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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고려사/권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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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고려사
| 다른 표기 =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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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太祖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姓王氏,諱建,字若天。松嶽郡人,世祖長子,母曰威肅王后韓氏。
唐乾符四年丁酉,正月丙戌,生於松嶽南第,神光紫氣,耀室充庭,竟日盤旋,狀若蛟龍。幼而聽明睿智,龍顔日角,方頣廣顙。氣度雄深,語音洪大,有濟世之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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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
태조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太祖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은 성이 왕씨이고 이름이 건(建)이며 자는 약천(若天)이다. 송악군(松嶽郡 : 지금의 개성직할시) 사람으로 세조(世祖)의 장남이며 모친은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4년(신라 헌강왕 3년, 877) 정유년 정월 병술일. 송악군 남쪽의 집에서 태어나자 신령스런 빛과 자색의 기운이 방안에 비치고 뜰에 가득 찼으며 종일토록 서려있는 형상이 흡사 용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용의 얼굴에 이마 뼈는 해처럼 솟아났으며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었다. 도량이 큰데다 말소리가 우렁차 세상을 구제할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
당시 신라의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도적떼1)가 다투어 일어났다. 견훤(甄萱)2)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방에 웅거해 후백제(後百濟)를 칭하였고3) 궁예(弓裔)4)는 고구려 땅에 터를 잡고 철원(鐵圓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에 도읍하고는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건녕(乾寧) 3년(신라 진성여왕 10년, 896) 병진년. 당시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 있던 세조가 송악군을 바치고 귀부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며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궁예더러,
“대왕께서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5)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군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라고 설득하자 궁예가 그 말을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勃禦塹城)6)을 쌓게 한 후 성주로 임명했다. 이 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광화(光化) 원년(신라 효공왕 2년, 898) 무오년. 궁예가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태조가 찾아가 알현하자 정기대감(精騎大監) 벼슬을 주었다.
광화(光化) 3년(신라 효공왕 4년, 900) 경신년.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충주(忠州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및 당성군(唐城郡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괴양군(槐壤郡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등의 군현을 토벌하게 했는데, 이를 다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粲) 벼슬을 주었다.
천복(天復) 3년(신라 효공왕 7년, 903) 계해년 3월.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7) 접경에 이르러 금성군(錦城郡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8)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군현을 쳐서 빼앗았다. 그리고는 금성군의 이름을 고쳐서 나주(羅州)라 한 후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게 한 후 돌아왔다.9)
이 해에 양주장수(良州將帥) 김인훈(金忍訓)10)이 위급함을 알려오자, 궁예가 태조를 시켜 구원하게 했다. 그 후 돌아오자 궁예가 변경의 일에 대해 물었는데,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확장시킬 전략을 보고했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태조를 눈여겨보게 되었으며 궁예도 기특하게 여겨 알찬(閼粲)으로 진급시켰다.
천우(天祐) 2년(신라 효공왕 9년, 905) 을축년. 궁예가 다시 철원에 도읍했다.11)
천우(天祐) 3년(신라 효공왕 10년, 906) 병인년. 궁예가 태조로 하여금 정기장군(精騎將軍) 금식(黔式) 등을 거느리고 군사 3천명을 지휘해 상주(尙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의 사화진(沙火鎭)을 치게 하니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궁예는 영토가 더욱 넓어지고 군세가 점점 강해지자 신라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면서 신라에서 귀부해온 사람을 모두 죽였다.
양나라 개평(開平) 3년(신라 효공왕 13년, 909) 기사년. 태조는 궁예가 날로 교만하고 포학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변방[閫外12)]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궁예가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의 상황을 우려해 태조를 시켜 진압하게 하고 한찬(韓粲)·해군(海軍) 대장군(大將軍)으로 진급시켰다. 태조가 정성껏 군사의 사기를 북돋우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보여주니 군사들이 그를 공경해 다들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으며 적의 국경 사람들도 두려워하며 복종했다.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光州)의 염해현(鹽海縣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13)에 진을 쳤다가 견훤이 오월국(吳越國)14)에 보내는 배를 나포해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포상했다.
다시 태조를 시켜 정주(貞州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에서 전함을 수리하게 한 후 알찬(閼粲)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천 5백 명을 지휘해 광주(光州)의 진도군(珍島郡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을 공격하게 했다. 태조가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고이도(皐夷島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 고이리)에 진을 치니 성안의 사람들이 군대의 위용이 엄정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태조가 나주의 포구에 이르니, 견훤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을 배치했는데, 목포(木浦 : 지금의 전라남도 목포시)15)로부터 덕진포(德眞浦 :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까지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서 그 군세가 매우 성했다. 장수들이 우려하자 태조는, “걱정하지 말라. 승리는 화합에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 있지 않다.”고 격려했다.
아군이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자 적 함선이 조금 물러났다. 바람을 타고 불을 지르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나 되었으며, 5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자 견훤이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처음에는 나주 관내의 고을들이 우리 영토와 멀리 떨어진 데다 적병이 가로막고 있어 서로 응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컸으나 태조가 견훤의 정예군을 분쇄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리하여 삼한(三韓)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
태조가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그대로 주둔해 수비하려 했다. 김언(金言) 등이 스스로 전공은 큰데 상이 없다고 여겨 크게 불만을 품자 태조가 타일렀다.
“게을리하지 말도록 조심하고 오직 힘을 다하여 딴 마음을 품지 않으면 복록을 차지할 수 있다. 지금 임금이 방자하고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는 데다 참소와 아첨을 일삼는 무리들이 득세하여 참소가 점점 퍼져가고 있다[浸潤16)]. 이 때문에 내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 상황이므로 차라리 전장에 나가 힘껏 왕을 도움으로써 몸을 보전하는 것이 낫다.”
장수들이 옳은 말이라 여겼다. 드디어 광주(光州)의 서남쪽 경계에 있는 반남현(潘南縣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의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지에 풀어 놓았다. 당시 압해현(壓海縣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17) 반란군의 두목 능창(能昌)이 바다섬에서 봉기했는데 수전(水戰)을 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수달(水獺)이라 불렀다. 그는 유랑하는 자들을 불러 모아 갈초도(葛草島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면 일원)의 군소 도적떼와 결탁한 다음 태조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요격해 타격을 가하려 했다. 이에 태조가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능창이 내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필시 섬의 도적들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다. 도적떼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세력을 합쳐 앞뒤로 협격해 온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수영을 잘하는 10여 명을 완전 무장시켜 작은 배에 태운 다음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로 가서 변란을 꾸미려고 왕래하는 자를 사로잡아 그 음모를 미리 막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장수들이 모두 그 말을 따랐다. 작전에 따라 작은 배 한 척을 나포했더니 바로 능창이었다. 잡아서 궁예에게 보내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고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해적들이 모두 너를 추대하여 수령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이는 나의 신묘한 계책 때문이다.”
고 으쓱댄 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쳤다.
건화(乾化) 3년(신라 신덕왕 3년, 914) 계유년. 태조가 누차 전공을 세우자 거듭 승진시켜 파진찬(波珍粲) 겸 시중(侍中)으로 삼고 내직으로 불러들였다. 수군의 지휘는 모두 부장 김언(金言) 등에게 맡겼으나 전투에 관련된 군무는 반드시 태조에게 보고한 후 시행하게 했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 가운데 으뜸이 되었으나 태조가 평소 바라던 바가 아니었고 또 참소가 두려워 그 지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관아에 출입하며 국정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했으며 감정을 누르고 행동을 근신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 힘썼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했다. 무고한 사람이 참소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번번이 모두 억울함을 밝혀 구해 주었다.
청주(靑州) 사람 아지태(阿志泰)는 본래 아첨을 잘하고 간특한 자로, 궁예가 참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같은 고을 사람인 입전(笠全)·신방(辛方)·관서(寬舒) 등을 참소했다. 해당 관청에서 이를 심문하였지만 몇 년 동안 판결을 내리지 못했는데 태조가 즉시 진위18)를 가려내어 아지태의 자백을 받아내자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군부의 장교들과 종친과 공신 및 지략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모조리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르게 되자 태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변방으로 나가기를 자원했다.
건화(乾化) 4년 갑술년. 궁예가 수군(水軍)의 지휘관이 현재 지위가 낮아 위엄으로써 적을 제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태조를 시중에서 해임하여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다. 이에 태조는 정주(貞州)의 포구(浦口)로 가서 전함 7십여 척을 정비하여 거기에 병사 2천 명을 싣고 나주까지 가니 후백제와 해상의 좀도둑들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모두 겁을 내어 옴짝 달싹을 못했다. 태조가 돌아와 순군의 전황이 유리하며 작전이 적절했다고 보고하자 궁예가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내가 거느린 장수들 가운데 왕건과 견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때 궁예가 반역죄를 터무니없이 꾸며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니 장수나 재상 가운데 해를 입는 자가 열 명 중 팔구 명이나 되었다. 항상 스스로,
“나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19)을 체득하여 부인(婦人)이 음란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알아 낼 수가 있다.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아 그런 짓을 한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리라.”
하고 뽐냈다. 그리고 석자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불에 달구어 음부에 쑤셔 넣으니 여인네들이 입과 코로 연기를 뿜으며 죽어갔다.
이 때문에 부녀자들이 무서워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노가 날로 극심해 갔다. 하루는 태조가 급한 부름을 받고 궁궐 안에 들어가 보니 궁예가 처형당한 사람에게서 몰수한 금은보화와 가재도구들을 점검하고 있다가 성난 눈으로 태조를 노려보며, “경이 어젯밤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왜 반역을 모의했느냐?”고 힐문했다. 태조가 얼굴빛을 변치 않고서 몸을 돌리고 웃으면서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궁예는,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으니 내가 이제 입정(入定)20)하여 경의 마음을 살핀 후 밝혀 주리라.”하고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 때 궁예의 곁에 있던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줍는 척하면서 태조의 곁을 빠르게 지나며 귓속말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태조가 그제서야 깨닫고, “신이 모반한 것이 사실이오니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고 말했다. 궁예가 크게 웃으며, “경은 정직하다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내려주며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했다.
드디어 보병장수(步兵將帥) 강선힐(康瑄詰)·흑상(黑湘)·김재원(金材瑗) 등을 태조의 부장으로 삼아 배 1백여 척을 더 만들게 하니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로서 위에 망루를 세웠고 말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태조는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는데, 이 해에 남쪽 지방에 기근이 들어 좀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수자리 사는 군졸들은 모두가 콩을 반이나 섞은 밥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태조가 정성껏 구휼하니 그 덕택에 모두 살게 되었다.
과거 태조의 나이 30세 때, 9층 금탑(金塔)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정명(貞明) 4년(918) 3월.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어느 날 우연히 저자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헌칠한 용모에 수염과 두발이 희고 머리에는 낡은 관을 썼으며 거사(居士)의 복색으로 왼손에는 바리 3개21)를, 오른손에는 사방 1자쯤 되는 낡은 거울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왕창근더러 자기 거울을 사겠느냐고 묻기에 왕창근이 쌀 두 말을 주고 그 거울을 샀다. 그랬더니 거울 주인은 그 쌀을 가지고 길 따라 가다가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왕창근이 그 거울을 저자의 담벼락에 걸자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에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그 글의 내용22)은 다음과 같았다.
“삼수(三水) 가운데 있는 사유(四維)23) 아래로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내어 먼저 계(鷄 : 鷄林 즉 신라)를 잡고 뒤에 압(鴨 : 압록강)을 칠 것이니 이것은 운수가 차서 삼갑(三甲 : 三韓의 뜻)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일컫도다. 어두움 속에서 하늘에 올라 밝음 속에서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子年)을 만나면 대사를 일으킬 것이며, 종적과 성명을 혼돈 속에 감추었으니 그 혼돈 속에서 누가 진(眞)과 성(聖)을 알리오? 법뢰(法雷)를 떨치고 신전(神電)을 휘두르며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黑金) 동쪽에 형체를 드러내리. 지혜로운 자는 보고 어리석은 자는 보지 못하나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며 사람들과 함께 정벌에 나서 때로는 성함을 드러내고 때로는 쇠함을 보이기도 하나 성쇠는 악한 잔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라. 이 가운데 한 마리 용은 아들이 서너 명인데 대를 번갈아 육갑자(六甲子)를 서로 잇게 되리. 이 사유(四維)는 반드시 축년(丑年)에 멸망하고 바다를 건너 와서 항복함은 모름지기 유년(酉年)을 기다려야 하리. 만약 현명한 왕이 이글을 보게 되면 나라와 백성이 태평하고 왕업은 길이 창성할 것이로다. 내가 적은 것은 총 147자라.”
왕창근이 당초 글자가 있는 줄 몰랐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겨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왕창근을 시켜 그 거울을 판 거사를 찾도록 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끝내 찾지 못했다. 다만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발삽사(勃颯寺)의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 앞에 전성고상(塡星古像)24)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거울 주인과 같고 양손에 바라와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이 기뻐하며 자세히 그 형상을 아뢰자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에게 그 글을 해독하게 했다. 송함홍 등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삼수(三水) 가운데 있는 사유(四維) 아래로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냈다.’라고 한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黑金) 동쪽에 형체를 드러내리.’라고 했는데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의 상을 지녔으니 아마도 이 분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흑금이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이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아마 끝에는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는 압(鴨)을 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후 먼저 계림(鷄林 : 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왕이 시기가 많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에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며 우리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상의한 후 딴 말을 꾸며 보고했다.
6월 을묘일. 기병장수(騎兵將帥)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몰래 모의한 후 밤중에 함께 태조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왕으로 추대하겠노라고 말했다. 태조가 단호히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柳氏)25)가 손수 갑옷을 가지고 와 태조에게 입히고 여러 장수들이 옹위해 집 밖으로 모시고 나왔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면서, “왕공(王公)께서 이제 정의의 깃발을 드셨다!”고 외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뒤질세라 달려오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환호하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 명을 넘었다.
궁예가 그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며, “왕공이 나라를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허사로다!”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미복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와 달아나니 나인들이 궁궐을 청소하고 새 왕을 맞이했다.
궁예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가 심해지자 보리 이삭을 몰래 잘라다 먹었다가, 곧 부양(斧壤 :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 역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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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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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조선 숙종, 영조 시대의 가인(歌人). 자는 자평(字平), 호는 노가재(老歌齋). 평민 출신으로 벼슬이 겨우 병조의 서리(書吏)에 이르렀다. [[저자:김천택|김천택]], 김우규 등과 사귀어 당시 가단의 중심이 되었고, 영조 39년(1763년)에 시가집 《해동가요》를 엮었는데, 그의 시조 117수가 이 책에 전해 온다. 그의 작품은 종래의 인생과 자연을 읊은 것이 아니라 사실적(寫實的)인 서경시(敍景詩)임이 특징이다. {{글로벌 인용|사설시조와 가집의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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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 ==
* [[해동가요]]
=== 시조 ===
* [[검으면 희다하고]]
* [[갓나희들이 여러 층이오레]]
* [[서방님 병들어 두고]]
* [[초암이 적료한대]]
* [[한식 비 갠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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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3" user="ZornsLemon" /></noinclude>{{c|{{크게|III. 박넝쿨타령}}}}
<section begin="현대어" />:1. 박넝쿨打令
<poem>
박넝쿨이 에헤이요 벋을적만 같아선
온세상을 얼사쿠나 다뒤덮는것같더니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草家집 三間을 못덮었네, 에헤이요 못덮었네.
복송아꽃이 에헤이요 피일적만 같아선
봄동산을 얼사쿠나 도맡아놀것 같더니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나비한마리도 못붙잡데, 에헤이요 못붙잡데.
박넝쿨이 에헤이요 벋을적만 같아선
가을올줄을 얼사쿠나 아는이가적드니
얼사쿠나 에헤이요 하로밤서리에, 에헤요
닢도줄기도 노구라붙고 둥근박만 달렸네.
</poem>
{{오른쪽|『女性』 42호(1939. 6). pp.16~17.}}
<section end="현대어" />
<section begin="원문" /><poem>
박넝쿨이 에헤이요 버들적만 갓하선는
온세상을 얼사쿠나 다뒤덤는것 갓드니
</poem><section end="원문" /><noinclude></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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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3" user="ZornsLemon" /></noinclude><poem>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해야
草家三間을 못다더펏데, 에해이요 못더펏네.
복숭아ᄭᅩᆺ치 에헤이요 퓌일적만 갓하선는
花園이 얼사쿠나 몽ᄯᅡᆼ노흘것 갓드니만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범나뷔 한마리 봇잡앗데 에헤이요 못붓잡앗데..
박넝쿨이 에헤이요 버들적만 갓하선는
가을 올줄을 에헤이요 아는이가 적드니만
얼사쿠나 에헤요 하룻밤 서리에 에헤요
닙도 줄기도 노구라붓고<ref>오그라져 시들고</ref> 둥근박만 달녓네
</poem>
{{오른쪽|—1934. 9. 5夜—}}
::「女性』(1939.6). p.99. 金億. 「素月의 生涯」 원고컷.<noinclude></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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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삼삭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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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머리말 |제목=청구영언 |부제=삼삭대엽(三數大葉) |이전=[[../무명씨|무명씨]] |다음=[[../낙시조|낙시조]] |설명= }} {{옛한글}} {{옛한글 시작}} <pages index="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 from=92 to=101 /> {{옛한글 끝}}"(으)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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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낙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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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맹상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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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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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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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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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齊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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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莊子)
|previous=[[../逍遙遊|逍遙遊第一]]
|next=[[../養生主|養生主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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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
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汝聞人籟而未聞地籟,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
子游曰:「敢問其方。」
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為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隹,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污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衆竅為虛。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子游曰:「地籟則衆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
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大知閑閑,小知-{zh-hant:閒閒;zh-hans:间间}-;大言炎炎,小言詹詹。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與接為搆,日以心鬬。縵者,窖者,密者。小恐惴惴,大恐縵縵。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其殺若秋冬,以言其日消也;其溺之所為之,不可使復之也;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近死之心,莫使復陽也。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啟態;樂出虛,蒸成菌。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非彼无我,非我无所取。是亦近矣,而不知其所為使。若有真宰,而特不得其朕。可行己信,而不見其形,有情而无形。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吾誰與為親?汝皆說之乎?其有私焉?如是皆有為臣妾乎?其臣妾不足以相治乎?其遞相為君臣乎?其有真君存焉?如求得其情與不得,無益損乎其真。一受其成形,不忘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薾)<ref>(中文)위키백과 틀 <nowiki>{{另|사용1|사용2}}</nowiki><nowiki>{{另|사용자|동자(同字) 또는 별자(別字)}}</nowiki> <nowiki>{{另|苶|薾}}</nowiki></ref>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无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是以无有為有。无有為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柰何哉!
夫言非吹也,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為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物无非彼,物无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无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无窮。是亦一无窮,非亦一无窮也。故曰莫若以明。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可乎可,不可乎不可。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无物不然,无物不可。故為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譎怪,道通為一。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无成與毀,復通為一。唯達者知通為一,為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因是已,已而不知其然,謂之道。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狙公賦芧,曰:「朝三而暮四,」衆狙皆怒。曰:「然則朝四而暮三,」衆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가능한 것은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도(道)가 작용하면 그렇게 되고, 만물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물은 본래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며, 본래 '가능한 것'이 있다.
어떤 것도 '그렇게 되지 않음'이 없고,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작은 풀 한 줄기와 대들보, 추악한 자와 서시(西施, 미녀), 기이하고 괴이한 것들이 다 도(道)로는 하나로 통한다.
그것을 나누는 것은 '형성'이고, 형성된 것은 결국 '파괴'된다.
모든 사물은 성립함과 파괴됨 없이 다시 도로 통일된다.
오직 도달한 자(通者)만이 그것이 하나로 통함을 안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는 것'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함'에 머문다.
이 '평범함(庸)'은 곧 '쓸모 있음'이고, 쓸모 있음은 곧 '통함'이고, 통함은 곧 '얻음'이며, 그 얻게 된 바는 곧 도에 근접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따름'을 따르면, 따르면서도 그것이 그러한 줄도 모른다. 이것이 곧 '도(道)'다.
정신을 다해 하나가 되려 하지만, 그것이 본래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 이를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이 조삼인가?
원숭이를 기르던 자가 도토리를 주며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냈다.
그러자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하니 모두 기뻐하였다.
이처럼 이름과 실제가 바뀌지 않았음에도, 기쁨과 분노가 달라진 것은 '도리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하늘의 저울(天鈞)에 머문다. 이것이 곧 '두 길을 함께 걷는 것(兩行)'이라 한다."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无成與虧乎哉?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惟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其子又以文之論論緒,終身无成。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為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為類,則與彼无以異矣。雖然,請嘗言之。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无也者,有未始有无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俄而有无矣,而未知有无之果孰有孰无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无謂乎?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於殤子,而彭祖為夭。天地與我並生(存)<ref><nowiki>{{另|生|存}}</nowiki></ref>,而萬物與我為一。既已為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无言乎?一與言為二,二與一為三。自此以往,巧曆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无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无適焉,因是已!
夫道未始有封,言未始有常,為是而有畛也,請言其畛:有左有右,相對而相反,各異便也,有倫有義,有分有辯,有競有爭,此之謂八德。六合之外,聖人存而不論;六合之內,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先王之志,聖人議而不辯。故分也者,有不分也;辯也者,有不辯也。曰:何也?聖人懷之,衆人辯之以相示也。故曰辯也者有不見也。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园而幾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故昔者堯問於舜曰:「我欲伐宗、膾、胥敖,南面而不釋然。其故何也?」舜曰:「夫三子者,猶存乎蓬艾之間。若不釋然,何哉?昔者十日並(竝)<ref>{<nowiki>{另|並|竝}}</nowiki></ref>出,萬物皆照,而況德之進乎日者乎!」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
曰:「吾惡乎知之!」
「子知子之所不知邪?」
曰:「吾惡乎知之!」
「然則物无知邪?」
曰:「吾惡乎知之!」
雖然,嘗試言之。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且吾嘗試問乎女:民溼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木處則惴慄恂懼,猨猴然乎哉?三者孰知正處?民食芻豢,麋鹿食薦,蝍且(蛆)甘帶,鴟鴉耆鼠,四者孰知正味?猨猵狙以為雌,麋與鹿交,鰌與魚游。毛嬙麗姬,人之所美也;魚見之深入,鳥見之高飛,麋鹿見之決驟,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自我觀之,仁義之端,是非之塗,樊然殽亂,吾惡能知其辯!
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
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沍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死生无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无謂有謂,有謂无謂,而遊乎塵垢之外。夫子以為孟浪之言,而我以為妙道之行也。吾子以為奚若?」
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熒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女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
予嘗為女妄言之,女以妄聽之。奚旁日月,挾宇宙?為其脗合,置其滑涽,以隸相尊。衆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萬物盡然,而以是相蘊。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筐牀,食芻豢,而後悔其泣也。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夢飲酒者,旦而哭泣;夢哭泣者,旦而田獵。方其夢也,不知其夢也。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而愚者自以為覺,竊竊然知之。君乎,牧乎,固哉!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是其言也,其名為弔詭。萬世之後而一遇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
既使我與若辯矣,若勝我,我不若勝,若果是也,我果非也邪?我勝若,若不吾勝,我果是也,而果非也邪?其或是也,其或非也邪?其俱是也,其俱非也邪?我與若不能相知也。則人固受其黮闇,吾誰使正之?使同乎若者正之?既與若同矣,惡能正之!使同乎我者正之?既同乎我矣,惡能正之!使異乎我與若者正之?既異乎我與若矣,惡能正之!使同乎我與若者正之?既同乎我與若矣,惡能正之!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而待彼也邪?
何謂和之以天倪?曰:是不是,然不然。是若果是也,則是之異乎不是也亦无辯﹔然若果然也,則然之異乎不然也亦无辯。化聲之相待、若其不相待。和之以天倪,因之以曼衍,所以窮年也。忘年忘義,振於无竟,故寓諸无竟。」
罔兩問景曰:「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无特操與?」
景曰:「吾有待而然者邪?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昔者莊周夢爲<ref>(中文)위키백과 틀 <nowiki>{{另|본자|약자}}</nowiki>약자동자 예시- <nowiki>{{另|爲|為}}</nowiki></ref>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 예전에 장주는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너무나 좋았고 황홀한 나비가 되어 있었다.스스로도 즐거워서 마음 따라 팔랑팔랑 춤추고 있었다. 내가 나인지 몰랐다. 깜짝 깨보니, 어라 장주다. 지금 장주의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의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장주와 나비에는 확실히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질의 변화라는 것이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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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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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齊物論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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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
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汝聞人籟而未聞地籟,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
子游曰:「敢問其方。」
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為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隹,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污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衆竅為虛。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子游曰:「地籟則衆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
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大知閑閑,小知-{zh-hant:閒閒;zh-hans:间间}-;大言炎炎,小言詹詹。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與接為搆,日以心鬬。縵者,窖者,密者。小恐惴惴,大恐縵縵。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其殺若秋冬,以言其日消也;其溺之所為之,不可使復之也;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近死之心,莫使復陽也。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啟態;樂出虛,蒸成菌。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非彼无我,非我无所取。是亦近矣,而不知其所為使。若有真宰,而特不得其朕。可行己信,而不見其形,有情而无形。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吾誰與為親?汝皆說之乎?其有私焉?如是皆有為臣妾乎?其臣妾不足以相治乎?其遞相為君臣乎?其有真君存焉?如求得其情與不得,無益損乎其真。一受其成形,不忘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薾)<ref>(中文)위키백과 틀 <nowiki>{{另|사용1|사용2}}</nowiki><nowiki>{{另|사용자|동자(同字) 또는 별자(別字)}}</nowiki> <nowiki>{{另|苶|薾}}</nowiki></ref>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无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是以无有為有。无有為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柰何哉!
夫言非吹也,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為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物无非彼,物无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无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无窮。是亦一无窮,非亦一无窮也。故曰莫若以明。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可乎可,不可乎不可。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无物不然,无物不可。故為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譎怪,道通為一。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无成與毀,復通為一。唯達者知通為一,為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因是已,已而不知其然,謂之道。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狙公賦芧,曰:「朝三而暮四,」衆狙皆怒。曰:「然則朝四而暮三,」衆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br>
"가능한 것은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도(道)가 작용하면 그렇게 되고, 만물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물은 본래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며, 본래 '가능한 것'이 있다.
어떤 것도 '그렇게 되지 않음'이 없고,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작은 풀 한 줄기와 대들보, 추악한 자와 서시(西施, 미녀), 기이하고 괴이한 것들이 다 도(道)로는 하나로 통한다.
그것을 나누는 것은 '형성'이고, 형성된 것은 결국 '파괴'된다.
모든 사물은 성립함과 파괴됨 없이 다시 도로 통일된다.
오직 도달한 자(通者)만이 그것이 하나로 통함을 안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는 것'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함'에 머문다.
이 '평범함(庸)'은 곧 '쓸모 있음'이고, 쓸모 있음은 곧 '통함'이고, 통함은 곧 '얻음'이며, 그 얻게 된 바는 곧 도에 근접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따름'을 따르면, 따르면서도 그것이 그러한 줄도 모른다. 이것이 곧 '도(道)'다.
정신을 다해 하나가 되려 하지만, 그것이 본래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 이를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이 조삼인가?
원숭이를 기르던 자가 도토리를 주며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냈다.
그러자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하니 모두 기뻐하였다.
이처럼 이름과 실제가 바뀌지 않았음에도, 기쁨과 분노가 달라진 것은 '도리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하늘의 저울(天鈞)에 머문다. 이것이 곧 '두 길을 함께 걷는 것(兩行)'이라 한다."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无成與虧乎哉?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惟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其子又以文之論論緒,終身无成。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為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為類,則與彼无以異矣。雖然,請嘗言之。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无也者,有未始有无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俄而有无矣,而未知有无之果孰有孰无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无謂乎?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於殤子,而彭祖為夭。天地與我並生(存)<ref><nowiki>{{另|生|存}}</nowiki></ref>,而萬物與我為一。既已為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无言乎?一與言為二,二與一為三。自此以往,巧曆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无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无適焉,因是已!
夫道未始有封,言未始有常,為是而有畛也,請言其畛:有左有右,相對而相反,各異便也,有倫有義,有分有辯,有競有爭,此之謂八德。六合之外,聖人存而不論;六合之內,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先王之志,聖人議而不辯。故分也者,有不分也;辯也者,有不辯也。曰:何也?聖人懷之,衆人辯之以相示也。故曰辯也者有不見也。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园而幾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故昔者堯問於舜曰:「我欲伐宗、膾、胥敖,南面而不釋然。其故何也?」舜曰:「夫三子者,猶存乎蓬艾之間。若不釋然,何哉?昔者十日並(竝)<ref>{<nowiki>{另|並|竝}}</nowiki></ref>出,萬物皆照,而況德之進乎日者乎!」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
曰:「吾惡乎知之!」
「子知子之所不知邪?」
曰:「吾惡乎知之!」
「然則物无知邪?」
曰:「吾惡乎知之!」
雖然,嘗試言之。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且吾嘗試問乎女:民溼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木處則惴慄恂懼,猨猴然乎哉?三者孰知正處?民食芻豢,麋鹿食薦,蝍且(蛆)甘帶,鴟鴉耆鼠,四者孰知正味?猨猵狙以為雌,麋與鹿交,鰌與魚游。毛嬙麗姬,人之所美也;魚見之深入,鳥見之高飛,麋鹿見之決驟,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自我觀之,仁義之端,是非之塗,樊然殽亂,吾惡能知其辯!
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
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沍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死生无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无謂有謂,有謂无謂,而遊乎塵垢之外。夫子以為孟浪之言,而我以為妙道之行也。吾子以為奚若?」
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熒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女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
予嘗為女妄言之,女以妄聽之。奚旁日月,挾宇宙?為其脗合,置其滑涽,以隸相尊。衆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萬物盡然,而以是相蘊。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筐牀,食芻豢,而後悔其泣也。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夢飲酒者,旦而哭泣;夢哭泣者,旦而田獵。方其夢也,不知其夢也。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而愚者自以為覺,竊竊然知之。君乎,牧乎,固哉!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是其言也,其名為弔詭。萬世之後而一遇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
既使我與若辯矣,若勝我,我不若勝,若果是也,我果非也邪?我勝若,若不吾勝,我果是也,而果非也邪?其或是也,其或非也邪?其俱是也,其俱非也邪?我與若不能相知也。則人固受其黮闇,吾誰使正之?使同乎若者正之?既與若同矣,惡能正之!使同乎我者正之?既同乎我矣,惡能正之!使異乎我與若者正之?既異乎我與若矣,惡能正之!使同乎我與若者正之?既同乎我與若矣,惡能正之!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而待彼也邪?
何謂和之以天倪?曰:是不是,然不然。是若果是也,則是之異乎不是也亦无辯﹔然若果然也,則然之異乎不然也亦无辯。化聲之相待、若其不相待。和之以天倪,因之以曼衍,所以窮年也。忘年忘義,振於无竟,故寓諸无竟。」
罔兩問景曰:「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无特操與?」
景曰:「吾有待而然者邪?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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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游曰:「敢問其方。」
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為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隹,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污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衆竅為虛。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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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彼无我,非我无所取。是亦近矣,而不知其所為使。若有真宰,而特不得其朕。可行己信,而不見其形,有情而无形。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吾誰與為親?汝皆說之乎?其有私焉?如是皆有為臣妾乎?其臣妾不足以相治乎?其遞相為君臣乎?其有真君存焉?如求得其情與不得,無益損乎其真。一受其成形,不忘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薾)<ref>(中文)위키백과 틀 <nowiki>{{另|사용1|사용2}}</nowiki><nowiki>{{另|사용자|동자(同字) 또는 별자(別字)}}</nowiki> <nowiki>{{另|苶|薾}}</nowiki></ref>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无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是以无有為有。无有為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柰何哉!
夫言非吹也,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為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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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것은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도(道)가 작용하면 그렇게 되고, 만물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물은 본래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며, 본래 '가능한 것'이 있다.
어떤 것도 '그렇게 되지 않음'이 없고,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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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나누는 것은 '형성'이고, 형성된 것은 결국 '파괴'된다.
모든 사물은 성립함과 파괴됨 없이 다시 도로 통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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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범함(庸)'은 곧 '쓸모 있음'이고, 쓸모 있음은 곧 '통함'이고, 통함은 곧 '얻음'이며, 그 얻게 된 바는 곧 도에 근접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따름'을 따르면, 따르면서도 그것이 그러한 줄도 모른다. 이것이 곧 '도(道)'다.
정신을 다해 하나가 되려 하지만, 그것이 본래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 이를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이 조삼인가?
원숭이를 기르던 자가 도토리를 주며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냈다.
그러자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하니 모두 기뻐하였다.
이처럼 이름과 실제가 바뀌지 않았음에도, 기쁨과 분노가 달라진 것은 '도리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하늘의 저울(天鈞)에 머문다. 이것이 곧 '두 길을 함께 걷는 것(兩行)'이라 한다."<br>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无成與虧乎哉?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惟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其子又以文之論論緒,終身无成。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為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為類,則與彼无以異矣。雖然,請嘗言之。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无也者,有未始有无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俄而有无矣,而未知有无之果孰有孰无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无謂乎?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於殤子,而彭祖為夭。天地與我並生(存)<ref><nowiki>{{另|生|存}}</nowiki></ref>,而萬物與我為一。既已為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无言乎?一與言為二,二與一為三。自此以往,巧曆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无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无適焉,因是已!
夫道未始有封,言未始有常,為是而有畛也,請言其畛:有左有右,相對而相反,各異便也,有倫有義,有分有辯,有競有爭,此之謂八德。六合之外,聖人存而不論;六合之內,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先王之志,聖人議而不辯。故分也者,有不分也;辯也者,有不辯也。曰:何也?聖人懷之,衆人辯之以相示也。故曰辯也者有不見也。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园而幾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故昔者堯問於舜曰:「我欲伐宗、膾、胥敖,南面而不釋然。其故何也?」舜曰:「夫三子者,猶存乎蓬艾之間。若不釋然,何哉?昔者十日並(竝)<ref>{<nowiki>{另|並|竝}}</nowiki></ref>出,萬物皆照,而況德之進乎日者乎!」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
曰:「吾惡乎知之!」
「子知子之所不知邪?」
曰:「吾惡乎知之!」
「然則物无知邪?」
曰:「吾惡乎知之!」
雖然,嘗試言之。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且吾嘗試問乎女:民溼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木處則惴慄恂懼,猨猴然乎哉?三者孰知正處?民食芻豢,麋鹿食薦,蝍且(蛆)甘帶,鴟鴉耆鼠,四者孰知正味?猨猵狙以為雌,麋與鹿交,鰌與魚游。毛嬙麗姬,人之所美也;魚見之深入,鳥見之高飛,麋鹿見之決驟,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自我觀之,仁義之端,是非之塗,樊然殽亂,吾惡能知其辯!
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
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沍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死生无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无謂有謂,有謂无謂,而遊乎塵垢之外。夫子以為孟浪之言,而我以為妙道之行也。吾子以為奚若?」
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熒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女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
予嘗為女妄言之,女以妄聽之。奚旁日月,挾宇宙?為其脗合,置其滑涽,以隸相尊。衆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萬物盡然,而以是相蘊。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筐牀,食芻豢,而後悔其泣也。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夢飲酒者,旦而哭泣;夢哭泣者,旦而田獵。方其夢也,不知其夢也。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而愚者自以為覺,竊竊然知之。君乎,牧乎,固哉!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是其言也,其名為弔詭。萬世之後而一遇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
既使我與若辯矣,若勝我,我不若勝,若果是也,我果非也邪?我勝若,若不吾勝,我果是也,而果非也邪?其或是也,其或非也邪?其俱是也,其俱非也邪?我與若不能相知也。則人固受其黮闇,吾誰使正之?使同乎若者正之?既與若同矣,惡能正之!使同乎我者正之?既同乎我矣,惡能正之!使異乎我與若者正之?既異乎我與若矣,惡能正之!使同乎我與若者正之?既同乎我與若矣,惡能正之!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而待彼也邪?
何謂和之以天倪?曰:是不是,然不然。是若果是也,則是之異乎不是也亦无辯﹔然若果然也,則然之異乎不然也亦无辯。化聲之相待、若其不相待。和之以天倪,因之以曼衍,所以窮年也。忘年忘義,振於无竟,故寓諸无竟。」
罔兩問景曰:「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无特操與?」
景曰:「吾有待而然者邪?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昔者莊周夢爲<ref>(中文)위키백과 틀 <nowiki>{{另|본자|약자}}</nowiki>약자동자 예시- <nowiki>{{另|爲|為}}</nowiki></ref>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 예전에 장주는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너무나 좋았고 황홀한 나비가 되어 있었다.스스로도 즐거워서 마음 따라 팔랑팔랑 춤추고 있었다. 내가 나인지 몰랐다. 깜짝 깨보니, 어라 장주다. 지금 장주의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의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장주와 나비에는 확실히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질의 변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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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쥬봉 장취양뎐
화설 ᄃᆡ명 경덕연간의 양쥬ᄯᆞᆼ의 ᄒᆞᆫ ᄌᆡ상이 잇스되 승은 양이요 명은 위요 자은 현인이 옛날
한ᄉᆞ 양ᄉᆞ긔 후예라 일즉 용문의 올나 명망이 조야의 진동하며 청염 강직하야 ᄆᆡᄉᆞ을 청도로 하더라
우승상 와희의 참소을 입어 벼살을 ᄉᆡ양하고 고향의 도라와 농부 어옹이 되여 월ᄒᆞ의 고기 낙구기와 구름소의 밧갈기을 일삼은이 가산이 보요하야 셰상의 그일거시 읍시나 다만 일점혈욕이 읍셔 ᄆᆡ일 스러 하던이 닐닐은 부인 풍씨 무자함을 한탄ᄒᆞ던이 옥잔의 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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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찾아낸 두 가지 방법이 있다. {{u|정음}} 틀을 쓰거나 {{du|*}}틀을 쓰는 것. 바깥에서 글자 크기를 키우면, 같이 커진다.
둘 다 글자 크기를 내 마음대로 하려면 틀을 만드는 게 좋을 지도.
〮
〯
{{더더더더크게|톄〯 {{정음|世|솅〮}}世{{*|솅〮}}예〮 브즈〮러니〮 受苦ᄒᆞ〮샤〮 衆生ᄋᆡ〮게 慈悲ᄒᆞ〮샤〮 이〮 法을〮 得ᄒᆞ〮샤〮 ᄂᆞᆷ〮 爲ᄒᆞ〮야〮 니〮ᄅᆞ시〮니〮}}
우〮리도〮 받ᄌᆞᄫᅡ〮 ᄡᅥ〮 敎化ᄅᆞᆯ〮 여루〮리라〮 ᄒᆞ고〮 須彌山頂에〮 올아〮 犍椎 티〮고〮 偈ᄅᆞᆯ〮 닐오〮ᄃ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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ᄒᆞᄋᆞ와 여법고ᇰ야ᇰᄒᆞᄋᆞᆸ고 지심건쳐ᇰ관음보
ᄒᆞᄋᆞ와 如法供養ᄒᆞᄋᆞᆸ고 至心虔請觀音菩
살과 쳔뇨ᇰ과 팔부과 호법션신과ᄅᆞᆯ ᄒᆞᄋᆞᆸ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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薩과 天龍과 八部과 護法善神과ᄅᆞᆯ ᄒᆞᄋᆞᆸ노니
유원ᄂᆡ림ᄒᆞ샤 즈ᇰ아드ᇰ원ᄒᆞ샤 텨ᇰ아여
惟願來臨ᄒᆞ샤 證我等願ᄒᆞ샤 聽我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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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The Elements of Euclid for the Use of Schools and Colleges - 1872 page 2a.png|frameless|400px|center]]
詳說古文眞寶大全前集目錄
卷之二
五言古風短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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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歌行
擬古
和徐都曹
怨歌行
古詩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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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詩二
鼓吹曲
遊東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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綠筠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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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ᄎᆡᆨ 일난 자식도 {{?}}{{?}}{{?}}{{?}}요 {{?}}{{?}}치면 {{?}}{{?}}ᄉᆡᆺ기이라
부ᄃᆡ 변변치 안이ᄒᆞ나 빌이지 말긔 쳔만쳔만 집안의 언문 ᄎᆡᆨ이라고 읍기로 ᄒᆞ로 젼악 볏계ᄂᆡᆫ이 글시도 흐리고 마음의 탐탐치 안이ᄒᆞ도다
이 ᄎᆡᆨ 거장 긔 씬 글을 보아 과연 우슘고치 ᄉᆞᄒᆞ도다 거러ᄂᆞ 쥬인옹의 망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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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졉동젼 권지단
ᄃᆡ셩 신죵 황졔 시졀의 죠션국 경ᄉᆞᆼ도 영쳔 이원쵼의 ᄒᆞᆫ ᄌᆡᄉᆞᆼ이 잇신이 승은 이씨오 명은 여셰라 셰ᄃᆡ ᄒᆞᆯ림오로 볘ᄉᆞ레 ᄯᅳᆺ지 읍고 셰ᄉᆞᆼ 피코져 ᄒᆞ여 고향의 도라와 낙산의 밧갈긔와 계ᄉᆞ의 고긔 낙긔를 일ᄉᆞᆷ던이 나이 육십이 당ᄒᆞ여 만득으로 일ᄌᆞ 일여를 두엇신이 아들의 효ᄒᆡᆼ 범졀리 비범ᄒᆞᆫ지라 일일은 부인 강씨 우연 득병ᄒᆞ여 ᄇᆡᆨ약이 무효ᄒᆞ고 셰ᄉᆞᆼ을 이별ᄒᆞᆫ이 ᄉᆞᆼ공이 비회를 금치 못ᄒᆞ여 ᄉᆞᆷ연ᄉᆞᆼ을 극진이 지ᄂᆡᆫ 후의 여식은 경쥬 연안 이씨 ᄃᆡᆨ의 츌가 씩이고 아드를 나이 십셰가 되ᄆᆡ 안동 강ᄒᆞᆯ림 집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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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ᄒᆞ여 혼례를 극지이 지ᄂᆡᆫ이 부인 강씨 효ᄒᆡᆼ과 ᄌᆡᄉᆡᆨ 인물리 셰ᄉᆞᆼ의 초월ᄒᆞᆫ지라 ᄉᆞᆼ공이 부요ᄒᆞᆫ 가ᄉᆞᆫ과 누ᄃᆡ 션영을 다 젼ᄒᆞ고 못ᄂᆡ 긧거ᄒᆞ던이 아들 용경이 션ᄃᆡ 효ᄒᆡᆼᄒᆞᆫ 일노 여러 번 ᄉᆞᆼ소ᄒᆞ러가 뉵노의 득병ᄒᆞ여 고향의 도라와 병셰가 극즁ᄒᆞᆫ지라 강씨 부인이 호치로 오룬손 무명지를 ᄭᆡ미러 피를 ᄂᆡ여 쥬야로 드리와도 죵시 효함이 읍난지라 오회라 이날 밤 ᄉᆞᆷ경의 셰ᄉᆞᆼ을 바린이 ᄉᆞᆼ공이 긔졀ᄒᆞ여 눕고 이지 못ᄒᆞ며 강씨은 우도 못ᄒᆞ고 시ᄉᆞᆼ을 붓들고 염습도 못ᄒᆞ게 ᄒᆞ며 ᄒᆞᆫ곳의 드러 구원지ᄒᆞ의 ᄒᆞᆫ가지로 단긔긔를 원ᄒᆞ노라 ᄒᆞ며 실갓튼 목슘이 집ᄲᅮᆯ갓치 ᄭᅥ지고져 ᄒᆞ거늘 ᄉᆞᆼ공이 {{?}}위ᄒᆞ여 왈 네 이졔 죽긔 션슈라 ᄒᆞᆫ 가ᄉᆞᆫ을 뉘의계 쥬션ᄒᆞ며 ᄯᅩᄒᆞᆫ 네 복즁의 일졈혈륙이 잇신이 후ᄉᆞ를 이어 ᄂᆡ 집을 보젼ᄒᆞ라 ᄒᆞᆫ이 강씨 부인이 시부의 명영을 거ᄉᆞ리지 못ᄒᆞ여 슬품을 진졍ᄒᆞ고 이렁구러 열달 만의 일ᄀᆡ 귀ᄌᆞ를 나은이 귀ᄒᆞ고 아름답다 이씨 혈륙이여 즉시 유모를 졍ᄒᆞ여 양휵ᄒᆞ계 ᄒᆞ고 구부ᄉᆞᆼ의 ᄒᆞ여 지ᄂᆡ되 허다ᄒᆞᆫ 가ᄉᆞᆫ과 슈다ᄒᆞᆫ 노복을 다 슈습ᄒᆞᆯ ᄯᅳ지 읍고 쥬야 쥭긔만 원ᄒᆞ더가 일일른 강씨 부인이 ᄉᆞᆼ공계 엿ᄌᆞ오되 ᄌᆞ부 명도 긔박ᄒᆞ와 이랑을 황쳔지ᄒᆞ의 셔로 영결ᄒᆞ고 일시의 쥭지 못ᄒᆞ와 완명을 보젼ᄒᆞ온이 결련ᄒᆞᆫ 마음과 ᄋᆡ통ᄒᆞᆫ 셔름을 금치 못ᄒᆞ온이 바ᄅᆡᆸ건대 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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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자어류/권17 대학혹문상 大學四或問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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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3T06:37:10Z
Thomas Dongsob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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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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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대학4 / 혹문 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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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語類卷第十七
주자어류 권 17
* 大學四或問上
대학 4 / 혹문 상(上)<ref>앞서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 대학에 관하여 논하였다. 권 17은 대학에 관한 네 번째 권이자 대학혹문의 상권에 관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부제가 붙었다. 대학혹문은 주희가 지은 대학의 참고서로 상/하 두 권으로 묶여있다. 가상의 질문자가 질문하면 주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목이 '누군가의 질문(或問)'이다. 논어, 맹자, 중용혹문도 있다.</ref>
* 經一章
== 경 1장 ==
<ref>대학은 경 1장과 전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는 대학의 이 순서에 맞추어 조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혹문 역시 대학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하여 전 10장에서 끝난다. 주자어류 권 17과 18 역시 혹문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한다.</ref>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단락 ===
* 或問吾子以爲大人之學一段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ref>대학혹문의 각 장은 여러 단락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류 17:1부터 18까지는 모두 그중 첫 번째 단락에 관한 내용이다. 어류 권 17과 18은 대학혹문을 먼저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고 여기다 대학혹문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는 것도 그 분량을 감안하였을 때 적절치 못하다. 박완식이 2010년에 번역한 '대학, 대학혹문, 대학강어'를 옆에 두고 참조하는 것이 좋다. 혹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을 웹상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C%80%ED%95%99#.E3.80.8E.ED.98.B9.EB.AC.B8.E3.80.8F_.EA.B2.BD1.EC.9E.A5 대학혹문 번역문(고려대 의적단)]).</ref>
* 17:1 問友仁: “看大學或問如何?”<ref>조선고사본은 상황 묘사가 보다 자세하다. '선생이 내게 물었다: 자네가 오늘 대학혹문을 읽었는데 어떠한가?(先生問友仁曰: 公今日看大學或問如何?)'</ref>
'''(선생이) 나(友仁)에게 질문함: 대학혹문을 보니 어떠한가?
曰: “粗曉其義.” <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뜻은 대강 깨쳤으나 아직 다 깨치지 못한 듯합니다. (云: 粗曉其義, 但恐未然.)'</ref>
'''(나의) 대답: 그 뜻을 대강 깨쳤습니다.
曰<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생이 한두군데를 찍어서 내게 설명해보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先生擧一二處令友仁說. 先生曰:)'</ref>: “如何是‘收其放心, 養其德性’?”
'''(선생이) 말함: 무엇이 '그 놓쳐버린 마음을(放心)<ref>맹자 6A:11. 맹자가 되찾으라고 한 마음은 어진 정서(仁)에 가까우나 주희는 이를 집중하여 각성된 의식인 것처럼 풀이했다. 그래서 주희가 '구방심(求放心)'을 요구할 때 이를 '거경(居敬)' 으로 치환해도 말이 통한다. 실제로 대학혹문에서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장한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본래 맹자에서 '방(放)'과 '존(存)'이라는 동사쌍으로 보이고자 한 이미지는 기르는 개나 닭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난 것을 수색해서 찾아오는 상황이었다. 주인이 고의로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짐승이 집을 나가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므로 '방심'은 '놓친 마음', '잃어버린 마음', '놓아버린 마음', '풀려난 마음', '달아난 마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반대로 '존심(存心)'이나 '구방심'은 그렇게 달아난 것을 되찾아 집안에 가져온 뒤 다시 달아나지 못하게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찾아오다', '보존하다', '간직하다', '간수하다' 등으로 번역한다.</ref> 거두어들이고 그 덕성(德性)을 기른다[收其放心, 養其德性]'는 것인가?
曰: “放心者, 或心起邪思, 意有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至於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截斷不續, 至於耳目言動皆然, 此乃謂之收. 旣能收其放心, 德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之外, 又養箇德性也.”
'''(나의) 대답: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란, 혹 마음(心)에 삿된 생각(邪思)이 일어나고, 의지(意)에 망령된 상념(妄念)이 생기며, 귀로 삿된 말을 듣고, 눈으로 혼란한 색을 보며, 입으로 도(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손발의 움직임이 예(禮)에 맞지 않는 데 이르기까지가 모두 놓침[放]입니다.<ref>이 주장의 레퍼런스는 물론 논어 12:1의 '극기복례'이다.</ref> 거두어들임[收]이란, 곧 삿된 생각과 망령된 상념이 있는 지점에서 딱 끊어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귀·눈·말·움직임[耳目言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거두어들인다[收]고 합니다. 자신의 놓쳐버린 마음(放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상 덕성(德性)은 자연히 길러집니다. 방심(放心)을 거두는 것과 별개로 다시 덕성(德性)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曰: “看得也好.” 友仁(69때).
'''(선생이) 말함: 잘 보았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 問: 或問"'以七年之病, 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方得.
'''질문: 《혹문(或問)》에서 "'일곱 해 된 병에 세 해 묵은 쑥을 구하는[七年之病, 求三年之艾]' 경우<ref>맹자 4A:9. 직전 조목의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친 적 없이 없었던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주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어렸을 적에 도덕원칙들을 신체화/습관화 시킨 뒤 (곧, 소학의 단계) 커서 그러한 도덕원칙들을 이지적으로 묻고 따져서 이해하는 것이다(곧, 대학의 단계). 하지만 주희가 보기에 오늘날에는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소학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 작업이 '경(敬)'공부이다. 비유하자면 평생에 걸쳐 (소학 때 못 했던 것을) 벌충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검정고시 같은 것이다. 일곱 해 된 병은 소학의 공부를 건너뛴 기간이고 세 해 묵은 쑥은 그것을 뒤늦게 따라잡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거경공부이다.</ref> 백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취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미 배움을 잃은[失學]<ref>어렸을 적에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말이다.</ref> 뒤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노력하고 분발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趲補得前許多欠闕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沒長進, 如何要塡補前面!” 賀孫(62이후).
'''대답: 시기를 놓친 뒤에 배우려면 반드시 이처럼 이전에 건너뛴 빈칸들을 서둘러[趲] 보충하여야 한다. '남이 한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한다.’<ref>중용 제 20장.</ref>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유유히 세월만 보내며 그날그날 해야할 공부(工夫)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인데 무슨 수로 이전(에 건너뛴) 부분을 메우려 하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 持敬以補小學之闕. 小學且是拘檢住身心, 到後來‘克己復禮’, 又是一段事. 德明(44이후).
'''경(敬)을 견지함으로써[持敬]<ref>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을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端慤純一靜專) 유지한다는 말이다(14:19). 조금 더 비근하게 설명하자면 흐리멍텅한 정신을 고조시켜 맑고 투명하고 집중된 상태로 유지하는 명상수련과 흡사하다. 어린아이가 평소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도 엄숙한 선생님 앞에 서거나, 교실에서 무언가를 발표하거나, 그밖에 진지한 이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산만한 의식을 또렷하게 집중시키게 된다. 소학에서 요구하는 공부들, 예컨대 거처를 청소하고 어른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공부들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처럼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가 소학 트레이닝을 겪지 않은 어른들에게 거경/지경 공부를 권하는 것은 A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B를 가져와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A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느긋하게 달성하고자했던 궁극적 목표를 생으로 가져와서 빨리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지난 십년의 공부를 몇년 안에 따라잡아서 해치워야하는 검정고시준비과정과 제일 가깝다. 한편 주희는 이처럼 마음을 특정한 상태로 세팅하고 유지하는 공부를 적극적인 이지적 탐구와 더불어 배움의 두 축으로 삼았다. 전자가 거경(居敬)/지경(持敬), 후자가 궁리(窮理)이다. 전자가 소학의 목표라면 후자는 대학의 목표이니, 주희의 '학'은 결국 소학과 대학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ref> 빼먹은 소학(小學) 단계를 보충한다. 소학(小學)은 일단은 몸과 마음을 꾸준히 붙들어매는[拘檢]<ref>'住'는 동사 뒤에 붙어서 행위의 지속을 나타내는 조사이다.</ref> 것이다. 훗날(에 하게 될)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克己復禮]' (공부의) 경우는 또다른 단계의 일이다.<ref>극기복례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붙들어매는 공부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정도상 더 높은 수준의 공부일 뿐이다. 17:1을 보라.</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7:4 問: “大學首云明德, 而不曾說主敬, 莫是已具於小學?”
'''질문: 《대학》 첫머리에서 명덕(明德)을 말하면서 주경(主敬)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주경이) 이미 소학(小學) 단계에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 아닙니까?<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固然. 自小學不傳, 伊川卻是帶補一‘敬’字.” 可學(62때).
'''대답: 진실로 그렇다. 소학(小學)이 전해지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천(伊川)<ref>정이(程頤)</ref>이 '경(敬)' 자 하나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5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致知至治國·平天下, 皆不外此. 人傑(51이후).
''' ‘경(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공부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6 問或問說敬處.
'''《혹문》에서 경(敬)을 설명한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四句不須分析, 只做一句看.”
'''대답: 저 네 구절<ref>대학혹문에서 주희는 경을 다음의 네 가지 문구를 가지고 설명한다. 정씨형제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사량좌의 '상성성법(常惺惺法)', 윤돈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한다는 측면, 상성성법은 집중한 의식의 각성되고 고양된 느낌,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그렇게 집중된 의식의 단단히 안정된 느낌을 형용한다.</ref>은 나누어 분석할 필요 없이 그저 한 구절로 보라.
次日, 又曰: “夜來說敬, 不須只管解說, 但整齊嚴肅便是敬, 散亂不收斂便是不敬. 四句只行著, 皆是敬.” 燾(70때).
'''다음 날 다시 말함: 어젯밤에 경(敬)에 대해 설명했는데, 계속 해설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경(敬)이고, 산란하여 수렴하지 못하면 불경(不敬)이다. 저 네 구절은 단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7 或問: “大學論敬所引諸說有內外之分.”
'''누군가의 질문: 《대학》<ref>사실은 대학'혹문'이라고 해야 옳다.</ref>에서 경(敬)을 논하며 인용한 여러 설(說)에는 내외(內外)의 구분이 있습니다.<ref>굳이 구분하자면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외면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고 나머지 셋은 내면이다.</ref>
曰: “不必分內外, 都只一般, 只恁行著都是敬.” 僩(69이후).
'''대답: 꼭 내외(內外)로 나눌 필요는 없다. 모두 매한가지다. 그저 그렇게 실천해가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ref>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같은 취지의 문답이 실려 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8 問: “敬, 諸先生之說各不同. 然總而行<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言'으로 썼다.</ref>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질문: 경(敬)에 대한 여러 선생의 설(說)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실천하여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면[常存]<ref>'존(存)'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17:1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되는 것입니까?”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斂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履孫(65때).
'''대답: 기실 매한가지이다. (마음이) 경건(敬)할 때 같으면 자연히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고[主一無適]', 자연히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며[整齊嚴肅]’, 자연히 '항상 반짝반짝 깨어있고[常惺惺]',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不容一物]'. 다만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 사씨(謝氏)나 윤씨(尹氏)의 설(說)<ref>'상성성'이 사씨, '기심수렴 불용일물'이 윤씨의 설이다.</ref>보다 더 분명하다.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9 或問: “先生說敬處, 擧伊川主一與整齊嚴肅之說與謝氏常惺惺之說. 就其中看, 謝氏尤切當.”
'''누군가의 질문: 선생님께서 경(敬)을 설명하신 부분에서 이천(伊川)의 주일(主一)과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 그리고 사씨(謝氏)의 상성성(常惺惺) 설(說)을 거론하셨습니다.<ref>이 설들에 대해서는 17:6을 참조하라.</ref> 그중에서 보면 사씨(謝氏)의 설명이 더욱 절실하고 적절[切當]<ref>'절(切)'은 어떤 설명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친숙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말이다.</ref>합니다.
曰: “如某所見, 伊川說得切當. 且如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若無整齊嚴肅, 卻要惺惺, 恐無捉摸, 不能常惺惺矣.” 人傑(51이후).
'''대답: 내가 보기엔 (사씨보다) 이천(伊川)이 적절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몸가짐을 정제엄숙(整齊嚴肅)하게 하면 이 마음이 보존[存]<ref>'존(存)'에 관해서는 17:1을 참조하라.</ref>되어 반짝반짝 깨어있을[惺惺] 수 있게 된다. 만약 정제엄숙(整齊嚴肅)한 자세 없이 반짝반짝 깨어있으려[惺惺] 한다면 아마 구체적으로 붙잡을 데가 없어[無捉摸]<ref>'정제엄숙'은 몸을 이렇게 하고 옷매무새를 저렇게 하라는 행동지침이므로 당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므로 '붙잡을 데'가 있다. '상성성'은 의식의 각성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므로 이 설명 속에는 어떤 행동지침이 없다.</ref> 늘 반짝반짝 깨어있을[常惺惺]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10 問: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자리에 '然則所謂敬者又若何而用力邪下' 14자가 더 들어있다.</ref>擧伊川及謝氏尹氏之說, 只是一意說敬.”
'''질문: 《혹문》에서 이천(伊川) 및 사씨(謝氏), 윤씨(尹氏)의 설(說)을 거론한 것은 그저 한 뜻으로 경(敬)을 설명한 것입니까?
曰: ‘主一無適’, 又說箇‘整齊嚴肅’; ‘整齊嚴肅’, 亦只是‘主一無適’意. 且自看整齊嚴肅時如何這裏便敬. 常惺惺也便是敬. 收斂此心, 不容一物, 也便是敬. 此事最易見. 試自體察看, 便見. 只是要敎心下常如此.”
'''대답: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하고 다시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 했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역시 그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이다. 어디 한번 정제엄숙(整齊嚴肅)할 때 어떻게 내면이 바로 경건(敬)해지는지 스스로 살펴 보라. '상성성(常惺惺)'해도 곧 경건(敬)하다. '수렴차심 불용일물[收斂此心, 不容一物]'<ref>본래는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이다. 경에 대한 이 네 가지 설명법은 17:6에 자세하니 참조하라.</ref>해도 곧 경건(敬)하다. 이 일은 매우 알기 쉽다. 시험 삼아 스스로 체험[體察]해 보면<ref>'체찰(體察)'은 몸소 체험/관찰하는 것이다.</ref> 바로 알 수 있다. 단지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이 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因說到放心: “如惻隱·羞惡·是非·辭遜是正心, 才差去, 便是放. 若整齊嚴肅, 便有惻隱·羞惡·是非·辭遜. 某看來, 四海九州, 無遠無近, 人人心都是放心, 也無一箇不放. 如小兒子才有智識, 此心便放了, 這裏便要講學存養.” 賀孫(62이후).
'''이어서 말이 방심(放心)에 미쳤다: 측은(惻隱)·수오(羞惡)·시비(是非)·사손(辭遜)<ref>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다.</ref> 같으면 바른 마음[正心]이요,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곧 놓친(放) 것이다. 정제엄숙(整齊嚴肅)한다면 곧 (놓친 마음을 다시 붙들어 와서) 측은·수오·시비·사손의 마음이 있게 된다. 내 생각에 사해(四海)와 구주(九州)<ref>온세상을 말한다.</ref> 어디든 멀거나 가깝거나 사람들 각각의 마음은 모두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니, 놓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경우도 지식[智識]이 생기자마자 이 마음을 바로 놓쳐버리게 되니, 이 지점에서 곧 강학(講學)과 존양(存養)<ref>강학과 존양은 각각 궁리와 거경 공부를 말한다. 17:1과 17:3의 주석을 참조하라.</ref>을 필요로 한다.
o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1 光祖問: “‘主一無適’與‘整齊嚴肅’不同否?”
'''광조(光祖)<ref>주희의 제자 가운데 광조가 셋이나 있다. 일역판은 여기서는 그 중 증흥종(曽興宗, 1146-1212)을 말한다고 주장한다.</ref>의 질문: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은 다르지 않습니까?<ref>둘 다 경건(敬)한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유지한다는 측면을 말한다. 앞의 몇 조목에서 자세하니 참조하라.</ref>
曰: “如何有兩樣! 只是箇敬. 極而至於堯舜, 也只常常是箇敬. 若語言不同, 自是那時就那事說, 自應如此. 且如大學論語孟子中庸都說敬; 詩也, 書也, 禮也, 亦都說敬. 各就那事上說得改頭換面. 要之, 只是箇敬.”
'''대답: 어찌 두 종류가 있겠나? 경(敬)은 하나 뿐이다. (거경 공부를) 지극히 하여 요순(堯舜)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역시 언제나 이 하나의 경(敬)일 뿐이다.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러저러한 때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응당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 예컨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모두 경(敬)을 말하고, 《시경》, 《서경》, 《예기》 또한 모두 경(敬)을 말하고 있다. 각각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얼굴을 바꿔가며(改頭換面)<ref>껍데기, 표현방식만 바꾸었지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ref>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경(敬)은 하나일 뿐이다.
又曰: “或人問: ‘出門·使民時是敬, 未出門·使民時是如何?’ 伊川答: ‘此“儼若思”時也.’ 要知這兩句只是箇‘毋不敬’. 又須要問未出門·使民時是如何. 這又何用問, 這自可見. 如未出門·使民時是這箇敬; 當出門·使民時也只是這箇敬. 到得出門·使民了, 也只是如此. 論語如此樣儘有, 最不可如此看.”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문을 나설 때와 백성을 부릴 때 경건(敬)하다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ref>논어 12:2. </ref>라고 하니, 이천(伊川)이 답하기를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할[儼若思]’<ref>예기 곡례 상.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하라(毋不敬,儼若思)'</ref> 때이다’라고 했다.<ref>이정유서 18:10. '질문: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뵙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 하라고 하는데, 아직 문을 나서지 않았고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 대답: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해야 할 때이다. 문을 나섰을 때의 경건함이 이와 같다면 문을 나서기 전에는 어떨지 알 만하다. 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問: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方其未出門未使民時, 如何? 曰: 此儼若思之時也. 當出門時其敬如此, 未出門時可知也. 且見乎外者出乎中者也.)</ref> 이 두 구절<ref>주일무적과 정제엄숙을 말한다.</ref> 모두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毋不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이걸 또 물을 필요가 있나? 이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도 이 경(敬) 하나일 뿐이고,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릴 때에도 역시 이 경(敬) 하나일 뿐이다.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린 뒤에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논어》에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으니, 결코 (이천에게 질문한 어떤 사람 처럼) 저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2 或問“整齊嚴肅”與“嚴威儼恪”之別.
'''누군가가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엄위엄각(嚴威儼恪)’<ref>엄숙하고 위엄있는 안색과 거동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편에 등장하는 문구이다.</ref>의 차이에 대해 질문함.
曰: “只一般. 整齊嚴肅雖非敬, 然所以爲敬也. 嚴威儼恪, 亦是如此.” 燾(70때).
'''대답: 똑같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 경(敬)은 아니지만 경(敬)을 행하는 수단이다. 엄위엄각(嚴威儼恪) 역시 그렇다.<ref>이정유서 15:182와 같은 취지이다. '엄위엄각은 경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경에 이르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自此入.)'</ref>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13 問: “上蔡說: ‘敬者, 常惺惺法也.’ 此說極精切.”
'''질문: 상채(上蔡)<ref>사량좌</ref>가 말하기를 ‘경(敬)이란 늘 반짝반짝 깨어있기[常惺惺] 위한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이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합니다[極精切].<ref>17:9를 참조하라.</ref>
曰: “不如程子整齊嚴肅之說爲好. 蓋人能如此, 其心卽在此, 便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 而內不惺惺者. 如人一時間外面整齊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寬了, 便昏怠也.”
'''대답: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만큼 좋지는 않다. 대개 사람이 이처럼<ref>정제엄숙을 말한다.</ref> 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곧 여기에 있어서[在此]<ref>의식(consciousness)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반짝반짝 깨어있게[惺惺] 되기 때문이다. 외면이 정갈하고 단정하며 엄숙(整齊嚴肅)하면서 내면이 반짝반짝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잠시라도[一時間] 외면이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곧 그 시간만큼 깨어있게 되고, 잠시라도 (몸가짐이) 풀어지면[放寬] 곧 흐릿하고 나태해지게[昏怠] 된다.
祖道曰: “此箇是氣. 須是氣淸明時, 便整齊嚴肅. 昏時便放過了, 如何捉得定?”
'''내(祖道)가 말함: 이것은 기(氣)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기(氣)가 맑고 밝을 때[淸明]는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흐릿할 때는 곧 방만하게[放過] 되니, 어떻게 해야 제대로 붙잡을 수 있습니까?<ref>'정(定)'은 현대 중국어 '주(住)'와 같다. 동사의 뒤에 붙어 'x得住'라고 하면 그 동작을 확실히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주고 'x不住'는 그 동작을 제대로 해낼 역량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ref>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志者, 氣之帥也.’ 此只當責志. 孟子曰: ‘持其志, 毋暴其氣.’ 若能持其志, 氣自淸明.”
'''대답: ‘심지(志)는 기(氣)를 통솔하는 장수이다[志者, 氣之帥也].’<ref>맹자 2A:2. 이른바 부동심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志)는 오늘날 말로 의지나 심지, 기(氣)는 의욕이나 기운, 에너지 정도에 해당한다. 심지가 장수라면 기는 병사들이다. 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에너지는 병사들에게서 나오지만(의욕과 기운), 병사들 각각이 어디로 움직여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방향성은 장수에게서 나온다(의지와 심지). 예컨대 시험기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심지의 명령이지만 실제로 공부하지 않고 침대에 붙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욕과 기운의 항명과 태업 때문이다.</ref> 이는 응당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심지(志)를 붙잡되 자기 기(氣)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持其志, 毋暴其氣]’고 하셨다.<ref>맹자 같은 곳.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병사들이 움직여야 한다. 장수의 뜻이 굳건하고 일관되면 병사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지를 굳건히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항명과 태업에도 이유가 있으니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일하고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경우 그런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Kwong-loi Shun, 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1997). P.68, 112-119를 참조하라.</ref> 만약 자기 심지(志)를 붙잡을 수 있다면 기(氣)는 저절로 맑고 밝아진다[淸明].
或曰: “程子曰: ‘學者爲習所奪, 氣所勝, 只可責志.’ 又曰: ‘只這箇也是私, 學者不恁地不得.’ 此說如何?”
'''누군가 말함: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자는 습관에게 빼앗기고 기(氣)에게 패배하니,<ref>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라.</ref> 단지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ref>이정유서 15:96. '배우는 자는 기에게 패배하고 습관에게 빼앗기니, 단지 심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學者, 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문구의 배치가 다르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고, 또 (심지를 붙잡으려는 것에 관해서)‘이 또한 사사로운 마음(私)일 뿐이지만,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ref>이정외서 8:6. '심지를 붙잡는 것을 논하다 선생이 말함: (심지를 붙잡으려는 마음) 또한 사사로운 마음일 뿐이다. 그래도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因論持其志先生曰: 只這箇也是私. 然學者不恁地不得.)'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어떻습니까?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涉於人爲, 便是私. 但學者不如此, 如何著力! 此程子所以下面便放一句云‘不如此不得’也.” 祖道(68때).
'''대답: 인위(人爲)에 관련되면 곧 사사롭다(私).<ref>기운과 의욕의 자연스러운 추세에 맡겨두지 않고 심지를 다져서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의욕을 몰고 가려는 것은 어느정도 작위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f> 다만 배우는 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쓰겠는가[著力]?<ref>'착력(著力)' 두 글자에 이미 작위성이 담겨있다.</ref> 이것이 정자(程子)께서 (사사롭다고 한 다음 그) 아래에다 바로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문을 덧붙이신 까닭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14 因看涪陵記善錄, 問: “和靖說敬, 就整齊嚴肅上做; 上蔡卻云‘是惺惺法’, 二者如何?”
'''부릉기선록(涪陵記善錄)<ref>정이의 제자 윤돈(尹焞)의 어록이다. 기록자는 윤돈의 제자인 풍충서(馮忠恕). 윤돈과 풍충서가 교유한 곳이 사천 부릉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청 중엽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실되었다. 이정외서 권 12에서 이 책으로부터 여덟 조목을 인용하고 있다.</ref>을 보다가 (선생이) 질문함: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은 경(敬)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측면에서 설명하고,<ref>본래 윤돈의 설명은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윤돈의 지침은 그 초점이 엄숙함에 있으므로 정이의 '정제엄숙'과 조응한다.</ref>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는 오히려 ‘반짝반짝 깨어있게 해주는 방법[惺惺法]이다’라고 하니, 이 두 설명이 어떠한가?<ref>비슷한 취지의 문답이 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실려있다. 정자상은 이 조목의 기록자인 정가학이다. '(질문) 和靖論敬以整齊嚴肅, 然專主於內; 上蔡專於事上作工夫, 故云敬是常惺惺法之類. (답변) 謝尹二說難分內外, 皆是自己心地功夫. 事上豈可不整齊嚴肅, 靜處豈可不常惺惺乎?'</ref>
厚之云: “先由和靖之說, 方到上蔡地位.”
'''후지(厚之)가 대답함: 먼저 화정(和靖)의 설(說)을 따른 뒤에야 상채(上蔡)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曰: “各有法門: 和靖是持守, 上蔡卻不要如此, 常要喚得醒. 要之, 和靖底是, 上蔡底橫.
'''(선생이) 말함: 각각 (나름의) 법문(法門)<ref>불교 용어. 진리에 이르는 방법, 경로 등을 이른다.</ref>이 있다. 화정(和靖)은 붙잡아 지키는 것[持守]이다. 상채(上蔡)는 이와 같이 하려 하지 않고 늘 깨어있고자[喚得醒] 한다. 화정(和靖)의 설은 옳고, 상채(上蔡)의 설은 비뚤다. <ref>횡설(橫說)은 횡설수설의 횡설이다. 조리가 없거나, 너무 고원하거나, 견강부회한 억지 주장을 이른다. 주희가 사량좌의 주장을 횡설이라고까지 했을까 의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잠재적 의문에 답하는 차원에서 고문해의는 114:40에서 주희가 여조겸의 주장 하나를 '횡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상채의 설을 '횡'이라고 했으면 화정의 설은 '종(縱)'이나 '직(直)'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시(是)'와 '직(直)'은 자형이 가까우므로 전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교감할 경우 화정의 설과 상채의 설 사이에 우열과 정부정은 없고 범주의 차이만 남게 된다.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단 이렇게 남겨둔다.</ref>
渠<ref>조선고사본과 성화본은 '渠'를 '某'라고 적었다. 주자어류고문해의에서는 이것을 '횡거'라고 볼 경우 이어지는 '역왈경이직내'가 불완전인용이 된다고 지적하고,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일역판의 역자들 역시 이하의 '역왈경이직내'가 장재의 저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渠'를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다만, 고문해의는 이 앞 부분을 '화정의 설은 옳고 상채의 설은 비뚤다(和靖底是, 上蔡底橫.).'라고 구두를 끊어서 읽어야 한다고 보았고 일역판은 '횡모(橫某)가 말했다'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류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기록자가 정가학(鄭可學)인 조목은 자주 비경(蜚卿)과 후지(厚之)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해 다자간 문답을 주고받으므로 각 발언이 누구의 질문이고 누구의 답변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정가학 조목들은 자주 자신의 발언을 '某曰'이나 '某云' 등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은데, 예컨대 4:38이나 7:24, 8:27, 19:93, 28:34, 106:32 등을 살펴보라.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일역판 보다는 고문해의의 제안이 더 합리적이다. 여기서는 고문해의를 따른다.</ref>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云'이라고 적었다.</ref>: ‘易曰: “敬以直內.” ’伊川云: ‘主一.’ 卻與和靖同. 大抵敬有二: 有未發, 有已發. 所謂‘毋不敬’, ‘事思敬’, 是也.”
'''내(某)가 말함: 《주역》에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한다[敬以直內]'고 하였고,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마음을 하나로 한다[主一]’고 하였으니, 오히려 화정(和靖)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경(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생각과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시점[未發]의 경과 이미 발한 뒤[已發]의 경입니다. 이른바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하라[毋不敬]’<ref>예기 곡례 상.</ref>와 ‘일을 할 적에는 경건할 것을 생각하라[事思敬]’<ref>논어 16:10.</ref>가 그것입니다.<ref>미발의 경과 이발의 경의 구분에 관해서는 17:11을 참조하라.</ref>
曰: “雖是有二, 然但一本, 只是見於動靜有異, 學者須要常流通無間."
'''(선생이) 말함<ref>고문해의와 일역본 모두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비록 두 가지가 있다 해도 뿌리는 하나이니, 그저 동(動)과 정(靜)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항상 (동/정 사이의) 흐름이 중단없이 자연스럽게 통하게 해야 한다. <ref>17:11의 논의를 참조하라. 정시의 경은 문을 나서기 전의 경건함이고 동시의 경은 문을 나서서 사태와 사물에 대처할 때의 경건함이다. 앞선 질문에서의 인용구로 말하자면 주역의 '경이직내'와 이천의 '주일무적', 윤돈(화정)의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정시의 경건함이다. 논어의 '사사경'은 동시의 경건함이다.</ref>
又: "如和靖之說固好, 但不知集義, 又卻欠工夫."
'''또 (내가 말함)<ref>이 대목을 이렇게 독립시켜 질문자의 질문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직전의 '曰: 雖是有二...'와 직후의 '曰: 亦是...'의 관계가 불분명해진다. 고문해의의 경우 일단은 앞쪽 曰을 주희의 대답으로, 뒤쪽 '曰'을 질문자의 추가 질문이라고 보았으나, 실은 상세히 읽어 보면 질문하는 말투가 아니어서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앞의 왈과 뒤의 왈을 모두 주희의 말로 해석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이렇게 질문자의 말로 떼어냈다. 여기서는 일역판을 따랐다.</ref>: 화정(和靖)의 설(說) 같은 경우 물론 좋긴 하지만 (그는) '의(義)에 부합하는 행위를 오래 축적해야 함[集義]'<ref>맹자 2A:2.</ref>을 알지 못했고, 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힘씀[工夫]이 부족했습니다.<ref>질문자는 화정의 경을 미발의 경건함, 정시의 경건함 쪽에 배속하고 있다. 이 경우 수행자 자신이야 홀로 방에 앉아 마음을 경건하게 길러낼 수 있을지라도 현실 사회 속에서 실질적인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매 순간 올바르고 경건한 선택을 내림으로써 스스로를 키워내는 과정은 겪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송대 문헌에서 거경(居敬)과 집의(集義) 공부를 이처럼 동/정, 내/외, 체/용의 두 방면으로 구분한 경우가 많다. 이정유서 18:101 '질문: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응당 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경은 (내면을) 함양하는 것 뿐이다.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모름지기 '집의'를 써야 한다.(問: 必有事焉, 當用敬否? 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질문: 경과 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경은 자신을 붙잡는 도리이고 의는 시비를 알고 이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의가 된다.(問: 敬義何別? 曰: 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또 남헌집(南軒集) 권 32 답유성지(答㳺誠之)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경과 집의 공부는 병행하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다. 만약 경건하게 할 줄만 알고 의로운 행위를 축적할 줄은 모른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 또한 멀뚱히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니 어떻게 마음의 본체가 사방으로 두루 흘러 영향을 미칠 수 있겠나? 집(集)은 축적한다(積)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에 의로움(義)없는 것이 없으되 (그 의로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드러나니, 구체적인 사태 하나하나에서 (의로운 판단과 행위를) 모아서 축적해야 한다.(居敬集義, 工夫並進, 相須而相成也. 若只要能敬, 不知集義, 則所謂敬者, 亦塊然無所爲而已, 烏得心體周流哉? 集訓積, 事事物物, 莫不有義, 而著乎人心, 正要一事一件上集.)'</ref>
曰: “亦是渠才氣去不得, 只得如此. 大抵有體無用, 便不渾全.”
'''(선생의) 대답<ref>고문해의에서는 일단 주희의 말로 보았으나 확신하지 못했다. 일역판도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그는<ref>윤돈을 말한다.</ref> 역시 그 재기(才氣)<ref>재치있고 민활함을 말한다.</ref>가 부족했기에[去不得]<ref>'去得'은 현대 중국어 '可以'와 같다. '去不得'은 이에 대한 부정표현이다. 주희가 보기에 윤돈은 순발력이나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묵묵히 정진하는 캐릭터였다. 예컨대 101:102-122를 보라.</ref> 단지 그와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개 본체(體)만 있고 작용(用)이 없으면 온전할[渾全] 수 없다.<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ref>
又問: “南軒說敬, 常云: ‘義已森然於其中.’”
'''다시 질문함<ref>기록자인 가학의 질문인 듯하다.</ref>: 남헌(南軒)<ref>장식(張栻)이다.</ref>은 경(敬)을 설명할 적에는 늘 ‘(경건하기만 하면) 의(義)는 이미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義已森然於其中]’고 말합니다.<ref>남헌집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위 주석에서 인용했듯 장식은 개인적 차원에서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과 사회적 차원에서 시비판단을 내리고 의로운 행적을 누적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말한 바 있다.</ref>
曰: “渠好如此說, 如仁智動靜之類皆然.” 可學(62때).
'''대답: 그는 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仁)·지(智)·동(動)·정(靜) 등에 (대해서 말할 적에) 모두 그러하다.<ref>장식의 계사논어해(癸巳論語解) 권3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과 정이라는 것은 인(仁)과 지(知)의 본질[體]이니, 물을 좋아하고(樂水) 산을 좋아(樂山)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동(動)하면 즐겁고 정(靜)하면 장수한다. 일삼는 바 없이 실천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항상 영원히 올바르며 굳건하니 어찌 장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知)의 본질은 동적이지만 이치는 각기 멈추는 곳이 있으니 정(靜)이 결국 그 속에 있다. 인(仁)의 본질은 정적이지만 두루 흘러 쉬지 않으니 동(動)이 결국 그 속에 있다. 동과 정이 교차하여 드러나며 본체와 작용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 인과 지의 (진정한) 뜻을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라면 (동정과 체용의 관계를) 알아보지 못한다.(動靜者, 仁知之體, 樂水樂山, 言其體則然也. 動則樂, 靜則夀. 行所無事, 不其樂乎? 常永貞固, 不其夀乎? 雖然, 知之體動, 而理各有止, 靜固在其中矣. 仁之體靜, 而周流不息, 動亦在其中矣. 動靜交見, 體用一源, 仁知之義, 非深體者, 不能識也.)'</ref>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15 問謝氏惺惺之說.
'''사씨(謝氏)의 '성성(惺惺)' 설(說)에 대하여 질문함.
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說敬, 卻只以‘整齊嚴肅’言之, 此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대답: '성성(惺惺)'이란 마음이 흐릿하지 않다는[不昏昧] 말이니, 그저 이것이 바로 경(敬)이다. 요즘 사람들은 경(敬)에 대해 말할 적에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만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도 물론 경(敬)이긴 하다만, 마음이 만약 흐릿하여 이치를 밝게 비춰주지 못한다면, 비록 억세게 붙잡는다[强把捉]<ref>주희는 의식(consciousness)을 바짝 긴장시켜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로 유지하는 행위를 대개 물건을 손으로 세게 쥐고 있는 느낌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파착(把捉), 지(持), 지수(持守) 등은 글자는 달라도 동일한 현상을 지시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ref> 한들 어찌 경(敬)이 될 수 있겠는가?
又問孟子告子不動心.
'''또, 맹자(孟子)와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질문함.
曰: “孟子是明理合義, 告子只是硬把捉.” 砥(61때).
'''대답: 맹자(孟子) (의 부동심은) 이치를 밝히고 의로움(義)에 부합하여 (획득하는 것)이고, 고자(告子)는 단지 (마음을) 억지로 단단히 붙잡아[硬把捉]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ref>부동심을 논한 맹자 2A:2는 난해한 조목이다. 주자어류 권 52의 200여 조목이 모두 이에 관한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주희가 생각하기에 고자는 세상의 여러 일과 서책 등으로부터 이치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도가적인 인물이다. 세상 일을 관찰하고 서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희가 생각하는 맹자의 부동심은 적극적으로 이치를 따져서 파악하고(즉, 지언知言)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즉, 집의集義)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이때문에 맹자의 부동심을 명리합의(明理合義)라고 평가하고 고자의 부동심을 경파착(硬把捉)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이때 명리는 이지적 노력, 집의는 실천적 노력이다. 자세한 분석은 장원태, "맹자 3.2에 대한 고찰", 2013과 김명석, "不動心 획득을 위한 孟子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한 고찰", 2021을 참조하라.</ref>
지(砥)의 기록. (61세 때)
* 17:16 或問: “謝氏常惺惺之說, 佛氏亦有此語.”
'''누군가의 질문: 사씨(謝氏)<ref>사량좌이다.</ref>의 상성성(常惺惺) 설(說)<ref>앞서 십여 조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의 경우, 불씨(佛氏) 역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曰: “其喚醒此心則同, 而其爲道則異. 吾儒喚醒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 佛氏則空喚醒在此, 無所作爲, 其異處在此.” 僩(69이후).
'''대답: 이 마음을 일깨우는[喚醒此心] 점에서는 같지만 그 도(道)의 성격은 다르다. 우리 유학(儒學)에서는 이 마음을 일깨워 그것이 많은 도리를 관조하게[照管] 하려는 것인데, 불씨(佛氏)는 헛되이 일깨워[在此]<ref>'재차'는 의식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실제로) 하는 바가(作爲) 아무것도 없으니, 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17 問: “和靖說: ‘其心收斂, 不容一物.’”
'''질문: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이‘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했습니다.<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斂. 他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直是更不著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賀孫(62이후).
'''대답: 이 마음이 그 어떤 대상에도 전혀 붙어있지 않으면[不著一物] 그게 바로 수렴(收斂)이다. 그는 윗 구절에서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사당[神祠]에 들어갈 때, 그때에는 그 어떤 사안도 전혀 마음에 더 붙일 수 없고 단지 공경(恭敬)함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ref>사고전서본 화정집(和靖集) 권 7, '예컨대 누군가 사당에 들어가 경의를 표할 적에 그 마음이 수렴되어 그 어떤 다른 사안도 전혀 붙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로 집중됨[主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且如人到神祠中致敬時, 其心收斂, 更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ref> 이 말이 매우 친근하고 절실하다. 지금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을 전일하게 할 수 있다면 곧 바짝 수렴하여 그 어떤 빈틈[空罅]도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思量]을 마치지 못했는데 또 다른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 버리면 마음은 곧 두 갈래 길이 되어버린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8 問尹氏“其心收斂不容一物”之說.
'''윤씨(尹氏)<ref>윤돈.</ref>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설(說)에 대한 질문.
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所亂, 便是不容一物也.”
'''대답: 마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주인으로 세워[主]<ref>'주(主)'자의 번역이 까다로운데, 전통적으로 '주장하다', '위주로 하다'와 같이 옮긴다. 여기서는 자신의 내면에 품은 여러 생각들의 위계서열에 있어서 최상의 자리, 즉 '주인'의 자리에 어떤 생각이나 마음가짐을 올려두었다는 의미에서 이상과 같이 번역했다. </ref> 다른 일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곧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問: “此只是說靜時氣象否?”
'''질문: 이는 고요할 때[靜時]의 기상(氣象)을 설명한 것 아닙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又問: “只靜時主敬, 便是‘必有事’否?”
'''재질문: 고요할 때[靜時] 경(敬)을 주인으로 세우는[主] 것이 곧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必有事]'<ref>본래 출전은 맹자 2A:2. 정씨 형제에 의하면 마음의 고요한 측면에 대해서도 모종의 의식적[用意] 노력을 동반한 공부가 필요하니 그것이 바로 경(敬)이다.(이정유서 18:35) 맹자의 '반드시 일이 있다[必有事]'에서 '일삼다'는 의식적 노력에 대한 요청인데, 여기서 맹자가 요청한 것을 정씨 형제는 경공부라고 해석했다. 이정유서 15:186'필유사언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니, 경이다.(必有事焉, 謂必有所事, 是敬也)'. 주희는 이러한 해석이 맹자의 본래 문맥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배격하지는 않는다. 52:162, 회암집 권40 답하숙경 제 29서('主敬存養, 雖説必有事焉, 然未有思慮作爲, 亦靜而已.'), 권 61 답임덕구(答林德久) 제 6서(질문: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必有事焉而勿正]’에 대해서, 명도와 이천은 대부분 “경(敬)을 위주로 한다”하고, 일설에는 “마땅히 의(義)를 모아야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위 글의 ‘의(義)를 모아 생겨나는 것이다’를 이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한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선(善)을 축적하는 공부가 아니겠습니까?‘必有事焉而勿正’, 二程多主於敬, 一說須當集義, 是承上文‘是集義所生者’而言. 所謂必有事, 則積集衆善工夫否? 답변: 맹자의 앞뒤 구절에 ‘경(敬)’자는 없고, ‘의(義)’자만 있을 뿐입니다. 정자는 이를 바꾸어서 ‘경(敬)’자로 설명했는데, 맹자의 본의와는 다릅니다. 집주를 보면 또한 자세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孟子上下文無‘敬’字, 只有‘義’字, 程子是移將去‘敬’字上說, 非孟子本意也. 集註亦可細玩.)등을 보라. 이 '일삼음[事]'을 주희는 기본적으로 '의로운 행실을 축적[集義]'하는 행위로 본다. 예컨대 52:93, 97, 167 등을 보라.</ref> 아닙니까?
曰: “然.” 僩(69이후).
'''대답: 그렇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단락 ===
此篇所謂在明明德一段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 17:19 問: “或問說‘仁義禮智之性’, 添‘健順’字,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을 설명하면서 ‘건(健)'과 '순(順)’ 자를 첨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ref>대학혹문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가 널리 작동하여 세상 만물을 틔워주고 길러주는데 그 창조하고 변화하는 내용물은 (따지고 보면) 음양과 오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음양과 오행이란 것도 (음양오행은 그 분류상 氣인데) 반드시 먼저 이치가 있고 난 다음에 기(氣)가 있는 것이요, 사물이 (실제로) 탄생한 측면에서는 또 기(氣)가 (먼저) 응취한 덕분에 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의 탄생은 필히 (먼저)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건, 순,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있게 되고, 필히 이 기를 얻은 연후에 혼, 백, 오장, 백해의 신체가 있게 된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의 진수와 2&5(음양과 오행이다)의 정수가 신비롭게 합쳐져 (사람이 탄생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대개 맹자이래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적에는 '인의예지' 혹은 '인의예지신' 정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건'과 '순' 두 형용사가 더 들어갔으니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ref>
曰: “此健順, 只是那陰陽之性.” 義剛(64이후).
'''대답: 이 건순(健順)이란 그저 저 음양(陰陽)의 성질일 뿐이다.<ref>주역에서 순양괘인 건(乾)괘의 성질이 굳건함(健), 순음괘인 곤(坤)괘의 성질이 유순함(順)이다. 인의예지신의 경우는 대개 백호통(白虎通)에서 정리한 내용에 따라 오행(목화토금수)에 하나씩 배당한다. 예컨대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해당하며 그 방위는 동쪽이다. 어류 6:45를 참조하라. 대학혹문에서 인간의 탄생을 말하면서 단순히 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만 했다면 인의예지신만 언급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만 '음양'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 했으니 음과 양의 성질에 해당하는 글자를 하나씩 더 첨부해서 앞뒤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ref>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7:20 問<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或問中' 세 글자가 더 있다.</ref>“健順仁義禮智之性”.
''' '건(健)·순(順)·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에 대한 질문.<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此承上文陰陽五行而言. 健, 陽也; 順, 陰也; 四者, 五行也. 分而言之: 仁禮屬陽, 義智屬陰.”
'''대답: “이는 윗글의 음양(陰陽)·오행(五行)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건(健)은 양(陽), 순(順)은 음(陰)이며, 네 가지<ref>인의예지(仁義禮智)</ref>는 오행(五行)이다. 나누어 말하면,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仁何以屬陰?”
'''질문: ‘하늘의 도(道)를 세우니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우니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道)를 세우니 인(仁)과 의(義)라 한다.’<ref>주역 설괘전. 설괘전의 설명대로라면 음-유-인, 양-강-의가 각각 같은 범주로 묶여야 한다. 이에 대한 주희의 반론은 어류 6:54를 참조하라.</ref>고 했는데, 인(仁)이 어찌하여 음(陰)에 속합니까?
曰: “仁何嘗屬陰! 袁機仲正來爭辨.<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일곱자가 없다. 서산독서기 갑집 권 8에서는 이 부분을 '袁機仲力爭'이라고 썼다.</ref> 他<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便'자가 더 있다.</ref>引<ref>'타인' 두 글자는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주석으로 처리했다.</ref>‘君子於仁也柔, 於義也剛’爲證. 殊不知論仁之定體, 則自屬陽. 至於論君子之學, 則又<ref>조선고사본에는 '又'자가 없다. </ref>各自就地頭說, 如何拘文牽引得! 今只觀天地之化, 草木發生, 自是條暢洞達, 無所窒礙, 此便是陽剛之氣. 如云: ‘采薇采薇, 薇亦陽<ref>하서린의 전경당본은 이 글자를'作'이라고 썼다.</ref>止.’ ‘薇亦剛止.’ 蓋薇之生也, 挺直而上, 此處皆可見.”
'''대답: 인(仁)이 어찌 일찍이 음(陰)에 속했겠는가? 때마침 원기중(袁機仲)<ref>원추(袁樞, 1131-1205)의 자가 기중이다. 어류 6:55를 보면 그는 의를 양에, 인을 음에 배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회암집 권 38의 답원기중별폭(答袁機仲別幅)에도 원기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주희의 반론이 실려있으니 참조하라.</ref>이 (그런 내용으로) 논쟁을 걸어왔다.<ref>여기서 '래(來)'는 찾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쪽을 '향해서' 어떤 동작을 수행했다는 뜻에 가깝다.</ref> 그는 ‘군자는 인(仁)에 대해서는 유(柔)하고, 의(義)에 대해서는 강(剛)하다’<ref>양웅의 법언(法言) 군자(君子)편. 주자어류 6:136을 보면 주희도 양웅의 이 발언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거나, 본체가 강한 덕목이 작용은 유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웅과 자신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려고 할 뿐이다.</ref>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는 인(仁)의 확정적 본질[定體]을 논하자면 당연히 양(陽)에 속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군자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또 각자의 경우[地頭]에 맞게 설명한 것이니,<ref>고문해의에서는 인의 확정적 본질을 논하는 경우에는 양에 속하고 인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음에 속한다고 정리했다.</ref> 어찌 (양웅의 법언에서 사용한) 문자(의 표현)에 얽매이는가?<ref>구문색인(拘文牽引)은 표현에 구애되어 얽매인 것이다.</ref> 이제 가만 보면 천지가 변화[天地之化]하여 초목이 탄생하고 발육할 적에 자연히 쭉쭉 뻗어나가 막히거나 걸리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양강(陽剛)한 기(氣)이다. 예를 들어 ‘고사리 캐고 고사리 캐니, 고사리 또한 양(陽)하네[采薇采薇, 薇亦陽止].’ ‘고사리 또한 강(剛)하네[薇亦剛止].’라 하였다.<ref>시경 소아 녹명지십 채미(采薇)편. 시경 쪽 원문은 '채미채미, 미역작지(采薇采薇 薇亦作止)', '채미채미, 미역유지(采薇采薇, 薇亦柔止)', '채미채미, 미역강지(采薇采薇, 薇亦剛止)'인데, 이는 고사리가 막 땅에서 자라나와 부드러운 단계를 거쳐 다 자라서 뻣뻣한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경과를 노래한 것이다. 주희는 우선 '作'을 '陽'으로 잘못 썼고, 또 중간에 위치한 '柔'를 생략하고 마지막 '剛'만을 인용함으로써 시경 채미편을 자신이 앞서 주장한 것처럼 초목이 양강(陽剛)하다는 말의 경전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ref> 대개 고사리는 나면서부터 똑바로 위로 자라니, 이러한 (고사리의 특성)에서 (초목의 양강(陽剛)한 성질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問: “禮屬陽. 至樂記, 則又以禮屬陰, 樂屬陽.”
'''질문: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禮)는 양(陽)에 속합니다. (하지만) 〈악기(樂記)〉에서는 또 예(禮)를 음(陰)에 배속하고 악(樂)을 양(陽)에 배속합니다.<ref>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기 악기편에서는 악을 하늘에, 예를 땅에 배속했다. '악은 하늘에서 말미암아 제작하고 예는 땅을 따라 제작한다(樂由天作, 禮以地制)'</ref>
曰: “固是. 若對樂說, 則自是如此. 蓋禮是箇限定裁節, 粲然有文底物事; 樂是和動底物事, 自當如此分. 如云‘禮主其減, 樂主其盈’之類, 推之可見.” 僩(69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악(樂)과 한 쌍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다. 대개 예(禮)는 한정짓고 선을 그으며[限定裁節] 찬란하게 문채가 있는[粲然有文] 것이고, 악(樂)은 조화롭고 감동시키는[和動]<ref>예기 악기편에 나오는 표현이다.</ref>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예가 양, 악이 음으로) 나뉜다. ‘예(禮)는 줄이는[減] 것을 위주로 하고, 악(樂)은 채우는[盈] 것을 위주로 한다[禮主其減, 樂主其盈]’라고 하는 것 등은 (앞선 내용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ref>예기 악기편. '악이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예란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줄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악은 채우는 것을 위주로 한다.(樂也者,動於內者也;禮也者,動於外者也。故禮主其減,樂主其盈.)' 줄이는 것은 '음'적인 운동, 채우는 것이 '양'적인 운동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떠올려 보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1 問: “健順在四端何屬?”
'''질문: 건순(健順)은 사단(四端) 중 어디에 속합니까?
曰: “仁與禮屬陽, 義與智屬陰.”
'''대답: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小學: ‘詩·書·禮·樂以造士.’ 注云: ‘禮, 陰也.’”
'''질문:《소학(小學)》에 ‘시(詩)·서(書)·예(禮)·악(樂)으로써 선비를 만든다’<ref>소학에서 예기 왕제편을 인용한 부분이다.</ref>고 하였는데, 주(注)에 ‘예(禮)는 음(陰)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f>주석은 예기 왕제편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ref>
曰: “此以文明言, 彼以節制言.”
'''대답: 이쪽은 문채나고 빛나는(文明) 측면에서 (예를) 설명한 것이고<ref>양에 속한다는 설명이다.</ref> 저쪽은 구별짓고 제약하는(節制)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ref>소학의 주석에 대한 설명이다.</ref>
問: “禮<ref>성화본은 '義'로 썼다. 이 조목의 첫 질문의 내용을 보나 이어지는 대화의 맥락상으로 보나 '義'가 더 어울리므로 이쪽으로 번역했다.</ref>智是束斂底意思, 故屬陰否?”
'''질문: 의(義)와 지(智)는 거두어들이는[束斂] 느낌이 있으므로 음(陰)에 속하는 것입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或問: “智未見束斂處.”
'''누군가의 질문: 지(智)는 거두어들이는 측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ref>일역판은 이 질문과 6:56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여기서의 '누군가'가 해당 조목의 기록자인 심한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ref>
曰: “義猶略有作爲, 智一知便了, 愈是束斂. 孟子曰: ‘是非之心, 智也.’ 纔知得是而愛, 非而惡, 便交過仁義去了.” 胡泳(69때).
'''대답: 의(義)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作爲) 조금 있지만, 지(智)는 한 번 알면 그걸로 끝이니 더욱 거두어들이는 쪽이다. 맹자(孟子)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라고 한다. 옳은[是] 줄 알고서 사랑하고 그른[非] 줄 알고서 미워하자마자 인(仁)과 의(義)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호영(胡泳)의 기록. (69세 때)
* 17:22 問陰陽五行健順五常之性.
'''음양(陰陽)·오행(五行)·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에 대한 질문.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陰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且如狗子, 會咬人底, 便是稟得那健底性; 不咬人底, 是稟得那順底性. 又如草木, 直底硬底, 是稟得剛底; 軟底弱底, 是稟得那順底.” 僩<ref>조선고사본에서는 '기손(蘷孫)'으로 썼다.</ref>(69이후).
'''대답: 굳건함(健)은 저 양(陽)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고, 유순함(順)은 저 음(陰)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며, 다섯가지 떳떳한 품성(五常)은 오행(五行)의 이치(理)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人物]은 모두 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을 부여받았다. 또 예컨대 개[狗子] 중에 사람을 무는 놈은 바로 저 굳건(健)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요, 사람을 물지 않는 놈은 저 유순(順)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다. 또 초목(草木) 중에 곧고 단단한 것은 강(剛)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저 윤순(順)<ref>이 글자는 엄밀한 문언이었으면 '柔'라고 썼어야 한다.</ref>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3 問: “或問‘氣之正且通者爲人, 氣之偏且塞者爲物’,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바르고 통한[正且通]<ref>바르다는 것은 도덕적 올바름보다는 똑바로 서있는 물건의 경우처럼 밸런스가 좋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통함은 공간적으로 이동할 때 장애 없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이다.</ref> 기(氣)는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偏且塞] 기(氣)는 사물이 된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物之生, 必因氣之聚而後有形, 得其淸者爲人, 得其濁者爲物. 假如大鑪鎔鐵, 其好者在一處, 其渣滓又在一處.”
'''대답: 사물의 생성은 반드시 (먼저) 기(氣)가 모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니, 그 맑은[淸] 것을 얻은 자는 사람이 되고 그 탁한[濁] 것을 얻은 자는 사물이 된다. 예를 들어 큰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면 잘 정련된 것이 한 쪽에 모이고 찌꺼기[渣滓]는 다른 한 쪽에 모이는 것과 같다.
又問: “氣則有淸濁, 而理則一同, 如何?”
'''재질문: 기(氣)에는 청탁(淸濁)이 있지만 이치(理)는 똑같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固是如此. 理者, 如一寶珠. 在聖賢, 則如置在淸水中, 其輝光自然發見; 在愚不肖者, 如置在濁水中, 須是澄去泥沙, 則光方可見. 今人所以不見理, 合澄去泥沙, 此所以須要克治也. 至如萬物亦有此理. 天何嘗不將此理與他. 只爲氣昏塞, 如置寶珠於濁泥中, 不復可見. 然物類中亦有知君臣母子, 知祭, 知時者, 亦是其中有一線明處. 然而不能如人者, 只爲他不能克治耳. 且蚤·虱亦有知, 如飢則噬人之類是也.” 祖道(68때).
'''대답: 진실로 그러하다. 이치(理)라는 것은 하나의 보배 구슬과 같다. (구슬이) 성현(聖賢)에게 있으면 마치 맑은 물[淸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휘광(輝光)이 자연히 드러나지만,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게 있으면 마치 탁한 물[濁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진흙과 모래[泥沙]를 걸러내야만 비로소 그 빛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이치(理)를 보지 못하니 마땅히 진흙과 모래를 걸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자기 기질을) 다스려야만[克治] 하는 까닭이다. 만물(萬物)의 경우에도 역시 이 이치(理)가 있다.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이 이치(理)를 그것들에게 주지 않았겠는가? 단지 기(氣) 때문에 흐리고 폐색하여[昏塞] 마치 보배 구슬을 탁한 진흙탕 속에 둔 것처럼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물들 중에서도 군신(君臣)·모자(母子)를 알고, 제사(祭)를 알며, 때[時]를 아는 종류가 있으니,<ref>당시 사람들은 벌과 개미[蜂蟻]에게 엄정한 군신관계가 있고. 호랑이와 이리[虎狼]에게 부자(혹은 모자)간에 친밀한 관계가 있고, 승냥이와 수달[豺獺]이 사냥한 짐승을 널어놓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줄 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와 이리의 친애함은 장자 천운편, 승냥이와 수달의 제사는 예기 왕제편이 최초의 출전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주자어류 4:9, 11, 19 등을 참조하라.</ref> 역시 그 속에 한 가닥 밝은 부분[一線明處]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과 같을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자기 기질을) 다스릴[克治] 수 없어서일 뿐이다. 또 벼룩[蚤]과 이[虱] 또한 (제한된 정도의) 지성(知)이 있으니, 예를 들어 굶주리면 사람을 무는 것 등이 이것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24 問: “或問云: ‘於其正且通者之中, 又或不能無淸濁之異, 故其所賦之質, 又有智愚賢不肖之殊.’ 世間有人聰明通曉, 是稟其氣之淸者矣, 然卻所爲過差, 或流而爲小人之歸者; 又有爲人賢, 而不甚聰明通曉, 是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그 바르고 통한[正且通] 자 중에서도 또 간혹 청탁(淸濁)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므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다시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통한 기에도 간혹 청탁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미추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추한 사람은 불초하니, 다시 서로 똑같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회암집 권 62 답이회숙(答李晦叔) 제 6서에서는 본 조목에서 인용한 것과 흡사한 버전으로 혹문을 인용하고 있다.</ref> 세상 사람 중에 총명하고 통달한[聰明通曉] 자는 맑은[淸] 기(氣)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하는 바가 어긋나서 혹 소인(小人)의 부류가 되고 마는 자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 사람됨이 현명하지만[賢] 그다지 총명하고 통달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曰: “或問中固已言之, 所謂‘又有智愚賢不肖之殊’, 是也. 蓋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事<ref>다수의 판본에서 '了'로 적었다.</ref>者, 智也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淸和溫恭之德. 又有人極溫和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爲學便是要克化, 敎此等氣質令恰好耳.” 僩(69이후).
'''대답: 《대학혹문》에서 이미 이에 관하여 말했으니, 이른바 ‘또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대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범주가 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聰明曉事] 자가 똑똑하되[智] 혹 현명하지 못하다면[不賢], 이는 곧 부여받은 것 가운데 맑고 온화하며[淸和] 따스하고 공손한[溫恭] 덕(德)이 부족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지극히 온화(溫和)하되 그다지 사리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바로 현명하지만[賢] 똑똑하지[智]는 못한 것이다. 배움(學)이란 바로 이러한 자기 기질을 이겨내고 변화시켜[克化] 딱 알맞게[恰好]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5 舜功問: “序引參天地事, 如何?”
'''순공(舜功)의 질문: (대학혹문의) 서문(序)에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셋이 되는[參天地]' 일을 인용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ref> '삼천지(參天地)'는 본래 중용 제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면 남이 그렇게 하도록 도울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했다면 이미 (이 사람의 위격은) 천지와 같으니,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은 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서문이 아니라 경 1장에서 '명덕'을 설명하는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은 태어나면서 바르고 통한 기운을 얻었으니 그 본성이 가장 귀하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허령통철(虛靈洞徹)하여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금수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처럼 되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어 (천지의) 낳고 기르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까닭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다.(唯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ref>
曰: “初言人之所以異於禽獸者, 至下須是見己之所以參化育者.”
'''대답: 처음에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까닭을 말하였으니, (이어지는) 그 아래에서는 모름지기 자신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參化育] 까닭을 보아야 한다.
又問: “此是到處, 如何?”
'''다시 질문: 이 과정은 종착점이[到處] 어떻게 됩니까?
曰: “到, 大有地步在. 但學者須先知其如此, 方可以下手. 今學者多言待發見處下手, 此已遲卻. 纔思要得善時, 便是善.” 可學(62때).
'''대답: (종착점에) 도달하기까지 크게 (여러가지) 단계들이[地步] 있다. 다만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종착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손을 쓸[下手] 수 있다. 지금 배우는 자들은 발현되는 경우[發見處]를 기다렸다가 손을 쓴다고 많이들 말하는데,<ref>이 발언은 아마도 호상학자들의 '찰식이발지제' 공부를 염두에 둔 듯하다. 고문해의는 회암집 권 51의 답동숙중(答董叔重) 제 3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ref> 이러면 이미 늦고 만다.<ref>'-却'은 현대 중국어 '-掉'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행위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한다. 예컨대 '망각(忘却)'은 잊어버린다는 행위가 완성된 것이다.</ref> 선(善)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 즉시 바로 선(善)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26 問: “或問‘自其有生之初’以下是一節; ‘顧人心稟受之初, 又必皆有以得乎陰陽五行之氣’以下是一節; ‘苟於是焉而不値其淸明純粹之會’, 這又轉一節; 下又轉入一節物欲去, 是否?”
'''질문: 《대학혹문》에서 ‘최초에 태어났을 때부터[自其有生之初]’ 이하가 한 단락이고, ‘생각건대 최초에 사람이 마음을 (하늘로부터) 받았을(稟受) 적에는 또 반드시 모두 음양(陰陽)·오행(五行)의 기(氣)를 얻음이 있었다’ 이하가 한 단락이며, ‘진실로 이 단계에서 그 청명하며 순수한 것들(을 받을) 기회[淸明純粹之會]를 만나지 못한다면’여기서 다시 전환되어 한 단락이고, 이어서 그 아래에서 다시 전환되어 '물욕(物欲)' 한 단락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까?<ref>질문자가 인용한 네 단락은 모두 현행본 대학혹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행본을 사서혹문의 최후개정판이라고 간주할 경우 여기서의 네 단락은 모두 구판의 문구들이 된다. 아래 주희의 말에 더해 여기서 인용된 부분만 가지고 추론하자면 제 1구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동질성, 제 2구는 음양오행의 정수를 얻어 탄생한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 제 3구는 그럼에도 타고난 기질의 퀄리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제 4구는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나 물욕에 빠져 추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일역판 역시 이와 흡사하게 추론했으니 참조하라.</ref>
曰: “初間說人人同得之理, 次又說人人同受之氣. 然其間卻有撞著不好底氣以生者, 這便被他拘滯了, 要變化卻難.”
'''대답: 처음에는 사람마다 똑같이 얻는 이치(理)를 설명하고,<ref>제 1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그 다음에는 또 사람마다 똑같이 받는 기(氣)를 설명한 것이다.<ref>제 2구를 설명한 것이다.</ref> 그러나 그 사이에 도리어 좋지 못한 기(氣)를 만나[撞]<ref>'撞'은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질문자가 인용한 제 3구의 '値'와 같다.</ref> 태어나는 자가 있으니,<ref>제 3구에 대한 해설이다.</ref> 그 경우 곧 그 (기에) 구속되고 막혀서[拘滯] 변화시키고자 하여도 어렵다.<ref>제 4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問: “如何是不好底氣?”
'''질문: 어떠한 것이 좋지 못한 기(氣)입니까?
曰: “天地之氣, 有淸有濁. 若値得晦暗昏濁底氣, 這便稟受得不好了. 旣是如此, 又加以應接事物, 逐逐於利欲, 故本來明德只管昏塞了. 故大學必敎人如此用工, 到後來卻會復得初頭渾全底道理.” 賀孫(62이후).
'''대답: 천지의 기(氣)에는 청탁이 있다. 만약 어둡고 혼탁한[晦暗昏濁] 기(氣)를 만난다면, 이는 곧 좋지 못한 것을 받은[稟受]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데 또 사물을 응대함[應接事物]에 있어 사사건건 이욕(利欲)을 쫓아다니므로, 본래의 명덕(明德)이 계속 흐리고 폐색[昏塞] 된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들이 이와 같이 힘을 쓰도록 가르쳐서, 나중에는 도리어 최초의 온전한[渾全] 도리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27 林安卿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擴將去.”
'''임안경(林安卿)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이 끝내 은폐될 수 없음을 설명한 부분이다.</ref>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은 지점들[覺處]에 나아가 앎을 지극히 하고(致知) 확충해[充擴] 나가야 합니다.
曰: “然. 昨日固已言之. 如擊石之火, 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林先引或問中“至於久而後有覺”之語爲比, 先生因及此.> 那箇覺, 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대답: 그렇다. 어제 진실로 이미 그것을 말했다. (그것은) 마치 부싯돌을 때려서 나오는 스파크[擊石之火]와 같으니, 작은 불씨[些子]일 뿐이지만, 착화하기만 하면 곧 온 들판을 다 태울[燎原] 수 있다. 만약 반드시 먼저 크게 깨달은[大覺] 다음에 비로소 격물(格物)·치지(致知)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순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임안경[林]이 먼저 《대학혹문》 중의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至於久而後有覺]'<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이정(二程)의 말이다. 원출전은 이정유서 18:18. '질문: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대답: 앎을 지극히하는 공부가 최우선이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이 매일 더욱 밝아질 것이고,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問: 學何以有至覺悟處? 曰: 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ref>는 말을 인용하여 비유하자 선생이 이어서 이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대학혹문에서 말한) 저 깨달음이란[那箇覺] 사물이 탐구되어 앎이 지극해진[物格知至] 뒤의 대철대오[大徹悟]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일은 모두 끝난다. 순간적인 깨달음[介然之覺] 같은 경우는 하루 동안에도 무시로 무수히[無時無數] 터져나오니,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려[識認] 붙잡아 지키고[操持] 확충하고 길러[充養]<ref>산란하는 마음을 수습하여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덕성을 두텁게 배양하는 공부를 말한다. 17:1과 3에서 설명하고 있는 소학 단계에서의 공부를 참조하라.</ref>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又問: “‘眞知’之‘知’與‘久而後有覺’之‘覺’字, 同否?”
'''다시 질문: ‘참된 앎[眞知]'<ref>진리를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 알아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이정이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정유서 2上:24 '참으로 아는 것과 평범하게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본 일인데, 어떤 농부가 호랑이에게 물려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쳤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변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그 농부만 안색이 변하여 다른 사람들과 반응이 달랐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참으로 안'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저 농부와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선을 알면서도 불선을 행하는 것은 역시 참으로 알지 못해서이다. 참으로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眞知與常知異. 常見一田夫曾被虎傷, 有人說虎傷人, 衆莫不驚, 獨田夫色動, 異於衆. 若虎能傷人, 雖三尺童子, 莫不知之, 然未嘗眞知. 眞知須如田夫乃是. 故人知不善, 而猶爲不善, 是亦未嘗眞知. 若眞知, 決不爲矣.)</ref>이라고 할 때의 ‘지(知)’와 ‘오래 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久而後有覺]’의 ‘각(覺)’ 자는 (의미가) 같지 않습니까?
曰: “大略也相似, 只是各自所指不同. 眞知是知得眞箇如此, 不只是聽得人說, 便喚做知. 覺, 則是忽然心中自有所覺悟, 曉得道理是如此. 人只有兩般心: 一箇是是底心, 一箇是不是底心. 只是才知得這是箇<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箇'의 순서가 '箇是'로 뒤집혀있다.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是箇'를 주석처리했다. 여유량본과 전경당본에서는 저본(중화서국판)과 같다.</ref>不是底心, 只這知得不是底心底心, 便是是底心. 便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 知得不是底心便是主, 那不是底心便是客. 便將這箇做主去治那箇客, 便常守定這箇知得不是底心做主, 莫要放失, 更那別討箇心來喚做是底心! 如非禮勿視聽言動, 只才知得這箇是非禮底心, 此便是禮底心, 便莫要視. 如人瞌睡, 方其睡時, 固無所覺. 莫敎纔醒, 便抖擻起精神, 莫要更敎他睡, 此便是醒. 不是已醒了, 更別去討箇醒, 說如何得他不睡. 程子所謂‘以心使心’, 便是如此. 人多疑是兩箇心, 不知只是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而已.”
'''대답: 대략 비슷하니, 그저 각자 지시하는 바[所指]가 다를 뿐이다. 참된 앎[眞知]은 참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단지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다. 깨달음[覺]이란 홀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깨닫는 바[覺悟]가 있어서 도리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옳은[是]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옳지 않은[不是] 마음이다. 그저 이것이 '옳지 않은 마음'임을 알기만 하면 곧 이 '옳지 않은 마음'을 아는 마음[知得不是底心底心]이 바로 '옳은 마음[是底心]'이다.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이 바로 주인(主)이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이 바로 손님(客)이다. 이것을 주인(主)으로 삼아 저 손님(客) 쪽을 다스려서, 항상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굳게 지켜[守定] 주인(主)으로 삼고 놓치지[放失] 말아야 하니, 다시 어디서[那]<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별도로 마음을 마련해와서[討]<ref>'討'는 물건을 구해다 온다는 뜻이다.</ref> '옳은 마음'이라고 부를 것인가?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聽言動]<ref>논어 12:1.</ref>는 말의 경우, '이건 예(禮)가 아니구나'라고 아는 그 마음[知得這箇是非禮底心]이야말로 바로 '예(禮)의 마음[禮底心]'이니, (이 마음을 주인으로 옹립한 사람은) 곧 (예에 어긋나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瞌睡] 경우, 잠이 든 동안에는 전혀 지각하는[覺]<ref>깨달을 '각(覺)'은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 사물을 지각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쓴 것이다.</ref> 바가 없다. 그저[莫敎]<ref>고문해의에서는 '只是'나 '除是'와 같다고 풀면서 '莫'을 부정사로, '敎'를 사역동사로 보는 해석을 배격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로 어류 130:77을 제시했는데, 사실 어류 전체에서 '막교'가 이런 식으로 쓰인 곳은 130:77 한 군데인 반면 다수의 다른 조목에서는 모두 '~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여전히 의심스럽다. 한어대사전에서는 '막교'를 '막비(莫非)'와 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님이 없다'가 된다. 일역판은 고문해의의 제언을 따랐다.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지만 달리 더 낫게 해석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우선 고문해의를 따라 번역해 두었다.</ref> 막 깨어나자마자[纔醒] 번쩍 정신을 차리고[抖擻起精神]<ref>'두수(抖擻)'는 물건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몸을 번쩍 일으키는 등을 말한다.</ref> 다시는 그 자신이 잠들도록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깨었다[醒]는 것이다. 이미 깨어난 뒤에 다시 별도로 '깨어있음'을 마련해와서 어떻게 하면 그 자신이 다시 잠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마음으로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ref>이정유서 18:85. '질문: 마음은 누가 부립니까? 대답: 마음으로 마음을 부리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저 혼자 하라고 맡겨두면 달아나 버린다. (曰: 心誰使之? 曰: 以心使心則可. 人心自由, 便放去也.)'</ref>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하면) 마음이 두개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데,<ref>마음 A로 마음 B를 통제한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에게 있어 마음은 하나 뿐이라는 주희의 평소 생각에 배치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심사심'이라고 말해도 사실은 하나뿐인 마음이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16:136, 34:196, 96:52 등을 보라.</ref> 단지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릴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元思云: “上蔡所謂‘人須是識其眞心, 方乍見孺子入井之時, 其怵惕·惻隱之心, 乃眞心也.'”
'''원사(元思)가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의 이른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眞心]을 알아야 한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막 보았을 때의 그 경악하며[怵惕] 측은해하는[惻隱] 마음이 바로 참된 마음[眞心]이다.'에 관하여 발언함.<ref>상채어록 권2의 한 대목을 주희가 맹자집주 2A:6에서 인용한 것이다. 맹자집주쪽의 문장은 본 조목과 일치하나 상채어록의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참된 마음이다. (人須識其眞心. 見孺子將入井時, 是眞心也.)'</ref>
曰: “孟子亦是只<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只'가 '只是'로 순서가 뒤집혀있다.</ref>討譬喩, 就這親切處說仁之心是如此, 欲人易曉. 若論此心發見, 無時而不發見, 不特見孺子之時爲然也. 若必待見孺子入井之時, 怵惕·惻隱之發而後用功, 則終身無緣有此等時節也.”
'''대답: 맹자(孟子) 역시 그저 비유를 하나 가져와서[討] 이렇게 친근하고 절실한[親切] 지점 위에서 인(仁)한 마음이란 이와 같음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쉽게 깨닫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 마음의 발현(發見)을 논하자면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으니[無時而不發見], 꼭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경악하며 측은해하는 마음이 발현된 뒤에야 힘을 써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죽을 때 까지 이러한 순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ref>발현된 것을 근거로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음 속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당시 표현으로 이발찰식 공부라고 불렀다. 오늘날 호남성 장사에 해당하는 형호남로 담주(潭州)를 근거지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이러한 방향의 공부를 주장했는데, 이를 통칭 '호상학(湖湘學)'이라고 부른다. 17:25에 이어 여기에서도 주희는 호상학의 공부방법론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어서 원사가 호상학의 거두인 호굉(胡宏)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ref>
元思云: “舊見五峰答彪居仁<ref>'彪居正'의 오기이다.</ref>書, 說齊王易<ref>성화본, 조선정판본, 조선고사본에서는 '易'을 '愛'로 적었다.</ref>牛之心云云, 先生辨之, 正是此意.”
'''원사(元思)가 말함: 옛날 오봉(五峰)<ref>호굉(胡宏, 1105~1161)이다. 호상학의 거두로 장식(張栻, 1133-1180)의 스승이다.</ref>이 표거정(彪居正)에게 답한 편지에서 제나라 임금(齊王)이<ref>맹자와 대담한 제선왕을 말한다.</ref> 소를 바꾼 마음[易牛之心]<ref>맹자 1A:7. 제나라 선왕이 제사에 쓰일 희생물인 소가 두려움에 떨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일을 말한다.</ref> 운운한 것을 보았는데,<ref>호굉의 주저인 지언(知言) 권 4에 이 대담이 실려있다. '다른날 물었다: 사람이 인하지 못한 까닭은 그 좋은 마음을 놓쳐서입니다. 놓친 마음을 가지고 (본래의 좋은) 마음을 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답: 제나라 임금이 소를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이 좋은 마음의 싹이 이욕(利欲)의 틈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드러난 그것을 붙잡아 간직하고 간직하여 기르고 길러서 확충하여 매우 커질 때까지 그치지 않으면 하늘과 똑같아진다. 이 마음이 발현하는 단서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핵심은 그것을 인식하는데 있을 뿐이다.(他日問曰: 人之所以不仁者, 以放其良心也. 以放心求心, 可乎? 曰: 齊王見牛而不忍殺, 此良心之苖裔, 因利欲之間而見者也. 一有見焉, 操而存之, 存而養之, 養而充之, 以至于大大而不已, 與天同矣. 此心在人, 其發見之端不同, 要在識之而已.)</ref> 선생님께서 (호굉과 표거정 사이의)그 대담을 논변하신 글<ref>주희가 장식, 여조겸과 함께 1170년(41세)에 완성한 호자지언의의(胡子知言疑義)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회암집 권 73에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이 상당하며 또 본 조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고 하기 어려우므로 인용하지는 않겠다.</ref>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曰: “然. 齊王之良心, 想得也常有發見時. 只是常時發見時, 不曾識得, 都放過<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이 뒤에 '去'자가 있다.</ref>了. 偶然愛牛之心, 有言語說出, 所以孟子因而以此推廣之也.”
'''대답: 그렇다. 제나라 임금(齊王)의 좋은 마음[良心]도 생각해 보면 역시 늘상 발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평상시 발현될 적에는 그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어서 모두 놓쳐버렸을[放過] 뿐이다. 우연히 소를 아끼는 마음[愛牛之心]이 말로 발화되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가 그 기회에 그것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又問: “自非物欲昏蔽之極, 未有不醒覺者.”
'''다시 질문: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지[物欲昏蔽之極]않은 이상 (여지껏) 깨어나지[醒覺]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曰: “便是物欲昏蔽之極, 也無時不醒覺. 只是醒覺了, 自放過去, 不曾存得耳.” 僩(69이후).
'''대답: 설령<ref>'便是'는 '설령[即使]', '비록[雖是]'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문해의를 참조하라.</ref>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사람은) 깨어나지 못할 때가 없다. 단지 깨어나고 나서도 스스로 놓쳐버려[放過去] 한번도 (제대로) 간직하지[存得] 못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8 友仁說“明明德”: “此‘明德’乃是人本有之物, 只爲氣稟與物欲所蔽而昏. 今學問進修, 便如磨鏡相似. 鏡本明, 被塵垢昏之, 用磨擦之工, 其明始現. 及其現也, 乃本然之明耳.”
'''내(友仁)가 ‘명명덕(明明德)’을 설명했다: 이 ‘명덕(明德)’은 바로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인데, 단지 기품(氣稟)<ref>각자가 타고난 정신/신체적 퀄리티를 말한다. '품'은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는 뜻이다.</ref>과 물욕(物欲)에 뒤덮혀 흐려졌을 뿐입니다. 지금 학문(學問)을 하여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아나가는[進修]<ref>'진수'는 주역 건괘 문언전의 '진덕수업(進德修業)'에서 나온 말이다. 주희는 주역본의에서 '진덕'을 마음의 진정성(忠信)을 배양하는 공부로, '수업'을 언행을 가다듬고 단속하는 공부로 풀이했다.</ref> 것은 마치 거울을 갈고닦는[磨鏡]<ref>당시 거울은 청동거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경'이란 유리거울을 헝겁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청동거울을 숯돌 등을 가지고 갈아내는 작업에 가깝다.</ref> 것과 비슷합니다. 거울은 본래 밝지만 먼지와 때[塵垢]에 의해 흐려진 것을 갈고닦는[磨擦] 노력을 들여야만 그 밝음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드러나게 되면 곧 본래의 밝음[本然之明]일 뿐입니다.
曰: “公說甚善. 但此理不比磨鏡之法.”
'''대답: 그대(公)의 설명이 매우 좋다. 다만 이 이치(理)는 거울을 갈고닦는 법[磨鏡之法]으로 비유할 수 없다.
先生略擡身, 露開兩手, 如閃出之狀, 曰: “忽然閃出這光明來, 不待磨而後現, 但人不自察耳. 如孺子將入於井, 不拘君子小人, 皆有怵惕·惻隱之心, 便可見.”
선생이 몸을 약간 일으켜 두 손을 펼쳐 (빛이) 번쩍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이고서 말함: 홀연히 이 광명(光明)이 번쩍 나오는 것이지, 갈고닦기를 기다린 뒤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스스로 (이 광명을) 살피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군자(君子)냐 소인(小人)이냐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드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友仁云: “或問中說‘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而其本體已洞然’, 便是這箇道理.”
'''내가(友仁) 말함: 《대학혹문》 중에 ‘그러므로 제아무리 뒤덮혀 흐려짐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이 빈틈[空隙] 속에서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직전 17:27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ref>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先生頷之, 曰: “於大原處不差, 正好進修.” 友仁(69때).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함: 큰 근원[大原]의 차원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기에[進修] 딱 좋을 때이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9 問: “或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而吾之'가 더 있다.</ref>所以明而新之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又'가 더 있다. 조선고사본처럼 인용해야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非可以私意苟且爲也.’ 私意是說著不得人爲, 苟且是說至善.”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구차한 것을[苟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의(私意)는 인위(人爲)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구차(苟且)는 지극한 선[至善]을 말하는 것입니다.<ref>대학혹문 인용구는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어야 맞겠으나 여기서 질문자가 '구차(苟且)'가 '지선(至善)'을 지시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번역해 두었다. '구차(苟且)'라는 표현은 오늘날 한국어에서 '구차한 살림살이'의 경우처럼 가난하고 변변찮은 모양새를 뜻하지만, 주희 당시에는 '임시변통(makeshift)' 같은 뜻으로 쓰였다. 질문자가 구차(苟且)를 지선으로 오인한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 주석을 보라.</ref>
曰: “才苟且, 如何會到極處!”
'''대답: 조금이라도 구차하면[苟且] 어떻게 지극한 지점[極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賀孫擧程子<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以'가 더 있다.</ref>義理精微之極<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姑以至善目之之語'가 더 있다. 이렇게 인용해야 문장이 현행본 대학혹문에 더 가깝게 된다.</ref>.
'''내가(賀孫) 정자(程子)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義理)’<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정이의 말이다.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원출전은 이정유서 15:183이다. '선이란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우선은[且] '지선'이라고 지목한다.(善者, 義理之精微, 無可得名. 且以至善目之.)' '임시로[姑]'나 '우선은[且]'은 모두 '구차(苟且)'와 같다. 최초의 질문자와 섭하손(두 사람은 동일인일 수도 있다)은 정자가 계속해서 지극한 진리에 '구차하게' 지선(至善)이라고 임시적인 라벨을 붙이고 있다고 하니 대학혹문의 다른 구절에 등장한 '구차(苟且)'라는 표현 역시 지선(至善)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오인한 듯하다.</ref>라는 말을 거론했다.
曰: “大抵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事皆有箇極好處. 今之人, 多是理會得半截, 便道了. 待人看來, 喚做好也得, 喚做不好也得. 自家本不曾識得到, 少刻也會入於老, 也會入於佛, 也會入於申韓之刑名. 止緣初間不理會到十分, 少刻便沒理會那箇是白, 那箇是皂, 那箇是酸, 那箇是鹹. 故大學必使人從致知直截要理會透, 方做得. 不要恁地半間半界, 含含糊糊. 某與人商量一件事, 須是要徹底敎盡. 若有些子未盡處, 如何住得. 若有事到手, 未是處, 須著極力辨別敎是. 且看孟子, 那箇事恁地含糊放過<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去'가 더 있다.</ref>! 有一字不是, 直<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須'가 더 있다.</ref>爭到底. 這是他見得十分極至, 十分透徹, 如何不說得?” 賀孫(62이후).
'''대답: 대체로 지선(至善)은 그저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 100퍼센트 단정하고 딱 맞아서[端正恰好] 조금도 옳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 조금도 (목표에) 이르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이다. 예컨대 임금을 섬김[事君]에 반드시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섬긴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경(敬)이라 하고, 백성을 다스림[治民]에 반드시 요(堯)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인(仁)이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반절[半截]만 이해하고서 다 했다고 말한다. 남이 보고서 판단하기를 좋다고 해도 괜찮고[得] 좋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得]는 식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15:116을 참조하라.<ref>여기서 '득(得)'은 현대중국어 '行(xing)', 영어 'OK'와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나른한 태도를 뜻한다.</ref> 자기 자신의 인식이 본래 (목표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 조금만 지나면 노자(老子)에게 들어갈 수도 있고, 부처[佛]에게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형명학(刑名)에도 들어갈 수 있다.<ref>전국시대 법가, 특히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문을 형명(刑名) 또는 형명(形名)이라고 부른다. 이는 형벌과 관련된 이름은 아니다. 관료 각각에게 부여된 직무의 내용이 명칭(名)이고, 실제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형체(形)이다. 형체와 명칭, 실질과 명칭이 서로 부합하도록 국가기구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형명학'이라는 별칭이 나온 것이다. 풍우란, 중국철학사(上), 1999. P.514-515.</ref> 그저 애초에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어느 것이[那] 희고 어느 것이 검으며,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짠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치지(致知) 단계에서부터 칼로 자른듯[直截]<ref>'직절(直截)'은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확실성, 철저성을 의미한다.</ref> 철저히 이해하도록[理會透] 요구하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어중간하고[半間半界]<ref>'반간불계(半間不界)'와 같다. 철처하지 못하다는 뜻이다.</ref> 웅얼거리듯[含含糊糊]<ref>함호(含糊)는 말소리가 또렷하지 않고 웅얼거린다는 뜻이다.</ref>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남과 무슨 일을 상의할 때에는 반드시 남김없이 철저히 하고자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다면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일이 손에 들어왔을 때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모름지기 극력(極力)으로 변별하여 맞게 만들어야 한다. 또 맹자(孟子)를 보라. (그가) 무슨 일을 그렇게 웅얼웅얼 대충 넘어가던가? 한 글자라도 맞지 않으면 끝까지[到底] 다투었다. 이(렇게 다툰 이유)는 그의 이해가 100퍼센트 지극하고 100퍼센트 투철했기 때문이니, (이러하다면 맹자가) 어찌 논변[說]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f>여기서는 심상하게 '말하다[說]'라고 풀어서는 안 된다. 논변을 너무 좋아한다는 당시의 악평에 대한 맹자의 변론으로 맹자 3B:9를 참조하라.</ref>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0 問: “或問說明德處云: ‘所以應乎事物之間, 莫不各有當然之則.’ 其說至善處, 又云: ‘所以見於日用之間者, 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二處相類, 何以別?”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기를 ‘사물(事物)에 응하는 사이에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혹문에서 지선(至善)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또 이르기를 ‘일상생활[日用] 사이에 나타나는 바에 각각 본래 그러한 일정한 법칙[本然一定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두 부분이 서로 유사한데, 어떻게 구분합니까?<ref>현행본 대학혹문에는 질문자 진순이 인용한 두 문구 가운데 후자만 있다. 전자는 아마도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개정의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ref>
曰: “都一般. 至善只是明德極盡處, 至纖至悉, 無所不盡.” 淳(61·70때).
'''대답: 모두 같은 이야기다. 지선(至善)은 단지 명덕(明德)이 남김없이 지극한 곳[極盡處]일 뿐이니, 지극히 섬세하고 상세하여[至纖至悉] 다하지 않음이 없다.<ref>같은 취지의 발언이 14:114에서도 보이는데 이 역시 진순이 질문하고 기록한 조목이다.</ref>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 17:31 仁甫問: “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다음 인용구에 대한) 인보(仁甫)의 질문: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ref>대학혹문. 17:29를 참조하라.</ref>
曰: “此是程先生說. 至善, 便如今人說極是. 且如說孝, 孟子說‘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此是不孝. 到得會奉養其親, 也似煞强得這箇, 又須著如曾子之養志, 而後爲能養. 這又似好了, 又當如所謂‘先意承志, 諭父母於道', '不遺父母惡名’, 使'國人稱願道‘幸哉有子如此’', 方好.”
'''대답: 이는 정(程) 선생의 설명이다. 지선(至善)은 곧 요즘 사람들이 '극히 옳다[極是]'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효(孝)를 말함에 있어, 맹자(孟子)가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보지 않는다’<ref>맹자 4B:30.</ref>고 한 것, 이것은 불효(不孝)이다. 자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경우는 역시 (앞서 말한) 그것보다는 꽤[煞] 나은[强得] 듯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증자(曾子)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한[養志] 것과 같이 해야만<ref>맹자 4A:19. 아버지의 의지를 살펴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쪽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말한다.</ref> 비로소 봉양을 잘하는 것이다. 이정도로도 좋은 듯하지만, 다시 마땅히 이른바 ‘부모의 뜻을 한발 앞서 헤아려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道)로 인도하며',<ref>예기 제의편. '군자의 효도란 (어버이의) 생각을 한 발 앞서 알아차려 그 뜻을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봉양이나 하는 사람이니 어찌 효도한다고 하겠나?(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安能為孝乎?)</ref>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아',<ref>예기 제의편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자기 행실을 삼가서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으면 잘 보내드렸다고 할 만하다.(父母旣沒,愼行其身,不遺父母惡名,可謂能終矣.)'</ref>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저런 아들이 있어서."라고 말하게'<ref>예기 제의편. '좋은 고기를 익혀서 드리는 것은 효가 아니라 봉양[養]이다. 군자가 말하는 효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아들이 있어서."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효이다.(亨孰膻薌,嘗而薦之,非孝也,養也。君子之所謂孝也者,國人稱愿然曰:『幸哉有子!』如此,所謂孝也已).</ref> 해야만 충분하다 하겠다.
又云: “孝莫大於尊親, 其次能養. 直是到這裏, 方喚做極是處, 方喚做至善處.”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효(孝)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尊親]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잘 봉양하는 것[能養]이다.<ref>예기 제의편. '큰 효도는 존친이요, 그 다음은 욕먹이지 않는 것이요, 그 아래가 잘 봉양하는 것이다.(大孝尊親,其次弗辱,其下能養)'</ref>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극히 옳은 곳[極是處]'이라 하고, 비로소 지선(至善)한 곳이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2 郭德元問: “或問: ‘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此三者, 求之古今人物, 是有甚人相似?”
'''곽덕원(郭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오직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있고, 또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不屑] 자가 있으며, 또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이다.</ref>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가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문구를 약간 축약한 형태이다. 아래 원주에서 인용한 탁록(卓錄) 쪽은 '因'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고 하였습니다. 이 세 부류를 고금(古今)의 인물 가운데서 찾아보면 누구와 비슷합니까?
曰: “如此等類甚多. 自謂能明其德而不屑乎新民者, 如佛·老便是; 不務明其明德, 而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如管仲之徒便是; 略知明德新民, 而不求止於至善者, 如前日所論王通便是<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如此'가 더 있다.</ref>. <卓錄云: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因<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狃'으로 썼다.</ref>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如前日所論王通之事是也.”><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 전체가 없는 대신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선생은 며칠 앞서 왕통론(王通論)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先生前此數日作王通論, 其間有此語.)'</ref> 看他於己分上亦甚修飭, 其論爲治本末, 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狹, 不曾就本原上著功,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始是. 看古之聖賢別無用心, 只這兩者是喫緊處: 明明德,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 正如佛家說, ‘爲此一大事因緣出見於世’, 此亦是聖人一大事也. 千言萬語, 只是說這箇道理. 若還一日不扶持, 便倒了. 聖人只是常欲扶持這箇道理, 敎他撑天柱地.” 文蔚(59이후).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卓録同. 又問: "秦漢以下, 無一人知講學明理, 所以無善治.” 曰: “然.” 因泛論歷代以及本朝太宗眞宗之朝, 可以有爲而不爲. “太宗每日看太平廣記數卷, 若能推此心去講學, 那裏得來? 不過寫字作詩, 君臣之間以此度日而已. 眞宗東封西祀, 糜費巨萬計, 不曾做得一事. 仁宗有意於爲治, 不肯安於小成, 要做極治之事. 只是資質慈仁, 卻不甚通曉用人, 驟進驟退, 終不曾做得一事. 然百姓戴之如父母. 契丹初陵中國, 後來卻服仁宗之德, 也是慈仁之效. 緣它至誠惻怛, 故能動人如此.' 이 내용은 선두 네 글자를 제외하고 127:8과 일치하므로 그쪽을 참조하라. 여기서 번역하지는 않겠다.</ref>
'''대답: “이러한 부류는 매우 많다. 스스로 자신의 (밝은) 덕(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로는 예컨대 불가와 노자[佛·老]가 바로 그렇다.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예를 들어 관중(管仲)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는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ref>584-617. 호는 문중자(文中子).</ref>이 바로 그렇다. <탁(卓)의 기록에는 “또 이 두 가지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작은 성취[小成]에 안주하고 근시안적 이익[近利]을 따라서[因]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의 경우가 그렇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일신의 차원[己分上]에서도 깊이 수양했으며[修飭], 그 다스림의 본말(本末)을 논한 것도 조리가 있었으니, 이 세상[斯世]에 대해 진지하게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스케일[規模]이 얕고 좁아서 일찍이 근본[本原]의 차원에서는 힘을 쓰지[著功]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做不徹] 못한 것이다. 반드시 그 최선의 것[極]<ref>지선(至善)을 말한다.</ref>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만 한다. 가만 보면 옛 성현(聖賢)은 다른데 마음을 씀이 없었고, 그저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ref>만이 긴요한 부분[喫緊處]이었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사욕(私欲)이 없기를 원했고,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든 각각의 사안(事事物物)에 대해 모두 마땅하게 처신하기를 원했다.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했다’<ref>법화경 서품 '제불과 세존이 오직 이 하나의 큰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했다.(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ref>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성인(聖人)의 하나의 큰일[一大事]이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단지 이 도리를 설명할 뿐이다. 만약 하루라도 부지(扶持) 않으면 곧 쓰러져버린다. 성인(聖人)은 그저 언제나 이 도리를 부지하여 하늘과 땅을 지탱하게[撑天柱地] 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33 問: “明德而不能推之以新民, 可謂是自私.”
'''질문: 명덕(明德)을 밝혔으되 그것을 미루어 백성을 새롭게하지[新民] 못한다면, 자기 생각만 한다[自私]<ref>자기 자신만을 위함, 자기 생각만 함,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있음. 주희는 보통 '자사자리(自私自利)'와 같은 형태로 사용하며 주로 불교를 비판할 적에 꺼내는 표현이다. 불교는 자기 일신의 구원만 신경쓸 뿐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취지이다.</ref>고 할 만합니다.
曰: “德旣明, 自然是能新民. 然亦有一種人不如此, 此便是釋·老之學. 此箇道理, 人人有之, 不是自家可專獨之物. 旣是明得此理, 須當推以及人, 使各明其德. 豈可說我自會了, 我自樂之, 不與人共!”
'''대답: 덕(德)이 이미 밝아졌다면 자연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와 노자의 학문이다. 이 도리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미 이 이치를 밝혔다면, 반드시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推以及人] 각자 자기 덕(德)을 밝히게 해야 한다. 어찌 나 혼자 해냈으니 나 혼자만 그것을 즐기고 남과 공유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因說: 曾有學佛者王天順, 與陸子靜辨論云: “我這佛法, 和耳目鼻口髓腦, 皆不愛惜. 要度天下人, 各成佛法, 豈得是自私!”
'''이어서 (내가) 말함: 일전에 불교를 배운 왕천순(王天順)<ref>누군지 확실치 않다. 상산집(象山集) 권 2의 여왕순백(與王順伯) 제 2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왕천순은 왕순백의 이름을 오기한 것일 수 있다.</ref>이 육자정(陸子靜)<ref>육구연이다.</ref>과 변론하며 이르기를 '나의 이 불법(佛法)은 귀·눈·코·입·골수·뇌[耳目鼻口髓腦]까지 모두 다<ref>'和...皆'는 현대 중국어 '連...都'와 같다. '~까지 모두다', '~마저도 모두 다' 정도의 의미이다.</ref> 아끼지 않고 천하 사람들을 제도하여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데 이게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自私]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先生笑曰: “待度得天下人各成佛法, 卻是敎得他各各自私. 陸子靜從初亦學佛, 嘗言: ‘儒佛差處是義利之間.’ 某應曰: ‘此猶是第二著, 只它根本處便不是. 當初釋迦爲太子時, 出遊, 見生老病死苦, 遂厭惡之, 入雪山修行. 從上一念, 便一切作空看, 惟恐割棄之不猛, 屛除之不盡. 吾儒卻不然. 蓋見得無一物不具此理, 無一理可違於物. 佛說萬理俱空, 吾儒說萬理俱實. 從此一差, 方有公私·義利之不同.’ 今學佛者云‘識心見性’, 不知是識何心, 是見何性.” 德明(44이후).
'''선생이 웃으며 말함: 천하 사람들이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도록 제도하겠다는 것은<ref>서두의 '대(待)'는 '욕(欲)'이나 '장요(將要)'와 같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말한다.</ref> 도리어 그들 각자가 자기 생각만 하도록[各各自私] 가르치는 것이다. 육자정(陸子靜) 역시 처음에는 불교를 배웠는데,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차이는 의(義)와 이(利)의 차이이다’고 하였다.<ref>이 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175년 아호에서의 만남, 혹은 1181년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ef> 내가 응답하기를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第二著]이다. 그저 그 근본(根本)부터가 옳지 않다. 당초 석가(釋迦)가 태자(太子)였을 때 성문 밖으로 나가 노닐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설산(雪山)에 들어가 수행하였다.<ref>석가모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을 말한다.</ref> 그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곧 일체를 공(空)으로 보게 되었고, 오직 그것을<ref>본질적으로 허망한 이 세상 일체를</ref> 잘라내어 버림[割棄]이 과감하지 못할까, 제거함[屛除]이 완벽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ref>불교의 출세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세간의 일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ref> 우리 유학[吾儒]은 도리어 그렇지 않다. 대개 한 물건도 이 이치(理)를 갖추지 않음이 없고, 한 이치도 사물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이치[萬理]가 모두 헛되다[空]고 말하고, 우리 유학은 모든 이치가 모두 진실[實]하다고 말한다.<ref>'실(實)'을 '진실하다'고 번역하긴 했지만, 여기서 '공'은 내용물이 빈 그릇을, '실'은 내용물이 가득찬 그릇을 연상시키고 있음에 주의하라. 주희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는 본질이자 당위(곧,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가 '진실되다'라고 말할 때는 불교에서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그러한 본질이자 당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ref> 이 하나의 차이로부터 비로소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의 차이가 있게 된다.’ 지금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識心見性]’고 말하지만, 대체 무슨 마음을 알고 무슨 성품을 본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o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 知止而後有定以下一段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17:34 問: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머무를 곳을 알 수 있으면[能知所止] 곧 마음[方寸] 속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 모두 확정불변한 이치[定理]가 있게 된다.’에 관한 질문.<ref>대학혹문. 14:126과 163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고한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져서 각각의 경우에 객관적인 도덕률이 확고하게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知止도 인지, 有定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ref>
曰: “定·靜·安三項若相似, 說出來煞不同. 有定, 是就事理上說, 言知得到時, 見事物上各各有箇合當底道理. 靜, 只就心上說.”
'''대답: 정(定)·정(靜)·안(安)<ref>대학 본문에서 제시한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득(得) 다섯 단계 가운데 세 꼭지를 말한 것이다. 14:157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마치 추운 자가 옷을 갈망하고 굶주린 자가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너무 확정적이라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ref> 세 항목은 비슷한 듯하지만 설명하면 자못 다르다. 확정됨(定)이 있다는 것은 사리(事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앎이 지극해졌을 때 사물마다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도리가 있음을 (확실하게) 본다는 말이다. 고요함(靜)은 (같은 내용을)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뿐이다.<ref>14:129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
問: “‘無所擇於地而安’, 莫是‘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否?”
'''질문: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히 안정된다’<ref>대학혹문</ref>는 것은 아마도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한대로 행하고,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한대로 행한다’<ref>중용 제 14장. '소(素)'는 '현재(見在)'의 뜻이다.</ref>는 것 아닙니까?”
曰: “這段須看意思接續處. 如‘能得’上面帶箇‘慮’字, ‘能慮’上面帶箇‘安’字, ‘能安’上面帶箇‘靜’字, ‘能靜’上面帶箇‘定’字, ‘有定’上面帶箇‘知止’字, 意思都接續. 旣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靜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邊也安, 在富貴也安, 在貧賤也安, 在患難也安.<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한 번 생각해 보라(看如何? 公且看,)'가 더 있다.</ref> 不見事理底人, 有一件事, 如此區處不得, 恁地區處又不得, 這如何會有定! 才不定, 則心下便營營皇皇, 心下才恁地, 又安頓在那裏得! 看在何處, 只是不安.” 賀孫(62이후).
'''대답: 이 단락은 모름지기 의미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능득(能得)’ 위에는 ‘려(慮)’ 자가 있고, ‘능려(能慮)’ 위에는 ‘안(安)’ 자가 있으며, ‘능안(能安)’ 위에는 ‘정(靜)’ 자가 있고, ‘능정(能靜)’ 위에는 ‘정(定)’ 자가 있으며, ‘유정(有定)’ 위에는 ‘지지(知止)’ 자가 있으니, 뜻이 모두 이어진다. 이미 사물에 확고불변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보고서 이 마음이 이렇게 고요해졌다면[寧靜], 어떤[看]<ref>의문구 앞에 나오는 '간(看)'은 '그 어떤... 막론하고(不管, 儘管)'으로 풀이한다. 14:143, 157을 참조하라.</ref> 상황에 처했느냐를 막론하고, 여기에 있어도 편안하고[安], 저기에 있어도 편안하며, 부귀(富貴)에 있어도 편안하고, 빈천(貧賤)에 있어도 편안하며, 환난(患難)에 있어도 편안하다.<ref>부귀, 빈천, 환난은 질문자가 인용한 중용 제 14장에서 들고 있는 예시들이다.</ref> 사리(事理)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안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고 저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으니, 이런 경우 어떻게 확고함(定)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확고(定)하지 못하면 마음속이 곧바로 안절부절 불안하니[營營皇皇], 마음속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면 또 어디에 (자신을) 편안히 둘[安頓] 수 있겠는가! 어디에[看] 있든 그저 불안할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5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硏幾.”
'''‘사려할 수 있으면[能慮] 사안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여 깊음을 지극히하고 기미를 갈고닦는다[隨事觀理, 極深硏幾].’<ref>대학혹문. '극심'과 '연기'는 본래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14:146을 참조하라.</ref>에 관한 질문.
曰: “到這處又更須審一審. ‘慮’字看來更重似‘思’字. 聖人下得言語恁地鎭重, 恁地重三疊四, 不若今人只說一下便了, 此聖人所以爲聖人.” 賀孫(62이후).
'''대답: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 번 신중히 살펴보아야[審]<ref>'심(審)'은 극심연기의 '연(硏)'을 풀이한 말이다.</ref> 한다. ‘려(慮)’ 자는 내 생각에 ‘사(思)’ 자보다[似]<ref>여기서 '사(似)'는 '어(於)'와 같다.</ref> 더 무겁다. 성인이 표현을 고른 것이 이렇게 진중(鎭重)하고 이렇게 거듭 반복되니[重三疊四], 요즘 사람들이 그저 한 번 말하고 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래서 성인은 성인인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6 安卿問: “知止是始, 能得是終. 或問言: ‘非有等級之相懸.’ 何也?”
'''안경(安卿)의 질문: 지지(知止)는 시작이고 능득(能得)은 끝입니다.<ref>이에 대한 설명은 17:34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대학혹문》에서는 (양자간에) ‘등급(等級)이 서로 현격히 벌어져 있지 않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이 말을 풀어써두어서 표현이 조금 다르다. '공자의 지우학(志于學)부터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 맹자의 선인(善人), 신인(信人)으로부터 성인(聖人), 신인(神人)까지가 실로 등급이 현격히 벌어져 있어서 평생토록 거쳐가는 순서인 것과는 같지 않다.(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ref>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也不是無等級,<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여섯 글자가 없다.</ref> 中間許多只是小階級, 無那大階級.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便是大階級, 步卻闊. 知止至能得, 只如志學至立相似, 立至不惑相似. 定·靜·安, 皆相類, 只是中間細分別恁地.”
'''대답: 역시 등급(等級)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의 많은 것들은 단지 작은 계단[階級]들일 뿐 그렇게 큰 계단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ref>논어 2:4에서 공자가 자신이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ref>부터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ref>공자가 7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 경지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많은 것들은 곧 큰 계단이니 보폭이 오히려 넓다.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부터 스스로 섰다[立]<ref>공자가 3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고, 스스로 섰다[立]부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不惑]<ref>40세의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다. 정(定)·정(靜)·안(安)은 모두 비슷한 부류요, 단지 중간에 저처럼 세밀하게 구별했을 뿐이다.
問: “到能得處是學之大成, 抑後面更有工夫?”
'''질문: 능득(能得)의 경지에 이르면 배움에 대성한[學之大成] 것입니까, 아니면 뒤에 공부가 더 있습니까?
曰: “在己已盡了,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亦只是自此推去.” 㝢(61이후).
'''대답: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는[在己] 이미 다 했고,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하지만, (후자는) 역시 그저 여기서<ref>자기 자신의 차원이다.</ref> 미루어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ref>이 부분은 14:152와 흡사하다.</ref>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 古之欲明明德於天下一段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17:37 問: “或問‘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 是能得已包齊家治國說了. 前晩何故又云‘能得後,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질문: 《대학혹문》에서 ‘성의(誠意)에서 평천하(平天下)까지는 저 지선(至善)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ref>대학혹문.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이란 명명덕의 일이요 제가, 치국, 평천하란 신민의 일이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요, 성의부터 평천하까지는 저 지선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ref>라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이 이미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까지 포함하여 설명한 것입니다.<ref>전통시대 유학이 커버하는 영역을 크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을 때, 인용된 대학혹문의 문구대로라면 두 영역이 수기로 일원화된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f>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어찌하여 또 ‘능득(能得)한 뒤에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ref>치인의 영역이 수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제 저녁의 대화란 17:36을 말한다. 17:34 또한 참조하라.</ref>
曰: “以修身言之, 都已盡了. 但以明明德言之, 在己無所不盡, 萬物之理亦無所不盡. 如'至誠惟能盡性', 只盡性時萬物之理都無不盡了. 故盡其性, 便盡人之性; 盡人之性, 便盡物之性.” 㝢<ref>조선고사본에서는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㝢同)'이다.</ref>(61이후).
'''대답: 수신(修身)으로 말하자면 이미 다 된 것이다.<ref>대학의 '능득'이란 문구는 수기와 치인 가운데 수기의 측면에 해당한다는 말이다.</ref> 단,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도 남김 없이 다 하고 만물의 이치 또한 남김 없이 다 하는 것이다.<ref>명덕을 밝히는 일을 수기에 국한시켜 보지 말고, 수기와 치인을 포함하는 상위의 범주로 보라는 말이다.</ref> 예컨대 '오직 지극한 진정성(誠)이라야 (자신의) 본성(性)을 온전히 다할 수 있고'<ref>중용 제 22장의 한 구문을 축약한 것이다.</ref>, 오직 (자신의) 본성(性)을 다할 때라야 만물의 이치도 남김 없이 다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性)을 다하면 곧 남의 본성(性)을 다하게 되고, 남의 본성(性)을 다하면 곧 사물의 본성(性)을 다하게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7:38 蜚卿言: “或問云: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伯羽謂' 세 자가 더 있다. '비경(蜚卿)'이 동백우(童伯羽)의 자(字)이므로 한 사람이 연이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ref> 明德之功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內, 或未盡化, 況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德乎?”
'''비경(蜚卿)이 말함: 《대학혹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의지를 참되게 하고[誠其意],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正其心], 각자 자신의 몸을 갈고닦고[修其身], 각자 자신의 어버이를 친애하며[親其親], 각자 자신의 어른을 공경하여[長其長], 천하가 평정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명덕(明德)의 공효(功)가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규문(閨門) 안에서 혹 다 교화시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거늘, 하물며 커다란 천하 전체가 요순(堯舜)의 교화에 순복하여 각자 자신의 덕(德)을 밝힐 수 있으리라 말하시는 것입니까?
曰: “大學‘明明德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是有如此規模, 卻是自家本來合如此, 不如此便是欠了他底.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己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槪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說‘比屋可封’, 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不如此不得. 到得做不去處, 卻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卻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內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爲聖賢之學.” 道夫(60이후).
'''대답: 《대학》의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는 것은 일단은 그 규모(規模)<ref>대강의 윤곽선, 원대한 스케일 같은 의미이다.</ref>가 이러하다고 설명한 것뿐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은 본래부터 응당 이와 같아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곧 (본래의) 자기 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윤(伊尹)은 평범한 백성 한 사람이라도 (요순과 같은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어서 도랑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했다.<ref>맹자 5A:7.</ref> (그러나) 이윤(伊尹)도 역시 그저 대체로 이렇게 하고자 했다는 것 뿐이니, 또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예컨대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만하다[比屋可封]’<ref>한서 왕망전(王莽傳). '명성한 세상에는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많으므로, 요순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明聖之世,國多賢人,故唐虞之時,可比屋而封.)'</ref>는 것 역시 한두 집 정도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의 규모(規模)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며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 뿐이다. (세웠던 스케일에 걸맞게) 해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f>'做不去'는 '할 수 없다', '做得去'는 '할 수 있다'이다.</ref> 규모(規模)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반면<ref>'著'은 '須著'과 같다. '반드시'.</ref> 공부(工夫)는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가야 한다. 규모(規模)와 단계별 순서[次第]도 없이 그저 지엽적인 것들[細碎處]에만 힘을 쓰면 곧바로 (오늘날) 세간의 공리(功利)를 따지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규모(規模)는 있지만 세밀한 공부(工夫)가 없다면 또 한갓 빈 규모(空規模)이고 말 뿐이다. 밖으로는 규모(規模)의 크기를 지극히하고 안으로는 미루어 (구체적인) 사사물물(事事物物)의 부분에 이르게 하여 그 어느 방면으로도 공부(工夫)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聖賢)의 배움이 성현의 배움이 되는 까닭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39 問或問“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
'''《대학혹문》의 '마음의 신명[心之神明]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ref>대학혹문. '저 지(知) 같은 경우는 마음의 신명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若夫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신명의 신(神)은 우리 의식의 완성도가 높음을, 명(明)은 의식의 활동성을 가리킨다. 재(宰)는 컨트롤한다는 의미이다. 묘(妙)를 운용하다로 풀이한 것은 17:40을 참조하라.</ref>에 대한 질문.
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대답: 신(神)은 그렇게 정밀하고 아름답다[精彩]는 것이요, 명(明)은 그렇게 밝게 빛난다는[光明] 것이다.
又曰: “心無事時, 都不見; 到得應事接物, 便在這裏; 應事了, 又不見: 恁地神出鬼沒!”
'''다시 말함: 마음은 일이 없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도 응사접물(應事接物)하게 되면 곧 이 안에[在這裏]<ref>마치 주인의 부주의로 인해 풀려나 달아나버린 가축처럼,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이 안에 없는' 상태가 바로 '방심(放心)'의 상태이다.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면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여 집중시킬 수 있는데 이렇게 집중된 상태를 어류에서는 자주 '여기 있다(在這裏)'고 표현한다.</ref> 있으며, 일에 대한 응대를 마치고 나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니, 이렇게나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
又曰: “理是定在這裏, 心便是運用這理底, 須是知得到. 知若不到, 欲爲善也未肯便與你爲善; 欲不爲惡, 也未肯便不與你爲惡. 知得到了, 直是如飢渴之於飮食. 而今不讀書時, 也須收斂身心敎在這裏, 乃程夫子所謂敬也. ‘整齊嚴肅’, 雖只是恁地, 須是下工夫, 方見得.”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이치(理)는 이 안에<ref>자신의 내면을 말한다.</ref> 확고하게 있고, 마음[心]은 바로 이 이치(理)를 운용(運用)하는 주체이니, 반드시 앎[知]이 지극해져야 한다. 만약 앎[知]이 지극해지지 못하면 선(善)을 행하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선(善)을 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악(惡)을 행하지 않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악(惡)을 행하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앎[知]이 지극해지고나면 바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마시고 먹으려는 것[飢渴之於飮食]과 같이 (선을 행하고 불선을 피하게) 된다. 지금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여[收斂身心] 여기에 있도록[在這裏]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부자(程夫子)<ref>정씨 형제를 말한다.</ref>께서 말씀하신 경(敬)이다.<ref>경에 대한 설명은 17:1부터 18까지에 걸쳐 자세히 적혀있으니 참조하라.</ref> ‘정제엄숙(整齊嚴肅)’이 비록 이런 것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실제로 힘써 해보아야만[工夫]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0 德元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或問"知妙衆理而宰萬物者也",)'라고 적혀있다.</ref>: “何謂‘妙衆理’?”
'''덕원(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의)‘묘중리(妙衆理)’는 무슨 말입니까?<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大凡道理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或錄此下云: “便只是理. 才知得,”><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便只是知得我底道理, 非是以我之知去知彼道理也. 道理固本有, 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或錄云: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夏熱冬寒,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所以謂之‘妙衆理’, 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或錄云: “蓋知得此理也.”>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대답: 무릇 도리(道理)는 모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앎[知]이란 것은 <혹자의 기록에서는 이 다음에 이렇게 말함: “그저 이치(理)일 뿐이다. 알게 되면”> 곧 나에게 있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지, 나의 앎[知]을 가지고 저쪽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ref>주희는 '지(知)'를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하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첫 번째 '앎'과 두 번째 '알게 되는'과 네 번째 '알게 되는'은 어떤 것을 알게 되는 행위(to know)를 뜻하고 세 번째 '나의 앎'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을 뜻한다.</ref> 도리는 물론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앎[知]을 사용해야만 비로소 틔워낼 수 있다.<ref>여기서의 앎은 의식(consciousness)이나 인지(cognition)에 가깝다.</ref> 만약 앎[知]이 없었다면 도리가 무슨 수로 드러나겠는가? <혹자의 기록: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가지고 있던 도리이다. 앎[知]이 없으면 도(道)를 놓아둘 곳이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그런 다음에야 도리가 정박할 곳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임금은 인(仁)하고 신하는 공경(敬)하는 것을, 앎[知]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한다[妙衆理]’고 했으니, 여러 이치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운용(運用)’이라는 글자는 병폐가 있으므로 그저 ‘묘(妙)’ 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혹자의 기록: “대개 이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又問: “知與思, 於身最切緊.”
'''재질문: 앎[知]과 생각[思]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긴요합니다.
曰: “然. 二者只是一事. 知如手, 思是使那手去做事, 思所以用夫知也.” 僩(69이후).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뒤에 총 196자의 긴 주석이 달려있는데, 본 조목과 비교하면 첫 질문은 약간 다르고 주희의 대답 부분은 동일하며, 재질문과 재대답이 없는 형태이다. 첫 질문만 번역하고 주희의 대답부분 번역은 생략한다. '혹자의 기록. 곽형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묘중리'는 무슨 말입니까? 혹시 여러 이치의 오묘한 신비를 탐색하여 주재자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或錄云:郭兄問: "或問'妙衆理而宰萬物者也', 何以謂之妙衆理? 豈非以知能探賾衆理之妙, 而爲之主宰乎?", 曰: "大凡道理, 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便只是理. 才知得, 便是自知得我之道理, 非是我以知去知那道理也. 道理固本有, 須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冬寒夏熱,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所以謂之妙萬理, 如云能運用萬理. 只是運用字又有病, 故只下得个妙字, 蓋知得此理也.")</ref>
'''대답: 그렇다. 그 둘은 하나일 뿐이다. 앎[知]은 손과 같고, 생각[思]은 저 손을 부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니, 생각[思]이란 저 앎[知]을 사용하는 것이다.<ref>여기서의 '앎'은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 혹은 의식(consciousness)에 가깝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1 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다음에 '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이 있다. 해당 부분은 대학혹문의 직접인용이다. 17:39를 보라.</ref>“知如何宰物?”
'''질문: 앎[知]이 어떻게 만물을 주재(宰)합니까?<ref>17:39와 40을 참조하라.</ref>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是知覺.” 道夫(60이후).
'''대답: 지각(知覺)<ref>지각(知覺)은 사태의 패턴을 알아차리고 시비를 구분하는 등 인지적 활동 전반을 말한다. 주희는 심지어 이나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까지도 지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ref>이 없으면 만물을 재제(宰制)<ref>힘을 행사하여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표현으로 '컨트롤하다' 정도의 뜻이다.</ref>할 수 없다. 만물을 재제(宰制)하려면 역시 지각(知覺)해야 한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2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주석으로 '知者妙衆理而宰萬物'가 더 적혀있다.</ref>: “‘宰萬物’, 是‘主宰’之‘宰’, ‘宰制’之‘宰’?”<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부분 전체가 주석처리되어있고, 이어서 역시 주석으로 '答'자가 적혀있다.</ref>
'''누군가의 질문: ‘재만물(宰萬物)’은 ‘주재(主宰)’의 ‘재(宰)’입니까, ‘재제(宰制)’의 ‘재(宰)’입니까?”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대답: 주(主)가 바로 재(宰)이고, 재(宰)가 바로 제(制)이다.<ref>주(主)는 무언가를 소유한 주인, 재(宰)는 일을 통괄하는 매니져, 제(制)는 컨트롤의 뜻이다. 결국 세 글자 모두 같은 실상을 지시하는 말이다.</ref>
又問: “孟子集注言: ‘心者, 具衆理而應萬事.’ 此言‘妙衆理而宰萬物’, 如何?”
'''재질문: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는 ‘마음이란 여러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ref>대학혹문을 말한다.</ref>서는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妙’字便稍精彩, 但只是不甚穩當, ‘具’字便平穩.” 履孫(65때).
'''대답: ‘묘(妙)’ 자는 조금 정채(精彩)롭긴 하지만 그다지 온당(穩當)하진 못하고, ‘구(具)’ 자는 평온(平穩)하다.<ref>'묘'는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해낸다는 인상이 있다. 그와 비교하면 '구'는 훨씬 수수하고 무엇보다도 정적이다.</ref>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43 郭兄問“莫不有以知夫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68자가 더 있다. '當然之則, 如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 臣何故用敬, 父何故用慈, 子何故用孝. 畢竟未曉, 敢以君何故用仁問先生, 伏望敎誨, 俾知所以然之故' 번역은 번역문의 주석쪽을 참조하라.</ref>”
'''곽형(郭兄)이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과 그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其所當然之則]을 알지 못함이 없다”<ref>이치(理)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는 어떤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한다. 예컨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은 우리가 이런저런 상황에 처하였을 때 준수해야 마땅한 법칙을 말한다. 예컨대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법칙이다. 현행본 대학혹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천하의 사물에는 반드시 각자 그렇게 되는 까닭과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이다.(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또, 혹문의 전 5장 부분에서도 '다른 수 없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점과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고 적고 있다.</ref>에 대해 질문함.<ref>조선고사본에 적힌 68자를 이어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란 임금의 인(仁),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비의 자(慈)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이란 임금은 어째서 인(仁)해야 하는지, 신하는 어째서 경(敬)해야 하는지,아비는 어째서 자(慈)해야 하는지, 아들은 어째서 효(孝)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끝내 깨치지 못하겠으니, 감히 '임금은 어째서 인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선생님께 묻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게 해주십시오.</ref>
曰: “所以然之故, 卽是更上面一層. 如君之所以仁, 蓋君是箇主腦, 人民土地皆屬它管, 它自是用仁愛. 試不仁愛看, 便行不得.<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자연히 이렇게 하게 된다(自然用如此).'</ref> 非是說<ref>조선고사본에서는 '是說'이 '說是'로 적혀있다.</ref>爲君了, 不得已用<ref>조선고사본에서는 '以'</ref>仁愛<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行之'</ref>, 自是理合如此. 試以一家論之: 爲家長者便用愛一家之人, 惜一家之物, 自是理合如此, 若天使之然. 每常思量著, 極好笑, 自那原頭來便如此了.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蓋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 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它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爲哉! 且以仁言之: 只天地生這物時便有箇仁, 它只知生而已. 從他原頭下來, 自然有箇春夏秋冬,<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四象'.</ref> 金木水火土.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此四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이 없다.</ref>故賦於人物, 便有仁義禮智之性.<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自它原頭處便如此了'</ref> 仁<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則'</ref>屬春, 屬木. 且看春間天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天地'가 없다.</ref>發生, 藹然和氣, 如草木萌芽, 初間僅一針許, 少間漸漸生長<ref>조선고사본에서는 '長'을 '發'로 적었다.</ref>, 以至枝葉花實, 變化萬狀, 便可見他生生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生之'가 없다.</ref>意. 非仁愛, 何以如此. 緣他本原處有箇仁愛溫和之理如此, 所以發之於用, 自然慈祥惻隱. 孟子說‘惻隱之端’, 惻隱又與慈仁不同, 惻隱是傷痛之切. 蓋仁, 本只有慈愛, 緣見孺子入井, 所以傷痛之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也'</ref>. 義屬金, 是天地自然有箇淸峻剛烈之氣. 所以人稟得, 自然有裁制, 便自然有羞惡之心. 禮智皆然. 蓋自本原而已然, 非旋安排敎如此也. 昔龜山問一學者: ‘當見孺子入井時, 其心怵惕·惻隱, 何故如此?’ 學者曰: ‘自然如此.’ 龜山曰: ‘豈可只說自然如此了便休? 須是知其所自來, 則仁不遠矣.’ 龜山此語極好. 又<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引'</ref>或人問龜山曰: ‘“以先知覺後知”, 知·覺如何分?’ 龜山曰: ‘知是知此事, 覺是覺此理.’ 且如知得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是知此事也; 又知得君之所以仁, 臣之所以敬, 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是覺此理也.” 僩(69이후).
'''대답: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란 다시 한 단계 더 위의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은 임금은 두뇌[主腦]여서 인민과 토지가 모두 그의 관할이니 그는 자연히 인애(仁愛)하게 된다. 어디 한번 (임금이) 인애(仁愛)하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즉시 말이 안 된다[行不得].<ref>'행부득(行不得)'은 근본적인 모순이 있어 성립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임금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인데 사람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ref> 임금이 되고 나서 부득이하게 인애(仁愛)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치상 당연히 이렇다는 말이다. 어디 한번 한 집안으로 논해보자. 가장(家長)이 된 자는 곧 온 집안 사람을 사랑하고 온 집안 물건을 아끼게 되니, 이치상 당연히 그렇게 되어 마치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우스우니, 저 근원[原頭]에서부터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또, 아버지가 자애롭게 되는 까닭과 아들이 효도하게 되는 까닭의 경우는, 대개 부자(父子)란 본래 같은 하나의 기(氣)인데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 뿐이므로,<ref>기는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자식의 신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기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양측은 동질의 물질을 두 장소에 나누어둔 것 뿐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물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은 것과 같다.</ref>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지는[恩愛相屬]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중대한 인간관계의 범주[大倫]<ref>예컨대 오륜(五倫) 같은 것이다.</ref>들이 모두 그러하니, 모두 천리(天理)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어찌 억지로 노력하는 요소가 끼어들 틈이 있겠나? 또, 인(仁)으로 말해보자면, 천지(天地)가 이 사물들을 낳으면서 인(仁)이 있게 되니, 그것은<ref>천지를 말한다.</ref> 단지 낳을[生] 줄만 알 뿐이다. 그 근원[原頭]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연히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있게 된다. <먼저 음양(陰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있고 나서 이 네 가지가 있게 된다.><ref>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이 '네 가지'는 춘하추동이다. 다만 조선고사본쪽을 따르자면 이 네 가지는 사상(四象)이다. 사상은 음양이 한 차례 더 분화한 형태, 곧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말한다.</ref> 그러므로 (그것들이) 사람과 사물(人物)에게 부여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性)이 있게 된다. 인(仁)은 봄에 속하고 목(木)에 속한다.<ref>17:19, 6:45를 참조하라.</ref> 또, 봄철에 천지가 만물을 발생시키고 온화한 기운이 가득한 것[藹然和氣]을 보라. 예컨대 초목의 싹[萌芽]이 처음에는 겨우 바늘 하나 크기였다가 이윽고 점점 생장하여 가지, 잎, 꽃, 열매에 이르도록 변화만상(變化萬狀)하니, 이에 그것의<ref>천지.</ref> 낳고 낳는[生生] 의지를 볼 수 있다. (천지의) 인애(仁愛)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것의 본원(本原)에 인애온화(仁愛溫和)의 이치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어 작용할 적에 자연히 자애롭고 측은하다[慈祥惻隱]. 맹자(孟子)가 ‘측은(惻隱)의 단서[端]’<ref>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말한다.</ref>를 말하였는데, 측은(惻隱)은 또 자인(慈仁)과 다르니, 측은(惻隱)은 상심하고 애통함[傷痛]이 간절한 것이다. 대개 인(仁)은 본래 자애(慈愛)만 있을 뿐이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상심하고 애통함이 간절한 것이다. 의(義)는 금(金)에 속하니, 천지에는 자연히 맑고 준엄하며 굳세고 맹렬한 기운[淸峻剛烈之氣]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부여받으면 자연히 재제(裁制)<ref>선을 긋고 잘라내고 절제하고 통제하는 행위.</ref>함이 있게 되고, 자연히 수오지심(羞惡之心)<ref>불명예를 수치스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다.</ref>이 있게 된다. 예(禮)와 지(智)의 경우도 모두 그러하다. 대개 본원(本原)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지, 임의로[旋]<ref>'旋'은 멋대로, 임의로(隨意).</ref> (의도를 가지고) 안배하여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옛날 구산(龜山)<ref>이정의 제자 양시.</ref>이 어떤 배우는 이에게 묻기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이 깜짝 놀라고 측은한데[怵惕惻隱], 어째서 이러한가?’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자연히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구산(龜山)이 말하기를 ‘어찌 그냥 자연히 그렇다고만 말하고 말 수 있는가? 반드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所自來]를 알아야 하니, (그렇게 하면) 인(仁)에서 멀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ref>구산집(龜山集) 권 11, 어록 2. '(선생이) 말함: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에게 반드시 측은지심이 드는데, 자기의 고통이 아닌데도 빠진자를 위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조의 대답: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이) 말함: 어찌 자연스럽게 그러하겠나? 이 이치를 몸소 탐구하여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 인의 도리가 멀지 않게 될 것이다." (曰: "孺子將入於井, 而人見之者, 必有惻隠之心, 疾痛非在己也, 而爲之疾痛, 何也?" 似祖曰: "出於自然, 不可已也." 曰: "安得自然如此? 若體究此理, 知其所從來, 則仁之道不遠矣.")' 주희의 인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ref> 구산의 이 말이 대단히 좋다. 또 어떤 사람이 구산에게 묻기를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친다”에서 앎(知)과 깨우침(覺)은 무슨 차이입니까?’라고 하니, 구산이 말하기를 ‘지(知)는 이 일[事]을 안다는 것이고, 각(覺)은 이 이치[理]를 깨닫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ref>양시가 아니라 이정의 말이다. 이정수언(二程粹言) 권 1에 보인다. 해당 텍스트는 양시가 이정의 어록을 문어체로 바꾼 작품이다. 이때문에 양시의 말인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누군가의 질문: "석씨는 '말 한마디에 깨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선생: "왜 꼭 부처인가? 맹자도 그렇게 말했다.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치고, 먼저 깨친 자가 뒤에 깨친 자를 깨우친다. 앎은 이 일을 안다는 것이고 깨달음은 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或問:釋氏有言下覺,如何? 子曰:何必浮屠氏? 孟子言之矣. 以先知覺後知,以先覺覺後覺. 知者,知此事也. 覺者,覺此理也.)'</ref> 예컨대 임금의 인(仁)과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버지의 자(慈)를 아는 것은 이 일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 신하가 경(敬)하게 되는 까닭, 아버지가 자(慈)하게 되는 까닭, 아들이 효(孝)하게 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4 或問“格物”章本有“所以然之故”.
'''대학혹문의 ‘격물(格物)’ 장(章)에 원래는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라는 표현이 있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기로, 천도가 작동하여 (만물을) 만들어내고 길러냄에, 소리와 색과 모양을 가지고서 천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물(物)이다. 물이 있고 나면, 이 물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까닭에는 각각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어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받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曰: "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ref>
曰: “後來看得, 且要見得‘所當然’是要切處. 若果見得不容已處, 則自可黙會矣.”
'''(이에 대한 선생의) 대답: 나중에 보니, 우선은 ‘그렇게 해야 마땅한 바[所當然]’를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고 절실[要切]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정말로 그만둘 수 없다는[不容已] 측면<ref>'소당연'을 말한다.</ref>을 보게 된다면 저절로 묵묵히 이해할[默會]<ref>묵묵히 이해함은 소리로 발성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개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의 차원에서 절감하여 세상과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함을 말한다.</ref> 수 있게 될 것이다.
===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 단락 ===
* 治國平天下者諸侯之事一段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ref>치국은 제후의 일이고 평천하는 천자의 일이다. 대학혹문 원문에서는 '천자와 제후의 일(天子諸侯之事)'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천자 부분이 생략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ref> 단락
* 17:45 問: “南軒謂: ‘爲己者, 無所爲而然也.’”
'''질문: 남헌(南軒)<ref>장식(張栻)</ref>이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ref>논어 14:25.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목표로 배움에 종사한다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전자가 위기지학, 후자가 위인지학이다.</ref>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也].’<ref> 남헌집 권14. 맹자강의서(孟子講義序). '배우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에 깊이 마음을 두어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려 한다면, 내 생각에 의(義)와 이(利)의 분별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 위하는 바 없이 그러함이 (바로 중용에서 말한) 천명(命)이 그치지 않는 이유이고, 본성(性)이 치우치지 않는 이유이며, 가르침(敎)이 무궁한 이유이다. 무릇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리 되는 것들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요 천리(天理)가 간직된 바가 아니니, 이것이 바로 의와 이의 구분이다.(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爲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爲而然也. 無所爲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敎之所以無窮也. 凡有所爲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 해당 부분은 주희가 대학혹문에서 직접인용하고 있다.</ref>라고 했습니다.
曰: “只是見得天下事皆我所合當爲而爲之, 非有所因而爲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之'를 '也'로 적었다.</ref>. 然所謂天下之事皆我之所當爲者, 只恁地强信不得. 須是學到那田地, 經歷磨鍊多後, 方信得過.” 道夫(60이후).
'''대답: 단지 천하의 일이 모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보았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ref>통상적인 논어 해석에서 벗어나서 '자기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을 위인지학으로,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을 위기지학이라고 본 것이다. 대학혹문 경 1장의 14절에서는 치국과 평천하는 모두 천자나 제후쯤 되는 사람들의 일인데 평범한 사대부가 대학을 읽으며 치국 평천하를 꿈꾸는 것은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위인지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군자란 자신이 모시는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어 백성들에게 요순의 은택을 입히려고 하므로 치국 평천하가 모두 군자의 '직분'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이가 대학의 치국 평천하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직분 내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므로 '위기지학'이 된다. 관련하여 어류 15:156을 보라.</ref> 그러나 이른바 천하의 일이 모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은, 그저 그렇게 억지로 믿는[强信] 것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배워서 저 경지[田地]에 도달하여 많은 경험과 단련[經歷磨鍊]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확실히 믿어지게 된다[信得過].<ref>'得過'의 '득'은 가능성을, '과'는 방향을 나타내는 보어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6 問爲己.
'''위기(爲己)에 대해 묻다.<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這須要自看, 逐日之間, 小事大事, 只是道我合當做, 便如此做, 這便是無所爲. 且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才說要人知, 便是有所爲. 如世上人才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爲人之甚者.” 賀孫(62이후).
'''대답: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보아야 하니, 매일매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저 '나는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다. 예컨대 글을 읽을 때, 그저 '나는 이렇게 (이걸)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자신을 신경써야[理會] 한다'<ref>'리회(理會)'는 종종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살피고 헤아리는 행위를 말한다. 8:91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이 된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이 글을 읽자마자 (자기가) 읽은 것을 활용하여[安排] 완전히[好]<ref>'好'는 이어지는 동작의 완성도가 높음을 나타낸다.</ref> 시문(時文)<ref>과거시험답안.</ref>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남을 위함[爲人]이 심한 경우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7 “‘爲己者, 無所爲而然.’ 無所爲, 只是見得自家合當做, 不是要人道好. 如甲兵·錢穀·籩豆·有司, 到當自家理會便理會, 不是爲別人了理會. 如割股·廬墓, 一則是不忍其親之病, 一則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爲己.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爲人.”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ref>장식의 말. 17:45를 보라.</ref> 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을) 마땅히 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이지, 남들이 '좋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갑병(甲兵)<ref>군무를 말한다.</ref>·전곡(錢穀)<ref>재무를 말한다.</ref>·변두(籩豆)<ref>제사와 의전을 말한다.</ref>·유사(有司)<ref>그밖의 모든 실무를 말한다.</ref>와 같이, 자기 자신이 마땅히 처리[理會]<ref>'리회(理會)'의 번역에 관해서는 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해야 할 때가 되면 곧 처리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할고(割股)<ref>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내 병든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효행의 케이스로 종종 거론된다.</ref>나 여묘(廬墓)<ref>부모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사는 행위. 역시 효행의 일종으로 거론된다.</ref> 같은 것은, 하나는 그 어버이의 병듬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행위이다. 만약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곧 남을 위하는[爲人] 행위이다.<ref> 이 부분은 대학혹문의 특정 구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대저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천하의 사무를 보기를 (모두) 마땅히 해야 하는 자신의 사무로 여기고 수행한다면 갑병, 전곡, 변두, 유사의 업무조차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겠구나 하여 수행한다면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내고 여묘살이하고 망가진 수레와 파리한 말을 타는 것도 모두 남을 위하는[爲人] 것일 뿐이다.(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馬, 亦爲人耳.)'</ref>
器遠問: “子房以家世相韓故, 從少年結士, 欲爲韓報仇, 這是有所爲否?”
'''기원(器遠)<ref>주희의 제자 조숙원(曹叔遠)</ref>의 질문: 자방(子房)<ref>한(漢)의 개국공신 장량(張良, BC 250-BC 186).</ref>이 집안 대대로 한(韓)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선비를 모아 한(韓)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 아닙니까?
曰: “他當初只一心欲爲國報仇. 只見這是箇臣子合當做底事, 不是爲別人, 不是要人知.” 賀孫(62이후).
'''대답: 그는 애당초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저 이것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보았을 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8 行夫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남헌이 말하기를(南軒云)'이 더 있다.</ref>“爲己者無所爲而然”.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다. 이는 모든 일이 다 자신이 응당 해야 할 바라고 보아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도 칭찬을 바라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목적)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也. 這是見得凡事皆吾所當爲, 非求人知, 不求人譽, 無倚無靠之謂否?)'가 더 있다.</ref>
'''행부(行夫)<ref>'행보'라고 읽어야 할지 '행부'라고 읽어야 할지 확실치 않다.</ref>가 “자신을 위하는 자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爲己者無所爲而然]”에 대해 질문함.<ref>이 부분에 대해서는 17:45와 46, 47을 참조하라.</ref>
曰: “有所爲者, 是爲人也. 這須是見得天下之事實是己所當爲, 非吾性分之外所能有, 然後爲之, 而無爲人之弊耳. 且如‘哭死而哀, 非爲生者’. 今人弔人之喪, 若以爲亡者平日與吾善厚, 眞箇可悼, 哭之發於中心, 此固出於自然者. 又有一般人欲亡者家人知我如此而哭者, 便不是, 這便是爲人. 又如人做一件善事, 是自家自肯去做, 非待人敎自家做, 方勉强做, 此便不是爲人也.”
'''대답: 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有所爲者] 남을 위한다는 것[爲人]이다. 이에 관해서는 반드시 천하의 일이 기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자기 본연의 직분[性分]의 범위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그렇게 알게 된) 뒤에 그것을 실천해야 남을 위하는 폐단[爲人之弊]이 없게 될 뿐이다.<ref>대학혹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활연대공하여, 천하를 봄에 그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고,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다. 혹여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여전히 자기 직분의 범위 안에 있다고 여긴다.(是以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去聲內也)'</ref> 예컨대 ‘죽은 이를 위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의 경우,<ref>맹자 7B:33.</ref> 요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喪)에 조문할 때, 만약 망자가 평소 나와 잘 지냈으므로 참으로 애석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통곡한다면 이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망자의 가족이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곡하니, 이는 옳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남을 위하는 것[爲人]이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좋은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기꺼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자기더러 하라고 시키면 그제서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남을 위하는 경우[爲人]가 아니다.
道夫曰: “先生所說錢穀·甲兵·割股·廬墓, 已甚分明, 在人所見如何爾.”
'''내가(道夫) 말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곡(錢穀)·갑병(甲兵)·할고(割股)·여묘(廬墓)<ref>17:47을 참조하라.</ref>는 매우[已甚] 분명하니, (이러한 행위들이 위기가 되느냐 위인이 되느냐는) 사람들 각자의 소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ref>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라는 뜻이다.</ref>
又問: “割股一事如何?”
'''(내가) 다시 질문함: 할고(割股)는 어떻습니까?
曰: “割股固自不是. 若是誠心爲之, 不求人知, 亦庶幾.”
'''대답: 할고(割股)는 물론 옳지 않지만, 만약 성심(誠心)으로 한 일이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면 역시 (옳은 쪽으로) 거의 가깝다[庶幾].
“今有以此要譽者.”
'''(나의 말): 요즘 이로써 명예를 구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因擧一事爲問. 先生詢究, 駭愕者久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재질문: "요즘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의 (할고 등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자인합니다<그럴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살펴보면) 역시 매우 난처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윽고, ...(再問: 如今都不問如何, 都<不只>自認自家不是, 然其曲折亦甚難處. 久之,)'가 더 있다.</ref> 乃始正色直辭曰: “只是自家過計了. 設使後來如何, 自家也未到得如此. 天下事惟其直而已. 試問鄕鄰, 自家平日是甚麽樣人! 官司推究亦自可見.”
'''이어서 한 가지 일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사정을) 자세히 물으시고 한동안 경악하셨다. 이내 안색을 바로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사람) 자신의 계산이 지나쳤던[過計] 것일 뿐이다. 설사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역시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일(에 대처하는 자세로는) 오직 정직함[直] 뿐이다. (그 사람은) 어디 한번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자기 자신이 평소 어떤 사람인지! 관청(官司)에서 조사해도 역시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行夫曰: “亦著下獄使錢, 得箇費力去.”
행부(行夫)의 말: 그래도 (체포될 경우) 옥에 갇혀 돈을 써야 하니[著]<ref>'著'은 종종 '須著'의 준말로 쓰인다. '~해야 한다'의 의미이다. 17:38의 용례를 참조하라.</ref>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曰: “世上那解免得全不霑濕! 如先所說, 是不安於義理之慮. 若安於義理之慮, 但見義理之當爲, 便恁滴水滴凍做去, 都無後來許多事.” 道夫(60이후).
'''대답: 세상에 어떻게[那] 조금도 젖지 않고[霑濕]<ref>'점유(沾濡)'라고도 쓴다.</ref> 면할 수[解]<ref>'解'는 영어에서의 can과 같다.</ref> 있겠는가! 앞서 말한 경우 같으면, (그 사람은)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했더라면 그저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서 곧 그렇게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어는 것처럼[滴水滴凍]<ref>'적수성동(滴水成凍)'의 형태로도 사용한다. 확고부동함, 과감함, 엄정함을 의미하며, 확실하게 하나하나 사안을 격파해가는 기상을 형용하기도 한다. 주자어류사휘연구 p.255 참조.</ref> 해나가서 뒷날의 여러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f>본 조목의 후반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일역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송회요집고등을 보면 당시 의도적인 할고를 통해 효자로 인정받아 세금과 요역을 면제받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각급 관청에서는 할고행위가 보고되면 그것이 진정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부당이득을 목적으로 자행한 것인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고, 조사 결과 불순한 할고라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건의 당사자는 병든 부모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할고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관청의 조사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할고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쩌면 할고를 통해 병이 나을 수도 있었을) 부모가 사망한 것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전 1장 ==
* 傳一章
전 1장
===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 然則其曰克明德一段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17:49 問: “‘克明德’, ‘克, 能也’. 或問中卻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曰: “此‘克’字雖訓‘能’字, 然‘克’字重於‘能’字. ‘能’字無力, ‘克’字有力. 便見得是他人不能, 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德’, 語意便都弱了. 凡字有訓義一般, 而聲響頓異, 便見得有力無力之分, 如‘克’之與‘能’是也. 如云‘克宅厥心’, ‘克明俊德’之類, 可見.” 僩(69이후).
*
===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 顧諟天之明命一段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17:50 問: “‘全體大用, 無時不發見於日用之間’. 如何是體? 如何是用?” 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 ‘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 體·用便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61이후).
* 17:51 問: “或問: ‘常目在之, 眞若見其“參於前, 倚於衡”也, 則“成性存存”, 而道義出矣.’ 不知所見者果何物耶?” 曰: “此豈有物可見! 但是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 每與是德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在. 一出言, 則言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一行事, 則事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不過如此耳, 初豈實有一物可以見其形象耶!” 壯祖(미상).
* 17:52 問: “引‘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曰: “自天之所命, 謂之明命, 我這裏得之於己, 謂之明德,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會忠; 事親必會孝; 見孺子,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 便自然會恭敬; 合辭遜處, 便自然會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會合道理!” 賀孫(62이후).
*
===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 是三者固皆自明之事一段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17:53 問: “‘顧諟’一句, 或問復以爲見‘天之未始不爲人, 而人之未始不爲天’, 何也?” 曰: “只是言人之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則, 所謂天理也. 人若每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只一理. 若理會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壯祖(미상).
* 17:54 問“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 曰: “天卽人, 人卽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旣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只今說話, 天便在這裏. 顧諟, 是常要看敎光明燦爛, 照在目前.” 僩(69이후).
*
== 전 2장 ==
* 傳二章
전 2장
===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 或問盤之有銘一段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17:55 德元問: “湯之盤銘, 見於何書?” 曰: “只見於大學.” 又曰: “成湯工夫全是在‘敬’字上. 看來, 大段是一箇修飭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亦說得大段地著. 如禹‘克勤于邦, 克儉于家’之類, 卻是大綱說. 到湯, 便說‘檢身若不及’.” 文蔚云: “‘以義制事, 以禮制心’, ‘不邇聲色, 不殖貨利’等語, 可見日新之功.” 曰: “固是. 某於或問中所以特地詳載者, 非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耳.” 文蔚(59이후).
* 17:56 問: “丹書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從’字意如何?” 曰: “從, 順也. 敬便豎起, 怠便放倒. 以理從事, 是義; 不以理從事, 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亦猶坤卦說敬·義.” 㝢(61이후).
*
== 전 3장 ==
* 傳三章
전 3장
===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 復引淇澳之詩一段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17:57 “‘瑟兮僩兮者, 恂慄也’. ‘僩’字, 舊訓寬大. 某看經子所載, 或從‘忄’·或從‘扌’之不同, 然皆云有武毅之貌, 所以某注中直以武毅言之.” 道夫云: “如此注, 則方與‘瑟’字及下文恂慄之說相合.” 曰: “且如‘恂’字, 鄭氏讀爲‘峻’. 某始者言, 此只是‘恂恂如也’之‘恂’, 何必如此. 及讀莊子, 見所謂‘木處則惴慄恂懼’, 然後知鄭氏之音爲當. 如此等處, 某於或問中不及載也. 要之, 如這般處, 須是讀得書多, 然後方見得.” 道夫(60이후).
* 17:58 問: “切磋琢磨, 是學者事, 而‘盛德至善’, 或問乃指聖人言之, 何也?” 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熙敬止’說. 然聖人也不是揷手掉臂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卻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爲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淳(61·70때). 寓同.
* 17:59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旣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 旣切而復磋之. 切得一箇樸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旣修而猶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 旣琢而復磨之. 琢, 是琢得一箇樸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之至善也. 取此而喩君子之於至善, 旣格物以求知所止矣, 又且用力以求得其所止焉. 正心·誠意, 便是道學·自修①. ‘瑟兮僩兮, 赫兮喧兮’, 到這裏, 睟面盎背, 發見於外, 便是道學·自修之驗也.” 道夫云: “所以或問中有始終條理之別也, 良爲此爾.” 曰: “然.” 道夫(60이후).
* 17:60 “‘如切如磋’, 道學也”, 卻以爲始條理之事; “‘如琢如磨’, 自修也”, 卻以爲終條理之事, 皆是要工夫精密. 道學是起頭處, 自修是成就處. 中間工夫, 旣講求又復講求, 旣克治又復克治, 此所謂已精而求其益精, 已密而求其益密也. 謨(50이후).
* 17:61 周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密否?” 曰: “始終條理都要密, 講貫而益講貫, 修飭而益修飭.” 淳(61·70때).
* 17:62 問: “琢磨後, 更有瑟僩赫喧, 何故爲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了氣象恁地. ‘穆穆文王’, 亦是氣象也.” 㝢(61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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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Dongsob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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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주자어류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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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語類卷第十七
주자어류 권 17
* 大學四或問上
대학 4 / 혹문 상(上)<ref>앞서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 대학에 관하여 논하였다. 권 17은 대학에 관한 네 번째 권이자 대학혹문의 상권에 관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부제가 붙었다. 대학혹문은 주희가 지은 대학의 참고서로 상/하 두 권으로 묶여있다. 가상의 질문자가 질문하면 주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목이 '누군가의 질문(或問)'이다. 논어, 맹자, 중용혹문도 있다.</ref>
* 經一章
== 경 1장 ==
<ref>대학은 경 1장과 전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는 대학의 이 순서에 맞추어 조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혹문 역시 대학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하여 전 10장에서 끝난다. 주자어류 권 17과 18 역시 혹문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한다.</ref>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단락 ===
* 或問吾子以爲大人之學一段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ref>대학혹문의 각 장은 여러 단락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류 17:1부터 18까지는 모두 그중 첫 번째 단락에 관한 내용이다. 어류 권 17과 18은 대학혹문을 먼저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고 여기다 대학혹문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는 것도 그 분량을 감안하였을 때 적절치 못하다. 박완식이 2010년에 번역한 '대학, 대학혹문, 대학강어'를 옆에 두고 참조하는 것이 좋다. 혹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을 웹상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C%80%ED%95%99#.E3.80.8E.ED.98.B9.EB.AC.B8.E3.80.8F_.EA.B2.BD1.EC.9E.A5 대학혹문 번역문(고려대 의적단)]).</ref>
* 17:1 問友仁: “看大學或問如何?”<ref>조선고사본은 상황 묘사가 보다 자세하다. '선생이 내게 물었다: 자네가 오늘 대학혹문을 읽었는데 어떠한가?(先生問友仁曰: 公今日看大學或問如何?)'</ref>
'''(선생이) 나(友仁)에게 질문함: 대학혹문을 보니 어떠한가?
曰: “粗曉其義.” <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뜻은 대강 깨쳤으나 아직 다 깨치지 못한 듯합니다. (云: 粗曉其義, 但恐未然.)'</ref>
'''(나의) 대답: 그 뜻을 대강 깨쳤습니다.
曰<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생이 한두군데를 찍어서 내게 설명해보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先生擧一二處令友仁說. 先生曰:)'</ref>: “如何是‘收其放心, 養其德性’?”
'''(선생이) 말함: 무엇이 '그 놓쳐버린 마음을(放心)<ref>맹자 6A:11. 맹자가 되찾으라고 한 마음은 어진 정서(仁)에 가까우나 주희는 이를 집중하여 각성된 의식인 것처럼 풀이했다. 그래서 주희가 '구방심(求放心)'을 요구할 때 이를 '거경(居敬)' 으로 치환해도 말이 통한다. 실제로 대학혹문에서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장한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본래 맹자에서 '방(放)'과 '존(存)'이라는 동사쌍으로 보이고자 한 이미지는 기르는 개나 닭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난 것을 수색해서 찾아오는 상황이었다. 주인이 고의로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짐승이 집을 나가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므로 '방심'은 '놓친 마음', '잃어버린 마음', '놓아버린 마음', '풀려난 마음', '달아난 마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반대로 '존심(存心)'이나 '구방심'은 그렇게 달아난 것을 되찾아 집안에 가져온 뒤 다시 달아나지 못하게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찾아오다', '보존하다', '간직하다', '간수하다' 등으로 번역한다.</ref> 거두어들이고 그 덕성(德性)을 기른다[收其放心, 養其德性]'는 것인가?
曰: “放心者, 或心起邪思, 意有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至於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截斷不續, 至於耳目言動皆然, 此乃謂之收. 旣能收其放心, 德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之外, 又養箇德性也.”
'''(나의) 대답: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란, 혹 마음(心)에 삿된 생각(邪思)이 일어나고, 의지(意)에 망령된 상념(妄念)이 생기며, 귀로 삿된 말을 듣고, 눈으로 혼란한 색을 보며, 입으로 도(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손발의 움직임이 예(禮)에 맞지 않는 데 이르기까지가 모두 놓침[放]입니다.<ref>이 주장의 레퍼런스는 물론 논어 12:1의 '극기복례'이다.</ref> 거두어들임[收]이란, 곧 삿된 생각과 망령된 상념이 있는 지점에서 딱 끊어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귀·눈·말·움직임[耳目言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거두어들인다[收]고 합니다. 자신의 놓쳐버린 마음(放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상 덕성(德性)은 자연히 길러집니다. 방심(放心)을 거두는 것과 별개로 다시 덕성(德性)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曰: “看得也好.” 友仁(69때).
'''(선생이) 말함: 잘 보았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 問: 或問"'以七年之病, 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方得.
'''질문: 《혹문(或問)》에서 "'일곱 해 된 병에 세 해 묵은 쑥을 구하는[七年之病, 求三年之艾]' 경우<ref>맹자 4A:9. 직전 조목의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친 적 없이 없었던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주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어렸을 적에 도덕원칙들을 신체화/습관화 시킨 뒤 (곧, 소학의 단계) 커서 그러한 도덕원칙들을 이지적으로 묻고 따져서 이해하는 것이다(곧, 대학의 단계). 하지만 주희가 보기에 오늘날에는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소학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 작업이 '경(敬)'공부이다. 비유하자면 평생에 걸쳐 (소학 때 못 했던 것을) 벌충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검정고시 같은 것이다. 일곱 해 된 병은 소학의 공부를 건너뛴 기간이고 세 해 묵은 쑥은 그것을 뒤늦게 따라잡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거경공부이다.</ref> 백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취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미 배움을 잃은[失學]<ref>어렸을 적에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말이다.</ref> 뒤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노력하고 분발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趲補得前許多欠闕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沒長進, 如何要塡補前面!” 賀孫(62이후).
'''대답: 시기를 놓친 뒤에 배우려면 반드시 이처럼 이전에 건너뛴 빈칸들을 서둘러[趲] 보충하여야 한다. '남이 한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한다.’<ref>중용 제 20장.</ref>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유유히 세월만 보내며 그날그날 해야할 공부(工夫)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인데 무슨 수로 이전(에 건너뛴) 부분을 메우려 하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 持敬以補小學之闕. 小學且是拘檢住身心, 到後來‘克己復禮’, 又是一段事. 德明(44이후).
'''경(敬)을 견지함으로써[持敬]<ref>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을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端慤純一靜專) 유지한다는 말이다(14:19). 조금 더 비근하게 설명하자면 흐리멍텅한 정신을 고조시켜 맑고 투명하고 집중된 상태로 유지하는 명상수련과 흡사하다. 어린아이가 평소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도 엄숙한 선생님 앞에 서거나, 교실에서 무언가를 발표하거나, 그밖에 진지한 이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산만한 의식을 또렷하게 집중시키게 된다. 소학에서 요구하는 공부들, 예컨대 거처를 청소하고 어른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공부들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처럼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가 소학 트레이닝을 겪지 않은 어른들에게 거경/지경 공부를 권하는 것은 A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B를 가져와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A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느긋하게 달성하고자했던 궁극적 목표를 생으로 가져와서 빨리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지난 십년의 공부를 몇년 안에 따라잡아서 해치워야하는 검정고시준비과정과 제일 가깝다. 한편 주희는 이처럼 마음을 특정한 상태로 세팅하고 유지하는 공부를 적극적인 이지적 탐구와 더불어 배움의 두 축으로 삼았다. 전자가 거경(居敬)/지경(持敬), 후자가 궁리(窮理)이다. 전자가 소학의 목표라면 후자는 대학의 목표이니, 주희의 '학'은 결국 소학과 대학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ref> 빼먹은 소학(小學) 단계를 보충한다. 소학(小學)은 일단은 몸과 마음을 꾸준히 붙들어매는[拘檢]<ref>'住'는 동사 뒤에 붙어서 행위의 지속을 나타내는 조사이다.</ref> 것이다. 훗날(에 하게 될)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克己復禮]' (공부의) 경우는 또다른 단계의 일이다.<ref>극기복례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붙들어매는 공부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정도상 더 높은 수준의 공부일 뿐이다. 17:1을 보라.</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7:4 問: “大學首云明德, 而不曾說主敬, 莫是已具於小學?”
'''질문: 《대학》 첫머리에서 명덕(明德)을 말하면서 주경(主敬)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주경이) 이미 소학(小學) 단계에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 아닙니까?<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固然. 自小學不傳, 伊川卻是帶補一‘敬’字.” 可學(62때).
'''대답: 진실로 그렇다. 소학(小學)이 전해지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천(伊川)<ref>정이(程頤)</ref>이 '경(敬)' 자 하나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5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致知至治國·平天下, 皆不外此. 人傑(51이후).
''' ‘경(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공부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6 問或問說敬處.
'''《혹문》에서 경(敬)을 설명한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四句不須分析, 只做一句看.”
'''대답: 저 네 구절<ref>대학혹문에서 주희는 경을 다음의 네 가지 문구를 가지고 설명한다. 정씨형제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사량좌의 '상성성법(常惺惺法)', 윤돈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한다는 측면, 상성성법은 집중한 의식의 각성되고 고양된 느낌,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그렇게 집중된 의식의 단단히 안정된 느낌을 형용한다.</ref>은 나누어 분석할 필요 없이 그저 한 구절로 보라.
次日, 又曰: “夜來說敬, 不須只管解說, 但整齊嚴肅便是敬, 散亂不收斂便是不敬. 四句只行著, 皆是敬.” 燾(70때).
'''다음 날 다시 말함: 어젯밤에 경(敬)에 대해 설명했는데, 계속 해설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경(敬)이고, 산란하여 수렴하지 못하면 불경(不敬)이다. 저 네 구절은 단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7 或問: “大學論敬所引諸說有內外之分.”
'''누군가의 질문: 《대학》<ref>사실은 대학'혹문'이라고 해야 옳다.</ref>에서 경(敬)을 논하며 인용한 여러 설(說)에는 내외(內外)의 구분이 있습니다.<ref>굳이 구분하자면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외면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고 나머지 셋은 내면이다.</ref>
曰: “不必分內外, 都只一般, 只恁行著都是敬.” 僩(69이후).
'''대답: 꼭 내외(內外)로 나눌 필요는 없다. 모두 매한가지다. 그저 그렇게 실천해가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ref>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같은 취지의 문답이 실려 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8 問: “敬, 諸先生之說各不同. 然總而行<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言'으로 썼다.</ref>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질문: 경(敬)에 대한 여러 선생의 설(說)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실천하여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면[常存]<ref>'존(存)'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17:1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되는 것입니까?”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斂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履孫(65때).
'''대답: 기실 매한가지이다. (마음이) 경건(敬)할 때 같으면 자연히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고[主一無適]', 자연히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며[整齊嚴肅]’, 자연히 '항상 반짝반짝 깨어있고[常惺惺]',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不容一物]'. 다만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 사씨(謝氏)나 윤씨(尹氏)의 설(說)<ref>'상성성'이 사씨, '기심수렴 불용일물'이 윤씨의 설이다.</ref>보다 더 분명하다.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9 或問: “先生說敬處, 擧伊川主一與整齊嚴肅之說與謝氏常惺惺之說. 就其中看, 謝氏尤切當.”
'''누군가의 질문: 선생님께서 경(敬)을 설명하신 부분에서 이천(伊川)의 주일(主一)과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 그리고 사씨(謝氏)의 상성성(常惺惺) 설(說)을 거론하셨습니다.<ref>이 설들에 대해서는 17:6을 참조하라.</ref> 그중에서 보면 사씨(謝氏)의 설명이 더욱 절실하고 적절[切當]<ref>'절(切)'은 어떤 설명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친숙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말이다.</ref>합니다.
曰: “如某所見, 伊川說得切當. 且如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若無整齊嚴肅, 卻要惺惺, 恐無捉摸, 不能常惺惺矣.” 人傑(51이후).
'''대답: 내가 보기엔 (사씨보다) 이천(伊川)이 적절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몸가짐을 정제엄숙(整齊嚴肅)하게 하면 이 마음이 보존[存]<ref>'존(存)'에 관해서는 17:1을 참조하라.</ref>되어 반짝반짝 깨어있을[惺惺] 수 있게 된다. 만약 정제엄숙(整齊嚴肅)한 자세 없이 반짝반짝 깨어있으려[惺惺] 한다면 아마 구체적으로 붙잡을 데가 없어[無捉摸]<ref>'정제엄숙'은 몸을 이렇게 하고 옷매무새를 저렇게 하라는 행동지침이므로 당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므로 '붙잡을 데'가 있다. '상성성'은 의식의 각성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므로 이 설명 속에는 어떤 행동지침이 없다.</ref> 늘 반짝반짝 깨어있을[常惺惺]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10 問: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자리에 '然則所謂敬者又若何而用力邪下' 14자가 더 들어있다.</ref>擧伊川及謝氏尹氏之說, 只是一意說敬.”
'''질문: 《혹문》에서 이천(伊川) 및 사씨(謝氏), 윤씨(尹氏)의 설(說)을 거론한 것은 그저 한 뜻으로 경(敬)을 설명한 것입니까?
曰: ‘主一無適’, 又說箇‘整齊嚴肅’; ‘整齊嚴肅’, 亦只是‘主一無適’意. 且自看整齊嚴肅時如何這裏便敬. 常惺惺也便是敬. 收斂此心, 不容一物, 也便是敬. 此事最易見. 試自體察看, 便見. 只是要敎心下常如此.”
'''대답: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하고 다시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 했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역시 그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이다. 어디 한번 정제엄숙(整齊嚴肅)할 때 어떻게 내면이 바로 경건(敬)해지는지 스스로 살펴 보라. '상성성(常惺惺)'해도 곧 경건(敬)하다. '수렴차심 불용일물[收斂此心, 不容一物]'<ref>본래는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이다. 경에 대한 이 네 가지 설명법은 17:6에 자세하니 참조하라.</ref>해도 곧 경건(敬)하다. 이 일은 매우 알기 쉽다. 시험 삼아 스스로 체험[體察]해 보면<ref>'체찰(體察)'은 몸소 체험/관찰하는 것이다.</ref> 바로 알 수 있다. 단지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이 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因說到放心: “如惻隱·羞惡·是非·辭遜是正心, 才差去, 便是放. 若整齊嚴肅, 便有惻隱·羞惡·是非·辭遜. 某看來, 四海九州, 無遠無近, 人人心都是放心, 也無一箇不放. 如小兒子才有智識, 此心便放了, 這裏便要講學存養.” 賀孫(62이후).
'''이어서 말이 방심(放心)에 미쳤다: 측은(惻隱)·수오(羞惡)·시비(是非)·사손(辭遜)<ref>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다.</ref> 같으면 바른 마음[正心]이요,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곧 놓친(放) 것이다. 정제엄숙(整齊嚴肅)한다면 곧 (놓친 마음을 다시 붙들어 와서) 측은·수오·시비·사손의 마음이 있게 된다. 내 생각에 사해(四海)와 구주(九州)<ref>온세상을 말한다.</ref> 어디든 멀거나 가깝거나 사람들 각각의 마음은 모두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니, 놓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경우도 지식[智識]이 생기자마자 이 마음을 바로 놓쳐버리게 되니, 이 지점에서 곧 강학(講學)과 존양(存養)<ref>강학과 존양은 각각 궁리와 거경 공부를 말한다. 17:1과 17:3의 주석을 참조하라.</ref>을 필요로 한다.
o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1 光祖問: “‘主一無適’與‘整齊嚴肅’不同否?”
'''광조(光祖)<ref>주희의 제자 가운데 광조가 셋이나 있다. 일역판은 여기서는 그 중 증흥종(曽興宗, 1146-1212)을 말한다고 주장한다.</ref>의 질문: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은 다르지 않습니까?<ref>둘 다 경건(敬)한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유지한다는 측면을 말한다. 앞의 몇 조목에서 자세하니 참조하라.</ref>
曰: “如何有兩樣! 只是箇敬. 極而至於堯舜, 也只常常是箇敬. 若語言不同, 自是那時就那事說, 自應如此. 且如大學論語孟子中庸都說敬; 詩也, 書也, 禮也, 亦都說敬. 各就那事上說得改頭換面. 要之, 只是箇敬.”
'''대답: 어찌 두 종류가 있겠나? 경(敬)은 하나 뿐이다. (거경 공부를) 지극히 하여 요순(堯舜)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역시 언제나 이 하나의 경(敬)일 뿐이다.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러저러한 때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응당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 예컨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모두 경(敬)을 말하고, 《시경》, 《서경》, 《예기》 또한 모두 경(敬)을 말하고 있다. 각각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얼굴을 바꿔가며(改頭換面)<ref>껍데기, 표현방식만 바꾸었지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ref>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경(敬)은 하나일 뿐이다.
又曰: “或人問: ‘出門·使民時是敬, 未出門·使民時是如何?’ 伊川答: ‘此“儼若思”時也.’ 要知這兩句只是箇‘毋不敬’. 又須要問未出門·使民時是如何. 這又何用問, 這自可見. 如未出門·使民時是這箇敬; 當出門·使民時也只是這箇敬. 到得出門·使民了, 也只是如此. 論語如此樣儘有, 最不可如此看.”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문을 나설 때와 백성을 부릴 때 경건(敬)하다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ref>논어 12:2. </ref>라고 하니, 이천(伊川)이 답하기를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할[儼若思]’<ref>예기 곡례 상.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하라(毋不敬,儼若思)'</ref> 때이다’라고 했다.<ref>이정유서 18:10. '질문: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뵙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 하라고 하는데, 아직 문을 나서지 않았고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 대답: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해야 할 때이다. 문을 나섰을 때의 경건함이 이와 같다면 문을 나서기 전에는 어떨지 알 만하다. 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問: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方其未出門未使民時, 如何? 曰: 此儼若思之時也. 當出門時其敬如此, 未出門時可知也. 且見乎外者出乎中者也.)</ref> 이 두 구절<ref>주일무적과 정제엄숙을 말한다.</ref> 모두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毋不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이걸 또 물을 필요가 있나? 이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도 이 경(敬) 하나일 뿐이고,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릴 때에도 역시 이 경(敬) 하나일 뿐이다.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린 뒤에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논어》에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으니, 결코 (이천에게 질문한 어떤 사람 처럼) 저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2 或問“整齊嚴肅”與“嚴威儼恪”之別.
'''누군가가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엄위엄각(嚴威儼恪)’<ref>엄숙하고 위엄있는 안색과 거동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편에 등장하는 문구이다.</ref>의 차이에 대해 질문함.
曰: “只一般. 整齊嚴肅雖非敬, 然所以爲敬也. 嚴威儼恪, 亦是如此.” 燾(70때).
'''대답: 똑같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 경(敬)은 아니지만 경(敬)을 행하는 수단이다. 엄위엄각(嚴威儼恪) 역시 그렇다.<ref>이정유서 15:182와 같은 취지이다. '엄위엄각은 경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경에 이르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自此入.)'</ref>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13 問: “上蔡說: ‘敬者, 常惺惺法也.’ 此說極精切.”
'''질문: 상채(上蔡)<ref>사량좌</ref>가 말하기를 ‘경(敬)이란 늘 반짝반짝 깨어있기[常惺惺] 위한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이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합니다[極精切].<ref>17:9를 참조하라.</ref>
曰: “不如程子整齊嚴肅之說爲好. 蓋人能如此, 其心卽在此, 便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 而內不惺惺者. 如人一時間外面整齊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寬了, 便昏怠也.”
'''대답: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만큼 좋지는 않다. 대개 사람이 이처럼<ref>정제엄숙을 말한다.</ref> 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곧 여기에 있어서[在此]<ref>의식(consciousness)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반짝반짝 깨어있게[惺惺] 되기 때문이다. 외면이 정갈하고 단정하며 엄숙(整齊嚴肅)하면서 내면이 반짝반짝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잠시라도[一時間] 외면이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곧 그 시간만큼 깨어있게 되고, 잠시라도 (몸가짐이) 풀어지면[放寬] 곧 흐릿하고 나태해지게[昏怠] 된다.
祖道曰: “此箇是氣. 須是氣淸明時, 便整齊嚴肅. 昏時便放過了, 如何捉得定?”
'''내(祖道)가 말함: 이것은 기(氣)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기(氣)가 맑고 밝을 때[淸明]는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흐릿할 때는 곧 방만하게[放過] 되니, 어떻게 해야 제대로 붙잡을 수 있습니까?<ref>'정(定)'은 현대 중국어 '주(住)'와 같다. 동사의 뒤에 붙어 'x得住'라고 하면 그 동작을 확실히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주고 'x不住'는 그 동작을 제대로 해낼 역량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ref>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志者, 氣之帥也.’ 此只當責志. 孟子曰: ‘持其志, 毋暴其氣.’ 若能持其志, 氣自淸明.”
'''대답: ‘심지(志)는 기(氣)를 통솔하는 장수이다[志者, 氣之帥也].’<ref>맹자 2A:2. 이른바 부동심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志)는 오늘날 말로 의지나 심지, 기(氣)는 의욕이나 기운, 에너지 정도에 해당한다. 심지가 장수라면 기는 병사들이다. 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에너지는 병사들에게서 나오지만(의욕과 기운), 병사들 각각이 어디로 움직여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방향성은 장수에게서 나온다(의지와 심지). 예컨대 시험기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심지의 명령이지만 실제로 공부하지 않고 침대에 붙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욕과 기운의 항명과 태업 때문이다.</ref> 이는 응당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심지(志)를 붙잡되 자기 기(氣)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持其志, 毋暴其氣]’고 하셨다.<ref>맹자 같은 곳.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병사들이 움직여야 한다. 장수의 뜻이 굳건하고 일관되면 병사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지를 굳건히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항명과 태업에도 이유가 있으니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일하고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경우 그런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Kwong-loi Shun, 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1997). P.68, 112-119를 참조하라.</ref> 만약 자기 심지(志)를 붙잡을 수 있다면 기(氣)는 저절로 맑고 밝아진다[淸明].
或曰: “程子曰: ‘學者爲習所奪, 氣所勝, 只可責志.’ 又曰: ‘只這箇也是私, 學者不恁地不得.’ 此說如何?”
'''누군가 말함: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자는 습관에게 빼앗기고 기(氣)에게 패배하니,<ref>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라.</ref> 단지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ref>이정유서 15:96. '배우는 자는 기에게 패배하고 습관에게 빼앗기니, 단지 심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學者, 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문구의 배치가 다르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고, 또 (심지를 붙잡으려는 것에 관해서)‘이 또한 사사로운 마음(私)일 뿐이지만,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ref>이정외서 8:6. '심지를 붙잡는 것을 논하다 선생이 말함: (심지를 붙잡으려는 마음) 또한 사사로운 마음일 뿐이다. 그래도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因論持其志先生曰: 只這箇也是私. 然學者不恁地不得.)'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어떻습니까?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涉於人爲, 便是私. 但學者不如此, 如何著力! 此程子所以下面便放一句云‘不如此不得’也.” 祖道(68때).
'''대답: 인위(人爲)에 관련되면 곧 사사롭다(私).<ref>기운과 의욕의 자연스러운 추세에 맡겨두지 않고 심지를 다져서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의욕을 몰고 가려는 것은 어느정도 작위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f> 다만 배우는 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쓰겠는가[著力]?<ref>'착력(著力)' 두 글자에 이미 작위성이 담겨있다.</ref> 이것이 정자(程子)께서 (사사롭다고 한 다음 그) 아래에다 바로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문을 덧붙이신 까닭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14 因看涪陵記善錄, 問: “和靖說敬, 就整齊嚴肅上做; 上蔡卻云‘是惺惺法’, 二者如何?”
'''부릉기선록(涪陵記善錄)<ref>정이의 제자 윤돈(尹焞)의 어록이다. 기록자는 윤돈의 제자인 풍충서(馮忠恕). 윤돈과 풍충서가 교유한 곳이 사천 부릉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청 중엽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실되었다. 이정외서 권 12에서 이 책으로부터 여덟 조목을 인용하고 있다.</ref>을 보다가 (선생이) 질문함: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은 경(敬)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측면에서 설명하고,<ref>본래 윤돈의 설명은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윤돈의 지침은 그 초점이 엄숙함에 있으므로 정이의 '정제엄숙'과 조응한다.</ref>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는 오히려 ‘반짝반짝 깨어있게 해주는 방법[惺惺法]이다’라고 하니, 이 두 설명이 어떠한가?<ref>비슷한 취지의 문답이 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실려있다. 정자상은 이 조목의 기록자인 정가학이다. '(질문) 和靖論敬以整齊嚴肅, 然專主於內; 上蔡專於事上作工夫, 故云敬是常惺惺法之類. (답변) 謝尹二說難分內外, 皆是自己心地功夫. 事上豈可不整齊嚴肅, 靜處豈可不常惺惺乎?'</ref>
厚之云: “先由和靖之說, 方到上蔡地位.”
'''후지(厚之)가 대답함: 먼저 화정(和靖)의 설(說)을 따른 뒤에야 상채(上蔡)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曰: “各有法門: 和靖是持守, 上蔡卻不要如此, 常要喚得醒. 要之, 和靖底是, 上蔡底橫.
'''(선생이) 말함: 각각 (나름의) 법문(法門)<ref>불교 용어. 진리에 이르는 방법, 경로 등을 이른다.</ref>이 있다. 화정(和靖)은 붙잡아 지키는 것[持守]이다. 상채(上蔡)는 이와 같이 하려 하지 않고 늘 깨어있고자[喚得醒] 한다. 화정(和靖)의 설은 옳고, 상채(上蔡)의 설은 비뚤다. <ref>횡설(橫說)은 횡설수설의 횡설이다. 조리가 없거나, 너무 고원하거나, 견강부회한 억지 주장을 이른다. 주희가 사량좌의 주장을 횡설이라고까지 했을까 의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잠재적 의문에 답하는 차원에서 고문해의는 114:40에서 주희가 여조겸의 주장 하나를 '횡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상채의 설을 '횡'이라고 했으면 화정의 설은 '종(縱)'이나 '직(直)'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시(是)'와 '직(直)'은 자형이 가까우므로 전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교감할 경우 화정의 설과 상채의 설 사이에 우열과 정부정은 없고 범주의 차이만 남게 된다.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단 이렇게 남겨둔다.</ref>
渠<ref>조선고사본과 성화본은 '渠'를 '某'라고 적었다. 주자어류고문해의에서는 이것을 '횡거'라고 볼 경우 이어지는 '역왈경이직내'가 불완전인용이 된다고 지적하고,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일역판의 역자들 역시 이하의 '역왈경이직내'가 장재의 저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渠'를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다만, 고문해의는 이 앞 부분을 '화정의 설은 옳고 상채의 설은 비뚤다(和靖底是, 上蔡底橫.).'라고 구두를 끊어서 읽어야 한다고 보았고 일역판은 '횡모(橫某)가 말했다'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류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기록자가 정가학(鄭可學)인 조목은 자주 비경(蜚卿)과 후지(厚之)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해 다자간 문답을 주고받으므로 각 발언이 누구의 질문이고 누구의 답변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정가학 조목들은 자주 자신의 발언을 '某曰'이나 '某云' 등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은데, 예컨대 4:38이나 7:24, 8:27, 19:93, 28:34, 106:32 등을 살펴보라.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일역판 보다는 고문해의의 제안이 더 합리적이다. 여기서는 고문해의를 따른다.</ref>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云'이라고 적었다.</ref>: ‘易曰: “敬以直內.” ’伊川云: ‘主一.’ 卻與和靖同. 大抵敬有二: 有未發, 有已發. 所謂‘毋不敬’, ‘事思敬’, 是也.”
'''내(某)가 말함: 《주역》에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한다[敬以直內]'고 하였고,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마음을 하나로 한다[主一]’고 하였으니, 오히려 화정(和靖)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경(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생각과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시점[未發]의 경과 이미 발한 뒤[已發]의 경입니다. 이른바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하라[毋不敬]’<ref>예기 곡례 상.</ref>와 ‘일을 할 적에는 경건할 것을 생각하라[事思敬]’<ref>논어 16:10.</ref>가 그것입니다.<ref>미발의 경과 이발의 경의 구분에 관해서는 17:11을 참조하라.</ref>
曰: “雖是有二, 然但一本, 只是見於動靜有異, 學者須要常流通無間."
'''(선생이) 말함<ref>고문해의와 일역본 모두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비록 두 가지가 있다 해도 뿌리는 하나이니, 그저 동(動)과 정(靜)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항상 (동/정 사이의) 흐름이 중단없이 자연스럽게 통하게 해야 한다. <ref>17:11의 논의를 참조하라. 정시의 경은 문을 나서기 전의 경건함이고 동시의 경은 문을 나서서 사태와 사물에 대처할 때의 경건함이다. 앞선 질문에서의 인용구로 말하자면 주역의 '경이직내'와 이천의 '주일무적', 윤돈(화정)의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정시의 경건함이다. 논어의 '사사경'은 동시의 경건함이다.</ref>
又: "如和靖之說固好, 但不知集義, 又卻欠工夫."
'''또 (내가 말함)<ref>이 대목을 이렇게 독립시켜 질문자의 질문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직전의 '曰: 雖是有二...'와 직후의 '曰: 亦是...'의 관계가 불분명해진다. 고문해의의 경우 일단은 앞쪽 曰을 주희의 대답으로, 뒤쪽 '曰'을 질문자의 추가 질문이라고 보았으나, 실은 상세히 읽어 보면 질문하는 말투가 아니어서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앞의 왈과 뒤의 왈을 모두 주희의 말로 해석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이렇게 질문자의 말로 떼어냈다. 여기서는 일역판을 따랐다.</ref>: 화정(和靖)의 설(說) 같은 경우 물론 좋긴 하지만 (그는) '의(義)에 부합하는 행위를 오래 축적해야 함[集義]'<ref>맹자 2A:2.</ref>을 알지 못했고, 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힘씀[工夫]이 부족했습니다.<ref>질문자는 화정의 경을 미발의 경건함, 정시의 경건함 쪽에 배속하고 있다. 이 경우 수행자 자신이야 홀로 방에 앉아 마음을 경건하게 길러낼 수 있을지라도 현실 사회 속에서 실질적인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매 순간 올바르고 경건한 선택을 내림으로써 스스로를 키워내는 과정은 겪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송대 문헌에서 거경(居敬)과 집의(集義) 공부를 이처럼 동/정, 내/외, 체/용의 두 방면으로 구분한 경우가 많다. 이정유서 18:101 '질문: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응당 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경은 (내면을) 함양하는 것 뿐이다.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모름지기 '집의'를 써야 한다.(問: 必有事焉, 當用敬否? 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질문: 경과 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경은 자신을 붙잡는 도리이고 의는 시비를 알고 이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의가 된다.(問: 敬義何別? 曰: 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또 남헌집(南軒集) 권 32 답유성지(答㳺誠之)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경과 집의 공부는 병행하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다. 만약 경건하게 할 줄만 알고 의로운 행위를 축적할 줄은 모른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 또한 멀뚱히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니 어떻게 마음의 본체가 사방으로 두루 흘러 영향을 미칠 수 있겠나? 집(集)은 축적한다(積)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에 의로움(義)없는 것이 없으되 (그 의로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드러나니, 구체적인 사태 하나하나에서 (의로운 판단과 행위를) 모아서 축적해야 한다.(居敬集義, 工夫並進, 相須而相成也. 若只要能敬, 不知集義, 則所謂敬者, 亦塊然無所爲而已, 烏得心體周流哉? 集訓積, 事事物物, 莫不有義, 而著乎人心, 正要一事一件上集.)'</ref>
曰: “亦是渠才氣去不得, 只得如此. 大抵有體無用, 便不渾全.”
'''(선생의) 대답<ref>고문해의에서는 일단 주희의 말로 보았으나 확신하지 못했다. 일역판도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그는<ref>윤돈을 말한다.</ref> 역시 그 재기(才氣)<ref>재치있고 민활함을 말한다.</ref>가 부족했기에[去不得]<ref>'去得'은 현대 중국어 '可以'와 같다. '去不得'은 이에 대한 부정표현이다. 주희가 보기에 윤돈은 순발력이나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묵묵히 정진하는 캐릭터였다. 예컨대 101:102-122를 보라.</ref> 단지 그와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개 본체(體)만 있고 작용(用)이 없으면 온전할[渾全] 수 없다.<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ref>
又問: “南軒說敬, 常云: ‘義已森然於其中.’”
'''다시 질문함<ref>기록자인 가학의 질문인 듯하다.</ref>: 남헌(南軒)<ref>장식(張栻)이다.</ref>은 경(敬)을 설명할 적에는 늘 ‘(경건하기만 하면) 의(義)는 이미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義已森然於其中]’고 말합니다.<ref>남헌집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위 주석에서 인용했듯 장식은 개인적 차원에서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과 사회적 차원에서 시비판단을 내리고 의로운 행적을 누적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말한 바 있다.</ref>
曰: “渠好如此說, 如仁智動靜之類皆然.” 可學(62때).
'''대답: 그는 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仁)·지(智)·동(動)·정(靜) 등에 (대해서 말할 적에) 모두 그러하다.<ref>장식의 계사논어해(癸巳論語解) 권3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과 정이라는 것은 인(仁)과 지(知)의 본질[體]이니, 물을 좋아하고(樂水) 산을 좋아(樂山)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동(動)하면 즐겁고 정(靜)하면 장수한다. 일삼는 바 없이 실천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항상 영원히 올바르며 굳건하니 어찌 장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知)의 본질은 동적이지만 이치는 각기 멈추는 곳이 있으니 정(靜)이 결국 그 속에 있다. 인(仁)의 본질은 정적이지만 두루 흘러 쉬지 않으니 동(動)이 결국 그 속에 있다. 동과 정이 교차하여 드러나며 본체와 작용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 인과 지의 (진정한) 뜻을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라면 (동정과 체용의 관계를) 알아보지 못한다.(動靜者, 仁知之體, 樂水樂山, 言其體則然也. 動則樂, 靜則夀. 行所無事, 不其樂乎? 常永貞固, 不其夀乎? 雖然, 知之體動, 而理各有止, 靜固在其中矣. 仁之體靜, 而周流不息, 動亦在其中矣. 動靜交見, 體用一源, 仁知之義, 非深體者, 不能識也.)'</ref>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15 問謝氏惺惺之說.
'''사씨(謝氏)의 '성성(惺惺)' 설(說)에 대하여 질문함.
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說敬, 卻只以‘整齊嚴肅’言之, 此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대답: '성성(惺惺)'이란 마음이 흐릿하지 않다는[不昏昧] 말이니, 그저 이것이 바로 경(敬)이다. 요즘 사람들은 경(敬)에 대해 말할 적에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만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도 물론 경(敬)이긴 하다만, 마음이 만약 흐릿하여 이치를 밝게 비춰주지 못한다면, 비록 억세게 붙잡는다[强把捉]<ref>주희는 의식(consciousness)을 바짝 긴장시켜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로 유지하는 행위를 대개 물건을 손으로 세게 쥐고 있는 느낌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파착(把捉), 지(持), 지수(持守) 등은 글자는 달라도 동일한 현상을 지시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ref> 한들 어찌 경(敬)이 될 수 있겠는가?
又問孟子告子不動心.
'''또, 맹자(孟子)와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질문함.
曰: “孟子是明理合義, 告子只是硬把捉.” 砥(61때).
'''대답: 맹자(孟子) (의 부동심은) 이치를 밝히고 의로움(義)에 부합하여 (획득하는 것)이고, 고자(告子)는 단지 (마음을) 억지로 단단히 붙잡아[硬把捉]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ref>부동심을 논한 맹자 2A:2는 난해한 조목이다. 주자어류 권 52의 200여 조목이 모두 이에 관한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주희가 생각하기에 고자는 세상의 여러 일과 서책 등으로부터 이치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도가적인 인물이다. 세상 일을 관찰하고 서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희가 생각하는 맹자의 부동심은 적극적으로 이치를 따져서 파악하고(즉, 지언知言)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즉, 집의集義)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이때문에 맹자의 부동심을 명리합의(明理合義)라고 평가하고 고자의 부동심을 경파착(硬把捉)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이때 명리는 이지적 노력, 집의는 실천적 노력이다. 자세한 분석은 장원태, "맹자 3.2에 대한 고찰", 2013과 김명석, "不動心 획득을 위한 孟子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한 고찰", 2021을 참조하라.</ref>
지(砥)의 기록. (61세 때)
* 17:16 或問: “謝氏常惺惺之說, 佛氏亦有此語.”
'''누군가의 질문: 사씨(謝氏)<ref>사량좌이다.</ref>의 상성성(常惺惺) 설(說)<ref>앞서 십여 조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의 경우, 불씨(佛氏) 역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曰: “其喚醒此心則同, 而其爲道則異. 吾儒喚醒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 佛氏則空喚醒在此, 無所作爲, 其異處在此.” 僩(69이후).
'''대답: 이 마음을 일깨우는[喚醒此心] 점에서는 같지만 그 도(道)의 성격은 다르다. 우리 유학(儒學)에서는 이 마음을 일깨워 그것이 많은 도리를 관조하게[照管] 하려는 것인데, 불씨(佛氏)는 헛되이 일깨워[在此]<ref>'재차'는 의식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실제로) 하는 바가(作爲) 아무것도 없으니, 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17 問: “和靖說: ‘其心收斂, 不容一物.’”
'''질문: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이‘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했습니다.<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斂. 他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直是更不著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賀孫(62이후).
'''대답: 이 마음이 그 어떤 대상에도 전혀 붙어있지 않으면[不著一物] 그게 바로 수렴(收斂)이다. 그는 윗 구절에서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사당[神祠]에 들어갈 때, 그때에는 그 어떤 사안도 전혀 마음에 더 붙일 수 없고 단지 공경(恭敬)함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ref>사고전서본 화정집(和靖集) 권 7, '예컨대 누군가 사당에 들어가 경의를 표할 적에 그 마음이 수렴되어 그 어떤 다른 사안도 전혀 붙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로 집중됨[主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且如人到神祠中致敬時, 其心收斂, 更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ref> 이 말이 매우 친근하고 절실하다. 지금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을 전일하게 할 수 있다면 곧 바짝 수렴하여 그 어떤 빈틈[空罅]도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思量]을 마치지 못했는데 또 다른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 버리면 마음은 곧 두 갈래 길이 되어버린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8 問尹氏“其心收斂不容一物”之說.
'''윤씨(尹氏)<ref>윤돈.</ref>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설(說)에 대한 질문.
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所亂, 便是不容一物也.”
'''대답: 마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주인으로 세워[主]<ref>'주(主)'자의 번역이 까다로운데, 전통적으로 '주장하다', '위주로 하다'와 같이 옮긴다. 여기서는 자신의 내면에 품은 여러 생각들의 위계서열에 있어서 최상의 자리, 즉 '주인'의 자리에 어떤 생각이나 마음가짐을 올려두었다는 의미에서 이상과 같이 번역했다. </ref> 다른 일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곧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問: “此只是說靜時氣象否?”
'''질문: 이는 고요할 때[靜時]의 기상(氣象)을 설명한 것 아닙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又問: “只靜時主敬, 便是‘必有事’否?”
'''재질문: 고요할 때[靜時] 경(敬)을 주인으로 세우는[主] 것이 곧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必有事]'<ref>본래 출전은 맹자 2A:2. 정씨 형제에 의하면 마음의 고요한 측면에 대해서도 모종의 의식적[用意] 노력을 동반한 공부가 필요하니 그것이 바로 경(敬)이다.(이정유서 18:35) 맹자의 '반드시 일이 있다[必有事]'에서 '일삼다'는 의식적 노력에 대한 요청인데, 여기서 맹자가 요청한 것을 정씨 형제는 경공부라고 해석했다. 이정유서 15:186'필유사언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니, 경이다.(必有事焉, 謂必有所事, 是敬也)'. 주희는 이러한 해석이 맹자의 본래 문맥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배격하지는 않는다. 52:162, 회암집 권40 답하숙경 제 29서('主敬存養, 雖説必有事焉, 然未有思慮作爲, 亦靜而已.'), 권 61 답임덕구(答林德久) 제 6서(질문: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必有事焉而勿正]’에 대해서, 명도와 이천은 대부분 “경(敬)을 위주로 한다”하고, 일설에는 “마땅히 의(義)를 모아야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위 글의 ‘의(義)를 모아 생겨나는 것이다’를 이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한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선(善)을 축적하는 공부가 아니겠습니까?‘必有事焉而勿正’, 二程多主於敬, 一說須當集義, 是承上文‘是集義所生者’而言. 所謂必有事, 則積集衆善工夫否? 답변: 맹자의 앞뒤 구절에 ‘경(敬)’자는 없고, ‘의(義)’자만 있을 뿐입니다. 정자는 이를 바꾸어서 ‘경(敬)’자로 설명했는데, 맹자의 본의와는 다릅니다. 집주를 보면 또한 자세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孟子上下文無‘敬’字, 只有‘義’字, 程子是移將去‘敬’字上說, 非孟子本意也. 集註亦可細玩.)등을 보라. 이 '일삼음[事]'을 주희는 기본적으로 '의로운 행실을 축적[集義]'하는 행위로 본다. 예컨대 52:93, 97, 167 등을 보라.</ref> 아닙니까?
曰: “然.” 僩(69이후).
'''대답: 그렇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단락 ===
此篇所謂在明明德一段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 17:19 問: “或問說‘仁義禮智之性’, 添‘健順’字,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을 설명하면서 ‘건(健)'과 '순(順)’ 자를 첨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ref>대학혹문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가 널리 작동하여 세상 만물을 틔워주고 길러주는데 그 창조하고 변화하는 내용물은 (따지고 보면) 음양과 오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음양과 오행이란 것도 (음양오행은 그 분류상 氣인데) 반드시 먼저 이치가 있고 난 다음에 기(氣)가 있는 것이요, 사물이 (실제로) 탄생한 측면에서는 또 기(氣)가 (먼저) 응취한 덕분에 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의 탄생은 필히 (먼저)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건, 순,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있게 되고, 필히 이 기를 얻은 연후에 혼, 백, 오장, 백해의 신체가 있게 된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의 진수와 2&5(음양과 오행이다)의 정수가 신비롭게 합쳐져 (사람이 탄생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대개 맹자이래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적에는 '인의예지' 혹은 '인의예지신' 정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건'과 '순' 두 형용사가 더 들어갔으니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ref>
曰: “此健順, 只是那陰陽之性.” 義剛(64이후).
'''대답: 이 건순(健順)이란 그저 저 음양(陰陽)의 성질일 뿐이다.<ref>주역에서 순양괘인 건(乾)괘의 성질이 굳건함(健), 순음괘인 곤(坤)괘의 성질이 유순함(順)이다. 인의예지신의 경우는 대개 백호통(白虎通)에서 정리한 내용에 따라 오행(목화토금수)에 하나씩 배당한다. 예컨대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해당하며 그 방위는 동쪽이다. 어류 6:45를 참조하라. 대학혹문에서 인간의 탄생을 말하면서 단순히 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만 했다면 인의예지신만 언급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만 '음양'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 했으니 음과 양의 성질에 해당하는 글자를 하나씩 더 첨부해서 앞뒤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ref>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7:20 問<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或問中' 세 글자가 더 있다.</ref>“健順仁義禮智之性”.
''' '건(健)·순(順)·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에 대한 질문.<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此承上文陰陽五行而言. 健, 陽也; 順, 陰也; 四者, 五行也. 分而言之: 仁禮屬陽, 義智屬陰.”
'''대답: “이는 윗글의 음양(陰陽)·오행(五行)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건(健)은 양(陽), 순(順)은 음(陰)이며, 네 가지<ref>인의예지(仁義禮智)</ref>는 오행(五行)이다. 나누어 말하면,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仁何以屬陰?”
'''질문: ‘하늘의 도(道)를 세우니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우니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道)를 세우니 인(仁)과 의(義)라 한다.’<ref>주역 설괘전. 설괘전의 설명대로라면 음-유-인, 양-강-의가 각각 같은 범주로 묶여야 한다. 이에 대한 주희의 반론은 어류 6:54를 참조하라.</ref>고 했는데, 인(仁)이 어찌하여 음(陰)에 속합니까?
曰: “仁何嘗屬陰! 袁機仲正來爭辨.<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일곱자가 없다. 서산독서기 갑집 권 8에서는 이 부분을 '袁機仲力爭'이라고 썼다.</ref> 他<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便'자가 더 있다.</ref>引<ref>'타인' 두 글자는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주석으로 처리했다.</ref>‘君子於仁也柔, 於義也剛’爲證. 殊不知論仁之定體, 則自屬陽. 至於論君子之學, 則又<ref>조선고사본에는 '又'자가 없다. </ref>各自就地頭說, 如何拘文牽引得! 今只觀天地之化, 草木發生, 自是條暢洞達, 無所窒礙, 此便是陽剛之氣. 如云: ‘采薇采薇, 薇亦陽<ref>하서린의 전경당본은 이 글자를'作'이라고 썼다.</ref>止.’ ‘薇亦剛止.’ 蓋薇之生也, 挺直而上, 此處皆可見.”
'''대답: 인(仁)이 어찌 일찍이 음(陰)에 속했겠는가? 때마침 원기중(袁機仲)<ref>원추(袁樞, 1131-1205)의 자가 기중이다. 어류 6:55를 보면 그는 의를 양에, 인을 음에 배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회암집 권 38의 답원기중별폭(答袁機仲別幅)에도 원기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주희의 반론이 실려있으니 참조하라.</ref>이 (그런 내용으로) 논쟁을 걸어왔다.<ref>여기서 '래(來)'는 찾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쪽을 '향해서' 어떤 동작을 수행했다는 뜻에 가깝다.</ref> 그는 ‘군자는 인(仁)에 대해서는 유(柔)하고, 의(義)에 대해서는 강(剛)하다’<ref>양웅의 법언(法言) 군자(君子)편. 주자어류 6:136을 보면 주희도 양웅의 이 발언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거나, 본체가 강한 덕목이 작용은 유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웅과 자신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려고 할 뿐이다.</ref>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는 인(仁)의 확정적 본질[定體]을 논하자면 당연히 양(陽)에 속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군자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또 각자의 경우[地頭]에 맞게 설명한 것이니,<ref>고문해의에서는 인의 확정적 본질을 논하는 경우에는 양에 속하고 인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음에 속한다고 정리했다.</ref> 어찌 (양웅의 법언에서 사용한) 문자(의 표현)에 얽매이는가?<ref>구문색인(拘文牽引)은 표현에 구애되어 얽매인 것이다.</ref> 이제 가만 보면 천지가 변화[天地之化]하여 초목이 탄생하고 발육할 적에 자연히 쭉쭉 뻗어나가 막히거나 걸리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양강(陽剛)한 기(氣)이다. 예를 들어 ‘고사리 캐고 고사리 캐니, 고사리 또한 양(陽)하네[采薇采薇, 薇亦陽止].’ ‘고사리 또한 강(剛)하네[薇亦剛止].’라 하였다.<ref>시경 소아 녹명지십 채미(采薇)편. 시경 쪽 원문은 '채미채미, 미역작지(采薇采薇 薇亦作止)', '채미채미, 미역유지(采薇采薇, 薇亦柔止)', '채미채미, 미역강지(采薇采薇, 薇亦剛止)'인데, 이는 고사리가 막 땅에서 자라나와 부드러운 단계를 거쳐 다 자라서 뻣뻣한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경과를 노래한 것이다. 주희는 우선 '作'을 '陽'으로 잘못 썼고, 또 중간에 위치한 '柔'를 생략하고 마지막 '剛'만을 인용함으로써 시경 채미편을 자신이 앞서 주장한 것처럼 초목이 양강(陽剛)하다는 말의 경전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ref> 대개 고사리는 나면서부터 똑바로 위로 자라니, 이러한 (고사리의 특성)에서 (초목의 양강(陽剛)한 성질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問: “禮屬陽. 至樂記, 則又以禮屬陰, 樂屬陽.”
'''질문: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禮)는 양(陽)에 속합니다. (하지만) 〈악기(樂記)〉에서는 또 예(禮)를 음(陰)에 배속하고 악(樂)을 양(陽)에 배속합니다.<ref>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기 악기편에서는 악을 하늘에, 예를 땅에 배속했다. '악은 하늘에서 말미암아 제작하고 예는 땅을 따라 제작한다(樂由天作, 禮以地制)'</ref>
曰: “固是. 若對樂說, 則自是如此. 蓋禮是箇限定裁節, 粲然有文底物事; 樂是和動底物事, 自當如此分. 如云‘禮主其減, 樂主其盈’之類, 推之可見.” 僩(69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악(樂)과 한 쌍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다. 대개 예(禮)는 한정짓고 선을 그으며[限定裁節] 찬란하게 문채가 있는[粲然有文] 것이고, 악(樂)은 조화롭고 감동시키는[和動]<ref>예기 악기편에 나오는 표현이다.</ref>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예가 양, 악이 음으로) 나뉜다. ‘예(禮)는 줄이는[減] 것을 위주로 하고, 악(樂)은 채우는[盈] 것을 위주로 한다[禮主其減, 樂主其盈]’라고 하는 것 등은 (앞선 내용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ref>예기 악기편. '악이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예란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줄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악은 채우는 것을 위주로 한다.(樂也者,動於內者也;禮也者,動於外者也。故禮主其減,樂主其盈.)' 줄이는 것은 '음'적인 운동, 채우는 것이 '양'적인 운동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떠올려 보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1 問: “健順在四端何屬?”
'''질문: 건순(健順)은 사단(四端) 중 어디에 속합니까?
曰: “仁與禮屬陽, 義與智屬陰.”
'''대답: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小學: ‘詩·書·禮·樂以造士.’ 注云: ‘禮, 陰也.’”
'''질문:《소학(小學)》에 ‘시(詩)·서(書)·예(禮)·악(樂)으로써 선비를 만든다’<ref>소학에서 예기 왕제편을 인용한 부분이다.</ref>고 하였는데, 주(注)에 ‘예(禮)는 음(陰)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f>주석은 예기 왕제편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ref>
曰: “此以文明言, 彼以節制言.”
'''대답: 이쪽은 문채나고 빛나는(文明) 측면에서 (예를) 설명한 것이고<ref>양에 속한다는 설명이다.</ref> 저쪽은 구별짓고 제약하는(節制)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ref>소학의 주석에 대한 설명이다.</ref>
問: “禮<ref>성화본은 '義'로 썼다. 이 조목의 첫 질문의 내용을 보나 이어지는 대화의 맥락상으로 보나 '義'가 더 어울리므로 이쪽으로 번역했다.</ref>智是束斂底意思, 故屬陰否?”
'''질문: 의(義)와 지(智)는 거두어들이는[束斂] 느낌이 있으므로 음(陰)에 속하는 것입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或問: “智未見束斂處.”
'''누군가의 질문: 지(智)는 거두어들이는 측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ref>일역판은 이 질문과 6:56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여기서의 '누군가'가 해당 조목의 기록자인 심한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ref>
曰: “義猶略有作爲, 智一知便了, 愈是束斂. 孟子曰: ‘是非之心, 智也.’ 纔知得是而愛, 非而惡, 便交過仁義去了.” 胡泳(69때).
'''대답: 의(義)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作爲) 조금 있지만, 지(智)는 한 번 알면 그걸로 끝이니 더욱 거두어들이는 쪽이다. 맹자(孟子)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라고 한다. 옳은[是] 줄 알고서 사랑하고 그른[非] 줄 알고서 미워하자마자 인(仁)과 의(義)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호영(胡泳)의 기록. (69세 때)
* 17:22 問陰陽五行健順五常之性.
'''음양(陰陽)·오행(五行)·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에 대한 질문.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陰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且如狗子, 會咬人底, 便是稟得那健底性; 不咬人底, 是稟得那順底性. 又如草木, 直底硬底, 是稟得剛底; 軟底弱底, 是稟得那順底.” 僩<ref>조선고사본에서는 '기손(蘷孫)'으로 썼다.</ref>(69이후).
'''대답: 굳건함(健)은 저 양(陽)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고, 유순함(順)은 저 음(陰)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며, 다섯가지 떳떳한 품성(五常)은 오행(五行)의 이치(理)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人物]은 모두 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을 부여받았다. 또 예컨대 개[狗子] 중에 사람을 무는 놈은 바로 저 굳건(健)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요, 사람을 물지 않는 놈은 저 유순(順)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다. 또 초목(草木) 중에 곧고 단단한 것은 강(剛)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저 윤순(順)<ref>이 글자는 엄밀한 문언이었으면 '柔'라고 썼어야 한다.</ref>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3 問: “或問‘氣之正且通者爲人, 氣之偏且塞者爲物’,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바르고 통한[正且通]<ref>바르다는 것은 도덕적 올바름보다는 똑바로 서있는 물건의 경우처럼 밸런스가 좋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통함은 공간적으로 이동할 때 장애 없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이다.</ref> 기(氣)는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偏且塞] 기(氣)는 사물이 된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物之生, 必因氣之聚而後有形, 得其淸者爲人, 得其濁者爲物. 假如大鑪鎔鐵, 其好者在一處, 其渣滓又在一處.”
'''대답: 사물의 생성은 반드시 (먼저) 기(氣)가 모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니, 그 맑은[淸] 것을 얻은 자는 사람이 되고 그 탁한[濁] 것을 얻은 자는 사물이 된다. 예를 들어 큰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면 잘 정련된 것이 한 쪽에 모이고 찌꺼기[渣滓]는 다른 한 쪽에 모이는 것과 같다.
又問: “氣則有淸濁, 而理則一同, 如何?”
'''재질문: 기(氣)에는 청탁(淸濁)이 있지만 이치(理)는 똑같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固是如此. 理者, 如一寶珠. 在聖賢, 則如置在淸水中, 其輝光自然發見; 在愚不肖者, 如置在濁水中, 須是澄去泥沙, 則光方可見. 今人所以不見理, 合澄去泥沙, 此所以須要克治也. 至如萬物亦有此理. 天何嘗不將此理與他. 只爲氣昏塞, 如置寶珠於濁泥中, 不復可見. 然物類中亦有知君臣母子, 知祭, 知時者, 亦是其中有一線明處. 然而不能如人者, 只爲他不能克治耳. 且蚤·虱亦有知, 如飢則噬人之類是也.” 祖道(68때).
'''대답: 진실로 그러하다. 이치(理)라는 것은 하나의 보배 구슬과 같다. (구슬이) 성현(聖賢)에게 있으면 마치 맑은 물[淸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휘광(輝光)이 자연히 드러나지만,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게 있으면 마치 탁한 물[濁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진흙과 모래[泥沙]를 걸러내야만 비로소 그 빛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이치(理)를 보지 못하니 마땅히 진흙과 모래를 걸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자기 기질을) 다스려야만[克治] 하는 까닭이다. 만물(萬物)의 경우에도 역시 이 이치(理)가 있다.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이 이치(理)를 그것들에게 주지 않았겠는가? 단지 기(氣) 때문에 흐리고 폐색하여[昏塞] 마치 보배 구슬을 탁한 진흙탕 속에 둔 것처럼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물들 중에서도 군신(君臣)·모자(母子)를 알고, 제사(祭)를 알며, 때[時]를 아는 종류가 있으니,<ref>당시 사람들은 벌과 개미[蜂蟻]에게 엄정한 군신관계가 있고. 호랑이와 이리[虎狼]에게 부자(혹은 모자)간에 친밀한 관계가 있고, 승냥이와 수달[豺獺]이 사냥한 짐승을 널어놓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줄 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와 이리의 친애함은 장자 천운편, 승냥이와 수달의 제사는 예기 왕제편이 최초의 출전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주자어류 4:9, 11, 19 등을 참조하라.</ref> 역시 그 속에 한 가닥 밝은 부분[一線明處]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과 같을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자기 기질을) 다스릴[克治] 수 없어서일 뿐이다. 또 벼룩[蚤]과 이[虱] 또한 (제한된 정도의) 지성(知)이 있으니, 예를 들어 굶주리면 사람을 무는 것 등이 이것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24 問: “或問云: ‘於其正且通者之中, 又或不能無淸濁之異, 故其所賦之質, 又有智愚賢不肖之殊.’ 世間有人聰明通曉, 是稟其氣之淸者矣, 然卻所爲過差, 或流而爲小人之歸者; 又有爲人賢, 而不甚聰明通曉, 是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그 바르고 통한[正且通] 자 중에서도 또 간혹 청탁(淸濁)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므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다시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통한 기에도 간혹 청탁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미추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추한 사람은 불초하니, 다시 서로 똑같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회암집 권 62 답이회숙(答李晦叔) 제 6서에서는 본 조목에서 인용한 것과 흡사한 버전으로 혹문을 인용하고 있다.</ref> 세상 사람 중에 총명하고 통달한[聰明通曉] 자는 맑은[淸] 기(氣)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하는 바가 어긋나서 혹 소인(小人)의 부류가 되고 마는 자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 사람됨이 현명하지만[賢] 그다지 총명하고 통달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曰: “或問中固已言之, 所謂‘又有智愚賢不肖之殊’, 是也. 蓋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事<ref>다수의 판본에서 '了'로 적었다.</ref>者, 智也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淸和溫恭之德. 又有人極溫和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爲學便是要克化, 敎此等氣質令恰好耳.” 僩(69이후).
'''대답: 《대학혹문》에서 이미 이에 관하여 말했으니, 이른바 ‘또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대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범주가 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聰明曉事] 자가 똑똑하되[智] 혹 현명하지 못하다면[不賢], 이는 곧 부여받은 것 가운데 맑고 온화하며[淸和] 따스하고 공손한[溫恭] 덕(德)이 부족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지극히 온화(溫和)하되 그다지 사리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바로 현명하지만[賢] 똑똑하지[智]는 못한 것이다. 배움(學)이란 바로 이러한 자기 기질을 이겨내고 변화시켜[克化] 딱 알맞게[恰好]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5 舜功問: “序引參天地事, 如何?”
'''순공(舜功)의 질문: (대학혹문의) 서문(序)에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셋이 되는[參天地]' 일을 인용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ref> '삼천지(參天地)'는 본래 중용 제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면 남이 그렇게 하도록 도울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했다면 이미 (이 사람의 위격은) 천지와 같으니,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은 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서문이 아니라 경 1장에서 '명덕'을 설명하는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은 태어나면서 바르고 통한 기운을 얻었으니 그 본성이 가장 귀하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허령통철(虛靈洞徹)하여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금수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처럼 되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어 (천지의) 낳고 기르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까닭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다.(唯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ref>
曰: “初言人之所以異於禽獸者, 至下須是見己之所以參化育者.”
'''대답: 처음에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까닭을 말하였으니, (이어지는) 그 아래에서는 모름지기 자신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參化育] 까닭을 보아야 한다.
又問: “此是到處, 如何?”
'''다시 질문: 이 과정은 종착점이[到處] 어떻게 됩니까?
曰: “到, 大有地步在. 但學者須先知其如此, 方可以下手. 今學者多言待發見處下手, 此已遲卻. 纔思要得善時, 便是善.” 可學(62때).
'''대답: (종착점에) 도달하기까지 크게 (여러가지) 단계들이[地步] 있다. 다만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종착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손을 쓸[下手] 수 있다. 지금 배우는 자들은 발현되는 경우[發見處]를 기다렸다가 손을 쓴다고 많이들 말하는데,<ref>이 발언은 아마도 호상학자들의 '찰식이발지제' 공부를 염두에 둔 듯하다. 고문해의는 회암집 권 51의 답동숙중(答董叔重) 제 3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ref> 이러면 이미 늦고 만다.<ref>'-却'은 현대 중국어 '-掉'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행위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한다. 예컨대 '망각(忘却)'은 잊어버린다는 행위가 완성된 것이다.</ref> 선(善)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 즉시 바로 선(善)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26 問: “或問‘自其有生之初’以下是一節; ‘顧人心稟受之初, 又必皆有以得乎陰陽五行之氣’以下是一節; ‘苟於是焉而不値其淸明純粹之會’, 這又轉一節; 下又轉入一節物欲去, 是否?”
'''질문: 《대학혹문》에서 ‘최초에 태어났을 때부터[自其有生之初]’ 이하가 한 단락이고, ‘생각건대 최초에 사람이 마음을 (하늘로부터) 받았을(稟受) 적에는 또 반드시 모두 음양(陰陽)·오행(五行)의 기(氣)를 얻음이 있었다’ 이하가 한 단락이며, ‘진실로 이 단계에서 그 청명하며 순수한 것들(을 받을) 기회[淸明純粹之會]를 만나지 못한다면’여기서 다시 전환되어 한 단락이고, 이어서 그 아래에서 다시 전환되어 '물욕(物欲)' 한 단락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까?<ref>질문자가 인용한 네 단락은 모두 현행본 대학혹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행본을 사서혹문의 최후개정판이라고 간주할 경우 여기서의 네 단락은 모두 구판의 문구들이 된다. 아래 주희의 말에 더해 여기서 인용된 부분만 가지고 추론하자면 제 1구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동질성, 제 2구는 음양오행의 정수를 얻어 탄생한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 제 3구는 그럼에도 타고난 기질의 퀄리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제 4구는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나 물욕에 빠져 추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일역판 역시 이와 흡사하게 추론했으니 참조하라.</ref>
曰: “初間說人人同得之理, 次又說人人同受之氣. 然其間卻有撞著不好底氣以生者, 這便被他拘滯了, 要變化卻難.”
'''대답: 처음에는 사람마다 똑같이 얻는 이치(理)를 설명하고,<ref>제 1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그 다음에는 또 사람마다 똑같이 받는 기(氣)를 설명한 것이다.<ref>제 2구를 설명한 것이다.</ref> 그러나 그 사이에 도리어 좋지 못한 기(氣)를 만나[撞]<ref>'撞'은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질문자가 인용한 제 3구의 '値'와 같다.</ref> 태어나는 자가 있으니,<ref>제 3구에 대한 해설이다.</ref> 그 경우 곧 그 (기에) 구속되고 막혀서[拘滯] 변화시키고자 하여도 어렵다.<ref>제 4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問: “如何是不好底氣?”
'''질문: 어떠한 것이 좋지 못한 기(氣)입니까?
曰: “天地之氣, 有淸有濁. 若値得晦暗昏濁底氣, 這便稟受得不好了. 旣是如此, 又加以應接事物, 逐逐於利欲, 故本來明德只管昏塞了. 故大學必敎人如此用工, 到後來卻會復得初頭渾全底道理.” 賀孫(62이후).
'''대답: 천지의 기(氣)에는 청탁이 있다. 만약 어둡고 혼탁한[晦暗昏濁] 기(氣)를 만난다면, 이는 곧 좋지 못한 것을 받은[稟受]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데 또 사물을 응대함[應接事物]에 있어 사사건건 이욕(利欲)을 쫓아다니므로, 본래의 명덕(明德)이 계속 흐리고 폐색[昏塞] 된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들이 이와 같이 힘을 쓰도록 가르쳐서, 나중에는 도리어 최초의 온전한[渾全] 도리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27 林安卿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擴將去.”
'''임안경(林安卿)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이 끝내 은폐될 수 없음을 설명한 부분이다.</ref>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은 지점들[覺處]에 나아가 앎을 지극히 하고(致知) 확충해[充擴] 나가야 합니다.
曰: “然. 昨日固已言之. 如擊石之火, 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林先引或問中“至於久而後有覺”之語爲比, 先生因及此.> 那箇覺, 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대답: 그렇다. 어제 진실로 이미 그것을 말했다. (그것은) 마치 부싯돌을 때려서 나오는 스파크[擊石之火]와 같으니, 작은 불씨[些子]일 뿐이지만, 착화하기만 하면 곧 온 들판을 다 태울[燎原] 수 있다. 만약 반드시 먼저 크게 깨달은[大覺] 다음에 비로소 격물(格物)·치지(致知)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순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임안경[林]이 먼저 《대학혹문》 중의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至於久而後有覺]'<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이정(二程)의 말이다. 원출전은 이정유서 18:18. '질문: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대답: 앎을 지극히하는 공부가 최우선이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이 매일 더욱 밝아질 것이고,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問: 學何以有至覺悟處? 曰: 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ref>는 말을 인용하여 비유하자 선생이 이어서 이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대학혹문에서 말한) 저 깨달음이란[那箇覺] 사물이 탐구되어 앎이 지극해진[物格知至] 뒤의 대철대오[大徹悟]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일은 모두 끝난다. 순간적인 깨달음[介然之覺] 같은 경우는 하루 동안에도 무시로 무수히[無時無數] 터져나오니,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려[識認] 붙잡아 지키고[操持] 확충하고 길러[充養]<ref>산란하는 마음을 수습하여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덕성을 두텁게 배양하는 공부를 말한다. 17:1과 3에서 설명하고 있는 소학 단계에서의 공부를 참조하라.</ref>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又問: “‘眞知’之‘知’與‘久而後有覺’之‘覺’字, 同否?”
'''다시 질문: ‘참된 앎[眞知]'<ref>진리를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 알아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이정이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정유서 2上:24 '참으로 아는 것과 평범하게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본 일인데, 어떤 농부가 호랑이에게 물려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쳤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변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그 농부만 안색이 변하여 다른 사람들과 반응이 달랐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참으로 안'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저 농부와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선을 알면서도 불선을 행하는 것은 역시 참으로 알지 못해서이다. 참으로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眞知與常知異. 常見一田夫曾被虎傷, 有人說虎傷人, 衆莫不驚, 獨田夫色動, 異於衆. 若虎能傷人, 雖三尺童子, 莫不知之, 然未嘗眞知. 眞知須如田夫乃是. 故人知不善, 而猶爲不善, 是亦未嘗眞知. 若眞知, 決不爲矣.)</ref>이라고 할 때의 ‘지(知)’와 ‘오래 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久而後有覺]’의 ‘각(覺)’ 자는 (의미가) 같지 않습니까?
曰: “大略也相似, 只是各自所指不同. 眞知是知得眞箇如此, 不只是聽得人說, 便喚做知. 覺, 則是忽然心中自有所覺悟, 曉得道理是如此. 人只有兩般心: 一箇是是底心, 一箇是不是底心. 只是才知得這是箇<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箇'의 순서가 '箇是'로 뒤집혀있다.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是箇'를 주석처리했다. 여유량본과 전경당본에서는 저본(중화서국판)과 같다.</ref>不是底心, 只這知得不是底心底心, 便是是底心. 便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 知得不是底心便是主, 那不是底心便是客. 便將這箇做主去治那箇客, 便常守定這箇知得不是底心做主, 莫要放失, 更那別討箇心來喚做是底心! 如非禮勿視聽言動, 只才知得這箇是非禮底心, 此便是禮底心, 便莫要視. 如人瞌睡, 方其睡時, 固無所覺. 莫敎纔醒, 便抖擻起精神, 莫要更敎他睡, 此便是醒. 不是已醒了, 更別去討箇醒, 說如何得他不睡. 程子所謂‘以心使心’, 便是如此. 人多疑是兩箇心, 不知只是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而已.”
'''대답: 대략 비슷하니, 그저 각자 지시하는 바[所指]가 다를 뿐이다. 참된 앎[眞知]은 참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단지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다. 깨달음[覺]이란 홀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깨닫는 바[覺悟]가 있어서 도리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옳은[是]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옳지 않은[不是] 마음이다. 그저 이것이 '옳지 않은 마음'임을 알기만 하면 곧 이 '옳지 않은 마음'을 아는 마음[知得不是底心底心]이 바로 '옳은 마음[是底心]'이다.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이 바로 주인(主)이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이 바로 손님(客)이다. 이것을 주인(主)으로 삼아 저 손님(客) 쪽을 다스려서, 항상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굳게 지켜[守定] 주인(主)으로 삼고 놓치지[放失] 말아야 하니, 다시 어디서[那]<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별도로 마음을 마련해와서[討]<ref>'討'는 물건을 구해다 온다는 뜻이다.</ref> '옳은 마음'이라고 부를 것인가?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聽言動]<ref>논어 12:1.</ref>는 말의 경우, '이건 예(禮)가 아니구나'라고 아는 그 마음[知得這箇是非禮底心]이야말로 바로 '예(禮)의 마음[禮底心]'이니, (이 마음을 주인으로 옹립한 사람은) 곧 (예에 어긋나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瞌睡] 경우, 잠이 든 동안에는 전혀 지각하는[覺]<ref>깨달을 '각(覺)'은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 사물을 지각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쓴 것이다.</ref> 바가 없다. 그저[莫敎]<ref>고문해의에서는 '只是'나 '除是'와 같다고 풀면서 '莫'을 부정사로, '敎'를 사역동사로 보는 해석을 배격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로 어류 130:77을 제시했는데, 사실 어류 전체에서 '막교'가 이런 식으로 쓰인 곳은 130:77 한 군데인 반면 다수의 다른 조목에서는 모두 '~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여전히 의심스럽다. 한어대사전에서는 '막교'를 '막비(莫非)'와 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님이 없다'가 된다. 일역판은 고문해의의 제언을 따랐다.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지만 달리 더 낫게 해석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우선 고문해의를 따라 번역해 두었다.</ref> 막 깨어나자마자[纔醒] 번쩍 정신을 차리고[抖擻起精神]<ref>'두수(抖擻)'는 물건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몸을 번쩍 일으키는 등을 말한다.</ref> 다시는 그 자신이 잠들도록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깨었다[醒]는 것이다. 이미 깨어난 뒤에 다시 별도로 '깨어있음'을 마련해와서 어떻게 하면 그 자신이 다시 잠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마음으로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ref>이정유서 18:85. '질문: 마음은 누가 부립니까? 대답: 마음으로 마음을 부리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저 혼자 하라고 맡겨두면 달아나 버린다. (曰: 心誰使之? 曰: 以心使心則可. 人心自由, 便放去也.)'</ref>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하면) 마음이 두개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데,<ref>마음 A로 마음 B를 통제한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에게 있어 마음은 하나 뿐이라는 주희의 평소 생각에 배치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심사심'이라고 말해도 사실은 하나뿐인 마음이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16:136, 34:196, 96:52 등을 보라.</ref> 단지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릴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元思云: “上蔡所謂‘人須是識其眞心, 方乍見孺子入井之時, 其怵惕·惻隱之心, 乃眞心也.'”
'''원사(元思)가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의 이른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眞心]을 알아야 한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막 보았을 때의 그 경악하며[怵惕] 측은해하는[惻隱] 마음이 바로 참된 마음[眞心]이다.'에 관하여 발언함.<ref>상채어록 권2의 한 대목을 주희가 맹자집주 2A:6에서 인용한 것이다. 맹자집주쪽의 문장은 본 조목과 일치하나 상채어록의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참된 마음이다. (人須識其眞心. 見孺子將入井時, 是眞心也.)'</ref>
曰: “孟子亦是只<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只'가 '只是'로 순서가 뒤집혀있다.</ref>討譬喩, 就這親切處說仁之心是如此, 欲人易曉. 若論此心發見, 無時而不發見, 不特見孺子之時爲然也. 若必待見孺子入井之時, 怵惕·惻隱之發而後用功, 則終身無緣有此等時節也.”
'''대답: 맹자(孟子) 역시 그저 비유를 하나 가져와서[討] 이렇게 친근하고 절실한[親切] 지점 위에서 인(仁)한 마음이란 이와 같음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쉽게 깨닫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 마음의 발현(發見)을 논하자면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으니[無時而不發見], 꼭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경악하며 측은해하는 마음이 발현된 뒤에야 힘을 써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죽을 때 까지 이러한 순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ref>발현된 것을 근거로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음 속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당시 표현으로 이발찰식 공부라고 불렀다. 오늘날 호남성 장사에 해당하는 형호남로 담주(潭州)를 근거지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이러한 방향의 공부를 주장했는데, 이를 통칭 '호상학(湖湘學)'이라고 부른다. 17:25에 이어 여기에서도 주희는 호상학의 공부방법론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어서 원사가 호상학의 거두인 호굉(胡宏)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ref>
元思云: “舊見五峰答彪居仁<ref>'彪居正'의 오기이다.</ref>書, 說齊王易<ref>성화본, 조선정판본, 조선고사본에서는 '易'을 '愛'로 적었다.</ref>牛之心云云, 先生辨之, 正是此意.”
'''원사(元思)가 말함: 옛날 오봉(五峰)<ref>호굉(胡宏, 1105~1161)이다. 호상학의 거두로 장식(張栻, 1133-1180)의 스승이다.</ref>이 표거정(彪居正)에게 답한 편지에서 제나라 임금(齊王)이<ref>맹자와 대담한 제선왕을 말한다.</ref> 소를 바꾼 마음[易牛之心]<ref>맹자 1A:7. 제나라 선왕이 제사에 쓰일 희생물인 소가 두려움에 떨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일을 말한다.</ref> 운운한 것을 보았는데,<ref>호굉의 주저인 지언(知言) 권 4에 이 대담이 실려있다. '다른날 물었다: 사람이 인하지 못한 까닭은 그 좋은 마음을 놓쳐서입니다. 놓친 마음을 가지고 (본래의 좋은) 마음을 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답: 제나라 임금이 소를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이 좋은 마음의 싹이 이욕(利欲)의 틈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드러난 그것을 붙잡아 간직하고 간직하여 기르고 길러서 확충하여 매우 커질 때까지 그치지 않으면 하늘과 똑같아진다. 이 마음이 발현하는 단서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핵심은 그것을 인식하는데 있을 뿐이다.(他日問曰: 人之所以不仁者, 以放其良心也. 以放心求心, 可乎? 曰: 齊王見牛而不忍殺, 此良心之苖裔, 因利欲之間而見者也. 一有見焉, 操而存之, 存而養之, 養而充之, 以至于大大而不已, 與天同矣. 此心在人, 其發見之端不同, 要在識之而已.)</ref> 선생님께서 (호굉과 표거정 사이의)그 대담을 논변하신 글<ref>주희가 장식, 여조겸과 함께 1170년(41세)에 완성한 호자지언의의(胡子知言疑義)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회암집 권 73에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이 상당하며 또 본 조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고 하기 어려우므로 인용하지는 않겠다.</ref>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曰: “然. 齊王之良心, 想得也常有發見時. 只是常時發見時, 不曾識得, 都放過<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이 뒤에 '去'자가 있다.</ref>了. 偶然愛牛之心, 有言語說出, 所以孟子因而以此推廣之也.”
'''대답: 그렇다. 제나라 임금(齊王)의 좋은 마음[良心]도 생각해 보면 역시 늘상 발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평상시 발현될 적에는 그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어서 모두 놓쳐버렸을[放過] 뿐이다. 우연히 소를 아끼는 마음[愛牛之心]이 말로 발화되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가 그 기회에 그것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又問: “自非物欲昏蔽之極, 未有不醒覺者.”
'''다시 질문: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지[物欲昏蔽之極]않은 이상 (여지껏) 깨어나지[醒覺]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曰: “便是物欲昏蔽之極, 也無時不醒覺. 只是醒覺了, 自放過去, 不曾存得耳.” 僩(69이후).
'''대답: 설령<ref>'便是'는 '설령[即使]', '비록[雖是]'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문해의를 참조하라.</ref>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사람은) 깨어나지 못할 때가 없다. 단지 깨어나고 나서도 스스로 놓쳐버려[放過去] 한번도 (제대로) 간직하지[存得] 못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8 友仁說“明明德”: “此‘明德’乃是人本有之物, 只爲氣稟與物欲所蔽而昏. 今學問進修, 便如磨鏡相似. 鏡本明, 被塵垢昏之, 用磨擦之工, 其明始現. 及其現也, 乃本然之明耳.”
'''내(友仁)가 ‘명명덕(明明德)’을 설명했다: 이 ‘명덕(明德)’은 바로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인데, 단지 기품(氣稟)<ref>각자가 타고난 정신/신체적 퀄리티를 말한다. '품'은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는 뜻이다.</ref>과 물욕(物欲)에 뒤덮혀 흐려졌을 뿐입니다. 지금 학문(學問)을 하여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아나가는[進修]<ref>'진수'는 주역 건괘 문언전의 '진덕수업(進德修業)'에서 나온 말이다. 주희는 주역본의에서 '진덕'을 마음의 진정성(忠信)을 배양하는 공부로, '수업'을 언행을 가다듬고 단속하는 공부로 풀이했다.</ref> 것은 마치 거울을 갈고닦는[磨鏡]<ref>당시 거울은 청동거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경'이란 유리거울을 헝겁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청동거울을 숯돌 등을 가지고 갈아내는 작업에 가깝다.</ref> 것과 비슷합니다. 거울은 본래 밝지만 먼지와 때[塵垢]에 의해 흐려진 것을 갈고닦는[磨擦] 노력을 들여야만 그 밝음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드러나게 되면 곧 본래의 밝음[本然之明]일 뿐입니다.
曰: “公說甚善. 但此理不比磨鏡之法.”
'''대답: 그대(公)의 설명이 매우 좋다. 다만 이 이치(理)는 거울을 갈고닦는 법[磨鏡之法]으로 비유할 수 없다.
先生略擡身, 露開兩手, 如閃出之狀, 曰: “忽然閃出這光明來, 不待磨而後現, 但人不自察耳. 如孺子將入於井, 不拘君子小人, 皆有怵惕·惻隱之心, 便可見.”
선생이 몸을 약간 일으켜 두 손을 펼쳐 (빛이) 번쩍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이고서 말함: 홀연히 이 광명(光明)이 번쩍 나오는 것이지, 갈고닦기를 기다린 뒤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스스로 (이 광명을) 살피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군자(君子)냐 소인(小人)이냐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드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友仁云: “或問中說‘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而其本體已洞然’, 便是這箇道理.”
'''내가(友仁) 말함: 《대학혹문》 중에 ‘그러므로 제아무리 뒤덮혀 흐려짐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이 빈틈[空隙] 속에서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직전 17:27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ref>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先生頷之, 曰: “於大原處不差, 正好進修.” 友仁(69때).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함: 큰 근원[大原]의 차원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기에[進修] 딱 좋을 때이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9 問: “或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而吾之'가 더 있다.</ref>所以明而新之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又'가 더 있다. 조선고사본처럼 인용해야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非可以私意苟且爲也.’ 私意是說著不得人爲, 苟且是說至善.”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구차한 것을[苟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의(私意)는 인위(人爲)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구차(苟且)는 지극한 선[至善]을 말하는 것입니다.<ref>대학혹문 인용구는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어야 맞겠으나 여기서 질문자가 '구차(苟且)'가 '지선(至善)'을 지시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번역해 두었다. '구차(苟且)'라는 표현은 오늘날 한국어에서 '구차한 살림살이'의 경우처럼 가난하고 변변찮은 모양새를 뜻하지만, 주희 당시에는 '임시변통(makeshift)' 같은 뜻으로 쓰였다. 질문자가 구차(苟且)를 지선으로 오인한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 주석을 보라.</ref>
曰: “才苟且, 如何會到極處!”
'''대답: 조금이라도 구차하면[苟且] 어떻게 지극한 지점[極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賀孫擧程子<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以'가 더 있다.</ref>義理精微之極<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姑以至善目之之語'가 더 있다. 이렇게 인용해야 문장이 현행본 대학혹문에 더 가깝게 된다.</ref>.
'''내가(賀孫) 정자(程子)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義理)’<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정이의 말이다.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원출전은 이정유서 15:183이다. '선이란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우선은[且] '지선'이라고 지목한다.(善者, 義理之精微, 無可得名. 且以至善目之.)' '임시로[姑]'나 '우선은[且]'은 모두 '구차(苟且)'와 같다. 최초의 질문자와 섭하손(두 사람은 동일인일 수도 있다)은 정자가 계속해서 지극한 진리에 '구차하게' 지선(至善)이라고 임시적인 라벨을 붙이고 있다고 하니 대학혹문의 다른 구절에 등장한 '구차(苟且)'라는 표현 역시 지선(至善)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오인한 듯하다.</ref>라는 말을 거론했다.
曰: “大抵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事皆有箇極好處. 今之人, 多是理會得半截, 便道了. 待人看來, 喚做好也得, 喚做不好也得. 自家本不曾識得到, 少刻也會入於老, 也會入於佛, 也會入於申韓之刑名. 止緣初間不理會到十分, 少刻便沒理會那箇是白, 那箇是皂, 那箇是酸, 那箇是鹹. 故大學必使人從致知直截要理會透, 方做得. 不要恁地半間半界, 含含糊糊. 某與人商量一件事, 須是要徹底敎盡. 若有些子未盡處, 如何住得. 若有事到手, 未是處, 須著極力辨別敎是. 且看孟子, 那箇事恁地含糊放過<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去'가 더 있다.</ref>! 有一字不是, 直<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須'가 더 있다.</ref>爭到底. 這是他見得十分極至, 十分透徹, 如何不說得?” 賀孫(62이후).
'''대답: 대체로 지선(至善)은 그저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 100퍼센트 단정하고 딱 맞아서[端正恰好] 조금도 옳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 조금도 (목표에) 이르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이다. 예컨대 임금을 섬김[事君]에 반드시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섬긴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경(敬)이라 하고, 백성을 다스림[治民]에 반드시 요(堯)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인(仁)이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반절[半截]만 이해하고서 다 했다고 말한다. 남이 보고서 판단하기를 좋다고 해도 괜찮고[得] 좋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得]는 식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15:116을 참조하라.<ref>여기서 '득(得)'은 현대중국어 '行(xing)', 영어 'OK'와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나른한 태도를 뜻한다.</ref> 자기 자신의 인식이 본래 (목표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 조금만 지나면 노자(老子)에게 들어갈 수도 있고, 부처[佛]에게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형명학(刑名)에도 들어갈 수 있다.<ref>전국시대 법가, 특히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문을 형명(刑名) 또는 형명(形名)이라고 부른다. 이는 형벌과 관련된 이름은 아니다. 관료 각각에게 부여된 직무의 내용이 명칭(名)이고, 실제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형체(形)이다. 형체와 명칭, 실질과 명칭이 서로 부합하도록 국가기구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형명학'이라는 별칭이 나온 것이다. 풍우란, 중국철학사(上), 1999. P.514-515.</ref> 그저 애초에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어느 것이[那] 희고 어느 것이 검으며,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짠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치지(致知) 단계에서부터 칼로 자른듯[直截]<ref>'직절(直截)'은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확실성, 철저성을 의미한다.</ref> 철저히 이해하도록[理會透] 요구하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어중간하고[半間半界]<ref>'반간불계(半間不界)'와 같다. 철처하지 못하다는 뜻이다.</ref> 웅얼거리듯[含含糊糊]<ref>함호(含糊)는 말소리가 또렷하지 않고 웅얼거린다는 뜻이다.</ref>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남과 무슨 일을 상의할 때에는 반드시 남김없이 철저히 하고자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다면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일이 손에 들어왔을 때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모름지기 극력(極力)으로 변별하여 맞게 만들어야 한다. 또 맹자(孟子)를 보라. (그가) 무슨 일을 그렇게 웅얼웅얼 대충 넘어가던가? 한 글자라도 맞지 않으면 끝까지[到底] 다투었다. 이(렇게 다툰 이유)는 그의 이해가 100퍼센트 지극하고 100퍼센트 투철했기 때문이니, (이러하다면 맹자가) 어찌 논변[說]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f>여기서는 심상하게 '말하다[說]'라고 풀어서는 안 된다. 논변을 너무 좋아한다는 당시의 악평에 대한 맹자의 변론으로 맹자 3B:9를 참조하라.</ref>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0 問: “或問說明德處云: ‘所以應乎事物之間, 莫不各有當然之則.’ 其說至善處, 又云: ‘所以見於日用之間者, 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二處相類, 何以別?”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기를 ‘사물(事物)에 응하는 사이에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혹문에서 지선(至善)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또 이르기를 ‘일상생활[日用] 사이에 나타나는 바에 각각 본래 그러한 일정한 법칙[本然一定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두 부분이 서로 유사한데, 어떻게 구분합니까?<ref>현행본 대학혹문에는 질문자 진순이 인용한 두 문구 가운데 후자만 있다. 전자는 아마도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개정의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ref>
曰: “都一般. 至善只是明德極盡處, 至纖至悉, 無所不盡.” 淳(61·70때).
'''대답: 모두 같은 이야기다. 지선(至善)은 단지 명덕(明德)이 남김없이 지극한 곳[極盡處]일 뿐이니, 지극히 섬세하고 상세하여[至纖至悉] 다하지 않음이 없다.<ref>같은 취지의 발언이 14:114에서도 보이는데 이 역시 진순이 질문하고 기록한 조목이다.</ref>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 17:31 仁甫問: “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다음 인용구에 대한) 인보(仁甫)의 질문: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ref>대학혹문. 17:29를 참조하라.</ref>
曰: “此是程先生說. 至善, 便如今人說極是. 且如說孝, 孟子說‘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此是不孝. 到得會奉養其親, 也似煞强得這箇, 又須著如曾子之養志, 而後爲能養. 這又似好了, 又當如所謂‘先意承志, 諭父母於道', '不遺父母惡名’, 使'國人稱願道‘幸哉有子如此’', 方好.”
'''대답: 이는 정(程) 선생의 설명이다. 지선(至善)은 곧 요즘 사람들이 '극히 옳다[極是]'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효(孝)를 말함에 있어, 맹자(孟子)가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보지 않는다’<ref>맹자 4B:30.</ref>고 한 것, 이것은 불효(不孝)이다. 자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경우는 역시 (앞서 말한) 그것보다는 꽤[煞] 나은[强得] 듯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증자(曾子)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한[養志] 것과 같이 해야만<ref>맹자 4A:19. 아버지의 의지를 살펴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쪽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말한다.</ref> 비로소 봉양을 잘하는 것이다. 이정도로도 좋은 듯하지만, 다시 마땅히 이른바 ‘부모의 뜻을 한발 앞서 헤아려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道)로 인도하며',<ref>예기 제의편. '군자의 효도란 (어버이의) 생각을 한 발 앞서 알아차려 그 뜻을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봉양이나 하는 사람이니 어찌 효도한다고 하겠나?(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安能為孝乎?)</ref>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아',<ref>예기 제의편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자기 행실을 삼가서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으면 잘 보내드렸다고 할 만하다.(父母旣沒,愼行其身,不遺父母惡名,可謂能終矣.)'</ref>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저런 아들이 있어서."라고 말하게'<ref>예기 제의편. '좋은 고기를 익혀서 드리는 것은 효가 아니라 봉양[養]이다. 군자가 말하는 효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아들이 있어서."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효이다.(亨孰膻薌,嘗而薦之,非孝也,養也。君子之所謂孝也者,國人稱愿然曰:『幸哉有子!』如此,所謂孝也已).</ref> 해야만 충분하다 하겠다.
又云: “孝莫大於尊親, 其次能養. 直是到這裏, 方喚做極是處, 方喚做至善處.”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효(孝)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尊親]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잘 봉양하는 것[能養]이다.<ref>예기 제의편. '큰 효도는 존친이요, 그 다음은 욕먹이지 않는 것이요, 그 아래가 잘 봉양하는 것이다.(大孝尊親,其次弗辱,其下能養)'</ref>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극히 옳은 곳[極是處]'이라 하고, 비로소 지선(至善)한 곳이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2 郭德元問: “或問: ‘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此三者, 求之古今人物, 是有甚人相似?”
'''곽덕원(郭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오직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있고, 또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不屑] 자가 있으며, 또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이다.</ref>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가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문구를 약간 축약한 형태이다. 아래 원주에서 인용한 탁록(卓錄) 쪽은 '因'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고 하였습니다. 이 세 부류를 고금(古今)의 인물 가운데서 찾아보면 누구와 비슷합니까?
曰: “如此等類甚多. 自謂能明其德而不屑乎新民者, 如佛·老便是; 不務明其明德, 而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如管仲之徒便是; 略知明德新民, 而不求止於至善者, 如前日所論王通便是<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如此'가 더 있다.</ref>. <卓錄云: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因<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狃'으로 썼다.</ref>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如前日所論王通之事是也.”><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 전체가 없는 대신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선생은 며칠 앞서 왕통론(王通論)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先生前此數日作王通論, 其間有此語.)'</ref> 看他於己分上亦甚修飭, 其論爲治本末, 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狹, 不曾就本原上著功,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始是. 看古之聖賢別無用心, 只這兩者是喫緊處: 明明德,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 正如佛家說, ‘爲此一大事因緣出見於世’, 此亦是聖人一大事也. 千言萬語, 只是說這箇道理. 若還一日不扶持, 便倒了. 聖人只是常欲扶持這箇道理, 敎他撑天柱地.” 文蔚(59이후).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卓録同. 又問: "秦漢以下, 無一人知講學明理, 所以無善治.” 曰: “然.” 因泛論歷代以及本朝太宗眞宗之朝, 可以有爲而不爲. “太宗每日看太平廣記數卷, 若能推此心去講學, 那裏得來? 不過寫字作詩, 君臣之間以此度日而已. 眞宗東封西祀, 糜費巨萬計, 不曾做得一事. 仁宗有意於爲治, 不肯安於小成, 要做極治之事. 只是資質慈仁, 卻不甚通曉用人, 驟進驟退, 終不曾做得一事. 然百姓戴之如父母. 契丹初陵中國, 後來卻服仁宗之德, 也是慈仁之效. 緣它至誠惻怛, 故能動人如此.' 이 내용은 선두 네 글자를 제외하고 127:8과 일치하므로 그쪽을 참조하라. 여기서 번역하지는 않겠다.</ref>
'''대답: “이러한 부류는 매우 많다. 스스로 자신의 (밝은) 덕(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로는 예컨대 불가와 노자[佛·老]가 바로 그렇다.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예를 들어 관중(管仲)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는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ref>584-617. 호는 문중자(文中子).</ref>이 바로 그렇다. <탁(卓)의 기록에는 “또 이 두 가지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작은 성취[小成]에 안주하고 근시안적 이익[近利]을 따라서[因]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의 경우가 그렇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일신의 차원[己分上]에서도 깊이 수양했으며[修飭], 그 다스림의 본말(本末)을 논한 것도 조리가 있었으니, 이 세상[斯世]에 대해 진지하게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스케일[規模]이 얕고 좁아서 일찍이 근본[本原]의 차원에서는 힘을 쓰지[著功]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做不徹] 못한 것이다. 반드시 그 최선의 것[極]<ref>지선(至善)을 말한다.</ref>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만 한다. 가만 보면 옛 성현(聖賢)은 다른데 마음을 씀이 없었고, 그저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ref>만이 긴요한 부분[喫緊處]이었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사욕(私欲)이 없기를 원했고,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든 각각의 사안(事事物物)에 대해 모두 마땅하게 처신하기를 원했다.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했다’<ref>법화경 서품 '제불과 세존이 오직 이 하나의 큰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했다.(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ref>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성인(聖人)의 하나의 큰일[一大事]이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단지 이 도리를 설명할 뿐이다. 만약 하루라도 부지(扶持) 않으면 곧 쓰러져버린다. 성인(聖人)은 그저 언제나 이 도리를 부지하여 하늘과 땅을 지탱하게[撑天柱地] 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33 問: “明德而不能推之以新民, 可謂是自私.”
'''질문: 명덕(明德)을 밝혔으되 그것을 미루어 백성을 새롭게하지[新民] 못한다면, 자기 생각만 한다[自私]<ref>자기 자신만을 위함, 자기 생각만 함,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있음. 주희는 보통 '자사자리(自私自利)'와 같은 형태로 사용하며 주로 불교를 비판할 적에 꺼내는 표현이다. 불교는 자기 일신의 구원만 신경쓸 뿐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취지이다.</ref>고 할 만합니다.
曰: “德旣明, 自然是能新民. 然亦有一種人不如此, 此便是釋·老之學. 此箇道理, 人人有之, 不是自家可專獨之物. 旣是明得此理, 須當推以及人, 使各明其德. 豈可說我自會了, 我自樂之, 不與人共!”
'''대답: 덕(德)이 이미 밝아졌다면 자연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와 노자의 학문이다. 이 도리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미 이 이치를 밝혔다면, 반드시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推以及人] 각자 자기 덕(德)을 밝히게 해야 한다. 어찌 나 혼자 해냈으니 나 혼자만 그것을 즐기고 남과 공유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因說: 曾有學佛者王天順, 與陸子靜辨論云: “我這佛法, 和耳目鼻口髓腦, 皆不愛惜. 要度天下人, 各成佛法, 豈得是自私!”
'''이어서 (내가) 말함: 일전에 불교를 배운 왕천순(王天順)<ref>누군지 확실치 않다. 상산집(象山集) 권 2의 여왕순백(與王順伯) 제 2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왕천순은 왕순백의 이름을 오기한 것일 수 있다.</ref>이 육자정(陸子靜)<ref>육구연이다.</ref>과 변론하며 이르기를 '나의 이 불법(佛法)은 귀·눈·코·입·골수·뇌[耳目鼻口髓腦]까지 모두 다<ref>'和...皆'는 현대 중국어 '連...都'와 같다. '~까지 모두다', '~마저도 모두 다' 정도의 의미이다.</ref> 아끼지 않고 천하 사람들을 제도하여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데 이게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自私]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先生笑曰: “待度得天下人各成佛法, 卻是敎得他各各自私. 陸子靜從初亦學佛, 嘗言: ‘儒佛差處是義利之間.’ 某應曰: ‘此猶是第二著, 只它根本處便不是. 當初釋迦爲太子時, 出遊, 見生老病死苦, 遂厭惡之, 入雪山修行. 從上一念, 便一切作空看, 惟恐割棄之不猛, 屛除之不盡. 吾儒卻不然. 蓋見得無一物不具此理, 無一理可違於物. 佛說萬理俱空, 吾儒說萬理俱實. 從此一差, 方有公私·義利之不同.’ 今學佛者云‘識心見性’, 不知是識何心, 是見何性.” 德明(44이후).
'''선생이 웃으며 말함: 천하 사람들이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도록 제도하겠다는 것은<ref>서두의 '대(待)'는 '욕(欲)'이나 '장요(將要)'와 같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말한다.</ref> 도리어 그들 각자가 자기 생각만 하도록[各各自私] 가르치는 것이다. 육자정(陸子靜) 역시 처음에는 불교를 배웠는데,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차이는 의(義)와 이(利)의 차이이다’고 하였다.<ref>이 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175년 아호에서의 만남, 혹은 1181년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ef> 내가 응답하기를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第二著]이다. 그저 그 근본(根本)부터가 옳지 않다. 당초 석가(釋迦)가 태자(太子)였을 때 성문 밖으로 나가 노닐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설산(雪山)에 들어가 수행하였다.<ref>석가모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을 말한다.</ref> 그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곧 일체를 공(空)으로 보게 되었고, 오직 그것을<ref>본질적으로 허망한 이 세상 일체를</ref> 잘라내어 버림[割棄]이 과감하지 못할까, 제거함[屛除]이 완벽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ref>불교의 출세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세간의 일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ref> 우리 유학[吾儒]은 도리어 그렇지 않다. 대개 한 물건도 이 이치(理)를 갖추지 않음이 없고, 한 이치도 사물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이치[萬理]가 모두 헛되다[空]고 말하고, 우리 유학은 모든 이치가 모두 진실[實]하다고 말한다.<ref>'실(實)'을 '진실하다'고 번역하긴 했지만, 여기서 '공'은 내용물이 빈 그릇을, '실'은 내용물이 가득찬 그릇을 연상시키고 있음에 주의하라. 주희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는 본질이자 당위(곧,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가 '진실되다'라고 말할 때는 불교에서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그러한 본질이자 당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ref> 이 하나의 차이로부터 비로소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의 차이가 있게 된다.’ 지금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識心見性]’고 말하지만, 대체 무슨 마음을 알고 무슨 성품을 본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o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 知止而後有定以下一段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17:34 問: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머무를 곳을 알 수 있으면[能知所止] 곧 마음[方寸] 속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 모두 확정불변한 이치[定理]가 있게 된다.’에 관한 질문.<ref>대학혹문. 14:126과 163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고한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져서 각각의 경우에 객관적인 도덕률이 확고하게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知止도 인지, 有定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ref>
曰: “定·靜·安三項若相似, 說出來煞不同. 有定, 是就事理上說, 言知得到時, 見事物上各各有箇合當底道理. 靜, 只就心上說.”
'''대답: 정(定)·정(靜)·안(安)<ref>대학 본문에서 제시한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득(得) 다섯 단계 가운데 세 꼭지를 말한 것이다. 14:157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마치 추운 자가 옷을 갈망하고 굶주린 자가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너무 확정적이라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ref> 세 항목은 비슷한 듯하지만 설명하면 자못 다르다. 확정됨(定)이 있다는 것은 사리(事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앎이 지극해졌을 때 사물마다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도리가 있음을 (확실하게) 본다는 말이다. 고요함(靜)은 (같은 내용을)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뿐이다.<ref>14:129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
問: “‘無所擇於地而安’, 莫是‘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否?”
'''질문: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히 안정된다’<ref>대학혹문</ref>는 것은 아마도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한대로 행하고,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한대로 행한다’<ref>중용 제 14장. '소(素)'는 '현재(見在)'의 뜻이다.</ref>는 것 아닙니까?”
曰: “這段須看意思接續處. 如‘能得’上面帶箇‘慮’字, ‘能慮’上面帶箇‘安’字, ‘能安’上面帶箇‘靜’字, ‘能靜’上面帶箇‘定’字, ‘有定’上面帶箇‘知止’字, 意思都接續. 旣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靜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邊也安, 在富貴也安, 在貧賤也安, 在患難也安.<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한 번 생각해 보라(看如何? 公且看,)'가 더 있다.</ref> 不見事理底人, 有一件事, 如此區處不得, 恁地區處又不得, 這如何會有定! 才不定, 則心下便營營皇皇, 心下才恁地, 又安頓在那裏得! 看在何處, 只是不安.” 賀孫(62이후).
'''대답: 이 단락은 모름지기 의미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능득(能得)’ 위에는 ‘려(慮)’ 자가 있고, ‘능려(能慮)’ 위에는 ‘안(安)’ 자가 있으며, ‘능안(能安)’ 위에는 ‘정(靜)’ 자가 있고, ‘능정(能靜)’ 위에는 ‘정(定)’ 자가 있으며, ‘유정(有定)’ 위에는 ‘지지(知止)’ 자가 있으니, 뜻이 모두 이어진다. 이미 사물에 확고불변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보고서 이 마음이 이렇게 고요해졌다면[寧靜], 어떤[看]<ref>의문구 앞에 나오는 '간(看)'은 '그 어떤... 막론하고(不管, 儘管)'으로 풀이한다. 14:143, 157을 참조하라.</ref> 상황에 처했느냐를 막론하고, 여기에 있어도 편안하고[安], 저기에 있어도 편안하며, 부귀(富貴)에 있어도 편안하고, 빈천(貧賤)에 있어도 편안하며, 환난(患難)에 있어도 편안하다.<ref>부귀, 빈천, 환난은 질문자가 인용한 중용 제 14장에서 들고 있는 예시들이다.</ref> 사리(事理)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안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고 저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으니, 이런 경우 어떻게 확고함(定)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확고(定)하지 못하면 마음속이 곧바로 안절부절 불안하니[營營皇皇], 마음속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면 또 어디에 (자신을) 편안히 둘[安頓] 수 있겠는가! 어디에[看] 있든 그저 불안할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5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硏幾.”
'''‘사려할 수 있으면[能慮] 사안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여 깊음을 지극히하고 기미를 갈고닦는다[隨事觀理, 極深硏幾].’<ref>대학혹문. '극심'과 '연기'는 본래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14:146을 참조하라.</ref>에 관한 질문.
曰: “到這處又更須審一審. ‘慮’字看來更重似‘思’字. 聖人下得言語恁地鎭重, 恁地重三疊四, 不若今人只說一下便了, 此聖人所以爲聖人.” 賀孫(62이후).
'''대답: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 번 신중히 살펴보아야[審]<ref>'심(審)'은 극심연기의 '연(硏)'을 풀이한 말이다.</ref> 한다. ‘려(慮)’ 자는 내 생각에 ‘사(思)’ 자보다[似]<ref>여기서 '사(似)'는 '어(於)'와 같다.</ref> 더 무겁다. 성인이 표현을 고른 것이 이렇게 진중(鎭重)하고 이렇게 거듭 반복되니[重三疊四], 요즘 사람들이 그저 한 번 말하고 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래서 성인은 성인인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6 安卿問: “知止是始, 能得是終. 或問言: ‘非有等級之相懸.’ 何也?”
'''안경(安卿)의 질문: 지지(知止)는 시작이고 능득(能得)은 끝입니다.<ref>이에 대한 설명은 17:34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대학혹문》에서는 (양자간에) ‘등급(等級)이 서로 현격히 벌어져 있지 않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이 말을 풀어써두어서 표현이 조금 다르다. '공자의 지우학(志于學)부터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 맹자의 선인(善人), 신인(信人)으로부터 성인(聖人), 신인(神人)까지가 실로 등급이 현격히 벌어져 있어서 평생토록 거쳐가는 순서인 것과는 같지 않다.(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ref>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也不是無等級,<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여섯 글자가 없다.</ref> 中間許多只是小階級, 無那大階級.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便是大階級, 步卻闊. 知止至能得, 只如志學至立相似, 立至不惑相似. 定·靜·安, 皆相類, 只是中間細分別恁地.”
'''대답: 역시 등급(等級)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의 많은 것들은 단지 작은 계단[階級]들일 뿐 그렇게 큰 계단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ref>논어 2:4에서 공자가 자신이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ref>부터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ref>공자가 7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 경지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많은 것들은 곧 큰 계단이니 보폭이 오히려 넓다.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부터 스스로 섰다[立]<ref>공자가 3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고, 스스로 섰다[立]부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不惑]<ref>40세의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다. 정(定)·정(靜)·안(安)은 모두 비슷한 부류요, 단지 중간에 저처럼 세밀하게 구별했을 뿐이다.
問: “到能得處是學之大成, 抑後面更有工夫?”
'''질문: 능득(能得)의 경지에 이르면 배움에 대성한[學之大成] 것입니까, 아니면 뒤에 공부가 더 있습니까?
曰: “在己已盡了,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亦只是自此推去.” 㝢(61이후).
'''대답: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는[在己] 이미 다 했고,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하지만, (후자는) 역시 그저 여기서<ref>자기 자신의 차원이다.</ref> 미루어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ref>이 부분은 14:152와 흡사하다.</ref>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 古之欲明明德於天下一段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17:37 問: “或問‘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 是能得已包齊家治國說了. 前晩何故又云‘能得後,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질문: 《대학혹문》에서 ‘성의(誠意)에서 평천하(平天下)까지는 저 지선(至善)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ref>대학혹문.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이란 명명덕의 일이요 제가, 치국, 평천하란 신민의 일이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요, 성의부터 평천하까지는 저 지선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ref>라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이 이미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까지 포함하여 설명한 것입니다.<ref>전통시대 유학이 커버하는 영역을 크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을 때, 인용된 대학혹문의 문구대로라면 두 영역이 수기로 일원화된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f>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어찌하여 또 ‘능득(能得)한 뒤에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ref>치인의 영역이 수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제 저녁의 대화란 17:36을 말한다. 17:34 또한 참조하라.</ref>
曰: “以修身言之, 都已盡了. 但以明明德言之, 在己無所不盡, 萬物之理亦無所不盡. 如'至誠惟能盡性', 只盡性時萬物之理都無不盡了. 故盡其性, 便盡人之性; 盡人之性, 便盡物之性.” 㝢<ref>조선고사본에서는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㝢同)'이다.</ref>(61이후).
'''대답: 수신(修身)으로 말하자면 이미 다 된 것이다.<ref>대학의 '능득'이란 문구는 수기와 치인 가운데 수기의 측면에 해당한다는 말이다.</ref> 단,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도 남김 없이 다 하고 만물의 이치 또한 남김 없이 다 하는 것이다.<ref>명덕을 밝히는 일을 수기에 국한시켜 보지 말고, 수기와 치인을 포함하는 상위의 범주로 보라는 말이다.</ref> 예컨대 '오직 지극한 진정성(誠)이라야 (자신의) 본성(性)을 온전히 다할 수 있고'<ref>중용 제 22장의 한 구문을 축약한 것이다.</ref>, 오직 (자신의) 본성(性)을 다할 때라야 만물의 이치도 남김 없이 다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性)을 다하면 곧 남의 본성(性)을 다하게 되고, 남의 본성(性)을 다하면 곧 사물의 본성(性)을 다하게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7:38 蜚卿言: “或問云: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伯羽謂' 세 자가 더 있다. '비경(蜚卿)'이 동백우(童伯羽)의 자(字)이므로 한 사람이 연이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ref> 明德之功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內, 或未盡化, 況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德乎?”
'''비경(蜚卿)이 말함: 《대학혹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의지를 참되게 하고[誠其意],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正其心], 각자 자신의 몸을 갈고닦고[修其身], 각자 자신의 어버이를 친애하며[親其親], 각자 자신의 어른을 공경하여[長其長], 천하가 평정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명덕(明德)의 공효(功)가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규문(閨門) 안에서 혹 다 교화시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거늘, 하물며 커다란 천하 전체가 요순(堯舜)의 교화에 순복하여 각자 자신의 덕(德)을 밝힐 수 있으리라 말하시는 것입니까?
曰: “大學‘明明德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是有如此規模, 卻是自家本來合如此, 不如此便是欠了他底.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己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槪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說‘比屋可封’, 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不如此不得. 到得做不去處, 卻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卻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內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爲聖賢之學.” 道夫(60이후).
'''대답: 《대학》의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는 것은 일단은 그 규모(規模)<ref>대강의 윤곽선, 원대한 스케일 같은 의미이다.</ref>가 이러하다고 설명한 것뿐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은 본래부터 응당 이와 같아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곧 (본래의) 자기 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윤(伊尹)은 평범한 백성 한 사람이라도 (요순과 같은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어서 도랑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했다.<ref>맹자 5A:7.</ref> (그러나) 이윤(伊尹)도 역시 그저 대체로 이렇게 하고자 했다는 것 뿐이니, 또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예컨대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만하다[比屋可封]’<ref>한서 왕망전(王莽傳). '명성한 세상에는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많으므로, 요순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明聖之世,國多賢人,故唐虞之時,可比屋而封.)'</ref>는 것 역시 한두 집 정도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의 규모(規模)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며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 뿐이다. (세웠던 스케일에 걸맞게) 해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f>'做不去'는 '할 수 없다', '做得去'는 '할 수 있다'이다.</ref> 규모(規模)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반면<ref>'著'은 '須著'과 같다. '반드시'.</ref> 공부(工夫)는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가야 한다. 규모(規模)와 단계별 순서[次第]도 없이 그저 지엽적인 것들[細碎處]에만 힘을 쓰면 곧바로 (오늘날) 세간의 공리(功利)를 따지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규모(規模)는 있지만 세밀한 공부(工夫)가 없다면 또 한갓 빈 규모(空規模)이고 말 뿐이다. 밖으로는 규모(規模)의 크기를 지극히하고 안으로는 미루어 (구체적인) 사사물물(事事物物)의 부분에 이르게 하여 그 어느 방면으로도 공부(工夫)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聖賢)의 배움이 성현의 배움이 되는 까닭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39 問或問“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
'''《대학혹문》의 '마음의 신명[心之神明]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ref>대학혹문. '저 지(知) 같은 경우는 마음의 신명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若夫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신명의 신(神)은 우리 의식의 완성도가 높음을, 명(明)은 의식의 활동성을 가리킨다. 재(宰)는 컨트롤한다는 의미이다. 묘(妙)를 운용하다로 풀이한 것은 17:40을 참조하라.</ref>에 대한 질문.
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대답: 신(神)은 그렇게 정밀하고 아름답다[精彩]는 것이요, 명(明)은 그렇게 밝게 빛난다는[光明] 것이다.
又曰: “心無事時, 都不見; 到得應事接物, 便在這裏; 應事了, 又不見: 恁地神出鬼沒!”
'''다시 말함: 마음은 일이 없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도 응사접물(應事接物)하게 되면 곧 이 안에[在這裏]<ref>마치 주인의 부주의로 인해 풀려나 달아나버린 가축처럼,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이 안에 없는' 상태가 바로 '방심(放心)'의 상태이다.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면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여 집중시킬 수 있는데 이렇게 집중된 상태를 어류에서는 자주 '여기 있다(在這裏)'고 표현한다.</ref> 있으며, 일에 대한 응대를 마치고 나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니, 이렇게나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
又曰: “理是定在這裏, 心便是運用這理底, 須是知得到. 知若不到, 欲爲善也未肯便與你爲善; 欲不爲惡, 也未肯便不與你爲惡. 知得到了, 直是如飢渴之於飮食. 而今不讀書時, 也須收斂身心敎在這裏, 乃程夫子所謂敬也. ‘整齊嚴肅’, 雖只是恁地, 須是下工夫, 方見得.”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이치(理)는 이 안에<ref>자신의 내면을 말한다.</ref> 확고하게 있고, 마음[心]은 바로 이 이치(理)를 운용(運用)하는 주체이니, 반드시 앎[知]이 지극해져야 한다. 만약 앎[知]이 지극해지지 못하면 선(善)을 행하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선(善)을 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악(惡)을 행하지 않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악(惡)을 행하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앎[知]이 지극해지고나면 바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마시고 먹으려는 것[飢渴之於飮食]과 같이 (선을 행하고 불선을 피하게) 된다. 지금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여[收斂身心] 여기에 있도록[在這裏]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부자(程夫子)<ref>정씨 형제를 말한다.</ref>께서 말씀하신 경(敬)이다.<ref>경에 대한 설명은 17:1부터 18까지에 걸쳐 자세히 적혀있으니 참조하라.</ref> ‘정제엄숙(整齊嚴肅)’이 비록 이런 것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실제로 힘써 해보아야만[工夫]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0 德元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或問"知妙衆理而宰萬物者也",)'라고 적혀있다.</ref>: “何謂‘妙衆理’?”
'''덕원(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의)‘묘중리(妙衆理)’는 무슨 말입니까?<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大凡道理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或錄此下云: “便只是理. 才知得,”><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便只是知得我底道理, 非是以我之知去知彼道理也. 道理固本有, 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或錄云: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夏熱冬寒,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所以謂之‘妙衆理’, 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或錄云: “蓋知得此理也.”>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대답: 무릇 도리(道理)는 모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앎[知]이란 것은 <혹자의 기록에서는 이 다음에 이렇게 말함: “그저 이치(理)일 뿐이다. 알게 되면”> 곧 나에게 있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지, 나의 앎[知]을 가지고 저쪽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ref>주희는 '지(知)'를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하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첫 번째 '앎'과 두 번째 '알게 되는'과 네 번째 '알게 되는'은 어떤 것을 알게 되는 행위(to know)를 뜻하고 세 번째 '나의 앎'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을 뜻한다.</ref> 도리는 물론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앎[知]을 사용해야만 비로소 틔워낼 수 있다.<ref>여기서의 앎은 의식(consciousness)이나 인지(cognition)에 가깝다.</ref> 만약 앎[知]이 없었다면 도리가 무슨 수로 드러나겠는가? <혹자의 기록: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가지고 있던 도리이다. 앎[知]이 없으면 도(道)를 놓아둘 곳이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그런 다음에야 도리가 정박할 곳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임금은 인(仁)하고 신하는 공경(敬)하는 것을, 앎[知]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한다[妙衆理]’고 했으니, 여러 이치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운용(運用)’이라는 글자는 병폐가 있으므로 그저 ‘묘(妙)’ 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혹자의 기록: “대개 이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又問: “知與思, 於身最切緊.”
'''재질문: 앎[知]과 생각[思]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긴요합니다.
曰: “然. 二者只是一事. 知如手, 思是使那手去做事, 思所以用夫知也.” 僩(69이후).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뒤에 총 196자의 긴 주석이 달려있는데, 본 조목과 비교하면 첫 질문은 약간 다르고 주희의 대답 부분은 동일하며, 재질문과 재대답이 없는 형태이다. 첫 질문만 번역하고 주희의 대답부분 번역은 생략한다. '혹자의 기록. 곽형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묘중리'는 무슨 말입니까? 혹시 여러 이치의 오묘한 신비를 탐색하여 주재자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或錄云:郭兄問: "或問'妙衆理而宰萬物者也', 何以謂之妙衆理? 豈非以知能探賾衆理之妙, 而爲之主宰乎?", 曰: "大凡道理, 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便只是理. 才知得, 便是自知得我之道理, 非是我以知去知那道理也. 道理固本有, 須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冬寒夏熱,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所以謂之妙萬理, 如云能運用萬理. 只是運用字又有病, 故只下得个妙字, 蓋知得此理也.")</ref>
'''대답: 그렇다. 그 둘은 하나일 뿐이다. 앎[知]은 손과 같고, 생각[思]은 저 손을 부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니, 생각[思]이란 저 앎[知]을 사용하는 것이다.<ref>여기서의 '앎'은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 혹은 의식(consciousness)에 가깝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1 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다음에 '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이 있다. 해당 부분은 대학혹문의 직접인용이다. 17:39를 보라.</ref>“知如何宰物?”
'''질문: 앎[知]이 어떻게 만물을 주재(宰)합니까?<ref>17:39와 40을 참조하라.</ref>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是知覺.” 道夫(60이후).
'''대답: 지각(知覺)<ref>지각(知覺)은 사태의 패턴을 알아차리고 시비를 구분하는 등 인지적 활동 전반을 말한다. 주희는 심지어 이나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까지도 지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ref>이 없으면 만물을 재제(宰制)<ref>힘을 행사하여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표현으로 '컨트롤하다' 정도의 뜻이다.</ref>할 수 없다. 만물을 재제(宰制)하려면 역시 지각(知覺)해야 한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2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주석으로 '知者妙衆理而宰萬物'가 더 적혀있다.</ref>: “‘宰萬物’, 是‘主宰’之‘宰’, ‘宰制’之‘宰’?”<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부분 전체가 주석처리되어있고, 이어서 역시 주석으로 '答'자가 적혀있다.</ref>
'''누군가의 질문: ‘재만물(宰萬物)’은 ‘주재(主宰)’의 ‘재(宰)’입니까, ‘재제(宰制)’의 ‘재(宰)’입니까?”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대답: 주(主)가 바로 재(宰)이고, 재(宰)가 바로 제(制)이다.<ref>주(主)는 무언가를 소유한 주인, 재(宰)는 일을 통괄하는 매니져, 제(制)는 컨트롤의 뜻이다. 결국 세 글자 모두 같은 실상을 지시하는 말이다.</ref>
又問: “孟子集注言: ‘心者, 具衆理而應萬事.’ 此言‘妙衆理而宰萬物’, 如何?”
'''재질문: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는 ‘마음이란 여러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ref>대학혹문을 말한다.</ref>서는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妙’字便稍精彩, 但只是不甚穩當, ‘具’字便平穩.” 履孫(65때).
'''대답: ‘묘(妙)’ 자는 조금 정채(精彩)롭긴 하지만 그다지 온당(穩當)하진 못하고, ‘구(具)’ 자는 평온(平穩)하다.<ref>'묘'는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해낸다는 인상이 있다. 그와 비교하면 '구'는 훨씬 수수하고 무엇보다도 정적이다.</ref>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43 郭兄問“莫不有以知夫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68자가 더 있다. '當然之則, 如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 臣何故用敬, 父何故用慈, 子何故用孝. 畢竟未曉, 敢以君何故用仁問先生, 伏望敎誨, 俾知所以然之故' 번역은 번역문의 주석쪽을 참조하라.</ref>”
'''곽형(郭兄)이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과 그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其所當然之則]을 알지 못함이 없다”<ref>이치(理)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는 어떤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한다. 예컨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은 우리가 이런저런 상황에 처하였을 때 준수해야 마땅한 법칙을 말한다. 예컨대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법칙이다. 현행본 대학혹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천하의 사물에는 반드시 각자 그렇게 되는 까닭과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이다.(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또, 혹문의 전 5장 부분에서도 '다른 수 없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점과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고 적고 있다.</ref>에 대해 질문함.<ref>조선고사본에 적힌 68자를 이어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란 임금의 인(仁),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비의 자(慈)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이란 임금은 어째서 인(仁)해야 하는지, 신하는 어째서 경(敬)해야 하는지,아비는 어째서 자(慈)해야 하는지, 아들은 어째서 효(孝)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끝내 깨치지 못하겠으니, 감히 '임금은 어째서 인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선생님께 묻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게 해주십시오.</ref>
曰: “所以然之故, 卽是更上面一層. 如君之所以仁, 蓋君是箇主腦, 人民土地皆屬它管, 它自是用仁愛. 試不仁愛看, 便行不得.<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자연히 이렇게 하게 된다(自然用如此).'</ref> 非是說<ref>조선고사본에서는 '是說'이 '說是'로 적혀있다.</ref>爲君了, 不得已用<ref>조선고사본에서는 '以'</ref>仁愛<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行之'</ref>, 自是理合如此. 試以一家論之: 爲家長者便用愛一家之人, 惜一家之物, 自是理合如此, 若天使之然. 每常思量著, 極好笑, 自那原頭來便如此了.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蓋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 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它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爲哉! 且以仁言之: 只天地生這物時便有箇仁, 它只知生而已. 從他原頭下來, 自然有箇春夏秋冬,<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四象'.</ref> 金木水火土.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此四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이 없다.</ref>故賦於人物, 便有仁義禮智之性.<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自它原頭處便如此了'</ref> 仁<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則'</ref>屬春, 屬木. 且看春間天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天地'가 없다.</ref>發生, 藹然和氣, 如草木萌芽, 初間僅一針許, 少間漸漸生長<ref>조선고사본에서는 '長'을 '發'로 적었다.</ref>, 以至枝葉花實, 變化萬狀, 便可見他生生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生之'가 없다.</ref>意. 非仁愛, 何以如此. 緣他本原處有箇仁愛溫和之理如此, 所以發之於用, 自然慈祥惻隱. 孟子說‘惻隱之端’, 惻隱又與慈仁不同, 惻隱是傷痛之切. 蓋仁, 本只有慈愛, 緣見孺子入井, 所以傷痛之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也'</ref>. 義屬金, 是天地自然有箇淸峻剛烈之氣. 所以人稟得, 自然有裁制, 便自然有羞惡之心. 禮智皆然. 蓋自本原而已然, 非旋安排敎如此也. 昔龜山問一學者: ‘當見孺子入井時, 其心怵惕·惻隱, 何故如此?’ 學者曰: ‘自然如此.’ 龜山曰: ‘豈可只說自然如此了便休? 須是知其所自來, 則仁不遠矣.’ 龜山此語極好. 又<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引'</ref>或人問龜山曰: ‘“以先知覺後知”, 知·覺如何分?’ 龜山曰: ‘知是知此事, 覺是覺此理.’ 且如知得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是知此事也; 又知得君之所以仁, 臣之所以敬, 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是覺此理也.” 僩(69이후).
'''대답: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란 다시 한 단계 더 위의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은 임금은 두뇌[主腦]여서 인민과 토지가 모두 그의 관할이니 그는 자연히 인애(仁愛)하게 된다. 어디 한번 (임금이) 인애(仁愛)하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즉시 말이 안 된다[行不得].<ref>'행부득(行不得)'은 근본적인 모순이 있어 성립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임금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인데 사람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ref> 임금이 되고 나서 부득이하게 인애(仁愛)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치상 당연히 이렇다는 말이다. 어디 한번 한 집안으로 논해보자. 가장(家長)이 된 자는 곧 온 집안 사람을 사랑하고 온 집안 물건을 아끼게 되니, 이치상 당연히 그렇게 되어 마치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우스우니, 저 근원[原頭]에서부터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또, 아버지가 자애롭게 되는 까닭과 아들이 효도하게 되는 까닭의 경우는, 대개 부자(父子)란 본래 같은 하나의 기(氣)인데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 뿐이므로,<ref>기는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자식의 신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기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양측은 동질의 물질을 두 장소에 나누어둔 것 뿐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물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은 것과 같다.</ref>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지는[恩愛相屬]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중대한 인간관계의 범주[大倫]<ref>예컨대 오륜(五倫) 같은 것이다.</ref>들이 모두 그러하니, 모두 천리(天理)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어찌 억지로 노력하는 요소가 끼어들 틈이 있겠나? 또, 인(仁)으로 말해보자면, 천지(天地)가 이 사물들을 낳으면서 인(仁)이 있게 되니, 그것은<ref>천지를 말한다.</ref> 단지 낳을[生] 줄만 알 뿐이다. 그 근원[原頭]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연히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있게 된다. <먼저 음양(陰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있고 나서 이 네 가지가 있게 된다.><ref>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이 '네 가지'는 춘하추동이다. 다만 조선고사본쪽을 따르자면 이 네 가지는 사상(四象)이다. 사상은 음양이 한 차례 더 분화한 형태, 곧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말한다.</ref> 그러므로 (그것들이) 사람과 사물(人物)에게 부여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性)이 있게 된다. 인(仁)은 봄에 속하고 목(木)에 속한다.<ref>17:19, 6:45를 참조하라.</ref> 또, 봄철에 천지가 만물을 발생시키고 온화한 기운이 가득한 것[藹然和氣]을 보라. 예컨대 초목의 싹[萌芽]이 처음에는 겨우 바늘 하나 크기였다가 이윽고 점점 생장하여 가지, 잎, 꽃, 열매에 이르도록 변화만상(變化萬狀)하니, 이에 그것의<ref>천지.</ref> 낳고 낳는[生生] 의지를 볼 수 있다. (천지의) 인애(仁愛)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것의 본원(本原)에 인애온화(仁愛溫和)의 이치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어 작용할 적에 자연히 자애롭고 측은하다[慈祥惻隱]. 맹자(孟子)가 ‘측은(惻隱)의 단서[端]’<ref>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말한다.</ref>를 말하였는데, 측은(惻隱)은 또 자인(慈仁)과 다르니, 측은(惻隱)은 상심하고 애통함[傷痛]이 간절한 것이다. 대개 인(仁)은 본래 자애(慈愛)만 있을 뿐이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상심하고 애통함이 간절한 것이다. 의(義)는 금(金)에 속하니, 천지에는 자연히 맑고 준엄하며 굳세고 맹렬한 기운[淸峻剛烈之氣]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부여받으면 자연히 재제(裁制)<ref>선을 긋고 잘라내고 절제하고 통제하는 행위.</ref>함이 있게 되고, 자연히 수오지심(羞惡之心)<ref>불명예를 수치스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다.</ref>이 있게 된다. 예(禮)와 지(智)의 경우도 모두 그러하다. 대개 본원(本原)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지, 임의로[旋]<ref>'旋'은 멋대로, 임의로(隨意).</ref> (의도를 가지고) 안배하여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옛날 구산(龜山)<ref>이정의 제자 양시.</ref>이 어떤 배우는 이에게 묻기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이 깜짝 놀라고 측은한데[怵惕惻隱], 어째서 이러한가?’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자연히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구산(龜山)이 말하기를 ‘어찌 그냥 자연히 그렇다고만 말하고 말 수 있는가? 반드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所自來]를 알아야 하니, (그렇게 하면) 인(仁)에서 멀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ref>구산집(龜山集) 권 11, 어록 2. '(선생이) 말함: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에게 반드시 측은지심이 드는데, 자기의 고통이 아닌데도 빠진자를 위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조의 대답: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이) 말함: 어찌 자연스럽게 그러하겠나? 이 이치를 몸소 탐구하여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 인의 도리가 멀지 않게 될 것이다." (曰: "孺子將入於井, 而人見之者, 必有惻隠之心, 疾痛非在己也, 而爲之疾痛, 何也?" 似祖曰: "出於自然, 不可已也." 曰: "安得自然如此? 若體究此理, 知其所從來, 則仁之道不遠矣.")' 주희의 인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ref> 구산의 이 말이 대단히 좋다. 또 어떤 사람이 구산에게 묻기를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친다”에서 앎(知)과 깨우침(覺)은 무슨 차이입니까?’라고 하니, 구산이 말하기를 ‘지(知)는 이 일[事]을 안다는 것이고, 각(覺)은 이 이치[理]를 깨닫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ref>양시가 아니라 이정의 말이다. 이정수언(二程粹言) 권 1에 보인다. 해당 텍스트는 양시가 이정의 어록을 문어체로 바꾼 작품이다. 이때문에 양시의 말인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누군가의 질문: "석씨는 '말 한마디에 깨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선생: "왜 꼭 부처인가? 맹자도 그렇게 말했다.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치고, 먼저 깨친 자가 뒤에 깨친 자를 깨우친다. 앎은 이 일을 안다는 것이고 깨달음은 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或問:釋氏有言下覺,如何? 子曰:何必浮屠氏? 孟子言之矣. 以先知覺後知,以先覺覺後覺. 知者,知此事也. 覺者,覺此理也.)'</ref> 예컨대 임금의 인(仁)과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버지의 자(慈)를 아는 것은 이 일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 신하가 경(敬)하게 되는 까닭, 아버지가 자(慈)하게 되는 까닭, 아들이 효(孝)하게 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4 或問“格物”章本有“所以然之故”.
'''대학혹문의 ‘격물(格物)’ 장(章)에 원래는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라는 표현이 있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기로, 천도가 작동하여 (만물을) 만들어내고 길러냄에, 소리와 색과 모양을 가지고서 천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물(物)이다. 물이 있고 나면, 이 물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까닭에는 각각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어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받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曰: "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ref>
曰: “後來看得, 且要見得‘所當然’是要切處. 若果見得不容已處, 則自可黙會矣.”
'''(이에 대한 선생의) 대답: 나중에 보니, 우선은 ‘그렇게 해야 마땅한 바[所當然]’를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고 절실[要切]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정말로 그만둘 수 없다는[不容已] 측면<ref>'소당연'을 말한다.</ref>을 보게 된다면 저절로 묵묵히 이해할[默會]<ref>묵묵히 이해함은 소리로 발성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개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의 차원에서 절감하여 세상과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함을 말한다.</ref> 수 있게 될 것이다.
===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 단락 ===
* 治國平天下者諸侯之事一段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ref>치국은 제후의 일이고 평천하는 천자의 일이다. 대학혹문 원문에서는 '천자와 제후의 일(天子諸侯之事)'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천자 부분이 생략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ref> 단락
* 17:45 問: “南軒謂: ‘爲己者, 無所爲而然也.’”
'''질문: 남헌(南軒)<ref>장식(張栻)</ref>이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ref>논어 14:25.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목표로 배움에 종사한다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전자가 위기지학, 후자가 위인지학이다.</ref>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也].’<ref> 남헌집 권14. 맹자강의서(孟子講義序). '배우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에 깊이 마음을 두어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려 한다면, 내 생각에 의(義)와 이(利)의 분별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 위하는 바 없이 그러함이 (바로 중용에서 말한) 천명(命)이 그치지 않는 이유이고, 본성(性)이 치우치지 않는 이유이며, 가르침(敎)이 무궁한 이유이다. 무릇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리 되는 것들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요 천리(天理)가 간직된 바가 아니니, 이것이 바로 의와 이의 구분이다.(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爲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爲而然也. 無所爲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敎之所以無窮也. 凡有所爲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 해당 부분은 주희가 대학혹문에서 직접인용하고 있다.</ref>라고 했습니다.
曰: “只是見得天下事皆我所合當爲而爲之, 非有所因而爲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之'를 '也'로 적었다.</ref>. 然所謂天下之事皆我之所當爲者, 只恁地强信不得. 須是學到那田地, 經歷磨鍊多後, 方信得過.” 道夫(60이후).
'''대답: 단지 천하의 일이 모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보았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ref>통상적인 논어 해석에서 벗어나서 '자기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을 위인지학으로,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을 위기지학이라고 본 것이다. 대학혹문 경 1장의 14절에서는 치국과 평천하는 모두 천자나 제후쯤 되는 사람들의 일인데 평범한 사대부가 대학을 읽으며 치국 평천하를 꿈꾸는 것은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위인지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군자란 자신이 모시는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어 백성들에게 요순의 은택을 입히려고 하므로 치국 평천하가 모두 군자의 '직분'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이가 대학의 치국 평천하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직분 내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므로 '위기지학'이 된다. 관련하여 어류 15:156을 보라.</ref> 그러나 이른바 천하의 일이 모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은, 그저 그렇게 억지로 믿는[强信] 것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배워서 저 경지[田地]에 도달하여 많은 경험과 단련[經歷磨鍊]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확실히 믿어지게 된다[信得過].<ref>'得過'의 '득'은 가능성을, '과'는 방향을 나타내는 보어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6 問爲己.
'''위기(爲己)에 대해 묻다.<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這須要自看, 逐日之間, 小事大事, 只是道我合當做, 便如此做, 這便是無所爲. 且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才說要人知, 便是有所爲. 如世上人才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爲人之甚者.” 賀孫(62이후).
'''대답: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보아야 하니, 매일매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저 '나는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다. 예컨대 글을 읽을 때, 그저 '나는 이렇게 (이걸)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자신을 신경써야[理會] 한다'<ref>'리회(理會)'는 종종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살피고 헤아리는 행위를 말한다. 8:91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이 된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이 글을 읽자마자 (자기가) 읽은 것을 활용하여[安排] 완전히[好]<ref>'好'는 이어지는 동작의 완성도가 높음을 나타낸다.</ref> 시문(時文)<ref>과거시험답안.</ref>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남을 위함[爲人]이 심한 경우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7 “‘爲己者, 無所爲而然.’ 無所爲, 只是見得自家合當做, 不是要人道好. 如甲兵·錢穀·籩豆·有司, 到當自家理會便理會, 不是爲別人了理會. 如割股·廬墓, 一則是不忍其親之病, 一則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爲己.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爲人.”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ref>장식의 말. 17:45를 보라.</ref> 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을) 마땅히 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이지, 남들이 '좋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갑병(甲兵)<ref>군무를 말한다.</ref>·전곡(錢穀)<ref>재무를 말한다.</ref>·변두(籩豆)<ref>제사와 의전을 말한다.</ref>·유사(有司)<ref>그밖의 모든 실무를 말한다.</ref>와 같이, 자기 자신이 마땅히 처리[理會]<ref>'리회(理會)'의 번역에 관해서는 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해야 할 때가 되면 곧 처리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할고(割股)<ref>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내 병든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효행의 케이스로 종종 거론된다.</ref>나 여묘(廬墓)<ref>부모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사는 행위. 역시 효행의 일종으로 거론된다.</ref> 같은 것은, 하나는 그 어버이의 병듬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행위이다. 만약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곧 남을 위하는[爲人] 행위이다.<ref> 이 부분은 대학혹문의 특정 구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대저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천하의 사무를 보기를 (모두) 마땅히 해야 하는 자신의 사무로 여기고 수행한다면 갑병, 전곡, 변두, 유사의 업무조차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겠구나 하여 수행한다면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내고 여묘살이하고 망가진 수레와 파리한 말을 타는 것도 모두 남을 위하는[爲人] 것일 뿐이다.(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馬, 亦爲人耳.)'</ref>
器遠問: “子房以家世相韓故, 從少年結士, 欲爲韓報仇, 這是有所爲否?”
'''기원(器遠)<ref>주희의 제자 조숙원(曹叔遠)</ref>의 질문: 자방(子房)<ref>한(漢)의 개국공신 장량(張良, BC 250-BC 186).</ref>이 집안 대대로 한(韓)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선비를 모아 한(韓)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 아닙니까?
曰: “他當初只一心欲爲國報仇. 只見這是箇臣子合當做底事, 不是爲別人, 不是要人知.” 賀孫(62이후).
'''대답: 그는 애당초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저 이것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보았을 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8 行夫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남헌이 말하기를(南軒云)'이 더 있다.</ref>“爲己者無所爲而然”.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다. 이는 모든 일이 다 자신이 응당 해야 할 바라고 보아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도 칭찬을 바라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목적)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也. 這是見得凡事皆吾所當爲, 非求人知, 不求人譽, 無倚無靠之謂否?)'가 더 있다.</ref>
'''행부(行夫)<ref>'행보'라고 읽어야 할지 '행부'라고 읽어야 할지 확실치 않다.</ref>가 “자신을 위하는 자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爲己者無所爲而然]”에 대해 질문함.<ref>이 부분에 대해서는 17:45와 46, 47을 참조하라.</ref>
曰: “有所爲者, 是爲人也. 這須是見得天下之事實是己所當爲, 非吾性分之外所能有, 然後爲之, 而無爲人之弊耳. 且如‘哭死而哀, 非爲生者’. 今人弔人之喪, 若以爲亡者平日與吾善厚, 眞箇可悼, 哭之發於中心, 此固出於自然者. 又有一般人欲亡者家人知我如此而哭者, 便不是, 這便是爲人. 又如人做一件善事, 是自家自肯去做, 非待人敎自家做, 方勉强做, 此便不是爲人也.”
'''대답: 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有所爲者] 남을 위한다는 것[爲人]이다. 이에 관해서는 반드시 천하의 일이 기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자기 본연의 직분[性分]의 범위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그렇게 알게 된) 뒤에 그것을 실천해야 남을 위하는 폐단[爲人之弊]이 없게 될 뿐이다.<ref>대학혹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활연대공하여, 천하를 봄에 그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고,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다. 혹여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여전히 자기 직분의 범위 안에 있다고 여긴다.(是以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去聲內也)'</ref> 예컨대 ‘죽은 이를 위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의 경우,<ref>맹자 7B:33.</ref> 요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喪)에 조문할 때, 만약 망자가 평소 나와 잘 지냈으므로 참으로 애석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통곡한다면 이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망자의 가족이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곡하니, 이는 옳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남을 위하는 것[爲人]이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좋은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기꺼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자기더러 하라고 시키면 그제서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남을 위하는 경우[爲人]가 아니다.
道夫曰: “先生所說錢穀·甲兵·割股·廬墓, 已甚分明, 在人所見如何爾.”
'''내가(道夫) 말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곡(錢穀)·갑병(甲兵)·할고(割股)·여묘(廬墓)<ref>17:47을 참조하라.</ref>는 매우[已甚] 분명하니, (이러한 행위들이 위기가 되느냐 위인이 되느냐는) 사람들 각자의 소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ref>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라는 뜻이다.</ref>
又問: “割股一事如何?”
'''(내가) 다시 질문함: 할고(割股)는 어떻습니까?
曰: “割股固自不是. 若是誠心爲之, 不求人知, 亦庶幾.”
'''대답: 할고(割股)는 물론 옳지 않지만, 만약 성심(誠心)으로 한 일이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면 역시 (옳은 쪽으로) 거의 가깝다[庶幾].
“今有以此要譽者.”
'''(나의 말): 요즘 이로써 명예를 구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因擧一事爲問. 先生詢究, 駭愕者久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재질문: "요즘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의 (할고 등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자인합니다<그럴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살펴보면) 역시 매우 난처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윽고, ...(再問: 如今都不問如何, 都<不只>自認自家不是, 然其曲折亦甚難處. 久之,)'가 더 있다.</ref> 乃始正色直辭曰: “只是自家過計了. 設使後來如何, 自家也未到得如此. 天下事惟其直而已. 試問鄕鄰, 自家平日是甚麽樣人! 官司推究亦自可見.”
'''이어서 한 가지 일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사정을) 자세히 물으시고 한동안 경악하셨다. 이내 안색을 바로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사람) 자신의 계산이 지나쳤던[過計] 것일 뿐이다. 설사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역시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일(에 대처하는 자세로는) 오직 정직함[直] 뿐이다. (그 사람은) 어디 한번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자기 자신이 평소 어떤 사람인지! 관청(官司)에서 조사해도 역시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行夫曰: “亦著下獄使錢, 得箇費力去.”
행부(行夫)의 말: 그래도 (체포될 경우) 옥에 갇혀 돈을 써야 하니[著]<ref>'著'은 종종 '須著'의 준말로 쓰인다. '~해야 한다'의 의미이다. 17:38의 용례를 참조하라.</ref>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曰: “世上那解免得全不霑濕! 如先所說, 是不安於義理之慮. 若安於義理之慮, 但見義理之當爲, 便恁滴水滴凍做去, 都無後來許多事.” 道夫(60이후).
'''대답: 세상에 어떻게[那] 조금도 젖지 않고[霑濕]<ref>'점유(沾濡)'라고도 쓴다.</ref> 면할 수[解]<ref>'解'는 영어에서의 can과 같다.</ref> 있겠는가! 앞서 말한 경우 같으면, (그 사람은)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했더라면 그저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서 곧 그렇게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어는 것처럼[滴水滴凍]<ref>'적수성동(滴水成凍)'의 형태로도 사용한다. 확고부동함, 과감함, 엄정함을 의미하며, 확실하게 하나하나 사안을 격파해가는 기상을 형용하기도 한다. 주자어류사휘연구 p.255 참조.</ref> 해나가서 뒷날의 여러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f>본 조목의 후반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일역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송회요집고등을 보면 당시 의도적인 할고를 통해 효자로 인정받아 세금과 요역을 면제받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각급 관청에서는 할고행위가 보고되면 그것이 진정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부당이득을 목적으로 자행한 것인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고, 조사 결과 불순한 할고라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건의 당사자는 병든 부모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할고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관청의 조사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할고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쩌면 할고를 통해 병이 나을 수도 있었을) 부모가 사망한 것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전 1장 ==
* 傳一章
전 1장
===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 然則其曰克明德一段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17:49 問: “‘克明德’, ‘克, 能也’. 或問中卻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질문: ‘극명덕(克明德)’<ref>대학 전 1장.</ref>에 대하여 ‘극(克)은 능(能)이다.’<ref>해당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ref>고 하였는데, 《대학혹문》 에서는 도리어 ‘이겨내려는[克] 노력을 다할 수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能'자가 없고 '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라고 쓰고 있다.</ref>고 풀이하여 다시‘이겨내어 다스리다[克治]’의 ‘극(克)’처럼 보이는데, 어째서입니까?<ref>극(克)은 능(能)이나 승(勝)으로 훈한다. 대학장구에서는 능으로 훈했는데 혹문에서는 승으로 훈했으니 이상하다는 질문이다.</ref>
曰: “此‘克’字雖訓‘能’字, 然‘克’字重於<ref>여유량본 이전의 판본들은 모두 '於'를 '如'로 적고 있다.</ref>‘能’字. ‘能’字無力, ‘克’字有力. 便見得是他人不能, 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德’, 語意便都弱了. 凡字有訓義一般, 而聲響頓異, 便見得有力無力之分, 如‘克’之與‘能’是也. 如云‘克宅厥心’, ‘克明俊德’之類, 可見.” 僩(69이후).
'''대답: 이 ‘극(克)’ 자는 비록 ‘능(能)’ 자로 훈(訓)하지만, 그래도 ‘극(克)’ 자가 ‘능(能)’ 자보다 무겁다. ‘능(能)’ 자는 힘이 없고 ‘극(克)’ 자는 힘이 있다. 곧 다른 사람은 능하지 못한데 문왕(文王)만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단지 ‘능명덕(能明德)’이라고만 썼으면 말의 뜻이 모두 약해졌을 것이다. 무릇 글자 중에는 훈(訓)과 뜻[義]은 같지만 음향[聲響]이 완전히[頓] 달라서 힘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극(克)’과 ‘능(能)’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능히 삼택의 마음을 안다[克宅厥心]’<ref>상서 주서 입정(立政)편 제 12장. 본래 '惟克厥宅心'이어야 하는데 본 조목에서는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고 있다. '택(宅)'은 지위이다. 입정편에서 세 가지 큰 지위에 거한 자를 '삼택' 혹은 '삼유택(三有宅)'이라고 부른다. '惟克厥宅心'은 문왕(文王)이 이 삼택의 마음을 능히 잘 알았다는 뜻이다.</ref>, ‘능히 큰 덕을 밝힌다[克明俊德]’<ref>상서 우서 요전 제 2장. 대학 전 1장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등과 같은 것들에서 (이 차이를) 볼 수 있다.<ref>주희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 顧諟天之明命一段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17:50 問: “‘全體大用, 無時不發見於日用之間’. 如何是體? 如何是用?” 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 ‘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 體·用便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61이후).
* 17:51 問: “或問: ‘常目在之, 眞若見其“參於前, 倚於衡”也, 則“成性存存”, 而道義出矣.’ 不知所見者果何物耶?” 曰: “此豈有物可見! 但是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 每與是德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在. 一出言, 則言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一行事, 則事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不過如此耳, 初豈實有一物可以見其形象耶!” 壯祖(미상).
* 17:52 問: “引‘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曰: “自天之所命, 謂之明命, 我這裏得之於己, 謂之明德,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會忠; 事親必會孝; 見孺子,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 便自然會恭敬; 合辭遜處, 便自然會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會合道理!” 賀孫(62이후).
*
===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 是三者固皆自明之事一段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17:53 問: “‘顧諟’一句, 或問復以爲見‘天之未始不爲人, 而人之未始不爲天’, 何也?” 曰: “只是言人之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則, 所謂天理也. 人若每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只一理. 若理會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壯祖(미상).
* 17:54 問“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 曰: “天卽人, 人卽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旣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只今說話, 天便在這裏. 顧諟, 是常要看敎光明燦爛, 照在目前.” 僩(69이후).
*
== 전 2장 ==
* 傳二章
전 2장
===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 或問盤之有銘一段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17:55 德元問: “湯之盤銘, 見於何書?” 曰: “只見於大學.” 又曰: “成湯工夫全是在‘敬’字上. 看來, 大段是一箇修飭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亦說得大段地著. 如禹‘克勤于邦, 克儉于家’之類, 卻是大綱說. 到湯, 便說‘檢身若不及’.” 文蔚云: “‘以義制事, 以禮制心’, ‘不邇聲色, 不殖貨利’等語, 可見日新之功.” 曰: “固是. 某於或問中所以特地詳載者, 非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耳.” 文蔚(59이후).
* 17:56 問: “丹書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從’字意如何?” 曰: “從, 順也. 敬便豎起, 怠便放倒. 以理從事, 是義; 不以理從事, 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亦猶坤卦說敬·義.” 㝢(61이후).
*
== 전 3장 ==
* 傳三章
전 3장
===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 復引淇澳之詩一段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17:57 “‘瑟兮僩兮者, 恂慄也’. ‘僩’字, 舊訓寬大. 某看經子所載, 或從‘忄’·或從‘扌’之不同, 然皆云有武毅之貌, 所以某注中直以武毅言之.” 道夫云: “如此注, 則方與‘瑟’字及下文恂慄之說相合.” 曰: “且如‘恂’字, 鄭氏讀爲‘峻’. 某始者言, 此只是‘恂恂如也’之‘恂’, 何必如此. 及讀莊子, 見所謂‘木處則惴慄恂懼’, 然後知鄭氏之音爲當. 如此等處, 某於或問中不及載也. 要之, 如這般處, 須是讀得書多, 然後方見得.” 道夫(60이후).
* 17:58 問: “切磋琢磨, 是學者事, 而‘盛德至善’, 或問乃指聖人言之, 何也?” 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熙敬止’說. 然聖人也不是揷手掉臂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卻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爲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淳(61·70때). 寓同.
* 17:59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旣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 旣切而復磋之. 切得一箇樸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旣修而猶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 旣琢而復磨之. 琢, 是琢得一箇樸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之至善也. 取此而喩君子之於至善, 旣格物以求知所止矣, 又且用力以求得其所止焉. 正心·誠意, 便是道學·自修①. ‘瑟兮僩兮, 赫兮喧兮’, 到這裏, 睟面盎背, 發見於外, 便是道學·自修之驗也.” 道夫云: “所以或問中有始終條理之別也, 良爲此爾.” 曰: “然.” 道夫(60이후).
* 17:60 “‘如切如磋’, 道學也”, 卻以爲始條理之事; “‘如琢如磨’, 自修也”, 卻以爲終條理之事, 皆是要工夫精密. 道學是起頭處, 自修是成就處. 中間工夫, 旣講求又復講求, 旣克治又復克治, 此所謂已精而求其益精, 已密而求其益密也. 謨(50이후).
* 17:61 周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密否?” 曰: “始終條理都要密, 講貫而益講貫, 修飭而益修飭.” 淳(61·70때).
* 17:62 問: “琢磨後, 更有瑟僩赫喧, 何故爲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了氣象恁地. ‘穆穆文王’, 亦是氣象也.” 㝢(61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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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語類卷第十七
주자어류 권 17
* 大學四或問上
대학 4 / 혹문 상(上)<ref>앞서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 대학에 관하여 논하였다. 권 17은 대학에 관한 네 번째 권이자 대학혹문의 상권에 관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부제가 붙었다. 대학혹문은 주희가 지은 대학의 참고서로 상/하 두 권으로 묶여있다. 가상의 질문자가 질문하면 주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목이 '누군가의 질문(或問)'이다. 논어, 맹자, 중용혹문도 있다.</ref>
* 經一章
== 경 1장 ==
<ref>대학은 경 1장과 전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는 대학의 이 순서에 맞추어 조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혹문 역시 대학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하여 전 10장에서 끝난다. 주자어류 권 17과 18 역시 혹문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한다.</ref>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단락 ===
* 或問吾子以爲大人之學一段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ref>대학혹문의 각 장은 여러 단락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류 17:1부터 18까지는 모두 그중 첫 번째 단락에 관한 내용이다. 어류 권 17과 18은 대학혹문을 먼저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고 여기다 대학혹문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는 것도 그 분량을 감안하였을 때 적절치 못하다. 박완식이 2010년에 번역한 '대학, 대학혹문, 대학강어'를 옆에 두고 참조하는 것이 좋다. 혹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을 웹상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C%80%ED%95%99#.E3.80.8E.ED.98.B9.EB.AC.B8.E3.80.8F_.EA.B2.BD1.EC.9E.A5 대학혹문 번역문(고려대 의적단)]).</ref>
* 17:1 問友仁: “看大學或問如何?”<ref>조선고사본은 상황 묘사가 보다 자세하다. '선생이 내게 물었다: 자네가 오늘 대학혹문을 읽었는데 어떠한가?(先生問友仁曰: 公今日看大學或問如何?)'</ref>
'''(선생이) 나(友仁)에게 질문함: 대학혹문을 보니 어떠한가?
曰: “粗曉其義.” <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뜻은 대강 깨쳤으나 아직 다 깨치지 못한 듯합니다. (云: 粗曉其義, 但恐未然.)'</ref>
'''(나의) 대답: 그 뜻을 대강 깨쳤습니다.
曰<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생이 한두군데를 찍어서 내게 설명해보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先生擧一二處令友仁說. 先生曰:)'</ref>: “如何是‘收其放心, 養其德性’?”
'''(선생이) 말함: 무엇이 '그 놓쳐버린 마음을(放心)<ref>맹자 6A:11. 맹자가 되찾으라고 한 마음은 어진 정서(仁)에 가까우나 주희는 이를 집중하여 각성된 의식인 것처럼 풀이했다. 그래서 주희가 '구방심(求放心)'을 요구할 때 이를 '거경(居敬)' 으로 치환해도 말이 통한다. 실제로 대학혹문에서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장한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본래 맹자에서 '방(放)'과 '존(存)'이라는 동사쌍으로 보이고자 한 이미지는 기르는 개나 닭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난 것을 수색해서 찾아오는 상황이었다. 주인이 고의로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짐승이 집을 나가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므로 '방심'은 '놓친 마음', '잃어버린 마음', '놓아버린 마음', '풀려난 마음', '달아난 마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반대로 '존심(存心)'이나 '구방심'은 그렇게 달아난 것을 되찾아 집안에 가져온 뒤 다시 달아나지 못하게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찾아오다', '보존하다', '간직하다', '간수하다' 등으로 번역한다.</ref> 거두어들이고 그 덕성(德性)을 기른다[收其放心, 養其德性]'는 것인가?
曰: “放心者, 或心起邪思, 意有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至於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截斷不續, 至於耳目言動皆然, 此乃謂之收. 旣能收其放心, 德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之外, 又養箇德性也.”
'''(나의) 대답: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란, 혹 마음(心)에 삿된 생각(邪思)이 일어나고, 의지(意)에 망령된 상념(妄念)이 생기며, 귀로 삿된 말을 듣고, 눈으로 혼란한 색을 보며, 입으로 도(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손발의 움직임이 예(禮)에 맞지 않는 데 이르기까지가 모두 놓침[放]입니다.<ref>이 주장의 레퍼런스는 물론 논어 12:1의 '극기복례'이다.</ref> 거두어들임[收]이란, 곧 삿된 생각과 망령된 상념이 있는 지점에서 딱 끊어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귀·눈·말·움직임[耳目言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거두어들인다[收]고 합니다. 자신의 놓쳐버린 마음(放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상 덕성(德性)은 자연히 길러집니다. 방심(放心)을 거두는 것과 별개로 다시 덕성(德性)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曰: “看得也好.” 友仁(69때).
'''(선생이) 말함: 잘 보았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 問: 或問"'以七年之病, 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方得.
'''질문: 《혹문(或問)》에서 "'일곱 해 된 병에 세 해 묵은 쑥을 구하는[七年之病, 求三年之艾]' 경우<ref>맹자 4A:9. 직전 조목의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친 적 없이 없었던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주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어렸을 적에 도덕원칙들을 신체화/습관화 시킨 뒤 (곧, 소학의 단계) 커서 그러한 도덕원칙들을 이지적으로 묻고 따져서 이해하는 것이다(곧, 대학의 단계). 하지만 주희가 보기에 오늘날에는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소학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 작업이 '경(敬)'공부이다. 비유하자면 평생에 걸쳐 (소학 때 못 했던 것을) 벌충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검정고시 같은 것이다. 일곱 해 된 병은 소학의 공부를 건너뛴 기간이고 세 해 묵은 쑥은 그것을 뒤늦게 따라잡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거경공부이다.</ref> 백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취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미 배움을 잃은[失學]<ref>어렸을 적에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말이다.</ref> 뒤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노력하고 분발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趲補得前許多欠闕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沒長進, 如何要塡補前面!” 賀孫(62이후).
'''대답: 시기를 놓친 뒤에 배우려면 반드시 이처럼 이전에 건너뛴 빈칸들을 서둘러[趲] 보충하여야 한다. '남이 한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한다.’<ref>중용 제 20장.</ref>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유유히 세월만 보내며 그날그날 해야할 공부(工夫)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인데 무슨 수로 이전(에 건너뛴) 부분을 메우려 하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 持敬以補小學之闕. 小學且是拘檢住身心, 到後來‘克己復禮’, 又是一段事. 德明(44이후).
'''경(敬)을 견지함으로써[持敬]<ref>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을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端慤純一靜專) 유지한다는 말이다(14:19). 조금 더 비근하게 설명하자면 흐리멍텅한 정신을 고조시켜 맑고 투명하고 집중된 상태로 유지하는 명상수련과 흡사하다. 어린아이가 평소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도 엄숙한 선생님 앞에 서거나, 교실에서 무언가를 발표하거나, 그밖에 진지한 이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산만한 의식을 또렷하게 집중시키게 된다. 소학에서 요구하는 공부들, 예컨대 거처를 청소하고 어른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공부들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처럼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가 소학 트레이닝을 겪지 않은 어른들에게 거경/지경 공부를 권하는 것은 A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B를 가져와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A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느긋하게 달성하고자했던 궁극적 목표를 생으로 가져와서 빨리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지난 십년의 공부를 몇년 안에 따라잡아서 해치워야하는 검정고시준비과정과 제일 가깝다. 한편 주희는 이처럼 마음을 특정한 상태로 세팅하고 유지하는 공부를 적극적인 이지적 탐구와 더불어 배움의 두 축으로 삼았다. 전자가 거경(居敬)/지경(持敬), 후자가 궁리(窮理)이다. 전자가 소학의 목표라면 후자는 대학의 목표이니, 주희의 '학'은 결국 소학과 대학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ref> 빼먹은 소학(小學) 단계를 보충한다. 소학(小學)은 일단은 몸과 마음을 꾸준히 붙들어매는[拘檢]<ref>'住'는 동사 뒤에 붙어서 행위의 지속을 나타내는 조사이다.</ref> 것이다. 훗날(에 하게 될)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克己復禮]' (공부의) 경우는 또다른 단계의 일이다.<ref>극기복례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붙들어매는 공부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정도상 더 높은 수준의 공부일 뿐이다. 17:1을 보라.</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7:4 問: “大學首云明德, 而不曾說主敬, 莫是已具於小學?”
'''질문: 《대학》 첫머리에서 명덕(明德)을 말하면서 주경(主敬)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주경이) 이미 소학(小學) 단계에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 아닙니까?<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固然. 自小學不傳, 伊川卻是帶補一‘敬’字.” 可學(62때).
'''대답: 진실로 그렇다. 소학(小學)이 전해지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천(伊川)<ref>정이(程頤)</ref>이 '경(敬)' 자 하나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5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致知至治國·平天下, 皆不外此. 人傑(51이후).
''' ‘경(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공부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6 問或問說敬處.
'''《혹문》에서 경(敬)을 설명한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四句不須分析, 只做一句看.”
'''대답: 저 네 구절<ref>대학혹문에서 주희는 경을 다음의 네 가지 문구를 가지고 설명한다. 정씨형제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사량좌의 '상성성법(常惺惺法)', 윤돈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한다는 측면, 상성성법은 집중한 의식의 각성되고 고양된 느낌,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그렇게 집중된 의식의 단단히 안정된 느낌을 형용한다.</ref>은 나누어 분석할 필요 없이 그저 한 구절로 보라.
次日, 又曰: “夜來說敬, 不須只管解說, 但整齊嚴肅便是敬, 散亂不收斂便是不敬. 四句只行著, 皆是敬.” 燾(70때).
'''다음 날 다시 말함: 어젯밤에 경(敬)에 대해 설명했는데, 계속 해설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경(敬)이고, 산란하여 수렴하지 못하면 불경(不敬)이다. 저 네 구절은 단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7 或問: “大學論敬所引諸說有內外之分.”
'''누군가의 질문: 《대학》<ref>사실은 대학'혹문'이라고 해야 옳다.</ref>에서 경(敬)을 논하며 인용한 여러 설(說)에는 내외(內外)의 구분이 있습니다.<ref>굳이 구분하자면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외면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고 나머지 셋은 내면이다.</ref>
曰: “不必分內外, 都只一般, 只恁行著都是敬.” 僩(69이후).
'''대답: 꼭 내외(內外)로 나눌 필요는 없다. 모두 매한가지다. 그저 그렇게 실천해가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ref>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같은 취지의 문답이 실려 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8 問: “敬, 諸先生之說各不同. 然總而行<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言'으로 썼다.</ref>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질문: 경(敬)에 대한 여러 선생의 설(說)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실천하여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면[常存]<ref>'존(存)'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17:1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되는 것입니까?”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斂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履孫(65때).
'''대답: 기실 매한가지이다. (마음이) 경건(敬)할 때 같으면 자연히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고[主一無適]', 자연히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며[整齊嚴肅]’, 자연히 '항상 반짝반짝 깨어있고[常惺惺]',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不容一物]'. 다만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 사씨(謝氏)나 윤씨(尹氏)의 설(說)<ref>'상성성'이 사씨, '기심수렴 불용일물'이 윤씨의 설이다.</ref>보다 더 분명하다.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9 或問: “先生說敬處, 擧伊川主一與整齊嚴肅之說與謝氏常惺惺之說. 就其中看, 謝氏尤切當.”
'''누군가의 질문: 선생님께서 경(敬)을 설명하신 부분에서 이천(伊川)의 주일(主一)과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 그리고 사씨(謝氏)의 상성성(常惺惺) 설(說)을 거론하셨습니다.<ref>이 설들에 대해서는 17:6을 참조하라.</ref> 그중에서 보면 사씨(謝氏)의 설명이 더욱 절실하고 적절[切當]<ref>'절(切)'은 어떤 설명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친숙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말이다.</ref>합니다.
曰: “如某所見, 伊川說得切當. 且如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若無整齊嚴肅, 卻要惺惺, 恐無捉摸, 不能常惺惺矣.” 人傑(51이후).
'''대답: 내가 보기엔 (사씨보다) 이천(伊川)이 적절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몸가짐을 정제엄숙(整齊嚴肅)하게 하면 이 마음이 보존[存]<ref>'존(存)'에 관해서는 17:1을 참조하라.</ref>되어 반짝반짝 깨어있을[惺惺] 수 있게 된다. 만약 정제엄숙(整齊嚴肅)한 자세 없이 반짝반짝 깨어있으려[惺惺] 한다면 아마 구체적으로 붙잡을 데가 없어[無捉摸]<ref>'정제엄숙'은 몸을 이렇게 하고 옷매무새를 저렇게 하라는 행동지침이므로 당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므로 '붙잡을 데'가 있다. '상성성'은 의식의 각성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므로 이 설명 속에는 어떤 행동지침이 없다.</ref> 늘 반짝반짝 깨어있을[常惺惺]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10 問: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자리에 '然則所謂敬者又若何而用力邪下' 14자가 더 들어있다.</ref>擧伊川及謝氏尹氏之說, 只是一意說敬.”
'''질문: 《혹문》에서 이천(伊川) 및 사씨(謝氏), 윤씨(尹氏)의 설(說)을 거론한 것은 그저 한 뜻으로 경(敬)을 설명한 것입니까?
曰: ‘主一無適’, 又說箇‘整齊嚴肅’; ‘整齊嚴肅’, 亦只是‘主一無適’意. 且自看整齊嚴肅時如何這裏便敬. 常惺惺也便是敬. 收斂此心, 不容一物, 也便是敬. 此事最易見. 試自體察看, 便見. 只是要敎心下常如此.”
'''대답: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하고 다시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 했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역시 그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이다. 어디 한번 정제엄숙(整齊嚴肅)할 때 어떻게 내면이 바로 경건(敬)해지는지 스스로 살펴 보라. '상성성(常惺惺)'해도 곧 경건(敬)하다. '수렴차심 불용일물[收斂此心, 不容一物]'<ref>본래는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이다. 경에 대한 이 네 가지 설명법은 17:6에 자세하니 참조하라.</ref>해도 곧 경건(敬)하다. 이 일은 매우 알기 쉽다. 시험 삼아 스스로 체험[體察]해 보면<ref>'체찰(體察)'은 몸소 체험/관찰하는 것이다.</ref> 바로 알 수 있다. 단지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이 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因說到放心: “如惻隱·羞惡·是非·辭遜是正心, 才差去, 便是放. 若整齊嚴肅, 便有惻隱·羞惡·是非·辭遜. 某看來, 四海九州, 無遠無近, 人人心都是放心, 也無一箇不放. 如小兒子才有智識, 此心便放了, 這裏便要講學存養.” 賀孫(62이후).
'''이어서 말이 방심(放心)에 미쳤다: 측은(惻隱)·수오(羞惡)·시비(是非)·사손(辭遜)<ref>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다.</ref> 같으면 바른 마음[正心]이요,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곧 놓친(放) 것이다. 정제엄숙(整齊嚴肅)한다면 곧 (놓친 마음을 다시 붙들어 와서) 측은·수오·시비·사손의 마음이 있게 된다. 내 생각에 사해(四海)와 구주(九州)<ref>온세상을 말한다.</ref> 어디든 멀거나 가깝거나 사람들 각각의 마음은 모두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니, 놓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경우도 지식[智識]이 생기자마자 이 마음을 바로 놓쳐버리게 되니, 이 지점에서 곧 강학(講學)과 존양(存養)<ref>강학과 존양은 각각 궁리와 거경 공부를 말한다. 17:1과 17:3의 주석을 참조하라.</ref>을 필요로 한다.
o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1 光祖問: “‘主一無適’與‘整齊嚴肅’不同否?”
'''광조(光祖)<ref>주희의 제자 가운데 광조가 셋이나 있다. 일역판은 여기서는 그 중 증흥종(曽興宗, 1146-1212)을 말한다고 주장한다.</ref>의 질문: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은 다르지 않습니까?<ref>둘 다 경건(敬)한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유지한다는 측면을 말한다. 앞의 몇 조목에서 자세하니 참조하라.</ref>
曰: “如何有兩樣! 只是箇敬. 極而至於堯舜, 也只常常是箇敬. 若語言不同, 自是那時就那事說, 自應如此. 且如大學論語孟子中庸都說敬; 詩也, 書也, 禮也, 亦都說敬. 各就那事上說得改頭換面. 要之, 只是箇敬.”
'''대답: 어찌 두 종류가 있겠나? 경(敬)은 하나 뿐이다. (거경 공부를) 지극히 하여 요순(堯舜)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역시 언제나 이 하나의 경(敬)일 뿐이다.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러저러한 때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응당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 예컨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모두 경(敬)을 말하고, 《시경》, 《서경》, 《예기》 또한 모두 경(敬)을 말하고 있다. 각각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얼굴을 바꿔가며(改頭換面)<ref>껍데기, 표현방식만 바꾸었지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ref>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경(敬)은 하나일 뿐이다.
又曰: “或人問: ‘出門·使民時是敬, 未出門·使民時是如何?’ 伊川答: ‘此“儼若思”時也.’ 要知這兩句只是箇‘毋不敬’. 又須要問未出門·使民時是如何. 這又何用問, 這自可見. 如未出門·使民時是這箇敬; 當出門·使民時也只是這箇敬. 到得出門·使民了, 也只是如此. 論語如此樣儘有, 最不可如此看.”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문을 나설 때와 백성을 부릴 때 경건(敬)하다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ref>논어 12:2. </ref>라고 하니, 이천(伊川)이 답하기를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할[儼若思]’<ref>예기 곡례 상.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하라(毋不敬,儼若思)'</ref> 때이다’라고 했다.<ref>이정유서 18:10. '질문: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뵙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 하라고 하는데, 아직 문을 나서지 않았고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 대답: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해야 할 때이다. 문을 나섰을 때의 경건함이 이와 같다면 문을 나서기 전에는 어떨지 알 만하다. 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問: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方其未出門未使民時, 如何? 曰: 此儼若思之時也. 當出門時其敬如此, 未出門時可知也. 且見乎外者出乎中者也.)</ref> 이 두 구절<ref>주일무적과 정제엄숙을 말한다.</ref> 모두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毋不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이걸 또 물을 필요가 있나? 이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도 이 경(敬) 하나일 뿐이고,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릴 때에도 역시 이 경(敬) 하나일 뿐이다.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린 뒤에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논어》에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으니, 결코 (이천에게 질문한 어떤 사람 처럼) 저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2 或問“整齊嚴肅”與“嚴威儼恪”之別.
'''누군가가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엄위엄각(嚴威儼恪)’<ref>엄숙하고 위엄있는 안색과 거동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편에 등장하는 문구이다.</ref>의 차이에 대해 질문함.
曰: “只一般. 整齊嚴肅雖非敬, 然所以爲敬也. 嚴威儼恪, 亦是如此.” 燾(70때).
'''대답: 똑같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 경(敬)은 아니지만 경(敬)을 행하는 수단이다. 엄위엄각(嚴威儼恪) 역시 그렇다.<ref>이정유서 15:182와 같은 취지이다. '엄위엄각은 경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경에 이르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自此入.)'</ref>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13 問: “上蔡說: ‘敬者, 常惺惺法也.’ 此說極精切.”
'''질문: 상채(上蔡)<ref>사량좌</ref>가 말하기를 ‘경(敬)이란 늘 반짝반짝 깨어있기[常惺惺] 위한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이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합니다[極精切].<ref>17:9를 참조하라.</ref>
曰: “不如程子整齊嚴肅之說爲好. 蓋人能如此, 其心卽在此, 便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 而內不惺惺者. 如人一時間外面整齊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寬了, 便昏怠也.”
'''대답: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만큼 좋지는 않다. 대개 사람이 이처럼<ref>정제엄숙을 말한다.</ref> 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곧 여기에 있어서[在此]<ref>의식(consciousness)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반짝반짝 깨어있게[惺惺] 되기 때문이다. 외면이 정갈하고 단정하며 엄숙(整齊嚴肅)하면서 내면이 반짝반짝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잠시라도[一時間] 외면이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곧 그 시간만큼 깨어있게 되고, 잠시라도 (몸가짐이) 풀어지면[放寬] 곧 흐릿하고 나태해지게[昏怠] 된다.
祖道曰: “此箇是氣. 須是氣淸明時, 便整齊嚴肅. 昏時便放過了, 如何捉得定?”
'''내(祖道)가 말함: 이것은 기(氣)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기(氣)가 맑고 밝을 때[淸明]는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흐릿할 때는 곧 방만하게[放過] 되니, 어떻게 해야 제대로 붙잡을 수 있습니까?<ref>'정(定)'은 현대 중국어 '주(住)'와 같다. 동사의 뒤에 붙어 'x得住'라고 하면 그 동작을 확실히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주고 'x不住'는 그 동작을 제대로 해낼 역량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ref>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志者, 氣之帥也.’ 此只當責志. 孟子曰: ‘持其志, 毋暴其氣.’ 若能持其志, 氣自淸明.”
'''대답: ‘심지(志)는 기(氣)를 통솔하는 장수이다[志者, 氣之帥也].’<ref>맹자 2A:2. 이른바 부동심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志)는 오늘날 말로 의지나 심지, 기(氣)는 의욕이나 기운, 에너지 정도에 해당한다. 심지가 장수라면 기는 병사들이다. 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에너지는 병사들에게서 나오지만(의욕과 기운), 병사들 각각이 어디로 움직여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방향성은 장수에게서 나온다(의지와 심지). 예컨대 시험기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심지의 명령이지만 실제로 공부하지 않고 침대에 붙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욕과 기운의 항명과 태업 때문이다.</ref> 이는 응당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심지(志)를 붙잡되 자기 기(氣)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持其志, 毋暴其氣]’고 하셨다.<ref>맹자 같은 곳.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병사들이 움직여야 한다. 장수의 뜻이 굳건하고 일관되면 병사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지를 굳건히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항명과 태업에도 이유가 있으니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일하고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경우 그런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Kwong-loi Shun, 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1997). P.68, 112-119를 참조하라.</ref> 만약 자기 심지(志)를 붙잡을 수 있다면 기(氣)는 저절로 맑고 밝아진다[淸明].
或曰: “程子曰: ‘學者爲習所奪, 氣所勝, 只可責志.’ 又曰: ‘只這箇也是私, 學者不恁地不得.’ 此說如何?”
'''누군가 말함: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자는 습관에게 빼앗기고 기(氣)에게 패배하니,<ref>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라.</ref> 단지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ref>이정유서 15:96. '배우는 자는 기에게 패배하고 습관에게 빼앗기니, 단지 심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學者, 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문구의 배치가 다르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고, 또 (심지를 붙잡으려는 것에 관해서)‘이 또한 사사로운 마음(私)일 뿐이지만,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ref>이정외서 8:6. '심지를 붙잡는 것을 논하다 선생이 말함: (심지를 붙잡으려는 마음) 또한 사사로운 마음일 뿐이다. 그래도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因論持其志先生曰: 只這箇也是私. 然學者不恁地不得.)'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어떻습니까?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涉於人爲, 便是私. 但學者不如此, 如何著力! 此程子所以下面便放一句云‘不如此不得’也.” 祖道(68때).
'''대답: 인위(人爲)에 관련되면 곧 사사롭다(私).<ref>기운과 의욕의 자연스러운 추세에 맡겨두지 않고 심지를 다져서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의욕을 몰고 가려는 것은 어느정도 작위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f> 다만 배우는 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쓰겠는가[著力]?<ref>'착력(著力)' 두 글자에 이미 작위성이 담겨있다.</ref> 이것이 정자(程子)께서 (사사롭다고 한 다음 그) 아래에다 바로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문을 덧붙이신 까닭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14 因看涪陵記善錄, 問: “和靖說敬, 就整齊嚴肅上做; 上蔡卻云‘是惺惺法’, 二者如何?”
'''부릉기선록(涪陵記善錄)<ref>정이의 제자 윤돈(尹焞)의 어록이다. 기록자는 윤돈의 제자인 풍충서(馮忠恕). 윤돈과 풍충서가 교유한 곳이 사천 부릉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청 중엽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실되었다. 이정외서 권 12에서 이 책으로부터 여덟 조목을 인용하고 있다.</ref>을 보다가 (선생이) 질문함: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은 경(敬)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측면에서 설명하고,<ref>본래 윤돈의 설명은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윤돈의 지침은 그 초점이 엄숙함에 있으므로 정이의 '정제엄숙'과 조응한다.</ref>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는 오히려 ‘반짝반짝 깨어있게 해주는 방법[惺惺法]이다’라고 하니, 이 두 설명이 어떠한가?<ref>비슷한 취지의 문답이 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실려있다. 정자상은 이 조목의 기록자인 정가학이다. '(질문) 和靖論敬以整齊嚴肅, 然專主於內; 上蔡專於事上作工夫, 故云敬是常惺惺法之類. (답변) 謝尹二說難分內外, 皆是自己心地功夫. 事上豈可不整齊嚴肅, 靜處豈可不常惺惺乎?'</ref>
厚之云: “先由和靖之說, 方到上蔡地位.”
'''후지(厚之)가 대답함: 먼저 화정(和靖)의 설(說)을 따른 뒤에야 상채(上蔡)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曰: “各有法門: 和靖是持守, 上蔡卻不要如此, 常要喚得醒. 要之, 和靖底是, 上蔡底橫.
'''(선생이) 말함: 각각 (나름의) 법문(法門)<ref>불교 용어. 진리에 이르는 방법, 경로 등을 이른다.</ref>이 있다. 화정(和靖)은 붙잡아 지키는 것[持守]이다. 상채(上蔡)는 이와 같이 하려 하지 않고 늘 깨어있고자[喚得醒] 한다. 화정(和靖)의 설은 옳고, 상채(上蔡)의 설은 비뚤다. <ref>횡설(橫說)은 횡설수설의 횡설이다. 조리가 없거나, 너무 고원하거나, 견강부회한 억지 주장을 이른다. 주희가 사량좌의 주장을 횡설이라고까지 했을까 의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잠재적 의문에 답하는 차원에서 고문해의는 114:40에서 주희가 여조겸의 주장 하나를 '횡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상채의 설을 '횡'이라고 했으면 화정의 설은 '종(縱)'이나 '직(直)'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시(是)'와 '직(直)'은 자형이 가까우므로 전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교감할 경우 화정의 설과 상채의 설 사이에 우열과 정부정은 없고 범주의 차이만 남게 된다.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단 이렇게 남겨둔다.</ref>
渠<ref>조선고사본과 성화본은 '渠'를 '某'라고 적었다. 주자어류고문해의에서는 이것을 '횡거'라고 볼 경우 이어지는 '역왈경이직내'가 불완전인용이 된다고 지적하고,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일역판의 역자들 역시 이하의 '역왈경이직내'가 장재의 저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渠'를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다만, 고문해의는 이 앞 부분을 '화정의 설은 옳고 상채의 설은 비뚤다(和靖底是, 上蔡底橫.).'라고 구두를 끊어서 읽어야 한다고 보았고 일역판은 '횡모(橫某)가 말했다'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류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기록자가 정가학(鄭可學)인 조목은 자주 비경(蜚卿)과 후지(厚之)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해 다자간 문답을 주고받으므로 각 발언이 누구의 질문이고 누구의 답변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정가학 조목들은 자주 자신의 발언을 '某曰'이나 '某云' 등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은데, 예컨대 4:38이나 7:24, 8:27, 19:93, 28:34, 106:32 등을 살펴보라.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일역판 보다는 고문해의의 제안이 더 합리적이다. 여기서는 고문해의를 따른다.</ref>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云'이라고 적었다.</ref>: ‘易曰: “敬以直內.” ’伊川云: ‘主一.’ 卻與和靖同. 大抵敬有二: 有未發, 有已發. 所謂‘毋不敬’, ‘事思敬’, 是也.”
'''내(某)가 말함: 《주역》에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한다[敬以直內]'고 하였고,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마음을 하나로 한다[主一]’고 하였으니, 오히려 화정(和靖)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경(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생각과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시점[未發]의 경과 이미 발한 뒤[已發]의 경입니다. 이른바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하라[毋不敬]’<ref>예기 곡례 상.</ref>와 ‘일을 할 적에는 경건할 것을 생각하라[事思敬]’<ref>논어 16:10.</ref>가 그것입니다.<ref>미발의 경과 이발의 경의 구분에 관해서는 17:11을 참조하라.</ref>
曰: “雖是有二, 然但一本, 只是見於動靜有異, 學者須要常流通無間."
'''(선생이) 말함<ref>고문해의와 일역본 모두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비록 두 가지가 있다 해도 뿌리는 하나이니, 그저 동(動)과 정(靜)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항상 (동/정 사이의) 흐름이 중단없이 자연스럽게 통하게 해야 한다. <ref>17:11의 논의를 참조하라. 정시의 경은 문을 나서기 전의 경건함이고 동시의 경은 문을 나서서 사태와 사물에 대처할 때의 경건함이다. 앞선 질문에서의 인용구로 말하자면 주역의 '경이직내'와 이천의 '주일무적', 윤돈(화정)의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정시의 경건함이다. 논어의 '사사경'은 동시의 경건함이다.</ref>
又: "如和靖之說固好, 但不知集義, 又卻欠工夫."
'''또 (내가 말함)<ref>이 대목을 이렇게 독립시켜 질문자의 질문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직전의 '曰: 雖是有二...'와 직후의 '曰: 亦是...'의 관계가 불분명해진다. 고문해의의 경우 일단은 앞쪽 曰을 주희의 대답으로, 뒤쪽 '曰'을 질문자의 추가 질문이라고 보았으나, 실은 상세히 읽어 보면 질문하는 말투가 아니어서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앞의 왈과 뒤의 왈을 모두 주희의 말로 해석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이렇게 질문자의 말로 떼어냈다. 여기서는 일역판을 따랐다.</ref>: 화정(和靖)의 설(說) 같은 경우 물론 좋긴 하지만 (그는) '의(義)에 부합하는 행위를 오래 축적해야 함[集義]'<ref>맹자 2A:2.</ref>을 알지 못했고, 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힘씀[工夫]이 부족했습니다.<ref>질문자는 화정의 경을 미발의 경건함, 정시의 경건함 쪽에 배속하고 있다. 이 경우 수행자 자신이야 홀로 방에 앉아 마음을 경건하게 길러낼 수 있을지라도 현실 사회 속에서 실질적인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매 순간 올바르고 경건한 선택을 내림으로써 스스로를 키워내는 과정은 겪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송대 문헌에서 거경(居敬)과 집의(集義) 공부를 이처럼 동/정, 내/외, 체/용의 두 방면으로 구분한 경우가 많다. 이정유서 18:101 '질문: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응당 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경은 (내면을) 함양하는 것 뿐이다.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모름지기 '집의'를 써야 한다.(問: 必有事焉, 當用敬否? 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질문: 경과 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경은 자신을 붙잡는 도리이고 의는 시비를 알고 이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의가 된다.(問: 敬義何別? 曰: 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또 남헌집(南軒集) 권 32 답유성지(答㳺誠之)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경과 집의 공부는 병행하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다. 만약 경건하게 할 줄만 알고 의로운 행위를 축적할 줄은 모른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 또한 멀뚱히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니 어떻게 마음의 본체가 사방으로 두루 흘러 영향을 미칠 수 있겠나? 집(集)은 축적한다(積)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에 의로움(義)없는 것이 없으되 (그 의로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드러나니, 구체적인 사태 하나하나에서 (의로운 판단과 행위를) 모아서 축적해야 한다.(居敬集義, 工夫並進, 相須而相成也. 若只要能敬, 不知集義, 則所謂敬者, 亦塊然無所爲而已, 烏得心體周流哉? 集訓積, 事事物物, 莫不有義, 而著乎人心, 正要一事一件上集.)'</ref>
曰: “亦是渠才氣去不得, 只得如此. 大抵有體無用, 便不渾全.”
'''(선생의) 대답<ref>고문해의에서는 일단 주희의 말로 보았으나 확신하지 못했다. 일역판도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그는<ref>윤돈을 말한다.</ref> 역시 그 재기(才氣)<ref>재치있고 민활함을 말한다.</ref>가 부족했기에[去不得]<ref>'去得'은 현대 중국어 '可以'와 같다. '去不得'은 이에 대한 부정표현이다. 주희가 보기에 윤돈은 순발력이나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묵묵히 정진하는 캐릭터였다. 예컨대 101:102-122를 보라.</ref> 단지 그와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개 본체(體)만 있고 작용(用)이 없으면 온전할[渾全] 수 없다.<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ref>
又問: “南軒說敬, 常云: ‘義已森然於其中.’”
'''다시 질문함<ref>기록자인 가학의 질문인 듯하다.</ref>: 남헌(南軒)<ref>장식(張栻)이다.</ref>은 경(敬)을 설명할 적에는 늘 ‘(경건하기만 하면) 의(義)는 이미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義已森然於其中]’고 말합니다.<ref>남헌집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위 주석에서 인용했듯 장식은 개인적 차원에서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과 사회적 차원에서 시비판단을 내리고 의로운 행적을 누적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말한 바 있다.</ref>
曰: “渠好如此說, 如仁智動靜之類皆然.” 可學(62때).
'''대답: 그는 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仁)·지(智)·동(動)·정(靜) 등에 (대해서 말할 적에) 모두 그러하다.<ref>장식의 계사논어해(癸巳論語解) 권3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과 정이라는 것은 인(仁)과 지(知)의 본질[體]이니, 물을 좋아하고(樂水) 산을 좋아(樂山)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동(動)하면 즐겁고 정(靜)하면 장수한다. 일삼는 바 없이 실천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항상 영원히 올바르며 굳건하니 어찌 장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知)의 본질은 동적이지만 이치는 각기 멈추는 곳이 있으니 정(靜)이 결국 그 속에 있다. 인(仁)의 본질은 정적이지만 두루 흘러 쉬지 않으니 동(動)이 결국 그 속에 있다. 동과 정이 교차하여 드러나며 본체와 작용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 인과 지의 (진정한) 뜻을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라면 (동정과 체용의 관계를) 알아보지 못한다.(動靜者, 仁知之體, 樂水樂山, 言其體則然也. 動則樂, 靜則夀. 行所無事, 不其樂乎? 常永貞固, 不其夀乎? 雖然, 知之體動, 而理各有止, 靜固在其中矣. 仁之體靜, 而周流不息, 動亦在其中矣. 動靜交見, 體用一源, 仁知之義, 非深體者, 不能識也.)'</ref>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15 問謝氏惺惺之說.
'''사씨(謝氏)의 '성성(惺惺)' 설(說)에 대하여 질문함.
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說敬, 卻只以‘整齊嚴肅’言之, 此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대답: '성성(惺惺)'이란 마음이 흐릿하지 않다는[不昏昧] 말이니, 그저 이것이 바로 경(敬)이다. 요즘 사람들은 경(敬)에 대해 말할 적에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만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도 물론 경(敬)이긴 하다만, 마음이 만약 흐릿하여 이치를 밝게 비춰주지 못한다면, 비록 억세게 붙잡는다[强把捉]<ref>주희는 의식(consciousness)을 바짝 긴장시켜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로 유지하는 행위를 대개 물건을 손으로 세게 쥐고 있는 느낌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파착(把捉), 지(持), 지수(持守) 등은 글자는 달라도 동일한 현상을 지시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ref> 한들 어찌 경(敬)이 될 수 있겠는가?
又問孟子告子不動心.
'''또, 맹자(孟子)와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질문함.
曰: “孟子是明理合義, 告子只是硬把捉.” 砥(61때).
'''대답: 맹자(孟子) (의 부동심은) 이치를 밝히고 의로움(義)에 부합하여 (획득하는 것)이고, 고자(告子)는 단지 (마음을) 억지로 단단히 붙잡아[硬把捉]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ref>부동심을 논한 맹자 2A:2는 난해한 조목이다. 주자어류 권 52의 200여 조목이 모두 이에 관한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주희가 생각하기에 고자는 세상의 여러 일과 서책 등으로부터 이치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도가적인 인물이다. 세상 일을 관찰하고 서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희가 생각하는 맹자의 부동심은 적극적으로 이치를 따져서 파악하고(즉, 지언知言)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즉, 집의集義)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이때문에 맹자의 부동심을 명리합의(明理合義)라고 평가하고 고자의 부동심을 경파착(硬把捉)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이때 명리는 이지적 노력, 집의는 실천적 노력이다. 자세한 분석은 장원태, "맹자 3.2에 대한 고찰", 2013과 김명석, "不動心 획득을 위한 孟子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한 고찰", 2021을 참조하라.</ref>
지(砥)의 기록. (61세 때)
* 17:16 或問: “謝氏常惺惺之說, 佛氏亦有此語.”
'''누군가의 질문: 사씨(謝氏)<ref>사량좌이다.</ref>의 상성성(常惺惺) 설(說)<ref>앞서 십여 조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의 경우, 불씨(佛氏) 역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曰: “其喚醒此心則同, 而其爲道則異. 吾儒喚醒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 佛氏則空喚醒在此, 無所作爲, 其異處在此.” 僩(69이후).
'''대답: 이 마음을 일깨우는[喚醒此心] 점에서는 같지만 그 도(道)의 성격은 다르다. 우리 유학(儒學)에서는 이 마음을 일깨워 그것이 많은 도리를 관조하게[照管] 하려는 것인데, 불씨(佛氏)는 헛되이 일깨워[在此]<ref>'재차'는 의식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실제로) 하는 바가(作爲) 아무것도 없으니, 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17 問: “和靖說: ‘其心收斂, 不容一物.’”
'''질문: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이‘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했습니다.<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斂. 他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直是更不著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賀孫(62이후).
'''대답: 이 마음이 그 어떤 대상에도 전혀 붙어있지 않으면[不著一物] 그게 바로 수렴(收斂)이다. 그는 윗 구절에서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사당[神祠]에 들어갈 때, 그때에는 그 어떤 사안도 전혀 마음에 더 붙일 수 없고 단지 공경(恭敬)함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ref>사고전서본 화정집(和靖集) 권 7, '예컨대 누군가 사당에 들어가 경의를 표할 적에 그 마음이 수렴되어 그 어떤 다른 사안도 전혀 붙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로 집중됨[主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且如人到神祠中致敬時, 其心收斂, 更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ref> 이 말이 매우 친근하고 절실하다. 지금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을 전일하게 할 수 있다면 곧 바짝 수렴하여 그 어떤 빈틈[空罅]도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思量]을 마치지 못했는데 또 다른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 버리면 마음은 곧 두 갈래 길이 되어버린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8 問尹氏“其心收斂不容一物”之說.
'''윤씨(尹氏)<ref>윤돈.</ref>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설(說)에 대한 질문.
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所亂, 便是不容一物也.”
'''대답: 마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주인으로 세워[主]<ref>'주(主)'자의 번역이 까다로운데, 전통적으로 '주장하다', '위주로 하다'와 같이 옮긴다. 여기서는 자신의 내면에 품은 여러 생각들의 위계서열에 있어서 최상의 자리, 즉 '주인'의 자리에 어떤 생각이나 마음가짐을 올려두었다는 의미에서 이상과 같이 번역했다. </ref> 다른 일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곧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問: “此只是說靜時氣象否?”
'''질문: 이는 고요할 때[靜時]의 기상(氣象)을 설명한 것 아닙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又問: “只靜時主敬, 便是‘必有事’否?”
'''재질문: 고요할 때[靜時] 경(敬)을 주인으로 세우는[主] 것이 곧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必有事]'<ref>본래 출전은 맹자 2A:2. 정씨 형제에 의하면 마음의 고요한 측면에 대해서도 모종의 의식적[用意] 노력을 동반한 공부가 필요하니 그것이 바로 경(敬)이다.(이정유서 18:35) 맹자의 '반드시 일이 있다[必有事]'에서 '일삼다'는 의식적 노력에 대한 요청인데, 여기서 맹자가 요청한 것을 정씨 형제는 경공부라고 해석했다. 이정유서 15:186'필유사언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니, 경이다.(必有事焉, 謂必有所事, 是敬也)'. 주희는 이러한 해석이 맹자의 본래 문맥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배격하지는 않는다. 52:162, 회암집 권40 답하숙경 제 29서('主敬存養, 雖説必有事焉, 然未有思慮作爲, 亦靜而已.'), 권 61 답임덕구(答林德久) 제 6서(질문: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必有事焉而勿正]’에 대해서, 명도와 이천은 대부분 “경(敬)을 위주로 한다”하고, 일설에는 “마땅히 의(義)를 모아야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위 글의 ‘의(義)를 모아 생겨나는 것이다’를 이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한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선(善)을 축적하는 공부가 아니겠습니까?‘必有事焉而勿正’, 二程多主於敬, 一說須當集義, 是承上文‘是集義所生者’而言. 所謂必有事, 則積集衆善工夫否? 답변: 맹자의 앞뒤 구절에 ‘경(敬)’자는 없고, ‘의(義)’자만 있을 뿐입니다. 정자는 이를 바꾸어서 ‘경(敬)’자로 설명했는데, 맹자의 본의와는 다릅니다. 집주를 보면 또한 자세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孟子上下文無‘敬’字, 只有‘義’字, 程子是移將去‘敬’字上說, 非孟子本意也. 集註亦可細玩.)등을 보라. 이 '일삼음[事]'을 주희는 기본적으로 '의로운 행실을 축적[集義]'하는 행위로 본다. 예컨대 52:93, 97, 167 등을 보라.</ref> 아닙니까?
曰: “然.” 僩(69이후).
'''대답: 그렇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단락 ===
此篇所謂在明明德一段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 17:19 問: “或問說‘仁義禮智之性’, 添‘健順’字,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을 설명하면서 ‘건(健)'과 '순(順)’ 자를 첨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ref>대학혹문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가 널리 작동하여 세상 만물을 틔워주고 길러주는데 그 창조하고 변화하는 내용물은 (따지고 보면) 음양과 오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음양과 오행이란 것도 (음양오행은 그 분류상 氣인데) 반드시 먼저 이치가 있고 난 다음에 기(氣)가 있는 것이요, 사물이 (실제로) 탄생한 측면에서는 또 기(氣)가 (먼저) 응취한 덕분에 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의 탄생은 필히 (먼저)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건, 순,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있게 되고, 필히 이 기를 얻은 연후에 혼, 백, 오장, 백해의 신체가 있게 된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의 진수와 2&5(음양과 오행이다)의 정수가 신비롭게 합쳐져 (사람이 탄생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대개 맹자이래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적에는 '인의예지' 혹은 '인의예지신' 정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건'과 '순' 두 형용사가 더 들어갔으니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ref>
曰: “此健順, 只是那陰陽之性.” 義剛(64이후).
'''대답: 이 건순(健順)이란 그저 저 음양(陰陽)의 성질일 뿐이다.<ref>주역에서 순양괘인 건(乾)괘의 성질이 굳건함(健), 순음괘인 곤(坤)괘의 성질이 유순함(順)이다. 인의예지신의 경우는 대개 백호통(白虎通)에서 정리한 내용에 따라 오행(목화토금수)에 하나씩 배당한다. 예컨대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해당하며 그 방위는 동쪽이다. 어류 6:45를 참조하라. 대학혹문에서 인간의 탄생을 말하면서 단순히 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만 했다면 인의예지신만 언급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만 '음양'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 했으니 음과 양의 성질에 해당하는 글자를 하나씩 더 첨부해서 앞뒤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ref>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7:20 問<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或問中' 세 글자가 더 있다.</ref>“健順仁義禮智之性”.
''' '건(健)·순(順)·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에 대한 질문.<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此承上文陰陽五行而言. 健, 陽也; 順, 陰也; 四者, 五行也. 分而言之: 仁禮屬陽, 義智屬陰.”
'''대답: “이는 윗글의 음양(陰陽)·오행(五行)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건(健)은 양(陽), 순(順)은 음(陰)이며, 네 가지<ref>인의예지(仁義禮智)</ref>는 오행(五行)이다. 나누어 말하면,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仁何以屬陰?”
'''질문: ‘하늘의 도(道)를 세우니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우니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道)를 세우니 인(仁)과 의(義)라 한다.’<ref>주역 설괘전. 설괘전의 설명대로라면 음-유-인, 양-강-의가 각각 같은 범주로 묶여야 한다. 이에 대한 주희의 반론은 어류 6:54를 참조하라.</ref>고 했는데, 인(仁)이 어찌하여 음(陰)에 속합니까?
曰: “仁何嘗屬陰! 袁機仲正來爭辨.<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일곱자가 없다. 서산독서기 갑집 권 8에서는 이 부분을 '袁機仲力爭'이라고 썼다.</ref> 他<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便'자가 더 있다.</ref>引<ref>'타인' 두 글자는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주석으로 처리했다.</ref>‘君子於仁也柔, 於義也剛’爲證. 殊不知論仁之定體, 則自屬陽. 至於論君子之學, 則又<ref>조선고사본에는 '又'자가 없다. </ref>各自就地頭說, 如何拘文牽引得! 今只觀天地之化, 草木發生, 自是條暢洞達, 無所窒礙, 此便是陽剛之氣. 如云: ‘采薇采薇, 薇亦陽<ref>하서린의 전경당본은 이 글자를'作'이라고 썼다.</ref>止.’ ‘薇亦剛止.’ 蓋薇之生也, 挺直而上, 此處皆可見.”
'''대답: 인(仁)이 어찌 일찍이 음(陰)에 속했겠는가? 때마침 원기중(袁機仲)<ref>원추(袁樞, 1131-1205)의 자가 기중이다. 어류 6:55를 보면 그는 의를 양에, 인을 음에 배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회암집 권 38의 답원기중별폭(答袁機仲別幅)에도 원기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주희의 반론이 실려있으니 참조하라.</ref>이 (그런 내용으로) 논쟁을 걸어왔다.<ref>여기서 '래(來)'는 찾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쪽을 '향해서' 어떤 동작을 수행했다는 뜻에 가깝다.</ref> 그는 ‘군자는 인(仁)에 대해서는 유(柔)하고, 의(義)에 대해서는 강(剛)하다’<ref>양웅의 법언(法言) 군자(君子)편. 주자어류 6:136을 보면 주희도 양웅의 이 발언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거나, 본체가 강한 덕목이 작용은 유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웅과 자신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려고 할 뿐이다.</ref>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는 인(仁)의 확정적 본질[定體]을 논하자면 당연히 양(陽)에 속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군자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또 각자의 경우[地頭]에 맞게 설명한 것이니,<ref>고문해의에서는 인의 확정적 본질을 논하는 경우에는 양에 속하고 인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음에 속한다고 정리했다.</ref> 어찌 (양웅의 법언에서 사용한) 문자(의 표현)에 얽매이는가?<ref>구문색인(拘文牽引)은 표현에 구애되어 얽매인 것이다.</ref> 이제 가만 보면 천지가 변화[天地之化]하여 초목이 탄생하고 발육할 적에 자연히 쭉쭉 뻗어나가 막히거나 걸리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양강(陽剛)한 기(氣)이다. 예를 들어 ‘고사리 캐고 고사리 캐니, 고사리 또한 양(陽)하네[采薇采薇, 薇亦陽止].’ ‘고사리 또한 강(剛)하네[薇亦剛止].’라 하였다.<ref>시경 소아 녹명지십 채미(采薇)편. 시경 쪽 원문은 '채미채미, 미역작지(采薇采薇 薇亦作止)', '채미채미, 미역유지(采薇采薇, 薇亦柔止)', '채미채미, 미역강지(采薇采薇, 薇亦剛止)'인데, 이는 고사리가 막 땅에서 자라나와 부드러운 단계를 거쳐 다 자라서 뻣뻣한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경과를 노래한 것이다. 주희는 우선 '作'을 '陽'으로 잘못 썼고, 또 중간에 위치한 '柔'를 생략하고 마지막 '剛'만을 인용함으로써 시경 채미편을 자신이 앞서 주장한 것처럼 초목이 양강(陽剛)하다는 말의 경전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ref> 대개 고사리는 나면서부터 똑바로 위로 자라니, 이러한 (고사리의 특성)에서 (초목의 양강(陽剛)한 성질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問: “禮屬陽. 至樂記, 則又以禮屬陰, 樂屬陽.”
'''질문: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禮)는 양(陽)에 속합니다. (하지만) 〈악기(樂記)〉에서는 또 예(禮)를 음(陰)에 배속하고 악(樂)을 양(陽)에 배속합니다.<ref>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기 악기편에서는 악을 하늘에, 예를 땅에 배속했다. '악은 하늘에서 말미암아 제작하고 예는 땅을 따라 제작한다(樂由天作, 禮以地制)'</ref>
曰: “固是. 若對樂說, 則自是如此. 蓋禮是箇限定裁節, 粲然有文底物事; 樂是和動底物事, 自當如此分. 如云‘禮主其減, 樂主其盈’之類, 推之可見.” 僩(69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악(樂)과 한 쌍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다. 대개 예(禮)는 한정짓고 선을 그으며[限定裁節] 찬란하게 문채가 있는[粲然有文] 것이고, 악(樂)은 조화롭고 감동시키는[和動]<ref>예기 악기편에 나오는 표현이다.</ref>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예가 양, 악이 음으로) 나뉜다. ‘예(禮)는 줄이는[減] 것을 위주로 하고, 악(樂)은 채우는[盈] 것을 위주로 한다[禮主其減, 樂主其盈]’라고 하는 것 등은 (앞선 내용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ref>예기 악기편. '악이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예란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줄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악은 채우는 것을 위주로 한다.(樂也者,動於內者也;禮也者,動於外者也。故禮主其減,樂主其盈.)' 줄이는 것은 '음'적인 운동, 채우는 것이 '양'적인 운동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떠올려 보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1 問: “健順在四端何屬?”
'''질문: 건순(健順)은 사단(四端) 중 어디에 속합니까?
曰: “仁與禮屬陽, 義與智屬陰.”
'''대답: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小學: ‘詩·書·禮·樂以造士.’ 注云: ‘禮, 陰也.’”
'''질문:《소학(小學)》에 ‘시(詩)·서(書)·예(禮)·악(樂)으로써 선비를 만든다’<ref>소학에서 예기 왕제편을 인용한 부분이다.</ref>고 하였는데, 주(注)에 ‘예(禮)는 음(陰)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f>주석은 예기 왕제편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ref>
曰: “此以文明言, 彼以節制言.”
'''대답: 이쪽은 문채나고 빛나는(文明) 측면에서 (예를) 설명한 것이고<ref>양에 속한다는 설명이다.</ref> 저쪽은 구별짓고 제약하는(節制)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ref>소학의 주석에 대한 설명이다.</ref>
問: “禮<ref>성화본은 '義'로 썼다. 이 조목의 첫 질문의 내용을 보나 이어지는 대화의 맥락상으로 보나 '義'가 더 어울리므로 이쪽으로 번역했다.</ref>智是束斂底意思, 故屬陰否?”
'''질문: 의(義)와 지(智)는 거두어들이는[束斂] 느낌이 있으므로 음(陰)에 속하는 것입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或問: “智未見束斂處.”
'''누군가의 질문: 지(智)는 거두어들이는 측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ref>일역판은 이 질문과 6:56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여기서의 '누군가'가 해당 조목의 기록자인 심한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ref>
曰: “義猶略有作爲, 智一知便了, 愈是束斂. 孟子曰: ‘是非之心, 智也.’ 纔知得是而愛, 非而惡, 便交過仁義去了.” 胡泳(69때).
'''대답: 의(義)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作爲) 조금 있지만, 지(智)는 한 번 알면 그걸로 끝이니 더욱 거두어들이는 쪽이다. 맹자(孟子)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라고 한다. 옳은[是] 줄 알고서 사랑하고 그른[非] 줄 알고서 미워하자마자 인(仁)과 의(義)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호영(胡泳)의 기록. (69세 때)
* 17:22 問陰陽五行健順五常之性.
'''음양(陰陽)·오행(五行)·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에 대한 질문.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陰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且如狗子, 會咬人底, 便是稟得那健底性; 不咬人底, 是稟得那順底性. 又如草木, 直底硬底, 是稟得剛底; 軟底弱底, 是稟得那順底.” 僩<ref>조선고사본에서는 '기손(蘷孫)'으로 썼다.</ref>(69이후).
'''대답: 굳건함(健)은 저 양(陽)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고, 유순함(順)은 저 음(陰)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며, 다섯가지 떳떳한 품성(五常)은 오행(五行)의 이치(理)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人物]은 모두 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을 부여받았다. 또 예컨대 개[狗子] 중에 사람을 무는 놈은 바로 저 굳건(健)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요, 사람을 물지 않는 놈은 저 유순(順)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다. 또 초목(草木) 중에 곧고 단단한 것은 강(剛)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저 윤순(順)<ref>이 글자는 엄밀한 문언이었으면 '柔'라고 썼어야 한다.</ref>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3 問: “或問‘氣之正且通者爲人, 氣之偏且塞者爲物’,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바르고 통한[正且通]<ref>바르다는 것은 도덕적 올바름보다는 똑바로 서있는 물건의 경우처럼 밸런스가 좋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통함은 공간적으로 이동할 때 장애 없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이다.</ref> 기(氣)는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偏且塞] 기(氣)는 사물이 된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物之生, 必因氣之聚而後有形, 得其淸者爲人, 得其濁者爲物. 假如大鑪鎔鐵, 其好者在一處, 其渣滓又在一處.”
'''대답: 사물의 생성은 반드시 (먼저) 기(氣)가 모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니, 그 맑은[淸] 것을 얻은 자는 사람이 되고 그 탁한[濁] 것을 얻은 자는 사물이 된다. 예를 들어 큰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면 잘 정련된 것이 한 쪽에 모이고 찌꺼기[渣滓]는 다른 한 쪽에 모이는 것과 같다.
又問: “氣則有淸濁, 而理則一同, 如何?”
'''재질문: 기(氣)에는 청탁(淸濁)이 있지만 이치(理)는 똑같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固是如此. 理者, 如一寶珠. 在聖賢, 則如置在淸水中, 其輝光自然發見; 在愚不肖者, 如置在濁水中, 須是澄去泥沙, 則光方可見. 今人所以不見理, 合澄去泥沙, 此所以須要克治也. 至如萬物亦有此理. 天何嘗不將此理與他. 只爲氣昏塞, 如置寶珠於濁泥中, 不復可見. 然物類中亦有知君臣母子, 知祭, 知時者, 亦是其中有一線明處. 然而不能如人者, 只爲他不能克治耳. 且蚤·虱亦有知, 如飢則噬人之類是也.” 祖道(68때).
'''대답: 진실로 그러하다. 이치(理)라는 것은 하나의 보배 구슬과 같다. (구슬이) 성현(聖賢)에게 있으면 마치 맑은 물[淸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휘광(輝光)이 자연히 드러나지만,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게 있으면 마치 탁한 물[濁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진흙과 모래[泥沙]를 걸러내야만 비로소 그 빛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이치(理)를 보지 못하니 마땅히 진흙과 모래를 걸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자기 기질을) 다스려야만[克治] 하는 까닭이다. 만물(萬物)의 경우에도 역시 이 이치(理)가 있다.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이 이치(理)를 그것들에게 주지 않았겠는가? 단지 기(氣) 때문에 흐리고 폐색하여[昏塞] 마치 보배 구슬을 탁한 진흙탕 속에 둔 것처럼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물들 중에서도 군신(君臣)·모자(母子)를 알고, 제사(祭)를 알며, 때[時]를 아는 종류가 있으니,<ref>당시 사람들은 벌과 개미[蜂蟻]에게 엄정한 군신관계가 있고. 호랑이와 이리[虎狼]에게 부자(혹은 모자)간에 친밀한 관계가 있고, 승냥이와 수달[豺獺]이 사냥한 짐승을 널어놓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줄 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와 이리의 친애함은 장자 천운편, 승냥이와 수달의 제사는 예기 왕제편이 최초의 출전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주자어류 4:9, 11, 19 등을 참조하라.</ref> 역시 그 속에 한 가닥 밝은 부분[一線明處]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과 같을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자기 기질을) 다스릴[克治] 수 없어서일 뿐이다. 또 벼룩[蚤]과 이[虱] 또한 (제한된 정도의) 지성(知)이 있으니, 예를 들어 굶주리면 사람을 무는 것 등이 이것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24 問: “或問云: ‘於其正且通者之中, 又或不能無淸濁之異, 故其所賦之質, 又有智愚賢不肖之殊.’ 世間有人聰明通曉, 是稟其氣之淸者矣, 然卻所爲過差, 或流而爲小人之歸者; 又有爲人賢, 而不甚聰明通曉, 是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그 바르고 통한[正且通] 자 중에서도 또 간혹 청탁(淸濁)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므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다시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통한 기에도 간혹 청탁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미추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추한 사람은 불초하니, 다시 서로 똑같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회암집 권 62 답이회숙(答李晦叔) 제 6서에서는 본 조목에서 인용한 것과 흡사한 버전으로 혹문을 인용하고 있다.</ref> 세상 사람 중에 총명하고 통달한[聰明通曉] 자는 맑은[淸] 기(氣)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하는 바가 어긋나서 혹 소인(小人)의 부류가 되고 마는 자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 사람됨이 현명하지만[賢] 그다지 총명하고 통달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曰: “或問中固已言之, 所謂‘又有智愚賢不肖之殊’, 是也. 蓋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事<ref>다수의 판본에서 '了'로 적었다.</ref>者, 智也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淸和溫恭之德. 又有人極溫和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爲學便是要克化, 敎此等氣質令恰好耳.” 僩(69이후).
'''대답: 《대학혹문》에서 이미 이에 관하여 말했으니, 이른바 ‘또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대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범주가 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聰明曉事] 자가 똑똑하되[智] 혹 현명하지 못하다면[不賢], 이는 곧 부여받은 것 가운데 맑고 온화하며[淸和] 따스하고 공손한[溫恭] 덕(德)이 부족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지극히 온화(溫和)하되 그다지 사리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바로 현명하지만[賢] 똑똑하지[智]는 못한 것이다. 배움(學)이란 바로 이러한 자기 기질을 이겨내고 변화시켜[克化] 딱 알맞게[恰好]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5 舜功問: “序引參天地事, 如何?”
'''순공(舜功)의 질문: (대학혹문의) 서문(序)에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셋이 되는[參天地]' 일을 인용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ref> '삼천지(參天地)'는 본래 중용 제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면 남이 그렇게 하도록 도울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했다면 이미 (이 사람의 위격은) 천지와 같으니,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은 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서문이 아니라 경 1장에서 '명덕'을 설명하는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은 태어나면서 바르고 통한 기운을 얻었으니 그 본성이 가장 귀하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허령통철(虛靈洞徹)하여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금수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처럼 되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어 (천지의) 낳고 기르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까닭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다.(唯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ref>
曰: “初言人之所以異於禽獸者, 至下須是見己之所以參化育者.”
'''대답: 처음에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까닭을 말하였으니, (이어지는) 그 아래에서는 모름지기 자신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參化育] 까닭을 보아야 한다.
又問: “此是到處, 如何?”
'''다시 질문: 이 과정은 종착점이[到處] 어떻게 됩니까?
曰: “到, 大有地步在. 但學者須先知其如此, 方可以下手. 今學者多言待發見處下手, 此已遲卻. 纔思要得善時, 便是善.” 可學(62때).
'''대답: (종착점에) 도달하기까지 크게 (여러가지) 단계들이[地步] 있다. 다만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종착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손을 쓸[下手] 수 있다. 지금 배우는 자들은 발현되는 경우[發見處]를 기다렸다가 손을 쓴다고 많이들 말하는데,<ref>이 발언은 아마도 호상학자들의 '찰식이발지제' 공부를 염두에 둔 듯하다. 고문해의는 회암집 권 51의 답동숙중(答董叔重) 제 3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ref> 이러면 이미 늦고 만다.<ref>'-却'은 현대 중국어 '-掉'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행위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한다. 예컨대 '망각(忘却)'은 잊어버린다는 행위가 완성된 것이다.</ref> 선(善)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 즉시 바로 선(善)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26 問: “或問‘自其有生之初’以下是一節; ‘顧人心稟受之初, 又必皆有以得乎陰陽五行之氣’以下是一節; ‘苟於是焉而不値其淸明純粹之會’, 這又轉一節; 下又轉入一節物欲去, 是否?”
'''질문: 《대학혹문》에서 ‘최초에 태어났을 때부터[自其有生之初]’ 이하가 한 단락이고, ‘생각건대 최초에 사람이 마음을 (하늘로부터) 받았을(稟受) 적에는 또 반드시 모두 음양(陰陽)·오행(五行)의 기(氣)를 얻음이 있었다’ 이하가 한 단락이며, ‘진실로 이 단계에서 그 청명하며 순수한 것들(을 받을) 기회[淸明純粹之會]를 만나지 못한다면’여기서 다시 전환되어 한 단락이고, 이어서 그 아래에서 다시 전환되어 '물욕(物欲)' 한 단락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까?<ref>질문자가 인용한 네 단락은 모두 현행본 대학혹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행본을 사서혹문의 최후개정판이라고 간주할 경우 여기서의 네 단락은 모두 구판의 문구들이 된다. 아래 주희의 말에 더해 여기서 인용된 부분만 가지고 추론하자면 제 1구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동질성, 제 2구는 음양오행의 정수를 얻어 탄생한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 제 3구는 그럼에도 타고난 기질의 퀄리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제 4구는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나 물욕에 빠져 추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일역판 역시 이와 흡사하게 추론했으니 참조하라.</ref>
曰: “初間說人人同得之理, 次又說人人同受之氣. 然其間卻有撞著不好底氣以生者, 這便被他拘滯了, 要變化卻難.”
'''대답: 처음에는 사람마다 똑같이 얻는 이치(理)를 설명하고,<ref>제 1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그 다음에는 또 사람마다 똑같이 받는 기(氣)를 설명한 것이다.<ref>제 2구를 설명한 것이다.</ref> 그러나 그 사이에 도리어 좋지 못한 기(氣)를 만나[撞]<ref>'撞'은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질문자가 인용한 제 3구의 '値'와 같다.</ref> 태어나는 자가 있으니,<ref>제 3구에 대한 해설이다.</ref> 그 경우 곧 그 (기에) 구속되고 막혀서[拘滯] 변화시키고자 하여도 어렵다.<ref>제 4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問: “如何是不好底氣?”
'''질문: 어떠한 것이 좋지 못한 기(氣)입니까?
曰: “天地之氣, 有淸有濁. 若値得晦暗昏濁底氣, 這便稟受得不好了. 旣是如此, 又加以應接事物, 逐逐於利欲, 故本來明德只管昏塞了. 故大學必敎人如此用工, 到後來卻會復得初頭渾全底道理.” 賀孫(62이후).
'''대답: 천지의 기(氣)에는 청탁이 있다. 만약 어둡고 혼탁한[晦暗昏濁] 기(氣)를 만난다면, 이는 곧 좋지 못한 것을 받은[稟受]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데 또 사물을 응대함[應接事物]에 있어 사사건건 이욕(利欲)을 쫓아다니므로, 본래의 명덕(明德)이 계속 흐리고 폐색[昏塞] 된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들이 이와 같이 힘을 쓰도록 가르쳐서, 나중에는 도리어 최초의 온전한[渾全] 도리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27 林安卿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擴將去.”
'''임안경(林安卿)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이 끝내 은폐될 수 없음을 설명한 부분이다.</ref>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은 지점들[覺處]에 나아가 앎을 지극히 하고(致知) 확충해[充擴] 나가야 합니다.
曰: “然. 昨日固已言之. 如擊石之火, 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林先引或問中“至於久而後有覺”之語爲比, 先生因及此.> 那箇覺, 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대답: 그렇다. 어제 진실로 이미 그것을 말했다. (그것은) 마치 부싯돌을 때려서 나오는 스파크[擊石之火]와 같으니, 작은 불씨[些子]일 뿐이지만, 착화하기만 하면 곧 온 들판을 다 태울[燎原] 수 있다. 만약 반드시 먼저 크게 깨달은[大覺] 다음에 비로소 격물(格物)·치지(致知)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순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임안경[林]이 먼저 《대학혹문》 중의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至於久而後有覺]'<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이정(二程)의 말이다. 원출전은 이정유서 18:18. '질문: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대답: 앎을 지극히하는 공부가 최우선이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이 매일 더욱 밝아질 것이고,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問: 學何以有至覺悟處? 曰: 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ref>는 말을 인용하여 비유하자 선생이 이어서 이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대학혹문에서 말한) 저 깨달음이란[那箇覺] 사물이 탐구되어 앎이 지극해진[物格知至] 뒤의 대철대오[大徹悟]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일은 모두 끝난다. 순간적인 깨달음[介然之覺] 같은 경우는 하루 동안에도 무시로 무수히[無時無數] 터져나오니,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려[識認] 붙잡아 지키고[操持] 확충하고 길러[充養]<ref>산란하는 마음을 수습하여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덕성을 두텁게 배양하는 공부를 말한다. 17:1과 3에서 설명하고 있는 소학 단계에서의 공부를 참조하라.</ref>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又問: “‘眞知’之‘知’與‘久而後有覺’之‘覺’字, 同否?”
'''다시 질문: ‘참된 앎[眞知]'<ref>진리를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 알아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이정이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정유서 2上:24 '참으로 아는 것과 평범하게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본 일인데, 어떤 농부가 호랑이에게 물려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쳤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변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그 농부만 안색이 변하여 다른 사람들과 반응이 달랐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참으로 안'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저 농부와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선을 알면서도 불선을 행하는 것은 역시 참으로 알지 못해서이다. 참으로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眞知與常知異. 常見一田夫曾被虎傷, 有人說虎傷人, 衆莫不驚, 獨田夫色動, 異於衆. 若虎能傷人, 雖三尺童子, 莫不知之, 然未嘗眞知. 眞知須如田夫乃是. 故人知不善, 而猶爲不善, 是亦未嘗眞知. 若眞知, 決不爲矣.)</ref>이라고 할 때의 ‘지(知)’와 ‘오래 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久而後有覺]’의 ‘각(覺)’ 자는 (의미가) 같지 않습니까?
曰: “大略也相似, 只是各自所指不同. 眞知是知得眞箇如此, 不只是聽得人說, 便喚做知. 覺, 則是忽然心中自有所覺悟, 曉得道理是如此. 人只有兩般心: 一箇是是底心, 一箇是不是底心. 只是才知得這是箇<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箇'의 순서가 '箇是'로 뒤집혀있다.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是箇'를 주석처리했다. 여유량본과 전경당본에서는 저본(중화서국판)과 같다.</ref>不是底心, 只這知得不是底心底心, 便是是底心. 便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 知得不是底心便是主, 那不是底心便是客. 便將這箇做主去治那箇客, 便常守定這箇知得不是底心做主, 莫要放失, 更那別討箇心來喚做是底心! 如非禮勿視聽言動, 只才知得這箇是非禮底心, 此便是禮底心, 便莫要視. 如人瞌睡, 方其睡時, 固無所覺. 莫敎纔醒, 便抖擻起精神, 莫要更敎他睡, 此便是醒. 不是已醒了, 更別去討箇醒, 說如何得他不睡. 程子所謂‘以心使心’, 便是如此. 人多疑是兩箇心, 不知只是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而已.”
'''대답: 대략 비슷하니, 그저 각자 지시하는 바[所指]가 다를 뿐이다. 참된 앎[眞知]은 참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단지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다. 깨달음[覺]이란 홀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깨닫는 바[覺悟]가 있어서 도리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옳은[是]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옳지 않은[不是] 마음이다. 그저 이것이 '옳지 않은 마음'임을 알기만 하면 곧 이 '옳지 않은 마음'을 아는 마음[知得不是底心底心]이 바로 '옳은 마음[是底心]'이다.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이 바로 주인(主)이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이 바로 손님(客)이다. 이것을 주인(主)으로 삼아 저 손님(客) 쪽을 다스려서, 항상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굳게 지켜[守定] 주인(主)으로 삼고 놓치지[放失] 말아야 하니, 다시 어디서[那]<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별도로 마음을 마련해와서[討]<ref>'討'는 물건을 구해다 온다는 뜻이다.</ref> '옳은 마음'이라고 부를 것인가?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聽言動]<ref>논어 12:1.</ref>는 말의 경우, '이건 예(禮)가 아니구나'라고 아는 그 마음[知得這箇是非禮底心]이야말로 바로 '예(禮)의 마음[禮底心]'이니, (이 마음을 주인으로 옹립한 사람은) 곧 (예에 어긋나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瞌睡] 경우, 잠이 든 동안에는 전혀 지각하는[覺]<ref>깨달을 '각(覺)'은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 사물을 지각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쓴 것이다.</ref> 바가 없다. 그저[莫敎]<ref>고문해의에서는 '只是'나 '除是'와 같다고 풀면서 '莫'을 부정사로, '敎'를 사역동사로 보는 해석을 배격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로 어류 130:77을 제시했는데, 사실 어류 전체에서 '막교'가 이런 식으로 쓰인 곳은 130:77 한 군데인 반면 다수의 다른 조목에서는 모두 '~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여전히 의심스럽다. 한어대사전에서는 '막교'를 '막비(莫非)'와 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님이 없다'가 된다. 일역판은 고문해의의 제언을 따랐다.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지만 달리 더 낫게 해석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우선 고문해의를 따라 번역해 두었다.</ref> 막 깨어나자마자[纔醒] 번쩍 정신을 차리고[抖擻起精神]<ref>'두수(抖擻)'는 물건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몸을 번쩍 일으키는 등을 말한다.</ref> 다시는 그 자신이 잠들도록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깨었다[醒]는 것이다. 이미 깨어난 뒤에 다시 별도로 '깨어있음'을 마련해와서 어떻게 하면 그 자신이 다시 잠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마음으로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ref>이정유서 18:85. '질문: 마음은 누가 부립니까? 대답: 마음으로 마음을 부리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저 혼자 하라고 맡겨두면 달아나 버린다. (曰: 心誰使之? 曰: 以心使心則可. 人心自由, 便放去也.)'</ref>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하면) 마음이 두개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데,<ref>마음 A로 마음 B를 통제한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에게 있어 마음은 하나 뿐이라는 주희의 평소 생각에 배치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심사심'이라고 말해도 사실은 하나뿐인 마음이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16:136, 34:196, 96:52 등을 보라.</ref> 단지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릴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元思云: “上蔡所謂‘人須是識其眞心, 方乍見孺子入井之時, 其怵惕·惻隱之心, 乃眞心也.'”
'''원사(元思)가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의 이른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眞心]을 알아야 한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막 보았을 때의 그 경악하며[怵惕] 측은해하는[惻隱] 마음이 바로 참된 마음[眞心]이다.'에 관하여 발언함.<ref>상채어록 권2의 한 대목을 주희가 맹자집주 2A:6에서 인용한 것이다. 맹자집주쪽의 문장은 본 조목과 일치하나 상채어록의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참된 마음이다. (人須識其眞心. 見孺子將入井時, 是眞心也.)'</ref>
曰: “孟子亦是只<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只'가 '只是'로 순서가 뒤집혀있다.</ref>討譬喩, 就這親切處說仁之心是如此, 欲人易曉. 若論此心發見, 無時而不發見, 不特見孺子之時爲然也. 若必待見孺子入井之時, 怵惕·惻隱之發而後用功, 則終身無緣有此等時節也.”
'''대답: 맹자(孟子) 역시 그저 비유를 하나 가져와서[討] 이렇게 친근하고 절실한[親切] 지점 위에서 인(仁)한 마음이란 이와 같음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쉽게 깨닫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 마음의 발현(發見)을 논하자면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으니[無時而不發見], 꼭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경악하며 측은해하는 마음이 발현된 뒤에야 힘을 써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죽을 때 까지 이러한 순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ref>발현된 것을 근거로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음 속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당시 표현으로 이발찰식 공부라고 불렀다. 오늘날 호남성 장사에 해당하는 형호남로 담주(潭州)를 근거지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이러한 방향의 공부를 주장했는데, 이를 통칭 '호상학(湖湘學)'이라고 부른다. 17:25에 이어 여기에서도 주희는 호상학의 공부방법론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어서 원사가 호상학의 거두인 호굉(胡宏)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ref>
元思云: “舊見五峰答彪居仁<ref>'彪居正'의 오기이다.</ref>書, 說齊王易<ref>성화본, 조선정판본, 조선고사본에서는 '易'을 '愛'로 적었다.</ref>牛之心云云, 先生辨之, 正是此意.”
'''원사(元思)가 말함: 옛날 오봉(五峰)<ref>호굉(胡宏, 1105~1161)이다. 호상학의 거두로 장식(張栻, 1133-1180)의 스승이다.</ref>이 표거정(彪居正)에게 답한 편지에서 제나라 임금(齊王)이<ref>맹자와 대담한 제선왕을 말한다.</ref> 소를 바꾼 마음[易牛之心]<ref>맹자 1A:7. 제나라 선왕이 제사에 쓰일 희생물인 소가 두려움에 떨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일을 말한다.</ref> 운운한 것을 보았는데,<ref>호굉의 주저인 지언(知言) 권 4에 이 대담이 실려있다. '다른날 물었다: 사람이 인하지 못한 까닭은 그 좋은 마음을 놓쳐서입니다. 놓친 마음을 가지고 (본래의 좋은) 마음을 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답: 제나라 임금이 소를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이 좋은 마음의 싹이 이욕(利欲)의 틈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드러난 그것을 붙잡아 간직하고 간직하여 기르고 길러서 확충하여 매우 커질 때까지 그치지 않으면 하늘과 똑같아진다. 이 마음이 발현하는 단서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핵심은 그것을 인식하는데 있을 뿐이다.(他日問曰: 人之所以不仁者, 以放其良心也. 以放心求心, 可乎? 曰: 齊王見牛而不忍殺, 此良心之苖裔, 因利欲之間而見者也. 一有見焉, 操而存之, 存而養之, 養而充之, 以至于大大而不已, 與天同矣. 此心在人, 其發見之端不同, 要在識之而已.)</ref> 선생님께서 (호굉과 표거정 사이의)그 대담을 논변하신 글<ref>주희가 장식, 여조겸과 함께 1170년(41세)에 완성한 호자지언의의(胡子知言疑義)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회암집 권 73에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이 상당하며 또 본 조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고 하기 어려우므로 인용하지는 않겠다.</ref>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曰: “然. 齊王之良心, 想得也常有發見時. 只是常時發見時, 不曾識得, 都放過<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이 뒤에 '去'자가 있다.</ref>了. 偶然愛牛之心, 有言語說出, 所以孟子因而以此推廣之也.”
'''대답: 그렇다. 제나라 임금(齊王)의 좋은 마음[良心]도 생각해 보면 역시 늘상 발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평상시 발현될 적에는 그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어서 모두 놓쳐버렸을[放過] 뿐이다. 우연히 소를 아끼는 마음[愛牛之心]이 말로 발화되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가 그 기회에 그것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又問: “自非物欲昏蔽之極, 未有不醒覺者.”
'''다시 질문: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지[物欲昏蔽之極]않은 이상 (여지껏) 깨어나지[醒覺]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曰: “便是物欲昏蔽之極, 也無時不醒覺. 只是醒覺了, 自放過去, 不曾存得耳.” 僩(69이후).
'''대답: 설령<ref>'便是'는 '설령[即使]', '비록[雖是]'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문해의를 참조하라.</ref>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사람은) 깨어나지 못할 때가 없다. 단지 깨어나고 나서도 스스로 놓쳐버려[放過去] 한번도 (제대로) 간직하지[存得] 못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8 友仁說“明明德”: “此‘明德’乃是人本有之物, 只爲氣稟與物欲所蔽而昏. 今學問進修, 便如磨鏡相似. 鏡本明, 被塵垢昏之, 用磨擦之工, 其明始現. 及其現也, 乃本然之明耳.”
'''내(友仁)가 ‘명명덕(明明德)’을 설명했다: 이 ‘명덕(明德)’은 바로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인데, 단지 기품(氣稟)<ref>각자가 타고난 정신/신체적 퀄리티를 말한다. '품'은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는 뜻이다.</ref>과 물욕(物欲)에 뒤덮혀 흐려졌을 뿐입니다. 지금 학문(學問)을 하여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아나가는[進修]<ref>'진수'는 주역 건괘 문언전의 '진덕수업(進德修業)'에서 나온 말이다. 주희는 주역본의에서 '진덕'을 마음의 진정성(忠信)을 배양하는 공부로, '수업'을 언행을 가다듬고 단속하는 공부로 풀이했다.</ref> 것은 마치 거울을 갈고닦는[磨鏡]<ref>당시 거울은 청동거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경'이란 유리거울을 헝겁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청동거울을 숯돌 등을 가지고 갈아내는 작업에 가깝다.</ref> 것과 비슷합니다. 거울은 본래 밝지만 먼지와 때[塵垢]에 의해 흐려진 것을 갈고닦는[磨擦] 노력을 들여야만 그 밝음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드러나게 되면 곧 본래의 밝음[本然之明]일 뿐입니다.
曰: “公說甚善. 但此理不比磨鏡之法.”
'''대답: 그대(公)의 설명이 매우 좋다. 다만 이 이치(理)는 거울을 갈고닦는 법[磨鏡之法]으로 비유할 수 없다.
先生略擡身, 露開兩手, 如閃出之狀, 曰: “忽然閃出這光明來, 不待磨而後現, 但人不自察耳. 如孺子將入於井, 不拘君子小人, 皆有怵惕·惻隱之心, 便可見.”
선생이 몸을 약간 일으켜 두 손을 펼쳐 (빛이) 번쩍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이고서 말함: 홀연히 이 광명(光明)이 번쩍 나오는 것이지, 갈고닦기를 기다린 뒤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스스로 (이 광명을) 살피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군자(君子)냐 소인(小人)이냐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드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友仁云: “或問中說‘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而其本體已洞然’, 便是這箇道理.”
'''내가(友仁) 말함: 《대학혹문》 중에 ‘그러므로 제아무리 뒤덮혀 흐려짐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이 빈틈[空隙] 속에서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직전 17:27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ref>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先生頷之, 曰: “於大原處不差, 正好進修.” 友仁(69때).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함: 큰 근원[大原]의 차원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기에[進修] 딱 좋을 때이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9 問: “或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而吾之'가 더 있다.</ref>所以明而新之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又'가 더 있다. 조선고사본처럼 인용해야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非可以私意苟且爲也.’ 私意是說著不得人爲, 苟且是說至善.”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구차한 것을[苟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의(私意)는 인위(人爲)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구차(苟且)는 지극한 선[至善]을 말하는 것입니다.<ref>대학혹문 인용구는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어야 맞겠으나 여기서 질문자가 '구차(苟且)'가 '지선(至善)'을 지시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번역해 두었다. '구차(苟且)'라는 표현은 오늘날 한국어에서 '구차한 살림살이'의 경우처럼 가난하고 변변찮은 모양새를 뜻하지만, 주희 당시에는 '임시변통(makeshift)' 같은 뜻으로 쓰였다. 질문자가 구차(苟且)를 지선으로 오인한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 주석을 보라.</ref>
曰: “才苟且, 如何會到極處!”
'''대답: 조금이라도 구차하면[苟且] 어떻게 지극한 지점[極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賀孫擧程子<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以'가 더 있다.</ref>義理精微之極<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姑以至善目之之語'가 더 있다. 이렇게 인용해야 문장이 현행본 대학혹문에 더 가깝게 된다.</ref>.
'''내가(賀孫) 정자(程子)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義理)’<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정이의 말이다.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원출전은 이정유서 15:183이다. '선이란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우선은[且] '지선'이라고 지목한다.(善者, 義理之精微, 無可得名. 且以至善目之.)' '임시로[姑]'나 '우선은[且]'은 모두 '구차(苟且)'와 같다. 최초의 질문자와 섭하손(두 사람은 동일인일 수도 있다)은 정자가 계속해서 지극한 진리에 '구차하게' 지선(至善)이라고 임시적인 라벨을 붙이고 있다고 하니 대학혹문의 다른 구절에 등장한 '구차(苟且)'라는 표현 역시 지선(至善)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오인한 듯하다.</ref>라는 말을 거론했다.
曰: “大抵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事皆有箇極好處. 今之人, 多是理會得半截, 便道了. 待人看來, 喚做好也得, 喚做不好也得. 自家本不曾識得到, 少刻也會入於老, 也會入於佛, 也會入於申韓之刑名. 止緣初間不理會到十分, 少刻便沒理會那箇是白, 那箇是皂, 那箇是酸, 那箇是鹹. 故大學必使人從致知直截要理會透, 方做得. 不要恁地半間半界, 含含糊糊. 某與人商量一件事, 須是要徹底敎盡. 若有些子未盡處, 如何住得. 若有事到手, 未是處, 須著極力辨別敎是. 且看孟子, 那箇事恁地含糊放過<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去'가 더 있다.</ref>! 有一字不是, 直<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須'가 더 있다.</ref>爭到底. 這是他見得十分極至, 十分透徹, 如何不說得?” 賀孫(62이후).
'''대답: 대체로 지선(至善)은 그저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 100퍼센트 단정하고 딱 맞아서[端正恰好] 조금도 옳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 조금도 (목표에) 이르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이다. 예컨대 임금을 섬김[事君]에 반드시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섬긴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경(敬)이라 하고, 백성을 다스림[治民]에 반드시 요(堯)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인(仁)이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반절[半截]만 이해하고서 다 했다고 말한다. 남이 보고서 판단하기를 좋다고 해도 괜찮고[得] 좋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得]는 식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15:116을 참조하라.<ref>여기서 '득(得)'은 현대중국어 '行(xing)', 영어 'OK'와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나른한 태도를 뜻한다.</ref> 자기 자신의 인식이 본래 (목표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 조금만 지나면 노자(老子)에게 들어갈 수도 있고, 부처[佛]에게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형명학(刑名)에도 들어갈 수 있다.<ref>전국시대 법가, 특히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문을 형명(刑名) 또는 형명(形名)이라고 부른다. 이는 형벌과 관련된 이름은 아니다. 관료 각각에게 부여된 직무의 내용이 명칭(名)이고, 실제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형체(形)이다. 형체와 명칭, 실질과 명칭이 서로 부합하도록 국가기구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형명학'이라는 별칭이 나온 것이다. 풍우란, 중국철학사(上), 1999. P.514-515.</ref> 그저 애초에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어느 것이[那] 희고 어느 것이 검으며,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짠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치지(致知) 단계에서부터 칼로 자른듯[直截]<ref>'직절(直截)'은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확실성, 철저성을 의미한다.</ref> 철저히 이해하도록[理會透] 요구하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어중간하고[半間半界]<ref>'반간불계(半間不界)'와 같다. 철처하지 못하다는 뜻이다.</ref> 웅얼거리듯[含含糊糊]<ref>함호(含糊)는 말소리가 또렷하지 않고 웅얼거린다는 뜻이다.</ref>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남과 무슨 일을 상의할 때에는 반드시 남김없이 철저히 하고자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다면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일이 손에 들어왔을 때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모름지기 극력(極力)으로 변별하여 맞게 만들어야 한다. 또 맹자(孟子)를 보라. (그가) 무슨 일을 그렇게 웅얼웅얼 대충 넘어가던가? 한 글자라도 맞지 않으면 끝까지[到底] 다투었다. 이(렇게 다툰 이유)는 그의 이해가 100퍼센트 지극하고 100퍼센트 투철했기 때문이니, (이러하다면 맹자가) 어찌 논변[說]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f>여기서는 심상하게 '말하다[說]'라고 풀어서는 안 된다. 논변을 너무 좋아한다는 당시의 악평에 대한 맹자의 변론으로 맹자 3B:9를 참조하라.</ref>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0 問: “或問說明德處云: ‘所以應乎事物之間, 莫不各有當然之則.’ 其說至善處, 又云: ‘所以見於日用之間者, 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二處相類, 何以別?”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기를 ‘사물(事物)에 응하는 사이에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혹문에서 지선(至善)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또 이르기를 ‘일상생활[日用] 사이에 나타나는 바에 각각 본래 그러한 일정한 법칙[本然一定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두 부분이 서로 유사한데, 어떻게 구분합니까?<ref>현행본 대학혹문에는 질문자 진순이 인용한 두 문구 가운데 후자만 있다. 전자는 아마도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개정의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ref>
曰: “都一般. 至善只是明德極盡處, 至纖至悉, 無所不盡.” 淳(61·70때).
'''대답: 모두 같은 이야기다. 지선(至善)은 단지 명덕(明德)이 남김없이 지극한 곳[極盡處]일 뿐이니, 지극히 섬세하고 상세하여[至纖至悉] 다하지 않음이 없다.<ref>같은 취지의 발언이 14:114에서도 보이는데 이 역시 진순이 질문하고 기록한 조목이다.</ref>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 17:31 仁甫問: “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다음 인용구에 대한) 인보(仁甫)의 질문: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ref>대학혹문. 17:29를 참조하라.</ref>
曰: “此是程先生說. 至善, 便如今人說極是. 且如說孝, 孟子說‘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此是不孝. 到得會奉養其親, 也似煞强得這箇, 又須著如曾子之養志, 而後爲能養. 這又似好了, 又當如所謂‘先意承志, 諭父母於道', '不遺父母惡名’, 使'國人稱願道‘幸哉有子如此’', 方好.”
'''대답: 이는 정(程) 선생의 설명이다. 지선(至善)은 곧 요즘 사람들이 '극히 옳다[極是]'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효(孝)를 말함에 있어, 맹자(孟子)가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보지 않는다’<ref>맹자 4B:30.</ref>고 한 것, 이것은 불효(不孝)이다. 자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경우는 역시 (앞서 말한) 그것보다는 꽤[煞] 나은[强得] 듯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증자(曾子)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한[養志] 것과 같이 해야만<ref>맹자 4A:19. 아버지의 의지를 살펴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쪽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말한다.</ref> 비로소 봉양을 잘하는 것이다. 이정도로도 좋은 듯하지만, 다시 마땅히 이른바 ‘부모의 뜻을 한발 앞서 헤아려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道)로 인도하며',<ref>예기 제의편. '군자의 효도란 (어버이의) 생각을 한 발 앞서 알아차려 그 뜻을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봉양이나 하는 사람이니 어찌 효도한다고 하겠나?(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安能為孝乎?)</ref>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아',<ref>예기 제의편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자기 행실을 삼가서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으면 잘 보내드렸다고 할 만하다.(父母旣沒,愼行其身,不遺父母惡名,可謂能終矣.)'</ref>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저런 아들이 있어서."라고 말하게'<ref>예기 제의편. '좋은 고기를 익혀서 드리는 것은 효가 아니라 봉양[養]이다. 군자가 말하는 효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아들이 있어서."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효이다.(亨孰膻薌,嘗而薦之,非孝也,養也。君子之所謂孝也者,國人稱愿然曰:『幸哉有子!』如此,所謂孝也已).</ref> 해야만 충분하다 하겠다.
又云: “孝莫大於尊親, 其次能養. 直是到這裏, 方喚做極是處, 方喚做至善處.”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효(孝)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尊親]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잘 봉양하는 것[能養]이다.<ref>예기 제의편. '큰 효도는 존친이요, 그 다음은 욕먹이지 않는 것이요, 그 아래가 잘 봉양하는 것이다.(大孝尊親,其次弗辱,其下能養)'</ref>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극히 옳은 곳[極是處]'이라 하고, 비로소 지선(至善)한 곳이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2 郭德元問: “或問: ‘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此三者, 求之古今人物, 是有甚人相似?”
'''곽덕원(郭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오직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있고, 또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不屑] 자가 있으며, 또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이다.</ref>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가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문구를 약간 축약한 형태이다. 아래 원주에서 인용한 탁록(卓錄) 쪽은 '因'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고 하였습니다. 이 세 부류를 고금(古今)의 인물 가운데서 찾아보면 누구와 비슷합니까?
曰: “如此等類甚多. 自謂能明其德而不屑乎新民者, 如佛·老便是; 不務明其明德, 而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如管仲之徒便是; 略知明德新民, 而不求止於至善者, 如前日所論王通便是<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如此'가 더 있다.</ref>. <卓錄云: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因<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狃'으로 썼다.</ref>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如前日所論王通之事是也.”><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 전체가 없는 대신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선생은 며칠 앞서 왕통론(王通論)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先生前此數日作王通論, 其間有此語.)'</ref> 看他於己分上亦甚修飭, 其論爲治本末, 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狹, 不曾就本原上著功,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始是. 看古之聖賢別無用心, 只這兩者是喫緊處: 明明德,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 正如佛家說, ‘爲此一大事因緣出見於世’, 此亦是聖人一大事也. 千言萬語, 只是說這箇道理. 若還一日不扶持, 便倒了. 聖人只是常欲扶持這箇道理, 敎他撑天柱地.” 文蔚(59이후).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卓録同. 又問: "秦漢以下, 無一人知講學明理, 所以無善治.” 曰: “然.” 因泛論歷代以及本朝太宗眞宗之朝, 可以有爲而不爲. “太宗每日看太平廣記數卷, 若能推此心去講學, 那裏得來? 不過寫字作詩, 君臣之間以此度日而已. 眞宗東封西祀, 糜費巨萬計, 不曾做得一事. 仁宗有意於爲治, 不肯安於小成, 要做極治之事. 只是資質慈仁, 卻不甚通曉用人, 驟進驟退, 終不曾做得一事. 然百姓戴之如父母. 契丹初陵中國, 後來卻服仁宗之德, 也是慈仁之效. 緣它至誠惻怛, 故能動人如此.' 이 내용은 선두 네 글자를 제외하고 127:8과 일치하므로 그쪽을 참조하라. 여기서 번역하지는 않겠다.</ref>
'''대답: “이러한 부류는 매우 많다. 스스로 자신의 (밝은) 덕(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로는 예컨대 불가와 노자[佛·老]가 바로 그렇다.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예를 들어 관중(管仲)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는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ref>584-617. 호는 문중자(文中子).</ref>이 바로 그렇다. <탁(卓)의 기록에는 “또 이 두 가지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작은 성취[小成]에 안주하고 근시안적 이익[近利]을 따라서[因]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의 경우가 그렇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일신의 차원[己分上]에서도 깊이 수양했으며[修飭], 그 다스림의 본말(本末)을 논한 것도 조리가 있었으니, 이 세상[斯世]에 대해 진지하게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스케일[規模]이 얕고 좁아서 일찍이 근본[本原]의 차원에서는 힘을 쓰지[著功]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做不徹] 못한 것이다. 반드시 그 최선의 것[極]<ref>지선(至善)을 말한다.</ref>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만 한다. 가만 보면 옛 성현(聖賢)은 다른데 마음을 씀이 없었고, 그저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ref>만이 긴요한 부분[喫緊處]이었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사욕(私欲)이 없기를 원했고,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든 각각의 사안(事事物物)에 대해 모두 마땅하게 처신하기를 원했다.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했다’<ref>법화경 서품 '제불과 세존이 오직 이 하나의 큰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했다.(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ref>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성인(聖人)의 하나의 큰일[一大事]이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단지 이 도리를 설명할 뿐이다. 만약 하루라도 부지(扶持) 않으면 곧 쓰러져버린다. 성인(聖人)은 그저 언제나 이 도리를 부지하여 하늘과 땅을 지탱하게[撑天柱地] 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33 問: “明德而不能推之以新民, 可謂是自私.”
'''질문: 명덕(明德)을 밝혔으되 그것을 미루어 백성을 새롭게하지[新民] 못한다면, 자기 생각만 한다[自私]<ref>자기 자신만을 위함, 자기 생각만 함,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있음. 주희는 보통 '자사자리(自私自利)'와 같은 형태로 사용하며 주로 불교를 비판할 적에 꺼내는 표현이다. 불교는 자기 일신의 구원만 신경쓸 뿐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취지이다.</ref>고 할 만합니다.
曰: “德旣明, 自然是能新民. 然亦有一種人不如此, 此便是釋·老之學. 此箇道理, 人人有之, 不是自家可專獨之物. 旣是明得此理, 須當推以及人, 使各明其德. 豈可說我自會了, 我自樂之, 不與人共!”
'''대답: 덕(德)이 이미 밝아졌다면 자연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와 노자의 학문이다. 이 도리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미 이 이치를 밝혔다면, 반드시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推以及人] 각자 자기 덕(德)을 밝히게 해야 한다. 어찌 나 혼자 해냈으니 나 혼자만 그것을 즐기고 남과 공유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因說: 曾有學佛者王天順, 與陸子靜辨論云: “我這佛法, 和耳目鼻口髓腦, 皆不愛惜. 要度天下人, 各成佛法, 豈得是自私!”
'''이어서 (내가) 말함: 일전에 불교를 배운 왕천순(王天順)<ref>누군지 확실치 않다. 상산집(象山集) 권 2의 여왕순백(與王順伯) 제 2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왕천순은 왕순백의 이름을 오기한 것일 수 있다.</ref>이 육자정(陸子靜)<ref>육구연이다.</ref>과 변론하며 이르기를 '나의 이 불법(佛法)은 귀·눈·코·입·골수·뇌[耳目鼻口髓腦]까지 모두 다<ref>'和...皆'는 현대 중국어 '連...都'와 같다. '~까지 모두다', '~마저도 모두 다' 정도의 의미이다.</ref> 아끼지 않고 천하 사람들을 제도하여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데 이게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自私]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先生笑曰: “待度得天下人各成佛法, 卻是敎得他各各自私. 陸子靜從初亦學佛, 嘗言: ‘儒佛差處是義利之間.’ 某應曰: ‘此猶是第二著, 只它根本處便不是. 當初釋迦爲太子時, 出遊, 見生老病死苦, 遂厭惡之, 入雪山修行. 從上一念, 便一切作空看, 惟恐割棄之不猛, 屛除之不盡. 吾儒卻不然. 蓋見得無一物不具此理, 無一理可違於物. 佛說萬理俱空, 吾儒說萬理俱實. 從此一差, 方有公私·義利之不同.’ 今學佛者云‘識心見性’, 不知是識何心, 是見何性.” 德明(44이후).
'''선생이 웃으며 말함: 천하 사람들이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도록 제도하겠다는 것은<ref>서두의 '대(待)'는 '욕(欲)'이나 '장요(將要)'와 같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말한다.</ref> 도리어 그들 각자가 자기 생각만 하도록[各各自私] 가르치는 것이다. 육자정(陸子靜) 역시 처음에는 불교를 배웠는데,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차이는 의(義)와 이(利)의 차이이다’고 하였다.<ref>이 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175년 아호에서의 만남, 혹은 1181년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ef> 내가 응답하기를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第二著]이다. 그저 그 근본(根本)부터가 옳지 않다. 당초 석가(釋迦)가 태자(太子)였을 때 성문 밖으로 나가 노닐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설산(雪山)에 들어가 수행하였다.<ref>석가모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을 말한다.</ref> 그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곧 일체를 공(空)으로 보게 되었고, 오직 그것을<ref>본질적으로 허망한 이 세상 일체를</ref> 잘라내어 버림[割棄]이 과감하지 못할까, 제거함[屛除]이 완벽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ref>불교의 출세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세간의 일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ref> 우리 유학[吾儒]은 도리어 그렇지 않다. 대개 한 물건도 이 이치(理)를 갖추지 않음이 없고, 한 이치도 사물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이치[萬理]가 모두 헛되다[空]고 말하고, 우리 유학은 모든 이치가 모두 진실[實]하다고 말한다.<ref>'실(實)'을 '진실하다'고 번역하긴 했지만, 여기서 '공'은 내용물이 빈 그릇을, '실'은 내용물이 가득찬 그릇을 연상시키고 있음에 주의하라. 주희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는 본질이자 당위(곧,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가 '진실되다'라고 말할 때는 불교에서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그러한 본질이자 당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ref> 이 하나의 차이로부터 비로소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의 차이가 있게 된다.’ 지금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識心見性]’고 말하지만, 대체 무슨 마음을 알고 무슨 성품을 본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o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 知止而後有定以下一段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17:34 問: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머무를 곳을 알 수 있으면[能知所止] 곧 마음[方寸] 속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 모두 확정불변한 이치[定理]가 있게 된다.’에 관한 질문.<ref>대학혹문. 14:126과 163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고한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져서 각각의 경우에 객관적인 도덕률이 확고하게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知止도 인지, 有定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ref>
曰: “定·靜·安三項若相似, 說出來煞不同. 有定, 是就事理上說, 言知得到時, 見事物上各各有箇合當底道理. 靜, 只就心上說.”
'''대답: 정(定)·정(靜)·안(安)<ref>대학 본문에서 제시한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득(得) 다섯 단계 가운데 세 꼭지를 말한 것이다. 14:157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마치 추운 자가 옷을 갈망하고 굶주린 자가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너무 확정적이라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ref> 세 항목은 비슷한 듯하지만 설명하면 자못 다르다. 확정됨(定)이 있다는 것은 사리(事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앎이 지극해졌을 때 사물마다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도리가 있음을 (확실하게) 본다는 말이다. 고요함(靜)은 (같은 내용을)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뿐이다.<ref>14:129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
問: “‘無所擇於地而安’, 莫是‘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否?”
'''질문: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히 안정된다’<ref>대학혹문</ref>는 것은 아마도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한대로 행하고,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한대로 행한다’<ref>중용 제 14장. '소(素)'는 '현재(見在)'의 뜻이다.</ref>는 것 아닙니까?”
曰: “這段須看意思接續處. 如‘能得’上面帶箇‘慮’字, ‘能慮’上面帶箇‘安’字, ‘能安’上面帶箇‘靜’字, ‘能靜’上面帶箇‘定’字, ‘有定’上面帶箇‘知止’字, 意思都接續. 旣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靜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邊也安, 在富貴也安, 在貧賤也安, 在患難也安.<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한 번 생각해 보라(看如何? 公且看,)'가 더 있다.</ref> 不見事理底人, 有一件事, 如此區處不得, 恁地區處又不得, 這如何會有定! 才不定, 則心下便營營皇皇, 心下才恁地, 又安頓在那裏得! 看在何處, 只是不安.” 賀孫(62이후).
'''대답: 이 단락은 모름지기 의미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능득(能得)’ 위에는 ‘려(慮)’ 자가 있고, ‘능려(能慮)’ 위에는 ‘안(安)’ 자가 있으며, ‘능안(能安)’ 위에는 ‘정(靜)’ 자가 있고, ‘능정(能靜)’ 위에는 ‘정(定)’ 자가 있으며, ‘유정(有定)’ 위에는 ‘지지(知止)’ 자가 있으니, 뜻이 모두 이어진다. 이미 사물에 확고불변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보고서 이 마음이 이렇게 고요해졌다면[寧靜], 어떤[看]<ref>의문구 앞에 나오는 '간(看)'은 '그 어떤... 막론하고(不管, 儘管)'으로 풀이한다. 14:143, 157을 참조하라.</ref> 상황에 처했느냐를 막론하고, 여기에 있어도 편안하고[安], 저기에 있어도 편안하며, 부귀(富貴)에 있어도 편안하고, 빈천(貧賤)에 있어도 편안하며, 환난(患難)에 있어도 편안하다.<ref>부귀, 빈천, 환난은 질문자가 인용한 중용 제 14장에서 들고 있는 예시들이다.</ref> 사리(事理)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안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고 저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으니, 이런 경우 어떻게 확고함(定)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확고(定)하지 못하면 마음속이 곧바로 안절부절 불안하니[營營皇皇], 마음속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면 또 어디에 (자신을) 편안히 둘[安頓] 수 있겠는가! 어디에[看] 있든 그저 불안할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5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硏幾.”
'''‘사려할 수 있으면[能慮] 사안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여 깊음을 지극히하고 기미를 갈고닦는다[隨事觀理, 極深硏幾].’<ref>대학혹문. '극심'과 '연기'는 본래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14:146을 참조하라.</ref>에 관한 질문.
曰: “到這處又更須審一審. ‘慮’字看來更重似‘思’字. 聖人下得言語恁地鎭重, 恁地重三疊四, 不若今人只說一下便了, 此聖人所以爲聖人.” 賀孫(62이후).
'''대답: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 번 신중히 살펴보아야[審]<ref>'심(審)'은 극심연기의 '연(硏)'을 풀이한 말이다.</ref> 한다. ‘려(慮)’ 자는 내 생각에 ‘사(思)’ 자보다[似]<ref>여기서 '사(似)'는 '어(於)'와 같다.</ref> 더 무겁다. 성인이 표현을 고른 것이 이렇게 진중(鎭重)하고 이렇게 거듭 반복되니[重三疊四], 요즘 사람들이 그저 한 번 말하고 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래서 성인은 성인인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6 安卿問: “知止是始, 能得是終. 或問言: ‘非有等級之相懸.’ 何也?”
'''안경(安卿)의 질문: 지지(知止)는 시작이고 능득(能得)은 끝입니다.<ref>이에 대한 설명은 17:34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대학혹문》에서는 (양자간에) ‘등급(等級)이 서로 현격히 벌어져 있지 않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이 말을 풀어써두어서 표현이 조금 다르다. '공자의 지우학(志于學)부터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 맹자의 선인(善人), 신인(信人)으로부터 성인(聖人), 신인(神人)까지가 실로 등급이 현격히 벌어져 있어서 평생토록 거쳐가는 순서인 것과는 같지 않다.(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ref>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也不是無等級,<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여섯 글자가 없다.</ref> 中間許多只是小階級, 無那大階級.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便是大階級, 步卻闊. 知止至能得, 只如志學至立相似, 立至不惑相似. 定·靜·安, 皆相類, 只是中間細分別恁地.”
'''대답: 역시 등급(等級)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의 많은 것들은 단지 작은 계단[階級]들일 뿐 그렇게 큰 계단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ref>논어 2:4에서 공자가 자신이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ref>부터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ref>공자가 7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 경지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많은 것들은 곧 큰 계단이니 보폭이 오히려 넓다.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부터 스스로 섰다[立]<ref>공자가 3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고, 스스로 섰다[立]부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不惑]<ref>40세의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다. 정(定)·정(靜)·안(安)은 모두 비슷한 부류요, 단지 중간에 저처럼 세밀하게 구별했을 뿐이다.
問: “到能得處是學之大成, 抑後面更有工夫?”
'''질문: 능득(能得)의 경지에 이르면 배움에 대성한[學之大成] 것입니까, 아니면 뒤에 공부가 더 있습니까?
曰: “在己已盡了,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亦只是自此推去.” 㝢(61이후).
'''대답: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는[在己] 이미 다 했고,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하지만, (후자는) 역시 그저 여기서<ref>자기 자신의 차원이다.</ref> 미루어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ref>이 부분은 14:152와 흡사하다.</ref>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 古之欲明明德於天下一段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17:37 問: “或問‘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 是能得已包齊家治國說了. 前晩何故又云‘能得後,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질문: 《대학혹문》에서 ‘성의(誠意)에서 평천하(平天下)까지는 저 지선(至善)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ref>대학혹문.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이란 명명덕의 일이요 제가, 치국, 평천하란 신민의 일이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요, 성의부터 평천하까지는 저 지선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ref>라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이 이미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까지 포함하여 설명한 것입니다.<ref>전통시대 유학이 커버하는 영역을 크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을 때, 인용된 대학혹문의 문구대로라면 두 영역이 수기로 일원화된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f>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어찌하여 또 ‘능득(能得)한 뒤에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ref>치인의 영역이 수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제 저녁의 대화란 17:36을 말한다. 17:34 또한 참조하라.</ref>
曰: “以修身言之, 都已盡了. 但以明明德言之, 在己無所不盡, 萬物之理亦無所不盡. 如'至誠惟能盡性', 只盡性時萬物之理都無不盡了. 故盡其性, 便盡人之性; 盡人之性, 便盡物之性.” 㝢<ref>조선고사본에서는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㝢同)'이다.</ref>(61이후).
'''대답: 수신(修身)으로 말하자면 이미 다 된 것이다.<ref>대학의 '능득'이란 문구는 수기와 치인 가운데 수기의 측면에 해당한다는 말이다.</ref> 단,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도 남김 없이 다 하고 만물의 이치 또한 남김 없이 다 하는 것이다.<ref>명덕을 밝히는 일을 수기에 국한시켜 보지 말고, 수기와 치인을 포함하는 상위의 범주로 보라는 말이다.</ref> 예컨대 '오직 지극한 진정성(誠)이라야 (자신의) 본성(性)을 온전히 다할 수 있고'<ref>중용 제 22장의 한 구문을 축약한 것이다.</ref>, 오직 (자신의) 본성(性)을 다할 때라야 만물의 이치도 남김 없이 다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性)을 다하면 곧 남의 본성(性)을 다하게 되고, 남의 본성(性)을 다하면 곧 사물의 본성(性)을 다하게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7:38 蜚卿言: “或問云: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伯羽謂' 세 자가 더 있다. '비경(蜚卿)'이 동백우(童伯羽)의 자(字)이므로 한 사람이 연이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ref> 明德之功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內, 或未盡化, 況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德乎?”
'''비경(蜚卿)이 말함: 《대학혹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의지를 참되게 하고[誠其意],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正其心], 각자 자신의 몸을 갈고닦고[修其身], 각자 자신의 어버이를 친애하며[親其親], 각자 자신의 어른을 공경하여[長其長], 천하가 평정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명덕(明德)의 공효(功)가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규문(閨門) 안에서 혹 다 교화시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거늘, 하물며 커다란 천하 전체가 요순(堯舜)의 교화에 순복하여 각자 자신의 덕(德)을 밝힐 수 있으리라 말하시는 것입니까?
曰: “大學‘明明德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是有如此規模, 卻是自家本來合如此, 不如此便是欠了他底.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己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槪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說‘比屋可封’, 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不如此不得. 到得做不去處, 卻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卻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內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爲聖賢之學.” 道夫(60이후).
'''대답: 《대학》의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는 것은 일단은 그 규모(規模)<ref>대강의 윤곽선, 원대한 스케일 같은 의미이다.</ref>가 이러하다고 설명한 것뿐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은 본래부터 응당 이와 같아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곧 (본래의) 자기 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윤(伊尹)은 평범한 백성 한 사람이라도 (요순과 같은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어서 도랑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했다.<ref>맹자 5A:7.</ref> (그러나) 이윤(伊尹)도 역시 그저 대체로 이렇게 하고자 했다는 것 뿐이니, 또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예컨대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만하다[比屋可封]’<ref>한서 왕망전(王莽傳). '명성한 세상에는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많으므로, 요순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明聖之世,國多賢人,故唐虞之時,可比屋而封.)'</ref>는 것 역시 한두 집 정도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의 규모(規模)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며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 뿐이다. (세웠던 스케일에 걸맞게) 해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f>'做不去'는 '할 수 없다', '做得去'는 '할 수 있다'이다.</ref> 규모(規模)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반면<ref>'著'은 '須著'과 같다. '반드시'.</ref> 공부(工夫)는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가야 한다. 규모(規模)와 단계별 순서[次第]도 없이 그저 지엽적인 것들[細碎處]에만 힘을 쓰면 곧바로 (오늘날) 세간의 공리(功利)를 따지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규모(規模)는 있지만 세밀한 공부(工夫)가 없다면 또 한갓 빈 규모(空規模)이고 말 뿐이다. 밖으로는 규모(規模)의 크기를 지극히하고 안으로는 미루어 (구체적인) 사사물물(事事物物)의 부분에 이르게 하여 그 어느 방면으로도 공부(工夫)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聖賢)의 배움이 성현의 배움이 되는 까닭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39 問或問“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
'''《대학혹문》의 '마음의 신명[心之神明]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ref>대학혹문. '저 지(知) 같은 경우는 마음의 신명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若夫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신명의 신(神)은 우리 의식의 완성도가 높음을, 명(明)은 의식의 활동성을 가리킨다. 재(宰)는 컨트롤한다는 의미이다. 묘(妙)를 운용하다로 풀이한 것은 17:40을 참조하라.</ref>에 대한 질문.
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대답: 신(神)은 그렇게 정밀하고 아름답다[精彩]는 것이요, 명(明)은 그렇게 밝게 빛난다는[光明] 것이다.
又曰: “心無事時, 都不見; 到得應事接物, 便在這裏; 應事了, 又不見: 恁地神出鬼沒!”
'''다시 말함: 마음은 일이 없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도 응사접물(應事接物)하게 되면 곧 이 안에[在這裏]<ref>마치 주인의 부주의로 인해 풀려나 달아나버린 가축처럼,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이 안에 없는' 상태가 바로 '방심(放心)'의 상태이다.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면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여 집중시킬 수 있는데 이렇게 집중된 상태를 어류에서는 자주 '여기 있다(在這裏)'고 표현한다.</ref> 있으며, 일에 대한 응대를 마치고 나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니, 이렇게나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
又曰: “理是定在這裏, 心便是運用這理底, 須是知得到. 知若不到, 欲爲善也未肯便與你爲善; 欲不爲惡, 也未肯便不與你爲惡. 知得到了, 直是如飢渴之於飮食. 而今不讀書時, 也須收斂身心敎在這裏, 乃程夫子所謂敬也. ‘整齊嚴肅’, 雖只是恁地, 須是下工夫, 方見得.”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이치(理)는 이 안에<ref>자신의 내면을 말한다.</ref> 확고하게 있고, 마음[心]은 바로 이 이치(理)를 운용(運用)하는 주체이니, 반드시 앎[知]이 지극해져야 한다. 만약 앎[知]이 지극해지지 못하면 선(善)을 행하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선(善)을 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악(惡)을 행하지 않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악(惡)을 행하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앎[知]이 지극해지고나면 바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마시고 먹으려는 것[飢渴之於飮食]과 같이 (선을 행하고 불선을 피하게) 된다. 지금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여[收斂身心] 여기에 있도록[在這裏]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부자(程夫子)<ref>정씨 형제를 말한다.</ref>께서 말씀하신 경(敬)이다.<ref>경에 대한 설명은 17:1부터 18까지에 걸쳐 자세히 적혀있으니 참조하라.</ref> ‘정제엄숙(整齊嚴肅)’이 비록 이런 것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실제로 힘써 해보아야만[工夫]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0 德元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或問"知妙衆理而宰萬物者也",)'라고 적혀있다.</ref>: “何謂‘妙衆理’?”
'''덕원(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의)‘묘중리(妙衆理)’는 무슨 말입니까?<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大凡道理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或錄此下云: “便只是理. 才知得,”><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便只是知得我底道理, 非是以我之知去知彼道理也. 道理固本有, 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或錄云: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夏熱冬寒,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所以謂之‘妙衆理’, 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或錄云: “蓋知得此理也.”>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대답: 무릇 도리(道理)는 모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앎[知]이란 것은 <혹자의 기록에서는 이 다음에 이렇게 말함: “그저 이치(理)일 뿐이다. 알게 되면”> 곧 나에게 있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지, 나의 앎[知]을 가지고 저쪽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ref>주희는 '지(知)'를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하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첫 번째 '앎'과 두 번째 '알게 되는'과 네 번째 '알게 되는'은 어떤 것을 알게 되는 행위(to know)를 뜻하고 세 번째 '나의 앎'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을 뜻한다.</ref> 도리는 물론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앎[知]을 사용해야만 비로소 틔워낼 수 있다.<ref>여기서의 앎은 의식(consciousness)이나 인지(cognition)에 가깝다.</ref> 만약 앎[知]이 없었다면 도리가 무슨 수로 드러나겠는가? <혹자의 기록: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가지고 있던 도리이다. 앎[知]이 없으면 도(道)를 놓아둘 곳이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그런 다음에야 도리가 정박할 곳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임금은 인(仁)하고 신하는 공경(敬)하는 것을, 앎[知]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한다[妙衆理]’고 했으니, 여러 이치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운용(運用)’이라는 글자는 병폐가 있으므로 그저 ‘묘(妙)’ 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혹자의 기록: “대개 이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又問: “知與思, 於身最切緊.”
'''재질문: 앎[知]과 생각[思]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긴요합니다.
曰: “然. 二者只是一事. 知如手, 思是使那手去做事, 思所以用夫知也.” 僩(69이후).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뒤에 총 196자의 긴 주석이 달려있는데, 본 조목과 비교하면 첫 질문은 약간 다르고 주희의 대답 부분은 동일하며, 재질문과 재대답이 없는 형태이다. 첫 질문만 번역하고 주희의 대답부분 번역은 생략한다. '혹자의 기록. 곽형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묘중리'는 무슨 말입니까? 혹시 여러 이치의 오묘한 신비를 탐색하여 주재자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或錄云:郭兄問: "或問'妙衆理而宰萬物者也', 何以謂之妙衆理? 豈非以知能探賾衆理之妙, 而爲之主宰乎?", 曰: "大凡道理, 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便只是理. 才知得, 便是自知得我之道理, 非是我以知去知那道理也. 道理固本有, 須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冬寒夏熱,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所以謂之妙萬理, 如云能運用萬理. 只是運用字又有病, 故只下得个妙字, 蓋知得此理也.")</ref>
'''대답: 그렇다. 그 둘은 하나일 뿐이다. 앎[知]은 손과 같고, 생각[思]은 저 손을 부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니, 생각[思]이란 저 앎[知]을 사용하는 것이다.<ref>여기서의 '앎'은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 혹은 의식(consciousness)에 가깝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1 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다음에 '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이 있다. 해당 부분은 대학혹문의 직접인용이다. 17:39를 보라.</ref>“知如何宰物?”
'''질문: 앎[知]이 어떻게 만물을 주재(宰)합니까?<ref>17:39와 40을 참조하라.</ref>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是知覺.” 道夫(60이후).
'''대답: 지각(知覺)<ref>지각(知覺)은 사태의 패턴을 알아차리고 시비를 구분하는 등 인지적 활동 전반을 말한다. 주희는 심지어 이나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까지도 지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ref>이 없으면 만물을 재제(宰制)<ref>힘을 행사하여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표현으로 '컨트롤하다' 정도의 뜻이다.</ref>할 수 없다. 만물을 재제(宰制)하려면 역시 지각(知覺)해야 한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2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주석으로 '知者妙衆理而宰萬物'가 더 적혀있다.</ref>: “‘宰萬物’, 是‘主宰’之‘宰’, ‘宰制’之‘宰’?”<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부분 전체가 주석처리되어있고, 이어서 역시 주석으로 '答'자가 적혀있다.</ref>
'''누군가의 질문: ‘재만물(宰萬物)’은 ‘주재(主宰)’의 ‘재(宰)’입니까, ‘재제(宰制)’의 ‘재(宰)’입니까?”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대답: 주(主)가 바로 재(宰)이고, 재(宰)가 바로 제(制)이다.<ref>주(主)는 무언가를 소유한 주인, 재(宰)는 일을 통괄하는 매니져, 제(制)는 컨트롤의 뜻이다. 결국 세 글자 모두 같은 실상을 지시하는 말이다.</ref>
又問: “孟子集注言: ‘心者, 具衆理而應萬事.’ 此言‘妙衆理而宰萬物’, 如何?”
'''재질문: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는 ‘마음이란 여러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ref>대학혹문을 말한다.</ref>서는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妙’字便稍精彩, 但只是不甚穩當, ‘具’字便平穩.” 履孫(65때).
'''대답: ‘묘(妙)’ 자는 조금 정채(精彩)롭긴 하지만 그다지 온당(穩當)하진 못하고, ‘구(具)’ 자는 평온(平穩)하다.<ref>'묘'는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해낸다는 인상이 있다. 그와 비교하면 '구'는 훨씬 수수하고 무엇보다도 정적이다.</ref>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43 郭兄問“莫不有以知夫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68자가 더 있다. '當然之則, 如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 臣何故用敬, 父何故用慈, 子何故用孝. 畢竟未曉, 敢以君何故用仁問先生, 伏望敎誨, 俾知所以然之故' 번역은 번역문의 주석쪽을 참조하라.</ref>”
'''곽형(郭兄)이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과 그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其所當然之則]을 알지 못함이 없다”<ref>이치(理)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는 어떤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한다. 예컨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은 우리가 이런저런 상황에 처하였을 때 준수해야 마땅한 법칙을 말한다. 예컨대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법칙이다. 현행본 대학혹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천하의 사물에는 반드시 각자 그렇게 되는 까닭과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이다.(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또, 혹문의 전 5장 부분에서도 '다른 수 없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점과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고 적고 있다.</ref>에 대해 질문함.<ref>조선고사본에 적힌 68자를 이어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란 임금의 인(仁),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비의 자(慈)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이란 임금은 어째서 인(仁)해야 하는지, 신하는 어째서 경(敬)해야 하는지,아비는 어째서 자(慈)해야 하는지, 아들은 어째서 효(孝)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끝내 깨치지 못하겠으니, 감히 '임금은 어째서 인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선생님께 묻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게 해주십시오.</ref>
曰: “所以然之故, 卽是更上面一層. 如君之所以仁, 蓋君是箇主腦, 人民土地皆屬它管, 它自是用仁愛. 試不仁愛看, 便行不得.<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자연히 이렇게 하게 된다(自然用如此).'</ref> 非是說<ref>조선고사본에서는 '是說'이 '說是'로 적혀있다.</ref>爲君了, 不得已用<ref>조선고사본에서는 '以'</ref>仁愛<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行之'</ref>, 自是理合如此. 試以一家論之: 爲家長者便用愛一家之人, 惜一家之物, 自是理合如此, 若天使之然. 每常思量著, 極好笑, 自那原頭來便如此了.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蓋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 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它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爲哉! 且以仁言之: 只天地生這物時便有箇仁, 它只知生而已. 從他原頭下來, 自然有箇春夏秋冬,<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四象'.</ref> 金木水火土.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此四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이 없다.</ref>故賦於人物, 便有仁義禮智之性.<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自它原頭處便如此了'</ref> 仁<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則'</ref>屬春, 屬木. 且看春間天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天地'가 없다.</ref>發生, 藹然和氣, 如草木萌芽, 初間僅一針許, 少間漸漸生長<ref>조선고사본에서는 '長'을 '發'로 적었다.</ref>, 以至枝葉花實, 變化萬狀, 便可見他生生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生之'가 없다.</ref>意. 非仁愛, 何以如此. 緣他本原處有箇仁愛溫和之理如此, 所以發之於用, 自然慈祥惻隱. 孟子說‘惻隱之端’, 惻隱又與慈仁不同, 惻隱是傷痛之切. 蓋仁, 本只有慈愛, 緣見孺子入井, 所以傷痛之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也'</ref>. 義屬金, 是天地自然有箇淸峻剛烈之氣. 所以人稟得, 自然有裁制, 便自然有羞惡之心. 禮智皆然. 蓋自本原而已然, 非旋安排敎如此也. 昔龜山問一學者: ‘當見孺子入井時, 其心怵惕·惻隱, 何故如此?’ 學者曰: ‘自然如此.’ 龜山曰: ‘豈可只說自然如此了便休? 須是知其所自來, 則仁不遠矣.’ 龜山此語極好. 又<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引'</ref>或人問龜山曰: ‘“以先知覺後知”, 知·覺如何分?’ 龜山曰: ‘知是知此事, 覺是覺此理.’ 且如知得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是知此事也; 又知得君之所以仁, 臣之所以敬, 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是覺此理也.” 僩(69이후).
'''대답: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란 다시 한 단계 더 위의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은 임금은 두뇌[主腦]여서 인민과 토지가 모두 그의 관할이니 그는 자연히 인애(仁愛)하게 된다. 어디 한번 (임금이) 인애(仁愛)하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즉시 말이 안 된다[行不得].<ref>'행부득(行不得)'은 근본적인 모순이 있어 성립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임금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인데 사람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ref> 임금이 되고 나서 부득이하게 인애(仁愛)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치상 당연히 이렇다는 말이다. 어디 한번 한 집안으로 논해보자. 가장(家長)이 된 자는 곧 온 집안 사람을 사랑하고 온 집안 물건을 아끼게 되니, 이치상 당연히 그렇게 되어 마치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우스우니, 저 근원[原頭]에서부터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또, 아버지가 자애롭게 되는 까닭과 아들이 효도하게 되는 까닭의 경우는, 대개 부자(父子)란 본래 같은 하나의 기(氣)인데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 뿐이므로,<ref>기는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자식의 신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기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양측은 동질의 물질을 두 장소에 나누어둔 것 뿐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물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은 것과 같다.</ref>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지는[恩愛相屬]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중대한 인간관계의 범주[大倫]<ref>예컨대 오륜(五倫) 같은 것이다.</ref>들이 모두 그러하니, 모두 천리(天理)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어찌 억지로 노력하는 요소가 끼어들 틈이 있겠나? 또, 인(仁)으로 말해보자면, 천지(天地)가 이 사물들을 낳으면서 인(仁)이 있게 되니, 그것은<ref>천지를 말한다.</ref> 단지 낳을[生] 줄만 알 뿐이다. 그 근원[原頭]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연히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있게 된다. <먼저 음양(陰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있고 나서 이 네 가지가 있게 된다.><ref>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이 '네 가지'는 춘하추동이다. 다만 조선고사본쪽을 따르자면 이 네 가지는 사상(四象)이다. 사상은 음양이 한 차례 더 분화한 형태, 곧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말한다.</ref> 그러므로 (그것들이) 사람과 사물(人物)에게 부여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性)이 있게 된다. 인(仁)은 봄에 속하고 목(木)에 속한다.<ref>17:19, 6:45를 참조하라.</ref> 또, 봄철에 천지가 만물을 발생시키고 온화한 기운이 가득한 것[藹然和氣]을 보라. 예컨대 초목의 싹[萌芽]이 처음에는 겨우 바늘 하나 크기였다가 이윽고 점점 생장하여 가지, 잎, 꽃, 열매에 이르도록 변화만상(變化萬狀)하니, 이에 그것의<ref>천지.</ref> 낳고 낳는[生生] 의지를 볼 수 있다. (천지의) 인애(仁愛)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것의 본원(本原)에 인애온화(仁愛溫和)의 이치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어 작용할 적에 자연히 자애롭고 측은하다[慈祥惻隱]. 맹자(孟子)가 ‘측은(惻隱)의 단서[端]’<ref>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말한다.</ref>를 말하였는데, 측은(惻隱)은 또 자인(慈仁)과 다르니, 측은(惻隱)은 상심하고 애통함[傷痛]이 간절한 것이다. 대개 인(仁)은 본래 자애(慈愛)만 있을 뿐이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상심하고 애통함이 간절한 것이다. 의(義)는 금(金)에 속하니, 천지에는 자연히 맑고 준엄하며 굳세고 맹렬한 기운[淸峻剛烈之氣]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부여받으면 자연히 재제(裁制)<ref>선을 긋고 잘라내고 절제하고 통제하는 행위.</ref>함이 있게 되고, 자연히 수오지심(羞惡之心)<ref>불명예를 수치스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다.</ref>이 있게 된다. 예(禮)와 지(智)의 경우도 모두 그러하다. 대개 본원(本原)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지, 임의로[旋]<ref>'旋'은 멋대로, 임의로(隨意).</ref> (의도를 가지고) 안배하여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옛날 구산(龜山)<ref>이정의 제자 양시.</ref>이 어떤 배우는 이에게 묻기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이 깜짝 놀라고 측은한데[怵惕惻隱], 어째서 이러한가?’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자연히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구산(龜山)이 말하기를 ‘어찌 그냥 자연히 그렇다고만 말하고 말 수 있는가? 반드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所自來]를 알아야 하니, (그렇게 하면) 인(仁)에서 멀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ref>구산집(龜山集) 권 11, 어록 2. '(선생이) 말함: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에게 반드시 측은지심이 드는데, 자기의 고통이 아닌데도 빠진자를 위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조의 대답: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이) 말함: 어찌 자연스럽게 그러하겠나? 이 이치를 몸소 탐구하여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 인의 도리가 멀지 않게 될 것이다." (曰: "孺子將入於井, 而人見之者, 必有惻隠之心, 疾痛非在己也, 而爲之疾痛, 何也?" 似祖曰: "出於自然, 不可已也." 曰: "安得自然如此? 若體究此理, 知其所從來, 則仁之道不遠矣.")' 주희의 인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ref> 구산의 이 말이 대단히 좋다. 또 어떤 사람이 구산에게 묻기를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친다”에서 앎(知)과 깨우침(覺)은 무슨 차이입니까?’라고 하니, 구산이 말하기를 ‘지(知)는 이 일[事]을 안다는 것이고, 각(覺)은 이 이치[理]를 깨닫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ref>양시가 아니라 이정의 말이다. 이정수언(二程粹言) 권 1에 보인다. 해당 텍스트는 양시가 이정의 어록을 문어체로 바꾼 작품이다. 이때문에 양시의 말인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누군가의 질문: "석씨는 '말 한마디에 깨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선생: "왜 꼭 부처인가? 맹자도 그렇게 말했다.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치고, 먼저 깨친 자가 뒤에 깨친 자를 깨우친다. 앎은 이 일을 안다는 것이고 깨달음은 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或問:釋氏有言下覺,如何? 子曰:何必浮屠氏? 孟子言之矣. 以先知覺後知,以先覺覺後覺. 知者,知此事也. 覺者,覺此理也.)'</ref> 예컨대 임금의 인(仁)과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버지의 자(慈)를 아는 것은 이 일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 신하가 경(敬)하게 되는 까닭, 아버지가 자(慈)하게 되는 까닭, 아들이 효(孝)하게 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4 或問“格物”章本有“所以然之故”.
'''대학혹문의 ‘격물(格物)’ 장(章)에 원래는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라는 표현이 있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기로, 천도가 작동하여 (만물을) 만들어내고 길러냄에, 소리와 색과 모양을 가지고서 천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물(物)이다. 물이 있고 나면, 이 물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까닭에는 각각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어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받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曰: "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ref>
曰: “後來看得, 且要見得‘所當然’是要切處. 若果見得不容已處, 則自可黙會矣.”
'''(이에 대한 선생의) 대답: 나중에 보니, 우선은 ‘그렇게 해야 마땅한 바[所當然]’를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고 절실[要切]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정말로 그만둘 수 없다는[不容已] 측면<ref>'소당연'을 말한다.</ref>을 보게 된다면 저절로 묵묵히 이해할[默會]<ref>묵묵히 이해함은 소리로 발성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개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의 차원에서 절감하여 세상과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함을 말한다.</ref> 수 있게 될 것이다.
===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 단락 ===
* 治國平天下者諸侯之事一段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ref>치국은 제후의 일이고 평천하는 천자의 일이다. 대학혹문 원문에서는 '천자와 제후의 일(天子諸侯之事)'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천자 부분이 생략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ref> 단락
* 17:45 問: “南軒謂: ‘爲己者, 無所爲而然也.’”
'''질문: 남헌(南軒)<ref>장식(張栻)</ref>이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ref>논어 14:25.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목표로 배움에 종사한다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전자가 위기지학, 후자가 위인지학이다.</ref>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也].’<ref> 남헌집 권14. 맹자강의서(孟子講義序). '배우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에 깊이 마음을 두어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려 한다면, 내 생각에 의(義)와 이(利)의 분별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 위하는 바 없이 그러함이 (바로 중용에서 말한) 천명(命)이 그치지 않는 이유이고, 본성(性)이 치우치지 않는 이유이며, 가르침(敎)이 무궁한 이유이다. 무릇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리 되는 것들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요 천리(天理)가 간직된 바가 아니니, 이것이 바로 의와 이의 구분이다.(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爲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爲而然也. 無所爲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敎之所以無窮也. 凡有所爲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 해당 부분은 주희가 대학혹문에서 직접인용하고 있다.</ref>라고 했습니다.
曰: “只是見得天下事皆我所合當爲而爲之, 非有所因而爲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之'를 '也'로 적었다.</ref>. 然所謂天下之事皆我之所當爲者, 只恁地强信不得. 須是學到那田地, 經歷磨鍊多後, 方信得過.” 道夫(60이후).
'''대답: 단지 천하의 일이 모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보았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ref>통상적인 논어 해석에서 벗어나서 '자기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을 위인지학으로,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을 위기지학이라고 본 것이다. 대학혹문 경 1장의 14절에서는 치국과 평천하는 모두 천자나 제후쯤 되는 사람들의 일인데 평범한 사대부가 대학을 읽으며 치국 평천하를 꿈꾸는 것은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위인지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군자란 자신이 모시는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어 백성들에게 요순의 은택을 입히려고 하므로 치국 평천하가 모두 군자의 '직분'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이가 대학의 치국 평천하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직분 내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므로 '위기지학'이 된다. 관련하여 어류 15:156을 보라.</ref> 그러나 이른바 천하의 일이 모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은, 그저 그렇게 억지로 믿는[强信] 것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배워서 저 경지[田地]에 도달하여 많은 경험과 단련[經歷磨鍊]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확실히 믿어지게 된다[信得過].<ref>'得過'의 '득'은 가능성을, '과'는 방향을 나타내는 보어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6 問爲己.
'''위기(爲己)에 대해 묻다.<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這須要自看, 逐日之間, 小事大事, 只是道我合當做, 便如此做, 這便是無所爲. 且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才說要人知, 便是有所爲. 如世上人才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爲人之甚者.” 賀孫(62이후).
'''대답: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보아야 하니, 매일매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저 '나는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다. 예컨대 글을 읽을 때, 그저 '나는 이렇게 (이걸)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자신을 신경써야[理會] 한다'<ref>'리회(理會)'는 종종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살피고 헤아리는 행위를 말한다. 8:91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이 된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이 글을 읽자마자 (자기가) 읽은 것을 활용하여[安排] 완전히[好]<ref>'好'는 이어지는 동작의 완성도가 높음을 나타낸다.</ref> 시문(時文)<ref>과거시험답안.</ref>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남을 위함[爲人]이 심한 경우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7 “‘爲己者, 無所爲而然.’ 無所爲, 只是見得自家合當做, 不是要人道好. 如甲兵·錢穀·籩豆·有司, 到當自家理會便理會, 不是爲別人了理會. 如割股·廬墓, 一則是不忍其親之病, 一則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爲己.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爲人.”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ref>장식의 말. 17:45를 보라.</ref> 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을) 마땅히 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이지, 남들이 '좋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갑병(甲兵)<ref>군무를 말한다.</ref>·전곡(錢穀)<ref>재무를 말한다.</ref>·변두(籩豆)<ref>제사와 의전을 말한다.</ref>·유사(有司)<ref>그밖의 모든 실무를 말한다.</ref>와 같이, 자기 자신이 마땅히 처리[理會]<ref>'리회(理會)'의 번역에 관해서는 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해야 할 때가 되면 곧 처리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할고(割股)<ref>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내 병든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효행의 케이스로 종종 거론된다.</ref>나 여묘(廬墓)<ref>부모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사는 행위. 역시 효행의 일종으로 거론된다.</ref> 같은 것은, 하나는 그 어버이의 병듬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행위이다. 만약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곧 남을 위하는[爲人] 행위이다.<ref> 이 부분은 대학혹문의 특정 구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대저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천하의 사무를 보기를 (모두) 마땅히 해야 하는 자신의 사무로 여기고 수행한다면 갑병, 전곡, 변두, 유사의 업무조차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겠구나 하여 수행한다면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내고 여묘살이하고 망가진 수레와 파리한 말을 타는 것도 모두 남을 위하는[爲人] 것일 뿐이다.(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馬, 亦爲人耳.)'</ref>
器遠問: “子房以家世相韓故, 從少年結士, 欲爲韓報仇, 這是有所爲否?”
'''기원(器遠)<ref>주희의 제자 조숙원(曹叔遠)</ref>의 질문: 자방(子房)<ref>한(漢)의 개국공신 장량(張良, BC 250-BC 186).</ref>이 집안 대대로 한(韓)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선비를 모아 한(韓)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 아닙니까?
曰: “他當初只一心欲爲國報仇. 只見這是箇臣子合當做底事, 不是爲別人, 不是要人知.” 賀孫(62이후).
'''대답: 그는 애당초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저 이것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보았을 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8 行夫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남헌이 말하기를(南軒云)'이 더 있다.</ref>“爲己者無所爲而然”.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다. 이는 모든 일이 다 자신이 응당 해야 할 바라고 보아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도 칭찬을 바라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목적)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也. 這是見得凡事皆吾所當爲, 非求人知, 不求人譽, 無倚無靠之謂否?)'가 더 있다.</ref>
'''행부(行夫)<ref>'행보'라고 읽어야 할지 '행부'라고 읽어야 할지 확실치 않다.</ref>가 “자신을 위하는 자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爲己者無所爲而然]”에 대해 질문함.<ref>이 부분에 대해서는 17:45와 46, 47을 참조하라.</ref>
曰: “有所爲者, 是爲人也. 這須是見得天下之事實是己所當爲, 非吾性分之外所能有, 然後爲之, 而無爲人之弊耳. 且如‘哭死而哀, 非爲生者’. 今人弔人之喪, 若以爲亡者平日與吾善厚, 眞箇可悼, 哭之發於中心, 此固出於自然者. 又有一般人欲亡者家人知我如此而哭者, 便不是, 這便是爲人. 又如人做一件善事, 是自家自肯去做, 非待人敎自家做, 方勉强做, 此便不是爲人也.”
'''대답: 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有所爲者] 남을 위한다는 것[爲人]이다. 이에 관해서는 반드시 천하의 일이 기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자기 본연의 직분[性分]의 범위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그렇게 알게 된) 뒤에 그것을 실천해야 남을 위하는 폐단[爲人之弊]이 없게 될 뿐이다.<ref>대학혹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활연대공하여, 천하를 봄에 그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고,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다. 혹여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여전히 자기 직분의 범위 안에 있다고 여긴다.(是以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去聲內也)'</ref> 예컨대 ‘죽은 이를 위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의 경우,<ref>맹자 7B:33.</ref> 요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喪)에 조문할 때, 만약 망자가 평소 나와 잘 지냈으므로 참으로 애석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통곡한다면 이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망자의 가족이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곡하니, 이는 옳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남을 위하는 것[爲人]이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좋은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기꺼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자기더러 하라고 시키면 그제서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남을 위하는 경우[爲人]가 아니다.
道夫曰: “先生所說錢穀·甲兵·割股·廬墓, 已甚分明, 在人所見如何爾.”
'''내가(道夫) 말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곡(錢穀)·갑병(甲兵)·할고(割股)·여묘(廬墓)<ref>17:47을 참조하라.</ref>는 매우[已甚] 분명하니, (이러한 행위들이 위기가 되느냐 위인이 되느냐는) 사람들 각자의 소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ref>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라는 뜻이다.</ref>
又問: “割股一事如何?”
'''(내가) 다시 질문함: 할고(割股)는 어떻습니까?
曰: “割股固自不是. 若是誠心爲之, 不求人知, 亦庶幾.”
'''대답: 할고(割股)는 물론 옳지 않지만, 만약 성심(誠心)으로 한 일이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면 역시 (옳은 쪽으로) 거의 가깝다[庶幾].
“今有以此要譽者.”
'''(나의 말): 요즘 이로써 명예를 구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因擧一事爲問. 先生詢究, 駭愕者久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재질문: "요즘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의 (할고 등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자인합니다<그럴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살펴보면) 역시 매우 난처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윽고, ...(再問: 如今都不問如何, 都<不只>自認自家不是, 然其曲折亦甚難處. 久之,)'가 더 있다.</ref> 乃始正色直辭曰: “只是自家過計了. 設使後來如何, 自家也未到得如此. 天下事惟其直而已. 試問鄕鄰, 自家平日是甚麽樣人! 官司推究亦自可見.”
'''이어서 한 가지 일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사정을) 자세히 물으시고 한동안 경악하셨다. 이내 안색을 바로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사람) 자신의 계산이 지나쳤던[過計] 것일 뿐이다. 설사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역시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일(에 대처하는 자세로는) 오직 정직함[直] 뿐이다. (그 사람은) 어디 한번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자기 자신이 평소 어떤 사람인지! 관청(官司)에서 조사해도 역시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行夫曰: “亦著下獄使錢, 得箇費力去.”
행부(行夫)의 말: 그래도 (체포될 경우) 옥에 갇혀 돈을 써야 하니[著]<ref>'著'은 종종 '須著'의 준말로 쓰인다. '~해야 한다'의 의미이다. 17:38의 용례를 참조하라.</ref>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曰: “世上那解免得全不霑濕! 如先所說, 是不安於義理之慮. 若安於義理之慮, 但見義理之當爲, 便恁滴水滴凍做去, 都無後來許多事.” 道夫(60이후).
'''대답: 세상에 어떻게[那] 조금도 젖지 않고[霑濕]<ref>'점유(沾濡)'라고도 쓴다.</ref> 면할 수[解]<ref>'解'는 영어에서의 can과 같다.</ref> 있겠는가! 앞서 말한 경우 같으면, (그 사람은)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했더라면 그저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서 곧 그렇게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어는 것처럼[滴水滴凍]<ref>'적수성동(滴水成凍)'의 형태로도 사용한다. 확고부동함, 과감함, 엄정함을 의미하며, 확실하게 하나하나 사안을 격파해가는 기상을 형용하기도 한다. 주자어류사휘연구 p.255 참조.</ref> 해나가서 뒷날의 여러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f>본 조목의 후반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일역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송회요집고등을 보면 당시 의도적인 할고를 통해 효자로 인정받아 세금과 요역을 면제받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각급 관청에서는 할고행위가 보고되면 그것이 진정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부당이득을 목적으로 자행한 것인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고, 조사 결과 불순한 할고라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건의 당사자는 병든 부모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할고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관청의 조사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할고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쩌면 할고를 통해 병이 나을 수도 있었을) 부모가 사망한 것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전 1장 ==
* 傳一章
전 1장
===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 然則其曰克明德一段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17:49 問: “‘克明德’, ‘克, 能也’. 或問中卻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질문: ‘극명덕(克明德)’<ref>대학 전 1장.</ref>에 대하여 ‘극(克)은 능(能)이다.’<ref>해당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ref>고 하였는데, 《대학혹문》 에서는 도리어 ‘이겨내려는[克] 노력을 다할 수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能'자가 없고 '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라고 쓰고 있다.</ref>고 풀이하여 다시‘이겨내어 다스리다[克治]’의 ‘극(克)’처럼 보이는데, 어째서입니까?<ref>극(克)은 능(能)이나 승(勝)으로 훈한다. 대학장구에서는 능으로 훈했는데 혹문에서는 승으로 훈했으니 이상하다는 질문이다.</ref>
曰: “此‘克’字雖訓‘能’字, 然‘克’字重於<ref>여유량본 이전의 판본들은 모두 '於'를 '如'로 적고 있다.</ref>‘能’字. ‘能’字無力, ‘克’字有力. 便見得是他人不能, 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德’, 語意便都弱了. 凡字有訓義一般, 而聲響頓異, 便見得有力無力之分, 如‘克’之與‘能’是也. 如云‘克宅厥心’, ‘克明俊德’之類, 可見.” 僩(69이후).
'''대답: 이 ‘극(克)’ 자는 비록 ‘능(能)’ 자로 훈(訓)하지만, 그래도 ‘극(克)’ 자가 ‘능(能)’ 자보다 무겁다. ‘능(能)’ 자는 힘이 없고 ‘극(克)’ 자는 힘이 있다. 곧 다른 사람은 능하지 못한데 문왕(文王)만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단지 ‘능명덕(能明德)’이라고만 썼으면 말의 뜻이 모두 약해졌을 것이다. 무릇 글자 중에는 훈(訓)과 뜻[義]은 같지만 음향[聲響]이 완전히[頓] 달라서 힘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극(克)’과 ‘능(能)’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능히 삼택의 마음을 안다[克宅厥心]’<ref>상서 주서 입정(立政)편 제 12장. 본래 '惟克厥宅心'이어야 하는데 본 조목에서는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고 있다. '택(宅)'은 지위이다. 입정편에서 세 가지 큰 지위에 거한 자를 '삼택' 혹은 '삼유택(三有宅)'이라고 부른다. '惟克厥宅心'은 문왕(文王)이 이 삼택의 마음을 능히 잘 알았다는 뜻이다.</ref>, ‘능히 큰 덕을 밝힌다[克明俊德]’<ref>상서 우서 요전 제 2장. 대학 전 1장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등과 같은 것들에서 (이 차이를) 볼 수 있다.<ref>주희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 顧諟天之明命一段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17:50 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대학혹문에서 밝은 명령에 대해 설명한 곳에서 말하기를(或問說明命處云)'이 더 있다.</ref>: “‘全體大用, 無時不發見於日用之間’. 如何是體? 如何是用?” <ref>조선고사본에서는 '如何是體? 如何是用?'이 없고 '일상 속의 어디가 전체대용의 지점입니까?(日用間如何是全體大用處)'라고 적혀 있다.</ref>
'''질문:‘온전한 본체[全體]와 위대한 작용[大用]이 일상[日用] 속에서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다'<ref>대학혹문.</ref>에서, 체(體)는 무엇이고 용(用)은 무엇입니까?<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 대학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전체대용(全體大用)'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명덕(明德)과 그것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양상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ref>
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 <ref>조선고사본에서는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이 없고, 그 대신 '可見.'과 '如喜怒哀樂'의 사이에 '體與用不相離, 如這是體, 起來運行便是用.'이 있다.</ref>‘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ref>조선고사본에서는 '擧此一節'</ref>, 體·用便<ref>조선고사본에서는 '便'을 '亦'으로 적었다.</ref>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하의 주석에서처럼 '희노는 용이요, 희노할 수 있게끔 해주는 원천이 체이다.(如喜怒是用, 所以能喜怒者, 便是體)'라고 적고 있다.</ref>”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61이후).<ref>조선고사본에서는 '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을 간단히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 㝢同.)'라고 적고 있다.</ref>
'''대답: 체(體)와 용(用)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몸[身]은 체(體)이고 일어나 가려는 것은 용(用)이다. ‘어린아이가 기어서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모두 경악하고 측은한 마음[怵惕惻隱之心]이 있다’는 단지 이 한 가지 단서에서 체(體)와 용(用)을 볼 수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용(用)이고, 희노애락의 원천[所以喜怒哀樂]은 체(體)이다. <진순의 기록: 희노할 수 있게끔 해주는 원천이 체이다.><ref>'소이(所以)'는 가능근거이다. 우리의 몸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걷고 달리는 것이 가능하고 핸드폰이 있어야 앱이 돌아가는 것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솟구침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능근거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ref><ref>본 조목은 서우와 진순이 각각 기록한 것인데 조선고사본에서는 진순의 것을 수록했고 여정덕본에서는 서우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되 진순의 것을 주석으로 삽입한 것처럼 보인다.</ref>
* 17:51 問: “或問: ‘常目在之, 眞若見其“參於前, 倚於衡”也, 則“成性存存”, 而道義出矣.’ 不知所見者果何物耶?” 曰: “此豈有物可見! 但是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 每與是德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在. 一出言, 則言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一行事, 則事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不過如此耳, 初豈實有一物可以見其形象耶!” 壯祖(미상).
• 17:51 묻다: “《혹문(或問)》에서 ‘항상 눈여겨보아[常目在之] 참으로 “수레 앞에 읍하고 수레 위 가로대에 기대어 있는 것[參於前, 倚於衡]”을 보는 듯이 하면, “성(性)을 이루어 보존하고 또 보존하여[成性存存]” 도의(道義)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는데, 보이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입니까?”
o 답하다: “이것이 어찌 볼 수 있는 물건이 있겠는가! 다만 무릇 사람들은 성찰(省察)할 줄 몰라서 평상시 일상생활[常行日用]에서 매번 이 덕(德)과 서로 잊고 지내며 또한 스스로 이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지금 이른바 돌아보고 바로잡는다는 것[顧諟]은 단지 마음속에 항상 이 이(理)가 존재함을 보존하는 것이다. 한 번 말을 하면 말에는 반드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있어 잃어서는 안 되고, 한 번 일을 행하면 일에는 반드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이 있어 잃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처음에 어찌 실로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는 한 물건이 있겠는가!”
o 장조(壯祖)의 기록. (미상)
* 17:52 問: “引‘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曰: “自天之所命, 謂之明命, 我這裏得之於己, 謂之明德,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會忠; 事親必會孝; 見孺子,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 便自然會恭敬; 合辭遜處, 便自然會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會合道理!” 賀孫(62이후).
• 17:52 묻다: “‘성(性)을 이루어 보존하고 또 보존하면[成性存存] 도의(道義)가 나온다’를 인용한 것은 어떻습니까?”
o 답하다: “하늘이 명(命)한 바를 일러 명명(明命)이라 하고, 내가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 얻은 것을 일러 명덕(明德)이라 하니, 단지 하나의 도리이다. 사람은 단지 이것들[這些]을 여기에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 보존하자마자 임금을 섬김에 반드시 충(忠)할 것이고, 어버이를 섬김에 반드시 효(孝)할 것이며, 어린아이를 보면 측달(怵惕)한 마음이 곧 발하고, 담을 뚫고 넘어가는[穿窬] 무리를 보면 수오(羞惡)의 마음이 곧 발하며, 공경(恭敬)해야 할 곳에서는 곧 자연히 공경할 것이고, 사양[辭遜]해야 할 곳에서는 곧 자연히 사양할 것이다. 모름지기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해야 곧 이 성(性)이 발현된 것이 모두 도리임을 볼 수 있다. 만약 이것들을 보존하지 못하고서 행동하기를 기다린다면, 어느 것이 도리에 맞겠는가!”
o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 是三者固皆自明之事一段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17:53 問: “‘顧諟’一句, 或問復以爲見‘天之未始不爲人, 而人之未始不爲天’, 何也?” 曰: “只是言人之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則, 所謂天理也. 人若每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只一理. 若理會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壯祖(미상).
* 17:54 問“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 曰: “天卽人, 人卽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旣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只今說話, 天便在這裏. 顧諟, 是常要看敎光明燦爛, 照在目前.” 僩(69이후).
*
== 전 2장 ==
* 傳二章
전 2장
===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 或問盤之有銘一段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17:55 德元問: “湯之盤銘, 見於何書?” 曰: “只見於大學.” 又曰: “成湯工夫全是在‘敬’字上. 看來, 大段是一箇修飭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亦說得大段地著. 如禹‘克勤于邦, 克儉于家’之類, 卻是大綱說. 到湯, 便說‘檢身若不及’.” 文蔚云: “‘以義制事, 以禮制心’, ‘不邇聲色, 不殖貨利’等語, 可見日新之功.” 曰: “固是. 某於或問中所以特地詳載者, 非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耳.” 文蔚(59이후).
* 17:56 問: “丹書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從’字意如何?” 曰: “從, 順也. 敬便豎起, 怠便放倒. 以理從事, 是義; 不以理從事, 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亦猶坤卦說敬·義.” 㝢(61이후).
*
== 전 3장 ==
* 傳三章
전 3장
===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 復引淇澳之詩一段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17:57 “‘瑟兮僩兮者, 恂慄也’. ‘僩’字, 舊訓寬大. 某看經子所載, 或從‘忄’·或從‘扌’之不同, 然皆云有武毅之貌, 所以某注中直以武毅言之.” 道夫云: “如此注, 則方與‘瑟’字及下文恂慄之說相合.” 曰: “且如‘恂’字, 鄭氏讀爲‘峻’. 某始者言, 此只是‘恂恂如也’之‘恂’, 何必如此. 及讀莊子, 見所謂‘木處則惴慄恂懼’, 然後知鄭氏之音爲當. 如此等處, 某於或問中不及載也. 要之, 如這般處, 須是讀得書多, 然後方見得.” 道夫(60이후).
* 17:58 問: “切磋琢磨, 是學者事, 而‘盛德至善’, 或問乃指聖人言之, 何也?” 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熙敬止’說. 然聖人也不是揷手掉臂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卻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爲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淳(61·70때). 寓同.
* 17:59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旣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 旣切而復磋之. 切得一箇樸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旣修而猶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 旣琢而復磨之. 琢, 是琢得一箇樸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之至善也. 取此而喩君子之於至善, 旣格物以求知所止矣, 又且用力以求得其所止焉. 正心·誠意, 便是道學·自修①. ‘瑟兮僩兮, 赫兮喧兮’, 到這裏, 睟面盎背, 發見於外, 便是道學·自修之驗也.” 道夫云: “所以或問中有始終條理之別也, 良爲此爾.” 曰: “然.” 道夫(60이후).
* 17:60 “‘如切如磋’, 道學也”, 卻以爲始條理之事; “‘如琢如磨’, 自修也”, 卻以爲終條理之事, 皆是要工夫精密. 道學是起頭處, 自修是成就處. 中間工夫, 旣講求又復講求, 旣克治又復克治, 此所謂已精而求其益精, 已密而求其益密也. 謨(50이후).
* 17:61 周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密否?” 曰: “始終條理都要密, 講貫而益講貫, 修飭而益修飭.” 淳(61·70때).
* 17:62 問: “琢磨後, 更有瑟僩赫喧, 何故爲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了氣象恁地. ‘穆穆文王’, 亦是氣象也.” 㝢(61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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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陸史 詩集 1946.pdf/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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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더크게|跋}}
{{들여쓰기/s|1}}家兄 陸史先生이 北京獄裡에서 寃死한지 이미 二碁가 지났다. 생각하면 貪窮과 投獄과 流込의 四十平生에 거의 하로도 寧目이 없었으나 文學靑年이 아니였던 그가 三十 고개를 넘어서 비로소 詩를 쓰기 시작해서 그처럼도 詩를 좋와했던것은 이마 그의 革命的情熱과 意慾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은체 詩에 憑藉해 꿈도 그려보고 不平도 暴白한것일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性格은 「絶頂」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楚剛하고 非妥協約이건마는 친구들에게는 寬仁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警察署에서는 要視察人이었것만은 文壇에서는 詩人행새를 한것을 보면 그가 所謂 單純한 詩人이 아니였던것을 아는 사람은 알것이다.{{들여쓰기/e}}
{{들여쓰기/s|1}}그래 不治의 病이 거이 治境에 이르렀을 때 끝끝내 靜攝하지않고 海外로 나간것은 破綻될 生活과 怫鬱한 心情을 붙일곳이 없어 내가 그처럼 挽留했음에도 나종에는 성을 내다시피하고 飄然히 떠난것이었다. 그리고 이 걸음은 마침내 死因이 되고만것이<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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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병든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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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 늙고 병(病)든 몸이 북향(北向)ᄒᆞ여 우니노라
|다른 표기 =
|지은이 = [[저자:송시열|송시열]]
|역자 =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청구영언]]에 무명씨의 시조로 게재돼 있다. 송시열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
{{옛한글}}
{{옛한글 시작}}
<pages index="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 from=74 to=74 fromsection="二九七" tosection="二九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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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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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thematic"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건너간후문득변하야흰말이되여자의게로도라오니하로날에능히삼쳔리를순행하는지라이날밤에차익이명을밧고말을잇그러안쟝을졍돈하니라이ᄯᅢ자의관을정졔하고부왕침뎐을향하야사배하고급히궁젼을ᄯᅥ나게하에나리니차익이건쳑을잇ᄭᅳ러기다리거늘태자타려하시니건쳑이문득굽을드러두번치며목을느리여셰번슬피우니소래쳐량하더라태자혜아리되슬푸다건쳑이비록김생이나집ᄯᅥ나주인을하직하게되니슬피우는도다이는무상대도를위하야부왕의지극한은혜를ᄭᅳᆫ으며왕궁부귀를다바리고츌가하는도다이ᄯᅢ에야슈부인이왕명을바다태자의침젼에나가태자의동졍을살피더니날이오래매약한몸이뇌곤하야침상을비겨조더니문득허공으로상셔구름이이러나며무슈한쟝육금신이금색광명을노아어두은밤이대낫갓더라태자그가온대로몸을날려공즁에오르니해와달이ᄯᅥ러져두억개에언치며구름속으로백룡을타고금신을좃차셔쳔으로향하야가거날야슈창망히소래질려가로되태자는쳡을바리시고누구를좃차어대로가나뇨태자구름가운대로셔한번도라보며뒤에좃차가난동자를발노차밀치니그동자가울며야슈품가온대로들거날야슈놀나ᄭᅮᆷ을ᄭᅢ치니동자의우는소래쟁々이들리는듯하더라야몽사를긔록하며졍신을차려시녀를부르니이ᄯᅢ가삼경이라죵요한월색은셔창에걸여잇고사방이젹요하거늘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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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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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크게|三數大葉}} <section begin="398" /><poem> 主辱臣死ㅣ라 ᄒᆞ니 내 주검즉 ᄒᆞ건마ᄂᆞᆫ 큰 칼 녀픠 ᄎᆞ고 이제도록 사랏기ᄂᆞᆫ 聖主의 萬德中興을 다셔 보려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398" /> <section begin="399" /><poem> 功名도 辱이러라 富貴도 슈괴러라 萬頃滄波에 白髮漁翁 되야 이셔 白日이 昭滄浪ᄒᆞᆫ 제 오명가명 ᄒᆞ리라 </poem><br> <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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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크게|三數大葉}}
<section begin="398" /><poem>
主辱臣死ㅣ라 ᄒᆞ니 내 주검즉 ᄒᆞ건마ᄂᆞᆫ
큰 칼 녀픠 ᄎᆞ고 이제도록 사랏기ᄂᆞᆫ
聖主의 萬德中興을 다셔 보려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398" />
<section begin="399" /><poem>
功名도 辱이러라 富貴도 슈괴러라
萬頃滄波에 白髮漁翁 되야 이셔
白日이 昭滄浪ᄒᆞᆫ 제 오명가명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399" />
<section begin="400" /><poem>
곳 지고 속닙 나니 綠陰이 소사난다
솔柯枝 것거 내여 柳絮를 ᄡᅳ리 치고
醉ᄒᆞ여 계유 든 ᄌᆞᆷ을 喚友鶯에 ᄭᆡ괘라
</poem><br>
<section end="400" />
<section begin="401" /><poem>
대 심거 울을 삼고 솔 갓고니 亭子ㅣ로다
白雲 더핀 듸 날 인ᄂᆞᆫ 줄 제 뉘 알리
庭畔에 鶴 徘徊ᄒᆞ니 긔 벗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01" />
<section begin="402" /><poem>
草堂에 일이 업서 거믄고를 베고 누어
太平 聖代를 ᄭᅮᆷ에나 보려ᄐᆞ니
門前에 數聲漁笛이 ᄌᆞᆷ든 날을 ᄭᆡ와다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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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한글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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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03" /><poem> 靑山에 눈 노긴 ᄇᆞ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잠간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귀밋ᄐᆡ ᄒᆡ무근 서리를 노겨 볼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03" /> <section begin="404" /><poem> 어우하 날 소겨고 秋月春風 날 소겨고 節節이 도라오매 有信히 너겻ᄃᆞ니 白髮란 날 다 맛지고 少年 ᄯᆞ롸 니거니 </poem><br> <section end="404" /> <sec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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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03" /><poem>
靑山에 눈 노긴 ᄇᆞ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잠간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귀밋ᄐᆡ ᄒᆡ무근 서리를 노겨 볼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03" />
<section begin="404" /><poem>
어우하 날 소겨고 秋月春風 날 소겨고
節節이 도라오매 有信히 너겻ᄃᆞ니
白髮란 날 다 맛지고 少年 ᄯᆞ롸 니거니
</poem><br>
<section end="404" />
<section begin="405" /><poem>
人生이 可憐ᄒᆞ다 물 우희 萍草ᄀᆞᆺ치
偶然히 만나셔 덧업시 여희거다
이後에 다시 만나면 緣分인가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405" />
<section begin="406" /><poem>
世上 사ᄅᆞᆷ들이 人生을 둘만 너겨
두고 ᄯᅩ 두고 먹고 놀 줄 모로ᄃᆞ라
주근 後 滿堂 金玉이 뉘 거시라 ᄒᆞ리오
</poem><br>
<section end="406" />
<section begin="407" /><poem>
이러니 져러니 ᄒᆞ고 世俗 긔별 傳치 마라
ᄂᆞᆷ의 是非ᄂᆞᆫ 나의 알 배 아니로다
瓦樽에 술이 닉어시면 긔 죠흔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07" />
<section begin="408" /><poem>
이러니 져러니 말고 술만 먹고 노새 그려
먹다가 醉커든 머근 재ᄌᆞᆷ을 드러
醉ᄒᆞ고 ᄌᆞᆷ든 덧이나 시름 닛쟈 ᄒᆞ노라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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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09" /><poem> 술 먹고 뷔거를 저긔 먹지 마쟈 盟誓ㅣ러니 盞 잡고 구버보니 盟誓홈이 虛事ㅣ로다 두어라 醉中盟誓ㅣ를 닐러 므슴 ᄒᆞ리오 </poem><br> <section end="409" /> <section begin="410" /><poem> 어우하 날 죽거든 독밧츼 집 東山에 무더 白骨이 塵土ㅣ 도여 酒樽이나 ᄆᆡᆼ글고쟈 平生에 덜 먹은 맛슬 다시 다마 보리라 </poem><br> <section end="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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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09" /><poem>
술 먹고 뷔거를 저긔 먹지 마쟈 盟誓ㅣ러니
盞 잡고 구버보니 盟誓홈이 虛事ㅣ로다
두어라 醉中盟誓ㅣ를 닐러 므슴 ᄒᆞ리오
</poem><br>
<section end="409" />
<section begin="410" /><poem>
어우하 날 죽거든 독밧츼 집 東山에 무더
白骨이 塵土ㅣ 도여 酒樽이나 ᄆᆡᆼ글고쟈
平生에 덜 먹은 맛슬 다시 다마 보리라
</poem><br>
<section end="410" />
<section begin="411" /><poem>
간밤의 부던 ᄇᆞᄅᆞᆷ에 滿庭桃花ㅣ 다 지거다
아ᄒᆡᄂᆞᆫ 뷔를 들고 ᄡᅳ로려 ᄒᆞᄂᆞᆫ괴야
落花ᅟᅵᆫ들 곳이 아니랴 ᄡᅳ지 만들 엇ᄃᆞ리
</poem><br>
<section end="411" />
<section begin="412" /><poem>
엇그제 부던 ᄇᆞ람 江湖에도 부돗ᄃᆞᆫ가
滿江 船子들이 어이구러 지내연고
山林에 드런 지 오래니 消息 몰라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12" />
<section begin="413" /><poem>
大海에 觀漁躍이오 長空에 任鳥飛라
大丈夫ㅣ 되야 나셔 志槪를 모롤 것가
엇더타 博施濟衆이 病 되옴이 이시랴
</poem><br>
<section end="413" />
<section begin="414" /><poem>
어져 可憐ᄒᆞ다 宇宙ㅣ 어이 忽忙턴고
南薰殿 五絃琴이 어ᄂᆡ ᄯᆡ에 그처진지
春秋에 風雨ㅣ 亂ᄒᆞ니 그를 슬허 ᄒᆞ노라
</poem>
{{nop}}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14"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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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15" /><poem> 仁風이 부ᄂᆞᆫ 날에 鳳凰이 來儀ᄒᆞ니 滿城 桃李ᄂᆞᆫ 지ᄂᆞ 니 곳이로다 山林에 구전 솔이야 곳이 잇사 져 보랴 </poem><br> <section end="415" /> <section begin="416" /><poem> 잘새ᄂᆞᆫ 다 ᄂᆞ라들고 새 ᄃᆞᆯ은 도다온다 외나모ᄃᆞ리고 홀로 가ᄂᆞᆫ 져 禪師ㅣ야 네 졀이 언매나 멀관ᄃᆡ 遠鍾聲이 들리ᄂᆞ니 </poem><br> <sec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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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15" /><poem>
仁風이 부ᄂᆞᆫ 날에 鳳凰이 來儀ᄒᆞ니
滿城 桃李ᄂᆞᆫ 지ᄂᆞ 니 곳이로다
山林에 구전 솔이야 곳이 잇사 져 보랴
</poem><br>
<section end="415" />
<section begin="416" /><poem>
잘새ᄂᆞᆫ 다 ᄂᆞ라들고 새 ᄃᆞᆯ은 도다온다
외나모ᄃᆞ리고 홀로 가ᄂᆞᆫ 져 禪師ㅣ야
네 졀이 언매나 멀관ᄃᆡ 遠鍾聲이 들리ᄂᆞ니
</poem><br>
<section end="416" />
<section begin="417" /><poem>
風霜이 섯거 친 날에 ᄀᆞᆺ 픠온 黃菊花를
金盆에 ᄀᆞ득 다마 玉堂에 보내오니
桃李야 곳이오 냥 마라 님의 ᄠᅳᆺ을 알괘라
</poem><br>
<section end="417" />
<section begin="418" /><poem>
가마귀 검다 ᄒᆞ고 白鷺ㅣ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소냐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슨 너ᄲᅮᆫ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18" />
<section begin="419" /><poem>
煤山閣 寂寞ᄒᆞᆫ듸 草色만 프르럿고
天壽陵 뷔여시니 ᄎᆞᆫ 구룸 ᄌᆞᆷ겨셰라
어즈버 古國 興廢를 못내 슬허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19" />
<section begin="420" /><poem>
世上 사ᄅᆞᆷ들이 입들만 셩ᄒᆞ여셔
제 허믈 젼혀 닛고 ᄂᆞᆷ의 흉 보ᄂᆞᆫ괴야
ᄂᆞᆷ의 흉 보거라 말고 제 허물을 고치고쟈
</poem>
{{nop}}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20"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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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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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21" /><poem> 酒客이 淸濁을 ᄀᆞᆯ희랴 ᄃᆞ나 ᄡᅳ나 마고 걸러 잡거니 勸ᄒᆞ거니 量대로 머그리라 醉ᄒᆞ고 草堂 ᄇᆞᆯ근 ᄃᆞᆯ에 누어신들 엇더{{sic|라|리}} </poem><br> <section end="421" /> <section begin="422" /><poem> 夕陽에 醉興을 계워 나귀 등에 실려시니 十里 溪山이 夢裏에 지내여다 어듸셔 數聲漁笛이 ᄌᆞᆷ든 날을 ᄭᆡ와다 </poem><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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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21" /><poem>
酒客이 淸濁을 ᄀᆞᆯ희랴 ᄃᆞ나 ᄡᅳ나 마고 걸러
잡거니 勸ᄒᆞ거니 量대로 머그리라
醉ᄒᆞ고 草堂 ᄇᆞᆯ근 ᄃᆞᆯ에 누어신들 엇더{{sic|라|리}}
</poem><br>
<section end="421" />
<section begin="422" /><poem>
夕陽에 醉興을 계워 나귀 등에 실려시니
十里 溪山이 夢裏에 지내여다
어듸셔 數聲漁笛이 ᄌᆞᆷ든 날을 ᄭᆡ와다
</poem><br>
<section end="422" />
<section begin="423" /><poem>
叩馬諫 못 일워든 殷日月에 못 죽던가
首陽山 고사리 긔 뉘 ᄯᅡ헤 나닷 말고
아므리 푸새엣 거신들 먹을 줄이 이시랴
</poem><br>
<section end="423" />
<section begin="424" /><poem>
周公도 聖人이샷다 世上 사ᄅᆞᆷ 드러스라
文王의 아들이오 武王의 아이로되
平生에 一毫 驕氣를 내야 뵈미 업ᄂᆞ니
</poem><br>
<section end="424" />
<section begin="425" /><poem>
南八兒 男兒ㅣ 死已연정 不可以不義屈矣여다
웃고 對答ᄒᆞ되 公이 有言敢不死아
千古에 눈물 둔 英雄이 몃몃 줄을 지올고
</poem><br>
<section end="425" />
<section begin="426" /><poem>
豪華코 富貴키야 信陵君만 ᄒᆞᆯ가마ᄂᆞᆫ
百年 못 ᄒᆞ야셔 무덤 우희 밧츨 가니
ᄒᆞ믈며 녀나믄 丈夫ㅣ야 닐러 무슴 ᄒᆞ리오
</poem>
{{nop}}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26"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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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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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27" /><poem> 엇그제 쥐비즌 술을 酒桶잇재 메고 나니 집안 아ᄒᆡ들히 허허 쳐 웃ᄂᆞᆫ괴야 江湖에 봄 간다 ᄒᆞ니 餞送ᄒᆞ려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27" /> <section begin="428" /><poem> 겨월날 ᄃᆞ스ᄒᆞᆫ 볏츨 님 계신 듸 비최고쟈 봄 미나리 ᄉᆞᆯ진 마슬 님의게 드리고쟈 님이야 무서시 업스리마ᄂᆞᆫ 내 못 니저 ᄒᆞ노라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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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27" /><poem>
엇그제 쥐비즌 술을 酒桶잇재 메고 나니
집안 아ᄒᆡ들히 허허 쳐 웃ᄂᆞᆫ괴야
江湖에 봄 간다 ᄒᆞ니 餞送ᄒᆞ려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27" />
<section begin="428" /><poem>
겨월날 ᄃᆞ스ᄒᆞᆫ 볏츨 님 계신 듸 비최고쟈
봄 미나리 ᄉᆞᆯ진 마슬 님의게 드리고쟈
님이야 무서시 업스리마ᄂᆞᆫ 내 못 니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28" />
<section begin="429" /><poem>
어져 世上 사ᄅᆞᆷ 올흔 일도 못다 ᄒᆞ고
구ᄐᆡ야 그른 일로 업슨 허믈 싯ᄂᆞᆫ괴야
우리ᄂᆞᆫ 이런 줄 아라셔 올혼 일만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429" />
<section begin="430" /><poem>
白髮이 功名이런들 사ᄅᆞᆷ마다 ᄃᆞ톨지니
날 ᄀᆞᆺ튼 愚拙은 늘거도 못 볼랏다
世上에 至極ᄒᆞᆫ 公道ᄂᆞᆫ 白髮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30" />
<section begin="431" /><poem>
世事를 내 아더냐 가리라 渭水濱에
벗이 날 ᄭᅴ다 山水조차 날을 ᄭᅴ랴
江湖에 一竿漁父ㅣ 되야 待天時를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431" />
<section begin="432" /><poem>
言忠信 行篤敬ᄒᆞ고 그른 일 아니ᄒᆞ면
내 몸에 害 업고 ᄂᆞᆷ 아니 무이ᄂᆞ니
行ᄒᆞ고 餘力이 잇거든 學文조차 ᄒᆞ리라
</poem>
{{nop}}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32"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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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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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rnsL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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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33" /><poem> 대쵸 볼 블글 柯枝 에후루혀 ᄀᆞᆯ희 ᄯᆞ고 올밤 벙근 柯枝 휘두두려 ᄀᆞᆯ희 주어 벗 모화 草堂에 드러가니 술이 풍풍 이셰라 </poem><br> <section end="433" /> <section begin="434" /><poem> 외야도 올타 ᄒᆞ고 올희야도 외다 ᄒᆞ니 世上 人事를 아마도 모를로다 ᄎᆞᆯ하리 내 왼 쳬ᄒᆞ고 ᄂᆞᆷ을 올타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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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begin="433" /><poem>
대쵸 볼 블글 柯枝 에후루혀 ᄀᆞᆯ희 ᄯᆞ고
올밤 벙근 柯枝 휘두두려 ᄀᆞᆯ희 주어
벗 모화 草堂에 드러가니 술이 풍풍 이셰라
</poem><br>
<section end="433" />
<section begin="434" /><poem>
외야도 올타 ᄒᆞ고 올희야도 외다 ᄒᆞ니
世上 人事를 아마도 모를로다
ᄎᆞᆯ하리 내 왼 쳬ᄒᆞ고 ᄂᆞᆷ을 올타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434" />
<section begin="435" /><poem>
百年을 可使人人壽ㅣ라도 憂樂이 中分未百年을
ᄒᆞ믈며 百年 반듯기 어려오니
두어라 百年前ᄭᆞ지란 醉코 놀려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35" />
<section begin="436" /><poem>
桃花 梨花 杏花 芳草들아 一年 春光 恨치 마라
너희ᄂᆞᆫ 그리ᄒᆞ여도 與天地無窮이라
우리ᄂᆞᆫ 百歲ㅅᄲᅮᆫ이매 그를 슬허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36" />
<section begin="437" /><poem>
楚覇王 壯ᄒᆞᆫ ᄠᅳᆺ도 죽기도곤 離別 셜어
王帳 悲歌에 눈믈 지여시나
至今히 烏江 風浪에 우닷 말은 업세라
</poem><br>
<section end="437" />
<section begin="438" /><poem>
ᄀᆞ르지나 셰지낫 즁에 주근 後ㅅ면 내 아ᄃᆞ냐
나 주근 무덤 우희 밧츨 가나 논을 ᄆᆡ나
酒不到 劉伶墳上土ㅣ니 아니 놀고 어이리
</poem>
{{n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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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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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rnsL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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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39" /><poem> 말ᄒᆞ기 죠타 ᄒᆞ고 ᄂᆞᆷ의 말을 마롤 거시 ᄂᆞᆷ의 말 내 ᄒᆞ면 ᄂᆞᆷ도 내 말 ᄒᆞᄂᆞᆫ 거시 말로셔 말이 만흐니 말 모로미 죠해라 </poem><br> <section end="439" /> <section begin="440" /><poem> 가더니 니즈 양ᄒᆞ여 ᄭᅮᆷ에도 아니 뵌다 현마 님이야 그 덧에 니저시랴 내 ᄉᆡᆼ각 애쉬온 젼ᄎᆞ로 님의 타슬 삼노라 </poem><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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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begin="439" /><poem>
말ᄒᆞ기 죠타 ᄒᆞ고 ᄂᆞᆷ의 말을 마롤 거시
ᄂᆞᆷ의 말 내 ᄒᆞ면 ᄂᆞᆷ도 내 말 ᄒᆞᄂᆞᆫ 거시
말로셔 말이 만흐니 말 모로미 죠해라
</poem><br>
<section end="439" />
<section begin="440" /><poem>
가더니 니즈 양ᄒᆞ여 ᄭᅮᆷ에도 아니 뵌다
현마 님이야 그 덧에 니저시랴
내 ᄉᆡᆼ각 애쉬온 젼ᄎᆞ로 님의 타슬 삼노라
</poem><br>
<section end="440" />
<section begin="441" /><poem>
섬ᄭᅥᆷ고 놀라올슨 秋天에 기러기로다
너 ᄂᆞ라 나올 제 님이 分明 아랴마ᄂᆞᆫ
消息을 못 미처 ᄆᆡᆫ지 우러 녤만 ᄒᆞᄂᆞ다
</poem><br>
<section end="441" />
<section begin="442" /><poem>
冬至ㅅᄃᆞᆯ 밤 기닷 말이 나ᄂᆞᆫ 니론 거즛말이
님 오신 날이면 ᄒᆞᄂᆞᆯ조차 무이 너겨
자ᄂᆞᆫ ᄃᆞᆰ 일 ᄭᆡ와 울려 님 가시게 ᄒᆞᄂᆞᆫ고
</poem><br>
<section end="442" />
<section begin="443" /><poem>
雪月이 滿窓ᄒᆞᆫ듸 ᄇᆞ람아 부지 마라
曳履聲 아닌 줄을 判然히 알건마ᄂᆞᆫ
그립고 아쉬온 적이면 ᄒᆡᆼ혀 긘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43" />
<section begin="444" /><poem>
窓 밧긔 셧ᄂᆞᆫ 燭불 눌과 離別 ᄒᆞ엿관ᄃᆡ
눈물 흘리며 속 ᄐᆞᄂᆞᆫ 줄 모로ᄂᆞᆫ고
우리도 져 燭불 ᄀᆞ틔여 속 ᄐᆞᄂᆞᆫ 줄 몰래라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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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한글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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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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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rnsL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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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45" /><poem> 져 건너 져 뫼흘 보니 눈 와시니 다 희거다 져 눈곳 노그면 프른 빗치 되련마ᄂᆞᆫ 희온 後 못 검ᄂᆞᆫ 거슨 白髮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45" /> <section begin="446" /><poem> 감장새 쟉다 ᄒᆞ고 大鵬아 웃지 마라 九萬里 長天을 너도 ᄂᆞᆯ고 저도 ᄂᆞᆫ다 두어라 一般飛鳥ㅣ니 네오 긔오 다르랴 </poem><br> <section end="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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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begin="445" /><poem>
져 건너 져 뫼흘 보니 눈 와시니 다 희거다
져 눈곳 노그면 프른 빗치 되련마ᄂᆞᆫ
희온 後 못 검ᄂᆞᆫ 거슨 白髮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45" />
<section begin="446" /><poem>
감장새 쟉다 ᄒᆞ고 大鵬아 웃지 마라
九萬里 長天을 너도 ᄂᆞᆯ고 저도 ᄂᆞᆫ다
두어라 一般飛鳥ㅣ니 네오 긔오 다르랴
</poem><br>
<section end="446" />
<section begin="447" /><poem>
越相國 茫小伯이 名遂功成 못ᄒᆞᆫ 젼에
五湖 烟月이 죠흔 줄 아라마ᄂᆞᆫ
西施를 싯노라 ᄒᆞ여 느저 도라 가니라
</poem><br>
<section end="447" />
<section begin="448" /><poem>
술 먹지 마쟈 ᄒᆞ니 술이라셔 제 ᄯᆞ론다
먹ᄂᆞᆫ 내 왼가 ᄯᆞ로ᄂᆞᆫ 술이 왼가
盞 잡고 ᄃᆞᆯᄃᆞ려 問ᄂᆞ니 뉘야 왼고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48" />
<section begin="449" /><poem>
天地도 唐虞ㅅ적 天地 日月도 唐虞ㅅ적 日月
天地 日月이 古今에 唐虞ㅣ로되
엇더타 世上 人事ᄂᆞᆫ 나날 달라 가ᄂᆞᆫ고
</poem><br>
<section end="449" />
<section begin="450" /><poem>
龍ᄀᆞᆺ치 한 것ᄂᆞᆫ ᄆᆞᆯ게 자 나믄 매를 밧고
夕陽 山路로 개 ᄃᆞ리고 드러가니
아마도 丈夫의 노리ᄂᆞᆫ 이 죠흔가 ᄒᆞ노라
</poem>
{{nop}}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50"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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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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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rnsL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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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51" /><poem> 治天下 五十年에 不知왜라 天下事를 億兆 蒼生 엿고쟈 願이러냐 康衢에 童謠를 드르니 太平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1" /> <section begin="452" /><poem> 南薰殿 ᄃᆞᆯ ᄇᆞᆯ근 밤의 八元八凱 ᄃᆞ리시고 五絃琴 一聲에 解吾民之慍兮로다 우리도 聖主를 뫼으와 同樂太平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452" /> <section begin="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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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begin="451" /><poem>
治天下 五十年에 不知왜라 天下事를
億兆 蒼生 엿고쟈 願이러냐
康衢에 童謠를 드르니 太平인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1" />
<section begin="452" /><poem>
南薰殿 ᄃᆞᆯ ᄇᆞᆯ근 밤의 八元八凱 ᄃᆞ리시고
五絃琴 一聲에 解吾民之慍兮로다
우리도 聖主를 뫼으와 同樂太平 ᄒᆞ리라
</poem><br>
<section end="452" />
<section begin="무명씨작품발" />::凡此無名氏 世遠代邈 莫知其姓名者 今皆不可攷 因錄于后 以待該洽之士 傍參而曲証
{{옛한글쪽 끝}}
<section end="무명씨작품발"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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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팔상록.djvu/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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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으니도라갈마음이ᄭᅳᆫ어져도로태자를차자가다가다시혜아리되태자는텬인이시라경계하사밧비도라가부왕ᄭᅦ고하라하섯거늘이졔도치아니하시며엇지한곳에모리아니라타일태자졍각을증득하실진대엇지나를졔도치아니하시며엇지한곳에모히지아니리요슬품을억제하고도라오다가시다시셜산을향하야바라보더니산뒤에거믄구름이덥폇거늘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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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도라갈마음이ᄭᅳᆫ어져도로태자를차자가다가다시혜아리되태자는텬인이시라경계하사밧비도라가부왕ᄭᅦ고하라하섯거늘이졔도치아니하시며엇지한곳에모리아니라타일태자졍각을증득하실진대엇지나를졔도치아니하시며엇지한곳에모히지아니리요슬품을억제하고도라오다가시다시셜산을향하야바라보더니산뒤에거믄구름이덥폇거늘차익이책족을드러가라치며일으대어엿부다건쳑은져구름을타고셜산으로가건마는나는사람이로되한갓건쳑만못하야흘노도라가는도다하고기리탄식하더라이ᄯᅢ에야슈부인이태자로더부러이별할졔슈장을보아글자를긔록하니라셰존으로써츌가하심이반다시무상졍각을어들쥴짐작하나화탄을만나리라하로침병을의지하엿더라이ᄯᅢ에졍반왕이태자츌가할가하야일야근심하사좌불안셕하더니사몽비몽간에태자계하에셔사배하여왈불초자오날々뎨텬으로더부러츌가하나이다하거늘왕이놀래여잡으려하니태자믄득변하야기리가하날에다흐며몸이세게에가득하더니이윽고몸을움지기여공즁에오르니텬지가신동하거날왕이놀나ᄭᅢ다르니일쟝춘몽이라졍신을차려시신을명하사태자의동졍을무르시니이ᄯᅢ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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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도라갈마음이ᄭᅳᆫ어져도로태자를차자가다가다시혜아리되태자는텬인이시라경계하사밧비도라가부왕ᄭᅦ고하라하섯거늘이졔도치아니하시며엇지한곳에모리아니라타일태자졍각을증득하실진대엇지나를졔도치아니하시며엇지한곳에모히지아니리요슬품을억제하고도라오다가시다시셜산을향하야바라보더니산뒤에거믄구름이덥폇거늘차익이책족을드러가라치며일으대어엿부다건쳑은져구름을타고셜산으로가건마는나는사람이로되한갓건쳑만못하야흘노도라가는도다하고기리탄식하더라이ᄯᅢ에야슈부인이태자로더부러이별할졔슈장을보아글자를긔록하란말삼을ᄭᅢ다라셰상만사인연ᄎᆔ산홀노위로하며ᄯᅩ몽사를보고태자는범인이아니라셰존으로써츌가하심이반다시무상졍각을어들쥴짐작하나화탄을만나리라하로침병을의지하엿더라이ᄯᅢ에졍반왕이태자츌가할가하야일야근심하사좌불안셕하더니사몽비몽간에태자계하에셔사배하여왈불초자오날々뎨텬으로더부러츌가하나이다하거늘왕이놀래여잡으려하니태자믄득변하야기리가하날에다흐며몸이세게에가득하더니이윽고몸을움지기여공즁에오르니텬지가신동하거날왕이놀나ᄭᅢ다르니일쟝춘몽이라졍신을차려시신을명하사태자의동졍을무르시니이ᄯᅢ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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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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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크게|樂時調}} <section begin="453" /><poem> 조오다가 낙대를 일코 춤추다가 되롱이를 일헤 늘근의 망녕을 白鷗ㅣ야 웃지 마라 져 건너 十里 桃花에 春興을 계워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3" /> <section begin="454" /><poem> ᄃᆞᆺᄂᆞᆫ ᄆᆞᆯ도 誤往 ᄒᆞ면 셔고 셧ᄂᆞᆫ 쇼도 타 ᄒᆞ면 간다 深意山 모진 범도 경셰ᄒᆞ면 도셔ᄂᆞ니 각시ᄃᆡ 엇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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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크게|樂時調}}
<section begin="453" /><poem>
조오다가 낙대를 일코 춤추다가 되롱이를 일헤
늘근의 망녕을 白鷗ㅣ야 웃지 마라
져 건너 十里 桃花에 春興을 계워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3" />
<section begin="454" /><poem>
ᄃᆞᆺᄂᆞᆫ ᄆᆞᆯ도 誤往 ᄒᆞ면 셔고 셧ᄂᆞᆫ 쇼도 타 ᄒᆞ면 간다
深意山 모진 범도 경셰ᄒᆞ면 도셔ᄂᆞ니
각시ᄃᆡ 엇더 니완ᄃᆡ 경셰를 不聽ᄒᆞᄂᆞ니
</poem><br>
<section end="454" />
<section begin="455" /><poem>
물 아레 그림자 지니 ᄃᆞ리 우희 즁이 간다
져 즁아 게 서거라 너 가ᄂᆞᆫ 듸 무러보쟈
손으로 흰 구룸 ᄀᆞ르치고 말 아니코 간다
</poem><br>
<section end="455" />
<section begin="456" /><poem>
岩畔 雪中孤竹 반갑도 반가왜라
뭇ᄂᆞ니 孤竹아 孤竹君의 네 엇더 닌
首陽山 萬古 淸風에 夷齊를 본 듯 ᄒᆞ여라
</poem><br>
<section end="456" />
<section begin="457" /><poem>
ᄉᆞ랑 ᄉᆞ랑 긴긴 ᄉᆞ랑 지쳔ᄀᆞ치 내내 ᄉᆞ랑
九萬里 長空에 넌즈러지고 남ᄂᆞᆫ ᄉᆞ랑
아마도 이 님의 ᄉᆞ랑은 ᄀᆞ업슨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7" />
<section begin="458" /><poem>
물 애래 셰가랑모래 아무리 ᄇᆞᆲ다 발자최 나며
님이 날을 아무리 괴다 내 아더냐 님의 안흘
</peom>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58"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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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크게|樂時調}}
<section begin="453" /><poem>
조오다가 낙대를 일코 춤추다가 되롱이를 일헤
늘근의 망녕을 白鷗ㅣ야 웃지 마라
져 건너 十里 桃花에 春興을 계워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3" />
<section begin="454" /><poem>
ᄃᆞᆺᄂᆞᆫ ᄆᆞᆯ도 誤往 ᄒᆞ면 셔고 셧ᄂᆞᆫ 쇼도 타 ᄒᆞ면 간다
深意山 모진 범도 경셰ᄒᆞ면 도셔ᄂᆞ니
각시ᄃᆡ 엇더 니완ᄃᆡ 경셰를 不聽ᄒᆞᄂᆞ니
</poem><br>
<section end="454" />
<section begin="455" /><poem>
물 아레 그림자 지니 ᄃᆞ리 우희 즁이 간다
져 즁아 게 서거라 너 가ᄂᆞᆫ 듸 무러보쟈
손으로 흰 구룸 ᄀᆞ르치고 말 아니코 간다
</poem><br>
<section end="455" />
<section begin="456" /><poem>
岩畔 雪中孤竹 반갑도 반가왜라
뭇ᄂᆞ니 孤竹아 孤竹君의 네 엇더 닌
首陽山 萬古 淸風에 夷齊를 본 듯 ᄒᆞ여라
</poem><br>
<section end="456" />
<section begin="457" /><poem>
ᄉᆞ랑 ᄉᆞ랑 긴긴 ᄉᆞ랑 지쳔ᄀᆞ치 내내 ᄉᆞ랑
九萬里 長空에 넌즈러지고 남ᄂᆞᆫ ᄉᆞ랑
아마도 이 님의 ᄉᆞ랑은 ᄀᆞ업슨가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7" />
<section begin="458" /><poem>
물 애래 셰가랑모래 아무리 ᄇᆞᆲ다 발자최 나며
님이 날을 아무리 괴다 내 아더냐 님의 안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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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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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58" /><poem> 狂風에 지부친 沙工ᄀᆞ치 기픠를 몰라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8" /> <section begin="459" /><poem> ᄉᆞ랑이 엇더터니 두렷더냐 넙엿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발을러냐 자힐러냐 지멸이 긴 줄은 모로되 애 그츨만 ᄒᆞ더라 </poem><br> <section end="459" /> <section begin="460" /><poem> 오ᄂᆞᆯ도 죠흔 날이오 이곳도 죠흔 곳이 죠흔 날 죠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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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58" /><poem>
狂風에 지부친 沙工ᄀᆞ치 기픠를 몰라 ᄒᆞ노라
</poem><br>
<section end="458" />
<section begin="459" /><poem>
ᄉᆞ랑이 엇더터니 두렷더냐 넙엿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발을러냐 자힐러냐
지멸이 긴 줄은 모로되 애 그츨만 ᄒᆞ더라
</poem><br>
<section end="459" />
<section begin="460" /><poem>
오ᄂᆞᆯ도 죠흔 날이오 이곳도 죠흔 곳이
죠흔 날 죠흔 곳에 죠흔 사람 만나 이셔
죠흔 술 죠흔 안쥬에 죠히 놀미 죠해라
</poem><br>
<section end="460" />
<section begin="461" /><poem>
淸明時節 雨紛紛ᄒᆞᆯ 제 나귀 목에 돈을 걸고
酒家ㅣ 어듸ᄆᆡ오 뭇노라 牧童들아
져 건너 杏花ㅣ ᄂᆞᆯ니니 게 가 무러 보읍소
</poem><br>
<section end="461" />
<section begin="462" /><poem>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 절로절로 水 절로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절로
두어라 절로 ᄌᆞ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poem>
<section end="462" />
<section begin="장진주사" />::{{크게|將進酒辭}}
<section end="장진주사" />
<section begin="463" /><poem>
ᄒᆞᆫ 盞 먹새그려 ᄯᅩ ᄒᆞᆫ 盞 먹새그려 곳 것거 算 노코 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後에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ᄆᆡ여 가나 流蘇寶帳에
</poem>
{{옛한글쪽 끝}}
<section end="463"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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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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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장진주사" /><peom> 萬人이 우러 녜나 어옥새 속새 덥가나무 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ᄒᆡ 흰 ᄃᆞᆯ ᄀᆞᄂᆞᆫ 비 굴근 눈 쇼쇼리 ᄇᆞ람 불 제 뉘 ᄒᆞᆫ 盞 먹쟈 ᄒᆞᆯ고 ᄒᆞ믈며 무덤 우희 ᄌᆡᆫ나비 ᄑᆞ람 불 제 뉘우ᄎᆞᆫ들 엇지리 </poem><br> <section end="장진주사" /> <section begin="과송강구택유감" /><poem> 空山木落雨蕭蕭 相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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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장진주사" /><peom>
萬人이 우러 녜나 어옥새 속새 덥가나무 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ᄒᆡ 흰 ᄃᆞᆯ ᄀᆞᄂᆞᆫ 비 굴근 눈 쇼쇼리 ᄇᆞ람 불 제 뉘 ᄒᆞᆫ 盞 먹쟈 ᄒᆞᆯ고
ᄒᆞ믈며 무덤 우희 ᄌᆡᆫ나비 ᄑᆞ람 불 제 뉘우ᄎᆞᆫ들 엇지리
</poem><br>
<section end="장진주사" />
<section begin="과송강구택유감" /><poem>
空山木落雨蕭蕭
相國風流此寂寥
惆悵一杯難更進
昔年歌曲卽今朝
</poem>
<section end="과송강구택유감" />
<section begin="한시 해설" />右 槿石洲韗 過松江舊宅有感
<section end="한시 해설" />
<section begin="장진주사 해설" />右將進酒辭 松江所製 盖倣太白長吉歡酒之意 又取杜工部緦麻百夫行君看束縛去之語 詞旨通達 句語悽惋 若使孟嘗君聞之 涙下不但雍門琹也
<section end="장진주사 해설" />
<section begin="맹상군가" />::{{크게|孟嘗君歌}}
<section end="맹상군가" />
<section begin="464" /><poem>
千秋前 尊貴키야 孟嘗君만 ᄒᆞᆯ가마ᄂᆞᆫ 千秋後 寃痛ᄒᆞᆷ이 孟嘗君이 더옥 셟다
食客이 젹돗ᄃᆞᆫ가 名聲이 괴요ᄐᆞᆫ가 개 盜賊 ᄃᆞᆰ의 우름 人力으로 사라나셔 말이야 주거지여 무덤 우희 가싀 나니 樵童牧竪들이 그
</poem>
{{옛한글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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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begin="장진주사" /><poem>
萬人이 우러 녜나 어옥새 속새 덥가나무 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ᄒᆡ 흰 ᄃᆞᆯ ᄀᆞᄂᆞᆫ 비 굴근 눈 쇼쇼리 ᄇᆞ람 불 제 뉘 ᄒᆞᆫ 盞 먹쟈 ᄒᆞᆯ고
ᄒᆞ믈며 무덤 우희 ᄌᆡᆫ나비 ᄑᆞ람 불 제 뉘우ᄎᆞᆫ들 엇지리
</poem><br>
<section end="장진주사" />
<section begin="과송강구택유감" /><poem>
::空山木落雨蕭蕭 相國風流此寂寥
::惆悵一杯難更進 昔年歌曲卽今朝
</poem>
<section end="과송강구택유감" />
<section begin="한시 해설" />::右 槿石洲韗 過松江舊宅有感
<section end="한시 해설" />
<section begin="장진주사 해설" />::右 將進酒辭 松江所製 盖倣太白長吉歡酒之意 又取杜工部緦麻百夫行君看束縛去之語 詞旨通達 句語悽惋 若使孟嘗君聞之 涙下不但雍門琹也
<section end="장진주사 해설" />
<section begin="맹상군가" />::{{크게|孟嘗君歌}}
<section end="맹상군가" />
<section begin="464" /><poem>
千秋前 尊貴키야 孟嘗君만 ᄒᆞᆯ가마ᄂᆞᆫ 千秋後 寃痛ᄒᆞᆷ이 孟嘗君이 더옥 셟다
食客이 젹돗ᄃᆞᆫ가 名聲이 괴요ᄐᆞᆫ가 개 盜賊 ᄃᆞᆰ의 우름 人力으로 사라나셔 말이야 주거지여 무덤 우희 가싀 나니 樵童牧竪들이 그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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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천택 청구영언 (디지털한글박물관, 1728).pdf/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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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464" /><poem> 우흐로 것니며셔 슬픈 노래 ᄒᆞᆫ 曲調를 부르리라 혜여실가 雍門調 一曲琹에 孟嘗君의 한숨이 오로ᄂᆞᆫ 듯 ᄂᆞ리ᄂᆞᆫ 듯 아ᄒᆡ야 거문고 쳥쳐라 사라신 제 놀리라 </poem><br> <section end="464" /> <section begin="맹상군가 해설" />::右孟嘗君歌 無名氏所製 盖傷其世間繁華 有似一場春夢 備說身後名不如眼前樂之意 若使薛君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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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begin="464" /><poem>
우흐로 것니며셔 슬픈 노래 ᄒᆞᆫ 曲調를 부르리라 혜여실가 雍門調 一曲琹에 孟嘗君의 한숨이 오로ᄂᆞᆫ 듯 ᄂᆞ리ᄂᆞᆫ 듯
아ᄒᆡ야 거문고 쳥쳐라 사라신 제 놀리라
</poem><br>
<section end="464" />
<section begin="맹상군가 해설" />::右孟嘗君歌 無名氏所製 盖傷其世間繁華 有似一場春夢 備說身後名不如眼前樂之意 若使薛君之靈更聽 則必沾襟於九原矣
<section end="맹상군가 해설" />
<section begin="편찬의 말" />::我東人所作歌曲 專用方言 間雜文字 率以諺書 傳行於世 盖方言之用 在其國俗 不得不然也 其歌曲 雖不能與中國樂譜比竝 亦有可觀而可聽者 中國之所謂歌 卽古樂府曁新聲 被之管絃者 俱是也 我國則 發之藩音 協以文語 此雖與中國異 而若其情境咸載 宮商諧和 使人詠歎淫佚 手舞足蹈 則其歸一也 遂取其表表盛行於世者 別爲記之如左
{{nop}}
{{옛한글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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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라 뎡부ㅣ 장ᄉᆡᆨ의 두목을 근포ᄒᆞ야 졍공 협졔ᄒᆞᆫ 죄ᄅᆞᆯ 다사리니 이에 증역ᄒᆞᄂᆞᆫ ᄇᆡᆨ셩이 길에 널니여 보ᄂᆞᆫ ᄌᆞㅣ 한탄 아니 리 업고 외읍이 ᄯᅩᄒᆞᆫ 소연ᄒᆞᆫ지라 뎡부ㅣ ᄇᆡᆨ셩이 작란ᄒᆞᆯ가 염녀ᄒᆞ야 군사ᄅᆞᆯ 발ᄒᆞ야 왕궁을 호위ᄒᆞ니 ᄇᆡᆨ공들이 궁곤무료ᄒᆞᆯ ᄯᅢᄅᆞᆯ 당ᄒᆞ야 공ᄭ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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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뎡부ㅣ 장ᄉᆡᆨ의 두목을 근포ᄒᆞ야 졍공 협졔ᄒᆞᆫ 죄ᄅᆞᆯ 다사리니 이에 증역ᄒᆞᄂᆞᆫ ᄇᆡᆨ셩이 길에 널니여 보ᄂᆞᆫ ᄌᆞㅣ 한탄 아니 리 업고 외읍이 ᄯᅩᄒᆞᆫ 소연ᄒᆞᆫ지라 뎡부ㅣ ᄇᆡᆨ셩이 작란ᄒᆞᆯ가 염녀ᄒᆞ야 군사ᄅᆞᆯ 발ᄒᆞ야 왕궁을 호위ᄒᆞ니 ᄇᆡᆨ공들이 궁곤무료ᄒᆞᆯ ᄯᅢᄅᆞᆯ 당ᄒᆞ야 공ᄭᅡᄂᆞᆫ 더ᄒᆞ지 아니ᄒᆞ고 ᄉᆡᆼᄋᆡᄂᆞᆫ 더욱 구간ᄒᆞ니 회당이 인ᄒᆞ야 치셩ᄒᆞᄂᆞᆫ지라 유식ᄌᆞㅣ 우심여분ᄒᆞ야 화단이 조셕에 날가 염녀ᄒᆞ더라
{{u|노의 비례왕}}이 ᄌᆡ위시 일쳔팔ᄇᆡᆨ사십일년【헌종 칠년】에 군사 뉵십ᄉᆞ만을 길너 젼혀 ᄂᆡ란을 방비ᄒᆞ니 병부에셔 지츌ᄒᆞ미 젹지 아니ᄒᆞ고 공부에셔 지츌ᄒᆞ미 ᄯᅩ {{du|영}}금 이쳔여만 방이 되니 향ᄌᆞ 일쳔팔ᄇᆡᆨ이십구년【순조 이십구년】에 국용이 {{du|영}}금 ᄉᆞ쳔만 방이러니 지금은 륙쳔만 방이 되니 이ᄂᆞᆫ {{du|법국}} 란리 젼보다 오히려 유가무감ᄒᆞ야 입불부츌 ᄒᆞᄂᆞᆫ지라 이에 혜오되 젼답은 이왕에 부셰가 과ᄒᆞ니 가셰ᄒᆞᆯ 슈 업고 오즉 은결 잇ᄂᆞᆫ 곳이 만으니 이졔 사신을 보ᄂᆡ여 젼지ᄅᆞᆯ 쳑량ᄒᆞ야 은결을 ᄎᆞ짐만 갓지 못ᄒᆞ다 ᄒᆞ고 사신을 ᄉᆞ면 보ᄂᆡ야 량젼ᄒᆞ니 ᄇᆡᆨ셩이 소요ᄒᆞ더라
{{u|법}}졍이 량젼ᄒᆞᆯ ᄯᅢ에 신사 슈인이 소민을 부츅여 소셜을 ᄂᆡ되 국가ㅣ 우리 양식을 ᄲᆡ앗는다 ᄒᆞᄆᆡ 사신이 일으ᄂᆞᆫ 곳에 녕을 죳지 아니ᄒᆞ고 작당 져희ᄒᆞᄂᆞᆫ지라 {{u|법}}졍이 긔호지셰ᄅᆞᆯ 당ᄒᆞ야 살뉵ᄒᆞ기ᄅᆞᆯ 만이 ᄒᆞ니 {{du|법국}}의 복ᄆᆞᆼ이 조셕에 잇더라
::뎨이십일졀 ᄇᆡᆨ셩이 의원에 호소ᄒᆞ야 장졍을 고치미라
ᄎᆞ시예 {{du|법국}} 인구ㅣ 삼쳔ᄉᆞᄇᆡᆨ만이 되ᄆᆡ {{du|법국}} 법률에 인민이 ᄌᆡ산이 잇셔 ᄆᆡ년 부셰ᄅᆞᆯ 나라에 밧치되 {{du|영}}금 팔방 이상되ᄂᆞᆫ ᄌᆞ야 관원 쳔거ᄒᆞᄂᆞᆫ 권을 허락ᄒᆞ나 연이나 부자ᄂᆞᆫ 소ᄒᆞ고 빈자ㅣ 다ᄒᆞ야 부셰 능이 팔방 이상에 이르러 관원 쳔거ᄒᆞᄂᆞᆫ ᄌᆞㅣ 겨우 이십여만 인이요 이 이십여만인이 ᄆᆡ양 민심과 형이ᄒᆞ야 거쳔ᄒᆞᄂᆞᆫ 관원이 민심에 흡족지 못ᄒᆞᄆᆡ 관민간에 옹폐ᄒᆞ미 만으며 허믈며 관원 거쳔ᄒᆞᄂᆞᆫ ᄌᆞㅣ 다 친쳑 고구어ᄂᆞᆯ 국가ㅣ 그 청을 드려 벼ᄉᆞᆯ을 식키니 차ᄇᆡ 왕실에 진츙ᄒᆞᆫ다 ᄒᆞ야 민간 질고ᄅᆞᆯ 뭇지 아니ᄒᆞ며 {{u|노의 비례왕}} ᄌᆡ위 십팔년 간에 문무ᄇᆡᆨ관 범 십삼만 명 즁에 능이 츌녁ᄒᆞ야 국가ᄅᆞᆯ 도은즉 그 족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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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쳑인아ㅣ 만이 현직에 거ᄒᆞᄂᆞᆫ지라 유시로 회뢰공ᄒᆡᆼᄒᆞ야 ᄆᆡ관뉵작ᄒᆞ미 왕왕이 잇스니 {{du|법국}} 대란 이후로 관방이 문란ᄒᆞ미 미유약ᄎᆞ지심이러라 {{du|법}}국 명ᄉᆞ {{u|랍마졍}}이<ref>라마르틴(Lamartine)</ref> 말ᄒᆞ야 갈오ᄃᆡ 조졍이 엇지ᄒᆞ야 순량ᄒᆞᆫ ᄇᆡᆨ셩으로 무뢰ᄒᆞᆫ 걸ᄀᆡᄅᆞᆯ ᄆᆡᆫ드ᄂᆞ뇨 ᄒᆞ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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쳑인아ㅣ 만이 현직에 거ᄒᆞᄂᆞᆫ지라 유시로 회뢰공ᄒᆡᆼᄒᆞ야 ᄆᆡ관뉵작ᄒᆞ미 왕왕이 잇스니 {{du|법국}} 대란 이후로 관방이 문란ᄒᆞ미 미유약ᄎᆞ지심이러라 {{du|법}}국 명ᄉᆞ {{u|랍마졍}}이<ref>라마르틴(Lamartine)</ref> 말ᄒᆞ야 갈오ᄃᆡ 조졍이 엇지ᄒᆞ야 순량ᄒᆞᆫ ᄇᆡᆨ셩으로 무뢰ᄒᆞᆫ 걸ᄀᆡᄅᆞᆯ ᄆᆡᆫ드ᄂᆞ뇨 ᄒᆞ니 말이 비록 과격ᄒᆞ나 보는 바ㅣ 업지 안타 ᄒᆞ더라
{{du|법국}} 명ᄉᆞ들이 말호ᄃᆡ 이졔 나라ᄅᆞᆯ 흥코ᄌᆞ ᄒᆞ면 반ᄃᆞ시 몬져 민심을 감화ᄒᆞ니만 갓지 못ᄒᆞ다 ᄒᆞ니 신식을 죳ᄂᆞᆫ 각 인이 다 양법미규ᄅᆞᆯ ᄉᆡᆼ각ᄒᆞ야 우민을 가르치고ᄌᆞ ᄒᆞ며 관원 거쳔ᄒᆞᄂᆞᆫ 일졀에 이르러ᄂᆞᆫ 부셰ᄅᆞᆯ {{du|영}}금 ᄉᆞ방 혹 이방에 이르ᄂᆞᆫ ᄌᆞᄂᆞᆫ 다 쳔관ᄒᆞᄂᆞᆫ 권이 잇게 ᄒᆞᄌᆞ ᄒᆞ야 졍부에 쥬달ᄒᆞ니 왕이 박논ᄒᆞ야 이르되 이ᄂᆞᆫ 불과 목하 션ᄀᆡ지질이라 ᄌᆞ연 물약유희ᄒᆞᆯ지라 하필 {{u|편작}}과 {{u|화타}}ᄅᆞᆯ 청ᄒᆞ야 분경케 ᄒᆞ리요 ᄒᆞ니 말ᄒᆞᄂᆞᆫ ᄌᆞㅣ 이르되 왕이 년긔 쇠모ᄒᆞ야 변경ᄒᆞ믈 조와 아니ᄒᆞᆫ다 ᄒᆞ나 기실 이 신법을 조와 아니ᄒᆞ믄 왕의 국량이 널지 못ᄒᆞ미요 ᄯᅩ 시셰에 명ᄇᆡᆨ지 못ᄒᆞ야 민졍을 아지 못ᄒᆞᄂᆞᆫ 연고ㅣ라 ᄒᆞ더라
신법을 구ᄒᆞᄂᆞᆫ ᄉᆞᄅᆞᆷ 즁에 {{u|아랍가}}와 {{u|조지륜 ᄇᆡ노}}와<ref>오딜롱 바로(Odillon Barrot)</ref> {{u|나의 ᄇᆡᆨ난ᄀᆡᆨ}}과<ref>루이 블랑크(Louis Blanc)</ref> {{u|졔이}}와 {{u|납마졍}} 졔인은 다 통리 현릉ᄒᆞᆫ 명ᄉᆞ요 물망소귀에 ᄇᆡᆨ셩이 경앙ᄒᆞᄂᆞᆫ ᄇᆡ라 국졍을 변통ᄒᆞ므로ᄡᅥ 급무ᄅᆞᆯ ᄉᆞᆷ아 국가ㅣ 곳 권력이 잇셔도 엇지 ᄒᆞ지 못ᄒᆞᆯ 쥴 알고 날로 변통ᄒᆞᆯ 법을 구ᄒᆞ야 일셩월신ᄒᆞ니 국가에셔ᄂᆞᆫ 더욱 의구지심이 잇셔 ᄯᅩᄒᆞᆫ 일젹월누ᄒᆞ더라 ᄎᆞ인들이 젼일 {{du|영국}}에셔 {{du|영국}} 졍부 변통ᄒᆞᄂᆞᆫ 묘계ᄅᆞᆯ 의방ᄒᆞ야 ᄒᆡᆼ헐ᄉᆡ 각 명ᄉᆞㅣ 각 대도회에 이르러 연셜장을 베푸러 인민을 초청ᄒᆞ니 오ᄂᆞᆫ ᄌᆞㅣ 슈쳔이라 다 국가의 병든 근원과 목금에 고칠 법을 말ᄒᆞ야 강ᄀᆡ격앙ᄒᆞ야 셩누구하ᄒᆞ니 비록 슌포가 잇셔 엄이 사찰ᄒᆞ야 방금ᄒᆞ나 필경 민심이 ᄒᆞᆫ갈갓치 셩셰호대ᄒᆞᄆᆡ 여간 슌포들이 엇지 ᄒᆞ리요 심지어 경순누월ᄒᆞ야 여긔셔 모이고 져긔셔 흣{{sic|텨|터}}져 금지ᄒᆞᆯ 길 업ᄂᆞᆫ지라 시국이 여ᄎᆞ에 더욱 위ᄐᆡᄒᆞ거ᄂᆞᆯ 왕은 슈구당의 {{u|계ᄉᆞ}} 대신과 갓치 쳐지안연ᄒᆞ야 소불ᄀᆡ의ᄒᆞ니 이ᄂᆞᆫ 그 마음에 헤오ᄃᆡ ᄌᆡ물을 원랍ᄒᆞ고 벼살ᄒᆞᆫ ᄌᆞᄂᆞᆫ 다 왕을 의지ᄒᆞ야 귀ᄒᆞ얏스니 왕의 위가 요동되면 져의 ᄌᆞ연 낙사ᄒᆞᆯ지라 그 왕실을 익ᄃᆡᄒᆞ미 필연 ᄇᆡᆨ졀불회ᄒᆞᆯ 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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쳑인아ㅣ 만이 현직에 거ᄒᆞᄂᆞᆫ지라 유시로 회뢰공ᄒᆡᆼᄒᆞ야 ᄆᆡ관뉵작ᄒᆞ미 왕왕이 잇스니 {{du|법국}} 대란 이후로 관방이 문란ᄒᆞ미 미유약ᄎᆞ지심이러라 {{du|법}}국 명ᄉᆞ {{u|랍마졍}}이<ref>라마르틴(Lamartine)</ref> 말ᄒᆞ야 갈오ᄃᆡ 조졍이 엇지ᄒᆞ야 순량ᄒᆞᆫ ᄇᆡᆨ셩으로 무뢰ᄒᆞᆫ 걸ᄀᆡᄅᆞᆯ ᄆᆡᆫ드ᄂᆞ뇨 ᄒᆞ니 말이 비록 과격ᄒᆞ나 보는 바ㅣ 업지 안타 ᄒᆞ더라
{{du|법국}} 명ᄉᆞ들이 말호ᄃᆡ 이졔 나라ᄅᆞᆯ 흥코ᄌᆞ ᄒᆞ면 반ᄃᆞ시 몬져 민심을 감화ᄒᆞ니만 갓지 못ᄒᆞ다 ᄒᆞ니 신식을 죳ᄂᆞᆫ 각 인이 다 양법미규ᄅᆞᆯ ᄉᆡᆼ각ᄒᆞ야 우민을 가르치고ᄌᆞ ᄒᆞ며 관원 거쳔ᄒᆞᄂᆞᆫ 일졀에 이르러ᄂᆞᆫ 부셰ᄅᆞᆯ {{du|영}}금 ᄉᆞ방 혹 이방에 이르ᄂᆞᆫ ᄌᆞᄂᆞᆫ 다 쳔관ᄒᆞᄂᆞᆫ 권이 잇게 ᄒᆞᄌᆞ ᄒᆞ야 졍부에 쥬달ᄒᆞ니 왕이 박논ᄒᆞ야 이르되 이ᄂᆞᆫ 불과 목하 션ᄀᆡ지질이라 ᄌᆞ연 물약유희ᄒᆞᆯ지라 하필 {{u|편작}}과 {{u|화타}}ᄅᆞᆯ 청ᄒᆞ야 분경케 ᄒᆞ리요 ᄒᆞ니 말ᄒᆞᄂᆞᆫ ᄌᆞㅣ 이르되 왕이 년긔 쇠모ᄒᆞ야 변경ᄒᆞ믈 조와 아니ᄒᆞᆫ다 ᄒᆞ나 기실 이 신법을 조와 아니ᄒᆞ믄 왕의 국량이 널지 못ᄒᆞ미요 ᄯᅩ 시셰에 명ᄇᆡᆨ지 못ᄒᆞ야 민졍을 아지 못ᄒᆞᄂᆞᆫ 연고ㅣ라 ᄒᆞ더라
신법을 구ᄒᆞᄂᆞᆫ ᄉᆞᄅᆞᆷ 즁에 {{u|아랍가}}와 {{u|{{sic|조|오}}지륜 ᄇᆡ노}}와<ref>오딜롱 바로(Odillon Barrot)</ref> {{u|나의 ᄇᆡᆨ난ᄀᆡᆨ}}과<ref>루이 블랑크(Louis Blanc)</ref> {{u|졔이}}와 {{u|납마졍}} 졔인은 다 통리 현릉ᄒᆞᆫ 명ᄉᆞ요 물망소귀에 ᄇᆡᆨ셩이 경앙ᄒᆞᄂᆞᆫ ᄇᆡ라 국졍을 변통ᄒᆞ므로ᄡᅥ 급무ᄅᆞᆯ ᄉᆞᆷ아 국가ㅣ 곳 권력이 잇셔도 엇지 ᄒᆞ지 못ᄒᆞᆯ 쥴 알고 날로 변통ᄒᆞᆯ 법을 구ᄒᆞ야 일셩월신ᄒᆞ니 국가에셔ᄂᆞᆫ 더욱 의구지심이 잇셔 ᄯᅩᄒᆞᆫ 일젹월누ᄒᆞ더라 ᄎᆞ인들이 젼일 {{du|영국}}에셔 {{du|영국}} 졍부 변통ᄒᆞᄂᆞᆫ 묘계ᄅᆞᆯ 의방ᄒᆞ야 ᄒᆡᆼ헐ᄉᆡ 각 명ᄉᆞㅣ 각 대도회에 이르러 연셜장을 베푸러 인민을 초청ᄒᆞ니 오ᄂᆞᆫ ᄌᆞㅣ 슈쳔이라 다 국가의 병든 근원과 목금에 고칠 법을 말ᄒᆞ야 강ᄀᆡ격앙ᄒᆞ야 셩누구하ᄒᆞ니 비록 슌포가 잇셔 엄이 사찰ᄒᆞ야 방금ᄒᆞ나 필경 민심이 ᄒᆞᆫ갈갓치 셩셰호대ᄒᆞᄆᆡ 여간 슌포들이 엇지 ᄒᆞ리요 심지어 경순누월ᄒᆞ야 여긔셔 모이고 져긔셔 흣{{sic|텨|터}}져 금지ᄒᆞᆯ 길 업ᄂᆞᆫ지라 시국이 여ᄎᆞ에 더욱 위ᄐᆡᄒᆞ거ᄂᆞᆯ 왕은 슈구당의 {{u|계ᄉᆞ}} 대신과 갓치 쳐지안연ᄒᆞ야 소불ᄀᆡ의ᄒᆞ니 이ᄂᆞᆫ 그 마음에 헤오ᄃᆡ ᄌᆡ물을 원랍ᄒᆞ고 벼살ᄒᆞᆫ ᄌᆞᄂᆞᆫ 다 왕을 의지ᄒᆞ야 귀ᄒᆞ얏스니 왕의 위가 요동되면 져의 ᄌᆞ연 낙사ᄒᆞᆯ지라 그 왕실을 익ᄃᆡᄒᆞ미 필연 ᄇᆡᆨ졀불회ᄒᆞᆯ 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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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ᄯᅩᄂᆞᆫ 각 병ᄉᆞ와 병졍이 국가의 녹봉을 바다쓰ᄆᆡ 필연 국가ᄅᆞᆯ 호위ᄒᆞᆯ 츙셩이 잇슬 거시니 이ᄂᆞᆫ 관인과 병ᄉᆞㅣ 다 오직 왕만 알지라 소민이 권이 업스니 설녕 요순롱셜ᄒᆞ야 국가ᄅᆞᆯ 시비ᄒᆞᆯ 지라도 득실에 관계 업다 ᄒᆞ고 민심과 츄향을 살피지 아니ᄒᆞ고 민심의 구ᄒᆞᄂᆞᆫ 바ᄅᆞᆯ ᄯᅩᄒᆞᆫ 쳬휼치 아니ᄒᆞ더라
::뎨이십이졀 {{du|법}}왕이 {{du|셔반아}}국과 혼인을 ᄆᆡ짐이라
{{u|노의 비례왕}}이 {{du|영국}}과 화친ᄒᆞ믄 {{du|법국}} 다사리ᄂᆞᆫ 뎨일 법으로 아ᄂᆞᆫ 고로 {{du|영국}}과 교셥이 되ᄂᆞᆫ 일은 무론 모ᄉᆞᄒᆞ고 겸양ᄒᆞ기ᄅᆞᆯ 쥬장ᄒᆞ야 흔단을 ᄂᆡ이지 아니ᄒᆞ니 {{du|법}}인이 ᄒᆞᆫ 야ᄉᆞᄅᆞᆯ ᄂᆡ여 왈 일쳔팔ᄇᆡᆨᄉᆞ십삼년【헌종 구년】에 {{du|법국}}이 {{du|영국}}의 속국이 되얏다 ᄒᆞ니 그 조롱ᄒᆞ미 ᄯᅩᄒᆞᆫ 심ᄒᆞ더라 이 ᄒᆡ에 {{du|영국}} 군쥬ㅣ 친이 {{du|법국}}에 이르러 양군이 셔로 즐기니 {{u|노의 비례왕}}이 자랑ᄒᆞ야 왈 {{du|영국}} 군쥬ㅣ 친이 오시믄 양국의 교호ᄒᆞᆷ만 보임이 아니라 ᄯᅩᄒᆞᆫ 과인이 치국ᄒᆞ미 장ᄒᆞᆫ 고로 친이 와셔 나ᄅᆞᆯ 흠모ᄒᆞ미라 ᄒᆞ고 슈월 후에 {{du|법}}왕이 ᄯᅩᄒᆞᆫ {{du|영국}}에 가 회ᄉᆞᄒᆞ고 {{du|법국}}이 {{du|셔반아}}국과 교셥ᄒᆞᄂᆞᆫ ᄃᆡᄉᆞᄅᆞᆯ 의논ᄒᆞ고 드듸여 언약을 졍ᄒᆞ고 도라오니라
션시에 {{du|셔반아}}국 군쥬ᄂᆞᆫ 처ᄌᆞ이라 그 츌가ᄒᆞ지 아니ᄒᆞᆫ 아오 군쥬로 더부러 쌍으로 {{du|법}}왕의 두 셰ᄌᆞ의게 혼인코ᄌᆞ 헐새 {{du|법}}왕이 헤오ᄃᆡ {{u|영국}}이 {{du|법국}}과 {{du|셔반아}}와 과이 친밀허믈 조와 아니ᄒᆞᄆᆡ 이졔 {{du|셔반아}} 군쥬로 며나리ᄅᆞᆯ 삼으면 반ᄃᆞ시 {{du|영국}}의게 득죄될가 념녀ᄒᆞ야 이에 다만 그 군쥬로ᄡᅥ {{du|법}}왕 넷ᄌᆡ 셰ᄌᆞ {{u|망답셜후}}의<ref>몽팡시에 공작(Duc de Montpensier)</ref> 부인을 삼고 {{du|셔반아}} 녀왕을 청ᄒᆞ야 별노이 ᄇᆡ필을 구ᄒᆞ라 ᄒᆞ고 {{du|법}}왕이 {{du|영국}} 군쥬ᄅᆞᆯ 보고 그 젼후 졍졀을 셩명ᄒᆞ니 {{du|영국}} 군쥬와 {{du|영}}대신이 {{du|법}}왕이 례ᄅᆞᆯ 안다 ᄒᆞ야 그 일을 허락ᄒᆞ고 ᄯᅩ 청ᄒᆞ되 {{du|법}}왕셰ᄌᆞ {{u|망답셜후}}ㅣ {{du|셔반아}} 군쥬와 셩혼헐진ᄃᆡᆫ 반ᄃᆞ시 군쥬의 형 {{du|셔반아}} 군쥬ㅣ 츌가ᄒᆞ야 ᄌᆞ녀간 나은 후에 비로소 {{du|법}}셰ᄌᆞㅣ {{du|셔반아}} 군쥬와 ᄐᆡᆨ일 셩혼ᄒᆞ라 ᄒᆞ니 【{{du|ᄐᆡ셔}} 법에 왕이 졸ᄒᆞ고 무ᄌᆞᄒᆞ면 위ᄅᆞᆯ 그 ᄯᆞᆯ의게 젼ᄒᆞ고 ᄯᅩ 즉위ᄒᆞ얏든 녀왕이 졸ᄒᆞ면 형종졔 급ᄒᆞᄂᆞᆫ 법을 죳ᄎᆞ 그 아오의게 젼ᄒᆞᄂᆞᆫ지라 이졔 {{du|영국}}이 이 청을 ᄒᆞᆷ은 대져 {{du|셔반아}} 녀왕이 일조에 쥭으면 {{du|법}}왕 셰ᄌᆞ {{u|망답셜후}}의 부인이 {{du|셔반아}} 인군의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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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위ᄅᆞᆯ 이어 {{du|법국}}과 {{du|셔반아}}이 합ᄒᆞᆯ가 념녀ᄒᆞ미라】 {{du|법}}왕이 ᄯᅩᄒᆞᆫ 허락ᄒᆞ고 ᄌᆡ셔 삽혈ᄒᆞ야 ᄆᆡᆼ셰ᄒᆞ얏더니 ᄎᆞ후 임염 삼년에 {{du|셔반아}} 녀왕이 의연이 츌가치 못ᄒᆞ거ᄂᆞᆯ {{du|법}}왕이 기다리지 못ᄒᆞ야 드듸여 일쳔팔ᄇᆡᆨᄉᆞ십뉵년【헌종 십이년】에 {{du|셔반아}}에 글을 보ᄂᆡ야 혼인을 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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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위ᄅᆞᆯ 이어 {{du|법국}}과 {{du|셔반아}}이 합ᄒᆞᆯ가 념녀ᄒᆞ미라】 {{du|법}}왕이 ᄯᅩᄒᆞᆫ 허락ᄒᆞ고 ᄌᆡ셔 삽혈ᄒᆞ야 ᄆᆡᆼ셰ᄒᆞ얏더니 ᄎᆞ후 임염 삼년에 {{du|셔반아}} 녀왕이 의연이 츌가치 못ᄒᆞ거ᄂᆞᆯ {{du|법}}왕이 기다리지 못ᄒᆞ야 드듸여 일쳔팔ᄇᆡᆨᄉᆞ십뉵년【헌종 십이년】에 {{du|셔반아}}에 글을 보ᄂᆡ야 혼인을 ᄌᆡ촉ᄒᆞ야 {{du|셔반아}} 녀왕과 밋 그 아오 군쥬로ᄡᅥ 왕의 두 셰ᄌᆞ비ᄅᆞᆯ 삼으니 목하에 {{du|구라파}}쥬 각국 경위로 말ᄒᆞ면 타국과 상관이 업거니와 당시에ᄂᆞᆫ 각국 교섭이 건년과 형이ᄒᆞ믄 대져 {{du|구라파}} 각국의 국권이 젼혀 인군의게 ᄆᆡ인 고로 {{du|법}}셰ᄌᆞㅣ {{du|셔반아}} 녀왕과 셩혼ᄒᆞ면 {{du|법}}왕이 자연 {{du|셔반아}} 녀왕의 시야비 되야 곳 가이 {{du|셔반아}} 병권을 가지고 {{du|셔반아}} 병함을 불너 합력ᄒᆞ야 {{du|영국}}을 치면 {{du|영국}}이 부지치 못ᄒᆞᆯ 고로 부득불 미리 조제 ᄒᆞ미러라
{{du|법}}왕이 {{du|영국}} ᄆᆡᆼ셰ᄅᆞᆯ ᄇᆡ반ᄒᆞ믄 화근의 시초이라 {{du|구라파}} 각국이 다 이로되 이ᄂᆞᆫ ᄇᆡ약ᄒᆞᄂᆞᆫ ᄉᆞᄅᆞᆷ이라 족히 밋을 거시 업다 ᄒᆞ야 비박히 아지 아니 리 업고 곳 그 본국 ᄉᆞᄅᆞᆷ도 왕은 무신ᄒᆞ다 ᄒᆞ야 더욱 묘시ᄒᆞ고 ᄯᅩ {{du|영법}}이 친밀ᄒᆞᆯ ᄯᅢ에ᄂᆞᆫ {{du|법}}민이 헤오ᄃᆡ {{du|영국}}이 필연 왕을 보호ᄒᆞ리라 ᄒᆞ고 망동치 못ᄒᆞ더니 이에 왕이 {{du|영국}}에 득죄ᄒᆞᄆᆡ {{du|영국}}이 구ᄒᆞ지 아니ᄒᆞ리라 ᄒᆞ고 민심이 졸변ᄒᆞ며 ᄯᅩ {{du|영국}} 신보관에셔 {{du|법}}왕의 무신ᄒᆞ믈 의논ᄒᆞ야 긔롱ᄒᆞᆷ을 마지 아니ᄒᆞ거ᄂᆞᆯ {{du|파리}} 신문사ㅣ 다 이 말을 긔록ᄒᆞ야 신보에 올리고 ᄯᅩ 드르니 {{du|영국}} 녀왕이 {{du|법}}왕의게 글을 보ᄂᆡ야 실신ᄒᆞ믈 ᄎᆡᆨ망ᄒᆞ얏다 ᄒᆞ니 민심이 더욱 안졍치 못ᄒᆞ더라
::뎨이십삼졀 {{du|파리}} 도셩이 ᄯᅩ 어지러우미라
당ᄎᆞ시ᄒᆞ야 왕도 ᄯᅩᄒᆞᆫ 민심이 불복ᄒᆞ믈 아나 맛ᄎᆞᆷᄂᆡ 옛법을 고치지 아니ᄒᆞ고 오직 의원을 쳬결ᄒᆞ고 병졍을 우ᄃᆡᄒᆞ면 완급간에 가이 밋을 만ᄒᆞ다 ᄒᆞ야 의원과 병졍을 후ᄃᆡᄒᆞ니 ᄇᆡᆨ셩은 ᄌᆞ연 더 박ᄒᆞ게 되ᄂᆞᆫ지라 미구에 ᄇᆡᆨ폐 총ᄉᆡᆼᄒᆞ고 각 관이 ᄯᅩ 뇌물노ᄡᅥ 일을 삼아 긔탄이 업더라 일쳔팔ᄇᆡᆨᄉᆞ십칠년【헌종 십삼년】에 군긔쳐에 한 대관이 뇌물을 밧다가 발각이 되니 신보관예셔 그 셩명을 드러ᄂᆡ야 ᄆᆡ관뉵작ᄒᆞ믈 말ᄒᆞ고 ᄯᅩ 이로되 아모 대관이 연희장을 금ᄒᆞ다가 돈을 밧고 허락ᄒᆞ얏다 ᄒᆞ며 ᄯᅩ 직조창의 실화ᄒᆞᆷ은 기실이 그 관원이 과이 흠츅을 ᄂᆡ이고 불을 노아 자최ᄅᆞᆯ 업새미라 ᄒᆞ고 ᄯᅩ 말호ᄃᆡ 병션에 군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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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태셔신사 하.djvu/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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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rnsL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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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쥴 ᄯᅢ에 잡된 물건으로 음식에 셕거 쥬엇스니 대져 관가이 덕ᄒᆡᆼ을 닥지 아니ᄒᆞ거ᄂᆞᆯ ᄇᆡᆨ셩은 무삼 도리와 강상을 도라보리요 ᄒᆞ야 회방이 봉긔ᄒᆞ야 금지치 못ᄒᆞᆯ너라 일쳔팔ᄇᆡᆨᄉᆞ십오륙년간【헌종 십일이년】에 흉년이 드러 곡가ㅣ 대귀ᄒᆞ거ᄂᆞᆯ 국가ㅣ 오히려 ᄋᆡ민지심이 잇셔 각 지방에 분ᄇᆡᄒᆞ야 {{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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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 ᄯᅢ에 잡된 물건으로 음식에 셕거 쥬엇스니 대져 관가이 덕ᄒᆡᆼ을 닥지 아니ᄒᆞ거ᄂᆞᆯ ᄇᆡᆨ셩은 무삼 도리와 강상을 도라보리요 ᄒᆞ야 회방이 봉긔ᄒᆞ야 금지치 못ᄒᆞᆯ너라
일쳔팔ᄇᆡᆨᄉᆞ십오륙년간【헌종 십일이년】에 흉년이 드러 곡가ㅣ 대귀ᄒᆞ거ᄂᆞᆯ 국가ㅣ 오히려 ᄋᆡ민지심이 잇셔 각 지방에 분ᄇᆡᄒᆞ야 {{du|영}}금 일ᄇᆡᆨ만 방을 ᄂᆡ야 곡식을 무ᄒᆞ야 ᄇᆡᆨ셩의게 염가로 발ᄆᆡᄒᆞ고 ᄯᅩ 그 다음 ᄒᆡ 일 년 셰입을 예ᄆᆡᄒᆞᄆᆡ 국가에 셰입을 셰츌과 비교ᄒᆞ야 보니 {{du|영}}금으로 부족이 일쳔이ᄇᆡᆨ만 방이라 나라의 위험ᄒᆞ미 더욱 무궁ᄒᆞ더라
{{du|법}}민이 이 졍형을 보고 졍부ᄅᆞᆯ 핍박ᄒᆞ야 구식을 고치라 ᄒᆞ더니 일쳔팔ᄇᆡᆨᄉᆞ십칠년 【헌종 십삼년】 십이월 이십팔일에 구신당이 말호ᄃᆡ ᄇᆡᆨ셩의 궁곤ᄒᆞ믄 다 졍부ㅣ 판리불션ᄒᆞᆫ 연고ㅣ라 ᄒᆞ고 피창ᄎᆞ화ᄒᆞ야 인심을 용동 식이며 ᄯᅩ {{du|법}}졍에 청ᄒᆞ야 민간에 관원 쳔거ᄒᆞᄂᆞᆫ 권을 널니고ᄌᆞ ᄒᆞ니 {{u|계사}} 대신이 허락지 아니ᄒᆞ거ᄂᆞᆯ 구신당이 이에 각 도에 통문ᄒᆞ야 지명지ᄉᆞᄅᆞᆯ 청ᄒᆞ야 {{du|파리}} 도셩에 모이려 ᄒᆞ니 법ᄉᆞㅣ 듯고 ᄃᆡ경ᄒᆞ야 발포 엄금ᄒᆞ거ᄂᆞᆯ 구신당이 겁ᄂᆡ여 회ᄅᆞᆯ 파ᄒᆞ니라 연이나 외도 ᄉᆞᄅᆞᆷ은 아지 못ᄒᆞ고 속장부회ᄒᆞᆫ ᄌᆞㅣ 도로에 낙역부졀ᄒᆞ야 {{du|파리}}에 이르더라 일쳔팔ᄇᆡᆨᄉᆞ십팔년 【헌종 십ᄉᆞ년】 이월 이십일일에 각 외방 ᄉᆞᄅᆞᆷ이 홀연이 다 나와 길가에 모이니 다만 보건ᄃᆡ 뉵가 ᄉᆞᆷ시에 쳔만 ᄉᆞᄅᆞᆷ의 머리 쥰동ᄒᆞ야 구물거리며 셔로 억ᄀᆡᄅᆞᆯ 견우어 피옹ᄎᆞ졔ᄒᆞ야 장ᄎᆞᆺ 무ᄉᆞᆷ 일이 잇ᄂᆞᆫ 쥴 아지 못ᄒᆞ고 피ᄎᆞ 셔로 무러도 다 망연부지ᄒᆞ더라 다ᄒᆡᆼ이 병졍이 나오지 아니ᄒᆞ야 오히려 심이 요란치 아니ᄒᆞ더니 이십이일에 {{du|파리}} ᄉᆞᄅᆞᆷ이 새벽에 이러 문을 열고 본즉 다만 여러 큰 길 어구에 긔치가 표양ᄒᆞ야 발셔 즁병을 둔찰ᄒᆞ고 ᄯᅩ 어림군이 왕ᄂᆡ ᄎᆡᆨ응ᄒᆞ니 이에 다 왕이 스ᄉᆞ로 위ᄐᆡᄒᆞᆫ ᄯᅳᆺ이 잇슴을 알고 곳 문을 닷고 져ᄌᆞᄅᆞᆯ 거두니 민심이 더욱 소란ᄒᆞ며 ᄯᅩ {{du|파리}}셩 외의 거민이 분분이 셩에 드러와 ᄉᆞᄅᆞᆷ이 만을스록 란이 더욱 치셩ᄒᆞ더니 이 날 일모시에 슈삼처 ᄇᆡᆨ셩이 각기 쥭목 잡긔ᄅᆞᆯ 가져다가 길 가온뎨 ᄊᆞ아 ᄎᆡᄎᆡᆨ을 삼고 ᄇᆡᆨ셩이 그 안에 업듸여 몸을 감초고 ᄯᅩ 가이 병마ᄅᆞᆯ 막을지라 홀연이 보ᄒᆞ되 긔계창이 발셔 창탈일공ᄒᆞᆫ 바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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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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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恤慎之心待幹僕必嚴而寬謹喪祭必孝而敬墳墓 不可以不重滛祀不可以不遠本業是務必無匱乏 之憂田租之收必安主佃之分崇儉朴懲忿怒家道 可得而守賑飢荒積陰德門閭可得而昌凡此善言 {{옛한글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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恤慎之心待幹僕必嚴而寬謹喪祭必孝而敬墳墓
不可以不重滛祀不可以不遠本業是務必無匱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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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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恤慎之心待幹僕必嚴而寬謹喪祭必孝而敬墳墓
不可以不重滛祀不可以不遠本業是務必無匱乏
之憂田租之收必安主佃之分崇儉朴懲忿怒家道
可得而守賑飢荒積陰德門閭可得而昌凡此善言
𣅜可警俗俾鋟榟傳之屬邑以示教焉爲吾民者滌
其習俗之汚新其日進之德遷善攺過不觸于刑則
風俗還淳理功以著庻無負<br/>
朝廷深仁厚澤㴠育天下之意云亞中大夫知松江府
事𠔥勸農事知渠堰事濟南路棣州王至和序<br/>
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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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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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孝父母友兄弟和室家 訓子孫睦宗𫞀厚親𧨏 恤鄰里慎交友待幹僕 謹䘮𥙊重墳墓逺海祀 務本業收田租崇儉朴 懲忿怒賑飢荒積隂徳 {{옛한글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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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父母友兄弟和室家
訓子孫睦宗𫞀厚親𧨏
恤鄰里慎交友待幹僕
謹䘮𥙊重墳墓逺海祀
務本業收田租崇儉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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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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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父母 友兄弟 和室家<br/>
訓子孫 睦宗𫞀 厚親誼<br/>
恤鄰里 慎交友 待幹僕<br/>
謹喪祭 重墳墓 遠滛祀<br/>
務本業 收田租 崇儉朴<br/>
懲忿怒 賑飢荒 積陰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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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I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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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고ᄃᆡ쇼셜 {{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 현슈문젼 상 {{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 현슈문젼 (1) {{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 뎨일 {{옛한글쪽 끝}} 朝鮮■■■■■■保轉本 {{옛한글쪽 시작}} 화셜ᄃᆡ송신종황뎨시졀의니부상셔현ᄐᆡᆨ지난용두각이학ᄉᆞ현왕손이오승상현범의ᅎᆞ라공의위인니관후장ᅎᆞ요공검인ᅎᆞᄒᆞ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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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I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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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한글쪽 시작}} 화셜ᄃᆡ송신종황뎨시졀의니부상셔현ᄐᆡᆨ지난용두각이학ᄉᆞ현왕손이오승상현범의ᅎᆞ라공의위인니관후장ᅎᆞ요공검인ᅎᆞᄒᆞ여만죄츄앙ᄒᆞ더라실즁의부인댱씨ᄂᆞᆫ셔북졀졔ᄉᆞ댱긔의네니ᅎᆞ용이슈려ᄒᆞ고ᄌᆡ덕이겸비ᄒᆞ여요조슉완이라공이즁ᄃᆡᄒᆞ고향당이칭찬ᄒᆞ며노복이공경ᄒᆞ더라비록가산은유여ᄒᆞ나슬하의일졈혈육이업ᄉᆞᄆᆡ부뷔ᄆᆡ양셔로ᄃᆡᄒᆞ여슬허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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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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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noinclude>써사람으게보ᄒᆞ니
{{절||三十四}} 오은고을이나아와예수를보고그디경ᄯᅥ나기를쳥ᄒᆞ다라
== 맛ᄃᆡ복음뎨구쟝 ==
{{절||一}} 예수ᄇᆡ에올나바다을건네여고향에닐으니
{{절||二}} 사람이바람증ᄒᆞᄂᆞᆫ쟈상에누은거슬머이고오거날예수그밋우물보고바람증ᄒᆞᄂᆞᆫ쟈게일오시ᄃᆡ쇼자야마음을노으라죄를샤한다ᄒᆞ니
{{절||三}} 션ᄇᆡ수인이마음에갈오ᄃᆡ이사람이참남ᄒᆞ다ᄒᆞ거날
{{절||四}} 예수그ᄯᅳᆺ을알고갈오시ᄃᆡ너의마음에엇지악을품나냐
{{절||五}} 죄를샤함과닐어ᄒᆡᆼᄒᆞᄂᆞᆫ거시어ᄂᆡ거시쉽갓나냐
{{절||六}} 다못너의도인자ᄯᅡᆼ에셔죄샤ᄒᆞ난권셰이스물알게{{복원|ᄒᆞ}}리라ᄒᆞ고이여바람증ᄒᆞᄂᆞᆫ쟈{{복원|게}}일오시ᄃᆡ닐어상을가지고집으로도라가라ᄒᆞᄆᆡ
{{절||七}} 곳닐어집으로도라가니
{{절||八}} 뭇사람이보고두려워하나님{{upe}}<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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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팔상록.djvu/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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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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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등이태자를호위하다가야반에가신곳을모르고창황망극하야궁문에대죄하엿더니왕이나오심을보고나아가왕ᄭᅦ머리를ᄯᅮ다리며복지주왈신등이왕명을밧자와태자를호위하옵더니야반에가신종젹을아지못하오니삼말삼을아뢰오릿가죄를쳥하나이다하고복디쳬읍하거늘왕이놀나낙담하여양구무언이러니눈물이비오듯하야용포를젹시더라이윽고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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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태자를호위하다가야반에가신곳을모르고창황망극하야궁문에대죄하엿더니왕이나오심을보고나아가왕ᄭᅦ머리를ᄯᅮ다리며복지주왈신등이왕명을밧자와태자를호위하옵더니야반에가신종젹을아지못하오니삼말삼을아뢰오릿가죄를쳥하나이다하고복디쳬읍하거늘왕이놀나낙담하여양구무언이러니눈물이비오듯하야용포를젹시더라이윽고탄식왈태자츌가함이분명하다간밤에몽사여차々々하더니태자는텬인니라인력으로못할바어니와말년에일자를어다탑々한애졍이금지옥엽갓더니이제태자를일흐니이마음을엇지위로하며종묘사직을뉘의게의탁하리요불상하고잔인한야슈의박명을더욱슬허하노라하고급히태자의침실에드러가니야슈하늘갓을바라보고눈물을ᄲᅮ려홍상을젹시다가왕이오심을보고창황이나와마질새셔로々무언이러니왕이야슈옥용션안에눈물어림을보고크게슬퍼하사왈태자츌성시에현부는아럿느냐만일아랏슬진댄임별에무엇이라하며어대로향하며어느ᄯᅢ에도라오마하더냐하고말삼을일우지못하야눈물을흐르거날왕의거동을보고슈색을감초며엄용대왈쳡의명도기박하와쳥춘에소쳔을이별하오니이이별이영별이라엇지슬푸지아니할오릿가만은태자는텬인이시라졔불이강림하사츌가하엿사오니엇지진셰부귀은애를생각하오릿가오래지아니하야졍각을증득하실진댄부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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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삼국사기/권50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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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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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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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x-wiki
==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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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x-wiki
==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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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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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삼국사기 (三國史記)
|부제=김유신 상(金庾信 上) (열전 제1권)
|저자=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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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 라이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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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삼국사기 (三國史記)
|부제=궁예 견훤(金庾信 上) (열전 제1권)
|저자=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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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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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삼국사기 (三國史記)
|부제=궁예 견훤(金庾信 上) (열전 제10권)
|저자=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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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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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궁예 견훤(弓裔 甄萱) (열전 제10권)
|저자=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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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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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삼국사기 (三國史記)
|부제=궁예 견훤(弓裔 甄萱) (열전 제10권)
|저자=김부식
|이전=[[삼국사기/창조리 개소문|창조리 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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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 라이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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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삼국사기 (三國史記)
|부제=궁예 견훤(弓裔 甄萱) (열전 제10권)
|저자=김부식
|이전=[[삼국사기/권49|창조리 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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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 ==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imagefont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imagefont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甄)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떼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6년(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천성(天成) 2년(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祖)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韓)씨의 도끼를 휘둘러,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면서 함께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더니, 요사이 볼모 둘이 다 죽음으로 인해서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를 잃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 오로지 이를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대에게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높이고 마음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이 조칙을 듣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주의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개가 서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결국 조롱당할 것이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imagefont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3년(서기 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반상서가 전해준 조서 한 통을 받았으며 겸하여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중국 사신이 보내온 조서와 편지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은 더하였지만 그대의 편지를 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번에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많이 도적의 무리에 붙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스스로 선린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과연 수천 리가 농업과 양잠을 일삼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듯이 곧장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모기새끼가 등에 산을 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으고 사죄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며 만약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령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어짊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이 둘렀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교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남쪽 사람들에게도 내가 크게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들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곤궁에 빠지고 왕궁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대의에 입각하여 주 왕실을 높이는 일에 누가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에 가까웠던가! 기회를 엿보아 한(漢)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 동탁(董卓)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극히 존귀한 왕에게 몸을 굽혀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게 하였다.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붙잡아 수레에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가득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桀), 주(紂)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극심하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다시 무기를 든 지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레와 같이 내달려 번개 같이 들이쳤으며 수전에서는 범처럼 치고 용처럼 뛰어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윤빈(尹邠)을 바닷가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鄒造)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근처에서는 수오(隨imagefont)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을 함락시키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淸州)를 깨뜨릴 때는 직심(直心) 등 너댓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으며,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속해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치고 공격하는 것이 이러하니 수복하는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기필코 저수(泜水)의 병영에서 장이(張耳)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종식시키고 세상은 길이 맑게 될 것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이 멀리 거친 이곳까지 감싸고 어진 마음이 깊어 어린 백성을 사랑하여,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난을 그치라고 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공손히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稇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imagefont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서기 929) 가을 7월,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장흥(長興) 3년(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금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군주를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 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서기 935) 10월 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천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만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頃)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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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과쳐자권속을다졔도함을입어타일에텬궁쾌락을바드리니복원셩상은심회를억제하고사과도히슬퍼마옵소셔인하야태자츌셩시에붓들고간하되노긔로일으든말과젼단향을주고가시든말삼을낫々치고하니왕이쳬읍왈부자는텬성지친이라잇고자하나형용이눈에암々하니슬프다늘근아비간쟝이엇지온젼하리요인하야방셩통곡하시니좌우졔신이일시에쳬읍하더라왕이야슈를위로하사왈홍안박명이엣날로붓터잇나니현부는관심하야노부를생각하라야슈이러나다시례배하더라이ᄯᅢ에태자를양육하던마하파사는마야부인의아우라슬피울다가왕ᄭᅦ고왈태자츌셩하엿스나멀니아니갓슬것이니여러쟝졸을보내여ᄯᅡ르게하소셔왕이왈내ᄯᅳᆺ도그러하나건쳑이능히일々에슈쳔리를행할지니쟝졸을보내여도밋지못할지라그러나사람을보내여소식을알것이로다하시고즉시우타등을명하야오백쟝슈를거나려즉시태자를ᄯᅡ라가다려오되만일삭발하엿거든두고도라오라하고사문직키든쟝졸을엄히경계하니라ᄯᅢ에차익이태자를이별하고눈물노도라오다가우타등을만나반기며태자셜산으로드러가신말삼을젼하니우타등이듯고ᄯᅩ한슬퍼하며즁도에머물너왕명을기다리더라차익이도라와태자의금포옥대와의관을밧드러올니고복디쳬읍왈국운이불행하사태자모든하날노더부러야만에츌셩하야발셔슈발을ᄭᅳᆫ코셜산으로드러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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