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5.0-wmf.7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초안 초안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번역:천자문 114 12396 392605 392398 2025-06-26T08:58:25Z 2406:5900:1001:2070:D5A9:2A25:EE5A:B0E8 鑑->鏡 392605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천자문 |저자 = [[저자:주흥사|주흥사]] |역자 = [[사용자:jjw|jjw]]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위키백과|천자문}}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2010년 8월 25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목각한 《천자문》이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width:200px; background:#eeffee;"| 원문 !background:#eeeeff;"| 번역 |- | {{더 크게|{{lang|zh|天地玄黃 宇宙洪荒}}}} |rowspan=2|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 |천지현황 우주홍황<ref>독음은 [http://handic.daum.net/dicha/view_top.do 다음한자사전] 을 따랐다. 두음법칙에 의해 독음이 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리(李)는 낱말의 앞에 올경우 이로 적었다.</ref> |- | {{더 크게|{{lang|zh|日月盈昃 辰宿列張}}}} |rowspan=2|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은 자리를 잡아 늘어서 있다. |- |일월영측 진수열장 |- | {{더 크게|{{lang|zh|寒來暑往 秋收冬藏}}}} |rowspan=2|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여 둔다. |- | 한래서왕 추수동장 |- | {{더 크게|{{lang|zh|閏餘成歲 律呂調陽}}}} |rowspan=2| 윤달을 더하여 한해를 이루고 가락을 맞추어 양기를 돋운다. |- | 윤여성세 율려조양 |- | {{더 크게|{{lang|zh|雲騰致雨 露結為霜}}}} |rowspan=2|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고 이슬은 얼어 서리가 된다. |- | 운등치우 노결위상 |- | {{더 크게|{{lang|zh|金生麗水 玉出崑岡}}}} |rowspan=2|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난다. |- | 금생여수 옥출곤강 |- | {{더 크게|{{lang|zh|劍號巨闕 珠稱夜光}}}} |rowspan=2| 검은 일컬어 거궐이요 구슬은 일컬어 야광이라. |- | 검호거궐 주칭야광 |- | {{더 크게|{{lang|zh|果珍李柰 菜重芥薑}}}} |rowspan=2| 과일 가운데 진미는 오얏과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 | 과진이내 채중개강 |- | {{더 크게|{{lang|zh|海鹹河淡 鱗潛羽翔}}}} |rowspan=2|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 | 해함하담 인잠우상 |- | {{더 크게|{{lang|zh|龍師火帝 鳥官人皇}}}} |rowspan=2| 복희씨<ref>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고 하며 용사는 복희의 별칭이다.</ref>, 신농씨<ref>화제 또는 염제(炎帝)는 신농씨의 별칭이다</ref>, 소호<ref>소호는 새 이름을 관직명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와 황제헌원<ref>황제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어 인황이란 별칭이 붙었다.</ref> |- | 용사화제 조관인황 |- | {{더 크게|{{lang|zh|始制文字 乃服衣裳}}}} |rowspan=2| 문자를 처음 짓고 옷을 지어 입혔지. |- | 시제문자 내복의상 |- | {{더 크게|{{lang|zh|推位讓國 有虞陶唐}}}} |rowspan=2| 자리를 미루며 나라를 물려주니 유우<ref>순임금의 이름이다.</ref> 와 도당<ref>우 임금의 이름이다.</ref> 이라. |- | 추위양국 유우도당 |- | {{더 크게|{{lang|zh|弔民伐罪 周發殷湯}}}} |rowspan=2| 백성을 돕고 죄를 벌하니 주나라 무왕<ref>발(發)은 주 무왕의 이름</ref> 과 은나라 탕왕이라. |- | 조민벌죄 주발은탕 |- | {{더 크게|{{lang|zh|坐朝問道 垂拱平章}}}} |rowspan=2| 조정에 앉아 도를 묻기에 두 손으로 문장을 올리니, |- | 좌조문도 수공평장 |- | {{더 크게|{{lang|zh|愛育黎首 臣伏戎羌}}}} |rowspan=2| 백성을 아끼고<ref>여수(黎首)는 검은 머리, 즉 관직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ref> 오랑캐가 신하로 복종하게 하소서. |- | 애육여수 신복융강 |- | {{더 크게|{{lang|zh|遐邇壹體 率賓歸王}}}} |rowspan=2|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가 되어 임금께 이끌려 따를 것입니다. |- | 하이일체 솔빈귀왕 |- | {{더 크게|{{lang|zh|鳴鳳在樹 白駒食場}}}} |rowspan=2|봉황은 나무에 내려 울고 흰망아지 풀을 뜯으니<ref>성군이 나면 봉황이 찾아와 울고 흰망아지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말함</ref> |- | 명봉재수 백구식장 |- | {{더 크게|{{lang|zh|化被草木 賴及萬方}}}} |rowspan=2| 덕화가 초목까지 미치고 만방에 퍼지리. |- | 화피초목 뇌급만방 |- | {{더 크게|{{lang|zh|蓋此身髮 四大五常}}}} |rowspan=2| 몸에 털이 덮힌 것과 같이 4대5상을 지키고<ref>4대는 하늘, 땅, 도(道), 임금. 5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ref> |- | 개차신발 사대오상 |- | {{더 크게|{{lang|zh|恭惟鞠養 豈敢毁傷}}}} |rowspan=2| 길러준 은혜를 공경하여 감히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 | 공유국양 기감훼상 |- | {{더 크게|{{lang|zh|女慕貞烈 男效才良}}}} |rowspan=2|여자는 정조를 따르고 남자는 재량을 본받아 |- | 여모정렬 남효재량 |- | {{더 크게|{{lang|zh|知過必改 得能莫忘}}}} |rowspan=2|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 | 지과필개 득능막망 |- | {{더 크게|{{lang|zh|罔談彼短 靡恃己長}}}} |rowspan=2| 다른이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마라 |- | 망담피단 미시기장 |- | {{더 크게|{{lang|zh|信使可覆 器欲難量}}}} |rowspan=2| 믿었던 장점이 뒤집힐 수 있고 다른 사람 기량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 신사가복 기욕난량 |- | {{더 크게|{{lang|zh|墨悲絲染 詩讚羔羊}}}} |rowspan=2| 이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탄식하였고<ref>묵자 소염론</ref> 시경은 고양을 찬송하였다.<ref>시경 고양편</ref> |- | 묵비사염 시찬고양 |- | {{더 크게|{{lang|zh|景行維賢 克念作聖}}}} |rowspan=2| 바르고 어진 것을 보고 행하여 지극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 | 경행유현 극념작성 |- | {{더 크게|{{lang|zh|德建名立 形端表正}}}} |rowspan=2|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면 바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 |- | 덕건명립 형단표정 |- | {{더 크게|{{lang|zh|空谷傳聲 虛堂習聽}}}} |rowspan=2| 빈 골짜기에 울리는 소리처럼 또한 빈집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 | 공곡전성 허당습청 |- | {{더 크게|{{lang|zh|禍因惡積 福緣善慶}}}} |rowspan=2| 화는 악행을 쌓은 것이 원인이요 복은 선행의 결과이다. |- | 화인악적 복연선경 |- | {{더 크게|{{lang|zh|尺璧非寶 寸陰是競}}}} |rowspan=2| 커다란 옥 구슬이<ref>여기서 벽은 완벽의 유래가 된 옥구슬을 말한다. 척(尺)과 촌(寸)은 길이의 단위이나 크고 작은 것으로 의역하였다.</ref> 보배가 아니니 작은 시간을 경주하여야 하여라. |- | 척벽비보 촌음시경 |- | {{더 크게|{{lang|zh|資父事君 曰嚴與敬}}}} |rowspan=2|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엄정하면서도 정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니 |- | 자부사군 왈엄여경 |- | {{더 크게|{{lang|zh|孝當竭力 忠則盡命}}}} |rowspan=2| 효도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 | 효당갈력 충즉진명 |- | {{더 크게|{{lang|zh|臨深履薄 夙興溫凊}}}} |rowspan=2| 깊은 곳을 만나도 살얼음 지나듯 조심하고 일찍 일어나 덥고 차가운지 살피는 것(이 효도하는 마음가짐이며) |- | 임심리박 숙흥온정 |- | {{더 크게|{{lang|zh|似蘭斯馨 如松之盛}}}} |rowspan=2|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굳센 것(이 충성하는 마음가짐이다.) |- | 사란사형 여송지성 |- | {{더 크게|{{lang|zh|川流不息 淵澄取映}}}} |rowspan=2| 냇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그림자를 비추듯 |- | 천류불식 연징취영 |- | {{더 크게|{{lang|zh|容止若思 言辭安定}}}} |rowspan=2| 얼굴은 생각과 같게 하고 말은 안정되게 하여야 한다. |- | 용지약사 언사안정 |- | {{더 크게|{{lang|zh|篤初誠美 愼終宜令}}}} |rowspan=2| 일을 시작할 때에 정성을 다하고 마무리 지을 때에도 신중히 하면 |- | 독초성미 신종의령 |- | {{더 크게|{{lang|zh|榮業所基 籍甚無竟}}}} |rowspan=2| 이를 바탕으로 이루는 업적이 끝없으리라. |- | 영업소기 적심무경 |- | {{더 크게|{{lang|zh|學優登仕 攝職從政}}}} |rowspan=2| 학문이 뛰어나 벼슬에 올라 직무를 맞고 정사를 돌볼 때에 |- | 학우등사 섭직종정 |- | {{더 크게|{{lang|zh|存以甘棠 去而益詠}}}} |rowspan=2|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ref>감당(甘棠)은 팥배나무이다. 주나라 소공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보고 공명 정대하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감당시를 읇었다. 시경 국풍편 감당</ref> |- | 존이감당 거이익영 |- | {{더 크게|{{lang|zh|樂殊貴賤 禮別尊卑}}}} |rowspan=2| 즐거움에 귀천이 없으나 예절에는 존비가 있으니 |- | 악수귀천 예별존비 |- | {{더 크게|{{lang|zh|上和下睦 夫唱婦隨}}}} |rowspan=2| 상하가 화목하고 부부가 원만하며<ref>사자성어 부창부수의 출전이다.</ref> |- | 상화하목 부창부수 |- | {{더 크게|{{lang|zh|外受傅訓 入奉母儀}}}} |rowspan=2| 밖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안에서는 어머니의 뜻을 받을며 |- | 외수부훈 입봉모의 |- | {{더 크게|{{lang|zh|諸姑伯叔 猶子比兒}}}} |rowspan=2| 모든 고모 삼촌의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 | 제고백숙 유자비아 |- | {{더 크게|{{lang|zh|孔懷兄弟 同氣連枝}}}} |rowspan=2| 형제는 서로 품어주니 같은 기운에서 나온 가지기 때문이고 |- | 공회형제 동기연지 |- | {{더 크게|{{lang|zh|交友投分 切磨箴規}}}} |rowspan=2| 벗을 사귈 때는 가려서 사귀고 규범을 염두에 두어 절제하여 |- | 교우투분 절마잠규 |- | {{더 크게|{{lang|zh|仁慈隱惻 造次弗離}}}} |rowspan=2|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여 떠나지 말아야 하고 |- | 인자은측 조차불리 |- | {{더 크게|{{lang|zh|節義廉退 顛沛匪虧}}}} |rowspan=2| 절의를 지키고 청렴히 물러나 이러한 (예의가) 이지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 | 절의염퇴 전패비휴 |- | {{더 크게|{{lang|zh|性靜情逸 心動神疲}}}} |rowspan=2| 성정이 고요하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하니 |- | 성정정일 심동신피 |- | {{더 크게|{{lang|zh|守眞志滿 逐物意移}}}} |rowspan=2| 참 뜻이 가득하도록 지키고 물욕을 멀리하라. |- | 수진지만 축물의이 |- | {{더 크게|{{lang|zh|堅持雅操 好爵自縻}}}} |rowspan=2| 우아하고 절개가 있으면 관작은 스스로 오게 되어 있다. |- | 견지아조 호작자미 |- | {{더 크게|{{lang|zh|都邑華夏 東西二京}}}} |rowspan=2| 화하<ref>중국의 별칭</ref> 의 도읍은 동서 2경이라 |- |도읍화하 동서이경 |- | {{더 크게|{{lang|zh|背邙面洛 浮渭據涇}}}} |rowspan=2|낙양은 북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마주하고 장안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는 구나. |- |배망면락 부위거경 |- | {{더 크게|{{lang|zh|宮殿盤鬱 樓觀飛驚}}}} |rowspan=2|궁전은 울창한 숲에 쌓였고 누각에 올라 놀라운 경치를 보며 |- |궁전반울 누관비경 |- | {{더 크게|{{lang|zh|圖寫禽獸 畵綵仙靈}}}} |rowspan=2|날짐승 들짐승을 그리니 신선 사는 그림이로구나. |- |도사금수 화채선령 |- | {{더 크게|{{lang|zh|丙舍傍啟 甲帳對楹}}}} |rowspan=2|병사<ref>궁전 내에 있는 건물들을 뜻하는 낱말</ref> 옆을 열어 갑장<ref>동방삭이 만들었다는 장막</ref> 이 기둥을 마주하게 하고 |- | 병사방계 갑장대영 |- | {{더 크게|{{lang|zh|肆筵設席 鼓瑟吹笙}}}} |rowspan=2|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고 비파를 뜯고 생황을 부니 |- |사연설석 고슬취생 |- | {{더 크게|{{lang|zh|升階納陛 弁轉疑星}}}} |rowspan=2| 계단을 올라 납폐하는 신료들은 별인듯 번쩍이고 |- |승계납폐 변전의성 |- | {{더 크게|{{lang|zh|右通廣內 左達承明}}}} |rowspan=2| 오른쪽은 광내로 통하고 왼쪽은 승명에 닿아<ref>광내와 승명은 모두 고대 중국 궁내의 관직처</ref> |- |우통광내 좌달승명 |- | {{더 크게|{{lang|zh|既集墳典 亦聚群英}}}} |rowspan=2| 이미 분전<ref>삼황오제 시절의 법률과 의전을 뜻한다.</ref> 을 모은 곳에 영웅들이 모였도다. |- |기집분전 역취군영 |- | {{더 크게|{{lang|zh|杜稾鍾隸 漆書壁經}}}} |rowspan=2| 두고<ref>초서를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ref> 와 종례<ref>예서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ref> 의 글 칠서<ref>대나무에 칠을 한 뒤 쓴 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ref> 와 벽경<ref>공자에게서 전해 왔다는 육경</ref> |- |두고종례 칠서벽경 |- | {{더 크게|{{lang|zh|府羅將相 路俠槐卿}}}} |rowspan=2|각 부에 장군과 재상이 있어 고관이 즐비하여 길이 좁다. |- |부라장상 노협괴경 |- | {{더 크게|{{lang|zh|戶封八縣 家給千兵}}}} |rowspan=2|여덟 고을을 봉지로 주고 천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니<ref>한고조의 논공행상을 가리킨다.</ref> |- |호봉팔현 가급천병 |- | {{더 크게|{{lang|zh|高冠陪輦 驅轂振纓}}}} |rowspan=2|높은 관을 쓰고 수레에올라 바퀴를 구르며 갓끈을 떨치는 구나. |- |고관배련 구곡진영 |- | {{더 크게|{{lang|zh|世祿侈富 車駕肥輕}}}} |rowspan=2| 대대로 받는 녹으로 부귀를 누리며 수레는 (제물로) 무겁고 가마는 가벼우니 |- |세록치부 거가비경 |- | {{더 크게|{{lang|zh|策功茂實 勒碑刻銘}}}} |rowspan=2|끝없이 쌓은 공적 비석에 세기는 구나. |- |책공무실 늑비각명 |- | {{더 크게|{{lang|zh|磻溪伊尹 佐時阿衡}}}} |rowspan=2| 반계의 (태공망)과 (탕왕을 도운) 이윤은 때가 도와 아형의 벼슬에 올랐고 |- |반계이윤 좌시아형 |- | {{더 크게|{{lang|zh|奄宅曲阜 微旦孰營}}}} |rowspan=2| 곡부에 궁전을 지은 것은 주공 단<ref>주문왕의 아우, 노나라의 시조</ref> 이 아니면 누가할 것인가 |- |엄택곡부 미단숙영 |- | {{더 크게|{{lang|zh|桓公匡合 濟弱扶傾}}}} |rowspan=2|환공은 제후를 널리 합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했지 |- |환공광합 제약부경 |- | {{더 크게|{{lang|zh|綺迴漢惠 說感武丁}}}} |rowspan=2|기리계<ref>한고조가 죽고 여희가 여씨 일족에서 황제를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장량은 기리계의 도움으로 혜제가 즉위하도록 하였다.</ref> 가 한 혜제를 회복시키고 부열이 무정을 감동시키듯.<ref>은 나라 무정이 부열에게 감동하여 선정을 배풀었다는 고사</ref> |- |기회한혜 설감무정 |- | {{더 크게|{{lang|zh|俊乂密勿 多士寔寧}}}} |rowspan=2|준걸과 예사가 모이니 참으로 평안하구나. |- |준예밀물 다사식녕 |- | {{더 크게|{{lang|zh|晉楚更霸 趙魏困橫}}}} |rowspan=2|진과 초가 다시 패자가 되고 조와위는 연횡으로 곤궁에 빠져 |- |진초갱패 조위곤횡 |- | {{더 크게|{{lang|zh|假途滅虢 踐土會盟}}}} |rowspan=2|진은 위계를 써 괵을 멸하고 천토에서 회맹하였고 |- |가도멸괵 천토회맹 |- | {{더 크게|{{lang|zh|何遵約法 韓弊煩刑}}}} |rowspan=2|어찌 (한고조의) 약법을 두고 한비자의 낡고 번잡한 형벌을 따를 것인가 |- |하준약법 한폐번형 |- | {{더 크게|{{lang|zh|起翦頗牧 用軍最精}}}} |rowspan=2|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은 군사를 가장 잘 다루었고 |- |기전파목 용군최정 |- | {{더 크게|{{lang|zh|宣威沙漠 馳譽丹青}}}} |rowspan=2|위엄을 사막에까지 떨치니 단청에 넣어 기리는 구나. |- |선위사막 치예단청 |- | {{더 크게|{{lang|zh|九州禹跡 百郡秦幷}}}} |rowspan=2| 하우씨가 구주를 두어 백군이 진에 병합되고 |- |구주우적 백군진병 |- | {{더 크게|{{lang|zh|嶽宗恆岱 禪主云亭}}}} |rowspan=2| 산중 으뜸은 항산과 태산이라 임금을 정하는 운정이 그곳에 있으며 |- |악종항대 선주운정 |- | {{더 크게|{{lang|zh|雁門紫塞 雞田赤城}}}} |rowspan=2| 안문관과 만리장성, 계전과 적성 |- |안문자새 계전적성 |- | {{더 크게|{{lang|zh|昆池碣石 鉅野洞庭}}}} |rowspan=2| 운남의 곤지와 부평의 갈석, 거야의 넓은 들판과 동정의 큰 호수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더 크게|{{lang|zh|曠遠緜邈 巖岫杳冥}}}} |rowspan=2|아득히 멀리 줄지어 있으니 아득하고 묘연하구나. |- |광원면막 암수묘명 |- | {{더 크게|{{lang|zh|治本於農 務茲稼穡}}}} |rowspan=2| 다스림의 근본은 농업이니 때를 맞추어 심고 거두어야 하리 |- |치본어농 무자가색 |- | {{더 크게|{{lang|zh|俶載南畝 我藝黍稷}}}} |rowspan=2|이제 남쪽 이랑을 일궈 나는 기장과 피를 가꾸어 |- |숙재남묘 아예서직 |- | {{더 크게|{{lang|zh|稅熟貢新 勸賞黜陟}}}} |rowspan=2| 익으면 세를 내고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 상을 권하고 (못된 자는) 내쫓으리라. |- |세숙공신 권상출척 |- | {{더 크게|{{lang|zh|孟軻敦素 史魚秉直}}}} |rowspan=2|맹자는 도타운 사람이었고 사어는 강직했으니 |- |맹가돈소 사어병직 |- | {{더 크게|{{lang|zh|庶幾中庸 勞謙謹敕}}}} |rowspan=2|중용을 으뜸으로 삼고 겸손에 힘쓰고 경계해야지 |- |서기중용 노겸근칙 |- | {{더 크게|{{lang|zh|聆音察理 鏡貌辨色}}}} |rowspan=2|들리는 소리 자세히 살피고 거울에 비치는 모양 꼼꼼히 구별하고 |- |영음찰리 감모변색 |- | {{더 크게|{{lang|zh|貽厥嘉猷 勉其祗植}}}} |rowspan=2|그 아름다움이 후세에 미치도록 그 덕을 쌓기를 부지런히 하며 |- |이궐가유 면기지식 |- | {{더 크게|{{lang|zh|省躬譏誡 寵增抗極}}}} |rowspan=2|몸을 살펴 나무라고 탓할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총애가 늘면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성궁기계 총증항극 |- | {{더 크게|{{lang|zh|殆辱近恥 林皋幸即}}}} |rowspan=2| 위태로운 치욕은 부끄러운 일에 의한 것이니 수풀과 언덕에 있는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 |태욕근치 임고행즉 |- | {{더 크게|{{lang|zh|兩疏見機 解組誰逼}}}} |rowspan=2| 양소<ref>한나라의 소광과 소수</ref> 는 기회를 보아 관복을 벗으니 누가 핍박하였으랴 |- |양소견기 해조수핍 |- | {{더 크게|{{lang|zh|索居閒處 沈默寂寥}}}} |rowspan=2|한가한 곳을 찾아 살며 고요히 살며 침묵한 채 |- |색거한처 침묵적요 |- | {{더 크게|{{lang|zh|求古尋論 散慮逍遙}}}} |rowspan=2|옛일을 두고 논장을 찾고 염려를 잊고 소요하니 |- |구고심론 산려소요 |- | {{더 크게|{{lang|zh|欣奏累遣 慼謝歡招}}}} |rowspan=2|기쁜 일은 알리고 누추한 것은 보내며 슬픈 일은 마다하고 기쁜 일을 환영하리 |- |흔주루견 척사환초 |- | {{더 크게|{{lang|zh|渠荷的歷 園莽抽條}}}} |rowspan=2|도랑에 핀 연꽃의 이력, 동산에 자란 풀 가지 |- |거하적력 원망추조 |- | {{더 크게|{{lang|zh|枇杷晚翠 梧桐早凋}}}} |rowspan=2|비파나무 만추에도 푸르른데 오동나무 일찍이 시들었고 |- |비파만취 오동조조 |- | {{더 크게|{{lang|zh|陳根委翳 落葉飄颻}}}} |rowspan=2|고목 뿌리 덮은 낙엽 바람에 날리니 |- |진근위예 낙엽표요 |- | {{더 크게|{{lang|zh|遊鵾獨運 凌摩絳霄}}}} |rowspan=2|댓닭 한 마리 홀로 해엄치며 노을진 하늘을 업수이 여기고 |- |유곤독운 능마강소 |- | {{더 크게|{{lang|zh|耽讀翫市 寓目囊箱}}}} |rowspan=2|(한나라 왕총은) 독서를 즐겨 한 번 보면 상자에 넣은 듯 (잊지 않았다지) |- |탐독완시 우목낭상 |- | {{더 크게|{{lang|zh|易輶攸畏 屬耳垣墻}}}} |rowspan=2|가벼이 경솔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담장에도 귀가 있다 하기 때문 |- |역유유외 속이원장 |- | {{더 크게|{{lang|zh|具膳飡飯 適口充腸}}}} |rowspan=2|반찬이나 저녁밥이야 먹고 배를 채우면 그만인 것 |- |구선손반 적구충장 |- | {{더 크게|{{lang|zh|飽飫烹宰 飢厭糟糠}}}} |rowspan=2|배부르면 재상의 요리도 물리게 되고 배 고프면 겨 지게미로도 족하니 |- |포어팽재 기염조강 |- | {{더 크게|{{lang|zh|親戚故舊 老少異糧}}}} |rowspan=2|친척이나 옛친구 노소에 따라 음식도 다를 밖에 |- |친척고구 노소이량 |- | {{더 크게|{{lang|zh|妾御績紡 侍巾帷房}}}} |rowspan=2|아내가 길쌈하여 어른 방에 수건을 받들고 |- |첩어적방 시건유방 |- | {{더 크게|{{lang|zh|紈扇圓潔 銀燭煒煌}}}} |rowspan=2|흰 비단으로 지은 부채 둥글고 깨끗하며 은촛대 불빛 밝으니 |- |환선원결 은촉위황 |- | {{더 크게|{{lang|zh|晝眠夕寐 藍笋象床}}}} |rowspan=2|낮에 자고 저녁에 또 자려 푸른 대로 코끼리 침상을 만들지 |- |주면석매 남순상상 |- | {{더 크게|{{lang|zh|絃歌酒讌 接盃舉觴}}}} |rowspan=2|거문거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주연을 열고 술잔을 들어 부딛히고 |- |현가주연 접배거상 |- | {{더 크게|{{lang|zh|矯手頓足 悅豫且康}}}} |rowspan=2|손을 들고 발을 움직여 춤추며 이처럼 평안함을 즐거워하세 |- |교수돈족 열예차강 |- | {{더 크게|{{lang|zh|嫡後嗣續 祭祀烝嘗}}}} |rowspan=2| 맏이는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어 |- |적후사속 제사증상 |- | {{더 크게|{{lang|zh|稽顙再拜 悚懼恐惶}}}} |rowspan=2|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여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계상재배 송구공황 |- | {{더 크게|{{lang|zh|牋牒簡要 顧答審詳}}}} |rowspan=2|편지는 간략히 요지만 쓰고 답신은 자세히 살펴서 하라. |- |전첩간요 고답심상 |- | {{더 크게|{{lang|zh|骸垢想浴 執熱願涼}}}} |rowspan=2|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생각이 나고 열이 차면 서늘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 |- |해구상욕 집열원량 |- | {{더 크게|{{lang|zh|驢騾犢特 駭躍超驤}}}} |rowspan=2|노새며 망아지, 숫송아지가 놀라뛰며 내달리듯 |- |여라독특 해약초양 |- | {{더 크게|{{lang|zh|誅斬賊盜 捕獲叛亡}}}} |rowspan=2|적도는 잡아 죽이고 배역자는 잡아들이리 |- |주참적도 포획반망 |- | {{더 크게|{{lang|zh|布射遼丸 嵇琴阮嘯}}}} |rowspan=2|여포는 활 잘 쏘았고 의료는 돌 잘 던졌으며 혜강은 금을 잘켰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지 |- |포사료환 혜금완소 |- | {{더 크게|{{lang|zh|恬筆倫紙 鈞巧任釣}}}} |rowspan=2|붓을 만든 건 몽념 종이를 만든 건 채륜, 마륜의 교묘한 솜씨<ref>마륜은 지남차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임공자의 낚시대<ref>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f> |- |염필윤지 균교임조 |- | {{더 크게|{{lang|zh|釋紛利俗 竝皆佳妙}}}} |rowspan=2|이러한 재주를 세상에 푸니 모두다 뛰어나고 신기하였다. |- |석분리속 병개가묘 |- | {{더 크게|{{lang|zh|毛施淑姿 工顰妍笑}}}} |rowspan=2|오나라 모타와 월나라 서시의 자태는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워라 |- |모시숙자 공빈연소 |- | {{더 크게|{{lang|zh|年矢每催 曦暉朗耀}}}} |rowspan=2| 세월은 살같이 언제나 제촉하나 햇빛 달빛은 밝게 빛나 |- |연시매최 희휘낭요 |- | {{더 크게|{{lang|zh|璇璣懸斡 晦魄環照}}}} |rowspan=2|천문을 보는 기계 매달려 돌듯 그믐이 지나 다시 보름이 되니 |- |선기현알 회백환조 |- | {{더 크게|{{lang|zh|指薪修祜 永綏吉劭}}}} |rowspan=2|손가락에 섶불을 단 듯 수양에 전념하면 영원토록 평안하고 길하리라. |- |지신수우 영수길소 |- | {{더 크게|{{lang|zh|矩步引領 俯仰廊廟}}}} |rowspan=2|반듯하게 걸으며 옷길을 끌고 사당에 엎드려 예의를 다하고 |- |구보인령 부앙낭묘 |- | {{더 크게|{{lang|zh|束帶矜莊 徘徊瞻眺}}}} |rowspan=2|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 |속대긍장 배회첨조 |- | {{더 크게|{{lang|zh|孤陋寡聞 愚蒙等誚}}}} |rowspan=2|(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루하고 들은 것 없어 어리석단 꾸짖음을 면치 못하리 |- |고루과문 우몽등초 |- | {{더 크게|{{lang|zh|謂語助者 焉哉乎也}}}} |rowspan=2|어조사에는 언재호야가 있다. |- |위어조자 언재호야 |} ==역주 == <references/> = 라이선스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PD-자작}} }} [[분류:한시]] lepjlik5oupw0u42yx7sqdcra02eomz 392606 392605 2025-06-26T09:41:59Z 2406:5900:1001:2070:D5A9:2A25:EE5A:B0E8 392606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천자문 |저자 = [[저자:주흥사|주흥사]] |역자 = [[사용자:jjw|jjw]]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위키백과|천자문}}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2010년 8월 25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목각한 《천자문》이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width:200px; background:#eeffee;"| 원문 !background:#eeeeff;"| 번역 |- | {{더 크게|{{lang|zh|天地玄黃 宇宙洪荒}}}} |rowspan=2|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 |천지현황 우주홍황<ref>독음은 [http://handic.daum.net/dicha/view_top.do 다음한자사전] 을 따랐다. 두음법칙에 의해 독음이 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리(李)는 낱말의 앞에 올경우 이로 적었다.</ref> |- | {{더 크게|{{lang|zh|日月盈昗 辰宿列張}}}} |rowspan=2|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은 자리를 잡아 늘어서 있다. |- |일월영측 진수열장 |- | {{더 크게|{{lang|zh|寒來暑往 秋收冬藏}}}} |rowspan=2|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여 둔다. |- | 한래서왕 추수동장 |- | {{더 크게|{{lang|zh|閏餘成歲 律呂調陽}}}} |rowspan=2| 윤달을 더하여 한해를 이루고 가락을 맞추어 양기를 돋운다. |- | 윤여성세 율려조양 |- | {{더 크게|{{lang|zh|雲騰致雨 露結為霜}}}} |rowspan=2|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고 이슬은 얼어 서리가 된다. |- | 운등치우 노결위상 |- | {{더 크게|{{lang|zh|金生麗水 玉出崑岡}}}} |rowspan=2|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난다. |- | 금생여수 옥출곤강 |- | {{더 크게|{{lang|zh|劍號巨闕 珠稱夜光}}}} |rowspan=2| 검은 일컬어 거궐이요 구슬은 일컬어 야광이라. |- | 검호거궐 주칭야광 |- | {{더 크게|{{lang|zh|果珍李柰 菜重芥薑}}}} |rowspan=2| 과일 가운데 진미는 오얏과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 | 과진이내 채중개강 |- | {{더 크게|{{lang|zh|海鹹河淡 鱗潛羽翔}}}} |rowspan=2|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 | 해함하담 인잠우상 |- | {{더 크게|{{lang|zh|龍師火帝 鳥官人皇}}}} |rowspan=2| 복희씨<ref>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고 하며 용사는 복희의 별칭이다.</ref>, 신농씨<ref>화제 또는 염제(炎帝)는 신농씨의 별칭이다</ref>, 소호<ref>소호는 새 이름을 관직명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와 황제헌원<ref>황제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어 인황이란 별칭이 붙었다.</ref> |- | 용사화제 조관인황 |- | {{더 크게|{{lang|zh|始制文字 乃服衣裳}}}} |rowspan=2| 문자를 처음 짓고 옷을 지어 입혔지. |- | 시제문자 내복의상 |- | {{더 크게|{{lang|zh|推位讓國 有虞陶唐}}}} |rowspan=2| 자리를 미루며 나라를 물려주니 유우<ref>순임금의 이름이다.</ref> 와 도당<ref>우 임금의 이름이다.</ref> 이라. |- | 추위양국 유우도당 |- | {{더 크게|{{lang|zh|弔民伐罪 周發殷湯}}}} |rowspan=2| 백성을 돕고 죄를 벌하니 주나라 무왕<ref>발(發)은 주 무왕의 이름</ref> 과 은나라 탕왕이라. |- | 조민벌죄 주발은탕 |- | {{더 크게|{{lang|zh|坐朝問道 垂拱平章}}}} |rowspan=2| 조정에 앉아 도를 묻기에 두 손으로 문장을 올리니, |- | 좌조문도 수공평장 |- | {{더 크게|{{lang|zh|愛育黎首 臣伏戎羌}}}} |rowspan=2| 백성을 아끼고<ref>여수(黎首)는 검은 머리, 즉 관직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ref> 오랑캐가 신하로 복종하게 하소서. |- | 애육여수 신복융강 |- | {{더 크게|{{lang|zh|遐邇壹體 率賓歸王}}}} |rowspan=2|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가 되어 임금께 이끌려 따를 것입니다. |- | 하이일체 솔빈귀왕 |- | {{더 크게|{{lang|zh|鳴鳳在樹 白駒食場}}}} |rowspan=2|봉황은 나무에 내려 울고 흰망아지 풀을 뜯으니<ref>성군이 나면 봉황이 찾아와 울고 흰망아지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말함</ref> |- | 명봉재수 백구식장 |- | {{더 크게|{{lang|zh|化被草木 賴及萬方}}}} |rowspan=2| 덕화가 초목까지 미치고 만방에 퍼지리. |- | 화피초목 뇌급만방 |- | {{더 크게|{{lang|zh|蓋此身髮 四大五常}}}} |rowspan=2| 몸에 털이 덮힌 것과 같이 4대5상을 지키고<ref>4대는 하늘, 땅, 도(道), 임금. 5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ref> |- | 개차신발 사대오상 |- | {{더 크게|{{lang|zh|恭惟鞠養 豈敢毁傷}}}} |rowspan=2| 길러준 은혜를 공경하여 감히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 | 공유국양 기감훼상 |- | {{더 크게|{{lang|zh|女慕貞烈 男效才良}}}} |rowspan=2|여자는 정조를 따르고 남자는 재량을 본받아 |- | 여모정렬 남효재량 |- | {{더 크게|{{lang|zh|知過必改 得能莫忘}}}} |rowspan=2|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 | 지과필개 득능막망 |- | {{더 크게|{{lang|zh|罔談彼短 靡恃己長}}}} |rowspan=2| 다른이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마라 |- | 망담피단 미시기장 |- | {{더 크게|{{lang|zh|信使可覆 器欲難量}}}} |rowspan=2| 믿었던 장점이 뒤집힐 수 있고 다른 사람 기량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 신사가복 기욕난량 |- | {{더 크게|{{lang|zh|墨悲絲染 詩讚羔羊}}}} |rowspan=2| 이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탄식하였고<ref>묵자 소염론</ref> 시경은 고양을 찬송하였다.<ref>시경 고양편</ref> |- | 묵비사염 시찬고양 |- | {{더 크게|{{lang|zh|景行維賢 克念作聖}}}} |rowspan=2| 바르고 어진 것을 보고 행하여 지극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 | 경행유현 극념작성 |- | {{더 크게|{{lang|zh|德建名立 形端表正}}}} |rowspan=2|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면 바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 |- | 덕건명립 형단표정 |- | {{더 크게|{{lang|zh|空谷傳聲 虛堂習聽}}}} |rowspan=2| 빈 골짜기에 울리는 소리처럼 또한 빈집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 | 공곡전성 허당습청 |- | {{더 크게|{{lang|zh|禍因惡積 福緣善慶}}}} |rowspan=2| 화는 악행을 쌓은 것이 원인이요 복은 선행의 결과이다. |- | 화인악적 복연선경 |- | {{더 크게|{{lang|zh|尺璧非寶 寸陰是競}}}} |rowspan=2| 커다란 옥 구슬이<ref>여기서 벽은 완벽의 유래가 된 옥구슬을 말한다. 척(尺)과 촌(寸)은 길이의 단위이나 크고 작은 것으로 의역하였다.</ref> 보배가 아니니 작은 시간을 경주하여야 하여라. |- | 척벽비보 촌음시경 |- | {{더 크게|{{lang|zh|資父事君 曰嚴與敬}}}} |rowspan=2|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엄정하면서도 정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니 |- | 자부사군 왈엄여경 |- | {{더 크게|{{lang|zh|孝當竭力 忠則盡命}}}} |rowspan=2| 효도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 | 효당갈력 충즉진명 |- | {{더 크게|{{lang|zh|臨深履薄 夙興溫凊}}}} |rowspan=2| 깊은 곳을 만나도 살얼음 지나듯 조심하고 일찍 일어나 덥고 차가운지 살피는 것(이 효도하는 마음가짐이며) |- | 임심리박 숙흥온정 |- | {{더 크게|{{lang|zh|似蘭斯馨 如松之盛}}}} |rowspan=2|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굳센 것(이 충성하는 마음가짐이다.) |- | 사란사형 여송지성 |- | {{더 크게|{{lang|zh|川流不息 淵澄取映}}}} |rowspan=2| 냇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그림자를 비추듯 |- | 천류불식 연징취영 |- | {{더 크게|{{lang|zh|容止若思 言辭安定}}}} |rowspan=2| 얼굴은 생각과 같게 하고 말은 안정되게 하여야 한다. |- | 용지약사 언사안정 |- | {{더 크게|{{lang|zh|篤初誠美 愼終宜令}}}} |rowspan=2| 일을 시작할 때에 정성을 다하고 마무리 지을 때에도 신중히 하면 |- | 독초성미 신종의령 |- | {{더 크게|{{lang|zh|榮業所基 籍甚無竟}}}} |rowspan=2| 이를 바탕으로 이루는 업적이 끝없으리라. |- | 영업소기 적심무경 |- | {{더 크게|{{lang|zh|學優登仕 攝職從政}}}} |rowspan=2| 학문이 뛰어나 벼슬에 올라 직무를 맞고 정사를 돌볼 때에 |- | 학우등사 섭직종정 |- | {{더 크게|{{lang|zh|存以甘棠 去而益詠}}}} |rowspan=2|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ref>감당(甘棠)은 팥배나무이다. 주나라 소공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보고 공명 정대하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감당시를 읇었다. 시경 국풍편 감당</ref> |- | 존이감당 거이익영 |- | {{더 크게|{{lang|zh|樂殊貴賤 禮別尊卑}}}} |rowspan=2| 즐거움에 귀천이 없으나 예절에는 존비가 있으니 |- | 악수귀천 예별존비 |- | {{더 크게|{{lang|zh|上和下睦 夫唱婦隨}}}} |rowspan=2| 상하가 화목하고 부부가 원만하며<ref>사자성어 부창부수의 출전이다.</ref> |- | 상화하목 부창부수 |- | {{더 크게|{{lang|zh|外受傅訓 入奉母儀}}}} |rowspan=2| 밖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안에서는 어머니의 뜻을 받을며 |- | 외수부훈 입봉모의 |- | {{더 크게|{{lang|zh|諸姑伯叔 猶子比兒}}}} |rowspan=2| 모든 고모 삼촌의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 | 제고백숙 유자비아 |- | {{더 크게|{{lang|zh|孔懷兄弟 同氣連枝}}}} |rowspan=2| 형제는 서로 품어주니 같은 기운에서 나온 가지기 때문이고 |- | 공회형제 동기연지 |- | {{더 크게|{{lang|zh|交友投分 切磨箴規}}}} |rowspan=2| 벗을 사귈 때는 가려서 사귀고 규범을 염두에 두어 절제하여 |- | 교우투분 절마잠규 |- | {{더 크게|{{lang|zh|仁慈隱惻 造次弗離}}}} |rowspan=2|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여 떠나지 말아야 하고 |- | 인자은측 조차불리 |- | {{더 크게|{{lang|zh|節義廉退 顛沛匪虧}}}} |rowspan=2| 절의를 지키고 청렴히 물러나 이러한 (예의가) 이지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 | 절의염퇴 전패비휴 |- | {{더 크게|{{lang|zh|性靜情逸 心動神疲}}}} |rowspan=2| 성정이 고요하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하니 |- | 성정정일 심동신피 |- | {{더 크게|{{lang|zh|守眞志滿 逐物意移}}}} |rowspan=2| 참 뜻이 가득하도록 지키고 물욕을 멀리하라. |- | 수진지만 축물의이 |- | {{더 크게|{{lang|zh|堅持雅操 好爵自縻}}}} |rowspan=2| 우아하고 절개가 있으면 관작은 스스로 오게 되어 있다. |- | 견지아조 호작자미 |- | {{더 크게|{{lang|zh|都邑華夏 東西二京}}}} |rowspan=2| 화하<ref>중국의 별칭</ref> 의 도읍은 동서 2경이라 |- |도읍화하 동서이경 |- | {{더 크게|{{lang|zh|背邙面洛 浮渭據涇}}}} |rowspan=2|낙양은 북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마주하고 장안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는 구나. |- |배망면락 부위거경 |- | {{더 크게|{{lang|zh|宮殿盤鬱 樓觀飛驚}}}} |rowspan=2|궁전은 울창한 숲에 쌓였고 누각에 올라 놀라운 경치를 보며 |- |궁전반울 누관비경 |- | {{더 크게|{{lang|zh|圖寫禽獸 畵綵仙靈}}}} |rowspan=2|날짐승 들짐승을 그리니 신선 사는 그림이로구나. |- |도사금수 화채선령 |- | {{더 크게|{{lang|zh|丙舍傍啟 甲帳對楹}}}} |rowspan=2|병사<ref>궁전 내에 있는 건물들을 뜻하는 낱말</ref> 옆을 열어 갑장<ref>동방삭이 만들었다는 장막</ref> 이 기둥을 마주하게 하고 |- | 병사방계 갑장대영 |- | {{더 크게|{{lang|zh|肆筵設席 鼓瑟吹笙}}}} |rowspan=2|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고 비파를 뜯고 생황을 부니 |- |사연설석 고슬취생 |- | {{더 크게|{{lang|zh|升階納陛 弁轉疑星}}}} |rowspan=2| 계단을 올라 납폐하는 신료들은 별인듯 번쩍이고 |- |승계납폐 변전의성 |- | {{더 크게|{{lang|zh|右通廣內 左達承明}}}} |rowspan=2| 오른쪽은 광내로 통하고 왼쪽은 승명에 닿아<ref>광내와 승명은 모두 고대 중국 궁내의 관직처</ref> |- |우통광내 좌달승명 |- | {{더 크게|{{lang|zh|既集墳典 亦聚群英}}}} |rowspan=2| 이미 분전<ref>삼황오제 시절의 법률과 의전을 뜻한다.</ref> 을 모은 곳에 영웅들이 모였도다. |- |기집분전 역취군영 |- | {{더 크게|{{lang|zh|杜稾鍾隸 漆書壁經}}}} |rowspan=2| 두고<ref>초서를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ref> 와 종례<ref>예서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ref> 의 글 칠서<ref>대나무에 칠을 한 뒤 쓴 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ref> 와 벽경<ref>공자에게서 전해 왔다는 육경</ref> |- |두고종례 칠서벽경 |- | {{더 크게|{{lang|zh|府羅將相 路俠槐卿}}}} |rowspan=2|각 부에 장군과 재상이 있어 고관이 즐비하여 길이 좁다. |- |부라장상 노협괴경 |- | {{더 크게|{{lang|zh|戶封八縣 家給千兵}}}} |rowspan=2|여덟 고을을 봉지로 주고 천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니<ref>한고조의 논공행상을 가리킨다.</ref> |- |호봉팔현 가급천병 |- | {{더 크게|{{lang|zh|高冠陪輦 驅轂振纓}}}} |rowspan=2|높은 관을 쓰고 수레에올라 바퀴를 구르며 갓끈을 떨치는 구나. |- |고관배련 구곡진영 |- | {{더 크게|{{lang|zh|世祿侈富 車駕肥輕}}}} |rowspan=2| 대대로 받는 녹으로 부귀를 누리며 수레는 (제물로) 무겁고 가마는 가벼우니 |- |세록치부 거가비경 |- | {{더 크게|{{lang|zh|策功茂實 勒碑刻銘}}}} |rowspan=2|끝없이 쌓은 공적 비석에 세기는 구나. |- |책공무실 늑비각명 |- | {{더 크게|{{lang|zh|磻溪伊尹 佐時阿衡}}}} |rowspan=2| 반계의 (태공망)과 (탕왕을 도운) 이윤은 때가 도와 아형의 벼슬에 올랐고 |- |반계이윤 좌시아형 |- | {{더 크게|{{lang|zh|奄宅曲阜 微旦孰營}}}} |rowspan=2| 곡부에 궁전을 지은 것은 주공 단<ref>주문왕의 아우, 노나라의 시조</ref> 이 아니면 누가할 것인가 |- |엄택곡부 미단숙영 |- | {{더 크게|{{lang|zh|桓公匡合 濟弱扶傾}}}} |rowspan=2|환공은 제후를 널리 합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했지 |- |환공광합 제약부경 |- | {{더 크게|{{lang|zh|綺迴漢惠 說感武丁}}}} |rowspan=2|기리계<ref>한고조가 죽고 여희가 여씨 일족에서 황제를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장량은 기리계의 도움으로 혜제가 즉위하도록 하였다.</ref> 가 한 혜제를 회복시키고 부열이 무정을 감동시키듯.<ref>은 나라 무정이 부열에게 감동하여 선정을 배풀었다는 고사</ref> |- |기회한혜 설감무정 |- | {{더 크게|{{lang|zh|俊乂密勿 多士寔寧}}}} |rowspan=2|준걸과 예사가 모이니 참으로 평안하구나. |- |준예밀물 다사식녕 |- | {{더 크게|{{lang|zh|晉楚更霸 趙魏困橫}}}} |rowspan=2|진과 초가 다시 패자가 되고 조와위는 연횡으로 곤궁에 빠져 |- |진초갱패 조위곤횡 |- | {{더 크게|{{lang|zh|假途滅虢 踐土會盟}}}} |rowspan=2|진은 위계를 써 괵을 멸하고 천토에서 회맹하였고 |- |가도멸괵 천토회맹 |- | {{더 크게|{{lang|zh|何遵約法 韓弊煩刑}}}} |rowspan=2|어찌 (한고조의) 약법을 두고 한비자의 낡고 번잡한 형벌을 따를 것인가 |- |하준약법 한폐번형 |- | {{더 크게|{{lang|zh|起翦頗牧 用軍最精}}}} |rowspan=2|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은 군사를 가장 잘 다루었고 |- |기전파목 용군최정 |- | {{더 크게|{{lang|zh|宣威沙漠 馳譽丹青}}}} |rowspan=2|위엄을 사막에까지 떨치니 단청에 넣어 기리는 구나. |- |선위사막 치예단청 |- | {{더 크게|{{lang|zh|九州禹跡 百郡秦幷}}}} |rowspan=2| 하우씨가 구주를 두어 백군이 진에 병합되고 |- |구주우적 백군진병 |- | {{더 크게|{{lang|zh|嶽宗恆岱 禪主云亭}}}} |rowspan=2| 산중 으뜸은 항산과 태산이라 임금을 정하는 운정이 그곳에 있으며 |- |악종항대 선주운정 |- | {{더 크게|{{lang|zh|雁門紫塞 雞田赤城}}}} |rowspan=2| 안문관과 만리장성, 계전과 적성 |- |안문자새 계전적성 |- | {{더 크게|{{lang|zh|昆池碣石 鉅野洞庭}}}} |rowspan=2| 운남의 곤지와 부평의 갈석, 거야의 넓은 들판과 동정의 큰 호수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더 크게|{{lang|zh|曠遠緜邈 巖岫杳冥}}}} |rowspan=2|아득히 멀리 줄지어 있으니 아득하고 묘연하구나. |- |광원면막 암수묘명 |- | {{더 크게|{{lang|zh|治本於農 務茲稼穡}}}} |rowspan=2| 다스림의 근본은 농업이니 때를 맞추어 심고 거두어야 하리 |- |치본어농 무자가색 |- | {{더 크게|{{lang|zh|俶載南畝 我藝黍稷}}}} |rowspan=2|이제 남쪽 이랑을 일궈 나는 기장과 피를 가꾸어 |- |숙재남묘 아예서직 |- | {{더 크게|{{lang|zh|稅熟貢新 勸賞黜陟}}}} |rowspan=2| 익으면 세를 내고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 상을 권하고 (못된 자는) 내쫓으리라. |- |세숙공신 권상출척 |- | {{더 크게|{{lang|zh|孟軻敦素 史魚秉直}}}} |rowspan=2|맹자는 도타운 사람이었고 사어는 강직했으니 |- |맹가돈소 사어병직 |- | {{더 크게|{{lang|zh|庶幾中庸 勞謙謹敕}}}} |rowspan=2|중용을 으뜸으로 삼고 겸손에 힘쓰고 경계해야지 |- |서기중용 노겸근칙 |- | {{더 크게|{{lang|zh|聆音察理 鏡貌辨色}}}} |rowspan=2|들리는 소리 자세히 살피고 거울에 비치는 모양 꼼꼼히 구별하고 |- |영음찰리 감모변색 |- | {{더 크게|{{lang|zh|貽厥嘉猷 勉其祗植}}}} |rowspan=2|그 아름다움이 후세에 미치도록 그 덕을 쌓기를 부지런히 하며 |- |이궐가유 면기지식 |- | {{더 크게|{{lang|zh|省躬譏誡 寵增抗極}}}} |rowspan=2|몸을 살펴 나무라고 탓할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총애가 늘면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성궁기계 총증항극 |- | {{더 크게|{{lang|zh|殆辱近恥 林皋幸即}}}} |rowspan=2| 위태로운 치욕은 부끄러운 일에 의한 것이니 수풀과 언덕에 있는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 |태욕근치 임고행즉 |- | {{더 크게|{{lang|zh|兩疏見機 解組誰逼}}}} |rowspan=2| 양소<ref>한나라의 소광과 소수</ref> 는 기회를 보아 관복을 벗으니 누가 핍박하였으랴 |- |양소견기 해조수핍 |- | {{더 크게|{{lang|zh|索居閒處 沈默寂寥}}}} |rowspan=2|한가한 곳을 찾아 살며 고요히 살며 침묵한 채 |- |색거한처 침묵적요 |- | {{더 크게|{{lang|zh|求古尋論 散慮逍遙}}}} |rowspan=2|옛일을 두고 논장을 찾고 염려를 잊고 소요하니 |- |구고심론 산려소요 |- | {{더 크게|{{lang|zh|欣奏累遣 慼謝歡招}}}} |rowspan=2|기쁜 일은 알리고 누추한 것은 보내며 슬픈 일은 마다하고 기쁜 일을 환영하리 |- |흔주루견 척사환초 |- | {{더 크게|{{lang|zh|渠荷的歷 園莽抽條}}}} |rowspan=2|도랑에 핀 연꽃의 이력, 동산에 자란 풀 가지 |- |거하적력 원망추조 |- | {{더 크게|{{lang|zh|枇杷晚翠 梧桐早凋}}}} |rowspan=2|비파나무 만추에도 푸르른데 오동나무 일찍이 시들었고 |- |비파만취 오동조조 |- | {{더 크게|{{lang|zh|陳根委翳 落葉飄颻}}}} |rowspan=2|고목 뿌리 덮은 낙엽 바람에 날리니 |- |진근위예 낙엽표요 |- | {{더 크게|{{lang|zh|遊鵾獨運 凌摩絳霄}}}} |rowspan=2|댓닭 한 마리 홀로 해엄치며 노을진 하늘을 업수이 여기고 |- |유곤독운 능마강소 |- | {{더 크게|{{lang|zh|耽讀翫市 寓目囊箱}}}} |rowspan=2|(한나라 왕총은) 독서를 즐겨 한 번 보면 상자에 넣은 듯 (잊지 않았다지) |- |탐독완시 우목낭상 |- | {{더 크게|{{lang|zh|易輶攸畏 屬耳垣墻}}}} |rowspan=2|가벼이 경솔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담장에도 귀가 있다 하기 때문 |- |역유유외 속이원장 |- | {{더 크게|{{lang|zh|具膳飡飯 適口充腸}}}} |rowspan=2|반찬이나 저녁밥이야 먹고 배를 채우면 그만인 것 |- |구선손반 적구충장 |- | {{더 크게|{{lang|zh|飽飫烹宰 飢厭糟糠}}}} |rowspan=2|배부르면 재상의 요리도 물리게 되고 배 고프면 겨 지게미로도 족하니 |- |포어팽재 기염조강 |- | {{더 크게|{{lang|zh|親戚故舊 老少異糧}}}} |rowspan=2|친척이나 옛친구 노소에 따라 음식도 다를 밖에 |- |친척고구 노소이량 |- | {{더 크게|{{lang|zh|妾御績紡 侍巾帷房}}}} |rowspan=2|아내가 길쌈하여 어른 방에 수건을 받들고 |- |첩어적방 시건유방 |- | {{더 크게|{{lang|zh|紈扇圓潔 銀燭煒煌}}}} |rowspan=2|흰 비단으로 지은 부채 둥글고 깨끗하며 은촛대 불빛 밝으니 |- |환선원결 은촉위황 |- | {{더 크게|{{lang|zh|晝眠夕寐 藍笋象床}}}} |rowspan=2|낮에 자고 저녁에 또 자려 푸른 대로 코끼리 침상을 만들지 |- |주면석매 남순상상 |- | {{더 크게|{{lang|zh|絃歌酒讌 接盃舉觴}}}} |rowspan=2|거문거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주연을 열고 술잔을 들어 부딛히고 |- |현가주연 접배거상 |- | {{더 크게|{{lang|zh|矯手頓足 悅豫且康}}}} |rowspan=2|손을 들고 발을 움직여 춤추며 이처럼 평안함을 즐거워하세 |- |교수돈족 열예차강 |- | {{더 크게|{{lang|zh|嫡後嗣續 祭祀烝嘗}}}} |rowspan=2| 맏이는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어 |- |적후사속 제사증상 |- | {{더 크게|{{lang|zh|稽顙再拜 悚懼恐惶}}}} |rowspan=2|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여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계상재배 송구공황 |- | {{더 크게|{{lang|zh|牋牒簡要 顧答審詳}}}} |rowspan=2|편지는 간략히 요지만 쓰고 답신은 자세히 살펴서 하라. |- |전첩간요 고답심상 |- | {{더 크게|{{lang|zh|骸垢想浴 執熱願涼}}}} |rowspan=2|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생각이 나고 열이 차면 서늘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 |- |해구상욕 집열원량 |- | {{더 크게|{{lang|zh|驢騾犢特 駭躍超驤}}}} |rowspan=2|노새며 망아지, 숫송아지가 놀라뛰며 내달리듯 |- |여라독특 해약초양 |- | {{더 크게|{{lang|zh|誅斬賊盜 捕獲叛亡}}}} |rowspan=2|적도는 잡아 죽이고 배역자는 잡아들이리 |- |주참적도 포획반망 |- | {{더 크게|{{lang|zh|布射遼丸 嵇琴阮嘯}}}} |rowspan=2|여포는 활 잘 쏘았고 의료는 돌 잘 던졌으며 혜강은 금을 잘켰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지 |- |포사료환 혜금완소 |- | {{더 크게|{{lang|zh|恬筆倫紙 鈞巧任釣}}}} |rowspan=2|붓을 만든 건 몽념 종이를 만든 건 채륜, 마륜의 교묘한 솜씨<ref>마륜은 지남차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임공자의 낚시대<ref>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f> |- |염필윤지 균교임조 |- | {{더 크게|{{lang|zh|釋紛利俗 竝皆佳妙}}}} |rowspan=2|이러한 재주를 세상에 푸니 모두다 뛰어나고 신기하였다. |- |석분리속 병개가묘 |- | {{더 크게|{{lang|zh|毛施淑姿 工顰妍笑}}}} |rowspan=2|오나라 모타와 월나라 서시의 자태는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워라 |- |모시숙자 공빈연소 |- | {{더 크게|{{lang|zh|年矢每催 曦暉朗耀}}}} |rowspan=2| 세월은 살같이 언제나 제촉하나 햇빛 달빛은 밝게 빛나 |- |연시매최 희휘낭요 |- | {{더 크게|{{lang|zh|璇璣懸斡 晦魄環照}}}} |rowspan=2|천문을 보는 기계 매달려 돌듯 그믐이 지나 다시 보름이 되니 |- |선기현알 회백환조 |- | {{더 크게|{{lang|zh|指薪修祜 永綏吉劭}}}} |rowspan=2|손가락에 섶불을 단 듯 수양에 전념하면 영원토록 평안하고 길하리라. |- |지신수우 영수길소 |- | {{더 크게|{{lang|zh|矩步引領 俯仰廊廟}}}} |rowspan=2|반듯하게 걸으며 옷길을 끌고 사당에 엎드려 예의를 다하고 |- |구보인령 부앙낭묘 |- | {{더 크게|{{lang|zh|束帶矜莊 徘徊瞻眺}}}} |rowspan=2|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 |속대긍장 배회첨조 |- | {{더 크게|{{lang|zh|孤陋寡聞 愚蒙等誚}}}} |rowspan=2|(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루하고 들은 것 없어 어리석단 꾸짖음을 면치 못하리 |- |고루과문 우몽등초 |- | {{더 크게|{{lang|zh|謂語助者 焉哉乎也}}}} |rowspan=2|어조사에는 언재호야가 있다. |- |위어조자 언재호야 |} ==역주 == <references/> = 라이선스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PD-자작}} }} [[분류:한시]] n6npql6uknr7kjifqbo7wvx5717e8wz 392607 392606 2025-06-26T09:42:33Z 2406:5900:1001:2070:D5A9:2A25:EE5A:B0E8 392607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천자문 |저자 = [[저자:주흥사|주흥사]] |역자 = [[사용자:jjw|jjw]]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위키백과|천자문}}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2010년 8월 25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목각한 《천자문》이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width:200px; background:#eeffee;"| 원문 !background:#eeeeff;"| 번역 |- | {{더 크게|{{lang|zh|天地玄黃 宇宙洪荒}}}} |rowspan=2|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 |천지현황 우주홍황<ref>독음은 [http://handic.daum.net/dicha/view_top.do 다음한자사전] 을 따랐다. 두음법칙에 의해 독음이 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리(李)는 낱말의 앞에 올경우 이로 적었다.</ref> |- | {{더 크게|{{lang|zh|日月盈昃 辰宿列張}}}} |rowspan=2|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은 자리를 잡아 늘어서 있다. |- |일월영측 진수열장 |- | {{더 크게|{{lang|zh|寒來暑往 秋收冬藏}}}} |rowspan=2|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여 둔다. |- | 한래서왕 추수동장 |- | {{더 크게|{{lang|zh|閏餘成歲 律呂調陽}}}} |rowspan=2| 윤달을 더하여 한해를 이루고 가락을 맞추어 양기를 돋운다. |- | 윤여성세 율려조양 |- | {{더 크게|{{lang|zh|雲騰致雨 露結為霜}}}} |rowspan=2|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고 이슬은 얼어 서리가 된다. |- | 운등치우 노결위상 |- | {{더 크게|{{lang|zh|金生麗水 玉出崑岡}}}} |rowspan=2|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난다. |- | 금생여수 옥출곤강 |- | {{더 크게|{{lang|zh|劍號巨闕 珠稱夜光}}}} |rowspan=2| 검은 일컬어 거궐이요 구슬은 일컬어 야광이라. |- | 검호거궐 주칭야광 |- | {{더 크게|{{lang|zh|果珍李柰 菜重芥薑}}}} |rowspan=2| 과일 가운데 진미는 오얏과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 | 과진이내 채중개강 |- | {{더 크게|{{lang|zh|海鹹河淡 鱗潛羽翔}}}} |rowspan=2|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 | 해함하담 인잠우상 |- | {{더 크게|{{lang|zh|龍師火帝 鳥官人皇}}}} |rowspan=2| 복희씨<ref>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고 하며 용사는 복희의 별칭이다.</ref>, 신농씨<ref>화제 또는 염제(炎帝)는 신농씨의 별칭이다</ref>, 소호<ref>소호는 새 이름을 관직명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와 황제헌원<ref>황제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어 인황이란 별칭이 붙었다.</ref> |- | 용사화제 조관인황 |- | {{더 크게|{{lang|zh|始制文字 乃服衣裳}}}} |rowspan=2| 문자를 처음 짓고 옷을 지어 입혔지. |- | 시제문자 내복의상 |- | {{더 크게|{{lang|zh|推位讓國 有虞陶唐}}}} |rowspan=2| 자리를 미루며 나라를 물려주니 유우<ref>순임금의 이름이다.</ref> 와 도당<ref>우 임금의 이름이다.</ref> 이라. |- | 추위양국 유우도당 |- | {{더 크게|{{lang|zh|弔民伐罪 周發殷湯}}}} |rowspan=2| 백성을 돕고 죄를 벌하니 주나라 무왕<ref>발(發)은 주 무왕의 이름</ref> 과 은나라 탕왕이라. |- | 조민벌죄 주발은탕 |- | {{더 크게|{{lang|zh|坐朝問道 垂拱平章}}}} |rowspan=2| 조정에 앉아 도를 묻기에 두 손으로 문장을 올리니, |- | 좌조문도 수공평장 |- | {{더 크게|{{lang|zh|愛育黎首 臣伏戎羌}}}} |rowspan=2| 백성을 아끼고<ref>여수(黎首)는 검은 머리, 즉 관직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ref> 오랑캐가 신하로 복종하게 하소서. |- | 애육여수 신복융강 |- | {{더 크게|{{lang|zh|遐邇壹體 率賓歸王}}}} |rowspan=2|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가 되어 임금께 이끌려 따를 것입니다. |- | 하이일체 솔빈귀왕 |- | {{더 크게|{{lang|zh|鳴鳳在樹 白駒食場}}}} |rowspan=2|봉황은 나무에 내려 울고 흰망아지 풀을 뜯으니<ref>성군이 나면 봉황이 찾아와 울고 흰망아지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말함</ref> |- | 명봉재수 백구식장 |- | {{더 크게|{{lang|zh|化被草木 賴及萬方}}}} |rowspan=2| 덕화가 초목까지 미치고 만방에 퍼지리. |- | 화피초목 뇌급만방 |- | {{더 크게|{{lang|zh|蓋此身髮 四大五常}}}} |rowspan=2| 몸에 털이 덮힌 것과 같이 4대5상을 지키고<ref>4대는 하늘, 땅, 도(道), 임금. 5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ref> |- | 개차신발 사대오상 |- | {{더 크게|{{lang|zh|恭惟鞠養 豈敢毁傷}}}} |rowspan=2| 길러준 은혜를 공경하여 감히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 | 공유국양 기감훼상 |- | {{더 크게|{{lang|zh|女慕貞烈 男效才良}}}} |rowspan=2|여자는 정조를 따르고 남자는 재량을 본받아 |- | 여모정렬 남효재량 |- | {{더 크게|{{lang|zh|知過必改 得能莫忘}}}} |rowspan=2|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 | 지과필개 득능막망 |- | {{더 크게|{{lang|zh|罔談彼短 靡恃己長}}}} |rowspan=2| 다른이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마라 |- | 망담피단 미시기장 |- | {{더 크게|{{lang|zh|信使可覆 器欲難量}}}} |rowspan=2| 믿었던 장점이 뒤집힐 수 있고 다른 사람 기량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 신사가복 기욕난량 |- | {{더 크게|{{lang|zh|墨悲絲染 詩讚羔羊}}}} |rowspan=2| 이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탄식하였고<ref>묵자 소염론</ref> 시경은 고양을 찬송하였다.<ref>시경 고양편</ref> |- | 묵비사염 시찬고양 |- | {{더 크게|{{lang|zh|景行維賢 克念作聖}}}} |rowspan=2| 바르고 어진 것을 보고 행하여 지극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 | 경행유현 극념작성 |- | {{더 크게|{{lang|zh|德建名立 形端表正}}}} |rowspan=2|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면 바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 |- | 덕건명립 형단표정 |- | {{더 크게|{{lang|zh|空谷傳聲 虛堂習聽}}}} |rowspan=2| 빈 골짜기에 울리는 소리처럼 또한 빈집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 | 공곡전성 허당습청 |- | {{더 크게|{{lang|zh|禍因惡積 福緣善慶}}}} |rowspan=2| 화는 악행을 쌓은 것이 원인이요 복은 선행의 결과이다. |- | 화인악적 복연선경 |- | {{더 크게|{{lang|zh|尺璧非寶 寸陰是競}}}} |rowspan=2| 커다란 옥 구슬이<ref>여기서 벽은 완벽의 유래가 된 옥구슬을 말한다. 척(尺)과 촌(寸)은 길이의 단위이나 크고 작은 것으로 의역하였다.</ref> 보배가 아니니 작은 시간을 경주하여야 하여라. |- | 척벽비보 촌음시경 |- | {{더 크게|{{lang|zh|資父事君 曰嚴與敬}}}} |rowspan=2|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엄정하면서도 정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니 |- | 자부사군 왈엄여경 |- | {{더 크게|{{lang|zh|孝當竭力 忠則盡命}}}} |rowspan=2| 효도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 | 효당갈력 충즉진명 |- | {{더 크게|{{lang|zh|臨深履薄 夙興溫凊}}}} |rowspan=2| 깊은 곳을 만나도 살얼음 지나듯 조심하고 일찍 일어나 덥고 차가운지 살피는 것(이 효도하는 마음가짐이며) |- | 임심리박 숙흥온정 |- | {{더 크게|{{lang|zh|似蘭斯馨 如松之盛}}}} |rowspan=2|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굳센 것(이 충성하는 마음가짐이다.) |- | 사란사형 여송지성 |- | {{더 크게|{{lang|zh|川流不息 淵澄取映}}}} |rowspan=2| 냇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그림자를 비추듯 |- | 천류불식 연징취영 |- | {{더 크게|{{lang|zh|容止若思 言辭安定}}}} |rowspan=2| 얼굴은 생각과 같게 하고 말은 안정되게 하여야 한다. |- | 용지약사 언사안정 |- | {{더 크게|{{lang|zh|篤初誠美 愼終宜令}}}} |rowspan=2| 일을 시작할 때에 정성을 다하고 마무리 지을 때에도 신중히 하면 |- | 독초성미 신종의령 |- | {{더 크게|{{lang|zh|榮業所基 籍甚無竟}}}} |rowspan=2| 이를 바탕으로 이루는 업적이 끝없으리라. |- | 영업소기 적심무경 |- | {{더 크게|{{lang|zh|學優登仕 攝職從政}}}} |rowspan=2| 학문이 뛰어나 벼슬에 올라 직무를 맞고 정사를 돌볼 때에 |- | 학우등사 섭직종정 |- | {{더 크게|{{lang|zh|存以甘棠 去而益詠}}}} |rowspan=2|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ref>감당(甘棠)은 팥배나무이다. 주나라 소공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보고 공명 정대하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감당시를 읇었다. 시경 국풍편 감당</ref> |- | 존이감당 거이익영 |- | {{더 크게|{{lang|zh|樂殊貴賤 禮別尊卑}}}} |rowspan=2| 즐거움에 귀천이 없으나 예절에는 존비가 있으니 |- | 악수귀천 예별존비 |- | {{더 크게|{{lang|zh|上和下睦 夫唱婦隨}}}} |rowspan=2| 상하가 화목하고 부부가 원만하며<ref>사자성어 부창부수의 출전이다.</ref> |- | 상화하목 부창부수 |- | {{더 크게|{{lang|zh|外受傅訓 入奉母儀}}}} |rowspan=2| 밖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안에서는 어머니의 뜻을 받을며 |- | 외수부훈 입봉모의 |- | {{더 크게|{{lang|zh|諸姑伯叔 猶子比兒}}}} |rowspan=2| 모든 고모 삼촌의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 | 제고백숙 유자비아 |- | {{더 크게|{{lang|zh|孔懷兄弟 同氣連枝}}}} |rowspan=2| 형제는 서로 품어주니 같은 기운에서 나온 가지기 때문이고 |- | 공회형제 동기연지 |- | {{더 크게|{{lang|zh|交友投分 切磨箴規}}}} |rowspan=2| 벗을 사귈 때는 가려서 사귀고 규범을 염두에 두어 절제하여 |- | 교우투분 절마잠규 |- | {{더 크게|{{lang|zh|仁慈隱惻 造次弗離}}}} |rowspan=2|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여 떠나지 말아야 하고 |- | 인자은측 조차불리 |- | {{더 크게|{{lang|zh|節義廉退 顛沛匪虧}}}} |rowspan=2| 절의를 지키고 청렴히 물러나 이러한 (예의가) 이지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 | 절의염퇴 전패비휴 |- | {{더 크게|{{lang|zh|性靜情逸 心動神疲}}}} |rowspan=2| 성정이 고요하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하니 |- | 성정정일 심동신피 |- | {{더 크게|{{lang|zh|守眞志滿 逐物意移}}}} |rowspan=2| 참 뜻이 가득하도록 지키고 물욕을 멀리하라. |- | 수진지만 축물의이 |- | {{더 크게|{{lang|zh|堅持雅操 好爵自縻}}}} |rowspan=2| 우아하고 절개가 있으면 관작은 스스로 오게 되어 있다. |- | 견지아조 호작자미 |- | {{더 크게|{{lang|zh|都邑華夏 東西二京}}}} |rowspan=2| 화하<ref>중국의 별칭</ref> 의 도읍은 동서 2경이라 |- |도읍화하 동서이경 |- | {{더 크게|{{lang|zh|背邙面洛 浮渭據涇}}}} |rowspan=2|낙양은 북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마주하고 장안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는 구나. |- |배망면락 부위거경 |- | {{더 크게|{{lang|zh|宮殿盤鬱 樓觀飛驚}}}} |rowspan=2|궁전은 울창한 숲에 쌓였고 누각에 올라 놀라운 경치를 보며 |- |궁전반울 누관비경 |- | {{더 크게|{{lang|zh|圖寫禽獸 畵綵仙靈}}}} |rowspan=2|날짐승 들짐승을 그리니 신선 사는 그림이로구나. |- |도사금수 화채선령 |- | {{더 크게|{{lang|zh|丙舍傍啟 甲帳對楹}}}} |rowspan=2|병사<ref>궁전 내에 있는 건물들을 뜻하는 낱말</ref> 옆을 열어 갑장<ref>동방삭이 만들었다는 장막</ref> 이 기둥을 마주하게 하고 |- | 병사방계 갑장대영 |- | {{더 크게|{{lang|zh|肆筵設席 鼓瑟吹笙}}}} |rowspan=2|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고 비파를 뜯고 생황을 부니 |- |사연설석 고슬취생 |- | {{더 크게|{{lang|zh|升階納陛 弁轉疑星}}}} |rowspan=2| 계단을 올라 납폐하는 신료들은 별인듯 번쩍이고 |- |승계납폐 변전의성 |- | {{더 크게|{{lang|zh|右通廣內 左達承明}}}} |rowspan=2| 오른쪽은 광내로 통하고 왼쪽은 승명에 닿아<ref>광내와 승명은 모두 고대 중국 궁내의 관직처</ref> |- |우통광내 좌달승명 |- | {{더 크게|{{lang|zh|既集墳典 亦聚群英}}}} |rowspan=2| 이미 분전<ref>삼황오제 시절의 법률과 의전을 뜻한다.</ref> 을 모은 곳에 영웅들이 모였도다. |- |기집분전 역취군영 |- | {{더 크게|{{lang|zh|杜稾鍾隸 漆書壁經}}}} |rowspan=2| 두고<ref>초서를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ref> 와 종례<ref>예서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ref> 의 글 칠서<ref>대나무에 칠을 한 뒤 쓴 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ref> 와 벽경<ref>공자에게서 전해 왔다는 육경</ref> |- |두고종례 칠서벽경 |- | {{더 크게|{{lang|zh|府羅將相 路俠槐卿}}}} |rowspan=2|각 부에 장군과 재상이 있어 고관이 즐비하여 길이 좁다. |- |부라장상 노협괴경 |- | {{더 크게|{{lang|zh|戶封八縣 家給千兵}}}} |rowspan=2|여덟 고을을 봉지로 주고 천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니<ref>한고조의 논공행상을 가리킨다.</ref> |- |호봉팔현 가급천병 |- | {{더 크게|{{lang|zh|高冠陪輦 驅轂振纓}}}} |rowspan=2|높은 관을 쓰고 수레에올라 바퀴를 구르며 갓끈을 떨치는 구나. |- |고관배련 구곡진영 |- | {{더 크게|{{lang|zh|世祿侈富 車駕肥輕}}}} |rowspan=2| 대대로 받는 녹으로 부귀를 누리며 수레는 (제물로) 무겁고 가마는 가벼우니 |- |세록치부 거가비경 |- | {{더 크게|{{lang|zh|策功茂實 勒碑刻銘}}}} |rowspan=2|끝없이 쌓은 공적 비석에 세기는 구나. |- |책공무실 늑비각명 |- | {{더 크게|{{lang|zh|磻溪伊尹 佐時阿衡}}}} |rowspan=2| 반계의 (태공망)과 (탕왕을 도운) 이윤은 때가 도와 아형의 벼슬에 올랐고 |- |반계이윤 좌시아형 |- | {{더 크게|{{lang|zh|奄宅曲阜 微旦孰營}}}} |rowspan=2| 곡부에 궁전을 지은 것은 주공 단<ref>주문왕의 아우, 노나라의 시조</ref> 이 아니면 누가할 것인가 |- |엄택곡부 미단숙영 |- | {{더 크게|{{lang|zh|桓公匡合 濟弱扶傾}}}} |rowspan=2|환공은 제후를 널리 합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했지 |- |환공광합 제약부경 |- | {{더 크게|{{lang|zh|綺迴漢惠 說感武丁}}}} |rowspan=2|기리계<ref>한고조가 죽고 여희가 여씨 일족에서 황제를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장량은 기리계의 도움으로 혜제가 즉위하도록 하였다.</ref> 가 한 혜제를 회복시키고 부열이 무정을 감동시키듯.<ref>은 나라 무정이 부열에게 감동하여 선정을 배풀었다는 고사</ref> |- |기회한혜 설감무정 |- | {{더 크게|{{lang|zh|俊乂密勿 多士寔寧}}}} |rowspan=2|준걸과 예사가 모이니 참으로 평안하구나. |- |준예밀물 다사식녕 |- | {{더 크게|{{lang|zh|晉楚更霸 趙魏困橫}}}} |rowspan=2|진과 초가 다시 패자가 되고 조와위는 연횡으로 곤궁에 빠져 |- |진초갱패 조위곤횡 |- | {{더 크게|{{lang|zh|假途滅虢 踐土會盟}}}} |rowspan=2|진은 위계를 써 괵을 멸하고 천토에서 회맹하였고 |- |가도멸괵 천토회맹 |- | {{더 크게|{{lang|zh|何遵約法 韓弊煩刑}}}} |rowspan=2|어찌 (한고조의) 약법을 두고 한비자의 낡고 번잡한 형벌을 따를 것인가 |- |하준약법 한폐번형 |- | {{더 크게|{{lang|zh|起翦頗牧 用軍最精}}}} |rowspan=2|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은 군사를 가장 잘 다루었고 |- |기전파목 용군최정 |- | {{더 크게|{{lang|zh|宣威沙漠 馳譽丹青}}}} |rowspan=2|위엄을 사막에까지 떨치니 단청에 넣어 기리는 구나. |- |선위사막 치예단청 |- | {{더 크게|{{lang|zh|九州禹跡 百郡秦幷}}}} |rowspan=2| 하우씨가 구주를 두어 백군이 진에 병합되고 |- |구주우적 백군진병 |- | {{더 크게|{{lang|zh|嶽宗恆岱 禪主云亭}}}} |rowspan=2| 산중 으뜸은 항산과 태산이라 임금을 정하는 운정이 그곳에 있으며 |- |악종항대 선주운정 |- | {{더 크게|{{lang|zh|雁門紫塞 雞田赤城}}}} |rowspan=2| 안문관과 만리장성, 계전과 적성 |- |안문자새 계전적성 |- | {{더 크게|{{lang|zh|昆池碣石 鉅野洞庭}}}} |rowspan=2| 운남의 곤지와 부평의 갈석, 거야의 넓은 들판과 동정의 큰 호수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더 크게|{{lang|zh|曠遠緜邈 巖岫杳冥}}}} |rowspan=2|아득히 멀리 줄지어 있으니 아득하고 묘연하구나. |- |광원면막 암수묘명 |- | {{더 크게|{{lang|zh|治本於農 務茲稼穡}}}} |rowspan=2| 다스림의 근본은 농업이니 때를 맞추어 심고 거두어야 하리 |- |치본어농 무자가색 |- | {{더 크게|{{lang|zh|俶載南畝 我藝黍稷}}}} |rowspan=2|이제 남쪽 이랑을 일궈 나는 기장과 피를 가꾸어 |- |숙재남묘 아예서직 |- | {{더 크게|{{lang|zh|稅熟貢新 勸賞黜陟}}}} |rowspan=2| 익으면 세를 내고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 상을 권하고 (못된 자는) 내쫓으리라. |- |세숙공신 권상출척 |- | {{더 크게|{{lang|zh|孟軻敦素 史魚秉直}}}} |rowspan=2|맹자는 도타운 사람이었고 사어는 강직했으니 |- |맹가돈소 사어병직 |- | {{더 크게|{{lang|zh|庶幾中庸 勞謙謹敕}}}} |rowspan=2|중용을 으뜸으로 삼고 겸손에 힘쓰고 경계해야지 |- |서기중용 노겸근칙 |- | {{더 크게|{{lang|zh|聆音察理 鏡貌辨色}}}} |rowspan=2|들리는 소리 자세히 살피고 거울에 비치는 모양 꼼꼼히 구별하고 |- |영음찰리 감모변색 |- | {{더 크게|{{lang|zh|貽厥嘉猷 勉其祗植}}}} |rowspan=2|그 아름다움이 후세에 미치도록 그 덕을 쌓기를 부지런히 하며 |- |이궐가유 면기지식 |- | {{더 크게|{{lang|zh|省躬譏誡 寵增抗極}}}} |rowspan=2|몸을 살펴 나무라고 탓할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총애가 늘면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성궁기계 총증항극 |- | {{더 크게|{{lang|zh|殆辱近恥 林皋幸即}}}} |rowspan=2| 위태로운 치욕은 부끄러운 일에 의한 것이니 수풀과 언덕에 있는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 |태욕근치 임고행즉 |- | {{더 크게|{{lang|zh|兩疏見機 解組誰逼}}}} |rowspan=2| 양소<ref>한나라의 소광과 소수</ref> 는 기회를 보아 관복을 벗으니 누가 핍박하였으랴 |- |양소견기 해조수핍 |- | {{더 크게|{{lang|zh|索居閒處 沈默寂寥}}}} |rowspan=2|한가한 곳을 찾아 살며 고요히 살며 침묵한 채 |- |색거한처 침묵적요 |- | {{더 크게|{{lang|zh|求古尋論 散慮逍遙}}}} |rowspan=2|옛일을 두고 논장을 찾고 염려를 잊고 소요하니 |- |구고심론 산려소요 |- | {{더 크게|{{lang|zh|欣奏累遣 慼謝歡招}}}} |rowspan=2|기쁜 일은 알리고 누추한 것은 보내며 슬픈 일은 마다하고 기쁜 일을 환영하리 |- |흔주루견 척사환초 |- | {{더 크게|{{lang|zh|渠荷的歷 園莽抽條}}}} |rowspan=2|도랑에 핀 연꽃의 이력, 동산에 자란 풀 가지 |- |거하적력 원망추조 |- | {{더 크게|{{lang|zh|枇杷晚翠 梧桐早凋}}}} |rowspan=2|비파나무 만추에도 푸르른데 오동나무 일찍이 시들었고 |- |비파만취 오동조조 |- | {{더 크게|{{lang|zh|陳根委翳 落葉飄颻}}}} |rowspan=2|고목 뿌리 덮은 낙엽 바람에 날리니 |- |진근위예 낙엽표요 |- | {{더 크게|{{lang|zh|遊鵾獨運 凌摩絳霄}}}} |rowspan=2|댓닭 한 마리 홀로 해엄치며 노을진 하늘을 업수이 여기고 |- |유곤독운 능마강소 |- | {{더 크게|{{lang|zh|耽讀翫市 寓目囊箱}}}} |rowspan=2|(한나라 왕총은) 독서를 즐겨 한 번 보면 상자에 넣은 듯 (잊지 않았다지) |- |탐독완시 우목낭상 |- | {{더 크게|{{lang|zh|易輶攸畏 屬耳垣墻}}}} |rowspan=2|가벼이 경솔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담장에도 귀가 있다 하기 때문 |- |역유유외 속이원장 |- | {{더 크게|{{lang|zh|具膳飡飯 適口充腸}}}} |rowspan=2|반찬이나 저녁밥이야 먹고 배를 채우면 그만인 것 |- |구선손반 적구충장 |- | {{더 크게|{{lang|zh|飽飫烹宰 飢厭糟糠}}}} |rowspan=2|배부르면 재상의 요리도 물리게 되고 배 고프면 겨 지게미로도 족하니 |- |포어팽재 기염조강 |- | {{더 크게|{{lang|zh|親戚故舊 老少異糧}}}} |rowspan=2|친척이나 옛친구 노소에 따라 음식도 다를 밖에 |- |친척고구 노소이량 |- | {{더 크게|{{lang|zh|妾御績紡 侍巾帷房}}}} |rowspan=2|아내가 길쌈하여 어른 방에 수건을 받들고 |- |첩어적방 시건유방 |- | {{더 크게|{{lang|zh|紈扇圓潔 銀燭煒煌}}}} |rowspan=2|흰 비단으로 지은 부채 둥글고 깨끗하며 은촛대 불빛 밝으니 |- |환선원결 은촉위황 |- | {{더 크게|{{lang|zh|晝眠夕寐 藍笋象床}}}} |rowspan=2|낮에 자고 저녁에 또 자려 푸른 대로 코끼리 침상을 만들지 |- |주면석매 남순상상 |- | {{더 크게|{{lang|zh|絃歌酒讌 接盃舉觴}}}} |rowspan=2|거문거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주연을 열고 술잔을 들어 부딛히고 |- |현가주연 접배거상 |- | {{더 크게|{{lang|zh|矯手頓足 悅豫且康}}}} |rowspan=2|손을 들고 발을 움직여 춤추며 이처럼 평안함을 즐거워하세 |- |교수돈족 열예차강 |- | {{더 크게|{{lang|zh|嫡後嗣續 祭祀烝嘗}}}} |rowspan=2| 맏이는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어 |- |적후사속 제사증상 |- | {{더 크게|{{lang|zh|稽顙再拜 悚懼恐惶}}}} |rowspan=2|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여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계상재배 송구공황 |- | {{더 크게|{{lang|zh|牋牒簡要 顧答審詳}}}} |rowspan=2|편지는 간략히 요지만 쓰고 답신은 자세히 살펴서 하라. |- |전첩간요 고답심상 |- | {{더 크게|{{lang|zh|骸垢想浴 執熱願涼}}}} |rowspan=2|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생각이 나고 열이 차면 서늘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 |- |해구상욕 집열원량 |- | {{더 크게|{{lang|zh|驢騾犢特 駭躍超驤}}}} |rowspan=2|노새며 망아지, 숫송아지가 놀라뛰며 내달리듯 |- |여라독특 해약초양 |- | {{더 크게|{{lang|zh|誅斬賊盜 捕獲叛亡}}}} |rowspan=2|적도는 잡아 죽이고 배역자는 잡아들이리 |- |주참적도 포획반망 |- | {{더 크게|{{lang|zh|布射遼丸 嵇琴阮嘯}}}} |rowspan=2|여포는 활 잘 쏘았고 의료는 돌 잘 던졌으며 혜강은 금을 잘켰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지 |- |포사료환 혜금완소 |- | {{더 크게|{{lang|zh|恬筆倫紙 鈞巧任釣}}}} |rowspan=2|붓을 만든 건 몽념 종이를 만든 건 채륜, 마륜의 교묘한 솜씨<ref>마륜은 지남차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임공자의 낚시대<ref>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f> |- |염필윤지 균교임조 |- | {{더 크게|{{lang|zh|釋紛利俗 竝皆佳妙}}}} |rowspan=2|이러한 재주를 세상에 푸니 모두다 뛰어나고 신기하였다. |- |석분리속 병개가묘 |- | {{더 크게|{{lang|zh|毛施淑姿 工顰妍笑}}}} |rowspan=2|오나라 모타와 월나라 서시의 자태는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워라 |- |모시숙자 공빈연소 |- | {{더 크게|{{lang|zh|年矢每催 曦暉朗耀}}}} |rowspan=2| 세월은 살같이 언제나 제촉하나 햇빛 달빛은 밝게 빛나 |- |연시매최 희휘낭요 |- | {{더 크게|{{lang|zh|璇璣懸斡 晦魄環照}}}} |rowspan=2|천문을 보는 기계 매달려 돌듯 그믐이 지나 다시 보름이 되니 |- |선기현알 회백환조 |- | {{더 크게|{{lang|zh|指薪修祜 永綏吉劭}}}} |rowspan=2|손가락에 섶불을 단 듯 수양에 전념하면 영원토록 평안하고 길하리라. |- |지신수우 영수길소 |- | {{더 크게|{{lang|zh|矩步引領 俯仰廊廟}}}} |rowspan=2|반듯하게 걸으며 옷길을 끌고 사당에 엎드려 예의를 다하고 |- |구보인령 부앙낭묘 |- | {{더 크게|{{lang|zh|束帶矜莊 徘徊瞻眺}}}} |rowspan=2|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 |속대긍장 배회첨조 |- | {{더 크게|{{lang|zh|孤陋寡聞 愚蒙等誚}}}} |rowspan=2|(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루하고 들은 것 없어 어리석단 꾸짖음을 면치 못하리 |- |고루과문 우몽등초 |- | {{더 크게|{{lang|zh|謂語助者 焉哉乎也}}}} |rowspan=2|어조사에는 언재호야가 있다. |- |위어조자 언재호야 |} ==역주 == <references/> = 라이선스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PD-자작}} }} [[분류:한시]] lepjlik5oupw0u42yx7sqdcra02eomz 392608 392607 2025-06-26T09:44:03Z 2406:5900:1001:2070:D5A9:2A25:EE5A:B0E8 392608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천자문 |저자 = [[저자:주흥사|주흥사]] |역자 = [[사용자:jjw|jjw]]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위키백과|천자문}}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2010년 8월 25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목각한 《천자문》이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width:200px; background:#eeffee;"| 원문 !background:#eeeeff;"| 번역 |- | {{더 크게|{{lang|zh|天地玄黃 宇宙洪荒}}}} |rowspan=2|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 |천지현황 우주홍황<ref>독음은 [http://handic.daum.net/dicha/view_top.do 다음한자사전] 을 따랐다. 두음법칙에 의해 독음이 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리(李)는 낱말의 앞에 올경우 이로 적었다.</ref> |- | {{더 크게|{{lang|zh|日月盈昗 辰宿列張}}}} |rowspan=2|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은 자리를 잡아 늘어서 있다. |- |일월영측 진수열장 |- | {{더 크게|{{lang|zh|寒來暑往 秋收冬藏}}}} |rowspan=2|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여 둔다. |- | 한래서왕 추수동장 |- | {{더 크게|{{lang|zh|閏餘成歲 律呂調陽}}}} |rowspan=2| 윤달을 더하여 한해를 이루고 가락을 맞추어 양기를 돋운다. |- | 윤여성세 율려조양 |- | {{더 크게|{{lang|zh|雲騰致雨 露結為霜}}}} |rowspan=2|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고 이슬은 얼어 서리가 된다. |- | 운등치우 노결위상 |- | {{더 크게|{{lang|zh|金生麗水 玉出崑岡}}}} |rowspan=2|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난다. |- | 금생여수 옥출곤강 |- | {{더 크게|{{lang|zh|劍號巨闕 珠稱夜光}}}} |rowspan=2| 검은 일컬어 거궐이요 구슬은 일컬어 야광이라. |- | 검호거궐 주칭야광 |- | {{더 크게|{{lang|zh|果珍李柰 菜重芥薑}}}} |rowspan=2| 과일 가운데 진미는 오얏과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 | 과진이내 채중개강 |- | {{더 크게|{{lang|zh|海鹹河淡 鱗潛羽翔}}}} |rowspan=2|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 | 해함하담 인잠우상 |- | {{더 크게|{{lang|zh|龍師火帝 鳥官人皇}}}} |rowspan=2| 복희씨<ref>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고 하며 용사는 복희의 별칭이다.</ref>, 신농씨<ref>화제 또는 염제(炎帝)는 신농씨의 별칭이다</ref>, 소호<ref>소호는 새 이름을 관직명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와 황제헌원<ref>황제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어 인황이란 별칭이 붙었다.</ref> |- | 용사화제 조관인황 |- | {{더 크게|{{lang|zh|始制文字 乃服衣裳}}}} |rowspan=2| 문자를 처음 짓고 옷을 지어 입혔지. |- | 시제문자 내복의상 |- | {{더 크게|{{lang|zh|推位讓國 有虞陶唐}}}} |rowspan=2| 자리를 미루며 나라를 물려주니 유우<ref>순임금의 이름이다.</ref> 와 도당<ref>우 임금의 이름이다.</ref> 이라. |- | 추위양국 유우도당 |- | {{더 크게|{{lang|zh|弔民伐罪 周發殷湯}}}} |rowspan=2| 백성을 돕고 죄를 벌하니 주나라 무왕<ref>발(發)은 주 무왕의 이름</ref> 과 은나라 탕왕이라. |- | 조민벌죄 주발은탕 |- | {{더 크게|{{lang|zh|坐朝問道 垂拱平章}}}} |rowspan=2| 조정에 앉아 도를 묻기에 두 손으로 문장을 올리니, |- | 좌조문도 수공평장 |- | {{더 크게|{{lang|zh|愛育黎首 臣伏戎羌}}}} |rowspan=2| 백성을 아끼고<ref>여수(黎首)는 검은 머리, 즉 관직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ref> 오랑캐가 신하로 복종하게 하소서. |- | 애육여수 신복융강 |- | {{더 크게|{{lang|zh|遐邇壹體 率賓歸王}}}} |rowspan=2|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가 되어 임금께 이끌려 따를 것입니다. |- | 하이일체 솔빈귀왕 |- | {{더 크게|{{lang|zh|鳴鳳在樹 白駒食場}}}} |rowspan=2|봉황은 나무에 내려 울고 흰망아지 풀을 뜯으니<ref>성군이 나면 봉황이 찾아와 울고 흰망아지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말함</ref> |- | 명봉재수 백구식장 |- | {{더 크게|{{lang|zh|化被草木 賴及萬方}}}} |rowspan=2| 덕화가 초목까지 미치고 만방에 퍼지리. |- | 화피초목 뇌급만방 |- | {{더 크게|{{lang|zh|蓋此身髮 四大五常}}}} |rowspan=2| 몸에 털이 덮힌 것과 같이 4대5상을 지키고<ref>4대는 하늘, 땅, 도(道), 임금. 5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ref> |- | 개차신발 사대오상 |- | {{더 크게|{{lang|zh|恭惟鞠養 豈敢毁傷}}}} |rowspan=2| 길러준 은혜를 공경하여 감히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 | 공유국양 기감훼상 |- | {{더 크게|{{lang|zh|女慕貞烈 男效才良}}}} |rowspan=2|여자는 정조를 따르고 남자는 재량을 본받아 |- | 여모정렬 남효재량 |- | {{더 크게|{{lang|zh|知過必改 得能莫忘}}}} |rowspan=2|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 | 지과필개 득능막망 |- | {{더 크게|{{lang|zh|罔談彼短 靡恃己長}}}} |rowspan=2| 다른이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마라 |- | 망담피단 미시기장 |- | {{더 크게|{{lang|zh|信使可覆 器欲難量}}}} |rowspan=2| 믿었던 장점이 뒤집힐 수 있고 다른 사람 기량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 신사가복 기욕난량 |- | {{더 크게|{{lang|zh|墨悲絲染 詩讚羔羊}}}} |rowspan=2| 이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탄식하였고<ref>묵자 소염론</ref> 시경은 고양을 찬송하였다.<ref>시경 고양편</ref> |- | 묵비사염 시찬고양 |- | {{더 크게|{{lang|zh|景行維賢 克念作聖}}}} |rowspan=2| 바르고 어진 것을 보고 행하여 지극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 | 경행유현 극념작성 |- | {{더 크게|{{lang|zh|德建名立 形端表正}}}} |rowspan=2|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면 바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 |- | 덕건명립 형단표정 |- | {{더 크게|{{lang|zh|空谷傳聲 虛堂習聽}}}} |rowspan=2| 빈 골짜기에 울리는 소리처럼 또한 빈집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 | 공곡전성 허당습청 |- | {{더 크게|{{lang|zh|禍因惡積 福緣善慶}}}} |rowspan=2| 화는 악행을 쌓은 것이 원인이요 복은 선행의 결과이다. |- | 화인악적 복연선경 |- | {{더 크게|{{lang|zh|尺璧非寶 寸陰是競}}}} |rowspan=2| 커다란 옥 구슬이<ref>여기서 벽은 완벽의 유래가 된 옥구슬을 말한다. 척(尺)과 촌(寸)은 길이의 단위이나 크고 작은 것으로 의역하였다.</ref> 보배가 아니니 작은 시간을 경주하여야 하여라. |- | 척벽비보 촌음시경 |- | {{더 크게|{{lang|zh|資父事君 曰嚴與敬}}}} |rowspan=2|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엄정하면서도 정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니 |- | 자부사군 왈엄여경 |- | {{더 크게|{{lang|zh|孝當竭力 忠則盡命}}}} |rowspan=2| 효도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 | 효당갈력 충즉진명 |- | {{더 크게|{{lang|zh|臨深履薄 夙興溫凊}}}} |rowspan=2| 깊은 곳을 만나도 살얼음 지나듯 조심하고 일찍 일어나 덥고 차가운지 살피는 것(이 효도하는 마음가짐이며) |- | 임심리박 숙흥온정 |- | {{더 크게|{{lang|zh|似蘭斯馨 如松之盛}}}} |rowspan=2|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굳센 것(이 충성하는 마음가짐이다.) |- | 사란사형 여송지성 |- | {{더 크게|{{lang|zh|川流不息 淵澄取映}}}} |rowspan=2| 냇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그림자를 비추듯 |- | 천류불식 연징취영 |- | {{더 크게|{{lang|zh|容止若思 言辭安定}}}} |rowspan=2| 얼굴은 생각과 같게 하고 말은 안정되게 하여야 한다. |- | 용지약사 언사안정 |- | {{더 크게|{{lang|zh|篤初誠美 愼終宜令}}}} |rowspan=2| 일을 시작할 때에 정성을 다하고 마무리 지을 때에도 신중히 하면 |- | 독초성미 신종의령 |- | {{더 크게|{{lang|zh|榮業所基 籍甚無竟}}}} |rowspan=2| 이를 바탕으로 이루는 업적이 끝없으리라. |- | 영업소기 적심무경 |- | {{더 크게|{{lang|zh|學優登仕 攝職從政}}}} |rowspan=2| 학문이 뛰어나 벼슬에 올라 직무를 맞고 정사를 돌볼 때에 |- | 학우등사 섭직종정 |- | {{더 크게|{{lang|zh|存以甘棠 去而益詠}}}} |rowspan=2|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ref>감당(甘棠)은 팥배나무이다. 주나라 소공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보고 공명 정대하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감당시를 읇었다. 시경 국풍편 감당</ref> |- | 존이감당 거이익영 |- | {{더 크게|{{lang|zh|樂殊貴賤 禮別尊卑}}}} |rowspan=2| 즐거움에 귀천이 없으나 예절에는 존비가 있으니 |- | 악수귀천 예별존비 |- | {{더 크게|{{lang|zh|上和下睦 夫唱婦隨}}}} |rowspan=2| 상하가 화목하고 부부가 원만하며<ref>사자성어 부창부수의 출전이다.</ref> |- | 상화하목 부창부수 |- | {{더 크게|{{lang|zh|外受傅訓 入奉母儀}}}} |rowspan=2| 밖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안에서는 어머니의 뜻을 받을며 |- | 외수부훈 입봉모의 |- | {{더 크게|{{lang|zh|諸姑伯叔 猶子比兒}}}} |rowspan=2| 모든 고모 삼촌의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 | 제고백숙 유자비아 |- | {{더 크게|{{lang|zh|孔懷兄弟 同氣連枝}}}} |rowspan=2| 형제는 서로 품어주니 같은 기운에서 나온 가지기 때문이고 |- | 공회형제 동기연지 |- | {{더 크게|{{lang|zh|交友投分 切磨箴規}}}} |rowspan=2| 벗을 사귈 때는 가려서 사귀고 규범을 염두에 두어 절제하여 |- | 교우투분 절마잠규 |- | {{더 크게|{{lang|zh|仁慈隱惻 造次弗離}}}} |rowspan=2|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여 떠나지 말아야 하고 |- | 인자은측 조차불리 |- | {{더 크게|{{lang|zh|節義廉退 顛沛匪虧}}}} |rowspan=2| 절의를 지키고 청렴히 물러나 이러한 (예의가) 이지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 | 절의염퇴 전패비휴 |- | {{더 크게|{{lang|zh|性靜情逸 心動神疲}}}} |rowspan=2| 성정이 고요하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하니 |- | 성정정일 심동신피 |- | {{더 크게|{{lang|zh|守眞志滿 逐物意移}}}} |rowspan=2| 참 뜻이 가득하도록 지키고 물욕을 멀리하라. |- | 수진지만 축물의이 |- | {{더 크게|{{lang|zh|堅持雅操 好爵自縻}}}} |rowspan=2| 우아하고 절개가 있으면 관작은 스스로 오게 되어 있다. |- | 견지아조 호작자미 |- | {{더 크게|{{lang|zh|都邑華夏 東西二京}}}} |rowspan=2| 화하<ref>중국의 별칭</ref> 의 도읍은 동서 2경이라 |- |도읍화하 동서이경 |- | {{더 크게|{{lang|zh|背邙面洛 浮渭據涇}}}} |rowspan=2|낙양은 북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마주하고 장안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는 구나. |- |배망면락 부위거경 |- | {{더 크게|{{lang|zh|宮殿盤鬱 樓觀飛驚}}}} |rowspan=2|궁전은 울창한 숲에 쌓였고 누각에 올라 놀라운 경치를 보며 |- |궁전반울 누관비경 |- | {{더 크게|{{lang|zh|圖寫禽獸 畵綵仙靈}}}} |rowspan=2|날짐승 들짐승을 그리니 신선 사는 그림이로구나. |- |도사금수 화채선령 |- | {{더 크게|{{lang|zh|丙舍傍啟 甲帳對楹}}}} |rowspan=2|병사<ref>궁전 내에 있는 건물들을 뜻하는 낱말</ref> 옆을 열어 갑장<ref>동방삭이 만들었다는 장막</ref> 이 기둥을 마주하게 하고 |- | 병사방계 갑장대영 |- | {{더 크게|{{lang|zh|肆筵設席 鼓瑟吹笙}}}} |rowspan=2|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고 비파를 뜯고 생황을 부니 |- |사연설석 고슬취생 |- | {{더 크게|{{lang|zh|升階納陛 弁轉疑星}}}} |rowspan=2| 계단을 올라 납폐하는 신료들은 별인듯 번쩍이고 |- |승계납폐 변전의성 |- | {{더 크게|{{lang|zh|右通廣內 左達承明}}}} |rowspan=2| 오른쪽은 광내로 통하고 왼쪽은 승명에 닿아<ref>광내와 승명은 모두 고대 중국 궁내의 관직처</ref> |- |우통광내 좌달승명 |- | {{더 크게|{{lang|zh|既集墳典 亦聚群英}}}} |rowspan=2| 이미 분전<ref>삼황오제 시절의 법률과 의전을 뜻한다.</ref> 을 모은 곳에 영웅들이 모였도다. |- |기집분전 역취군영 |- | {{더 크게|{{lang|zh|杜稾鍾隸 漆書壁經}}}} |rowspan=2| 두고<ref>초서를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ref> 와 종례<ref>예서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ref> 의 글 칠서<ref>대나무에 칠을 한 뒤 쓴 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ref> 와 벽경<ref>공자에게서 전해 왔다는 육경</ref> |- |두고종례 칠서벽경 |- | {{더 크게|{{lang|zh|府羅將相 路俠槐卿}}}} |rowspan=2|각 부에 장군과 재상이 있어 고관이 즐비하여 길이 좁다. |- |부라장상 노협괴경 |- | {{더 크게|{{lang|zh|戶封八縣 家給千兵}}}} |rowspan=2|여덟 고을을 봉지로 주고 천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니<ref>한고조의 논공행상을 가리킨다.</ref> |- |호봉팔현 가급천병 |- | {{더 크게|{{lang|zh|高冠陪輦 驅轂振纓}}}} |rowspan=2|높은 관을 쓰고 수레에올라 바퀴를 구르며 갓끈을 떨치는 구나. |- |고관배련 구곡진영 |- | {{더 크게|{{lang|zh|世祿侈富 車駕肥輕}}}} |rowspan=2| 대대로 받는 녹으로 부귀를 누리며 수레는 (제물로) 무겁고 가마는 가벼우니 |- |세록치부 거가비경 |- | {{더 크게|{{lang|zh|策功茂實 勒碑刻銘}}}} |rowspan=2|끝없이 쌓은 공적 비석에 세기는 구나. |- |책공무실 늑비각명 |- | {{더 크게|{{lang|zh|磻溪伊尹 佐時阿衡}}}} |rowspan=2| 반계의 (태공망)과 (탕왕을 도운) 이윤은 때가 도와 아형의 벼슬에 올랐고 |- |반계이윤 좌시아형 |- | {{더 크게|{{lang|zh|奄宅曲阜 微旦孰營}}}} |rowspan=2| 곡부에 궁전을 지은 것은 주공 단<ref>주문왕의 아우, 노나라의 시조</ref> 이 아니면 누가할 것인가 |- |엄택곡부 미단숙영 |- | {{더 크게|{{lang|zh|桓公匡合 濟弱扶傾}}}} |rowspan=2|환공은 제후를 널리 합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했지 |- |환공광합 제약부경 |- | {{더 크게|{{lang|zh|綺迴漢惠 說感武丁}}}} |rowspan=2|기리계<ref>한고조가 죽고 여희가 여씨 일족에서 황제를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장량은 기리계의 도움으로 혜제가 즉위하도록 하였다.</ref> 가 한 혜제를 회복시키고 부열이 무정을 감동시키듯.<ref>은 나라 무정이 부열에게 감동하여 선정을 배풀었다는 고사</ref> |- |기회한혜 설감무정 |- | {{더 크게|{{lang|zh|俊乂密勿 多士寔寧}}}} |rowspan=2|준걸과 예사가 모이니 참으로 평안하구나. |- |준예밀물 다사식녕 |- | {{더 크게|{{lang|zh|晉楚更霸 趙魏困橫}}}} |rowspan=2|진과 초가 다시 패자가 되고 조와위는 연횡으로 곤궁에 빠져 |- |진초갱패 조위곤횡 |- | {{더 크게|{{lang|zh|假途滅虢 踐土會盟}}}} |rowspan=2|진은 위계를 써 괵을 멸하고 천토에서 회맹하였고 |- |가도멸괵 천토회맹 |- | {{더 크게|{{lang|zh|何遵約法 韓弊煩刑}}}} |rowspan=2|어찌 (한고조의) 약법을 두고 한비자의 낡고 번잡한 형벌을 따를 것인가 |- |하준약법 한폐번형 |- | {{더 크게|{{lang|zh|起翦頗牧 用軍最精}}}} |rowspan=2|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은 군사를 가장 잘 다루었고 |- |기전파목 용군최정 |- | {{더 크게|{{lang|zh|宣威沙漠 馳譽丹青}}}} |rowspan=2|위엄을 사막에까지 떨치니 단청에 넣어 기리는 구나. |- |선위사막 치예단청 |- | {{더 크게|{{lang|zh|九州禹跡 百郡秦幷}}}} |rowspan=2| 하우씨가 구주를 두어 백군이 진에 병합되고 |- |구주우적 백군진병 |- | {{더 크게|{{lang|zh|嶽宗恆岱 禪主云亭}}}} |rowspan=2| 산중 으뜸은 항산과 태산이라 임금을 정하는 운정이 그곳에 있으며 |- |악종항대 선주운정 |- | {{더 크게|{{lang|zh|雁門紫塞 雞田赤城}}}} |rowspan=2| 안문관과 만리장성, 계전과 적성 |- |안문자새 계전적성 |- | {{더 크게|{{lang|zh|昆池碣石 鉅野洞庭}}}} |rowspan=2| 운남의 곤지와 부평의 갈석, 거야의 넓은 들판과 동정의 큰 호수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더 크게|{{lang|zh|曠遠緜邈 巖岫杳冥}}}} |rowspan=2|아득히 멀리 줄지어 있으니 아득하고 묘연하구나. |- |광원면막 암수묘명 |- | {{더 크게|{{lang|zh|治本於農 務茲稼穡}}}} |rowspan=2| 다스림의 근본은 농업이니 때를 맞추어 심고 거두어야 하리 |- |치본어농 무자가색 |- | {{더 크게|{{lang|zh|俶載南畝 我藝黍稷}}}} |rowspan=2|이제 남쪽 이랑을 일궈 나는 기장과 피를 가꾸어 |- |숙재남묘 아예서직 |- | {{더 크게|{{lang|zh|稅熟貢新 勸賞黜陟}}}} |rowspan=2| 익으면 세를 내고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 상을 권하고 (못된 자는) 내쫓으리라. |- |세숙공신 권상출척 |- | {{더 크게|{{lang|zh|孟軻敦素 史魚秉直}}}} |rowspan=2|맹자는 도타운 사람이었고 사어는 강직했으니 |- |맹가돈소 사어병직 |- | {{더 크게|{{lang|zh|庶幾中庸 勞謙謹敕}}}} |rowspan=2|중용을 으뜸으로 삼고 겸손에 힘쓰고 경계해야지 |- |서기중용 노겸근칙 |- | {{더 크게|{{lang|zh|聆音察理 鏡貌辨色}}}} |rowspan=2|들리는 소리 자세히 살피고 거울에 비치는 모양 꼼꼼히 구별하고 |- |영음찰리 감모변색 |- | {{더 크게|{{lang|zh|貽厥嘉猷 勉其祗植}}}} |rowspan=2|그 아름다움이 후세에 미치도록 그 덕을 쌓기를 부지런히 하며 |- |이궐가유 면기지식 |- | {{더 크게|{{lang|zh|省躬譏誡 寵增抗極}}}} |rowspan=2|몸을 살펴 나무라고 탓할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총애가 늘면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성궁기계 총증항극 |- | {{더 크게|{{lang|zh|殆辱近恥 林皋幸即}}}} |rowspan=2| 위태로운 치욕은 부끄러운 일에 의한 것이니 수풀과 언덕에 있는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 |태욕근치 임고행즉 |- | {{더 크게|{{lang|zh|兩疏見機 解組誰逼}}}} |rowspan=2| 양소<ref>한나라의 소광과 소수</ref> 는 기회를 보아 관복을 벗으니 누가 핍박하였으랴 |- |양소견기 해조수핍 |- | {{더 크게|{{lang|zh|索居閒處 沈默寂寥}}}} |rowspan=2|한가한 곳을 찾아 살며 고요히 살며 침묵한 채 |- |색거한처 침묵적요 |- | {{더 크게|{{lang|zh|求古尋論 散慮逍遙}}}} |rowspan=2|옛일을 두고 논장을 찾고 염려를 잊고 소요하니 |- |구고심론 산려소요 |- | {{더 크게|{{lang|zh|欣奏累遣 慼謝歡招}}}} |rowspan=2|기쁜 일은 알리고 누추한 것은 보내며 슬픈 일은 마다하고 기쁜 일을 환영하리 |- |흔주루견 척사환초 |- | {{더 크게|{{lang|zh|渠荷的歷 園莽抽條}}}} |rowspan=2|도랑에 핀 연꽃의 이력, 동산에 자란 풀 가지 |- |거하적력 원망추조 |- | {{더 크게|{{lang|zh|枇杷晚翠 梧桐早凋}}}} |rowspan=2|비파나무 만추에도 푸르른데 오동나무 일찍이 시들었고 |- |비파만취 오동조조 |- | {{더 크게|{{lang|zh|陳根委翳 落葉飄颻}}}} |rowspan=2|고목 뿌리 덮은 낙엽 바람에 날리니 |- |진근위예 낙엽표요 |- | {{더 크게|{{lang|zh|遊鵾獨運 凌摩絳霄}}}} |rowspan=2|댓닭 한 마리 홀로 해엄치며 노을진 하늘을 업수이 여기고 |- |유곤독운 능마강소 |- | {{더 크게|{{lang|zh|耽讀翫市 寓目囊箱}}}} |rowspan=2|(한나라 왕총은) 독서를 즐겨 한 번 보면 상자에 넣은 듯 (잊지 않았다지) |- |탐독완시 우목낭상 |- | {{더 크게|{{lang|zh|易輶攸畏 屬耳垣墻}}}} |rowspan=2|가벼이 경솔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담장에도 귀가 있다 하기 때문 |- |역유유외 속이원장 |- | {{더 크게|{{lang|zh|具膳飡飯 適口充腸}}}} |rowspan=2|반찬이나 저녁밥이야 먹고 배를 채우면 그만인 것 |- |구선손반 적구충장 |- | {{더 크게|{{lang|zh|飽飫烹宰 飢厭糟糠}}}} |rowspan=2|배부르면 재상의 요리도 물리게 되고 배 고프면 겨 지게미로도 족하니 |- |포어팽재 기염조강 |- | {{더 크게|{{lang|zh|親戚故舊 老少異糧}}}} |rowspan=2|친척이나 옛친구 노소에 따라 음식도 다를 밖에 |- |친척고구 노소이량 |- | {{더 크게|{{lang|zh|妾御績紡 侍巾帷房}}}} |rowspan=2|아내가 길쌈하여 어른 방에 수건을 받들고 |- |첩어적방 시건유방 |- | {{더 크게|{{lang|zh|紈扇圓潔 銀燭煒煌}}}} |rowspan=2|흰 비단으로 지은 부채 둥글고 깨끗하며 은촛대 불빛 밝으니 |- |환선원결 은촉위황 |- | {{더 크게|{{lang|zh|晝眠夕寐 藍笋象床}}}} |rowspan=2|낮에 자고 저녁에 또 자려 푸른 대로 코끼리 침상을 만들지 |- |주면석매 남순상상 |- | {{더 크게|{{lang|zh|絃歌酒讌 接盃舉觴}}}} |rowspan=2|거문거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주연을 열고 술잔을 들어 부딛히고 |- |현가주연 접배거상 |- | {{더 크게|{{lang|zh|矯手頓足 悅豫且康}}}} |rowspan=2|손을 들고 발을 움직여 춤추며 이처럼 평안함을 즐거워하세 |- |교수돈족 열예차강 |- | {{더 크게|{{lang|zh|嫡後嗣續 祭祀烝嘗}}}} |rowspan=2| 맏이는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어 |- |적후사속 제사증상 |- | {{더 크게|{{lang|zh|稽顙再拜 悚懼恐惶}}}} |rowspan=2|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여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계상재배 송구공황 |- | {{더 크게|{{lang|zh|牋牒簡要 顧答審詳}}}} |rowspan=2|편지는 간략히 요지만 쓰고 답신은 자세히 살펴서 하라. |- |전첩간요 고답심상 |- | {{더 크게|{{lang|zh|骸垢想浴 執熱願涼}}}} |rowspan=2|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생각이 나고 열이 차면 서늘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 |- |해구상욕 집열원량 |- | {{더 크게|{{lang|zh|驢騾犢特 駭躍超驤}}}} |rowspan=2|노새며 망아지, 숫송아지가 놀라뛰며 내달리듯 |- |여라독특 해약초양 |- | {{더 크게|{{lang|zh|誅斬賊盜 捕獲叛亡}}}} |rowspan=2|적도는 잡아 죽이고 배역자는 잡아들이리 |- |주참적도 포획반망 |- | {{더 크게|{{lang|zh|布射遼丸 嵇琴阮嘯}}}} |rowspan=2|여포는 활 잘 쏘았고 의료는 돌 잘 던졌으며 혜강은 금을 잘켰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지 |- |포사료환 혜금완소 |- | {{더 크게|{{lang|zh|恬筆倫紙 鈞巧任釣}}}} |rowspan=2|붓을 만든 건 몽념 종이를 만든 건 채륜, 마륜의 교묘한 솜씨<ref>마륜은 지남차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임공자의 낚시대<ref>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f> |- |염필윤지 균교임조 |- | {{더 크게|{{lang|zh|釋紛利俗 竝皆佳妙}}}} |rowspan=2|이러한 재주를 세상에 푸니 모두다 뛰어나고 신기하였다. |- |석분리속 병개가묘 |- | {{더 크게|{{lang|zh|毛施淑姿 工顰妍笑}}}} |rowspan=2|오나라 모타와 월나라 서시의 자태는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워라 |- |모시숙자 공빈연소 |- | {{더 크게|{{lang|zh|年矢每催 曦暉朗耀}}}} |rowspan=2| 세월은 살같이 언제나 제촉하나 햇빛 달빛은 밝게 빛나 |- |연시매최 희휘낭요 |- | {{더 크게|{{lang|zh|璇璣懸斡 晦魄環照}}}} |rowspan=2|천문을 보는 기계 매달려 돌듯 그믐이 지나 다시 보름이 되니 |- |선기현알 회백환조 |- | {{더 크게|{{lang|zh|指薪修祜 永綏吉劭}}}} |rowspan=2|손가락에 섶불을 단 듯 수양에 전념하면 영원토록 평안하고 길하리라. |- |지신수우 영수길소 |- | {{더 크게|{{lang|zh|矩步引領 俯仰廊廟}}}} |rowspan=2|반듯하게 걸으며 옷길을 끌고 사당에 엎드려 예의를 다하고 |- |구보인령 부앙낭묘 |- | {{더 크게|{{lang|zh|束帶矜莊 徘徊瞻眺}}}} |rowspan=2|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 |속대긍장 배회첨조 |- | {{더 크게|{{lang|zh|孤陋寡聞 愚蒙等誚}}}} |rowspan=2|(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루하고 들은 것 없어 어리석단 꾸짖음을 면치 못하리 |- |고루과문 우몽등초 |- | {{더 크게|{{lang|zh|謂語助者 焉哉乎也}}}} |rowspan=2|어조사에는 언재호야가 있다. |- |위어조자 언재호야 |} ==역주 == <references/> = 라이선스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PD-자작}} }} [[분류:한시]] n6npql6uknr7kjifqbo7wvx5717e8wz 392609 392608 2025-06-26T09:45:09Z 2406:5900:1001:2070:D5A9:2A25:EE5A:B0E8 392609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천자문 |저자 = [[저자:주흥사|주흥사]] |역자 = [[사용자:jjw|jjw]]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위키백과|천자문}}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2010년 8월 25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목각한 《천자문》이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width:200px; background:#eeffee;"| 원문 !background:#eeeeff;"| 번역 |- | {{더 크게|{{lang|zh|天地玄黃 宇宙洪荒}}}} |rowspan=2|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 |천지현황 우주홍황<ref>독음은 [http://handic.daum.net/dicha/view_top.do 다음한자사전] 을 따랐다. 두음법칙에 의해 독음이 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리(李)는 낱말의 앞에 올경우 이로 적었다.</ref> |- | {{더 크게|{{lang|zh|日月盈昃 辰宿列張}}}} |rowspan=2|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은 자리를 잡아 늘어서 있다. |- |일월영측 진수열장 |- | {{더 크게|{{lang|zh|寒來暑往 秋收冬藏}}}} |rowspan=2|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여 둔다. |- | 한래서왕 추수동장 |- | {{더 크게|{{lang|zh|閏餘成歲 律呂調陽}}}} |rowspan=2| 윤달을 더하여 한해를 이루고 가락을 맞추어 양기를 돋운다. |- | 윤여성세 율려조양 |- | {{더 크게|{{lang|zh|雲騰致雨 露結為霜}}}} |rowspan=2|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고 이슬은 얼어 서리가 된다. |- | 운등치우 노결위상 |- | {{더 크게|{{lang|zh|金生麗水 玉出崑岡}}}} |rowspan=2|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난다. |- | 금생여수 옥출곤강 |- | {{더 크게|{{lang|zh|劍號巨闕 珠稱夜光}}}} |rowspan=2| 검은 일컬어 거궐이요 구슬은 일컬어 야광이라. |- | 검호거궐 주칭야광 |- | {{더 크게|{{lang|zh|果珍李柰 菜重芥薑}}}} |rowspan=2| 과일 가운데 진미는 오얏과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 | 과진이내 채중개강 |- | {{더 크게|{{lang|zh|海鹹河淡 鱗潛羽翔}}}} |rowspan=2|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 | 해함하담 인잠우상 |- | {{더 크게|{{lang|zh|龍師火帝 鳥官人皇}}}} |rowspan=2| 복희씨<ref>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고 하며 용사는 복희의 별칭이다.</ref>, 신농씨<ref>화제 또는 염제(炎帝)는 신농씨의 별칭이다</ref>, 소호<ref>소호는 새 이름을 관직명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와 황제헌원<ref>황제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어 인황이란 별칭이 붙었다.</ref> |- | 용사화제 조관인황 |- | {{더 크게|{{lang|zh|始制文字 乃服衣裳}}}} |rowspan=2| 문자를 처음 짓고 옷을 지어 입혔지. |- | 시제문자 내복의상 |- | {{더 크게|{{lang|zh|推位讓國 有虞陶唐}}}} |rowspan=2| 자리를 미루며 나라를 물려주니 유우<ref>순임금의 이름이다.</ref> 와 도당<ref>우 임금의 이름이다.</ref> 이라. |- | 추위양국 유우도당 |- | {{더 크게|{{lang|zh|弔民伐罪 周發殷湯}}}} |rowspan=2| 백성을 돕고 죄를 벌하니 주나라 무왕<ref>발(發)은 주 무왕의 이름</ref> 과 은나라 탕왕이라. |- | 조민벌죄 주발은탕 |- | {{더 크게|{{lang|zh|坐朝問道 垂拱平章}}}} |rowspan=2| 조정에 앉아 도를 묻기에 두 손으로 문장을 올리니, |- | 좌조문도 수공평장 |- | {{더 크게|{{lang|zh|愛育黎首 臣伏戎羌}}}} |rowspan=2| 백성을 아끼고<ref>여수(黎首)는 검은 머리, 즉 관직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ref> 오랑캐가 신하로 복종하게 하소서. |- | 애육여수 신복융강 |- | {{더 크게|{{lang|zh|遐邇壹體 率賓歸王}}}} |rowspan=2|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가 되어 임금께 이끌려 따를 것입니다. |- | 하이일체 솔빈귀왕 |- | {{더 크게|{{lang|zh|鳴鳳在樹 白駒食場}}}} |rowspan=2|봉황은 나무에 내려 울고 흰망아지 풀을 뜯으니<ref>성군이 나면 봉황이 찾아와 울고 흰망아지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말함</ref> |- | 명봉재수 백구식장 |- | {{더 크게|{{lang|zh|化被草木 賴及萬方}}}} |rowspan=2| 덕화가 초목까지 미치고 만방에 퍼지리. |- | 화피초목 뇌급만방 |- | {{더 크게|{{lang|zh|蓋此身髮 四大五常}}}} |rowspan=2| 몸에 털이 덮힌 것과 같이 4대5상을 지키고<ref>4대는 하늘, 땅, 도(道), 임금. 5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ref> |- | 개차신발 사대오상 |- | {{더 크게|{{lang|zh|恭惟鞠養 豈敢毁傷}}}} |rowspan=2| 길러준 은혜를 공경하여 감히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 | 공유국양 기감훼상 |- | {{더 크게|{{lang|zh|女慕貞烈 男效才良}}}} |rowspan=2|여자는 정조를 따르고 남자는 재량을 본받아 |- | 여모정렬 남효재량 |- | {{더 크게|{{lang|zh|知過必改 得能莫忘}}}} |rowspan=2|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 | 지과필개 득능막망 |- | {{더 크게|{{lang|zh|罔談彼短 靡恃己長}}}} |rowspan=2| 다른이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마라 |- | 망담피단 미시기장 |- | {{더 크게|{{lang|zh|信使可覆 器欲難量}}}} |rowspan=2| 믿었던 장점이 뒤집힐 수 있고 다른 사람 기량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 신사가복 기욕난량 |- | {{더 크게|{{lang|zh|墨悲絲染 詩讚羔羊}}}} |rowspan=2| 이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탄식하였고<ref>묵자 소염론</ref> 시경은 고양을 찬송하였다.<ref>시경 고양편</ref> |- | 묵비사염 시찬고양 |- | {{더 크게|{{lang|zh|景行維賢 克念作聖}}}} |rowspan=2| 바르고 어진 것을 보고 행하여 지극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 | 경행유현 극념작성 |- | {{더 크게|{{lang|zh|德建名立 形端表正}}}} |rowspan=2|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면 바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 |- | 덕건명립 형단표정 |- | {{더 크게|{{lang|zh|空谷傳聲 虛堂習聽}}}} |rowspan=2| 빈 골짜기에 울리는 소리처럼 또한 빈집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 | 공곡전성 허당습청 |- | {{더 크게|{{lang|zh|禍因惡積 福緣善慶}}}} |rowspan=2| 화는 악행을 쌓은 것이 원인이요 복은 선행의 결과이다. |- | 화인악적 복연선경 |- | {{더 크게|{{lang|zh|尺璧非寶 寸陰是競}}}} |rowspan=2| 커다란 옥 구슬이<ref>여기서 벽은 완벽의 유래가 된 옥구슬을 말한다. 척(尺)과 촌(寸)은 길이의 단위이나 크고 작은 것으로 의역하였다.</ref> 보배가 아니니 작은 시간을 경주하여야 하여라. |- | 척벽비보 촌음시경 |- | {{더 크게|{{lang|zh|資父事君 曰嚴與敬}}}} |rowspan=2|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엄정하면서도 정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니 |- | 자부사군 왈엄여경 |- | {{더 크게|{{lang|zh|孝當竭力 忠則盡命}}}} |rowspan=2| 효도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 | 효당갈력 충즉진명 |- | {{더 크게|{{lang|zh|臨深履薄 夙興溫凊}}}} |rowspan=2| 깊은 곳을 만나도 살얼음 지나듯 조심하고 일찍 일어나 덥고 차가운지 살피는 것(이 효도하는 마음가짐이며) |- | 임심리박 숙흥온정 |- | {{더 크게|{{lang|zh|似蘭斯馨 如松之盛}}}} |rowspan=2|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굳센 것(이 충성하는 마음가짐이다.) |- | 사란사형 여송지성 |- | {{더 크게|{{lang|zh|川流不息 淵澄取映}}}} |rowspan=2| 냇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그림자를 비추듯 |- | 천류불식 연징취영 |- | {{더 크게|{{lang|zh|容止若思 言辭安定}}}} |rowspan=2| 얼굴은 생각과 같게 하고 말은 안정되게 하여야 한다. |- | 용지약사 언사안정 |- | {{더 크게|{{lang|zh|篤初誠美 愼終宜令}}}} |rowspan=2| 일을 시작할 때에 정성을 다하고 마무리 지을 때에도 신중히 하면 |- | 독초성미 신종의령 |- | {{더 크게|{{lang|zh|榮業所基 籍甚無竟}}}} |rowspan=2| 이를 바탕으로 이루는 업적이 끝없으리라. |- | 영업소기 적심무경 |- | {{더 크게|{{lang|zh|學優登仕 攝職從政}}}} |rowspan=2| 학문이 뛰어나 벼슬에 올라 직무를 맞고 정사를 돌볼 때에 |- | 학우등사 섭직종정 |- | {{더 크게|{{lang|zh|存以甘棠 去而益詠}}}} |rowspan=2|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ref>감당(甘棠)은 팥배나무이다. 주나라 소공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보고 공명 정대하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감당시를 읇었다. 시경 국풍편 감당</ref> |- | 존이감당 거이익영 |- | {{더 크게|{{lang|zh|樂殊貴賤 禮別尊卑}}}} |rowspan=2| 즐거움에 귀천이 없으나 예절에는 존비가 있으니 |- | 악수귀천 예별존비 |- | {{더 크게|{{lang|zh|上和下睦 夫唱婦隨}}}} |rowspan=2| 상하가 화목하고 부부가 원만하며<ref>사자성어 부창부수의 출전이다.</ref> |- | 상화하목 부창부수 |- | {{더 크게|{{lang|zh|外受傅訓 入奉母儀}}}} |rowspan=2| 밖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안에서는 어머니의 뜻을 받을며 |- | 외수부훈 입봉모의 |- | {{더 크게|{{lang|zh|諸姑伯叔 猶子比兒}}}} |rowspan=2| 모든 고모 삼촌의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 | 제고백숙 유자비아 |- | {{더 크게|{{lang|zh|孔懷兄弟 同氣連枝}}}} |rowspan=2| 형제는 서로 품어주니 같은 기운에서 나온 가지기 때문이고 |- | 공회형제 동기연지 |- | {{더 크게|{{lang|zh|交友投分 切磨箴規}}}} |rowspan=2| 벗을 사귈 때는 가려서 사귀고 규범을 염두에 두어 절제하여 |- | 교우투분 절마잠규 |- | {{더 크게|{{lang|zh|仁慈隱惻 造次弗離}}}} |rowspan=2|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여 떠나지 말아야 하고 |- | 인자은측 조차불리 |- | {{더 크게|{{lang|zh|節義廉退 顛沛匪虧}}}} |rowspan=2| 절의를 지키고 청렴히 물러나 이러한 (예의가) 이지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 | 절의염퇴 전패비휴 |- | {{더 크게|{{lang|zh|性靜情逸 心動神疲}}}} |rowspan=2| 성정이 고요하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하니 |- | 성정정일 심동신피 |- | {{더 크게|{{lang|zh|守眞志滿 逐物意移}}}} |rowspan=2| 참 뜻이 가득하도록 지키고 물욕을 멀리하라. |- | 수진지만 축물의이 |- | {{더 크게|{{lang|zh|堅持雅操 好爵自縻}}}} |rowspan=2| 우아하고 절개가 있으면 관작은 스스로 오게 되어 있다. |- | 견지아조 호작자미 |- | {{더 크게|{{lang|zh|都邑華夏 東西二京}}}} |rowspan=2| 화하<ref>중국의 별칭</ref> 의 도읍은 동서 2경이라 |- |도읍화하 동서이경 |- | {{더 크게|{{lang|zh|背邙面洛 浮渭據涇}}}} |rowspan=2|낙양은 북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마주하고 장안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는 구나. |- |배망면락 부위거경 |- | {{더 크게|{{lang|zh|宮殿盤鬱 樓觀飛驚}}}} |rowspan=2|궁전은 울창한 숲에 쌓였고 누각에 올라 놀라운 경치를 보며 |- |궁전반울 누관비경 |- | {{더 크게|{{lang|zh|圖寫禽獸 畵綵仙靈}}}} |rowspan=2|날짐승 들짐승을 그리니 신선 사는 그림이로구나. |- |도사금수 화채선령 |- | {{더 크게|{{lang|zh|丙舍傍啟 甲帳對楹}}}} |rowspan=2|병사<ref>궁전 내에 있는 건물들을 뜻하는 낱말</ref> 옆을 열어 갑장<ref>동방삭이 만들었다는 장막</ref> 이 기둥을 마주하게 하고 |- | 병사방계 갑장대영 |- | {{더 크게|{{lang|zh|肆筵設席 鼓瑟吹笙}}}} |rowspan=2|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고 비파를 뜯고 생황을 부니 |- |사연설석 고슬취생 |- | {{더 크게|{{lang|zh|升階納陛 弁轉疑星}}}} |rowspan=2| 계단을 올라 납폐하는 신료들은 별인듯 번쩍이고 |- |승계납폐 변전의성 |- | {{더 크게|{{lang|zh|右通廣內 左達承明}}}} |rowspan=2| 오른쪽은 광내로 통하고 왼쪽은 승명에 닿아<ref>광내와 승명은 모두 고대 중국 궁내의 관직처</ref> |- |우통광내 좌달승명 |- | {{더 크게|{{lang|zh|既集墳典 亦聚群英}}}} |rowspan=2| 이미 분전<ref>삼황오제 시절의 법률과 의전을 뜻한다.</ref> 을 모은 곳에 영웅들이 모였도다. |- |기집분전 역취군영 |- | {{더 크게|{{lang|zh|杜稾鍾隸 漆書壁經}}}} |rowspan=2| 두고<ref>초서를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ref> 와 종례<ref>예서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ref> 의 글 칠서<ref>대나무에 칠을 한 뒤 쓴 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ref> 와 벽경<ref>공자에게서 전해 왔다는 육경</ref> |- |두고종례 칠서벽경 |- | {{더 크게|{{lang|zh|府羅將相 路俠槐卿}}}} |rowspan=2|각 부에 장군과 재상이 있어 고관이 즐비하여 길이 좁다. |- |부라장상 노협괴경 |- | {{더 크게|{{lang|zh|戶封八縣 家給千兵}}}} |rowspan=2|여덟 고을을 봉지로 주고 천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니<ref>한고조의 논공행상을 가리킨다.</ref> |- |호봉팔현 가급천병 |- | {{더 크게|{{lang|zh|高冠陪輦 驅轂振纓}}}} |rowspan=2|높은 관을 쓰고 수레에올라 바퀴를 구르며 갓끈을 떨치는 구나. |- |고관배련 구곡진영 |- | {{더 크게|{{lang|zh|世祿侈富 車駕肥輕}}}} |rowspan=2| 대대로 받는 녹으로 부귀를 누리며 수레는 (제물로) 무겁고 가마는 가벼우니 |- |세록치부 거가비경 |- | {{더 크게|{{lang|zh|策功茂實 勒碑刻銘}}}} |rowspan=2|끝없이 쌓은 공적 비석에 세기는 구나. |- |책공무실 늑비각명 |- | {{더 크게|{{lang|zh|磻溪伊尹 佐時阿衡}}}} |rowspan=2| 반계의 (태공망)과 (탕왕을 도운) 이윤은 때가 도와 아형의 벼슬에 올랐고 |- |반계이윤 좌시아형 |- | {{더 크게|{{lang|zh|奄宅曲阜 微旦孰營}}}} |rowspan=2| 곡부에 궁전을 지은 것은 주공 단<ref>주문왕의 아우, 노나라의 시조</ref> 이 아니면 누가할 것인가 |- |엄택곡부 미단숙영 |- | {{더 크게|{{lang|zh|桓公匡合 濟弱扶傾}}}} |rowspan=2|환공은 제후를 널리 합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했지 |- |환공광합 제약부경 |- | {{더 크게|{{lang|zh|綺迴漢惠 說感武丁}}}} |rowspan=2|기리계<ref>한고조가 죽고 여희가 여씨 일족에서 황제를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장량은 기리계의 도움으로 혜제가 즉위하도록 하였다.</ref> 가 한 혜제를 회복시키고 부열이 무정을 감동시키듯.<ref>은 나라 무정이 부열에게 감동하여 선정을 배풀었다는 고사</ref> |- |기회한혜 설감무정 |- | {{더 크게|{{lang|zh|俊乂密勿 多士寔寧}}}} |rowspan=2|준걸과 예사가 모이니 참으로 평안하구나. |- |준예밀물 다사식녕 |- | {{더 크게|{{lang|zh|晉楚更霸 趙魏困橫}}}} |rowspan=2|진과 초가 다시 패자가 되고 조와위는 연횡으로 곤궁에 빠져 |- |진초갱패 조위곤횡 |- | {{더 크게|{{lang|zh|假途滅虢 踐土會盟}}}} |rowspan=2|진은 위계를 써 괵을 멸하고 천토에서 회맹하였고 |- |가도멸괵 천토회맹 |- | {{더 크게|{{lang|zh|何遵約法 韓弊煩刑}}}} |rowspan=2|어찌 (한고조의) 약법을 두고 한비자의 낡고 번잡한 형벌을 따를 것인가 |- |하준약법 한폐번형 |- | {{더 크게|{{lang|zh|起翦頗牧 用軍最精}}}} |rowspan=2|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은 군사를 가장 잘 다루었고 |- |기전파목 용군최정 |- | {{더 크게|{{lang|zh|宣威沙漠 馳譽丹青}}}} |rowspan=2|위엄을 사막에까지 떨치니 단청에 넣어 기리는 구나. |- |선위사막 치예단청 |- | {{더 크게|{{lang|zh|九州禹跡 百郡秦幷}}}} |rowspan=2| 하우씨가 구주를 두어 백군이 진에 병합되고 |- |구주우적 백군진병 |- | {{더 크게|{{lang|zh|嶽宗恆岱 禪主云亭}}}} |rowspan=2| 산중 으뜸은 항산과 태산이라 임금을 정하는 운정이 그곳에 있으며 |- |악종항대 선주운정 |- | {{더 크게|{{lang|zh|雁門紫塞 雞田赤城}}}} |rowspan=2| 안문관과 만리장성, 계전과 적성 |- |안문자새 계전적성 |- | {{더 크게|{{lang|zh|昆池碣石 鉅野洞庭}}}} |rowspan=2| 운남의 곤지와 부평의 갈석, 거야의 넓은 들판과 동정의 큰 호수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더 크게|{{lang|zh|曠遠緜邈 巖岫杳冥}}}} |rowspan=2|아득히 멀리 줄지어 있으니 아득하고 묘연하구나. |- |광원면막 암수묘명 |- | {{더 크게|{{lang|zh|治本於農 務茲稼穡}}}} |rowspan=2| 다스림의 근본은 농업이니 때를 맞추어 심고 거두어야 하리 |- |치본어농 무자가색 |- | {{더 크게|{{lang|zh|俶載南畝 我藝黍稷}}}} |rowspan=2|이제 남쪽 이랑을 일궈 나는 기장과 피를 가꾸어 |- |숙재남묘 아예서직 |- | {{더 크게|{{lang|zh|稅熟貢新 勸賞黜陟}}}} |rowspan=2| 익으면 세를 내고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 상을 권하고 (못된 자는) 내쫓으리라. |- |세숙공신 권상출척 |- | {{더 크게|{{lang|zh|孟軻敦素 史魚秉直}}}} |rowspan=2|맹자는 도타운 사람이었고 사어는 강직했으니 |- |맹가돈소 사어병직 |- | {{더 크게|{{lang|zh|庶幾中庸 勞謙謹敕}}}} |rowspan=2|중용을 으뜸으로 삼고 겸손에 힘쓰고 경계해야지 |- |서기중용 노겸근칙 |- | {{더 크게|{{lang|zh|聆音察理 鏡貌辨色}}}} |rowspan=2|들리는 소리 자세히 살피고 거울에 비치는 모양 꼼꼼히 구별하고 |- |영음찰리 감모변색 |- | {{더 크게|{{lang|zh|貽厥嘉猷 勉其祗植}}}} |rowspan=2|그 아름다움이 후세에 미치도록 그 덕을 쌓기를 부지런히 하며 |- |이궐가유 면기지식 |- | {{더 크게|{{lang|zh|省躬譏誡 寵增抗極}}}} |rowspan=2|몸을 살펴 나무라고 탓할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총애가 늘면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성궁기계 총증항극 |- | {{더 크게|{{lang|zh|殆辱近恥 林皋幸即}}}} |rowspan=2| 위태로운 치욕은 부끄러운 일에 의한 것이니 수풀과 언덕에 있는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 |태욕근치 임고행즉 |- | {{더 크게|{{lang|zh|兩疏見機 解組誰逼}}}} |rowspan=2| 양소<ref>한나라의 소광과 소수</ref> 는 기회를 보아 관복을 벗으니 누가 핍박하였으랴 |- |양소견기 해조수핍 |- | {{더 크게|{{lang|zh|索居閒處 沈默寂寥}}}} |rowspan=2|한가한 곳을 찾아 살며 고요히 살며 침묵한 채 |- |색거한처 침묵적요 |- | {{더 크게|{{lang|zh|求古尋論 散慮逍遙}}}} |rowspan=2|옛일을 두고 논장을 찾고 염려를 잊고 소요하니 |- |구고심론 산려소요 |- | {{더 크게|{{lang|zh|欣奏累遣 慼謝歡招}}}} |rowspan=2|기쁜 일은 알리고 누추한 것은 보내며 슬픈 일은 마다하고 기쁜 일을 환영하리 |- |흔주루견 척사환초 |- | {{더 크게|{{lang|zh|渠荷的歷 園莽抽條}}}} |rowspan=2|도랑에 핀 연꽃의 이력, 동산에 자란 풀 가지 |- |거하적력 원망추조 |- | {{더 크게|{{lang|zh|枇杷晚翠 梧桐早凋}}}} |rowspan=2|비파나무 만추에도 푸르른데 오동나무 일찍이 시들었고 |- |비파만취 오동조조 |- | {{더 크게|{{lang|zh|陳根委翳 落葉飄颻}}}} |rowspan=2|고목 뿌리 덮은 낙엽 바람에 날리니 |- |진근위예 낙엽표요 |- | {{더 크게|{{lang|zh|遊鵾獨運 凌摩絳霄}}}} |rowspan=2|댓닭 한 마리 홀로 해엄치며 노을진 하늘을 업수이 여기고 |- |유곤독운 능마강소 |- | {{더 크게|{{lang|zh|耽讀翫市 寓目囊箱}}}} |rowspan=2|(한나라 왕총은) 독서를 즐겨 한 번 보면 상자에 넣은 듯 (잊지 않았다지) |- |탐독완시 우목낭상 |- | {{더 크게|{{lang|zh|易輶攸畏 屬耳垣墻}}}} |rowspan=2|가벼이 경솔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담장에도 귀가 있다 하기 때문 |- |역유유외 속이원장 |- | {{더 크게|{{lang|zh|具膳飡飯 適口充腸}}}} |rowspan=2|반찬이나 저녁밥이야 먹고 배를 채우면 그만인 것 |- |구선손반 적구충장 |- | {{더 크게|{{lang|zh|飽飫烹宰 飢厭糟糠}}}} |rowspan=2|배부르면 재상의 요리도 물리게 되고 배 고프면 겨 지게미로도 족하니 |- |포어팽재 기염조강 |- | {{더 크게|{{lang|zh|親戚故舊 老少異糧}}}} |rowspan=2|친척이나 옛친구 노소에 따라 음식도 다를 밖에 |- |친척고구 노소이량 |- | {{더 크게|{{lang|zh|妾御績紡 侍巾帷房}}}} |rowspan=2|아내가 길쌈하여 어른 방에 수건을 받들고 |- |첩어적방 시건유방 |- | {{더 크게|{{lang|zh|紈扇圓潔 銀燭煒煌}}}} |rowspan=2|흰 비단으로 지은 부채 둥글고 깨끗하며 은촛대 불빛 밝으니 |- |환선원결 은촉위황 |- | {{더 크게|{{lang|zh|晝眠夕寐 藍笋象床}}}} |rowspan=2|낮에 자고 저녁에 또 자려 푸른 대로 코끼리 침상을 만들지 |- |주면석매 남순상상 |- | {{더 크게|{{lang|zh|絃歌酒讌 接盃舉觴}}}} |rowspan=2|거문거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주연을 열고 술잔을 들어 부딛히고 |- |현가주연 접배거상 |- | {{더 크게|{{lang|zh|矯手頓足 悅豫且康}}}} |rowspan=2|손을 들고 발을 움직여 춤추며 이처럼 평안함을 즐거워하세 |- |교수돈족 열예차강 |- | {{더 크게|{{lang|zh|嫡後嗣續 祭祀烝嘗}}}} |rowspan=2| 맏이는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어 |- |적후사속 제사증상 |- | {{더 크게|{{lang|zh|稽顙再拜 悚懼恐惶}}}} |rowspan=2|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여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계상재배 송구공황 |- | {{더 크게|{{lang|zh|牋牒簡要 顧答審詳}}}} |rowspan=2|편지는 간략히 요지만 쓰고 답신은 자세히 살펴서 하라. |- |전첩간요 고답심상 |- | {{더 크게|{{lang|zh|骸垢想浴 執熱願涼}}}} |rowspan=2|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생각이 나고 열이 차면 서늘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 |- |해구상욕 집열원량 |- | {{더 크게|{{lang|zh|驢騾犢特 駭躍超驤}}}} |rowspan=2|노새며 망아지, 숫송아지가 놀라뛰며 내달리듯 |- |여라독특 해약초양 |- | {{더 크게|{{lang|zh|誅斬賊盜 捕獲叛亡}}}} |rowspan=2|적도는 잡아 죽이고 배역자는 잡아들이리 |- |주참적도 포획반망 |- | {{더 크게|{{lang|zh|布射遼丸 嵇琴阮嘯}}}} |rowspan=2|여포는 활 잘 쏘았고 의료는 돌 잘 던졌으며 혜강은 금을 잘켰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지 |- |포사료환 혜금완소 |- | {{더 크게|{{lang|zh|恬筆倫紙 鈞巧任釣}}}} |rowspan=2|붓을 만든 건 몽념 종이를 만든 건 채륜, 마륜의 교묘한 솜씨<ref>마륜은 지남차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임공자의 낚시대<ref>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f> |- |염필윤지 균교임조 |- | {{더 크게|{{lang|zh|釋紛利俗 竝皆佳妙}}}} |rowspan=2|이러한 재주를 세상에 푸니 모두다 뛰어나고 신기하였다. |- |석분리속 병개가묘 |- | {{더 크게|{{lang|zh|毛施淑姿 工顰妍笑}}}} |rowspan=2|오나라 모타와 월나라 서시의 자태는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워라 |- |모시숙자 공빈연소 |- | {{더 크게|{{lang|zh|年矢每催 曦暉朗耀}}}} |rowspan=2| 세월은 살같이 언제나 제촉하나 햇빛 달빛은 밝게 빛나 |- |연시매최 희휘낭요 |- | {{더 크게|{{lang|zh|璇璣懸斡 晦魄環照}}}} |rowspan=2|천문을 보는 기계 매달려 돌듯 그믐이 지나 다시 보름이 되니 |- |선기현알 회백환조 |- | {{더 크게|{{lang|zh|指薪修祜 永綏吉劭}}}} |rowspan=2|손가락에 섶불을 단 듯 수양에 전념하면 영원토록 평안하고 길하리라. |- |지신수우 영수길소 |- | {{더 크게|{{lang|zh|矩步引領 俯仰廊廟}}}} |rowspan=2|반듯하게 걸으며 옷길을 끌고 사당에 엎드려 예의를 다하고 |- |구보인령 부앙낭묘 |- | {{더 크게|{{lang|zh|束帶矜莊 徘徊瞻眺}}}} |rowspan=2|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 |속대긍장 배회첨조 |- | {{더 크게|{{lang|zh|孤陋寡聞 愚蒙等誚}}}} |rowspan=2|(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루하고 들은 것 없어 어리석단 꾸짖음을 면치 못하리 |- |고루과문 우몽등초 |- | {{더 크게|{{lang|zh|謂語助者 焉哉乎也}}}} |rowspan=2|어조사에는 언재호야가 있다. |- |위어조자 언재호야 |} ==역주 == <references/> = 라이선스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PD-자작}} }} [[분류:한시]] lepjlik5oupw0u42yx7sqdcra02eomz 392610 392609 2025-06-26T09:49:45Z 2406:5900:1001:2070:D5A9:2A25:EE5A:B0E8 392610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천자문 |저자 = [[저자:주흥사|주흥사]] |역자 = [[사용자:jjw|jjw]]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위키백과|천자문}}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만들었다.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2010년 8월 25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목각한 《천자문》이 대한민국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width:200px; background:#eeffee;"| 원문 !background:#eeeeff;"| 번역 |- | {{더 크게|{{lang|zh|天地玄黃 宇宙洪荒}}}} |rowspan=2|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 |천지현황 우주홍황<ref>독음은 [http://handic.daum.net/dicha/view_top.do 다음한자사전] 을 따랐다. 두음법칙에 의해 독음이 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리(李)는 낱말의 앞에 올경우 이로 적었다.</ref> |- | {{더 크게|{{lang|zh|日月盈昃 辰宿列張}}}} |rowspan=2|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은 자리를 잡아 늘어서 있다. |- |일월영측 진수열장 |- | {{더 크게|{{lang|zh|寒來暑往 秋收冬藏}}}} |rowspan=2|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여 둔다. |- | 한래서왕 추수동장 |- | {{더 크게|{{lang|zh|閏餘成歲 律呂調陽}}}} |rowspan=2| 윤달을 더하여 한해를 이루고 가락을 맞추어 양기를 돋운다. |- | 윤여성세 율려조양 |- | {{더 크게|{{lang|zh|雲騰致雨 露結為霜}}}} |rowspan=2|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고 이슬은 얼어 서리가 된다. |- | 운등치우 노결위상 |- | {{더 크게|{{lang|zh|金生麗水 玉出昆岡}}}} |rowspan=2|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난다. |- | 금생여수 옥출곤강 |- | {{더 크게|{{lang|zh|劍號巨闕 珠稱夜光}}}} |rowspan=2| 검은 일컬어 거궐이요 구슬은 일컬어 야광이라. |- | 검호거궐 주칭야광 |- | {{더 크게|{{lang|zh|果珍李柰 菜重芥薑}}}} |rowspan=2| 과일 가운데 진미는 오얏과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 | 과진이내 채중개강 |- | {{더 크게|{{lang|zh|海鹹河淡 鱗潛羽翔}}}} |rowspan=2|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 | 해함하담 인잠우상 |- | {{더 크게|{{lang|zh|龍師火帝 鳥官人皇}}}} |rowspan=2| 복희씨<ref>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였다고 하며 용사는 복희의 별칭이다.</ref>, 신농씨<ref>화제 또는 염제(炎帝)는 신농씨의 별칭이다</ref>, 소호<ref>소호는 새 이름을 관직명으로 삼았다고 한다.</ref> 와 황제헌원<ref>황제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어 인황이란 별칭이 붙었다.</ref> |- | 용사화제 조관인황 |- | {{더 크게|{{lang|zh|始制文字 乃服衣裳}}}} |rowspan=2| 문자를 처음 짓고 옷을 지어 입혔지. |- | 시제문자 내복의상 |- | {{더 크게|{{lang|zh|推位讓國 有虞陶唐}}}} |rowspan=2| 자리를 미루며 나라를 물려주니 유우<ref>순임금의 이름이다.</ref> 와 도당<ref>우 임금의 이름이다.</ref> 이라. |- | 추위양국 유우도당 |- | {{더 크게|{{lang|zh|弔民伐罪 周發殷湯}}}} |rowspan=2| 백성을 돕고 죄를 벌하니 주나라 무왕<ref>발(發)은 주 무왕의 이름</ref> 과 은나라 탕왕이라. |- | 조민벌죄 주발은탕 |- | {{더 크게|{{lang|zh|坐朝問道 垂拱平章}}}} |rowspan=2| 조정에 앉아 도를 묻기에 두 손으로 문장을 올리니, |- | 좌조문도 수공평장 |- | {{더 크게|{{lang|zh|愛育黎首 臣伏戎羌}}}} |rowspan=2| 백성을 아끼고<ref>여수(黎首)는 검은 머리, 즉 관직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ref> 오랑캐가 신하로 복종하게 하소서. |- | 애육여수 신복융강 |- | {{더 크게|{{lang|zh|遐邇壹體 率賓歸王}}}} |rowspan=2|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가 되어 임금께 이끌려 따를 것입니다. |- | 하이일체 솔빈귀왕 |- | {{더 크게|{{lang|zh|鳴鳳在樹 白駒食場}}}} |rowspan=2|봉황은 나무에 내려 울고 흰망아지 풀을 뜯으니<ref>성군이 나면 봉황이 찾아와 울고 흰망아지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말함</ref> |- | 명봉재수 백구식장 |- | {{더 크게|{{lang|zh|化被草木 賴及萬方}}}} |rowspan=2| 덕화가 초목까지 미치고 만방에 퍼지리. |- | 화피초목 뇌급만방 |- | {{더 크게|{{lang|zh|蓋此身髮 四大五常}}}} |rowspan=2| 몸에 털이 덮힌 것과 같이 4대5상을 지키고<ref>4대는 하늘, 땅, 도(道), 임금. 5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ref> |- | 개차신발 사대오상 |- | {{더 크게|{{lang|zh|恭惟鞠養 豈敢毁傷}}}} |rowspan=2| 길러준 은혜를 공경하여 감히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 | 공유국양 기감훼상 |- | {{더 크게|{{lang|zh|女慕貞烈 男效才良}}}} |rowspan=2|여자는 정조를 따르고 남자는 재량을 본받아 |- | 여모정렬 남효재량 |- | {{더 크게|{{lang|zh|知過必改 得能莫忘}}}} |rowspan=2|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 | 지과필개 득능막망 |- | {{더 크게|{{lang|zh|罔談彼短 靡恃己長}}}} |rowspan=2| 다른이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너무 믿지 마라 |- | 망담피단 미시기장 |- | {{더 크게|{{lang|zh|信使可覆 器欲難量}}}} |rowspan=2| 믿었던 장점이 뒤집힐 수 있고 다른 사람 기량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 신사가복 기욕난량 |- | {{더 크게|{{lang|zh|墨悲絲染 詩讚羔羊}}}} |rowspan=2| 이 때문에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탄식하였고<ref>묵자 소염론</ref> 시경은 고양을 찬송하였다.<ref>시경 고양편</ref> |- | 묵비사염 시찬고양 |- | {{더 크게|{{lang|zh|景行維賢 克念作聖}}}} |rowspan=2| 바르고 어진 것을 보고 행하여 지극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 | 경행유현 극념작성 |- | {{더 크게|{{lang|zh|德建名立 形端表正}}}} |rowspan=2|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면 바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 |- | 덕건명립 형단표정 |- | {{더 크게|{{lang|zh|空谷傳聲 虛堂習聽}}}} |rowspan=2| 빈 골짜기에 울리는 소리처럼 또한 빈집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 | 공곡전성 허당습청 |- | {{더 크게|{{lang|zh|禍因惡積 福緣善慶}}}} |rowspan=2| 화는 악행을 쌓은 것이 원인이요 복은 선행의 결과이다. |- | 화인악적 복연선경 |- | {{더 크게|{{lang|zh|尺璧非寶 寸陰是競}}}} |rowspan=2| 커다란 옥 구슬이<ref>여기서 벽은 완벽의 유래가 된 옥구슬을 말한다. 척(尺)과 촌(寸)은 길이의 단위이나 크고 작은 것으로 의역하였다.</ref> 보배가 아니니 작은 시간을 경주하여야 하여라. |- | 척벽비보 촌음시경 |- | {{더 크게|{{lang|zh|資父事君 曰嚴與敬}}}} |rowspan=2|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엄정하면서도 정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니 |- | 자부사군 왈엄여경 |- | {{더 크게|{{lang|zh|孝當竭力 忠則盡命}}}} |rowspan=2| 효도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 | 효당갈력 충즉진명 |- | {{더 크게|{{lang|zh|臨深履薄 夙興溫凊}}}} |rowspan=2| 깊은 곳을 만나도 살얼음 지나듯 조심하고 일찍 일어나 덥고 차가운지 살피는 것(이 효도하는 마음가짐이며) |- | 임심리박 숙흥온정 |- | {{더 크게|{{lang|zh|似蘭斯馨 如松之盛}}}} |rowspan=2|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소나무처럼 굳센 것(이 충성하는 마음가짐이다.) |- | 사란사형 여송지성 |- | {{더 크게|{{lang|zh|川流不息 淵澄取映}}}} |rowspan=2| 냇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그림자를 비추듯 |- | 천류불식 연징취영 |- | {{더 크게|{{lang|zh|容止若思 言辭安定}}}} |rowspan=2| 얼굴은 생각과 같게 하고 말은 안정되게 하여야 한다. |- | 용지약사 언사안정 |- | {{더 크게|{{lang|zh|篤初誠美 愼終宜令}}}} |rowspan=2| 일을 시작할 때에 정성을 다하고 마무리 지을 때에도 신중히 하면 |- | 독초성미 신종의령 |- | {{더 크게|{{lang|zh|榮業所基 籍甚無竟}}}} |rowspan=2| 이를 바탕으로 이루는 업적이 끝없으리라. |- | 영업소기 적심무경 |- | {{더 크게|{{lang|zh|學優登仕 攝職從政}}}} |rowspan=2| 학문이 뛰어나 벼슬에 올라 직무를 맞고 정사를 돌볼 때에 |- | 학우등사 섭직종정 |- | {{더 크게|{{lang|zh|存以甘棠 去而益詠}}}} |rowspan=2|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ref>감당(甘棠)은 팥배나무이다. 주나라 소공은 팥배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보고 공명 정대하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감당시를 읇었다. 시경 국풍편 감당</ref> |- | 존이감당 거이익영 |- | {{더 크게|{{lang|zh|樂殊貴賤 禮別尊卑}}}} |rowspan=2| 즐거움에 귀천이 없으나 예절에는 존비가 있으니 |- | 악수귀천 예별존비 |- | {{더 크게|{{lang|zh|上和下睦 夫唱婦隨}}}} |rowspan=2| 상하가 화목하고 부부가 원만하며<ref>사자성어 부창부수의 출전이다.</ref> |- | 상화하목 부창부수 |- | {{더 크게|{{lang|zh|外受傅訓 入奉母儀}}}} |rowspan=2| 밖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안에서는 어머니의 뜻을 받을며 |- | 외수부훈 입봉모의 |- | {{더 크게|{{lang|zh|諸姑伯叔 猶子比兒}}}} |rowspan=2| 모든 고모 삼촌의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 | 제고백숙 유자비아 |- | {{더 크게|{{lang|zh|孔懷兄弟 同氣連枝}}}} |rowspan=2| 형제는 서로 품어주니 같은 기운에서 나온 가지기 때문이고 |- | 공회형제 동기연지 |- | {{더 크게|{{lang|zh|交友投分 切磨箴規}}}} |rowspan=2| 벗을 사귈 때는 가려서 사귀고 규범을 염두에 두어 절제하여 |- | 교우투분 절마잠규 |- | {{더 크게|{{lang|zh|仁慈隱惻 造次弗離}}}} |rowspan=2|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여 떠나지 말아야 하고 |- | 인자은측 조차불리 |- | {{더 크게|{{lang|zh|節義廉退 顛沛匪虧}}}} |rowspan=2| 절의를 지키고 청렴히 물러나 이러한 (예의가) 이지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 | 절의염퇴 전패비휴 |- | {{더 크게|{{lang|zh|性靜情逸 心動神疲}}}} |rowspan=2| 성정이 고요하면 심정이 편안하고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하니 |- | 성정정일 심동신피 |- | {{더 크게|{{lang|zh|守眞志滿 逐物意移}}}} |rowspan=2| 참 뜻이 가득하도록 지키고 물욕을 멀리하라. |- | 수진지만 축물의이 |- | {{더 크게|{{lang|zh|堅持雅操 好爵自縻}}}} |rowspan=2| 우아하고 절개가 있으면 관작은 스스로 오게 되어 있다. |- | 견지아조 호작자미 |- | {{더 크게|{{lang|zh|都邑華夏 東西二京}}}} |rowspan=2| 화하<ref>중국의 별칭</ref> 의 도읍은 동서 2경이라 |- |도읍화하 동서이경 |- | {{더 크게|{{lang|zh|背邙面洛 浮渭據涇}}}} |rowspan=2|낙양은 북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마주하고 장안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는 구나. |- |배망면락 부위거경 |- | {{더 크게|{{lang|zh|宮殿盤鬱 樓觀飛驚}}}} |rowspan=2|궁전은 울창한 숲에 쌓였고 누각에 올라 놀라운 경치를 보며 |- |궁전반울 누관비경 |- | {{더 크게|{{lang|zh|圖寫禽獸 畵綵仙靈}}}} |rowspan=2|날짐승 들짐승을 그리니 신선 사는 그림이로구나. |- |도사금수 화채선령 |- | {{더 크게|{{lang|zh|丙舍傍啟 甲帳對楹}}}} |rowspan=2|병사<ref>궁전 내에 있는 건물들을 뜻하는 낱말</ref> 옆을 열어 갑장<ref>동방삭이 만들었다는 장막</ref> 이 기둥을 마주하게 하고 |- | 병사방계 갑장대영 |- | {{더 크게|{{lang|zh|肆筵設席 鼓瑟吹笙}}}} |rowspan=2|자리를 마련해 연회를 열고 비파를 뜯고 생황을 부니 |- |사연설석 고슬취생 |- | {{더 크게|{{lang|zh|升階納陛 弁轉疑星}}}} |rowspan=2| 계단을 올라 납폐하는 신료들은 별인듯 번쩍이고 |- |승계납폐 변전의성 |- | {{더 크게|{{lang|zh|右通廣內 左達承明}}}} |rowspan=2| 오른쪽은 광내로 통하고 왼쪽은 승명에 닿아<ref>광내와 승명은 모두 고대 중국 궁내의 관직처</ref> |- |우통광내 좌달승명 |- | {{더 크게|{{lang|zh|既集墳典 亦聚群英}}}} |rowspan=2| 이미 분전<ref>삼황오제 시절의 법률과 의전을 뜻한다.</ref> 을 모은 곳에 영웅들이 모였도다. |- |기집분전 역취군영 |- | {{더 크게|{{lang|zh|杜稾鍾隸 漆書壁經}}}} |rowspan=2| 두고<ref>초서를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ref> 와 종례<ref>예서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ref> 의 글 칠서<ref>대나무에 칠을 한 뒤 쓴 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ref> 와 벽경<ref>공자에게서 전해 왔다는 육경</ref> |- |두고종례 칠서벽경 |- | {{더 크게|{{lang|zh|府羅將相 路俠槐卿}}}} |rowspan=2|각 부에 장군과 재상이 있어 고관이 즐비하여 길이 좁다. |- |부라장상 노협괴경 |- | {{더 크게|{{lang|zh|戶封八縣 家給千兵}}}} |rowspan=2|여덟 고을을 봉지로 주고 천명의 군사로 지키게 하니<ref>한고조의 논공행상을 가리킨다.</ref> |- |호봉팔현 가급천병 |- | {{더 크게|{{lang|zh|高冠陪輦 驅轂振纓}}}} |rowspan=2|높은 관을 쓰고 수레에올라 바퀴를 구르며 갓끈을 떨치는 구나. |- |고관배련 구곡진영 |- | {{더 크게|{{lang|zh|世祿侈富 車駕肥輕}}}} |rowspan=2| 대대로 받는 녹으로 부귀를 누리며 수레는 (제물로) 무겁고 가마는 가벼우니 |- |세록치부 거가비경 |- | {{더 크게|{{lang|zh|策功茂實 勒碑刻銘}}}} |rowspan=2|끝없이 쌓은 공적 비석에 세기는 구나. |- |책공무실 늑비각명 |- | {{더 크게|{{lang|zh|磻溪伊尹 佐時阿衡}}}} |rowspan=2| 반계의 (태공망)과 (탕왕을 도운) 이윤은 때가 도와 아형의 벼슬에 올랐고 |- |반계이윤 좌시아형 |- | {{더 크게|{{lang|zh|奄宅曲阜 微旦孰營}}}} |rowspan=2| 곡부에 궁전을 지은 것은 주공 단<ref>주문왕의 아우, 노나라의 시조</ref> 이 아니면 누가할 것인가 |- |엄택곡부 미단숙영 |- | {{더 크게|{{lang|zh|桓公匡合 濟弱扶傾}}}} |rowspan=2|환공은 제후를 널리 합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했지 |- |환공광합 제약부경 |- | {{더 크게|{{lang|zh|綺迴漢惠 說感武丁}}}} |rowspan=2|기리계<ref>한고조가 죽고 여희가 여씨 일족에서 황제를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장량은 기리계의 도움으로 혜제가 즉위하도록 하였다.</ref> 가 한 혜제를 회복시키고 부열이 무정을 감동시키듯.<ref>은 나라 무정이 부열에게 감동하여 선정을 배풀었다는 고사</ref> |- |기회한혜 설감무정 |- | {{더 크게|{{lang|zh|俊乂密勿 多士寔寧}}}} |rowspan=2|준걸과 예사가 모이니 참으로 평안하구나. |- |준예밀물 다사식녕 |- | {{더 크게|{{lang|zh|晉楚更霸 趙魏困橫}}}} |rowspan=2|진과 초가 다시 패자가 되고 조와위는 연횡으로 곤궁에 빠져 |- |진초갱패 조위곤횡 |- | {{더 크게|{{lang|zh|假途滅虢 踐土會盟}}}} |rowspan=2|진은 위계를 써 괵을 멸하고 천토에서 회맹하였고 |- |가도멸괵 천토회맹 |- | {{더 크게|{{lang|zh|何遵約法 韓弊煩刑}}}} |rowspan=2|어찌 (한고조의) 약법을 두고 한비자의 낡고 번잡한 형벌을 따를 것인가 |- |하준약법 한폐번형 |- | {{더 크게|{{lang|zh|起翦頗牧 用軍最精}}}} |rowspan=2|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은 군사를 가장 잘 다루었고 |- |기전파목 용군최정 |- | {{더 크게|{{lang|zh|宣威沙漠 馳譽丹青}}}} |rowspan=2|위엄을 사막에까지 떨치니 단청에 넣어 기리는 구나. |- |선위사막 치예단청 |- | {{더 크게|{{lang|zh|九州禹跡 百郡秦幷}}}} |rowspan=2| 하우씨가 구주를 두어 백군이 진에 병합되고 |- |구주우적 백군진병 |- | {{더 크게|{{lang|zh|嶽宗恆岱 禪主云亭}}}} |rowspan=2| 산중 으뜸은 항산과 태산이라 임금을 정하는 운정이 그곳에 있으며 |- |악종항대 선주운정 |- | {{더 크게|{{lang|zh|雁門紫塞 雞田赤城}}}} |rowspan=2| 안문관과 만리장성, 계전과 적성 |- |안문자새 계전적성 |- | {{더 크게|{{lang|zh|昆池碣石 鉅野洞庭}}}} |rowspan=2| 운남의 곤지와 부평의 갈석, 거야의 넓은 들판과 동정의 큰 호수 |- |곤지갈석 거야동정 |- | {{더 크게|{{lang|zh|曠遠緜邈 巖岫杳冥}}}} |rowspan=2|아득히 멀리 줄지어 있으니 아득하고 묘연하구나. |- |광원면막 암수묘명 |- | {{더 크게|{{lang|zh|治本於農 務茲稼穡}}}} |rowspan=2| 다스림의 근본은 농업이니 때를 맞추어 심고 거두어야 하리 |- |치본어농 무자가색 |- | {{더 크게|{{lang|zh|俶載南畝 我藝黍稷}}}} |rowspan=2|이제 남쪽 이랑을 일궈 나는 기장과 피를 가꾸어 |- |숙재남묘 아예서직 |- | {{더 크게|{{lang|zh|稅熟貢新 勸賞黜陟}}}} |rowspan=2| 익으면 세를 내고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 상을 권하고 (못된 자는) 내쫓으리라. |- |세숙공신 권상출척 |- | {{더 크게|{{lang|zh|孟軻敦素 史魚秉直}}}} |rowspan=2|맹자는 도타운 사람이었고 사어는 강직했으니 |- |맹가돈소 사어병직 |- | {{더 크게|{{lang|zh|庶幾中庸 勞謙謹敕}}}} |rowspan=2|중용을 으뜸으로 삼고 겸손에 힘쓰고 경계해야지 |- |서기중용 노겸근칙 |- | {{더 크게|{{lang|zh|聆音察理 鏡貌辨色}}}} |rowspan=2|들리는 소리 자세히 살피고 거울에 비치는 모양 꼼꼼히 구별하고 |- |영음찰리 감모변색 |- | {{더 크게|{{lang|zh|貽厥嘉猷 勉其祗植}}}} |rowspan=2|그 아름다움이 후세에 미치도록 그 덕을 쌓기를 부지런히 하며 |- |이궐가유 면기지식 |- | {{더 크게|{{lang|zh|省躬譏誡 寵增抗極}}}} |rowspan=2|몸을 살펴 나무라고 탓할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총애가 늘면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성궁기계 총증항극 |- | {{더 크게|{{lang|zh|殆辱近恥 林皋幸即}}}} |rowspan=2| 위태로운 치욕은 부끄러운 일에 의한 것이니 수풀과 언덕에 있는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 |태욕근치 임고행즉 |- | {{더 크게|{{lang|zh|兩疏見機 解組誰逼}}}} |rowspan=2| 양소<ref>한나라의 소광과 소수</ref> 는 기회를 보아 관복을 벗으니 누가 핍박하였으랴 |- |양소견기 해조수핍 |- | {{더 크게|{{lang|zh|索居閒處 沈默寂寥}}}} |rowspan=2|한가한 곳을 찾아 살며 고요히 살며 침묵한 채 |- |색거한처 침묵적요 |- | {{더 크게|{{lang|zh|求古尋論 散慮逍遙}}}} |rowspan=2|옛일을 두고 논장을 찾고 염려를 잊고 소요하니 |- |구고심론 산려소요 |- | {{더 크게|{{lang|zh|欣奏累遣 慼謝歡招}}}} |rowspan=2|기쁜 일은 알리고 누추한 것은 보내며 슬픈 일은 마다하고 기쁜 일을 환영하리 |- |흔주루견 척사환초 |- | {{더 크게|{{lang|zh|渠荷的歷 園莽抽條}}}} |rowspan=2|도랑에 핀 연꽃의 이력, 동산에 자란 풀 가지 |- |거하적력 원망추조 |- | {{더 크게|{{lang|zh|枇杷晚翠 梧桐早凋}}}} |rowspan=2|비파나무 만추에도 푸르른데 오동나무 일찍이 시들었고 |- |비파만취 오동조조 |- | {{더 크게|{{lang|zh|陳根委翳 落葉飄颻}}}} |rowspan=2|고목 뿌리 덮은 낙엽 바람에 날리니 |- |진근위예 낙엽표요 |- | {{더 크게|{{lang|zh|遊鵾獨運 凌摩絳霄}}}} |rowspan=2|댓닭 한 마리 홀로 해엄치며 노을진 하늘을 업수이 여기고 |- |유곤독운 능마강소 |- | {{더 크게|{{lang|zh|耽讀翫市 寓目囊箱}}}} |rowspan=2|(한나라 왕총은) 독서를 즐겨 한 번 보면 상자에 넣은 듯 (잊지 않았다지) |- |탐독완시 우목낭상 |- | {{더 크게|{{lang|zh|易輶攸畏 屬耳垣墻}}}} |rowspan=2|가벼이 경솔하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담장에도 귀가 있다 하기 때문 |- |역유유외 속이원장 |- | {{더 크게|{{lang|zh|具膳飡飯 適口充腸}}}} |rowspan=2|반찬이나 저녁밥이야 먹고 배를 채우면 그만인 것 |- |구선손반 적구충장 |- | {{더 크게|{{lang|zh|飽飫烹宰 飢厭糟糠}}}} |rowspan=2|배부르면 재상의 요리도 물리게 되고 배 고프면 겨 지게미로도 족하니 |- |포어팽재 기염조강 |- | {{더 크게|{{lang|zh|親戚故舊 老少異糧}}}} |rowspan=2|친척이나 옛친구 노소에 따라 음식도 다를 밖에 |- |친척고구 노소이량 |- | {{더 크게|{{lang|zh|妾御績紡 侍巾帷房}}}} |rowspan=2|아내가 길쌈하여 어른 방에 수건을 받들고 |- |첩어적방 시건유방 |- | {{더 크게|{{lang|zh|紈扇圓潔 銀燭煒煌}}}} |rowspan=2|흰 비단으로 지은 부채 둥글고 깨끗하며 은촛대 불빛 밝으니 |- |환선원결 은촉위황 |- | {{더 크게|{{lang|zh|晝眠夕寐 藍笋象床}}}} |rowspan=2|낮에 자고 저녁에 또 자려 푸른 대로 코끼리 침상을 만들지 |- |주면석매 남순상상 |- | {{더 크게|{{lang|zh|絃歌酒讌 接盃舉觴}}}} |rowspan=2|거문거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주연을 열고 술잔을 들어 부딛히고 |- |현가주연 접배거상 |- | {{더 크게|{{lang|zh|矯手頓足 悅豫且康}}}} |rowspan=2|손을 들고 발을 움직여 춤추며 이처럼 평안함을 즐거워하세 |- |교수돈족 열예차강 |- | {{더 크게|{{lang|zh|嫡後嗣續 祭祀烝嘗}}}} |rowspan=2| 맏이는 뒤를 이어 제사를 지내어 |- |적후사속 제사증상 |- | {{더 크게|{{lang|zh|稽顙再拜 悚懼恐惶}}}} |rowspan=2|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여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보여야 한다. |- |계상재배 송구공황 |- | {{더 크게|{{lang|zh|牋牒簡要 顧答審詳}}}} |rowspan=2|편지는 간략히 요지만 쓰고 답신은 자세히 살펴서 하라. |- |전첩간요 고답심상 |- | {{더 크게|{{lang|zh|骸垢想浴 執熱願涼}}}} |rowspan=2|몸에 때가 끼면 목욕할 생각이 나고 열이 차면 서늘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 |- |해구상욕 집열원량 |- | {{더 크게|{{lang|zh|驢騾犢特 駭躍超驤}}}} |rowspan=2|노새며 망아지, 숫송아지가 놀라뛰며 내달리듯 |- |여라독특 해약초양 |- | {{더 크게|{{lang|zh|誅斬賊盜 捕獲叛亡}}}} |rowspan=2|적도는 잡아 죽이고 배역자는 잡아들이리 |- |주참적도 포획반망 |- | {{더 크게|{{lang|zh|布射遼丸 嵇琴阮嘯}}}} |rowspan=2|여포는 활 잘 쏘았고 의료는 돌 잘 던졌으며 혜강은 금을 잘켰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지 |- |포사료환 혜금완소 |- | {{더 크게|{{lang|zh|恬筆倫紙 鈞巧任釣}}}} |rowspan=2|붓을 만든 건 몽념 종이를 만든 건 채륜, 마륜의 교묘한 솜씨<ref>마륜은 지남차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임공자의 낚시대<ref>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ref> |- |염필윤지 균교임조 |- | {{더 크게|{{lang|zh|釋紛利俗 竝皆佳妙}}}} |rowspan=2|이러한 재주를 세상에 푸니 모두다 뛰어나고 신기하였다. |- |석분리속 병개가묘 |- | {{더 크게|{{lang|zh|毛施淑姿 工顰妍笑}}}} |rowspan=2|오나라 모타와 월나라 서시의 자태는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워라 |- |모시숙자 공빈연소 |- | {{더 크게|{{lang|zh|年矢每催 曦暉朗耀}}}} |rowspan=2| 세월은 살같이 언제나 제촉하나 햇빛 달빛은 밝게 빛나 |- |연시매최 희휘낭요 |- | {{더 크게|{{lang|zh|璇璣懸斡 晦魄環照}}}} |rowspan=2|천문을 보는 기계 매달려 돌듯 그믐이 지나 다시 보름이 되니 |- |선기현알 회백환조 |- | {{더 크게|{{lang|zh|指薪修祜 永綏吉劭}}}} |rowspan=2|손가락에 섶불을 단 듯 수양에 전념하면 영원토록 평안하고 길하리라. |- |지신수우 영수길소 |- | {{더 크게|{{lang|zh|矩步引領 俯仰廊廟}}}} |rowspan=2|반듯하게 걸으며 옷길을 끌고 사당에 엎드려 예의를 다하고 |- |구보인령 부앙낭묘 |- | {{더 크게|{{lang|zh|束帶矜莊 徘徊瞻眺}}}} |rowspan=2|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 |속대긍장 배회첨조 |- | {{더 크게|{{lang|zh|孤陋寡聞 愚蒙等誚}}}} |rowspan=2|(이런 글을 쓴 나는) 고루하고 들은 것 없어 어리석단 꾸짖음을 면치 못하리 |- |고루과문 우몽등초 |- | {{더 크게|{{lang|zh|謂語助者 焉哉乎也}}}} |rowspan=2|어조사에는 언재호야가 있다. |- |위어조자 언재호야 |} ==역주 == <references/> = 라이선스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PD-자작}} }} [[분류:한시]] 9hyiy1mxkop94dy9qoy62ov661rd5of 사용자:Jeebeen 2 44056 392563 391721 2025-06-25T15:50:01Z 175.192.98.242 392563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ㅆ빌 개쌔꺄!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mhmygrjkiszb9s4t7dnxd77vcz5qysb 392564 392563 2025-06-25T16:06:30Z 175.192.98.242 392564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ㅆ빌 개쌔꺄!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DeepSeek]]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2wfe0guyzxjr1g3789e4vl8movsakuv 392565 392564 2025-06-25T16:15:20Z Aspere 5453 [[Special:Contributions/175.192.98.242|175.192.98.242]]([[User talk:175.192.98.242|토론]])의 편집을 [[User:Aspere|Aspere]]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389034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iwvj8lbontvrncepad6zu9qfh8679nu 392572 392565 2025-06-26T00:48:28Z 2001:E60:109E:4A42:249B:8017:E9DA:6E7C 392572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애미 뒤진 위키코모리 새끼. 니가 가라 상하이~ 왜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니가 뭔 권력자 새끼가? 그러면 넌 고통만 쌓이가~ 넌 그냥 김종필이야~ 아 왜이리 웃기는 것이냐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3puha5ee880cqvkpapxszcq32rghypm 392574 392572 2025-06-26T01:58:36Z Aspere 5453 [[Special:Contributions/2001:E60:109E:4A42:249B:8017:E9DA:6E7C|2001:E60:109E:4A42:249B:8017:E9DA:6E7C]]([[User talk:2001:E60:109E:4A42:249B:8017:E9DA:6E7C|토론]])의 편집을 [[User:Aspere|Aspere]]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389034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iwvj8lbontvrncepad6zu9qfh8679nu 392598 392574 2025-06-26T07:41:19Z 175.192.98.242 392598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보지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swzd8b300928rtph8h76re6f4p6vvi1 392603 392598 2025-06-26T08:20:29Z Aspere 5453 [[Special:Contributions/175.192.98.242|175.192.98.242]]([[User talk:175.192.98.242|토론]])의 편집을 [[User:Aspere|Aspere]]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389034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iwvj8lbontvrncepad6zu9qfh8679nu 392604 392603 2025-06-26T08:20:48Z Aspere 5453 "[[사용자:Jeebeen]]" 문서를 보호했습니다: 빈번한 훼손 행위 ([편집=자동 인증된 사용자만 허용] (2025년 7월 3일 (목) 08:20 (UTC)에 만료) [이동=자동 인증된 사용자만 허용] (2025년 7월 3일 (목) 08:20 (UTC)에 만료)) 389034 wikitext text/x-wiki {| style="float: right; margin-left: 1em; margin-bottom: 0.5em;" ! [[위키백과:바벨|Language]] |- ! {{user ko}} |- ! {{user en-3}} |- |} == 현재 작업 == * [[틀:글 숨김]] ** [[모듈:hide]] ** 파라미터를 <code>제목=낱말풀이</code> (띄어쓰기는 무시함)로 설정할 경우 자동으로 낱말마다 위키낱말사전으로 향하는 링크를 달아 주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mw:Extension:Scribunto/ko|모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문자열은 [[w:정규표현식|정규표현식]]으로 처리하며, 루아에서는 [[mw:Extension:Scribunto/Lua_reference_manual/ko#패턴|패턴]]이라는 개념으로 일컫어집니다. 위키문헌은 문서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굳이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낱말마다 틀을 찾아 넣는 불편함보단 이게 낫겠죠. **: 참고: [[사용자:Jeebeen/위키문헌과 위키낱말사전이 협업하는 방법]] *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사용자 토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 [[사용자:Jeebeen/okm assistance.js]] - 중세 국어의 가상 키보드를 띄워 줍니다. ; 비기술 * [[사용자:Jeebeen/문헌 작업]] == 다음을 활용함 == * [[w:챗GPT|ChatGPT]] ** 모듈의 전반적인 작성, 코드 조언 ** '''문헌의 OCR''' ** 독해 * 구글 이미지 검색 ** '''문헌의 OCR''' * Maestra AI (추천) ** '''영상, 구술 자료의 자동 받아쓰기''' * [https://vectorizer.ai/ Vectorizer AI] == 주 관심사 == * [[w:방언|방언, 사투리 자료]] ** 한국내 구소련권 지역 출신-고려인 공동체의 구술 자료 *** 러시아어 방언 *** <s>고려말</s> 취소선 처리한 것은 한국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 중 70대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시며, 그 분들은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마당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고려말 채록은 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 [[w:이슬람|쿠란, 하디스들의 한국어 번역]] 저는 대한민국 시흥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안산과 가깝다 보니 안산의 구소련권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어 쿠란과 하디스의 한국어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iwvj8lbontvrncepad6zu9qfh8679nu 번역:주자어류/권17 대학혹문상 大學四或問上 114 86377 392600 392545 2025-06-26T08:08:07Z Thomas Dongsob Ahn 16640 작업중 392600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017 | 다른 표기 = | 부제 = 대학4 / 혹문 상(上)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 편집자 = | 역자 = | 이전 = | 다음 = | 설명 = }} 朱子語類卷第十七 주자어류 권 17 *   大學四或問上 대학 4 / 혹문 상(上)<ref>앞서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 대학에 관하여 논하였다. 권 17은 대학에 관한 네 번째 권이자 대학혹문의 상권에 관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부제가 붙었다. 대학혹문은 주희가 지은 대학의 참고서로 상/하 두 권으로 묶여있다. 가상의 질문자가 질문하면 주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목이 '누군가의 질문(或問)'이다. 논어, 맹자, 중용혹문도 있다.</ref> *    經一章 == 경 1장 == <ref>대학은 경 1장과 전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는 대학의 이 순서에 맞추어 조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혹문 역시 대학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하여 전 10장에서 끝난다. 주자어류 권 17과 18 역시 혹문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한다.</ref>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단락 === *   或問吾子以爲大人之學一段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ref>대학혹문의 각 장은 여러 단락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류 17:1부터 18까지는 모두 그중 첫 번째 단락에 관한 내용이다. 어류 권 17과 18은 대학혹문을 먼저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고 여기다 대학혹문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는 것도 그 분량을 감안하였을 때 적절치 못하다. 박완식이 2010년에 번역한 '대학, 대학혹문, 대학강어'를 옆에 두고 참조하는 것이 좋다. 혹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을 웹상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C%80%ED%95%99#.E3.80.8E.ED.98.B9.EB.AC.B8.E3.80.8F_.EA.B2.BD1.EC.9E.A5 대학혹문 번역문(고려대 의적단)]).</ref> *  17:1 問友仁: “看大學或問如何?”<ref>조선고사본은 상황 묘사가 보다 자세하다. '선생이 내게 물었다: 자네가 오늘 대학혹문을 읽었는데 어떠한가?(先生問友仁曰: 公今日看大學或問如何?)'</ref> '''(선생이) 나(友仁)에게 질문함: 대학혹문을 보니 어떠한가? 曰: “粗曉其義.” <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뜻은 대강 깨쳤으나 아직 다 깨치지 못한 듯합니다. (云: 粗曉其義, 但恐未然.)'</ref> '''(나의) 대답: 그 뜻을 대강 깨쳤습니다. 曰<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생이 한두군데를 찍어서 내게 설명해보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先生擧一二處令友仁說. 先生曰:)'</ref>: “如何是‘收其放心, 養其德性’?” '''(선생이) 말함: 무엇이 '그 놓쳐버린 마음을(放心)<ref>맹자 6A:11. 맹자가 되찾으라고 한 마음은 어진 정서(仁)에 가까우나 주희는 이를 집중하여 각성된 의식인 것처럼 풀이했다. 그래서 주희가 '구방심(求放心)'을 요구할 때 이를 '거경(居敬)' 으로 치환해도 말이 통한다. 실제로 대학혹문에서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장한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본래 맹자에서 '방(放)'과 '존(存)'이라는 동사쌍으로 보이고자 한 이미지는 기르는 개나 닭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난 것을 수색해서 찾아오는 상황이었다. 주인이 고의로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짐승이 집을 나가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므로 '방심'은 '놓친 마음', '잃어버린 마음', '놓아버린 마음', '풀려난 마음', '달아난 마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반대로 '존심(存心)'이나 '구방심'은 그렇게 달아난 것을 되찾아 집안에 가져온 뒤 다시 달아나지 못하게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찾아오다', '보존하다', '간직하다', '간수하다' 등으로 번역한다.</ref> 거두어들이고 그 덕성(德性)을 기른다[收其放心, 養其德性]'는 것인가? 曰: “放心者, 或心起邪思, 意有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至於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截斷不續, 至於耳目言動皆然, 此乃謂之收. 旣能收其放心, 德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之外, 又養箇德性也.” '''(나의) 대답: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란, 혹 마음(心)에 삿된 생각(邪思)이 일어나고, 의지(意)에 망령된 상념(妄念)이 생기며, 귀로 삿된 말을 듣고, 눈으로 혼란한 색을 보며, 입으로 도(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손발의 움직임이 예(禮)에 맞지 않는 데 이르기까지가 모두 놓침[放]입니다.<ref>이 주장의 레퍼런스는 물론 논어 12:1의 '극기복례'이다.</ref> 거두어들임[收]이란, 곧 삿된 생각과 망령된 상념이 있는 지점에서 딱 끊어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귀·눈·말·움직임[耳目言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거두어들인다[收]고 합니다. 자신의 놓쳐버린 마음(放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상 덕성(德性)은 자연히 길러집니다. 방심(放心)을 거두는 것과 별개로 다시 덕성(德性)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曰: “看得也好.” 友仁(69때). '''(선생이) 말함: 잘 보았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 問: 或問"'以七年之病, 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方得. '''질문: 《혹문(或問)》에서 "'일곱 해 된 병에 세 해 묵은 쑥을 구하는[七年之病, 求三年之艾]' 경우<ref>맹자 4A:9. 직전 조목의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친 적 없이 없었던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주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어렸을 적에 도덕원칙들을 신체화/습관화 시킨 뒤 (곧, 소학의 단계) 커서 그러한 도덕원칙들을 이지적으로 묻고 따져서 이해하는 것이다(곧, 대학의 단계). 하지만 주희가 보기에 오늘날에는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소학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 작업이 '경(敬)'공부이다. 비유하자면 평생에 걸쳐 (소학 때 못 했던 것을) 벌충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검정고시 같은 것이다. 일곱 해 된 병은 소학의 공부를 건너뛴 기간이고 세 해 묵은 쑥은 그것을 뒤늦게 따라잡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거경공부이다.</ref> 백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취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미 배움을 잃은[失學]<ref>어렸을 적에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말이다.</ref> 뒤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노력하고 분발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趲補得前許多欠闕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沒長進, 如何要塡補前面!” 賀孫(62이후). '''대답: 시기를 놓친 뒤에 배우려면 반드시 이처럼 이전에 건너뛴 빈칸들을 서둘러[趲] 보충하여야 한다. '남이 한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한다.’<ref>중용 제 20장.</ref>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유유히 세월만 보내며 그날그날 해야할 공부(工夫)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인데 무슨 수로 이전(에 건너뛴) 부분을 메우려 하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 持敬以補小學之闕. 小學且是拘檢住身心, 到後來‘克己復禮’, 又是一段事. 德明(44이후). '''경(敬)을 견지함으로써[持敬]<ref>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을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端慤純一靜專) 유지한다는 말이다(14:19). 조금 더 비근하게 설명하자면 흐리멍텅한 정신을 고조시켜 맑고 투명하고 집중된 상태로 유지하는 명상수련과 흡사하다. 어린아이가 평소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도 엄숙한 선생님 앞에 서거나, 교실에서 무언가를 발표하거나, 그밖에 진지한 이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산만한 의식을 또렷하게 집중시키게 된다. 소학에서 요구하는 공부들, 예컨대 거처를 청소하고 어른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공부들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처럼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가 소학 트레이닝을 겪지 않은 어른들에게 거경/지경 공부를 권하는 것은 A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B를 가져와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A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느긋하게 달성하고자했던 궁극적 목표를 생으로 가져와서 빨리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지난 십년의 공부를 몇년 안에 따라잡아서 해치워야하는 검정고시준비과정과 제일 가깝다. 한편 주희는 이처럼 마음을 특정한 상태로 세팅하고 유지하는 공부를 적극적인 이지적 탐구와 더불어 배움의 두 축으로 삼았다. 전자가 거경(居敬)/지경(持敬), 후자가 궁리(窮理)이다. 전자가 소학의 목표라면 후자는 대학의 목표이니, 주희의 '학'은 결국 소학과 대학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ref> 빼먹은 소학(小學) 단계를 보충한다. 소학(小學)은 일단은 몸과 마음을 꾸준히 붙들어매는[拘檢]<ref>'住'는 동사 뒤에 붙어서 행위의 지속을 나타내는 조사이다.</ref> 것이다. 훗날(에 하게 될)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克己復禮]' (공부의) 경우는 또다른 단계의 일이다.<ref>극기복례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붙들어매는 공부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정도상 더 높은 수준의 공부일 뿐이다. 17:1을 보라.</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7:4 問: “大學首云明德, 而不曾說主敬, 莫是已具於小學?” '''질문: 《대학》 첫머리에서 명덕(明德)을 말하면서 주경(主敬)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주경이) 이미 소학(小學) 단계에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 아닙니까?<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固然. 自小學不傳, 伊川卻是帶補一‘敬’字.” 可學(62때). '''대답: 진실로 그렇다. 소학(小學)이 전해지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천(伊川)<ref>정이(程頤)</ref>이 '경(敬)' 자 하나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5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致知至治國·平天下, 皆不外此. 人傑(51이후). ''' ‘경(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공부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6 問或問說敬處. '''《혹문》에서 경(敬)을 설명한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四句不須分析, 只做一句看.” '''대답: 저 네 구절<ref>대학혹문에서 주희는 경을 다음의 네 가지 문구를 가지고 설명한다. 정씨형제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사량좌의 '상성성법(常惺惺法)', 윤돈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한다는 측면, 상성성법은 집중한 의식의 각성되고 고양된 느낌,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그렇게 집중된 의식의 단단히 안정된 느낌을 형용한다.</ref>은 나누어 분석할 필요 없이 그저 한 구절로 보라. 次日, 又曰: “夜來說敬, 不須只管解說, 但整齊嚴肅便是敬, 散亂不收斂便是不敬. 四句只行著, 皆是敬.” 燾(70때). '''다음 날 다시 말함: 어젯밤에 경(敬)에 대해 설명했는데, 계속 해설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경(敬)이고, 산란하여 수렴하지 못하면 불경(不敬)이다. 저 네 구절은 단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7 或問: “大學論敬所引諸說有內外之分.” '''누군가의 질문: 《대학》<ref>사실은 대학'혹문'이라고 해야 옳다.</ref>에서 경(敬)을 논하며 인용한 여러 설(說)에는 내외(內外)의 구분이 있습니다.<ref>굳이 구분하자면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외면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고 나머지 셋은 내면이다.</ref> 曰: “不必分內外, 都只一般, 只恁行著都是敬.” 僩(69이후). '''대답: 꼭 내외(內外)로 나눌 필요는 없다. 모두 매한가지다. 그저 그렇게 실천해가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ref>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같은 취지의 문답이 실려 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8 問: “敬, 諸先生之說各不同. 然總而行<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言'으로 썼다.</ref>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질문: 경(敬)에 대한 여러 선생의 설(說)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실천하여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면[常存]<ref>'존(存)'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17:1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되는 것입니까?”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斂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履孫(65때). '''대답: 기실 매한가지이다. (마음이) 경건(敬)할 때 같으면 자연히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고[主一無適]', 자연히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며[整齊嚴肅]’, 자연히 '항상 반짝반짝 깨어있고[常惺惺]',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不容一物]'. 다만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 사씨(謝氏)나 윤씨(尹氏)의 설(說)<ref>'상성성'이 사씨, '기심수렴 불용일물'이 윤씨의 설이다.</ref>보다 더 분명하다.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9 或問: “先生說敬處, 擧伊川主一與整齊嚴肅之說與謝氏常惺惺之說. 就其中看, 謝氏尤切當.” '''누군가의 질문: 선생님께서 경(敬)을 설명하신 부분에서 이천(伊川)의 주일(主一)과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 그리고 사씨(謝氏)의 상성성(常惺惺) 설(說)을 거론하셨습니다.<ref>이 설들에 대해서는 17:6을 참조하라.</ref> 그중에서 보면 사씨(謝氏)의 설명이 더욱 절실하고 적절[切當]<ref>'절(切)'은 어떤 설명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친숙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말이다.</ref>합니다. 曰: “如某所見, 伊川說得切當. 且如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若無整齊嚴肅, 卻要惺惺, 恐無捉摸, 不能常惺惺矣.” 人傑(51이후). '''대답: 내가 보기엔 (사씨보다) 이천(伊川)이 적절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몸가짐을 정제엄숙(整齊嚴肅)하게 하면 이 마음이 보존[存]<ref>'존(存)'에 관해서는 17:1을 참조하라.</ref>되어 반짝반짝 깨어있을[惺惺] 수 있게 된다. 만약 정제엄숙(整齊嚴肅)한 자세 없이 반짝반짝 깨어있으려[惺惺] 한다면 아마 구체적으로 붙잡을 데가 없어[無捉摸]<ref>'정제엄숙'은 몸을 이렇게 하고 옷매무새를 저렇게 하라는 행동지침이므로 당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므로 '붙잡을 데'가 있다. '상성성'은 의식의 각성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므로 이 설명 속에는 어떤 행동지침이 없다.</ref> 늘 반짝반짝 깨어있을[常惺惺]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10 問: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자리에 '然則所謂敬者又若何而用力邪下' 14자가 더 들어있다.</ref>擧伊川及謝氏尹氏之說, 只是一意說敬.” '''질문: 《혹문》에서 이천(伊川) 및 사씨(謝氏), 윤씨(尹氏)의 설(說)을 거론한 것은 그저 한 뜻으로 경(敬)을 설명한 것입니까? 曰: ‘主一無適’, 又說箇‘整齊嚴肅’; ‘整齊嚴肅’, 亦只是‘主一無適’意. 且自看整齊嚴肅時如何這裏便敬. 常惺惺也便是敬. 收斂此心, 不容一物, 也便是敬. 此事最易見. 試自體察看, 便見. 只是要敎心下常如此.” '''대답: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하고 다시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 했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역시 그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이다. 어디 한번 정제엄숙(整齊嚴肅)할 때 어떻게 내면이 바로 경건(敬)해지는지 스스로 살펴 보라. '상성성(常惺惺)'해도 곧 경건(敬)하다. '수렴차심 불용일물[收斂此心, 不容一物]'<ref>본래는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이다. 경에 대한 이 네 가지 설명법은 17:6에 자세하니 참조하라.</ref>해도 곧 경건(敬)하다. 이 일은 매우 알기 쉽다. 시험 삼아 스스로 체험[體察]해 보면<ref>'체찰(體察)'은 몸소 체험/관찰하는 것이다.</ref> 바로 알 수 있다. 단지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이 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因說到放心: “如惻隱·羞惡·是非·辭遜是正心, 才差去, 便是放. 若整齊嚴肅, 便有惻隱·羞惡·是非·辭遜. 某看來, 四海九州, 無遠無近, 人人心都是放心, 也無一箇不放. 如小兒子才有智識, 此心便放了, 這裏便要講學存養.” 賀孫(62이후). '''이어서 말이 방심(放心)에 미쳤다: 측은(惻隱)·수오(羞惡)·시비(是非)·사손(辭遜)<ref>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다.</ref> 같으면 바른 마음[正心]이요,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곧 놓친(放) 것이다. 정제엄숙(整齊嚴肅)한다면 곧 (놓친 마음을 다시 붙들어 와서) 측은·수오·시비·사손의 마음이 있게 된다. 내 생각에 사해(四海)와 구주(九州)<ref>온세상을 말한다.</ref> 어디든 멀거나 가깝거나 사람들 각각의 마음은 모두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니, 놓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경우도 지식[智識]이 생기자마자 이 마음을 바로 놓쳐버리게 되니, 이 지점에서 곧 강학(講學)과 존양(存養)<ref>강학과 존양은 각각 궁리와 거경 공부를 말한다. 17:1과 17:3의 주석을 참조하라.</ref>을 필요로 한다. o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1 光祖問: “‘主一無適’與‘整齊嚴肅’不同否?” '''광조(光祖)<ref>주희의 제자 가운데 광조가 셋이나 있다. 일역판은 여기서는 그 중 증흥종(曽興宗, 1146-1212)을 말한다고 주장한다.</ref>의 질문: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은 다르지 않습니까?<ref>둘 다 경건(敬)한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유지한다는 측면을 말한다. 앞의 몇 조목에서 자세하니 참조하라.</ref> 曰: “如何有兩樣! 只是箇敬. 極而至於堯舜, 也只常常是箇敬. 若語言不同, 自是那時就那事說, 自應如此. 且如大學論語孟子中庸都說敬; 詩也, 書也, 禮也, 亦都說敬. 各就那事上說得改頭換面. 要之, 只是箇敬.” '''대답: 어찌 두 종류가 있겠나? 경(敬)은 하나 뿐이다. (거경 공부를) 지극히 하여 요순(堯舜)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역시 언제나 이 하나의 경(敬)일 뿐이다.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러저러한 때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응당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 예컨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모두 경(敬)을 말하고, 《시경》, 《서경》, 《예기》 또한 모두 경(敬)을 말하고 있다. 각각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얼굴을 바꿔가며(改頭換面)<ref>껍데기, 표현방식만 바꾸었지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ref>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경(敬)은 하나일 뿐이다. 又曰: “或人問: ‘出門·使民時是敬, 未出門·使民時是如何?’ 伊川答: ‘此“儼若思”時也.’ 要知這兩句只是箇‘毋不敬’. 又須要問未出門·使民時是如何. 這又何用問, 這自可見. 如未出門·使民時是這箇敬; 當出門·使民時也只是這箇敬. 到得出門·使民了, 也只是如此. 論語如此樣儘有, 最不可如此看.”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문을 나설 때와 백성을 부릴 때 경건(敬)하다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ref>논어 12:2. </ref>라고 하니, 이천(伊川)이 답하기를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할[儼若思]’<ref>예기 곡례 상.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하라(毋不敬,儼若思)'</ref> 때이다’라고 했다.<ref>이정유서 18:10. '질문: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뵙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 하라고 하는데, 아직 문을 나서지 않았고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 대답: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해야 할 때이다. 문을 나섰을 때의 경건함이 이와 같다면 문을 나서기 전에는 어떨지 알 만하다. 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問: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方其未出門未使民時, 如何? 曰: 此儼若思之時也. 當出門時其敬如此, 未出門時可知也. 且見乎外者出乎中者也.)</ref> 이 두 구절<ref>주일무적과 정제엄숙을 말한다.</ref> 모두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毋不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이걸 또 물을 필요가 있나? 이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도 이 경(敬) 하나일 뿐이고,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릴 때에도 역시 이 경(敬) 하나일 뿐이다.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린 뒤에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논어》에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으니, 결코 (이천에게 질문한 어떤 사람 처럼) 저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2 或問“整齊嚴肅”與“嚴威儼恪”之別. '''누군가가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엄위엄각(嚴威儼恪)’<ref>엄숙하고 위엄있는 안색과 거동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편에 등장하는 문구이다.</ref>의 차이에 대해 질문함. 曰: “只一般. 整齊嚴肅雖非敬, 然所以爲敬也. 嚴威儼恪, 亦是如此.” 燾(70때). '''대답: 똑같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 경(敬)은 아니지만 경(敬)을 행하는 수단이다. 엄위엄각(嚴威儼恪) 역시 그렇다.<ref>이정유서 15:182와 같은 취지이다. '엄위엄각은 경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경에 이르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自此入.)'</ref>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13 問: “上蔡說: ‘敬者, 常惺惺法也.’ 此說極精切.” '''질문: 상채(上蔡)<ref>사량좌</ref>가 말하기를 ‘경(敬)이란 늘 반짝반짝 깨어있기[常惺惺] 위한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이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합니다[極精切].<ref>17:9를 참조하라.</ref> 曰: “不如程子整齊嚴肅之說爲好. 蓋人能如此, 其心卽在此, 便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 而內不惺惺者. 如人一時間外面整齊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寬了, 便昏怠也.” '''대답: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만큼 좋지는 않다. 대개 사람이 이처럼<ref>정제엄숙을 말한다.</ref> 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곧 여기에 있어서[在此]<ref>의식(consciousness)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반짝반짝 깨어있게[惺惺] 되기 때문이다. 외면이 정갈하고 단정하며 엄숙(整齊嚴肅)하면서 내면이 반짝반짝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잠시라도[一時間] 외면이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곧 그 시간만큼 깨어있게 되고, 잠시라도 (몸가짐이) 풀어지면[放寬] 곧 흐릿하고 나태해지게[昏怠] 된다. 祖道曰: “此箇是氣. 須是氣淸明時, 便整齊嚴肅. 昏時便放過了, 如何捉得定?” '''내(祖道)가 말함: 이것은 기(氣)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기(氣)가 맑고 밝을 때[淸明]는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흐릿할 때는 곧 방만하게[放過] 되니, 어떻게 해야 제대로 붙잡을 수 있습니까?<ref>'정(定)'은 현대 중국어 '주(住)'와 같다. 동사의 뒤에 붙어 'x得住'라고 하면 그 동작을 확실히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주고 'x不住'는 그 동작을 제대로 해낼 역량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ref>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志者, 氣之帥也.’ 此只當責志. 孟子曰: ‘持其志, 毋暴其氣.’ 若能持其志, 氣自淸明.” '''대답: ‘심지(志)는 기(氣)를 통솔하는 장수이다[志者, 氣之帥也].’<ref>맹자 2A:2. 이른바 부동심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志)는 오늘날 말로 의지나 심지, 기(氣)는 의욕이나 기운, 에너지 정도에 해당한다. 심지가 장수라면 기는 병사들이다. 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에너지는 병사들에게서 나오지만(의욕과 기운), 병사들 각각이 어디로 움직여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방향성은 장수에게서 나온다(의지와 심지). 예컨대 시험기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심지의 명령이지만 실제로 공부하지 않고 침대에 붙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욕과 기운의 항명과 태업 때문이다.</ref> 이는 응당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심지(志)를 붙잡되 자기 기(氣)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持其志, 毋暴其氣]’고 하셨다.<ref>맹자 같은 곳.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병사들이 움직여야 한다. 장수의 뜻이 굳건하고 일관되면 병사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지를 굳건히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항명과 태업에도 이유가 있으니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일하고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경우 그런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Kwong-loi Shun, 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1997). P.68, 112-119를 참조하라.</ref> 만약 자기 심지(志)를 붙잡을 수 있다면 기(氣)는 저절로 맑고 밝아진다[淸明]. 或曰: “程子曰: ‘學者爲習所奪, 氣所勝, 只可責志.’ 又曰: ‘只這箇也是私, 學者不恁地不得.’ 此說如何?” '''누군가 말함: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자는 습관에게 빼앗기고 기(氣)에게 패배하니,<ref>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라.</ref> 단지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ref>이정유서 15:96. '배우는 자는 기에게 패배하고 습관에게 빼앗기니, 단지 심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學者, 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문구의 배치가 다르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고, 또 (심지를 붙잡으려는 것에 관해서)‘이 또한 사사로운 마음(私)일 뿐이지만,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ref>이정외서 8:6. '심지를 붙잡는 것을 논하다 선생이 말함: (심지를 붙잡으려는 마음) 또한 사사로운 마음일 뿐이다. 그래도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因論持其志先生曰: 只這箇也是私. 然學者不恁地不得.)'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어떻습니까?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涉於人爲, 便是私. 但學者不如此, 如何著力! 此程子所以下面便放一句云‘不如此不得’也.” 祖道(68때). '''대답: 인위(人爲)에 관련되면 곧 사사롭다(私).<ref>기운과 의욕의 자연스러운 추세에 맡겨두지 않고 심지를 다져서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의욕을 몰고 가려는 것은 어느정도 작위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f> 다만 배우는 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쓰겠는가[著力]?<ref>'착력(著力)' 두 글자에 이미 작위성이 담겨있다.</ref> 이것이 정자(程子)께서 (사사롭다고 한 다음 그) 아래에다 바로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문을 덧붙이신 까닭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14 因看涪陵記善錄, 問: “和靖說敬, 就整齊嚴肅上做; 上蔡卻云‘是惺惺法’, 二者如何?” '''부릉기선록(涪陵記善錄)<ref>정이의 제자 윤돈(尹焞)의 어록이다. 기록자는 윤돈의 제자인 풍충서(馮忠恕). 윤돈과 풍충서가 교유한 곳이 사천 부릉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청 중엽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실되었다. 이정외서 권 12에서 이 책으로부터 여덟 조목을 인용하고 있다.</ref>을 보다가 (선생이) 질문함: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은 경(敬)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측면에서 설명하고,<ref>본래 윤돈의 설명은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윤돈의 지침은 그 초점이 엄숙함에 있으므로 정이의 '정제엄숙'과 조응한다.</ref>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는 오히려 ‘반짝반짝 깨어있게 해주는 방법[惺惺法]이다’라고 하니, 이 두 설명이 어떠한가?<ref>비슷한 취지의 문답이 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실려있다. 정자상은 이 조목의 기록자인 정가학이다. '(질문) 和靖論敬以整齊嚴肅, 然專主於內; 上蔡專於事上作工夫, 故云敬是常惺惺法之類. (답변) 謝尹二說難分內外, 皆是自己心地功夫. 事上豈可不整齊嚴肅, 靜處豈可不常惺惺乎?'</ref> 厚之云: “先由和靖之說, 方到上蔡地位.” '''후지(厚之)가 대답함: 먼저 화정(和靖)의 설(說)을 따른 뒤에야 상채(上蔡)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曰: “各有法門: 和靖是持守, 上蔡卻不要如此, 常要喚得醒. 要之, 和靖底是, 上蔡底橫. '''(선생이) 말함: 각각 (나름의) 법문(法門)<ref>불교 용어. 진리에 이르는 방법, 경로 등을 이른다.</ref>이 있다. 화정(和靖)은 붙잡아 지키는 것[持守]이다. 상채(上蔡)는 이와 같이 하려 하지 않고 늘 깨어있고자[喚得醒] 한다. 화정(和靖)의 설은 옳고, 상채(上蔡)의 설은 비뚤다. <ref>횡설(橫說)은 횡설수설의 횡설이다. 조리가 없거나, 너무 고원하거나, 견강부회한 억지 주장을 이른다. 주희가 사량좌의 주장을 횡설이라고까지 했을까 의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잠재적 의문에 답하는 차원에서 고문해의는 114:40에서 주희가 여조겸의 주장 하나를 '횡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상채의 설을 '횡'이라고 했으면 화정의 설은 '종(縱)'이나 '직(直)'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시(是)'와 '직(直)'은 자형이 가까우므로 전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교감할 경우 화정의 설과 상채의 설 사이에 우열과 정부정은 없고 범주의 차이만 남게 된다.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단 이렇게 남겨둔다.</ref> 渠<ref>조선고사본과 성화본은 '渠'를 '某'라고 적었다. 주자어류고문해의에서는 이것을 '횡거'라고 볼 경우 이어지는 '역왈경이직내'가 불완전인용이 된다고 지적하고,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일역판의 역자들 역시 이하의 '역왈경이직내'가 장재의 저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渠'를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다만, 고문해의는 이 앞 부분을 '화정의 설은 옳고 상채의 설은 비뚤다(和靖底是, 上蔡底橫.).'라고 구두를 끊어서 읽어야 한다고 보았고 일역판은 '횡모(橫某)가 말했다'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류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기록자가 정가학(鄭可學)인 조목은 자주 비경(蜚卿)과 후지(厚之)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해 다자간 문답을 주고받으므로 각 발언이 누구의 질문이고 누구의 답변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정가학 조목들은 자주 자신의 발언을 '某曰'이나 '某云' 등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은데, 예컨대 4:38이나 7:24, 8:27, 19:93, 28:34, 106:32 등을 살펴보라.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일역판 보다는 고문해의의 제안이 더 합리적이다. 여기서는 고문해의를 따른다.</ref>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云'이라고 적었다.</ref>: ‘易曰: “敬以直內.” ’伊川云: ‘主一.’ 卻與和靖同. 大抵敬有二: 有未發, 有已發. 所謂‘毋不敬’, ‘事思敬’, 是也.” '''내(某)가 말함: 《주역》에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한다[敬以直內]'고 하였고,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마음을 하나로 한다[主一]’고 하였으니, 오히려 화정(和靖)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경(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생각과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시점[未發]의 경과 이미 발한 뒤[已發]의 경입니다. 이른바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하라[毋不敬]’<ref>예기 곡례 상.</ref>와 ‘일을 할 적에는 경건할 것을 생각하라[事思敬]’<ref>논어 16:10.</ref>가 그것입니다.<ref>미발의 경과 이발의 경의 구분에 관해서는 17:11을 참조하라.</ref> 曰: “雖是有二, 然但一本, 只是見於動靜有異, 學者須要常流通無間." '''(선생이) 말함<ref>고문해의와 일역본 모두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비록 두 가지가 있다 해도 뿌리는 하나이니, 그저 동(動)과 정(靜)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항상 (동/정 사이의) 흐름이 중단없이 자연스럽게 통하게 해야 한다. <ref>17:11의 논의를 참조하라. 정시의 경은 문을 나서기 전의 경건함이고 동시의 경은 문을 나서서 사태와 사물에 대처할 때의 경건함이다. 앞선 질문에서의 인용구로 말하자면 주역의 '경이직내'와 이천의 '주일무적', 윤돈(화정)의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정시의 경건함이다. 논어의 '사사경'은 동시의 경건함이다.</ref> 又: "如和靖之說固好, 但不知集義, 又卻欠工夫." '''또 (내가 말함)<ref>이 대목을 이렇게 독립시켜 질문자의 질문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직전의 '曰: 雖是有二...'와 직후의 '曰: 亦是...'의 관계가 불분명해진다. 고문해의의 경우 일단은 앞쪽 曰을 주희의 대답으로, 뒤쪽 '曰'을 질문자의 추가 질문이라고 보았으나, 실은 상세히 읽어 보면 질문하는 말투가 아니어서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앞의 왈과 뒤의 왈을 모두 주희의 말로 해석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이렇게 질문자의 말로 떼어냈다. 여기서는 일역판을 따랐다.</ref>: 화정(和靖)의 설(說) 같은 경우 물론 좋긴 하지만 (그는) '의(義)에 부합하는 행위를 오래 축적해야 함[集義]'<ref>맹자 2A:2.</ref>을 알지 못했고, 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힘씀[工夫]이 부족했습니다.<ref>질문자는 화정의 경을 미발의 경건함, 정시의 경건함 쪽에 배속하고 있다. 이 경우 수행자 자신이야 홀로 방에 앉아 마음을 경건하게 길러낼 수 있을지라도 현실 사회 속에서 실질적인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매 순간 올바르고 경건한 선택을 내림으로써 스스로를 키워내는 과정은 겪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송대 문헌에서 거경(居敬)과 집의(集義) 공부를 이처럼 동/정, 내/외, 체/용의 두 방면으로 구분한 경우가 많다. 이정유서 18:101 '질문: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응당 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경은 (내면을) 함양하는 것 뿐이다.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모름지기 '집의'를 써야 한다.(問: 必有事焉, 當用敬否? 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질문: 경과 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경은 자신을 붙잡는 도리이고 의는 시비를 알고 이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의가 된다.(問: 敬義何別? 曰: 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또 남헌집(南軒集) 권 32 답유성지(答㳺誠之)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경과 집의 공부는 병행하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다. 만약 경건하게 할 줄만 알고 의로운 행위를 축적할 줄은 모른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 또한 멀뚱히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니 어떻게 마음의 본체가 사방으로 두루 흘러 영향을 미칠 수 있겠나? 집(集)은 축적한다(積)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에 의로움(義)없는 것이 없으되 (그 의로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드러나니, 구체적인 사태 하나하나에서 (의로운 판단과 행위를) 모아서 축적해야 한다.(居敬集義, 工夫並進, 相須而相成也. 若只要能敬, 不知集義, 則所謂敬者, 亦塊然無所爲而已, 烏得心體周流哉? 集訓積, 事事物物, 莫不有義, 而著乎人心, 正要一事一件上集.)'</ref> 曰: “亦是渠才氣去不得, 只得如此. 大抵有體無用, 便不渾全.” '''(선생의) 대답<ref>고문해의에서는 일단 주희의 말로 보았으나 확신하지 못했다. 일역판도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그는<ref>윤돈을 말한다.</ref> 역시 그 재기(才氣)<ref>재치있고 민활함을 말한다.</ref>가 부족했기에[去不得]<ref>'去得'은 현대 중국어 '可以'와 같다. '去不得'은 이에 대한 부정표현이다. 주희가 보기에 윤돈은 순발력이나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묵묵히 정진하는 캐릭터였다. 예컨대 101:102-122를 보라.</ref> 단지 그와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개 본체(體)만 있고 작용(用)이 없으면 온전할[渾全] 수 없다.<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ref> 又問: “南軒說敬, 常云: ‘義已森然於其中.’” '''다시 질문함<ref>기록자인 가학의 질문인 듯하다.</ref>: 남헌(南軒)<ref>장식(張栻)이다.</ref>은 경(敬)을 설명할 적에는 늘 ‘(경건하기만 하면) 의(義)는 이미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義已森然於其中]’고 말합니다.<ref>남헌집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위 주석에서 인용했듯 장식은 개인적 차원에서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과 사회적 차원에서 시비판단을 내리고 의로운 행적을 누적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말한 바 있다.</ref> 曰: “渠好如此說, 如仁智動靜之類皆然.” 可學(62때). '''대답: 그는 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仁)·지(智)·동(動)·정(靜) 등에 (대해서 말할 적에) 모두 그러하다.<ref>장식의 계사논어해(癸巳論語解) 권3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과 정이라는 것은 인(仁)과 지(知)의 본질[體]이니, 물을 좋아하고(樂水) 산을 좋아(樂山)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동(動)하면 즐겁고 정(靜)하면 장수한다. 일삼는 바 없이 실천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항상 영원히 올바르며 굳건하니 어찌 장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知)의 본질은 동적이지만 이치는 각기 멈추는 곳이 있으니 정(靜)이 결국 그 속에 있다. 인(仁)의 본질은 정적이지만 두루 흘러 쉬지 않으니 동(動)이 결국 그 속에 있다. 동과 정이 교차하여 드러나며 본체와 작용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 인과 지의 (진정한) 뜻을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라면 (동정과 체용의 관계를) 알아보지 못한다.(動靜者, 仁知之體, 樂水樂山, 言其體則然也. 動則樂, 靜則夀. 行所無事, 不其樂乎? 常永貞固, 不其夀乎? 雖然, 知之體動, 而理各有止, 靜固在其中矣. 仁之體靜, 而周流不息, 動亦在其中矣. 動靜交見, 體用一源, 仁知之義, 非深體者, 不能識也.)'</ref>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15 問謝氏惺惺之說. '''사씨(謝氏)의 '성성(惺惺)' 설(說)에 대하여 질문함. 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說敬, 卻只以‘整齊嚴肅’言之, 此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대답: '성성(惺惺)'이란 마음이 흐릿하지 않다는[不昏昧] 말이니, 그저 이것이 바로 경(敬)이다. 요즘 사람들은 경(敬)에 대해 말할 적에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만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도 물론 경(敬)이긴 하다만, 마음이 만약 흐릿하여 이치를 밝게 비춰주지 못한다면, 비록 억세게 붙잡는다[强把捉]<ref>주희는 의식(consciousness)을 바짝 긴장시켜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로 유지하는 행위를 대개 물건을 손으로 세게 쥐고 있는 느낌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파착(把捉), 지(持), 지수(持守) 등은 글자는 달라도 동일한 현상을 지시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ref> 한들 어찌 경(敬)이 될 수 있겠는가? 又問孟子告子不動心. '''또, 맹자(孟子)와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질문함. 曰: “孟子是明理合義, 告子只是硬把捉.” 砥(61때). '''대답: 맹자(孟子) (의 부동심은) 이치를 밝히고 의로움(義)에 부합하여 (획득하는 것)이고, 고자(告子)는 단지 (마음을) 억지로 단단히 붙잡아[硬把捉]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ref>부동심을 논한 맹자 2A:2는 난해한 조목이다. 주자어류 권 52의 200여 조목이 모두 이에 관한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주희가 생각하기에 고자는 세상의 여러 일과 서책 등으로부터 이치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도가적인 인물이다. 세상 일을 관찰하고 서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희가 생각하는 맹자의 부동심은 적극적으로 이치를 따져서 파악하고(즉, 지언知言)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즉, 집의集義)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이때문에 맹자의 부동심을 명리합의(明理合義)라고 평가하고 고자의 부동심을 경파착(硬把捉)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이때 명리는 이지적 노력, 집의는 실천적 노력이다. 자세한 분석은 장원태, "맹자 3.2에 대한 고찰", 2013과 김명석, "不動心 획득을 위한 孟子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한 고찰", 2021을 참조하라.</ref> 지(砥)의 기록. (61세 때) *  17:16 或問: “謝氏常惺惺之說, 佛氏亦有此語.” '''누군가의 질문: 사씨(謝氏)<ref>사량좌이다.</ref>의 상성성(常惺惺) 설(說)<ref>앞서 십여 조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의 경우, 불씨(佛氏) 역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曰: “其喚醒此心則同, 而其爲道則異. 吾儒喚醒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 佛氏則空喚醒在此, 無所作爲, 其異處在此.” 僩(69이후). '''대답: 이 마음을 일깨우는[喚醒此心] 점에서는 같지만 그 도(道)의 성격은 다르다. 우리 유학(儒學)에서는 이 마음을 일깨워 그것이 많은 도리를 관조하게[照管] 하려는 것인데, 불씨(佛氏)는 헛되이 일깨워[在此]<ref>'재차'는 의식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실제로) 하는 바가(作爲) 아무것도 없으니, 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17 問: “和靖說: ‘其心收斂, 不容一物.’” '''질문: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이‘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했습니다.<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斂. 他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直是更不著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賀孫(62이후). '''대답: 이 마음이 그 어떤 대상에도 전혀 붙어있지 않으면[不著一物] 그게 바로 수렴(收斂)이다. 그는 윗 구절에서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사당[神祠]에 들어갈 때, 그때에는 그 어떤 사안도 전혀 마음에 더 붙일 수 없고 단지 공경(恭敬)함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ref>사고전서본 화정집(和靖集) 권 7, '예컨대 누군가 사당에 들어가 경의를 표할 적에 그 마음이 수렴되어 그 어떤 다른 사안도 전혀 붙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로 집중됨[主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且如人到神祠中致敬時, 其心收斂, 更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ref> 이 말이 매우 친근하고 절실하다. 지금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을 전일하게 할 수 있다면 곧 바짝 수렴하여 그 어떤 빈틈[空罅]도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思量]을 마치지 못했는데 또 다른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 버리면 마음은 곧 두 갈래 길이 되어버린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8 問尹氏“其心收斂不容一物”之說. '''윤씨(尹氏)<ref>윤돈.</ref>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설(說)에 대한 질문. 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所亂, 便是不容一物也.” '''대답: 마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주인으로 세워[主]<ref>'주(主)'자의 번역이 까다로운데, 전통적으로 '주장하다', '위주로 하다'와 같이 옮긴다. 여기서는 자신의 내면에 품은 여러 생각들의 위계서열에 있어서 최상의 자리, 즉 '주인'의 자리에 어떤 생각이나 마음가짐을 올려두었다는 의미에서 이상과 같이 번역했다. </ref> 다른 일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곧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問: “此只是說靜時氣象否?” '''질문: 이는 고요할 때[靜時]의 기상(氣象)을 설명한 것 아닙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又問: “只靜時主敬, 便是‘必有事’否?” '''재질문: 고요할 때[靜時] 경(敬)을 주인으로 세우는[主] 것이 곧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必有事]'<ref>본래 출전은 맹자 2A:2. 정씨 형제에 의하면 마음의 고요한 측면에 대해서도 모종의 의식적[用意] 노력을 동반한 공부가 필요하니 그것이 바로 경(敬)이다.(이정유서 18:35) 맹자의 '반드시 일이 있다[必有事]'에서 '일삼다'는 의식적 노력에 대한 요청인데, 여기서 맹자가 요청한 것을 정씨 형제는 경공부라고 해석했다. 이정유서 15:186'필유사언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니, 경이다.(必有事焉, 謂必有所事, 是敬也)'. 주희는 이러한 해석이 맹자의 본래 문맥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배격하지는 않는다. 52:162, 회암집 권40 답하숙경 제 29서('主敬存養, 雖説必有事焉, 然未有思慮作爲, 亦靜而已.'), 권 61 답임덕구(答林德久) 제 6서(질문: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必有事焉而勿正]’에 대해서, 명도와 이천은 대부분 “경(敬)을 위주로 한다”하고, 일설에는 “마땅히 의(義)를 모아야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위 글의 ‘의(義)를 모아 생겨나는 것이다’를 이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한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선(善)을 축적하는 공부가 아니겠습니까?‘必有事焉而勿正’, 二程多主於敬, 一說須當集義, 是承上文‘是集義所生者’而言. 所謂必有事, 則積集衆善工夫否? 답변: 맹자의 앞뒤 구절에 ‘경(敬)’자는 없고, ‘의(義)’자만 있을 뿐입니다. 정자는 이를 바꾸어서 ‘경(敬)’자로 설명했는데, 맹자의 본의와는 다릅니다. 집주를 보면 또한 자세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孟子上下文無‘敬’字, 只有‘義’字, 程子是移將去‘敬’字上說, 非孟子本意也. 集註亦可細玩.)등을 보라. 이 '일삼음[事]'을 주희는 기본적으로 '의로운 행실을 축적[集義]'하는 행위로 본다. 예컨대 52:93, 97, 167 등을 보라.</ref> 아닙니까? 曰: “然.” 僩(69이후). '''대답: 그렇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단락 === 此篇所謂在明明德一段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  17:19 問: “或問說‘仁義禮智之性’, 添‘健順’字,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을 설명하면서 ‘건(健)'과 '순(順)’ 자를 첨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ref>대학혹문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가 널리 작동하여 세상 만물을 틔워주고 길러주는데 그 창조하고 변화하는 내용물은 (따지고 보면) 음양과 오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음양과 오행이란 것도 (음양오행은 그 분류상 氣인데) 반드시 먼저 이치가 있고 난 다음에 기(氣)가 있는 것이요, 사물이 (실제로) 탄생한 측면에서는 또 기(氣)가 (먼저) 응취한 덕분에 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의 탄생은 필히 (먼저)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건, 순,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있게 되고, 필히 이 기를 얻은 연후에 혼, 백, 오장, 백해의 신체가 있게 된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의 진수와 2&5(음양과 오행이다)의 정수가 신비롭게 합쳐져 (사람이 탄생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대개 맹자이래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적에는 '인의예지' 혹은 '인의예지신' 정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건'과 '순' 두 형용사가 더 들어갔으니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ref> 曰: “此健順, 只是那陰陽之性.” 義剛(64이후). '''대답: 이 건순(健順)이란 그저 저 음양(陰陽)의 성질일 뿐이다.<ref>주역에서 순양괘인 건(乾)괘의 성질이 굳건함(健), 순음괘인 곤(坤)괘의 성질이 유순함(順)이다. 인의예지신의 경우는 대개 백호통(白虎通)에서 정리한 내용에 따라 오행(목화토금수)에 하나씩 배당한다. 예컨대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해당하며 그 방위는 동쪽이다. 어류 6:45를 참조하라. 대학혹문에서 인간의 탄생을 말하면서 단순히 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만 했다면 인의예지신만 언급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만 '음양'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 했으니 음과 양의 성질에 해당하는 글자를 하나씩 더 첨부해서 앞뒤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ref>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7:20 問<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或問中' 세 글자가 더 있다.</ref>“健順仁義禮智之性”. ''' '건(健)·순(順)·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에 대한 질문.<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此承上文陰陽五行而言. 健, 陽也; 順, 陰也; 四者, 五行也. 分而言之: 仁禮屬陽, 義智屬陰.” '''대답: “이는 윗글의 음양(陰陽)·오행(五行)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건(健)은 양(陽), 순(順)은 음(陰)이며, 네 가지<ref>인의예지(仁義禮智)</ref>는 오행(五行)이다. 나누어 말하면,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仁何以屬陰?” '''질문: ‘하늘의 도(道)를 세우니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우니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道)를 세우니 인(仁)과 의(義)라 한다.’<ref>주역 설괘전. 설괘전의 설명대로라면 음-유-인, 양-강-의가 각각 같은 범주로 묶여야 한다. 이에 대한 주희의 반론은 어류 6:54를 참조하라.</ref>고 했는데, 인(仁)이 어찌하여 음(陰)에 속합니까? 曰: “仁何嘗屬陰! 袁機仲正來爭辨.<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일곱자가 없다. 서산독서기 갑집 권 8에서는 이 부분을 '袁機仲力爭'이라고 썼다.</ref> 他<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便'자가 더 있다.</ref>引<ref>'타인' 두 글자는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주석으로 처리했다.</ref>‘君子於仁也柔, 於義也剛’爲證. 殊不知論仁之定體, 則自屬陽. 至於論君子之學, 則又<ref>조선고사본에는 '又'자가 없다. </ref>各自就地頭說, 如何拘文牽引得! 今只觀天地之化, 草木發生, 自是條暢洞達, 無所窒礙, 此便是陽剛之氣. 如云: ‘采薇采薇, 薇亦陽<ref>하서린의 전경당본은 이 글자를'作'이라고 썼다.</ref>止.’ ‘薇亦剛止.’ 蓋薇之生也, 挺直而上, 此處皆可見.” '''대답: 인(仁)이 어찌 일찍이 음(陰)에 속했겠는가? 때마침 원기중(袁機仲)<ref>원추(袁樞, 1131-1205)의 자가 기중이다. 어류 6:55를 보면 그는 의를 양에, 인을 음에 배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회암집 권 38의 답원기중별폭(答袁機仲別幅)에도 원기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주희의 반론이 실려있으니 참조하라.</ref>이 (그런 내용으로) 논쟁을 걸어왔다.<ref>여기서 '래(來)'는 찾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쪽을 '향해서' 어떤 동작을 수행했다는 뜻에 가깝다.</ref> 그는 ‘군자는 인(仁)에 대해서는 유(柔)하고, 의(義)에 대해서는 강(剛)하다’<ref>양웅의 법언(法言) 군자(君子)편. 주자어류 6:136을 보면 주희도 양웅의 이 발언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거나, 본체가 강한 덕목이 작용은 유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웅과 자신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려고 할 뿐이다.</ref>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는 인(仁)의 확정적 본질[定體]을 논하자면 당연히 양(陽)에 속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군자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또 각자의 경우[地頭]에 맞게 설명한 것이니,<ref>고문해의에서는 인의 확정적 본질을 논하는 경우에는 양에 속하고 인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음에 속한다고 정리했다.</ref> 어찌 (양웅의 법언에서 사용한) 문자(의 표현)에 얽매이는가?<ref>구문색인(拘文牽引)은 표현에 구애되어 얽매인 것이다.</ref> 이제 가만 보면 천지가 변화[天地之化]하여 초목이 탄생하고 발육할 적에 자연히 쭉쭉 뻗어나가 막히거나 걸리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양강(陽剛)한 기(氣)이다. 예를 들어 ‘고사리 캐고 고사리 캐니, 고사리 또한 양(陽)하네[采薇采薇, 薇亦陽止].’ ‘고사리 또한 강(剛)하네[薇亦剛止].’라 하였다.<ref>시경 소아 녹명지십 채미(采薇)편. 시경 쪽 원문은 '채미채미, 미역작지(采薇采薇 薇亦作止)', '채미채미, 미역유지(采薇采薇, 薇亦柔止)', '채미채미, 미역강지(采薇采薇, 薇亦剛止)'인데, 이는 고사리가 막 땅에서 자라나와 부드러운 단계를 거쳐 다 자라서 뻣뻣한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경과를 노래한 것이다. 주희는 우선 '作'을 '陽'으로 잘못 썼고, 또 중간에 위치한 '柔'를 생략하고 마지막 '剛'만을 인용함으로써 시경 채미편을 자신이 앞서 주장한 것처럼 초목이 양강(陽剛)하다는 말의 경전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ref> 대개 고사리는 나면서부터 똑바로 위로 자라니, 이러한 (고사리의 특성)에서 (초목의 양강(陽剛)한 성질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問: “禮屬陽. 至樂記, 則又以禮屬陰, 樂屬陽.” '''질문: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禮)는 양(陽)에 속합니다. (하지만) 〈악기(樂記)〉에서는 또 예(禮)를 음(陰)에 배속하고 악(樂)을 양(陽)에 배속합니다.<ref>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기 악기편에서는 악을 하늘에, 예를 땅에 배속했다. '악은 하늘에서 말미암아 제작하고 예는 땅을 따라 제작한다(樂由天作, 禮以地制)'</ref> 曰: “固是. 若對樂說, 則自是如此. 蓋禮是箇限定裁節, 粲然有文底物事; 樂是和動底物事, 自當如此分. 如云‘禮主其減, 樂主其盈’之類, 推之可見.” 僩(69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악(樂)과 한 쌍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다. 대개 예(禮)는 한정짓고 선을 그으며[限定裁節] 찬란하게 문채가 있는[粲然有文] 것이고, 악(樂)은 조화롭고 감동시키는[和動]<ref>예기 악기편에 나오는 표현이다.</ref>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예가 양, 악이 음으로) 나뉜다. ‘예(禮)는 줄이는[減] 것을 위주로 하고, 악(樂)은 채우는[盈] 것을 위주로 한다[禮主其減, 樂主其盈]’라고 하는 것 등은 (앞선 내용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ref>예기 악기편. '악이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예란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줄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악은 채우는 것을 위주로 한다.(樂也者,動於內者也;禮也者,動於外者也。故禮主其減,樂主其盈.)' 줄이는 것은 '음'적인 운동, 채우는 것이 '양'적인 운동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떠올려 보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1 問: “健順在四端何屬?” '''질문: 건순(健順)은 사단(四端) 중 어디에 속합니까? 曰: “仁與禮屬陽, 義與智屬陰.” '''대답: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小學: ‘詩·書·禮·樂以造士.’ 注云: ‘禮, 陰也.’” '''질문:《소학(小學)》에 ‘시(詩)·서(書)·예(禮)·악(樂)으로써 선비를 만든다’<ref>소학에서 예기 왕제편을 인용한 부분이다.</ref>고 하였는데, 주(注)에 ‘예(禮)는 음(陰)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f>주석은 예기 왕제편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ref> 曰: “此以文明言, 彼以節制言.” '''대답: 이쪽은 문채나고 빛나는(文明) 측면에서 (예를) 설명한 것이고<ref>양에 속한다는 설명이다.</ref> 저쪽은 구별짓고 제약하는(節制)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ref>소학의 주석에 대한 설명이다.</ref> 問: “禮<ref>성화본은 '義'로 썼다. 이 조목의 첫 질문의 내용을 보나 이어지는 대화의 맥락상으로 보나 '義'가 더 어울리므로 이쪽으로 번역했다.</ref>智是束斂底意思, 故屬陰否?” '''질문: 의(義)와 지(智)는 거두어들이는[束斂] 느낌이 있으므로 음(陰)에 속하는 것입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或問: “智未見束斂處.” '''누군가의 질문: 지(智)는 거두어들이는 측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ref>일역판은 이 질문과 6:56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여기서의 '누군가'가 해당 조목의 기록자인 심한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ref> 曰: “義猶略有作爲, 智一知便了, 愈是束斂. 孟子曰: ‘是非之心, 智也.’ 纔知得是而愛, 非而惡, 便交過仁義去了.” 胡泳(69때). '''대답: 의(義)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作爲) 조금 있지만, 지(智)는 한 번 알면 그걸로 끝이니 더욱 거두어들이는 쪽이다. 맹자(孟子)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라고 한다. 옳은[是] 줄 알고서 사랑하고 그른[非] 줄 알고서 미워하자마자 인(仁)과 의(義)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호영(胡泳)의 기록. (69세 때) *  17:22 問陰陽五行健順五常之性. '''음양(陰陽)·오행(五行)·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에 대한 질문.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陰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且如狗子, 會咬人底, 便是稟得那健底性; 不咬人底, 是稟得那順底性. 又如草木, 直底硬底, 是稟得剛底; 軟底弱底, 是稟得那順底.” 僩<ref>조선고사본에서는 '기손(蘷孫)'으로 썼다.</ref>(69이후). '''대답: 굳건함(健)은 저 양(陽)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고, 유순함(順)은 저 음(陰)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며, 다섯가지 떳떳한 품성(五常)은 오행(五行)의 이치(理)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人物]은 모두 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을 부여받았다. 또 예컨대 개[狗子] 중에 사람을 무는 놈은 바로 저 굳건(健)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요, 사람을 물지 않는 놈은 저 유순(順)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다. 또 초목(草木) 중에 곧고 단단한 것은 강(剛)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저 윤순(順)<ref>이 글자는 엄밀한 문언이었으면 '柔'라고 썼어야 한다.</ref>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3 問: “或問‘氣之正且通者爲人, 氣之偏且塞者爲物’,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바르고 통한[正且通]<ref>바르다는 것은 도덕적 올바름보다는 똑바로 서있는 물건의 경우처럼 밸런스가 좋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통함은 공간적으로 이동할 때 장애 없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이다.</ref> 기(氣)는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偏且塞] 기(氣)는 사물이 된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物之生, 必因氣之聚而後有形, 得其淸者爲人, 得其濁者爲物. 假如大鑪鎔鐵, 其好者在一處, 其渣滓又在一處.” '''대답: 사물의 생성은 반드시 (먼저) 기(氣)가 모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니, 그 맑은[淸] 것을 얻은 자는 사람이 되고 그 탁한[濁] 것을 얻은 자는 사물이 된다. 예를 들어 큰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면 잘 정련된 것이 한 쪽에 모이고 찌꺼기[渣滓]는 다른 한 쪽에 모이는 것과 같다. 又問: “氣則有淸濁, 而理則一同, 如何?” '''재질문: 기(氣)에는 청탁(淸濁)이 있지만 이치(理)는 똑같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固是如此. 理者, 如一寶珠. 在聖賢, 則如置在淸水中, 其輝光自然發見; 在愚不肖者, 如置在濁水中, 須是澄去泥沙, 則光方可見. 今人所以不見理, 合澄去泥沙, 此所以須要克治也. 至如萬物亦有此理. 天何嘗不將此理與他. 只爲氣昏塞, 如置寶珠於濁泥中, 不復可見. 然物類中亦有知君臣母子, 知祭, 知時者, 亦是其中有一線明處. 然而不能如人者, 只爲他不能克治耳. 且蚤·虱亦有知, 如飢則噬人之類是也.” 祖道(68때). '''대답: 진실로 그러하다. 이치(理)라는 것은 하나의 보배 구슬과 같다. (구슬이) 성현(聖賢)에게 있으면 마치 맑은 물[淸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휘광(輝光)이 자연히 드러나지만,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게 있으면 마치 탁한 물[濁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진흙과 모래[泥沙]를 걸러내야만 비로소 그 빛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이치(理)를 보지 못하니 마땅히 진흙과 모래를 걸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자기 기질을) 다스려야만[克治] 하는 까닭이다. 만물(萬物)의 경우에도 역시 이 이치(理)가 있다.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이 이치(理)를 그것들에게 주지 않았겠는가? 단지 기(氣) 때문에 흐리고 폐색하여[昏塞] 마치 보배 구슬을 탁한 진흙탕 속에 둔 것처럼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물들 중에서도 군신(君臣)·모자(母子)를 알고, 제사(祭)를 알며, 때[時]를 아는 종류가 있으니,<ref>당시 사람들은 벌과 개미[蜂蟻]에게 엄정한 군신관계가 있고. 호랑이와 이리[虎狼]에게 부자(혹은 모자)간에 친밀한 관계가 있고, 승냥이와 수달[豺獺]이 사냥한 짐승을 널어놓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줄 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와 이리의 친애함은 장자 천운편, 승냥이와 수달의 제사는 예기 왕제편이 최초의 출전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주자어류 4:9, 11, 19 등을 참조하라.</ref> 역시 그 속에 한 가닥 밝은 부분[一線明處]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과 같을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자기 기질을) 다스릴[克治] 수 없어서일 뿐이다. 또 벼룩[蚤]과 이[虱] 또한 (제한된 정도의) 지성(知)이 있으니, 예를 들어 굶주리면 사람을 무는 것 등이 이것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24 問: “或問云: ‘於其正且通者之中, 又或不能無淸濁之異, 故其所賦之質, 又有智愚賢不肖之殊.’ 世間有人聰明通曉, 是稟其氣之淸者矣, 然卻所爲過差, 或流而爲小人之歸者; 又有爲人賢, 而不甚聰明通曉, 是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그 바르고 통한[正且通] 자 중에서도 또 간혹 청탁(淸濁)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므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다시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통한 기에도 간혹 청탁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미추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추한 사람은 불초하니, 다시 서로 똑같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회암집 권 62 답이회숙(答李晦叔) 제 6서에서는 본 조목에서 인용한 것과 흡사한 버전으로 혹문을 인용하고 있다.</ref> 세상 사람 중에 총명하고 통달한[聰明通曉] 자는 맑은[淸] 기(氣)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하는 바가 어긋나서 혹 소인(小人)의 부류가 되고 마는 자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 사람됨이 현명하지만[賢] 그다지 총명하고 통달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曰: “或問中固已言之, 所謂‘又有智愚賢不肖之殊’, 是也. 蓋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事<ref>다수의 판본에서 '了'로 적었다.</ref>者, 智也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淸和溫恭之德. 又有人極溫和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爲學便是要克化, 敎此等氣質令恰好耳.” 僩(69이후). '''대답: 《대학혹문》에서 이미 이에 관하여 말했으니, 이른바 ‘또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대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범주가 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聰明曉事] 자가 똑똑하되[智] 혹 현명하지 못하다면[不賢], 이는 곧 부여받은 것 가운데 맑고 온화하며[淸和] 따스하고 공손한[溫恭] 덕(德)이 부족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지극히 온화(溫和)하되 그다지 사리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바로 현명하지만[賢] 똑똑하지[智]는 못한 것이다. 배움(學)이란 바로 이러한 자기 기질을 이겨내고 변화시켜[克化] 딱 알맞게[恰好]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5 舜功問: “序引參天地事, 如何?” '''순공(舜功)의 질문: (대학혹문의) 서문(序)에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셋이 되는[參天地]' 일을 인용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ref> '삼천지(參天地)'는 본래 중용 제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면 남이 그렇게 하도록 도울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했다면 이미 (이 사람의 위격은) 천지와 같으니,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은 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서문이 아니라 경 1장에서 '명덕'을 설명하는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은 태어나면서 바르고 통한 기운을 얻었으니 그 본성이 가장 귀하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허령통철(虛靈洞徹)하여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금수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처럼 되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어 (천지의) 낳고 기르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까닭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다.(唯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ref> 曰: “初言人之所以異於禽獸者, 至下須是見己之所以參化育者.” '''대답: 처음에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까닭을 말하였으니, (이어지는) 그 아래에서는 모름지기 자신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參化育] 까닭을 보아야 한다. 又問: “此是到處, 如何?” '''다시 질문: 이 과정은 종착점이[到處] 어떻게 됩니까? 曰: “到, 大有地步在. 但學者須先知其如此, 方可以下手. 今學者多言待發見處下手, 此已遲卻. 纔思要得善時, 便是善.” 可學(62때). '''대답: (종착점에) 도달하기까지 크게 (여러가지) 단계들이[地步] 있다. 다만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종착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손을 쓸[下手] 수 있다. 지금 배우는 자들은 발현되는 경우[發見處]를 기다렸다가 손을 쓴다고 많이들 말하는데,<ref>이 발언은 아마도 호상학자들의 '찰식이발지제' 공부를 염두에 둔 듯하다. 고문해의는 회암집 권 51의 답동숙중(答董叔重) 제 3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ref> 이러면 이미 늦고 만다.<ref>'-却'은 현대 중국어 '-掉'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행위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한다. 예컨대 '망각(忘却)'은 잊어버린다는 행위가 완성된 것이다.</ref> 선(善)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 즉시 바로 선(善)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26 問: “或問‘自其有生之初’以下是一節; ‘顧人心稟受之初, 又必皆有以得乎陰陽五行之氣’以下是一節; ‘苟於是焉而不値其淸明純粹之會’, 這又轉一節; 下又轉入一節物欲去, 是否?” '''질문: 《대학혹문》에서 ‘최초에 태어났을 때부터[自其有生之初]’ 이하가 한 단락이고, ‘생각건대 최초에 사람이 마음을 (하늘로부터) 받았을(稟受) 적에는 또 반드시 모두 음양(陰陽)·오행(五行)의 기(氣)를 얻음이 있었다’ 이하가 한 단락이며, ‘진실로 이 단계에서 그 청명하며 순수한 것들(을 받을) 기회[淸明純粹之會]를 만나지 못한다면’여기서 다시 전환되어 한 단락이고, 이어서 그 아래에서 다시 전환되어 '물욕(物欲)' 한 단락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까?<ref>질문자가 인용한 네 단락은 모두 현행본 대학혹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행본을 사서혹문의 최후개정판이라고 간주할 경우 여기서의 네 단락은 모두 구판의 문구들이 된다. 아래 주희의 말에 더해 여기서 인용된 부분만 가지고 추론하자면 제 1구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동질성, 제 2구는 음양오행의 정수를 얻어 탄생한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 제 3구는 그럼에도 타고난 기질의 퀄리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제 4구는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나 물욕에 빠져 추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일역판 역시 이와 흡사하게 추론했으니 참조하라.</ref> 曰: “初間說人人同得之理, 次又說人人同受之氣. 然其間卻有撞著不好底氣以生者, 這便被他拘滯了, 要變化卻難.” '''대답: 처음에는 사람마다 똑같이 얻는 이치(理)를 설명하고,<ref>제 1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그 다음에는 또 사람마다 똑같이 받는 기(氣)를 설명한 것이다.<ref>제 2구를 설명한 것이다.</ref> 그러나 그 사이에 도리어 좋지 못한 기(氣)를 만나[撞]<ref>'撞'은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질문자가 인용한 제 3구의 '値'와 같다.</ref> 태어나는 자가 있으니,<ref>제 3구에 대한 해설이다.</ref> 그 경우 곧 그 (기에) 구속되고 막혀서[拘滯] 변화시키고자 하여도 어렵다.<ref>제 4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問: “如何是不好底氣?” '''질문: 어떠한 것이 좋지 못한 기(氣)입니까? 曰: “天地之氣, 有淸有濁. 若値得晦暗昏濁底氣, 這便稟受得不好了. 旣是如此, 又加以應接事物, 逐逐於利欲, 故本來明德只管昏塞了. 故大學必敎人如此用工, 到後來卻會復得初頭渾全底道理.” 賀孫(62이후). '''대답: 천지의 기(氣)에는 청탁이 있다. 만약 어둡고 혼탁한[晦暗昏濁] 기(氣)를 만난다면, 이는 곧 좋지 못한 것을 받은[稟受]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데 또 사물을 응대함[應接事物]에 있어 사사건건 이욕(利欲)을 쫓아다니므로, 본래의 명덕(明德)이 계속 흐리고 폐색[昏塞] 된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들이 이와 같이 힘을 쓰도록 가르쳐서, 나중에는 도리어 최초의 온전한[渾全] 도리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27 林安卿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擴將去.” '''임안경(林安卿)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이 끝내 은폐될 수 없음을 설명한 부분이다.</ref>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은 지점들[覺處]에 나아가 앎을 지극히 하고(致知) 확충해[充擴] 나가야 합니다. 曰: “然. 昨日固已言之. 如擊石之火, 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林先引或問中“至於久而後有覺”之語爲比, 先生因及此.> 那箇覺, 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대답: 그렇다. 어제 진실로 이미 그것을 말했다. (그것은) 마치 부싯돌을 때려서 나오는 스파크[擊石之火]와 같으니, 작은 불씨[些子]일 뿐이지만, 착화하기만 하면 곧 온 들판을 다 태울[燎原] 수 있다. 만약 반드시 먼저 크게 깨달은[大覺] 다음에 비로소 격물(格物)·치지(致知)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순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임안경[林]이 먼저 《대학혹문》 중의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至於久而後有覺]'<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이정(二程)의 말이다. 원출전은 이정유서 18:18. '질문: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대답: 앎을 지극히하는 공부가 최우선이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이 매일 더욱 밝아질 것이고,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問: 學何以有至覺悟處? 曰: 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ref>는 말을 인용하여 비유하자 선생이 이어서 이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대학혹문에서 말한) 저 깨달음이란[那箇覺] 사물이 탐구되어 앎이 지극해진[物格知至] 뒤의 대철대오[大徹悟]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일은 모두 끝난다. 순간적인 깨달음[介然之覺] 같은 경우는 하루 동안에도 무시로 무수히[無時無數] 터져나오니,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려[識認] 붙잡아 지키고[操持] 확충하고 길러[充養]<ref>산란하는 마음을 수습하여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덕성을 두텁게 배양하는 공부를 말한다. 17:1과 3에서 설명하고 있는 소학 단계에서의 공부를 참조하라.</ref>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又問: “‘眞知’之‘知’與‘久而後有覺’之‘覺’字, 同否?” '''다시 질문: ‘참된 앎[眞知]'<ref>진리를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 알아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이정이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정유서 2上:24 '참으로 아는 것과 평범하게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본 일인데, 어떤 농부가 호랑이에게 물려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쳤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변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그 농부만 안색이 변하여 다른 사람들과 반응이 달랐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참으로 안'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저 농부와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선을 알면서도 불선을 행하는 것은 역시 참으로 알지 못해서이다. 참으로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眞知與常知異. 常見一田夫曾被虎傷, 有人說虎傷人, 衆莫不驚, 獨田夫色動, 異於衆. 若虎能傷人, 雖三尺童子, 莫不知之, 然未嘗眞知. 眞知須如田夫乃是. 故人知不善, 而猶爲不善, 是亦未嘗眞知. 若眞知, 決不爲矣.)</ref>이라고 할 때의 ‘지(知)’와 ‘오래 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久而後有覺]’의 ‘각(覺)’ 자는 (의미가) 같지 않습니까? 曰: “大略也相似, 只是各自所指不同. 眞知是知得眞箇如此, 不只是聽得人說, 便喚做知. 覺, 則是忽然心中自有所覺悟, 曉得道理是如此. 人只有兩般心: 一箇是是底心, 一箇是不是底心. 只是才知得這是箇<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箇'의 순서가 '箇是'로 뒤집혀있다.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是箇'를 주석처리했다. 여유량본과 전경당본에서는 저본(중화서국판)과 같다.</ref>不是底心, 只這知得不是底心底心, 便是是底心. 便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 知得不是底心便是主, 那不是底心便是客. 便將這箇做主去治那箇客, 便常守定這箇知得不是底心做主, 莫要放失, 更那別討箇心來喚做是底心! 如非禮勿視聽言動, 只才知得這箇是非禮底心, 此便是禮底心, 便莫要視. 如人瞌睡, 方其睡時, 固無所覺. 莫敎纔醒, 便抖擻起精神, 莫要更敎他睡, 此便是醒. 不是已醒了, 更別去討箇醒, 說如何得他不睡. 程子所謂‘以心使心’, 便是如此. 人多疑是兩箇心, 不知只是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而已.” '''대답: 대략 비슷하니, 그저 각자 지시하는 바[所指]가 다를 뿐이다. 참된 앎[眞知]은 참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단지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다. 깨달음[覺]이란 홀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깨닫는 바[覺悟]가 있어서 도리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옳은[是]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옳지 않은[不是] 마음이다. 그저 이것이 '옳지 않은 마음'임을 알기만 하면 곧 이 '옳지 않은 마음'을 아는 마음[知得不是底心底心]이 바로 '옳은 마음[是底心]'이다.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이 바로 주인(主)이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이 바로 손님(客)이다. 이것을 주인(主)으로 삼아 저 손님(客) 쪽을 다스려서, 항상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굳게 지켜[守定] 주인(主)으로 삼고 놓치지[放失] 말아야 하니, 다시 어디서[那]<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별도로 마음을 마련해와서[討]<ref>'討'는 물건을 구해다 온다는 뜻이다.</ref> '옳은 마음'이라고 부를 것인가?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聽言動]<ref>논어 12:1.</ref>는 말의 경우, '이건 예(禮)가 아니구나'라고 아는 그 마음[知得這箇是非禮底心]이야말로 바로 '예(禮)의 마음[禮底心]'이니, (이 마음을 주인으로 옹립한 사람은) 곧 (예에 어긋나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瞌睡] 경우, 잠이 든 동안에는 전혀 지각하는[覺]<ref>깨달을 '각(覺)'은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 사물을 지각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쓴 것이다.</ref> 바가 없다. 그저[莫敎]<ref>고문해의에서는 '只是'나 '除是'와 같다고 풀면서 '莫'을 부정사로, '敎'를 사역동사로 보는 해석을 배격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로 어류 130:77을 제시했는데, 사실 어류 전체에서 '막교'가 이런 식으로 쓰인 곳은 130:77 한 군데인 반면 다수의 다른 조목에서는 모두 '~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여전히 의심스럽다. 한어대사전에서는 '막교'를 '막비(莫非)'와 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님이 없다'가 된다. 일역판은 고문해의의 제언을 따랐다.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지만 달리 더 낫게 해석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우선 고문해의를 따라 번역해 두었다.</ref> 막 깨어나자마자[纔醒] 번쩍 정신을 차리고[抖擻起精神]<ref>'두수(抖擻)'는 물건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몸을 번쩍 일으키는 등을 말한다.</ref> 다시는 그 자신이 잠들도록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깨었다[醒]는 것이다. 이미 깨어난 뒤에 다시 별도로 '깨어있음'을 마련해와서 어떻게 하면 그 자신이 다시 잠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마음으로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ref>이정유서 18:85. '질문: 마음은 누가 부립니까? 대답: 마음으로 마음을 부리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저 혼자 하라고 맡겨두면 달아나 버린다. (曰: 心誰使之? 曰: 以心使心則可. 人心自由, 便放去也.)'</ref>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하면) 마음이 두개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데,<ref>마음 A로 마음 B를 통제한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에게 있어 마음은 하나 뿐이라는 주희의 평소 생각에 배치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심사심'이라고 말해도 사실은 하나뿐인 마음이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16:136, 34:196, 96:52 등을 보라.</ref> 단지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릴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元思云: “上蔡所謂‘人須是識其眞心, 方乍見孺子入井之時, 其怵惕·惻隱之心, 乃眞心也.'” '''원사(元思)가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의 이른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眞心]을 알아야 한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막 보았을 때의 그 경악하며[怵惕] 측은해하는[惻隱] 마음이 바로 참된 마음[眞心]이다.'에 관하여 발언함.<ref>상채어록 권2의 한 대목을 주희가 맹자집주 2A:6에서 인용한 것이다. 맹자집주쪽의 문장은 본 조목과 일치하나 상채어록의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참된 마음이다. (人須識其眞心. 見孺子將入井時, 是眞心也.)'</ref> 曰: “孟子亦是只<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只'가 '只是'로 순서가 뒤집혀있다.</ref>討譬喩, 就這親切處說仁之心是如此, 欲人易曉. 若論此心發見, 無時而不發見, 不特見孺子之時爲然也. 若必待見孺子入井之時, 怵惕·惻隱之發而後用功, 則終身無緣有此等時節也.” '''대답: 맹자(孟子) 역시 그저 비유를 하나 가져와서[討] 이렇게 친근하고 절실한[親切] 지점 위에서 인(仁)한 마음이란 이와 같음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쉽게 깨닫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 마음의 발현(發見)을 논하자면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으니[無時而不發見], 꼭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경악하며 측은해하는 마음이 발현된 뒤에야 힘을 써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죽을 때 까지 이러한 순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ref>발현된 것을 근거로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음 속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당시 표현으로 이발찰식 공부라고 불렀다. 오늘날 호남성 장사에 해당하는 형호남로 담주(潭州)를 근거지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이러한 방향의 공부를 주장했는데, 이를 통칭 '호상학(湖湘學)'이라고 부른다. 17:25에 이어 여기에서도 주희는 호상학의 공부방법론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어서 원사가 호상학의 거두인 호굉(胡宏)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ref> 元思云: “舊見五峰答彪居仁<ref>'彪居正'의 오기이다.</ref>書, 說齊王易<ref>성화본, 조선정판본, 조선고사본에서는 '易'을 '愛'로 적었다.</ref>牛之心云云, 先生辨之, 正是此意.” '''원사(元思)가 말함: 옛날 오봉(五峰)<ref>호굉(胡宏, 1105~1161)이다. 호상학의 거두로 장식(張栻, 1133-1180)의 스승이다.</ref>이 표거정(彪居正)에게 답한 편지에서 제나라 임금(齊王)이<ref>맹자와 대담한 제선왕을 말한다.</ref> 소를 바꾼 마음[易牛之心]<ref>맹자 1A:7. 제나라 선왕이 제사에 쓰일 희생물인 소가 두려움에 떨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일을 말한다.</ref> 운운한 것을 보았는데,<ref>호굉의 주저인 지언(知言) 권 4에 이 대담이 실려있다. '다른날 물었다: 사람이 인하지 못한 까닭은 그 좋은 마음을 놓쳐서입니다. 놓친 마음을 가지고 (본래의 좋은) 마음을 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답: 제나라 임금이 소를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이 좋은 마음의 싹이 이욕(利欲)의 틈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드러난 그것을 붙잡아 간직하고 간직하여 기르고 길러서 확충하여 매우 커질 때까지 그치지 않으면 하늘과 똑같아진다. 이 마음이 발현하는 단서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핵심은 그것을 인식하는데 있을 뿐이다.(他日問曰: 人之所以不仁者, 以放其良心也. 以放心求心, 可乎? 曰: 齊王見牛而不忍殺, 此良心之苖裔, 因利欲之間而見者也. 一有見焉, 操而存之, 存而養之, 養而充之, 以至于大大而不已, 與天同矣. 此心在人, 其發見之端不同, 要在識之而已.)</ref> 선생님께서 (호굉과 표거정 사이의)그 대담을 논변하신 글<ref>주희가 장식, 여조겸과 함께 1170년(41세)에 완성한 호자지언의의(胡子知言疑義)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회암집 권 73에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이 상당하며 또 본 조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고 하기 어려우므로 인용하지는 않겠다.</ref>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曰: “然. 齊王之良心, 想得也常有發見時. 只是常時發見時, 不曾識得, 都放過<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이 뒤에 '去'자가 있다.</ref>了. 偶然愛牛之心, 有言語說出, 所以孟子因而以此推廣之也.” '''대답: 그렇다. 제나라 임금(齊王)의 좋은 마음[良心]도 생각해 보면 역시 늘상 발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평상시 발현될 적에는 그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어서 모두 놓쳐버렸을[放過] 뿐이다. 우연히 소를 아끼는 마음[愛牛之心]이 말로 발화되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가 그 기회에 그것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又問: “自非物欲昏蔽之極, 未有不醒覺者.” '''다시 질문: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지[物欲昏蔽之極]않은 이상 (여지껏) 깨어나지[醒覺]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曰: “便是物欲昏蔽之極, 也無時不醒覺. 只是醒覺了, 自放過去, 不曾存得耳.” 僩(69이후). '''대답: 설령<ref>'便是'는 '설령[即使]', '비록[雖是]'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문해의를 참조하라.</ref>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사람은) 깨어나지 못할 때가 없다. 단지 깨어나고 나서도 스스로 놓쳐버려[放過去] 한번도 (제대로) 간직하지[存得] 못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8 友仁說“明明德”: “此‘明德’乃是人本有之物, 只爲氣稟與物欲所蔽而昏. 今學問進修, 便如磨鏡相似. 鏡本明, 被塵垢昏之, 用磨擦之工, 其明始現. 及其現也, 乃本然之明耳.” '''내(友仁)가 ‘명명덕(明明德)’을 설명했다: 이 ‘명덕(明德)’은 바로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인데, 단지 기품(氣稟)<ref>각자가 타고난 정신/신체적 퀄리티를 말한다. '품'은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는 뜻이다.</ref>과 물욕(物欲)에 뒤덮혀 흐려졌을 뿐입니다. 지금 학문(學問)을 하여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아나가는[進修]<ref>'진수'는 주역 건괘 문언전의 '진덕수업(進德修業)'에서 나온 말이다. 주희는 주역본의에서 '진덕'을 마음의 진정성(忠信)을 배양하는 공부로, '수업'을 언행을 가다듬고 단속하는 공부로 풀이했다.</ref> 것은 마치 거울을 갈고닦는[磨鏡]<ref>당시 거울은 청동거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경'이란 유리거울을 헝겁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청동거울을 숯돌 등을 가지고 갈아내는 작업에 가깝다.</ref> 것과 비슷합니다. 거울은 본래 밝지만 먼지와 때[塵垢]에 의해 흐려진 것을 갈고닦는[磨擦] 노력을 들여야만 그 밝음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드러나게 되면 곧 본래의 밝음[本然之明]일 뿐입니다. 曰: “公說甚善. 但此理不比磨鏡之法.” '''대답: 그대(公)의 설명이 매우 좋다. 다만 이 이치(理)는 거울을 갈고닦는 법[磨鏡之法]으로 비유할 수 없다. 先生略擡身, 露開兩手, 如閃出之狀, 曰: “忽然閃出這光明來, 不待磨而後現, 但人不自察耳. 如孺子將入於井, 不拘君子小人, 皆有怵惕·惻隱之心, 便可見.” 선생이 몸을 약간 일으켜 두 손을 펼쳐 (빛이) 번쩍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이고서 말함: 홀연히 이 광명(光明)이 번쩍 나오는 것이지, 갈고닦기를 기다린 뒤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스스로 (이 광명을) 살피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군자(君子)냐 소인(小人)이냐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드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友仁云: “或問中說‘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而其本體已洞然’, 便是這箇道理.” '''내가(友仁) 말함: 《대학혹문》 중에 ‘그러므로 제아무리 뒤덮혀 흐려짐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이 빈틈[空隙] 속에서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직전 17:27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ref>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先生頷之, 曰: “於大原處不差, 正好進修.” 友仁(69때).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함: 큰 근원[大原]의 차원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기에[進修] 딱 좋을 때이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9 問: “或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而吾之'가 더 있다.</ref>所以明而新之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又'가 더 있다. 조선고사본처럼 인용해야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非可以私意苟且爲也.’ 私意是說著不得人爲, 苟且是說至善.”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구차한 것을[苟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의(私意)는 인위(人爲)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구차(苟且)는 지극한 선[至善]을 말하는 것입니다.<ref>대학혹문 인용구는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어야 맞겠으나 여기서 질문자가 '구차(苟且)'가 '지선(至善)'을 지시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번역해 두었다. '구차(苟且)'라는 표현은 오늘날 한국어에서 '구차한 살림살이'의 경우처럼 가난하고 변변찮은 모양새를 뜻하지만, 주희 당시에는 '임시변통(makeshift)' 같은 뜻으로 쓰였다. 질문자가 구차(苟且)를 지선으로 오인한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 주석을 보라.</ref> 曰: “才苟且, 如何會到極處!” '''대답: 조금이라도 구차하면[苟且] 어떻게 지극한 지점[極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賀孫擧程子<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以'가 더 있다.</ref>義理精微之極<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姑以至善目之之語'가 더 있다. 이렇게 인용해야 문장이 현행본 대학혹문에 더 가깝게 된다.</ref>. '''내가(賀孫) 정자(程子)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義理)’<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정이의 말이다.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원출전은 이정유서 15:183이다. '선이란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우선은[且] '지선'이라고 지목한다.(善者, 義理之精微, 無可得名. 且以至善目之.)' '임시로[姑]'나 '우선은[且]'은 모두 '구차(苟且)'와 같다. 최초의 질문자와 섭하손(두 사람은 동일인일 수도 있다)은 정자가 계속해서 지극한 진리에 '구차하게' 지선(至善)이라고 임시적인 라벨을 붙이고 있다고 하니 대학혹문의 다른 구절에 등장한 '구차(苟且)'라는 표현 역시 지선(至善)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오인한 듯하다.</ref>라는 말을 거론했다. 曰: “大抵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事皆有箇極好處. 今之人, 多是理會得半截, 便道了. 待人看來, 喚做好也得, 喚做不好也得. 自家本不曾識得到, 少刻也會入於老, 也會入於佛, 也會入於申韓之刑名. 止緣初間不理會到十分, 少刻便沒理會那箇是白, 那箇是皂, 那箇是酸, 那箇是鹹. 故大學必使人從致知直截要理會透, 方做得. 不要恁地半間半界, 含含糊糊. 某與人商量一件事, 須是要徹底敎盡. 若有些子未盡處, 如何住得. 若有事到手, 未是處, 須著極力辨別敎是. 且看孟子, 那箇事恁地含糊放過<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去'가 더 있다.</ref>! 有一字不是, 直<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須'가 더 있다.</ref>爭到底. 這是他見得十分極至, 十分透徹, 如何不說得?” 賀孫(62이후). '''대답: 대체로 지선(至善)은 그저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 100퍼센트 단정하고 딱 맞아서[端正恰好] 조금도 옳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 조금도 (목표에) 이르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이다. 예컨대 임금을 섬김[事君]에 반드시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섬긴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경(敬)이라 하고, 백성을 다스림[治民]에 반드시 요(堯)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인(仁)이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반절[半截]만 이해하고서 다 했다고 말한다. 남이 보고서 판단하기를 좋다고 해도 괜찮고[得] 좋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得]는 식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15:116을 참조하라.<ref>여기서 '득(得)'은 현대중국어 '行(xing)', 영어 'OK'와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나른한 태도를 뜻한다.</ref> 자기 자신의 인식이 본래 (목표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 조금만 지나면 노자(老子)에게 들어갈 수도 있고, 부처[佛]에게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형명학(刑名)에도 들어갈 수 있다.<ref>전국시대 법가, 특히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문을 형명(刑名) 또는 형명(形名)이라고 부른다. 이는 형벌과 관련된 이름은 아니다. 관료 각각에게 부여된 직무의 내용이 명칭(名)이고, 실제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형체(形)이다. 형체와 명칭, 실질과 명칭이 서로 부합하도록 국가기구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형명학'이라는 별칭이 나온 것이다. 풍우란, 중국철학사(上), 1999. P.514-515.</ref> 그저 애초에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어느 것이[那] 희고 어느 것이 검으며,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짠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치지(致知) 단계에서부터 칼로 자른듯[直截]<ref>'직절(直截)'은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확실성, 철저성을 의미한다.</ref> 철저히 이해하도록[理會透] 요구하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어중간하고[半間半界]<ref>'반간불계(半間不界)'와 같다. 철처하지 못하다는 뜻이다.</ref> 웅얼거리듯[含含糊糊]<ref>함호(含糊)는 말소리가 또렷하지 않고 웅얼거린다는 뜻이다.</ref>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남과 무슨 일을 상의할 때에는 반드시 남김없이 철저히 하고자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다면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일이 손에 들어왔을 때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모름지기 극력(極力)으로 변별하여 맞게 만들어야 한다. 또 맹자(孟子)를 보라. (그가) 무슨 일을 그렇게 웅얼웅얼 대충 넘어가던가? 한 글자라도 맞지 않으면 끝까지[到底] 다투었다. 이(렇게 다툰 이유)는 그의 이해가 100퍼센트 지극하고 100퍼센트 투철했기 때문이니, (이러하다면 맹자가) 어찌 논변[說]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f>여기서는 심상하게 '말하다[說]'라고 풀어서는 안 된다. 논변을 너무 좋아한다는 당시의 악평에 대한 맹자의 변론으로 맹자 3B:9를 참조하라.</ref>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0 問: “或問說明德處云: ‘所以應乎事物之間, 莫不各有當然之則.’ 其說至善處, 又云: ‘所以見於日用之間者, 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二處相類, 何以別?”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기를 ‘사물(事物)에 응하는 사이에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혹문에서 지선(至善)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또 이르기를 ‘일상생활[日用] 사이에 나타나는 바에 각각 본래 그러한 일정한 법칙[本然一定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두 부분이 서로 유사한데, 어떻게 구분합니까?<ref>현행본 대학혹문에는 질문자 진순이 인용한 두 문구 가운데 후자만 있다. 전자는 아마도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개정의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ref> 曰: “都一般. 至善只是明德極盡處, 至纖至悉, 無所不盡.” 淳(61·70때). '''대답: 모두 같은 이야기다. 지선(至善)은 단지 명덕(明德)이 남김없이 지극한 곳[極盡處]일 뿐이니, 지극히 섬세하고 상세하여[至纖至悉] 다하지 않음이 없다.<ref>같은 취지의 발언이 14:114에서도 보이는데 이 역시 진순이 질문하고 기록한 조목이다.</ref>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  17:31 仁甫問: “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다음 인용구에 대한) 인보(仁甫)의 질문: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ref>대학혹문. 17:29를 참조하라.</ref> 曰: “此是程先生說. 至善, 便如今人說極是. 且如說孝, 孟子說‘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此是不孝. 到得會奉養其親, 也似煞强得這箇, 又須著如曾子之養志, 而後爲能養. 這又似好了, 又當如所謂‘先意承志, 諭父母於道', '不遺父母惡名’, 使'國人稱願道‘幸哉有子如此’', 方好.” '''대답: 이는 정(程) 선생의 설명이다. 지선(至善)은 곧 요즘 사람들이 '극히 옳다[極是]'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효(孝)를 말함에 있어, 맹자(孟子)가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보지 않는다’<ref>맹자 4B:30.</ref>고 한 것, 이것은 불효(不孝)이다. 자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경우는 역시 (앞서 말한) 그것보다는 꽤[煞] 나은[强得] 듯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증자(曾子)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한[養志] 것과 같이 해야만<ref>맹자 4A:19. 아버지의 의지를 살펴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쪽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말한다.</ref> 비로소 봉양을 잘하는 것이다. 이정도로도 좋은 듯하지만, 다시 마땅히 이른바 ‘부모의 뜻을 한발 앞서 헤아려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道)로 인도하며',<ref>예기 제의편. '군자의 효도란 (어버이의) 생각을 한 발 앞서 알아차려 그 뜻을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봉양이나 하는 사람이니 어찌 효도한다고 하겠나?(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安能為孝乎?)</ref>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아',<ref>예기 제의편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자기 행실을 삼가서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으면 잘 보내드렸다고 할 만하다.(父母旣沒,愼行其身,不遺父母惡名,可謂能終矣.)'</ref>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저런 아들이 있어서."라고 말하게'<ref>예기 제의편. '좋은 고기를 익혀서 드리는 것은 효가 아니라 봉양[養]이다. 군자가 말하는 효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아들이 있어서."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효이다.(亨孰膻薌,嘗而薦之,非孝也,養也。君子之所謂孝也者,國人稱愿然曰:『幸哉有子!』如此,所謂孝也已).</ref> 해야만 충분하다 하겠다. 又云: “孝莫大於尊親, 其次能養. 直是到這裏, 方喚做極是處, 方喚做至善處.”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효(孝)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尊親]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잘 봉양하는 것[能養]이다.<ref>예기 제의편. '큰 효도는 존친이요, 그 다음은 욕먹이지 않는 것이요, 그 아래가 잘 봉양하는 것이다.(大孝尊親,其次弗辱,其下能養)'</ref>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극히 옳은 곳[極是處]'이라 하고, 비로소 지선(至善)한 곳이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2 郭德元問: “或問: ‘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此三者, 求之古今人物, 是有甚人相似?” '''곽덕원(郭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오직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있고, 또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不屑] 자가 있으며, 또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이다.</ref>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가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문구를 약간 축약한 형태이다. 아래 원주에서 인용한 탁록(卓錄) 쪽은 '因'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고 하였습니다. 이 세 부류를 고금(古今)의 인물 가운데서 찾아보면 누구와 비슷합니까? 曰: “如此等類甚多. 自謂能明其德而不屑乎新民者, 如佛·老便是; 不務明其明德, 而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如管仲之徒便是; 略知明德新民, 而不求止於至善者, 如前日所論王通便是<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如此'가 더 있다.</ref>. <卓錄云: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因<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狃'으로 썼다.</ref>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如前日所論王通之事是也.”><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 전체가 없는 대신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선생은 며칠 앞서 왕통론(王通論)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先生前此數日作王通論, 其間有此語.)'</ref> 看他於己分上亦甚修飭, 其論爲治本末, 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狹, 不曾就本原上著功,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始是. 看古之聖賢別無用心, 只這兩者是喫緊處: 明明德,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 正如佛家說, ‘爲此一大事因緣出見於世’, 此亦是聖人一大事也. 千言萬語, 只是說這箇道理. 若還一日不扶持, 便倒了. 聖人只是常欲扶持這箇道理, 敎他撑天柱地.” 文蔚(59이후).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卓録同. 又問: "秦漢以下, 無一人知講學明理, 所以無善治.” 曰: “然.” 因泛論歷代以及本朝太宗眞宗之朝, 可以有爲而不爲. “太宗每日看太平廣記數卷, 若能推此心去講學, 那裏得來? 不過寫字作詩, 君臣之間以此度日而已. 眞宗東封西祀, 糜費巨萬計, 不曾做得一事. 仁宗有意於爲治, 不肯安於小成, 要做極治之事. 只是資質慈仁, 卻不甚通曉用人, 驟進驟退, 終不曾做得一事. 然百姓戴之如父母. 契丹初陵中國, 後來卻服仁宗之德, 也是慈仁之效. 緣它至誠惻怛, 故能動人如此.' 이 내용은 선두 네 글자를 제외하고 127:8과 일치하므로 그쪽을 참조하라. 여기서 번역하지는 않겠다.</ref> '''대답: “이러한 부류는 매우 많다. 스스로 자신의 (밝은) 덕(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로는 예컨대 불가와 노자[佛·老]가 바로 그렇다.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예를 들어 관중(管仲)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는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ref>584-617. 호는 문중자(文中子).</ref>이 바로 그렇다. <탁(卓)의 기록에는 “또 이 두 가지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작은 성취[小成]에 안주하고 근시안적 이익[近利]을 따라서[因]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의 경우가 그렇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일신의 차원[己分上]에서도 깊이 수양했으며[修飭], 그 다스림의 본말(本末)을 논한 것도 조리가 있었으니, 이 세상[斯世]에 대해 진지하게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스케일[規模]이 얕고 좁아서 일찍이 근본[本原]의 차원에서는 힘을 쓰지[著功]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做不徹] 못한 것이다. 반드시 그 최선의 것[極]<ref>지선(至善)을 말한다.</ref>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만 한다. 가만 보면 옛 성현(聖賢)은 다른데 마음을 씀이 없었고, 그저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ref>만이 긴요한 부분[喫緊處]이었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사욕(私欲)이 없기를 원했고,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든 각각의 사안(事事物物)에 대해 모두 마땅하게 처신하기를 원했다.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했다’<ref>법화경 서품 '제불과 세존이 오직 이 하나의 큰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했다.(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ref>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성인(聖人)의 하나의 큰일[一大事]이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단지 이 도리를 설명할 뿐이다. 만약 하루라도 부지(扶持) 않으면 곧 쓰러져버린다. 성인(聖人)은 그저 언제나 이 도리를 부지하여 하늘과 땅을 지탱하게[撑天柱地] 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33 問: “明德而不能推之以新民, 可謂是自私.” '''질문: 명덕(明德)을 밝혔으되 그것을 미루어 백성을 새롭게하지[新民] 못한다면, 자기 생각만 한다[自私]<ref>자기 자신만을 위함, 자기 생각만 함,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있음. 주희는 보통 '자사자리(自私自利)'와 같은 형태로 사용하며 주로 불교를 비판할 적에 꺼내는 표현이다. 불교는 자기 일신의 구원만 신경쓸 뿐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취지이다.</ref>고 할 만합니다. 曰: “德旣明, 自然是能新民. 然亦有一種人不如此, 此便是釋·老之學. 此箇道理, 人人有之, 不是自家可專獨之物. 旣是明得此理, 須當推以及人, 使各明其德. 豈可說我自會了, 我自樂之, 不與人共!” '''대답: 덕(德)이 이미 밝아졌다면 자연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와 노자의 학문이다. 이 도리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미 이 이치를 밝혔다면, 반드시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推以及人] 각자 자기 덕(德)을 밝히게 해야 한다. 어찌 나 혼자 해냈으니 나 혼자만 그것을 즐기고 남과 공유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因說: 曾有學佛者王天順, 與陸子靜辨論云: “我這佛法, 和耳目鼻口髓腦, 皆不愛惜. 要度天下人, 各成佛法, 豈得是自私!” '''이어서 (내가) 말함: 일전에 불교를 배운 왕천순(王天順)<ref>누군지 확실치 않다. 상산집(象山集) 권 2의 여왕순백(與王順伯) 제 2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왕천순은 왕순백의 이름을 오기한 것일 수 있다.</ref>이 육자정(陸子靜)<ref>육구연이다.</ref>과 변론하며 이르기를 '나의 이 불법(佛法)은 귀·눈·코·입·골수·뇌[耳目鼻口髓腦]까지 모두 다<ref>'和...皆'는 현대 중국어 '連...都'와 같다. '~까지 모두다', '~마저도 모두 다' 정도의 의미이다.</ref> 아끼지 않고 천하 사람들을 제도하여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데 이게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自私]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先生笑曰: “待度得天下人各成佛法, 卻是敎得他各各自私. 陸子靜從初亦學佛, 嘗言: ‘儒佛差處是義利之間.’ 某應曰: ‘此猶是第二著, 只它根本處便不是. 當初釋迦爲太子時, 出遊, 見生老病死苦, 遂厭惡之, 入雪山修行. 從上一念, 便一切作空看, 惟恐割棄之不猛, 屛除之不盡. 吾儒卻不然. 蓋見得無一物不具此理, 無一理可違於物. 佛說萬理俱空, 吾儒說萬理俱實. 從此一差, 方有公私·義利之不同.’ 今學佛者云‘識心見性’, 不知是識何心, 是見何性.” 德明(44이후). '''선생이 웃으며 말함: 천하 사람들이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도록 제도하겠다는 것은<ref>서두의 '대(待)'는 '욕(欲)'이나 '장요(將要)'와 같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말한다.</ref> 도리어 그들 각자가 자기 생각만 하도록[各各自私] 가르치는 것이다. 육자정(陸子靜) 역시 처음에는 불교를 배웠는데,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차이는 의(義)와 이(利)의 차이이다’고 하였다.<ref>이 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175년 아호에서의 만남, 혹은 1181년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ef> 내가 응답하기를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第二著]이다. 그저 그 근본(根本)부터가 옳지 않다. 당초 석가(釋迦)가 태자(太子)였을 때 성문 밖으로 나가 노닐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설산(雪山)에 들어가 수행하였다.<ref>석가모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을 말한다.</ref> 그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곧 일체를 공(空)으로 보게 되었고, 오직 그것을<ref>본질적으로 허망한 이 세상 일체를</ref> 잘라내어 버림[割棄]이 과감하지 못할까, 제거함[屛除]이 완벽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ref>불교의 출세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세간의 일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ref> 우리 유학[吾儒]은 도리어 그렇지 않다. 대개 한 물건도 이 이치(理)를 갖추지 않음이 없고, 한 이치도 사물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이치[萬理]가 모두 헛되다[空]고 말하고, 우리 유학은 모든 이치가 모두 진실[實]하다고 말한다.<ref>'실(實)'을 '진실하다'고 번역하긴 했지만, 여기서 '공'은 내용물이 빈 그릇을, '실'은 내용물이 가득찬 그릇을 연상시키고 있음에 주의하라. 주희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는 본질이자 당위(곧,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가 '진실되다'라고 말할 때는 불교에서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그러한 본질이자 당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ref> 이 하나의 차이로부터 비로소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의 차이가 있게 된다.’ 지금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識心見性]’고 말하지만, 대체 무슨 마음을 알고 무슨 성품을 본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o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   知止而後有定以下一段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17:34 問: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머무를 곳을 알 수 있으면[能知所止] 곧 마음[方寸] 속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 모두 확정불변한 이치[定理]가 있게 된다.’에 관한 질문.<ref>대학혹문. 14:126과 163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고한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져서 각각의 경우에 객관적인 도덕률이 확고하게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知止도 인지, 有定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ref> 曰: “定·靜·安三項若相似, 說出來煞不同. 有定, 是就事理上說, 言知得到時, 見事物上各各有箇合當底道理. 靜, 只就心上說.” '''대답: 정(定)·정(靜)·안(安)<ref>대학 본문에서 제시한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득(得) 다섯 단계 가운데 세 꼭지를 말한 것이다. 14:157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마치 추운 자가 옷을 갈망하고 굶주린 자가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너무 확정적이라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ref> 세 항목은 비슷한 듯하지만 설명하면 자못 다르다. 확정됨(定)이 있다는 것은 사리(事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앎이 지극해졌을 때 사물마다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도리가 있음을 (확실하게) 본다는 말이다. 고요함(靜)은 (같은 내용을)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뿐이다.<ref>14:129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 問: “‘無所擇於地而安’, 莫是‘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否?” '''질문: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히 안정된다’<ref>대학혹문</ref>는 것은 아마도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한대로 행하고,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한대로 행한다’<ref>중용 제 14장. '소(素)'는 '현재(見在)'의 뜻이다.</ref>는 것 아닙니까?” 曰: “這段須看意思接續處. 如‘能得’上面帶箇‘慮’字, ‘能慮’上面帶箇‘安’字, ‘能安’上面帶箇‘靜’字, ‘能靜’上面帶箇‘定’字, ‘有定’上面帶箇‘知止’字, 意思都接續. 旣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靜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邊也安, 在富貴也安, 在貧賤也安, 在患難也安.<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한 번 생각해 보라(看如何? 公且看,)'가 더 있다.</ref> 不見事理底人, 有一件事, 如此區處不得, 恁地區處又不得, 這如何會有定! 才不定, 則心下便營營皇皇, 心下才恁地, 又安頓在那裏得! 看在何處, 只是不安.” 賀孫(62이후). '''대답: 이 단락은 모름지기 의미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능득(能得)’ 위에는 ‘려(慮)’ 자가 있고, ‘능려(能慮)’ 위에는 ‘안(安)’ 자가 있으며, ‘능안(能安)’ 위에는 ‘정(靜)’ 자가 있고, ‘능정(能靜)’ 위에는 ‘정(定)’ 자가 있으며, ‘유정(有定)’ 위에는 ‘지지(知止)’ 자가 있으니, 뜻이 모두 이어진다. 이미 사물에 확고불변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보고서 이 마음이 이렇게 고요해졌다면[寧靜], 어떤[看]<ref>의문구 앞에 나오는 '간(看)'은 '그 어떤... 막론하고(不管, 儘管)'으로 풀이한다. 14:143, 157을 참조하라.</ref> 상황에 처했느냐를 막론하고, 여기에 있어도 편안하고[安], 저기에 있어도 편안하며, 부귀(富貴)에 있어도 편안하고, 빈천(貧賤)에 있어도 편안하며, 환난(患難)에 있어도 편안하다.<ref>부귀, 빈천, 환난은 질문자가 인용한 중용 제 14장에서 들고 있는 예시들이다.</ref> 사리(事理)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안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고 저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으니, 이런 경우 어떻게 확고함(定)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확고(定)하지 못하면 마음속이 곧바로 안절부절 불안하니[營營皇皇], 마음속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면 또 어디에 (자신을) 편안히 둘[安頓] 수 있겠는가! 어디에[看] 있든 그저 불안할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5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硏幾.” '''‘사려할 수 있으면[能慮] 사안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여 깊음을 지극히하고 기미를 갈고닦는다[隨事觀理, 極深硏幾].’<ref>대학혹문. '극심'과 '연기'는 본래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14:146을 참조하라.</ref>에 관한 질문. 曰: “到這處又更須審一審. ‘慮’字看來更重似‘思’字. 聖人下得言語恁地鎭重, 恁地重三疊四, 不若今人只說一下便了, 此聖人所以爲聖人.” 賀孫(62이후). '''대답: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 번 신중히 살펴보아야[審]<ref>'심(審)'은 극심연기의 '연(硏)'을 풀이한 말이다.</ref> 한다. ‘려(慮)’ 자는 내 생각에 ‘사(思)’ 자보다[似]<ref>여기서 '사(似)'는 '어(於)'와 같다.</ref> 더 무겁다. 성인이 표현을 고른 것이 이렇게 진중(鎭重)하고 이렇게 거듭 반복되니[重三疊四], 요즘 사람들이 그저 한 번 말하고 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래서 성인은 성인인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6 安卿問: “知止是始, 能得是終. 或問言: ‘非有等級之相懸.’ 何也?” '''안경(安卿)의 질문: 지지(知止)는 시작이고 능득(能得)은 끝입니다.<ref>이에 대한 설명은 17:34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대학혹문》에서는 (양자간에) ‘등급(等級)이 서로 현격히 벌어져 있지 않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이 말을 풀어써두어서 표현이 조금 다르다. '공자의 지우학(志于學)부터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 맹자의 선인(善人), 신인(信人)으로부터 성인(聖人), 신인(神人)까지가 실로 등급이 현격히 벌어져 있어서 평생토록 거쳐가는 순서인 것과는 같지 않다.(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ref>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也不是無等級,<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여섯 글자가 없다.</ref> 中間許多只是小階級, 無那大階級.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便是大階級, 步卻闊. 知止至能得, 只如志學至立相似, 立至不惑相似. 定·靜·安, 皆相類, 只是中間細分別恁地.” '''대답: 역시 등급(等級)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의 많은 것들은 단지 작은 계단[階級]들일 뿐 그렇게 큰 계단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ref>논어 2:4에서 공자가 자신이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ref>부터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ref>공자가 7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 경지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많은 것들은 곧 큰 계단이니 보폭이 오히려 넓다.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부터 스스로 섰다[立]<ref>공자가 3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고, 스스로 섰다[立]부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不惑]<ref>40세의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다. 정(定)·정(靜)·안(安)은 모두 비슷한 부류요, 단지 중간에 저처럼 세밀하게 구별했을 뿐이다. 問: “到能得處是學之大成, 抑後面更有工夫?” '''질문: 능득(能得)의 경지에 이르면 배움에 대성한[學之大成] 것입니까, 아니면 뒤에 공부가 더 있습니까? 曰: “在己已盡了,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亦只是自此推去.” 㝢(61이후). '''대답: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는[在己] 이미 다 했고,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하지만, (후자는) 역시 그저 여기서<ref>자기 자신의 차원이다.</ref> 미루어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ref>이 부분은 14:152와 흡사하다.</ref>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   古之欲明明德於天下一段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17:37 問: “或問‘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 是能得已包齊家治國說了. 前晩何故又云‘能得後,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질문: 《대학혹문》에서 ‘성의(誠意)에서 평천하(平天下)까지는 저 지선(至善)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ref>대학혹문.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이란 명명덕의 일이요 제가, 치국, 평천하란 신민의 일이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요, 성의부터 평천하까지는 저 지선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ref>라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이 이미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까지 포함하여 설명한 것입니다.<ref>전통시대 유학이 커버하는 영역을 크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을 때, 인용된 대학혹문의 문구대로라면 두 영역이 수기로 일원화된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f>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어찌하여 또 ‘능득(能得)한 뒤에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ref>치인의 영역이 수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제 저녁의 대화란 17:36을 말한다. 17:34 또한 참조하라.</ref> 曰: “以修身言之, 都已盡了. 但以明明德言之, 在己無所不盡, 萬物之理亦無所不盡. 如'至誠惟能盡性', 只盡性時萬物之理都無不盡了. 故盡其性, 便盡人之性; 盡人之性, 便盡物之性.” 㝢<ref>조선고사본에서는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㝢同)'이다.</ref>(61이후). '''대답: 수신(修身)으로 말하자면 이미 다 된 것이다.<ref>대학의 '능득'이란 문구는 수기와 치인 가운데 수기의 측면에 해당한다는 말이다.</ref> 단,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도 남김 없이 다 하고 만물의 이치 또한 남김 없이 다 하는 것이다.<ref>명덕을 밝히는 일을 수기에 국한시켜 보지 말고, 수기와 치인을 포함하는 상위의 범주로 보라는 말이다.</ref> 예컨대 '오직 지극한 진정성(誠)이라야 (자신의) 본성(性)을 온전히 다할 수 있고'<ref>중용 제 22장의 한 구문을 축약한 것이다.</ref>, 오직 (자신의) 본성(性)을 다할 때라야 만물의 이치도 남김 없이 다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性)을 다하면 곧 남의 본성(性)을 다하게 되고, 남의 본성(性)을 다하면 곧 사물의 본성(性)을 다하게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7:38 蜚卿言: “或問云: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伯羽謂' 세 자가 더 있다. '비경(蜚卿)'이 동백우(童伯羽)의 자(字)이므로 한 사람이 연이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ref> 明德之功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內, 或未盡化, 況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德乎?” '''비경(蜚卿)이 말함: 《대학혹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의지를 참되게 하고[誠其意],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正其心], 각자 자신의 몸을 갈고닦고[修其身], 각자 자신의 어버이를 친애하며[親其親], 각자 자신의 어른을 공경하여[長其長], 천하가 평정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명덕(明德)의 공효(功)가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규문(閨門) 안에서 혹 다 교화시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거늘, 하물며 커다란 천하 전체가 요순(堯舜)의 교화에 순복하여 각자 자신의 덕(德)을 밝힐 수 있으리라 말하시는 것입니까? 曰: “大學‘明明德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是有如此規模, 卻是自家本來合如此, 不如此便是欠了他底.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己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槪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說‘比屋可封’, 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不如此不得. 到得做不去處, 卻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卻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內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爲聖賢之學.” 道夫(60이후). '''대답: 《대학》의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는 것은 일단은 그 규모(規模)<ref>대강의 윤곽선, 원대한 스케일 같은 의미이다.</ref>가 이러하다고 설명한 것뿐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은 본래부터 응당 이와 같아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곧 (본래의) 자기 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윤(伊尹)은 평범한 백성 한 사람이라도 (요순과 같은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어서 도랑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했다.<ref>맹자 5A:7.</ref> (그러나) 이윤(伊尹)도 역시 그저 대체로 이렇게 하고자 했다는 것 뿐이니, 또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예컨대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만하다[比屋可封]’<ref>한서 왕망전(王莽傳). '명성한 세상에는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많으므로, 요순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明聖之世,國多賢人,故唐虞之時,可比屋而封.)'</ref>는 것 역시 한두 집 정도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의 규모(規模)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며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 뿐이다. (세웠던 스케일에 걸맞게) 해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f>'做不去'는 '할 수 없다', '做得去'는 '할 수 있다'이다.</ref> 규모(規模)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반면<ref>'著'은 '須著'과 같다. '반드시'.</ref> 공부(工夫)는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가야 한다. 규모(規模)와 단계별 순서[次第]도 없이 그저 지엽적인 것들[細碎處]에만 힘을 쓰면 곧바로 (오늘날) 세간의 공리(功利)를 따지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규모(規模)는 있지만 세밀한 공부(工夫)가 없다면 또 한갓 빈 규모(空規模)이고 말 뿐이다. 밖으로는 규모(規模)의 크기를 지극히하고 안으로는 미루어 (구체적인) 사사물물(事事物物)의 부분에 이르게 하여 그 어느 방면으로도 공부(工夫)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聖賢)의 배움이 성현의 배움이 되는 까닭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39 問或問“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 '''《대학혹문》의 '마음의 신명[心之神明]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ref>대학혹문. '저 지(知) 같은 경우는 마음의 신명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若夫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신명의 신(神)은 우리 의식의 완성도가 높음을, 명(明)은 의식의 활동성을 가리킨다. 재(宰)는 컨트롤한다는 의미이다. 묘(妙)를 운용하다로 풀이한 것은 17:40을 참조하라.</ref>에 대한 질문. 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대답: 신(神)은 그렇게 정밀하고 아름답다[精彩]는 것이요, 명(明)은 그렇게 밝게 빛난다는[光明] 것이다. 又曰: “心無事時, 都不見; 到得應事接物, 便在這裏; 應事了, 又不見: 恁地神出鬼沒!” '''다시 말함: 마음은 일이 없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도 응사접물(應事接物)하게 되면 곧 이 안에[在這裏]<ref>마치 주인의 부주의로 인해 풀려나 달아나버린 가축처럼,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이 안에 없는' 상태가 바로 '방심(放心)'의 상태이다.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면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여 집중시킬 수 있는데 이렇게 집중된 상태를 어류에서는 자주 '여기 있다(在這裏)'고 표현한다.</ref> 있으며, 일에 대한 응대를 마치고 나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니, 이렇게나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 又曰: “理是定在這裏, 心便是運用這理底, 須是知得到. 知若不到, 欲爲善也未肯便與你爲善; 欲不爲惡, 也未肯便不與你爲惡. 知得到了, 直是如飢渴之於飮食. 而今不讀書時, 也須收斂身心敎在這裏, 乃程夫子所謂敬也. ‘整齊嚴肅’, 雖只是恁地, 須是下工夫, 方見得.”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이치(理)는 이 안에<ref>자신의 내면을 말한다.</ref> 확고하게 있고, 마음[心]은 바로 이 이치(理)를 운용(運用)하는 주체이니, 반드시 앎[知]이 지극해져야 한다. 만약 앎[知]이 지극해지지 못하면 선(善)을 행하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선(善)을 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악(惡)을 행하지 않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악(惡)을 행하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앎[知]이 지극해지고나면 바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마시고 먹으려는 것[飢渴之於飮食]과 같이 (선을 행하고 불선을 피하게) 된다. 지금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여[收斂身心] 여기에 있도록[在這裏]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부자(程夫子)<ref>정씨 형제를 말한다.</ref>께서 말씀하신 경(敬)이다.<ref>경에 대한 설명은 17:1부터 18까지에 걸쳐 자세히 적혀있으니 참조하라.</ref> ‘정제엄숙(整齊嚴肅)’이 비록 이런 것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실제로 힘써 해보아야만[工夫]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0 德元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或問"知妙衆理而宰萬物者也",)'라고 적혀있다.</ref>: “何謂‘妙衆理’?” '''덕원(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의)‘묘중리(妙衆理)’는 무슨 말입니까?<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大凡道理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或錄此下云: “便只是理. 才知得,”><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便只是知得我底道理, 非是以我之知去知彼道理也. 道理固本有, 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或錄云: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夏熱冬寒,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所以謂之‘妙衆理’, 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或錄云: “蓋知得此理也.”>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대답: 무릇 도리(道理)는 모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앎[知]이란 것은 <혹자의 기록에서는 이 다음에 이렇게 말함: “그저 이치(理)일 뿐이다. 알게 되면”> 곧 나에게 있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지, 나의 앎[知]을 가지고 저쪽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ref>주희는 '지(知)'를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하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첫 번째 '앎'과 두 번째 '알게 되는'과 네 번째 '알게 되는'은 어떤 것을 알게 되는 행위(to know)를 뜻하고 세 번째 '나의 앎'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을 뜻한다.</ref> 도리는 물론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앎[知]을 사용해야만 비로소 틔워낼 수 있다.<ref>여기서의 앎은 의식(consciousness)이나 인지(cognition)에 가깝다.</ref> 만약 앎[知]이 없었다면 도리가 무슨 수로 드러나겠는가? <혹자의 기록: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가지고 있던 도리이다. 앎[知]이 없으면 도(道)를 놓아둘 곳이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그런 다음에야 도리가 정박할 곳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임금은 인(仁)하고 신하는 공경(敬)하는 것을, 앎[知]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한다[妙衆理]’고 했으니, 여러 이치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운용(運用)’이라는 글자는 병폐가 있으므로 그저 ‘묘(妙)’ 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혹자의 기록: “대개 이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又問: “知與思, 於身最切緊.” '''재질문: 앎[知]과 생각[思]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긴요합니다. 曰: “然. 二者只是一事. 知如手, 思是使那手去做事, 思所以用夫知也.” 僩(69이후).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뒤에 총 196자의 긴 주석이 달려있는데, 본 조목과 비교하면 첫 질문은 약간 다르고 주희의 대답 부분은 동일하며, 재질문과 재대답이 없는 형태이다. 첫 질문만 번역하고 주희의 대답부분 번역은 생략한다. '혹자의 기록. 곽형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묘중리'는 무슨 말입니까? 혹시 여러 이치의 오묘한 신비를 탐색하여 주재자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或錄云:郭兄問: "或問'妙衆理而宰萬物者也', 何以謂之妙衆理? 豈非以知能探賾衆理之妙, 而爲之主宰乎?", 曰: "大凡道理, 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便只是理. 才知得, 便是自知得我之道理, 非是我以知去知那道理也. 道理固本有, 須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冬寒夏熱,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所以謂之妙萬理, 如云能運用萬理. 只是運用字又有病, 故只下得个妙字, 蓋知得此理也.")</ref> '''대답: 그렇다. 그 둘은 하나일 뿐이다. 앎[知]은 손과 같고, 생각[思]은 저 손을 부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니, 생각[思]이란 저 앎[知]을 사용하는 것이다.<ref>여기서의 '앎'은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 혹은 의식(consciousness)에 가깝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1 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다음에 '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이 있다. 해당 부분은 대학혹문의 직접인용이다. 17:39를 보라.</ref>“知如何宰物?” '''질문: 앎[知]이 어떻게 만물을 주재(宰)합니까?<ref>17:39와 40을 참조하라.</ref>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是知覺.” 道夫(60이후). '''대답: 지각(知覺)<ref>지각(知覺)은 사태의 패턴을 알아차리고 시비를 구분하는 등 인지적 활동 전반을 말한다. 주희는 심지어 이나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까지도 지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ref>이 없으면 만물을 재제(宰制)<ref>힘을 행사하여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표현으로 '컨트롤하다' 정도의 뜻이다.</ref>할 수 없다. 만물을 재제(宰制)하려면 역시 지각(知覺)해야 한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2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주석으로 '知者妙衆理而宰萬物'가 더 적혀있다.</ref>: “‘宰萬物’, 是‘主宰’之‘宰’, ‘宰制’之‘宰’?”<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부분 전체가 주석처리되어있고, 이어서 역시 주석으로 '答'자가 적혀있다.</ref> '''누군가의 질문: ‘재만물(宰萬物)’은 ‘주재(主宰)’의 ‘재(宰)’입니까, ‘재제(宰制)’의 ‘재(宰)’입니까?”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대답: 주(主)가 바로 재(宰)이고, 재(宰)가 바로 제(制)이다.<ref>주(主)는 무언가를 소유한 주인, 재(宰)는 일을 통괄하는 매니져, 제(制)는 컨트롤의 뜻이다. 결국 세 글자 모두 같은 실상을 지시하는 말이다.</ref> 又問: “孟子集注言: ‘心者, 具衆理而應萬事.’ 此言‘妙衆理而宰萬物’, 如何?” '''재질문: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는 ‘마음이란 여러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ref>대학혹문을 말한다.</ref>서는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妙’字便稍精彩, 但只是不甚穩當, ‘具’字便平穩.” 履孫(65때). '''대답: ‘묘(妙)’ 자는 조금 정채(精彩)롭긴 하지만 그다지 온당(穩當)하진 못하고, ‘구(具)’ 자는 평온(平穩)하다.<ref>'묘'는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해낸다는 인상이 있다. 그와 비교하면 '구'는 훨씬 수수하고 무엇보다도 정적이다.</ref>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43 郭兄問“莫不有以知夫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68자가 더 있다. '當然之則, 如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 臣何故用敬, 父何故用慈, 子何故用孝. 畢竟未曉, 敢以君何故用仁問先生, 伏望敎誨, 俾知所以然之故' 번역은 번역문의 주석쪽을 참조하라.</ref>” '''곽형(郭兄)이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과 그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其所當然之則]을 알지 못함이 없다”<ref>이치(理)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는 어떤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한다. 예컨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은 우리가 이런저런 상황에 처하였을 때 준수해야 마땅한 법칙을 말한다. 예컨대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법칙이다. 현행본 대학혹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천하의 사물에는 반드시 각자 그렇게 되는 까닭과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이다.(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또, 혹문의 전 5장 부분에서도 '다른 수 없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점과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고 적고 있다.</ref>에 대해 질문함.<ref>조선고사본에 적힌 68자를 이어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란 임금의 인(仁),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비의 자(慈)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이란 임금은 어째서 인(仁)해야 하는지, 신하는 어째서 경(敬)해야 하는지,아비는 어째서 자(慈)해야 하는지, 아들은 어째서 효(孝)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끝내 깨치지 못하겠으니, 감히 '임금은 어째서 인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선생님께 묻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게 해주십시오.</ref> 曰: “所以然之故, 卽是更上面一層. 如君之所以仁, 蓋君是箇主腦, 人民土地皆屬它管, 它自是用仁愛. 試不仁愛看, 便行不得.<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자연히 이렇게 하게 된다(自然用如此).'</ref> 非是說<ref>조선고사본에서는 '是說'이 '說是'로 적혀있다.</ref>爲君了, 不得已用<ref>조선고사본에서는 '以'</ref>仁愛<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行之'</ref>, 自是理合如此. 試以一家論之: 爲家長者便用愛一家之人, 惜一家之物, 自是理合如此, 若天使之然. 每常思量著, 極好笑, 自那原頭來便如此了.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蓋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 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它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爲哉! 且以仁言之: 只天地生這物時便有箇仁, 它只知生而已. 從他原頭下來, 自然有箇春夏秋冬,<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四象'.</ref> 金木水火土.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此四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이 없다.</ref>故賦於人物, 便有仁義禮智之性.<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自它原頭處便如此了'</ref> 仁<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則'</ref>屬春, 屬木. 且看春間天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天地'가 없다.</ref>發生, 藹然和氣, 如草木萌芽, 初間僅一針許, 少間漸漸生長<ref>조선고사본에서는 '長'을 '發'로 적었다.</ref>, 以至枝葉花實, 變化萬狀, 便可見他生生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生之'가 없다.</ref>意. 非仁愛, 何以如此. 緣他本原處有箇仁愛溫和之理如此, 所以發之於用, 自然慈祥惻隱. 孟子說‘惻隱之端’, 惻隱又與慈仁不同, 惻隱是傷痛之切. 蓋仁, 本只有慈愛, 緣見孺子入井, 所以傷痛之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也'</ref>. 義屬金, 是天地自然有箇淸峻剛烈之氣. 所以人稟得, 自然有裁制, 便自然有羞惡之心. 禮智皆然. 蓋自本原而已然, 非旋安排敎如此也. 昔龜山問一學者: ‘當見孺子入井時, 其心怵惕·惻隱, 何故如此?’ 學者曰: ‘自然如此.’ 龜山曰: ‘豈可只說自然如此了便休? 須是知其所自來, 則仁不遠矣.’ 龜山此語極好. 又<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引'</ref>或人問龜山曰: ‘“以先知覺後知”, 知·覺如何分?’ 龜山曰: ‘知是知此事, 覺是覺此理.’ 且如知得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是知此事也; 又知得君之所以仁, 臣之所以敬, 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是覺此理也.” 僩(69이후). '''대답: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란 다시 한 단계 더 위의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은 임금은 두뇌[主腦]여서 인민과 토지가 모두 그의 관할이니 그는 자연히 인애(仁愛)하게 된다. 어디 한번 (임금이) 인애(仁愛)하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즉시 말이 안 된다[行不得].<ref>'행부득(行不得)'은 근본적인 모순이 있어 성립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임금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인데 사람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ref> 임금이 되고 나서 부득이하게 인애(仁愛)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치상 당연히 이렇다는 말이다. 어디 한번 한 집안으로 논해보자. 가장(家長)이 된 자는 곧 온 집안 사람을 사랑하고 온 집안 물건을 아끼게 되니, 이치상 당연히 그렇게 되어 마치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우스우니, 저 근원[原頭]에서부터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또, 아버지가 자애롭게 되는 까닭과 아들이 효도하게 되는 까닭의 경우는, 대개 부자(父子)란 본래 같은 하나의 기(氣)인데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 뿐이므로,<ref>기는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자식의 신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기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양측은 동질의 물질을 두 장소에 나누어둔 것 뿐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물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은 것과 같다.</ref>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지는[恩愛相屬]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중대한 인간관계의 범주[大倫]<ref>예컨대 오륜(五倫) 같은 것이다.</ref>들이 모두 그러하니, 모두 천리(天理)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어찌 억지로 노력하는 요소가 끼어들 틈이 있겠나? 또, 인(仁)으로 말해보자면, 천지(天地)가 이 사물들을 낳으면서 인(仁)이 있게 되니, 그것은<ref>천지를 말한다.</ref> 단지 낳을[生] 줄만 알 뿐이다. 그 근원[原頭]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연히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있게 된다. <먼저 음양(陰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있고 나서 이 네 가지가 있게 된다.><ref>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이 '네 가지'는 춘하추동이다. 다만 조선고사본쪽을 따르자면 이 네 가지는 사상(四象)이다. 사상은 음양이 한 차례 더 분화한 형태, 곧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말한다.</ref> 그러므로 (그것들이) 사람과 사물(人物)에게 부여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性)이 있게 된다. 인(仁)은 봄에 속하고 목(木)에 속한다.<ref>17:19, 6:45를 참조하라.</ref> 또, 봄철에 천지가 만물을 발생시키고 온화한 기운이 가득한 것[藹然和氣]을 보라. 예컨대 초목의 싹[萌芽]이 처음에는 겨우 바늘 하나 크기였다가 이윽고 점점 생장하여 가지, 잎, 꽃, 열매에 이르도록 변화만상(變化萬狀)하니, 이에 그것의<ref>천지.</ref> 낳고 낳는[生生] 의지를 볼 수 있다. (천지의) 인애(仁愛)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것의 본원(本原)에 인애온화(仁愛溫和)의 이치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어 작용할 적에 자연히 자애롭고 측은하다[慈祥惻隱]. 맹자(孟子)가 ‘측은(惻隱)의 단서[端]’<ref>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말한다.</ref>를 말하였는데, 측은(惻隱)은 또 자인(慈仁)과 다르니, 측은(惻隱)은 상심하고 애통함[傷痛]이 간절한 것이다. 대개 인(仁)은 본래 자애(慈愛)만 있을 뿐이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상심하고 애통함이 간절한 것이다. 의(義)는 금(金)에 속하니, 천지에는 자연히 맑고 준엄하며 굳세고 맹렬한 기운[淸峻剛烈之氣]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부여받으면 자연히 재제(裁制)<ref>선을 긋고 잘라내고 절제하고 통제하는 행위.</ref>함이 있게 되고, 자연히 수오지심(羞惡之心)<ref>불명예를 수치스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다.</ref>이 있게 된다. 예(禮)와 지(智)의 경우도 모두 그러하다. 대개 본원(本原)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지, 임의로[旋]<ref>'旋'은 멋대로, 임의로(隨意).</ref> (의도를 가지고) 안배하여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옛날 구산(龜山)<ref>이정의 제자 양시.</ref>이 어떤 배우는 이에게 묻기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이 깜짝 놀라고 측은한데[怵惕惻隱], 어째서 이러한가?’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자연히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구산(龜山)이 말하기를 ‘어찌 그냥 자연히 그렇다고만 말하고 말 수 있는가? 반드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所自來]를 알아야 하니, (그렇게 하면) 인(仁)에서 멀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ref>구산집(龜山集) 권 11, 어록 2. '(선생이) 말함: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에게 반드시 측은지심이 드는데, 자기의 고통이 아닌데도 빠진자를 위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조의 대답: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이) 말함: 어찌 자연스럽게 그러하겠나? 이 이치를 몸소 탐구하여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 인의 도리가 멀지 않게 될 것이다." (曰: "孺子將入於井, 而人見之者, 必有惻隠之心, 疾痛非在己也, 而爲之疾痛, 何也?" 似祖曰: "出於自然, 不可已也." 曰: "安得自然如此? 若體究此理, 知其所從來, 則仁之道不遠矣.")' 주희의 인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ref> 구산의 이 말이 대단히 좋다. 또 어떤 사람이 구산에게 묻기를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친다”에서 앎(知)과 깨우침(覺)은 무슨 차이입니까?’라고 하니, 구산이 말하기를 ‘지(知)는 이 일[事]을 안다는 것이고, 각(覺)은 이 이치[理]를 깨닫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ref>양시가 아니라 이정의 말이다. 이정수언(二程粹言) 권 1에 보인다. 해당 텍스트는 양시가 이정의 어록을 문어체로 바꾼 작품이다. 이때문에 양시의 말인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누군가의 질문: "석씨는 '말 한마디에 깨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선생: "왜 꼭 부처인가? 맹자도 그렇게 말했다.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치고, 먼저 깨친 자가 뒤에 깨친 자를 깨우친다. 앎은 이 일을 안다는 것이고 깨달음은 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或問:釋氏有言下覺,如何? 子曰:何必浮屠氏? 孟子言之矣. 以先知覺後知,以先覺覺後覺. 知者,知此事也. 覺者,覺此理也.)'</ref> 예컨대 임금의 인(仁)과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버지의 자(慈)를 아는 것은 이 일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 신하가 경(敬)하게 되는 까닭, 아버지가 자(慈)하게 되는 까닭, 아들이 효(孝)하게 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4 或問“格物”章本有“所以然之故”. '''대학혹문의 ‘격물(格物)’ 장(章)에 원래는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라는 표현이 있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기로, 천도가 작동하여 (만물을) 만들어내고 길러냄에, 소리와 색과 모양을 가지고서 천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물(物)이다. 물이 있고 나면, 이 물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까닭에는 각각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어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받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曰: "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ref> 曰: “後來看得, 且要見得‘所當然’是要切處. 若果見得不容已處, 則自可黙會矣.” '''(이에 대한 선생의) 대답: 나중에 보니, 우선은 ‘그렇게 해야 마땅한 바[所當然]’를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고 절실[要切]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정말로 그만둘 수 없다는[不容已] 측면<ref>'소당연'을 말한다.</ref>을 보게 된다면 저절로 묵묵히 이해할[默會]<ref>묵묵히 이해함은 소리로 발성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개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의 차원에서 절감하여 세상과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함을 말한다.</ref> 수 있게 될 것이다. ===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 단락 === *   治國平天下者諸侯之事一段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ref>치국은 제후의 일이고 평천하는 천자의 일이다. 대학혹문 원문에서는 '천자와 제후의 일(天子諸侯之事)'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천자 부분이 생략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ref> 단락 *  17:45 問: “南軒謂: ‘爲己者, 無所爲而然也.’” '''질문: 남헌(南軒)<ref>장식(張栻)</ref>이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ref>논어 14:25.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목표로 배움에 종사한다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전자가 위기지학, 후자가 위인지학이다.</ref>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也].’<ref> 남헌집 권14. 맹자강의서(孟子講義序). '배우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에 깊이 마음을 두어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려 한다면, 내 생각에 의(義)와 이(利)의 분별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 위하는 바 없이 그러함이 (바로 중용에서 말한) 천명(命)이 그치지 않는 이유이고, 본성(性)이 치우치지 않는 이유이며, 가르침(敎)이 무궁한 이유이다. 무릇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리 되는 것들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요 천리(天理)가 간직된 바가 아니니, 이것이 바로 의와 이의 구분이다.(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爲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爲而然也. 無所爲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敎之所以無窮也. 凡有所爲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 해당 부분은 주희가 대학혹문에서 직접인용하고 있다.</ref>라고 했습니다. 曰: “只是見得天下事皆我所合當爲而爲之, 非有所因而爲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之'를 '也'로 적었다.</ref>. 然所謂天下之事皆我之所當爲者, 只恁地强信不得. 須是學到那田地, 經歷磨鍊多後, 方信得過.” 道夫(60이후). '''대답: 단지 천하의 일이 모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보았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ref>통상적인 논어 해석에서 벗어나서 '자기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을 위인지학으로,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을 위기지학이라고 본 것이다. 대학혹문 경 1장의 14절에서는 치국과 평천하는 모두 천자나 제후쯤 되는 사람들의 일인데 평범한 사대부가 대학을 읽으며 치국 평천하를 꿈꾸는 것은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위인지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군자란 자신이 모시는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어 백성들에게 요순의 은택을 입히려고 하므로 치국 평천하가 모두 군자의 '직분'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이가 대학의 치국 평천하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직분 내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므로 '위기지학'이 된다. 관련하여 어류 15:156을 보라.</ref> 그러나 이른바 천하의 일이 모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은, 그저 그렇게 억지로 믿는[强信] 것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배워서 저 경지[田地]에 도달하여 많은 경험과 단련[經歷磨鍊]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확실히 믿어지게 된다[信得過].<ref>'得過'의 '득'은 가능성을, '과'는 방향을 나타내는 보어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6 問爲己. '''위기(爲己)에 대해 묻다.<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這須要自看, 逐日之間, 小事大事, 只是道我合當做, 便如此做, 這便是無所爲. 且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才說要人知, 便是有所爲. 如世上人才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爲人之甚者.” 賀孫(62이후). '''대답: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보아야 하니, 매일매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저 '나는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다. 예컨대 글을 읽을 때, 그저 '나는 이렇게 (이걸)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자신을 신경써야[理會] 한다'<ref>'리회(理會)'는 종종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살피고 헤아리는 행위를 말한다. 8:91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이 된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이 글을 읽자마자 (자기가) 읽은 것을 활용하여[安排] 완전히[好]<ref>'好'는 이어지는 동작의 완성도가 높음을 나타낸다.</ref> 시문(時文)<ref>과거시험답안.</ref>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남을 위함[爲人]이 심한 경우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7 “‘爲己者, 無所爲而然.’ 無所爲, 只是見得自家合當做, 不是要人道好. 如甲兵·錢穀·籩豆·有司, 到當自家理會便理會, 不是爲別人了理會. 如割股·廬墓, 一則是不忍其親之病, 一則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爲己.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爲人.”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ref>장식의 말. 17:45를 보라.</ref> 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을) 마땅히 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이지, 남들이 '좋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갑병(甲兵)<ref>군무를 말한다.</ref>·전곡(錢穀)<ref>재무를 말한다.</ref>·변두(籩豆)<ref>제사와 의전을 말한다.</ref>·유사(有司)<ref>그밖의 모든 실무를 말한다.</ref>와 같이, 자기 자신이 마땅히 처리[理會]<ref>'리회(理會)'의 번역에 관해서는 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해야 할 때가 되면 곧 처리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할고(割股)<ref>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내 병든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효행의 케이스로 종종 거론된다.</ref>나 여묘(廬墓)<ref>부모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사는 행위. 역시 효행의 일종으로 거론된다.</ref> 같은 것은, 하나는 그 어버이의 병듬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행위이다. 만약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곧 남을 위하는[爲人] 행위이다.<ref> 이 부분은 대학혹문의 특정 구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대저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천하의 사무를 보기를 (모두) 마땅히 해야 하는 자신의 사무로 여기고 수행한다면 갑병, 전곡, 변두, 유사의 업무조차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겠구나 하여 수행한다면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내고 여묘살이하고 망가진 수레와 파리한 말을 타는 것도 모두 남을 위하는[爲人] 것일 뿐이다.(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馬, 亦爲人耳.)'</ref> 器遠問: “子房以家世相韓故, 從少年結士, 欲爲韓報仇, 這是有所爲否?” '''기원(器遠)<ref>주희의 제자 조숙원(曹叔遠)</ref>의 질문: 자방(子房)<ref>한(漢)의 개국공신 장량(張良, BC 250-BC 186).</ref>이 집안 대대로 한(韓)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선비를 모아 한(韓)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 아닙니까? 曰: “他當初只一心欲爲國報仇. 只見這是箇臣子合當做底事, 不是爲別人, 不是要人知.” 賀孫(62이후). '''대답: 그는 애당초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저 이것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보았을 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8 行夫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남헌이 말하기를(南軒云)'이 더 있다.</ref>“爲己者無所爲而然”.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다. 이는 모든 일이 다 자신이 응당 해야 할 바라고 보아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도 칭찬을 바라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목적)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也. 這是見得凡事皆吾所當爲, 非求人知, 不求人譽, 無倚無靠之謂否?)'가 더 있다.</ref> '''행부(行夫)<ref>'행보'라고 읽어야 할지 '행부'라고 읽어야 할지 확실치 않다.</ref>가 “자신을 위하는 자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爲己者無所爲而然]”에 대해 질문함.<ref>이 부분에 대해서는 17:45와 46, 47을 참조하라.</ref> 曰: “有所爲者, 是爲人也. 這須是見得天下之事實是己所當爲, 非吾性分之外所能有, 然後爲之, 而無爲人之弊耳. 且如‘哭死而哀, 非爲生者’. 今人弔人之喪, 若以爲亡者平日與吾善厚, 眞箇可悼, 哭之發於中心, 此固出於自然者. 又有一般人欲亡者家人知我如此而哭者, 便不是, 這便是爲人. 又如人做一件善事, 是自家自肯去做, 非待人敎自家做, 方勉强做, 此便不是爲人也.” '''대답: 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有所爲者] 남을 위한다는 것[爲人]이다. 이에 관해서는 반드시 천하의 일이 기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자기 본연의 직분[性分]의 범위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그렇게 알게 된) 뒤에 그것을 실천해야 남을 위하는 폐단[爲人之弊]이 없게 될 뿐이다.<ref>대학혹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활연대공하여, 천하를 봄에 그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고,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다. 혹여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여전히 자기 직분의 범위 안에 있다고 여긴다.(是以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去聲內也)'</ref> 예컨대 ‘죽은 이를 위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의 경우,<ref>맹자 7B:33.</ref> 요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喪)에 조문할 때, 만약 망자가 평소 나와 잘 지냈으므로 참으로 애석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통곡한다면 이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망자의 가족이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곡하니, 이는 옳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남을 위하는 것[爲人]이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좋은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기꺼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자기더러 하라고 시키면 그제서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남을 위하는 경우[爲人]가 아니다. 道夫曰: “先生所說錢穀·甲兵·割股·廬墓, 已甚分明, 在人所見如何爾.” '''내가(道夫) 말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곡(錢穀)·갑병(甲兵)·할고(割股)·여묘(廬墓)<ref>17:47을 참조하라.</ref>는 매우[已甚] 분명하니, (이러한 행위들이 위기가 되느냐 위인이 되느냐는) 사람들 각자의 소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ref>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라는 뜻이다.</ref> 又問: “割股一事如何?” '''(내가) 다시 질문함: 할고(割股)는 어떻습니까? 曰: “割股固自不是. 若是誠心爲之, 不求人知, 亦庶幾.” '''대답: 할고(割股)는 물론 옳지 않지만, 만약 성심(誠心)으로 한 일이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면 역시 (옳은 쪽으로) 거의 가깝다[庶幾]. “今有以此要譽者.” '''(나의 말): 요즘 이로써 명예를 구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因擧一事爲問. 先生詢究, 駭愕者久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재질문: "요즘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의 (할고 등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자인합니다<그럴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살펴보면) 역시 매우 난처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윽고, ...(再問: 如今都不問如何, 都<不只>自認自家不是, 然其曲折亦甚難處. 久之,)'가 더 있다.</ref> 乃始正色直辭曰: “只是自家過計了. 設使後來如何, 自家也未到得如此. 天下事惟其直而已. 試問鄕鄰, 自家平日是甚麽樣人! 官司推究亦自可見.” '''이어서 한 가지 일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사정을) 자세히 물으시고 한동안 경악하셨다. 이내 안색을 바로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사람) 자신의 계산이 지나쳤던[過計] 것일 뿐이다. 설사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역시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일(에 대처하는 자세로는) 오직 정직함[直] 뿐이다. (그 사람은) 어디 한번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자기 자신이 평소 어떤 사람인지! 관청(官司)에서 조사해도 역시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行夫曰: “亦著下獄使錢, 得箇費力去.” 행부(行夫)의 말: 그래도 (체포될 경우) 옥에 갇혀 돈을 써야 하니[著]<ref>'著'은 종종 '須著'의 준말로 쓰인다. '~해야 한다'의 의미이다. 17:38의 용례를 참조하라.</ref>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曰: “世上那解免得全不霑濕! 如先所說, 是不安於義理之慮. 若安於義理之慮, 但見義理之當爲, 便恁滴水滴凍做去, 都無後來許多事.” 道夫(60이후). '''대답: 세상에 어떻게[那] 조금도 젖지 않고[霑濕]<ref>'점유(沾濡)'라고도 쓴다.</ref> 면할 수[解]<ref>'解'는 영어에서의 can과 같다.</ref> 있겠는가! 앞서 말한 경우 같으면, (그 사람은)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했더라면 그저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서 곧 그렇게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어는 것처럼[滴水滴凍]<ref>'적수성동(滴水成凍)'의 형태로도 사용한다. 확고부동함, 과감함, 엄정함을 의미하며, 확실하게 하나하나 사안을 격파해가는 기상을 형용하기도 한다. 주자어류사휘연구 p.255 참조.</ref> 해나가서 뒷날의 여러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f>본 조목의 후반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일역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송회요집고등을 보면 당시 의도적인 할고를 통해 효자로 인정받아 세금과 요역을 면제받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각급 관청에서는 할고행위가 보고되면 그것이 진정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부당이득을 목적으로 자행한 것인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고, 조사 결과 불순한 할고라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건의 당사자는 병든 부모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할고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관청의 조사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할고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쩌면 할고를 통해 병이 나을 수도 있었을) 부모가 사망한 것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전 1장 == *  傳一章 전 1장 ===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 然則其曰克明德一段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17:49 問: “‘克明德’, ‘克, 能也’. 或問中卻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질문: ‘극명덕(克明德)’<ref>대학 전 1장.</ref>에 대하여 ‘극(克)은 능(能)이다.’<ref>해당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ref>고 하였는데, 《대학혹문》 에서는 도리어 ‘이겨내려는[克] 노력을 다할 수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能'자가 없고 '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라고 쓰고 있다.</ref>고 풀이하여 다시‘이겨내어 다스리다[克治]’의 ‘극(克)’처럼 보이는데, 어째서입니까?<ref>극(克)은 능(能)이나 승(勝)으로 훈한다. 대학장구에서는 능으로 훈했는데 혹문에서는 승으로 훈했으니 이상하다는 질문이다.</ref> 曰: “此‘克’字雖訓‘能’字, 然‘克’字重於<ref>여유량본 이전의 판본들은 모두 '於'를 '如'로 적고 있다.</ref>‘能’字. ‘能’字無力, ‘克’字有力. 便見得是他人不能, 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德’, 語意便都弱了. 凡字有訓義一般, 而聲響頓異, 便見得有力無力之分, 如‘克’之與‘能’是也. 如云‘克宅厥心’, ‘克明俊德’之類, 可見.” 僩(69이후). '''대답: 이 ‘극(克)’ 자는 비록 ‘능(能)’ 자로 훈(訓)하지만, 그래도 ‘극(克)’ 자가 ‘능(能)’ 자보다 무겁다. ‘능(能)’ 자는 힘이 없고 ‘극(克)’ 자는 힘이 있다. 곧 다른 사람은 능하지 못한데 문왕(文王)만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단지 ‘능명덕(能明德)’이라고만 썼으면 말의 뜻이 모두 약해졌을 것이다. 무릇 글자 중에는 훈(訓)과 뜻[義]은 같지만 음향[聲響]이 완전히[頓] 달라서 힘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극(克)’과 ‘능(能)’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능히 삼택의 마음을 안다[克宅厥心]’<ref>상서 주서 입정(立政)편 제 12장. 본래 '惟克厥宅心'이어야 하는데 본 조목에서는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고 있다. '택(宅)'은 지위이다. 입정편에서 세 가지 큰 지위에 거한 자를 '삼택' 혹은 '삼유택(三有宅)'이라고 부른다. '惟克厥宅心'은 문왕(文王)이 이 삼택의 마음을 능히 잘 알았다는 뜻이다.</ref>, ‘능히 큰 덕을 밝힌다[克明俊德]’<ref>상서 우서 요전 제 2장. 대학 전 1장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등과 같은 것들에서 (이 차이를) 볼 수 있다.<ref>주희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 顧諟天之明命一段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17:50 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대학혹문에서 밝은 명령에 대해 설명한 곳에서 말하기를(或問說明命處云)'이 더 있다.</ref>: “‘全體大用, 無時不發見於日用之間’. 如何是體? 如何是用?” <ref>조선고사본에서는 '如何是體? 如何是用?'이 없고 '일상 속의 어디가 전체대용의 지점입니까?(日用間如何是全體大用處)'라고 적혀 있다.</ref> '''질문:‘온전한 본체[全體]와 위대한 작용[大用]이 일상[日用] 속에서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다'<ref>대학혹문.</ref>에서, 체(體)는 무엇이고 용(用)은 무엇입니까?<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 대학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전체대용(全體大用)'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명덕(明德)과 그것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양상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ref> 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 <ref>조선고사본에서는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이 없고, 그 대신 '可見.'과 '如喜怒哀樂'의 사이에 '體與用不相離, 如這是體, 起來運行便是用.'이 있다.</ref>‘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ref>조선고사본에서는 '擧此一節'</ref>, 體·用便<ref>조선고사본에서는 '便'을 '亦'으로 적었다.</ref>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하의 주석에서처럼 '희노는 용이요, 희노할 수 있게끔 해주는 원천이 체이다.(如喜怒是用, 所以能喜怒者, 便是體)'라고 적고 있다.</ref>”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61이후).<ref>조선고사본에서는 '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을 간단히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 㝢同.)'라고 적고 있다.</ref> '''대답: 체(體)와 용(用)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몸[身]은 체(體)이고 일어나 가려는 것은 용(用)이다. ‘어린아이가 기어서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모두 경악하고 측은한 마음[怵惕惻隱之心]이 있다’는 단지 이 한 가지 단서에서 체(體)와 용(用)을 볼 수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용(用)이고, 희노애락의 원천[所以喜怒哀樂]은 체(體)이다. <진순의 기록: 희노할 수 있게끔 해주는 원천이 체이다.><ref>'소이(所以)'는 가능근거이다. 우리의 몸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걷고 달리는 것이 가능하고 핸드폰이 있어야 앱이 돌아가는 것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솟구침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능근거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ref><ref>본 조목은 서우와 진순이 각각 기록한 것인데 조선고사본에서는 진순의 것을 수록했고 여정덕본에서는 서우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되 진순의 것을 주석으로 삽입한 것처럼 보인다.</ref> *  17:51 問: “或問: ‘常目在之, 眞若見其“參於前, 倚於衡”也, 則“成性存存”, 而道義出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 구문이 더 있다. '늘 반복하여 생각하지만 그 뜻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중용』(제 16장)에서 말하기를, '마치 그 위에 있는 듯하고,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고 한 것은 귀신(鬼神)의 성정과 공효[德]가 이처럼 성대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귀신이라고 한다면 (우리) 몸 밖에 (실제로) 있는 물건입니다만, 지금 이른바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나의 이 작은 마음 속에 갖추어진 것이니, 애초에 어찌 형체가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마치 정말로 그것이 앞에 참여하고 있고 멍에에 기대고 있음을 보듯이 하라"고 하니,(常反覆思之, 而未會其意. 如中庸言, 如在其上, 如其左右, 是言鬼神之德如此其盛也. 猶曰鬼神者, 身外之物也. 今之所謂德者, 乃天之所以命我, 而具於一心之微, 初豈有形體之可見? 今乃曰眞若見其參於前而倚於衡,)'</ref> 不知<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其'가 더 있다.</ref>所見者果何物耶?” '''질문: 《대학혹문》에서 ‘"항상 거기에 눈을 두어서[常目在之]"<ref>대학 전 1장에 나오는 '고식(顧諟)'에 대한 주희의 풀이이다. 대학장구에 보인다.</ref> 마치 정말로 “(서 있을 때는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음"<ref>논어 15:5</ref>을 보듯이 한다면 “이루어진 본성(性)을 간직하고 간직하여[成性存存]” 도의(道義)가 (거기서) 나올 것이다.<ref>주역 계사상전 제 7장. '이루어진 본성을 간직하고 간직함이 도의가 나오는 문이다(成性存存, 道義之門)'</ref>’<ref>대학혹문. 어류 16:9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라.</ref>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물건입니까? 曰: “此豈有物可見! 但是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 每與是德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在. 一出言, 則言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一行事, 則事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不過如此耳, 初豈實有一物可以見其形象耶!” 壯祖(미상). '''대답: 이 어찌 볼 수 있는 물건이겠는가? 다만 뭇 사람들이 성찰(省察)할 줄 몰라서 일상생활[常行日用] 속에서 매양 이 (밝은) 덕(德)을 잊고 지내며,<ref>'與'는 뒤따라오는 명사구를 목적어로 확정해준다. '相'은 뒤따라오는 동사의 일방적인 적용을 나타낸다. 뭇 사람들'이' 밝은 덕'을' 잊고 사는 것이지, 밝은 덕과 사람들이 서로를 잊고 산다는 말이 아니다.</ref> 자신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줄도 모르고 있다. 지금 이른바 '자세히 살핀다[顧諟]'는 것은 그저 마음속에서 늘 이 이치(理)를 간직하고 있으라는 것 정도이다.<ref>'在'는 단정적 어감의 어기사로, 문언의 '焉'과 같다.</ref> 일단 말을 냈으면 말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으니 실언해서는 안 되고, 일단 일을 행했으면 일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실수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에 불과할 뿐이니, 애초에 어찌 실제로 무슨 물건이 있어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다는 것이겠는가? 장조(壯祖)의 기록. (미상) *  17:52 問: “引‘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질문: '이루어진 본성(性)을 간직하고 간직하여[成性存存] 도의(道義)가 (거기서) 나올 것이다.'<ref>17:51을 참조하라.</ref>를 인용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曰: “自天之所命, 謂之明命, 我這裏得之於己, 謂之明德,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會忠; 事親必會孝; 見孺子,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 便自然會恭敬; 合辭遜處, 便自然會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會合道理!” 賀孫(62이후). '''대답: 하늘이 명(命)한 바를 '밝은 명령(明命)'이라 하고, 내가 내 속에 얻은 것을 '밝은 덕(明德)'이라 하니, (이 둘은) 하나의 도리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저 이것을[這些] 자기 속에 잘 간직하기만 하면 된다. 자기 속에 간직하기만 하면, 임금을 섬김에 반드시 충(忠)할 수 있을 것이고, 어버이를 섬김에 반드시 효(孝)할 수 있을 것이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를 보면 깜짝 놀라는(怵惕) 마음이 바로 틔워나올 것이고, 담을 뚫고 넘어[穿窬] (도둑질하는) 무리를 보면 수치스럽고 미워하는[羞惡] 마음이 바로 틔워나올 것이며, 응당 공경(恭敬)해야 할 곳에서는 바로 자연스레 공경할 수 있을 것이고, 응당 사양[辭遜]해야 할 곳에서는 바로 자연스레 사양할 수 있을 것이다. 늘 반드시 이 마음을 잘 간직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곧 이 본성(性)이 발현한 것이 모두 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이것을<ref>밝은 명령이자 밝은 덕.</ref> 잘 간직하지도 못하면서 틔워나오길 기대한다면 그 무엇이 도리에 합치할 수 있겠나?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 是三者固皆自明之事一段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17:53 問: “‘顧諟’一句, 或問復以爲見‘天之未始不爲人, 而人之未始不爲天’, 何也?” '''질문: '자세히 살피다[顧諟]’<ref>대학 전 1장.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顧諟天之明命]' 원출전은 서경 상서 태갑편.</ref> 구절은 《대학혹문》에서 다시 ‘하늘은 일찍이 사람이 아닌 적이 없고 사람은 일찍이 하늘이 아닌 적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只是言人之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則, 所謂天理也. 人若每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只一理. 若理會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壯祖(미상). '''대답: 사람의 본성(性)은 본래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사람의 일상생활[日用]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있지 않음을 말한 것 뿐이다. 법칙[則]이란 이른바 천리(天理)이다. 사람이 매사를 옳게 한다면 곧 천리(天理)에 합치된다. 하늘과 사람은 본래 (동일한)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만약 이 뜻을 이해한다면 하늘이 어찌 (사람보다) 클 것이며 사람이 어찌 (하늘보다) 작을 것인가? 장조(壯祖)의 기록. (미상) *  17:54 問“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 ''' '하늘은 일찍이 사람이 아닌 적이 없고 사람은 일찍이 하늘이 아닌 적이 없다[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에 대한 질문. 曰: “天卽人, 人卽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旣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只今說話, 天便在這裏. 顧諟, 是常要看敎光明燦爛, 照在目前.” 僩(69이후). '''대답: 하늘이 사람이고 사람이 하늘이다. 사람의 탄생은 하늘에서 얻었으니, 이 사람을 낳은 이상 하늘은 다시 사람 안에 있게 된다. 말하고 움직이며 보고 듣는 것[語言動作視聽] 모두가 다 하늘이다. 바로 지금 (내가) 말하고 떠드는 것도 하늘이 그 안에 있다. '자세히 살핀다[顧諟]'함은 항상 (명덕의) 찬란한 광명(光明)이 내 눈 앞을 비추도록 보라는 것이다.<ref>유사한 표현이 14:73에 있으니 참조하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전 2장 == *  傳二章 전 2장 ===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 或問盤之有銘一段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17:55 德元問: “湯之盤銘, 見於何書?” 曰: “只見於大學.” 又曰: “成湯工夫全是在‘敬’字上. 看來, 大段是一箇修飭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亦說得大段地著. 如禹‘克勤于邦, 克儉于家’之類, 卻是大綱說. 到湯, 便說‘檢身若不及’.” 文蔚云: “‘以義制事, 以禮制心’, ‘不邇聲色, 不殖貨利’等語, 可見日新之功.” 曰: “固是. 某於或問中所以特地詳載者, 非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耳.” 文蔚(59이후). *  17:56 問: “丹書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從’字意如何?” 曰: “從, 順也. 敬便豎起, 怠便放倒. 以理從事, 是義; 不以理從事, 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亦猶坤卦說敬·義.” 㝢(61이후). * " 17:55 덕원(德元)이 묻다: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은 어느 책에서 보입니까?" o 답하다: "단지 《대학》에서만 보인다." o 또한 말하다: "성탕(成湯)의 공부는 온전히 '경(敬)' 자 위에 있다. 보아하니 매우 수양하고 삼가는[修飭]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가 공부한 부분을 말할 때 또한 매우 대단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우(禹)임금의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집안 살림에 검소했다[克勤于邦, 克儉于家]' 등과 같은 종류는 도리어 대강(大綱)을 말한 것이다. 탕왕(湯)에 이르러서는 곧 '몸을 살핌이 미치지 못하는 듯이 했다[檢身若不及]'고 말한다." o 문울(文蔚)이 말하다: "'의(義)로써 일을 제어하고 예(禮)로써 마음을 제어하며[以義制事, 以禮制心]',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고 화리(貨利)를 불리지 않았다[不邇聲色, 不殖貨利]' 등의 말을 보면 날로 새로워지는 공효[日新之功]를 알 수 있습니다." o 답하다: "진실로 그렇다. 내가 《혹문(或問)》 중에서 특별히 상세히 실은 까닭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쓰게[經心] 하고자 함일 뿐이다." o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56 묻다: "《단서(丹書)》에 이르기를 '경(敬)이 태만(怠)함을 이기면 길(吉)하고, 태만(怠)함이 경(敬)을 이기면 멸(滅)하며, 의(義)가 욕심(欲)을 이기면 따르고[從], 욕심(欲)이 의(義)를 이기면 흉(凶)하다.' '종(從)' 자의 뜻은 어떻습니까?" o 답하다: "종(從)은 순(順)이다. 경(敬)하면 곧 세워지고[?起], 태(怠)하면 곧 쓰러진다[放倒]. 이치[理]로써 일을 따르는 것이 의(義)이고, 이치[理]로써 일을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욕(欲)이다. 여기에서 경(敬)과 의(義)는 하나의 체(體)·용(用)이니, 또한 곤괘(坤卦)에서 경(敬)·의(義)를 설명한 것과 같다." o 우(?)의 기록. (61세 이후) == 전 3장 == *  傳三章 전 3장 ===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 復引淇澳之詩一段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17:57 “‘瑟兮僩兮者, 恂慄也’. ‘僩’字, 舊訓寬大. 某看經子所載, 或從‘忄’·或從‘扌’之不同, 然皆云有武毅之貌, 所以某注中直以武毅言之.” 道夫云: “如此注, 則方與‘瑟’字及下文恂慄之說相合.” 曰: “且如‘恂’字, 鄭氏讀爲‘峻’. 某始者言, 此只是‘恂恂如也’之‘恂’, 何必如此. 及讀莊子, 見所謂‘木處則惴慄恂懼’, 然後知鄭氏之音爲當. 如此等處, 某於或問中不及載也. 要之, 如這般處, 須是讀得書多, 然後方見得.” 道夫(60이후). *  17:58 問: “切磋琢磨, 是學者事, 而‘盛德至善’, 或問乃指聖人言之, 何也?” 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熙敬止’說. 然聖人也不是揷手掉臂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卻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爲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淳(61·70때). 寓同. *  17:59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旣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 旣切而復磋之. 切得一箇樸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旣修而猶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 旣琢而復磨之. 琢, 是琢得一箇樸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之至善也. 取此而喩君子之於至善, 旣格物以求知所止矣, 又且用力以求得其所止焉. 正心·誠意, 便是道學·自修①. ‘瑟兮僩兮, 赫兮喧兮’, 到這裏, 睟面盎背, 發見於外, 便是道學·自修之驗也.” 道夫云: “所以或問中有始終條理之別也, 良爲此爾.” 曰: “然.” 道夫(60이후). *  17:60 “‘如切如磋’, 道學也”, 卻以爲始條理之事; “‘如琢如磨’, 自修也”, 卻以爲終條理之事, 皆是要工夫精密. 道學是起頭處, 自修是成就處. 中間工夫, 旣講求又復講求, 旣克治又復克治, 此所謂已精而求其益精, 已密而求其益密也. 謨(50이후). *  17:61 周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密否?” 曰: “始終條理都要密, 講貫而益講貫, 修飭而益修飭.” 淳(61·70때). *  17:62 問: “琢磨後, 更有瑟僩赫喧, 何故爲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了氣象恁地. ‘穆穆文王’, 亦是氣象也.” 㝢(61이후). lttu9j0n1boejl8o6y3k63yuyeb3gmg 392601 392600 2025-06-26T08:08:32Z Thomas Dongsob Ahn 16640 작업중 392601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017 | 다른 표기 = | 부제 = 대학4 / 혹문 상(上)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 편집자 = | 역자 = | 이전 = | 다음 = | 설명 = }} 朱子語類卷第十七 주자어류 권 17 *   大學四或問上 대학 4 / 혹문 상(上)<ref>앞서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 대학에 관하여 논하였다. 권 17은 대학에 관한 네 번째 권이자 대학혹문의 상권에 관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부제가 붙었다. 대학혹문은 주희가 지은 대학의 참고서로 상/하 두 권으로 묶여있다. 가상의 질문자가 질문하면 주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목이 '누군가의 질문(或問)'이다. 논어, 맹자, 중용혹문도 있다.</ref> *    經一章 == 경 1장 == <ref>대학은 경 1장과 전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어류 권 14부터 16까지는 대학의 이 순서에 맞추어 조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혹문 역시 대학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하여 전 10장에서 끝난다. 주자어류 권 17과 18 역시 혹문의 순서에 따라 경 1장부터 시작한다.</ref>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단락 === *   或問吾子以爲大人之學一段 ''' '누군가의 질문: 그대는 대인의 학문이라고...' <ref>대학혹문의 각 장은 여러 단락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류 17:1부터 18까지는 모두 그중 첫 번째 단락에 관한 내용이다. 어류 권 17과 18은 대학혹문을 먼저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고 여기다 대학혹문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는 것도 그 분량을 감안하였을 때 적절치 못하다. 박완식이 2010년에 번역한 '대학, 대학혹문, 대학강어'를 옆에 두고 참조하는 것이 좋다. 혹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을 웹상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이쪽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https://dh.aks.ac.kr/Edu/wiki/index.php/%EB%8C%80%ED%95%99#.E3.80.8E.ED.98.B9.EB.AC.B8.E3.80.8F_.EA.B2.BD1.EC.9E.A5 대학혹문 번역문(고려대 의적단)]).</ref> *  17:1 問友仁: “看大學或問如何?”<ref>조선고사본은 상황 묘사가 보다 자세하다. '선생이 내게 물었다: 자네가 오늘 대학혹문을 읽었는데 어떠한가?(先生問友仁曰: 公今日看大學或問如何?)'</ref> '''(선생이) 나(友仁)에게 질문함: 대학혹문을 보니 어떠한가? 曰: “粗曉其義.” <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뜻은 대강 깨쳤으나 아직 다 깨치지 못한 듯합니다. (云: 粗曉其義, 但恐未然.)'</ref> '''(나의) 대답: 그 뜻을 대강 깨쳤습니다. 曰<ref>조선고사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생이 한두군데를 찍어서 내게 설명해보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先生擧一二處令友仁說. 先生曰:)'</ref>: “如何是‘收其放心, 養其德性’?” '''(선생이) 말함: 무엇이 '그 놓쳐버린 마음을(放心)<ref>맹자 6A:11. 맹자가 되찾으라고 한 마음은 어진 정서(仁)에 가까우나 주희는 이를 집중하여 각성된 의식인 것처럼 풀이했다. 그래서 주희가 '구방심(求放心)'을 요구할 때 이를 '거경(居敬)' 으로 치환해도 말이 통한다. 실제로 대학혹문에서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장한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본래 맹자에서 '방(放)'과 '존(存)'이라는 동사쌍으로 보이고자 한 이미지는 기르는 개나 닭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난 것을 수색해서 찾아오는 상황이었다. 주인이 고의로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짐승이 집을 나가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므로 '방심'은 '놓친 마음', '잃어버린 마음', '놓아버린 마음', '풀려난 마음', '달아난 마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반대로 '존심(存心)'이나 '구방심'은 그렇게 달아난 것을 되찾아 집안에 가져온 뒤 다시 달아나지 못하게 적절하게 관리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찾아오다', '보존하다', '간직하다', '간수하다' 등으로 번역한다.</ref> 거두어들이고 그 덕성(德性)을 기른다[收其放心, 養其德性]'는 것인가? 曰: “放心者, 或心起邪思, 意有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至於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截斷不續, 至於耳目言動皆然, 此乃謂之收. 旣能收其放心, 德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之外, 又養箇德性也.” '''(나의) 대답: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란, 혹 마음(心)에 삿된 생각(邪思)이 일어나고, 의지(意)에 망령된 상념(妄念)이 생기며, 귀로 삿된 말을 듣고, 눈으로 혼란한 색을 보며, 입으로 도(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손발의 움직임이 예(禮)에 맞지 않는 데 이르기까지가 모두 놓침[放]입니다.<ref>이 주장의 레퍼런스는 물론 논어 12:1의 '극기복례'이다.</ref> 거두어들임[收]이란, 곧 삿된 생각과 망령된 상념이 있는 지점에서 딱 끊어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귀·눈·말·움직임[耳目言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거두어들인다[收]고 합니다. 자신의 놓쳐버린 마음(放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상 덕성(德性)은 자연히 길러집니다. 방심(放心)을 거두는 것과 별개로 다시 덕성(德性)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曰: “看得也好.” 友仁(69때). '''(선생이) 말함: 잘 보았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 問: 或問"'以七年之病, 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方得. '''질문: 《혹문(或問)》에서 "'일곱 해 된 병에 세 해 묵은 쑥을 구하는[七年之病, 求三年之艾]' 경우<ref>맹자 4A:9. 직전 조목의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부분은 어렸을 적 소학의 단계를 거친 적 없이 없었던 어른이 이렇게 빼먹은 과정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거경공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주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어렸을 적에 도덕원칙들을 신체화/습관화 시킨 뒤 (곧, 소학의 단계) 커서 그러한 도덕원칙들을 이지적으로 묻고 따져서 이해하는 것이다(곧, 대학의 단계). 하지만 주희가 보기에 오늘날에는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소학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 작업이 '경(敬)'공부이다. 비유하자면 평생에 걸쳐 (소학 때 못 했던 것을) 벌충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검정고시 같은 것이다. 일곱 해 된 병은 소학의 공부를 건너뛴 기간이고 세 해 묵은 쑥은 그것을 뒤늦게 따라잡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거경공부이다.</ref> 백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취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미 배움을 잃은[失學]<ref>어렸을 적에 소학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말이다.</ref> 뒤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노력하고 분발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趲補得前許多欠闕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沒長進, 如何要塡補前面!” 賀孫(62이후). '''대답: 시기를 놓친 뒤에 배우려면 반드시 이처럼 이전에 건너뛴 빈칸들을 서둘러[趲] 보충하여야 한다. '남이 한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만에 능숙히 해내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한다.’<ref>중용 제 20장.</ref>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유유히 세월만 보내며 그날그날 해야할 공부(工夫)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인데 무슨 수로 이전(에 건너뛴) 부분을 메우려 하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 持敬以補小學之闕. 小學且是拘檢住身心, 到後來‘克己復禮’, 又是一段事. 德明(44이후). '''경(敬)을 견지함으로써[持敬]<ref>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을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端慤純一靜專) 유지한다는 말이다(14:19). 조금 더 비근하게 설명하자면 흐리멍텅한 정신을 고조시켜 맑고 투명하고 집중된 상태로 유지하는 명상수련과 흡사하다. 어린아이가 평소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도 엄숙한 선생님 앞에 서거나, 교실에서 무언가를 발표하거나, 그밖에 진지한 이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산만한 의식을 또렷하게 집중시키게 된다. 소학에서 요구하는 공부들, 예컨대 거처를 청소하고 어른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공부들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처럼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가 소학 트레이닝을 겪지 않은 어른들에게 거경/지경 공부를 권하는 것은 A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B를 가져와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A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느긋하게 달성하고자했던 궁극적 목표를 생으로 가져와서 빨리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지난 십년의 공부를 몇년 안에 따라잡아서 해치워야하는 검정고시준비과정과 제일 가깝다. 한편 주희는 이처럼 마음을 특정한 상태로 세팅하고 유지하는 공부를 적극적인 이지적 탐구와 더불어 배움의 두 축으로 삼았다. 전자가 거경(居敬)/지경(持敬), 후자가 궁리(窮理)이다. 전자가 소학의 목표라면 후자는 대학의 목표이니, 주희의 '학'은 결국 소학과 대학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ref> 빼먹은 소학(小學) 단계를 보충한다. 소학(小學)은 일단은 몸과 마음을 꾸준히 붙들어매는[拘檢]<ref>'住'는 동사 뒤에 붙어서 행위의 지속을 나타내는 조사이다.</ref> 것이다. 훗날(에 하게 될)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克己復禮]' (공부의) 경우는 또다른 단계의 일이다.<ref>극기복례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붙들어매는 공부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정도상 더 높은 수준의 공부일 뿐이다. 17:1을 보라.</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7:4 問: “大學首云明德, 而不曾說主敬, 莫是已具於小學?” '''질문: 《대학》 첫머리에서 명덕(明德)을 말하면서 주경(主敬)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주경이) 이미 소학(小學) 단계에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 아닙니까?<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固然. 自小學不傳, 伊川卻是帶補一‘敬’字.” 可學(62때). '''대답: 진실로 그렇다. 소학(小學)이 전해지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천(伊川)<ref>정이(程頤)</ref>이 '경(敬)' 자 하나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5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致知至治國·平天下, 皆不外此. 人傑(51이후). ''' ‘경(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공부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6 問或問說敬處. '''《혹문》에서 경(敬)을 설명한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四句不須分析, 只做一句看.” '''대답: 저 네 구절<ref>대학혹문에서 주희는 경을 다음의 네 가지 문구를 가지고 설명한다. 정씨형제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사량좌의 '상성성법(常惺惺法)', 윤돈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한다는 측면, 상성성법은 집중한 의식의 각성되고 고양된 느낌,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그렇게 집중된 의식의 단단히 안정된 느낌을 형용한다.</ref>은 나누어 분석할 필요 없이 그저 한 구절로 보라. 次日, 又曰: “夜來說敬, 不須只管解說, 但整齊嚴肅便是敬, 散亂不收斂便是不敬. 四句只行著, 皆是敬.” 燾(70때). '''다음 날 다시 말함: 어젯밤에 경(敬)에 대해 설명했는데, 계속 해설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경(敬)이고, 산란하여 수렴하지 못하면 불경(不敬)이다. 저 네 구절은 단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7 或問: “大學論敬所引諸說有內外之分.” '''누군가의 질문: 《대학》<ref>사실은 대학'혹문'이라고 해야 옳다.</ref>에서 경(敬)을 논하며 인용한 여러 설(說)에는 내외(內外)의 구분이 있습니다.<ref>굳이 구분하자면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외면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고 나머지 셋은 내면이다.</ref> 曰: “不必分內外, 都只一般, 只恁行著都是敬.” 僩(69이후). '''대답: 꼭 내외(內外)로 나눌 필요는 없다. 모두 매한가지다. 그저 그렇게 실천해가기만 하면 모두 경(敬)이다.<ref>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같은 취지의 문답이 실려 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8 問: “敬, 諸先生之說各不同. 然總而行<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言'으로 썼다.</ref>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질문: 경(敬)에 대한 여러 선생의 설(說)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실천하여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면[常存]<ref>'존(存)'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17:1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되는 것입니까?”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斂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履孫(65때). '''대답: 기실 매한가지이다. (마음이) 경건(敬)할 때 같으면 자연히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고[主一無適]', 자연히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며[整齊嚴肅]’, 자연히 '항상 반짝반짝 깨어있고[常惺惺]',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不容一物]'. 다만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이 사씨(謝氏)나 윤씨(尹氏)의 설(說)<ref>'상성성'이 사씨, '기심수렴 불용일물'이 윤씨의 설이다.</ref>보다 더 분명하다.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9 或問: “先生說敬處, 擧伊川主一與整齊嚴肅之說與謝氏常惺惺之說. 就其中看, 謝氏尤切當.” '''누군가의 질문: 선생님께서 경(敬)을 설명하신 부분에서 이천(伊川)의 주일(主一)과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 그리고 사씨(謝氏)의 상성성(常惺惺) 설(說)을 거론하셨습니다.<ref>이 설들에 대해서는 17:6을 참조하라.</ref> 그중에서 보면 사씨(謝氏)의 설명이 더욱 절실하고 적절[切當]<ref>'절(切)'은 어떤 설명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친숙하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말이다.</ref>합니다. 曰: “如某所見, 伊川說得切當. 且如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若無整齊嚴肅, 卻要惺惺, 恐無捉摸, 不能常惺惺矣.” 人傑(51이후). '''대답: 내가 보기엔 (사씨보다) 이천(伊川)이 적절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몸가짐을 정제엄숙(整齊嚴肅)하게 하면 이 마음이 보존[存]<ref>'존(存)'에 관해서는 17:1을 참조하라.</ref>되어 반짝반짝 깨어있을[惺惺] 수 있게 된다. 만약 정제엄숙(整齊嚴肅)한 자세 없이 반짝반짝 깨어있으려[惺惺] 한다면 아마 구체적으로 붙잡을 데가 없어[無捉摸]<ref>'정제엄숙'은 몸을 이렇게 하고 옷매무새를 저렇게 하라는 행동지침이므로 당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므로 '붙잡을 데'가 있다. '상성성'은 의식의 각성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므로 이 설명 속에는 어떤 행동지침이 없다.</ref> 늘 반짝반짝 깨어있을[常惺惺]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7:10 問: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자리에 '然則所謂敬者又若何而用力邪下' 14자가 더 들어있다.</ref>擧伊川及謝氏尹氏之說, 只是一意說敬.” '''질문: 《혹문》에서 이천(伊川) 및 사씨(謝氏), 윤씨(尹氏)의 설(說)을 거론한 것은 그저 한 뜻으로 경(敬)을 설명한 것입니까? 曰: ‘主一無適’, 又說箇‘整齊嚴肅’; ‘整齊嚴肅’, 亦只是‘主一無適’意. 且自看整齊嚴肅時如何這裏便敬. 常惺惺也便是敬. 收斂此心, 不容一物, 也便是敬. 此事最易見. 試自體察看, 便見. 只是要敎心下常如此.” '''대답: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하고 다시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 했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역시 그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이다. 어디 한번 정제엄숙(整齊嚴肅)할 때 어떻게 내면이 바로 경건(敬)해지는지 스스로 살펴 보라. '상성성(常惺惺)'해도 곧 경건(敬)하다. '수렴차심 불용일물[收斂此心, 不容一物]'<ref>본래는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이다. 경에 대한 이 네 가지 설명법은 17:6에 자세하니 참조하라.</ref>해도 곧 경건(敬)하다. 이 일은 매우 알기 쉽다. 시험 삼아 스스로 체험[體察]해 보면<ref>'체찰(體察)'은 몸소 체험/관찰하는 것이다.</ref> 바로 알 수 있다. 단지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이 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因說到放心: “如惻隱·羞惡·是非·辭遜是正心, 才差去, 便是放. 若整齊嚴肅, 便有惻隱·羞惡·是非·辭遜. 某看來, 四海九州, 無遠無近, 人人心都是放心, 也無一箇不放. 如小兒子才有智識, 此心便放了, 這裏便要講學存養.” 賀孫(62이후). '''이어서 말이 방심(放心)에 미쳤다: 측은(惻隱)·수오(羞惡)·시비(是非)·사손(辭遜)<ref>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다.</ref> 같으면 바른 마음[正心]이요,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곧 놓친(放) 것이다. 정제엄숙(整齊嚴肅)한다면 곧 (놓친 마음을 다시 붙들어 와서) 측은·수오·시비·사손의 마음이 있게 된다. 내 생각에 사해(四海)와 구주(九州)<ref>온세상을 말한다.</ref> 어디든 멀거나 가깝거나 사람들 각각의 마음은 모두 놓쳐버린 마음(放心)이니, 놓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린아이 같은 경우도 지식[智識]이 생기자마자 이 마음을 바로 놓쳐버리게 되니, 이 지점에서 곧 강학(講學)과 존양(存養)<ref>강학과 존양은 각각 궁리와 거경 공부를 말한다. 17:1과 17:3의 주석을 참조하라.</ref>을 필요로 한다. o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1 光祖問: “‘主一無適’與‘整齊嚴肅’不同否?” '''광조(光祖)<ref>주희의 제자 가운데 광조가 셋이나 있다. 일역판은 여기서는 그 중 증흥종(曽興宗, 1146-1212)을 말한다고 주장한다.</ref>의 질문: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은 다르지 않습니까?<ref>둘 다 경건(敬)한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이다. 주일무적은 의식의 집중이라는 측면,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유지한다는 측면을 말한다. 앞의 몇 조목에서 자세하니 참조하라.</ref> 曰: “如何有兩樣! 只是箇敬. 極而至於堯舜, 也只常常是箇敬. 若語言不同, 自是那時就那事說, 自應如此. 且如大學論語孟子中庸都說敬; 詩也, 書也, 禮也, 亦都說敬. 各就那事上說得改頭換面. 要之, 只是箇敬.” '''대답: 어찌 두 종류가 있겠나? 경(敬)은 하나 뿐이다. (거경 공부를) 지극히 하여 요순(堯舜)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역시 언제나 이 하나의 경(敬)일 뿐이다. 표현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러저러한 때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응당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 예컨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모두 경(敬)을 말하고, 《시경》, 《서경》, 《예기》 또한 모두 경(敬)을 말하고 있다. 각각 이러저러한 일을 가지고 얼굴을 바꿔가며(改頭換面)<ref>껍데기, 표현방식만 바꾸었지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ref>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경(敬)은 하나일 뿐이다. 又曰: “或人問: ‘出門·使民時是敬, 未出門·使民時是如何?’ 伊川答: ‘此“儼若思”時也.’ 要知這兩句只是箇‘毋不敬’. 又須要問未出門·使民時是如何. 這又何用問, 這自可見. 如未出門·使民時是這箇敬; 當出門·使民時也只是這箇敬. 到得出門·使民了, 也只是如此. 論語如此樣儘有, 最不可如此看.”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문을 나설 때와 백성을 부릴 때 경건(敬)하다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ref>논어 12:2. </ref>라고 하니, 이천(伊川)이 답하기를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할[儼若思]’<ref>예기 곡례 상.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하라(毋不敬,儼若思)'</ref> 때이다’라고 했다.<ref>이정유서 18:10. '질문: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뵙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 하라고 하는데, 아직 문을 나서지 않았고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 대답: 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엄숙해야 할 때이다. 문을 나섰을 때의 경건함이 이와 같다면 문을 나서기 전에는 어떨지 알 만하다. 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問: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方其未出門未使民時, 如何? 曰: 此儼若思之時也. 當出門時其敬如此, 未出門時可知也. 且見乎外者出乎中者也.)</ref> 이 두 구절<ref>주일무적과 정제엄숙을 말한다.</ref> 모두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毋不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이걸 또 물을 필요가 있나? 이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을 나서기 전과 백성을 부리기 전에도 이 경(敬) 하나일 뿐이고,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릴 때에도 역시 이 경(敬) 하나일 뿐이다. 문을 나서고 백성을 부린 뒤에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논어》에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으니, 결코 (이천에게 질문한 어떤 사람 처럼) 저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2 或問“整齊嚴肅”與“嚴威儼恪”之別. '''누군가가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엄위엄각(嚴威儼恪)’<ref>엄숙하고 위엄있는 안색과 거동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편에 등장하는 문구이다.</ref>의 차이에 대해 질문함. 曰: “只一般. 整齊嚴肅雖非敬, 然所以爲敬也. 嚴威儼恪, 亦是如此.” 燾(70때). '''대답: 똑같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이 경(敬)은 아니지만 경(敬)을 행하는 수단이다. 엄위엄각(嚴威儼恪) 역시 그렇다.<ref>이정유서 15:182와 같은 취지이다. '엄위엄각은 경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경에 이르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嚴威儼恪, 非敬之道. 但致敬, 須自此入.)'</ref> 도(燾)의 기록. (70세 때) *  17:13 問: “上蔡說: ‘敬者, 常惺惺法也.’ 此說極精切.” '''질문: 상채(上蔡)<ref>사량좌</ref>가 말하기를 ‘경(敬)이란 늘 반짝반짝 깨어있기[常惺惺] 위한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이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합니다[極精切].<ref>17:9를 참조하라.</ref> 曰: “不如程子整齊嚴肅之說爲好. 蓋人能如此, 其心卽在此, 便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 而內不惺惺者. 如人一時間外面整齊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寬了, 便昏怠也.” '''대답: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 설(說)만큼 좋지는 않다. 대개 사람이 이처럼<ref>정제엄숙을 말한다.</ref> 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곧 여기에 있어서[在此]<ref>의식(consciousness)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반짝반짝 깨어있게[惺惺] 되기 때문이다. 외면이 정갈하고 단정하며 엄숙(整齊嚴肅)하면서 내면이 반짝반짝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잠시라도[一時間] 외면이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곧 그 시간만큼 깨어있게 되고, 잠시라도 (몸가짐이) 풀어지면[放寬] 곧 흐릿하고 나태해지게[昏怠] 된다. 祖道曰: “此箇是氣. 須是氣淸明時, 便整齊嚴肅. 昏時便放過了, 如何捉得定?” '''내(祖道)가 말함: 이것은 기(氣)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기(氣)가 맑고 밝을 때[淸明]는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흐릿할 때는 곧 방만하게[放過] 되니, 어떻게 해야 제대로 붙잡을 수 있습니까?<ref>'정(定)'은 현대 중국어 '주(住)'와 같다. 동사의 뒤에 붙어 'x得住'라고 하면 그 동작을 확실히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주고 'x不住'는 그 동작을 제대로 해낼 역량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ref>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志者, 氣之帥也.’ 此只當責志. 孟子曰: ‘持其志, 毋暴其氣.’ 若能持其志, 氣自淸明.” '''대답: ‘심지(志)는 기(氣)를 통솔하는 장수이다[志者, 氣之帥也].’<ref>맹자 2A:2. 이른바 부동심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志)는 오늘날 말로 의지나 심지, 기(氣)는 의욕이나 기운, 에너지 정도에 해당한다. 심지가 장수라면 기는 병사들이다. 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에너지는 병사들에게서 나오지만(의욕과 기운), 병사들 각각이 어디로 움직여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방향성은 장수에게서 나온다(의지와 심지). 예컨대 시험기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심지의 명령이지만 실제로 공부하지 않고 침대에 붙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욕과 기운의 항명과 태업 때문이다.</ref> 이는 응당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심지(志)를 붙잡되 자기 기(氣)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持其志, 毋暴其氣]’고 하셨다.<ref>맹자 같은 곳.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병사들이 움직여야 한다. 장수의 뜻이 굳건하고 일관되면 병사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지를 굳건히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항명과 태업에도 이유가 있으니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일하고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경우 그런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Kwong-loi Shun, 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1997). P.68, 112-119를 참조하라.</ref> 만약 자기 심지(志)를 붙잡을 수 있다면 기(氣)는 저절로 맑고 밝아진다[淸明]. 或曰: “程子曰: ‘學者爲習所奪, 氣所勝, 只可責志.’ 又曰: ‘只這箇也是私, 學者不恁地不得.’ 此說如何?” '''누군가 말함: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자는 습관에게 빼앗기고 기(氣)에게 패배하니,<ref>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라.</ref> 단지 심지(志)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ref>이정유서 15:96. '배우는 자는 기에게 패배하고 습관에게 빼앗기니, 단지 심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을 뿐이다.(學者, 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문구의 배치가 다르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고, 또 (심지를 붙잡으려는 것에 관해서)‘이 또한 사사로운 마음(私)일 뿐이지만,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ref>이정외서 8:6. '심지를 붙잡는 것을 논하다 선생이 말함: (심지를 붙잡으려는 마음) 또한 사사로운 마음일 뿐이다. 그래도 배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因論持其志先生曰: 只這箇也是私. 然學者不恁地不得.)'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의는 같다.</ref>고 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어떻습니까? 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先生曰'이다.</ref>: “涉於人爲, 便是私. 但學者不如此, 如何著力! 此程子所以下面便放一句云‘不如此不得’也.” 祖道(68때). '''대답: 인위(人爲)에 관련되면 곧 사사롭다(私).<ref>기운과 의욕의 자연스러운 추세에 맡겨두지 않고 심지를 다져서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의욕을 몰고 가려는 것은 어느정도 작위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f> 다만 배우는 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쓰겠는가[著力]?<ref>'착력(著力)' 두 글자에 이미 작위성이 담겨있다.</ref> 이것이 정자(程子)께서 (사사롭다고 한 다음 그) 아래에다 바로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문을 덧붙이신 까닭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14 因看涪陵記善錄, 問: “和靖說敬, 就整齊嚴肅上做; 上蔡卻云‘是惺惺法’, 二者如何?” '''부릉기선록(涪陵記善錄)<ref>정이의 제자 윤돈(尹焞)의 어록이다. 기록자는 윤돈의 제자인 풍충서(馮忠恕). 윤돈과 풍충서가 교유한 곳이 사천 부릉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청 중엽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실되었다. 이정외서 권 12에서 이 책으로부터 여덟 조목을 인용하고 있다.</ref>을 보다가 (선생이) 질문함: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은 경(敬)을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측면에서 설명하고,<ref>본래 윤돈의 설명은 '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윤돈의 지침은 그 초점이 엄숙함에 있으므로 정이의 '정제엄숙'과 조응한다.</ref>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는 오히려 ‘반짝반짝 깨어있게 해주는 방법[惺惺法]이다’라고 하니, 이 두 설명이 어떠한가?<ref>비슷한 취지의 문답이 회암집 권 56의 답정자상(答鄭子上) 제 14서에 실려있다. 정자상은 이 조목의 기록자인 정가학이다. '(질문) 和靖論敬以整齊嚴肅, 然專主於內; 上蔡專於事上作工夫, 故云敬是常惺惺法之類. (답변) 謝尹二說難分內外, 皆是自己心地功夫. 事上豈可不整齊嚴肅, 靜處豈可不常惺惺乎?'</ref> 厚之云: “先由和靖之說, 方到上蔡地位.” '''후지(厚之)가 대답함: 먼저 화정(和靖)의 설(說)을 따른 뒤에야 상채(上蔡)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曰: “各有法門: 和靖是持守, 上蔡卻不要如此, 常要喚得醒. 要之, 和靖底是, 上蔡底橫. '''(선생이) 말함: 각각 (나름의) 법문(法門)<ref>불교 용어. 진리에 이르는 방법, 경로 등을 이른다.</ref>이 있다. 화정(和靖)은 붙잡아 지키는 것[持守]이다. 상채(上蔡)는 이와 같이 하려 하지 않고 늘 깨어있고자[喚得醒] 한다. 화정(和靖)의 설은 옳고, 상채(上蔡)의 설은 비뚤다. <ref>횡설(橫說)은 횡설수설의 횡설이다. 조리가 없거나, 너무 고원하거나, 견강부회한 억지 주장을 이른다. 주희가 사량좌의 주장을 횡설이라고까지 했을까 의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잠재적 의문에 답하는 차원에서 고문해의는 114:40에서 주희가 여조겸의 주장 하나를 '횡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상채의 설을 '횡'이라고 했으면 화정의 설은 '종(縱)'이나 '직(直)'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시(是)'와 '직(直)'은 자형이 가까우므로 전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교감할 경우 화정의 설과 상채의 설 사이에 우열과 정부정은 없고 범주의 차이만 남게 된다.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단 이렇게 남겨둔다.</ref> 渠<ref>조선고사본과 성화본은 '渠'를 '某'라고 적었다. 주자어류고문해의에서는 이것을 '횡거'라고 볼 경우 이어지는 '역왈경이직내'가 불완전인용이 된다고 지적하고,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일역판의 역자들 역시 이하의 '역왈경이직내'가 장재의 저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渠'를 '某'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다만, 고문해의는 이 앞 부분을 '화정의 설은 옳고 상채의 설은 비뚤다(和靖底是, 上蔡底橫.).'라고 구두를 끊어서 읽어야 한다고 보았고 일역판은 '횡모(橫某)가 말했다'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류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기록자가 정가학(鄭可學)인 조목은 자주 비경(蜚卿)과 후지(厚之)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해 다자간 문답을 주고받으므로 각 발언이 누구의 질문이고 누구의 답변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정가학 조목들은 자주 자신의 발언을 '某曰'이나 '某云' 등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은데, 예컨대 4:38이나 7:24, 8:27, 19:93, 28:34, 106:32 등을 살펴보라.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일역판 보다는 고문해의의 제안이 더 합리적이다. 여기서는 고문해의를 따른다.</ref>曰<ref>조선고사본에서는 '云'이라고 적었다.</ref>: ‘易曰: “敬以直內.” ’伊川云: ‘主一.’ 卻與和靖同. 大抵敬有二: 有未發, 有已發. 所謂‘毋不敬’, ‘事思敬’, 是也.” '''내(某)가 말함: 《주역》에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한다[敬以直內]'고 하였고,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마음을 하나로 한다[主一]’고 하였으니, 오히려 화정(和靖)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경(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생각과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시점[未發]의 경과 이미 발한 뒤[已發]의 경입니다. 이른바 ‘경건하지 않음이 없게하라[毋不敬]’<ref>예기 곡례 상.</ref>와 ‘일을 할 적에는 경건할 것을 생각하라[事思敬]’<ref>논어 16:10.</ref>가 그것입니다.<ref>미발의 경과 이발의 경의 구분에 관해서는 17:11을 참조하라.</ref> 曰: “雖是有二, 然但一本, 只是見於動靜有異, 學者須要常流通無間." '''(선생이) 말함<ref>고문해의와 일역본 모두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비록 두 가지가 있다 해도 뿌리는 하나이니, 그저 동(動)과 정(靜)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항상 (동/정 사이의) 흐름이 중단없이 자연스럽게 통하게 해야 한다. <ref>17:11의 논의를 참조하라. 정시의 경은 문을 나서기 전의 경건함이고 동시의 경은 문을 나서서 사태와 사물에 대처할 때의 경건함이다. 앞선 질문에서의 인용구로 말하자면 주역의 '경이직내'와 이천의 '주일무적', 윤돈(화정)의 '기심수렴 불용일물'은 정시의 경건함이다. 논어의 '사사경'은 동시의 경건함이다.</ref> 又: "如和靖之說固好, 但不知集義, 又卻欠工夫." '''또 (내가 말함)<ref>이 대목을 이렇게 독립시켜 질문자의 질문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직전의 '曰: 雖是有二...'와 직후의 '曰: 亦是...'의 관계가 불분명해진다. 고문해의의 경우 일단은 앞쪽 曰을 주희의 대답으로, 뒤쪽 '曰'을 질문자의 추가 질문이라고 보았으나, 실은 상세히 읽어 보면 질문하는 말투가 아니어서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앞의 왈과 뒤의 왈을 모두 주희의 말로 해석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이렇게 질문자의 말로 떼어냈다. 여기서는 일역판을 따랐다.</ref>: 화정(和靖)의 설(說) 같은 경우 물론 좋긴 하지만 (그는) '의(義)에 부합하는 행위를 오래 축적해야 함[集義]'<ref>맹자 2A:2.</ref>을 알지 못했고, 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힘씀[工夫]이 부족했습니다.<ref>질문자는 화정의 경을 미발의 경건함, 정시의 경건함 쪽에 배속하고 있다. 이 경우 수행자 자신이야 홀로 방에 앉아 마음을 경건하게 길러낼 수 있을지라도 현실 사회 속에서 실질적인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매 순간 올바르고 경건한 선택을 내림으로써 스스로를 키워내는 과정은 겪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송대 문헌에서 거경(居敬)과 집의(集義) 공부를 이처럼 동/정, 내/외, 체/용의 두 방면으로 구분한 경우가 많다. 이정유서 18:101 '질문: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응당 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경은 (내면을) 함양하는 것 뿐이다.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분은 모름지기 '집의'를 써야 한다.(問: 必有事焉, 當用敬否? 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질문: 경과 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경은 자신을 붙잡는 도리이고 의는 시비를 알고 이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의가 된다.(問: 敬義何別? 曰: 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또 남헌집(南軒集) 권 32 답유성지(答㳺誠之)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경과 집의 공부는 병행하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다. 만약 경건하게 할 줄만 알고 의로운 행위를 축적할 줄은 모른다면 이른바 경이라는 것 또한 멀뚱히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니 어떻게 마음의 본체가 사방으로 두루 흘러 영향을 미칠 수 있겠나? 집(集)은 축적한다(積)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에 의로움(義)없는 것이 없으되 (그 의로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드러나니, 구체적인 사태 하나하나에서 (의로운 판단과 행위를) 모아서 축적해야 한다.(居敬集義, 工夫並進, 相須而相成也. 若只要能敬, 不知集義, 則所謂敬者, 亦塊然無所爲而已, 烏得心體周流哉? 集訓積, 事事物物, 莫不有義, 而著乎人心, 正要一事一件上集.)'</ref> 曰: “亦是渠才氣去不得, 只得如此. 大抵有體無用, 便不渾全.” '''(선생의) 대답<ref>고문해의에서는 일단 주희의 말로 보았으나 확신하지 못했다. 일역판도 주희의 말로 보았다.</ref>: 그는<ref>윤돈을 말한다.</ref> 역시 그 재기(才氣)<ref>재치있고 민활함을 말한다.</ref>가 부족했기에[去不得]<ref>'去得'은 현대 중국어 '可以'와 같다. '去不得'은 이에 대한 부정표현이다. 주희가 보기에 윤돈은 순발력이나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묵묵히 정진하는 캐릭터였다. 예컨대 101:102-122를 보라.</ref> 단지 그와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개 본체(體)만 있고 작용(用)이 없으면 온전할[渾全] 수 없다.<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ref> 又問: “南軒說敬, 常云: ‘義已森然於其中.’” '''다시 질문함<ref>기록자인 가학의 질문인 듯하다.</ref>: 남헌(南軒)<ref>장식(張栻)이다.</ref>은 경(敬)을 설명할 적에는 늘 ‘(경건하기만 하면) 의(義)는 이미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義已森然於其中]’고 말합니다.<ref>남헌집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위 주석에서 인용했듯 장식은 개인적 차원에서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과 사회적 차원에서 시비판단을 내리고 의로운 행적을 누적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말한 바 있다.</ref> 曰: “渠好如此說, 如仁智動靜之類皆然.” 可學(62때). '''대답: 그는 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仁)·지(智)·동(動)·정(靜) 등에 (대해서 말할 적에) 모두 그러하다.<ref>장식의 계사논어해(癸巳論語解) 권3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과 정이라는 것은 인(仁)과 지(知)의 본질[體]이니, 물을 좋아하고(樂水) 산을 좋아(樂山)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동(動)하면 즐겁고 정(靜)하면 장수한다. 일삼는 바 없이 실천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항상 영원히 올바르며 굳건하니 어찌 장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知)의 본질은 동적이지만 이치는 각기 멈추는 곳이 있으니 정(靜)이 결국 그 속에 있다. 인(仁)의 본질은 정적이지만 두루 흘러 쉬지 않으니 동(動)이 결국 그 속에 있다. 동과 정이 교차하여 드러나며 본체와 작용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 인과 지의 (진정한) 뜻을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라면 (동정과 체용의 관계를) 알아보지 못한다.(動靜者, 仁知之體, 樂水樂山, 言其體則然也. 動則樂, 靜則夀. 行所無事, 不其樂乎? 常永貞固, 不其夀乎? 雖然, 知之體動, 而理各有止, 靜固在其中矣. 仁之體靜, 而周流不息, 動亦在其中矣. 動靜交見, 體用一源, 仁知之義, 非深體者, 不能識也.)'</ref>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15 問謝氏惺惺之說. '''사씨(謝氏)의 '성성(惺惺)' 설(說)에 대하여 질문함. 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今人說敬, 卻只以‘整齊嚴肅’言之, 此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대답: '성성(惺惺)'이란 마음이 흐릿하지 않다는[不昏昧] 말이니, 그저 이것이 바로 경(敬)이다. 요즘 사람들은 경(敬)에 대해 말할 적에 그저 ‘정제엄숙(整齊嚴肅)’만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도 물론 경(敬)이긴 하다만, 마음이 만약 흐릿하여 이치를 밝게 비춰주지 못한다면, 비록 억세게 붙잡는다[强把捉]<ref>주희는 의식(consciousness)을 바짝 긴장시켜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로 유지하는 행위를 대개 물건을 손으로 세게 쥐고 있는 느낌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파착(把捉), 지(持), 지수(持守) 등은 글자는 달라도 동일한 현상을 지시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ref> 한들 어찌 경(敬)이 될 수 있겠는가? 又問孟子告子不動心. '''또, 맹자(孟子)와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에 대하여 질문함. 曰: “孟子是明理合義, 告子只是硬把捉.” 砥(61때). '''대답: 맹자(孟子) (의 부동심은) 이치를 밝히고 의로움(義)에 부합하여 (획득하는 것)이고, 고자(告子)는 단지 (마음을) 억지로 단단히 붙잡아[硬把捉]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ref>부동심을 논한 맹자 2A:2는 난해한 조목이다. 주자어류 권 52의 200여 조목이 모두 이에 관한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주희가 생각하기에 고자는 세상의 여러 일과 서책 등으로부터 이치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도가적인 인물이다. 세상 일을 관찰하고 서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희가 생각하는 맹자의 부동심은 적극적으로 이치를 따져서 파악하고(즉, 지언知言)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즉, 집의集義)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이때문에 맹자의 부동심을 명리합의(明理合義)라고 평가하고 고자의 부동심을 경파착(硬把捉)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이때 명리는 이지적 노력, 집의는 실천적 노력이다. 자세한 분석은 장원태, "맹자 3.2에 대한 고찰", 2013과 김명석, "不動心 획득을 위한 孟子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한 고찰", 2021을 참조하라.</ref> 지(砥)의 기록. (61세 때) *  17:16 或問: “謝氏常惺惺之說, 佛氏亦有此語.” '''누군가의 질문: 사씨(謝氏)<ref>사량좌이다.</ref>의 상성성(常惺惺) 설(說)<ref>앞서 십여 조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의 경우, 불씨(佛氏) 역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曰: “其喚醒此心則同, 而其爲道則異. 吾儒喚醒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 佛氏則空喚醒在此, 無所作爲, 其異處在此.” 僩(69이후). '''대답: 이 마음을 일깨우는[喚醒此心] 점에서는 같지만 그 도(道)의 성격은 다르다. 우리 유학(儒學)에서는 이 마음을 일깨워 그것이 많은 도리를 관조하게[照管] 하려는 것인데, 불씨(佛氏)는 헛되이 일깨워[在此]<ref>'재차'는 의식의 집중되고 각성된 상태를 말한다.</ref> (실제로) 하는 바가(作爲) 아무것도 없으니, 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17 問: “和靖說: ‘其心收斂, 不容一物.’” '''질문: 화정(和靖)<ref>윤돈이다.</ref>이‘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했습니다.<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斂. 他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直是更不著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賀孫(62이후). '''대답: 이 마음이 그 어떤 대상에도 전혀 붙어있지 않으면[不著一物] 그게 바로 수렴(收斂)이다. 그는 윗 구절에서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사당[神祠]에 들어갈 때, 그때에는 그 어떤 사안도 전혀 마음에 더 붙일 수 없고 단지 공경(恭敬)함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ref>사고전서본 화정집(和靖集) 권 7, '예컨대 누군가 사당에 들어가 경의를 표할 적에 그 마음이 수렴되어 그 어떤 다른 사안도 전혀 붙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로 집중됨[主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且如人到神祠中致敬時, 其心收斂, 更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ref> 이 말이 매우 친근하고 절실하다. 지금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을 전일하게 할 수 있다면 곧 바짝 수렴하여 그 어떤 빈틈[空罅]도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思量]을 마치지 못했는데 또 다른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 버리면 마음은 곧 두 갈래 길이 되어버린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18 問尹氏“其心收斂不容一物”之說. '''윤씨(尹氏)<ref>윤돈.</ref>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ref>자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7:8, 14 등을 참조하라.</ref> 설(說)에 대한 질문. 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所亂, 便是不容一物也.” '''대답: 마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주인으로 세워[主]<ref>'주(主)'자의 번역이 까다로운데, 전통적으로 '주장하다', '위주로 하다'와 같이 옮긴다. 여기서는 자신의 내면에 품은 여러 생각들의 위계서열에 있어서 최상의 자리, 즉 '주인'의 자리에 어떤 생각이나 마음가짐을 올려두었다는 의미에서 이상과 같이 번역했다. </ref> 다른 일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곧 한 물건도 (내 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問: “此只是說靜時氣象否?” '''질문: 이는 고요할 때[靜時]의 기상(氣象)을 설명한 것 아닙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又問: “只靜時主敬, 便是‘必有事’否?” '''재질문: 고요할 때[靜時] 경(敬)을 주인으로 세우는[主] 것이 곧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어[必有事]'<ref>본래 출전은 맹자 2A:2. 정씨 형제에 의하면 마음의 고요한 측면에 대해서도 모종의 의식적[用意] 노력을 동반한 공부가 필요하니 그것이 바로 경(敬)이다.(이정유서 18:35) 맹자의 '반드시 일이 있다[必有事]'에서 '일삼다'는 의식적 노력에 대한 요청인데, 여기서 맹자가 요청한 것을 정씨 형제는 경공부라고 해석했다. 이정유서 15:186'필유사언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니, 경이다.(必有事焉, 謂必有所事, 是敬也)'. 주희는 이러한 해석이 맹자의 본래 문맥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배격하지는 않는다. 52:162, 회암집 권40 답하숙경 제 29서('主敬存養, 雖説必有事焉, 然未有思慮作爲, 亦靜而已.'), 권 61 답임덕구(答林德久) 제 6서(질문: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必有事焉而勿正]’에 대해서, 명도와 이천은 대부분 “경(敬)을 위주로 한다”하고, 일설에는 “마땅히 의(義)를 모아야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위 글의 ‘의(義)를 모아 생겨나는 것이다’를 이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한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선(善)을 축적하는 공부가 아니겠습니까?‘必有事焉而勿正’, 二程多主於敬, 一說須當集義, 是承上文‘是集義所生者’而言. 所謂必有事, 則積集衆善工夫否? 답변: 맹자의 앞뒤 구절에 ‘경(敬)’자는 없고, ‘의(義)’자만 있을 뿐입니다. 정자는 이를 바꾸어서 ‘경(敬)’자로 설명했는데, 맹자의 본의와는 다릅니다. 집주를 보면 또한 자세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孟子上下文無‘敬’字, 只有‘義’字, 程子是移將去‘敬’字上說, 非孟子本意也. 集註亦可細玩.)등을 보라. 이 '일삼음[事]'을 주희는 기본적으로 '의로운 행실을 축적[集義]'하는 행위로 본다. 예컨대 52:93, 97, 167 등을 보라.</ref> 아닙니까? 曰: “然.” 僩(69이후). '''대답: 그렇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단락 === 此篇所謂在明明德一段 ''' 이 책의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  17:19 問: “或問說‘仁義禮智之性’, 添‘健順’字,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을 설명하면서 ‘건(健)'과 '순(順)’ 자를 첨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ref>대학혹문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가 널리 작동하여 세상 만물을 틔워주고 길러주는데 그 창조하고 변화하는 내용물은 (따지고 보면) 음양과 오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음양과 오행이란 것도 (음양오행은 그 분류상 氣인데) 반드시 먼저 이치가 있고 난 다음에 기(氣)가 있는 것이요, 사물이 (실제로) 탄생한 측면에서는 또 기(氣)가 (먼저) 응취한 덕분에 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의 탄생은 필히 (먼저)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건, 순,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있게 되고, 필히 이 기를 얻은 연후에 혼, 백, 오장, 백해의 신체가 있게 된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의 진수와 2&5(음양과 오행이다)의 정수가 신비롭게 합쳐져 (사람이 탄생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대개 맹자이래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적에는 '인의예지' 혹은 '인의예지신' 정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건'과 '순' 두 형용사가 더 들어갔으니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ref> 曰: “此健順, 只是那陰陽之性.” 義剛(64이후). '''대답: 이 건순(健順)이란 그저 저 음양(陰陽)의 성질일 뿐이다.<ref>주역에서 순양괘인 건(乾)괘의 성질이 굳건함(健), 순음괘인 곤(坤)괘의 성질이 유순함(順)이다. 인의예지신의 경우는 대개 백호통(白虎通)에서 정리한 내용에 따라 오행(목화토금수)에 하나씩 배당한다. 예컨대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해당하며 그 방위는 동쪽이다. 어류 6:45를 참조하라. 대학혹문에서 인간의 탄생을 말하면서 단순히 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만 했다면 인의예지신만 언급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만 '음양'오행의 정수를 받았다고 했으니 음과 양의 성질에 해당하는 글자를 하나씩 더 첨부해서 앞뒤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ref>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7:20 問<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或問中' 세 글자가 더 있다.</ref>“健順仁義禮智之性”. ''' '건(健)·순(順)·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性)'에 대한 질문.<ref>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曰: “此承上文陰陽五行而言. 健, 陽也; 順, 陰也; 四者, 五行也. 分而言之: 仁禮屬陽, 義智屬陰.” '''대답: “이는 윗글의 음양(陰陽)·오행(五行)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건(健)은 양(陽), 순(順)은 음(陰)이며, 네 가지<ref>인의예지(仁義禮智)</ref>는 오행(五行)이다. 나누어 말하면,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仁何以屬陰?” '''질문: ‘하늘의 도(道)를 세우니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우니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道)를 세우니 인(仁)과 의(義)라 한다.’<ref>주역 설괘전. 설괘전의 설명대로라면 음-유-인, 양-강-의가 각각 같은 범주로 묶여야 한다. 이에 대한 주희의 반론은 어류 6:54를 참조하라.</ref>고 했는데, 인(仁)이 어찌하여 음(陰)에 속합니까? 曰: “仁何嘗屬陰! 袁機仲正來爭辨.<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일곱자가 없다. 서산독서기 갑집 권 8에서는 이 부분을 '袁機仲力爭'이라고 썼다.</ref> 他<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便'자가 더 있다.</ref>引<ref>'타인' 두 글자는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주석으로 처리했다.</ref>‘君子於仁也柔, 於義也剛’爲證. 殊不知論仁之定體, 則自屬陽. 至於論君子之學, 則又<ref>조선고사본에는 '又'자가 없다. </ref>各自就地頭說, 如何拘文牽引得! 今只觀天地之化, 草木發生, 自是條暢洞達, 無所窒礙, 此便是陽剛之氣. 如云: ‘采薇采薇, 薇亦陽<ref>하서린의 전경당본은 이 글자를'作'이라고 썼다.</ref>止.’ ‘薇亦剛止.’ 蓋薇之生也, 挺直而上, 此處皆可見.” '''대답: 인(仁)이 어찌 일찍이 음(陰)에 속했겠는가? 때마침 원기중(袁機仲)<ref>원추(袁樞, 1131-1205)의 자가 기중이다. 어류 6:55를 보면 그는 의를 양에, 인을 음에 배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회암집 권 38의 답원기중별폭(答袁機仲別幅)에도 원기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주희의 반론이 실려있으니 참조하라.</ref>이 (그런 내용으로) 논쟁을 걸어왔다.<ref>여기서 '래(來)'는 찾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쪽을 '향해서' 어떤 동작을 수행했다는 뜻에 가깝다.</ref> 그는 ‘군자는 인(仁)에 대해서는 유(柔)하고, 의(義)에 대해서는 강(剛)하다’<ref>양웅의 법언(法言) 군자(君子)편. 주자어류 6:136을 보면 주희도 양웅의 이 발언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거나, 본체가 강한 덕목이 작용은 유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웅과 자신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려고 할 뿐이다.</ref>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는 인(仁)의 확정적 본질[定體]을 논하자면 당연히 양(陽)에 속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군자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또 각자의 경우[地頭]에 맞게 설명한 것이니,<ref>고문해의에서는 인의 확정적 본질을 논하는 경우에는 양에 속하고 인의 배움을 논하는 경우에는 음에 속한다고 정리했다.</ref> 어찌 (양웅의 법언에서 사용한) 문자(의 표현)에 얽매이는가?<ref>구문색인(拘文牽引)은 표현에 구애되어 얽매인 것이다.</ref> 이제 가만 보면 천지가 변화[天地之化]하여 초목이 탄생하고 발육할 적에 자연히 쭉쭉 뻗어나가 막히거나 걸리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양강(陽剛)한 기(氣)이다. 예를 들어 ‘고사리 캐고 고사리 캐니, 고사리 또한 양(陽)하네[采薇采薇, 薇亦陽止].’ ‘고사리 또한 강(剛)하네[薇亦剛止].’라 하였다.<ref>시경 소아 녹명지십 채미(采薇)편. 시경 쪽 원문은 '채미채미, 미역작지(采薇采薇 薇亦作止)', '채미채미, 미역유지(采薇采薇, 薇亦柔止)', '채미채미, 미역강지(采薇采薇, 薇亦剛止)'인데, 이는 고사리가 막 땅에서 자라나와 부드러운 단계를 거쳐 다 자라서 뻣뻣한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경과를 노래한 것이다. 주희는 우선 '作'을 '陽'으로 잘못 썼고, 또 중간에 위치한 '柔'를 생략하고 마지막 '剛'만을 인용함으로써 시경 채미편을 자신이 앞서 주장한 것처럼 초목이 양강(陽剛)하다는 말의 경전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ref> 대개 고사리는 나면서부터 똑바로 위로 자라니, 이러한 (고사리의 특성)에서 (초목의 양강(陽剛)한 성질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問: “禮屬陽. 至樂記, 則又以禮屬陰, 樂屬陽.” '''질문: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禮)는 양(陽)에 속합니다. (하지만) 〈악기(樂記)〉에서는 또 예(禮)를 음(陰)에 배속하고 악(樂)을 양(陽)에 배속합니다.<ref>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기 악기편에서는 악을 하늘에, 예를 땅에 배속했다. '악은 하늘에서 말미암아 제작하고 예는 땅을 따라 제작한다(樂由天作, 禮以地制)'</ref> 曰: “固是. 若對樂說, 則自是如此. 蓋禮是箇限定裁節, 粲然有文底物事; 樂是和動底物事, 自當如此分. 如云‘禮主其減, 樂主其盈’之類, 推之可見.” 僩(69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악(樂)과 한 쌍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다. 대개 예(禮)는 한정짓고 선을 그으며[限定裁節] 찬란하게 문채가 있는[粲然有文] 것이고, 악(樂)은 조화롭고 감동시키는[和動]<ref>예기 악기편에 나오는 표현이다.</ref>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예가 양, 악이 음으로) 나뉜다. ‘예(禮)는 줄이는[減] 것을 위주로 하고, 악(樂)은 채우는[盈] 것을 위주로 한다[禮主其減, 樂主其盈]’라고 하는 것 등은 (앞선 내용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ref>예기 악기편. '악이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예란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줄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악은 채우는 것을 위주로 한다.(樂也者,動於內者也;禮也者,動於外者也。故禮主其減,樂主其盈.)' 줄이는 것은 '음'적인 운동, 채우는 것이 '양'적인 운동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떠올려 보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1 問: “健順在四端何屬?” '''질문: 건순(健順)은 사단(四端) 중 어디에 속합니까? 曰: “仁與禮屬陽, 義與智屬陰.” '''대답: 인(仁)과 예(禮)는 양(陽)에 속하고, 의(義)와 지(智)는 음(陰)에 속한다. 問: “小學: ‘詩·書·禮·樂以造士.’ 注云: ‘禮, 陰也.’” '''질문:《소학(小學)》에 ‘시(詩)·서(書)·예(禮)·악(樂)으로써 선비를 만든다’<ref>소학에서 예기 왕제편을 인용한 부분이다.</ref>고 하였는데, 주(注)에 ‘예(禮)는 음(陰)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f>주석은 예기 왕제편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ref> 曰: “此以文明言, 彼以節制言.” '''대답: 이쪽은 문채나고 빛나는(文明) 측면에서 (예를) 설명한 것이고<ref>양에 속한다는 설명이다.</ref> 저쪽은 구별짓고 제약하는(節制)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ref>소학의 주석에 대한 설명이다.</ref> 問: “禮<ref>성화본은 '義'로 썼다. 이 조목의 첫 질문의 내용을 보나 이어지는 대화의 맥락상으로 보나 '義'가 더 어울리므로 이쪽으로 번역했다.</ref>智是束斂底意思, 故屬陰否?” '''질문: 의(義)와 지(智)는 거두어들이는[束斂] 느낌이 있으므로 음(陰)에 속하는 것입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或問: “智未見束斂處.” '''누군가의 질문: 지(智)는 거두어들이는 측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ref>일역판은 이 질문과 6:56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여기서의 '누군가'가 해당 조목의 기록자인 심한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ref> 曰: “義猶略有作爲, 智一知便了, 愈是束斂. 孟子曰: ‘是非之心, 智也.’ 纔知得是而愛, 非而惡, 便交過仁義去了.” 胡泳(69때). '''대답: 의(義)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作爲) 조금 있지만, 지(智)는 한 번 알면 그걸로 끝이니 더욱 거두어들이는 쪽이다. 맹자(孟子)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라고 한다. 옳은[是] 줄 알고서 사랑하고 그른[非] 줄 알고서 미워하자마자 인(仁)과 의(義)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호영(胡泳)의 기록. (69세 때) *  17:22 問陰陽五行健順五常之性. '''음양(陰陽)·오행(五行)·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에 대한 질문.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陰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且如狗子, 會咬人底, 便是稟得那健底性; 不咬人底, 是稟得那順底性. 又如草木, 直底硬底, 是稟得剛底; 軟底弱底, 是稟得那順底.” 僩<ref>조선고사본에서는 '기손(蘷孫)'으로 썼다.</ref>(69이후). '''대답: 굳건함(健)은 저 양(陽)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고, 유순함(順)은 저 음(陰)의 기(氣)를 부여받은 것이며, 다섯가지 떳떳한 품성(五常)은 오행(五行)의 이치(理)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人物]은 모두 건순(健順)·오상(五常)의 성질(性)을 부여받았다. 또 예컨대 개[狗子] 중에 사람을 무는 놈은 바로 저 굳건(健)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요, 사람을 물지 않는 놈은 저 유순(順)한 성질(性)을 부여받은 놈이다. 또 초목(草木) 중에 곧고 단단한 것은 강(剛)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저 윤순(順)<ref>이 글자는 엄밀한 문언이었으면 '柔'라고 썼어야 한다.</ref>한 것을 부여받은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3 問: “或問‘氣之正且通者爲人, 氣之偏且塞者爲物’, 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바르고 통한[正且通]<ref>바르다는 것은 도덕적 올바름보다는 똑바로 서있는 물건의 경우처럼 밸런스가 좋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통함은 공간적으로 이동할 때 장애 없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이다.</ref> 기(氣)는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偏且塞] 기(氣)는 사물이 된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物之生, 必因氣之聚而後有形, 得其淸者爲人, 得其濁者爲物. 假如大鑪鎔鐵, 其好者在一處, 其渣滓又在一處.” '''대답: 사물의 생성은 반드시 (먼저) 기(氣)가 모인 뒤에 형체가 있게 되니, 그 맑은[淸] 것을 얻은 자는 사람이 되고 그 탁한[濁] 것을 얻은 자는 사물이 된다. 예를 들어 큰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면 잘 정련된 것이 한 쪽에 모이고 찌꺼기[渣滓]는 다른 한 쪽에 모이는 것과 같다. 又問: “氣則有淸濁, 而理則一同, 如何?” '''재질문: 기(氣)에는 청탁(淸濁)이 있지만 이치(理)는 똑같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固是如此. 理者, 如一寶珠. 在聖賢, 則如置在淸水中, 其輝光自然發見; 在愚不肖者, 如置在濁水中, 須是澄去泥沙, 則光方可見. 今人所以不見理, 合澄去泥沙, 此所以須要克治也. 至如萬物亦有此理. 天何嘗不將此理與他. 只爲氣昏塞, 如置寶珠於濁泥中, 不復可見. 然物類中亦有知君臣母子, 知祭, 知時者, 亦是其中有一線明處. 然而不能如人者, 只爲他不能克治耳. 且蚤·虱亦有知, 如飢則噬人之類是也.” 祖道(68때). '''대답: 진실로 그러하다. 이치(理)라는 것은 하나의 보배 구슬과 같다. (구슬이) 성현(聖賢)에게 있으면 마치 맑은 물[淸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휘광(輝光)이 자연히 드러나지만,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게 있으면 마치 탁한 물[濁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진흙과 모래[泥沙]를 걸러내야만 비로소 그 빛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이치(理)를 보지 못하니 마땅히 진흙과 모래를 걸러내야 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자기 기질을) 다스려야만[克治] 하는 까닭이다. 만물(萬物)의 경우에도 역시 이 이치(理)가 있다.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이 이치(理)를 그것들에게 주지 않았겠는가? 단지 기(氣) 때문에 흐리고 폐색하여[昏塞] 마치 보배 구슬을 탁한 진흙탕 속에 둔 것처럼 (그 빛을) 다시는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물들 중에서도 군신(君臣)·모자(母子)를 알고, 제사(祭)를 알며, 때[時]를 아는 종류가 있으니,<ref>당시 사람들은 벌과 개미[蜂蟻]에게 엄정한 군신관계가 있고. 호랑이와 이리[虎狼]에게 부자(혹은 모자)간에 친밀한 관계가 있고, 승냥이와 수달[豺獺]이 사냥한 짐승을 널어놓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줄 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와 이리의 친애함은 장자 천운편, 승냥이와 수달의 제사는 예기 왕제편이 최초의 출전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주자어류 4:9, 11, 19 등을 참조하라.</ref> 역시 그 속에 한 가닥 밝은 부분[一線明處]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과 같을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자기 기질을) 다스릴[克治] 수 없어서일 뿐이다. 또 벼룩[蚤]과 이[虱] 또한 (제한된 정도의) 지성(知)이 있으니, 예를 들어 굶주리면 사람을 무는 것 등이 이것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때) *  17:24 問: “或問云: ‘於其正且通者之中, 又或不能無淸濁之異, 故其所賦之質, 又有智愚賢不肖之殊.’ 世間有人聰明通曉, 是稟其氣之淸者矣, 然卻所爲過差, 或流而爲小人之歸者; 又有爲人賢, 而不甚聰明通曉, 是如何?” '''질문: 《대학혹문》에서 ‘그 바르고 통한[正且通] 자 중에서도 또 간혹 청탁(淸濁)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므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다시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통한 기에도 간혹 청탁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미추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추한 사람은 불초하니, 다시 서로 똑같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회암집 권 62 답이회숙(答李晦叔) 제 6서에서는 본 조목에서 인용한 것과 흡사한 버전으로 혹문을 인용하고 있다.</ref> 세상 사람 중에 총명하고 통달한[聰明通曉] 자는 맑은[淸] 기(氣)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하는 바가 어긋나서 혹 소인(小人)의 부류가 되고 마는 자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 사람됨이 현명하지만[賢] 그다지 총명하고 통달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曰: “或問中固已言之, 所謂‘又有智愚賢不肖之殊’, 是也. 蓋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事<ref>다수의 판본에서 '了'로 적었다.</ref>者, 智也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淸和溫恭之德. 又有人極溫和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爲學便是要克化, 敎此等氣質令恰好耳.” 僩(69이후). '''대답: 《대학혹문》에서 이미 이에 관하여 말했으니, 이른바 ‘또 지(智)·우(愚)·현(賢)·불초(不肖)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대개 그 부여받은 기질[所賦之質]에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범주가 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聰明曉事] 자가 똑똑하되[智] 혹 현명하지 못하다면[不賢], 이는 곧 부여받은 것 가운데 맑고 온화하며[淸和] 따스하고 공손한[溫恭] 덕(德)이 부족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지극히 온화(溫和)하되 그다지 사리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바로 현명하지만[賢] 똑똑하지[智]는 못한 것이다. 배움(學)이란 바로 이러한 자기 기질을 이겨내고 변화시켜[克化] 딱 알맞게[恰好] 만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5 舜功問: “序引參天地事, 如何?” '''순공(舜功)의 질문: (대학혹문의) 서문(序)에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셋이 되는[參天地]' 일을 인용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ref> '삼천지(參天地)'는 본래 중용 제 2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면 남이 그렇게 하도록 도울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했다면 이미 (이 사람의 위격은) 천지와 같으니,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은 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서문이 아니라 경 1장에서 '명덕'을 설명하는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은 태어나면서 바르고 통한 기운을 얻었으니 그 본성이 가장 귀하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허령통철(虛靈洞徹)하여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금수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처럼 되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어 (천지의) 낳고 기르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까닭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다.(唯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ref> 曰: “初言人之所以異於禽獸者, 至下須是見己之所以參化育者.” '''대답: 처음에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까닭을 말하였으니, (이어지는) 그 아래에서는 모름지기 자신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에 참여하는[參化育] 까닭을 보아야 한다. 又問: “此是到處, 如何?” '''다시 질문: 이 과정은 종착점이[到處] 어떻게 됩니까? 曰: “到, 大有地步在. 但學者須先知其如此, 方可以下手. 今學者多言待發見處下手, 此已遲卻. 纔思要得善時, 便是善.” 可學(62때). '''대답: (종착점에) 도달하기까지 크게 (여러가지) 단계들이[地步] 있다. 다만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종착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손을 쓸[下手] 수 있다. 지금 배우는 자들은 발현되는 경우[發見處]를 기다렸다가 손을 쓴다고 많이들 말하는데,<ref>이 발언은 아마도 호상학자들의 '찰식이발지제' 공부를 염두에 둔 듯하다. 고문해의는 회암집 권 51의 답동숙중(答董叔重) 제 3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ref> 이러면 이미 늦고 만다.<ref>'-却'은 현대 중국어 '-掉'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행위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한다. 예컨대 '망각(忘却)'은 잊어버린다는 행위가 완성된 것이다.</ref> 선(善)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 즉시 바로 선(善)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때) *  17:26 問: “或問‘自其有生之初’以下是一節; ‘顧人心稟受之初, 又必皆有以得乎陰陽五行之氣’以下是一節; ‘苟於是焉而不値其淸明純粹之會’, 這又轉一節; 下又轉入一節物欲去, 是否?” '''질문: 《대학혹문》에서 ‘최초에 태어났을 때부터[自其有生之初]’ 이하가 한 단락이고, ‘생각건대 최초에 사람이 마음을 (하늘로부터) 받았을(稟受) 적에는 또 반드시 모두 음양(陰陽)·오행(五行)의 기(氣)를 얻음이 있었다’ 이하가 한 단락이며, ‘진실로 이 단계에서 그 청명하며 순수한 것들(을 받을) 기회[淸明純粹之會]를 만나지 못한다면’여기서 다시 전환되어 한 단락이고, 이어서 그 아래에서 다시 전환되어 '물욕(物欲)' 한 단락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까?<ref>질문자가 인용한 네 단락은 모두 현행본 대학혹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행본을 사서혹문의 최후개정판이라고 간주할 경우 여기서의 네 단락은 모두 구판의 문구들이 된다. 아래 주희의 말에 더해 여기서 인용된 부분만 가지고 추론하자면 제 1구는 인간 고유의 도덕적 동질성, 제 2구는 음양오행의 정수를 얻어 탄생한 인간의 신체적 동질성, 제 3구는 그럼에도 타고난 기질의 퀄리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제 4구는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나 물욕에 빠져 추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일역판 역시 이와 흡사하게 추론했으니 참조하라.</ref> 曰: “初間說人人同得之理, 次又說人人同受之氣. 然其間卻有撞著不好底氣以生者, 這便被他拘滯了, 要變化卻難.” '''대답: 처음에는 사람마다 똑같이 얻는 이치(理)를 설명하고,<ref>제 1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그 다음에는 또 사람마다 똑같이 받는 기(氣)를 설명한 것이다.<ref>제 2구를 설명한 것이다.</ref> 그러나 그 사이에 도리어 좋지 못한 기(氣)를 만나[撞]<ref>'撞'은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질문자가 인용한 제 3구의 '値'와 같다.</ref> 태어나는 자가 있으니,<ref>제 3구에 대한 해설이다.</ref> 그 경우 곧 그 (기에) 구속되고 막혀서[拘滯] 변화시키고자 하여도 어렵다.<ref>제 4구를 해설한 것이다.</ref> 問: “如何是不好底氣?” '''질문: 어떠한 것이 좋지 못한 기(氣)입니까? 曰: “天地之氣, 有淸有濁. 若値得晦暗昏濁底氣, 這便稟受得不好了. 旣是如此, 又加以應接事物, 逐逐於利欲, 故本來明德只管昏塞了. 故大學必敎人如此用工, 到後來卻會復得初頭渾全底道理.” 賀孫(62이후). '''대답: 천지의 기(氣)에는 청탁이 있다. 만약 어둡고 혼탁한[晦暗昏濁] 기(氣)를 만난다면, 이는 곧 좋지 못한 것을 받은[稟受]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데 또 사물을 응대함[應接事物]에 있어 사사건건 이욕(利欲)을 쫓아다니므로, 본래의 명덕(明德)이 계속 흐리고 폐색[昏塞] 된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들이 이와 같이 힘을 쓰도록 가르쳐서, 나중에는 도리어 최초의 온전한[渾全] 도리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27 林安卿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擴將去.” '''임안경(林安卿)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이 끝내 은폐될 수 없음을 설명한 부분이다.</ref>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은 지점들[覺處]에 나아가 앎을 지극히 하고(致知) 확충해[充擴] 나가야 합니다. 曰: “然. 昨日固已言之. 如擊石之火, 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林先引或問中“至於久而後有覺”之語爲比, 先生因及此.> 那箇覺, 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대답: 그렇다. 어제 진실로 이미 그것을 말했다. (그것은) 마치 부싯돌을 때려서 나오는 스파크[擊石之火]와 같으니, 작은 불씨[些子]일 뿐이지만, 착화하기만 하면 곧 온 들판을 다 태울[燎原] 수 있다. 만약 반드시 먼저 크게 깨달은[大覺] 다음에 비로소 격물(格物)·치지(致知)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순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임안경[林]이 먼저 《대학혹문》 중의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至於久而後有覺]'<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이정(二程)의 말이다. 원출전은 이정유서 18:18. '질문: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대답: 앎을 지극히하는 공부가 최우선이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이 매일 더욱 밝아질 것이고,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한 이후에 깨닫게 된다.(問: 學何以有至覺悟處? 曰: 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ref>는 말을 인용하여 비유하자 선생이 이어서 이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대학혹문에서 말한) 저 깨달음이란[那箇覺] 사물이 탐구되어 앎이 지극해진[物格知至] 뒤의 대철대오[大徹悟]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일은 모두 끝난다. 순간적인 깨달음[介然之覺] 같은 경우는 하루 동안에도 무시로 무수히[無時無數] 터져나오니,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려[識認] 붙잡아 지키고[操持] 확충하고 길러[充養]<ref>산란하는 마음을 수습하여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덕성을 두텁게 배양하는 공부를 말한다. 17:1과 3에서 설명하고 있는 소학 단계에서의 공부를 참조하라.</ref>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又問: “‘眞知’之‘知’與‘久而後有覺’之‘覺’字, 同否?” '''다시 질문: ‘참된 앎[眞知]'<ref>진리를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 알아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말한다. 이정이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정유서 2上:24 '참으로 아는 것과 평범하게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본 일인데, 어떤 농부가 호랑이에게 물려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쳤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변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그 농부만 안색이 변하여 다른 사람들과 반응이 달랐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참으로 안'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저 농부와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선을 알면서도 불선을 행하는 것은 역시 참으로 알지 못해서이다. 참으로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眞知與常知異. 常見一田夫曾被虎傷, 有人說虎傷人, 衆莫不驚, 獨田夫色動, 異於衆. 若虎能傷人, 雖三尺童子, 莫不知之, 然未嘗眞知. 眞知須如田夫乃是. 故人知不善, 而猶爲不善, 是亦未嘗眞知. 若眞知, 決不爲矣.)</ref>이라고 할 때의 ‘지(知)’와 ‘오래 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久而後有覺]’의 ‘각(覺)’ 자는 (의미가) 같지 않습니까? 曰: “大略也相似, 只是各自所指不同. 眞知是知得眞箇如此, 不只是聽得人說, 便喚做知. 覺, 則是忽然心中自有所覺悟, 曉得道理是如此. 人只有兩般心: 一箇是是底心, 一箇是不是底心. 只是才知得這是箇<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箇'의 순서가 '箇是'로 뒤집혀있다. 만력본과 화각본에서는 '是箇'를 주석처리했다. 여유량본과 전경당본에서는 저본(중화서국판)과 같다.</ref>不是底心, 只這知得不是底心底心, 便是是底心. 便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 知得不是底心便是主, 那不是底心便是客. 便將這箇做主去治那箇客, 便常守定這箇知得不是底心做主, 莫要放失, 更那別討箇心來喚做是底心! 如非禮勿視聽言動, 只才知得這箇是非禮底心, 此便是禮底心, 便莫要視. 如人瞌睡, 方其睡時, 固無所覺. 莫敎纔醒, 便抖擻起精神, 莫要更敎他睡, 此便是醒. 不是已醒了, 更別去討箇醒, 說如何得他不睡. 程子所謂‘以心使心’, 便是如此. 人多疑是兩箇心, 不知只是將這知得不是底心去治那不是底心而已.” '''대답: 대략 비슷하니, 그저 각자 지시하는 바[所指]가 다를 뿐이다. 참된 앎[眞知]은 참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단지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다. 깨달음[覺]이란 홀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깨닫는 바[覺悟]가 있어서 도리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옳은[是]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옳지 않은[不是] 마음이다. 그저 이것이 '옳지 않은 마음'임을 알기만 하면 곧 이 '옳지 않은 마음'을 아는 마음[知得不是底心底心]이 바로 '옳은 마음[是底心]'이다.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이 바로 주인(主)이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이 바로 손님(客)이다. 이것을 주인(主)으로 삼아 저 손님(客) 쪽을 다스려서, 항상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굳게 지켜[守定] 주인(主)으로 삼고 놓치지[放失] 말아야 하니, 다시 어디서[那]<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별도로 마음을 마련해와서[討]<ref>'討'는 물건을 구해다 온다는 뜻이다.</ref> '옳은 마음'이라고 부를 것인가?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聽言動]<ref>논어 12:1.</ref>는 말의 경우, '이건 예(禮)가 아니구나'라고 아는 그 마음[知得這箇是非禮底心]이야말로 바로 '예(禮)의 마음[禮底心]'이니, (이 마음을 주인으로 옹립한 사람은) 곧 (예에 어긋나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瞌睡] 경우, 잠이 든 동안에는 전혀 지각하는[覺]<ref>깨달을 '각(覺)'은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 사물을 지각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쓴 것이다.</ref> 바가 없다. 그저[莫敎]<ref>고문해의에서는 '只是'나 '除是'와 같다고 풀면서 '莫'을 부정사로, '敎'를 사역동사로 보는 해석을 배격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로 어류 130:77을 제시했는데, 사실 어류 전체에서 '막교'가 이런 식으로 쓰인 곳은 130:77 한 군데인 반면 다수의 다른 조목에서는 모두 '~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여전히 의심스럽다. 한어대사전에서는 '막교'를 '막비(莫非)'와 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님이 없다'가 된다. 일역판은 고문해의의 제언을 따랐다.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지만 달리 더 낫게 해석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우선 고문해의를 따라 번역해 두었다.</ref> 막 깨어나자마자[纔醒] 번쩍 정신을 차리고[抖擻起精神]<ref>'두수(抖擻)'는 물건을 번쩍 들어올리거나 몸을 번쩍 일으키는 등을 말한다.</ref> 다시는 그 자신이 잠들도록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깨었다[醒]는 것이다. 이미 깨어난 뒤에 다시 별도로 '깨어있음'을 마련해와서 어떻게 하면 그 자신이 다시 잠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마음으로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ref>이정유서 18:85. '질문: 마음은 누가 부립니까? 대답: 마음으로 마음을 부리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저 혼자 하라고 맡겨두면 달아나 버린다. (曰: 心誰使之? 曰: 以心使心則可. 人心自由, 便放去也.)'</ref>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하면) 마음이 두개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데,<ref>마음 A로 마음 B를 통제한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에게 있어 마음은 하나 뿐이라는 주희의 평소 생각에 배치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심사심'이라고 말해도 사실은 하나뿐인 마음이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16:136, 34:196, 96:52 등을 보라.</ref> 단지 이 '옳지 않음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저 '옳지 않은 마음'을 다스릴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元思云: “上蔡所謂‘人須是識其眞心, 方乍見孺子入井之時, 其怵惕·惻隱之心, 乃眞心也.'” '''원사(元思)가 상채(上蔡)<ref>사량좌이다.</ref>의 이른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眞心]을 알아야 한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막 보았을 때의 그 경악하며[怵惕] 측은해하는[惻隱] 마음이 바로 참된 마음[眞心]이다.'에 관하여 발언함.<ref>상채어록 권2의 한 대목을 주희가 맹자집주 2A:6에서 인용한 것이다. 맹자집주쪽의 문장은 본 조목과 일치하나 상채어록의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 참된 마음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참된 마음이다. (人須識其眞心. 見孺子將入井時, 是眞心也.)'</ref> 曰: “孟子亦是只<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是只'가 '只是'로 순서가 뒤집혀있다.</ref>討譬喩, 就這親切處說仁之心是如此, 欲人易曉. 若論此心發見, 無時而不發見, 不特見孺子之時爲然也. 若必待見孺子入井之時, 怵惕·惻隱之發而後用功, 則終身無緣有此等時節也.” '''대답: 맹자(孟子) 역시 그저 비유를 하나 가져와서[討] 이렇게 친근하고 절실한[親切] 지점 위에서 인(仁)한 마음이란 이와 같음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쉽게 깨닫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 마음의 발현(發見)을 논하자면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으니[無時而不發見], 꼭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경악하며 측은해하는 마음이 발현된 뒤에야 힘을 써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죽을 때 까지 이러한 순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ref>발현된 것을 근거로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음 속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당시 표현으로 이발찰식 공부라고 불렀다. 오늘날 호남성 장사에 해당하는 형호남로 담주(潭州)를 근거지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이러한 방향의 공부를 주장했는데, 이를 통칭 '호상학(湖湘學)'이라고 부른다. 17:25에 이어 여기에서도 주희는 호상학의 공부방법론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어서 원사가 호상학의 거두인 호굉(胡宏)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ref> 元思云: “舊見五峰答彪居仁<ref>'彪居正'의 오기이다.</ref>書, 說齊王易<ref>성화본, 조선정판본, 조선고사본에서는 '易'을 '愛'로 적었다.</ref>牛之心云云, 先生辨之, 正是此意.” '''원사(元思)가 말함: 옛날 오봉(五峰)<ref>호굉(胡宏, 1105~1161)이다. 호상학의 거두로 장식(張栻, 1133-1180)의 스승이다.</ref>이 표거정(彪居正)에게 답한 편지에서 제나라 임금(齊王)이<ref>맹자와 대담한 제선왕을 말한다.</ref> 소를 바꾼 마음[易牛之心]<ref>맹자 1A:7. 제나라 선왕이 제사에 쓰일 희생물인 소가 두려움에 떨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일을 말한다.</ref> 운운한 것을 보았는데,<ref>호굉의 주저인 지언(知言) 권 4에 이 대담이 실려있다. '다른날 물었다: 사람이 인하지 못한 까닭은 그 좋은 마음을 놓쳐서입니다. 놓친 마음을 가지고 (본래의 좋은) 마음을 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답: 제나라 임금이 소를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이 좋은 마음의 싹이 이욕(利欲)의 틈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드러난 그것을 붙잡아 간직하고 간직하여 기르고 길러서 확충하여 매우 커질 때까지 그치지 않으면 하늘과 똑같아진다. 이 마음이 발현하는 단서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핵심은 그것을 인식하는데 있을 뿐이다.(他日問曰: 人之所以不仁者, 以放其良心也. 以放心求心, 可乎? 曰: 齊王見牛而不忍殺, 此良心之苖裔, 因利欲之間而見者也. 一有見焉, 操而存之, 存而養之, 養而充之, 以至于大大而不已, 與天同矣. 此心在人, 其發見之端不同, 要在識之而已.)</ref> 선생님께서 (호굉과 표거정 사이의)그 대담을 논변하신 글<ref>주희가 장식, 여조겸과 함께 1170년(41세)에 완성한 호자지언의의(胡子知言疑義)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회암집 권 73에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이 상당하며 또 본 조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고 하기 어려우므로 인용하지는 않겠다.</ref>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曰: “然. 齊王之良心, 想得也常有發見時. 只是常時發見時, 不曾識得, 都放過<ref>성화본, 조선고사본, 조선정판본에서는 이 뒤에 '去'자가 있다.</ref>了. 偶然愛牛之心, 有言語說出, 所以孟子因而以此推廣之也.” '''대답: 그렇다. 제나라 임금(齊王)의 좋은 마음[良心]도 생각해 보면 역시 늘상 발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평상시 발현될 적에는 그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어서 모두 놓쳐버렸을[放過] 뿐이다. 우연히 소를 아끼는 마음[愛牛之心]이 말로 발화되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가 그 기회에 그것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又問: “自非物欲昏蔽之極, 未有不醒覺者.” '''다시 질문: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지[物欲昏蔽之極]않은 이상 (여지껏) 깨어나지[醒覺]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曰: “便是物欲昏蔽之極, 也無時不醒覺. 只是醒覺了, 自放過去, 不曾存得耳.” 僩(69이후). '''대답: 설령<ref>'便是'는 '설령[即使]', '비록[雖是]'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문해의를 참조하라.</ref> 물욕(物欲)에 흐려지고 폐색됨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사람은) 깨어나지 못할 때가 없다. 단지 깨어나고 나서도 스스로 놓쳐버려[放過去] 한번도 (제대로) 간직하지[存得] 못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28 友仁說“明明德”: “此‘明德’乃是人本有之物, 只爲氣稟與物欲所蔽而昏. 今學問進修, 便如磨鏡相似. 鏡本明, 被塵垢昏之, 用磨擦之工, 其明始現. 及其現也, 乃本然之明耳.” '''내(友仁)가 ‘명명덕(明明德)’을 설명했다: 이 ‘명덕(明德)’은 바로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인데, 단지 기품(氣稟)<ref>각자가 타고난 정신/신체적 퀄리티를 말한다. '품'은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는 뜻이다.</ref>과 물욕(物欲)에 뒤덮혀 흐려졌을 뿐입니다. 지금 학문(學問)을 하여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아나가는[進修]<ref>'진수'는 주역 건괘 문언전의 '진덕수업(進德修業)'에서 나온 말이다. 주희는 주역본의에서 '진덕'을 마음의 진정성(忠信)을 배양하는 공부로, '수업'을 언행을 가다듬고 단속하는 공부로 풀이했다.</ref> 것은 마치 거울을 갈고닦는[磨鏡]<ref>당시 거울은 청동거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경'이란 유리거울을 헝겁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청동거울을 숯돌 등을 가지고 갈아내는 작업에 가깝다.</ref> 것과 비슷합니다. 거울은 본래 밝지만 먼지와 때[塵垢]에 의해 흐려진 것을 갈고닦는[磨擦] 노력을 들여야만 그 밝음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드러나게 되면 곧 본래의 밝음[本然之明]일 뿐입니다. 曰: “公說甚善. 但此理不比磨鏡之法.” '''대답: 그대(公)의 설명이 매우 좋다. 다만 이 이치(理)는 거울을 갈고닦는 법[磨鏡之法]으로 비유할 수 없다. 先生略擡身, 露開兩手, 如閃出之狀, 曰: “忽然閃出這光明來, 不待磨而後現, 但人不自察耳. 如孺子將入於井, 不拘君子小人, 皆有怵惕·惻隱之心, 便可見.” 선생이 몸을 약간 일으켜 두 손을 펼쳐 (빛이) 번쩍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이고서 말함: 홀연히 이 광명(光明)이 번쩍 나오는 것이지, 갈고닦기를 기다린 뒤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스스로 (이 광명을) 살피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군자(君子)냐 소인(小人)이냐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드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友仁云: “或問中說‘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而其本體已洞然’, 便是這箇道理.” '''내가(友仁) 말함: 《대학혹문》 중에 ‘그러므로 제아무리 뒤덮혀 흐려짐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介然之頃] 한 번 깨닫기만[覺] 하면 이 빈틈[空隙] 속에서 그 본체(本體)는 이미 환하다[洞然矣]’<ref>직전 17:27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ref>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先生頷之, 曰: “於大原處不差, 正好進修.” 友仁(69때).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함: 큰 근원[大原]의 차원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덕을) 진전시키고 (사업을) 닦기에[進修] 딱 좋을 때이다. 우인(友仁)의 기록. (69세 때) *  17:29 問: “或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而吾之'가 더 있다.</ref>所以明而新之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지점에 '又'가 더 있다. 조선고사본처럼 인용해야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非可以私意苟且爲也.’ 私意是說著不得人爲, 苟且是說至善.”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구차한 것을[苟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의(私意)는 인위(人爲)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구차(苟且)는 지극한 선[至善]을 말하는 것입니다.<ref>대학혹문 인용구는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어야 맞겠으나 여기서 질문자가 '구차(苟且)'가 '지선(至善)'을 지시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번역해 두었다. '구차(苟且)'라는 표현은 오늘날 한국어에서 '구차한 살림살이'의 경우처럼 가난하고 변변찮은 모양새를 뜻하지만, 주희 당시에는 '임시변통(makeshift)' 같은 뜻으로 쓰였다. 질문자가 구차(苟且)를 지선으로 오인한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 주석을 보라.</ref> 曰: “才苟且, 如何會到極處!” '''대답: 조금이라도 구차하면[苟且] 어떻게 지극한 지점[極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賀孫擧程子<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以'가 더 있다.</ref>義理精微之極<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姑以至善目之之語'가 더 있다. 이렇게 인용해야 문장이 현행본 대학혹문에 더 가깝게 된다.</ref>. '''내가(賀孫) 정자(程子)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義理)’<ref>대학혹문에서 인용한 정이의 말이다.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원출전은 이정유서 15:183이다. '선이란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우선은[且] '지선'이라고 지목한다.(善者, 義理之精微, 無可得名. 且以至善目之.)' '임시로[姑]'나 '우선은[且]'은 모두 '구차(苟且)'와 같다. 최초의 질문자와 섭하손(두 사람은 동일인일 수도 있다)은 정자가 계속해서 지극한 진리에 '구차하게' 지선(至善)이라고 임시적인 라벨을 붙이고 있다고 하니 대학혹문의 다른 구절에 등장한 '구차(苟且)'라는 표현 역시 지선(至善)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오인한 듯하다.</ref>라는 말을 거론했다. 曰: “大抵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事皆有箇極好處. 今之人, 多是理會得半截, 便道了. 待人看來, 喚做好也得, 喚做不好也得. 自家本不曾識得到, 少刻也會入於老, 也會入於佛, 也會入於申韓之刑名. 止緣初間不理會到十分, 少刻便沒理會那箇是白, 那箇是皂, 那箇是酸, 那箇是鹹. 故大學必使人從致知直截要理會透, 方做得. 不要恁地半間半界, 含含糊糊. 某與人商量一件事, 須是要徹底敎盡. 若有些子未盡處, 如何住得. 若有事到手, 未是處, 須著極力辨別敎是. 且看孟子, 那箇事恁地含糊放過<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去'가 더 있다.</ref>! 有一字不是, 直<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須'가 더 있다.</ref>爭到底. 這是他見得十分極至, 十分透徹, 如何不說得?” 賀孫(62이후). '''대답: 대체로 지선(至善)은 그저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 100퍼센트 단정하고 딱 맞아서[端正恰好] 조금도 옳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 조금도 (목표에) 이르지 못한 데가 없는 지점이다. 예컨대 임금을 섬김[事君]에 반드시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섬긴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경(敬)이라 하고, 백성을 다스림[治民]에 반드시 요(堯)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식과 같아야 비로소 인(仁)이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지극히 좋은 지점[極好處]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반절[半截]만 이해하고서 다 했다고 말한다. 남이 보고서 판단하기를 좋다고 해도 괜찮고[得] 좋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得]는 식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15:116을 참조하라.<ref>여기서 '득(得)'은 현대중국어 '行(xing)', 영어 'OK'와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나른한 태도를 뜻한다.</ref> 자기 자신의 인식이 본래 (목표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 조금만 지나면 노자(老子)에게 들어갈 수도 있고, 부처[佛]에게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형명학(刑名)에도 들어갈 수 있다.<ref>전국시대 법가, 특히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문을 형명(刑名) 또는 형명(形名)이라고 부른다. 이는 형벌과 관련된 이름은 아니다. 관료 각각에게 부여된 직무의 내용이 명칭(名)이고, 실제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형체(形)이다. 형체와 명칭, 실질과 명칭이 서로 부합하도록 국가기구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형명학'이라는 별칭이 나온 것이다. 풍우란, 중국철학사(上), 1999. P.514-515.</ref> 그저 애초에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어느 것이[那] 희고 어느 것이 검으며,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짠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ref>여기서 '那'는 의문사이다. 현대중국어 '哪'와 같다.</ref>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치지(致知) 단계에서부터 칼로 자른듯[直截]<ref>'직절(直截)'은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확실성, 철저성을 의미한다.</ref> 철저히 이해하도록[理會透] 요구하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어중간하고[半間半界]<ref>'반간불계(半間不界)'와 같다. 철처하지 못하다는 뜻이다.</ref> 웅얼거리듯[含含糊糊]<ref>함호(含糊)는 말소리가 또렷하지 않고 웅얼거린다는 뜻이다.</ref>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남과 무슨 일을 상의할 때에는 반드시 남김없이 철저히 하고자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다면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일이 손에 들어왔을 때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모름지기 극력(極力)으로 변별하여 맞게 만들어야 한다. 또 맹자(孟子)를 보라. (그가) 무슨 일을 그렇게 웅얼웅얼 대충 넘어가던가? 한 글자라도 맞지 않으면 끝까지[到底] 다투었다. 이(렇게 다툰 이유)는 그의 이해가 100퍼센트 지극하고 100퍼센트 투철했기 때문이니, (이러하다면 맹자가) 어찌 논변[說]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f>여기서는 심상하게 '말하다[說]'라고 풀어서는 안 된다. 논변을 너무 좋아한다는 당시의 악평에 대한 맹자의 변론으로 맹자 3B:9를 참조하라.</ref>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0 問: “或問說明德處云: ‘所以應乎事物之間, 莫不各有當然之則.’ 其說至善處, 又云: ‘所以見於日用之間者, 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二處相類, 何以別?” '''질문: 《대학혹문》에서 명덕(明德)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기를 ‘사물(事物)에 응하는 사이에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혹문에서 지선(至善)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또 이르기를 ‘일상생활[日用] 사이에 나타나는 바에 각각 본래 그러한 일정한 법칙[本然一定之則]이 없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두 부분이 서로 유사한데, 어떻게 구분합니까?<ref>현행본 대학혹문에는 질문자 진순이 인용한 두 문구 가운데 후자만 있다. 전자는 아마도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개정의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ref> 曰: “都一般. 至善只是明德極盡處, 至纖至悉, 無所不盡.” 淳(61·70때). '''대답: 모두 같은 이야기다. 지선(至善)은 단지 명덕(明德)이 남김없이 지극한 곳[極盡處]일 뿐이니, 지극히 섬세하고 상세하여[至纖至悉] 다하지 않음이 없다.<ref>같은 취지의 발언이 14:114에서도 보이는데 이 역시 진순이 질문하고 기록한 조목이다.</ref>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  17:31 仁甫問: “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다음 인용구에 대한) 인보(仁甫)의 질문: '지극히 정미한 의리여서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로[姑] '지선(至善)'이라고 지목한다.'<ref>대학혹문. 17:29를 참조하라.</ref> 曰: “此是程先生說. 至善, 便如今人說極是. 且如說孝, 孟子說‘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此是不孝. 到得會奉養其親, 也似煞强得這箇, 又須著如曾子之養志, 而後爲能養. 這又似好了, 又當如所謂‘先意承志, 諭父母於道', '不遺父母惡名’, 使'國人稱願道‘幸哉有子如此’', 方好.” '''대답: 이는 정(程) 선생의 설명이다. 지선(至善)은 곧 요즘 사람들이 '극히 옳다[極是]'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효(孝)를 말함에 있어, 맹자(孟子)가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보지 않는다’<ref>맹자 4B:30.</ref>고 한 것, 이것은 불효(不孝)이다. 자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경우는 역시 (앞서 말한) 그것보다는 꽤[煞] 나은[强得] 듯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증자(曾子)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한[養志] 것과 같이 해야만<ref>맹자 4A:19. 아버지의 의지를 살펴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쪽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말한다.</ref> 비로소 봉양을 잘하는 것이다. 이정도로도 좋은 듯하지만, 다시 마땅히 이른바 ‘부모의 뜻을 한발 앞서 헤아려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道)로 인도하며',<ref>예기 제의편. '군자의 효도란 (어버이의) 생각을 한 발 앞서 알아차려 그 뜻을 받들고, 부모를 타일러 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봉양이나 하는 사람이니 어찌 효도한다고 하겠나?(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安能為孝乎?)</ref>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아',<ref>예기 제의편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자기 행실을 삼가서 부모에게 오명을 끼치지 않으면 잘 보내드렸다고 할 만하다.(父母旣沒,愼行其身,不遺父母惡名,可謂能終矣.)'</ref>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저런 아들이 있어서."라고 말하게'<ref>예기 제의편. '좋은 고기를 익혀서 드리는 것은 효가 아니라 봉양[養]이다. 군자가 말하는 효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칭찬하며 "좋겠다! 아들이 있어서."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효이다.(亨孰膻薌,嘗而薦之,非孝也,養也。君子之所謂孝也者,國人稱愿然曰:『幸哉有子!』如此,所謂孝也已).</ref> 해야만 충분하다 하겠다. 又云: “孝莫大於尊親, 其次能養. 直是到這裏, 方喚做極是處, 方喚做至善處.”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효(孝)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尊親]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잘 봉양하는 것[能養]이다.<ref>예기 제의편. '큰 효도는 존친이요, 그 다음은 욕먹이지 않는 것이요, 그 아래가 잘 봉양하는 것이다.(大孝尊親,其次弗辱,其下能養)'</ref>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극히 옳은 곳[極是處]'이라 하고, 비로소 지선(至善)한 곳이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2 郭德元問: “或問: ‘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此三者, 求之古今人物, 是有甚人相似?” '''곽덕원(郭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오직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있고, 또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도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不屑] 자가 있으며, 또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이다.</ref>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가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문구를 약간 축약한 형태이다. 아래 원주에서 인용한 탁록(卓錄) 쪽은 '因'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현행본 대학혹문과 일치한다.</ref>고 하였습니다. 이 세 부류를 고금(古今)의 인물 가운데서 찾아보면 누구와 비슷합니까? 曰: “如此等類甚多. 自謂能明其德而不屑乎新民者, 如佛·老便是; 不務明其明德, 而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如管仲之徒便是; 略知明德新民, 而不求止於至善者, 如前日所論王通便是<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如此'가 더 있다.</ref>. <卓錄云: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因<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狃'으로 썼다.</ref>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如前日所論王通之事是也.”><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 전체가 없는 대신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선생은 며칠 앞서 왕통론(王通論)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先生前此數日作王通論, 其間有此語.)'</ref> 看他於己分上亦甚修飭, 其論爲治本末, 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狹, 不曾就本原上著功,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始是. 看古之聖賢別無用心, 只這兩者是喫緊處: 明明德,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 正如佛家說, ‘爲此一大事因緣出見於世’, 此亦是聖人一大事也. 千言萬語, 只是說這箇道理. 若還一日不扶持, 便倒了. 聖人只是常欲扶持這箇道理, 敎他撑天柱地.” 文蔚(59이후).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있다. '卓録同. 又問: "秦漢以下, 無一人知講學明理, 所以無善治.” 曰: “然.” 因泛論歷代以及本朝太宗眞宗之朝, 可以有爲而不爲. “太宗每日看太平廣記數卷, 若能推此心去講學, 那裏得來? 不過寫字作詩, 君臣之間以此度日而已. 眞宗東封西祀, 糜費巨萬計, 不曾做得一事. 仁宗有意於爲治, 不肯安於小成, 要做極治之事. 只是資質慈仁, 卻不甚通曉用人, 驟進驟退, 終不曾做得一事. 然百姓戴之如父母. 契丹初陵中國, 後來卻服仁宗之德, 也是慈仁之效. 緣它至誠惻怛, 故能動人如此.' 이 내용은 선두 네 글자를 제외하고 127:8과 일치하므로 그쪽을 참조하라. 여기서 번역하지는 않겠다.</ref> '''대답: “이러한 부류는 매우 많다. 스스로 자신의 (밝은) 덕(德)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로는 예컨대 불가와 노자[佛·老]가 바로 그렇다.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만 가지고도 충분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예를 들어 관중(管仲)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을 대략 알지만 지선(至善)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는 않는 자는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ref>584-617. 호는 문중자(文中子).</ref>이 바로 그렇다. <탁(卓)의 기록에는 “또 이 두 가지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임을 대략 알지만 작은 성취[小成]에 안주하고 근시안적 이익[近利]을 따라서[因] 지선(至善)이 있는 곳(所在)에 도달하여 머무르기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예를 들어 전날 논의했던 왕통(王通)의 경우가 그렇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일신의 차원[己分上]에서도 깊이 수양했으며[修飭], 그 다스림의 본말(本末)을 논한 것도 조리가 있었으니, 이 세상[斯世]에 대해 진지하게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스케일[規模]이 얕고 좁아서 일찍이 근본[本原]의 차원에서는 힘을 쓰지[著功]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做不徹] 못한 것이다. 반드시 그 최선의 것[極]<ref>지선(至善)을 말한다.</ref>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만 한다. 가만 보면 옛 성현(聖賢)은 다른데 마음을 씀이 없었고, 그저 이 두 가지<ref>명명덕과 신민</ref>만이 긴요한 부분[喫緊處]이었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사욕(私欲)이 없기를 원했고,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든 각각의 사안(事事物物)에 대해 모두 마땅하게 처신하기를 원했다.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했다’<ref>법화경 서품 '제불과 세존이 오직 이 하나의 큰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했다.(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ref>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성인(聖人)의 하나의 큰일[一大事]이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단지 이 도리를 설명할 뿐이다. 만약 하루라도 부지(扶持) 않으면 곧 쓰러져버린다. 성인(聖人)은 그저 언제나 이 도리를 부지하여 하늘과 땅을 지탱하게[撑天柱地] 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33 問: “明德而不能推之以新民, 可謂是自私.” '''질문: 명덕(明德)을 밝혔으되 그것을 미루어 백성을 새롭게하지[新民] 못한다면, 자기 생각만 한다[自私]<ref>자기 자신만을 위함, 자기 생각만 함,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있음. 주희는 보통 '자사자리(自私自利)'와 같은 형태로 사용하며 주로 불교를 비판할 적에 꺼내는 표현이다. 불교는 자기 일신의 구원만 신경쓸 뿐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취지이다.</ref>고 할 만합니다. 曰: “德旣明, 自然是能新民. 然亦有一種人不如此, 此便是釋·老之學. 此箇道理, 人人有之, 不是自家可專獨之物. 旣是明得此理, 須當推以及人, 使各明其德. 豈可說我自會了, 我自樂之, 不與人共!” '''대답: 덕(德)이 이미 밝아졌다면 자연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와 노자의 학문이다. 이 도리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미 이 이치를 밝혔다면, 반드시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推以及人] 각자 자기 덕(德)을 밝히게 해야 한다. 어찌 나 혼자 해냈으니 나 혼자만 그것을 즐기고 남과 공유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因說: 曾有學佛者王天順, 與陸子靜辨論云: “我這佛法, 和耳目鼻口髓腦, 皆不愛惜. 要度天下人, 各成佛法, 豈得是自私!” '''이어서 (내가) 말함: 일전에 불교를 배운 왕천순(王天順)<ref>누군지 확실치 않다. 상산집(象山集) 권 2의 여왕순백(與王順伯) 제 2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왕천순은 왕순백의 이름을 오기한 것일 수 있다.</ref>이 육자정(陸子靜)<ref>육구연이다.</ref>과 변론하며 이르기를 '나의 이 불법(佛法)은 귀·눈·코·입·골수·뇌[耳目鼻口髓腦]까지 모두 다<ref>'和...皆'는 현대 중국어 '連...都'와 같다. '~까지 모두다', '~마저도 모두 다' 정도의 의미이다.</ref> 아끼지 않고 천하 사람들을 제도하여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데 이게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自私]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先生笑曰: “待度得天下人各成佛法, 卻是敎得他各各自私. 陸子靜從初亦學佛, 嘗言: ‘儒佛差處是義利之間.’ 某應曰: ‘此猶是第二著, 只它根本處便不是. 當初釋迦爲太子時, 出遊, 見生老病死苦, 遂厭惡之, 入雪山修行. 從上一念, 便一切作空看, 惟恐割棄之不猛, 屛除之不盡. 吾儒卻不然. 蓋見得無一物不具此理, 無一理可違於物. 佛說萬理俱空, 吾儒說萬理俱實. 從此一差, 方有公私·義利之不同.’ 今學佛者云‘識心見性’, 不知是識何心, 是見何性.” 德明(44이후). '''선생이 웃으며 말함: 천하 사람들이 각자 불법(佛法)을 이루도록 제도하겠다는 것은<ref>서두의 '대(待)'는 '욕(欲)'이나 '장요(將要)'와 같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말한다.</ref> 도리어 그들 각자가 자기 생각만 하도록[各各自私] 가르치는 것이다. 육자정(陸子靜) 역시 처음에는 불교를 배웠는데,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차이는 의(義)와 이(利)의 차이이다’고 하였다.<ref>이 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175년 아호에서의 만남, 혹은 1181년 백록동서원에서의 만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ef> 내가 응답하기를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第二著]이다. 그저 그 근본(根本)부터가 옳지 않다. 당초 석가(釋迦)가 태자(太子)였을 때 성문 밖으로 나가 노닐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설산(雪山)에 들어가 수행하였다.<ref>석가모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을 말한다.</ref> 그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곧 일체를 공(空)으로 보게 되었고, 오직 그것을<ref>본질적으로 허망한 이 세상 일체를</ref> 잘라내어 버림[割棄]이 과감하지 못할까, 제거함[屛除]이 완벽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ref>불교의 출세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세간의 일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ref> 우리 유학[吾儒]은 도리어 그렇지 않다. 대개 한 물건도 이 이치(理)를 갖추지 않음이 없고, 한 이치도 사물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이치[萬理]가 모두 헛되다[空]고 말하고, 우리 유학은 모든 이치가 모두 진실[實]하다고 말한다.<ref>'실(實)'을 '진실하다'고 번역하긴 했지만, 여기서 '공'은 내용물이 빈 그릇을, '실'은 내용물이 가득찬 그릇을 연상시키고 있음에 주의하라. 주희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는 본질이자 당위(곧,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가 '진실되다'라고 말할 때는 불교에서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그러한 본질이자 당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ref> 이 하나의 차이로부터 비로소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의 차이가 있게 된다.’ 지금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識心見性]’고 말하지만, 대체 무슨 마음을 알고 무슨 성품을 본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o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   知止而後有定以下一段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 이하 단락 *  17:34 問: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머무를 곳을 알 수 있으면[能知所止] 곧 마음[方寸] 속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 모두 확정불변한 이치[定理]가 있게 된다.’에 관한 질문.<ref>대학혹문. 14:126과 163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고한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져서 각각의 경우에 객관적인 도덕률이 확고하게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知止도 인지, 有定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ref> 曰: “定·靜·安三項若相似, 說出來煞不同. 有定, 是就事理上說, 言知得到時, 見事物上各各有箇合當底道理. 靜, 只就心上說.” '''대답: 정(定)·정(靜)·안(安)<ref>대학 본문에서 제시한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득(得) 다섯 단계 가운데 세 꼭지를 말한 것이다. 14:157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마치 추운 자가 옷을 갈망하고 굶주린 자가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너무 확정적이라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ref> 세 항목은 비슷한 듯하지만 설명하면 자못 다르다. 확정됨(定)이 있다는 것은 사리(事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앎이 지극해졌을 때 사물마다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도리가 있음을 (확실하게) 본다는 말이다. 고요함(靜)은 (같은 내용을)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뿐이다.<ref>14:129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 問: “‘無所擇於地而安’, 莫是‘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否?” '''질문: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히 안정된다’<ref>대학혹문</ref>는 것은 아마도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한대로 행하고,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한대로 행한다’<ref>중용 제 14장. '소(素)'는 '현재(見在)'의 뜻이다.</ref>는 것 아닙니까?” 曰: “這段須看意思接續處. 如‘能得’上面帶箇‘慮’字, ‘能慮’上面帶箇‘安’字, ‘能安’上面帶箇‘靜’字, ‘能靜’上面帶箇‘定’字, ‘有定’上面帶箇‘知止’字, 意思都接續. 旣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靜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邊也安, 在富貴也安, 在貧賤也安, 在患難也安.<ref>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한 번 생각해 보라(看如何? 公且看,)'가 더 있다.</ref> 不見事理底人, 有一件事, 如此區處不得, 恁地區處又不得, 這如何會有定! 才不定, 則心下便營營皇皇, 心下才恁地, 又安頓在那裏得! 看在何處, 只是不安.” 賀孫(62이후). '''대답: 이 단락은 모름지기 의미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능득(能得)’ 위에는 ‘려(慮)’ 자가 있고, ‘능려(能慮)’ 위에는 ‘안(安)’ 자가 있으며, ‘능안(能安)’ 위에는 ‘정(靜)’ 자가 있고, ‘능정(能靜)’ 위에는 ‘정(定)’ 자가 있으며, ‘유정(有定)’ 위에는 ‘지지(知止)’ 자가 있으니, 뜻이 모두 이어진다. 이미 사물에 확고불변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보고서 이 마음이 이렇게 고요해졌다면[寧靜], 어떤[看]<ref>의문구 앞에 나오는 '간(看)'은 '그 어떤... 막론하고(不管, 儘管)'으로 풀이한다. 14:143, 157을 참조하라.</ref> 상황에 처했느냐를 막론하고, 여기에 있어도 편안하고[安], 저기에 있어도 편안하며, 부귀(富貴)에 있어도 편안하고, 빈천(貧賤)에 있어도 편안하며, 환난(患難)에 있어도 편안하다.<ref>부귀, 빈천, 환난은 질문자가 인용한 중용 제 14장에서 들고 있는 예시들이다.</ref> 사리(事理)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안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고 저렇게 처리해도 잘 되지 않으니, 이런 경우 어떻게 확고함(定)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확고(定)하지 못하면 마음속이 곧바로 안절부절 불안하니[營營皇皇], 마음속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면 또 어디에 (자신을) 편안히 둘[安頓] 수 있겠는가! 어디에[看] 있든 그저 불안할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5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硏幾.” '''‘사려할 수 있으면[能慮] 사안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여 깊음을 지극히하고 기미를 갈고닦는다[隨事觀理, 極深硏幾].’<ref>대학혹문. '극심'과 '연기'는 본래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14:146을 참조하라.</ref>에 관한 질문. 曰: “到這處又更須審一審. ‘慮’字看來更重似‘思’字. 聖人下得言語恁地鎭重, 恁地重三疊四, 不若今人只說一下便了, 此聖人所以爲聖人.” 賀孫(62이후). '''대답: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 번 신중히 살펴보아야[審]<ref>'심(審)'은 극심연기의 '연(硏)'을 풀이한 말이다.</ref> 한다. ‘려(慮)’ 자는 내 생각에 ‘사(思)’ 자보다[似]<ref>여기서 '사(似)'는 '어(於)'와 같다.</ref> 더 무겁다. 성인이 표현을 고른 것이 이렇게 진중(鎭重)하고 이렇게 거듭 반복되니[重三疊四], 요즘 사람들이 그저 한 번 말하고 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래서 성인은 성인인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36 安卿問: “知止是始, 能得是終. 或問言: ‘非有等級之相懸.’ 何也?” '''안경(安卿)의 질문: 지지(知止)는 시작이고 능득(能得)은 끝입니다.<ref>이에 대한 설명은 17:34의 주석을 참조하라.</ref> 《대학혹문》에서는 (양자간에) ‘등급(等級)이 서로 현격히 벌어져 있지 않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이 말을 풀어써두어서 표현이 조금 다르다. '공자의 지우학(志于學)부터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 맹자의 선인(善人), 신인(信人)으로부터 성인(聖人), 신인(神人)까지가 실로 등급이 현격히 벌어져 있어서 평생토록 거쳐가는 순서인 것과는 같지 않다.(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ref>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也不是無等級,<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여섯 글자가 없다.</ref> 中間許多只是小階級, 無那大階級.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便是大階級, 步卻闊. 知止至能得, 只如志學至立相似, 立至不惑相似. 定·靜·安, 皆相類, 只是中間細分別恁地.” '''대답: 역시 등급(等級)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의 많은 것들은 단지 작은 계단[階級]들일 뿐 그렇게 큰 계단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ref>논어 2:4에서 공자가 자신이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ref>부터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ref>공자가 7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 경지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많은 것들은 곧 큰 계단이니 보폭이 오히려 넓다.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배움에 뜻을 두는 것[志學]부터 스스로 섰다[立]<ref>공자가 30세에 달성한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고, 스스로 섰다[立]부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不惑]<ref>40세의 경지이다.</ref>까지와 비슷하다. 정(定)·정(靜)·안(安)은 모두 비슷한 부류요, 단지 중간에 저처럼 세밀하게 구별했을 뿐이다. 問: “到能得處是學之大成, 抑後面更有工夫?” '''질문: 능득(能得)의 경지에 이르면 배움에 대성한[學之大成] 것입니까, 아니면 뒤에 공부가 더 있습니까? 曰: “在己已盡了,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亦只是自此推去.” 㝢(61이후). '''대답: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는[在己] 이미 다 했고,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하지만, (후자는) 역시 그저 여기서<ref>자기 자신의 차원이다.</ref> 미루어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ref>이 부분은 14:152와 흡사하다.</ref>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   古之欲明明德於天下一段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단락 *  17:37 問: “或問‘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 是能得已包齊家治國說了. 前晩何故又云‘能得後, 更要去齊家, 治國, 平天下'?” '''질문: 《대학혹문》에서 ‘성의(誠意)에서 평천하(平天下)까지는 저 지선(至善)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ref>대학혹문.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이란 명명덕의 일이요 제가, 치국, 평천하란 신민의 일이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요, 성의부터 평천하까지는 저 지선의 자리를 얻어 거기에 머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ref>라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이 이미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까지 포함하여 설명한 것입니다.<ref>전통시대 유학이 커버하는 영역을 크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을 때, 인용된 대학혹문의 문구대로라면 두 영역이 수기로 일원화된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f>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어찌하여 또 ‘능득(能得)한 뒤에 다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ref>치인의 영역이 수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제 저녁의 대화란 17:36을 말한다. 17:34 또한 참조하라.</ref> 曰: “以修身言之, 都已盡了. 但以明明德言之, 在己無所不盡, 萬物之理亦無所不盡. 如'至誠惟能盡性', 只盡性時萬物之理都無不盡了. 故盡其性, 便盡人之性; 盡人之性, 便盡物之性.” 㝢<ref>조선고사본에서는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㝢同)'이다.</ref>(61이후). '''대답: 수신(修身)으로 말하자면 이미 다 된 것이다.<ref>대학의 '능득'이란 문구는 수기와 치인 가운데 수기의 측면에 해당한다는 말이다.</ref> 단,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차원에서도 남김 없이 다 하고 만물의 이치 또한 남김 없이 다 하는 것이다.<ref>명덕을 밝히는 일을 수기에 국한시켜 보지 말고, 수기와 치인을 포함하는 상위의 범주로 보라는 말이다.</ref> 예컨대 '오직 지극한 진정성(誠)이라야 (자신의) 본성(性)을 온전히 다할 수 있고'<ref>중용 제 22장의 한 구문을 축약한 것이다.</ref>, 오직 (자신의) 본성(性)을 다할 때라야 만물의 이치도 남김 없이 다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性)을 다하면 곧 남의 본성(性)을 다하게 되고, 남의 본성(性)을 다하면 곧 사물의 본성(性)을 다하게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7:38 蜚卿言: “或問云: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伯羽謂' 세 자가 더 있다. '비경(蜚卿)'이 동백우(童伯羽)의 자(字)이므로 한 사람이 연이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ref> 明德之功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內, 或未盡化, 況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德乎?” '''비경(蜚卿)이 말함: 《대학혹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의지를 참되게 하고[誠其意],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正其心], 각자 자신의 몸을 갈고닦고[修其身], 각자 자신의 어버이를 친애하며[親其親], 각자 자신의 어른을 공경하여[長其長], 천하가 평정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명덕(明德)의 공효(功)가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규문(閨門) 안에서 혹 다 교화시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거늘, 하물며 커다란 천하 전체가 요순(堯舜)의 교화에 순복하여 각자 자신의 덕(德)을 밝힐 수 있으리라 말하시는 것입니까? 曰: “大學‘明明德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是有如此規模, 卻是自家本來合如此, 不如此便是欠了他底.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己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槪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說‘比屋可封’, 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不如此不得. 到得做不去處, 卻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卻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內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爲聖賢之學.” 道夫(60이후). '''대답: 《대학》의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는 것은 일단은 그 규모(規模)<ref>대강의 윤곽선, 원대한 스케일 같은 의미이다.</ref>가 이러하다고 설명한 것뿐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은 본래부터 응당 이와 같아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곧 (본래의) 자기 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윤(伊尹)은 평범한 백성 한 사람이라도 (요순과 같은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어서 도랑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했다.<ref>맹자 5A:7.</ref> (그러나) 이윤(伊尹)도 역시 그저 대체로 이렇게 하고자 했다는 것 뿐이니, 또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예컨대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만하다[比屋可封]’<ref>한서 왕망전(王莽傳). '명성한 세상에는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많으므로, 요순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작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明聖之世,國多賢人,故唐虞之時,可比屋而封.)'</ref>는 것 역시 한두 집 정도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의 규모(規模)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며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 뿐이다. (세웠던 스케일에 걸맞게) 해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f>'做不去'는 '할 수 없다', '做得去'는 '할 수 있다'이다.</ref> 규모(規模)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반면<ref>'著'은 '須著'과 같다. '반드시'.</ref> 공부(工夫)는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가야 한다. 규모(規模)와 단계별 순서[次第]도 없이 그저 지엽적인 것들[細碎處]에만 힘을 쓰면 곧바로 (오늘날) 세간의 공리(功利)를 따지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규모(規模)는 있지만 세밀한 공부(工夫)가 없다면 또 한갓 빈 규모(空規模)이고 말 뿐이다. 밖으로는 규모(規模)의 크기를 지극히하고 안으로는 미루어 (구체적인) 사사물물(事事物物)의 부분에 이르게 하여 그 어느 방면으로도 공부(工夫)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聖賢)의 배움이 성현의 배움이 되는 까닭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39 問或問“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 '''《대학혹문》의 '마음의 신명[心之神明]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ref>대학혹문. '저 지(知) 같은 경우는 마음의 신명이니,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若夫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신명의 신(神)은 우리 의식의 완성도가 높음을, 명(明)은 의식의 활동성을 가리킨다. 재(宰)는 컨트롤한다는 의미이다. 묘(妙)를 운용하다로 풀이한 것은 17:40을 참조하라.</ref>에 대한 질문. 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대답: 신(神)은 그렇게 정밀하고 아름답다[精彩]는 것이요, 명(明)은 그렇게 밝게 빛난다는[光明] 것이다. 又曰: “心無事時, 都不見; 到得應事接物, 便在這裏; 應事了, 又不見: 恁地神出鬼沒!” '''다시 말함: 마음은 일이 없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도 응사접물(應事接物)하게 되면 곧 이 안에[在這裏]<ref>마치 주인의 부주의로 인해 풀려나 달아나버린 가축처럼,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이 안에 없는' 상태가 바로 '방심(放心)'의 상태이다.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면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여 집중시킬 수 있는데 이렇게 집중된 상태를 어류에서는 자주 '여기 있다(在這裏)'고 표현한다.</ref> 있으며, 일에 대한 응대를 마치고 나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니, 이렇게나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 又曰: “理是定在這裏, 心便是運用這理底, 須是知得到. 知若不到, 欲爲善也未肯便與你爲善; 欲不爲惡, 也未肯便不與你爲惡. 知得到了, 直是如飢渴之於飮食. 而今不讀書時, 也須收斂身心敎在這裏, 乃程夫子所謂敬也. ‘整齊嚴肅’, 雖只是恁地, 須是下工夫, 方見得.”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이치(理)는 이 안에<ref>자신의 내면을 말한다.</ref> 확고하게 있고, 마음[心]은 바로 이 이치(理)를 운용(運用)하는 주체이니, 반드시 앎[知]이 지극해져야 한다. 만약 앎[知]이 지극해지지 못하면 선(善)을 행하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선(善)을 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악(惡)을 행하지 않고자 해도 (마음은) 선뜻 자네와 함께 악(惡)을 행하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앎[知]이 지극해지고나면 바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마시고 먹으려는 것[飢渴之於飮食]과 같이 (선을 행하고 불선을 피하게) 된다. 지금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여[收斂身心] 여기에 있도록[在這裏]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부자(程夫子)<ref>정씨 형제를 말한다.</ref>께서 말씀하신 경(敬)이다.<ref>경에 대한 설명은 17:1부터 18까지에 걸쳐 자세히 적혀있으니 참조하라.</ref> ‘정제엄숙(整齊嚴肅)’이 비록 이런 것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실제로 힘써 해보아야만[工夫]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0 德元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或問"知妙衆理而宰萬物者也",)'라고 적혀있다.</ref>: “何謂‘妙衆理’?” '''덕원(德元)의 질문: (대학혹문의)‘묘중리(妙衆理)’는 무슨 말입니까?<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大凡道理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或錄此下云: “便只是理. 才知得,”><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便只是知得我底道理, 非是以我之知去知彼道理也. 道理固本有, 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或錄云: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夏熱冬寒,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所以謂之‘妙衆理’, 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或錄云: “蓋知得此理也.”>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주석이 없다.</ref> '''대답: 무릇 도리(道理)는 모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앎[知]이란 것은 <혹자의 기록에서는 이 다음에 이렇게 말함: “그저 이치(理)일 뿐이다. 알게 되면”> 곧 나에게 있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지, 나의 앎[知]을 가지고 저쪽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ref>주희는 '지(知)'를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하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첫 번째 '앎'과 두 번째 '알게 되는'과 네 번째 '알게 되는'은 어떤 것을 알게 되는 행위(to know)를 뜻하고 세 번째 '나의 앎'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을 뜻한다.</ref> 도리는 물론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앎[知]을 사용해야만 비로소 틔워낼 수 있다.<ref>여기서의 앎은 의식(consciousness)이나 인지(cognition)에 가깝다.</ref> 만약 앎[知]이 없었다면 도리가 무슨 수로 드러나겠는가? <혹자의 기록: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가지고 있던 도리이다. 앎[知]이 없으면 도(道)를 놓아둘 곳이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그런 다음에야 도리가 정박할 곳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임금은 인(仁)하고 신하는 공경(敬)하는 것을, 앎[知]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한다[妙衆理]’고 했으니, 여러 이치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운용(運用)’이라는 글자는 병폐가 있으므로 그저 ‘묘(妙)’ 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혹자의 기록: “대개 이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又問: “知與思, 於身最切緊.” '''재질문: 앎[知]과 생각[思]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긴요합니다. 曰: “然. 二者只是一事. 知如手, 思是使那手去做事, 思所以用夫知也.” 僩(69이후). <ref>조선고사본에는 이 뒤에 총 196자의 긴 주석이 달려있는데, 본 조목과 비교하면 첫 질문은 약간 다르고 주희의 대답 부분은 동일하며, 재질문과 재대답이 없는 형태이다. 첫 질문만 번역하고 주희의 대답부분 번역은 생략한다. '혹자의 기록. 곽형의 질문: "대학혹문에서 '(앎은) 묘중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묘중리'는 무슨 말입니까? 혹시 여러 이치의 오묘한 신비를 탐색하여 주재자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或錄云:郭兄問: "或問'妙衆理而宰萬物者也', 何以謂之妙衆理? 豈非以知能探賾衆理之妙, 而爲之主宰乎?", 曰: "大凡道理, 皆是我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知者, 便只是理. 才知得, 便是自知得我之道理, 非是我以知去知那道理也. 道理固本有, 須用知, 方發得出來. 若無知, 道理何從而見?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之道理也. 只是無知, 則道無安頓處. 故須知, 然後道理有所湊泊也. 如冬寒夏熱, 君仁臣敬, 非知, 如何知得? 所以謂之妙萬理, 如云能運用萬理. 只是運用字又有病, 故只下得个妙字, 蓋知得此理也.")</ref> '''대답: 그렇다. 그 둘은 하나일 뿐이다. 앎[知]은 손과 같고, 생각[思]은 저 손을 부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니, 생각[思]이란 저 앎[知]을 사용하는 것이다.<ref>여기서의 '앎'은 알 수 있는 능력(intelligence) 혹은 의식(consciousness)에 가깝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1 問: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다음에 '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이 있다. 해당 부분은 대학혹문의 직접인용이다. 17:39를 보라.</ref>“知如何宰物?” '''질문: 앎[知]이 어떻게 만물을 주재(宰)합니까?<ref>17:39와 40을 참조하라.</ref>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是知覺.” 道夫(60이후). '''대답: 지각(知覺)<ref>지각(知覺)은 사태의 패턴을 알아차리고 시비를 구분하는 등 인지적 활동 전반을 말한다. 주희는 심지어 이나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까지도 지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ref>이 없으면 만물을 재제(宰制)<ref>힘을 행사하여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표현으로 '컨트롤하다' 정도의 뜻이다.</ref>할 수 없다. 만물을 재제(宰制)하려면 역시 지각(知覺)해야 한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2 或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주석으로 '知者妙衆理而宰萬物'가 더 적혀있다.</ref>: “‘宰萬物’, 是‘主宰’之‘宰’, ‘宰制’之‘宰’?”<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부분 전체가 주석처리되어있고, 이어서 역시 주석으로 '答'자가 적혀있다.</ref> '''누군가의 질문: ‘재만물(宰萬物)’은 ‘주재(主宰)’의 ‘재(宰)’입니까, ‘재제(宰制)’의 ‘재(宰)’입니까?”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대답: 주(主)가 바로 재(宰)이고, 재(宰)가 바로 제(制)이다.<ref>주(主)는 무언가를 소유한 주인, 재(宰)는 일을 통괄하는 매니져, 제(制)는 컨트롤의 뜻이다. 결국 세 글자 모두 같은 실상을 지시하는 말이다.</ref> 又問: “孟子集注言: ‘心者, 具衆理而應萬事.’ 此言‘妙衆理而宰萬物’, 如何?” '''재질문: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는 ‘마음이란 여러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ref>대학혹문을 말한다.</ref>서는 ‘여러 이치를 절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妙’字便稍精彩, 但只是不甚穩當, ‘具’字便平穩.” 履孫(65때). '''대답: ‘묘(妙)’ 자는 조금 정채(精彩)롭긴 하지만 그다지 온당(穩當)하진 못하고, ‘구(具)’ 자는 평온(平穩)하다.<ref>'묘'는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해낸다는 인상이 있다. 그와 비교하면 '구'는 훨씬 수수하고 무엇보다도 정적이다.</ref>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때) *  17:43 郭兄問“莫不有以知夫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68자가 더 있다. '當然之則, 如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 臣何故用敬, 父何故用慈, 子何故用孝. 畢竟未曉, 敢以君何故用仁問先生, 伏望敎誨, 俾知所以然之故' 번역은 번역문의 주석쪽을 참조하라.</ref>” '''곽형(郭兄)이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과 그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其所當然之則]을 알지 못함이 없다”<ref>이치(理)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는 어떤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한다. 예컨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은 우리가 이런저런 상황에 처하였을 때 준수해야 마땅한 법칙을 말한다. 예컨대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법칙이다. 현행본 대학혹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천하의 사물에는 반드시 각자 그렇게 되는 까닭과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이다.(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또, 혹문의 전 5장 부분에서도 '다른 수 없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점과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고 적고 있다.</ref>에 대해 질문함.<ref>조선고사본에 적힌 68자를 이어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란 임금의 인(仁),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비의 자(慈) 같은 것들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이란 임금은 어째서 인(仁)해야 하는지, 신하는 어째서 경(敬)해야 하는지,아비는 어째서 자(慈)해야 하는지, 아들은 어째서 효(孝)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끝내 깨치지 못하겠으니, 감히 '임금은 어째서 인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선생님께 묻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게 해주십시오.</ref> 曰: “所以然之故, 卽是更上面一層. 如君之所以仁, 蓋君是箇主腦, 人民土地皆屬它管, 它自是用仁愛. 試不仁愛看, 便行不得.<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자연히 이렇게 하게 된다(自然用如此).'</ref> 非是說<ref>조선고사본에서는 '是說'이 '說是'로 적혀있다.</ref>爲君了, 不得已用<ref>조선고사본에서는 '以'</ref>仁愛<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行之'</ref>, 自是理合如此. 試以一家論之: 爲家長者便用愛一家之人, 惜一家之物, 自是理合如此, 若天使之然. 每常思量著, 極好笑, 自那原頭來便如此了.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蓋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 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它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爲哉! 且以仁言之: 只天地生這物時便有箇仁, 它只知生而已. 從他原頭下來, 自然有箇春夏秋冬,<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四象'.</ref> 金木水火土. <初有陰陽, 有陰陽, 便有此四者.>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주석이 없다.</ref>故賦於人物, 便有仁義禮智之性.<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自它原頭處便如此了'</ref> 仁<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則'</ref>屬春, 屬木. 且看春間天地<ref>조선고사본에서는 '天地'가 없다.</ref>發生, 藹然和氣, 如草木萌芽, 初間僅一針許, 少間漸漸生長<ref>조선고사본에서는 '長'을 '發'로 적었다.</ref>, 以至枝葉花實, 變化萬狀, 便可見他生生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生之'가 없다.</ref>意. 非仁愛, 何以如此. 緣他本原處有箇仁愛溫和之理如此, 所以發之於用, 自然慈祥惻隱. 孟子說‘惻隱之端’, 惻隱又與慈仁不同, 惻隱是傷痛之切. 蓋仁, 本只有慈愛, 緣見孺子入井, 所以傷痛之切<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也'</ref>. 義屬金, 是天地自然有箇淸峻剛烈之氣. 所以人稟得, 自然有裁制, 便自然有羞惡之心. 禮智皆然. 蓋自本原而已然, 非旋安排敎如此也. 昔龜山問一學者: ‘當見孺子入井時, 其心怵惕·惻隱, 何故如此?’ 學者曰: ‘自然如此.’ 龜山曰: ‘豈可只說自然如此了便休? 須是知其所自來, 則仁不遠矣.’ 龜山此語極好. 又<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引'</ref>或人問龜山曰: ‘“以先知覺後知”, 知·覺如何分?’ 龜山曰: ‘知是知此事, 覺是覺此理.’ 且如知得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是知此事也; 又知得君之所以仁, 臣之所以敬, 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是覺此理也.” 僩(69이후). '''대답: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란 다시 한 단계 더 위의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은 임금은 두뇌[主腦]여서 인민과 토지가 모두 그의 관할이니 그는 자연히 인애(仁愛)하게 된다. 어디 한번 (임금이) 인애(仁愛)하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즉시 말이 안 된다[行不得].<ref>'행부득(行不得)'은 근본적인 모순이 있어 성립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임금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인데 사람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ref> 임금이 되고 나서 부득이하게 인애(仁愛)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치상 당연히 이렇다는 말이다. 어디 한번 한 집안으로 논해보자. 가장(家長)이 된 자는 곧 온 집안 사람을 사랑하고 온 집안 물건을 아끼게 되니, 이치상 당연히 그렇게 되어 마치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우스우니, 저 근원[原頭]에서부터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또, 아버지가 자애롭게 되는 까닭과 아들이 효도하게 되는 까닭의 경우는, 대개 부자(父子)란 본래 같은 하나의 기(氣)인데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 뿐이므로,<ref>기는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자식의 신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기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양측은 동질의 물질을 두 장소에 나누어둔 것 뿐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물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은 것과 같다.</ref>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지는[恩愛相屬]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중대한 인간관계의 범주[大倫]<ref>예컨대 오륜(五倫) 같은 것이다.</ref>들이 모두 그러하니, 모두 천리(天理)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어찌 억지로 노력하는 요소가 끼어들 틈이 있겠나? 또, 인(仁)으로 말해보자면, 천지(天地)가 이 사물들을 낳으면서 인(仁)이 있게 되니, 그것은<ref>천지를 말한다.</ref> 단지 낳을[生] 줄만 알 뿐이다. 그 근원[原頭]으로부터 흘러나와 자연히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있게 된다. <먼저 음양(陰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있고 나서 이 네 가지가 있게 된다.><ref>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이 '네 가지'는 춘하추동이다. 다만 조선고사본쪽을 따르자면 이 네 가지는 사상(四象)이다. 사상은 음양이 한 차례 더 분화한 형태, 곧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말한다.</ref> 그러므로 (그것들이) 사람과 사물(人物)에게 부여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性)이 있게 된다. 인(仁)은 봄에 속하고 목(木)에 속한다.<ref>17:19, 6:45를 참조하라.</ref> 또, 봄철에 천지가 만물을 발생시키고 온화한 기운이 가득한 것[藹然和氣]을 보라. 예컨대 초목의 싹[萌芽]이 처음에는 겨우 바늘 하나 크기였다가 이윽고 점점 생장하여 가지, 잎, 꽃, 열매에 이르도록 변화만상(變化萬狀)하니, 이에 그것의<ref>천지.</ref> 낳고 낳는[生生] 의지를 볼 수 있다. (천지의) 인애(仁愛)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것의 본원(本原)에 인애온화(仁愛溫和)의 이치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어 작용할 적에 자연히 자애롭고 측은하다[慈祥惻隱]. 맹자(孟子)가 ‘측은(惻隱)의 단서[端]’<ref>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말한다.</ref>를 말하였는데, 측은(惻隱)은 또 자인(慈仁)과 다르니, 측은(惻隱)은 상심하고 애통함[傷痛]이 간절한 것이다. 대개 인(仁)은 본래 자애(慈愛)만 있을 뿐이지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상심하고 애통함이 간절한 것이다. 의(義)는 금(金)에 속하니, 천지에는 자연히 맑고 준엄하며 굳세고 맹렬한 기운[淸峻剛烈之氣]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부여받으면 자연히 재제(裁制)<ref>선을 긋고 잘라내고 절제하고 통제하는 행위.</ref>함이 있게 되고, 자연히 수오지심(羞惡之心)<ref>불명예를 수치스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다.</ref>이 있게 된다. 예(禮)와 지(智)의 경우도 모두 그러하다. 대개 본원(本原)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지, 임의로[旋]<ref>'旋'은 멋대로, 임의로(隨意).</ref> (의도를 가지고) 안배하여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옛날 구산(龜山)<ref>이정의 제자 양시.</ref>이 어떤 배우는 이에게 묻기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이 깜짝 놀라고 측은한데[怵惕惻隱], 어째서 이러한가?’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자연히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구산(龜山)이 말하기를 ‘어찌 그냥 자연히 그렇다고만 말하고 말 수 있는가? 반드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所自來]를 알아야 하니, (그렇게 하면) 인(仁)에서 멀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ref>구산집(龜山集) 권 11, 어록 2. '(선생이) 말함: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에게 반드시 측은지심이 드는데, 자기의 고통이 아닌데도 빠진자를 위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조의 대답: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이) 말함: 어찌 자연스럽게 그러하겠나? 이 이치를 몸소 탐구하여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 인의 도리가 멀지 않게 될 것이다." (曰: "孺子將入於井, 而人見之者, 必有惻隠之心, 疾痛非在己也, 而爲之疾痛, 何也?" 似祖曰: "出於自然, 不可已也." 曰: "安得自然如此? 若體究此理, 知其所從來, 則仁之道不遠矣.")' 주희의 인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ref> 구산의 이 말이 대단히 좋다. 또 어떤 사람이 구산에게 묻기를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친다”에서 앎(知)과 깨우침(覺)은 무슨 차이입니까?’라고 하니, 구산이 말하기를 ‘지(知)는 이 일[事]을 안다는 것이고, 각(覺)은 이 이치[理]를 깨닫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ref>양시가 아니라 이정의 말이다. 이정수언(二程粹言) 권 1에 보인다. 해당 텍스트는 양시가 이정의 어록을 문어체로 바꾼 작품이다. 이때문에 양시의 말인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누군가의 질문: "석씨는 '말 한마디에 깨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선생: "왜 꼭 부처인가? 맹자도 그렇게 말했다. 먼저 안 자가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치고, 먼저 깨친 자가 뒤에 깨친 자를 깨우친다. 앎은 이 일을 안다는 것이고 깨달음은 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或問:釋氏有言下覺,如何? 子曰:何必浮屠氏? 孟子言之矣. 以先知覺後知,以先覺覺後覺. 知者,知此事也. 覺者,覺此理也.)'</ref> 예컨대 임금의 인(仁)과 신하의 경(敬), 아들의 효(孝), 아버지의 자(慈)를 아는 것은 이 일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인(仁)하게 되는 까닭, 신하가 경(敬)하게 되는 까닭, 아버지가 자(慈)하게 되는 까닭, 아들이 효(孝)하게 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7:44 或問“格物”章本有“所以然之故”. '''대학혹문의 ‘격물(格物)’ 장(章)에 원래는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之故]'이라는 표현이 있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기로, 천도가 작동하여 (만물을) 만들어내고 길러냄에, 소리와 색과 모양을 가지고서 천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물(物)이다. 물이 있고 나면, 이 물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까닭에는 각각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어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받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曰: "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ref> 曰: “後來看得, 且要見得‘所當然’是要切處. 若果見得不容已處, 則自可黙會矣.” '''(이에 대한 선생의) 대답: 나중에 보니, 우선은 ‘그렇게 해야 마땅한 바[所當然]’를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고 절실[要切]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정말로 그만둘 수 없다는[不容已] 측면<ref>'소당연'을 말한다.</ref>을 보게 된다면 저절로 묵묵히 이해할[默會]<ref>묵묵히 이해함은 소리로 발성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개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의 차원에서 절감하여 세상과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함을 말한다.</ref> 수 있게 될 것이다. ===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 단락 === *   治國平天下者諸侯之事一段 '치국과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다'<ref>치국은 제후의 일이고 평천하는 천자의 일이다. 대학혹문 원문에서는 '천자와 제후의 일(天子諸侯之事)'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천자 부분이 생략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ref> 단락 *  17:45 問: “南軒謂: ‘爲己者, 無所爲而然也.’” '''질문: 남헌(南軒)<ref>장식(張栻)</ref>이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ref>논어 14:25.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인의 인정과 주목을 목표로 배움에 종사한다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전자가 위기지학, 후자가 위인지학이다.</ref>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也].’<ref> 남헌집 권14. 맹자강의서(孟子講義序). '배우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에 깊이 마음을 두어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려 한다면, 내 생각에 의(義)와 이(利)의 분별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 위하는 바 없이 그러함이 (바로 중용에서 말한) 천명(命)이 그치지 않는 이유이고, 본성(性)이 치우치지 않는 이유이며, 가르침(敎)이 무궁한 이유이다. 무릇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리 되는 것들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요 천리(天理)가 간직된 바가 아니니, 이것이 바로 의와 이의 구분이다.(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爲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爲而然也. 無所爲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敎之所以無窮也. 凡有所爲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 해당 부분은 주희가 대학혹문에서 직접인용하고 있다.</ref>라고 했습니다. 曰: “只是見得天下事皆我所合當爲而爲之, 非有所因而爲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之'를 '也'로 적었다.</ref>. 然所謂天下之事皆我之所當爲者, 只恁地强信不得. 須是學到那田地, 經歷磨鍊多後, 方信得過.” 道夫(60이후). '''대답: 단지 천하의 일이 모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보았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ref>통상적인 논어 해석에서 벗어나서 '자기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을 위인지학으로,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을 위기지학이라고 본 것이다. 대학혹문 경 1장의 14절에서는 치국과 평천하는 모두 천자나 제후쯤 되는 사람들의 일인데 평범한 사대부가 대학을 읽으며 치국 평천하를 꿈꾸는 것은 직분을 벗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위인지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군자란 자신이 모시는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어 백성들에게 요순의 은택을 입히려고 하므로 치국 평천하가 모두 군자의 '직분'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이가 대학의 치국 평천하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직분 내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므로 '위기지학'이 된다. 관련하여 어류 15:156을 보라.</ref> 그러나 이른바 천하의 일이 모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는 것은, 그저 그렇게 억지로 믿는[强信] 것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배워서 저 경지[田地]에 도달하여 많은 경험과 단련[經歷磨鍊]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확실히 믿어지게 된다[信得過].<ref>'得過'의 '득'은 가능성을, '과'는 방향을 나타내는 보어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46 問爲己. '''위기(爲己)에 대해 묻다.<ref>직전 조목을 참조하라.</ref> 曰: “這須要自看, 逐日之間, 小事大事, 只是道我合當做, 便如此做, 這便是無所爲. 且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才說要人知, 便是有所爲. 如世上人才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爲人之甚者.” 賀孫(62이후). '''대답: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보아야 하니, 매일매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저 '나는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다. 예컨대 글을 읽을 때, 그저 '나는 이렇게 (이걸)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자신을 신경써야[理會] 한다'<ref>'리회(理會)'는 종종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살피고 헤아리는 행위를 말한다. 8:91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하고 있으니 참조하라.</ref>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이 된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이 글을 읽자마자 (자기가) 읽은 것을 활용하여[安排] 완전히[好]<ref>'好'는 이어지는 동작의 완성도가 높음을 나타낸다.</ref> 시문(時文)<ref>과거시험답안.</ref>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남을 위함[爲人]이 심한 경우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7 “‘爲己者, 無所爲而然.’ 無所爲, 只是見得自家合當做, 不是要人道好. 如甲兵·錢穀·籩豆·有司, 到當自家理會便理會, 不是爲別人了理會. 如割股·廬墓, 一則是不忍其親之病, 一則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爲己.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爲人.” '''‘자신을 위하는 자[爲己者]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無所爲而然].’<ref>장식의 말. 17:45를 보라.</ref> 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을) 마땅히 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이지, 남들이 '좋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갑병(甲兵)<ref>군무를 말한다.</ref>·전곡(錢穀)<ref>재무를 말한다.</ref>·변두(籩豆)<ref>제사와 의전을 말한다.</ref>·유사(有司)<ref>그밖의 모든 실무를 말한다.</ref>와 같이, 자기 자신이 마땅히 처리[理會]<ref>'리회(理會)'의 번역에 관해서는 직전 조목의 주석을 참조하라.</ref>해야 할 때가 되면 곧 처리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할고(割股)<ref>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내 병든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효행의 케이스로 종종 거론된다.</ref>나 여묘(廬墓)<ref>부모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사는 행위. 역시 효행의 일종으로 거론된다.</ref> 같은 것은, 하나는 그 어버이의 병듬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행위이다. 만약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곧 남을 위하는[爲人] 행위이다.<ref> 이 부분은 대학혹문의 특정 구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대저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천하의 사무를 보기를 (모두) 마땅히 해야 하는 자신의 사무로 여기고 수행한다면 갑병, 전곡, 변두, 유사의 업무조차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爲己]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겠구나 하여 수행한다면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내고 여묘살이하고 망가진 수레와 파리한 말을 타는 것도 모두 남을 위하는[爲人] 것일 뿐이다.(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馬, 亦爲人耳.)'</ref> 器遠問: “子房以家世相韓故, 從少年結士, 欲爲韓報仇, 這是有所爲否?” '''기원(器遠)<ref>주희의 제자 조숙원(曹叔遠)</ref>의 질문: 자방(子房)<ref>한(漢)의 개국공신 장량(張良, BC 250-BC 186).</ref>이 집안 대대로 한(韓)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선비를 모아 한(韓)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 아닙니까? 曰: “他當初只一心欲爲國報仇. 只見這是箇臣子合當做底事, 不是爲別人, 不是要人知.” 賀孫(62이후). '''대답: 그는 애당초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저 이것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보았을 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7:48 行夫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남헌이 말하기를(南軒云)'이 더 있다.</ref>“爲己者無所爲而然”. <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다. 이는 모든 일이 다 자신이 응당 해야 할 바라고 보아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도 칭찬을 바라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목적)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也. 這是見得凡事皆吾所當爲, 非求人知, 不求人譽, 無倚無靠之謂否?)'가 더 있다.</ref> '''행부(行夫)<ref>'행보'라고 읽어야 할지 '행부'라고 읽어야 할지 확실치 않다.</ref>가 “자신을 위하는 자는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다[爲己者無所爲而然]”에 대해 질문함.<ref>이 부분에 대해서는 17:45와 46, 47을 참조하라.</ref> 曰: “有所爲者, 是爲人也. 這須是見得天下之事實是己所當爲, 非吾性分之外所能有, 然後爲之, 而無爲人之弊耳. 且如‘哭死而哀, 非爲生者’. 今人弔人之喪, 若以爲亡者平日與吾善厚, 眞箇可悼, 哭之發於中心, 此固出於自然者. 又有一般人欲亡者家人知我如此而哭者, 便不是, 這便是爲人. 又如人做一件善事, 是自家自肯去做, 非待人敎自家做, 方勉强做, 此便不是爲人也.” '''대답: 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有所爲者] 남을 위한다는 것[爲人]이다. 이에 관해서는 반드시 천하의 일이 기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자기 본연의 직분[性分]의 범위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 (그렇게 알게 된) 뒤에 그것을 실천해야 남을 위하는 폐단[爲人之弊]이 없게 될 뿐이다.<ref>대학혹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활연대공하여, 천하를 봄에 그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고,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라고 여김이 없다. 혹여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여전히 자기 직분의 범위 안에 있다고 여긴다.(是以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去聲內也)'</ref> 예컨대 ‘죽은 이를 위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의 경우,<ref>맹자 7B:33.</ref> 요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喪)에 조문할 때, 만약 망자가 평소 나와 잘 지냈으므로 참으로 애석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통곡한다면 이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망자의 가족이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곡하니, 이는 옳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남을 위하는 것[爲人]이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좋은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기꺼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자기더러 하라고 시키면 그제서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남을 위하는 경우[爲人]가 아니다. 道夫曰: “先生所說錢穀·甲兵·割股·廬墓, 已甚分明, 在人所見如何爾.” '''내가(道夫) 말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곡(錢穀)·갑병(甲兵)·할고(割股)·여묘(廬墓)<ref>17:47을 참조하라.</ref>는 매우[已甚] 분명하니, (이러한 행위들이 위기가 되느냐 위인이 되느냐는) 사람들 각자의 소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ref>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라는 뜻이다.</ref> 又問: “割股一事如何?” '''(내가) 다시 질문함: 할고(割股)는 어떻습니까? 曰: “割股固自不是. 若是誠心爲之, 不求人知, 亦庶幾.” '''대답: 할고(割股)는 물론 옳지 않지만, 만약 성심(誠心)으로 한 일이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면 역시 (옳은 쪽으로) 거의 가깝다[庶幾]. “今有以此要譽者.” '''(나의 말): 요즘 이로써 명예를 구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因擧一事爲問. 先生詢究, 駭愕者久之,<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재질문: "요즘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의 (할고 등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자인합니다<그럴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살펴보면) 역시 매우 난처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윽고, ...(再問: 如今都不問如何, 都<不只>自認自家不是, 然其曲折亦甚難處. 久之,)'가 더 있다.</ref> 乃始正色直辭曰: “只是自家過計了. 設使後來如何, 自家也未到得如此. 天下事惟其直而已. 試問鄕鄰, 自家平日是甚麽樣人! 官司推究亦自可見.” '''이어서 한 가지 일을 들어 물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사정을) 자세히 물으시고 한동안 경악하셨다. 이내 안색을 바로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사람) 자신의 계산이 지나쳤던[過計] 것일 뿐이다. 설사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역시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일(에 대처하는 자세로는) 오직 정직함[直] 뿐이다. (그 사람은) 어디 한번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자기 자신이 평소 어떤 사람인지! 관청(官司)에서 조사해도 역시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行夫曰: “亦著下獄使錢, 得箇費力去.” 행부(行夫)의 말: 그래도 (체포될 경우) 옥에 갇혀 돈을 써야 하니[著]<ref>'著'은 종종 '須著'의 준말로 쓰인다. '~해야 한다'의 의미이다. 17:38의 용례를 참조하라.</ref>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曰: “世上那解免得全不霑濕! 如先所說, 是不安於義理之慮. 若安於義理之慮, 但見義理之當爲, 便恁滴水滴凍做去, 都無後來許多事.” 道夫(60이후). '''대답: 세상에 어떻게[那] 조금도 젖지 않고[霑濕]<ref>'점유(沾濡)'라고도 쓴다.</ref> 면할 수[解]<ref>'解'는 영어에서의 can과 같다.</ref> 있겠는가! 앞서 말한 경우 같으면, (그 사람은)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의리(義理)에 대한 생각에서 편안했더라면 그저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서 곧 그렇게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어는 것처럼[滴水滴凍]<ref>'적수성동(滴水成凍)'의 형태로도 사용한다. 확고부동함, 과감함, 엄정함을 의미하며, 확실하게 하나하나 사안을 격파해가는 기상을 형용하기도 한다. 주자어류사휘연구 p.255 참조.</ref> 해나가서 뒷날의 여러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f>본 조목의 후반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일역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송회요집고등을 보면 당시 의도적인 할고를 통해 효자로 인정받아 세금과 요역을 면제받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각급 관청에서는 할고행위가 보고되면 그것이 진정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부당이득을 목적으로 자행한 것인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고, 조사 결과 불순한 할고라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건의 당사자는 병든 부모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할고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관청의 조사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할고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쩌면 할고를 통해 병이 나을 수도 있었을) 부모가 사망한 것이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전 1장 == *  傳一章 전 1장 ===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 然則其曰克明德一段 '그렇다면 (전 1장에서) 극명덕이라고 한 것은...' 단락 *  17:49 問: “‘克明德’, ‘克, 能也’. 或問中卻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질문: ‘극명덕(克明德)’<ref>대학 전 1장.</ref>에 대하여 ‘극(克)은 능(能)이다.’<ref>해당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ref>고 하였는데, 《대학혹문》 에서는 도리어 ‘이겨내려는[克] 노력을 다할 수 있다’<ref>현행본 대학혹문에서는 '能'자가 없고 '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라고 쓰고 있다.</ref>고 풀이하여 다시‘이겨내어 다스리다[克治]’의 ‘극(克)’처럼 보이는데, 어째서입니까?<ref>극(克)은 능(能)이나 승(勝)으로 훈한다. 대학장구에서는 능으로 훈했는데 혹문에서는 승으로 훈했으니 이상하다는 질문이다.</ref> 曰: “此‘克’字雖訓‘能’字, 然‘克’字重於<ref>여유량본 이전의 판본들은 모두 '於'를 '如'로 적고 있다.</ref>‘能’字. ‘能’字無力, ‘克’字有力. 便見得是他人不能, 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德’, 語意便都弱了. 凡字有訓義一般, 而聲響頓異, 便見得有力無力之分, 如‘克’之與‘能’是也. 如云‘克宅厥心’, ‘克明俊德’之類, 可見.” 僩(69이후). '''대답: 이 ‘극(克)’ 자는 비록 ‘능(能)’ 자로 훈(訓)하지만, 그래도 ‘극(克)’ 자가 ‘능(能)’ 자보다 무겁다. ‘능(能)’ 자는 힘이 없고 ‘극(克)’ 자는 힘이 있다. 곧 다른 사람은 능하지 못한데 문왕(文王)만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단지 ‘능명덕(能明德)’이라고만 썼으면 말의 뜻이 모두 약해졌을 것이다. 무릇 글자 중에는 훈(訓)과 뜻[義]은 같지만 음향[聲響]이 완전히[頓] 달라서 힘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극(克)’과 ‘능(能)’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능히 삼택의 마음을 안다[克宅厥心]’<ref>상서 주서 입정(立政)편 제 12장. 본래 '惟克厥宅心'이어야 하는데 본 조목에서는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고 있다. '택(宅)'은 지위이다. 입정편에서 세 가지 큰 지위에 거한 자를 '삼택' 혹은 '삼유택(三有宅)'이라고 부른다. '惟克厥宅心'은 문왕(文王)이 이 삼택의 마음을 능히 잘 알았다는 뜻이다.</ref>, ‘능히 큰 덕을 밝힌다[克明俊德]’<ref>상서 우서 요전 제 2장. 대학 전 1장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등과 같은 것들에서 (이 차이를) 볼 수 있다.<ref>주희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 顧諟天之明命一段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 단락 *  17:50 問<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로 '대학혹문에서 밝은 명령에 대해 설명한 곳에서 말하기를(或問說明命處云)'이 더 있다.</ref>: “‘全體大用, 無時不發見於日用之間’. 如何是體? 如何是用?” <ref>조선고사본에서는 '如何是體? 如何是用?'이 없고 '일상 속의 어디가 전체대용의 지점입니까?(日用間如何是全體大用處)'라고 적혀 있다.</ref> '''질문:‘온전한 본체[全體]와 위대한 작용[大用]이 일상[日用] 속에서 발현되지 않는 때가 없다'<ref>대학혹문.</ref>에서, 체(體)는 무엇이고 용(用)은 무엇입니까?<ref>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어류 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령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5:65도 참조하면 좋다. 대학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전체대용(全體大用)'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명덕(明德)과 그것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양상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ref> 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 <ref>조선고사본에서는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 便是用.'이 없고, 그 대신 '可見.'과 '如喜怒哀樂'의 사이에 '體與用不相離, 如這是體, 起來運行便是用.'이 있다.</ref>‘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ref>조선고사본에서는 '擧此一節'</ref>, 體·用便<ref>조선고사본에서는 '便'을 '亦'으로 적었다.</ref>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하의 주석에서처럼 '희노는 용이요, 희노할 수 있게끔 해주는 원천이 체이다.(如喜怒是用, 所以能喜怒者, 便是體)'라고 적고 있다.</ref>”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61이후).<ref>조선고사본에서는 ' <淳錄云: “所以能喜怒者, 便是體.”> 㝢'을 간단히 '순의 기록. 우의 기록도 같다(淳. 㝢同.)'라고 적고 있다.</ref> '''대답: 체(體)와 용(用)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몸[身]은 체(體)이고 일어나 가려는 것은 용(用)이다. ‘어린아이가 기어서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모두 경악하고 측은한 마음[怵惕惻隱之心]이 있다’는 단지 이 한 가지 단서에서 체(體)와 용(用)을 볼 수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용(用)이고, 희노애락의 원천[所以喜怒哀樂]은 체(體)이다. <진순의 기록: 희노할 수 있게끔 해주는 원천이 체이다.><ref>'소이(所以)'는 가능근거이다. 우리의 몸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걷고 달리는 것이 가능하고 핸드폰이 있어야 앱이 돌아가는 것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솟구침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능근거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ref><ref>본 조목은 서우와 진순이 각각 기록한 것인데 조선고사본에서는 진순의 것을 수록했고 여정덕본에서는 서우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되 진순의 것을 주석으로 삽입한 것처럼 보인다.</ref> *  17:51 問: “或問: ‘常目在之, 眞若見其“參於前, 倚於衡”也, 則“成性存存”, 而道義出矣.’<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다음 구문이 더 있다. '늘 반복하여 생각하지만 그 뜻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중용』(제 16장)에서 말하기를, '마치 그 위에 있는 듯하고,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고 한 것은 귀신(鬼神)의 성정과 공효[德]가 이처럼 성대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귀신이라고 한다면 (우리) 몸 밖에 (실제로) 있는 물건입니다만, 지금 이른바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나의 이 작은 마음 속에 갖추어진 것이니, 애초에 어찌 형체가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마치 정말로 그것이 앞에 참여하고 있고 멍에에 기대고 있음을 보듯이 하라"고 하니,(常反覆思之, 而未會其意. 如中庸言, 如在其上, 如其左右, 是言鬼神之德如此其盛也. 猶曰鬼神者, 身外之物也. 今之所謂德者, 乃天之所以命我, 而具於一心之微, 初豈有形體之可見? 今乃曰眞若見其參於前而倚於衡,)'</ref> 不知<ref>조선고사본에서는 이 뒤에 '其'가 더 있다.</ref>所見者果何物耶?” '''질문: 《대학혹문》에서 ‘"항상 거기에 눈을 두어서[常目在之]"<ref>대학 전 1장에 나오는 '고식(顧諟)'에 대한 주희의 풀이이다. 대학장구에 보인다.</ref> 마치 정말로 “(서 있을 때는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음"<ref>논어 15:5</ref>을 보듯이 한다면 “이루어진 본성(性)을 간직하고 간직하여[成性存存]” 도의(道義)가 (거기서) 나올 것이다.<ref>주역 계사상전 제 7장. '이루어진 본성을 간직하고 간직함이 도의가 나오는 문이다(成性存存, 道義之門)'</ref>’<ref>대학혹문. 어류 16:9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라.</ref>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물건입니까? 曰: “此豈有物可見! 但是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 每與是德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在. 一出言, 則言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一行事, 則事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不過如此耳, 初豈實有一物可以見其形象耶!” 壯祖(미상). '''대답: 이 어찌 볼 수 있는 물건이겠는가? 다만 뭇 사람들이 성찰(省察)할 줄 몰라서 일상생활[常行日用] 속에서 매양 이 (밝은) 덕(德)을 잊고 지내며,<ref>'與'는 뒤따라오는 명사구를 목적어로 확정해준다. '相'은 뒤따라오는 동사의 일방적인 적용을 나타낸다. 뭇 사람들'이' 밝은 덕'을' 잊고 사는 것이지, 밝은 덕과 사람들이 서로를 잊고 산다는 말이 아니다.</ref> 자신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줄도 모르고 있다. 지금 이른바 '자세히 살핀다[顧諟]'는 것은 그저 마음속에서 늘 이 이치(理)를 간직하고 있으라는 것 정도이다.<ref>'在'는 단정적 어감의 어기사로, 문언의 '焉'과 같다.</ref> 일단 말을 냈으면 말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으니 실언해서는 안 되고, 일단 일을 행했으면 일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실수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에 불과할 뿐이니, 애초에 어찌 실제로 무슨 물건이 있어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다는 것이겠는가? 장조(壯祖)의 기록. (미상) *  17:52 問: “引‘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질문: '이루어진 본성(性)을 간직하고 간직하여[成性存存] 도의(道義)가 (거기서) 나올 것이다.'<ref>17:51을 참조하라.</ref>를 인용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曰: “自天之所命, 謂之明命, 我這裏得之於己, 謂之明德,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會忠; 事親必會孝; 見孺子,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 便自然會恭敬; 合辭遜處, 便自然會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會合道理!” 賀孫(62이후). '''대답: 하늘이 명(命)한 바를 '밝은 명령(明命)'이라 하고, 내가 내 속에 얻은 것을 '밝은 덕(明德)'이라 하니, (이 둘은) 하나의 도리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저 이것을[這些] 자기 속에 잘 간직하기만 하면 된다. 자기 속에 간직하기만 하면, 임금을 섬김에 반드시 충(忠)할 수 있을 것이고, 어버이를 섬김에 반드시 효(孝)할 수 있을 것이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를 보면 깜짝 놀라는(怵惕) 마음이 바로 틔워나올 것이고, 담을 뚫고 넘어[穿窬] (도둑질하는) 무리를 보면 수치스럽고 미워하는[羞惡] 마음이 바로 틔워나올 것이며, 응당 공경(恭敬)해야 할 곳에서는 바로 자연스레 공경할 수 있을 것이고, 응당 사양[辭遜]해야 할 곳에서는 바로 자연스레 사양할 수 있을 것이다. 늘 반드시 이 마음을 잘 간직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곧 이 본성(性)이 발현한 것이 모두 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이것을<ref>밝은 명령이자 밝은 덕.</ref> 잘 간직하지도 못하면서 틔워나오길 기대한다면 그 무엇이 도리에 합치할 수 있겠나?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 是三者固皆自明之事一段 '이 세 가지는 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단락 *  17:53 問: “‘顧諟’一句, 或問復以爲見‘天之未始不爲人, 而人之未始不爲天’, 何也?” '''질문: '자세히 살피다[顧諟]’<ref>대학 전 1장. '하늘의 밝은 명령을 자세히 살핀다[顧諟天之明命]' 원출전은 서경 상서 태갑편.</ref> 구절은 《대학혹문》에서 다시 ‘하늘은 일찍이 사람이 아닌 적이 없고 사람은 일찍이 하늘이 아닌 적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曰: “只是言人之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則, 所謂天理也. 人若每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只一理. 若理會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壯祖(미상). '''대답: 사람의 본성(性)은 본래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사람의 일상생활[日用]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當然之則]이 있지 않음을 말한 것 뿐이다. 법칙[則]이란 이른바 천리(天理)이다. 사람이 매사를 옳게 한다면 곧 천리(天理)에 합치된다. 하늘과 사람은 본래 (동일한)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만약 이 뜻을 이해한다면 하늘이 어찌 (사람보다) 클 것이며 사람이 어찌 (하늘보다) 작을 것인가? 장조(壯祖)의 기록. (미상) *  17:54 問“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 ''' '하늘은 일찍이 사람이 아닌 적이 없고 사람은 일찍이 하늘이 아닌 적이 없다[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에 대한 질문. 曰: “天卽人, 人卽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旣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只今說話, 天便在這裏. 顧諟, 是常要看敎光明燦爛, 照在目前.” 僩(69이후). '''대답: 하늘이 사람이고 사람이 하늘이다. 사람의 탄생은 하늘에서 얻었으니, 이 사람을 낳은 이상 하늘은 다시 사람 안에 있게 된다. 말하고 움직이며 보고 듣는 것[語言動作視聽] 모두가 다 하늘이다. 바로 지금 (내가) 말하고 떠드는 것도 하늘이 그 안에 있다. '자세히 살핀다[顧諟]'함은 항상 (명덕의) 찬란한 광명(光明)이 내 눈 앞을 비추도록 보라는 것이다.<ref>유사한 표현이 14:73에 있으니 참조하라.</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전 2장 == *  傳二章 전 2장 ===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 或問盤之有銘一段 '누군가의 질문: 욕조(盤)에 명문(銘)을 새긴 까닭은...' 단락 *  17:55 德元問: “湯之盤銘, 見於何書?” 曰: “只見於大學.” 又曰: “成湯工夫全是在‘敬’字上. 看來, 大段是一箇修飭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亦說得大段地著. 如禹‘克勤于邦, 克儉于家’之類, 卻是大綱說. 到湯, 便說‘檢身若不及’.” 文蔚云: “‘以義制事, 以禮制心’, ‘不邇聲色, 不殖貨利’等語, 可見日新之功.” 曰: “固是. 某於或問中所以特地詳載者, 非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耳.” 文蔚(59이후). *  17:56 問: “丹書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從’字意如何?” 曰: “從, 順也. 敬便豎起, 怠便放倒. 以理從事, 是義; 不以理從事, 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亦猶坤卦說敬·義.” 㝢(61이후). * " 17:55 덕원(德元)이 묻다: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은 어느 책에서 보입니까?" o 답하다: "단지 《대학》에서만 보인다." o 또한 말하다: "성탕(成湯)의 공부는 온전히 '경(敬)' 자 위에 있다. 보아하니 매우 수양하고 삼가는[修飭]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가 공부한 부분을 말할 때 또한 매우 대단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우(禹)임금의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집안 살림에 검소했다[克勤于邦, 克儉于家]' 등과 같은 종류는 도리어 대강(大綱)을 말한 것이다. 탕왕(湯)에 이르러서는 곧 '몸을 살핌이 미치지 못하는 듯이 했다[檢身若不及]'고 말한다." o 문울(文蔚)이 말하다: "'의(義)로써 일을 제어하고 예(禮)로써 마음을 제어하며[以義制事, 以禮制心]',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고 화리(貨利)를 불리지 않았다[不邇聲色, 不殖貨利]' 등의 말을 보면 날로 새로워지는 공효[日新之功]를 알 수 있습니다." o 답하다: "진실로 그렇다. 내가 《혹문(或問)》 중에서 특별히 상세히 실은 까닭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쓰게[經心] 하고자 함일 뿐이다." o 문울(文蔚)의 기록. (59세 이후) " 17:56 묻다: "《단서(丹書)》에 이르기를 '경(敬)이 태만(怠)함을 이기면 길(吉)하고, 태만(怠)함이 경(敬)을 이기면 멸(滅)하며, 의(義)가 욕심(欲)을 이기면 따르고[從], 욕심(欲)이 의(義)를 이기면 흉(凶)하다.' '종(從)' 자의 뜻은 어떻습니까?" o 답하다: "종(從)은 순(順)이다. 경(敬)하면 곧 세워지고[?起], 태(怠)하면 곧 쓰러진다[放倒]. 이치[理]로써 일을 따르는 것이 의(義)이고, 이치[理]로써 일을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욕(欲)이다. 여기에서 경(敬)과 의(義)는 하나의 체(體)·용(用)이니, 또한 곤괘(坤卦)에서 경(敬)·의(義)를 설명한 것과 같다." o 우(?)의 기록. (61세 이후) == 전 3장 == *  傳三章 전 3장 ===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 復引淇澳之詩一段 '다시 시경 기욱(淇奧)편을 인용한 까닭은...' 단락 *  17:57 “‘瑟兮僩兮者, 恂慄也’. ‘僩’字, 舊訓寬大. 某看經子所載, 或從‘忄’·或從‘扌’之不同, 然皆云有武毅之貌, 所以某注中直以武毅言之.” 道夫云: “如此注, 則方與‘瑟’字及下文恂慄之說相合.” 曰: “且如‘恂’字, 鄭氏讀爲‘峻’. 某始者言, 此只是‘恂恂如也’之‘恂’, 何必如此. 及讀莊子, 見所謂‘木處則惴慄恂懼’, 然後知鄭氏之音爲當. 如此等處, 某於或問中不及載也. 要之, 如這般處, 須是讀得書多, 然後方見得.” 道夫(60이후). *  17:58 問: “切磋琢磨, 是學者事, 而‘盛德至善’, 或問乃指聖人言之, 何也?” 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熙敬止’說. 然聖人也不是揷手掉臂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卻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爲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淳(61·70때). 寓同. *  17:59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旣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 旣切而復磋之. 切得一箇樸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旣修而猶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 旣琢而復磨之. 琢, 是琢得一箇樸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之至善也. 取此而喩君子之於至善, 旣格物以求知所止矣, 又且用力以求得其所止焉. 正心·誠意, 便是道學·自修①. ‘瑟兮僩兮, 赫兮喧兮’, 到這裏, 睟面盎背, 發見於外, 便是道學·自修之驗也.” 道夫云: “所以或問中有始終條理之別也, 良爲此爾.” 曰: “然.” 道夫(60이후). *  17:60 “‘如切如磋’, 道學也”, 卻以爲始條理之事; “‘如琢如磨’, 自修也”, 卻以爲終條理之事, 皆是要工夫精密. 道學是起頭處, 自修是成就處. 中間工夫, 旣講求又復講求, 旣克治又復克治, 此所謂已精而求其益精, 已密而求其益密也. 謨(50이후). *  17:61 周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密否?” 曰: “始終條理都要密, 講貫而益講貫, 修飭而益修飭.” 淳(61·70때). *  17:62 問: “琢磨後, 更有瑟僩赫喧, 何故爲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了氣象恁地. ‘穆穆文王’, 亦是氣象也.” 㝢(61이후). • 17:57 “‘엄밀하고 굳세다[瑟兮僩兮]’는 것은 엄숙하고 두려워함[恂慄]이다. ‘한(僩)’ 자는 옛날에는 너그럽고 큼[寬大]으로 훈(訓)했다. 내가 경(經)과 자(子)에 실린 바를 보니, 혹 ‘忄’ 변을 따르거나 혹 ‘扌’ 변을 따르는 다름이 있지만, 모두 굳세고 굳건한 모습[武毅之貌]이 있다고 말하므로, 내가 주(注) 가운데 바로 무의(武毅)로써 그것을 설명했다.” o 도부(道夫)가 말하다: “이와 같이 주(注)해야 비로소 ‘슬(瑟)’ 자 및 아랫글의 순률(恂慄) 설(說)과 서로 부합합니다.” o 답하다: “또한 예컨대 ‘순(恂)’ 자를 정씨(鄭氏, 정현)는 ‘준(峻)’으로 읽었다. 내가 처음에 말하기를, 이것은 단지 ‘온순한 모습[恂恂如也]’의 ‘순(恂)’이니, 어찌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장자(莊子)》를 읽다가 이른바 ‘나무에 있을 때는 곧 두려워 떨며 무서워한다[木處則惴慄恂懼]’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정씨(鄭氏)의 음(音)이 마땅함을 알았다. 이와 같은 부분은 내가 《혹문(或問)》 중에 미처 싣지 못했다. 요컨대 이와 같은 부분은 모름지기 글을 많이 읽은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o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7:58 묻다: “절차탁마(切磋琢磨)는 배우는 자의 일인데,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盛德至善]’을 《혹문(或問)》에서는 곧 성인(聖人)을 가리켜 말했으니, 어째서입니까?” o 답하다: “뒷부분에서 설명한 것이 커서 성인(聖人)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 이는 윗글의 ‘문왕(文王)이 계속 밝히고 공경하여 그침[緝熙敬止]’에 연결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聖人) 또한 손 놓고 팔짱 끼고[揷手掉臂] 저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모름지기 배워야 비로소 된다. 공자(孔子)께서 이르신 바 ‘덕(德)을 닦지 못하며, 학문(學)을 강론하지 못하며, 의(義)를 듣고 옮겨가지 못하며, 불선(不善)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근심이다[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이것이 무슨 긴요함이 있는가? 성인께서 도리어 근심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직 그것을 근심하셨기 때문에 성인이 되신 것이다. 이른바 ‘나면서부터 아는 자[生而知之者]’는 곧 단지 이것을 아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직 성인(聖)이라도 생각을 망령되이 하면 미치광이가 되고, 오직 미치광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聖)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o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우(寓)도 같음. • 17:59 “‘자르는 듯하고 가는 듯함[如切如磋]’은 도학(道學)이고, ‘쪼는 듯하고 가는 듯함[如琢如磨]’은 자수(自修)이다. 이미 배우고도 오히려 그 이르지 못함을 염려하면 다시 강습(講習)하고 토론(討論)하여 그것을 구하니, 뼈나 뿔을 다루는 자가 이미 자르고[切] 다시 그것을 가는 것[磋]과 같다. 잘라서 하나의 바탕[樸]을 여기에 얻으면 또한 괜찮은 듯하지만, 또한 그것을 갈아서[磋] 매끄럽고 윤택함[滑澤]에 이르게 하니, 이것이 뼈나 뿔을 다루는 자의 지극한 선[至善]이다. 이미 닦고도[修] 오히려 그 이르지 못함을 염려하면 또한 성찰(省察)하고 극치(克治)하여 그것을 마치니, 옥이나 돌을 다루는 자가 이미 쪼고[琢] 다시 그것을 가는 것[磨]과 같다. 쪼는 것[琢]은 하나의 바탕[樸]을 여기에 얻으면 또한 괜찮은 듯하지만, 또한 그것을 갈아서[磨] 정밀하고 세밀함[精細]에 이르게 하니, 이것이 옥이나 돌을 다루는 것의 지극한 선[至善]이다. 이것을 취하여 군자가 지선(至善)에 임함을 비유하니, 이미 격물(格物)하여 머무를 곳[所止]을 알기를 구하고, 또한 힘을 써서 그 머무를 곳[所止]을 얻기를 구한다. 정심(正心)·성의(誠意)가 바로 도학(道學)·자수(自修)이다①. ‘엄밀하고 굳세며[瑟兮僩兮], 빛나고 성대함[赫兮喧兮]’ 여기에 이르면,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등에 넘쳐[睟面盎背] 밖으로 드러나니, 바로 도학(道學)·자수(自修)의 증험(驗)이다.” o 도부(道夫)가 말하다: “그러므로 《혹문(或問)》 중에 시종(始終)과 조리(條理)의 구별이 있는 것이니,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o 답하다: “그렇다.” o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o ①: (편집자 주: 원문에는 각주 표시가 있으나 내용은 없음) • 17:60 “‘자르는 듯하고 가는 듯함[如切如磋]’은 도학(道學)이다”는 도리어 시작하는 조리[始條理]의 일로 삼고, “‘쪼는 듯하고 가는 듯함[如琢如磨]’은 자수(自修)이다”는 도리어 마치는 조리[終條理]의 일로 삼으니, 모두 공부(工夫)가 정밀(精密)함을 요구한다. 도학(道學)은 시작하는 부분이고, 자수(自修)는 성취하는 부분이다. 중간의 공부는 이미 강구(講求)하고 또다시 강구하며, 이미 극치(克治)하고 또다시 극치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미 정밀한데 그 더욱 정밀함을 구하고, 이미 치밀한데 그 더욱 치밀함을 구하는 것이다. o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7:61 주(周)가 묻다: “절차(切磋)는 시작하는 조리[始條理]이고, 탁마(琢磨)는 마치는 조리[終條理]입니다. 마치는 조리가 비교적 치밀합니까?” o 답하다: “시작하는 조리와 마치는 조리 모두 치밀해야 하니, 강론하고 익힘[講貫]에 더욱 강론하고 익히며, 수양하고 삼감[修飭]에 더욱 수양하고 삼가야 한다.” o 순(淳)의 기록. (61세 혹은 70세 때) • 17:62 묻다: “탁마(琢磨) 뒤에 다시 슬한(瑟僩)·혁훤(赫喧)이 있는데, 어찌하여 마치는 조리[終條理]의 일이 됩니까?” o 답하다: “그것은 공부하는 부분이 아니라 성취된 뒤의 기상(氣象)이 그러한 것이다. ‘점잖고 교양 있는 문왕[穆穆文王]’ 또한 기상(氣象)이다.” o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ez976uzrnju9di4oidkg02rb25mj7bz 사용자:ZornsLemon/한글 100대 문화 유산 2 101499 392573 392553 2025-06-26T01:08:27Z ZornsLemon 15531 392573 wikitext text/x-wiki 국립한글박물관 아카이브 https://archives.hangeul.go.kr/ko/M000000594/heritage/list 한글 100대 문화유산 <poem> 1 [[훈민정음|훈민정음 (해례본)]] 1446 2 [[월인천강지곡]] 1447 3 [[용비어천가]] 1447 4 [[동국정운]] 1448 5 [[석보상절]] 1449 6 [[홍무정운역훈]] 1455 7 [[훈민정음언해|훈민정음(언해본)]] 1459(훈민정음 반포 직후) 8 [[월인석보]] 1459(훈민정음 반포 직후) 9 한글 금속활자: 조선 전기 10 [[능엄경언해]] 1461 [https://akorn.bab2min.pe.kr/group/31 어듸메(10권)] 11 [[법화경언해]] 1463 [https://akorn.bab2min.pe.kr/group/4 어듸메(4권?)] 12 [[평창 상원사 중창 권선문]] 1464 [https://akorn.bab2min.pe.kr/doc/78 어듸메] 13 [[내훈]] 1475 [https://akorn.bab2min.pe.kr/group/22 어듸메(4권)] 14 [[삼강행실도|삼강행실도언해]] 1481 [https://akorn.bab2min.pe.kr/group/74 어듸메(3권)] 15 [[두시언해]] 1481 / 작업 중... 16 [[금강경삼가해]] 1482 / [[색인:Geumjanggyeong Eonhae.djvu|금강경언해]]와는 다른 것? 17 [[구급간이방]] 1489 / [https://akorn.bab2min.pe.kr/group/6 어듸메(7권?)] [[구급방언해]]: 복각본?? 18 [[악학궤범]] 1493 19 [[나신걸 한글편지]] 1490년대(추정) 20 [[설공찬전]] 1511 / 스캔본 작업 필요 21 [[번역소학]], [[소학언해]] 1518/1588 / 스캔본 작업 필요 22 [[노걸대언해|번역노걸대, 노걸대언해]] 16세기(조선 중종 연간) / 스캔본 문서로 작업 필요 23 [[간이벽온방|간이벽온방언해]] 1525 24 [[훈몽자회]] 1527 25 <strike>한글 영비: 1536</strike> 26 [[고열녀전/권4|고열녀전]] 1543 27 [[부모은중경|부모은중경언해]] 1545 추정 / 현대문임. 스캔본 문서로 작업 필요 28 [[시용향악보]] 조선중기 29 [[금보]] 1572 30 [[광주천자문]] 1575 31 <strike>안락국태자전변상도: 1576 (탱화)</strike> 32 [[안민학 애도문]] 1576 [https://akorn.bab2min.pe.kr/doc/109 어듸메] 33 [[석봉천자문]] 1583 / [https://akorn.bab2min.pe.kr/doc/175 어듸메] [[천자문]] 자체는 있지만... 34 [[논어언해]] 1590 35 [[순천김씨 간찰]] 16세기 후반 [https://akorn.bab2min.pe.kr/doc/101 어듸메]와 동일한 것? 36 [[선조국문유서]] 1593 37 [[무예제보언해|무예제보(언해)]] 1598 38 [[유합]] 16세기 추정(미상) / 판본이 다른 듯. 39 [[악장가사]] 16세기 추정(미상) 40 [[언해태산집요]] 1608 / 색인 문서 필요 [https://akorn.bab2min.pe.kr/doc/450 어듸메] 41 [[언해두창집요]] 1608 / 색인 문서 필요 [https://akorn.bab2min.pe.kr/group/448 어듸메(2권)] 42 [[동의보감/탕액편|동의보감 탕액편]] 1610 / 한문판임. 한글 스캔본 문서로 작업해야 함. [https://akorn.bab2min.pe.kr/doc/270 어듸메] 43 [[병자일기]] 1636 / 색인 문서 작업 필요, 미완성 44 [[산성일기]] 조선 중기 / 토막글, 색인 문서 필요 [https://akorn.bab2min.pe.kr/doc/878 어듸메] 45 [[음식디미방]] 1670 / 색인 문서 필요 46 [[첩해신어]] 1676 / 토막글, 색인 문서 필요 [https://akorn.bab2min.pe.kr/group/577 어듸메(9권)] 47 [[사씨남정기]] 1689-1692 / 이게... 없다고? [https://akorn.bab2min.pe.kr/group/353 어듸메] 48 [[송강가사]] 1690년대 49 [[구운몽]] 17세기 / 판본 50 [[춘향전]] 18세기 / 어떤 판본을 써야 할지? 51 [[청구영언]] 1728 52 [[해동가요]] 1755 53 [[천의소감언해]] 1756 / 토막글, 색인 문서 필요 54 [[일동장유가]] 1764 / 옛한글 문헌 프로젝트. [[색인:일동장유가 권1.djvu|1권]], [[색인:일동장유가 권2.djvu|2권]], [[색인:일동장유가 권3.djvu|3권]] 55 [[심청전]] 18세기 추정(미상) / 판본 문제... 56 [[농가월령가]] 1786∼1855 / [[색인:PD6B-27 001 농가월령가 농가월령가(15).pdf|농가월령가(색인)]] 57 [[무예도보통지언해]] 1790 / 토막글, 색인 문서 필요 [https://akorn.bab2min.pe.kr/doc/338 어듸메] 58 [[증수무원록언해]] 1792 / 미완성 [[색인:증수무원록언해.djvu|증수무원록(색인)]] 59 [[한중록]] 1795 60 [[정조어필한글편지첩]] 18세기 61 [[정순왕후 한글편지]] 18세기 전후 62 [[완월회맹연]] 18세기 / 180권???? 63 <strike>한글조선전도: 18세기~19세기 / 지도</strike> 64 [[규합총서]] 1809 65 [[물명고]] 1820년대 / 토막글, [[색인:CNTS-00047978256 物名考.pdf|물명고(색인)]] 66 [[언문지]] 1824 67 [[한양가]] 1844 68 [[흥부전]] 19세기 추정(미상) / 판본 문제 69 [[가곡원류]] 1876 이후 / 판본 문제 [[색인:증보가곡원류 K4-6779.pdf|증보가곡원류(색인)]], 원본 가곡원류는 국립국악원 소장 영인본 70 [[한글 첫 걸음(Corean Primer)]] 1877 / [[:en:Index:Corean Primer (1877).djvu|영어판 색인]] 71 [[한불자전]] 1880 72 [[한성주보]] 1886(창간) 73 [[예수셩교젼셔]] 1887 74 [[사민필지]] 1891 옛한글 문헌 프로젝트 작업 대상. [[색인:사민필지.djvu|사민필지(색인)]] 75 <strike>수선전도: 1892년 / 지도</strike> 76 [[텬로력뎡|천로역정]] 1895 77 [[서유견문]] 1895 78 [[국민 소학 독본|국민소학독본]] 1895 79 [[독립신문/1896년/4월/7일|독립신문 제1호]] 1896 80 <strike>오대쥬각국전도: 1896 / 지도</strike> 81 [[국문정리]] 1897 82 [[로제타 홀 한글점자 교재]] 1897 83 [[매일신문]] 1898(창간) / 실제 내용은 채워야 함. 84 [[홍길동전]] 19세기(조선후기) / 판본 문제... 85 [[혈의 누|혈의누]] 1907 86 [[국문연구안]] 1907~1909: [[국문연구정의안]]과는 다른 것? 어쨌든 스캔본 작업 필요. 87 [[소년|소년(창간호)]] 1908(창간) 88 [[붉은저고리]] 1913 89 [[아이들보이]] 1913 90 [[말모이 원고]] 1914년경 91 [[습례국]] 1919 92 [[훈맹정음]] 1926 93 [[한글|한글(잡지)]] 1927- 94 [[조선말 큰사전 원고]] 1929-1942 95 [[한글 마춤법 통일안|한글마춤법통일안]] 1933 96 <strike>송기주 네벌식 한글 타자기: 1934</strike> 97 [[한글갈]] 1942 9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9 [[바둑이와 철수(초등국어 1-1)]] 1948 100 <strike>공병우 타자기: 1949</strike> </poem> 34ffohekpfkgdd5j6h5zomeyfvrfzcp 사용자:Aspere/8월의 신문 에디터톤/색인 문서 목록 2 101532 392566 392530 2025-06-25T16:27:10Z Aspere 5453 /* 개화기 (~1900년대) */ 392566 wikitext text/x-wiki == 범례 == * 한자 ** 국한문 혼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O ** 제목이나 고유명사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 * 옛한글 ** 아래아 등 현대의 표기와 현저하게 다른 경우 O ** 아래아는 소멸되었으나 일부 특정 글자("또"를 "ᄯᅩ"로 적는 등)에서만 사용하는 경우 △ == 개화기 (~1900년대) == === 1904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163043 大韓每日申報 1904-08-09.pdf]] || 1904-08-09 || [[색인:대한매일신보 19040809.pdf|기존 작업 색인]]과 중복 |- | [[색인:CNTS-00048114450 大韓每日申報 1904-08-10.pdf]] || 1904-08-10 |- | [[색인:CNTS-00048114782 大韓每日申報 1904-08-11.pdf]] || 1904-08-11 |- | [[색인:CNTS-00048178680 大韓每日申報 1904-08-12.pdf]] || 1904-08-12 |- | [[색인:CNTS-00048143238 大韓每日申報 1904-08-13.pdf]] || 1904-08-13 |- | [[색인:CNTS-00048196414 大韓每日申報 1904-08-16.pdf]] || 1904-08-16 |- | [[색인:CNTS-00048175458 大韓每日申報 1904-08-17.pdf]] || 1904-08-17 |- | [[색인:CNTS-00048171812 大韓每日申報 1904-08-18.pdf]] || 1904-08-18 |- | [[색인:CNTS-00048172247 大韓每日申報 1904-08-20.pdf]] || 1904-08-20 |- | [[색인:CNTS-00048175296 大韓每日申報 1904-08-23.pdf]] || 1904-08-23 |- | [[색인:CNTS-00048174256 大韓每日申報 1904-08-24.pdf]] || 1904-08-24 |- | [[색인:CNTS-00048244659 大韓每日申報 1904-08-25.pdf]] || 1904-08-25 |- | [[색인:CNTS-00048122714 大韓每日申報 1904-08-27.pdf]] || 1904-08-27 |- | [[색인:CNTS-00048213452 大韓每日申報 1904-08-30.pdf]] || 1904-08-30 |- | [[색인:CNTS-00048123625 大韓每日申報 1904-08-31.pdf]] || 1904-08-31 |} === 1905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05742 大韓每日申報 1905-08-12.pdf]] || 1905-08-12 |- | [[색인:CNTS-00093105790 大韓每日申報 1905-08-13.pdf]] || 1905-08-13 |- | [[색인:CNTS-00093105813 大韓每日申報 1905-08-15.pdf]] || 1905-08-15 |- | [[색인:CNTS-00093105859 大韓每日申報 1905-08-16.pdf]] || 1905-08-16 |- | [[색인:CNTS-00093105912 大韓每日申報 1905-08-18.pdf]] || 1905-08-18 |- | [[색인:CNTS-00093105964 大韓每日申報 1905-08-19.pdf]] || 1905-08-19 |- | [[색인:CNTS-00093105991 大韓每日申報 1905-08-20.pdf]] || 1905-08-20 |- | [[색인:CNTS-00093106028 大韓每日申報 1905-08-22.pdf]] || 1905-08-22 |- | [[색인:CNTS-00093106064 大韓每日申報 1905-08-23.pdf]] || 1905-08-23 |- | [[색인:CNTS-00093106104 大韓每日申報 1905-08-24.pdf]] || 1905-08-24 |- | [[색인:CNTS-00093106151 大韓每日申報 1905-08-25.pdf]] || 1905-08-25 |- | [[색인:CNTS-00093106188 大韓每日申報 1905-08-27.pdf]] || 1905-08-27 |- | [[색인:CNTS-00093106235 大韓每日申報 1905-08-29.pdf]] || 1905-08-29 |- | [[색인:CNTS-00093106308 大韓每日申報 1905-08-30.pdf]] || 1905-08-30 |- | [[색인:CNTS-00093106334 大韓每日申報 1905-08-31.pdf]] || 1905-08-31 |} === 190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6470 共立新報 1906-08-25.pdf]] || 1906-08-25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 [[색인:CNTS-00093119282 大韓每日申報 1906-08-02.pdf]] || 1906-08-02 |- | [[색인:CNTS-00093119350 大韓每日申報 1906-08-03.pdf]] || 1906-08-03 |- | [[색인:CNTS-00093119383 大韓每日申報 1906-08-04.pdf]] || 1906-08-04 |- | [[색인:CNTS-00093119440 大韓每日申報 1906-08-05.pdf]] || 1906-08-05 |- | [[색인:CNTS-00093119523 大韓每日申報 1906-08-07.pdf]] || 1906-08-07 |- | [[색인:CNTS-00093119549 大韓每日申報 1906-08-08.pdf]] || 1906-08-08 |- | [[색인:CNTS-00093119591 大韓每日申報 1906-08-09.pdf]] || 1906-08-09 |- | [[색인:CNTS-00093119668 大韓每日申報 1906-08-10.pdf]] || 1906-08-10 |- | [[색인:CNTS-00093119700 大韓每日申報 1906-08-11.pdf]] || 1906-08-11 |- | [[색인:CNTS-00093119778 大韓每日申報 1906-08-12.pdf]] || 1906-08-12 |- | [[색인:CNTS-00093119850 大韓每日申報 1906-08-14.pdf]] || 1906-08-14 |- | [[색인:CNTS-00093119897 大韓每日申報 1906-08-15.pdf]] || 1906-08-15 |- | [[색인:CNTS-00093119939 大韓每日申報 1906-08-16.pdf]] || 1906-08-16 |- | [[색인:CNTS-00093119975 大韓每日申報 1906-08-17.pdf]] || 1906-08-17 |- | [[색인:CNTS-00093120026 大韓每日申報 1906-08-18.pdf]] || 1906-08-18 |- | [[색인:CNTS-00093120074 大韓每日申報 1906-08-19.pdf]] || 1906-08-19 |- | [[색인:CNTS-00093120133 大韓每日申報 1906-08-21.pdf]] || 1906-08-21 |- | [[색인:CNTS-00093120185 大韓每日申報 1906-08-22.pdf]] || 1906-08-22 |- | [[색인:CNTS-00093120212 大韓每日申報 1906-08-23.pdf]] || 1906-08-23 |- | [[색인:CNTS-00093120270 大韓每日申報 1906-08-24.pdf]] || 1906-08-24 |- | [[색인:CNTS-00093120360 大韓每日申報 1906-08-25.pdf]] || 1906-08-25 |- | [[색인:CNTS-00093120408 大韓每日申報 1906-08-26.pdf]] || 1906-08-26 |- | [[색인:CNTS-00093120461 大韓每日申報 1906-08-28.pdf]] || 1906-08-28 |- | [[색인:CNTS-00093120522 大韓每日申報 1906-08-29.pdf]] || 1906-08-29 |- | [[색인:CNTS-00093120556 大韓每日申報 1906-08-30.pdf]] || 1906-08-30 |- | [[색인:CNTS-00093120593 大韓每日申報 1906-08-31.pdf]] || 1906-08-31 |} === 190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7280 共立新報 1907-08-09.pdf ]] || 1907-08-09 |- | [[색인:CNTS-00049010957 共立新報 1907-08-16.pdf ]] || 1907-08-16 |- | [[색인:CNTS-00115097358 共立新報 1907-08-23.pdf ]] || 1907-08-23 |- | [[색인:CNTS-00115097372 共立新報 1907-08-30.pdf ]] || 1907-08-30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37172 大韓每日申報 1907-08-02.pdf]] || 1907-08-02 |- | [[색인:CNTS-00093137187 大韓每日申報 1907-08-03.pdf]] || 1907-08-03 |- | [[색인:CNTS-00093137316 大韓每日申報 1907-08-04.pdf]] || 1907-08-04 |- | [[색인:CNTS-00093137338 大韓每日申報 1907-08-06.pdf]] || 1907-08-06 |- | [[색인:CNTS-00093137480 大韓每日申報 1907-08-07.pdf]] || 1907-08-07 |- | [[색인:CNTS-00093137499 大韓每日申報 1907-08-08.pdf]] || 1907-08-08 |- | [[색인:CNTS-00093137625 大韓每日申報 1907-08-09.pdf]] || 1907-08-09 |- | [[색인:CNTS-00093137650 大韓每日申報 1907-08-10.pdf]] || 1907-08-10 |- | [[색인:CNTS-00093137777 大韓每日申報 1907-08-11.pdf]] || 1907-08-11 |- | [[색인:CNTS-00093137886 大韓每日申報 1907-08-13.pdf]] || 1907-08-13 |- | [[색인:CNTS-00093137935 大韓每日申報 1907-08-14.pdf]] || 1907-08-14 |- | [[색인:CNTS-00093137990 大韓每日申報 1907-08-15.pdf]] || 1907-08-15 |- | [[색인:CNTS-00093138042 大韓每日申報 1907-08-16.pdf]] || 1907-08-16 |- | [[색인:CNTS-00093138108 大韓每日申報 1907-08-17.pdf]] || 1907-08-17 |- | [[색인:CNTS-00093138173 大韓每日申報 1907-08-18.pdf]] || 1907-08-18 |- | [[색인:CNTS-00093138255 大韓每日申報 1907-08-20.pdf]] || 1907-08-20 |- | [[색인:CNTS-00093138323 大韓每日申報 1907-08-21.pdf]] || 1907-08-21 |- | [[색인:CNTS-00093138398 大韓每日申報 1907-08-22.pdf]] || 1907-08-22 |- | [[색인:CNTS-00093138538 大韓每日申報 1907-08-23.pdf]] || 1907-08-23 |- | [[색인:CNTS-00093138600 大韓每日申報 1907-08-24.pdf]] || 1907-08-24 |- | [[색인:CNTS-00093138631 大韓每日申報 1907-08-27.pdf]] || 1907-08-27 |- | [[색인:CNTS-00093138753 大韓每日申報 1907-08-29.pdf]] || 1907-08-29 |- | [[색인:CNTS-00093138772 大韓每日申報 1907-08-30.pdf]] || 1907-08-30 |- | [[색인:CNTS-00093138910 大韓每日申報 1907-08-31.pdf]] || 1907-08-31 |} === 190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916681 共立新報 1908-08-12.pdf ]] || 1908-08-12 |- | [[색인:CNTS-00048962815 共立新報 1908-08-19.pdf ]] || 1908-08-19 |- | [[색인:CNTS-00049012696 共立新報 1908-08-26.pdf ]] || 1908-08-26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61249 大韓每日申報 1908-08-02.pdf]] || 1908-08-02 |- | [[색인:CNTS-00093161323 大韓每日申報 1908-08-04.pdf]] || 1908-08-04 |- | [[색인:CNTS-00093161450 大韓每日申報 1908-08-05.pdf]] || 1908-08-05 |- | [[색인:CNTS-00093161494 大韓每日申報 1908-08-06.pdf]] || 1908-08-06 |- | [[색인:CNTS-00093161636 大韓每日申報 1908-08-07.pdf]] || 1908-08-07 |- | [[색인:CNTS-00093161666 大韓每日申報 1908-08-08.pdf]] || 1908-08-08 |- | [[색인:CNTS-00093161770 大韓每日申報 1908-08-09.pdf]] || 1908-08-09 |- | [[색인:CNTS-00093161841 大韓每日申報 1908-08-11.pdf]] || 1908-08-11 |- | [[색인:CNTS-00093161884 大韓每日申報 1908-08-12.pdf]] || 1908-08-12 |- | [[색인:CNTS-00093161962 大韓每日申報 1908-08-13.pdf]] || 1908-08-13 |- | [[색인:CNTS-00093162054 大韓每日申報 1908-08-14.pdf]] || 1908-08-14 |- | [[색인:CNTS-00093162125 大韓每日申報 1908-08-16.pdf]] || 1908-08-16 |- | [[색인:CNTS-00093162198 大韓每日申報 1908-08-18.pdf]] || 1908-08-18 |- | [[색인:CNTS-00093162279 大韓每日申報 1908-08-19.pdf]] || 1908-08-19 |- | [[색인:CNTS-00093162349 大韓每日申報 1908-08-20.pdf]] || 1908-08-20 |- | [[색인:CNTS-00093162447 大韓每日申報 1908-08-21.pdf]] || 1908-08-21 |- | [[색인:CNTS-00093162505 大韓每日申報 1908-08-22.pdf]] || 1908-08-22 |- | [[색인:CNTS-00093162642 大韓每日申報 1908-08-23.pdf]] || 1908-08-23 |- | [[색인:CNTS-00093162655 大韓每日申報 1908-08-25.pdf]] || 1908-08-25 |- | [[색인:CNTS-00093162740 大韓每日申報 1908-08-26.pdf]] || 1908-08-26 |- | [[색인:CNTS-00093162861 大韓每日申報 1908-08-27.pdf]] || 1908-08-27 |- | [[색인:CNTS-00093162903 大韓每日申報 1908-08-29.pdf]] || 1908-08-29 |- | [[색인:CNTS-00093162983 大韓每日申報 1908-08-30.pdf]] || 1908-08-30 |} ==== 190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83086 大韓每日申報 1909-08-03.pdf]] || 1909-08-03 |- | [[색인:CNTS-00093183168 大韓每日申報 1909-08-04.pdf]] || 1909-08-04 |- | [[색인:CNTS-00093183247 大韓每日申報 1909-08-05.pdf]] || 1909-08-05 |- | [[색인:CNTS-00093183374 大韓每日申報 1909-08-06.pdf]] || 1909-08-06 |- | [[색인:CNTS-00093183397 大韓每日申報 1909-08-07.pdf]] || 1909-08-07 |- | [[색인:CNTS-00093183472 大韓每日申報 1909-08-08.pdf]] || 1909-08-08 |- | [[색인:CNTS-00093183614 大韓每日申報 1909-08-10.pdf]] || 1909-08-10 |- | [[색인:CNTS-00093183634 大韓每日申報 1909-08-11.pdf]] || 1909-08-11 |- | [[색인:CNTS-00093183705 大韓每日申報 1909-08-12.pdf]] || 1909-08-12 |- | [[색인:CNTS-00093183789 大韓每日申報 1909-08-13.pdf]] || 1909-08-13 |- | [[색인:CNTS-00093183860 大韓每日申報 1909-08-14.pdf]] || 1909-08-14 |- | [[색인:CNTS-00093183937 大韓每日申報 1909-08-17.pdf]] || 1909-08-17 |- | [[색인:CNTS-00093184043 大韓每日申報 1909-08-18.pdf]] || 1909-08-18 |- | [[색인:CNTS-00093184073 大韓每日申報 1909-08-19.pdf]] || 1909-08-19 |- | [[색인:CNTS-00093184143 大韓每日申報 1909-08-20.pdf]] || 1909-08-20 |- | [[색인:CNTS-00093184253 大韓每日申報 1909-08-21.pdf]] || 1909-08-21 |- | [[색인:CNTS-00093184306 大韓每日申報 1909-08-22.pdf]] || 1909-08-22 |- | [[색인:CNTS-00093184382 大韓每日申報 1909-08-24.pdf]] || 1909-08-24 |- | [[색인:CNTS-00093184464 大韓每日申報 1909-08-25.pdf]] || 1909-08-25 |- | [[색인:CNTS-00093184606 大韓每日申報 1909-08-26.pdf]] || 1909-08-26 |- | [[색인:CNTS-00093184630 大韓每日申報 1909-08-27.pdf]] || 1909-08-27 |- | [[색인:CNTS-00093184730 大韓每日申報 1909-08-29.pdf]] || 1909-08-29 |- | [[색인:CNTS-00093184853 大韓每日申報 1909-08-31.pdf]] || 1909-08-31 |} === 191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208820 大韓每日申報 1910-08-03.pdf]] || 1910-08-03 |- | [[색인:CNTS-00093208906 大韓每日申報 1910-08-04.pdf]] || 1910-08-04 |- | [[색인:CNTS-00093208987 大韓每日申報 1910-08-05.pdf]] || 1910-08-05 |- | [[색인:CNTS-00093209080 大韓每日申報 1910-08-06.pdf]] || 1910-08-06 |- | [[색인:CNTS-00093209184 大韓每日申報 1910-08-07.pdf]] || 1910-08-07 |- | [[색인:CNTS-00093209270 大韓每日申報 1910-08-09.pdf]] || 1910-08-09 |- | [[색인:CNTS-00093209358 大韓每日申報 1910-08-16.pdf]] || 1910-08-16 |- | [[색인:CNTS-00093209455 大韓每日申報 1910-08-17.pdf]] || 1910-08-17 |- | [[색인:CNTS-00093209525 大韓每日申報 1910-08-26.pdf]] || 1910-08-26 |- | [[색인:CNTS-00093209617 大韓每日申報 1910-08-27.pdf]] || 1910-08-27 |- | [[색인:CNTS-00093209702 大韓每日申報 1910-08-28.pdf]] || 1910-08-28 |} == 일제강점기 (1910년대~1944년) == === 192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35903 中外日報 1927-08-02.pdf]] || 1927-08-02 |- | [[색인:CNTS-00093436018 中外日報 1927-08-03.pdf]] || 1927-08-03 |- | [[색인:CNTS-00093436273 中外日報 1927-08-04.pdf]] || 1927-08-04 |- | [[색인:CNTS-00093436345 中外日報 1927-08-05.pdf]] || 1927-08-05 |- | [[색인:CNTS-00093436458 中外日報 1927-08-06.pdf]] || 1927-08-06 |- | [[색인:CNTS-00093436542 中外日報 1927-08-07.pdf]] || 1927-08-07 |- | [[색인:CNTS-00093436729 中外日報 1927-08-08.pdf]] || 1927-08-08 |- | [[색인:CNTS-00093436826 中外日報 1927-08-09.pdf]] || 1927-08-09 |- | [[색인:CNTS-00093436990 中外日報 1927-08-10.pdf]] || 1927-08-10 |- | [[색인:CNTS-00093437060 中外日報 1927-08-11.pdf]] || 1927-08-11 |- | [[색인:CNTS-00093437217 中外日報 1927-08-12.pdf]] || 1927-08-12 |- | [[색인:CNTS-00093437321 中外日報 1927-08-13.pdf]] || 1927-08-13 |- | [[색인:CNTS-00093437485 中外日報 1927-08-14.pdf]] || 1927-08-14 |- | [[색인:CNTS-00067903192 中外日報 1927-08-15.pdf]] || 1927-08-15 |- | [[색인:CNTS-00093437608 中外日報 1927-08-16.pdf]] || 1927-08-16 |- | [[색인:CNTS-00093437823 中外日報 1927-08-17.pdf]] || 1927-08-17 |- | [[색인:CNTS-00049019603 中外日報 1927-08-18.pdf]] || 1927-08-18 |- | [[색인:CNTS-00093437884 中外日報 1927-08-19.pdf]] || 1927-08-19 |- | [[색인:CNTS-00093438026 中外日報 1927-08-20.pdf]] || 1927-08-20 |- | [[색인:CNTS-00093438159 中外日報 1927-08-21.pdf]] || 1927-08-21 |- | [[색인:CNTS-00093438241 中外日報 1927-08-22.pdf]] || 1927-08-22 |- | [[색인:CNTS-00093438432 中外日報 1927-08-23.pdf]] || 1927-08-23 |- | [[색인:CNTS-00093438476 中外日報 1927-08-24.pdf]] || 1927-08-24 |- | [[색인:CNTS-00093438705 中外日報 1927-08-25.pdf]] || 1927-08-25 |- | [[색인:CNTS-00093438717 中外日報 1927-08-26.pdf]] || 1927-08-26 |- | [[색인:CNTS-00093438861 中外日報 1927-08-27.pdf]] || 1927-08-27 |- | [[색인:CNTS-00093438989 中外日報 1927-08-28.pdf]] || 1927-08-28 |- | [[색인:CNTS-00093439087 中外日報 1927-08-29.pdf]] || 1927-08-29 |- | [[색인:CNTS-00093439245 中外日報 1927-08-30.pdf]] || 1927-08-30 |- | [[색인:CNTS-00093439415 中外日報 1927-08-31.pdf]] || 1927-08-31 |} === 192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52603 中外日報 1928-08-02.pdf]] || 1928-08-02 |- | [[색인:CNTS-00093452625 中外日報 1928-08-03.pdf]] || 1928-08-03 |- | [[색인:CNTS-00093452821 中外日報 1928-08-04.pdf]] || 1928-08-04 |- | [[색인:CNTS-00093452854 中外日報 1928-08-05.pdf]] || 1928-08-05 |- | [[색인:CNTS-00093452959 中外日報 1928-08-06.pdf]] || 1928-08-06 |- | [[색인:CNTS-00093453097 中外日報 1928-08-07.pdf]] || 1928-08-07 |- | [[색인:CNTS-00093453278 中外日報 1928-08-08.pdf]] || 1928-08-08 |- | [[색인:CNTS-00093453298 中外日報 1928-08-09.pdf]] || 1928-08-09 |- | [[색인:CNTS-00093453408 中外日報 1928-08-10.pdf]] || 1928-08-10 |- | [[색인:CNTS-00093453548 中外日報 1928-08-11.pdf]] || 1928-08-11 |- | [[색인:CNTS-00093453626 中外日報 1928-08-12.pdf]] || 1928-08-12 |- | [[색인:CNTS-00093453817 中外日報 1928-08-13.pdf]] || 1928-08-13 |- | [[색인:CNTS-00093453841 中外日報 1928-08-14.pdf]] || 1928-08-14 |- | [[색인:CNTS-00093453984 中外日報 1928-08-15.pdf]] || 1928-08-15 |- | [[색인:CNTS-00093454051 中外日報 1928-08-16.pdf]] || 1928-08-16 |- | [[색인:CNTS-00093454175 中外日報 1928-08-17.pdf]] || 1928-08-17 |- | [[색인:CNTS-00093454330 中外日報 1928-08-18.pdf]] || 1928-08-18 |- | [[색인:CNTS-00093454426 中外日報 1928-08-19.pdf]] || 1928-08-19 |- | [[색인:CNTS-00093454626 中外日報 1928-08-20.pdf]] || 1928-08-20 |- | [[색인:CNTS-00093454743 中外日報 1928-08-21.pdf]] || 1928-08-21 |- | [[색인:CNTS-00093454766 中外日報 1928-08-22.pdf]] || 1928-08-22 |- | [[색인:CNTS-00093454896 中外日報 1928-08-23.pdf]] || 1928-08-23 |- | [[색인:CNTS-00093455081 中外日報 1928-08-24.pdf]] || 1928-08-24 |- | [[색인:CNTS-00093455216 中外日報 1928-08-25.pdf]] || 1928-08-25 |- | [[색인:CNTS-00048208555 中外日報 1928-08-26.pdf]] || 1928-08-26 |- | [[색인:CNTS-00093455222 中外日報 1928-08-27.pdf]] || 1928-08-27 |- | [[색인:CNTS-00093455440 中外日報 1928-08-28.pdf]] || 1928-08-28 |- | [[색인:CNTS-00093455471 中外日報 1928-08-29.pdf]] || 1928-08-29 |- | [[색인:CNTS-00093455627 中外日報 1928-08-30.pdf]] || 1928-08-30 |- | [[색인:CNTS-00093455677 中外日報 1928-08-31.pdf]] || 1928-08-31 |} === 192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48574467 中外日報 1929-08-02.pdf]] || 1929-08-02 |- | [[색인:CNTS-00049033203 中外日報 1929-08-03.pdf]] || 1929-08-03 |- | [[색인:CNTS-00048201752 中外日報 1929-08-04.pdf]] || 1929-08-04 |- | [[색인:CNTS-00067908798 中外日報 1929-08-05.pdf]] || 1929-08-05 |- | [[색인:CNTS-00048138072 中外日報 1929-08-06.pdf]] || 1929-08-06 |- | [[색인:CNTS-00067908818 中外日報 1929-08-07.pdf]] || 1929-08-07 |- | [[색인:CNTS-00048168260 中外日報 1929-08-08.pdf]] || 1929-08-08 |- | [[색인:CNTS-00067908837 中外日報 1929-08-09.pdf]] || 1929-08-09 |- | [[색인:CNTS-00048241910 中外日報 1929-08-10.pdf]] || 1929-08-10 |- | [[색인:CNTS-00067908869 中外日報 1929-08-11.pdf]] || 1929-08-11 |- | [[색인:CNTS-00048881881 中外日報 1929-08-12.pdf]] || 1929-08-12 |- | [[색인:CNTS-00048384760 中外日報 1929-08-13.pdf]] || 1929-08-13 |- | [[색인:CNTS-00049008235 中外日報 1929-08-14.pdf]] || 1929-08-14 |- | [[색인:CNTS-00048856789 中外日報 1929-08-15.pdf]] || 1929-08-15 |- | [[색인:CNTS-00067908928 中外日報 1929-08-16.pdf]] || 1929-08-16 |- | [[색인:CNTS-00048647463 中外日報 1929-08-17.pdf]] || 1929-08-17 |- | [[색인:CNTS-00048840753 中外日報 1929-08-18.pdf]] || 1929-08-18 |- | [[색인:CNTS-00048538506 中外日報 1929-08-19.pdf]] || 1929-08-19 |- | [[색인:CNTS-00067908976 中外日報 1929-08-20.pdf]] || 1929-08-20 |- | [[색인:CNTS-00048557092 中外日報 1929-08-21.pdf]] || 1929-08-21 |- | [[색인:CNTS-00067908996 中外日報 1929-08-22.pdf]] || 1929-08-22 |- | [[색인:CNTS-00048714889 中外日報 1929-08-23.pdf]] || 1929-08-23 |- | [[색인:CNTS-00067909007 中外日報 1929-08-24.pdf]] || 1929-08-24 |- | [[색인:CNTS-00048206485 中外日報 1929-08-25.pdf]] || 1929-08-25 |- | [[색인:CNTS-00067909031 中外日報 1929-08-26.pdf]] || 1929-08-26 |- | [[색인:CNTS-00067909037 中外日報 1929-08-27.pdf]] || 1929-08-27 |- | [[색인:CNTS-00048111230 中外日報 1929-08-28.pdf]] || 1929-08-28 |- | [[색인:CNTS-00048143182 中外日報 1929-08-29.pdf]] || 1929-08-29 |- | [[색인:CNTS-00048326024 中外日報 1929-08-30.pdf]] || 1929-08-30 |- | [[색인:CNTS-00048677493 中外日報 1929-08-31.pdf]] || 1929-08-31 |} === 193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503617 中外日報 1930-08-02.pdf]] || 1930-08-02 |- | [[색인:CNTS-00093503976 中外日報 1930-08-03.pdf]] || 1930-08-03 |- | [[색인:CNTS-00093504113 中外日報 1930-08-04.pdf]] || 1930-08-04 |- | [[색인:CNTS-00093504212 中外日報 1930-08-05.pdf]] || 1930-08-05 |- | [[색인:CNTS-00093504458 中外日報 1930-08-06.pdf]] || 1930-08-06 |- | [[색인:CNTS-00093504624 中外日報 1930-08-07.pdf]] || 1930-08-07 |- | [[색인:CNTS-00093504818 中外日報 1930-08-08.pdf]] || 1930-08-08 |- | [[색인:CNTS-00093504966 中外日報 1930-08-09.pdf]] || 1930-08-09 |- | [[색인CNTS-00093505163 中外日報 1930-08-10.pdf]] || 1930-08-10 |- | [[색인:CNTS-00093505440 中外日報 1930-08-11.pdf]] || 1930-08-11 |- | [[색인:CNTS-00093505465 中外日報 1930-08-12.pdf]] || 1930-08-12 |- | [[색인:CNTS-00093505651 中外日報 1930-08-13.pdf]] || 1930-08-13 |- | [[색인:CNTS-00093505855 中外日報 1930-08-14.pdf]] || 1930-08-14 |- | [[색인:CNTS-00093506209 中外日報 1930-08-15.pdf]] || 1930-08-15 |- | [[색인:CNTS-00093506257 中外日報 1930-08-16.pdf]] || 1930-08-16 |- | [[색인:CNTS-00093506449 中外日報 1930-08-17.pdf]] || 1930-08-17 |- | [[색인:CNTS-00093506671 中外日報 1930-08-18.pdf]] || 1930-08-18 |- | [[색인:CNTS-00093506826 中外日報 1930-08-19.pdf]] || 1930-08-19 |- | [[색인:CNTS-00093506985 中外日報 1930-08-20.pdf]] || 1930-08-20 |- | [[색인:CNTS-00093507200 中外日報 1930-08-21.pdf]] || 1930-08-21 |- | [[색인:CNTS-00093507315 中外日報 1930-08-22.pdf]] || 1930-08-22 |- | [[색인:CNTS-00093507579 中外日報 1930-08-23.pdf]] || 1930-08-23 |- | [[색인:CNTS-00093507755 中外日報 1930-08-24.pdf]] || 1930-08-24 |- | [[색인:CNTS-00093507992 中外日報 1930-08-25.pdf]] || 1930-08-25 |- | [[색인:CNTS-00093508063 中外日報 1930-08-26.pdf]] || 1930-08-26 |- | [[색인:CNTS-00093508408 中外日報 1930-08-27.pdf]] || 1930-08-27 |- | [[색인:CNTS-00093508439 中外日報 1930-08-28.pdf]] || 1930-08-28 |- | [[색인:CNTS-00093508640 中外日報 1930-08-29.pdf]] || 1930-08-29 |- | [[색인:CNTS-00093509028 中外日報 1930-08-30.pdf]] || 1930-08-30 |- | [[색인:CNTS-00093509206 中外日報 1930-08-31.pdf]] || 1930-08-31 |} == 해방 이후 (1945년~) == === 194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298564 中外新報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12225 中外新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122434 中外新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518378 中外新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48302059 中外新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154198 中外新報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54767 中外新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691782 中外新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153694 中外新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558988 中外新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152638 中外新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120107 中外新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51813 中外新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311969 中外新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48133423 中外新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725279 中外新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51566 中外新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48184428 中外新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133132 中外新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631026 中外新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311721 中外新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205410 中外新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132555 中外新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273158 中外新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717925 中外新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201950 中外新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266013 中外新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113773 中外新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0957 中央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65300964 中央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65301033 中央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65301081 中央新聞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65301090 中央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65301123 中央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65301149 中央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65301206 中央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65301230 中央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65301270 中央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65301294 中央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65301347 中央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65301364 中央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65301388 中央新聞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65301417 中央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65301451 中央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65301504 中央新聞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65301519 中央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65301552 中央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65301616 中央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65301638 中央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65301659 中央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50396 全國勞動者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344389 全國勞動者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84456 大東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07244 大東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476528 大東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952811 大東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205480 大東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96196 大東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202016 大東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938609 大東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194546 大東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204672 大東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264306 大東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92000 大東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264645 大東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194234 大東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60637 大東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200979 大東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352004 大東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177785 大東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196620 大東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980138 大東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195431 大東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979226 大東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664145 大東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191302 大東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272432 大東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30152 大邱時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109330161 大邱時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109330231 大邱時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109330275 大邱時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109330320 大邱時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109330401 大邱時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109330427 大邱時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109330519 大邱時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109330553 大邱時報 1946-08-12.pdf]] || 1946-08-12 |- | [[색인:CNTS-00109330599 大邱時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109330651 大邱時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109330756 大邱時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109330820 大邱時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109330840 大邱時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109330909 大邱時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109330986 大邱時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109331132 大邱時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109331312 大邱時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109331318 大邱時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109331506 大邱時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109331588 大邱時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109331648 大邱時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109331700 大邱時報 1946-08-26.pdf]] || 1946-08-26 |- | [[색인:CNTS-00109331774 大邱時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109331809 大邱時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109331883 大邱時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109331955 大邱時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109331987 大邱時報 1946-08-31.pdf]] || 1946-08-31 |} === 194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5741 中央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5305777 中央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65305845 中央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5305862 中央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65305883 中央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5305933 中央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5305943 中央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5305981 中央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65306011 中央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5306082 中央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5306101 中央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65306129 中央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5306182 中央新聞 1947-08-16.pdf]] || 1947-08-16 |- | [[색인:CNTS-00065306192 中央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65306247 中央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65306322 中央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5306346 中央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5306380 中央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5306419 中央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65306446 中央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5306506 中央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5306533 中央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65306562 中央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65306602 中央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5306647 中央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65306658 中央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광명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469644 光明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48191659 光明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88428 光明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48800666 光明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205304 光明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48667932 光明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48336548 光明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48800046 光明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00611 光明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7982416 光明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48360276 光明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30523 全國勞動者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colspan="3" | 국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3752839 國際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13752882 國際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113752887 國際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13752928 國際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13752951 國際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13752999 國際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13753042 國際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13753082 國際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13753106 國際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13753130 國際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13753157 國際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96209 大東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7993445 大東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02145 大東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7993450 大東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194627 大東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7993458 大東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7993459 大東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7993461 大東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64378 大東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48192077 大東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7993472 大東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48485812 大東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7993477 大東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48264717 大東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48194267 大東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7993488 大東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7993493 大東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7993499 大東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48201041 大東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7993503 大東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7993508 大東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48177810 大東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48196686 大東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7993523 大東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48176217 大東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46354 大邱時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09346407 大邱時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09346456 大邱時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09346513 大邱時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09346563 大邱時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09346668 大邱時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09346702 大邱時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09346752 大邱時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09346822 大邱時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09346881 大邱時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109346882 大邱時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109347085 大邱時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109347186 大邱時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109347267 大邱時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109347401 大邱時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109347461 大邱時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109347617 大邱時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109347653 大邱時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109347678 大邱時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109347762 大邱時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109347855 大邱時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109347938 大邱時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109348003 大邱時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64215 大韓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64445 大韓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64465 大韓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64514 大韓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64536 大韓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64752 大韓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64816 大韓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64824 大韓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65070 大韓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65094 大韓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65150 大韓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65374 大韓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65401 大韓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65655 大韓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65675 大韓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65705 大韓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65755 大韓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65966 大韓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65999 大韓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66075 大韓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66265 大韓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66313 大韓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194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남조선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4965763 南朝鮮民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114965819 南朝鮮民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14965866 南朝鮮民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114965906 南朝鮮民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114965972 南朝鮮民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114966016 南朝鮮民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114966021 南朝鮮民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114966066 南朝鮮民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114966114 南朝鮮民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114966161 南朝鮮民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114966205 南朝鮮民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114966218 南朝鮮民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114966247 南朝鮮民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114966288 南朝鮮民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114966339 南朝鮮民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114966379 南朝鮮民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114966431 南朝鮮民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114966451 南朝鮮民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114966497 南朝鮮民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114966533 南朝鮮民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114966591 南朝鮮民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114966597 南朝鮮民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114966640 南朝鮮民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816953 大東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62773 大邱時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09362798 大邱時報 1948-08-05.pdf]] || 1948-08-05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 [[색인:CNTS-00088008156 大韓日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08358 大韓日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08728 大韓日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09203 大韓日報 1948-08-09.pdf]] || 1948-08-09 |- | [[색인:CNTS-00088009428 大韓日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09801 大韓日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10349 大韓日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10702 大韓日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10754 大韓日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11046 大韓日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11400 大韓日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11883 大韓日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12502 大韓日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13332 大韓日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13415 大韓日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14017 大韓日報 1948-08-23.pdf]] || 1948-08-23 |- | [[색인:CNTS-00088014510 大韓日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14922 大韓日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15512 大韓日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16242 大韓日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16332 大韓日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16766 大韓日報 1948-08-30.pdf]] || 1948-08-30 |- | [[색인:CNTS-00088017406 大韓日報 1948-08-31.pdf]] || 1948-08-31 |} 1zirnehx1vj9h9olufe7ur1ytkpxs54 392567 392566 2025-06-25T16:38:46Z Aspere 5453 /* 해방 이후 (1945년~) */ 392567 wikitext text/x-wiki == 범례 == * 한자 ** 국한문 혼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O ** 제목이나 고유명사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 * 옛한글 ** 아래아 등 현대의 표기와 현저하게 다른 경우 O ** 아래아는 소멸되었으나 일부 특정 글자("또"를 "ᄯᅩ"로 적는 등)에서만 사용하는 경우 △ == 개화기 (~1900년대) == === 1904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163043 大韓每日申報 1904-08-09.pdf]] || 1904-08-09 || [[색인:대한매일신보 19040809.pdf|기존 작업 색인]]과 중복 |- | [[색인:CNTS-00048114450 大韓每日申報 1904-08-10.pdf]] || 1904-08-10 |- | [[색인:CNTS-00048114782 大韓每日申報 1904-08-11.pdf]] || 1904-08-11 |- | [[색인:CNTS-00048178680 大韓每日申報 1904-08-12.pdf]] || 1904-08-12 |- | [[색인:CNTS-00048143238 大韓每日申報 1904-08-13.pdf]] || 1904-08-13 |- | [[색인:CNTS-00048196414 大韓每日申報 1904-08-16.pdf]] || 1904-08-16 |- | [[색인:CNTS-00048175458 大韓每日申報 1904-08-17.pdf]] || 1904-08-17 |- | [[색인:CNTS-00048171812 大韓每日申報 1904-08-18.pdf]] || 1904-08-18 |- | [[색인:CNTS-00048172247 大韓每日申報 1904-08-20.pdf]] || 1904-08-20 |- | [[색인:CNTS-00048175296 大韓每日申報 1904-08-23.pdf]] || 1904-08-23 |- | [[색인:CNTS-00048174256 大韓每日申報 1904-08-24.pdf]] || 1904-08-24 |- | [[색인:CNTS-00048244659 大韓每日申報 1904-08-25.pdf]] || 1904-08-25 |- | [[색인:CNTS-00048122714 大韓每日申報 1904-08-27.pdf]] || 1904-08-27 |- | [[색인:CNTS-00048213452 大韓每日申報 1904-08-30.pdf]] || 1904-08-30 |- | [[색인:CNTS-00048123625 大韓每日申報 1904-08-31.pdf]] || 1904-08-31 |} === 1905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05742 大韓每日申報 1905-08-12.pdf]] || 1905-08-12 |- | [[색인:CNTS-00093105790 大韓每日申報 1905-08-13.pdf]] || 1905-08-13 |- | [[색인:CNTS-00093105813 大韓每日申報 1905-08-15.pdf]] || 1905-08-15 |- | [[색인:CNTS-00093105859 大韓每日申報 1905-08-16.pdf]] || 1905-08-16 |- | [[색인:CNTS-00093105912 大韓每日申報 1905-08-18.pdf]] || 1905-08-18 |- | [[색인:CNTS-00093105964 大韓每日申報 1905-08-19.pdf]] || 1905-08-19 |- | [[색인:CNTS-00093105991 大韓每日申報 1905-08-20.pdf]] || 1905-08-20 |- | [[색인:CNTS-00093106028 大韓每日申報 1905-08-22.pdf]] || 1905-08-22 |- | [[색인:CNTS-00093106064 大韓每日申報 1905-08-23.pdf]] || 1905-08-23 |- | [[색인:CNTS-00093106104 大韓每日申報 1905-08-24.pdf]] || 1905-08-24 |- | [[색인:CNTS-00093106151 大韓每日申報 1905-08-25.pdf]] || 1905-08-25 |- | [[색인:CNTS-00093106188 大韓每日申報 1905-08-27.pdf]] || 1905-08-27 |- | [[색인:CNTS-00093106235 大韓每日申報 1905-08-29.pdf]] || 1905-08-29 |- | [[색인:CNTS-00093106308 大韓每日申報 1905-08-30.pdf]] || 1905-08-30 |- | [[색인:CNTS-00093106334 大韓每日申報 1905-08-31.pdf]] || 1905-08-31 |} === 190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6470 共立新報 1906-08-25.pdf]] || 1906-08-25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 [[색인:CNTS-00093119282 大韓每日申報 1906-08-02.pdf]] || 1906-08-02 |- | [[색인:CNTS-00093119350 大韓每日申報 1906-08-03.pdf]] || 1906-08-03 |- | [[색인:CNTS-00093119383 大韓每日申報 1906-08-04.pdf]] || 1906-08-04 |- | [[색인:CNTS-00093119440 大韓每日申報 1906-08-05.pdf]] || 1906-08-05 |- | [[색인:CNTS-00093119523 大韓每日申報 1906-08-07.pdf]] || 1906-08-07 |- | [[색인:CNTS-00093119549 大韓每日申報 1906-08-08.pdf]] || 1906-08-08 |- | [[색인:CNTS-00093119591 大韓每日申報 1906-08-09.pdf]] || 1906-08-09 |- | [[색인:CNTS-00093119668 大韓每日申報 1906-08-10.pdf]] || 1906-08-10 |- | [[색인:CNTS-00093119700 大韓每日申報 1906-08-11.pdf]] || 1906-08-11 |- | [[색인:CNTS-00093119778 大韓每日申報 1906-08-12.pdf]] || 1906-08-12 |- | [[색인:CNTS-00093119850 大韓每日申報 1906-08-14.pdf]] || 1906-08-14 |- | [[색인:CNTS-00093119897 大韓每日申報 1906-08-15.pdf]] || 1906-08-15 |- | [[색인:CNTS-00093119939 大韓每日申報 1906-08-16.pdf]] || 1906-08-16 |- | [[색인:CNTS-00093119975 大韓每日申報 1906-08-17.pdf]] || 1906-08-17 |- | [[색인:CNTS-00093120026 大韓每日申報 1906-08-18.pdf]] || 1906-08-18 |- | [[색인:CNTS-00093120074 大韓每日申報 1906-08-19.pdf]] || 1906-08-19 |- | [[색인:CNTS-00093120133 大韓每日申報 1906-08-21.pdf]] || 1906-08-21 |- | [[색인:CNTS-00093120185 大韓每日申報 1906-08-22.pdf]] || 1906-08-22 |- | [[색인:CNTS-00093120212 大韓每日申報 1906-08-23.pdf]] || 1906-08-23 |- | [[색인:CNTS-00093120270 大韓每日申報 1906-08-24.pdf]] || 1906-08-24 |- | [[색인:CNTS-00093120360 大韓每日申報 1906-08-25.pdf]] || 1906-08-25 |- | [[색인:CNTS-00093120408 大韓每日申報 1906-08-26.pdf]] || 1906-08-26 |- | [[색인:CNTS-00093120461 大韓每日申報 1906-08-28.pdf]] || 1906-08-28 |- | [[색인:CNTS-00093120522 大韓每日申報 1906-08-29.pdf]] || 1906-08-29 |- | [[색인:CNTS-00093120556 大韓每日申報 1906-08-30.pdf]] || 1906-08-30 |- | [[색인:CNTS-00093120593 大韓每日申報 1906-08-31.pdf]] || 1906-08-31 |} === 190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7280 共立新報 1907-08-09.pdf ]] || 1907-08-09 |- | [[색인:CNTS-00049010957 共立新報 1907-08-16.pdf ]] || 1907-08-16 |- | [[색인:CNTS-00115097358 共立新報 1907-08-23.pdf ]] || 1907-08-23 |- | [[색인:CNTS-00115097372 共立新報 1907-08-30.pdf ]] || 1907-08-30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37172 大韓每日申報 1907-08-02.pdf]] || 1907-08-02 |- | [[색인:CNTS-00093137187 大韓每日申報 1907-08-03.pdf]] || 1907-08-03 |- | [[색인:CNTS-00093137316 大韓每日申報 1907-08-04.pdf]] || 1907-08-04 |- | [[색인:CNTS-00093137338 大韓每日申報 1907-08-06.pdf]] || 1907-08-06 |- | [[색인:CNTS-00093137480 大韓每日申報 1907-08-07.pdf]] || 1907-08-07 |- | [[색인:CNTS-00093137499 大韓每日申報 1907-08-08.pdf]] || 1907-08-08 |- | [[색인:CNTS-00093137625 大韓每日申報 1907-08-09.pdf]] || 1907-08-09 |- | [[색인:CNTS-00093137650 大韓每日申報 1907-08-10.pdf]] || 1907-08-10 |- | [[색인:CNTS-00093137777 大韓每日申報 1907-08-11.pdf]] || 1907-08-11 |- | [[색인:CNTS-00093137886 大韓每日申報 1907-08-13.pdf]] || 1907-08-13 |- | [[색인:CNTS-00093137935 大韓每日申報 1907-08-14.pdf]] || 1907-08-14 |- | [[색인:CNTS-00093137990 大韓每日申報 1907-08-15.pdf]] || 1907-08-15 |- | [[색인:CNTS-00093138042 大韓每日申報 1907-08-16.pdf]] || 1907-08-16 |- | [[색인:CNTS-00093138108 大韓每日申報 1907-08-17.pdf]] || 1907-08-17 |- | [[색인:CNTS-00093138173 大韓每日申報 1907-08-18.pdf]] || 1907-08-18 |- | [[색인:CNTS-00093138255 大韓每日申報 1907-08-20.pdf]] || 1907-08-20 |- | [[색인:CNTS-00093138323 大韓每日申報 1907-08-21.pdf]] || 1907-08-21 |- | [[색인:CNTS-00093138398 大韓每日申報 1907-08-22.pdf]] || 1907-08-22 |- | [[색인:CNTS-00093138538 大韓每日申報 1907-08-23.pdf]] || 1907-08-23 |- | [[색인:CNTS-00093138600 大韓每日申報 1907-08-24.pdf]] || 1907-08-24 |- | [[색인:CNTS-00093138631 大韓每日申報 1907-08-27.pdf]] || 1907-08-27 |- | [[색인:CNTS-00093138753 大韓每日申報 1907-08-29.pdf]] || 1907-08-29 |- | [[색인:CNTS-00093138772 大韓每日申報 1907-08-30.pdf]] || 1907-08-30 |- | [[색인:CNTS-00093138910 大韓每日申報 1907-08-31.pdf]] || 1907-08-31 |} === 190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916681 共立新報 1908-08-12.pdf ]] || 1908-08-12 |- | [[색인:CNTS-00048962815 共立新報 1908-08-19.pdf ]] || 1908-08-19 |- | [[색인:CNTS-00049012696 共立新報 1908-08-26.pdf ]] || 1908-08-26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61249 大韓每日申報 1908-08-02.pdf]] || 1908-08-02 |- | [[색인:CNTS-00093161323 大韓每日申報 1908-08-04.pdf]] || 1908-08-04 |- | [[색인:CNTS-00093161450 大韓每日申報 1908-08-05.pdf]] || 1908-08-05 |- | [[색인:CNTS-00093161494 大韓每日申報 1908-08-06.pdf]] || 1908-08-06 |- | [[색인:CNTS-00093161636 大韓每日申報 1908-08-07.pdf]] || 1908-08-07 |- | [[색인:CNTS-00093161666 大韓每日申報 1908-08-08.pdf]] || 1908-08-08 |- | [[색인:CNTS-00093161770 大韓每日申報 1908-08-09.pdf]] || 1908-08-09 |- | [[색인:CNTS-00093161841 大韓每日申報 1908-08-11.pdf]] || 1908-08-11 |- | [[색인:CNTS-00093161884 大韓每日申報 1908-08-12.pdf]] || 1908-08-12 |- | [[색인:CNTS-00093161962 大韓每日申報 1908-08-13.pdf]] || 1908-08-13 |- | [[색인:CNTS-00093162054 大韓每日申報 1908-08-14.pdf]] || 1908-08-14 |- | [[색인:CNTS-00093162125 大韓每日申報 1908-08-16.pdf]] || 1908-08-16 |- | [[색인:CNTS-00093162198 大韓每日申報 1908-08-18.pdf]] || 1908-08-18 |- | [[색인:CNTS-00093162279 大韓每日申報 1908-08-19.pdf]] || 1908-08-19 |- | [[색인:CNTS-00093162349 大韓每日申報 1908-08-20.pdf]] || 1908-08-20 |- | [[색인:CNTS-00093162447 大韓每日申報 1908-08-21.pdf]] || 1908-08-21 |- | [[색인:CNTS-00093162505 大韓每日申報 1908-08-22.pdf]] || 1908-08-22 |- | [[색인:CNTS-00093162642 大韓每日申報 1908-08-23.pdf]] || 1908-08-23 |- | [[색인:CNTS-00093162655 大韓每日申報 1908-08-25.pdf]] || 1908-08-25 |- | [[색인:CNTS-00093162740 大韓每日申報 1908-08-26.pdf]] || 1908-08-26 |- | [[색인:CNTS-00093162861 大韓每日申報 1908-08-27.pdf]] || 1908-08-27 |- | [[색인:CNTS-00093162903 大韓每日申報 1908-08-29.pdf]] || 1908-08-29 |- | [[색인:CNTS-00093162983 大韓每日申報 1908-08-30.pdf]] || 1908-08-30 |} ==== 190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83086 大韓每日申報 1909-08-03.pdf]] || 1909-08-03 |- | [[색인:CNTS-00093183168 大韓每日申報 1909-08-04.pdf]] || 1909-08-04 |- | [[색인:CNTS-00093183247 大韓每日申報 1909-08-05.pdf]] || 1909-08-05 |- | [[색인:CNTS-00093183374 大韓每日申報 1909-08-06.pdf]] || 1909-08-06 |- | [[색인:CNTS-00093183397 大韓每日申報 1909-08-07.pdf]] || 1909-08-07 |- | [[색인:CNTS-00093183472 大韓每日申報 1909-08-08.pdf]] || 1909-08-08 |- | [[색인:CNTS-00093183614 大韓每日申報 1909-08-10.pdf]] || 1909-08-10 |- | [[색인:CNTS-00093183634 大韓每日申報 1909-08-11.pdf]] || 1909-08-11 |- | [[색인:CNTS-00093183705 大韓每日申報 1909-08-12.pdf]] || 1909-08-12 |- | [[색인:CNTS-00093183789 大韓每日申報 1909-08-13.pdf]] || 1909-08-13 |- | [[색인:CNTS-00093183860 大韓每日申報 1909-08-14.pdf]] || 1909-08-14 |- | [[색인:CNTS-00093183937 大韓每日申報 1909-08-17.pdf]] || 1909-08-17 |- | [[색인:CNTS-00093184043 大韓每日申報 1909-08-18.pdf]] || 1909-08-18 |- | [[색인:CNTS-00093184073 大韓每日申報 1909-08-19.pdf]] || 1909-08-19 |- | [[색인:CNTS-00093184143 大韓每日申報 1909-08-20.pdf]] || 1909-08-20 |- | [[색인:CNTS-00093184253 大韓每日申報 1909-08-21.pdf]] || 1909-08-21 |- | [[색인:CNTS-00093184306 大韓每日申報 1909-08-22.pdf]] || 1909-08-22 |- | [[색인:CNTS-00093184382 大韓每日申報 1909-08-24.pdf]] || 1909-08-24 |- | [[색인:CNTS-00093184464 大韓每日申報 1909-08-25.pdf]] || 1909-08-25 |- | [[색인:CNTS-00093184606 大韓每日申報 1909-08-26.pdf]] || 1909-08-26 |- | [[색인:CNTS-00093184630 大韓每日申報 1909-08-27.pdf]] || 1909-08-27 |- | [[색인:CNTS-00093184730 大韓每日申報 1909-08-29.pdf]] || 1909-08-29 |- | [[색인:CNTS-00093184853 大韓每日申報 1909-08-31.pdf]] || 1909-08-31 |} === 191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208820 大韓每日申報 1910-08-03.pdf]] || 1910-08-03 |- | [[색인:CNTS-00093208906 大韓每日申報 1910-08-04.pdf]] || 1910-08-04 |- | [[색인:CNTS-00093208987 大韓每日申報 1910-08-05.pdf]] || 1910-08-05 |- | [[색인:CNTS-00093209080 大韓每日申報 1910-08-06.pdf]] || 1910-08-06 |- | [[색인:CNTS-00093209184 大韓每日申報 1910-08-07.pdf]] || 1910-08-07 |- | [[색인:CNTS-00093209270 大韓每日申報 1910-08-09.pdf]] || 1910-08-09 |- | [[색인:CNTS-00093209358 大韓每日申報 1910-08-16.pdf]] || 1910-08-16 |- | [[색인:CNTS-00093209455 大韓每日申報 1910-08-17.pdf]] || 1910-08-17 |- | [[색인:CNTS-00093209525 大韓每日申報 1910-08-26.pdf]] || 1910-08-26 |- | [[색인:CNTS-00093209617 大韓每日申報 1910-08-27.pdf]] || 1910-08-27 |- | [[색인:CNTS-00093209702 大韓每日申報 1910-08-28.pdf]] || 1910-08-28 |} == 일제강점기 (1910년대~1944년) == === 192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35903 中外日報 1927-08-02.pdf]] || 1927-08-02 |- | [[색인:CNTS-00093436018 中外日報 1927-08-03.pdf]] || 1927-08-03 |- | [[색인:CNTS-00093436273 中外日報 1927-08-04.pdf]] || 1927-08-04 |- | [[색인:CNTS-00093436345 中外日報 1927-08-05.pdf]] || 1927-08-05 |- | [[색인:CNTS-00093436458 中外日報 1927-08-06.pdf]] || 1927-08-06 |- | [[색인:CNTS-00093436542 中外日報 1927-08-07.pdf]] || 1927-08-07 |- | [[색인:CNTS-00093436729 中外日報 1927-08-08.pdf]] || 1927-08-08 |- | [[색인:CNTS-00093436826 中外日報 1927-08-09.pdf]] || 1927-08-09 |- | [[색인:CNTS-00093436990 中外日報 1927-08-10.pdf]] || 1927-08-10 |- | [[색인:CNTS-00093437060 中外日報 1927-08-11.pdf]] || 1927-08-11 |- | [[색인:CNTS-00093437217 中外日報 1927-08-12.pdf]] || 1927-08-12 |- | [[색인:CNTS-00093437321 中外日報 1927-08-13.pdf]] || 1927-08-13 |- | [[색인:CNTS-00093437485 中外日報 1927-08-14.pdf]] || 1927-08-14 |- | [[색인:CNTS-00067903192 中外日報 1927-08-15.pdf]] || 1927-08-15 |- | [[색인:CNTS-00093437608 中外日報 1927-08-16.pdf]] || 1927-08-16 |- | [[색인:CNTS-00093437823 中外日報 1927-08-17.pdf]] || 1927-08-17 |- | [[색인:CNTS-00049019603 中外日報 1927-08-18.pdf]] || 1927-08-18 |- | [[색인:CNTS-00093437884 中外日報 1927-08-19.pdf]] || 1927-08-19 |- | [[색인:CNTS-00093438026 中外日報 1927-08-20.pdf]] || 1927-08-20 |- | [[색인:CNTS-00093438159 中外日報 1927-08-21.pdf]] || 1927-08-21 |- | [[색인:CNTS-00093438241 中外日報 1927-08-22.pdf]] || 1927-08-22 |- | [[색인:CNTS-00093438432 中外日報 1927-08-23.pdf]] || 1927-08-23 |- | [[색인:CNTS-00093438476 中外日報 1927-08-24.pdf]] || 1927-08-24 |- | [[색인:CNTS-00093438705 中外日報 1927-08-25.pdf]] || 1927-08-25 |- | [[색인:CNTS-00093438717 中外日報 1927-08-26.pdf]] || 1927-08-26 |- | [[색인:CNTS-00093438861 中外日報 1927-08-27.pdf]] || 1927-08-27 |- | [[색인:CNTS-00093438989 中外日報 1927-08-28.pdf]] || 1927-08-28 |- | [[색인:CNTS-00093439087 中外日報 1927-08-29.pdf]] || 1927-08-29 |- | [[색인:CNTS-00093439245 中外日報 1927-08-30.pdf]] || 1927-08-30 |- | [[색인:CNTS-00093439415 中外日報 1927-08-31.pdf]] || 1927-08-31 |} === 192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52603 中外日報 1928-08-02.pdf]] || 1928-08-02 |- | [[색인:CNTS-00093452625 中外日報 1928-08-03.pdf]] || 1928-08-03 |- | [[색인:CNTS-00093452821 中外日報 1928-08-04.pdf]] || 1928-08-04 |- | [[색인:CNTS-00093452854 中外日報 1928-08-05.pdf]] || 1928-08-05 |- | [[색인:CNTS-00093452959 中外日報 1928-08-06.pdf]] || 1928-08-06 |- | [[색인:CNTS-00093453097 中外日報 1928-08-07.pdf]] || 1928-08-07 |- | [[색인:CNTS-00093453278 中外日報 1928-08-08.pdf]] || 1928-08-08 |- | [[색인:CNTS-00093453298 中外日報 1928-08-09.pdf]] || 1928-08-09 |- | [[색인:CNTS-00093453408 中外日報 1928-08-10.pdf]] || 1928-08-10 |- | [[색인:CNTS-00093453548 中外日報 1928-08-11.pdf]] || 1928-08-11 |- | [[색인:CNTS-00093453626 中外日報 1928-08-12.pdf]] || 1928-08-12 |- | [[색인:CNTS-00093453817 中外日報 1928-08-13.pdf]] || 1928-08-13 |- | [[색인:CNTS-00093453841 中外日報 1928-08-14.pdf]] || 1928-08-14 |- | [[색인:CNTS-00093453984 中外日報 1928-08-15.pdf]] || 1928-08-15 |- | [[색인:CNTS-00093454051 中外日報 1928-08-16.pdf]] || 1928-08-16 |- | [[색인:CNTS-00093454175 中外日報 1928-08-17.pdf]] || 1928-08-17 |- | [[색인:CNTS-00093454330 中外日報 1928-08-18.pdf]] || 1928-08-18 |- | [[색인:CNTS-00093454426 中外日報 1928-08-19.pdf]] || 1928-08-19 |- | [[색인:CNTS-00093454626 中外日報 1928-08-20.pdf]] || 1928-08-20 |- | [[색인:CNTS-00093454743 中外日報 1928-08-21.pdf]] || 1928-08-21 |- | [[색인:CNTS-00093454766 中外日報 1928-08-22.pdf]] || 1928-08-22 |- | [[색인:CNTS-00093454896 中外日報 1928-08-23.pdf]] || 1928-08-23 |- | [[색인:CNTS-00093455081 中外日報 1928-08-24.pdf]] || 1928-08-24 |- | [[색인:CNTS-00093455216 中外日報 1928-08-25.pdf]] || 1928-08-25 |- | [[색인:CNTS-00048208555 中外日報 1928-08-26.pdf]] || 1928-08-26 |- | [[색인:CNTS-00093455222 中外日報 1928-08-27.pdf]] || 1928-08-27 |- | [[색인:CNTS-00093455440 中外日報 1928-08-28.pdf]] || 1928-08-28 |- | [[색인:CNTS-00093455471 中外日報 1928-08-29.pdf]] || 1928-08-29 |- | [[색인:CNTS-00093455627 中外日報 1928-08-30.pdf]] || 1928-08-30 |- | [[색인:CNTS-00093455677 中外日報 1928-08-31.pdf]] || 1928-08-31 |} === 192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48574467 中外日報 1929-08-02.pdf]] || 1929-08-02 |- | [[색인:CNTS-00049033203 中外日報 1929-08-03.pdf]] || 1929-08-03 |- | [[색인:CNTS-00048201752 中外日報 1929-08-04.pdf]] || 1929-08-04 |- | [[색인:CNTS-00067908798 中外日報 1929-08-05.pdf]] || 1929-08-05 |- | [[색인:CNTS-00048138072 中外日報 1929-08-06.pdf]] || 1929-08-06 |- | [[색인:CNTS-00067908818 中外日報 1929-08-07.pdf]] || 1929-08-07 |- | [[색인:CNTS-00048168260 中外日報 1929-08-08.pdf]] || 1929-08-08 |- | [[색인:CNTS-00067908837 中外日報 1929-08-09.pdf]] || 1929-08-09 |- | [[색인:CNTS-00048241910 中外日報 1929-08-10.pdf]] || 1929-08-10 |- | [[색인:CNTS-00067908869 中外日報 1929-08-11.pdf]] || 1929-08-11 |- | [[색인:CNTS-00048881881 中外日報 1929-08-12.pdf]] || 1929-08-12 |- | [[색인:CNTS-00048384760 中外日報 1929-08-13.pdf]] || 1929-08-13 |- | [[색인:CNTS-00049008235 中外日報 1929-08-14.pdf]] || 1929-08-14 |- | [[색인:CNTS-00048856789 中外日報 1929-08-15.pdf]] || 1929-08-15 |- | [[색인:CNTS-00067908928 中外日報 1929-08-16.pdf]] || 1929-08-16 |- | [[색인:CNTS-00048647463 中外日報 1929-08-17.pdf]] || 1929-08-17 |- | [[색인:CNTS-00048840753 中外日報 1929-08-18.pdf]] || 1929-08-18 |- | [[색인:CNTS-00048538506 中外日報 1929-08-19.pdf]] || 1929-08-19 |- | [[색인:CNTS-00067908976 中外日報 1929-08-20.pdf]] || 1929-08-20 |- | [[색인:CNTS-00048557092 中外日報 1929-08-21.pdf]] || 1929-08-21 |- | [[색인:CNTS-00067908996 中外日報 1929-08-22.pdf]] || 1929-08-22 |- | [[색인:CNTS-00048714889 中外日報 1929-08-23.pdf]] || 1929-08-23 |- | [[색인:CNTS-00067909007 中外日報 1929-08-24.pdf]] || 1929-08-24 |- | [[색인:CNTS-00048206485 中外日報 1929-08-25.pdf]] || 1929-08-25 |- | [[색인:CNTS-00067909031 中外日報 1929-08-26.pdf]] || 1929-08-26 |- | [[색인:CNTS-00067909037 中外日報 1929-08-27.pdf]] || 1929-08-27 |- | [[색인:CNTS-00048111230 中外日報 1929-08-28.pdf]] || 1929-08-28 |- | [[색인:CNTS-00048143182 中外日報 1929-08-29.pdf]] || 1929-08-29 |- | [[색인:CNTS-00048326024 中外日報 1929-08-30.pdf]] || 1929-08-30 |- | [[색인:CNTS-00048677493 中外日報 1929-08-31.pdf]] || 1929-08-31 |} === 193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503617 中外日報 1930-08-02.pdf]] || 1930-08-02 |- | [[색인:CNTS-00093503976 中外日報 1930-08-03.pdf]] || 1930-08-03 |- | [[색인:CNTS-00093504113 中外日報 1930-08-04.pdf]] || 1930-08-04 |- | [[색인:CNTS-00093504212 中外日報 1930-08-05.pdf]] || 1930-08-05 |- | [[색인:CNTS-00093504458 中外日報 1930-08-06.pdf]] || 1930-08-06 |- | [[색인:CNTS-00093504624 中外日報 1930-08-07.pdf]] || 1930-08-07 |- | [[색인:CNTS-00093504818 中外日報 1930-08-08.pdf]] || 1930-08-08 |- | [[색인:CNTS-00093504966 中外日報 1930-08-09.pdf]] || 1930-08-09 |- | [[색인CNTS-00093505163 中外日報 1930-08-10.pdf]] || 1930-08-10 |- | [[색인:CNTS-00093505440 中外日報 1930-08-11.pdf]] || 1930-08-11 |- | [[색인:CNTS-00093505465 中外日報 1930-08-12.pdf]] || 1930-08-12 |- | [[색인:CNTS-00093505651 中外日報 1930-08-13.pdf]] || 1930-08-13 |- | [[색인:CNTS-00093505855 中外日報 1930-08-14.pdf]] || 1930-08-14 |- | [[색인:CNTS-00093506209 中外日報 1930-08-15.pdf]] || 1930-08-15 |- | [[색인:CNTS-00093506257 中外日報 1930-08-16.pdf]] || 1930-08-16 |- | [[색인:CNTS-00093506449 中外日報 1930-08-17.pdf]] || 1930-08-17 |- | [[색인:CNTS-00093506671 中外日報 1930-08-18.pdf]] || 1930-08-18 |- | [[색인:CNTS-00093506826 中外日報 1930-08-19.pdf]] || 1930-08-19 |- | [[색인:CNTS-00093506985 中外日報 1930-08-20.pdf]] || 1930-08-20 |- | [[색인:CNTS-00093507200 中外日報 1930-08-21.pdf]] || 1930-08-21 |- | [[색인:CNTS-00093507315 中外日報 1930-08-22.pdf]] || 1930-08-22 |- | [[색인:CNTS-00093507579 中外日報 1930-08-23.pdf]] || 1930-08-23 |- | [[색인:CNTS-00093507755 中外日報 1930-08-24.pdf]] || 1930-08-24 |- | [[색인:CNTS-00093507992 中外日報 1930-08-25.pdf]] || 1930-08-25 |- | [[색인:CNTS-00093508063 中外日報 1930-08-26.pdf]] || 1930-08-26 |- | [[색인:CNTS-00093508408 中外日報 1930-08-27.pdf]] || 1930-08-27 |- | [[색인:CNTS-00093508439 中外日報 1930-08-28.pdf]] || 1930-08-28 |- | [[색인:CNTS-00093508640 中外日報 1930-08-29.pdf]] || 1930-08-29 |- | [[색인:CNTS-00093509028 中外日報 1930-08-30.pdf]] || 1930-08-30 |- | [[색인:CNTS-00093509206 中外日報 1930-08-31.pdf]] || 1930-08-31 |} == 해방 이후 (1945년~) == === 194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298564 中外新報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12225 中外新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122434 中外新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518378 中外新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48302059 中外新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154198 中外新報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54767 中外新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691782 中外新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153694 中外新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558988 中外新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152638 中外新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120107 中外新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51813 中外新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311969 中外新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48133423 中外新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725279 中外新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51566 中外新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48184428 中外新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133132 中外新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631026 中外新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311721 中外新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205410 中外新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132555 中外新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273158 中外新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717925 中外新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201950 中外新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266013 中外新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113773 中外新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0957 中央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65300964 中央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65301033 中央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65301081 中央新聞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65301090 中央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65301123 中央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65301149 中央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65301206 中央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65301230 中央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65301270 中央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65301294 中央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65301347 中央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65301364 中央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65301388 中央新聞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65301417 中央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65301451 中央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65301504 中央新聞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65301519 中央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65301552 中央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65301616 中央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65301638 中央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65301659 中央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50396 全國勞動者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344389 全國勞動者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84456 大東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07244 大東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476528 大東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952811 大東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205480 大東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96196 大東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202016 大東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938609 大東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194546 大東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204672 大東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264306 大東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92000 大東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264645 大東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194234 大東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60637 大東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200979 大東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352004 大東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177785 大東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196620 大東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980138 大東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195431 大東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979226 大東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664145 大東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191302 大東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272432 大東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30152 大邱時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109330161 大邱時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109330231 大邱時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109330275 大邱時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109330320 大邱時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109330401 大邱時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109330427 大邱時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109330519 大邱時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109330553 大邱時報 1946-08-12.pdf]] || 1946-08-12 |- | [[색인:CNTS-00109330599 大邱時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109330651 大邱時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109330756 大邱時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109330820 大邱時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109330840 大邱時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109330909 大邱時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109330986 大邱時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109331132 大邱時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109331312 大邱時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109331318 大邱時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109331506 大邱時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109331588 大邱時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109331648 大邱時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109331700 大邱時報 1946-08-26.pdf]] || 1946-08-26 |- | [[색인:CNTS-00109331774 大邱時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109331809 大邱時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109331883 大邱時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109331955 大邱時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109331987 大邱時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가정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76758028 家政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76758066 家政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76758088 家政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76758107 家政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76758140 家政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76758163 家政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76758216 家政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76758251 家政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76758258 家政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76758292 家政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76758328 家政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76758355 家政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76758388 家政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76758409 家政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76758428 家政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76758470 家政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76758482 家政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76758508 家政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76758538 家政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76758570 家政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76758602 家政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76758634 家政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76758665 家政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76758694 家政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76758715 家政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194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5741 中央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5305777 中央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65305845 中央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5305862 中央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65305883 中央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5305933 中央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5305943 中央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5305981 中央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65306011 中央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5306082 中央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5306101 中央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65306129 中央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5306182 中央新聞 1947-08-16.pdf]] || 1947-08-16 |- | [[색인:CNTS-00065306192 中央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65306247 中央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65306322 中央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5306346 中央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5306380 中央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5306419 中央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65306446 中央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5306506 中央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5306533 中央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65306562 中央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65306602 中央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5306647 中央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65306658 中央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광명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469644 光明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48191659 光明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88428 光明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48800666 光明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205304 光明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48667932 光明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48336548 光明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48800046 光明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00611 光明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7982416 光明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48360276 光明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30523 全國勞動者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colspan="3" | 국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3752839 國際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13752882 國際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113752887 國際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13752928 國際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13752951 國際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13752999 國際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13753042 國際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13753082 國際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13753106 國際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13753130 國際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13753157 國際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96209 大東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7993445 大東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02145 大東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7993450 大東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194627 大東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7993458 大東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7993459 大東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7993461 大東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64378 大東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48192077 大東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7993472 大東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48485812 大東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7993477 大東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48264717 大東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48194267 大東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7993488 大東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7993493 大東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7993499 大東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48201041 大東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7993503 大東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7993508 大東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48177810 大東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48196686 大東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7993523 大東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48176217 大東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46354 大邱時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09346407 大邱時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09346456 大邱時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09346513 大邱時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09346563 大邱時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09346668 大邱時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09346702 大邱時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09346752 大邱時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09346822 大邱時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09346881 大邱時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109346882 大邱時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109347085 大邱時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109347186 大邱時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109347267 大邱時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109347401 大邱時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109347461 大邱時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109347617 大邱時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109347653 大邱時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109347678 大邱時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109347762 大邱時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109347855 大邱時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109347938 大邱時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109348003 大邱時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64215 大韓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64445 大韓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64465 大韓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64514 大韓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64536 大韓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64752 大韓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64816 大韓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64824 大韓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65070 大韓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65094 大韓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65150 大韓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65374 大韓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65401 大韓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65655 大韓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65675 大韓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65705 大韓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65755 大韓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65966 大韓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65999 大韓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66075 大韓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66265 大韓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66313 大韓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1257 婦人新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1490 婦人新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81656 婦人新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1788 婦人新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1929 婦人新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2236 婦人新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2279 婦人新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2526 婦人新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2699 婦人新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2973 婦人新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3027 婦人新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3068 婦人新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3319 婦人新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3415 婦人新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3521 婦人新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3880 婦人新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3908 婦人新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4225 婦人新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4320 婦人新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4522 婦人新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4617 婦人新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4918 婦人新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5023 婦人新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5074 婦人新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5392 婦人新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녀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6064 婦女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6270 婦女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6387 婦女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6462 婦女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6809 婦女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6980 婦女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7006 婦女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7138 婦女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7365 婦女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7546 婦女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7571 婦女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7838 婦女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7930 婦女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8290 婦女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8474 婦女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8522 婦女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8824 婦女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8950 婦女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9091 婦女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9274 婦女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9404 婦女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9429 婦女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9645 婦女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9822 婦女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41346 嶺南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8241400 嶺南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8241596 嶺南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8241697 嶺南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241857 嶺南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241963 嶺南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242196 嶺南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242387 嶺南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229349 嶺南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229399 嶺南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229607 嶺南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229906 嶺南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229994 嶺南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230295 嶺南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230530 嶺南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230617 嶺南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230867 嶺南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230917 嶺南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231192 嶺南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231446 嶺南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231498 嶺南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231757 嶺南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231819 嶺南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232049 嶺南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232407 嶺南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194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남조선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4965763 南朝鮮民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114965819 南朝鮮民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14965866 南朝鮮民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114965906 南朝鮮民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114965972 南朝鮮民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114966016 南朝鮮民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114966021 南朝鮮民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114966066 南朝鮮民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114966114 南朝鮮民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114966161 南朝鮮民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114966205 南朝鮮民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114966218 南朝鮮民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114966247 南朝鮮民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114966288 南朝鮮民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114966339 南朝鮮民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114966379 南朝鮮民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114966431 南朝鮮民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114966451 南朝鮮民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114966497 南朝鮮民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114966533 南朝鮮民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114966591 南朝鮮民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114966597 南朝鮮民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114966640 南朝鮮民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816953 大東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62773 大邱時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09362798 大邱時報 1948-08-05.pdf]] || 1948-08-05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08156 大韓日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08358 大韓日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08728 大韓日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09203 大韓日報 1948-08-09.pdf]] || 1948-08-09 |- | [[색인:CNTS-00088009428 大韓日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09801 大韓日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10349 大韓日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10702 大韓日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10754 大韓日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11046 大韓日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11400 大韓日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11883 大韓日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12502 大韓日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13332 大韓日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13415 大韓日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14017 大韓日報 1948-08-23.pdf]] || 1948-08-23 |- | [[색인:CNTS-00088014510 大韓日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14922 大韓日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15512 大韓日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16242 大韓日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16332 大韓日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16766 大韓日報 1948-08-30.pdf]] || 1948-08-30 |- | [[색인:CNTS-00088017406 大韓日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34809 婦人新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088035078 婦人新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35179 婦人新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35426 婦人新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035589 婦人新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35911 婦人新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036039 婦人新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088036150 婦人新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36275 婦人新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36533 婦人新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36683 婦人新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36934 婦人新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36976 婦人新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37086 婦人新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37377 婦人新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37462 婦人新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37727 婦人新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37901 婦人新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37982 婦人新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38263 婦人新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38604 婦人新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38652 婦人新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038775 婦人新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39052 婦人新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39315 婦人新報 1948-08-31.pdf]] || 1948-08-31 |} === 194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72035 嶺南日報 1949-08-04.pdf]] || 1949-08-04 |- | [[색인:CNTS-00088272210 嶺南日報 1949-08-05.pdf]] || 1949-08-05 |- | [[색인:CNTS-00088272505 嶺南日報 1949-08-06.pdf]] || 1949-08-06 |- | [[색인:CNTS-00088272618 嶺南日報 1949-08-10.pdf]] || 1949-08-10 |- | [[색인:CNTS-00088272811 嶺南日報 1949-08-11.pdf]] || 1949-08-11 |- | [[색인:CNTS-00088272989 嶺南日報 1949-08-12.pdf]] || 1949-08-12 |- | [[색인:CNTS-00088273263 嶺南日報 1949-08-13.pdf]] || 1949-08-13 |- | [[색인:CNTS-00088273477 嶺南日報 1949-08-15.pdf]] || 1949-08-15 |- | [[색인:CNTS-00088273600 嶺南日報 1949-08-17.pdf]] || 1949-08-17 |- | [[색인:CNTS-00088273770 嶺南日報 1949-08-19.pdf]] || 1949-08-19 |- | [[색인:CNTS-00088273980 嶺南日報 1949-08-20.pdf]] || 1949-08-20 |- | [[색인:CNTS-00088274307 嶺南日報 1949-08-21.pdf]] || 1949-08-21 |- | [[색인:CNTS-00088274513 嶺南日報 1949-08-23.pdf]] || 1949-08-23 |- | [[색인:CNTS-00088274772 嶺南日報 1949-08-25.pdf]] || 1949-08-25 |- | [[색인:CNTS-00088274989 嶺南日報 1949-08-26.pdf]] || 1949-08-26 |- | [[색인:CNTS-00088275240 嶺南日報 1949-08-27.pdf]] || 1949-08-27 |- | [[색인:CNTS-00088275487 嶺南日報 1949-08-28.pdf]] || 1949-08-28 |- | [[색인:CNTS-00088275705 嶺南日報 1949-08-30.pdf]] || 1949-08-30 |- | [[색인:CNTS-00088276098 嶺南日報 1949-08-31.pdf]] || 1949-08-31 |} kfg7doa4s060w2ind5vsq8r2mjd8oz7 392568 392567 2025-06-25T16:44:41Z Aspere 5453 /* 1946년 */ 392568 wikitext text/x-wiki == 범례 == * 한자 ** 국한문 혼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O ** 제목이나 고유명사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 * 옛한글 ** 아래아 등 현대의 표기와 현저하게 다른 경우 O ** 아래아는 소멸되었으나 일부 특정 글자("또"를 "ᄯᅩ"로 적는 등)에서만 사용하는 경우 △ == 개화기 (~1900년대) == === 1904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163043 大韓每日申報 1904-08-09.pdf]] || 1904-08-09 || [[색인:대한매일신보 19040809.pdf|기존 작업 색인]]과 중복 |- | [[색인:CNTS-00048114450 大韓每日申報 1904-08-10.pdf]] || 1904-08-10 |- | [[색인:CNTS-00048114782 大韓每日申報 1904-08-11.pdf]] || 1904-08-11 |- | [[색인:CNTS-00048178680 大韓每日申報 1904-08-12.pdf]] || 1904-08-12 |- | [[색인:CNTS-00048143238 大韓每日申報 1904-08-13.pdf]] || 1904-08-13 |- | [[색인:CNTS-00048196414 大韓每日申報 1904-08-16.pdf]] || 1904-08-16 |- | [[색인:CNTS-00048175458 大韓每日申報 1904-08-17.pdf]] || 1904-08-17 |- | [[색인:CNTS-00048171812 大韓每日申報 1904-08-18.pdf]] || 1904-08-18 |- | [[색인:CNTS-00048172247 大韓每日申報 1904-08-20.pdf]] || 1904-08-20 |- | [[색인:CNTS-00048175296 大韓每日申報 1904-08-23.pdf]] || 1904-08-23 |- | [[색인:CNTS-00048174256 大韓每日申報 1904-08-24.pdf]] || 1904-08-24 |- | [[색인:CNTS-00048244659 大韓每日申報 1904-08-25.pdf]] || 1904-08-25 |- | [[색인:CNTS-00048122714 大韓每日申報 1904-08-27.pdf]] || 1904-08-27 |- | [[색인:CNTS-00048213452 大韓每日申報 1904-08-30.pdf]] || 1904-08-30 |- | [[색인:CNTS-00048123625 大韓每日申報 1904-08-31.pdf]] || 1904-08-31 |} === 1905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05742 大韓每日申報 1905-08-12.pdf]] || 1905-08-12 |- | [[색인:CNTS-00093105790 大韓每日申報 1905-08-13.pdf]] || 1905-08-13 |- | [[색인:CNTS-00093105813 大韓每日申報 1905-08-15.pdf]] || 1905-08-15 |- | [[색인:CNTS-00093105859 大韓每日申報 1905-08-16.pdf]] || 1905-08-16 |- | [[색인:CNTS-00093105912 大韓每日申報 1905-08-18.pdf]] || 1905-08-18 |- | [[색인:CNTS-00093105964 大韓每日申報 1905-08-19.pdf]] || 1905-08-19 |- | [[색인:CNTS-00093105991 大韓每日申報 1905-08-20.pdf]] || 1905-08-20 |- | [[색인:CNTS-00093106028 大韓每日申報 1905-08-22.pdf]] || 1905-08-22 |- | [[색인:CNTS-00093106064 大韓每日申報 1905-08-23.pdf]] || 1905-08-23 |- | [[색인:CNTS-00093106104 大韓每日申報 1905-08-24.pdf]] || 1905-08-24 |- | [[색인:CNTS-00093106151 大韓每日申報 1905-08-25.pdf]] || 1905-08-25 |- | [[색인:CNTS-00093106188 大韓每日申報 1905-08-27.pdf]] || 1905-08-27 |- | [[색인:CNTS-00093106235 大韓每日申報 1905-08-29.pdf]] || 1905-08-29 |- | [[색인:CNTS-00093106308 大韓每日申報 1905-08-30.pdf]] || 1905-08-30 |- | [[색인:CNTS-00093106334 大韓每日申報 1905-08-31.pdf]] || 1905-08-31 |} === 190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6470 共立新報 1906-08-25.pdf]] || 1906-08-25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 [[색인:CNTS-00093119282 大韓每日申報 1906-08-02.pdf]] || 1906-08-02 |- | [[색인:CNTS-00093119350 大韓每日申報 1906-08-03.pdf]] || 1906-08-03 |- | [[색인:CNTS-00093119383 大韓每日申報 1906-08-04.pdf]] || 1906-08-04 |- | [[색인:CNTS-00093119440 大韓每日申報 1906-08-05.pdf]] || 1906-08-05 |- | [[색인:CNTS-00093119523 大韓每日申報 1906-08-07.pdf]] || 1906-08-07 |- | [[색인:CNTS-00093119549 大韓每日申報 1906-08-08.pdf]] || 1906-08-08 |- | [[색인:CNTS-00093119591 大韓每日申報 1906-08-09.pdf]] || 1906-08-09 |- | [[색인:CNTS-00093119668 大韓每日申報 1906-08-10.pdf]] || 1906-08-10 |- | [[색인:CNTS-00093119700 大韓每日申報 1906-08-11.pdf]] || 1906-08-11 |- | [[색인:CNTS-00093119778 大韓每日申報 1906-08-12.pdf]] || 1906-08-12 |- | [[색인:CNTS-00093119850 大韓每日申報 1906-08-14.pdf]] || 1906-08-14 |- | [[색인:CNTS-00093119897 大韓每日申報 1906-08-15.pdf]] || 1906-08-15 |- | [[색인:CNTS-00093119939 大韓每日申報 1906-08-16.pdf]] || 1906-08-16 |- | [[색인:CNTS-00093119975 大韓每日申報 1906-08-17.pdf]] || 1906-08-17 |- | [[색인:CNTS-00093120026 大韓每日申報 1906-08-18.pdf]] || 1906-08-18 |- | [[색인:CNTS-00093120074 大韓每日申報 1906-08-19.pdf]] || 1906-08-19 |- | [[색인:CNTS-00093120133 大韓每日申報 1906-08-21.pdf]] || 1906-08-21 |- | [[색인:CNTS-00093120185 大韓每日申報 1906-08-22.pdf]] || 1906-08-22 |- | [[색인:CNTS-00093120212 大韓每日申報 1906-08-23.pdf]] || 1906-08-23 |- | [[색인:CNTS-00093120270 大韓每日申報 1906-08-24.pdf]] || 1906-08-24 |- | [[색인:CNTS-00093120360 大韓每日申報 1906-08-25.pdf]] || 1906-08-25 |- | [[색인:CNTS-00093120408 大韓每日申報 1906-08-26.pdf]] || 1906-08-26 |- | [[색인:CNTS-00093120461 大韓每日申報 1906-08-28.pdf]] || 1906-08-28 |- | [[색인:CNTS-00093120522 大韓每日申報 1906-08-29.pdf]] || 1906-08-29 |- | [[색인:CNTS-00093120556 大韓每日申報 1906-08-30.pdf]] || 1906-08-30 |- | [[색인:CNTS-00093120593 大韓每日申報 1906-08-31.pdf]] || 1906-08-31 |} === 190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7280 共立新報 1907-08-09.pdf ]] || 1907-08-09 |- | [[색인:CNTS-00049010957 共立新報 1907-08-16.pdf ]] || 1907-08-16 |- | [[색인:CNTS-00115097358 共立新報 1907-08-23.pdf ]] || 1907-08-23 |- | [[색인:CNTS-00115097372 共立新報 1907-08-30.pdf ]] || 1907-08-30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37172 大韓每日申報 1907-08-02.pdf]] || 1907-08-02 |- | [[색인:CNTS-00093137187 大韓每日申報 1907-08-03.pdf]] || 1907-08-03 |- | [[색인:CNTS-00093137316 大韓每日申報 1907-08-04.pdf]] || 1907-08-04 |- | [[색인:CNTS-00093137338 大韓每日申報 1907-08-06.pdf]] || 1907-08-06 |- | [[색인:CNTS-00093137480 大韓每日申報 1907-08-07.pdf]] || 1907-08-07 |- | [[색인:CNTS-00093137499 大韓每日申報 1907-08-08.pdf]] || 1907-08-08 |- | [[색인:CNTS-00093137625 大韓每日申報 1907-08-09.pdf]] || 1907-08-09 |- | [[색인:CNTS-00093137650 大韓每日申報 1907-08-10.pdf]] || 1907-08-10 |- | [[색인:CNTS-00093137777 大韓每日申報 1907-08-11.pdf]] || 1907-08-11 |- | [[색인:CNTS-00093137886 大韓每日申報 1907-08-13.pdf]] || 1907-08-13 |- | [[색인:CNTS-00093137935 大韓每日申報 1907-08-14.pdf]] || 1907-08-14 |- | [[색인:CNTS-00093137990 大韓每日申報 1907-08-15.pdf]] || 1907-08-15 |- | [[색인:CNTS-00093138042 大韓每日申報 1907-08-16.pdf]] || 1907-08-16 |- | [[색인:CNTS-00093138108 大韓每日申報 1907-08-17.pdf]] || 1907-08-17 |- | [[색인:CNTS-00093138173 大韓每日申報 1907-08-18.pdf]] || 1907-08-18 |- | [[색인:CNTS-00093138255 大韓每日申報 1907-08-20.pdf]] || 1907-08-20 |- | [[색인:CNTS-00093138323 大韓每日申報 1907-08-21.pdf]] || 1907-08-21 |- | [[색인:CNTS-00093138398 大韓每日申報 1907-08-22.pdf]] || 1907-08-22 |- | [[색인:CNTS-00093138538 大韓每日申報 1907-08-23.pdf]] || 1907-08-23 |- | [[색인:CNTS-00093138600 大韓每日申報 1907-08-24.pdf]] || 1907-08-24 |- | [[색인:CNTS-00093138631 大韓每日申報 1907-08-27.pdf]] || 1907-08-27 |- | [[색인:CNTS-00093138753 大韓每日申報 1907-08-29.pdf]] || 1907-08-29 |- | [[색인:CNTS-00093138772 大韓每日申報 1907-08-30.pdf]] || 1907-08-30 |- | [[색인:CNTS-00093138910 大韓每日申報 1907-08-31.pdf]] || 1907-08-31 |} === 190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916681 共立新報 1908-08-12.pdf ]] || 1908-08-12 |- | [[색인:CNTS-00048962815 共立新報 1908-08-19.pdf ]] || 1908-08-19 |- | [[색인:CNTS-00049012696 共立新報 1908-08-26.pdf ]] || 1908-08-26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61249 大韓每日申報 1908-08-02.pdf]] || 1908-08-02 |- | [[색인:CNTS-00093161323 大韓每日申報 1908-08-04.pdf]] || 1908-08-04 |- | [[색인:CNTS-00093161450 大韓每日申報 1908-08-05.pdf]] || 1908-08-05 |- | [[색인:CNTS-00093161494 大韓每日申報 1908-08-06.pdf]] || 1908-08-06 |- | [[색인:CNTS-00093161636 大韓每日申報 1908-08-07.pdf]] || 1908-08-07 |- | [[색인:CNTS-00093161666 大韓每日申報 1908-08-08.pdf]] || 1908-08-08 |- | [[색인:CNTS-00093161770 大韓每日申報 1908-08-09.pdf]] || 1908-08-09 |- | [[색인:CNTS-00093161841 大韓每日申報 1908-08-11.pdf]] || 1908-08-11 |- | [[색인:CNTS-00093161884 大韓每日申報 1908-08-12.pdf]] || 1908-08-12 |- | [[색인:CNTS-00093161962 大韓每日申報 1908-08-13.pdf]] || 1908-08-13 |- | [[색인:CNTS-00093162054 大韓每日申報 1908-08-14.pdf]] || 1908-08-14 |- | [[색인:CNTS-00093162125 大韓每日申報 1908-08-16.pdf]] || 1908-08-16 |- | [[색인:CNTS-00093162198 大韓每日申報 1908-08-18.pdf]] || 1908-08-18 |- | [[색인:CNTS-00093162279 大韓每日申報 1908-08-19.pdf]] || 1908-08-19 |- | [[색인:CNTS-00093162349 大韓每日申報 1908-08-20.pdf]] || 1908-08-20 |- | [[색인:CNTS-00093162447 大韓每日申報 1908-08-21.pdf]] || 1908-08-21 |- | [[색인:CNTS-00093162505 大韓每日申報 1908-08-22.pdf]] || 1908-08-22 |- | [[색인:CNTS-00093162642 大韓每日申報 1908-08-23.pdf]] || 1908-08-23 |- | [[색인:CNTS-00093162655 大韓每日申報 1908-08-25.pdf]] || 1908-08-25 |- | [[색인:CNTS-00093162740 大韓每日申報 1908-08-26.pdf]] || 1908-08-26 |- | [[색인:CNTS-00093162861 大韓每日申報 1908-08-27.pdf]] || 1908-08-27 |- | [[색인:CNTS-00093162903 大韓每日申報 1908-08-29.pdf]] || 1908-08-29 |- | [[색인:CNTS-00093162983 大韓每日申報 1908-08-30.pdf]] || 1908-08-30 |} ==== 190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83086 大韓每日申報 1909-08-03.pdf]] || 1909-08-03 |- | [[색인:CNTS-00093183168 大韓每日申報 1909-08-04.pdf]] || 1909-08-04 |- | [[색인:CNTS-00093183247 大韓每日申報 1909-08-05.pdf]] || 1909-08-05 |- | [[색인:CNTS-00093183374 大韓每日申報 1909-08-06.pdf]] || 1909-08-06 |- | [[색인:CNTS-00093183397 大韓每日申報 1909-08-07.pdf]] || 1909-08-07 |- | [[색인:CNTS-00093183472 大韓每日申報 1909-08-08.pdf]] || 1909-08-08 |- | [[색인:CNTS-00093183614 大韓每日申報 1909-08-10.pdf]] || 1909-08-10 |- | [[색인:CNTS-00093183634 大韓每日申報 1909-08-11.pdf]] || 1909-08-11 |- | [[색인:CNTS-00093183705 大韓每日申報 1909-08-12.pdf]] || 1909-08-12 |- | [[색인:CNTS-00093183789 大韓每日申報 1909-08-13.pdf]] || 1909-08-13 |- | [[색인:CNTS-00093183860 大韓每日申報 1909-08-14.pdf]] || 1909-08-14 |- | [[색인:CNTS-00093183937 大韓每日申報 1909-08-17.pdf]] || 1909-08-17 |- | [[색인:CNTS-00093184043 大韓每日申報 1909-08-18.pdf]] || 1909-08-18 |- | [[색인:CNTS-00093184073 大韓每日申報 1909-08-19.pdf]] || 1909-08-19 |- | [[색인:CNTS-00093184143 大韓每日申報 1909-08-20.pdf]] || 1909-08-20 |- | [[색인:CNTS-00093184253 大韓每日申報 1909-08-21.pdf]] || 1909-08-21 |- | [[색인:CNTS-00093184306 大韓每日申報 1909-08-22.pdf]] || 1909-08-22 |- | [[색인:CNTS-00093184382 大韓每日申報 1909-08-24.pdf]] || 1909-08-24 |- | [[색인:CNTS-00093184464 大韓每日申報 1909-08-25.pdf]] || 1909-08-25 |- | [[색인:CNTS-00093184606 大韓每日申報 1909-08-26.pdf]] || 1909-08-26 |- | [[색인:CNTS-00093184630 大韓每日申報 1909-08-27.pdf]] || 1909-08-27 |- | [[색인:CNTS-00093184730 大韓每日申報 1909-08-29.pdf]] || 1909-08-29 |- | [[색인:CNTS-00093184853 大韓每日申報 1909-08-31.pdf]] || 1909-08-31 |} === 191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208820 大韓每日申報 1910-08-03.pdf]] || 1910-08-03 |- | [[색인:CNTS-00093208906 大韓每日申報 1910-08-04.pdf]] || 1910-08-04 |- | [[색인:CNTS-00093208987 大韓每日申報 1910-08-05.pdf]] || 1910-08-05 |- | [[색인:CNTS-00093209080 大韓每日申報 1910-08-06.pdf]] || 1910-08-06 |- | [[색인:CNTS-00093209184 大韓每日申報 1910-08-07.pdf]] || 1910-08-07 |- | [[색인:CNTS-00093209270 大韓每日申報 1910-08-09.pdf]] || 1910-08-09 |- | [[색인:CNTS-00093209358 大韓每日申報 1910-08-16.pdf]] || 1910-08-16 |- | [[색인:CNTS-00093209455 大韓每日申報 1910-08-17.pdf]] || 1910-08-17 |- | [[색인:CNTS-00093209525 大韓每日申報 1910-08-26.pdf]] || 1910-08-26 |- | [[색인:CNTS-00093209617 大韓每日申報 1910-08-27.pdf]] || 1910-08-27 |- | [[색인:CNTS-00093209702 大韓每日申報 1910-08-28.pdf]] || 1910-08-28 |} == 일제강점기 (1910년대~1944년) == === 192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35903 中外日報 1927-08-02.pdf]] || 1927-08-02 |- | [[색인:CNTS-00093436018 中外日報 1927-08-03.pdf]] || 1927-08-03 |- | [[색인:CNTS-00093436273 中外日報 1927-08-04.pdf]] || 1927-08-04 |- | [[색인:CNTS-00093436345 中外日報 1927-08-05.pdf]] || 1927-08-05 |- | [[색인:CNTS-00093436458 中外日報 1927-08-06.pdf]] || 1927-08-06 |- | [[색인:CNTS-00093436542 中外日報 1927-08-07.pdf]] || 1927-08-07 |- | [[색인:CNTS-00093436729 中外日報 1927-08-08.pdf]] || 1927-08-08 |- | [[색인:CNTS-00093436826 中外日報 1927-08-09.pdf]] || 1927-08-09 |- | [[색인:CNTS-00093436990 中外日報 1927-08-10.pdf]] || 1927-08-10 |- | [[색인:CNTS-00093437060 中外日報 1927-08-11.pdf]] || 1927-08-11 |- | [[색인:CNTS-00093437217 中外日報 1927-08-12.pdf]] || 1927-08-12 |- | [[색인:CNTS-00093437321 中外日報 1927-08-13.pdf]] || 1927-08-13 |- | [[색인:CNTS-00093437485 中外日報 1927-08-14.pdf]] || 1927-08-14 |- | [[색인:CNTS-00067903192 中外日報 1927-08-15.pdf]] || 1927-08-15 |- | [[색인:CNTS-00093437608 中外日報 1927-08-16.pdf]] || 1927-08-16 |- | [[색인:CNTS-00093437823 中外日報 1927-08-17.pdf]] || 1927-08-17 |- | [[색인:CNTS-00049019603 中外日報 1927-08-18.pdf]] || 1927-08-18 |- | [[색인:CNTS-00093437884 中外日報 1927-08-19.pdf]] || 1927-08-19 |- | [[색인:CNTS-00093438026 中外日報 1927-08-20.pdf]] || 1927-08-20 |- | [[색인:CNTS-00093438159 中外日報 1927-08-21.pdf]] || 1927-08-21 |- | [[색인:CNTS-00093438241 中外日報 1927-08-22.pdf]] || 1927-08-22 |- | [[색인:CNTS-00093438432 中外日報 1927-08-23.pdf]] || 1927-08-23 |- | [[색인:CNTS-00093438476 中外日報 1927-08-24.pdf]] || 1927-08-24 |- | [[색인:CNTS-00093438705 中外日報 1927-08-25.pdf]] || 1927-08-25 |- | [[색인:CNTS-00093438717 中外日報 1927-08-26.pdf]] || 1927-08-26 |- | [[색인:CNTS-00093438861 中外日報 1927-08-27.pdf]] || 1927-08-27 |- | [[색인:CNTS-00093438989 中外日報 1927-08-28.pdf]] || 1927-08-28 |- | [[색인:CNTS-00093439087 中外日報 1927-08-29.pdf]] || 1927-08-29 |- | [[색인:CNTS-00093439245 中外日報 1927-08-30.pdf]] || 1927-08-30 |- | [[색인:CNTS-00093439415 中外日報 1927-08-31.pdf]] || 1927-08-31 |} === 192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52603 中外日報 1928-08-02.pdf]] || 1928-08-02 |- | [[색인:CNTS-00093452625 中外日報 1928-08-03.pdf]] || 1928-08-03 |- | [[색인:CNTS-00093452821 中外日報 1928-08-04.pdf]] || 1928-08-04 |- | [[색인:CNTS-00093452854 中外日報 1928-08-05.pdf]] || 1928-08-05 |- | [[색인:CNTS-00093452959 中外日報 1928-08-06.pdf]] || 1928-08-06 |- | [[색인:CNTS-00093453097 中外日報 1928-08-07.pdf]] || 1928-08-07 |- | [[색인:CNTS-00093453278 中外日報 1928-08-08.pdf]] || 1928-08-08 |- | [[색인:CNTS-00093453298 中外日報 1928-08-09.pdf]] || 1928-08-09 |- | [[색인:CNTS-00093453408 中外日報 1928-08-10.pdf]] || 1928-08-10 |- | [[색인:CNTS-00093453548 中外日報 1928-08-11.pdf]] || 1928-08-11 |- | [[색인:CNTS-00093453626 中外日報 1928-08-12.pdf]] || 1928-08-12 |- | [[색인:CNTS-00093453817 中外日報 1928-08-13.pdf]] || 1928-08-13 |- | [[색인:CNTS-00093453841 中外日報 1928-08-14.pdf]] || 1928-08-14 |- | [[색인:CNTS-00093453984 中外日報 1928-08-15.pdf]] || 1928-08-15 |- | [[색인:CNTS-00093454051 中外日報 1928-08-16.pdf]] || 1928-08-16 |- | [[색인:CNTS-00093454175 中外日報 1928-08-17.pdf]] || 1928-08-17 |- | [[색인:CNTS-00093454330 中外日報 1928-08-18.pdf]] || 1928-08-18 |- | [[색인:CNTS-00093454426 中外日報 1928-08-19.pdf]] || 1928-08-19 |- | [[색인:CNTS-00093454626 中外日報 1928-08-20.pdf]] || 1928-08-20 |- | [[색인:CNTS-00093454743 中外日報 1928-08-21.pdf]] || 1928-08-21 |- | [[색인:CNTS-00093454766 中外日報 1928-08-22.pdf]] || 1928-08-22 |- | [[색인:CNTS-00093454896 中外日報 1928-08-23.pdf]] || 1928-08-23 |- | [[색인:CNTS-00093455081 中外日報 1928-08-24.pdf]] || 1928-08-24 |- | [[색인:CNTS-00093455216 中外日報 1928-08-25.pdf]] || 1928-08-25 |- | [[색인:CNTS-00048208555 中外日報 1928-08-26.pdf]] || 1928-08-26 |- | [[색인:CNTS-00093455222 中外日報 1928-08-27.pdf]] || 1928-08-27 |- | [[색인:CNTS-00093455440 中外日報 1928-08-28.pdf]] || 1928-08-28 |- | [[색인:CNTS-00093455471 中外日報 1928-08-29.pdf]] || 1928-08-29 |- | [[색인:CNTS-00093455627 中外日報 1928-08-30.pdf]] || 1928-08-30 |- | [[색인:CNTS-00093455677 中外日報 1928-08-31.pdf]] || 1928-08-31 |} === 192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48574467 中外日報 1929-08-02.pdf]] || 1929-08-02 |- | [[색인:CNTS-00049033203 中外日報 1929-08-03.pdf]] || 1929-08-03 |- | [[색인:CNTS-00048201752 中外日報 1929-08-04.pdf]] || 1929-08-04 |- | [[색인:CNTS-00067908798 中外日報 1929-08-05.pdf]] || 1929-08-05 |- | [[색인:CNTS-00048138072 中外日報 1929-08-06.pdf]] || 1929-08-06 |- | [[색인:CNTS-00067908818 中外日報 1929-08-07.pdf]] || 1929-08-07 |- | [[색인:CNTS-00048168260 中外日報 1929-08-08.pdf]] || 1929-08-08 |- | [[색인:CNTS-00067908837 中外日報 1929-08-09.pdf]] || 1929-08-09 |- | [[색인:CNTS-00048241910 中外日報 1929-08-10.pdf]] || 1929-08-10 |- | [[색인:CNTS-00067908869 中外日報 1929-08-11.pdf]] || 1929-08-11 |- | [[색인:CNTS-00048881881 中外日報 1929-08-12.pdf]] || 1929-08-12 |- | [[색인:CNTS-00048384760 中外日報 1929-08-13.pdf]] || 1929-08-13 |- | [[색인:CNTS-00049008235 中外日報 1929-08-14.pdf]] || 1929-08-14 |- | [[색인:CNTS-00048856789 中外日報 1929-08-15.pdf]] || 1929-08-15 |- | [[색인:CNTS-00067908928 中外日報 1929-08-16.pdf]] || 1929-08-16 |- | [[색인:CNTS-00048647463 中外日報 1929-08-17.pdf]] || 1929-08-17 |- | [[색인:CNTS-00048840753 中外日報 1929-08-18.pdf]] || 1929-08-18 |- | [[색인:CNTS-00048538506 中外日報 1929-08-19.pdf]] || 1929-08-19 |- | [[색인:CNTS-00067908976 中外日報 1929-08-20.pdf]] || 1929-08-20 |- | [[색인:CNTS-00048557092 中外日報 1929-08-21.pdf]] || 1929-08-21 |- | [[색인:CNTS-00067908996 中外日報 1929-08-22.pdf]] || 1929-08-22 |- | [[색인:CNTS-00048714889 中外日報 1929-08-23.pdf]] || 1929-08-23 |- | [[색인:CNTS-00067909007 中外日報 1929-08-24.pdf]] || 1929-08-24 |- | [[색인:CNTS-00048206485 中外日報 1929-08-25.pdf]] || 1929-08-25 |- | [[색인:CNTS-00067909031 中外日報 1929-08-26.pdf]] || 1929-08-26 |- | [[색인:CNTS-00067909037 中外日報 1929-08-27.pdf]] || 1929-08-27 |- | [[색인:CNTS-00048111230 中外日報 1929-08-28.pdf]] || 1929-08-28 |- | [[색인:CNTS-00048143182 中外日報 1929-08-29.pdf]] || 1929-08-29 |- | [[색인:CNTS-00048326024 中外日報 1929-08-30.pdf]] || 1929-08-30 |- | [[색인:CNTS-00048677493 中外日報 1929-08-31.pdf]] || 1929-08-31 |} === 193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503617 中外日報 1930-08-02.pdf]] || 1930-08-02 |- | [[색인:CNTS-00093503976 中外日報 1930-08-03.pdf]] || 1930-08-03 |- | [[색인:CNTS-00093504113 中外日報 1930-08-04.pdf]] || 1930-08-04 |- | [[색인:CNTS-00093504212 中外日報 1930-08-05.pdf]] || 1930-08-05 |- | [[색인:CNTS-00093504458 中外日報 1930-08-06.pdf]] || 1930-08-06 |- | [[색인:CNTS-00093504624 中外日報 1930-08-07.pdf]] || 1930-08-07 |- | [[색인:CNTS-00093504818 中外日報 1930-08-08.pdf]] || 1930-08-08 |- | [[색인:CNTS-00093504966 中外日報 1930-08-09.pdf]] || 1930-08-09 |- | [[색인CNTS-00093505163 中外日報 1930-08-10.pdf]] || 1930-08-10 |- | [[색인:CNTS-00093505440 中外日報 1930-08-11.pdf]] || 1930-08-11 |- | [[색인:CNTS-00093505465 中外日報 1930-08-12.pdf]] || 1930-08-12 |- | [[색인:CNTS-00093505651 中外日報 1930-08-13.pdf]] || 1930-08-13 |- | [[색인:CNTS-00093505855 中外日報 1930-08-14.pdf]] || 1930-08-14 |- | [[색인:CNTS-00093506209 中外日報 1930-08-15.pdf]] || 1930-08-15 |- | [[색인:CNTS-00093506257 中外日報 1930-08-16.pdf]] || 1930-08-16 |- | [[색인:CNTS-00093506449 中外日報 1930-08-17.pdf]] || 1930-08-17 |- | [[색인:CNTS-00093506671 中外日報 1930-08-18.pdf]] || 1930-08-18 |- | [[색인:CNTS-00093506826 中外日報 1930-08-19.pdf]] || 1930-08-19 |- | [[색인:CNTS-00093506985 中外日報 1930-08-20.pdf]] || 1930-08-20 |- | [[색인:CNTS-00093507200 中外日報 1930-08-21.pdf]] || 1930-08-21 |- | [[색인:CNTS-00093507315 中外日報 1930-08-22.pdf]] || 1930-08-22 |- | [[색인:CNTS-00093507579 中外日報 1930-08-23.pdf]] || 1930-08-23 |- | [[색인:CNTS-00093507755 中外日報 1930-08-24.pdf]] || 1930-08-24 |- | [[색인:CNTS-00093507992 中外日報 1930-08-25.pdf]] || 1930-08-25 |- | [[색인:CNTS-00093508063 中外日報 1930-08-26.pdf]] || 1930-08-26 |- | [[색인:CNTS-00093508408 中外日報 1930-08-27.pdf]] || 1930-08-27 |- | [[색인:CNTS-00093508439 中外日報 1930-08-28.pdf]] || 1930-08-28 |- | [[색인:CNTS-00093508640 中外日報 1930-08-29.pdf]] || 1930-08-29 |- | [[색인:CNTS-00093509028 中外日報 1930-08-30.pdf]] || 1930-08-30 |- | [[색인:CNTS-00093509206 中外日報 1930-08-31.pdf]] || 1930-08-31 |} == 해방 이후 (1945년~) == === 194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298564 中外新報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12225 中外新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122434 中外新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518378 中外新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48302059 中外新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154198 中外新報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54767 中外新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691782 中外新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153694 中外新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558988 中外新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152638 中外新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120107 中外新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51813 中外新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311969 中外新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48133423 中外新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725279 中外新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51566 中外新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48184428 中外新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133132 中外新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631026 中外新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311721 中外新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205410 中外新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132555 中外新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273158 中外新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717925 中外新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201950 中外新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266013 中外新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113773 中外新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0957 中央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65300964 中央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65301033 中央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65301081 中央新聞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65301090 中央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65301123 中央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65301149 中央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65301206 中央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65301230 中央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65301270 中央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65301294 中央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65301347 中央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65301364 中央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65301388 中央新聞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65301417 中央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65301451 中央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65301504 中央新聞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65301519 中央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65301552 中央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65301616 中央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65301638 中央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65301659 中央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50396 全國勞動者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344389 全國勞動者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84456 大東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07244 大東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476528 大東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952811 大東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205480 大東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96196 大東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202016 大東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938609 大東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194546 大東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204672 大東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264306 大東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92000 大東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264645 大東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194234 大東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60637 大東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200979 大東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352004 大東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177785 大東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196620 大東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980138 大東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195431 大東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979226 大東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664145 大東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191302 大東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272432 大東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30152 大邱時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109330161 大邱時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109330231 大邱時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109330275 大邱時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109330320 大邱時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109330401 大邱時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109330427 大邱時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109330519 大邱時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109330553 大邱時報 1946-08-12.pdf]] || 1946-08-12 |- | [[색인:CNTS-00109330599 大邱時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109330651 大邱時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109330756 大邱時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109330820 大邱時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109330840 大邱時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109330909 大邱時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109330986 大邱時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109331132 大邱時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109331312 大邱時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109331318 大邱時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109331506 大邱時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109331588 大邱時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109331648 大邱時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109331700 大邱時報 1946-08-26.pdf]] || 1946-08-26 |- | [[색인:CNTS-00109331774 大邱時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109331809 大邱時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109331883 大邱時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109331955 大邱時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109331987 大邱時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가정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76758028 家政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76758066 家政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76758088 家政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76758107 家政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76758140 家政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76758163 家政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76758216 家政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76758251 家政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76758258 家政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76758292 家政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76758328 家政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76758355 家政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76758388 家政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76758409 家政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76758428 家政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76758470 家政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76758482 家政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76758508 家政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76758538 家政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76758570 家政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76758602 家政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76758634 家政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76758665 家政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76758694 家政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76758715 家政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66107 工業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88066324 工業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88066512 工業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88066592 工業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88066779 工業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88067091 工業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88067102 工業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88067204 工業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88067565 工業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88067730 工業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88067785 工業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88068065 工業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88068602 工業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88069055 工業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88069065 工業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88069196 工業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88069558 工業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88069776 工業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88070212 工業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88070329 工業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88070412 工業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88070746 工業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88070882 工業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88070927 工業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88071303 工業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194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5741 中央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5305777 中央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65305845 中央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5305862 中央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65305883 中央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5305933 中央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5305943 中央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5305981 中央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65306011 中央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5306082 中央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5306101 中央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65306129 中央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5306182 中央新聞 1947-08-16.pdf]] || 1947-08-16 |- | [[색인:CNTS-00065306192 中央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65306247 中央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65306322 中央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5306346 中央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5306380 中央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5306419 中央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65306446 中央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5306506 中央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5306533 中央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65306562 中央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65306602 中央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5306647 中央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65306658 中央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광명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469644 光明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48191659 光明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88428 光明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48800666 光明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205304 光明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48667932 光明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48336548 光明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48800046 光明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00611 光明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7982416 光明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48360276 光明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30523 全國勞動者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colspan="3" | 국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3752839 國際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13752882 國際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113752887 國際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13752928 國際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13752951 國際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13752999 國際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13753042 國際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13753082 國際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13753106 國際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13753130 國際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13753157 國際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96209 大東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7993445 大東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02145 大東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7993450 大東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194627 大東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7993458 大東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7993459 大東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7993461 大東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64378 大東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48192077 大東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7993472 大東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48485812 大東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7993477 大東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48264717 大東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48194267 大東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7993488 大東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7993493 大東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7993499 大東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48201041 大東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7993503 大東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7993508 大東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48177810 大東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48196686 大東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7993523 大東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48176217 大東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46354 大邱時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09346407 大邱時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09346456 大邱時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09346513 大邱時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09346563 大邱時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09346668 大邱時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09346702 大邱時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09346752 大邱時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09346822 大邱時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09346881 大邱時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109346882 大邱時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109347085 大邱時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109347186 大邱時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109347267 大邱時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109347401 大邱時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109347461 大邱時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109347617 大邱時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109347653 大邱時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109347678 大邱時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109347762 大邱時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109347855 大邱時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109347938 大邱時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109348003 大邱時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64215 大韓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64445 大韓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64465 大韓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64514 大韓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64536 大韓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64752 大韓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64816 大韓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64824 大韓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65070 大韓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65094 大韓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65150 大韓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65374 大韓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65401 大韓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65655 大韓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65675 大韓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65705 大韓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65755 大韓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65966 大韓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65999 大韓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66075 大韓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66265 大韓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66313 大韓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1257 婦人新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1490 婦人新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81656 婦人新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1788 婦人新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1929 婦人新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2236 婦人新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2279 婦人新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2526 婦人新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2699 婦人新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2973 婦人新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3027 婦人新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3068 婦人新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3319 婦人新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3415 婦人新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3521 婦人新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3880 婦人新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3908 婦人新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4225 婦人新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4320 婦人新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4522 婦人新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4617 婦人新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4918 婦人新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5023 婦人新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5074 婦人新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5392 婦人新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녀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6064 婦女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6270 婦女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6387 婦女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6462 婦女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6809 婦女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6980 婦女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7006 婦女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7138 婦女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7365 婦女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7546 婦女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7571 婦女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7838 婦女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7930 婦女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8290 婦女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8474 婦女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8522 婦女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8824 婦女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8950 婦女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9091 婦女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9274 婦女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9404 婦女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9429 婦女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9645 婦女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9822 婦女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41346 嶺南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8241400 嶺南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8241596 嶺南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8241697 嶺南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241857 嶺南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241963 嶺南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242196 嶺南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242387 嶺南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229349 嶺南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229399 嶺南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229607 嶺南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229906 嶺南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229994 嶺南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230295 嶺南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230530 嶺南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230617 嶺南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230867 嶺南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230917 嶺南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231192 嶺南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231446 嶺南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231498 嶺南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231757 嶺南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231819 嶺南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232049 嶺南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232407 嶺南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194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남조선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4965763 南朝鮮民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114965819 南朝鮮民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14965866 南朝鮮民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114965906 南朝鮮民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114965972 南朝鮮民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114966016 南朝鮮民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114966021 南朝鮮民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114966066 南朝鮮民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114966114 南朝鮮民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114966161 南朝鮮民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114966205 南朝鮮民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114966218 南朝鮮民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114966247 南朝鮮民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114966288 南朝鮮民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114966339 南朝鮮民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114966379 南朝鮮民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114966431 南朝鮮民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114966451 南朝鮮民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114966497 南朝鮮民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114966533 南朝鮮民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114966591 南朝鮮民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114966597 南朝鮮民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114966640 南朝鮮民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816953 大東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62773 大邱時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09362798 大邱時報 1948-08-05.pdf]] || 1948-08-05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08156 大韓日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08358 大韓日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08728 大韓日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09203 大韓日報 1948-08-09.pdf]] || 1948-08-09 |- | [[색인:CNTS-00088009428 大韓日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09801 大韓日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10349 大韓日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10702 大韓日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10754 大韓日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11046 大韓日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11400 大韓日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11883 大韓日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12502 大韓日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13332 大韓日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13415 大韓日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14017 大韓日報 1948-08-23.pdf]] || 1948-08-23 |- | [[색인:CNTS-00088014510 大韓日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14922 大韓日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15512 大韓日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16242 大韓日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16332 大韓日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16766 大韓日報 1948-08-30.pdf]] || 1948-08-30 |- | [[색인:CNTS-00088017406 大韓日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34809 婦人新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088035078 婦人新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35179 婦人新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35426 婦人新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035589 婦人新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35911 婦人新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036039 婦人新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088036150 婦人新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36275 婦人新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36533 婦人新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36683 婦人新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36934 婦人新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36976 婦人新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37086 婦人新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37377 婦人新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37462 婦人新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37727 婦人新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37901 婦人新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37982 婦人新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38263 婦人新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38604 婦人新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38652 婦人新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038775 婦人新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39052 婦人新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39315 婦人新報 1948-08-31.pdf]] || 1948-08-31 |} === 194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72035 嶺南日報 1949-08-04.pdf]] || 1949-08-04 |- | [[색인:CNTS-00088272210 嶺南日報 1949-08-05.pdf]] || 1949-08-05 |- | [[색인:CNTS-00088272505 嶺南日報 1949-08-06.pdf]] || 1949-08-06 |- | [[색인:CNTS-00088272618 嶺南日報 1949-08-10.pdf]] || 1949-08-10 |- | [[색인:CNTS-00088272811 嶺南日報 1949-08-11.pdf]] || 1949-08-11 |- | [[색인:CNTS-00088272989 嶺南日報 1949-08-12.pdf]] || 1949-08-12 |- | [[색인:CNTS-00088273263 嶺南日報 1949-08-13.pdf]] || 1949-08-13 |- | [[색인:CNTS-00088273477 嶺南日報 1949-08-15.pdf]] || 1949-08-15 |- | [[색인:CNTS-00088273600 嶺南日報 1949-08-17.pdf]] || 1949-08-17 |- | [[색인:CNTS-00088273770 嶺南日報 1949-08-19.pdf]] || 1949-08-19 |- | [[색인:CNTS-00088273980 嶺南日報 1949-08-20.pdf]] || 1949-08-20 |- | [[색인:CNTS-00088274307 嶺南日報 1949-08-21.pdf]] || 1949-08-21 |- | [[색인:CNTS-00088274513 嶺南日報 1949-08-23.pdf]] || 1949-08-23 |- | [[색인:CNTS-00088274772 嶺南日報 1949-08-25.pdf]] || 1949-08-25 |- | [[색인:CNTS-00088274989 嶺南日報 1949-08-26.pdf]] || 1949-08-26 |- | [[색인:CNTS-00088275240 嶺南日報 1949-08-27.pdf]] || 1949-08-27 |- | [[색인:CNTS-00088275487 嶺南日報 1949-08-28.pdf]] || 1949-08-28 |- | [[색인:CNTS-00088275705 嶺南日報 1949-08-30.pdf]] || 1949-08-30 |- | [[색인:CNTS-00088276098 嶺南日報 1949-08-31.pdf]] || 1949-08-31 |} shrftbogea4ywsk6047iy6isq14kixd 392569 392568 2025-06-25T16:45:45Z Aspere 5453 /* 1947년 */ 392569 wikitext text/x-wiki == 범례 == * 한자 ** 국한문 혼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O ** 제목이나 고유명사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 * 옛한글 ** 아래아 등 현대의 표기와 현저하게 다른 경우 O ** 아래아는 소멸되었으나 일부 특정 글자("또"를 "ᄯᅩ"로 적는 등)에서만 사용하는 경우 △ == 개화기 (~1900년대) == === 1904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163043 大韓每日申報 1904-08-09.pdf]] || 1904-08-09 || [[색인:대한매일신보 19040809.pdf|기존 작업 색인]]과 중복 |- | [[색인:CNTS-00048114450 大韓每日申報 1904-08-10.pdf]] || 1904-08-10 |- | [[색인:CNTS-00048114782 大韓每日申報 1904-08-11.pdf]] || 1904-08-11 |- | [[색인:CNTS-00048178680 大韓每日申報 1904-08-12.pdf]] || 1904-08-12 |- | [[색인:CNTS-00048143238 大韓每日申報 1904-08-13.pdf]] || 1904-08-13 |- | [[색인:CNTS-00048196414 大韓每日申報 1904-08-16.pdf]] || 1904-08-16 |- | [[색인:CNTS-00048175458 大韓每日申報 1904-08-17.pdf]] || 1904-08-17 |- | [[색인:CNTS-00048171812 大韓每日申報 1904-08-18.pdf]] || 1904-08-18 |- | [[색인:CNTS-00048172247 大韓每日申報 1904-08-20.pdf]] || 1904-08-20 |- | [[색인:CNTS-00048175296 大韓每日申報 1904-08-23.pdf]] || 1904-08-23 |- | [[색인:CNTS-00048174256 大韓每日申報 1904-08-24.pdf]] || 1904-08-24 |- | [[색인:CNTS-00048244659 大韓每日申報 1904-08-25.pdf]] || 1904-08-25 |- | [[색인:CNTS-00048122714 大韓每日申報 1904-08-27.pdf]] || 1904-08-27 |- | [[색인:CNTS-00048213452 大韓每日申報 1904-08-30.pdf]] || 1904-08-30 |- | [[색인:CNTS-00048123625 大韓每日申報 1904-08-31.pdf]] || 1904-08-31 |} === 1905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05742 大韓每日申報 1905-08-12.pdf]] || 1905-08-12 |- | [[색인:CNTS-00093105790 大韓每日申報 1905-08-13.pdf]] || 1905-08-13 |- | [[색인:CNTS-00093105813 大韓每日申報 1905-08-15.pdf]] || 1905-08-15 |- | [[색인:CNTS-00093105859 大韓每日申報 1905-08-16.pdf]] || 1905-08-16 |- | [[색인:CNTS-00093105912 大韓每日申報 1905-08-18.pdf]] || 1905-08-18 |- | [[색인:CNTS-00093105964 大韓每日申報 1905-08-19.pdf]] || 1905-08-19 |- | [[색인:CNTS-00093105991 大韓每日申報 1905-08-20.pdf]] || 1905-08-20 |- | [[색인:CNTS-00093106028 大韓每日申報 1905-08-22.pdf]] || 1905-08-22 |- | [[색인:CNTS-00093106064 大韓每日申報 1905-08-23.pdf]] || 1905-08-23 |- | [[색인:CNTS-00093106104 大韓每日申報 1905-08-24.pdf]] || 1905-08-24 |- | [[색인:CNTS-00093106151 大韓每日申報 1905-08-25.pdf]] || 1905-08-25 |- | [[색인:CNTS-00093106188 大韓每日申報 1905-08-27.pdf]] || 1905-08-27 |- | [[색인:CNTS-00093106235 大韓每日申報 1905-08-29.pdf]] || 1905-08-29 |- | [[색인:CNTS-00093106308 大韓每日申報 1905-08-30.pdf]] || 1905-08-30 |- | [[색인:CNTS-00093106334 大韓每日申報 1905-08-31.pdf]] || 1905-08-31 |} === 190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6470 共立新報 1906-08-25.pdf]] || 1906-08-25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 [[색인:CNTS-00093119282 大韓每日申報 1906-08-02.pdf]] || 1906-08-02 |- | [[색인:CNTS-00093119350 大韓每日申報 1906-08-03.pdf]] || 1906-08-03 |- | [[색인:CNTS-00093119383 大韓每日申報 1906-08-04.pdf]] || 1906-08-04 |- | [[색인:CNTS-00093119440 大韓每日申報 1906-08-05.pdf]] || 1906-08-05 |- | [[색인:CNTS-00093119523 大韓每日申報 1906-08-07.pdf]] || 1906-08-07 |- | [[색인:CNTS-00093119549 大韓每日申報 1906-08-08.pdf]] || 1906-08-08 |- | [[색인:CNTS-00093119591 大韓每日申報 1906-08-09.pdf]] || 1906-08-09 |- | [[색인:CNTS-00093119668 大韓每日申報 1906-08-10.pdf]] || 1906-08-10 |- | [[색인:CNTS-00093119700 大韓每日申報 1906-08-11.pdf]] || 1906-08-11 |- | [[색인:CNTS-00093119778 大韓每日申報 1906-08-12.pdf]] || 1906-08-12 |- | [[색인:CNTS-00093119850 大韓每日申報 1906-08-14.pdf]] || 1906-08-14 |- | [[색인:CNTS-00093119897 大韓每日申報 1906-08-15.pdf]] || 1906-08-15 |- | [[색인:CNTS-00093119939 大韓每日申報 1906-08-16.pdf]] || 1906-08-16 |- | [[색인:CNTS-00093119975 大韓每日申報 1906-08-17.pdf]] || 1906-08-17 |- | [[색인:CNTS-00093120026 大韓每日申報 1906-08-18.pdf]] || 1906-08-18 |- | [[색인:CNTS-00093120074 大韓每日申報 1906-08-19.pdf]] || 1906-08-19 |- | [[색인:CNTS-00093120133 大韓每日申報 1906-08-21.pdf]] || 1906-08-21 |- | [[색인:CNTS-00093120185 大韓每日申報 1906-08-22.pdf]] || 1906-08-22 |- | [[색인:CNTS-00093120212 大韓每日申報 1906-08-23.pdf]] || 1906-08-23 |- | [[색인:CNTS-00093120270 大韓每日申報 1906-08-24.pdf]] || 1906-08-24 |- | [[색인:CNTS-00093120360 大韓每日申報 1906-08-25.pdf]] || 1906-08-25 |- | [[색인:CNTS-00093120408 大韓每日申報 1906-08-26.pdf]] || 1906-08-26 |- | [[색인:CNTS-00093120461 大韓每日申報 1906-08-28.pdf]] || 1906-08-28 |- | [[색인:CNTS-00093120522 大韓每日申報 1906-08-29.pdf]] || 1906-08-29 |- | [[색인:CNTS-00093120556 大韓每日申報 1906-08-30.pdf]] || 1906-08-30 |- | [[색인:CNTS-00093120593 大韓每日申報 1906-08-31.pdf]] || 1906-08-31 |} === 190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7280 共立新報 1907-08-09.pdf ]] || 1907-08-09 |- | [[색인:CNTS-00049010957 共立新報 1907-08-16.pdf ]] || 1907-08-16 |- | [[색인:CNTS-00115097358 共立新報 1907-08-23.pdf ]] || 1907-08-23 |- | [[색인:CNTS-00115097372 共立新報 1907-08-30.pdf ]] || 1907-08-30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37172 大韓每日申報 1907-08-02.pdf]] || 1907-08-02 |- | [[색인:CNTS-00093137187 大韓每日申報 1907-08-03.pdf]] || 1907-08-03 |- | [[색인:CNTS-00093137316 大韓每日申報 1907-08-04.pdf]] || 1907-08-04 |- | [[색인:CNTS-00093137338 大韓每日申報 1907-08-06.pdf]] || 1907-08-06 |- | [[색인:CNTS-00093137480 大韓每日申報 1907-08-07.pdf]] || 1907-08-07 |- | [[색인:CNTS-00093137499 大韓每日申報 1907-08-08.pdf]] || 1907-08-08 |- | [[색인:CNTS-00093137625 大韓每日申報 1907-08-09.pdf]] || 1907-08-09 |- | [[색인:CNTS-00093137650 大韓每日申報 1907-08-10.pdf]] || 1907-08-10 |- | [[색인:CNTS-00093137777 大韓每日申報 1907-08-11.pdf]] || 1907-08-11 |- | [[색인:CNTS-00093137886 大韓每日申報 1907-08-13.pdf]] || 1907-08-13 |- | [[색인:CNTS-00093137935 大韓每日申報 1907-08-14.pdf]] || 1907-08-14 |- | [[색인:CNTS-00093137990 大韓每日申報 1907-08-15.pdf]] || 1907-08-15 |- | [[색인:CNTS-00093138042 大韓每日申報 1907-08-16.pdf]] || 1907-08-16 |- | [[색인:CNTS-00093138108 大韓每日申報 1907-08-17.pdf]] || 1907-08-17 |- | [[색인:CNTS-00093138173 大韓每日申報 1907-08-18.pdf]] || 1907-08-18 |- | [[색인:CNTS-00093138255 大韓每日申報 1907-08-20.pdf]] || 1907-08-20 |- | [[색인:CNTS-00093138323 大韓每日申報 1907-08-21.pdf]] || 1907-08-21 |- | [[색인:CNTS-00093138398 大韓每日申報 1907-08-22.pdf]] || 1907-08-22 |- | [[색인:CNTS-00093138538 大韓每日申報 1907-08-23.pdf]] || 1907-08-23 |- | [[색인:CNTS-00093138600 大韓每日申報 1907-08-24.pdf]] || 1907-08-24 |- | [[색인:CNTS-00093138631 大韓每日申報 1907-08-27.pdf]] || 1907-08-27 |- | [[색인:CNTS-00093138753 大韓每日申報 1907-08-29.pdf]] || 1907-08-29 |- | [[색인:CNTS-00093138772 大韓每日申報 1907-08-30.pdf]] || 1907-08-30 |- | [[색인:CNTS-00093138910 大韓每日申報 1907-08-31.pdf]] || 1907-08-31 |} === 190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916681 共立新報 1908-08-12.pdf ]] || 1908-08-12 |- | [[색인:CNTS-00048962815 共立新報 1908-08-19.pdf ]] || 1908-08-19 |- | [[색인:CNTS-00049012696 共立新報 1908-08-26.pdf ]] || 1908-08-26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61249 大韓每日申報 1908-08-02.pdf]] || 1908-08-02 |- | [[색인:CNTS-00093161323 大韓每日申報 1908-08-04.pdf]] || 1908-08-04 |- | [[색인:CNTS-00093161450 大韓每日申報 1908-08-05.pdf]] || 1908-08-05 |- | [[색인:CNTS-00093161494 大韓每日申報 1908-08-06.pdf]] || 1908-08-06 |- | [[색인:CNTS-00093161636 大韓每日申報 1908-08-07.pdf]] || 1908-08-07 |- | [[색인:CNTS-00093161666 大韓每日申報 1908-08-08.pdf]] || 1908-08-08 |- | [[색인:CNTS-00093161770 大韓每日申報 1908-08-09.pdf]] || 1908-08-09 |- | [[색인:CNTS-00093161841 大韓每日申報 1908-08-11.pdf]] || 1908-08-11 |- | [[색인:CNTS-00093161884 大韓每日申報 1908-08-12.pdf]] || 1908-08-12 |- | [[색인:CNTS-00093161962 大韓每日申報 1908-08-13.pdf]] || 1908-08-13 |- | [[색인:CNTS-00093162054 大韓每日申報 1908-08-14.pdf]] || 1908-08-14 |- | [[색인:CNTS-00093162125 大韓每日申報 1908-08-16.pdf]] || 1908-08-16 |- | [[색인:CNTS-00093162198 大韓每日申報 1908-08-18.pdf]] || 1908-08-18 |- | [[색인:CNTS-00093162279 大韓每日申報 1908-08-19.pdf]] || 1908-08-19 |- | [[색인:CNTS-00093162349 大韓每日申報 1908-08-20.pdf]] || 1908-08-20 |- | [[색인:CNTS-00093162447 大韓每日申報 1908-08-21.pdf]] || 1908-08-21 |- | [[색인:CNTS-00093162505 大韓每日申報 1908-08-22.pdf]] || 1908-08-22 |- | [[색인:CNTS-00093162642 大韓每日申報 1908-08-23.pdf]] || 1908-08-23 |- | [[색인:CNTS-00093162655 大韓每日申報 1908-08-25.pdf]] || 1908-08-25 |- | [[색인:CNTS-00093162740 大韓每日申報 1908-08-26.pdf]] || 1908-08-26 |- | [[색인:CNTS-00093162861 大韓每日申報 1908-08-27.pdf]] || 1908-08-27 |- | [[색인:CNTS-00093162903 大韓每日申報 1908-08-29.pdf]] || 1908-08-29 |- | [[색인:CNTS-00093162983 大韓每日申報 1908-08-30.pdf]] || 1908-08-30 |} ==== 190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83086 大韓每日申報 1909-08-03.pdf]] || 1909-08-03 |- | [[색인:CNTS-00093183168 大韓每日申報 1909-08-04.pdf]] || 1909-08-04 |- | [[색인:CNTS-00093183247 大韓每日申報 1909-08-05.pdf]] || 1909-08-05 |- | [[색인:CNTS-00093183374 大韓每日申報 1909-08-06.pdf]] || 1909-08-06 |- | [[색인:CNTS-00093183397 大韓每日申報 1909-08-07.pdf]] || 1909-08-07 |- | [[색인:CNTS-00093183472 大韓每日申報 1909-08-08.pdf]] || 1909-08-08 |- | [[색인:CNTS-00093183614 大韓每日申報 1909-08-10.pdf]] || 1909-08-10 |- | [[색인:CNTS-00093183634 大韓每日申報 1909-08-11.pdf]] || 1909-08-11 |- | [[색인:CNTS-00093183705 大韓每日申報 1909-08-12.pdf]] || 1909-08-12 |- | [[색인:CNTS-00093183789 大韓每日申報 1909-08-13.pdf]] || 1909-08-13 |- | [[색인:CNTS-00093183860 大韓每日申報 1909-08-14.pdf]] || 1909-08-14 |- | [[색인:CNTS-00093183937 大韓每日申報 1909-08-17.pdf]] || 1909-08-17 |- | [[색인:CNTS-00093184043 大韓每日申報 1909-08-18.pdf]] || 1909-08-18 |- | [[색인:CNTS-00093184073 大韓每日申報 1909-08-19.pdf]] || 1909-08-19 |- | [[색인:CNTS-00093184143 大韓每日申報 1909-08-20.pdf]] || 1909-08-20 |- | [[색인:CNTS-00093184253 大韓每日申報 1909-08-21.pdf]] || 1909-08-21 |- | [[색인:CNTS-00093184306 大韓每日申報 1909-08-22.pdf]] || 1909-08-22 |- | [[색인:CNTS-00093184382 大韓每日申報 1909-08-24.pdf]] || 1909-08-24 |- | [[색인:CNTS-00093184464 大韓每日申報 1909-08-25.pdf]] || 1909-08-25 |- | [[색인:CNTS-00093184606 大韓每日申報 1909-08-26.pdf]] || 1909-08-26 |- | [[색인:CNTS-00093184630 大韓每日申報 1909-08-27.pdf]] || 1909-08-27 |- | [[색인:CNTS-00093184730 大韓每日申報 1909-08-29.pdf]] || 1909-08-29 |- | [[색인:CNTS-00093184853 大韓每日申報 1909-08-31.pdf]] || 1909-08-31 |} === 191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208820 大韓每日申報 1910-08-03.pdf]] || 1910-08-03 |- | [[색인:CNTS-00093208906 大韓每日申報 1910-08-04.pdf]] || 1910-08-04 |- | [[색인:CNTS-00093208987 大韓每日申報 1910-08-05.pdf]] || 1910-08-05 |- | [[색인:CNTS-00093209080 大韓每日申報 1910-08-06.pdf]] || 1910-08-06 |- | [[색인:CNTS-00093209184 大韓每日申報 1910-08-07.pdf]] || 1910-08-07 |- | [[색인:CNTS-00093209270 大韓每日申報 1910-08-09.pdf]] || 1910-08-09 |- | [[색인:CNTS-00093209358 大韓每日申報 1910-08-16.pdf]] || 1910-08-16 |- | [[색인:CNTS-00093209455 大韓每日申報 1910-08-17.pdf]] || 1910-08-17 |- | [[색인:CNTS-00093209525 大韓每日申報 1910-08-26.pdf]] || 1910-08-26 |- | [[색인:CNTS-00093209617 大韓每日申報 1910-08-27.pdf]] || 1910-08-27 |- | [[색인:CNTS-00093209702 大韓每日申報 1910-08-28.pdf]] || 1910-08-28 |} == 일제강점기 (1910년대~1944년) == === 192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35903 中外日報 1927-08-02.pdf]] || 1927-08-02 |- | [[색인:CNTS-00093436018 中外日報 1927-08-03.pdf]] || 1927-08-03 |- | [[색인:CNTS-00093436273 中外日報 1927-08-04.pdf]] || 1927-08-04 |- | [[색인:CNTS-00093436345 中外日報 1927-08-05.pdf]] || 1927-08-05 |- | [[색인:CNTS-00093436458 中外日報 1927-08-06.pdf]] || 1927-08-06 |- | [[색인:CNTS-00093436542 中外日報 1927-08-07.pdf]] || 1927-08-07 |- | [[색인:CNTS-00093436729 中外日報 1927-08-08.pdf]] || 1927-08-08 |- | [[색인:CNTS-00093436826 中外日報 1927-08-09.pdf]] || 1927-08-09 |- | [[색인:CNTS-00093436990 中外日報 1927-08-10.pdf]] || 1927-08-10 |- | [[색인:CNTS-00093437060 中外日報 1927-08-11.pdf]] || 1927-08-11 |- | [[색인:CNTS-00093437217 中外日報 1927-08-12.pdf]] || 1927-08-12 |- | [[색인:CNTS-00093437321 中外日報 1927-08-13.pdf]] || 1927-08-13 |- | [[색인:CNTS-00093437485 中外日報 1927-08-14.pdf]] || 1927-08-14 |- | [[색인:CNTS-00067903192 中外日報 1927-08-15.pdf]] || 1927-08-15 |- | [[색인:CNTS-00093437608 中外日報 1927-08-16.pdf]] || 1927-08-16 |- | [[색인:CNTS-00093437823 中外日報 1927-08-17.pdf]] || 1927-08-17 |- | [[색인:CNTS-00049019603 中外日報 1927-08-18.pdf]] || 1927-08-18 |- | [[색인:CNTS-00093437884 中外日報 1927-08-19.pdf]] || 1927-08-19 |- | [[색인:CNTS-00093438026 中外日報 1927-08-20.pdf]] || 1927-08-20 |- | [[색인:CNTS-00093438159 中外日報 1927-08-21.pdf]] || 1927-08-21 |- | [[색인:CNTS-00093438241 中外日報 1927-08-22.pdf]] || 1927-08-22 |- | [[색인:CNTS-00093438432 中外日報 1927-08-23.pdf]] || 1927-08-23 |- | [[색인:CNTS-00093438476 中外日報 1927-08-24.pdf]] || 1927-08-24 |- | [[색인:CNTS-00093438705 中外日報 1927-08-25.pdf]] || 1927-08-25 |- | [[색인:CNTS-00093438717 中外日報 1927-08-26.pdf]] || 1927-08-26 |- | [[색인:CNTS-00093438861 中外日報 1927-08-27.pdf]] || 1927-08-27 |- | [[색인:CNTS-00093438989 中外日報 1927-08-28.pdf]] || 1927-08-28 |- | [[색인:CNTS-00093439087 中外日報 1927-08-29.pdf]] || 1927-08-29 |- | [[색인:CNTS-00093439245 中外日報 1927-08-30.pdf]] || 1927-08-30 |- | [[색인:CNTS-00093439415 中外日報 1927-08-31.pdf]] || 1927-08-31 |} === 192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52603 中外日報 1928-08-02.pdf]] || 1928-08-02 |- | [[색인:CNTS-00093452625 中外日報 1928-08-03.pdf]] || 1928-08-03 |- | [[색인:CNTS-00093452821 中外日報 1928-08-04.pdf]] || 1928-08-04 |- | [[색인:CNTS-00093452854 中外日報 1928-08-05.pdf]] || 1928-08-05 |- | [[색인:CNTS-00093452959 中外日報 1928-08-06.pdf]] || 1928-08-06 |- | [[색인:CNTS-00093453097 中外日報 1928-08-07.pdf]] || 1928-08-07 |- | [[색인:CNTS-00093453278 中外日報 1928-08-08.pdf]] || 1928-08-08 |- | [[색인:CNTS-00093453298 中外日報 1928-08-09.pdf]] || 1928-08-09 |- | [[색인:CNTS-00093453408 中外日報 1928-08-10.pdf]] || 1928-08-10 |- | [[색인:CNTS-00093453548 中外日報 1928-08-11.pdf]] || 1928-08-11 |- | [[색인:CNTS-00093453626 中外日報 1928-08-12.pdf]] || 1928-08-12 |- | [[색인:CNTS-00093453817 中外日報 1928-08-13.pdf]] || 1928-08-13 |- | [[색인:CNTS-00093453841 中外日報 1928-08-14.pdf]] || 1928-08-14 |- | [[색인:CNTS-00093453984 中外日報 1928-08-15.pdf]] || 1928-08-15 |- | [[색인:CNTS-00093454051 中外日報 1928-08-16.pdf]] || 1928-08-16 |- | [[색인:CNTS-00093454175 中外日報 1928-08-17.pdf]] || 1928-08-17 |- | [[색인:CNTS-00093454330 中外日報 1928-08-18.pdf]] || 1928-08-18 |- | [[색인:CNTS-00093454426 中外日報 1928-08-19.pdf]] || 1928-08-19 |- | [[색인:CNTS-00093454626 中外日報 1928-08-20.pdf]] || 1928-08-20 |- | [[색인:CNTS-00093454743 中外日報 1928-08-21.pdf]] || 1928-08-21 |- | [[색인:CNTS-00093454766 中外日報 1928-08-22.pdf]] || 1928-08-22 |- | [[색인:CNTS-00093454896 中外日報 1928-08-23.pdf]] || 1928-08-23 |- | [[색인:CNTS-00093455081 中外日報 1928-08-24.pdf]] || 1928-08-24 |- | [[색인:CNTS-00093455216 中外日報 1928-08-25.pdf]] || 1928-08-25 |- | [[색인:CNTS-00048208555 中外日報 1928-08-26.pdf]] || 1928-08-26 |- | [[색인:CNTS-00093455222 中外日報 1928-08-27.pdf]] || 1928-08-27 |- | [[색인:CNTS-00093455440 中外日報 1928-08-28.pdf]] || 1928-08-28 |- | [[색인:CNTS-00093455471 中外日報 1928-08-29.pdf]] || 1928-08-29 |- | [[색인:CNTS-00093455627 中外日報 1928-08-30.pdf]] || 1928-08-30 |- | [[색인:CNTS-00093455677 中外日報 1928-08-31.pdf]] || 1928-08-31 |} === 192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48574467 中外日報 1929-08-02.pdf]] || 1929-08-02 |- | [[색인:CNTS-00049033203 中外日報 1929-08-03.pdf]] || 1929-08-03 |- | [[색인:CNTS-00048201752 中外日報 1929-08-04.pdf]] || 1929-08-04 |- | [[색인:CNTS-00067908798 中外日報 1929-08-05.pdf]] || 1929-08-05 |- | [[색인:CNTS-00048138072 中外日報 1929-08-06.pdf]] || 1929-08-06 |- | [[색인:CNTS-00067908818 中外日報 1929-08-07.pdf]] || 1929-08-07 |- | [[색인:CNTS-00048168260 中外日報 1929-08-08.pdf]] || 1929-08-08 |- | [[색인:CNTS-00067908837 中外日報 1929-08-09.pdf]] || 1929-08-09 |- | [[색인:CNTS-00048241910 中外日報 1929-08-10.pdf]] || 1929-08-10 |- | [[색인:CNTS-00067908869 中外日報 1929-08-11.pdf]] || 1929-08-11 |- | [[색인:CNTS-00048881881 中外日報 1929-08-12.pdf]] || 1929-08-12 |- | [[색인:CNTS-00048384760 中外日報 1929-08-13.pdf]] || 1929-08-13 |- | [[색인:CNTS-00049008235 中外日報 1929-08-14.pdf]] || 1929-08-14 |- | [[색인:CNTS-00048856789 中外日報 1929-08-15.pdf]] || 1929-08-15 |- | [[색인:CNTS-00067908928 中外日報 1929-08-16.pdf]] || 1929-08-16 |- | [[색인:CNTS-00048647463 中外日報 1929-08-17.pdf]] || 1929-08-17 |- | [[색인:CNTS-00048840753 中外日報 1929-08-18.pdf]] || 1929-08-18 |- | [[색인:CNTS-00048538506 中外日報 1929-08-19.pdf]] || 1929-08-19 |- | [[색인:CNTS-00067908976 中外日報 1929-08-20.pdf]] || 1929-08-20 |- | [[색인:CNTS-00048557092 中外日報 1929-08-21.pdf]] || 1929-08-21 |- | [[색인:CNTS-00067908996 中外日報 1929-08-22.pdf]] || 1929-08-22 |- | [[색인:CNTS-00048714889 中外日報 1929-08-23.pdf]] || 1929-08-23 |- | [[색인:CNTS-00067909007 中外日報 1929-08-24.pdf]] || 1929-08-24 |- | [[색인:CNTS-00048206485 中外日報 1929-08-25.pdf]] || 1929-08-25 |- | [[색인:CNTS-00067909031 中外日報 1929-08-26.pdf]] || 1929-08-26 |- | [[색인:CNTS-00067909037 中外日報 1929-08-27.pdf]] || 1929-08-27 |- | [[색인:CNTS-00048111230 中外日報 1929-08-28.pdf]] || 1929-08-28 |- | [[색인:CNTS-00048143182 中外日報 1929-08-29.pdf]] || 1929-08-29 |- | [[색인:CNTS-00048326024 中外日報 1929-08-30.pdf]] || 1929-08-30 |- | [[색인:CNTS-00048677493 中外日報 1929-08-31.pdf]] || 1929-08-31 |} === 193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503617 中外日報 1930-08-02.pdf]] || 1930-08-02 |- | [[색인:CNTS-00093503976 中外日報 1930-08-03.pdf]] || 1930-08-03 |- | [[색인:CNTS-00093504113 中外日報 1930-08-04.pdf]] || 1930-08-04 |- | [[색인:CNTS-00093504212 中外日報 1930-08-05.pdf]] || 1930-08-05 |- | [[색인:CNTS-00093504458 中外日報 1930-08-06.pdf]] || 1930-08-06 |- | [[색인:CNTS-00093504624 中外日報 1930-08-07.pdf]] || 1930-08-07 |- | [[색인:CNTS-00093504818 中外日報 1930-08-08.pdf]] || 1930-08-08 |- | [[색인:CNTS-00093504966 中外日報 1930-08-09.pdf]] || 1930-08-09 |- | [[색인CNTS-00093505163 中外日報 1930-08-10.pdf]] || 1930-08-10 |- | [[색인:CNTS-00093505440 中外日報 1930-08-11.pdf]] || 1930-08-11 |- | [[색인:CNTS-00093505465 中外日報 1930-08-12.pdf]] || 1930-08-12 |- | [[색인:CNTS-00093505651 中外日報 1930-08-13.pdf]] || 1930-08-13 |- | [[색인:CNTS-00093505855 中外日報 1930-08-14.pdf]] || 1930-08-14 |- | [[색인:CNTS-00093506209 中外日報 1930-08-15.pdf]] || 1930-08-15 |- | [[색인:CNTS-00093506257 中外日報 1930-08-16.pdf]] || 1930-08-16 |- | [[색인:CNTS-00093506449 中外日報 1930-08-17.pdf]] || 1930-08-17 |- | [[색인:CNTS-00093506671 中外日報 1930-08-18.pdf]] || 1930-08-18 |- | [[색인:CNTS-00093506826 中外日報 1930-08-19.pdf]] || 1930-08-19 |- | [[색인:CNTS-00093506985 中外日報 1930-08-20.pdf]] || 1930-08-20 |- | [[색인:CNTS-00093507200 中外日報 1930-08-21.pdf]] || 1930-08-21 |- | [[색인:CNTS-00093507315 中外日報 1930-08-22.pdf]] || 1930-08-22 |- | [[색인:CNTS-00093507579 中外日報 1930-08-23.pdf]] || 1930-08-23 |- | [[색인:CNTS-00093507755 中外日報 1930-08-24.pdf]] || 1930-08-24 |- | [[색인:CNTS-00093507992 中外日報 1930-08-25.pdf]] || 1930-08-25 |- | [[색인:CNTS-00093508063 中外日報 1930-08-26.pdf]] || 1930-08-26 |- | [[색인:CNTS-00093508408 中外日報 1930-08-27.pdf]] || 1930-08-27 |- | [[색인:CNTS-00093508439 中外日報 1930-08-28.pdf]] || 1930-08-28 |- | [[색인:CNTS-00093508640 中外日報 1930-08-29.pdf]] || 1930-08-29 |- | [[색인:CNTS-00093509028 中外日報 1930-08-30.pdf]] || 1930-08-30 |- | [[색인:CNTS-00093509206 中外日報 1930-08-31.pdf]] || 1930-08-31 |} == 해방 이후 (1945년~) == === 194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298564 中外新報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12225 中外新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122434 中外新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518378 中外新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48302059 中外新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154198 中外新報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54767 中外新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691782 中外新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153694 中外新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558988 中外新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152638 中外新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120107 中外新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51813 中外新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311969 中外新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48133423 中外新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725279 中外新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51566 中外新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48184428 中外新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133132 中外新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631026 中外新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311721 中外新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205410 中外新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132555 中外新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273158 中外新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717925 中外新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201950 中外新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266013 中外新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113773 中外新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0957 中央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65300964 中央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65301033 中央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65301081 中央新聞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65301090 中央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65301123 中央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65301149 中央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65301206 中央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65301230 中央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65301270 中央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65301294 中央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65301347 中央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65301364 中央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65301388 中央新聞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65301417 中央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65301451 中央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65301504 中央新聞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65301519 中央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65301552 中央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65301616 中央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65301638 中央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65301659 中央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50396 全國勞動者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344389 全國勞動者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84456 大東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07244 大東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476528 大東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952811 大東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205480 大東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96196 大東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202016 大東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938609 大東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194546 大東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204672 大東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264306 大東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92000 大東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264645 大東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194234 大東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60637 大東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200979 大東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352004 大東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177785 大東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196620 大東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980138 大東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195431 大東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979226 大東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664145 大東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191302 大東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272432 大東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30152 大邱時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109330161 大邱時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109330231 大邱時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109330275 大邱時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109330320 大邱時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109330401 大邱時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109330427 大邱時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109330519 大邱時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109330553 大邱時報 1946-08-12.pdf]] || 1946-08-12 |- | [[색인:CNTS-00109330599 大邱時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109330651 大邱時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109330756 大邱時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109330820 大邱時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109330840 大邱時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109330909 大邱時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109330986 大邱時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109331132 大邱時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109331312 大邱時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109331318 大邱時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109331506 大邱時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109331588 大邱時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109331648 大邱時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109331700 大邱時報 1946-08-26.pdf]] || 1946-08-26 |- | [[색인:CNTS-00109331774 大邱時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109331809 大邱時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109331883 大邱時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109331955 大邱時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109331987 大邱時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가정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76758028 家政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76758066 家政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76758088 家政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76758107 家政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76758140 家政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76758163 家政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76758216 家政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76758251 家政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76758258 家政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76758292 家政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76758328 家政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76758355 家政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76758388 家政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76758409 家政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76758428 家政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76758470 家政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76758482 家政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76758508 家政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76758538 家政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76758570 家政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76758602 家政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76758634 家政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76758665 家政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76758694 家政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76758715 家政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66107 工業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88066324 工業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88066512 工業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88066592 工業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88066779 工業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88067091 工業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88067102 工業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88067204 工業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88067565 工業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88067730 工業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88067785 工業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88068065 工業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88068602 工業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88069055 工業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88069065 工業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88069196 工業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88069558 工業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88069776 工業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88070212 工業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88070329 工業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88070412 工業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88070746 工業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88070882 工業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88070927 工業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88071303 工業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194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5741 中央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5305777 中央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65305845 中央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5305862 中央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65305883 中央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5305933 中央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5305943 中央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5305981 中央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65306011 中央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5306082 中央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5306101 中央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65306129 中央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5306182 中央新聞 1947-08-16.pdf]] || 1947-08-16 |- | [[색인:CNTS-00065306192 中央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65306247 中央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65306322 中央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5306346 中央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5306380 中央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5306419 中央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65306446 中央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5306506 中央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5306533 中央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65306562 中央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65306602 中央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5306647 中央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65306658 中央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광명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469644 光明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48191659 光明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88428 光明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48800666 光明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205304 光明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48667932 光明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48336548 光明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48800046 光明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00611 光明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7982416 光明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48360276 光明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30523 全國勞動者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colspan="3" | 국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3752839 國際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13752882 國際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113752887 國際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13752928 國際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13752951 國際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13752999 國際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13753042 國際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13753082 國際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13753106 國際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13753130 國際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13753157 國際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96209 大東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7993445 大東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02145 大東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7993450 大東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194627 大東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7993458 大東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7993459 大東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7993461 大東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64378 大東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48192077 大東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7993472 大東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48485812 大東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7993477 大東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48264717 大東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48194267 大東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7993488 大東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7993493 大東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7993499 大東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48201041 大東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7993503 大東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7993508 大東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48177810 大東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48196686 大東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7993523 大東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48176217 大東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46354 大邱時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09346407 大邱時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09346456 大邱時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09346513 大邱時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09346563 大邱時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09346668 大邱時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09346702 大邱時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09346752 大邱時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09346822 大邱時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09346881 大邱時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109346882 大邱時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109347085 大邱時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109347186 大邱時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109347267 大邱時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109347401 大邱時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109347461 大邱時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109347617 大邱時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109347653 大邱時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109347678 大邱時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109347762 大邱時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109347855 大邱時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109347938 大邱時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109348003 大邱時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64215 大韓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64445 大韓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64465 大韓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64514 大韓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64536 大韓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64752 大韓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64816 大韓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64824 大韓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65070 大韓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65094 大韓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65150 大韓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65374 大韓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65401 大韓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65655 大韓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65675 大韓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65705 大韓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65755 大韓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65966 大韓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65999 大韓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66075 大韓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66265 大韓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66313 大韓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1257 婦人新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1490 婦人新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81656 婦人新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1788 婦人新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1929 婦人新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2236 婦人新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2279 婦人新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2526 婦人新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2699 婦人新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2973 婦人新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3027 婦人新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3068 婦人新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3319 婦人新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3415 婦人新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3521 婦人新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3880 婦人新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3908 婦人新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4225 婦人新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4320 婦人新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4522 婦人新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4617 婦人新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4918 婦人新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5023 婦人新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5074 婦人新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5392 婦人新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녀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6064 婦女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6270 婦女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6387 婦女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6462 婦女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6809 婦女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6980 婦女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7006 婦女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7138 婦女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7365 婦女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7546 婦女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7571 婦女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7838 婦女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7930 婦女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8290 婦女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8474 婦女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8522 婦女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8824 婦女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8950 婦女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9091 婦女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9274 婦女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9404 婦女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9429 婦女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9645 婦女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9822 婦女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41346 嶺南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8241400 嶺南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8241596 嶺南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8241697 嶺南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241857 嶺南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241963 嶺南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242196 嶺南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242387 嶺南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229349 嶺南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229399 嶺南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229607 嶺南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229906 嶺南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229994 嶺南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230295 嶺南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230530 嶺南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230617 嶺南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230867 嶺南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230917 嶺南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231192 嶺南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231446 嶺南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231498 嶺南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231757 嶺南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231819 嶺南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232049 嶺南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232407 嶺南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103934 工業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104002 工業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104039 工業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104381 工業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104424 工業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104747 工業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104790 工業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104839 工業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105166 工業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105203 工業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105208 工業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105547 工業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105571 工業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105698 工業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105948 工業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106077 工業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106431 工業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106433 工業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106532 工業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106723 工業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107169 工業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107222 工業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194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남조선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4965763 南朝鮮民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114965819 南朝鮮民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14965866 南朝鮮民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114965906 南朝鮮民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114965972 南朝鮮民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114966016 南朝鮮民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114966021 南朝鮮民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114966066 南朝鮮民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114966114 南朝鮮民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114966161 南朝鮮民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114966205 南朝鮮民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114966218 南朝鮮民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114966247 南朝鮮民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114966288 南朝鮮民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114966339 南朝鮮民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114966379 南朝鮮民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114966431 南朝鮮民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114966451 南朝鮮民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114966497 南朝鮮民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114966533 南朝鮮民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114966591 南朝鮮民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114966597 南朝鮮民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114966640 南朝鮮民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816953 大東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62773 大邱時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09362798 大邱時報 1948-08-05.pdf]] || 1948-08-05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08156 大韓日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08358 大韓日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08728 大韓日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09203 大韓日報 1948-08-09.pdf]] || 1948-08-09 |- | [[색인:CNTS-00088009428 大韓日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09801 大韓日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10349 大韓日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10702 大韓日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10754 大韓日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11046 大韓日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11400 大韓日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11883 大韓日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12502 大韓日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13332 大韓日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13415 大韓日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14017 大韓日報 1948-08-23.pdf]] || 1948-08-23 |- | [[색인:CNTS-00088014510 大韓日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14922 大韓日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15512 大韓日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16242 大韓日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16332 大韓日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16766 大韓日報 1948-08-30.pdf]] || 1948-08-30 |- | [[색인:CNTS-00088017406 大韓日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34809 婦人新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088035078 婦人新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35179 婦人新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35426 婦人新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035589 婦人新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35911 婦人新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036039 婦人新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088036150 婦人新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36275 婦人新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36533 婦人新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36683 婦人新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36934 婦人新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36976 婦人新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37086 婦人新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37377 婦人新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37462 婦人新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37727 婦人新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37901 婦人新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37982 婦人新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38263 婦人新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38604 婦人新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38652 婦人新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038775 婦人新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39052 婦人新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39315 婦人新報 1948-08-31.pdf]] || 1948-08-31 |} === 194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72035 嶺南日報 1949-08-04.pdf]] || 1949-08-04 |- | [[색인:CNTS-00088272210 嶺南日報 1949-08-05.pdf]] || 1949-08-05 |- | [[색인:CNTS-00088272505 嶺南日報 1949-08-06.pdf]] || 1949-08-06 |- | [[색인:CNTS-00088272618 嶺南日報 1949-08-10.pdf]] || 1949-08-10 |- | [[색인:CNTS-00088272811 嶺南日報 1949-08-11.pdf]] || 1949-08-11 |- | [[색인:CNTS-00088272989 嶺南日報 1949-08-12.pdf]] || 1949-08-12 |- | [[색인:CNTS-00088273263 嶺南日報 1949-08-13.pdf]] || 1949-08-13 |- | [[색인:CNTS-00088273477 嶺南日報 1949-08-15.pdf]] || 1949-08-15 |- | [[색인:CNTS-00088273600 嶺南日報 1949-08-17.pdf]] || 1949-08-17 |- | [[색인:CNTS-00088273770 嶺南日報 1949-08-19.pdf]] || 1949-08-19 |- | [[색인:CNTS-00088273980 嶺南日報 1949-08-20.pdf]] || 1949-08-20 |- | [[색인:CNTS-00088274307 嶺南日報 1949-08-21.pdf]] || 1949-08-21 |- | [[색인:CNTS-00088274513 嶺南日報 1949-08-23.pdf]] || 1949-08-23 |- | [[색인:CNTS-00088274772 嶺南日報 1949-08-25.pdf]] || 1949-08-25 |- | [[색인:CNTS-00088274989 嶺南日報 1949-08-26.pdf]] || 1949-08-26 |- | [[색인:CNTS-00088275240 嶺南日報 1949-08-27.pdf]] || 1949-08-27 |- | [[색인:CNTS-00088275487 嶺南日報 1949-08-28.pdf]] || 1949-08-28 |- | [[색인:CNTS-00088275705 嶺南日報 1949-08-30.pdf]] || 1949-08-30 |- | [[색인:CNTS-00088276098 嶺南日報 1949-08-31.pdf]] || 1949-08-31 |} 2h4o6t5xntda57n6axuwwfyypgwu6ja 392570 392569 2025-06-25T16:46:59Z Aspere 5453 /* 1948년 */ 392570 wikitext text/x-wiki == 범례 == * 한자 ** 국한문 혼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O ** 제목이나 고유명사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 * 옛한글 ** 아래아 등 현대의 표기와 현저하게 다른 경우 O ** 아래아는 소멸되었으나 일부 특정 글자("또"를 "ᄯᅩ"로 적는 등)에서만 사용하는 경우 △ == 개화기 (~1900년대) == === 1904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163043 大韓每日申報 1904-08-09.pdf]] || 1904-08-09 || [[색인:대한매일신보 19040809.pdf|기존 작업 색인]]과 중복 |- | [[색인:CNTS-00048114450 大韓每日申報 1904-08-10.pdf]] || 1904-08-10 |- | [[색인:CNTS-00048114782 大韓每日申報 1904-08-11.pdf]] || 1904-08-11 |- | [[색인:CNTS-00048178680 大韓每日申報 1904-08-12.pdf]] || 1904-08-12 |- | [[색인:CNTS-00048143238 大韓每日申報 1904-08-13.pdf]] || 1904-08-13 |- | [[색인:CNTS-00048196414 大韓每日申報 1904-08-16.pdf]] || 1904-08-16 |- | [[색인:CNTS-00048175458 大韓每日申報 1904-08-17.pdf]] || 1904-08-17 |- | [[색인:CNTS-00048171812 大韓每日申報 1904-08-18.pdf]] || 1904-08-18 |- | [[색인:CNTS-00048172247 大韓每日申報 1904-08-20.pdf]] || 1904-08-20 |- | [[색인:CNTS-00048175296 大韓每日申報 1904-08-23.pdf]] || 1904-08-23 |- | [[색인:CNTS-00048174256 大韓每日申報 1904-08-24.pdf]] || 1904-08-24 |- | [[색인:CNTS-00048244659 大韓每日申報 1904-08-25.pdf]] || 1904-08-25 |- | [[색인:CNTS-00048122714 大韓每日申報 1904-08-27.pdf]] || 1904-08-27 |- | [[색인:CNTS-00048213452 大韓每日申報 1904-08-30.pdf]] || 1904-08-30 |- | [[색인:CNTS-00048123625 大韓每日申報 1904-08-31.pdf]] || 1904-08-31 |} === 1905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05742 大韓每日申報 1905-08-12.pdf]] || 1905-08-12 |- | [[색인:CNTS-00093105790 大韓每日申報 1905-08-13.pdf]] || 1905-08-13 |- | [[색인:CNTS-00093105813 大韓每日申報 1905-08-15.pdf]] || 1905-08-15 |- | [[색인:CNTS-00093105859 大韓每日申報 1905-08-16.pdf]] || 1905-08-16 |- | [[색인:CNTS-00093105912 大韓每日申報 1905-08-18.pdf]] || 1905-08-18 |- | [[색인:CNTS-00093105964 大韓每日申報 1905-08-19.pdf]] || 1905-08-19 |- | [[색인:CNTS-00093105991 大韓每日申報 1905-08-20.pdf]] || 1905-08-20 |- | [[색인:CNTS-00093106028 大韓每日申報 1905-08-22.pdf]] || 1905-08-22 |- | [[색인:CNTS-00093106064 大韓每日申報 1905-08-23.pdf]] || 1905-08-23 |- | [[색인:CNTS-00093106104 大韓每日申報 1905-08-24.pdf]] || 1905-08-24 |- | [[색인:CNTS-00093106151 大韓每日申報 1905-08-25.pdf]] || 1905-08-25 |- | [[색인:CNTS-00093106188 大韓每日申報 1905-08-27.pdf]] || 1905-08-27 |- | [[색인:CNTS-00093106235 大韓每日申報 1905-08-29.pdf]] || 1905-08-29 |- | [[색인:CNTS-00093106308 大韓每日申報 1905-08-30.pdf]] || 1905-08-30 |- | [[색인:CNTS-00093106334 大韓每日申報 1905-08-31.pdf]] || 1905-08-31 |} === 190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6470 共立新報 1906-08-25.pdf]] || 1906-08-25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 [[색인:CNTS-00093119282 大韓每日申報 1906-08-02.pdf]] || 1906-08-02 |- | [[색인:CNTS-00093119350 大韓每日申報 1906-08-03.pdf]] || 1906-08-03 |- | [[색인:CNTS-00093119383 大韓每日申報 1906-08-04.pdf]] || 1906-08-04 |- | [[색인:CNTS-00093119440 大韓每日申報 1906-08-05.pdf]] || 1906-08-05 |- | [[색인:CNTS-00093119523 大韓每日申報 1906-08-07.pdf]] || 1906-08-07 |- | [[색인:CNTS-00093119549 大韓每日申報 1906-08-08.pdf]] || 1906-08-08 |- | [[색인:CNTS-00093119591 大韓每日申報 1906-08-09.pdf]] || 1906-08-09 |- | [[색인:CNTS-00093119668 大韓每日申報 1906-08-10.pdf]] || 1906-08-10 |- | [[색인:CNTS-00093119700 大韓每日申報 1906-08-11.pdf]] || 1906-08-11 |- | [[색인:CNTS-00093119778 大韓每日申報 1906-08-12.pdf]] || 1906-08-12 |- | [[색인:CNTS-00093119850 大韓每日申報 1906-08-14.pdf]] || 1906-08-14 |- | [[색인:CNTS-00093119897 大韓每日申報 1906-08-15.pdf]] || 1906-08-15 |- | [[색인:CNTS-00093119939 大韓每日申報 1906-08-16.pdf]] || 1906-08-16 |- | [[색인:CNTS-00093119975 大韓每日申報 1906-08-17.pdf]] || 1906-08-17 |- | [[색인:CNTS-00093120026 大韓每日申報 1906-08-18.pdf]] || 1906-08-18 |- | [[색인:CNTS-00093120074 大韓每日申報 1906-08-19.pdf]] || 1906-08-19 |- | [[색인:CNTS-00093120133 大韓每日申報 1906-08-21.pdf]] || 1906-08-21 |- | [[색인:CNTS-00093120185 大韓每日申報 1906-08-22.pdf]] || 1906-08-22 |- | [[색인:CNTS-00093120212 大韓每日申報 1906-08-23.pdf]] || 1906-08-23 |- | [[색인:CNTS-00093120270 大韓每日申報 1906-08-24.pdf]] || 1906-08-24 |- | [[색인:CNTS-00093120360 大韓每日申報 1906-08-25.pdf]] || 1906-08-25 |- | [[색인:CNTS-00093120408 大韓每日申報 1906-08-26.pdf]] || 1906-08-26 |- | [[색인:CNTS-00093120461 大韓每日申報 1906-08-28.pdf]] || 1906-08-28 |- | [[색인:CNTS-00093120522 大韓每日申報 1906-08-29.pdf]] || 1906-08-29 |- | [[색인:CNTS-00093120556 大韓每日申報 1906-08-30.pdf]] || 1906-08-30 |- | [[색인:CNTS-00093120593 大韓每日申報 1906-08-31.pdf]] || 1906-08-31 |} === 190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7280 共立新報 1907-08-09.pdf ]] || 1907-08-09 |- | [[색인:CNTS-00049010957 共立新報 1907-08-16.pdf ]] || 1907-08-16 |- | [[색인:CNTS-00115097358 共立新報 1907-08-23.pdf ]] || 1907-08-23 |- | [[색인:CNTS-00115097372 共立新報 1907-08-30.pdf ]] || 1907-08-30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37172 大韓每日申報 1907-08-02.pdf]] || 1907-08-02 |- | [[색인:CNTS-00093137187 大韓每日申報 1907-08-03.pdf]] || 1907-08-03 |- | [[색인:CNTS-00093137316 大韓每日申報 1907-08-04.pdf]] || 1907-08-04 |- | [[색인:CNTS-00093137338 大韓每日申報 1907-08-06.pdf]] || 1907-08-06 |- | [[색인:CNTS-00093137480 大韓每日申報 1907-08-07.pdf]] || 1907-08-07 |- | [[색인:CNTS-00093137499 大韓每日申報 1907-08-08.pdf]] || 1907-08-08 |- | [[색인:CNTS-00093137625 大韓每日申報 1907-08-09.pdf]] || 1907-08-09 |- | [[색인:CNTS-00093137650 大韓每日申報 1907-08-10.pdf]] || 1907-08-10 |- | [[색인:CNTS-00093137777 大韓每日申報 1907-08-11.pdf]] || 1907-08-11 |- | [[색인:CNTS-00093137886 大韓每日申報 1907-08-13.pdf]] || 1907-08-13 |- | [[색인:CNTS-00093137935 大韓每日申報 1907-08-14.pdf]] || 1907-08-14 |- | [[색인:CNTS-00093137990 大韓每日申報 1907-08-15.pdf]] || 1907-08-15 |- | [[색인:CNTS-00093138042 大韓每日申報 1907-08-16.pdf]] || 1907-08-16 |- | [[색인:CNTS-00093138108 大韓每日申報 1907-08-17.pdf]] || 1907-08-17 |- | [[색인:CNTS-00093138173 大韓每日申報 1907-08-18.pdf]] || 1907-08-18 |- | [[색인:CNTS-00093138255 大韓每日申報 1907-08-20.pdf]] || 1907-08-20 |- | [[색인:CNTS-00093138323 大韓每日申報 1907-08-21.pdf]] || 1907-08-21 |- | [[색인:CNTS-00093138398 大韓每日申報 1907-08-22.pdf]] || 1907-08-22 |- | [[색인:CNTS-00093138538 大韓每日申報 1907-08-23.pdf]] || 1907-08-23 |- | [[색인:CNTS-00093138600 大韓每日申報 1907-08-24.pdf]] || 1907-08-24 |- | [[색인:CNTS-00093138631 大韓每日申報 1907-08-27.pdf]] || 1907-08-27 |- | [[색인:CNTS-00093138753 大韓每日申報 1907-08-29.pdf]] || 1907-08-29 |- | [[색인:CNTS-00093138772 大韓每日申報 1907-08-30.pdf]] || 1907-08-30 |- | [[색인:CNTS-00093138910 大韓每日申報 1907-08-31.pdf]] || 1907-08-31 |} === 190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916681 共立新報 1908-08-12.pdf ]] || 1908-08-12 |- | [[색인:CNTS-00048962815 共立新報 1908-08-19.pdf ]] || 1908-08-19 |- | [[색인:CNTS-00049012696 共立新報 1908-08-26.pdf ]] || 1908-08-26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61249 大韓每日申報 1908-08-02.pdf]] || 1908-08-02 |- | [[색인:CNTS-00093161323 大韓每日申報 1908-08-04.pdf]] || 1908-08-04 |- | [[색인:CNTS-00093161450 大韓每日申報 1908-08-05.pdf]] || 1908-08-05 |- | [[색인:CNTS-00093161494 大韓每日申報 1908-08-06.pdf]] || 1908-08-06 |- | [[색인:CNTS-00093161636 大韓每日申報 1908-08-07.pdf]] || 1908-08-07 |- | [[색인:CNTS-00093161666 大韓每日申報 1908-08-08.pdf]] || 1908-08-08 |- | [[색인:CNTS-00093161770 大韓每日申報 1908-08-09.pdf]] || 1908-08-09 |- | [[색인:CNTS-00093161841 大韓每日申報 1908-08-11.pdf]] || 1908-08-11 |- | [[색인:CNTS-00093161884 大韓每日申報 1908-08-12.pdf]] || 1908-08-12 |- | [[색인:CNTS-00093161962 大韓每日申報 1908-08-13.pdf]] || 1908-08-13 |- | [[색인:CNTS-00093162054 大韓每日申報 1908-08-14.pdf]] || 1908-08-14 |- | [[색인:CNTS-00093162125 大韓每日申報 1908-08-16.pdf]] || 1908-08-16 |- | [[색인:CNTS-00093162198 大韓每日申報 1908-08-18.pdf]] || 1908-08-18 |- | [[색인:CNTS-00093162279 大韓每日申報 1908-08-19.pdf]] || 1908-08-19 |- | [[색인:CNTS-00093162349 大韓每日申報 1908-08-20.pdf]] || 1908-08-20 |- | [[색인:CNTS-00093162447 大韓每日申報 1908-08-21.pdf]] || 1908-08-21 |- | [[색인:CNTS-00093162505 大韓每日申報 1908-08-22.pdf]] || 1908-08-22 |- | [[색인:CNTS-00093162642 大韓每日申報 1908-08-23.pdf]] || 1908-08-23 |- | [[색인:CNTS-00093162655 大韓每日申報 1908-08-25.pdf]] || 1908-08-25 |- | [[색인:CNTS-00093162740 大韓每日申報 1908-08-26.pdf]] || 1908-08-26 |- | [[색인:CNTS-00093162861 大韓每日申報 1908-08-27.pdf]] || 1908-08-27 |- | [[색인:CNTS-00093162903 大韓每日申報 1908-08-29.pdf]] || 1908-08-29 |- | [[색인:CNTS-00093162983 大韓每日申報 1908-08-30.pdf]] || 1908-08-30 |} ==== 190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83086 大韓每日申報 1909-08-03.pdf]] || 1909-08-03 |- | [[색인:CNTS-00093183168 大韓每日申報 1909-08-04.pdf]] || 1909-08-04 |- | [[색인:CNTS-00093183247 大韓每日申報 1909-08-05.pdf]] || 1909-08-05 |- | [[색인:CNTS-00093183374 大韓每日申報 1909-08-06.pdf]] || 1909-08-06 |- | [[색인:CNTS-00093183397 大韓每日申報 1909-08-07.pdf]] || 1909-08-07 |- | [[색인:CNTS-00093183472 大韓每日申報 1909-08-08.pdf]] || 1909-08-08 |- | [[색인:CNTS-00093183614 大韓每日申報 1909-08-10.pdf]] || 1909-08-10 |- | [[색인:CNTS-00093183634 大韓每日申報 1909-08-11.pdf]] || 1909-08-11 |- | [[색인:CNTS-00093183705 大韓每日申報 1909-08-12.pdf]] || 1909-08-12 |- | [[색인:CNTS-00093183789 大韓每日申報 1909-08-13.pdf]] || 1909-08-13 |- | [[색인:CNTS-00093183860 大韓每日申報 1909-08-14.pdf]] || 1909-08-14 |- | [[색인:CNTS-00093183937 大韓每日申報 1909-08-17.pdf]] || 1909-08-17 |- | [[색인:CNTS-00093184043 大韓每日申報 1909-08-18.pdf]] || 1909-08-18 |- | [[색인:CNTS-00093184073 大韓每日申報 1909-08-19.pdf]] || 1909-08-19 |- | [[색인:CNTS-00093184143 大韓每日申報 1909-08-20.pdf]] || 1909-08-20 |- | [[색인:CNTS-00093184253 大韓每日申報 1909-08-21.pdf]] || 1909-08-21 |- | [[색인:CNTS-00093184306 大韓每日申報 1909-08-22.pdf]] || 1909-08-22 |- | [[색인:CNTS-00093184382 大韓每日申報 1909-08-24.pdf]] || 1909-08-24 |- | [[색인:CNTS-00093184464 大韓每日申報 1909-08-25.pdf]] || 1909-08-25 |- | [[색인:CNTS-00093184606 大韓每日申報 1909-08-26.pdf]] || 1909-08-26 |- | [[색인:CNTS-00093184630 大韓每日申報 1909-08-27.pdf]] || 1909-08-27 |- | [[색인:CNTS-00093184730 大韓每日申報 1909-08-29.pdf]] || 1909-08-29 |- | [[색인:CNTS-00093184853 大韓每日申報 1909-08-31.pdf]] || 1909-08-31 |} === 191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208820 大韓每日申報 1910-08-03.pdf]] || 1910-08-03 |- | [[색인:CNTS-00093208906 大韓每日申報 1910-08-04.pdf]] || 1910-08-04 |- | [[색인:CNTS-00093208987 大韓每日申報 1910-08-05.pdf]] || 1910-08-05 |- | [[색인:CNTS-00093209080 大韓每日申報 1910-08-06.pdf]] || 1910-08-06 |- | [[색인:CNTS-00093209184 大韓每日申報 1910-08-07.pdf]] || 1910-08-07 |- | [[색인:CNTS-00093209270 大韓每日申報 1910-08-09.pdf]] || 1910-08-09 |- | [[색인:CNTS-00093209358 大韓每日申報 1910-08-16.pdf]] || 1910-08-16 |- | [[색인:CNTS-00093209455 大韓每日申報 1910-08-17.pdf]] || 1910-08-17 |- | [[색인:CNTS-00093209525 大韓每日申報 1910-08-26.pdf]] || 1910-08-26 |- | [[색인:CNTS-00093209617 大韓每日申報 1910-08-27.pdf]] || 1910-08-27 |- | [[색인:CNTS-00093209702 大韓每日申報 1910-08-28.pdf]] || 1910-08-28 |} == 일제강점기 (1910년대~1944년) == === 192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35903 中外日報 1927-08-02.pdf]] || 1927-08-02 |- | [[색인:CNTS-00093436018 中外日報 1927-08-03.pdf]] || 1927-08-03 |- | [[색인:CNTS-00093436273 中外日報 1927-08-04.pdf]] || 1927-08-04 |- | [[색인:CNTS-00093436345 中外日報 1927-08-05.pdf]] || 1927-08-05 |- | [[색인:CNTS-00093436458 中外日報 1927-08-06.pdf]] || 1927-08-06 |- | [[색인:CNTS-00093436542 中外日報 1927-08-07.pdf]] || 1927-08-07 |- | [[색인:CNTS-00093436729 中外日報 1927-08-08.pdf]] || 1927-08-08 |- | [[색인:CNTS-00093436826 中外日報 1927-08-09.pdf]] || 1927-08-09 |- | [[색인:CNTS-00093436990 中外日報 1927-08-10.pdf]] || 1927-08-10 |- | [[색인:CNTS-00093437060 中外日報 1927-08-11.pdf]] || 1927-08-11 |- | [[색인:CNTS-00093437217 中外日報 1927-08-12.pdf]] || 1927-08-12 |- | [[색인:CNTS-00093437321 中外日報 1927-08-13.pdf]] || 1927-08-13 |- | [[색인:CNTS-00093437485 中外日報 1927-08-14.pdf]] || 1927-08-14 |- | [[색인:CNTS-00067903192 中外日報 1927-08-15.pdf]] || 1927-08-15 |- | [[색인:CNTS-00093437608 中外日報 1927-08-16.pdf]] || 1927-08-16 |- | [[색인:CNTS-00093437823 中外日報 1927-08-17.pdf]] || 1927-08-17 |- | [[색인:CNTS-00049019603 中外日報 1927-08-18.pdf]] || 1927-08-18 |- | [[색인:CNTS-00093437884 中外日報 1927-08-19.pdf]] || 1927-08-19 |- | [[색인:CNTS-00093438026 中外日報 1927-08-20.pdf]] || 1927-08-20 |- | [[색인:CNTS-00093438159 中外日報 1927-08-21.pdf]] || 1927-08-21 |- | [[색인:CNTS-00093438241 中外日報 1927-08-22.pdf]] || 1927-08-22 |- | [[색인:CNTS-00093438432 中外日報 1927-08-23.pdf]] || 1927-08-23 |- | [[색인:CNTS-00093438476 中外日報 1927-08-24.pdf]] || 1927-08-24 |- | [[색인:CNTS-00093438705 中外日報 1927-08-25.pdf]] || 1927-08-25 |- | [[색인:CNTS-00093438717 中外日報 1927-08-26.pdf]] || 1927-08-26 |- | [[색인:CNTS-00093438861 中外日報 1927-08-27.pdf]] || 1927-08-27 |- | [[색인:CNTS-00093438989 中外日報 1927-08-28.pdf]] || 1927-08-28 |- | [[색인:CNTS-00093439087 中外日報 1927-08-29.pdf]] || 1927-08-29 |- | [[색인:CNTS-00093439245 中外日報 1927-08-30.pdf]] || 1927-08-30 |- | [[색인:CNTS-00093439415 中外日報 1927-08-31.pdf]] || 1927-08-31 |} === 192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52603 中外日報 1928-08-02.pdf]] || 1928-08-02 |- | [[색인:CNTS-00093452625 中外日報 1928-08-03.pdf]] || 1928-08-03 |- | [[색인:CNTS-00093452821 中外日報 1928-08-04.pdf]] || 1928-08-04 |- | [[색인:CNTS-00093452854 中外日報 1928-08-05.pdf]] || 1928-08-05 |- | [[색인:CNTS-00093452959 中外日報 1928-08-06.pdf]] || 1928-08-06 |- | [[색인:CNTS-00093453097 中外日報 1928-08-07.pdf]] || 1928-08-07 |- | [[색인:CNTS-00093453278 中外日報 1928-08-08.pdf]] || 1928-08-08 |- | [[색인:CNTS-00093453298 中外日報 1928-08-09.pdf]] || 1928-08-09 |- | [[색인:CNTS-00093453408 中外日報 1928-08-10.pdf]] || 1928-08-10 |- | [[색인:CNTS-00093453548 中外日報 1928-08-11.pdf]] || 1928-08-11 |- | [[색인:CNTS-00093453626 中外日報 1928-08-12.pdf]] || 1928-08-12 |- | [[색인:CNTS-00093453817 中外日報 1928-08-13.pdf]] || 1928-08-13 |- | [[색인:CNTS-00093453841 中外日報 1928-08-14.pdf]] || 1928-08-14 |- | [[색인:CNTS-00093453984 中外日報 1928-08-15.pdf]] || 1928-08-15 |- | [[색인:CNTS-00093454051 中外日報 1928-08-16.pdf]] || 1928-08-16 |- | [[색인:CNTS-00093454175 中外日報 1928-08-17.pdf]] || 1928-08-17 |- | [[색인:CNTS-00093454330 中外日報 1928-08-18.pdf]] || 1928-08-18 |- | [[색인:CNTS-00093454426 中外日報 1928-08-19.pdf]] || 1928-08-19 |- | [[색인:CNTS-00093454626 中外日報 1928-08-20.pdf]] || 1928-08-20 |- | [[색인:CNTS-00093454743 中外日報 1928-08-21.pdf]] || 1928-08-21 |- | [[색인:CNTS-00093454766 中外日報 1928-08-22.pdf]] || 1928-08-22 |- | [[색인:CNTS-00093454896 中外日報 1928-08-23.pdf]] || 1928-08-23 |- | [[색인:CNTS-00093455081 中外日報 1928-08-24.pdf]] || 1928-08-24 |- | [[색인:CNTS-00093455216 中外日報 1928-08-25.pdf]] || 1928-08-25 |- | [[색인:CNTS-00048208555 中外日報 1928-08-26.pdf]] || 1928-08-26 |- | [[색인:CNTS-00093455222 中外日報 1928-08-27.pdf]] || 1928-08-27 |- | [[색인:CNTS-00093455440 中外日報 1928-08-28.pdf]] || 1928-08-28 |- | [[색인:CNTS-00093455471 中外日報 1928-08-29.pdf]] || 1928-08-29 |- | [[색인:CNTS-00093455627 中外日報 1928-08-30.pdf]] || 1928-08-30 |- | [[색인:CNTS-00093455677 中外日報 1928-08-31.pdf]] || 1928-08-31 |} === 192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48574467 中外日報 1929-08-02.pdf]] || 1929-08-02 |- | [[색인:CNTS-00049033203 中外日報 1929-08-03.pdf]] || 1929-08-03 |- | [[색인:CNTS-00048201752 中外日報 1929-08-04.pdf]] || 1929-08-04 |- | [[색인:CNTS-00067908798 中外日報 1929-08-05.pdf]] || 1929-08-05 |- | [[색인:CNTS-00048138072 中外日報 1929-08-06.pdf]] || 1929-08-06 |- | [[색인:CNTS-00067908818 中外日報 1929-08-07.pdf]] || 1929-08-07 |- | [[색인:CNTS-00048168260 中外日報 1929-08-08.pdf]] || 1929-08-08 |- | [[색인:CNTS-00067908837 中外日報 1929-08-09.pdf]] || 1929-08-09 |- | [[색인:CNTS-00048241910 中外日報 1929-08-10.pdf]] || 1929-08-10 |- | [[색인:CNTS-00067908869 中外日報 1929-08-11.pdf]] || 1929-08-11 |- | [[색인:CNTS-00048881881 中外日報 1929-08-12.pdf]] || 1929-08-12 |- | [[색인:CNTS-00048384760 中外日報 1929-08-13.pdf]] || 1929-08-13 |- | [[색인:CNTS-00049008235 中外日報 1929-08-14.pdf]] || 1929-08-14 |- | [[색인:CNTS-00048856789 中外日報 1929-08-15.pdf]] || 1929-08-15 |- | [[색인:CNTS-00067908928 中外日報 1929-08-16.pdf]] || 1929-08-16 |- | [[색인:CNTS-00048647463 中外日報 1929-08-17.pdf]] || 1929-08-17 |- | [[색인:CNTS-00048840753 中外日報 1929-08-18.pdf]] || 1929-08-18 |- | [[색인:CNTS-00048538506 中外日報 1929-08-19.pdf]] || 1929-08-19 |- | [[색인:CNTS-00067908976 中外日報 1929-08-20.pdf]] || 1929-08-20 |- | [[색인:CNTS-00048557092 中外日報 1929-08-21.pdf]] || 1929-08-21 |- | [[색인:CNTS-00067908996 中外日報 1929-08-22.pdf]] || 1929-08-22 |- | [[색인:CNTS-00048714889 中外日報 1929-08-23.pdf]] || 1929-08-23 |- | [[색인:CNTS-00067909007 中外日報 1929-08-24.pdf]] || 1929-08-24 |- | [[색인:CNTS-00048206485 中外日報 1929-08-25.pdf]] || 1929-08-25 |- | [[색인:CNTS-00067909031 中外日報 1929-08-26.pdf]] || 1929-08-26 |- | [[색인:CNTS-00067909037 中外日報 1929-08-27.pdf]] || 1929-08-27 |- | [[색인:CNTS-00048111230 中外日報 1929-08-28.pdf]] || 1929-08-28 |- | [[색인:CNTS-00048143182 中外日報 1929-08-29.pdf]] || 1929-08-29 |- | [[색인:CNTS-00048326024 中外日報 1929-08-30.pdf]] || 1929-08-30 |- | [[색인:CNTS-00048677493 中外日報 1929-08-31.pdf]] || 1929-08-31 |} === 193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503617 中外日報 1930-08-02.pdf]] || 1930-08-02 |- | [[색인:CNTS-00093503976 中外日報 1930-08-03.pdf]] || 1930-08-03 |- | [[색인:CNTS-00093504113 中外日報 1930-08-04.pdf]] || 1930-08-04 |- | [[색인:CNTS-00093504212 中外日報 1930-08-05.pdf]] || 1930-08-05 |- | [[색인:CNTS-00093504458 中外日報 1930-08-06.pdf]] || 1930-08-06 |- | [[색인:CNTS-00093504624 中外日報 1930-08-07.pdf]] || 1930-08-07 |- | [[색인:CNTS-00093504818 中外日報 1930-08-08.pdf]] || 1930-08-08 |- | [[색인:CNTS-00093504966 中外日報 1930-08-09.pdf]] || 1930-08-09 |- | [[색인CNTS-00093505163 中外日報 1930-08-10.pdf]] || 1930-08-10 |- | [[색인:CNTS-00093505440 中外日報 1930-08-11.pdf]] || 1930-08-11 |- | [[색인:CNTS-00093505465 中外日報 1930-08-12.pdf]] || 1930-08-12 |- | [[색인:CNTS-00093505651 中外日報 1930-08-13.pdf]] || 1930-08-13 |- | [[색인:CNTS-00093505855 中外日報 1930-08-14.pdf]] || 1930-08-14 |- | [[색인:CNTS-00093506209 中外日報 1930-08-15.pdf]] || 1930-08-15 |- | [[색인:CNTS-00093506257 中外日報 1930-08-16.pdf]] || 1930-08-16 |- | [[색인:CNTS-00093506449 中外日報 1930-08-17.pdf]] || 1930-08-17 |- | [[색인:CNTS-00093506671 中外日報 1930-08-18.pdf]] || 1930-08-18 |- | [[색인:CNTS-00093506826 中外日報 1930-08-19.pdf]] || 1930-08-19 |- | [[색인:CNTS-00093506985 中外日報 1930-08-20.pdf]] || 1930-08-20 |- | [[색인:CNTS-00093507200 中外日報 1930-08-21.pdf]] || 1930-08-21 |- | [[색인:CNTS-00093507315 中外日報 1930-08-22.pdf]] || 1930-08-22 |- | [[색인:CNTS-00093507579 中外日報 1930-08-23.pdf]] || 1930-08-23 |- | [[색인:CNTS-00093507755 中外日報 1930-08-24.pdf]] || 1930-08-24 |- | [[색인:CNTS-00093507992 中外日報 1930-08-25.pdf]] || 1930-08-25 |- | [[색인:CNTS-00093508063 中外日報 1930-08-26.pdf]] || 1930-08-26 |- | [[색인:CNTS-00093508408 中外日報 1930-08-27.pdf]] || 1930-08-27 |- | [[색인:CNTS-00093508439 中外日報 1930-08-28.pdf]] || 1930-08-28 |- | [[색인:CNTS-00093508640 中外日報 1930-08-29.pdf]] || 1930-08-29 |- | [[색인:CNTS-00093509028 中外日報 1930-08-30.pdf]] || 1930-08-30 |- | [[색인:CNTS-00093509206 中外日報 1930-08-31.pdf]] || 1930-08-31 |} == 해방 이후 (1945년~) == === 194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298564 中外新報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12225 中外新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122434 中外新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518378 中外新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48302059 中外新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154198 中外新報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54767 中外新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691782 中外新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153694 中外新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558988 中外新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152638 中外新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120107 中外新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51813 中外新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311969 中外新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48133423 中外新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725279 中外新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51566 中外新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48184428 中外新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133132 中外新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631026 中外新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311721 中外新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205410 中外新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132555 中外新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273158 中外新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717925 中外新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201950 中外新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266013 中外新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113773 中外新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0957 中央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65300964 中央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65301033 中央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65301081 中央新聞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65301090 中央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65301123 中央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65301149 中央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65301206 中央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65301230 中央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65301270 中央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65301294 中央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65301347 中央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65301364 中央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65301388 中央新聞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65301417 中央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65301451 中央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65301504 中央新聞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65301519 中央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65301552 中央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65301616 中央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65301638 中央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65301659 中央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50396 全國勞動者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344389 全國勞動者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84456 大東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07244 大東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476528 大東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952811 大東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205480 大東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96196 大東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202016 大東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938609 大東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194546 大東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204672 大東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264306 大東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92000 大東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264645 大東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194234 大東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60637 大東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200979 大東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352004 大東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177785 大東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196620 大東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980138 大東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195431 大東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979226 大東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664145 大東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191302 大東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272432 大東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30152 大邱時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109330161 大邱時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109330231 大邱時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109330275 大邱時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109330320 大邱時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109330401 大邱時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109330427 大邱時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109330519 大邱時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109330553 大邱時報 1946-08-12.pdf]] || 1946-08-12 |- | [[색인:CNTS-00109330599 大邱時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109330651 大邱時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109330756 大邱時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109330820 大邱時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109330840 大邱時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109330909 大邱時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109330986 大邱時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109331132 大邱時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109331312 大邱時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109331318 大邱時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109331506 大邱時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109331588 大邱時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109331648 大邱時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109331700 大邱時報 1946-08-26.pdf]] || 1946-08-26 |- | [[색인:CNTS-00109331774 大邱時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109331809 大邱時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109331883 大邱時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109331955 大邱時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109331987 大邱時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가정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76758028 家政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76758066 家政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76758088 家政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76758107 家政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76758140 家政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76758163 家政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76758216 家政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76758251 家政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76758258 家政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76758292 家政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76758328 家政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76758355 家政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76758388 家政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76758409 家政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76758428 家政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76758470 家政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76758482 家政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76758508 家政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76758538 家政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76758570 家政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76758602 家政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76758634 家政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76758665 家政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76758694 家政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76758715 家政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66107 工業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88066324 工業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88066512 工業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88066592 工業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88066779 工業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88067091 工業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88067102 工業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88067204 工業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88067565 工業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88067730 工業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88067785 工業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88068065 工業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88068602 工業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88069055 工業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88069065 工業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88069196 工業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88069558 工業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88069776 工業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88070212 工業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88070329 工業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88070412 工業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88070746 工業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88070882 工業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88070927 工業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88071303 工業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194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5741 中央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5305777 中央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65305845 中央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5305862 中央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65305883 中央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5305933 中央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5305943 中央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5305981 中央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65306011 中央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5306082 中央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5306101 中央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65306129 中央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5306182 中央新聞 1947-08-16.pdf]] || 1947-08-16 |- | [[색인:CNTS-00065306192 中央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65306247 中央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65306322 中央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5306346 中央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5306380 中央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5306419 中央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65306446 中央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5306506 中央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5306533 中央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65306562 中央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65306602 中央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5306647 中央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65306658 中央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광명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469644 光明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48191659 光明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88428 光明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48800666 光明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205304 光明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48667932 光明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48336548 光明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48800046 光明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00611 光明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7982416 光明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48360276 光明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30523 全國勞動者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colspan="3" | 국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3752839 國際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13752882 國際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113752887 國際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13752928 國際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13752951 國際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13752999 國際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13753042 國際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13753082 國際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13753106 國際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13753130 國際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13753157 國際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96209 大東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7993445 大東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02145 大東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7993450 大東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194627 大東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7993458 大東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7993459 大東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7993461 大東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64378 大東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48192077 大東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7993472 大東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48485812 大東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7993477 大東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48264717 大東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48194267 大東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7993488 大東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7993493 大東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7993499 大東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48201041 大東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7993503 大東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7993508 大東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48177810 大東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48196686 大東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7993523 大東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48176217 大東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46354 大邱時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09346407 大邱時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09346456 大邱時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09346513 大邱時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09346563 大邱時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09346668 大邱時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09346702 大邱時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09346752 大邱時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09346822 大邱時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09346881 大邱時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109346882 大邱時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109347085 大邱時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109347186 大邱時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109347267 大邱時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109347401 大邱時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109347461 大邱時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109347617 大邱時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109347653 大邱時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109347678 大邱時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109347762 大邱時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109347855 大邱時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109347938 大邱時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109348003 大邱時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64215 大韓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64445 大韓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64465 大韓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64514 大韓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64536 大韓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64752 大韓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64816 大韓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64824 大韓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65070 大韓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65094 大韓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65150 大韓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65374 大韓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65401 大韓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65655 大韓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65675 大韓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65705 大韓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65755 大韓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65966 大韓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65999 大韓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66075 大韓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66265 大韓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66313 大韓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1257 婦人新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1490 婦人新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81656 婦人新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1788 婦人新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1929 婦人新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2236 婦人新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2279 婦人新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2526 婦人新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2699 婦人新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2973 婦人新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3027 婦人新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3068 婦人新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3319 婦人新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3415 婦人新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3521 婦人新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3880 婦人新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3908 婦人新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4225 婦人新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4320 婦人新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4522 婦人新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4617 婦人新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4918 婦人新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5023 婦人新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5074 婦人新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5392 婦人新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녀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6064 婦女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6270 婦女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6387 婦女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6462 婦女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6809 婦女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6980 婦女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7006 婦女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7138 婦女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7365 婦女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7546 婦女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7571 婦女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7838 婦女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7930 婦女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8290 婦女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8474 婦女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8522 婦女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8824 婦女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8950 婦女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9091 婦女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9274 婦女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9404 婦女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9429 婦女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9645 婦女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9822 婦女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41346 嶺南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8241400 嶺南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8241596 嶺南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8241697 嶺南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241857 嶺南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241963 嶺南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242196 嶺南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242387 嶺南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229349 嶺南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229399 嶺南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229607 嶺南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229906 嶺南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229994 嶺南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230295 嶺南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230530 嶺南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230617 嶺南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230867 嶺南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230917 嶺南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231192 嶺南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231446 嶺南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231498 嶺南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231757 嶺南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231819 嶺南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232049 嶺南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232407 嶺南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103934 工業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104002 工業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104039 工業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104381 工業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104424 工業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104747 工業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104790 工業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104839 工業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105166 工業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105203 工業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105208 工業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105547 工業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105571 工業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105698 工業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105948 工業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106077 工業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106431 工業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106433 工業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106532 工業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106723 工業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107169 工業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107222 工業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194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남조선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4965763 南朝鮮民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114965819 南朝鮮民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14965866 南朝鮮民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114965906 南朝鮮民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114965972 南朝鮮民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114966016 南朝鮮民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114966021 南朝鮮民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114966066 南朝鮮民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114966114 南朝鮮民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114966161 南朝鮮民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114966205 南朝鮮民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114966218 南朝鮮民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114966247 南朝鮮民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114966288 南朝鮮民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114966339 南朝鮮民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114966379 南朝鮮民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114966431 南朝鮮民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114966451 南朝鮮民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114966497 南朝鮮民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114966533 南朝鮮民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114966591 南朝鮮民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114966597 南朝鮮民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114966640 南朝鮮民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816953 大東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62773 大邱時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09362798 大邱時報 1948-08-05.pdf]] || 1948-08-05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08156 大韓日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08358 大韓日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08728 大韓日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09203 大韓日報 1948-08-09.pdf]] || 1948-08-09 |- | [[색인:CNTS-00088009428 大韓日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09801 大韓日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10349 大韓日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10702 大韓日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10754 大韓日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11046 大韓日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11400 大韓日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11883 大韓日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12502 大韓日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13332 大韓日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13415 大韓日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14017 大韓日報 1948-08-23.pdf]] || 1948-08-23 |- | [[색인:CNTS-00088014510 大韓日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14922 大韓日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15512 大韓日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16242 大韓日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16332 大韓日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16766 大韓日報 1948-08-30.pdf]] || 1948-08-30 |- | [[색인:CNTS-00088017406 大韓日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34809 婦人新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088035078 婦人新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35179 婦人新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35426 婦人新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035589 婦人新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35911 婦人新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036039 婦人新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088036150 婦人新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36275 婦人新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36533 婦人新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36683 婦人新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36934 婦人新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36976 婦人新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37086 婦人新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37377 婦人新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37462 婦人新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37727 婦人新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37901 婦人新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37982 婦人新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38263 婦人新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38604 婦人新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38652 婦人新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038775 婦人新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39052 婦人新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39315 婦人新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162701 工業新聞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163126 工業新聞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163165 工業新聞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163634 工業新聞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163647 工業新聞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164110 工業新聞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164155 工業新聞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164278 工業新聞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164416 工業新聞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164684 工業新聞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164894 工業新聞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165234 工業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165432 工業新聞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165874 工業新聞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166179 工業新聞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166341 工業新聞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166714 工業新聞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167164 工業新聞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167396 工業新聞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167504 工業新聞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167776 工業新聞 1948-08-31.pdf]] || 1948-08-31 |} === 194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72035 嶺南日報 1949-08-04.pdf]] || 1949-08-04 |- | [[색인:CNTS-00088272210 嶺南日報 1949-08-05.pdf]] || 1949-08-05 |- | [[색인:CNTS-00088272505 嶺南日報 1949-08-06.pdf]] || 1949-08-06 |- | [[색인:CNTS-00088272618 嶺南日報 1949-08-10.pdf]] || 1949-08-10 |- | [[색인:CNTS-00088272811 嶺南日報 1949-08-11.pdf]] || 1949-08-11 |- | [[색인:CNTS-00088272989 嶺南日報 1949-08-12.pdf]] || 1949-08-12 |- | [[색인:CNTS-00088273263 嶺南日報 1949-08-13.pdf]] || 1949-08-13 |- | [[색인:CNTS-00088273477 嶺南日報 1949-08-15.pdf]] || 1949-08-15 |- | [[색인:CNTS-00088273600 嶺南日報 1949-08-17.pdf]] || 1949-08-17 |- | [[색인:CNTS-00088273770 嶺南日報 1949-08-19.pdf]] || 1949-08-19 |- | [[색인:CNTS-00088273980 嶺南日報 1949-08-20.pdf]] || 1949-08-20 |- | [[색인:CNTS-00088274307 嶺南日報 1949-08-21.pdf]] || 1949-08-21 |- | [[색인:CNTS-00088274513 嶺南日報 1949-08-23.pdf]] || 1949-08-23 |- | [[색인:CNTS-00088274772 嶺南日報 1949-08-25.pdf]] || 1949-08-25 |- | [[색인:CNTS-00088274989 嶺南日報 1949-08-26.pdf]] || 1949-08-26 |- | [[색인:CNTS-00088275240 嶺南日報 1949-08-27.pdf]] || 1949-08-27 |- | [[색인:CNTS-00088275487 嶺南日報 1949-08-28.pdf]] || 1949-08-28 |- | [[색인:CNTS-00088275705 嶺南日報 1949-08-30.pdf]] || 1949-08-30 |- | [[색인:CNTS-00088276098 嶺南日報 1949-08-31.pdf]] || 1949-08-31 |} br7r6zdftwlh11cvlkzlf1mtyhpr0rx 392571 392570 2025-06-25T16:57:23Z Aspere 5453 /* 개화기 (~1900년대) */ 392571 wikitext text/x-wiki == 범례 == * 한자 ** 국한문 혼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 O ** 제목이나 고유명사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 * 옛한글 ** 아래아 등 현대의 표기와 현저하게 다른 경우 O ** 아래아는 소멸되었으나 일부 특정 글자("또"를 "ᄯᅩ"로 적는 등)에서만 사용하는 경우 △ == 개화기 (~1900년대) == === 189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제국신문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68002161 帝國新聞 1898-08-11.pdf]] || 1898-08-11 |- | [[색인:CNTS-00048766065 帝國新聞 1898-08-12.pdf]] || 1898-08-12 |- | [[색인:CNTS-00048464939 帝國新聞 1898-08-13.pdf]] || 1898-08-13 |- | [[색인:CNTS-00068002173 帝國新聞 1898-08-15.pdf]] || 1898-08-15 |- | [[색인:CNTS-00068002178 帝國新聞 1898-08-16.pdf]] || 1898-08-16 |- | [[색인:CNTS-00048762974 帝國新聞 1898-08-17.pdf]] || 1898-08-17 |- | [[색인:CNTS-00048764009 帝國新聞 1898-08-18.pdf]] || 1898-08-18 |- | [[색인:CNTS-00068002198 帝國新聞 1898-08-19.pdf]] || 1898-08-19 |- | [[색인:CNTS-00048763794 帝國新聞 1898-08-20.pdf]] || 1898-08-20 |- | [[색인:CNTS-00048480560 帝國新聞 1898-08-22.pdf]] || 1898-08-22 |- | [[색인:CNTS-00068002215 帝國新聞 1898-08-23.pdf]] || 1898-08-23 |- | [[색인:CNTS-00049027984 帝國新聞 1898-08-24.pdf]] || 1898-08-24 |- | [[색인:CNTS-00048993243 帝國新聞 1898-08-25.pdf]] || 1898-08-25 |- | [[색인:CNTS-00068002225 帝國新聞 1898-08-26.pdf]] || 1898-08-26 |- | [[색인:CNTS-00048461328 帝國新聞 1898-08-27.pdf]] || 1898-08-27 |- | [[색인:CNTS-00068002235 帝國新聞 1898-08-29.pdf]] || 1898-08-29 |- | [[색인:CNTS-00068002242 帝國新聞 1898-08-30.pdf]] || 1898-08-30 |- | [[색인:CNTS-00068002249 帝國新聞 1898-08-31.pdf]] || 1898-08-31 |} === 1901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제국신문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766249 帝國新聞 1901-08-27.pdf]] || 1901-08-27 |} === 1902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제국신문 (한자 X, 옛한글 O) |- |- | [[색인:CNTS-00076938256 帝國新聞 1902-08-02.pdf]] || 1902-08-02 |- | [[색인:CNTS-00048480240 帝國新聞 1902-08-11.pdf]] || 1902-08-11 |- | [[색인:CNTS-00048465087 帝國新聞 1902-08-12.pdf]] || 1902-08-12 |- | [[색인:CNTS-00048660647 帝國新聞 1902-08-13.pdf]] || 1902-08-13 |- | [[색인:CNTS-00048763087 帝國新聞 1902-08-14.pdf]] || 1902-08-14 |- | [[색인:CNTS-00048476362 帝國新聞 1902-08-15.pdf]] || 1902-08-15 |- | [[색인:CNTS-00048764191 帝國新聞 1902-08-16.pdf]] || 1902-08-16 |- | [[색인:CNTS-00049026581 帝國新聞 1902-08-18.pdf]] || 1902-08-18 |- | [[색인:CNTS-00048764025 帝國新聞 1902-08-20.pdf]] || 1902-08-20 |- | [[색인:CNTS-00048480758 帝國新聞 1902-08-21.pdf]] || 1902-08-21 |- | [[색인:CNTS-00048510615 帝國新聞 1902-08-22.pdf]] || 1902-08-22 |- | [[색인:CNTS-00049028021 帝國新聞 1902-08-23.pdf]] || 1902-08-23 |- | [[색인:CNTS-00048993298 帝國新聞 1902-08-25.pdf]] || 1902-08-25 |- | [[색인:CNTS-00048507693 帝國新聞 1902-08-26.pdf]] || 1902-08-26 |- | [[색인:CNTS-00048461370 帝國新聞 1902-08-27.pdf]] || 1902-08-27 |- | [[색인:CNTS-00048641742 帝國新聞 1902-08-29.pdf]] || 1902-08-29 |- | [[색인:CNTS-00048713582 帝國新聞 1902-08-30.pdf]] || 1902-08-30 |} === 1904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163043 大韓每日申報 1904-08-09.pdf]] || 1904-08-09 || [[색인:대한매일신보 19040809.pdf|기존 작업 색인]]과 중복 |- | [[색인:CNTS-00048114450 大韓每日申報 1904-08-10.pdf]] || 1904-08-10 |- | [[색인:CNTS-00048114782 大韓每日申報 1904-08-11.pdf]] || 1904-08-11 |- | [[색인:CNTS-00048178680 大韓每日申報 1904-08-12.pdf]] || 1904-08-12 |- | [[색인:CNTS-00048143238 大韓每日申報 1904-08-13.pdf]] || 1904-08-13 |- | [[색인:CNTS-00048196414 大韓每日申報 1904-08-16.pdf]] || 1904-08-16 |- | [[색인:CNTS-00048175458 大韓每日申報 1904-08-17.pdf]] || 1904-08-17 |- | [[색인:CNTS-00048171812 大韓每日申報 1904-08-18.pdf]] || 1904-08-18 |- | [[색인:CNTS-00048172247 大韓每日申報 1904-08-20.pdf]] || 1904-08-20 |- | [[색인:CNTS-00048175296 大韓每日申報 1904-08-23.pdf]] || 1904-08-23 |- | [[색인:CNTS-00048174256 大韓每日申報 1904-08-24.pdf]] || 1904-08-24 |- | [[색인:CNTS-00048244659 大韓每日申報 1904-08-25.pdf]] || 1904-08-25 |- | [[색인:CNTS-00048122714 大韓每日申報 1904-08-27.pdf]] || 1904-08-27 |- | [[색인:CNTS-00048213452 大韓每日申報 1904-08-30.pdf]] || 1904-08-30 |- | [[색인:CNTS-00048123625 大韓每日申報 1904-08-31.pdf]] || 1904-08-31 |} === 1905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X,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05742 大韓每日申報 1905-08-12.pdf]] || 1905-08-12 |- | [[색인:CNTS-00093105790 大韓每日申報 1905-08-13.pdf]] || 1905-08-13 |- | [[색인:CNTS-00093105813 大韓每日申報 1905-08-15.pdf]] || 1905-08-15 |- | [[색인:CNTS-00093105859 大韓每日申報 1905-08-16.pdf]] || 1905-08-16 |- | [[색인:CNTS-00093105912 大韓每日申報 1905-08-18.pdf]] || 1905-08-18 |- | [[색인:CNTS-00093105964 大韓每日申報 1905-08-19.pdf]] || 1905-08-19 |- | [[색인:CNTS-00093105991 大韓每日申報 1905-08-20.pdf]] || 1905-08-20 |- | [[색인:CNTS-00093106028 大韓每日申報 1905-08-22.pdf]] || 1905-08-22 |- | [[색인:CNTS-00093106064 大韓每日申報 1905-08-23.pdf]] || 1905-08-23 |- | [[색인:CNTS-00093106104 大韓每日申報 1905-08-24.pdf]] || 1905-08-24 |- | [[색인:CNTS-00093106151 大韓每日申報 1905-08-25.pdf]] || 1905-08-25 |- | [[색인:CNTS-00093106188 大韓每日申報 1905-08-27.pdf]] || 1905-08-27 |- | [[색인:CNTS-00093106235 大韓每日申報 1905-08-29.pdf]] || 1905-08-29 |- | [[색인:CNTS-00093106308 大韓每日申報 1905-08-30.pdf]] || 1905-08-30 |- | [[색인:CNTS-00093106334 大韓每日申報 1905-08-31.pdf]] || 1905-08-31 |} === 190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6470 共立新報 1906-08-25.pdf]] || 1906-08-25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 [[색인:CNTS-00093119282 大韓每日申報 1906-08-02.pdf]] || 1906-08-02 |- | [[색인:CNTS-00093119350 大韓每日申報 1906-08-03.pdf]] || 1906-08-03 |- | [[색인:CNTS-00093119383 大韓每日申報 1906-08-04.pdf]] || 1906-08-04 |- | [[색인:CNTS-00093119440 大韓每日申報 1906-08-05.pdf]] || 1906-08-05 |- | [[색인:CNTS-00093119523 大韓每日申報 1906-08-07.pdf]] || 1906-08-07 |- | [[색인:CNTS-00093119549 大韓每日申報 1906-08-08.pdf]] || 1906-08-08 |- | [[색인:CNTS-00093119591 大韓每日申報 1906-08-09.pdf]] || 1906-08-09 |- | [[색인:CNTS-00093119668 大韓每日申報 1906-08-10.pdf]] || 1906-08-10 |- | [[색인:CNTS-00093119700 大韓每日申報 1906-08-11.pdf]] || 1906-08-11 |- | [[색인:CNTS-00093119778 大韓每日申報 1906-08-12.pdf]] || 1906-08-12 |- | [[색인:CNTS-00093119850 大韓每日申報 1906-08-14.pdf]] || 1906-08-14 |- | [[색인:CNTS-00093119897 大韓每日申報 1906-08-15.pdf]] || 1906-08-15 |- | [[색인:CNTS-00093119939 大韓每日申報 1906-08-16.pdf]] || 1906-08-16 |- | [[색인:CNTS-00093119975 大韓每日申報 1906-08-17.pdf]] || 1906-08-17 |- | [[색인:CNTS-00093120026 大韓每日申報 1906-08-18.pdf]] || 1906-08-18 |- | [[색인:CNTS-00093120074 大韓每日申報 1906-08-19.pdf]] || 1906-08-19 |- | [[색인:CNTS-00093120133 大韓每日申報 1906-08-21.pdf]] || 1906-08-21 |- | [[색인:CNTS-00093120185 大韓每日申報 1906-08-22.pdf]] || 1906-08-22 |- | [[색인:CNTS-00093120212 大韓每日申報 1906-08-23.pdf]] || 1906-08-23 |- | [[색인:CNTS-00093120270 大韓每日申報 1906-08-24.pdf]] || 1906-08-24 |- | [[색인:CNTS-00093120360 大韓每日申報 1906-08-25.pdf]] || 1906-08-25 |- | [[색인:CNTS-00093120408 大韓每日申報 1906-08-26.pdf]] || 1906-08-26 |- | [[색인:CNTS-00093120461 大韓每日申報 1906-08-28.pdf]] || 1906-08-28 |- | [[색인:CNTS-00093120522 大韓每日申報 1906-08-29.pdf]] || 1906-08-29 |- | [[색인:CNTS-00093120556 大韓每日申報 1906-08-30.pdf]] || 1906-08-30 |- | [[색인:CNTS-00093120593 大韓每日申報 1906-08-31.pdf]] || 1906-08-31 |} === 190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115097280 共立新報 1907-08-09.pdf ]] || 1907-08-09 |- | [[색인:CNTS-00049010957 共立新報 1907-08-16.pdf ]] || 1907-08-16 |- | [[색인:CNTS-00115097358 共立新報 1907-08-23.pdf ]] || 1907-08-23 |- | [[색인:CNTS-00115097372 共立新報 1907-08-30.pdf ]] || 1907-08-30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37172 大韓每日申報 1907-08-02.pdf]] || 1907-08-02 |- | [[색인:CNTS-00093137187 大韓每日申報 1907-08-03.pdf]] || 1907-08-03 |- | [[색인:CNTS-00093137316 大韓每日申報 1907-08-04.pdf]] || 1907-08-04 |- | [[색인:CNTS-00093137338 大韓每日申報 1907-08-06.pdf]] || 1907-08-06 |- | [[색인:CNTS-00093137480 大韓每日申報 1907-08-07.pdf]] || 1907-08-07 |- | [[색인:CNTS-00093137499 大韓每日申報 1907-08-08.pdf]] || 1907-08-08 |- | [[색인:CNTS-00093137625 大韓每日申報 1907-08-09.pdf]] || 1907-08-09 |- | [[색인:CNTS-00093137650 大韓每日申報 1907-08-10.pdf]] || 1907-08-10 |- | [[색인:CNTS-00093137777 大韓每日申報 1907-08-11.pdf]] || 1907-08-11 |- | [[색인:CNTS-00093137886 大韓每日申報 1907-08-13.pdf]] || 1907-08-13 |- | [[색인:CNTS-00093137935 大韓每日申報 1907-08-14.pdf]] || 1907-08-14 |- | [[색인:CNTS-00093137990 大韓每日申報 1907-08-15.pdf]] || 1907-08-15 |- | [[색인:CNTS-00093138042 大韓每日申報 1907-08-16.pdf]] || 1907-08-16 |- | [[색인:CNTS-00093138108 大韓每日申報 1907-08-17.pdf]] || 1907-08-17 |- | [[색인:CNTS-00093138173 大韓每日申報 1907-08-18.pdf]] || 1907-08-18 |- | [[색인:CNTS-00093138255 大韓每日申報 1907-08-20.pdf]] || 1907-08-20 |- | [[색인:CNTS-00093138323 大韓每日申報 1907-08-21.pdf]] || 1907-08-21 |- | [[색인:CNTS-00093138398 大韓每日申報 1907-08-22.pdf]] || 1907-08-22 |- | [[색인:CNTS-00093138538 大韓每日申報 1907-08-23.pdf]] || 1907-08-23 |- | [[색인:CNTS-00093138600 大韓每日申報 1907-08-24.pdf]] || 1907-08-24 |- | [[색인:CNTS-00093138631 大韓每日申報 1907-08-27.pdf]] || 1907-08-27 |- | [[색인:CNTS-00093138753 大韓每日申報 1907-08-29.pdf]] || 1907-08-29 |- | [[색인:CNTS-00093138772 大韓每日申報 1907-08-30.pdf]] || 1907-08-30 |- | [[색인:CNTS-00093138910 大韓每日申報 1907-08-31.pdf]] || 1907-08-31 |} === 190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공립신문 (한자 △, 옛한글 O) |- | [[색인:CNTS-00048916681 共立新報 1908-08-12.pdf ]] || 1908-08-12 |- | [[색인:CNTS-00048962815 共立新報 1908-08-19.pdf ]] || 1908-08-19 |- | [[색인:CNTS-00049012696 共立新報 1908-08-26.pdf ]] || 1908-08-26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61249 大韓每日申報 1908-08-02.pdf]] || 1908-08-02 |- | [[색인:CNTS-00093161323 大韓每日申報 1908-08-04.pdf]] || 1908-08-04 |- | [[색인:CNTS-00093161450 大韓每日申報 1908-08-05.pdf]] || 1908-08-05 |- | [[색인:CNTS-00093161494 大韓每日申報 1908-08-06.pdf]] || 1908-08-06 |- | [[색인:CNTS-00093161636 大韓每日申報 1908-08-07.pdf]] || 1908-08-07 |- | [[색인:CNTS-00093161666 大韓每日申報 1908-08-08.pdf]] || 1908-08-08 |- | [[색인:CNTS-00093161770 大韓每日申報 1908-08-09.pdf]] || 1908-08-09 |- | [[색인:CNTS-00093161841 大韓每日申報 1908-08-11.pdf]] || 1908-08-11 |- | [[색인:CNTS-00093161884 大韓每日申報 1908-08-12.pdf]] || 1908-08-12 |- | [[색인:CNTS-00093161962 大韓每日申報 1908-08-13.pdf]] || 1908-08-13 |- | [[색인:CNTS-00093162054 大韓每日申報 1908-08-14.pdf]] || 1908-08-14 |- | [[색인:CNTS-00093162125 大韓每日申報 1908-08-16.pdf]] || 1908-08-16 |- | [[색인:CNTS-00093162198 大韓每日申報 1908-08-18.pdf]] || 1908-08-18 |- | [[색인:CNTS-00093162279 大韓每日申報 1908-08-19.pdf]] || 1908-08-19 |- | [[색인:CNTS-00093162349 大韓每日申報 1908-08-20.pdf]] || 1908-08-20 |- | [[색인:CNTS-00093162447 大韓每日申報 1908-08-21.pdf]] || 1908-08-21 |- | [[색인:CNTS-00093162505 大韓每日申報 1908-08-22.pdf]] || 1908-08-22 |- | [[색인:CNTS-00093162642 大韓每日申報 1908-08-23.pdf]] || 1908-08-23 |- | [[색인:CNTS-00093162655 大韓每日申報 1908-08-25.pdf]] || 1908-08-25 |- | [[색인:CNTS-00093162740 大韓每日申報 1908-08-26.pdf]] || 1908-08-26 |- | [[색인:CNTS-00093162861 大韓每日申報 1908-08-27.pdf]] || 1908-08-27 |- | [[색인:CNTS-00093162903 大韓每日申報 1908-08-29.pdf]] || 1908-08-29 |- | [[색인:CNTS-00093162983 大韓每日申報 1908-08-30.pdf]] || 1908-08-30 |} ==== 190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183086 大韓每日申報 1909-08-03.pdf]] || 1909-08-03 |- | [[색인:CNTS-00093183168 大韓每日申報 1909-08-04.pdf]] || 1909-08-04 |- | [[색인:CNTS-00093183247 大韓每日申報 1909-08-05.pdf]] || 1909-08-05 |- | [[색인:CNTS-00093183374 大韓每日申報 1909-08-06.pdf]] || 1909-08-06 |- | [[색인:CNTS-00093183397 大韓每日申報 1909-08-07.pdf]] || 1909-08-07 |- | [[색인:CNTS-00093183472 大韓每日申報 1909-08-08.pdf]] || 1909-08-08 |- | [[색인:CNTS-00093183614 大韓每日申報 1909-08-10.pdf]] || 1909-08-10 |- | [[색인:CNTS-00093183634 大韓每日申報 1909-08-11.pdf]] || 1909-08-11 |- | [[색인:CNTS-00093183705 大韓每日申報 1909-08-12.pdf]] || 1909-08-12 |- | [[색인:CNTS-00093183789 大韓每日申報 1909-08-13.pdf]] || 1909-08-13 |- | [[색인:CNTS-00093183860 大韓每日申報 1909-08-14.pdf]] || 1909-08-14 |- | [[색인:CNTS-00093183937 大韓每日申報 1909-08-17.pdf]] || 1909-08-17 |- | [[색인:CNTS-00093184043 大韓每日申報 1909-08-18.pdf]] || 1909-08-18 |- | [[색인:CNTS-00093184073 大韓每日申報 1909-08-19.pdf]] || 1909-08-19 |- | [[색인:CNTS-00093184143 大韓每日申報 1909-08-20.pdf]] || 1909-08-20 |- | [[색인:CNTS-00093184253 大韓每日申報 1909-08-21.pdf]] || 1909-08-21 |- | [[색인:CNTS-00093184306 大韓每日申報 1909-08-22.pdf]] || 1909-08-22 |- | [[색인:CNTS-00093184382 大韓每日申報 1909-08-24.pdf]] || 1909-08-24 |- | [[색인:CNTS-00093184464 大韓每日申報 1909-08-25.pdf]] || 1909-08-25 |- | [[색인:CNTS-00093184606 大韓每日申報 1909-08-26.pdf]] || 1909-08-26 |- | [[색인:CNTS-00093184630 大韓每日申報 1909-08-27.pdf]] || 1909-08-27 |- | [[색인:CNTS-00093184730 大韓每日申報 1909-08-29.pdf]] || 1909-08-29 |- | [[색인:CNTS-00093184853 大韓每日申報 1909-08-31.pdf]] || 1909-08-31 |} === 191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대한매일신보 (한자 O, 옛한글 O) |- | [[색인:CNTS-00093208820 大韓每日申報 1910-08-03.pdf]] || 1910-08-03 |- | [[색인:CNTS-00093208906 大韓每日申報 1910-08-04.pdf]] || 1910-08-04 |- | [[색인:CNTS-00093208987 大韓每日申報 1910-08-05.pdf]] || 1910-08-05 |- | [[색인:CNTS-00093209080 大韓每日申報 1910-08-06.pdf]] || 1910-08-06 |- | [[색인:CNTS-00093209184 大韓每日申報 1910-08-07.pdf]] || 1910-08-07 |- | [[색인:CNTS-00093209270 大韓每日申報 1910-08-09.pdf]] || 1910-08-09 |- | [[색인:CNTS-00093209358 大韓每日申報 1910-08-16.pdf]] || 1910-08-16 |- | [[색인:CNTS-00093209455 大韓每日申報 1910-08-17.pdf]] || 1910-08-17 |- | [[색인:CNTS-00093209525 大韓每日申報 1910-08-26.pdf]] || 1910-08-26 |- | [[색인:CNTS-00093209617 大韓每日申報 1910-08-27.pdf]] || 1910-08-27 |- | [[색인:CNTS-00093209702 大韓每日申報 1910-08-28.pdf]] || 1910-08-28 |} == 일제강점기 (1910년대~1944년) == === 192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35903 中外日報 1927-08-02.pdf]] || 1927-08-02 |- | [[색인:CNTS-00093436018 中外日報 1927-08-03.pdf]] || 1927-08-03 |- | [[색인:CNTS-00093436273 中外日報 1927-08-04.pdf]] || 1927-08-04 |- | [[색인:CNTS-00093436345 中外日報 1927-08-05.pdf]] || 1927-08-05 |- | [[색인:CNTS-00093436458 中外日報 1927-08-06.pdf]] || 1927-08-06 |- | [[색인:CNTS-00093436542 中外日報 1927-08-07.pdf]] || 1927-08-07 |- | [[색인:CNTS-00093436729 中外日報 1927-08-08.pdf]] || 1927-08-08 |- | [[색인:CNTS-00093436826 中外日報 1927-08-09.pdf]] || 1927-08-09 |- | [[색인:CNTS-00093436990 中外日報 1927-08-10.pdf]] || 1927-08-10 |- | [[색인:CNTS-00093437060 中外日報 1927-08-11.pdf]] || 1927-08-11 |- | [[색인:CNTS-00093437217 中外日報 1927-08-12.pdf]] || 1927-08-12 |- | [[색인:CNTS-00093437321 中外日報 1927-08-13.pdf]] || 1927-08-13 |- | [[색인:CNTS-00093437485 中外日報 1927-08-14.pdf]] || 1927-08-14 |- | [[색인:CNTS-00067903192 中外日報 1927-08-15.pdf]] || 1927-08-15 |- | [[색인:CNTS-00093437608 中外日報 1927-08-16.pdf]] || 1927-08-16 |- | [[색인:CNTS-00093437823 中外日報 1927-08-17.pdf]] || 1927-08-17 |- | [[색인:CNTS-00049019603 中外日報 1927-08-18.pdf]] || 1927-08-18 |- | [[색인:CNTS-00093437884 中外日報 1927-08-19.pdf]] || 1927-08-19 |- | [[색인:CNTS-00093438026 中外日報 1927-08-20.pdf]] || 1927-08-20 |- | [[색인:CNTS-00093438159 中外日報 1927-08-21.pdf]] || 1927-08-21 |- | [[색인:CNTS-00093438241 中外日報 1927-08-22.pdf]] || 1927-08-22 |- | [[색인:CNTS-00093438432 中外日報 1927-08-23.pdf]] || 1927-08-23 |- | [[색인:CNTS-00093438476 中外日報 1927-08-24.pdf]] || 1927-08-24 |- | [[색인:CNTS-00093438705 中外日報 1927-08-25.pdf]] || 1927-08-25 |- | [[색인:CNTS-00093438717 中外日報 1927-08-26.pdf]] || 1927-08-26 |- | [[색인:CNTS-00093438861 中外日報 1927-08-27.pdf]] || 1927-08-27 |- | [[색인:CNTS-00093438989 中外日報 1927-08-28.pdf]] || 1927-08-28 |- | [[색인:CNTS-00093439087 中外日報 1927-08-29.pdf]] || 1927-08-29 |- | [[색인:CNTS-00093439245 中外日報 1927-08-30.pdf]] || 1927-08-30 |- | [[색인:CNTS-00093439415 中外日報 1927-08-31.pdf]] || 1927-08-31 |} === 192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452603 中外日報 1928-08-02.pdf]] || 1928-08-02 |- | [[색인:CNTS-00093452625 中外日報 1928-08-03.pdf]] || 1928-08-03 |- | [[색인:CNTS-00093452821 中外日報 1928-08-04.pdf]] || 1928-08-04 |- | [[색인:CNTS-00093452854 中外日報 1928-08-05.pdf]] || 1928-08-05 |- | [[색인:CNTS-00093452959 中外日報 1928-08-06.pdf]] || 1928-08-06 |- | [[색인:CNTS-00093453097 中外日報 1928-08-07.pdf]] || 1928-08-07 |- | [[색인:CNTS-00093453278 中外日報 1928-08-08.pdf]] || 1928-08-08 |- | [[색인:CNTS-00093453298 中外日報 1928-08-09.pdf]] || 1928-08-09 |- | [[색인:CNTS-00093453408 中外日報 1928-08-10.pdf]] || 1928-08-10 |- | [[색인:CNTS-00093453548 中外日報 1928-08-11.pdf]] || 1928-08-11 |- | [[색인:CNTS-00093453626 中外日報 1928-08-12.pdf]] || 1928-08-12 |- | [[색인:CNTS-00093453817 中外日報 1928-08-13.pdf]] || 1928-08-13 |- | [[색인:CNTS-00093453841 中外日報 1928-08-14.pdf]] || 1928-08-14 |- | [[색인:CNTS-00093453984 中外日報 1928-08-15.pdf]] || 1928-08-15 |- | [[색인:CNTS-00093454051 中外日報 1928-08-16.pdf]] || 1928-08-16 |- | [[색인:CNTS-00093454175 中外日報 1928-08-17.pdf]] || 1928-08-17 |- | [[색인:CNTS-00093454330 中外日報 1928-08-18.pdf]] || 1928-08-18 |- | [[색인:CNTS-00093454426 中外日報 1928-08-19.pdf]] || 1928-08-19 |- | [[색인:CNTS-00093454626 中外日報 1928-08-20.pdf]] || 1928-08-20 |- | [[색인:CNTS-00093454743 中外日報 1928-08-21.pdf]] || 1928-08-21 |- | [[색인:CNTS-00093454766 中外日報 1928-08-22.pdf]] || 1928-08-22 |- | [[색인:CNTS-00093454896 中外日報 1928-08-23.pdf]] || 1928-08-23 |- | [[색인:CNTS-00093455081 中外日報 1928-08-24.pdf]] || 1928-08-24 |- | [[색인:CNTS-00093455216 中外日報 1928-08-25.pdf]] || 1928-08-25 |- | [[색인:CNTS-00048208555 中外日報 1928-08-26.pdf]] || 1928-08-26 |- | [[색인:CNTS-00093455222 中外日報 1928-08-27.pdf]] || 1928-08-27 |- | [[색인:CNTS-00093455440 中外日報 1928-08-28.pdf]] || 1928-08-28 |- | [[색인:CNTS-00093455471 中外日報 1928-08-29.pdf]] || 1928-08-29 |- | [[색인:CNTS-00093455627 中外日報 1928-08-30.pdf]] || 1928-08-30 |- | [[색인:CNTS-00093455677 中外日報 1928-08-31.pdf]] || 1928-08-31 |} === 192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48574467 中外日報 1929-08-02.pdf]] || 1929-08-02 |- | [[색인:CNTS-00049033203 中外日報 1929-08-03.pdf]] || 1929-08-03 |- | [[색인:CNTS-00048201752 中外日報 1929-08-04.pdf]] || 1929-08-04 |- | [[색인:CNTS-00067908798 中外日報 1929-08-05.pdf]] || 1929-08-05 |- | [[색인:CNTS-00048138072 中外日報 1929-08-06.pdf]] || 1929-08-06 |- | [[색인:CNTS-00067908818 中外日報 1929-08-07.pdf]] || 1929-08-07 |- | [[색인:CNTS-00048168260 中外日報 1929-08-08.pdf]] || 1929-08-08 |- | [[색인:CNTS-00067908837 中外日報 1929-08-09.pdf]] || 1929-08-09 |- | [[색인:CNTS-00048241910 中外日報 1929-08-10.pdf]] || 1929-08-10 |- | [[색인:CNTS-00067908869 中外日報 1929-08-11.pdf]] || 1929-08-11 |- | [[색인:CNTS-00048881881 中外日報 1929-08-12.pdf]] || 1929-08-12 |- | [[색인:CNTS-00048384760 中外日報 1929-08-13.pdf]] || 1929-08-13 |- | [[색인:CNTS-00049008235 中外日報 1929-08-14.pdf]] || 1929-08-14 |- | [[색인:CNTS-00048856789 中外日報 1929-08-15.pdf]] || 1929-08-15 |- | [[색인:CNTS-00067908928 中外日報 1929-08-16.pdf]] || 1929-08-16 |- | [[색인:CNTS-00048647463 中外日報 1929-08-17.pdf]] || 1929-08-17 |- | [[색인:CNTS-00048840753 中外日報 1929-08-18.pdf]] || 1929-08-18 |- | [[색인:CNTS-00048538506 中外日報 1929-08-19.pdf]] || 1929-08-19 |- | [[색인:CNTS-00067908976 中外日報 1929-08-20.pdf]] || 1929-08-20 |- | [[색인:CNTS-00048557092 中外日報 1929-08-21.pdf]] || 1929-08-21 |- | [[색인:CNTS-00067908996 中外日報 1929-08-22.pdf]] || 1929-08-22 |- | [[색인:CNTS-00048714889 中外日報 1929-08-23.pdf]] || 1929-08-23 |- | [[색인:CNTS-00067909007 中外日報 1929-08-24.pdf]] || 1929-08-24 |- | [[색인:CNTS-00048206485 中外日報 1929-08-25.pdf]] || 1929-08-25 |- | [[색인:CNTS-00067909031 中外日報 1929-08-26.pdf]] || 1929-08-26 |- | [[색인:CNTS-00067909037 中外日報 1929-08-27.pdf]] || 1929-08-27 |- | [[색인:CNTS-00048111230 中外日報 1929-08-28.pdf]] || 1929-08-28 |- | [[색인:CNTS-00048143182 中外日報 1929-08-29.pdf]] || 1929-08-29 |- | [[색인:CNTS-00048326024 中外日報 1929-08-30.pdf]] || 1929-08-30 |- | [[색인:CNTS-00048677493 中外日報 1929-08-31.pdf]] || 1929-08-31 |} === 1930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일보 (한자 O, 옛한글 △) |- | [[색인:CNTS-00093503617 中外日報 1930-08-02.pdf]] || 1930-08-02 |- | [[색인:CNTS-00093503976 中外日報 1930-08-03.pdf]] || 1930-08-03 |- | [[색인:CNTS-00093504113 中外日報 1930-08-04.pdf]] || 1930-08-04 |- | [[색인:CNTS-00093504212 中外日報 1930-08-05.pdf]] || 1930-08-05 |- | [[색인:CNTS-00093504458 中外日報 1930-08-06.pdf]] || 1930-08-06 |- | [[색인:CNTS-00093504624 中外日報 1930-08-07.pdf]] || 1930-08-07 |- | [[색인:CNTS-00093504818 中外日報 1930-08-08.pdf]] || 1930-08-08 |- | [[색인:CNTS-00093504966 中外日報 1930-08-09.pdf]] || 1930-08-09 |- | [[색인CNTS-00093505163 中外日報 1930-08-10.pdf]] || 1930-08-10 |- | [[색인:CNTS-00093505440 中外日報 1930-08-11.pdf]] || 1930-08-11 |- | [[색인:CNTS-00093505465 中外日報 1930-08-12.pdf]] || 1930-08-12 |- | [[색인:CNTS-00093505651 中外日報 1930-08-13.pdf]] || 1930-08-13 |- | [[색인:CNTS-00093505855 中外日報 1930-08-14.pdf]] || 1930-08-14 |- | [[색인:CNTS-00093506209 中外日報 1930-08-15.pdf]] || 1930-08-15 |- | [[색인:CNTS-00093506257 中外日報 1930-08-16.pdf]] || 1930-08-16 |- | [[색인:CNTS-00093506449 中外日報 1930-08-17.pdf]] || 1930-08-17 |- | [[색인:CNTS-00093506671 中外日報 1930-08-18.pdf]] || 1930-08-18 |- | [[색인:CNTS-00093506826 中外日報 1930-08-19.pdf]] || 1930-08-19 |- | [[색인:CNTS-00093506985 中外日報 1930-08-20.pdf]] || 1930-08-20 |- | [[색인:CNTS-00093507200 中外日報 1930-08-21.pdf]] || 1930-08-21 |- | [[색인:CNTS-00093507315 中外日報 1930-08-22.pdf]] || 1930-08-22 |- | [[색인:CNTS-00093507579 中外日報 1930-08-23.pdf]] || 1930-08-23 |- | [[색인:CNTS-00093507755 中外日報 1930-08-24.pdf]] || 1930-08-24 |- | [[색인:CNTS-00093507992 中外日報 1930-08-25.pdf]] || 1930-08-25 |- | [[색인:CNTS-00093508063 中外日報 1930-08-26.pdf]] || 1930-08-26 |- | [[색인:CNTS-00093508408 中外日報 1930-08-27.pdf]] || 1930-08-27 |- | [[색인:CNTS-00093508439 中外日報 1930-08-28.pdf]] || 1930-08-28 |- | [[색인:CNTS-00093508640 中外日報 1930-08-29.pdf]] || 1930-08-29 |- | [[색인:CNTS-00093509028 中外日報 1930-08-30.pdf]] || 1930-08-30 |- | [[색인:CNTS-00093509206 中外日報 1930-08-31.pdf]] || 1930-08-31 |} == 해방 이후 (1945년~) == === 1946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외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298564 中外新報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12225 中外新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122434 中外新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518378 中外新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48302059 中外新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154198 中外新報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54767 中外新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691782 中外新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153694 中外新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558988 中外新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152638 中外新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120107 中外新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51813 中外新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311969 中外新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48133423 中外新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725279 中外新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51566 中外新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48184428 中外新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133132 中外新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631026 中外新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311721 中外新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205410 中外新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132555 中外新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273158 中外新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717925 中外新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201950 中外新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266013 中外新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113773 中外新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0957 中央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65300964 中央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65301033 中央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65301081 中央新聞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065301090 中央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65301123 中央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65301149 中央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65301206 中央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65301230 中央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65301270 中央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65301294 中央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65301347 中央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65301364 中央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65301388 中央新聞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065301417 中央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65301451 中央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65301504 中央新聞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065301519 中央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65301552 中央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65301616 中央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65301638 中央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65301659 中央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50396 全國勞動者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344389 全國勞動者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84456 大東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48207244 大東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48476528 大東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48952811 大東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48205480 大東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48196196 大東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48202016 大東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48938609 大東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48194546 大東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48204672 大東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48264306 大東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48192000 大東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48264645 大東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48194234 大東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48360637 大東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48200979 大東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48352004 大東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48177785 大東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48196620 大東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48980138 大東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48195431 大東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48979226 大東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48664145 大東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48191302 大東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48272432 大東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30152 大邱時報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109330161 大邱時報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109330231 大邱時報 1946-08-05.pdf]] || 1946-08-05 |- | [[색인:CNTS-00109330275 大邱時報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109330320 大邱時報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109330401 大邱時報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109330427 大邱時報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109330519 大邱時報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109330553 大邱時報 1946-08-12.pdf]] || 1946-08-12 |- | [[색인:CNTS-00109330599 大邱時報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109330651 大邱時報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109330756 大邱時報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109330820 大邱時報 1946-08-16.pdf]] || 1946-08-16 |- | [[색인:CNTS-00109330840 大邱時報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109330909 大邱時報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109330986 大邱時報 1946-08-19.pdf]] || 1946-08-19 |- | [[색인:CNTS-00109331132 大邱時報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109331312 大邱時報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109331318 大邱時報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109331506 大邱時報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109331588 大邱時報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109331648 大邱時報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109331700 大邱時報 1946-08-26.pdf]] || 1946-08-26 |- | [[색인:CNTS-00109331774 大邱時報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109331809 大邱時報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109331883 大邱時報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109331955 大邱時報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109331987 大邱時報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가정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76758028 家政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76758066 家政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76758088 家政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76758107 家政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76758140 家政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76758163 家政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76758216 家政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76758251 家政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76758258 家政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76758292 家政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76758328 家政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76758355 家政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76758388 家政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76758409 家政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76758428 家政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76758470 家政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76758482 家政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76758508 家政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76758538 家政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76758570 家政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76758602 家政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76758634 家政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76758665 家政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76758694 家政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76758715 家政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66107 工業新聞 1946-08-02.pdf]] || 1946-08-02 |- | [[색인:CNTS-00088066324 工業新聞 1946-08-03.pdf]] || 1946-08-03 |- | [[색인:CNTS-00088066512 工業新聞 1946-08-04.pdf]] || 1946-08-04 |- | [[색인:CNTS-00088066592 工業新聞 1946-08-06.pdf]] || 1946-08-06 |- | [[색인:CNTS-00088066779 工業新聞 1946-08-07.pdf]] || 1946-08-07 |- | [[색인:CNTS-00088067091 工業新聞 1946-08-08.pdf]] || 1946-08-08 |- | [[색인:CNTS-00088067102 工業新聞 1946-08-09.pdf]] || 1946-08-09 |- | [[색인:CNTS-00088067204 工業新聞 1946-08-10.pdf]] || 1946-08-10 |- | [[색인:CNTS-00088067565 工業新聞 1946-08-11.pdf]] || 1946-08-11 |- | [[색인:CNTS-00088067730 工業新聞 1946-08-13.pdf]] || 1946-08-13 |- | [[색인:CNTS-00088067785 工業新聞 1946-08-14.pdf]] || 1946-08-14 |- | [[색인:CNTS-00088068065 工業新聞 1946-08-15.pdf]] || 1946-08-15 |- | [[색인:CNTS-00088068602 工業新聞 1946-08-17.pdf]] || 1946-08-17 |- | [[색인:CNTS-00088069055 工業新聞 1946-08-18.pdf]] || 1946-08-18 |- | [[색인:CNTS-00088069065 工業新聞 1946-08-20.pdf]] || 1946-08-20 |- | [[색인:CNTS-00088069196 工業新聞 1946-08-21.pdf]] || 1946-08-21 |- | [[색인:CNTS-00088069558 工業新聞 1946-08-22.pdf]] || 1946-08-22 |- | [[색인:CNTS-00088069776 工業新聞 1946-08-23.pdf]] || 1946-08-23 |- | [[색인:CNTS-00088070212 工業新聞 1946-08-24.pdf]] || 1946-08-24 |- | [[색인:CNTS-00088070329 工業新聞 1946-08-25.pdf]] || 1946-08-25 |- | [[색인:CNTS-00088070412 工業新聞 1946-08-27.pdf]] || 1946-08-27 |- | [[색인:CNTS-00088070746 工業新聞 1946-08-28.pdf]] || 1946-08-28 |- | [[색인:CNTS-00088070882 工業新聞 1946-08-29.pdf]] || 1946-08-29 |- | [[색인:CNTS-00088070927 工業新聞 1946-08-30.pdf]] || 1946-08-30 |- | [[색인:CNTS-00088071303 工業新聞 1946-08-31.pdf]] || 1946-08-31 |} === 1947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중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65305741 中央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5305777 中央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65305845 中央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5305862 中央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65305883 中央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5305933 中央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5305943 中央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5305981 中央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65306011 中央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5306082 中央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5306101 中央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65306129 中央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5306182 中央新聞 1947-08-16.pdf]] || 1947-08-16 |- | [[색인:CNTS-00065306192 中央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65306247 中央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65306322 中央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5306346 中央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5306380 中央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5306419 中央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65306446 中央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5306506 中央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5306533 中央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65306562 中央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65306602 中央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5306647 中央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65306658 中央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광명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469644 光明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48191659 光明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88428 光明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48800666 光明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205304 光明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48667932 光明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48336548 光明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48800046 光明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00611 光明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67982416 光明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48360276 光明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전국노동자신문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330523 全國勞動者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colspan="3" | 국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3752839 國際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13752882 國際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113752887 國際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13752928 國際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13752951 國際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13752999 國際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13753042 國際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13753082 國際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13753106 國際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13753130 國際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13753157 國際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196209 大東新聞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67993445 大東新聞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48202145 大東新聞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67993450 大東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48194627 大東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67993458 大東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67993459 大東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67993461 大東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48264378 大東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48192077 大東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67993472 大東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48485812 大東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67993477 大東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48264717 大東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48194267 大東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67993488 大東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67993493 大東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67993499 大東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48201041 大東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67993503 大東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67993508 大東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48177810 大東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48196686 大東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67993523 大東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48176217 大東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46354 大邱時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109346407 大邱時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109346456 大邱時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109346513 大邱時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109346563 大邱時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109346668 大邱時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109346702 大邱時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109346752 大邱時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109346822 大邱時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109346881 大邱時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109346882 大邱時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109347085 大邱時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109347186 大邱時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109347267 大邱時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109347401 大邱時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109347461 大邱時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109347617 大邱時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109347653 大邱時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109347678 大邱時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109347762 大邱時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109347855 大邱時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109347938 大邱時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109348003 大邱時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64215 大韓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64445 大韓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64465 大韓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64514 大韓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64536 大韓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64752 大韓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64816 大韓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64824 大韓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65070 大韓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65094 大韓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65150 大韓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65374 大韓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65401 大韓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65655 大韓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65675 大韓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65705 大韓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65755 大韓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65966 大韓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65999 大韓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66075 大韓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66265 大韓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66313 大韓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1257 婦人新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1490 婦人新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7981656 婦人新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1788 婦人新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1929 婦人新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2236 婦人新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2279 婦人新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2526 婦人新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2699 婦人新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2973 婦人新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3027 婦人新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3068 婦人新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3319 婦人新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3415 婦人新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3521 婦人新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3880 婦人新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3908 婦人新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4225 婦人新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4320 婦人新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4522 婦人新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4617 婦人新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4918 婦人新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5023 婦人新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5074 婦人新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5392 婦人新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부녀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7986064 婦女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7986270 婦女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7986387 婦女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7986462 婦女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7986809 婦女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7986980 婦女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7987006 婦女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7987138 婦女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7987365 婦女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7987546 婦女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7987571 婦女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7987838 婦女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7987930 婦女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7988290 婦女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7988474 婦女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7988522 婦女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7988824 婦女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7988950 婦女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7989091 婦女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7989274 婦女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7989404 婦女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7989429 婦女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7989645 婦女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7989822 婦女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41346 嶺南日報 1947-08-02.pdf]] || 1947-08-02 |- | [[색인:CNTS-00088241400 嶺南日報 1947-08-03.pdf]] || 1947-08-03 |- | [[색인:CNTS-00088241596 嶺南日報 1947-08-05.pdf]] || 1947-08-05 |- | [[색인:CNTS-00088241697 嶺南日報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241857 嶺南日報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241963 嶺南日報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242196 嶺南日報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242387 嶺南日報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229349 嶺南日報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229399 嶺南日報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229607 嶺南日報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229906 嶺南日報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229994 嶺南日報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230295 嶺南日報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230530 嶺南日報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230617 嶺南日報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230867 嶺南日報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230917 嶺南日報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231192 嶺南日報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231446 嶺南日報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231498 嶺南日報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231757 嶺南日報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231819 嶺南日報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232049 嶺南日報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232407 嶺南日報 1947-08-31.pdf]] || 1947-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103934 工業新聞 1947-08-06.pdf]] || 1947-08-06 |- | [[색인:CNTS-00088104002 工業新聞 1947-08-07.pdf]] || 1947-08-07 |- | [[색인:CNTS-00088104039 工業新聞 1947-08-08.pdf]] || 1947-08-08 |- | [[색인:CNTS-00088104381 工業新聞 1947-08-09.pdf]] || 1947-08-09 |- | [[색인:CNTS-00088104424 工業新聞 1947-08-10.pdf]] || 1947-08-10 |- | [[색인:CNTS-00088104747 工業新聞 1947-08-12.pdf]] || 1947-08-12 |- | [[색인:CNTS-00088104790 工業新聞 1947-08-13.pdf]] || 1947-08-13 |- | [[색인:CNTS-00088104839 工業新聞 1947-08-14.pdf]] || 1947-08-14 |- | [[색인:CNTS-00088105166 工業新聞 1947-08-15.pdf]] || 1947-08-15 |- | [[색인:CNTS-00088105203 工業新聞 1947-08-17.pdf]] || 1947-08-17 |- | [[색인:CNTS-00088105208 工業新聞 1947-08-19.pdf]] || 1947-08-19 |- | [[색인:CNTS-00088105547 工業新聞 1947-08-20.pdf]] || 1947-08-20 |- | [[색인:CNTS-00088105571 工業新聞 1947-08-21.pdf]] || 1947-08-21 |- | [[색인:CNTS-00088105698 工業新聞 1947-08-22.pdf]] || 1947-08-22 |- | [[색인:CNTS-00088105948 工業新聞 1947-08-23.pdf]] || 1947-08-23 |- | [[색인:CNTS-00088106077 工業新聞 1947-08-24.pdf]] || 1947-08-24 |- | [[색인:CNTS-00088106431 工業新聞 1947-08-26.pdf]] || 1947-08-26 |- | [[색인:CNTS-00088106433 工業新聞 1947-08-27.pdf]] || 1947-08-27 |- | [[색인:CNTS-00088106532 工業新聞 1947-08-28.pdf]] || 1947-08-28 |- | [[색인:CNTS-00088106723 工業新聞 1947-08-29.pdf]] || 1947-08-29 |- | [[색인:CNTS-00088107169 工業新聞 1947-08-30.pdf]] || 1947-08-30 |- | [[색인:CNTS-00088107222 工業新聞 1947-08-31.pdf]] || 1947-08-31 |} === 1948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남조선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14965763 南朝鮮民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114965819 南朝鮮民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14965866 南朝鮮民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114965906 南朝鮮民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114965972 南朝鮮民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114966016 南朝鮮民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114966021 南朝鮮民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114966066 南朝鮮民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114966114 南朝鮮民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114966161 南朝鮮民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114966205 南朝鮮民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114966218 南朝鮮民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114966247 南朝鮮民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114966288 南朝鮮民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114966339 南朝鮮民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114966379 南朝鮮民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114966431 南朝鮮民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114966451 南朝鮮民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114966497 南朝鮮民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114966533 南朝鮮民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114966591 南朝鮮民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114966597 南朝鮮民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114966640 南朝鮮民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대동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48816953 大東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colspan="3" | 대구시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109362773 大邱時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109362798 大邱時報 1948-08-05.pdf]] || 1948-08-05 |- ! colspan="3" | 대한일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08156 大韓日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08358 大韓日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08728 大韓日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09203 大韓日報 1948-08-09.pdf]] || 1948-08-09 |- | [[색인:CNTS-00088009428 大韓日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09801 大韓日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10349 大韓日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10702 大韓日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10754 大韓日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11046 大韓日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11400 大韓日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11883 大韓日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12502 大韓日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13332 大韓日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13415 大韓日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14017 大韓日報 1948-08-23.pdf]] || 1948-08-23 |- | [[색인:CNTS-00088014510 大韓日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14922 大韓日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15512 大韓日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16242 大韓日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16332 大韓日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16766 大韓日報 1948-08-30.pdf]] || 1948-08-30 |- | [[색인:CNTS-00088017406 大韓日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부인신보 (한자 △,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034809 婦人新報 1948-08-03.pdf]] || 1948-08-03 |- | [[색인:CNTS-00088035078 婦人新報 1948-08-04.pdf]] || 1948-08-04 |- | [[색인:CNTS-00088035179 婦人新報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035426 婦人新報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035589 婦人新報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035911 婦人新報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036039 婦人新報 1948-08-10.pdf]] || 1948-08-10 |- | [[색인:CNTS-00088036150 婦人新報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036275 婦人新報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036533 婦人新報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036683 婦人新報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036934 婦人新報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036976 婦人新報 1948-08-17.pdf]] || 1948-08-17 |- | [[색인:CNTS-00088037086 婦人新報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037377 婦人新報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037462 婦人新報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037727 婦人新報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037901 婦人新報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037982 婦人新報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038263 婦人新報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038604 婦人新報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038652 婦人新報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038775 婦人新報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039052 婦人新報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039315 婦人新報 1948-08-31.pdf]] || 1948-08-31 |- ! colspan="3" | 공업신문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162701 工業新聞 1948-08-05.pdf]] || 1948-08-05 |- | [[색인:CNTS-00088163126 工業新聞 1948-08-06.pdf]] || 1948-08-06 |- | [[색인:CNTS-00088163165 工業新聞 1948-08-07.pdf]] || 1948-08-07 |- | [[색인:CNTS-00088163634 工業新聞 1948-08-08.pdf]] || 1948-08-08 |- | [[색인:CNTS-00088163647 工業新聞 1948-08-11.pdf]] || 1948-08-11 |- | [[색인:CNTS-00088164110 工業新聞 1948-08-12.pdf]] || 1948-08-12 |- | [[색인:CNTS-00088164155 工業新聞 1948-08-13.pdf]] || 1948-08-13 |- | [[색인:CNTS-00088164278 工業新聞 1948-08-14.pdf]] || 1948-08-14 |- | [[색인:CNTS-00088164416 工業新聞 1948-08-15.pdf]] || 1948-08-15 |- | [[색인:CNTS-00088164684 工業新聞 1948-08-18.pdf]] || 1948-08-18 |- | [[색인:CNTS-00088164894 工業新聞 1948-08-19.pdf]] || 1948-08-19 |- | [[색인:CNTS-00088165234 工業新聞 1948-08-20.pdf]] || 1948-08-20 |- | [[색인:CNTS-00088165432 工業新聞 1948-08-21.pdf]] || 1948-08-21 |- | [[색인:CNTS-00088165874 工業新聞 1948-08-22.pdf]] || 1948-08-22 |- | [[색인:CNTS-00088166179 工業新聞 1948-08-24.pdf]] || 1948-08-24 |- | [[색인:CNTS-00088166341 工業新聞 1948-08-25.pdf]] || 1948-08-25 |- | [[색인:CNTS-00088166714 工業新聞 1948-08-26.pdf]] || 1948-08-26 |- | [[색인:CNTS-00088167164 工業新聞 1948-08-27.pdf]] || 1948-08-27 |- | [[색인:CNTS-00088167396 工業新聞 1948-08-28.pdf]] || 1948-08-28 |- | [[색인:CNTS-00088167504 工業新聞 1948-08-29.pdf]] || 1948-08-29 |- | [[색인:CNTS-00088167776 工業新聞 1948-08-31.pdf]] || 1948-08-31 |} === 1949년 === {| class="wikitable" |- ! 색인 !! 날짜 !! 비고 |- ! colspan="3" | 영남신보 (한자 O, 옛한글 X) |- | [[색인:CNTS-00088272035 嶺南日報 1949-08-04.pdf]] || 1949-08-04 |- | [[색인:CNTS-00088272210 嶺南日報 1949-08-05.pdf]] || 1949-08-05 |- | [[색인:CNTS-00088272505 嶺南日報 1949-08-06.pdf]] || 1949-08-06 |- | [[색인:CNTS-00088272618 嶺南日報 1949-08-10.pdf]] || 1949-08-10 |- | [[색인:CNTS-00088272811 嶺南日報 1949-08-11.pdf]] || 1949-08-11 |- | [[색인:CNTS-00088272989 嶺南日報 1949-08-12.pdf]] || 1949-08-12 |- | [[색인:CNTS-00088273263 嶺南日報 1949-08-13.pdf]] || 1949-08-13 |- | [[색인:CNTS-00088273477 嶺南日報 1949-08-15.pdf]] || 1949-08-15 |- | [[색인:CNTS-00088273600 嶺南日報 1949-08-17.pdf]] || 1949-08-17 |- | [[색인:CNTS-00088273770 嶺南日報 1949-08-19.pdf]] || 1949-08-19 |- | [[색인:CNTS-00088273980 嶺南日報 1949-08-20.pdf]] || 1949-08-20 |- | [[색인:CNTS-00088274307 嶺南日報 1949-08-21.pdf]] || 1949-08-21 |- | [[색인:CNTS-00088274513 嶺南日報 1949-08-23.pdf]] || 1949-08-23 |- | [[색인:CNTS-00088274772 嶺南日報 1949-08-25.pdf]] || 1949-08-25 |- | [[색인:CNTS-00088274989 嶺南日報 1949-08-26.pdf]] || 1949-08-26 |- | [[색인:CNTS-00088275240 嶺南日報 1949-08-27.pdf]] || 1949-08-27 |- | [[색인:CNTS-00088275487 嶺南日報 1949-08-28.pdf]] || 1949-08-28 |- | [[색인:CNTS-00088275705 嶺南日報 1949-08-30.pdf]] || 1949-08-30 |- | [[색인:CNTS-00088276098 嶺南日報 1949-08-31.pdf]] || 1949-08-31 |} bjrxv9fsdybclvu19v5i9xtm096ssw5 페이지:詩經諺解 제4책.djvu/28 250 101556 392554 2025-06-25T12:33:37Z Lawhunt 1731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big> :{{더더작게|혹}}羣{{더더작게|군}}ᄒᆞ며或{{더더작게|혹}}友{{더더작게|우}}ᄒᆞ거ᄂᆞᆯ左{{더더작게|좌}}右{{더더작게|우}}ᄅᆞᆯ다率{{더더작게|솔}}ᄒᆞ야ᄡᅥ天{{더더작게|텬}}子{{더더작게|ᄌᆞ}}ᄅᆞᆯ燕{{더더작게|연}}케ᄒᆞ놋다<br> ○旣{{더더작게|긔}}張{{더더작게|쟝}}我{{더더작게|아}}弓{{더더작게|궁}}{{분주|ᄒᆞ|고}}旣{{더더작게|긔}}... 39255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big> :{{더더작게|혹}}羣{{더더작게|군}}ᄒᆞ며或{{더더작게|혹}}友{{더더작게|우}}ᄒᆞ거ᄂᆞᆯ左{{더더작게|좌}}右{{더더작게|우}}ᄅᆞᆯ다率{{더더작게|솔}}ᄒᆞ야ᄡᅥ天{{더더작게|텬}}子{{더더작게|ᄌᆞ}}ᄅᆞᆯ燕{{더더작게|연}}케ᄒᆞ놋다<br> ○旣{{더더작게|긔}}張{{더더작게|쟝}}我{{더더작게|아}}弓{{더더작게|궁}}{{분주|ᄒᆞ|고}}旣{{더더작게|긔}}挾{{더더작게|협}}我{{더더작게|아}}矢{{더더작게|시}}{{분주|ᄒᆞ|야}}發{{더더작게|발}}彼{{더더작게|피}}小{{더더작게|쇼}}豝{{더더작게|파}}{{분주|ᄒᆞ|여}}殪{{더더작게|예}}此{{더더작게|ᄎᆞ}}大{{더더작게|대}}兕{{더더작게|시}}{{분주|ᄒᆞ|야}}以{{더더작게|이}}御{{더더작게|어}}賓{{더더작게|빈}}客{{더더작게|ᄀᆡᆨ}}{{분주|ᄒᆞ|고}}且{{더더작게|챠}}以{{더더작게|이}}酌{{더더작게|쟈}}醴{{더더작게|례}}{{분주|ᅵ로|다}}<br> :이믜우리弓{{더더작게|궁}}을張{{더더작게|쟝}}ᄒᆞ고이믜우리矢{{더더작게|시}}ᄅᆞᆯ挾{{더더작게|협}}ᄒᆞ여뎌小{{더더작게|쇼}}豝{{더더작게|파}}ᄅᆞᆯ發{{더더작게|발}}ᄒᆞ며이大{{더더작게|대}}兕{{더더작게|시}}ᄅᆞᆯ殪{{더더작게|예}}ᄒᆞ야ᄡᅥ賓{{더더작게|빈}}客{{더더작게|ᄀᆡᆨ}}의 </big>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ppez50zqnqebpkw19khuh68bxplba56 페이지:詩經諺解 제4책.djvu/29 250 101557 392555 2025-06-25T13:14:39Z Lawhunt 1731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big> :게御{{더더작게|어}}ᄒᆞ고ᄡᅥ醴{{더더작게|례}}ᄅᆞᆯ酌{{더더작게|쟉}}ᄒᆞ놋다<br> ::吉{{더더작게|길}}日{{더더작게|일}}四{{더더작게|ᄉᆞ}}章{{더더작게|쟝}}<br> 鴻{{더더작게|홍}}鳫{{더더작게|안}}于{{더더작게|우}}飛{{더더작게|비}}{{분주|ᄒᆞ|니}}肅{{더더작게|슉}}肅{{더더작게|슉}}基{{더더작게|기}}羽{{더더작게|우}}{{분주|ᅵ로|다}}之{{더더... 39255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big> :게御{{더더작게|어}}ᄒᆞ고ᄡᅥ醴{{더더작게|례}}ᄅᆞᆯ酌{{더더작게|쟉}}ᄒᆞ놋다<br> ::吉{{더더작게|길}}日{{더더작게|일}}四{{더더작게|ᄉᆞ}}章{{더더작게|쟝}}<br> 鴻{{더더작게|홍}}鳫{{더더작게|안}}于{{더더작게|우}}飛{{더더작게|비}}{{분주|ᄒᆞ|니}}肅{{더더작게|슉}}肅{{더더작게|슉}}基{{더더작게|기}}羽{{더더작게|우}}{{분주|ᅵ로|다}}之{{더더작게|지}}子{{더더작게|ᄌᆞ}}于{{더더작게|우}}征{{더더작게|졍}}{{분주|ᄒᆞ|니}}劬{{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于{{더더작게|우}}野{{더더작게|야}}{{분주|ᅵ로|다}}爰{{더더작게|원}}及{{더더작게|급}}矜{{더더작게|긍}}人{{더더작게|인}}{{분주|이|}}哀{{더더작게|ᄋᆡ}}此{{더더작게|ᄎᆞ}}鰥{{더더작게|환}}寡{{더더작게|과}}{{분주|ᅵ로|다}}<br> :鴻{{더더작게|홍}}鳫{{더더작게|안}}이飛{{더더작게|비}}ᄒᆞ니그羽{{더더작게|우}}ᅵ肅{{더더작게|슉}}肅{{더더작게|슉}}ᄒᆞ놋다之{{더더작게|지}}子{{더더작게|ᄌᆞ}}ᅵ征{{더더작게|졍}}ᄒᆞ니野{{더더작게|야}}의劬{{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ᄒᆞ놋다이에미츠니矜{{더더작게|긍}}ᄒᆞᆫ사ᄅᆞᆷ이이鰥{{더더작게|환}}寡{{더더작게|과}}ᅵ哀{{더더작게|ᄋᆡ}}흡도다 </big>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7b74k37paxgqw1m4fs754yvpxwp8xho 페이지:孔夫子言行錄.djvu/6 250 101558 392556 2025-06-25T14:24:32Z Ghdtjdals 18466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이구쳑뉵촌九尺六寸이오허리ᄂᆞᆫ열아름이시오긔린麒麟이옥샹셔玉祥瑞를토吐ᄒᆞᆷ이오물졍긔精氣라쇠ᄒᆞᆫ쥬周나라를계쇽繼續ᄒᆞ사나시니어려셔노르시ᄆᆡ항상졔긔恒常祭器을버리여녜모禮貌양을베푸시고밋쟝셩長成ᄒᆞ시ᄆᆡ위리委吏가되ᄉᆞ요량料量을평平이ᄒᆞ시고ᄉᆞ직리司職吏가되시ᄆᆡ뉵츅六畜이번셩蕃盛ᄒᆞ고쥬나라... 39255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Ghdtjdals"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이구쳑뉵촌九尺六寸이오허리ᄂᆞᆫ열아름이시오긔린麒麟이옥샹셔玉祥瑞를토吐ᄒᆞᆷ이오물졍긔精氣라쇠ᄒᆞᆫ쥬周나라를계쇽繼續ᄒᆞ사나시니어려셔노르시ᄆᆡ항상졔긔恒常祭器을버리여녜모禮貌양을베푸시고밋쟝셩長成ᄒᆞ시ᄆᆡ위리委吏가되ᄉᆞ요량料量을평平이ᄒᆞ시고ᄉᆞ직리司職吏가되시ᄆᆡ뉵츅六畜이번셩蕃盛ᄒᆞ고쥬나라의가시ᄆᆡ녜를노ᄌᆞ老子의게무르시고이믜도라오시ᄆᆡ졔자弟子-더욱만이오ᄂᆞᆫ지라그즁에ᄒᆞᆫ졔ᄌᆞ弟子-원방遠方으로좃차오ᄂᆞᆫᄌᆡ잇거늘공ᄌᆞ-집흐신막ᄃᆡ를언메고무러갈오ᄉᆞᄃᆡᄌᆞᄂᆡ부친父親이무양無恙ᄒᆞ신야ᄯᅩ막ᄃᆡ을쳐갈ᄋᆞᄉᆞᄃᆡᄌᆞᄂᆡ모친母親이무양ᄒᆞ신야막ᄃᆡ을놋코갈오사ᄃᆡᄌᆞᄂᆡ형졔兄弟다무양ᄒᆞ냐막ᄃᆡ를ᄭᅳ러갈오사ᄃᆡᄌᆞᄂᆡ쳐ᄌᆞ妻子-무양ᄒᆞ냐ᄒᆞ시니그런고로부ᄌᆞ夫子ᄂᆞᆫ여셧ᄌᆞ막ᄃᆡ로귀쳔貴賤의등분等分과친쇼親踈의의리義理을의논議論ᄒᆞ시고분변分辨ᄒᆞ신다ᄒᆞ더라노소공魯昭公이십오년二十五年갑신甲申에공ᄌᆞ에츈츄春秋가삼십오셰三十五歲시라쇼공昭公이젯齊나라로다라나ᄆᆡ노국魯國이어지럽거늘공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baqukxrid00hec7su5o0ukmy3q94lrs 페이지:孔夫子言行錄.djvu/7 250 101559 392557 2025-06-25T14:41:34Z Ghdtjdals 18466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ᄌᆞ|졔齊나라에가ᄉᆞ고쇼ᄌᆞ高昭子의가신家臣이되여써경공景公의게통通ᄒᆞ나경공이니계尼豁ㅅ밧으로써봉封ᄒᆞ고ᄌᆞᄒᆞᄆᆡ안영晏嬰이갈오ᄃᆡ불가不可라ᄒᆞ니경공이의혹疑惑ᄒᆞᄂᆞᆫ지라공ᄌᆞ드듸여노魯나라로도라오시다노졍공魯定公원년元年임진壬辰은공ᄌᆞ의츈츄가ᄉᆞ십ᄉᆞᆷ셰四十三歲시라계씨季氏가강셩强盛ᄒ... 39255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Ghdtjdals"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ᄌᆞ|졔齊나라에가ᄉᆞ고쇼ᄌᆞ高昭子의가신家臣이되여써경공景公의게통通ᄒᆞ나경공이니계尼豁ㅅ밧으로써봉封ᄒᆞ고ᄌᆞᄒᆞᄆᆡ안영晏嬰이갈오ᄃᆡ불가不可라ᄒᆞ니경공이의혹疑惑ᄒᆞᄂᆞᆫ지라공ᄌᆞ드듸여노魯나라로도라오시다노졍공魯定公원년元年임진壬辰은공ᄌᆞ의츈츄가ᄉᆞ십ᄉᆞᆷ셰四十三歲시라계씨季氏가강셩强盛ᄒᆞ야참남僭濫ᄒᆞ고그신ᄒᆞ양호陽虎가난亂을지여졍ᄉᆞ政事를쳔단擅斷이ᄒᆞᄂᆞᆫ고로공ᄌᆞ|벼슬을ᄉᆞ면辭免ᄒᆞ시고물너와시셔詩書와예악禮樂을닥그시니졔자弟子|더욱만터라구년九年경ᄌᆞ庚子ᄂᆞᆫ공자孔子의츈츄春秋|오십일셰五十一歲시라공산불뉴비公山不狃費ᄯᅡᆼ으로써반畔ᄒᆞᄆᆡ계씨季氏공ᄌᆞ를불너보ᄂᆡ여션유宣論ᄒᆞ고ᄌᆞᄒᆞ거늘맛츰ᄂᆡᄒᆡᆼ行치안이ᄒᆞ시고졍공定公이공ᄌᆞ로써즁도中都원을ᄒᆞ이시거늘일년一年에ᄉᆞ방四方이법法밧는지라드듸여ᄉᆞ공司空을삼으시곳도ᄃᆡᄉᆞ구大司寇를ᄉᆞᆷ다십년十年신츅辛丑에졍공定公을도으ᄉᆞ젯齊나라임군을협곡夾谷에모듸시다십이년十二年계묘癸卯에ᄌᆞ로子路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9ofnkdc0zoi9jd25ltbfgro02g1emo1 페이지:태셔신사 하.djvu/89 250 101560 392558 2025-06-25T15:02:59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혜오ᄃᆡ 하ᄂᆞᆯ이 쥬신 목숨은 나의 가진 거시 아니요 조상의 젼ᄅᆡᄒᆞᆫ ᄌᆡ산도 ᄯᅩ 감히 나의 물건이 아니라 ᄒᆞ야 졍부의 법령이 비록 미흡ᄒᆞ야도 통국 ᄉᆞᄅᆞᆷ이 한마ᄃᆡ 말도 그르다 ᄒᆞ지 못ᄒᆞ니 이ᄂᆞᆫ {{du|오}}황이 ᄇᆡᆨ셩을 인류로 아지 아님이라 연이 {{du|오}}민이 황뎨의 식견이 비루ᄒᆞ고 셩졍이 강ᄑᆡᆨᄒᆞ... 39255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혜오ᄃᆡ 하ᄂᆞᆯ이 쥬신 목숨은 나의 가진 거시 아니요 조상의 젼ᄅᆡᄒᆞᆫ ᄌᆡ산도 ᄯᅩ 감히 나의 물건이 아니라 ᄒᆞ야 졍부의 법령이 비록 미흡ᄒᆞ야도 통국 ᄉᆞᄅᆞᆷ이 한마ᄃᆡ 말도 그르다 ᄒᆞ지 못ᄒᆞ니 이ᄂᆞᆫ {{du|오}}황이 ᄇᆡᆨ셩을 인류로 아지 아님이라 연이 {{du|오}}민이 황뎨의 식견이 비루ᄒᆞ고 셩졍이 강ᄑᆡᆨᄒᆞᆷ을 알고 변을 짓고ᄌᆞ ᄒᆞ나 오직 {{du|오}}황의 마음이 젼혀 강포ᄒᆞᆷ은 아니라 기실은 애민ᄒᆞᆷ이요 기타 졍ᄉᆞㅣ ᄯᅩᄒᆞᆫ 민간에 유익ᄒᆞᆷ도 잇고 ᄯᅩ 우리 소민이 젼일에 황뎨와 갓치 {{du|법}}황 {{u|나파륜}}의 만모와 학ᄃᆡᄅᆞᆯ 바닷스니 이졔 황뎨 년긔 놉흐시ᄆᆡ 우리 비록 불합ᄒᆞᆷ이 잇실지라도 ᄎᆞᆷ아 그 쇠휴잔년과 우환여ᄉᆡᆼ에 다시 속수ᄃᆡ폐ᄒᆞᄂᆞᆫ 고초ᄅᆞᆯ 당케 ᄒᆞ리요 ᄒᆞ고 마음을 눅이고 ᄯᅢᄅᆞᆯ 기다리더라 연이나 일조에 산릉이 붕ᄒᆞ시면 그 위ᄅᆞᆯ 잇ᄂᆞᆫ ᄌᆞᄂᆞᆫ 도라보지 아닐너라 일쳔팔ᄇᆡᆨᄉᆞᆷ십오년【헌종 원년】에 {{u|번셔}} 황뎨 훙ᄒᆞ고 신군 {{u|비졉남}}이<ref>페르디난트(Ferdinand)</ref> 즉위ᄒᆞᄆᆡ {{du|오국}} ᄉᆞ린에 각국이 ᄐᆡ반이나 다 졔도ᄅᆞᆯ 곳쳐 인민이 졍ᄉᆞ 의론ᄒᆞᄂᆞᆫ 권을 가졋ᄂᆞᆫ지라 이ᄯᅢ ᄇᆡᆨ셩이 다 외국 ᄉᆞ졍을 아ᄂᆞᆫ 고로 비록 국가의 금령이 잇스나 사사로이 회ᄅᆞᆯ 모와 졍ᄉᆞ 득실을 의론ᄒᆞ야 오직 ᄯᅢ 오기ᄅᆞᆯ 기다리거ᄂᆞᆯ 졍부ᄂᆞᆫ 막연부지ᄒᆞ고 의연히 셰력을 빙ᄌᆞᄒᆞ야 ᄇᆡᆨ셩을 압졔ᄒᆞ며 ᄇᆡᆨ셩의 유익ᄒᆞ고 편안ᄒᆞᆫ 일은 ᄒᆡᆼ치 아니ᄒᆞ고 다만 교만ᄒᆞ고 인순ᄒᆞᆷ을 일ᄉᆞᆷ아 그 록위만 보젼코ᄌᆞ ᄒᆞ니 국고금은 ᄆᆡ년 입불부츌ᄒᆞ야 옛적 {{du|쥬}} 난왕의 ᄑᆡ채ᄃᆡᄅᆞᆯ 가히 ᄊᆞ을지라 이에 통국 인심이 요란ᄒᆞ야 황뎨와 관장을 밋지 아니ᄒᆞ고 화란이 조셕에 잇더라 대져 {{du|오국}} 법령이 {{du|구쥬}} 각국 신법을 ᄯᅡ로지 못ᄒᆞ거ᄂᆞᆯ 기즁 더욱이 대폐 잇스니 이ᄂᆞᆫ 망국ᄒᆞᆯ 장본이라 {{du|오국}} 인민이 두 종낙이 잇스니 일은 {{du|일이만}} 동족인이요 일은 {{du|아라사}} 동족인이라 {{du|오국}} 졍부ㅣ {{du|일이만}}을 친밀ᄒᆞ고 {{du|아라사}}ᄂᆞᆫ 셕긔다 ᄒᆞ야 항상 {{du|일이만}} 족은 두호ᄒᆞ고 {{du|아라사}} 족은 박ᄃᆡᄒᆞ야 {{du|아라사}} 족이 호소ᄒᆞᆷ이 잇스면 그 시비ᄂᆞᆫ 무론ᄒᆞ고 ᄇᆡᆨ가지에 한가지도 쳥종치 아니며 {{du|일이만}} 족뉴ᄂᆞᆫ ᄆᆡ양 몽혜ᄒᆞᄂᆞᆫ 일이 만흔지라 이에 {{du|아라사}} 족뉴의 {{du|시랍비}}<ref>슬라브(Slav)</ref> ᄉᆞᄅᆞᆷ이 【{{du|시랍비}}ᄂᆞᆫ {{du|아라사}} 인종 총명이요 ᄯᅩ {{du|항가리}} ᄉᆞᄅᆞᆷ이라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d1gu5r72384w4cp9rvyt6rb230iobmm 페이지:태셔신사 하.djvu/90 250 101561 392559 2025-06-25T15:03:27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ᄒᆞ며 ᄯᅩ 디명을 인ᄒᆞ야 {{du|마가}}인이라도<ref>마갸르(Magyar)</ref> ᄒᆞ더라】 다 일으되 국가ㅣ 우리ᄅᆞᆯ 외ᄃᆡᄒᆞ니 우리 ᄯᅡ로이 한 나라흘 ᄆᆡᆫ듬이 올코 허물며 {{du|항가리}}ᄂᆞᆫ 옛젹에 엄연이 한 나라히라 이졔 ᄉᆡ로이 나라히 되야도 어렵지 아니ᄒᆞ니 하필 {{du|오국}} 울타리 빗ᄒᆡ 잇셔 무엇ᄒᆞ리요 ᄒᆞ야 날로 란을 짓... 39255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ᄒᆞ며 ᄯᅩ 디명을 인ᄒᆞ야 {{du|마가}}인이라도<ref>마갸르(Magyar)</ref> ᄒᆞ더라】 다 일으되 국가ㅣ 우리ᄅᆞᆯ 외ᄃᆡᄒᆞ니 우리 ᄯᅡ로이 한 나라흘 ᄆᆡᆫ듬이 올코 허물며 {{du|항가리}}ᄂᆞᆫ 옛젹에 엄연이 한 나라히라 이졔 ᄉᆡ로이 나라히 되야도 어렵지 아니ᄒᆞ니 하필 {{du|오국}} 울타리 빗ᄒᆡ 잇셔 무엇ᄒᆞ리요 ᄒᆞ야 날로 란을 짓고ᄌᆞ ᄒᆞ거ᄂᆞᆯ 셕호ㅣ라 {{du|오국}} 군신은 다만 교만ᄒᆞ야 권셰로 ᄇᆡᆨ셩을 압졔ᄒᆞ며 구법만 쥰ᄒᆡᆼᄒᆞ고 ᄀᆡ현역철ᄒᆞ야 순량ᄒᆞᆫ ᄇᆡᆨ셩을 안무치 못ᄒᆞ니 그 엇지 장치구안ᄒᆞ리요 ::뎨이졀 {{du|오국}} 일쳔팔ᄇᆡᆨᄉᆞ십팔년 졍형이라 이ᄯᅢ에 {{du|법}}황 {{u|노의 비례}} ᄇᆡᆨ셩을 학ᄃᆡᄒᆞᄆᆡ ᄇᆡᆨ셩이 견ᄃᆡ지 못ᄒᆞ야 일졔히 란을 지어 황뎨ᄅᆞᆯ ᄶᅩᆺ거ᄂᆞᆯ {{du|오국}} ᄇᆡᆨ셩이 듯고 다 일으되 우리 인군의 포학ᄒᆞᆷ은 {{du|법}}황에셔 더 심ᄒᆞ더니 이졔 {{du|법}}황이 도망ᄒᆞ얏스니 우리도 이 긔회ᄅᆞᆯ 일치 마ᄌᆞ ᄒᆞ거ᄂᆞᆯ {{du|오국}} 졍부ㅣ 그 말을 듯고 대경ᄒᆞ야 ᄇᆡᆨ셩이 {{du|법국}}을 효빈ᄒᆞᆯ가 염녀ᄒᆞ나 오히려 ᄇᆡᆨ셩의 ᄯᅳᆺ이 {{du|법국}}과 요요상ᄃᆡᄒᆞ야 란을 지을 쥴은 모로더라 이ᄯᅢ에 {{du|오국}} 졍승 {{u|몰투니}} 벼살이 놉하 왕위에 올으ᄆᆡ 안부존영이 셰상에 혁혁ᄒᆞ더니 일쳔팔ᄇᆡᆨᄉᆞ십팔년 【헌종 십사년】 ᄉᆞᆷ월 초일일에 ᄇᆡᆨ셩이 졸연이 이러나 {{u|몰투니}} 왕궁에 다라들거ᄂᆞᆯ 졍부ㅣ 급히 군ᄉᆞᄅᆞᆯ 조발ᄒᆞ야 ᄶᅩᆺᄎᆞ쓰나 ᄇᆡᆨ셩 즁 ᄌᆞ연 쥭고 상ᄒᆞᆫ 자ㅣ 잇ᄂᆞᆫ지라 {{du|오}}황이 그 ᄉᆞ셰 급ᄒᆞᆷ을 알고 젼일의 학졍ᄒᆞ든 마음을 ᄌᆞᆷ간 도뤼혀 군긔쳐 대신을 쳬ᄎᆞᄒᆞ고 조셔ᄅᆞᆯ 나리여 각 신문ᄉᆞ에 명ᄒᆞ야 졍ᄉᆞ 득실과 치국치민ᄒᆞᄂᆞᆫ 량ᄎᆡᆨ을 말ᄒᆞ라 ᄒᆞ고 일면으로 상하 의원을 명ᄒᆞ야 졍ᄉᆞᄅᆞᆯ 의론케 ᄒᆞ고 젼일에 무죄히 금고ᄒᆞᆫ ᄉᆞᄅᆞᆷ을 다 방셕ᄒᆞ고 ᄇᆡᆨ셩의 구ᄒᆞᄂᆞᆫ 바 신법을 일일히 허락ᄒᆞ고 ᄯᅩ ᄇᆡᆨ셩의 원을 죳ᄎᆞ 관원 쳔거ᄒᆞᄂᆞᆫ 권을 쥬게 ᄒᆞ니 여ᄎᆞ 졍형은 가위 ᄇᆡᆨ셩의 ᄯᅳᆺ을 ᄯᅡ라 사사순종ᄒᆞ야 불유여력이어ᄂᆞᆯ ᄇᆡᆨ셩은 도뤼혀 {{du|오}}황의 마음을 밋지 아니ᄒᆞ고 다 이르되 이ᄂᆞᆫ 황뎨 법령을 속히 곳쳐 우리ᄅᆞᆯ 유인ᄒᆞ야 민심을 흣터지게 ᄒᆞᆷ이요 진심은 아니라 타일에 필연 권셰로 우리ᄅᆞᆯ 압졔ᄒᆞ야 구법을 ᄒᆡᆼᄒᆞ리라 ᄒᆞ고 란이 긋치지 아니ᄒᆞ거ᄂᆞᆯ {{u|비졉남}} 황뎨 그 화ㅣ 몸에 밋츨가 ᄒᆞ야 일쳔팔ᄇᆡᆨᄉᆞ십팔년 【헌종 십사년】 오월 십팔일에 가마니 미복으로 {{du|유은랍}} 【{{du|유은랍}}은 곳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ozxtyob7txujjrptf3wxhq0inlfzdaj 페이지:태셔신사 하.djvu/91 250 101562 392560 2025-06-25T15:03:54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du|유야랍}}이라】 도셩에 나가 도망ᄒᆞᆯᄉᆡ 소친다려 일너 왈 우리 ᄇᆡᆨ셩이 우미ᄒᆞᆷ이 여ᄎᆞᄒᆞ니 타일에 져의 번연ᄀᆡ오ᄒᆞ면 다시 가히 ᄐᆡ평무ᄉᆞᄒᆞᆫ 복을 누리리라 ᄒᆞ더라 {{u|비졉남}} 황뎨 손위ᄒᆞᆫ 후 국회 즁 상하 각 관이 두어 례ᄇᆡ 후에 {{du|유야랍}} 도셩에 모히니 대져 {{du|오국}}은 국가히 릉히 ᄒᆞᆫ번 국... 39256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du|유야랍}}이라】 도셩에 나가 도망ᄒᆞᆯᄉᆡ 소친다려 일너 왈 우리 ᄇᆡᆨ셩이 우미ᄒᆞᆷ이 여ᄎᆞᄒᆞ니 타일에 져의 번연ᄀᆡ오ᄒᆞ면 다시 가히 ᄐᆡ평무ᄉᆞᄒᆞᆫ 복을 누리리라 ᄒᆞ더라 {{u|비졉남}} 황뎨 손위ᄒᆞᆫ 후 국회 즁 상하 각 관이 두어 례ᄇᆡ 후에 {{du|유야랍}} 도셩에 모히니 대져 {{du|오국}}은 국가히 릉히 ᄒᆞᆫ번 국회ᄅᆞᆯ 모흐면 아모리 졀ᄃᆡᄒᆞᆫ 일이라도 다 가히 결단ᄒᆞ든 ᄇᆡ라 이졔 국회 크게 됨을 보고 다 환희과망ᄒᆞ야 왈 종젼에 ᄇᆡᆨ셩 질고와 폐막을 다 가히 일조에 쓰러 바리리라 ᄒᆞ야 조와ᄒᆞᄂᆞᆫ 빗치 낫ᄒᆡ 드러나더니 다만 {{du|오}}황이 도셩에 잇지 아니ᄒᆞᄆᆡ 졔반 례졀과 규식을 ᄒᆡᆼ치 못ᄒᆞᆯ지라 이에 {{du|오}}황을 청ᄒᆞ야 도셩에 도라오게 ᄒᆞ니 {{du|오}}황이 도셩에 이르러 다시 혜오ᄃᆡ ᄇᆡᆨ셩이 필연 젼ᄉᆞᄅᆞᆯ 후회ᄒᆞ야 ᄌᆞᄎᆞ로 안분수명ᄒᆞ고 다시 지졀을 ᄂᆡ지 아니리라 ᄒᆞ고 의연히 옛 규모ᄅᆞᆯ 변치 아니ᄒᆞ얏더니 ᄯᅩ 두어 례ᄇᆡᄅᆞᆯ 지ᄂᆡᄆᆡ ᄇᆡᆨ셩이 그 ᄯᅳᆺ을 알고 드듸여 팔월 십이일에 ᄃᆡ란이 다시 이러 홀왕홀ᄅᆡᄒᆞ야 두미ᄅᆞᆯ 알 수 업다가 십월 ᄉᆞ일에 ᄇᆡᆨ셩이 군긔고ᄅᆞᆯ 창탈ᄒᆞ고 대신 {{u|뢰토아}}ᄂᆞᆫ<ref>라투르(Latour)</ref> 년긔 고대ᄒᆞᆫ ᄉᆞᄅᆞᆷ이라 맛ᄎᆞᆷᄂᆡ 쥭이고 초칠일에 {{u|비졉남}} 황뎨 ᄯᅩ 도망ᄒᆞ야 도셩에 나가니 {{du|유야랍}}이 ᄌᆞᄎᆞ로 ᄇᆡᆨ셩이 졍ᄉᆞᄅᆞᆯ 주장ᄒᆞ더라 {{du|오국}} 란리 지ᄎᆞᄒᆞᄆᆡ 졸연히 평졍키 어례울지라 그 외ᄉᆡᆼ에 {{du|륜파졔}}와<ref>롬바르디(lombardy)</ref> {{du|비ᄂᆡ텬}}은<ref>베네치아(Venetia)</ref> {{du|의대리}}와 이웃이라 일시에 다 반ᄒᆞ고 {{du|지즁ᄒᆡ}} 모든 셤 즁에 {{du|살졍니아}}<ref>사르디니아(Sardnia)</ref>도 왕이 엇셔 민당과 연락ᄒᆞ고 {{du|의대리국}} ᄉᆞᄅᆞᆷ은 {{du|오}}민의 반ᄒᆞᆷ을 깃거ᄒᆞ고 {{du|항가리}} ᄉᆞᄅᆞᆷ은 갈오대 우리 이졔 ᄌᆞ주지국이 되얏스니 {{du|오국}}의 압졔ᄅᆞᆯ 밧지 아니리라 ᄒᆞ며 ᄎᆞ외에 ᄯᅩ {{du|파형야}}와 {{du|셜뇌사}}<ref>실레시아(Silesia)</ref> 냥ᄉᆡᆼ 즁에 잡거ᄒᆞᄂᆞᆫ {{du|아라사}} 종락 {{du|시랍비}} 【디명】 ᄉᆞᄅᆞᆷ이 ᄯᅩᄒᆞᆫ 반ᄒᆞ야 {{du|항가리}} ᄉᆞᄅᆞᆷ【{{du|아라사}} 동족인이니 디명을 인ᄒᆞ야 일홈ᄒᆞᆷ이라】을 응ᄒᆞ고 {{du|유야랍}}은 ᄇᆡᆨ셩이 졍ᄉᆞ을 쥬장ᄒᆞ야 심지어 {{du|오}}황이 의탁ᄒᆞᆯ 곳이 업고 통이 ᄂᆡ외 상하인 등이 다 의심ᄒᆞ고 겁ᄂᆡ여 그 황뎨와 대신이 인민을 압졔ᄒᆞᆫ다 ᄒᆞ고 공경ᄒᆞ고 ᄋᆡ련ᄒᆞᄂᆞᆫ 마음이 업고 다만 져의 질고ᄅᆞᆯ 구ᄒᆞ자 ᄒᆞ야 웃ᄉᆞᄅᆞᆷ을 긔탄치 아니ᄒᆞᆷ이 {{du|구쥬}} 각국 인민과 갓더라 이ᄯᅢ에 란당이 사긔ᄒᆞ나 겨우 수 월 만에 ᄎᆞ뎨 삭평ᄒᆞ니 그 {{du|파형야}}와 {{du|셜뇌사}} 냥ᄉᆡᆼ에 {{du|시랍비}} 인의 란을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htk3olr74tgli0sfal9lixm77yk07an 페이지:태셔신사 하.djvu/92 250 101563 392561 2025-06-25T15:04:35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평졍ᄒᆞᆫ ᄉᆞᄅᆞᆷ은 {{u|분지가}}<ref>빈디슈그레츠(Windischgrätz)</ref> 왕작이요 {{du|살졍니아}}도 왕을 ᄉᆞ로잡은 자ᄂᆞᆫ {{u|납대ᄉᆞ긔}}<ref>라데츠키(Radetsky)</ref> 총병이라 {{u|납대ᄉᆞ긔}} ᄯᅩ 군ᄉᆞᄅᆞᆯ 옴기여 {{du|의대리}}와 이웃ᄒᆞᆫ {{du|비니텬}} {{du|륜파졔}} 냥ᄉᆡᆼ의 란을 평ᄒᆞ고 ᄯᅩ {{u|비졉남}} 황뎨 피위ᄒᆞᆫ지 뎨ᄉᆞ... 39256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평졍ᄒᆞᆫ ᄉᆞᄅᆞᆷ은 {{u|분지가}}<ref>빈디슈그레츠(Windischgrätz)</ref> 왕작이요 {{du|살졍니아}}도 왕을 ᄉᆞ로잡은 자ᄂᆞᆫ {{u|납대ᄉᆞ긔}}<ref>라데츠키(Radetsky)</ref> 총병이라 {{u|납대ᄉᆞ긔}} ᄯᅩ 군ᄉᆞᄅᆞᆯ 옴기여 {{du|의대리}}와 이웃ᄒᆞᆫ {{du|비니텬}} {{du|륜파졔}} 냥ᄉᆡᆼ의 란을 평ᄒᆞ고 ᄯᅩ {{u|비졉남}} 황뎨 피위ᄒᆞᆫ지 뎨ᄉᆞᆷ일에 의병장 {{u|ᄎᆞᄅᆡ긔}}라<ref>옐라치치(Jellačić)</ref> ᄒᆞᄂᆞᆫ ᄉᆞᄅᆞᆷ이 근왕병 ᄉᆞᆷ만을 거ᄂᆞ리고 {{du|유야랍}}에 이르니 {{du|유야랍}} ᄉᆞᄅᆞᆷ이 폐문불랍ᄒᆞ거ᄂᆞᆯ {{u|ᄎᆞᄅᆡ긔}}ᄂᆞᆫ {{du|극난텬}}<ref>크로아티아(Cratia)</ref> 족류ㅣ라 비록 {{du|항가리}}에 입적ᄒᆞ얏스나 {{du|항가리}}인과 동심치 아니ᄒᆞ고 일너 왈 우리 만일 ᄌᆞ립ᄒᆞ야 나라히 되면 필연 복망ᄒᆞᆷ이 {{du|오국}}보다 더 심ᄒᆞ리라 ᄒᆞ더니 이ᄯᅢ에 {{du|유야랍}}인이 문을 닷고 들이지 아니ᄒᆞ나 불순일간에 {{u|ᄎᆞᄅᆡ긔}}ᄅᆞᆯ 응ᄒᆞ야 오ᄂᆞᆫ 자ㅣ 졈졈 더ᄒᆞ야 칠만 인에 일으ᄂᆞᆫ지라 드대여 {{du|유야랍}}을 에우고 대포ᄅᆞᆯ 노으니 {{du|유야랍}} ᄉᆞᄅᆞᆷ이 막지 못ᄒᆞᆯ 쥴 알고 일쳔팔ᄇᆡᆨᄉᆞ십팔년 【헌종 십사년】 십월 ᄉᆞᆷ십일일에 셩문을 대ᄀᆡᄒᆞ고 {{u|ᄎᆞᄅᆡ긔}}ᄅᆞᆯ 영졉ᄒᆞ야 드리니 이ᄯᅢ에 {{u|비졉남}} 황뎨 {{u|ᄎᆞᄅᆡ긔}} 군즁에 잇다가 한ᄭᅦ 입셩ᄒᆞᄆᆡ 다시 황뎨 위에 올으게 ᄒᆞ니 {{u|비졉남}}이 혜오ᄃᆡ 짐이 다시 황위에 잇스면 민심이 불복ᄒᆞᆯ 거시요 짐도 ᄯᅩᄒᆞᆫ 원치 아니ᄒᆞᆫ다 ᄒᆞ고 그 족하 {{u|번셔 약슬 뎨일}}의게<ref>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ref> 젼위ᄒᆞ니라 이ᄯᅢ에 {{du|항가리}} ᄉᆞᄅᆞᆷ 일쳔일ᄇᆡᆨ만 인이 ᄌᆞ립ᄒᆞ야 일국이 되니 그 ᄯᅡ히 수쳔리라 당초 {{du|오국}}에 속ᄒᆞ얏슬 ᄯᅢ에ᄂᆞᆫ 곤궁막심ᄒᆞ고 깁흔 바다에 ᄲᆞ짐과 갓ᄐᆞ야 진발ᄒᆞᆯ 도리 업스니 ᄃᆡ져 ᄆᆡ년 부셰 밧치기ᄂᆞᆫ 다 농민이 진기사력ᄒᆞ야 쥬야 고ᄉᆡᆼᄒᆞᆷ이요 그 진신셰가와 ᄌᆞᆷ영망족은 다 부셰ᄅᆞᆯ 면ᄒᆞ야 조곰도 국가에 보용ᄒᆞᆷ이 업고 기즁 더욱 가련ᄒᆞᆫ ᄌᆞᄂᆞᆫ 농가의 작인이라 종년 근고ᄒᆞ다가 화곡이 다 셩숙ᄒᆞ면 곳 답쥬의게 돌녀 보ᄂᆡ고 분호도 남은 거시 업스며 지어 관리의 관하 긔ᄒᆞᆫ 물건인즉 시가ᄂᆞᆫ 물론ᄒᆞ고 상고ㅣ 감히 닷토지 못ᄒᆞ며 만일 셰가 ᄌᆞ뎨가 물건을 가져 가거나 돈을 취ᄃᆡᄒᆞ면 영영 환보치 아니ᄒᆞ며 ᄯᅩ 감히 달나지도 못ᄒᆞ더라 이ᄯᅢ {{du|항가리}} 종락 즁 {{du|마가}}라 ᄒᆞᄂᆞᆫ 지파ㅣ 잇셔 {{du|항가리}} ᄯᅡ 졀반을 웅거ᄒᆞᄆᆡ 항상 ᄌᆞ주ᄒᆞᆯ 마음이 잇더니 밋 {{du|법국}}이 민쥬국 됨을 듯고 흠선불이ᄒᆞ야 먼져 긔ᄉᆞᄒᆞ니 {{du|구쥬}} ᄉᆞᄅᆞᆷ 방관ᄒᆞᄂᆞᆫ 자ㅣ 다 말ᄒᆞ되 {{du|항가리}} ᄉᆞᄅᆞᆷ이 도탄 즁에 잇슨지 오ᄅᆡᆫ 지라 이졔 승시ᄒᆞ야 이러남이 올타 ᄒᆞ더라 {{du|오국}}이 졍히 ᄃᆡ란ᄒᆞᆯᄉᆡ 만일 {{du|항가리}}ᄅᆞᆯ 회복지 못ᄒᆞ면 {{du|오국}}은 장찻 나라이 되지 못ᄒᆞᆯ지라 {{du|항가리}}의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1di9a6krl6oglgzwavt5ky7ptxjkqiv 페이지:태셔신사 하.djvu/93 250 101564 392562 2025-06-25T15:05:03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거괴ᄂᆞᆫ {{u|가소}}ㅣ라<ref>코슈트 러요시(Lajos Kossuth)</ref> 긔ᄉᆞ지초에 그 무리ᄅᆞᆯ 효유왈 우리 ᄌᆞ립ᄒᆞ야 나라히 된 후에ᄂᆞᆫ 다 갈력동심ᄒᆞ야 일호도 ᄉᆞ심을 두지 말고 무론 귀쳔빈부ᄒᆞ고 ᄌᆞ긔 ᄌᆡ산을 다ᄒᆞ야 ᄂᆡ정을 다ᄉᆞ리고 외젹을 방어ᄒᆞ고 심력이 진ᄒᆞᆫ 후에 말니라 ᄒᆞ고 드ᄃᆡ여 {{du|오국}}을 반ᄒᆞ... 39256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거괴ᄂᆞᆫ {{u|가소}}ㅣ라<ref>코슈트 러요시(Lajos Kossuth)</ref> 긔ᄉᆞ지초에 그 무리ᄅᆞᆯ 효유왈 우리 ᄌᆞ립ᄒᆞ야 나라히 된 후에ᄂᆞᆫ 다 갈력동심ᄒᆞ야 일호도 ᄉᆞ심을 두지 말고 무론 귀쳔빈부ᄒᆞ고 ᄌᆞ긔 ᄌᆡ산을 다ᄒᆞ야 ᄂᆡ정을 다ᄉᆞ리고 외젹을 방어ᄒᆞ고 심력이 진ᄒᆞᆫ 후에 말니라 ᄒᆞ고 드ᄃᆡ여 {{du|오국}}을 반ᄒᆞᆫ지 수월이 되ᄆᆡ 규모와 법졔 졍졍졔졔ᄒᆞ거ᄂᆞᆯ 이웃에 잇ᄂᆞᆫ {{du|파란}}<ref>폴란드(Poland)</ref> {{du|법난셔}} {{du|의ᄃᆡ리}} 졔국에 부득지ᄒᆞᆫ ᄉᆞᄅᆞᆷ이 다 {{du|항가리}}에 가셔 일비지력을 돕고ᄌᆞ ᄒᆞ며 {{du|항가리}}에 군ᄉᆞᄅᆞᆯ 총독ᄒᆞᆫ ᄌᆞᄂᆞᆫ {{u|철이치}}라<ref>게오르기(Georgey)</ref> 군무에 련슉ᄒᆞ고 ᄉᆞ리에 통달ᄒᆞ며 부하에 졍병 십이만이 잇고 {{u|가소}}ㅣ ᄯᅩ 용비 부족ᄒᆞᆯ가 염녀ᄒᆞ야 지폐ᄅᆞᆯ 졔조ᄒᆞ야 국용을 지발ᄒᆞ더라 {{du|오국}}이 {{du|항가리}} 반ᄒᆞᆷ을 보고 이에 {{du|아라ᄉᆞ}}에 구원을 쳥ᄒᆞ니 {{du|아}}황 {{u|니고랄사}}ㅣ<ref>니콜라스(Nicholas)</ref> 원ᄅᆡ ᄇᆡᆨ셩이 ᄌᆞ주ᄒᆞᆷ을 믜워ᄒᆞ고 ᄯᅩ 본국이 그 풍습을 본바들가 염녀ᄒᆞ야 일쳔팔ᄇᆡᆨᄉᆞ십구년 【헌종 십오년】 오월 팔일에 군ᄉᆞ 십오만을 발ᄒᆞ야 {{du|오국}}을 도읍더라 {{du|오아}} 냥국은 원ᄅᆡ 대국이라 {{du|항가리}} 엇지 져당ᄒᆞ리요 두어 례ᄇᆡᄅᆞᆯ ᄊᆞ호다가 필경 과불적즁ᄒᆞ야 ᄉᆞ졸이 졈졈 이산ᄒᆞ거ᄂᆞᆯ {{u|가소}}ㅣ 셩ᄉᆞ치 못ᄒᆞᆯ 쥴 알고 일조에 군무졔ᄉᆞᄅᆞᆯ {{u|쳘이치}}의게 젼장ᄒᆞ고 고비원쥬ᄒᆞ야 부지거처라 {{u|쳘이치}} ᄒᆞᆯ일업셔 {{du|아라사}}에 항복ᄒᆞ니 이ᄂᆞᆫ 일쳔ᄇᆡᆨᄉᆞ십구년 【헌종 십오년】 팔월 십이일이라 {{du|항가리}} 이믜 ᄑᆡᄒᆞᄆᆡ 다시 {{du|오지리아}}의 노복이 되거ᄂᆞᆯ {{du|오국}} 총병이 {{du|항가리}}의 ᄉᆞ로잡은 바 모든 무변을 일일히 다 쥭이니 ᄎᆞᆷ혹ᄒᆞ도다 {{du|오국}}의 포학무도ᄒᆞᆷ을 엇지 말ᄒᆞ리요 ::뎨ᄉᆞᆷ졀 국톄ᄅᆞᆯ 졍돈ᄒᆞᆷ이라 션시에 {{du|오국}} 신황 {{u|번셔 약슬 뎨일}}이 {{du|항가리}} 반ᄒᆞᆷ을 보고 겁ᄂᆡ여 일쳔팔ᄇᆡᆨᄉᆞ십팔년 【헌종 십사년】 십이월 오일에 칙셔ᄅᆞᆯ 나려 왈 ᄌᆞ금 이후ᄂᆞᆫ 국즁 ᄉᆞ무ᄅᆞᆯ 너의 ᄇᆡᆨ셩이 주장케 ᄒᆞ고 너의 긔모이ᄎᆡᆨ을 드리ᄂᆞᆫ 자ㅣ 잇스면 짐이 다 일일 쳥종ᄒᆞᆯ 거시오 다 ᄌᆞ주지권이 잇게 ᄒᆞ리라 ᄒᆞ고 ᄉᆞᆷ월 칠일에 신졔ᄅᆞᆯ 반ᄒᆡᆼᄒᆞ야 다시 의원을 셰우고 의원 즁 졔의원은 인민이 공쳔ᄒᆞ야 가가호호이 다 거관ᄒᆞᄂᆞᆫ 권이 잇고 신문ᄉᆞᄅᆞᆯ 허ᄒᆞ야 국ᄉᆞᄅᆞᆯ 의론ᄒᆞ게 ᄒᆞ고 학교 경비ᄂᆞᆫ 국가ㅣ 발급ᄒᆞ야 ᄉᆞᄅᆞᆷ마다 독셔케 ᄒᆞ며 각 교회도 일톄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7bfnqbc6v1a4we2xjq8yu5t54dpl2j9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38 250 101565 392575 2025-06-26T02:03:10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慮려ᄒᆞ얏ᄂᆞᆫ故로妾쳡의生覺ᄉᆡᆼ각에ᄂᆞᆫ公子공ᄌᆞᄭᅴ告고치아니ᄒᆞ고한갓金石금셕갓흔ᄯᅳᆺ을굿게ᄒᆞ고져ᄒᆞᆷ이러니엇지凶計흉계가蘆林로림에셔더甚심ᄒᆞᆫ거시업슬쥴ᄯᅳᆺᄒᆞ얏스리잇고公子공ᄌᆞᄭᅴ告고치아니ᄒᆞᆷ은妾쳡의罪죄큰지라萬番만번쥭으ᄂᆞ엇지贖속ᄒᆞ리잇고然연이나往事왕ᄉᆞ를追悔츄회ᄒᆞ... 39257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慮려ᄒᆞ얏ᄂᆞᆫ故로妾쳡의生覺ᄉᆡᆼ각에ᄂᆞᆫ公子공ᄌᆞᄭᅴ告고치아니ᄒᆞ고한갓金石금셕갓흔ᄯᅳᆺ을굿게ᄒᆞ고져ᄒᆞᆷ이러니엇지凶計흉계가蘆林로림에셔더甚심ᄒᆞᆫ거시업슬쥴ᄯᅳᆺᄒᆞ얏스리잇고公子공ᄌᆞᄭᅴ告고치아니ᄒᆞᆷ은妾쳡의罪죄큰지라萬番만번쥭으ᄂᆞ엇지贖속ᄒᆞ리잇고然연이나往事왕ᄉᆞ를追悔츄회ᄒᆞ야무엇ᄒᆞ리잇가반다시奇異긔이ᄒᆞᆫ計較계교를베푸러압길을열게ᄒᆞ리이라ᄒᆞ고金銀금은을ᄂᆡ여公子공ᄌᆞ를쥬며計較계교를가르쳐曰왈如此如此여ᄎᆞ여ᄎᆞᄒᆞ쇼셔ᄒᆞ고다시王生왕ᄉᆡᆼ을香卓下향탁하에隱伏은복ᄒᆞ게ᄒᆞᆫ後후그從者종자를불너드려參拜참ᄇᆡ케ᄒᆞ고因인ᄒᆞ야轎子교ᄌᆞ에올나집으로도라가니라王生왕ᄉᆡᆼ이玉檀옥단을번ᄀᆡ갓치만나心曲심곡에ᄆᆡᆺ친說話셜화를다못ᄒᆞ고구름흣듯離別리별ᄒᆞ니그心懷심회가엇ᄯᅥ타形言형언ᄒᆞ리오悲切비졀ᄒᆞᆷ과喜悅희열ᄒᆞᆷ이交集교집ᄒᆞ나十分寬抑십분관억ᄒᆞᄂᆞᆫ中즁玉檀옥단의自己ᄌᆞ긔를爲위ᄒᆞ야盡心진심토록ᄒᆞᆷ을보니芦林로림에厄ᄋᆡᆨ을當당케ᄒᆞᆷ이娼母창모의所爲소위오玉檀옥단의同謀동모ᄒᆞᆷ이아닌쥴알ᄆᆡ前日전일玉檀옥단을怨望원망ᄒᆞ던일이後悔莫及후회막급이라雖然슈연이라困厄곤ᄋᆡᆨ이莫甚막심ᄒᆞ야進退진퇴를自由ᄌᆞ유치못ᄒᆞ다가玉檀옥단의計較계교가르침을드르니籠롱에드럿든ᄉᆡ가靑天쳥텬으로나라가고陷穽함졍에ᄲᅡ졋든범이山中산즁으로다라남갓흐니千里遠山쳔리원산에疑慮의려ᄒᆞ시ᄂᆞᆫ雙親쌍친의心懷심회를足족히慰勞위로ᄒᆞᆯ거시오手中슈즁에金銀금은이잇스{{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b4xyrpo78m63lt36s5bqiuz78slhvgx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39 250 101566 392576 2025-06-26T02:21:12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니갈ᄒᆞᆫ龍룡이물을어듬갓흐니ᄯᅩᄒᆞᆫ足죡히娼母창모에怨讎원슈를갑흘지라玉檀옥단에말을좃지아니코난일이瓦觧와ᄒᆡ가될듯ᄒᆞᆫ지라卽時鄰邑즉시린읍져자에나아가金銀금은을換買환ᄆᆡᄒᆞ야緋緞衣服비단의복을사셔입으며駿馬쥰마를사셔타고ᄯᅩ비힌皮籠二百介피롱이ᄇᆡᆨᄀᆡ를사가지고隱辟은벽ᄒᆞᆫ客店ᄀᆡᆨ졈을갈히... 39257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니갈ᄒᆞᆫ龍룡이물을어듬갓흐니ᄯᅩᄒᆞᆫ足죡히娼母창모에怨讎원슈를갑흘지라玉檀옥단에말을좃지아니코난일이瓦觧와ᄒᆡ가될듯ᄒᆞᆫ지라卽時鄰邑즉시린읍져자에나아가金銀금은을換買환ᄆᆡᄒᆞ야緋緞衣服비단의복을사셔입으며駿馬쥰마를사셔타고ᄯᅩ비힌皮籠二百介피롱이ᄇᆡᆨᄀᆡ를사가지고隱辟은벽ᄒᆞᆫ客店ᄀᆡᆨ졈을갈히여멈을ᄉᆡ그皮籠피롱에다가돌과기와조각을너흔後후잠을쇠로잠아金銀寶貨금은보화를너은것갓치ᄒᆞ고말百匹ᄇᆡᆨ필을셰어더실이여먼져行ᄒᆡᆼᄒᆞ게ᄒᆞ고王生왕ᄉᆡᆼ은뒤를ᄯᅡ라行ᄒᆡᆼᄒᆞ야徐州地境셔쥬지경에일으러ᄂᆞᆫ玉檀옥단의집을向향ᄒᆞ야가되南남으로붓터北북으로向ᄒᆡᆼᄒᆞ야京師경ᄉᆞ로가ᄂᆞᆫ것갓치ᄒᆞᆯᄉᆡ玉檀옥단의집에다다르니洞里동리ᄉᆞᄅᆞᆷ들이王生왕ᄉᆡᆼ에이와갓치ᄒᆞ야도라옴을보고驚恠경괴ᄒᆞᆷ을마지아니며길이메여예ᄒᆞ며曰왈公子공ᄌᆞ가한번가시ᄆᆡ影響영향이頓無돈무ᄒᆞ시더니오ᄂᆞᆯ날어느곳으로조ᄎᆞ오시오며이럿틋ᄒᆞᆫ財産ᄌᆡ산을어드시니잇고王生왕ᄉᆡᆼ이笑曰쇼왈公等공등이李白리ᄇᆡᆨ의詩시를듯지못ᄒᆞ얏ᄂᆞ뇨ᄒᆞᄂᆞᆯ이나의才操ᄌᆡ됴를ᄂᆞ시ᄆᆡ반다시쓸곳이잇고千金쳔금을흣텃다ᄒᆞᄆᆡ다시도라온다ᄒᆞ얏ᄂᆞᆫ지라이졔婚姻혼인을京師경ᄉᆞ에定뎡ᄒᆞ얏ᄂᆞᆫ고로浙江졀강으로셔오ᄂᆞᆫ길이로라ᄒᆞᆫᄃᆡ衆人즁인이이말을듯고져마다稱歎칭탄ᄒᆞ며娼母창모의집奴僕노복이닷토와가며바라보다가집으로드러{{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c7kief01wc4azmscuh3rrekg6zwxyzx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0 250 101567 392577 2025-06-26T02:37:18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가王公子왕공ᄌᆞ에도라옴을告고ᄒᆞᆫᄃᆡ옥단이이말을듯고佯驚曰양경왈슯흐다王公子왕공ᄌᆞ가쥭지아니ᄒᆞ얏거ᄂᆞᆯ엇지罷盟파ᄆᆡᆼᄒᆞ고두번媤싀집가리오ᄒᆞ고드ᄃᆡ여北樓북루에도라와목을ᄆᆡ려ᄒᆞ거ᄂᆞᆯ侍婢시비가이舉動거동을보고大驚ᄃᆡ경ᄒᆞ야急급히娼母창모를불너救援구원ᄒᆞ니라王公子玉檀왕공ᄌᆡ옥단의집... 39257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가王公子왕공ᄌᆞ에도라옴을告고ᄒᆞᆫᄃᆡ옥단이이말을듯고佯驚曰양경왈슯흐다王公子왕공ᄌᆞ가쥭지아니ᄒᆞ얏거ᄂᆞᆯ엇지罷盟파ᄆᆡᆼᄒᆞ고두번媤싀집가리오ᄒᆞ고드ᄃᆡ여北樓북루에도라와목을ᄆᆡ려ᄒᆞ거ᄂᆞᆯ侍婢시비가이舉動거동을보고大驚ᄃᆡ경ᄒᆞ야急급히娼母창모를불너救援구원ᄒᆞ니라王公子玉檀왕공ᄌᆡ옥단의집을지나되드려다보지안코가거ᄂᆞᆯ娼母창모와朝雲조운이王生왕ᄉᆡᆼ의裘馬구마와財寶ᄌᆡ보의盛셩ᄒᆞᆷ을보고가만히議論曰의론왈玉檀옥단이王生왈ᄉᆡᆼ에쥭지아니ᄒᆞᆷ을알고罷盟파ᄆᆡᆼᄒᆞᆷ을恨한ᄒᆞ야自決ᄌᆞ결코져ᄒᆞ얏스니自此以後ᄌᆞᄎᆞ이후로ᄂᆞᆫ반다시接客졉ᄀᆡᆨ지아니ᄒᆞᆯ거시라이졔이財物ᄌᆡ물을보고ᄲᆡ앗지못ᄒᆞᆫ즉다시엇지못ᄒᆞᆯ거시니温言順辞온언슌ᄉᆞ로됴히解喩ᄒᆡ유ᄒᆞᆫ則즉뎌도無心ᄒᆞᆯ거시오王生왕ᄉᆡᆼ도반다시玉檀옥단을잇지못ᄒᆞ야다시올이니機會긔회를타셔그財物ᄌᆡ물을아슨이만갓지못ᄒᆞ다ᄒᆞ고드ᄃᆡ여길가에나아가王生왕ᄉᆡᆼ에탄말을붓잡고말ᄒᆞ야갈오ᄃᆡ公子公子공ᄌᆞ공ᄌᆞ여엇지無情무졍ᄒᆞᆷ이이갓흐뇨芦林로림에셔한번離散리산ᄒᆞᆫ後후로公子공ᄌᆞ의居處거쳐를알지못ᄒᆞ와晝夜주야로도라오시기만바라되맛참ᄂᆡ音信음신이懸隔현격ᄒᆞᆫ故고로왼집안老少로쇼가號哭호곡으로날을보ᄂᆡ다가오날날意外의외에公子공ᄌᆞ를뵈왓거ᄂᆞᆯ엇지過門不入과문불입ᄒᆞ시ᄂᆞ니잇가참無情무졍ᄒᆞ도소이다ᄒᆞ거ᄂᆞᆯ王生왕ᄉᆡᆼ이말을멈츄고對答대답ᄒᆞ야가로{{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toz99wl4b1bc7ec08fzjd81wsc2l9qn 페이지:詩經諺解 제4책.djvu/30 250 101568 392578 2025-06-26T02:49:34Z Lawhunt 1731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big>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于{{더더작게|우}}飛{{더더작게|비}}{{분주|ᄒᆞ|니}}集{{더더작게|집}}于{{더더작게|우}}中{{더더작게|즁}}澤{{더더작게|ᄐᆡᆨ}}{{분주|이로|다}}之{{더더작게|지}}子{{더더작게|ᄌᆞ}}于{{더더작게|우}}垣{{더더작게|원}}{{분주|ᄒᆞ|니}}百{{더더작게|ᄇᆡᆨ}}堵{{더더작게|도}}皆{{더더작게|ᄀᆡ}}作{{더더작게|작}}{... 39257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big>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于{{더더작게|우}}飛{{더더작게|비}}{{분주|ᄒᆞ|니}}集{{더더작게|집}}于{{더더작게|우}}中{{더더작게|즁}}澤{{더더작게|ᄐᆡᆨ}}{{분주|이로|다}}之{{더더작게|지}}子{{더더작게|ᄌᆞ}}于{{더더작게|우}}垣{{더더작게|원}}{{분주|ᄒᆞ|니}}百{{더더작게|ᄇᆡᆨ}}堵{{더더작게|도}}皆{{더더작게|ᄀᆡ}}作{{더더작게|작}}{{분주|이로|다}}雖{{더더작게|슈}}則{{더더작게|즉}}劬{{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분주|ᅵ|나}}基{{더더작게|ᄀ}}究{{더더작게|구}}安{{더더작게|안}}宅{{더더작게|ᄐᆡᆨ}}{{분주|이로|다}}<br>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이飛{{더더작게|비}}ᄒᆞ니中{{더더작게|즁}}宅{{더더작게|ᄐᆡᆨ}}애集{{더더작게|집}}ᄒᆞ놋다之{{더더작게|지}}子{{더더작게|ᄌᆞ}}ᅵ垣{{더더작게|원}}ᄒᆞ니百{{더더작게|ᄇᆡᆨ}}堵{{더더작게|도}}ᄅᆞᆯ다作{{더더작게|작}}ᄒᆞ놋다비록劬{{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ᄒᆞ나그내죵의安{{더더작게|안}}宅{{더더작게|ᄐᆡᆨ}}ᄒᆞ리로다<br>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于{{더더작게|우}}飛{{더더작게|비}}{{분주|ᄒᆞ|니}}哀{{더더작게|ᄋᆡ}}鳴{{더더작게|명}}嗷{{더더작게|오}}嗷{{더더작게|오}}{{분주|ᅵ로|다}}維{{더더작게|유}}此{{더더작게|ᄎᆞ}}哲{{더더작게|쳘}}人{{더더작게|인}}{{분주|인|}}謂{{더더작게|위}}我{{더더작게|아}}劬 </big>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msgo8p3s0xmpzj127ss109wxugrfry4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1 250 101569 392579 2025-06-26T02:52:45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ᄃᆡ이무ᄉᆞᆷ말이뇨ᄂᆡ쳐음으로玉檀옥단에迷惑미혹ᄒᆞ야財物ᄌᆡ물이盡진ᄒᆞᆷ으로故鄕고향에도라가지못ᄒᆞ고잇슴이러니그ᄃᆡ等등이計較계교로써ᄂᆞ를속여芦林로림에가리고가셔쥭여結果결과코ᄌᆞᄒᆞᆷ을皇天황텬이구버살피ᄉᆞ無道무도ᄒᆞᆫ强盜강도을만ᄂᆞ쓰ᄂᆞ多幸다ᄒᆡᆼ히쥭지안니ᄒᆞ고故鄕고향에도라가家産가... 39257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ᄃᆡ이무ᄉᆞᆷ말이뇨ᄂᆡ쳐음으로玉檀옥단에迷惑미혹ᄒᆞ야財物ᄌᆡ물이盡진ᄒᆞᆷ으로故鄕고향에도라가지못ᄒᆞ고잇슴이러니그ᄃᆡ等등이計較계교로써ᄂᆞ를속여芦林로림에가리고가셔쥭여結果결과코ᄌᆞᄒᆞᆷ을皇天황텬이구버살피ᄉᆞ無道무도ᄒᆞᆫ强盜강도을만ᄂᆞ쓰ᄂᆞ多幸다ᄒᆡᆼ히쥭지안니ᄒᆞ고故鄕고향에도라가家産가산을잘다ᄉᆞ려오날ᄂᆞᆯ기우러진財産ᄌᆡ산을補充보츙ᄒᆞ고어진配匹ᄇᆡ필을定뎡ᄒᆞ얏ᄂᆞᆫ고로京師경ᄉᆞ로向향ᄒᆞᄂᆞᆫ터이러니이졔길이이곳을지ᄂᆡᄂᆞᆫ지라不得已行부득이ᄒᆡᆼᄒᆞ거니와그ᄃᆡ무ᄉᆞᆷ面目면목이라ᄯᅩ나의가ᄂᆞᆫ길을막고妖恠요괴로온말로ᄭᅬ이ᄂᆞᆫ다그러ᄂᆞ前事젼ᄉᆞ을生覺ᄉᆡᆼ각ᄒᆞᄆᆡ刻骨痛忿각골통분ᄒᆞ야何日何時하일하시던지期於긔어코나의忿恨분한을풀고ᄌᆞᄒᆞ얏스ᄂᆞ古語고어에이른바君子군ᄌᆞᄂᆞᆫ宿怨슉원을介意ᄀᆡ의치안ᄂᆞᆫ다ᄒᆞ얏기로이졔아모말도안이ᄒᆞ고가거니와日後일후ᄂᆞᆫ부ᄃᆡ改過ᄀᆡ과ᄒᆞ야그런慘毒참독ᄒᆞᆫ惡心악심을먹어다른ᄉᆞᄅᆞᆷ을害ᄒᆡᄒᆞᆯᄯᅳᆺ을두지말ᄂᆞᄉᆞᄅᆞᆷ이ᄒᆞᆫ번마음을그릇먹으면하ᄂᆞᆯ이無心치안이ᄒᆞᄉᆞ生前死後ᄉᆡᆼ젼ᄉᆞ후에그罰벌이젹지안일지라넷말에일너쓰되天作孼쳔작얼은猶可違유가위어니와自作孼ᄌᆞ작얼은不可活불가활이라ᄒᆞ얏ᄂᆞ니戒之愼之계지신지ᄒᆞ야後悔후회ᄒᆞᆷ이업게ᄒᆞ라ᄒᆞ니娼母창뫼이말을듯고얼골을더욱和화히ᄒᆞ며ᄀᆞᆯ오ᄃᆡ公子공ᄌᆞ에勸告권고ᄒᆞ시ᄂᆞᆫ말ᄉᆞᆷ을드르ᄆᆡ雲霧운무을혜치고靑天쳥쳔{{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9fanpu1zhp6zgt70ojicy06i2pefkp6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2 250 101570 392580 2025-06-26T03:08:01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을본듯ᄒᆞᄂᆞ向日之事향일지ᄉᆞᄂᆞᆫ老身로신이實실노公子공ᄌᆡ를ᄒᆡᄒᆞ고ᄌᆞᄒᆞᆷ이안니라果然과연芦林로림에이르러셔야비로소房門방문을잠으지못ᄒᆞᆷ을ᄭᆡ닷고公子공ᄌᆞ를請쳥ᄒᆞ야ᄒᆞᆫ번行ᄒᆡᆼᄒᆞᆷ을受苦슈고케ᄒᆞ미러니日暮일모ᄒᆞ도록기다리ᄂᆞ終無消息종무소식이라마지못ᄒᆞ야그近處酒店근쳐쥬졈에... 39258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을본듯ᄒᆞᄂᆞ向日之事향일지ᄉᆞᄂᆞᆫ老身로신이實실노公子공ᄌᆡ를ᄒᆡᄒᆞ고ᄌᆞᄒᆞᆷ이안니라果然과연芦林로림에이르러셔야비로소房門방문을잠으지못ᄒᆞᆷ을ᄭᆡ닷고公子공ᄌᆞ를請쳥ᄒᆞ야ᄒᆞᆫ번行ᄒᆡᆼᄒᆞᆷ을受苦슈고케ᄒᆞ미러니日暮일모ᄒᆞ도록기다리ᄂᆞ終無消息종무소식이라마지못ᄒᆞ야그近處酒店근쳐쥬졈에셔一夜일야를寄宿긔슉ᄒᆞ고公子공ᄌᆞ에오시기를苦待고ᄃᆡᄒᆞ얏스ᄂᆞ그ᄂᆞᆯ마참ᄂᆡ만ᄂᆞ지못ᄒᆞᆫ지라엇지公子공ᄌᆡ그밤에오시다가그런無知무지ᄒᆞᆫ强盜강도에게困厄곤ᄋᆡᆨ을當당ᄒᆞ실줄生覺ᄉᆡᆼ각이ᄂᆞᄒᆞ얏스리오기다리다못ᄒᆞ야西關셔관ᄭᅡ지가셔ᄉᆞᄅᆞᆷ으로ᄒᆞ야금本家본집에보ᄂᆡ여探知탐지ᄒᆞᆫ즉그ᄂᆞᆯ밤에단여곳가시더라傳젼ᄒᆞᄆᆡ반다시芦林近處로림근쳐에셔우리을찻노라彷徨방황ᄒᆞ시는가ᄒᆞ야四面搜探ᄉᆞ면슈탐ᄒᆞᄂᆞ踪跡종젹을알슈업셔數朔슈삭을그곳에셔머므다가慘然참연히집에도라와본則즉家産가산이蕩盡無餘탕진무여ᄒᆞᆫ지라隣里인리ᄉᆞᄅᆞᆷ다려무러본則즉직히든奴僕노복에所爲소위라그러나財物ᄌᆡ물일흔것은오히려恨한헐바이업스ᄂᆞ오즉公子공ᄌᆞ에存沒죤몰을아지못ᄒᆞ야晝夜쥬야근심中즁이러니多幸다ᄒᆡᆼ히公子공ᄌᆞ을오날날맛ᄂᆞᄆᆡ깃붐이測量측량업도소이다그러ᄂᆞ기시老身로신에잘못ᄒᆞᆷ은辨白변ᄇᆡᆨᄒᆞ기어렵ᄉᆞ오며玉檀옥단은公子공ᄌᆡᄒᆞᆫ번ᄯᅥᄂᆞ신後후로쥭기로써節졀을직히고晝夜北樓쥬야북루에셔부르지져울며樓루에ᄂᆞ리지안이ᄒᆞᆫ지{{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67komxwdv8qzebxc6vr6075na3wgruj 페이지:詩經諺解 제4책.djvu/31 250 101571 392581 2025-06-26T03:15:00Z Lawhunt 1731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big> {{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분주|ᅵ어|ᄂᆞᆯ}}維{{더더작게|유}}彼{{더더작게|피}}愚{{더더작게|우}}人{{더더작게|인}}{{분주|은|}}謂{{더더작게|위}}我{{더더작게|아}}宣{{더더작게|션}}驕{{더더작게|교}}{{분주|ᅵ라ᄒᆞ|ᄂᆞ다}}<br>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이飛{{더더작게|비}}ᄒᆞ니哀{{더더작게|ᄋᆡ}}히鳴{{더더작게|명}}홈을嗷{{... 39258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big> {{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분주|ᅵ어|ᄂᆞᆯ}}維{{더더작게|유}}彼{{더더작게|피}}愚{{더더작게|우}}人{{더더작게|인}}{{분주|은|}}謂{{더더작게|위}}我{{더더작게|아}}宣{{더더작게|션}}驕{{더더작게|교}}{{분주|ᅵ라ᄒᆞ|ᄂᆞ다}}<br>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이飛{{더더작게|비}}ᄒᆞ니哀{{더더작게|ᄋᆡ}}히鳴{{더더작게|명}}홈을嗷{{더더작게|오}}嗷{{더더작게|오}}히ᄒᆞ놋다이哲{{더더작게|쳘}}ᄒᆞᆫ사ᄅᆞᆷ은날을닐오ᄃᆡ劬{{더더작게|구}}勞{{더더작게|로}}ᄒᆞᆫ다ᄒᆞ거ᄂᆞᆯ뎌愚{{더더작게|우}}ᄒᆞᆫ사ᄅᆞᆷ은날을닐오ᄃᆡ驕{{더더작게|교}}ᄅᆞᆯ宣{{더더작게|션}}ᄒᆞᆫ다ᄒᆞᄂᆞ다<br> ::鴻{{더더작게|홍}}鴈{{더더작게|안}}三{{더더작게|삼}}章{{더더작게|쟝}}<br> 夜{{더더작게|야}}如{{더더작게|여}}何{{더더작게|하}}基{{더더작게|긔}}{{분주|오|}}夜{{더더작게|야}}未{{더더작게|미}}央{{더더작게|앙}}{{분주|이|나}}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之{{더더작게|지}}光{{더더작게|광}}{{분주|이로|다}}君{{더더작게|군}}子{{더더작게|ᄌᆞ}}至{{더더작게|지}}止{{더더작게|지}} </big>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m50a6vvxhlk63tpunmc40t00l1ht8gu 페이지:詩經諺解 제4책.djvu/32 250 101572 392582 2025-06-26T04:20:11Z Lawhunt 1731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big> {{분주|ᄒᆞ|니}}鸞{{더더작게|란}}聲{{더더작게|셩}}將{{더더작게|쟝}}將{{더더작게|}}{{분주|이로|다}}<br> :夜{{더더작게|야}}ᅵ엇더뇨夜{{더더작게|야}}ᅵ央{{더더작게|앙}}이몯ᄒᆞ여시나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ᅵ光{{더더작게|광}}ᄒᆞ도다君{{더더작게|군}}子{{더더작게|ᄌᆞ}}ᅵ至{{더더작게|}}ᄒᆞ니鸞{{더더작게|란}}ᄉ聲{{더더작게|... 39258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big> {{분주|ᄒᆞ|니}}鸞{{더더작게|란}}聲{{더더작게|셩}}將{{더더작게|쟝}}將{{더더작게|}}{{분주|이로|다}}<br> :夜{{더더작게|야}}ᅵ엇더뇨夜{{더더작게|야}}ᅵ央{{더더작게|앙}}이몯ᄒᆞ여시나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ᅵ光{{더더작게|광}}ᄒᆞ도다君{{더더작게|군}}子{{더더작게|ᄌᆞ}}ᅵ至{{더더작게|}}ᄒᆞ니鸞{{더더작게|란}}ᄉ聲{{더더작게|셩}}이將{{더더작게|쟝}}將{{더더작게|쟝}}ᄒᆞ놋다<br> ○夜{{더더작게|야}}如{{더더작게|여}}何{{더더작게|하}}基{{더더작게|긔}}{{분주|오|}}夜{{더더작게|야}}未{{더더작게|미}}艾{{더더작게|애}}{{분주|나|}}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晣{{더더작게|제}}晣{{더더작게|제}}{{분주|로|다}}君{{더더작게|군}}子{{더더작게|ᄌᆞ}}至{{더더작게|지}}止{{더더작게|지}}{{분주|ᄒᆞ|니}}鸞{{더더작게|란}}聲{{더더작게|셩}}噦{{더더작게|홰}}噦{{더더작게|홰}}{{분주|로|다}}<br> :夜{{더더작게|야}}이엇더뇨夜{{더더작게|야}}ᅵ艾{{더더작게|애}}티몯ᄒᆞ여시나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ᅵ晣{{더더작게|제}}晣{{더더작게|제}}ᄒᆞ도다君{{더더작게|군}}子 </big>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0in84p8caq286bzlnf6h67gby735cw8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3 250 101573 392583 2025-06-26T04:41:11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임의両年량년이라万若만약公子未信공ᄌᆡ미신ᄒᆞ시거든隣里ᄉᆞᄅᆞᆷ다려무르시면ᄯᅩᄒᆞᆫ가히懲驗징험ᄒᆞ실것이라엇지無據무거ᄒᆞᆫ말노써老身로신을責ᄎᆡᆨᄒᆞ시ᄂᆞ뇨万一玉檀만일옥단으로더부러恩情은졍이已盡이진ᄒᆞ얏스면다시말ᄒᆞᆯ바이업거니와그러치안일진ᄃᆡ엇지薄情박졍ᄒᆞᆫ말노써晝夜苦待쥬야고ᄃᆡᄒᆞ... 392583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임의両年량년이라万若만약公子未信공ᄌᆡ미신ᄒᆞ시거든隣里ᄉᆞᄅᆞᆷ다려무르시면ᄯᅩᄒᆞᆫ가히懲驗징험ᄒᆞ실것이라엇지無據무거ᄒᆞᆫ말노써老身로신을責ᄎᆡᆨᄒᆞ시ᄂᆞ뇨万一玉檀만일옥단으로더부러恩情은졍이已盡이진ᄒᆞ얏스면다시말ᄒᆞᆯ바이업거니와그러치안일진ᄃᆡ엇지薄情박졍ᄒᆞᆫ말노써晝夜苦待쥬야고ᄃᆡᄒᆞᄂᆞᆫ玉檀옥단에게더으시ᄂᆞ잇가王生왕ᄉᆡᆼ이거즛놀ᄂᆞ曰왈晩生만ᄉᆡᆼ은于今生覺우금ᄉᆡᆼ각ᄒᆞ기를그ᄃᆡ와玉檀옥단과ᄒᆞᆫ가지ᄭᅬᄒᆞ야ᄂᆞ를害ᄒᆡᄒᆞ려ᄒᆞᆷ인줄아랏더니그ᄃᆡ에말과갓홀진ᄃᆡ도로혀ᄂᆡ가知識지식이淺薄쳔박ᄒᆞ야ᄉᆞᄅᆞᆷ에深淺심쳔과厚薄후박을혜아리지못ᄒᆞᆷ이라오날맛當당히玉檀옥단을暫間잠간보고그仔細ᄌᆞ셔ᄒᆞᆫ말을물어보와眞假진가를判斷판단ᄒᆞ리라ᄒᆞ고말을도로혀娼母창모의집에이르러廳上쳥상에올나座定좌뎡ᄒᆞᆫ後후玉檀옥단을부르니玉檀옥단이질겨ᄂᆞ오지안코娼母창모다려말ᄒᆞ야曰왈뉴가王公子왕공ᄌᆞ를請쳥ᄒᆞ야이르럿ᄂᆞ잇가至今지금에비록王公子强仍왕공ᄌᆡ강잉ᄒᆞ야ᄂᆡ집에이르럿스ᄂᆞ엇지前日芦林젼일로림에셔當ᄒᆞ든일을잇고예와갓치날도더부러질기리요ᄎᆞ라리보지안이ᄒᆞᆷ이올흘가ᄒᆞ나니이다娼母창뫼이말을듯고다시勸권ᄒᆞ야曰왈ᄂᆡ가임의조흔말노써辨明변명ᄒᆞᄆᆡ王公子왕공ᄌᆞ도마음을풀고집에이르럿스니엇지네가ᄂᆞ아가보지안이ᄒᆞ리요ᄒᆞ거ᄂᆞᆯ玉檀옥단이變色對曰변ᄉᆡᆨᄃᆡ왈王公子閣왕공ᄌᆡ각{{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awrw4xwfl38f8umx9dfnx3sedljb8zq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4 250 101574 392584 2025-06-26T04:52:32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老로에아달노셔그릇娼家창가에미혹ᄒᆞᆫ바이되야이곳에온지不過불과五六年오륙년에數萬金슈만금에巨財거ᄌᆡ을虛費허비ᄒᆞ얏거ᄂᆞᆯ우리등은그厚후ᄒᆞᆷ을生覺ᄉᆡᆼ각지안코도로혀死地ᄉᆞ디에너허쥭이고ᄌᆞᄒᆞ얏더니公子天幸공ᄌᆡ텬ᄒᆡᆼ으로死地ᄉᆞ디를버셔ᄂᆞ故鄕고향에도라가家産가산을整理졍리ᄒᆞ고財物ᄌᆡ몰을... 39258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老로에아달노셔그릇娼家창가에미혹ᄒᆞᆫ바이되야이곳에온지不過불과五六年오륙년에數萬金슈만금에巨財거ᄌᆡ을虛費허비ᄒᆞ얏거ᄂᆞᆯ우리등은그厚후ᄒᆞᆷ을生覺ᄉᆡᆼ각지안코도로혀死地ᄉᆞ디에너허쥭이고ᄌᆞᄒᆞ얏더니公子天幸공ᄌᆡ텬ᄒᆡᆼ으로死地ᄉᆞ디를버셔ᄂᆞ故鄕고향에도라가家産가산을整理졍리ᄒᆞ고財物ᄌᆡ몰을모화다시豪富호부ᄒᆞᆷ에이르ᄆᆡ前日젼일娼家창가에셔지ᄂᆡ든바와芦林로림의일을全然젼연히모르ᄂᆞᆫ톄ᄒᆞ고말을아니ᄒᆞ나ᄂᆡ무ᄉᆞᆷ낫으로相對상ᄃᆡᄒᆞ오릿가ᄒᆞ며듯지아니ᄒᆞ더니이ᄯᆡ王生왕ᄉᆡᆼ이오ᄅᆡ도록기다리되玉檀옥단이나와보지아니ᄒᆞᆷ을보고즘짓몸을이러가고져ᄒᆞ거ᄂᆞᆯ唱母창모가더욱錯急착급ᄒᆞ야玉檀옥단에게懇聽간쳥ᄒᆞ야曰왈王公子왕공ᄌᆡᄂᆡ말을듯고드러올ᄲᅮᆫ안여舊情구졍을ᄉᆡᆼ각고너를보고져ᄒᆞ야廳上쳥상에셔기다리더니너의動靜동졍이업슴을보고가고져ᄒᆞ니이ᄂᆞᆫ王生왕ᄉᆡᆼ이前嫌젼혐을풀고ᄌᆞᄒᆞ미어ᄂᆞᆯ무삼일을沮戱져희ᄋᆞ야나가보지아니ᄒᆞᄂᆞ냐玉檀曰옥단왈人非木石인비목셕이라ᄂᆡ가이런마음이잇거던젠들엇지含寃함원치아니ᄒᆞ리오母親모친이날도ᄒᆞ야금나아가보게ᄒᆞ실진ᄃᆡ한計較계교를베푸러公子공ᄌᆞ의마음을快悅괘열케ᄒᆞ여야ᄒᆞ리이다娼母曰창모왈무삼計較계교를엇더케行ᄒᆡᆼᄒᆞ여야ᄒᆞᆯ고玉檀옥단왈이計較계교베풀기가장容易용이ᄒᆞᆫ지라前日公子젼일공ᄌᆞ에虛費허비ᄒᆞᆫ바金銀금은과玩好之완ᄒᆞ지{{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i0tlgm5rqdjc17tlbsdbt7cf9vynr9v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5 250 101575 392585 2025-06-26T05:16:20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物물을公子공ᄌᆞ의압헤버려놋코큰잔ᄎᆡ를베푸러公子공ᄌᆞ에게謝罪ᄉᆞ죄ᄒᆞ야曰왈집안에財物ᄌᆡ물은前者젼자에다일엇ᄉᆞ오나오직公子공ᄌᆞ의쥬신바金銀은금과玩好之物완호지물은맛ᄎᆞᆷ玉檀단이北樓북루에감초앗ᄂᆞᆫ故고로남아잇ᄉᆞ오니이ᄂᆞᆫ公子공ᄌᆞ의福복이라敗家ᄑᆡ가ᄒᆞᆫ집에이物件물건을于今우금것賣用ᄆ... 39258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物물을公子공ᄌᆞ의압헤버려놋코큰잔ᄎᆡ를베푸러公子공ᄌᆞ에게謝罪ᄉᆞ죄ᄒᆞ야曰왈집안에財物ᄌᆡ물은前者젼자에다일엇ᄉᆞ오나오직公子공ᄌᆞ의쥬신바金銀은금과玩好之物완호지물은맛ᄎᆞᆷ玉檀단이北樓북루에감초앗ᄂᆞᆫ故고로남아잇ᄉᆞ오니이ᄂᆞᆫ公子공ᄌᆞ의福복이라敗家ᄑᆡ가ᄒᆞᆫ집에이物件물건을于今우금것賣用ᄆᆡ용치아니ᄒᆞᆷ은他日公子탄일공ᄌᆞ가오시기를기다림이니우리집에셔公子공ᄌᆞ를渴望갈망ᄒᆞᆷ이이가치至極지극ᄒᆞ옵거ᄂᆞᆯ公子공ᄌᆡ도도혀芦林로림의無情무졍ᄒᆞᆫ일로써疑心의심ᄒᆞ시ᄂᆞ잇가請쳥컨ᄃᆡ일노써謝罪사죄ᄒᆞ노라ᄒᆞᆫ즉졔가반다시그憾情감졍을풀고賂物뇌물을쥴지니그리ᄒᆞ온즉오ᄅᆡᆫ財物ᄌᆡ물노써ᄉᆡ財物ᄌᆡ물을락시질ᄒᆞᄂᆞᆫ됴흔밋기가되리이다娼母창뫼그말을을히녁여이에金銀금은과玩好之物완호지물을버려노흐며잔ᄎᆡ를크게베푼ᄃᆡ玉檀옥단이비로쇼나와公子공ᄌᆞ의게졀ᄒᆞ고오직등도라안지며敢감히仰視앙시치못ᄒᆞ거ᄂᆞᆯ王生왕ᄉᆡᆼ이玉檀옥단에이갓치ᄒᆞᆷ을보고그緣故연고를물은ᄃᆡ玉檀윽단이對曰ᄃᆡ왈公子공ᄌᆡ芦林로림의無情무졍ᄒᆞᆷ을아지못ᄒᆞ시고다만나의쇼긴바로만疑心의심ᄒᆞ시고過門不顧과문불고ᄒᆞ시니妾쳡이무삼面目면목으로公子공ᄌᆞ를對ᄃᆡᄒᆞ오릿가王生왕ᄉᆡᆼ이손을들어우셔曰왈져지음게厄ᄋᆡᆨ을만남은疑心의심ᄒᆞᆯ바이업거니와이졔主母쥬모의盛意셩의가甚심히至極지극ᄒᆞᆷ을보ᄆᆡ宿恨슉한이氷消빙쇼됨을ᄭᆡ닷지못ᄒᆞ리로다{{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2xhqej1c6bs6179ibpvick43pj66twh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6 250 101576 392586 2025-06-26T05:33:17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ᄒᆞ며玉檀옥단의花容화용을殷懃은근히ᄉᆞᆲ혀보니黑雲흑운갓ᄒᆞᆫ綠髮록발은귀밋헤婆娑파ᄉᆞᄒᆞ고白日ᄇᆡᆨ일갓ᄒᆞᆫ玉面옥면에脂粉지분을다ᄉᆞ리지아니ᄒᆞ얏ᄂᆞᆫᄃᆡ靑山蛾眉쳥산아미에愁雲슈운이어ᄅᆡ엿스며曉星雙眼효셩쌍안에水波슈파가顯形현형ᄒᆞ니一喜一悲일희일비ᄒᆞᄂᆞᆫ氣色긔ᄉᆡᆨ이瘦瘠슈쳑ᄒᆞᆫ態度... 39258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ᄒᆞ며玉檀옥단의花容화용을殷懃은근히ᄉᆞᆲ혀보니黑雲흑운갓ᄒᆞᆫ綠髮록발은귀밋헤婆娑파ᄉᆞᄒᆞ고白日ᄇᆡᆨ일갓ᄒᆞᆫ玉面옥면에脂粉지분을다ᄉᆞ리지아니ᄒᆞ얏ᄂᆞᆫᄃᆡ靑山蛾眉쳥산아미에愁雲슈운이어ᄅᆡ엿스며曉星雙眼효셩쌍안에水波슈파가顯形현형ᄒᆞ니一喜一悲일희일비ᄒᆞᄂᆞᆫ氣色긔ᄉᆡᆨ이瘦瘠슈쳑ᄒᆞᆫ態度ᄐᆡ도와셔로비치이ᄆᆡ愛戀ᄋᆡ련ᄒᆞᆫ마음과可憐가련ᄒᆞᆫ生覺ᄉᆡᆼ각을暫時잠시라도鎭定진뎡치못ᄒᆞ야玉手옥슈를잇글며무릅을連련ᄒᆞ야疊々쳡쳡ᄒᆞᆫ懷抱회포를펴고져ᄒᆞ나耳目이목이煩多번다ᄒᆞ야計較계교를이루지못ᄒᆞᆯ지라强仍강잉히抑制억졔ᄒᆞ고玉盃옥ᄇᆡ에香醞향은을부어娼母창모에게謝禮사례ᄒᆞ며ᄯᅩ朝雲죠운을對ᄃᆡᄒᆞ야懇切간졀히勸권ᄒᆞᆫᄃᆡ娼母창모와朝雲죠운이져의奸計간계에바짐을喜幸희ᄒᆡᆼᄒᆞ야한번도辭讓ᄉᆞ양치안코날이맛도록宴席연셕에參例참례ᄒᆞ야다가즐거이罷宴파연ᄒᆞ니라先時션시에玉檀옥단이侍婢시비로ᄒᆞ야금酒盃쥬ᄇᆡ를傳젼ᄒᆞ게ᄒᆞ되公子공ᄌᆞ의게드리ᄂᆞᆫ酒盃쥬ᄇᆡ에ᄂᆞᆫ冷水ᄅᆡᆼ슈를和合화합ᄒᆞ야나오게ᄒᆞᆯᄲᅮᆫ아니라王生왕ᄉᆡᆼ에酒量쥬랑이큰故고로醉취치아니ᄒᆞ얏고娼母창모와朝雲죠운은마음노코쥬ᄂᆞᆫᄃᆡ로마시엿스ᄆᆡ極극히醉ᄎᆔᄒᆞᆫ지라侍婢시비에게붓들녀寢所침쇼로가니라玉檀옥단이王生왕ᄉᆡᆼ으로더부러財寶ᄌᆡ보와玩好之物완호지물을거두어가지고北樓북루로도라오니生離死別ᄉᆡᆼ리ᄉᆞ별에슯흔懷抱회포가疊々쳡쳡ᄒᆞ야蒼天창텬만바라고唏噓長歎희허장탄으로歲月셰월을보ᄂᆡ다가天佑神助텬우신됴ᄒᆞ야黃泉客황쳔ᄀᆡᆨ을免면ᄒᆞ고산낫으{{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t9c0qhg3w82jgx6comib1ncctuggt1v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7 250 101577 392587 2025-06-26T05:56:17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로도라와指向지향치못ᄒᆞ든懷抱회포를慰勞위로ᄒᆞ니그반갑고깃분마음이엇더ᄒᆞ리요娼母창모의凶計흉계에ᄲᅡ져목슘을保全보젼치못ᄒᆞᆯ번ᄒᆞ다가겨오殘命잔명을保全보젼ᄒᆞ얏스나依支의지ᄒᆞᆯ곳이바히업셔流離丐乞류리ᄀᆡ걸노날을보ᄂᆡᄂᆞᆫ中즁暫時不忘잠시불망ᄒᆞ든佳人가인을致疑치의ᄒᆞ다가魚■어안에有情유졍ᄒ... 39258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로도라와指向지향치못ᄒᆞ든懷抱회포를慰勞위로ᄒᆞ니그반갑고깃분마음이엇더ᄒᆞ리요娼母창모의凶計흉계에ᄲᅡ져목슘을保全보젼치못ᄒᆞᆯ번ᄒᆞ다가겨오殘命잔명을保全보젼ᄒᆞ얏스나依支의지ᄒᆞᆯ곳이바히업셔流離丐乞류리ᄀᆡ걸노날을보ᄂᆡᄂᆞᆫ中즁暫時不忘잠시불망ᄒᆞ든佳人가인을致疑치의ᄒᆞ다가魚■어안에有情유졍ᄒᆞᆷ으로嫌疑험의를구름갓치헷쳐바리고녯樓루에도라와玉顔옥안을相對상ᄃᆡᄒᆞ니闊達활달ᄒᆞᆫ大丈夫ᄃᆡ장부에志慨지ᄀᆡᆫ들感淚감누을엇지禁抑금억ᄒᆞ리오兩情량졍이依依의의ᄒᆞᄆᆡ春日츈일이비록길드ᄅᆡ도이懷抱회포를盡述진슐키어렵거든험을며졀은春宵츈쇼리오終夜종야토록잠을이루지못ᄒᆞ며夢中몽즁과生時ᄉᆡᆼ시를分間분간치못ᄒᆞ더라王生왕ᄉᆡᆼ이忽然홀연보ᄆᆡ壁上벽상에絶句一首졀귀일슈가잇거ᄂᆞᆯ仔細자셰히이보니이곳玉檀옥단의筆跡필젹이라그詩시에曰왈 北樓春日又黃昏<br/> 濕盡羅巾拭淚痕<br/> 回首蘆林烏鵲亂<br/> 不知何處可招魂 북루에봄날이ᄯᅩ황혼이되얏ᄂᆞᆫᄃᆡ<br/> 깁슈건이눈문흔젹을씨셔다ᄒᆞ얏도다<br/> 머리를도리키ᄆᆡ로림에오작이어ᄌᆞ로오니<br/> 아지못게라어ᄂᆞᆫ곳에가혼을불을고 ᄒᆞ얏더라王生왕ᄉᆡᆼ이그詩시를보ᄆᆡ辭意ᄉᆞ의가哀怨ᄋᆡ원ᄒᆞᆫ지라눈물ᄲᅮ림을ᄭᆡ닷지못ᄒᆞ며부슬잡아{{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1mrsbho48v8gquuorv8s6sobk3yp4st 페이지:(만고웅변)소진장의젼.djvu/27 250 101578 392588 2025-06-26T06:09:12Z Ming9113 18465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 시작}} 치ᄂᆡ죠ᄋᅶᆼ의언약과갓치ᄒᆞ겟ᄂᆞ이다ᄒᆞ며화음ᄇᆡᆨ일노쇼진을ᄯᅩᄒᆞᆫ쥬거ᄂᆞᆯ쇼진이ᄯᅩ위나라에가셔위혜왕을달ᄂᆡ여왈위나라ᄂᆞᆫ디방이쳔리로ᄃᆡ인민의만은것과거마의만음이위국갓흠이업스니진나라항거ᄒᆞ기가유여ᄒᆞ거ᄂᆞᆯ이제군신의말을들어ᄯᅡᆼ을버혀셔진나라에신하로셤기고ᄌᆞᄒᆞ니만일진국이구ᄒᆞ... 39258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Ming9113" /></noinclude>{{옛한글 시작}} 치ᄂᆡ죠ᄋᅶᆼ의언약과갓치ᄒᆞ겟ᄂᆞ이다ᄒᆞ며화음ᄇᆡᆨ일노쇼진을ᄯᅩᄒᆞᆫ쥬거ᄂᆞᆯ쇼진이ᄯᅩ위나라에가셔위혜왕을달ᄂᆡ여왈위나라ᄂᆞᆫ디방이쳔리로ᄃᆡ인민의만은것과거마의만음이위국갓흠이업스니진나라항거ᄒᆞ기가유여ᄒᆞ거ᄂᆞᆯ이제군신의말을들어ᄯᅡᆼ을버혀셔진나라에신하로셤기고ᄌᆞᄒᆞ니만일진국이구ᄒᆞ기를말지아니ᄒᆞᆫ즉장찻엇지ᄒᆞ시려ᄒᆞᄂᆞ잇가ᄃᆡ왕이진실노신의륙국의죵친ᄒᆞᄂᆞᆫ말ᄉᆞᆷ을드르ᄉᆞ힘을아울너ᄒᆞ야진나라를졔어ᄒᆞ면가히영구ᄒᆞᆯ지라도진나라근심은업슬거시오신이이졔됴왕의명을밧드러여긔옴은언약을좃게ᄒᆞᆷ이니이다위혜왕왈과인이미거ᄒᆞ고불초ᄒᆞ야스ᄉᆞ로ᄑᆡᄒᆞ고욕을ᄎᆔᄒᆞ얏더니이졔션ᄉᆡᆼ이량ᄎᆡᆨ으로써과인을가라치시거ᄂᆞᆯ감히명을좃지아느리잇가금과비단한슈ᄅᆡ를ᄯᅩᄒᆞᆫ쥬거ᄂᆞᆯ쇼진이다시졔나라로가셔졔션왕을달ᄂᆡ야왈신은듯ᄉᆞ온즉임치길에ᄂᆞᆫ슈ᄅᆡ박휘가부듸치고사ᄅᆞᆷ의억ᄀᆡ가부빈다ᄒᆞ니텬하에부ᄒᆞ고셩ᄒᆞᆷ이비ᄒᆞᆯ슈업거ᄂᆞᆯ이에셔흐로낫츨ᄒᆞ야진나라셤김을ᄭᅬᄒᆞ니엇지붓그럽지아니리오ᄯᅩ졔나라디방이진나라가기가심히멀거ᄂᆞᆯ진나라군ᄉᆞ가반다시졔국에능히밋지못ᄒᆞ겟거ᄂᆞᆯ진국을셤기ᄌᆞᄒᆞᆷ은엇지ᄒᆞᆷ이니잇가신은원컨ᄃᆡ대왕이됴나라언약을좃게ᄒᆞ야륙국이화친ᄒᆞ고갓치셔로구원ᄒᆞ면좃치안켓ᄂᆞ잇가졔션왕왈ᄉᆞᆷ가ᄀᆞᄅᆞ침을바드리이다쇼진이이에ᄎᆞ를모라남방으로향ᄒᆞ야쵸나라위왕을달ᄂᆡ야왈초나라디방이오쳔여리오텬하에막강이되야진나라에셔근심ᄒᆞᆷ이쵸나라갓흠이업스니쵸나라이ᄒᆞᆫ즉진나라이약ᄒᆞᆯ거시오진나라이강ᄒᆞᆫ즉쵸나라이약ᄒᆞᆯ지라이졔렬국에인군이언약을좃지아니ᄒᆞ면어그러질거시니ᄃᆡ져좃기에합ᄒᆞᆫ즉졔후 {{옛한글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3eaj032hwqnboojf9j89yvydndlu0ug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8 250 101579 392589 2025-06-26T06:20:14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和答ᄒᆞ니曰왈 舊容登臺日已昏<br/> 點燈相對見啼痕<br/> 蘆林風雨今何許<br/> 怊悵應存未返魂 녯얼골노ᄃᆡ에오르ᄆᆡ날이임의황혼이됨이여<br/> 등촉을혀고상ᄃᆡᄒᆞᄆᆡ우름흔젹을보왓도다<br/> 로림에풍우가이졔엇더ᄒᆞ던고<br/> 초창히ᄉᆡᆼ존ᄒᆞᄆᆡ반혼치아니ᄒᆞ리로다 ᄒᆞ얏더라是夜將半시야장반에四顧無人ᄉᆞ고무인ᄒᆞᆫ지... 39258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和答ᄒᆞ니曰왈 舊容登臺日已昏<br/> 點燈相對見啼痕<br/> 蘆林風雨今何許<br/> 怊悵應存未返魂 녯얼골노ᄃᆡ에오르ᄆᆡ날이임의황혼이됨이여<br/> 등촉을혀고상ᄃᆡᄒᆞᄆᆡ우름흔젹을보왓도다<br/> 로림에풍우가이졔엇더ᄒᆞ던고<br/> 초창히ᄉᆡᆼ존ᄒᆞᄆᆡ반혼치아니ᄒᆞ리로다 ᄒᆞ얏더라是夜將半시야장반에四顧無人ᄉᆞ고무인ᄒᆞᆫ지라玉檀옥단이長吁短歎장우단탄ᄒᆞ다가말ᄒᆞ야갈오ᄃᆡ公子宰相家千金공ᄌᆡᄌᆡ상가쳔금갓ᄒᆞᆫ몸으로맛當당히箕裘긔구의業업을이으실거시어ᄂᆞᆯ한낫娼女창녀를보시고迷惑미혹ᄒᆞ사留連류련ᄒᆞ신지數年슈년에萬金之財만금지ᄌᆡ를虛費허비ᄒᆞ시고맛참ᄂᆡ財物ᄌᆡ물이업슨緣故연고로몸이不測불측ᄒᆞᆫ禍화에ᄲᅡ지셧다가비록生命ᄉᆡᆼ명은保全보젼ᄒᆞ얏스나그厄ᄋᆡᆨ이甚심히慘惑참혹ᄒᆞᆫ지라이機會긔회를타셔뎌財物ᄌᆡ물을거두어가지시고집으로도라가覲親근친ᄒᆞ신則즉거의父母부모에怒노ᄒᆞ심을풀거시오ᄯᅩᄒᆞᆫ薄行박ᄒᆡᆼ에일홈을免면ᄒᆞ실리이다王生曰왕ᄉᆡᆼ왈그ᄃᆡ에말이當然당연ᄒᆞ나참아엇지도라가리오나곳업스면그ᄃᆡ가娼母창모의手段슈단에能능히견ᄃᆡ지못ᄒᆞᆯ거시라覺生ᄉᆡᆼ각ᄒᆞᆯᄉᆞ록心懷如刺심회여ᄌᆞᄒᆞ니將次장ᄎᆞ엇지ᄒᆞ면됴흐리오ᄒᆞ고즐겨行ᄒᆡᆼᄒᆞ지아니ᄒᆞ거ᄂᆞᆯ玉檀옥단이再三懇勸ᄌᆡ삼간권ᄒᆞ며붓드러이르{{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tkxycylvs3w5mksfr8h1mosugxm470t 392590 392589 2025-06-26T06:20:54Z Kwonmax23 15771 39259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和答화답ᄒᆞ니曰왈 舊容登臺日已昏<br/> 點燈相對見啼痕<br/> 蘆林風雨今何許<br/> 怊悵應存未返魂 녯얼골노ᄃᆡ에오르ᄆᆡ날이임의황혼이됨이여<br/> 등촉을혀고상ᄃᆡᄒᆞᄆᆡ우름흔젹을보왓도다<br/> 로림에풍우가이졔엇더ᄒᆞ던고<br/> 초창히ᄉᆡᆼ존ᄒᆞᄆᆡ반혼치아니ᄒᆞ리로다 ᄒᆞ얏더라是夜將半시야장반에四顧無人ᄉᆞ고무인ᄒᆞᆫ지라玉檀옥단이長吁短歎장우단탄ᄒᆞ다가말ᄒᆞ야갈오ᄃᆡ公子宰相家千金공ᄌᆡᄌᆡ상가쳔금갓ᄒᆞᆫ몸으로맛當당히箕裘긔구의業업을이으실거시어ᄂᆞᆯ한낫娼女창녀를보시고迷惑미혹ᄒᆞ사留連류련ᄒᆞ신지數年슈년에萬金之財만금지ᄌᆡ를虛費허비ᄒᆞ시고맛참ᄂᆡ財物ᄌᆡ물이업슨緣故연고로몸이不測불측ᄒᆞᆫ禍화에ᄲᅡ지셧다가비록生命ᄉᆡᆼ명은保全보젼ᄒᆞ얏스나그厄ᄋᆡᆨ이甚심히慘惑참혹ᄒᆞᆫ지라이機會긔회를타셔뎌財物ᄌᆡ물을거두어가지시고집으로도라가覲親근친ᄒᆞ신則즉거의父母부모에怒노ᄒᆞ심을풀거시오ᄯᅩᄒᆞᆫ薄行박ᄒᆡᆼ에일홈을免면ᄒᆞ실리이다王生曰왕ᄉᆡᆼ왈그ᄃᆡ에말이當然당연ᄒᆞ나참아엇지도라가리오나곳업스면그ᄃᆡ가娼母창모의手段슈단에能능히견ᄃᆡ지못ᄒᆞᆯ거시라覺生ᄉᆡᆼ각ᄒᆞᆯᄉᆞ록心懷如刺심회여ᄌᆞᄒᆞ니將次장ᄎᆞ엇지ᄒᆞ면됴흐리오ᄒᆞ고즐겨行ᄒᆡᆼᄒᆞ지아니ᄒᆞ거ᄂᆞᆯ玉檀옥단이再三懇勸ᄌᆡ삼간권ᄒᆞ며붓드러이르{{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anh5st3mtkkvfp41ycvgi44jn36j1yc 페이지:(만고웅변)소진장의젼.djvu/28 250 101580 392591 2025-06-26T06:30:28Z Ming9113 18465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 시작}} 가쟝찻ᄯᅡᆼ을버혀쵸국을셤길거시오어그러진ᄃᆡ연ᄒᆞᆫ즉쵸나라이쟝찻ᄯᅡᆼ을베혀진나라를셤길지라이졔량ᄎᆡᆨ이샹거심원ᄒᆞ니이다쵸위왕왈션ᄉᆡᆼ의말ᄉᆞᆷ은쵸나라복이라ᄒᆞᆯ지니이다쇼진이이에북으로ᄒᆡᆼᄒᆞ야됴나라슉후의게회보ᄒᆞᆯᄉᆡ락양에지나니졔후가각기ᄉᆞ신을발ᄒᆞ야젼숑ᄒᆞ며의장긔치가젼ᄎᆞ후응ᄒ... 39259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Ming9113" /></noinclude>{{옛한글 시작}} 가쟝찻ᄯᅡᆼ을버혀쵸국을셤길거시오어그러진ᄃᆡ연ᄒᆞᆫ즉쵸나라이쟝찻ᄯᅡᆼ을베혀진나라를셤길지라이졔량ᄎᆡᆨ이샹거심원ᄒᆞ니이다쵸위왕왈션ᄉᆡᆼ의말ᄉᆞᆷ은쵸나라복이라ᄒᆞᆯ지니이다쇼진이이에북으로ᄒᆡᆼᄒᆞ야됴나라슉후의게회보ᄒᆞᆯᄉᆡ락양에지나니졔후가각기ᄉᆞ신을발ᄒᆞ야젼숑ᄒᆞ며의장긔치가젼ᄎᆞ후응ᄒᆞ며거긔치즁이이십리에연졉ᄒᆞ야ᄭᅳᆫ어지지아니ᄒᆞ야위의가왕ᄌᆞ에비ᄒᆞ며연로디방관이틔ᄭᅳᆯ을바라보고졀ᄒᆞ더라쥬나라현왕이쇼진이쟝찻이른단말을듯고미리사ᄅᆞᆷ으로ᄒᆞ야곰도로쓸게ᄒᆞ며교외에쟝막을베푸러마질ᄉᆡ쇼진의로모가집ᄑᆡᆼ이를붓들고방관ᄒᆞ다가ᄎᆡᆨ々ᄒᆞ야탄식ᄒᆞ기를마지아니ᄒᆞ며두아오와형슈와안ᄒᆡ가눈을기우려감히우러々보지못ᄒᆞ며부복ᄒᆞ야맛더라쇼진이ᄎᆞ가온ᄃᆡ에셔형슈다려일너왈젼일에형슈씨ᄭᅦ셔나를위ᄒᆞ야불을ᄯᆡ지아니ᄒᆞ시더니이졔ᄂᆞᆫ엇지ᄒᆞ야공손ᄒᆞᆷ이과ᄒᆞ시니잇가형슈왈게ᄌᆞ를보건ᄃᆡ위가놉고황금이만흔즉불가불공경아니ᄒᆞᆯ슈가업ᄂᆞ이다쇼진이탄왈셰샹에ᄯᅳᆺ이ᄅᆡᆼᄒᆞ고더움을보와사ᄅᆞᆷ의낫치놉고나져진다ᄒᆞ더니ᄂᆡ가오날이야비로소부귀가업지못ᄒᆞᆯ줄을알앗노라이에ᄎᆞ로그친쇽을ᄐᆡ우고고향에갓치도라가큰집을지으며친쳑을모도여거ᄒᆞᆯᄉᆡ쳔금을흣터죵죡을쥬더라이졔하남부셩ᄂᆡ에쇼진의집터라상젼ᄒᆞ거ᄂᆞᆯ엇던사ᄅᆞᆷ이ᄯᅡᆼ을파셔황금ᄇᆡᆨ졍을어더ᄂᆡ인지라대져쇼진당년에파무듬이러라쇼진의아오ᄃᆡ와려가그형이귀ᄒᆞ고셩ᄒᆞᆷ을부러ᄒᆞ야음부를ᄯᅩᄒᆞᆫ습독ᄒᆞ며유셰지슐을ᄇᆡ호더라쇼진이집에머무른지슈일만에ᄎᆞ를타고발졍ᄒᆞ야됴국에드러가니죠슉후ㅣ쇼진을봉ᄒᆞ야무안군을ᄉᆞᆷ으며졔귝쵸국위국한국연국다셧나라에ᄉᆞ신 {{옛한글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ojwk6zxfofynxbmu79fqhfzxnh4dkl9 페이지:오자셔실긔.djvu/11 250 101581 392592 2025-06-26T06:31:15Z Bborang 18488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그곳으로가셔좃침이올토다ᄒᆞ고수양을바라고ᄀᆞ더니즁로에일으러셔한낫수ᄅᆡ급히몰아압흐로오거ᄂᆞᆯ오운이쵸병인ᄀᆞ의심ᄒᆞ야수ㅅ풀속에숨고감히나지못ᄒᆞ더니다시살펴보니친구ᄉᆞᄅᆞᆷ신포셔라타국에사신갓다ᄀᆞ도라오는길에일로좃ᄎᆞ지ᄂᆡ감이어ᄂᆞᆯ오운이나아ᄀᆞ슈ᄅᆡ겻ᄒᆡ셔서읍ᄒᆞ니신포셔황망히슈ᄅᆡ에... 39259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Bborang"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그곳으로가셔좃침이올토다ᄒᆞ고수양을바라고ᄀᆞ더니즁로에일으러셔한낫수ᄅᆡ급히몰아압흐로오거ᄂᆞᆯ오운이쵸병인ᄀᆞ의심ᄒᆞ야수ㅅ풀속에숨고감히나지못ᄒᆞ더니다시살펴보니친구ᄉᆞᄅᆞᆷ신포셔라타국에사신갓다ᄀᆞ도라오는길에일로좃ᄎᆞ지ᄂᆡ감이어ᄂᆞᆯ오운이나아ᄀᆞ슈ᄅᆡ겻ᄒᆡ셔서읍ᄒᆞ니신포셔황망히슈ᄅᆡ에나려셔로보고뭇되ᄌᆞ셔무슨연고로홀로이곳에왓ᄂᆞ뇨ᄒᆞ거ᄂᆞᆯᄌᆞ셔평왕이자긔부형을무죄히죽인일을셜파ᄒᆞ야일장을울며고ᄒᆞᆫᄃᆡ포셔듯고추연히녁여문왈그ᄃᆡ지금어ᄃᆡ로ᄀᆞᄂᆞ뇨운이ᄀᆞᆯ오ᄃᆡᄂᆡ들으니부모의원슈는하ᄂᆞᆯ을ᄒᆞᆫᄀᆞ지아니ᄒᆞᆫ다ᄒᆞ니ᄂᆡ장ᄎᆞ타국에도망ᄒᆞ야군사를빌어쵸를쳐서쵸왕의고기를씹고무극의사지를슈ᄅᆡ로ᄶᅵ저야이ᄒᆞᆫ을풀니라ᄒᆞ노라포서만류ᄒᆞ야ᄀᆞᆯ오ᄃᆡ쵸왕이비록무도ᄒᆞ다ᄒᆞ나인군이라그ᄃᆡ루ᄃᆡ신ᄒᆞᄀᆞ되엿스니군신의분의ᄀᆞ뎡ᄒᆞ얏는지라엇지신하로서인군을원슈ᄒᆞ리요운이ᄀᆞᆯ오ᄃᆡ녯젹에걸슈라ᄒᆞ는인군이그신하의게쥭임을당ᄒᆞᆯ은오작무도ᄒᆞᆫ소치라이졔쵸왕이며나리를ᄎᆔᄒᆞ고뎍자를ᄂᆡ여ᄶᅭ츠며간신의참소를밋어츙신을쥭이니ᄂᆡ타국에ᄀᆞ셔쳥병ᄒᆞ야영ᄯᆞ에드러ᄀᆞ서쵸국의더러운ᄯᅴ글을씨서바리려ᄒᆞ노라하물며골육의원슈ᄀᆞ깁헛스니엇지안연히잇스리요포서ᄀᆞᆯ오ᄃᆡᄂᆡᄀᆞ그ᄃᆡ를ᄀᆞ라쳐쵸ㅅ나라원슈를갑흐라ᄒᆞᆫ즉인군ᄭᅴ불츙이오그ᄃᆡ를ᄀᆞ라쳐원슈를갑지말나ᄒᆞ면그ᄃᆡ로ᄒᆞ야곰불효에ᄲᅡ지게ᄒᆞᆷ이니그ᄃᆡ는힘ᄡᅧᄒᆡᆼᄒᆞᆯ지어다븡우에의리로ᄂᆡ반ᄃᆞ시타인의게루셜ᄒᆞ지는아니ᄒᆞ려니와그러나그ᄃᆡ능하초국을업지를진ᄃᆡᄂᆡ능히쵸국을보존ᄒᆞᆯ것이오그ᄃᆡ능히초국을위ᄐᆡᄒᆞ게ᄒᆞᆯ진ᄃᆡᄂᆡ능히초국을편안ᄒᆞ게ᄒᆞ리라ᄒᆞ거늘오운이신포셔를하직ᄒᆞ고여러날만에숑국에닐으러ᄐᆡᄌᆞ건을보고평왕이무고참쇼를밋어ᄌᆞ긔부형죽인일을알외고다시물어ᄀᆞᆯ오ᄃᆡᄐᆡᄌᆞ닐즉이숑나라인군을보셧ᄂᆞ닛가ᄒᆞᆫᄃᆡ건이왈이졔숑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175gnlzwnhdm5pb70q1k815cgw8oa1q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49 250 101582 392593 2025-06-26T06:34:31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현ᄃᆡ王生왕ᄉᆡᆼ이마지못ᄒᆞ야作別작별ᄒᆞᆯᄉᆡ玉檀옥단이눈물을흘니며드ᄃᆡ여滿庭芳만졍방한曲調곡됴로써離別리별ᄒᆞ니그詞ᄉᆞ에曰왈 깁흔情졍을펴지못ᄒᆞ야져밤이將次장ᄎᆞᄉᆡ이여此生何日ᄎᆞᄉᆡᆼ하일에다시즐길고芦林로림에厄ᄋᆡᆨ을免면ᄒᆞ얏슴이여엇지가히이機會긔회를일흐리오嗚呼오호라郞君랑군이한번가... 392593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현ᄃᆡ王生왕ᄉᆡᆼ이마지못ᄒᆞ야作別작별ᄒᆞᆯᄉᆡ玉檀옥단이눈물을흘니며드ᄃᆡ여滿庭芳만졍방한曲調곡됴로써離別리별ᄒᆞ니그詞ᄉᆞ에曰왈 깁흔情졍을펴지못ᄒᆞ야져밤이將次장ᄎᆞᄉᆡ이여此生何日ᄎᆞᄉᆡᆼ하일에다시즐길고芦林로림에厄ᄋᆡᆨ을免면ᄒᆞ얏슴이여엇지가히이機會긔회를일흐리오嗚呼오호라郞君랑군이한번가심이여明鏡명경을對ᄃᆡᄒᆞ야길히외로온鸞란ᄉᆡ가되리로다됴히歸寧귀녕ᄒᆞ사讀書독셔ᄒᆞ시기에專心젼심ᄒᆞ시고삼가紅顔홍안을生覺ᄉᆡᆼ각지말으쇼셔오ᄂᆞᆯ날離別리별ᄒᆞ고한번가시ᄆᆡ도라오시기어렵도다白髮ᄇᆡᆨ발이되도록一片丹心일편단심을誓誓ᄆᆡᆼ셔ᄒᆞᆷ을怊悵ᄒᆞᆷ이여일노조ᄎᆞ北樓북루의사ᄅᆞᆷ업ᄂᆞᆫ밤에외로히闌干란간을依支의지ᄒᆞ리로다멀도다江南消息강남쇼식을뉘傳젼ᄒᆞᆯ고바라고바라ᄆᆡ靑山쳥산ᄲᅮᆫ이로다 ᄒᆞ얏더라王生왕ᄉᆡᆼ이듯기를다ᄒᆞᄆᆡᄯᅩᄒᆞᆫ淚水루ᄉᆔ나림을禁금치못ᄒᆞ며卽時즉시和答화답ᄒᆞ니曰왈 千里쳔리에生還ᄉᆡᆼ환ᄒᆞᆷ이여半夜반야에離別리별을當당ᄒᆞ니슯흐고깃분마음이粉々분〻ᄒᆞ도다行ᄒᆡᆼᄒᆞᄂᆞᆫ말이發발코져ᄒᆞᆷ이여白雲ᄇᆡᆨ운이楚쵸나라關관에稀迷희미ᄒᆞ도다헛도히한雙玉簫쌍옥쇼를불미여秦樓진루에셔어나ᄯᆡᄂᆞ鸞란ᄉᆡ를탈고슯흐다그ᄃᆡ옷자락을잡음이여차마놋키어려오니壯士장ᄉᆞ의{{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7oqkv162g6tde6o4yi8vjuh2xil7kvj 페이지:(만고웅변)소진장의젼.djvu/29 250 101583 392594 2025-06-26T06:49:16Z Ming9113 18465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 시작}} 을보ᄂᆡ여언약을졍ᄒᆞ고모다환슈상에셔로모도여ᄆᆡᆼ셰ᄒᆞᆯᄉᆡ쇼진이죠슉후와갓치환슈에미리가셔단을싸코위치를ᄇᆡ포ᄒᆞ야졔후이름을기다리니더니연문공이먼져이르며그담에ᄂᆞᆫ한나라션혜공이々르며ᄯᅩ슈일이못되야위나라혜왕과졔나라션왕과쵸나라위왕이륙속ᄒᆞ야이르거ᄂᆞᆯ쇼진니먼져각국ᄃᆡ부로더부러셔로보고좌ᄎ... 39259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Ming9113" /></noinclude>{{옛한글 시작}} 을보ᄂᆡ여언약을졍ᄒᆞ고모다환슈상에셔로모도여ᄆᆡᆼ셰ᄒᆞᆯᄉᆡ쇼진이죠슉후와갓치환슈에미리가셔단을싸코위치를ᄇᆡ포ᄒᆞ야졔후이름을기다리니더니연문공이먼져이르며그담에ᄂᆞᆫ한나라션혜공이々르며ᄯᅩ슈일이못되야위나라혜왕과졔나라션왕과쵸나라위왕이륙속ᄒᆞ야이르거ᄂᆞᆯ쇼진니먼져각국ᄃᆡ부로더부러셔로보고좌ᄎᆞ를ᄉᆞ々로의론ᄒᆞᆯᄉᆡ쵸와연국은늙은나라이오졔한됴위ᄂᆞᆫ도시셩을고친신국이라다만이ᄯᆡ젼ᄌᆡᆼᄒᆞᄂᆞᆫ져음을당ᄒᆞ야나라에대쇼로써ᄎᆞ셔를졍ᄒᆞᆯ지니쵸국은가장크고졔국이그버금이되며위국이그다음이오됴국연국한국이셔로ᄎᆞ々ᄎᆞ례가되나그즁에쵸제위삼국은왕을칭ᄒᆞ며됴연한삼국은후라일커르ᄆᆡ작위가셔로달니여ᄎᆞ례가불편ᄒᆞᆫ지라이에쇼진이의론을셰우되륙국이모다왕호를칭ᄒᆞ야됴왕이언약에쥬인이되야쥬쥬셕에안지며쵸왕등은ᄎᆞ례로ᄀᆡᆨ위에안게ᄒᆞ더라먼져각국으로더부러졍당ᄒᆞ게회의ᄒᆞ고그날을당ᄒᆞ야각기ᄆᆡᆼ단에올으며위ᄎᆞ를좃ᄎᆞᄇᆡ렬ᄒᆞ얏더라쇼진이셤돌을지나올나가여섯인군의게고ᄒᆞ야왈모든나라인군이산동에큰나라이되고모다왕작이라디광병다ᄒᆞ야죡히스ᄉᆞ로웅장ᄒᆞᆯ만ᄒᆞ며진국은말을치던쳔ᄒᆞᆫ지아비라함양에험ᄒᆞᆷ을웅거ᄒᆞ야렬국을누에쳐럼먹으려ᄒᆞ니모든인군은능히얼골을북으로ᄒᆞ야진국을셤기려ᄒᆞ나잇가졔후ㅣ모다왈진나라셤기믈원ᄒᆞ지아니ᄒᆞ며션ᄉᆡᆼ이발ᄭᅦ가라침을밧들녀ᄒᆞ나이다쇼진왈이졔합죵이라ᄒᆞᆷ은진국을물니쳐ᄌᆞ는ᄭᅬ라젼일에임이모든국군의ᄋᆞᆸᄒᆡ셜명ᄒᆞ야아시게ᄒᆞ얏스니오날은다만만희ᄉᆡᆼ을잡고피를ᄶᅵᆨ어신명에ᄆᆡᆼ셔를ᄒᆞ고형졔지의를ᄆᆡ져만일환난이잇거든셔로구원ᄒᆞ게쇼셔여셧인군이모다 {{옛한글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764qmytfk53gc2izfpy21r83bntfdtz 페이지:(고대소설)쳥루지열녀.djvu/50 250 101584 392595 2025-06-26T07:01:02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朱顔쥬안이減감ᄒᆞ리로다言約언약이비록金石금석갓ᄒᆞ나다시만ᄂᆞᆯ길이업스니어ᄂᆞ날이나도라올고돌갓ᄒᆞᆫ챵ᄌᆞ가ᄌᆡ가되고玉貌옥모가消削쇼삭ᄒᆞ리로다過隙光陰관극광음이얼마런고悲慘비참히對ᄃᆡᄒᆞ야別淚별루를欄干란간에ᄲᅮ리도다或者혹자쥭지안코다시녯因緣인연을잇고져ᄒᆞ면碧海벽ᄒᆡ가靑山쳥산이되리로다... 39259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Kwonmax23" /></noinclude>{{옛한글쪽 시작}}朱顔쥬안이減감ᄒᆞ리로다言約언약이비록金石금석갓ᄒᆞ나다시만ᄂᆞᆯ길이업스니어ᄂᆞ날이나도라올고돌갓ᄒᆞᆫ챵ᄌᆞ가ᄌᆡ가되고玉貌옥모가消削쇼삭ᄒᆞ리로다過隙光陰관극광음이얼마런고悲慘비참히對ᄃᆡᄒᆞ야別淚별루를欄干란간에ᄲᅮ리도다或者혹자쥭지안코다시녯因緣인연을잇고져ᄒᆞ면碧海벽ᄒᆡ가靑山쳥산이되리로다 ᄒᆞ얏더라王生왕ᄉᆡᆼ이和答화답ᄒᆞ기를마치ᄆᆡ村鷄쵼계ᄂᆞᆫᄉᆡ벽을報보ᄒᆞᄂᆞᆫᄃᆡ淸燈쳥등에火影화영이盡진ᄒᆞᄂᆞᆫ지라玉檀옥단이侍婢시비로ᄒᆞ야금가만히公子공ᄌᆞ에從者종자를불너皮籠피롱에든돌과瓦片와편을ᄭᅥᄂᆡ고娼母창모의獻壽헌슈ᄒᆞᆫ바金銀금은과玩好之物완호지물이며私々ᄉᆞᄉᆞ로히두엇든寶貝金銀보ᄇᆡ금은을너흔後후封鎖봉쇄케ᄒᆞ고王生왕ᄉᆡᆼ다려일너曰왈妾쳡의드린바寶物보물을江南강남에가셔放賣방ᄆᆡᄒᆞ시면足족히虛費허비ᄒᆞᆫ數슈를補充보츙ᄒᆞᆯ거시오니急급히실코가쇼셔ᄒᆞᆫᄆᆡ王生왕ᄉᆡᆼ이그離別리별ᄒᆞᆷ을悶忙민망ᄒᆞ야慘々嗚咽참참오열ᄒᆞ며玉檀옥단을안고ᄎᆞᆷ아노치못ᄒᆞ거ᄂᆞᆯ玉檀옥단이손으로王生왕ᄉᆡᆼ을밀치고門문으로나아가ᄂᆞᆫ지라王生왕ᄉᆡᆼ이ᄒᆞᆯ일업시눈물을먹음고離別리별왈어ᄂᆞᄯᆡ나다시만날고玉檀曰옥단왈公子歸覲공ᄌᆡ귀근ᄒᆞ신後후功夫공부를專力젼력ᄒᆞ사일즉登科등과ᄒᆞ야이골刺史ᄌᆞ사를ᄒᆞ신즉妾쳡을相逢상봉ᄒᆞ시ᄂᆞᆫ날이오万若만약그러치아닌즉妾쳡을{{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6qyrjqdk5jk7jqe16dw5ky6phkwn0l8 페이지:오자셔실긔.djvu/12 250 101585 392596 2025-06-26T07:33:36Z Bborang 18488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국에ᄂᆡ란이일어ᄂᆞ군신이셔로싸호는지라그럼으로ᄂᆡ보임을통치못ᄒᆞ엿노라ᄒᆞ더라그후에숑국ᄂᆡ란이진셩되지못ᄒᆞ야초ㅅ나라의셔군ᄉᆞ를됴발ᄒᆞ야숑국을구원ᄒᆞ더니오운이쵸ㅅ나라군ᄉᆡ닐음을듯고ᄐᆡᄌᆞ건으로더부러뎡국으로다라나니뎡나라뎡공이ᄐᆡᄌᆞ건의닐음을듯고ᄀᆡᆨ관을졍히소쇄ᄒᆞ며의식을후히주거늘건... 39259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Bborang"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국에ᄂᆡ란이일어ᄂᆞ군신이셔로싸호는지라그럼으로ᄂᆡ보임을통치못ᄒᆞ엿노라ᄒᆞ더라그후에숑국ᄂᆡ란이진셩되지못ᄒᆞ야초ㅅ나라의셔군ᄉᆞ를됴발ᄒᆞ야숑국을구원ᄒᆞ더니오운이쵸ㅅ나라군ᄉᆡ닐음을듯고ᄐᆡᄌᆞ건으로더부러뎡국으로다라나니뎡나라뎡공이ᄐᆡᄌᆞ건의닐음을듯고ᄀᆡᆨ관을졍히소쇄ᄒᆞ며의식을후히주거늘건이오운으로더부러ᄆᆡ양뎡공을봄ᄋᆡ반다시울며원통ᄒᆞᆫ졍샹을고ᄒᆞ니뎡공이ᄀᆞᆯ오ᄃᆡ뎡나라는나라이젹고군ᄉᆡ약ᄒᆞ야죡히쓰지못ᄒᆞᆯ지라그ᄃᆡ원슈를갑고져ᄒᆞᆯ진ᄃᆡ엇지진나라에가셔ᄭᅬᄒᆞ지아니ᄒᆞᄂᆞ뇨ᄒᆞ거늘ᄐᆡᄌᆞ건이오운을뎡나라에머물게ᄒᆞ고친히진국에가셔진경공을보고그ᄉᆞ연을고ᄒᆞᆫᄃᆡ경공이ᄐᆡᄌᆞ를관역에머물게ᄒᆞ고드ᄃᆡ여뉵경을불너쵸국칠일을의론ᄒᆞ니그ᄯᆡ에뉵경이진나라졍ᄉᆞ잡아임의로츌쳑ᄒᆞᆷᄋᆡ인군이약ᄒᆞ고신하가강셩ᄒᆞ야경공이능히임의로ᄒᆞ지못ᄒᆞ더라뉵경즁에오작위셔와한불신이라ᄒᆞ는신하는어질고남아지ᄉᆞ경은다권셰를탐ᄒᆞ고ᄌᆡ물을ᄉᆞ랑ᄒᆞ는무릴너라그즁에슌인이라ᄒᆞ는ᄉᆞ람이ᄌᆡ물탐ᄒᆞ기를더욱심히ᄒᆞ더니뎡나라졍승유길에게ᄉᆞ람을보ᄂᆡᄌᆡ물을쳥구ᄒᆞᆫᄃᆡ유길이듯지아니ᄒᆞ는지라일노죳ᄎᆞ슌인이뎡나라를믜워ᄒᆞ야ᄒᆞᆼ샹ᄒᆡ코져ᄒᆞ더니이졔를당ᄒᆞ야가만히경공ᄭᅴ쳥ᄒᆞ야ᄀᆞᆯ오ᄃᆡ뎡국이진국과초국두사이에잇셔셔반복무샹ᄒᆞᆫ지가하로잇흘이아니온즉이졔초국ᄐᆡᄌᆞ가뎡국에잇ᄉᆞ오니뎡국이반ᄃᆞ시신용ᄒᆞᆯ지라ᄐᆡᄌᆞ능히나를위ᄒᆞ야ᄂᆡ응이되면ᄂᆡ가군ᄉᆞ를발ᄒᆞ야뎡국을멸ᄒᆞ고뎡국으로ᄡᅥᄐᆡᄌᆞ를준연후에셔々히초국멸ᄒᆞᆷ을도모ᄒᆞ면엇지됴흔일이아니리요ᄒᆞ소셔ᄒᆞᆫᄃᆡ경공이그계교를죳ᄎᆞ즉시슌인을명ᄒᆞ야그ᄭᅬ로ᄡᅥᄐᆡᄌᆞ의게고ᄒᆞᆫᄃᆡᄐᆡᄌᆞ흔연히허락ᄒᆞ고뎡국에도라와셔오운으로더부러그일을샹의ᄒᆞᆫᄃᆡ오운이간왈ᄉᆞ람이튱셩과신의로써나를ᄃᆡ졉ᄒᆞ거늘엇지ᄒᆞ야도리여도모ᄒᆞ리오이는요ᄒᆡᆼ의계교라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nwmln4h4lf5ugvomm0jkbjqz1zt6rm6 페이지:(만고웅변)소진장의젼.djvu/30 250 101586 392597 2025-06-26T07:39:34Z Ming9113 18465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 시작}} 공슈왈ᄉᆞᆷ가々라치믈밧ᄀᆡᆺ나이다ᄒᆞ거ᄂᆞᆯ쇼진이쇼반을밧드러륙왕ᄭᅴ쳥ᄒᆞ야피를ᄶᅵ그라ᄒᆞ며졀ᄒᆞ야텬디와륙국죠죵에고ᄒᆞ되만일々국이ᄆᆡᆼ셔를어긔거든오국이갓치々ᄂᆞᆫᄆᆡᆼ셔글을여셧장이되게쎠셔륙국이각기ᄒᆞ나식가진후잔ᄎᆡ에나아가게ᄒᆞ며됴왕왈쇼진이큰량ᄎᆡᆨ을ᄂᆡ야륙국을편안케ᄒᆞ니맛당이놉... 39259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Ming9113" /></noinclude>{{옛한글 시작}} 공슈왈ᄉᆞᆷ가々라치믈밧ᄀᆡᆺ나이다ᄒᆞ거ᄂᆞᆯ쇼진이쇼반을밧드러륙왕ᄭᅴ쳥ᄒᆞ야피를ᄶᅵ그라ᄒᆞ며졀ᄒᆞ야텬디와륙국죠죵에고ᄒᆞ되만일々국이ᄆᆡᆼ셔를어긔거든오국이갓치々ᄂᆞᆫᄆᆡᆼ셔글을여셧장이되게쎠셔륙국이각기ᄒᆞ나식가진후잔ᄎᆡ에나아가게ᄒᆞ며됴왕왈쇼진이큰량ᄎᆡᆨ을ᄂᆡ야륙국을편안케ᄒᆞ니맛당이놉흔작위를봉ᄒᆞ야륙국에왕ᄅᆡᄒᆞ고언약을굿게ᄒᆞᆷ이엇더ᄒᆞ니잇가오왕이일졔히왈됴왕의말ᄉᆞᆷ이가장죳타ᄒᆞ야륙왕이쇼진을봉ᄒᆞ야종약장을삼고륙국에졍승인을겸ᄒᆞ야차게ᄒᆞ니금ᄑᆡ보검이륙국신민을춍할ᄒᆞ게되얏스며ᄯᅩ각국이황금ᄇᆡᆨ일과량마십승을쥰ᄃᆡ쇼진이ᄉᆞ은ᄒᆞ며륙왕이각々흐터져본국에도라가거ᄂᆞᆯ쇼진이됴슉후를ᄯᅡ라됴나라에도라오니이ᄯᆡ는쥬현왕ᄉᆞᆷ십륙년이러라이ᄒᆡ에위나라혜왕과연나라문왕이모다쥭고위양왕과연역왕이위를이엿더다화셜쇼진이임이륙국을합죵식이고죵약ᄒᆞ난글ᄒᆞ나를쎠진나라관에더지니관문직힌아젼이혜문왕ᄭᅴ보ᄂᆡ야보게ᄒᆞᆫᄃᆡ혜문왕이ᄃᆡ경ᄒᆞ야상국공손연더러무러왈만일륙국이일쳬가되면과인의ᄎᆔᄒᆞᆷ을바랄슈업슬거시니반시게ᄎᆡᆨᄒᆞ나를ᄉᆡᆼ각ᄒᆞ야그죵약ᄒᆞ믈ᄭᆡ친후에야가히ᄃᆡᄉᆞ를도모ᄒᆞᆯ가ᄒᆞ나이다공손연왈머리로죵약ᄒᆞᆫ사ᄅᆞᆷ은됴국이라ᄃᆡ왕이군ᄉᆞ를일히켜됴국을먼져치고각국에그먼져구원ᄒᆞ믈보와즉시군ᄉᆞ를옴기여치면졔후가두려워ᄒᆞ야죵약을가히헤치리이다이ᄯᆡ에장장의겻ᄒᆡ잇다가이말을드른즉마ᄋᆞᆷ에됴나라를치고ᄌᆞᄒᆞᆷ이아니오만일흥병벌됴ᄒᆞ면이ᄂᆞᆫ쇼진의덕을져바림이라이에나와말ᄒᆞ야왈시방륙국이ᄉᆡ로합ᄒᆞ얏스ᄆᆡ그형셰가죨지디헤치기어려울거시오진나라에셔만일됴국을치면ᄒᆞᆫ국에셔ᄂᆞᆫ의양 {{옛한글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ov3bosybg0g7xw8s0spa1gxrn0yaes8 페이지:오자셔실긔.djvu/13 250 101587 392599 2025-06-26T08:01:42Z Bborang 18488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올치아니ᄒᆞ니이다ᄒᆞᆫᄃᆡ건이ᄀᆞᆯ오ᄃᆡᄂᆡ가임의진나라인군과신하의게허락ᄒᆞ엿노라운이왈진국을응죵치아니ᄒᆞᆫ다ᄒᆞ여도죄될것은업거니와만일뎡국을ᄭᅬᄒᆞᆫ즉이는신의를다일허바림이니엇지ᄉᆞ람이라ᄒᆞ리오ᄐᆡᄌᆞ는밧비갈지어다ᄌᆡ앙이곳당도ᄒᆞ리이다ᄒᆞᆫᄃᆡᄐᆡᄌᆞ건이나라어듬에탐ᄒᆞ야오운의간ᄒ... 39259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Bborang"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올치아니ᄒᆞ니이다ᄒᆞᆫᄃᆡ건이ᄀᆞᆯ오ᄃᆡᄂᆡ가임의진나라인군과신하의게허락ᄒᆞ엿노라운이왈진국을응죵치아니ᄒᆞᆫ다ᄒᆞ여도죄될것은업거니와만일뎡국을ᄭᅬᄒᆞᆫ즉이는신의를다일허바림이니엇지ᄉᆞ람이라ᄒᆞ리오ᄐᆡᄌᆞ는밧비갈지어다ᄌᆡ앙이곳당도ᄒᆞ리이다ᄒᆞᆫᄃᆡᄐᆡᄌᆞ건이나라어듬에탐ᄒᆞ야오운의간ᄒᆞᆷ을듯지아니ᄒᆞ고ᄉᆞ々ᄌᆡ물로ᄡᅥ날ᄂᆡᆫᄉᆞ람을모집ᄒᆞ고다시뎡공의좌우졔신을쳬결ᄒᆞ야도아주기를바라더니어느ᄉᆞ람이그일을뎡공ᄭᅴ고ᄒᆞᆫᄃᆡ뎡공이유길을불너샹의ᄒᆞ고ᄐᆡᄌᆞ건을후원유로불너드려ᄀᆞᆯ오ᄃᆡ과인이됴흔ᄯᅳᆺ으로ᄐᆡᄌᆞ를머물게ᄒᆞ엿거늘ᄐᆡᄌᆞ무ᄉᆞᆷ연고로우리나라를도모ᄒᆞᄂᆞ뇨ᄒᆞ고력ᄉᆞ를ᄭᅮ지져ᄐᆡᄌᆞ건을잡아자리우ᄒᆡ셔버히고죵인이십여인을모다잡아버히더니오운이관역에머물ᄉᆡ홀연살이ᄯᅥᆯ니기를마지아니ᄒᆞ거늘운이ᄀᆞᆯ오ᄃᆡᄐᆡᄌᆞ위ᄐᆡᄒᆞ도다ᄒᆞ더니얼마아니되여셔죵인이도망ᄒᆞ야관역에도라와셔ᄐᆡᄌᆞ의잡혀죽은일을고ᄒᆞ거늘오운이즉시ᄐᆡᄌᆞ건의아달승을다리고뎡국을ᄯᅥ나오ㅅ나라로향ᄒᆞ야난을피ᄒᆞᆯᄉᆡ길에셔낫에는슘고밤이면ᄒᆡᆼᄒᆞ니쳔신만고를이루긔록지못ᄒᆞᆯ러라여러날만에딘국에다々르니딘국은나라이협착ᄒᆞ야족히머물지못ᄒᆞᆯ줄알고다시딘국을ᄯᅥ나동으로향ᄒᆞ야가니슈일을지ᄂᆡᄆᆡ장ᄎᆞ쇼관이라ᄒᆞ는ᄯᅡ을당도ᄒᆞᆯ지라그ᄯᅡ히쇼현산셔편에잇스니려쥬와호쥬로왕ᄅᆡᄒᆞ는요츙이라이ᄯᅡ을지ᄂᆡ면곳대강이니이는오ㅅ나라로통ᄒᆞ는슈로이러라형셰심히험쥰ᄒᆞ니초국우ᄉᆞ마벼ᄉᆞᆯᄒᆞᆫ원월이대군을거나려이ᄯᅡ을직히더라오운이력양ᄯᅡ에닐으러주져ᄒᆞ며나아가지못ᄒᆞ더니홀연한로인이막ᄃᆡ를잇글고슛풀가온데드러와오운을보고그샹모를긔이ᄒᆞ게녁여읍ᄒᆞ고ᄀᆞᆯ오ᄃᆡ그ᄃᆡ오씨의ᄌᆞ손이아니냐ᄒᆞ거늘운이크게놀ᄂᆡ여왈엇지알으시ᄂᆞ닛고로인왈나는편작의뎨ᄌᆞ동고공이라어려셔븟터의슐을ᄇᆡ왕렬국에유람ᄒᆞ더니이졔나히늙으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apq9ntks3f790zmz0kenie0mviomt1k 페이지:詩經諺解 제7책.djvu/11 250 101588 392602 2025-06-26T08:13:11Z Lifestory24 17304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享{{더 작게|향}}ᄒᆞ시리라<br/> 我{{더 작게|아}}其{{더 작게|기}}夙{{더 작게|슉}}夜{{더 작게|야애}}畏{{더 작게|외}}天{{더 작게|텬}}之{{더 작게|지}}威{{더 작게|위ᄒᆞ야}}于{{더 작게|우}}時{{더 작게|시}}保{{더 작게|보}}之{{더 작게|지엇다}}<br/> :내그夙{{더 작게|슉}}夜{{더 작게|야}}애天{{더 작게|텬}}ㅅ威{{더 작게|위}}를畏{{더 작게|외}}ᄒᆞ야이예保{... 39260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ifestory24"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享{{더 작게|향}}ᄒᆞ시리라<br/> 我{{더 작게|아}}其{{더 작게|기}}夙{{더 작게|슉}}夜{{더 작게|야애}}畏{{더 작게|외}}天{{더 작게|텬}}之{{더 작게|지}}威{{더 작게|위ᄒᆞ야}}于{{더 작게|우}}時{{더 작게|시}}保{{더 작게|보}}之{{더 작게|지엇다}}<br/> :내그夙{{더 작게|슉}}夜{{더 작게|야}}애天{{더 작게|텬}}ㅅ威{{더 작게|위}}를畏{{더 작게|외}}ᄒᆞ야이예保{{더 작게|보}}ᄒᆞᆯ디엇다<br/> ::我{{더 작게|아}}將{{더 작게|쟝}}一{{더 작게|일}}章{{더 작게|쟝}}<br/> 時{{더 작게|시}}邁{{더 작게|매}}其{{더 작게|기}}邦{{더 작게|방애}}昊{{더 작게|호}}天{{더 작게|텬}}其{{더 작게|기}}子{{더 작게|ᄌᆞ}}之{{더 작게|지아}}<br/> :時{{더 작게|시}}로그邦{{더 작게|방}}애邁{{더 작게|매}}홈애昊{{더 작게|호}}天{{더 작게|텬}}이그子{{더 작게|ᄌᆞ}}ᄒᆞ실가<br/>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7wp6txpyv7yt1bwh8qecamyaz4wpek6 페이지:詩經諺解 제4책.djvu/33 250 101589 392611 2025-06-26T11:27:01Z Lawhunt 1731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big> :{{더더작게|ᄌᆞ}}ᅵ至{{더더작게|지}}{{분주|ᄒᆞ|니}}鸞{{더더작게|란}}聲{{더더작게|셩}}이噦{{더더작게|홰}}噦{{더더작게|홰}}ᄒᆞ도다<br> ○夜{{더더작게|야}}如{{더더작게|여}}何{{더더작게|하}}基{{더더작게|긔}}{{분주|오|}}夜{{더더작게|야}}鄕{{더더작게|향}}晨{{더더작게|신}}{{분주|이|라}}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有{{더더작게|유}}煇{... 39261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big> :{{더더작게|ᄌᆞ}}ᅵ至{{더더작게|지}}{{분주|ᄒᆞ|니}}鸞{{더더작게|란}}聲{{더더작게|셩}}이噦{{더더작게|홰}}噦{{더더작게|홰}}ᄒᆞ도다<br> ○夜{{더더작게|야}}如{{더더작게|여}}何{{더더작게|하}}基{{더더작게|긔}}{{분주|오|}}夜{{더더작게|야}}鄕{{더더작게|향}}晨{{더더작게|신}}{{분주|이|라}}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有{{더더작게|유}}煇{{더더작게|훈}}{{분주|이로|다}}君{{더더작게|군}}子{{더더작게|ᄌᆞ}}至{{더더작게|지}}止{{더더작게|지}}{{분주|ᄒᆞ|니}}言{{더더작게|언}}觀{{더더작게|관}}基{{더더작게|기}}旂{{더더작게|긔}}{{분주|로|다}}<br> :夜{{더더작게|야}}ᅵ엇더뇨夜{{더더작게|야}}ᅵ晨{{더더작게|신}}을鄕{{더더작게|향}}혼디라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ᅵ煇{{더더작게|훈}}ᄒᆞ도다君{{더더작게|군}}子{{더더작게|ᄌᆞ}}ᅵ至{{더더작게|지}}ᄒᆞ니그旂{{더더작게|긔}}ᄅᆞᆯ볼이로다<br> ::庭{{더더작게|뎡}}燎{{더더작게|료}}三{{더더작게|삼}}章{{더더작게|쟝}}<br> 沔{{더더작게|면}}彼{{더더작게|피}}流{{더더작게|류}}水{{더더작게|슈}}{{분주|ᅵ|여}}朝{{더더작게|죠}}宗{{더더작게|종}}于{{더더작게|우}}海{{더더작게|ᄒᆡ}} </big>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8nt3o2wxj4klwadq99sbje58e3gbz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