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6.0-wmf.26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해석 해석토론 초안 초안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행사 행사토론 번역:공산당 선언/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114 1731 426862 381310 2026-05-05T06:37:15Z ~2026-27195-43 19334 /* 비판·공상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이들과이 -> 이들과의 426862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제목 = [[번역:공산당 선언|공산당 선언]] |지은이 = [[글쓴이:카를 마르크스|카를 마르크스]], [[글쓴이:프리드리히 엥겔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자 = |부제 = 제3장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전 = [[번역:공산당 선언/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제2장]] |다음 = [[번역:공산당 선언/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제4장]] |설명 = }} <div class="prose"> == 반동적 사회주의 == === 봉건적 사회주의 ===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은 그 역사적 지위로 말미암아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써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1830년의 프랑스 7월 혁명과 영국의 선거법 개정 운동에서, 밉살맞은 벼락 부자들이 또 한 번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중대한 정치 투쟁에 관해서는 더 이상 두말할 여지조차 없게 되었다. 귀족들에게는 글을 통한 투쟁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문필 활동 분야에서도 왕정 복고 시대 의 낡은 문구로는 이미 통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귀족들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를 고려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착취받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부르주아지를 고발하는 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지배자를 비방하는 노래를 부르고 약간 불길한 예언을 이 지배자의 귀에 속삭여 분풀이를 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봉건적 사회주의는 일부는 장송곡이요, 일부는 비방문이며, 일부는 과거의 메아리요, 일부는 미래에 대한 위협이다. 때로는 신랄하고 기지에 찬 독설적인 선고로 부르주아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일도 있었으나, 현대사의 진로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희극적인 인상을 남겼을 뿐이다. 귀족들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냥자루를 깃발 삼아 내흔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족의 뒤를 따라나서자마자 그들의 등뒤에 그려진 낡은 봉건적 문장(紋章)을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비웃으며 흩어졌다. 프랑스 정통 왕당파<sup>[16]</sup>의 일부와 청년 영국파<sup>[17]</sup>가 이 같은 희극을 연출했다. 봉건 영주들은 자신들의 착취가 부르주아지의 착취와는 달랐음을 역설하지만, 그들이 지금에 와서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완전히 다른 정세와 조건 밑에서 착취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자신들이 지배할 당시에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현대 부르주아지야말로 자신들의 사회 질서가 낳을 수밖에 없는 산물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이 갖고 있는 반동적 성격을 감추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는 주된 이유는, 부르주아지의 지배 밑에서 낡은 사회 전체를 산산이 부숴 버릴 계급이 발전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일반을 만들어 낸다는 점보다 그들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그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치적 실천에서는 노동자 계급을 강압하는 모든 대책에 동참하고 있으며, 일상 생활에서는 자신들의 모든 미사 여구와는 반대로 공업의 나무에서 떨어지는 황금 사과를 주워 모으며 신의와 애정과 명예를 버리고 양모와 사탕무와 술의 판매로 이익을 누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sup><nowiki><2></nowiki></sup>. 성직자가 언제나 봉건 영주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성직자의 사회주의 또한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을 맞잡고 있다. 기독교적인 금욕주의에 사회주의적 색깔을 입히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기독교 또한 사적 소유, 결혼, 국가를 극구 반대하지 않았던가? 기독교는 그 대신에 자선과 구걸, 독신과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하지 않았던가? 기독교<sup>[18]</sup> 사회주의는 성직자가 귀족들의 분노에 끼얹어 주는 성수(聖水)일 뿐이다. ===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 부르주아지에 의해 타도되어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 생활 조건이 나빠지고 소멸해 가는 계급은 봉건 귀족만이 아니다. 중세의 성외(城外) 시민과 소농민은 현대 부르주아지의 선구자였다. 상공업의 발전이 뒤진 나라들에서는 이 계급이 아직도 신흥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새로운 소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으며,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보완물로서 끊임없이 새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경쟁은 이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계속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시킨다. 그리하여 그들 또한 바로 대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신들이 현대 사회의 독자적인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소멸되고 상업, 공업, 농업에서의 감시인과 고용 사무원들로 교체될 때가 닥쳐옴을 알게 된다. 프랑스와 같이 농민 계급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선 문필가들이 부르주아 체제를 비판할 때 소부르주아·소농민적 기준을 갖다 붙이거나 소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을 편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시스몽디<sup>(21)</sup>는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러한 문헌의 우두머리다. 이 사회주의는 현대적 생산 관계의 모순을 아주 날카롭게 분석해냈다. 이 사회주의는 경제학자들의 위선적인 변명을 폭로했다. 그것은 기계에 의한 생산과 분업이 미치는 파괴적 작용, 자본과 토지 소유의 집중, 과잉 생산, 공황, 소부르주아와 소농민의 필연적 멸망,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 생산의 무정부성, 부의 분배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불평등, 국가간의 처절한 산업 전쟁, 낡은 도덕, 낡은 가족 관계와 낡은 민족성의 와해를 반박할 여지 없이 증명했다. 그러나 그 적극적 내용을 살펴보면, 이 사회주의는 낡은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 및 낡은 소유 관계와 낡은 사회를 부흥하려 하거나 또는 현대의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들을 낡은 소유 관계의 틀 속에, 즉 현대의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에 의해 이미 파괴되었으며 또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낡은 소유 관계의 틀 속에 또다시 억지로 밀어 넣으려한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경우이든 그것은 반동적이며 또 공상적이다. 동업 조합 형태의 매뉴팩처와 가부장적인 농업, 이것이 이 사회주의의 마지막 약속이다. 이러한 노선이 좀더 발전하게 되자 그것은 결국 비겁한 푸념에 빠지고 말았다<sup>[19]</sup>. === 독일 사회주의 또는 '참된' 사회주의 ===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은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억압 밑에서 생겨났으며 그 지배에 대한 투쟁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이 문헌이 독일에 들어온 것은 독일의 부르주아지가 이제 막 봉건적 절대주의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독일의 철학자들, 얼치기 철학자들과 문필 애호가들은 이 문헌에 열렬히 매달렸지만, 이러한 저술들이 프랑스로부터 독일에 들어올 때 프랑스의 생활 조건도 함께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독일의 상황에서 프랑스의 문헌은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모두 잃어버린 채 순전히 문헌으로서의 겉모습만을 띠게 되었다. 이 문헌들은 인간 본질의 실현에 관한<sup>[20]</sup> 한가한 사변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의 독일 철학자들에게는 프랑스 대혁명의 요구가 '실천 이성'일반의 요구라는 것말고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고,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의지 표명이 그들의 눈에는 순수 의지, 즉 응당 그래야 할 의지, 참된 인간 의지의 법칙을 뜻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 문필가들의 저작은 오로지 새로운 프랑스 사상을 자신들의 낡은 철학적 양심과 조화시키거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철학적 관점에서 프랑스 사상을 섭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섭취는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인 자기들 편리한 대로 옮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수도승들이 고대 다신교 시대의 고전 사본에다 카톨릭 성인들의 무미 건조한 전기를 적어 넣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독일 문필가들은 경건하지 못한 프랑스 문헌을 가지고 바로 그와 정반대의 일을 했다. 그들은 프랑스 원전에다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철학적 헛소리를 써 넣었다. 예를 들면,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비판에다 '인간적 본질의 소외'라 썼고,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비판에는 '추상적 보편의 지배 폐지'등등을 써 넣었던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발전에다 자신들의 철학적 상투어를 끼워 넣는 데 대해 그들은 '행동의 철학'이니 '참된 사회주의'니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이니 '사회주의의 철학적 논증'이니 하는 식으로 작위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은 완전히 껍질만 남고 말았다. 그리고 독일인의 손안에서는 이 문헌이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 인의 편파성'을 극복했다고, 즉 사진들은 참된 욕구 대신에 진리의 욕구를, 프롤레타리아의 이해 관계 대신에 인간 일반의 이해 관계를 대변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인간이란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현실적으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철학적 환상의 안개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인 것이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습작을 그렇듯 대단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소리 높여 광고하던 이 독일 사회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현학적 순진함을 잃어 갔다. 봉건 영주들과 절대 군주제에 대항하는 독일, 특히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의 투쟁, 한마디로 자유주의 운동이 차츰 본격적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참된' 사회주의는 마침내 이 정치적 운동에다 사회주의적 요구를 대립시키면서 자유주의, 대의제 국가, 부르주아적 경쟁, 부르주아적 출판의 자유, 부르주아적 법률, 부르주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통적인 저주를 퍼붓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부르주아 운동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반대로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설교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 인들의 비판을 단조롭게 되풀이한 것이었지만, 프랑스 인들의 비판이 현대 부르주아 사회와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생활 조건과 정치 제도, 즉 독일에서는 이제 겨우 쟁취할 대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바로 그 모든 전제 조건들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침 잊고 있었다. 성직자, 학교 교원, 무지 몽매한 융커, 관료들을 거느린 독일의 절대주의 정부들에게는 독일 사회주의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부르주아지를 막아 줄 안성맞춤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참된' 사회주의는 절대주의 정부들이 독일 노동자들의 폭동을 진압할 때 사용한 채찍과 탄환이ㅡ 쓴 맛을 덜어 줄 달콤한 양념이었다. 이처럼 '참된' 사회주의는 독일 부르주아지를 막는 정부의 무기가 된 동시에 반동적 이익, 즉 독일의 속물 부르주아들<sup>[21]</sup>의 이해 관계를 직접 표현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16세기 이래 이어져 내려왔고 그때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로 다시 새롭게 나타나고는 했던 소부르주아지가 현존 질서에서 실제적인 사회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소부르주아지의 유지는 독일의 현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소부르주아지는 공업과 정치에서 부르주아지가 지배하게 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자본 집적에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들이 틀림없이 파멸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소부르주아지에게 '참된' 사회주의는 이 두 마리 새를 잡을 하나의 돌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참된' 사회주의는 전염병처럼 널리 퍼졌다. 사변의 거미줄로 엮고, 진기한 웅변의 꽃으로 수놓고, 달콤한 감동의 눈물로 적신 이 신비한 보자기,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한 두 가지 빈약한 '영원한 진리'를 싼 보자기는 이 군중 사이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상품 판로를 넓혀 주었을 뿐이다. 한편 독일 사회주의측에서도 소시민층의 떠벌이 대변인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점점 더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 독일의 속물들을 모범 인간으로 선언했다. 독일 사회주의는 이 모범 인간의 비열함 하나하나마다 심오하고 고상한 사회주의적 의미를 부여하여, 비열함을 정반대된느 고상한 그 무엇으로 바꿔 놓고는 했다. 마침내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난폭하고 파괴적인' 공산주의 경향을 공공연하게 반대하여, 자신은 모든 계급 투쟁을 초월하여 숭고한 불편 부당(不偏不黨)을 지킨다고까지 선언하기에 이르렸다. 현재 독일에서 나돌고 있는 이른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저작들은 몇몇 개를 빼고는 모두 이 추악하고 퇴폐적인 문헌<sup><nowiki><3></nowiki></sup>에 속한다. == 보수적 또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 부르주아지의 일부는 부르주아 사회의 존재를 공고히하려고 사회의 질병들을 치료하고자 한다.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인도주의자, 근로 계급의 처지 개선론자, 자선 사업가, 동물 애호 협회원, 금주 협회 조직자, 각양 각색의 보잘것없는 개량주의자들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완전한 체계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그 예로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sup>(22)</sup>을 들 수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들은, 현대 사회 존립의 여러 조건은 유지하되 이 조건들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투쟁과 위험만은 없애려 한다. 그들은 현대 사회를 유지하되 그것을 변혁하고 분해하는 요소만은 없애려 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부르주아지를 갖고 싶은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물론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를 최상의 세계로 생각한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이러한 편의적인 관념을 어느 정도 통일성을 갖춘 체계로 완성한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사회주의체계를 실험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권고하고 있으나, 사실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존 사회에 머물러 있되 부르주아 사회를 그 어떤 증오스러운 것으로 보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회주의 가운데 덜 체계적이기는 하지만 더 현실적인 또 하나의 형태가 있는데, 이것은 노동자 계급에게는 이러저러한 정치 변혁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 오직 물질적 생활 조건이나 경제적 관계를 바꾸는 것만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논증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혁명 운동에 염증을 느끼도록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가 말하는 물질적 생활 조건을 바꾸는 것이란 혁명으로만 달성될 수 있는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의 폐지가 아니라 이 생산 관계의 기반 위에서 실현되고 따라서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고작해야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드는 비용을 줄이고 부르주아지의 국가 운영을 간소화하는 행정적 개선을 뜻한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웅변가의 단순한 수식어가 덧붙을 때에만 더욱 그럴듯한 표현이 된다. <center>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자유 무역!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보호 관세!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독방 감옥! </center> 이러한 것이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단 하나의 결론이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란 한마디로, 부르주아는---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부르주아라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 비판·공상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우리가 여기서 논하려는 것은 근대의 모든 대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를 표현한 문헌(바뵈프<sup>(23)</sup>의 저작 등등)이 아니다. 전반적 격동의 시기, 봉건 사회가 무너지는 시기에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직접 실현하려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번째 시도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미숙한 상태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아(이 조건들은 부르주아 시대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과 함께 나타난 혁명적 문헌은 내용이 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편적인 금욕주의와 조잡한 평균주의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계, 즉 생 시몽<sup>(24)</sup>, 푸리에<sup>(25)</sup>, 오언<sup>(26)</sup> 등의 체계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시기,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초기에 태어났다.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부분을 보라.) 이러한 체계를 발명한 사람들도 계급간의 대립과 지배적인 사회 안에서 그 사회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는 아무런 역사적 독자성도, 그들 나름의 고유한 정치 운동도 보지 못했다. 계급 대립의 발전은 공업의 발전과 발맞춰 나아가기 때문에,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이러한 조건을 창출해 낼 사회 과학과 사회 법칙을 찾을 수도 없었다. 역사적 행동 대신에 그들 개인의 창의적인 노력이, 해방의 역사적 조건들 대신에 환상적인 조건들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차츰 계급으로 조직되어 가는 과정 대신에 이 발명가들이 고안해 낸 처방에 따른 사회 조직이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가올 세계 역사가 자신들의 사회적 계획을 선전하고 실행하는 방향으로 귀착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 속에서 주로 가장 고통받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믿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가장 고통받는 계급으로만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계급 투쟁의 미숙한 상태와 그들 자신의 생활 처지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그 계급 대립을 뛰어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모든 사회 성원의 처지를, 심지어는 가장 좋은 조건에 있는 성원들의 처지까지도 개선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늘 아무 구별도 없이 사회 전체에, 아니 주로 지배 계급에 호소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계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는 가능한 최상의 사회에 대한 가능한 최상의 계획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 활동, 특히 모든 혁명 활동을 배격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하며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은 실험을 통해, 즉 실례를 보임으로써 새로운 사회 복음의 길을 개척하려고 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이러한 환상적인 묘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시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환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대에 생겨났으며, 사회의 전반적 변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감으로 가득 찬 최초의 충동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문헌에는 비판적 요소도 들어 있다. 그 저서들은 현존 사회의 모든 기초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노동자들을 계몽하는 데 가장 값진 자료를 제공했다. 미래 사회에 관한 그들의 적극적인 명제들, 예컨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대립 폐지, 가족과 사적 영리와 임금 노동의 폐지, 사회적 조화 선언, 단순한 생산 관리 기구의 국가의 전화, 이 모든 명제들은 이제 방금 발전하기 시작했으므로 처음에는 막연하고 명료하지 않게만 알려져 있던 계급 대립이 중지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들도 아직도 순전히 공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비판·공상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의의는 역사가 발전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계급 투쟁이 발전하여 더욱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됨에 따라 계급 투쟁을 뛰어넘으려는 이 환상적 태도, 즉 계급 투쟁을 극복하려는 환상적 태도는 모든 실천적 의의와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이 체계의 창시자들은 많은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그 제자들은 늘 반동적 종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으로 거듭 발전하는데도 자기 스승들의 낡은 견해를 고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 투쟁을 무마하고 대립을 화해시키려 애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유토피아를 실험에의해 실현하려고 한다. 즉 개별적인 팔랑스테르를 세우고 국내 이민지를 창설하며 소(小)이카리아---새로운 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꾸는 것이다<sup><nowiki><4></nowiki></sup>. 또 이 모든 사상 누각을 쌓으려고 부르주아들의 자비심과 돈주머니에서 나오는 박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차츰 위에 서술한 반동적 또는 보수적 사회주의자들의 부류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들과의ㅡ 차이는 단지 그들이 더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사회 과학의 기적적인 힘에 대한 환상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들이 노동자들의 모든 정치 운동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은 오지 자기들의 새 복음에 대한 맹목적 불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은 차티스트들<sup>(27)</sup>을 반대하고,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sup>[22]</sup>을 반대한다. == 저자의 주 == <nowiki><1></nowiki> 1660~1689년의 영국의 왕정 복고 시대가 아니라 1814~1830년의 프랑스의 왕정 복고 시대를 가리킨다. [1888년 영어판에 붙인 엥겔스의 주--편집자] <nowiki><2></nowiki> 이것은 주로 독일의 경우에 해당한다. 독일에서는 토지 귀족과 융커들이 관리인을 두고 토지의 대부분을 자기 돈으로 경작하고 있으며, 게다가 설탕 공장과 양조장에서 나오는 생산물만 해도 무척 많다. 좀더 부유한 영국의 귀족은 아직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다소간 미심쩍은 주식 회사 설립자들에게 명의를 빌려 줌으로써 줄어든 지대를 메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1888년 영어판에 붙인 엥겔스의 주--편집자] <nowiki><3></nowiki> 1848년 혁명적 폭풍은 이 추악한 유파 전체를 싹쓸이해 버렸으며, 이 유파의 지지자들은 계속 사회주의를 앞에 내세울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 유파의 주요 대표자이자 고전적 전형은 칼 그륀 씨다. [1890년 독일어판에 붙인 엥겔스의 주--편집자] Karl Grun(1817~1887년) 소부르주아 언론인. 1840년대에 '참된' 사회주의의 주요 대표자였다.--역자 <nowiki><4></nowiki> 팔랑스테르(Phalanstere)는 푸리에가 고안한 사회주의적 정착지. 이카리아(Ikarie)는 카베가 자신의 유토피아에 붙인 이름으로, 그 뒤 그는 자신이 미국에 세운 공산주의적 정착지도 이카리아라 불렀다. [1888년 영어판에 붙인 엥겔서의 주--편집자] '국내 이민지'(Home Kolonien)란 오언이 자신의 공산주의적 모범 사회에 붙인 이름이다. 팔랑스테르는 푸리에가 계획한 공공 궁전의 이름이다. 이카리아란 카베가 묘사한 공산주의 제도를 실시하는 유토피아적 환상의 나라를 가리킨다. [1890년 독일어판에 붙인 엥겔스의 주--편집자] == 편집자의 주 == [16] 정통 왕당파(Legitimisten) 1830년에 타도된 부르봉 왕조의 추종자들로 세습적인 대토지 소유 귀족의 이해 관계를 대변했다. 이들은 금융 귀족과 대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던 오를레앙 공의 왕정(7월 왕정)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이때 정통 왕당파의 일부는 종종 대중 선동에 호소하면서 부르주아지의 착취로부터 근로 대중을 보호하는 척했다. [17] 청년 영국파(Young England) 토리 당에 속하던 영국의 정치가와 문필가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1840년대 초에 형성되었다. 부르주아지의 정치·경제적 힘이 커짐에 따라 토지 소유 귀족들의 불만을 대변하던 청년 영국파의 대표자들은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여 부르주아지와의 싸움에 이용하려고 선동적인 수단에 호소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의 의도를 '봉건적 사회주의'라고 했다. 청년 영국파의 주요 대표자는 디즈레일리, 칼라일(Thomas Carlyle) 등이다. [18] 1848년판에는 '선성한'(heilige)으로 되어 있었다. [19] 1888년판에는 이 문장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에 의해 자기 기만의 황홀함이 모두 깨지고 나자,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가련한 푸념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20] 1848년판에는 '참된 사회에 관한'이라는 말이 덧붙어 있었다. [21] 속물 부르주아들(Pfahlburgerschaft)이라는 말이 1888년판에는 속물들(Philister)로 되어 있다. [22] 개혁주의자들(Reformisten) 1843년부터 1850년까지 파리에서 발행된 신문 『개혁』의 추종자들. 공화국 수립과 민주·사회적 개혁 수행을 옹호했다. 역자의 주 (21) Jean Charles Sismonde de Sismondi(1773~1842년) 스위스의 경제학자, 역사가.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에서 자본주의를'(레닌) 비판했으며 소생산을 이상형으로 제시했다. (22) 프루동은 1846년에 자신의 두 번째 저작이자 최초의 경제 이론서인 『빈곤의 철학』(Philosophie de la misere)를 썼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에게서 『빈곤의 철학』을 받아본 뒤 곧, 이를 비꼬아서 『철학의 빈곤』(Misere de la philosophie, 1847)을 발표하여 프루동의 주장을 격렬히 비판한 바 있다.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경제학의 범주를 물질적 생산력 발전의 특정한 단계에 조응한 생산 관계의 이론적 표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마치 모든 현실보다 앞서 존재하는 외부적 이념인 양 변형했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프루동은 계급 모순이 조화와 평등이라는 일종의 공상적 청사진에 의해 폐지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23) Francois Noel Babeuf(1760~1797년) 프랑스의 초기 공산주의 혁명가.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796년에 '평등자단'을 조직하여, 소수의 음모자들에 의한 혁명적 봉기를 일으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평등자단'의 음모는 봉기를 겨우 몇 시간 앞두고 발각되어 바뵈프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평등자 선언』에는 자신이 구상한 혁명 이론과 사회 건설 방안이 담겨 있다. (24) Claude Henri de Rouvroy de Saint-Simon(1760~1825년) 프랑스의 명문 귀족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 19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전통전인 토지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빈곤·실업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에 생 시몽은 『산업 체계론』, 『산업가 교리 문답』등을 발표하여, 다가올 산업 사회를 산업가를 중심으로 다시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25) Francois Marie Charles Fourier(1772~1837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푸리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부르주아지의 탐욕을 비난하고, 사람들이 노동한 양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받는 이상 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설교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많은 사회주의 이상촌은 건설했으나 실패했다. (26) Robert Owen(1771~1858년) 영국의 노동 운동가, 사회 개혁가. 오언은 뉴라나크(New Lanark)의 대방적 공장의 소유자로 일찍부터 노동자의 참상을 깨닫고 협동 조합 운동을 주도했다. 오언은 평등 사회 건설을 꿈꾸고 사재(私財)를 털어 1825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공산촌인 뉴하모니(New Harmony)를 건설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7) 차티스트들(Chartisten)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의 지지자들. 이 운동은 노동자 계급이 주도한 세계 최초의 정치 운동으로 1836년부터 184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선거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으며,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div> [[el:Μανιφέστο του Κομμουνιστικού Κόμματος/Κεφάλαιο 3: Σοσιαλιστική και Κομμουνιστική Φιλολογία]] [[ru:Манифес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Часть III]] nq88oci9op9bl9mhboj6lpzmhbui820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방송극/텔레비전 드라마/텔레비전 영화 0 14062 426866 317719 2026-05-05T08:21:14Z ~2026-27089-40 19335 426866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부제=텔레비전 영화 |이전=[[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방송극/텔레비전 드라마/텔레비전 드라마와 제작|텔레비전 드라마와 제작]] |다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방송극/텔레비전 드라마/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 ==텔레비전 영화== television映畵 영상예술로서의 텔레비전영화가 브라운관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 된 일은 아니다. 영화라 하면 본래 극장영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텔레비전이 보급됨에 따라 점점 브라운관에 방영(放映)하기 위한 영화 제작의 필요성이 높아졌고, 그러한 종류의 영화를 극장용 영화와 구별하여 편의상 텔레비전영화라 부르게 되었으나, 본질적으로 양자 사이에 별 차이는 없다. 또한 극장에서 공개되었던 영화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어도 이를 텔레비전 영화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텔레비전 영화란 처음부터 텔레비전 방영을 목적으로 기획·제작된 것을 가리키는 호칭이며, 극장용 영화와 구별하기 위한 명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텔레비전 드라마(스튜디오 드라마)와 비교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명칭이 아닐까 한다. ==텔레비전 영화와 극장영화== television映畵-劇場映畵텔레비전 영화와 극장용 영화가 제작상 본질적으로 같다고는 하나, 이것을 감상하는 쪽(시청자·관객)에서 생각해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다. 텔레비전은 가정의 안방에 모인 온 가족을 대상으로 하지만 극장영화는 극장이란 특정한 장소를 찾아오는 관객을 대상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자연히 제작목표가 달라지며, 목표가 달라짐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수법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러한 차이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 screen-Braun管 텔레비전 방송은 가정에서의 시청자를 중요한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상기의 크기로 인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텔레비전영화는 한정된 넓이의 브라운관을 의식하고 제작되기 마련이다. 극영화 역시 스크린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브라운관과 스크린은 그 영상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으며 그 점에서 두 장르의 방향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극영화는 스크린을 확대함으로써 대형화되어 왔고 대형 영상(映像)의 매력으로 어필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 구체적인 예가 시네마스코프에서 70mm영화, 시네라마 등의 개발이다. 즉 텔레비전 영화가 재래의 극영화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극영화는 대형화로써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던 양자가 기획적으로나 각본·연출상으로 점점 갈라져 나가는 현상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일 뿐만 아니라 극영화와 텔레비전 영화의 제작기술의 분화는 단지 각본·연출 부분에 그치지 않고 카메라워크·연기, 그 밖의 부분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어 장래에는 텔레비전 영화와 극장영화는 같은 영상예술이면서도 각기 독특한 장르로서 분명하게 구별될 날이 올 것이다. ==텔레비전 영화와 스튜디오 드라마== television 映畵-st­udio drama 극장영화와 텔레비전 영화는 과도적인 현상으로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나, 제작상으로 보아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스튜디오 드라마라 불리는 것 중에도 부분적으로는 영화를 사용한 것도 적지는 않으나, 원칙적으로는 스튜디오 안에서 연출되는 드라마를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방영하는 것이므로 영화와는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스튜디오 안의 한정된 공간 속에서 1편의 드라마가 연출된다는 점으로 볼 때 영화보다는 오히려 무대극적인 요소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최근에는 비디오테이프의 도입에 따라 영화적인 화면 구성에 가까운 경향을 가진 스튜디오 드라마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텔레비전 영화보다는 오히려 스튜디오 드라마 쪽에서 참다운 텔레비전의 특성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극장과 달리 가정 안의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친근감은 스튜디오 드라마의 커다란 무기이며, 이른바 영화적 수법의 카메라워크에 의지하지 않고 무대극적인 생생한 호소(呼訴)가 가능하다는 점에 스튜디오 드라마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무대극적이라 할지라도 무대극 중계가 가진 약점(즉, 극장이나 무대 구조의 제한 속에서의 카메라워크는 드라마 연출의 참된 중계가 불가능하다)을 커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본에서 연출 분야상 이후 스튜디오 드라마는 더욱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텔레비전의 가능성을 좀더 살릴수 있는 방향으로 탐구가 계속될 것이며, 현재의 텔레비전 영화의 수법도 점점 극장용 영화 수법을 떠나 독특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역이 개척되리라 생각된다. ==연속 텔레비전 영화와 단막 텔레비전 영화== 連續televi­sion 映畵-單幕television 映畵 연속 텔레비전 영화란 1회로 완결되지 않고 1주 1회 혹은 매일 연속 방영하되, 몇 회 또는 그 이상으로 완결되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이에 비해 단막영화란 1회로 완결되는 드라마이다. 물론 연속 텔레비전 영화라 할지라도 매일 방영되는 것을 '일일연속드라마'라 불러 1주 1회씩 방영되는 주간연속드라마와 구별하고 있지만, 어쨌든 1회로써 드라마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단막드라마와 구별된다. 연속물이라 하더라도 등장하는 인물은 동일하나 드라마 자체는 1회마다 완결되는 형식인 것도 있다. 이것은 단막영화를 몇 번에 걸쳐 방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단막영화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연속드라마와 단막드라마는 시청자가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연속드라마인 경우 드라마가 전개하는 스토리의 흥미가 감상의 주안점이 된다. 연속물인 1회의 영화가 끝날 때, 다음 회에 흥미를 갖게 하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상례인데 단막영화의 경우는 그러한 배려는 필요 없으며, 드라마의 종료와 함께 시청자가 만족하기만 하면 족한 것이다. 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드라마 기법이 서툴다는 평을 받아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단막영화는 극장영화와 그 점에서 거의 다름이 없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은 영화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극장용 영화에 비해 텔레비전 영화의 길이는 짧다. 따라서 드라마 작법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생기는데, 그 점은 전문적인 영화작법에 속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며, 간단히 요약하면 한정된 시간 안에 그 테마를 어떻게 화면에 표현하고 시청자(관객)에게 감명을 줄 것이냐에 귀결된다. ==텔레비전 영화의 각본과 연출== television映畵-脚本-演出텔레비전 영화의 각본이란 무엇인가를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일은 상당히 곤란한 일에 속한다. 텔레비전 영화에 각본이란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으리라 생각되는 마당에, 각본의 형식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억지로 말하라면 드라마 전체의 내용을 문자화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각본을 바탕으로 영상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프로듀서가 맡고, 디렉터는 각본에 지정된 등장 인물이나 그 밖의 것을 영상으로 구상화(具象化)하는 작업을 맡게 된다. 따라서 연출과 각본은 별개의 독립된 것이지만, 영상화되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을 때의 작품은 그 어느 한쪽도 아닌 공동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 각본과 연출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는 점이 흔히 논의되지만, 이것은 박수를 칠 때 어느 쪽 손에 의해 소리가 났는가를 논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왼손만으로 혹은 오른손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듯이 각본만으로 혹은 연출만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자의 형태로 된 각본은 한 예술작품으로서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같은 각본을 가지고 연출을 해도 연출가에 따라 다른 영화가 만들어진다. 이 점에서 작품이나 연출가의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각본을 어떤 연출가가 연출하든 같은 영화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연출가의 독자성인 창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마치 주형(鑄型)에 쇳물을 부어 주물을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작업이 될 것이다. ==텔레비전 영화의 각본== television映畵-脚本 텔레비전 영화는 각본과 수법에 있어서 일반 극영화와 근본적인 차이는 없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각각 극장의 관객과 안방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각본 작법이나 집필 자세에 있어 다소 차이가 생긴다. 텔레비전의 경우 안방의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은 남녀노소·교양·생활환경 등의 점에서 극장의 관객과는 다르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할 강의를 중학생들에게 이해시키려면 거기 알맞는 세심한 배려가 교사에게 요구되듯이 텔레비전 영화는 시청자의 최대공약수를 포착해야 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제작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각본의 수준(내용)을 낮추라는 얘기는 아니다. 어떤 드라마를 영화로 만들려 할 때 작자는 테마를 설정하고, 인물의 배치, 스토리의 전개와 전체적인 구성, 대사·장면의 안배 등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브라운관을 염두에 두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천차만별의 시청자를 생각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즉, 드라마는 우선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는 제아무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시청자에게 공감이나 흥미를 갖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자는 텔레비전 영화의 가능성이나 한계라는 점에서 규제를 받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수십만 시청자에게 호소하는 예술이며,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도 느끼게 된다. 텔레비전의 각본이 종래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텔레비전 영화의 연출== television映畵-演出 70년대 우리는 텔레비전 영화 제작에 따른 여러 기법상의 문제로 텔레비전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못하여 당시 방영된 텔레비전 영화는 모두 외국, 특히 미국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1980년 첫 방송을 한 KBS-1TV의 은 국내 명작소설과 기타 작품을 TV드라마로 극화해서 방송함으로써 영상을 통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한편 MBC도 83년 을 방영하여 '텔레비전 영화' 시대를 겨냥한 프로그램으로 다채로운 영상 표현과 다양한 주제와 접근 방식을 택하면서 풍자나 사회의식, 추리나 멜로물의 요소까지 폭넓게 동원해 텔레비전 영화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 텔레비전 영화의 연출이 초기에 있어서는 거의 기성 작가에 의해 이루어져 온 것은 어느 나라고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기성감독들도 텔레비전 영화를 자주 연출하게 되자 연출 방법에 변화가 생겼다. 앞에서 말했듯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고, 스크린보다 훨씬 작은 화면에 드라마를 전개하는 테크닉(예를 들면 화면구성·연기지도·장면 전환·커트 인·나레이션의 사용 등)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음악·미술·의상 등의 면에서도 마찬가지며, 텔레비전 영화에는 텔레비전 영화에 알맞는 연출 테크닉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편지 같은 것의 클로즈업된 커트 인이 나왔을 때, 극장영화의 경우엔 관객들은 편지나 일기에 적힌 내용을 직접 읽음으로써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크기가 한정된 브라운관에서는 읽기 어려우므로, 편지를 쓴 사람이나 받은 사람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을 넣는 등의 방법이 친절한 방법이며, 편지나 일기장을 커트 인하지 않고 편지를 읽는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킬 수도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두 인물의 얼굴을 번갈아 업(up)시키는 것이 효과적인데, 그것은 화면이 작은 브라운관의 영상에서는 극장영화처럼 드라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풍경을 배경으로 깔아도 별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텔레비전 영화의 개념과 특성을 간단히 소개했는데, 현재의 텔레비전 영화는 각본·연출 그 밖의 면에서 독특한 수법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극장용 영화의 수법에서 탈피한 순수한 텔레비전 영화의 기법 개발은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4jg07jsjy3mrq4d190fa3g2jxtcrexc 주리야 0 37136 426859 155531 2026-05-04T13:06:28Z ZornsLemon 15531 426859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주리야 |다른 표기=朱利耶 |저자=[[저자:이효석|이효석]] |설명=출전: <新女性>, 1933.3~1934.3 }} == 생활의 노래 (生活譜) == 「짱 겐 보」 「짱 겐 돌」 「짱 겐 칼」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듯 이르니, 「로오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로오자라고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싫어요—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그것이 소아병이란 거야.」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오자가 크게 실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 로오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로오자가— 부엌에서— 암만해도 어색한 걸.」 「로오자가 별 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도 짓고 옷도 기워야지.」 「행주치마 입은 로오자.」 「참으로 장한 로오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나는 공설시장의 로오자인가요?— 장에 가는 건 내게만 맡기니.」 「암, 공설시장의 로오자요, 방안의 로오자요, 거리의 로오자요.」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오자, 그런 로오자는 오늘부터 폐업이여요.」 「땅속의 로오자가 슬퍼하게.— 어서 장에 나갔다 와요.」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 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하니까요.」 책상 위에 펴 놓은 로오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활의 잔치 마당이에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 그 속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 그같이 신성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그러믄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요?— 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띄우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sic|재}}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찬란하게 비치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나물 바구니— 생활 바구니.)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 생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 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 가지고 올게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드러냄표|벙어리|sesame}}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빼죽이 솟는 돈 닢이 한 닢 두 닢 좁은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푼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r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 속에 넣고 날마다 한 닢 두 닢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갈지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 이것을 생각할 때에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 그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워 노세요. 네?」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게 덥석 전신을 의지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문질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는—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능금 한 입 드릴까?」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서요. 한 입 이상은 안 되요— 행길에서 먹을게 없어지게.」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나의 능금 누가 사노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모로코」에서 디이트릿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리로 읊으면서 주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 못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한숨.— 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졋을 때에 주화에게는 두 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 잊어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건넌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어느덧 뜰 안에 봄이 가득 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벌써— 봄.) 주리야와의 몇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로오자는 못 되더라도— 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 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다 먹고 난 속심을 뾰족한 구두 끝으로 툭 차버릴 주리야— 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과 진열장의 미학(美學)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 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 길게 떨어뜨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섰을 주리야— 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에 그려볼 때 주화에게는 석 달 전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나왔다— {{문단 그림}}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독특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 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 항구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 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이 어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걸이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은 귀엽다고 생{{sic|간|각}}하였다. 나이 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부는 못 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 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리는 동안에 문득 꿈을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계셔요?」 주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에!」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 여자— S 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 보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성진 사는 김영애요.」 「대체 웬일이요.— 들어오시오.」 「편지도 안 드리고 문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우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내렸다.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왔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 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이 바라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 왜 그리 일찍 주무세요?」 듣고 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 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있소.— 그것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흠— 대담한 용단이시군.」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속이 백짓장같이 하아얀 넌센스 뽀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 결혼의 희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드러냄표|노라|sesame}}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에요.— 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 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는 안 돌아갈 작정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 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왔으니까요.」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 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는 못했을 거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에요.」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 당분간 살 만한 것만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 하고 그는 슈우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을 집어내서 주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놀라서 그를 똑바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 쓰면 한 일 년 지탱해 갈는지요.」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다 할는지— 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슈우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 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 놓고는 자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 등 얇다란 몇 권의 팜플렛이었다.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 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 빈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 한구석에 간수하였다. 주화는 그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 두 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도의 정도를 넘은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의 사상의 경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할 수 없었다. ----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간 자세를 이지러뜨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의 절대적임을 언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듯이 기뻐하며 다음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삭월세로 빌려 놓고 약 백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만하고 따로 백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 「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 「리야」를 빌어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정한 생산과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이 괴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는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이퍼(이렇게 부르기는 과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주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신의 피가 수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가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그칠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채의 전개— 책을 아직 반도 넘기지 않은 이제 주화는 주리야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 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서 준 것은 무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속을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에 생긋 웃고 섰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드러냄표|카페|sesame}}(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 대로 {{드러냄표|샐러드|sesame}}나 맨들구요.」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그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고 하꾸라이가 아니라요, 크로오바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먹어 본 탓인지.」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 갑에 든 크로오바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 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드러냄표|샐러드|sesame}}, 카페와 숭늉— 이 칵테일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렇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떤 때에는 {{드러냄표|햄|sesame}}이나 {{드러냄표|소오세지|sesame}} 조각을 사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되게까지 되었던 거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하고 탄식하였을 때 주화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치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지」 하고 도리어 톡톡이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에도 가야 하지 않겠소?」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 석 달 동안이나 데리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이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에요?」 「석 달 동안이나 벼르고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드러냄표|견학|sesame}}할 자격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직공과도 친해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찍이 가 봅시다.」 「네— 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기뻐서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이 뚫어져 뾰족이 내다보이는 하아얀 한 개의 별— 석 달 동안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성가족(聖家族) == 「대체 어데까지 끌고 가실 작정예요?」 「따라만 오구려.」 「지도에도 없는 세상 속으로 데리고 가실 셈이군.」 「지도에 없는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도에 없는 세상이라면 천당과 지옥인데 끌고 가시는 곳이 대체 어데예요?」 「지옥일는지도 모르지.」 「맙소사. 천당으로 못 데리고 가실지언정 지옥으로 끌고 가시겠어요?」 「그럼 천당으로—」 「성스러운 가족 사는 세상으로요.」 종종걸음으로 주화의 뒤를 따라가는 주리야는 이 한가하지 못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재담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장식하려 하였다. 시구문 안, 전차를 내려서 좁은 옆 골목으로 한 마장 가량이나 걸어 들어가도 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나는 곳이 없었다. 전등 하나도 달리지 않은 골목 안은 유심히도 어둡다. 도희의 불빛이 밤하늘 위에 우렷이 흐려있을 뿐이요, 그것이 이 동떨어진 어두운 골목 안까지 비취이지는 않았다. 서울 온 지 석달에 아직 거리 거리의 지리가 밝지 못한 주리야에게 이 궁벽한 지대는 생각지도 못한 딴 세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전등 하나도 없다니.」 길바닥이 어두워서 발밑이 허전허전하는 주리야는 주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길을 더듬으면서 게두덜거린다. 「아마도 지옥인가 보오.」 껄껄 웃는 주화가 얄궂게 생각되었다. 「난 도로 갈 테예요.」 「여기까지 왔다 도로 가다니...... 가만 있소. 다 왔나 부오.」 하면서 주화는 무뜩 눈앞에 닥치는 대문 앞에 머물렀다. 「낙원에서 지옥까지가 아흐레 동안의 길이라더니 전찻길에서 여기까지 아마 구 분은 걸렸나 봐요.」 「농담은 그만 두고 따라 들어 오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도래를 틀고 손쉽게 문을 열더니 주리야를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지옥이고 천당이고 간에 다 왔으니 시원하군요.」 한 간의 조촐한 대문과는 딴판으로 뜰 안은 침침한 어둠 속에 넓직하게 퍼져 있고 그 네모에 마룻대를 달리한 여러 채의 초라한 집이 들어섰음을 보아 그 안은 한 집안이 아니라 채마다 다른 가호가 들어있음을 주리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뜰 복판에 지붕 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아도 돌 틈에 푸르칙칙하게 이끼 끼인 그 우물이 집안 전체에 우중충한 느낌을 주었다. 가호마다의 생활의 자태를 첫눈에 엿볼 수는 없었으나 전체에서 받는 첫인상은 심히 우중충한 것이었다. 우물과 같은 칙칙한 생활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 밑을 조심해요.」 주화는 우물 옆을 돌아 구석으로 훨씬 들어박힌 서편 가호의 뒤로 돌아갔다. 첫걸음의 발 설은 어둠길을 주리야는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가호와 동떨어져서 외딸리 아늑하게 서편으로 향한 그 집을 돌아 정면에 이르렀을 때에 좁은 뜰로 향한 두 간의 방에서는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인기척이 없고 고요한 공기가 바닷속같이 주위에 잠겨 있다. 「바로 이 집이요.」 「성당같이 고요하군요.」 「성당같이 고이 올라 오오.」 야트막한 툇마루에 오르더니 주화는 말도 없이 아랫방 문을 열고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주선생님이시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여인네의 얼굴이 밀장 사이에 어리웠다. 「시스러워 여기지 말고 들어오.」 주화는 주저하는 주리야를 내다보고 다시 여인네를 향하였다. 「주리야를 데리고 왔는데.」 여인네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더니 마루로 뛰어나왔다. 「들어오시오.」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초면의 따뜻한 손길에 끌려 주리야는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첫 인사는 아무 것도 없이 끔직이도 반가워하여 주는 따뜻한 애정에 주리야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한 느낌을 받아 그 자리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어지러운데 와주시노라구.」 여인네—주화에게서 늘 들어온 남죽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 려진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어 한구석에 뭉쳐 놓았다. 오 랫동안 고생에 폭 바스러진 까무잡잡한 남죽의 얼굴에 주리 야는 첫눈에 친밀한 「언니」를 느꼈다. 「진작 오려던 것이 생각만 앞서고 여의치 못했어요.」 「나야말로 늘 주선생께서 듣기만 하면서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남죽은 주리야를 진득이 바라보며, 「살림살이 바쁘시지.」 고향이 같은 관북의 이웃 고을이라는 생각이 도와서인지 즉석에 한집안 식구와 같이 피차의 감정과 의사가 유통되었다. 몇마디를 건너지 않아 벌써 두 사람의 마음은 긴밀히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땅속의 세상일 는지도 모르기는 하나 주리야가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같 이 낯설고 서마서마한 곳은 아니요, 마음의 세상에는 땅 위 땅속이 없이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쉽게 합류되었던 것이다. 「오늘 면회하였소?」 주화는 남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면회는 못했어요. 요전에 면회한 지 몇날 안된다구 허가 를 해주어야지요. 겨우 헌 옷가지를 차하해 왔을 뿐이지요.」 「공연히 공장만 하루 때려눕혔군요.」 「그런데 요사이 건강이 퍽 부실한 모양이여요.」 「그 동무 말아니군—검거될 때부터 심장이 약하던 사람이 예심에 거의 일년이나 있게 되니 안그럴 리 있겠노.」 「요전에 면회할 때부터 신관이 몹시 축났기에 걱정은 했 지만—오늘 편지로 자세히 들으니 아주 심한 모양인데요.」 「편지로요?」 「차하해 내온 옷을 뜯었더니 저고리 솜 갈피 속에 이런 것이 나왔어요.」 하며 남죽은 치마띠 사이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한 장의 종 이 조각을 집어내서 주리야의 눈앞을 서슴지 아니하고 주화 에게 주었다. 「혈서이군.」 종이 조각을 펴 들자 주화의 양미간에는 볼 동안에 수심의 주름이 잡혔다. 「입술을 깨물고 피를 내서 간수의 눈을 숨겨 가며 차입해 준 코종이에 깨알 박듯 그렸겠지요—늘 하는 짓이니.」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서 주리야는 가벼운 몸서리를 치 면서 주화가 든 혈서의 조각을 무시무시 바라보았다. 내려 읽는 주화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주리야는 불시에 수군거리는 사람 의 음성을 들었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고 외국어의 단어를 외우는 것도 같은 가는 목소리는 확실히 웃방에서 흘러나오 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있는 웃방에 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 있는 웃방 장지를 바라보았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린 후 책 덮는 소리 가 나더니 웃방 장지가 가볍게 열렸다. 그칠 새 없이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상스러워서 은 근히 그쪽만 바라보고 앉았던 주리야는 열린 장지로 나타난 그 인물에 적지아니 놀랐다. 「저이가......」 주리야는 집에 가끔 주화를 찾아오는 그 대학생을 이 낯설 은 곳에서 만날 줄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주동무요.」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그는 주화들이 와 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있으련만 의아한 눈초리로 주리 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리야의 더욱 이상스 럽게 여긴 것은 뒤미처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낯설은 처녀였다. 어떤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그 처녀가 남죽의 동생 남희인 줄은 물론 첫눈에 집작할 수 있었으나 그와 이 대학 생이 한방에서 수군거리는 친밀한 사이에 있다는 것이 그러 한 장면을 처음 당하는 주리야에게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려워서 못해 먹겠다.」 낯설은 주리야를 보고 문턱에서 주춤한 남희는 부끄러운 펴정을 이런 탄식으로 얼버무려 넘기면서 언니 옆에 사뿐 내려와 앉았다. 주리야는 여자다운 민첩한 신경으로 수줍어하는 남희의 태 도와 겸연쩍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과 남희 두 사람 의 서먹서먹한 이를 첫눈에 느꼈다. 「한달이나 두달로 그렇게 쉽게 깨치겠소?」 대학생인 민호는 딴전을 보면서 남희에게 말하고 주리야를 바라보며, 「주동무는 불란서말 공부하신다지요?」 주화를 부를 때 쓰는 「주동무」로 주리야를 부르는 것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친밀의 느 낌이 없지 않음을 깨달은 주리야는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 게, 「심심풀이로 강의록을 뒤적거릴 뿐이지 정성을 들여야 말 이지요.」 「남희 불란서말은 안 배우려우.」 「그렇게 한가한 것 배울 틈 있나요.」 민호의 농담에 남희는 가볍게 반박하며 주리야를 흘끗 바 라보았다. 웬일인지 이 한마디가 주리야에게 불현듯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남희와 불란서말을 공부하 는 자기와의 의식의 정도, 피차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주리 야가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이 말에서 받는 불쾌한 느낌을 마지 못하였다. 남죽에게 「언니」를 느낀 그는 남희에게도 응당 친밀한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나 웬 일인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도리어 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가 본데.」 편지에만 열중하였던 주화는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남죽을 바라보았다. 「이왕 들어가 있는 이상 고분고분히 일르는 대로 했으면 좋을 것을 공연히 쓸데 없는 반항을 하는 모양이예요.」 남죽의 뒤를 남희가 받아서, 「아재는 원래 피가 관 분이래서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시 게 되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청대로 보석 운동을 해보시지.」 「보석 운동인들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보석이라면 저도 힘써 보지요.」 민호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희망도 있으니 우선 이변호사를 찾아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나도 만나는 대로 말해 보지만.」 「이변호사에게 폐를 끼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형무서에 서 여간해서 승낙하겠어요? 병이 쇠해 빠져서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옥을 시키는 형편인데.」 한숨을 짓고 남죽은 계속하여, 「그러고 둘째로 보증금이 수백원은 들 터인데 그것을 또 어데서 어떻게 구하겠어요.」 「어떻든 유예할 경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곧 이변호사를 찾아보시도록 하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죽은 날쌔게 혈서를 접서어 치마 틈에 수습하고 널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었다. 박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누구시라구요.」 긴장이 풀리며 남죽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들 다 오지 않었소.」 박선생은 문득 주리야를 발견하고, 「주씨 웬일이요.」 의아한 눈을 던졌다. 늘 집으로 찾아오는 박선생 처소를 항상 변경하면서 돌아 다니는 그에게 가끔 저녁을 대접한 일까지 있는 박선생—그를 문득 이런 곳에서 만나니 친밀한 느낌이 났다. 「바람도 쏘일 겸 놀러 왔지요.」 「놀러......」 「올 때들이 되었는데 아직 안 오는군.」 주화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이 있나 부구나—주리야는 직각적으로 느꼈다. 놀 러왔다는 말을 듣고 박선생이 놀라는 것이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도 주화는 모임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극히 신중히 해나가는 모임인 것같이 짐작되었다. 따라서 그가 참례할 바가 못 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이만 실례할까요?」 하고 주화의 의견을 묻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글세...... 있으려면 있구.」 꼭 있으라고는 권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임에는 참석 시키지 말고 우선 집만 가리켜 줄 작정인 듯하였다. 「더 놀다 가시지, 이런 것 저런 것 보아 두세야지.」 박선생의 권고를 그러나 주리야는 사양하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밖의 아마도 「동무」들의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 가 났다.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오.」 하고 그를 보내는 주화에게 체면에 차마 달려들어 어리광 을 피우지는 못하고 점잖게 대답하면서 좌중에 목례를 남지 고 방을 나갔다. 「아리랑에 잠간 들렸다가 바로 집에 가 있을께요.」 야영 백화점에 들려 늘 하는 버릇으로 막연히 찬란한 층층 을 한 바퀴 돈 후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다시 단골로 다니는 조촐한 차점 「아리랑」에 들려 진한 코오피를 청하 였다. 코오피 인이 꼭 박혀버린 주리야는 하루에도 여러 잔은 예 사로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의 건강을 해롭히지 는 않았다. 코오피의 향기와 쓴 맛이 그의 비위에 꼭 맞았 던 것이다. (발자크는 긔의 일생을 코오피 마시고 소설 쓰는데 바쳤다지. 나도 그이와 같이 자바보다도 브라질보다도 모카가 제일 좋아.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평생 코오피나 실컷 마셔 볼까)하면서 그의 코오피의 습관을 발자크의 풍류에 비기는 주리야였다. 그러나 그 습관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 색한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 감정에 꼭 들어맞는 극히 자연 스러운 것이었다. 「크림은 넣지 말까?」 「아무렴. 시커먼 진짬으로 한 잔.」 어느결엔지 벌써 퍽 친밀한 사이가 된 차점의 여주인 한라 에게 주리야는 손짓과 웃음을 던졌다. 「오늘 난 좋은 곳에 갔다 왔지.」 한라가 손수 코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없는 고요한 탁자에 주리야와 마주 앉았을 때에 주리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데라니. 천당에?」 「천사들이 있는 대신 거츠런 장정들이 모이는 곳에.」 「장정들이 모여서 천국을 세우려고 애쓰는 곳에 말이지.」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끔찍한 세상을 보았소— 피가 난 모둠 계획.......—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연히나 마 짐작되는 것 같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쾌한 레코드나 한 장 걸가. 주리야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도 한 장.」 하면서 일어서려는 한라를 그러나 주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붙들어 앉히고, 「오늘밤 만은 나의 기분을 깨뜨리지 말고 고요히 그대로 두어요......나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랫동안 잊었 던 한 구절의 시가 가슴속에 솟아 오르겠지.」 「에구, 오늘밤에는 또 왜 이리 센티멘탈해졌어.」 「놀리지 말구 이것 좀 들어봐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리야는 한 구절의 시를 읊기 시작하 였다. 하아얀 횟돌의 조각이 있고 꽃향기 넘치고 햇볕이 창에 얼기설기 비치는 곳 이글이글 타는 난로와 음식장과 유리잔 있는 곳 거기에서 꿈을 꾸고 그대를 생각하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이지러진 한 개의 탁자가 있다. 쉬어빠진 한 잔의 술이 있다. 낡은 한 권의 성서가 있다. 끄슬러서 침침한 등불이 있다. 시들어버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유리창 밖에는 진눈깨비와 바람이 불고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에 떨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니라. 「아니 어데서 그런 시를 외웠소?」 듣고 난 한라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면서 주리야의 코를 끄 들었다. 「훌륭하지.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읊은 아름다운 노래야.」 「가난한 줄 이제 알었나.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싸움터로 나가야 할 시절이니라—고 고쳤으면 좋겠군—우리도 현재 이런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시가 아니라 소시민적 감정을 표현한 잠꼬대야.」 「이지러진 탁자. 쉬어빠진 술. 어두운 등불—시상으로 얼마 나 훌륭하우. 나는 여기에서 한 편의 푸로시를 발견한 듯한데.」 「푸로시에 아스파라거스는 다 무어야. 세상에는 아스파라 거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렁우. 진정한 푸로시 되려면 아직 구만리의 거리가 있어.」 사귄지는 오래지만 한라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의견을 듣기 는 처음이었다. 마음속에 그 무엇이 있듯이 평소에 멍하고 있는 한라이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이러 한 소리를 하는 호늘밤의 그가 주리야에게는 이상스럽게 생 각되었다. 「그럼 결국 푸로시가 아니란 말이지?」 「주리야나 나같이 날마다 코오피나 먹고 지내는 한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 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이 싱싱한 실감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그럼 부르 조아의 것이란 말요.」 어느결엔지 모임에서 만났던 민호가 나타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주리야는 이렇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계시오.」 「푸로시 시비예요.」 「어떤 푸로시요.」 「아니 그래 이런 것이 푸로시가 아니예요.」 하고 주리야는 다시 아까의 시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까지 듣고 앉았던 민호는 신중한 목소리로, 「훌륭한 시가 듣고 싶으면 내 한 편 읊어 드리지—이런 것 이 정말 훌륭한 시란 것이요.」 고향 사정 말한 일 없고 자유로운 시간 가진 적 없이 제일 싫은 책임 도맡아 보던 그 동무 곤란이 막심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그 동무 기계같이 일하고 칼날같이 과단성있고 ××의 그물 표범같이 뚫던 그 동무 밉살스러우리만치 대담하던 그 동무 아! 끝내 그는 붙잡히고야 말았다. 겁내는 내의 마음 늘 매질하여 준 것은 신념에 빛나는 그의 눈이었다. 풍진 세상의 행복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 꾸짖어 준 것은 도깨비불 같은 그의 눈이었다. 나의 가슴 사소한 책무에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백곱절의 일을 하였다. 모진 폭풍우가 휩쓸어오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던 그 동무 나의 마음 못 믿더라도 그만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 동무 잡히고야 말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누나.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콘크리트 천정을 노리고 있을까 지금의 그 동무 이틀 동안 굶은 배 한 그릇 국밥으로 채운 그와 나였다. 우박송이 퍼붓는 어둠 뚫고 전신을 폭 적시우며 모둠에 달려간 그와 나였다. 「우리」에서 돌아올 때 나는 늘 그의 꿋꿋한 손과 낭랑한 웃음이 그리웠다. 그 동무 그 동무 돌아오지 않는 그 동무 목숨 떨어지는 날까지 잡히운 몸의 그 동무 매맞고 박채우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그 동무 도깨비불 같은 그이 눈이 철망을 건너 나에게 광명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그 동무 돌아오지 않누나. 그러나 그가 주고간 열정 그가 보낸 광명 나의 가슴에 타고 수천 동지 가슴에 타서 세상을 살러버릴 횃불이 되리라. 아! 동무여 편히 쉬라 새벽은 가깝다! 「아 그 동무 그 동무—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하군. 아니 그 것이 대체 시요, 실제 경험이요?」 마지막 구걸까지 숨도 가라앉지 않고 듣고 있던 주리야는 감도에 넘치는 두 눈에 광채를 가득히 담았다. 「퍽이나 감동하신 모양이군.」 「그렇게 훌륭한 시는 오늘밤 처음 들엇어요. 문밖은 진눈 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아! 돌아오지 않누나. 그 동무!」 감동된 두어 줄을 외우다가 주리야는 문득 한라를 보고 놀 라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같이 둥근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고여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술에는 웃 음을 띄우고 눈으로는 울고 있다. 「한라 왜 우우?」 「지금 그 시간 너무도 훌륭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는 병증이 있다우.」 그렇게 말하여도 주리야는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느꼈다. 아까의 그의 시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지금의 눈물이라 든지 그 무슨 그 시와 관련되는 것이 그의 생활의 한구석에 있으려니 짐작 되었다. 하기사 주리야 자신도 그 시에서 받은 감동은 심히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무지를 개발하여 주는 횃불이요, 소시민 적 생활 위에 떨어진 위대한 폭탄덩이였다. 그 위에 한라의 눈물은 더한층 그를 매질하여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고 요하던 좌석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기가 아까워서 그는 한라 의 손을 잡으면서, 「울지 말우 한라—내 레코드 한 장 걸게.」 하고 일어나 가서 그가 좋아하는 렌·피리스의 하와이안 비 타를 걸었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양말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아리고 내 알말대님.」 하고 땅 위를 더듬어보는 동안에, 「별 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민호가 그의 발밑에서 그것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주리야는 민호의 눈앞을 꺼리지도 않고 무릎 위까지 치마 를 걷고 양말을 걷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민호가 그에게 준 한 마디가 웬일인지 이상스럽게도 가슴속에 들어 배는 듯하였다.—(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집에 돌아오니 주화는 어느덧 아랫목 이불 속에 드러누워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웃목에 친 검은 막 속에서 옷을 벗고 나오는 오늘밤의 주 리야의 자태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찰란한 나체에 포도 잎새 한 닢 붙이지 않고 칵 속에서 뛰어나와 주화의 앞에 나타나던 그가 오늘은 포도 잎새 아닌 한 권의 책으로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주화의 앞에 웬일인지 별안간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포도 잎새 대신으로 쓴 그 책은 자본 론의 한 권이었다. 이불 속에 뛰어들어가기가 바쁘게 주화 의 귀밑에, 「아리랑의 한라가 <그 동무>란 시의 낭독을 듣고 우니 웬 일예요.」 「그 시 그대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울 때도 있겠지.」 「아니 한라의 친구가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그 동무>의 처지에 있으니 까 말요.」 작자 부언(附言)—작 중 두 편의 시는 모(某)씨의 것을 빌려 다가 의역한 것임을 말하여 둔다. == 마음의 안테나 == (대체 웬 녀석야.) 알지 못할 사나이의 시선을 등뒤에 받으면서 정동 골목으 로 들어갈 때에 주리야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일정 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향을 갈아 길을 돌릴까도 생각하였으나 맡은 일의 관계 상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대로 정동 골목을 들어갔다. (불량소년일까, 그렇지 않으면 탐정일까......) 알지 못할 작자였다. 종로 근처에서부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 M 백화점의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단정한 양복 맵 시로 보더라도 탐정의 유가 아니면 흔히 있는 불량소년의 따위였다. 그러나 탐정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 정체 모를 사나이의 추격은 더한층 불안한 느낌 을 주었다. (이녀석, 어데 따라 보아라.)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 가다가 조그만 과자가게 앞에 왔을 때에 뒤를 돌아보고 사나이의 눈을 교묘하게 감춰 과 자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츄잉껌을 사서 쭐기쭐기 씹으면서 밖을 내다보노라니 헛물 켠 사나이는 길 옆을 기웃기웃 살피면서 과자점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흉칙한 녀석.) 주리야는 콧웃음을 치면서 가게 주인을 보고, 「저따위 녀석이 뒤를 쫓것나요.」 주인의 웃음을 들으면서 다시 가게를 나온 그는 사나이의 간 곳을 살핀 후 뒷골목으로 살짝 돌아섰다. 영사관 지대를 지나 넓은 고개 위에 나섰을 때에도 사나이의 그림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주리야는 통쾌한 웃음을 남기면서— 그러나 역시 치밀한 주의이ㅡ 눈을 던지면서 급한 걸음으로 민호의 숙소인 아파아트로 향하여 내려갔다. 고개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목조 이층집—문간에는 여러 가지 단체의 간판까지 걸린 그 한 채를 아파아트라고 부르 기는 부적당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방방을 개인 혹은 단체에 게 빌려주는 그 집을 아파아트라고 부르기에 주리야는 아무 런 부자연한 느낌을 느끼지 않았다.이층의 방 한 간을 민호 가 빌려 가지고 있었다. 급히 문간을 들어간 주리야는 그것이 첫걸음이었지만 이층 에 뛰어 올라가 손쉽게 민호의 방을 찾았다. 걸리지 않은 문을 노크하니 반갑게 안으로부터 열렸다. 불쑥 내밀었던 남희의 고개가 별안간 움츠러들었다. 순간 예상치 아니한 여주인고의 출현에 주리야의 눈썹이 볼 동안에 찌푸러졌으 나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없고 남희 혼자였다. 남희가 무료하여서 읽던 책이 침대 위에 편 채로 놓여 있었다. 무심히 뒹굴고 있던 남희 는 성에 맞지 않는 이 돌연하 침입자로 인하여 마치 엄한 선생의 앞에 나선 듯이 마음이 거북하고 몸이 굳어졌다. 「민호씨를 만나러 왔더니 안계신가부군.」 「입때껏 기다려도 안들어 오셔요.」 「웬일인가 시간이 넘었는데.」 하면서 주리야가 책상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남희는 별안 간 그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 위에 놓인 한 자의 종이를 집 어서 날쌔게 꾸겨 버렸다.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우렷이 빛났다. 필연코 민호에게 대한 공상의 낙서를 그 위에 장난 쳤으려니 생각하고 주리야는 쓴웃음을 남희의 얼굴 위에 정 면으로 던졌다. 그 웃음의 그늘 속에는 그러나 독사의 그것 과 같은 매운 눈초리가 숨겨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앞 을 가로채고 나타나는 남희가 주리야에게는 귀찮고 어줍지 않은 존재였고, 그 남희에게 주리야는 독을 품은 수리같이 생각되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겁을, 한 사람은 불 같은 질 투를 만나는 때마다 동시에 느꼈다. 주리야의 냉정한 이성 이 그의 이 부탕한 질투를 꾸짖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 러나 더 많이 그의 여자다운 본능이 과분의 열정을 북돋아 마지 않았다. 「이만 가볼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 남희는 혼잣말로 중 얼거리고 주리야의 대답고 기다리지 않고 아파아트를 나갔다. 남희가 가버리고 혼자 주인 없는 방에 남아있으려니 주리 야는 도리어 스스러운 생각이 났다. 남의 권리를 뺏고 그 뒷자리에 들어서 그의 염치가 너무도 뻔질뻔질하게 생각되 엇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가 씹는 껌의 향기와 같이 사 라져버리고 민호에게 대한 생각만니 찐덕찐덕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가 생각하여도 부당한 경쟁의 의식과 알지 못할 승부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신 괴 이하게 여겼다. 창 밖에는 여학교가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서 공고 같이 뛰노는 처녀들의 아무 계교없는 순진한 자태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매질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스럽게 시침을 떼고 주인없는 방의 여왕 이 되었다. 민호 안오는 시간의 무료를 못이겨 그는 알콜 풍로에 불을 달이고 물을 끓였다. 여러해 동안 살아오는 그 자신의 아파아트와도 같이 가장 손쉽게 장 속에서 크림과 사탕을 집어내서 코오피를 만들었다. 뜨거운 차를 불고 있 는 동안에 민호가 왔다. 「잠간 동안 이 방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자리를 사양하면서, 「—남희까지 쫓아버리고요.」 하고 이 한 마디가 민호에게 주는 효과를 살피려고 그의 얼굴을 진득이 노렸다. 「장하군요.」 슬푼 표정 대신에 민호는 미소로 이 어여쁜 「영웅」을 칭 찬하였다. 물론 그 미소와 칭찬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없었으나 주리야는 적어도 이 「사나이」—생각과 처지 와 양심과 순정을 빼내 버린 나머지의 이 사나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그의 헛된 자만심만은 아닌 듯하였다. 「주화가 단체 일로 시골 간 것 아시겠지?」 「동무에게서 들었지요.」 「주화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하고 주리야는 핸드빽 속에서 한 장의 두터운 봉투를 집어 냈다. 「—이것을 즉시 전해 달라구요.」 「하하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던가.」 민호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봉투를 책상 속 깊이 간수하였다. 주리야 자신 실상은 봉투의 내용을 몰랐으나—구태여 알 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갈의 임무를 마치니 곧 안심될 뿐이 었다. 「그리고—」 장난의 눈초리로 민호를 바라보며, 「즉시 뜯어보고 곧 시작해 달라구요.」 「영어면 곧 되겠지만 독일어면 좀 거북한데.」 늘 있는 구라파 한가운데에서 직수입하여 오는 직접 일에 관계있는 원물 팜플렛의 번역의 일인 것을 주리야는 여기에 서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여 더 자세한 내용의 비밀을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야지.」 껌을 새로 집어내서 입에 넣고 곱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파아트를 나와 고개를 걸어 내려가던 주리야는 고요한 행길에 인기척 소리를 듣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알 지 못할 사나이가 그의 뒤를 또 쫓는 것이었다. 별안간 소 름이 끼쳤다. (웬 벌레 같은 놈팽이야.) 그 추근추근한 사나이의 행동에 화가 버럭 나서 주리야는 문득 한 꾀를 내어 걸음을 멈추고 길 옆에 무뜩 서 버렸다— (놈 좀 앞서 봐라.) 사나이는 터벅터벅 가까이 오더니 그의 옆에 머물렀다. 씹 던 껌을 그의 낯짝에 탁 뱉을까 생각하며 휙 돌아섰을 때 사나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공손히 목례를 하였다. 「실례지만 김영애씨지요?」 「웬 걱정이요?」 「이를 말이 있어서요—」 사나이는 모자를 쑥 올려 뒷덜이에 붙이고 두 손을 양복바 지 주머니 속에 푹 꼽더니, 「—공연히 서울바닥을 일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골로 내 려가는 것이 어떻소?」 별안간의 충고에 마음이 짜릿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례한 그의 낯짝에 숫제 껌을 뱉아버릴까 하다가 참고, 「아니, 댁이 무엇인데 그렇게 주제넘소?」 물론 그가 경박한 불량소년이 아님은 그의 충고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은......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나 당신의 처지가 딱해서 하는 말이요.」 「나의 자유 의지의 행동인데 무엇이 딱하단 말요.」 「시골서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소.」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보다 도 남의 사정을 여기까지 알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괴상하 여 주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다.」 하고 사나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정색하더니, 「어떻든 잘 생각하여서 앞길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이번에는 혼자 앞장을 서서 더끔더끔 걸어 내려갔다. 주리야는 의아하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그자리에 우두 커니 서서 껌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이상스런 사나이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의 말이 유난히도 뼈속에 사무쳐서 여러 가지 생 각을 가슴속에 자아내게 하였다. 움직이는 불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주리야는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외로운 처 소에 돌아가서 혼자의 저녁을 짓기도 스산할 것 같아서 양 식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거리에 등불이 들어온후에 야 어슬어슬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아래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필연코 주화의 동무들이 찾아 와 있으려니 생각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주리야는 그들이 도무지 뜻하지 못하였던 의외의 인 물임에 깜짝 놀랐다. 될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의 앞을 피하 여 되돌아서서 도망이라도 하고 싶은 정경이었다. 「어디를 가서 종일 쏘다닌단 말이냐?」 침착한 목소리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주리야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우두 커니 서 있는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주리야는 마음을 다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오빠.」 고개를 수그린 누이동생의 자태에 오빠는 목소리를 부드럽 혔다. 「서울 온지는 벌써 여러날 되었으나 집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이야.」 「아니 그래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 수 있니? 사립 탐정에게 부탁하여 사흘만에 겨우 찾 아냈다.」 「탐정에게요?」 이렇게 반문한 주리야는 아까의 아상스러운 거리의 사나이 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 추근추근하게 그의 뒤를 쫓던 것 도 결국 고마운 충고를 주려는 생각보다도 그의 거동을 살 피려는 직업적 심사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안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이야?」 「저도 충분히 생각한 후에 취한 행동인데 걱정하실 필요 가 어디 있어요?」 「한 분밖에 안계시는 어머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시 는 줄 아니. 불효막심한 자식.」 「어차피 불효막심은 생각한 끝에 일인데요. 어머님께 반 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유만은 배반할 수 없어요.」 「주제넘은 소리 그만두어.」 오빠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에 서울 와서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돈 한푼 없는 놈팽이와 붙어서 무엇을 했어?」 이 말은 듣고 주리야는 그의 기개높은 자존심으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 마세요. 돈 한푼 없는 놈팽이라니 요? 어떻게 하시는 말씀예요? 돈은 없다 할지라도 돈 많은 도야지와는 뜻이 다르답니다.」 옆에 앉은 사나이—주리야가 배반하고 온 시골의 약혼자— 가 입맛이 쓴지 오빠와 주리야를 등분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라.」 오빠의 이 한마디에 주리야는 그러나 구태여 반항하려 하 지 않고 그것이 도리어 괴로울 듯하여서 잠자코 고개를 숙 였다. 「.............」 허수아비같이 앉았던 약혼자는 기회를 잡은 듯이 오빠를, 다음에 주리야를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 을 하여 주시오. 지금이라도 나에게는 결코 늦지 않으니 충 분히 생각해서 잘 조처하시오.」 주리야는 기가 막혀 속으로 픽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 리라고 말한 법도 없다. 추근추근한 사나이.) 이렇게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말없이 침울하고 슬픈태도를 지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내일은 단연코 내려가자—나이는 차 가는데 언제까지든지 그 주제로 언제 사람 되겠니.」 비교적 온순한 오빠의 태도에 호감을 가진 주리야는 오빠 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공손히 듣는 체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집안에 대한 체면도 체면이지만 이제는 박군을 대할 면 목이 없다.」 오빠는 사과하는 듯이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주리야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두 청 년은 그들의 권유가 효과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기뻐하였으 나 주리야는 속마음으로는 웃고 있었다. 눈물—그것은 반드시 슬픔의 표현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주리야에게 그 눈물이 일종의 기교(技巧)요, 일종의 수단이 었다. 눈물과는 딴판으로 마음속으로는 물론 다를 꾀를 궁 리하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같이 새우다가는 불가불 붙들리고야 말 것이다. 밤이 새기 전에 이 두 마리의 이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하겠다.) 그날밤 늦은 후 일찍 잠든 두 사람의 옆을 빠져 주리야는 일보러 가는 체 하고 방을 나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여행에 넉 넉하리만큼 가방 속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몰래 집을 나왔다. 들고 나온 「벙어리」를 돌에 부딪쳐 깨뜨리고 흐 트러진 돈을 가방 속에 걷어 넣었다. (월미도에 가서 며칠 동안 바다를 보며 은신하여 있을 여 비는 되겠지.) 주체스런 가방을 들고 뒷골목을 걸음 빨리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행을 승낙할까.) 혼자 가기가 수상하게 보일까봐 민호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이것이 민호를 차지할 안성마춤의 좋은 기회라고 은근 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가면 끌고 가지.) 아름다운 악마의 결심을 하고 주리야는 고요한 밤거리를 걸어 정동 아파아트로 향하였다. 벌써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운 민호를 잡아 일으키고 주 리야는 황급한 어조로 그의 신변의 위험을 고하였다. 물론 그것이 일종의 그의 기교였으나 그의 어조가 너무도 황급하 고 태도가 서먹서먹한 까달게 민호도 황급하게 뛰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치 불이 났다!는 고함을 듣고 순간 뛰어나가 듯이 민호는 잠시 동안 아무 지각없이 들뜬 마음으로 날뛰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바 람에 전후의 판단과 냉정한 분별이 없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집어 얹고 주리야의 손에 끌리다시피하여 허둥지둥 거리로 나갔다. 막차는 이미 끊어진 뒤었다. 주리야는 하는 수 없이 택시 를 세내 가지고 민호와 같이 탔다. 넓은 밤 가도를 자동차 는 전속력으로 달았다. 길 양편의 나뭇잎이 선명한 초록빛 으로 자동차의 등불 속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신선한 밤 드라이브—그 속에서 차차 정신이 든 민호는 이 밤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몽유병자가 아닌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몽롱한 의식에서 차차 현실로 돌아갔다. (나의 행동은 바른 것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비판할 여가 가 없었다. 요동하는 차 안에 있을 때에 사람은 이유없이 취하는 법이다. 그 가벼운 도취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주 리야의 육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다시 꿈 세 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데를 왔나.) 단 걸음에 섬 속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호는 부지식간의 그 의 행동이 엄청나게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았어요. 범의 구에서 피해 나온 듯해요.」 주리야는 마음속으로 안도한 듯이 여관집 문앞까지 갖다 댄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저하는 민호의 손을 끌었다. 「동행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나는 뒤로 가지요.」 동지인 주화의 생각이 퍼뜩 머리속을 스치자 정신을 깬 양 심의 조각이 민호의 가슴을 죄었다. 「동무의 위험을 보면서도 그의 옆을 피하다니 그런 비겁 한 사람이 어디 있소?」 주리야는 비웃는 듯이 우뚝 서서, 「미래의 투사 될 사람이 그만한 용기도 없이 어떻게 하우.」 「옆을 피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주리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 「나 혼자 보다도 당신이 옆에 같이 있는 것이 다른 눈에 도 수상치 아니하고 더욱 안전하단 말예요. 당신은 며칠 동 안 나의 허수아비가 되고 장식품이 되면 그만예요.」 얇은 양심은 부드럽게 거세를 당하고 민호는 끌려 들어갔다. 여관의 바다의 첫 시절이라 만원이었다. 이층의 방 한 간 이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로 안내해 주시오.」 주리야는 하녀에게 분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거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대담한 까닭에 민호는 도리 어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그와 싸워 보자고 민호는 결심하였다. 양심과 애욕과 어느 것이 이길까 승패를 가려 보리라고 작정하고 닥쳐오는 현실 그대로를 순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밤이다. 창르 열고 민호는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에 잠 들고 있는 항구에는 등불이 둥실둥실 떠 있고 섬 밑에서부 터는 어두운 바다가 폭넓게 쭉 깔려 있다. 시원한 바람이 우거진 나뭇잎을 흔들면서 흘러와서는 가슴속을 헤치고 들 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민호의 등뒤에 주리야가 너무도 가까이 와 섰기 때문에 목 덜미가 간지러우리만큼 주리야의 따뜻한 입김이 가깝게 흘 러왔다. 「밤 바다는 어두운 데서 보아야 더 좋답니다.」 「어두우면 바다가 보이나요.」 「우렷이 보이는 곳에 운치가 있지요—내 불을 끄고 올게 보세요.」 「불은 그대로 두시지.」 민호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주리야는 뒤로 가서 방 복판의 전기불을 껐다. 민호 옆에 와서 창을 마주 열고, 「어슴푸레한 것이 더 한층 아름답지요. 밝은 곳에서 추한 것도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아름답게 보여요. 바다도 사람 의 죄악도—」 하면서 가슴을 헤치고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아, 저 등대!」 등대를 발견하고 그는 어린아이같이 팔을 뻗쳐 반짝거리는 먼 곳의 등대를 가리켰다. 깜박거리는 등대 밑에는 신비로 운 바다가 짙은 빛으로 질펀하게 퍼져 있고 같은 바다 위에 하늘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초생달이 얕게 빗겼다. 「귀찮은 현실에 부닥기는 우리에게는 가끔 이와 같은 로 맨티시즘도 필요하겠지요.」 「로맨티시즘이라니요?—나에게는 이 밤이 괴롭소이다. 주 리야와 나와의 관계는 결코 로맨티시즘 속에 떠 놀 관계가 못되니까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가상도 못해 요?」 별안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리야는 죄진 것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휙 돌아섰다. 그 바람에 민호의 양복 호크에 공교롭게 걸렸던 원피스의 치마 허리가 쭉 찢어졌다. 「아이구 어쩌나.」 찢어진 허리르 만지면서 주리야는 새삼스럽게 민호를 쳐다 보았다. 마치 민호의 탓인 듯이 그를 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문간에 선 하녀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주춤하면서 문을 빼꼼이 닫았다. 「쉬시기 전에 목욕들 안하세요?」 민호는 급스럽게 불을 켜고 수건을 얻어 가지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주리야가 가족탕에 들어간 동안에 민호는 혼자 넓은 남탕 에 들어가서 더운 조수 속에 몸을 담궜다. 전신의 피가 녹고 풀리는 동안에 주리야에게 대한 생각과 여러 가지 의심이 뒤를 이어 솟았다. (주리야의 마음속은 대체 어떤한 것인고.) 그의 눈을 현혹케 하고 괴롭히는 것은 나 어리고 천진한 그의 무작위한 심사에서 나온 것일까. 찬란한 그의 천성에 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 있는 말이요, 속 있는 거동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를 유혹하자는 처 음부터의 계속적 성심으로인가. 그러나 그의 주화에게 대한 사랑은 두텁고 깊고 한푼의 틈도 없는 것임을 민호는 잘 알 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의 지듭을 떠보자는 수작인가. 동 지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는 가짜의 마음으로인가. 그렇다면 거동이 너무도 공들다. 아무리 신변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 도 하필 즐겨하지 않는 그를 이 밤중에 끌어낸다는 것은 너 무도 공든 행동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일시 의 장난일까. 심심풀이의 장난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다시 첫 끝에 돌아가 주리야의 본 심을 되생각하고 거듭 짐작하였다. 그동안에 주리야도 독탕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 던 것이다. 그는 갈래갈래의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도 그는 주화를 사랑하였다. 사상적 동감보다도 시각적(視覺 的) 애정으로 첫눈에 끌은 그를 주리야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랑은 차차 깊고 진하고 믿음직한 것으로 변하 였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주화의 동무인 민호를 싫어하 지 않았다. 시각적이고 호감을 느꼈다. 사람의 육체에 눈이 있고 심장이 있는 이상 이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감각의 안테나인 두 눈에 모양이 비칠 때 그것 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사람된 마음의 자유라 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함에 그는 하등의 양심의 꾸지 람을 받지 않았다. 감정의 명령을 잘 좇는 것이 도리어 양 심에 충실한 소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 에 불을 지른 것은 민호의 애인 남희였다. 그는 남희를 만 나는 첫 순간부터 이유 모를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마는 그 질투가 도와서 오늘밤의 행동을 인도한 것이었다. 오늘밤의 행동—그것은 그의 신변의 위험 을 피하는 한 수단인 동시에 남희에게 대한 일종의 자랑이 요, 시위운동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밤의 행동을 어느 끝 까지 전개시키겠다는 최우적 성산과 야심은 없었다. 그는 아직 민호에게 최후의 것까지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 만 주화에게 대하여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에게 대하 여 느끼는 시각적 호감—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박넝쿨같이 갈래갈래로 뻗어 나가는 여자의 마음—어느 갈래가 진짬이요 어느 갈래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모두 똑같이 진정의 갈래—그 방향 많은 갈래갈래의 마음에 주리 야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방 가운데에는 두채의 이불 이 나란히 펴 있었다. 물론 부부려니 짐작하고 하녀가 펴 놓은 것이다. (흠. 마치 두 부부의 잠자리 같군.) 뒤미처 들어온 민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한편 이불께 로 갔다. 「—밤이 퍽도 늦은가부다.」 「곧 자야지요.」 주리야는 나머지 한편의 이불 위로 가서, 「나는 밝으면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불을 끄지요.」 민호의 손이 뻗어 전기불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잠자리 옷을 갈아입고 각 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주리야는 무심한 자태를 지니고 민호는 하룻밤 동안 괴롭게 싸워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 그 뒤에 오는 것 ==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이불 속에서 황망히 속옷을 껴입은 주리야는 이불을 걷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였다. 엉겹결에 그의 두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 만졌다. 한 송이의 꽃이 하룻밤 서리에 시들어버리듯이 팽 팽하던 그의 얼굴이 하룻밤 도안 이지러지지나 않았을까를 본능적으로 염려하는 듯이. 다음에 그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 오리 한 오리 어루만졌다. 만지는 동안에 그도 모르게 그의 손에 힘이 맺혔다. 손가락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오리 두오리 뚝뚝 뜯겼다. 나중에는 여러 오리씩 줌으로 뜯겼다. 머리를 뜯으면서 그의 시선은 이불 사이로 하아얗게 드러 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보지 않을 것을 본 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스럽게 솟아올라 그는 이불로 다리를 푹 덮어 버렸다. 머리속이 아찔하여지며 별안간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눈이 팽팽 돌았다. 마치 처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려서 깨뜨린 첫 순간과도 같이. 무의식간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잠간 동안에 이불 위에 가락가락 흐트러졌다. 콧등이 띵하여지며 눈물이 빠지지 솟았다—목소리를 내서 막 울고 싶은 심중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슴 밑으로 둥긋이 드러나 젖통을 만지 다가 황망히 옷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소 잃은 후에 외양 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찬란한 아침 해가 창으로 불쑥 솟아 들어왔다. 햇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주리야는 얼굴을 숙 여 버렸다. 너무도 밝은 빛을 꺼리고 사양하는 듯이. 「벌써 깨셨소?」 등위에서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가 아제는 마치 그의 몸을 찌르는 황충이와 같아서 주리야는 그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 였다. 「아니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오?」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건강한 체중이 그의 등뒤에 바싹 기어 옴을 주 리야는 느꼈다. 「골이 아프시오, 배가 아프시오?—별안간 웬일이시오?」 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으며 울음에 떨리는 주리야의 두 어깨가 육중한 힘 안에 폭 싸였다. 주리야는 순간 달팽이같이 움츠러들면 번개같이 몸을 흔들 어 빼쳤다. 몸서리를 치면서—민호의 육체가 지금에는 징그 러운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몸을 빼치는 것과 동시에 좌향을 휙 돌리면서 바른손이 민 호의 볼 위에 날쌔게 날랐다. 「악마!」 또한번 손이 날았다. 「아니 무슨 짓이요?」 「저리 가요.」 「주리야.」 「동물!」 「미쳤소?」 「당신은 동지가 아니고 동물이요.」 「아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요?」 「시침을 떼는구료.」 「곡절을 모르겠으니.」 「간밤에 나를......」 주리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그것이 그다지......」 「그것이 그다지라니.」 「그다지 노엽소?」 「어떻게 하는 말요?」 「대체 나 한 사람만의 의사였단 말요?」 「잠든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있단 말요?」 「그러면 그때까지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 「아니 누가 유혹을 했단 말요?—코큰 소리 그만하오.」 「적어도 암시는 주지 않았소.」 「하룻동안 허수아비 노릇하랬지 누가 사람 노릇—아니 애 인 노릇을 하랬소.」 「그건 이유닷지 않는, 모욕에 지나지 못하는 말요.」 「버젓한 애인 노릇을 한 당신이 너무도 주제넘었소.」 「그렇게 말하면 당초에 아파아트에서 잠든 사람을 몰아낸 것은 무슨 까닭이었소?」 「당신은 그것을 이 결말을 가져오기 위하여서 한 꾀인 줄 아는구려.」 「적어도 결과는 그렇게 되잖았소. 당신이 원인을 지어 놓 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모욕이요. 바로 그때에 치든지 욕 을 주든지하지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요?」 「아니 변명이 무슨 변명이요?」 주리야는 기가 막히는 듯이 눈물 어린 얼굴로 민호를 노렸다. 「나는 다만 떨어진 물건을 집었을 뿐요—땅에 떨어진 양말 대님을 줍듯이.」 양말대님—주리야는 문득 언제인가 차점「아리랑」에서 그 가 떨어뜨린 양말대님을 민호가 집어주던 장면을 그리고 그 가 별 것 다 떨어뜨리시는군 하고 웃던 것을 생각하였다. 사나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임을 알고 그의 큰 실책을 깨달았다. 양말대님이라면 사실 그가 양말 대님을 떨어뜨린 것과 정조를 떨어뜨린 것과는 같은 정도의 부지식간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여운 가운데에도 얼 굴이 붉어져서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정말 별 것을 다 떨어뜨렸구나!) 이러한 속생각 뿐이다. 「손 닿는 곳에 있는 향기 높은 한 송이의 능금—동지고 원 수고 간에 발병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따지 낳을 사나이는 세상에 없을거요. 결국 육체적 거리의 죄였소. 육체적 거리 가 너무도 가까웠든 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 「뻔질뻔질하게—설교를 하는 셈인가.」 주리야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섰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보기 싫으니.」 민호를 보지 않고 눈은 딴전을 향한 채 손은 문을 가리켰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은 아니오. 그러나 이 한가 지만은 잘 알아주어야 하오—결코 주리야의 의지를 짓밟은 나 혼자의 의사로의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이 점에 있는 것이요.」 주리야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무츰무츰하고 서 있다가,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요.」 하고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듯이 방을 뛰어나갔다. 아래층 문간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오는 여하인의 아침인사를 받은 체 만 체하고 문을 뛰어나간 주리야는 허 둥지둥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얼굴이 불을 끼얹은 듯이 화끈화끈 달았다. 굴이라도 있으 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거리는 발이 대중없이 빨리 언덕을 휘둘러 내려갔다. 해가 활짝 솟아 가까운 바다를 일직선으로 찬란히 빛내었다. 움푹 줄어들어간 바다는 파도 한 조각 없이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신선하고 공기가 차다. 불역에가지 내려간 주리야는 모래 위에 푹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무의식간에 지난 밤 기억이 다시 소생되어 마음을 찧고 얼 굴을 달게 하였다. 더구나 아까의 민호의 마지감 마디가 가 슴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운 몸을 바닷물에 잠 그고도 싶은 생각이 났다. (주화를 무슨 낯으로 대하누.) 생각할수록 엄청났다. 처녀가 물동이를 깨뜨린 느낌을 지 나 이제는 하늘을 뒤엎은 듯한 땅을 깨뜨려 놓은 듯도 한 느낌이었다. 주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나 현재 그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금단의 길이다. 그 금단의 과일 을 딴 것은 과시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허락하지 못할 장 난이요 죄악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조관이라도 이것은 허락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주리야는 그가 저지를 죄를, 잘못된 몸을 어떻게 처치하였으면 좋을지 나중에는 몸부림이 날 뿐 이었다. (진작 그때에 왜 반항하지 못하였던가.) 이 생각이 더한층 그의 마음을 에우고 수치의 불을 끼얹었다. 붙잡을 수 없는 애욕의 힘을 이제는 오히려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 결과가 올 것을 처음에 전연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결과가 있은 후의 이 후회 환멸 슬픔—이것이야말로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예측 못한 것이었다. 불어나는 고무풍선을 그것이 터질 줄 을 번연히 알면서도 힘껏 불어 기어코 터뜨리고 그 후에 새 삼스럽게 뉘우치는—그 심사였다. 사랑—미움—후회. 이 갈래갈래의 마음의 줄기와 모순된 심 정—주리야는 이제 이것을 또한번 느꼈다. 수건을 바닷물에 축여 얼굴을 식히면서 그는 모래펄을 거 닐다가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 위에서 다시 행길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어수선한 감정은 차츰 정리되고 통일되어 이 제는 다시 마지막의 한 점인 주화에게로 향하였다. 한 점으 로 집중되니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다. (주화를 어떻게 대하누—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옳겠지— 그러면 대체 주화는 무엇이라고 할까—나를 어떻게 조처할까......) 주화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항상 극히 순진하고 깨끗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화의 앞에 속일 수는 없 었다. 그만큼 주화에게 바친 그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다. 그 의 양심—그것은 곧 주화에게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은 이 제 그를 괴롬의 바퀴 속에 넣고 끝장이 되었다. 「아씨, 아씨, 어데까지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신발소리 역시 여관집 하녀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바람 쏘이러 나왔소.」 수상한 것을 느낀 듯한 하녀의 태도를 살피고 주리야는 시 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그러서요—이렇게 일찌기.」 하녀는 황망하던 그의 양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미소를 띄 우면서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제가 이 근처를 안내하여 드릴까요?」 「그만 거닐고 들어가겠소.」 섣불리 하다가 도리어 마음속을 들여다 보일까 두려워하여 주리야는 발을 돌렸다. 하녀와 나란히 서서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민호가 가버렸 을까, 아직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층에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민호는 아직 있었다. 화로전을 끼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주리야가 들어가도 즉시 고 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보면 또다시 기억이 소생되는 까닭에 주리야는 딴전 을 보면서 한구석에 가서 주섬주섬 짐으 싸기 시작하였다. 「주리야.」 민호는 고개를 들고—무거운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과실이라는 것도 있지 않우. 이렇게 불쾌한 결 말을 맺은 채 섭섭하게 헤어질 거야 있소?」 「............」 「주리야의 생각대로 나의 과실로 돌려보내더라도 앞으로 나 틈 없이 지냅시다. 너무 태도를 선명히 해서 도리어 남 의 눈에라도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우.」 「모든 것을 숨기잔 말이지요.」 「어젯밤에 주리야가 말한 것같이 우리에게는 로맨티시즘 도 필요하다니 한 폭의 로맨틱한 기억으로 싸 두면 그만 아 니요.」 「나는 먼저 가요.」 짐을 다 싸고 손쉽게 단장한 주리야는 민호의 말을 한 귀 로 흘리면서 슈우트 케이스를 들고 문을 나갔다. 「주리야, 주리야.」 들은 체 만 체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의아해 하는 하녀에게 두어 마디 귓속말로 이르고 이른 아 침의 여관을 나갔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탈 생각이었다. 오빠들의 그 뒷소식을 모르는 까닭에 집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우선 당분간 「아 리랑」의 한라에게 몸을 둘 작정으로. 「아침부터 행장을 하고 오늘은 또 웬일이야.」 주리야가 인천서 오는 아침 차를 내린 길로 바로 아직 가 게도 열지 않은 「아리랑」의 문을 두드렸을 때 눈을 비비 며 나온 한라가 의아하여 문을 열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어데를 가는 셈이야?」 「여기까지 왔지」 「여기에 오는데 가방까지 들어야 하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주리야는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풀썩 주저앉으며, 「—시골서 오빠들이 올라온 까닭에 집을 쫓겨 다니는 셈야.」 「진작 이리로 오지 왜—잡히면 경이겠지.」 「처음부터 오기도 미안해서—」 어름어름 그 자리를 미봉하는 주리야를 한라는 손을 끌어 뒷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걱정 말고 방으로 들어와요.」 두터운 벽을 끼고 가게 뒷편에 붙은 넓직한 한 간의 방—한 라의 살림방이요 침실인 그 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루 를 앞둔 의롱 그릇과 잠자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만 숨어 있으면 거리가 뒤집혀도 몰라요.」 주섬주섬 잠자리를 걷고 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당분간 있어 볼까?」 주리야는 천연스러운 자태를 지었다. 그러나 한라가 아침 준비로 밖에 나가 덜거덕덜거덕 하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에는 일단락의 침착이 오고 그 맑은 침착 속으로 모든 비밀과 고민이 새로 살아나왔다. 뒷골목으로 열린 창으로는 늦은 햇발이 흘러 들어와 창 기 슭에 놓인 화분의 「제라늄」을 짙은 분홍으로 물들였다. 그 맑고 신선한 분홍이 주리야의 흐린 마음에는 지나쳐 무 거운 짐이었다. 같은 붉은 빛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나 「제라늄」의 신선한 분홍은 주리야의 붉은 마음에 는 도리어 눈부신 것이었다. 마치 맑은 태양의 빛이 어두운 눈에는 지나쳐 눈부신 것과도 같이. 그 눈부신 「제라늄」 과 동무하여 가는 한라의 순진한 열정—한 사람에게 줄기차 게 바치고 있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그것이 불현 듯이 부 럽게 생각되었다. 그 한라의 열정과 나의 마음과는 마치 달 라진 흙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주리야가 생 각할 때 한라의 그 단순한 살림이 주리야의 더럽힌 몸을 받 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제라늄」의 감격에서 눈을 돌린 쥘야에게 문득 책시렁에 끼인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주리야는 새삼스런 감동에 끌려 이미 졸업하여 버린 그 한권의 책—코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시렁에서 뽑아냈다—의지할 곳을 찾는 그의 고독한 마음에 그것은 마치 기다만한 기둥같이도 생각되어서. 두터운 책을 군데군데 펴서 무의미 하게 구절구절을 읽어 가며 그의 마음의 동감되는 대문을 억지로 찾으려고 애썼으 나 그의 현재의 처지를 변호하여 줄 만한 대문이 쉽사리 눈 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펄펄 넘어가는 책장 틈 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나왔다. 푸른 검사의 도장이 찍힌 현 저동에서 온 편지—무심히 뒤를 번기니 연필로 박아 쓴 두어 줄의 글이 또렷이 눈에 띄었다. —한라! 외로운 세상에 있으니 그 무슨 든든한 믿을 것을 찾는 마음 뿐이오. 쇠같이 굳은 한라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마음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오. 주의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 어서나 든든히 믿는 마음—이것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는 것임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오...... 결코 감상적이 아닌 이 외로운 마음의 고백이 주리야의 가 슴을 에웠다. 영오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한라의 굳은 심지 가 주리야의 마음을 울렸다. 유리 그릇과도 같이 깨지기 쉬 운 그의 마음이야 드디어 한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임을 주 리야는 느꼈다. 신발 소리를 듣고 주리야는 엽서를 책 틈에 날쌔게 감추어 버렸다. 한라가 쟁반에 조반을 날라온 것이었다. 「대단히 설핀 것이지만 이것이 조반이야.」 그다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한라는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진한 코오피, 덩어리 채로의 빵, 통 째로의 버터—뜨거운 코오피의 피어오르는 김이 향기로왔다. 「그러나 이것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사 치해—이 한 잔의 코오피의 향기가 목에 걸리는 때가 많은걸.」 회포를 말하면서 차를 권하다가 한라는 문득 주리야의 손 밑에 펴져 있는 책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붉은 사랑>은—」 하고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보고 싶어서.」 「한라는 코론타이즘을 어떻게 생각허우.」 「코론타이즘—성생활에 관한 자도요 이단이지 결코 새로운 성도덕의 수립이 아니야—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가령 왓시라사의 행동은—」 「음탕한 계집의 난잡한 행동에 지나지 못하지.」 「굳건한 투사적 공로는 어떻게 허구.」 「투사적 공로는 공로요 사랑은 사랑이지, 그와 이와는 아 무 관련도 없는 거야. 주의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은 감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랑의 감각을 주의의 양심으로 카무프라즈하려고 한 곳에 왓시릿사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즉 문란한 애욕을 감추려고 주의를 내세웠단 말이지?」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애욕을 난용한 것은 어떨까 생각해. 애욕 생활이 어지러운 이상 그것은 동물적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어젓한 주의 의 간판으로 둘러 가리우는 것은 약고 간사한 짓야—왓시릿 사는 결국 굳건한 투사였는지 모르나 반면에 음탕한 둥물이 지 무어야.」 「사람이 아니요, 동물!」 한라의 마치 재판관의 그것과도 같은 엄격한 자세에 주리 야는 그도 그렇게 이렇게 돌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왓시릿사가 동물이면 나는 무엇인고.) 이명제가 가슴곳게 뱅 돌면서 주리야는 한라의 앞에서 의 젓이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듯하였다. (—왓시릿사에게는 굳건한 투사적 일면이나 있지. 나는 다 만 달뜬 불량소녀 밖에는—단순한 동물밖에는 못되는 셈이다.) 한라가 가게에 나가 손님을 맞으며 덜거덕덜거덕 일보고 있는 하룻동안 주리야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마음을 죄이면 서 솟아올랐다. 한낮이 지나 손님이 잠간 비었을 때 한라가 과일 접시와 먹을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왔다. 한라가 쟁반을 책상 위에 놓기가 바쁘게 밖에서 별안간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라 언니! 한라 언니!」 한라는 숨도 돌릴 새 없이 황망히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님 남희, 웬일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예요.」 듣고 보니 갈데없는 남희의 목소리였다. 한라의 의아하는 태도와 남희의 조급한 양이 그들의 목소 리 만으로도 주리야에게는 또렷이 짐작되었다. 「무슨 급한 일로—」 「저—」 남희는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동안을 띄었다가, 「민호씨 혹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급히 말을 이어 버렸다. (—아니 민호를 왜?) 민호라는 한 마디가 마치 철퇴같이 머리를 내려친 듯이 주 리야는 순간 아찔하였으나 다시 숨을 죽이고 전신을 귀삼아 문밖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中略)...... == 반둥건둥 == 짧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리야는 옆에 앉아 그를 지키 고 있는 주화를 발견한 순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에 게 대하여 용솟음치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정리하고 든든한 배짱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혼수상태에 빠질 첫 순간과 같 이 여전히 마음이 설레고 골이 띵하였다. 「정신 좀 차렸소—대체 웬일요. 별안간 혼몽상태에 빠졌으니.」 주화으 부드러운 목소리도 퍽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주화를 그렇게 정면 으로 순간에 대하여 버리니 도리어 옹졸이고 있던 마음이 턱 놓이며 그의 귀익은 목소리에 든든한 안도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리야의 일신이 안전하였으니 다행 이오.」 골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수건에 새로 물을 축여 이마 위에 대면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서 주리 야는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언제 올라 오셨어요?」 「시골 일이 웬만큼 정리된 것을 좋아라 하고 어젯밤에 뛰 어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이곳 일이 뒤틀려 있는구려. 박선 생 남죽네 민호 할 것 없이 전통이구려.」 민호마저 들어간 것을 그보다도 먼저 주화가 알고 있는 것 을 알고 주리야는 돌연히 무서운 생각이 났다. 민호가 들어 간 것조차 알고 있다면 그럼 그것까지—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리야까지 한몫에 쓸리지 않았나 염려하였더니 이 런 다행은 없소—이곳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 었소. 언제 별안간 바람이 휩쓸려 올는지 모르는 판이요.」 하고 이마의 수건을 잠간 떼고 낯색을 엿보면서 주화는 말 을 이었다. 「몸이 웬만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집을 피해야 할 것이요.」 「아니,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이제 또 새로운 커다란 일이 눈 앞에 닥쳐있음을 듣고 주리야는 마음이 옹송망송함을 깨 달았다. 「웬만하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구려. 나는 그동안 정리 할 것을 대개 정리하여야겠소.」 하고 주화는 새삼스럽게 조급하게 주리야의 옆을 떠나 책 상께로 갔다. 책시렁에서 책을 뽑아내 책장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도 하 고 책상 빼닫이를 뽑아 편지와 종잇장을 갈피갈피 뒤지기도 하였다. 그 급스러운 거동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 도 마치 부채로 부치는 듯이 차차 조급하게 설레기 시작하 였다—이 기회야말로 속히 허물을 고백하여야 할 알맞은 기 회인 것이다. 「이것 보세요.」 그러나 눈을 꼭 감고 이 한 마디를 말하고는 주화가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볼 것을 느끼고 주리야는 말도 잇지 못하고 이불을 푹 써버렸다. 「일어나지 못하겠단 말요.」 주화가 와서 이불을 벗기고 그를 들여다볼 때에 그는 황당 하게 딴소리를 할 수 밖에는 없었다. 「몸이 거북해서 저는 못 일어나겠어요. 어서 혼자나 몸을 피하여요. 저는 이곳에 누운 채 일을 당하겠어요—죄진 몸이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지막 마디를 쥘야는 뼈있는 말로 한 셈이었으나 그 풍자 를 깨닫지 못한 주화는 주리야의 자포적 태도를 도리어 위 험하다 생각하며 애써 그를 일으키려 하였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고 어서 기운을 내보아요. 정 맥이 없다면 차를 부르리다.」 「차는 무슨 차예요.」 주화의 말이 너무도 고마워서 그는 미안한 생각에 상반신 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지요—일어나기는 해도 몸을 피하기 전에 먼 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이 어느때라고 그렇게 유한 소리만 하오. 이야기도 할 때가 따로 있지 이 시급한 경우에—」 도리어 약간 화를 내며 주화는 다시 책상께로 가서 주섬주 섬 정리를 계속하였다. 그러고 보니 또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려서 주리야는 초조한 마음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피신 문제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가로놓여 있어요.」 밖에서 돌연히 바시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리야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주화는 잠시 쫑그렸다가 문서를 주섬주섬 모 아 들고 뒷문으로 살며시 나가 버렸다. 아무 것도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엉겼던 긴장이 풀어지자 주리야도 일어서서 날쌔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화는 부엌에서 들고나간 문서를 불사르는 눈치였다. 한 참 동안 부스럭거리더니 뒤로 돌아 안방으로 들어가 벽장 속을 들추었다. 주리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에 주 화는 다시 뒤로 돌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제가 진 죄를 고백하면 놀라지 않으실 테예요? 괴로워하 지 않으실 데예요—어떤 죄를 저었든지 같이 데리고 가시겠 어요? 죄—그렇지요. 저는 적어도 아직까지 큰 죄라고 생각 하여요.」 말은 평범하였으나 주리야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 낸 것이 었다. 「아니 무슨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단 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갑시다—나는 어쩐지 커다란 위험이 일각일각 가까이 닥쳐오는 듯한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소.」 「저의 고백—그것이 커다란 위험일는지도 모르지요.」 「아, 웬일인지 몸이 떨리누나.」 사실 알 수 없는 몸을 떨면서 주화는 채 손대지 못한 책상 위 다른 문서를 대충대충 골라서 두 손에 나눠 쥐었다. 「자, 이 길로 바로 나갑시다. 내 뒤를 곧 쫓아 나오구려.」 하고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앞문을 열었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말할 것은 말해 버려야 시원하겠어요.」 주리야가 조바심하고 외칠 동안에 벌써 문밖에 나가 버린 주화는 웬일인지 별안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으흐ㅅ!」 다음 순간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손에 든 문서 를 마저 불살러 버리려는 셈이겠지 생각하고 문을 홱 연 주 리야 자신도 깜짝 놀라 버렸다. 밖에는 어느새인지 주화의 직각대로 올 것이 와 선 것이었다. 몇분 해서 주화와 주리야는 조금의 거역도 없이 순순하게 관할 서원의 앞을 섰다. 위험이 올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일각일각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죄이거니 하고 느낄 때 주리야는 주화의 일 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이라 저무는 거리를 남녀가 나란히 서 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걸어가기가 너무도 겸연쩍어서 주리야는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다. 사흘이 두 번 겹치고 세 번 겹쳐 열흘만에 주리야는 단독 서를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건에 직접 관계 가 엷고 죄가 가벼운 탓이지, 주화들의 풀릴 날은 바다같이 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를 여러 번 거듭하여야 할 것을 주 리야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옷고름을 줄기줄리 뜯기우고 옷 폭을 찢기운 너불너불한 주제로 거리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첫 경험인 주리야는 며 칠 동안에 겪은 변이 마치 여러 해 동안의 고생과도 같이 몹시도 길고 험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글자대로 지옥의 괴롬이었다. 그가 이전에 경솔한 달뜬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운동의 현실이란 지긋지긋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 길의 열정을 꾸준히 가짐이 범상한 사람의 능히 할바가 아님을 알았을 때 그런 괴롬을 거듭하여도 주저앉는 법 없는 주화들의 앙칼진 의지야말로 하늘 위의 태양과도 같이 높고 장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모욕」—이라는 점잖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이 하의 대접—그 속에서 정신도 정신이려니와 주리야의 육체는 완전히 피곤하고 쇠잔하였다. 그 뒤에 더한층 괴로운 것은 돌연히 처음 당하는 커다란 생리적 변화가 온 것이었다. 들어간 지 며칠 안되어서부터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돌연히 식욕이 줄고 구역질이 나고 간간이 복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갈수 록에 더하여 갔다. 취조실에서 받는 괴롬보다도 어두운 우 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이 생리적 괴롬이 그에게는 더한층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의 문을 풀려 나온 날, 불현 듯이 이 증세는 더욱 심한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밝은 거리를 걸으려니 골이 뒤흔들리 고 현기증이 나며 느긋느긋 속이 뒤집혀 갔다. 넓은 거리를 걷다가 그는 몇번이나 머물러 서서 한참씩 구 역질을 하다가는 걷고 걷고 하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괴롬에 지쳐서 그는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꺼릴 여가조 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육체적 변화를 불안히 여겨 집에도 들릴 새 없이 그는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았다. 한라의 권유로 내 친 걸음에 뒷골목의 조그만 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맥박을 보고 청진기를 대고 일정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주 리야의 오도깝스런 불안의 표정을 웃는 듯이 침착하게 말하 였다.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예요?」 「큰 변화야 큰 변화지요.」 의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고는 아직도 인생에 미흡한 순진 한 주리야의 태도를 귀엽게 여기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사든 지 벌써 서너달째 되는 것 같소이다. 」 「네?」 철없는 주리야는 아직도 의사의 말의 뜻을 몰라서 알지 못 할 그의 선고에 놀라서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경사라니요?」 「짐작해 보시구려.」 하고 은근히 그의 배를 노려보는 의사의 시선에 살핀 순간 쥘야는 처음으로 그의 뜻을 깨닫고 홀연히 놀라며 그도 모 르게 배를 부둥켜안았다. 「아니 그럼—」 귓불을 별안간 빨갛게 물들이며 주리야는 의사의 선고에 요번에는 짜장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걱정하실 것은 없소이다. 달포쯤 지나면 그 런 증세는 다시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니까요.」 쫓기우는 듯이 급스럽게 병원을 나온 주리야는 거리의 찬 바람을 쏘이면서 걸어도 화끈 다는 얼굴이 쉽사리 식지 않 았다. 여러 가지의 변이 너무도 일시에 닥쳐온 까닭에 그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흥분과 부끄럼 사이로도 주리야는 은근 히 손꼽아 석달을 세어 올라가 석달 전의 주화와의 열정의 기억을 마음속에 되풀이하여 보았다. 물론 시일에 틀림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일의 확실성을 얻으면 얻을수 록 더욱 부끄러운 생각에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그 인생의 큰 변화가 한결같이 거짓말 같이만 생각되었다. ......(中略)...... 1dltnswexlzxciprvvy0fmrvkbc5x32 426860 426859 2026-05-04T13:50:51Z ZornsLemon 15531 /* 성가족(聖家族) */ 426860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주리야 |다른 표기=朱利耶 |저자=[[저자:이효석|이효석]] |설명=출전: <新女性>, 1933.3~1934.3 }} == 생활의 노래 (生活譜) == 「짱 겐 보」 「짱 겐 돌」 「짱 겐 칼」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듯 이르니, 「로오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로오자라고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싫어요—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그것이 소아병이란 거야.」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오자가 크게 실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 로오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로오자가— 부엌에서— 암만해도 어색한 걸.」 「로오자가 별 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도 짓고 옷도 기워야지.」 「행주치마 입은 로오자.」 「참으로 장한 로오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나는 공설시장의 로오자인가요?— 장에 가는 건 내게만 맡기니.」 「암, 공설시장의 로오자요, 방안의 로오자요, 거리의 로오자요.」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오자, 그런 로오자는 오늘부터 폐업이여요.」 「땅속의 로오자가 슬퍼하게.— 어서 장에 나갔다 와요.」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 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하니까요.」 책상 위에 펴 놓은 로오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활의 잔치 마당이에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 그 속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 그같이 신성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그러믄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요?— 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띄우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sic|재}}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찬란하게 비치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나물 바구니— 생활 바구니.)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 생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 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 가지고 올게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드러냄표|벙어리|sesame}}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빼죽이 솟는 돈 닢이 한 닢 두 닢 좁은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푼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r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 속에 넣고 날마다 한 닢 두 닢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갈지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 이것을 생각할 때에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 그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워 노세요. 네?」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게 덥석 전신을 의지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문질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는—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능금 한 입 드릴까?」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서요. 한 입 이상은 안 되요— 행길에서 먹을게 없어지게.」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나의 능금 누가 사노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모로코」에서 디이트릿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리로 읊으면서 주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 못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한숨.— 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졋을 때에 주화에게는 두 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 잊어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건넌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어느덧 뜰 안에 봄이 가득 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벌써— 봄.) 주리야와의 몇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로오자는 못 되더라도— 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 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다 먹고 난 속심을 뾰족한 구두 끝으로 툭 차버릴 주리야— 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과 진열장의 미학(美學)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 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 길게 떨어뜨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섰을 주리야— 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에 그려볼 때 주화에게는 석 달 전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나왔다— {{문단 그림}}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독특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 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 항구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 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이 어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걸이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은 귀엽다고 생{{sic|간|각}}하였다. 나이 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부는 못 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 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리는 동안에 문득 꿈을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계셔요?」 주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에!」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 여자— S 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 보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성진 사는 김영애요.」 「대체 웬일이요.— 들어오시오.」 「편지도 안 드리고 문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우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내렸다.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왔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 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이 바라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 왜 그리 일찍 주무세요?」 듣고 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 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있소.— 그것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흠— 대담한 용단이시군.」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속이 백짓장같이 하아얀 넌센스 뽀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 결혼의 희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드러냄표|노라|sesame}}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에요.— 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 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는 안 돌아갈 작정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 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왔으니까요.」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 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는 못했을 거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에요.」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 당분간 살 만한 것만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 하고 그는 슈우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을 집어내서 주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놀라서 그를 똑바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 쓰면 한 일 년 지탱해 갈는지요.」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다 할는지— 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슈우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 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 놓고는 자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 등 얇다란 몇 권의 팜플렛이었다.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 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 빈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 한구석에 간수하였다. 주화는 그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 두 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도의 정도를 넘은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의 사상의 경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할 수 없었다. ----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간 자세를 이지러뜨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의 절대적임을 언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듯이 기뻐하며 다음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삭월세로 빌려 놓고 약 백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만하고 따로 백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 「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 「리야」를 빌어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정한 생산과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이 괴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는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이퍼(이렇게 부르기는 과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주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신의 피가 수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가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그칠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채의 전개— 책을 아직 반도 넘기지 않은 이제 주화는 주리야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 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서 준 것은 무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속을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에 생긋 웃고 섰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드러냄표|카페|sesame}}(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 대로 {{드러냄표|샐러드|sesame}}나 맨들구요.」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그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고 하꾸라이가 아니라요, 크로오바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먹어 본 탓인지.」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 갑에 든 크로오바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 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드러냄표|샐러드|sesame}}, 카페와 숭늉— 이 칵테일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렇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떤 때에는 {{드러냄표|햄|sesame}}이나 {{드러냄표|소오세지|sesame}} 조각을 사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되게까지 되었던 거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하고 탄식하였을 때 주화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치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지」 하고 도리어 톡톡이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에도 가야 하지 않겠소?」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 석 달 동안이나 데리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이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에요?」 「석 달 동안이나 벼르고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드러냄표|견학|sesame}}할 자격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직공과도 친해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찍이 가 봅시다.」 「네— 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기뻐서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이 뚫어져 뾰족이 내다보이는 하아얀 한 개의 별— 석 달 동안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성가족(聖家族) == 「대체 어데까지 끌고 가실 작정예요?」 「따라만 오구려.」 「지도에도 없는 세상 속으로 데리고 가실 셈이군.」 「지도에 없는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도에 없는 세상이라면 천당과 지옥인데 끌고 가시는 곳이 대체 어데예요?」 「지옥일는지도 모르지.」 「맙소사. 천당으로 못 데리고 가실지언정 지옥으로 끌고 가시겠어요?」 「그럼 천당으로—」 「성스러운 가족 사는 세상으로요.」 종종걸음으로 주화의 뒤를 따라가는 주리야는 이 한가하지 못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재담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장식하려 하였다. 시구문 안, 전차를 내려서 좁은 옆 골목으로 한 마장 가량이나 걸어 들어가도 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나는 곳이 없었다. 전등 하나도 달리지 않은 골목 안은 유심히도 어둡다. 도희의 불빛이 밤하늘 위에 우렷이 흐려있을 뿐이요, 그것이 이 동떨어진 어두운 골목 안까지 비취이지는 않았다. 서울 온 지 석달에 아직 거리 거리의 지리가 밝지 못한 주리야에게 이 궁벽한 지대는 생각지도 못한 딴 세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전등 하나도 없다니.」 길바닥이 어두워서 발밑이 허전허전하는 주리야는 주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길을 더듬으면서 게두덜거린다. 「아마도 지옥인가 보오.」 껄껄 웃는 주화가 얄궂게 생각되었다. 「난 도로 갈 테예요.」 「여기까지 왔다 도로 가다니...... 가만 있소. 다 왔나 부오.」 하면서 주화는 무뜩 눈앞에 닥치는 대문 앞에 머물렀다. 「낙원에서 지옥까지가 아흐레 동안의 길이라더니 전찻길에서 여기까지 아마 구 분은 걸렸나 봐요.」 「농담은 그만 두고 따라 들어 오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도래를 틀고 손쉽게 문을 열더니 주리야를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지옥이고 천당이고 간에 다 왔으니 시원하군요.」 한 간의 조촐한 대문과는 딴판으로 뜰 안은 침침한 어둠 속에 넓직하게 퍼져 있고 그 네모에 마룻대를 달리한 여러 채의 초라한 집이 들어섰음을 보아 그 안은 한 집안이 아니라 채마다 다른 가호가 들어있음을 주리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뜰 복판에 지붕 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아도 돌 틈에 푸르칙칙하게 이끼 끼인 그 우물이 집안 전체에 우중충한 느낌을 주었다. 가호마다의 생활의 자태를 첫눈에 엿볼 수는 없었으나 전체에서 받는 첫인상은 심히 우중충한 것이었다. 우물과 같은 칙칙한 생활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 밑을 조심해요.」 주화는 우물 옆을 돌아 구석으로 훨씬 들어박힌 서편 가호의 뒤로 돌아갔다. 첫걸음의 발 설은 어둠길을 주리야는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가호와 동떨어져서 외딸리 아늑하게 서편으로 향한 그 집을 돌아 정면에 이르렀을 때에 좁은 뜰로 향한 두 간의 방에서는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인기척이 없고 고요한 공기가 바닷속같이 주위에 잠겨 있다. 「바로 이 집이요.」 「성당같이 고요하군요.」 「성당같이 고이 올라 오오.」 야트막한 툇마루에 오르더니 주화는 말도 없이 아랫방 문을 열고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주선생님이시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여인네의 얼굴이 밀장 사이에 어리웠다. 「시스러워 여기지 말고 들어오.」 주화는 주저하는 주리야를 내다보고 다시 여인네를 향하였다. 「주리야를 데리고 왔는데.」 여인네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더니 마루로 뛰어나왔다. 「들어오시오.」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초면의 따뜻한 손길에 끌려 주리야는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첫 인사는 아무 것도 없이 끔직이도 반가워하여 주는 따뜻한 애정에 주리야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한 느낌을 받아 그 자리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어지러운데 와 주시노라구.」 여인네— 주화에게서 늘 들어온 남죽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진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어 한구석에 뭉쳐 놓았다. 오랫동안 고생에 폭 바스러진 까무잡잡한 남죽의 얼굴에 주리야는 첫눈에 친밀한 「언니」를 느꼈다. 「진작 오려던 것이 생각만 앞서고 여의치 못했어요.」 「나야말로 늘 주선생께서 듣기만 하면서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남죽은 주리야를 진득이 바라보며, 「살림살이 바쁘시지.」 고향이 같은 관북의 이웃 고을이라는 생각이 도와서인지 즉석에 한 집안 식구와 같이 피차의 감정과 의사가 유통되었다. 몇 마디를 건너지 않아 벌써 두 사람의 마음은 긴밀히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땅속의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나 주리야가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같이 낯설고 서마서마한 곳은 아니요, 마음의 세상에는 땅 위 땅 속이 없이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쉽게 합류되었던 것이다. 「오늘 면회하였소?」 주화는 남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면회는 못했어요. 요전에 면회한지 몇 날 안 된다구 허가를 해주어야지요. 겨우 헌 옷가지를 차하해 왔을 뿐이지요.」 「공연히 공장만 하루 때려눕혔군요.」 「그런데 요사이 건강이 퍽 부실한 모양이여요.」 「그 동무 말 아니군— 검거될 때부터 심장이 약하던 사람이 예심에 거의 일 년이나 있게 되니 안 그럴 리 있겠노.」 「요전에 면회할 때부터 신관이 몹시 축났기에 걱정은 했지만— 오늘 편지로 자세히 들으니 아주 심한 모양인데요.」 「편지로요?」 「차하해 내온 옷을 뜯었더니 저고리 솜 갈피 속에서 이런 것이 나왔어요.」 하며 남죽은 치마띠 사이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한 장의 종이 조각을 집어내서 주리야의 눈앞을 서슴지 아니하고 주화에게 주었다. 「혈서이군.」 종이 조각을 펴 들자 주화의 양미간에는 볼 동안에 수심의 주름이 잡혔다. 「입술을 깨물고 피를 내서 간수의 눈을 숨겨 가며 차입해 준 코종이에 깨알 박듯 그렸겠지요.— 늘 하는 짓이니.」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서 주리야는 가벼운 몸서리를 치면서 주화가 든 혈서의 조각을 무시무시 바라보았다. 내려 읽는 주화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주리야는 불시에 수군거리는 사람의 음성을 들었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고 외국어의 단어를 외우는 것도 같은 가는 목소리는 확실히 웃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있는 웃방 장지를 바라보았다. ----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린 후 책 덮는 소리가 나더니 웃방 장지가 가볍게 열렸다. 그칠 새 없이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상스러워서 은근히 그쪽만 바라보고 앉았던 주리야는 열린 장지로 나타난 그 인물에 적지 아니 놀랐다. 「저이가......」 주리야는 집에 가끔 주화를 찾아오는 그 대학생을 이 낯설은 곳에서 만날 줄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주동무요.」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그는 주화들이 와 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있으련만 의아한 눈초리로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리야의 더욱 이상스럽게 여긴 것은 뒤미처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낯설은 처녀였다. 어떤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그 처녀가 남죽의 동생 남희인 줄은 물론 첫눈에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와 이 대학생이 한 방에서 수군거리는 친밀한 사이에 있다는 것이 그러한 장면을 처음 당하는 주리야에게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려워서 못해 먹겠다.」 낯설은 주리야를 보고 문턱에서 주춤한 남희는 부끄러운 표정을 이런 탄식으로 얼버무려 넘기면서 언니 옆에 사뿐 내려와 앉았다. 주리야는 여자다운 민첩한 신경으로 수줍어하는 남희의 태도와 겸연쩍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과 남희 두 사람의 서먹서먹한 이를 첫눈에 느꼈다. 「한 달이나 두 달로 그렇게 쉽게 깨치겠소?」 대학생인 민호는 딴전을 보면서 남희에게 말하고 주리야를 바라 보며, 「주동무는 불란서말 공부하신다지요?」 주화를 부를 때 쓰는 「주동무」로 주리야를 부르는 것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친밀의 느낌이 없지 않음을 깨달은 주리야는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심심풀이로 강의록을 뒤적거릴 뿐이지 정성을 들여야 말이지요.」 「남희 불란서말은 안 배우려우.」 「그렇게 한가한 것 배울 틈 있나요.」 민호의 농담에 남희는 가볍게 반박하며 주리야를 흘끗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이 한마디가 주리야에게 불현듯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남희와 불란서말을 공부하는 자기와의 의식의 정도, 피차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주리야가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이 말에서 받는 불쾌한 느낌을 마지 못하였다. 남죽에게 「언니」를 느낀 그는 남희에게도 응당 친밀한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나 웬일인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도리어 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가 본데.」 편지에만 열중하였던 주화는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남죽을 바라보았다. 「이왕 들어가 있는 이상 고분고분히 일르는 대로 했으면 좋을 것을 공연히 쓸데 없는 반항을 하는 모양이예요.」 남죽의 뒤를 남희가 받아서, 「아재는 원래 피가 관 분이래서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시게 되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청대로 보석 운동을 해보시지.」 「보석 운동인들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보석이라면 저도 힘써 보지요.」 민호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희망도 있으니 우선 이변호사를 찾아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나도 만나는 대로 말해 보지만.」 「이변호사에게 폐를 끼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형무서에서 여간해서 승낙하겠어요? 병이 쇠해 빠져서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옥을 시키는 형편인데.」 한숨을 짓고 남죽은 계속하여, 「그러고 둘째로 보증금이 수백원은 들 터인데 그것을 또 어데서 어떻게 구하겠어요.」 「어떻든 유예할 경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곧 이변호사를 찾아보시도록 하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죽은 날쌔게 혈서를 접어서 치마 틈에 수습하고 널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었다. 박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누구시라구요.」 긴장이 풀리며 남죽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들 다 오지 않었소.」 박선생은 문득 주리야를 발견하고, 「주씨 웬일이요.」 의아한 눈을 던졌다. 늘 집으로 찾아오는 박선생 처소를 항상 변경하면서 돌아 다니는 그에게 가끔 저녁을 대접한 일까지 있는 박선생— 그를 문득 이런 곳에서 만나니 친밀한 느낌이 났다. 「바람도 쏘일 겸 놀러 왔지요.」 「놀러......」 「올 때들이 되었는데 아직 안 오는군.」 주화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이 있나 보구나— 주리야는 직각적으로 느꼈다. 놀 러 왔다는 말을 듣고 박선생이 놀라는 것이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도 주화는 모임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극히 신중히 해나가는 모임인 것같이 짐작되었다. 따라서 그가 참례할 바가 못 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이만 실례할까요?」 하고 주화의 의견을 묻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있으려면 있구.」 꼭 있으라고는 권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임에는 참석시키지 말고 우선 집만 가리켜 줄 작정인 듯하였다. 「더 {{드러냄표|놀다}} 가시지, 이런 것 저런 것 보아 두셔야지.」 박선생의 권고를 그러나 주리야는 사양하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밖에 아마도 「동무」들의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났다.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오.」 하고 그를 보내는 주화에게 체면에 차마 달려들어 어리광을 피우지는 못하고 점잖게 대답하면서 좌중에 목례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아리랑'에 잠간 들렸다가 바로 집에 가 있을게요.」 ---- 야영 백화점에 들려 늘 하는 버릇으로 막연히 찬란한 층층을 한 바퀴 돈 후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다시 단골로 다니는 조촐한 차점 '아리랑'에 들려 진한 커피를 청하였다. 커피 인이 꼭 박혀버린 주리야는 하루에도 여러 잔은 예사로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의 건강을 해롭히지는 않았다. 커피의 향기와 쓴맛이 그의 비위에 꼭 맞았던 것이다. (발자크는 그의 일생을 커피 마시고 소설 쓰는 데 바쳤다지. 나도 그이와 같이 {{드러냄표|자바|sesame}}보다도 {{드러냄표|브라질|sesame}}보다도 {{드러냄표|모카|sesame}}가 제일 좋아.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평생 커피나 실컷 마셔 볼까) 하면서 그의 커피의 습관을 발자크의 풍류에 비기는 주리야였다. 그러나 그 습관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색한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 감정에 꼭 들어맞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크림은 넣지 말까?」 「아무렴. 시커먼 진짬으로 한 잔.」 어느결엔지 벌써 퍽 친밀한 사이가 된 차점의 여주인 한라에게 주리야는 손짓과 웃음을 던졌다. 「오늘 난 좋은 곳에 갔다 왔지.」 한라가 손수 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없는 고요한 탁자에 주리야와 마주 앉았을 때에 주리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데라니. 천당에?」 「천사들이 있는 대신 거츠런 장정들이 모이는 곳에.」 「장정들이 모여서 천국을 세우려고 애쓰는 곳에 말이지.」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끔찍한 세상을 보았소.— 피가 난 모둠 계획.......—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연히나마 짐작되는 것 같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쾌한 레코드나 한 장 걸가. 주리야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도 한 장.」 하면서 일어서려는 한라를 그러나 주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붙들어 앉히고, 「오늘밤만은 나의 기분을 깨뜨리지 말고 고요히 그대로 두어요...... 나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랫동안 잊었던 한 구절의 시가 가슴속에 솟아 오르겠지.」 「에구, 오늘밤에는 또 왜 이리 센티멘탈해졌어?」 「놀리지 말구 이것 좀 들어봐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리야는 한 구절의 시를 읊기 시작하 였다. :하아얀 횟돌의 조각이 있고 꽃향기 넘치고 햇볕이 창에 얼기설기 비치는 곳 :이글이글 타는 난로와 음식장과 유리잔 있는 곳 :거기에서 꿈을 꾸고 그대를 생각하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이지러진 한 개의 탁자가 있다. :쉬어빠진 한 잔의 술이 있다. :낡은 한 권의 성서가 있다. :끄슬러서 침침한 등불이 있다. :시들어버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유리창 밖에는 진눈깨비와 바람이 불고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에 떨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니라. 「아니 어데서 그런 시를 외웠소?」 듣고 난 한라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면서 주리야의 코를 끄들었다. 「훌륭하지.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읊은 아름다운 노래야.」 「가난한 줄 이제 알었나.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드러냄표|싸움터|sesame}}로 나가야 할 시절이니라'—고 고쳤으면 좋겠군.— 우리도 현재 이런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시가 아니라 소시민적 감정을 표현한 잠꼬대야.」 「이지러진 탁자. 쉬어빠진 술. 어두운 등불.— 시상으로 얼마나 훌륭하우. 나는 여기에서 한 편의 프로 시를 발견한 듯한데.」 「프로 시에 아스파라거스는 다 무어야. 세상에는 아스파라거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우. 진정한 프로 시 되려면 아직 구만리의 거리가 있어.」 사귄 지는 오래지만 한라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의견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마음속에 그 무엇이 있듯이 평소에 멍하고 있는 한라이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이러한 소리를 하는 오늘밤의 그가 주리야에게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럼 결국 프로 시가 아니란 말이지?」 「주리야나 나같이 날마다 커피나 먹고 지내는 한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이 싱싱한 실감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그럼 부르주아의 것이란 말요.」 어느결엔지 모둠에서 만났던 민호가 나타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주리야는 이렇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계시오.」 「프로 시 시비예요.」 「어떤 프로 시요.」 「아니 그래 이런 것이 프로 시가 아니예요?」 하고 주리야는 다시 아까의 시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까지 듣고 앉았던 민호는 신중한 목소리로, 「훌륭한 시가 듣고 싶으면 내 한 편 읊어 드리지— 이런 것이 정말 훌륭한 시란 것이요.」 :고향 사정 말한 일 없고 :자유로운 시간 가진 적 없이 :제일 싫은 책임 도맡아 보던 그 동무 :곤란이 막심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그 동무 :기계같이 일하고 :칼날같이 과단성 있고 :××의 그물 표범같이 뚫던 그 동무 :밉살스러우리만치 대담하던 그 동무 :아! 끝내 그는 붙잡히고야 말았다 :겁내는 내의 마음 늘 매질하여 준 것은 :신념에 빛나는 그의 눈이었다 :풍진 세상의 행복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 :꾸짖어 준 것은 도깨비불 같은 그 눈이었다 :나의 가슴 사소한 책무에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백곱절의 일을 하였다 :모진 폭풍우가 휩쓸어오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던 그 동무 :나의 마음 못 믿더라도 그만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 동무 잡히고야 말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누나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콘크리트 천정을 노리고 있을까 지금의 그 동무 :이틀 동안 굶은 배 한 그릇 국밥으로 채운 :그와 나였다 :우박송이 퍼붓는 어둠 뚫고 :전신을 폭 적시우며 :모둠에 달려간 그와 나였다 :「우리」에서 돌아올 때 :나는 늘 그의 꿋꿋한 손과 낭랑한 웃음이 그리웠다 :그 동무 그 동무 돌아오지 않는 그 동무 :목숨 떨어지는 날까지 잡히운 몸의 그 동무 :매맞고 박채우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그 동무 :도깨비불 같은 그이 눈이 :철망을 건너 나에게 광명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그 동무 돌아오지 않누나. :그러나 그가 주고 간 열정 그가 보낸 광명 :나의 가슴에 타고 수천 동지 가슴에 타서 :세상을 살러 버릴 횃불이 되리라 :아! 동무여 편히 쉬라 새벽은 가깝다! 「아 그 동무 그 동무.— 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하군. 아니 그것이 대체 시요, 실제 경험이요?」 마지막 구절까지 숨도 가라앉지 않고 듣고 있던 주리야는 감동에 넘치는 두 눈에 광채를 가득히 담았다. 「퍽이나 감동하신 모양이군.」 「그렇게 훌륭한 시는 오늘밤 처음 들엇어요.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아! 돌아오지 않누나. 그 동무!」 감동된 두어 줄을 외우다가 주리야는 문득 한라를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같이 둥근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고여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술에는 웃음을 띄우고 눈으로는 울고 있다. 「한라, 왜 우우?」 「지금 그 시가 너무도 훌륭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는 병증이 있다우.」 그렇게는 말하여도 주리야는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느꼈다. 아까의 그의 시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지금의 눈물이라든지 그 무슨 그 시와 관련되는 것이 그의 생활의 한구석에 있으려니 짐작되었다. 하기는 주리야 자신도 그 시에서 받은 감동은 심히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무지를 개발하여 주는 횃불이요, 소시민적 생활 위에 떨어진 위대한 폭탄덩이였다. 그 위에 한라의 눈물은 더한층 그를 매질하여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고요하던 좌석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기가 아까워서 그는 한라의 손을 잡으면서, 「울지 말우 한라— 내 레코드 한 장 걸게.」 하고 일어나 가서 그가 좋아하는 {{드러냄표|렌·피리스|sesame}}의 하와이안 비 타를 걸었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양말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아리고 내 양말 대님.」 하고 땅 위를 더듬어보는 동안에,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민호가 그의 발밑에서 그것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리야는 민호의 눈앞을 꺼리지도 않고 무릎 위까지 치마를 걷고 양말을 걷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민호가 그에게 준 한 마디가 웬일인지 이상스럽게도 가슴속에 들어 배는 듯하였다.—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 집에 돌아오니 주화는 어느덧 아랫목 이불 속에 드러누워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웃목에 친 검은 막 속에서 옷을 벗고 나오는 오늘밤의 주리야의 자태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찬란한 나체에 포도 잎새 한 닢 붙이지 않고 칵 속에서 뛰어나와 주화의 앞에 나타나던 그가 오늘은 포도 잎새 아닌 한 권의 책으로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주화의 앞에 웬일인지 별안간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포도 잎새 대신으로 쓴 그 책은 자본론의 한 권이었다. 이불 속에 뛰어들어가기가 바쁘게 주화의 귀 밑에, 「아리랑의 한라가 '그 동무'란 시의 낭독을 듣고 우니 웬 일예요.」 「그 시 그대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울 때도 있겠지.」 「아니 한라의 친구가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그 동무'의 처지에 있으니까 말요.」 작자 부언(附言)— 作中 두 편의 詩는 某氏의 것을 빌려다가 의역한 것임을 말하여 둔다. == 마음의 안테나 == (대체 웬 녀석야.) 알지 못할 사나이의 시선을 등뒤에 받으면서 정동 골목으 로 들어갈 때에 주리야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일정 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향을 갈아 길을 돌릴까도 생각하였으나 맡은 일의 관계 상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대로 정동 골목을 들어갔다. (불량소년일까, 그렇지 않으면 탐정일까......) 알지 못할 작자였다. 종로 근처에서부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 M 백화점의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단정한 양복 맵 시로 보더라도 탐정의 유가 아니면 흔히 있는 불량소년의 따위였다. 그러나 탐정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 정체 모를 사나이의 추격은 더한층 불안한 느낌 을 주었다. (이녀석, 어데 따라 보아라.)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 가다가 조그만 과자가게 앞에 왔을 때에 뒤를 돌아보고 사나이의 눈을 교묘하게 감춰 과 자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츄잉껌을 사서 쭐기쭐기 씹으면서 밖을 내다보노라니 헛물 켠 사나이는 길 옆을 기웃기웃 살피면서 과자점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흉칙한 녀석.) 주리야는 콧웃음을 치면서 가게 주인을 보고, 「저따위 녀석이 뒤를 쫓것나요.」 주인의 웃음을 들으면서 다시 가게를 나온 그는 사나이의 간 곳을 살핀 후 뒷골목으로 살짝 돌아섰다. 영사관 지대를 지나 넓은 고개 위에 나섰을 때에도 사나이의 그림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주리야는 통쾌한 웃음을 남기면서— 그러나 역시 치밀한 주의이ㅡ 눈을 던지면서 급한 걸음으로 민호의 숙소인 아파아트로 향하여 내려갔다. 고개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목조 이층집—문간에는 여러 가지 단체의 간판까지 걸린 그 한 채를 아파아트라고 부르 기는 부적당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방방을 개인 혹은 단체에 게 빌려주는 그 집을 아파아트라고 부르기에 주리야는 아무 런 부자연한 느낌을 느끼지 않았다.이층의 방 한 간을 민호 가 빌려 가지고 있었다. 급히 문간을 들어간 주리야는 그것이 첫걸음이었지만 이층 에 뛰어 올라가 손쉽게 민호의 방을 찾았다. 걸리지 않은 문을 노크하니 반갑게 안으로부터 열렸다. 불쑥 내밀었던 남희의 고개가 별안간 움츠러들었다. 순간 예상치 아니한 여주인고의 출현에 주리야의 눈썹이 볼 동안에 찌푸러졌으 나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없고 남희 혼자였다. 남희가 무료하여서 읽던 책이 침대 위에 편 채로 놓여 있었다. 무심히 뒹굴고 있던 남희 는 성에 맞지 않는 이 돌연하 침입자로 인하여 마치 엄한 선생의 앞에 나선 듯이 마음이 거북하고 몸이 굳어졌다. 「민호씨를 만나러 왔더니 안계신가부군.」 「입때껏 기다려도 안들어 오셔요.」 「웬일인가 시간이 넘었는데.」 하면서 주리야가 책상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남희는 별안 간 그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 위에 놓인 한 자의 종이를 집 어서 날쌔게 꾸겨 버렸다.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우렷이 빛났다. 필연코 민호에게 대한 공상의 낙서를 그 위에 장난 쳤으려니 생각하고 주리야는 쓴웃음을 남희의 얼굴 위에 정 면으로 던졌다. 그 웃음의 그늘 속에는 그러나 독사의 그것 과 같은 매운 눈초리가 숨겨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앞 을 가로채고 나타나는 남희가 주리야에게는 귀찮고 어줍지 않은 존재였고, 그 남희에게 주리야는 독을 품은 수리같이 생각되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겁을, 한 사람은 불 같은 질 투를 만나는 때마다 동시에 느꼈다. 주리야의 냉정한 이성 이 그의 이 부탕한 질투를 꾸짖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 러나 더 많이 그의 여자다운 본능이 과분의 열정을 북돋아 마지 않았다. 「이만 가볼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 남희는 혼잣말로 중 얼거리고 주리야의 대답고 기다리지 않고 아파아트를 나갔다. 남희가 가버리고 혼자 주인 없는 방에 남아있으려니 주리 야는 도리어 스스러운 생각이 났다. 남의 권리를 뺏고 그 뒷자리에 들어서 그의 염치가 너무도 뻔질뻔질하게 생각되 엇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가 씹는 껌의 향기와 같이 사 라져버리고 민호에게 대한 생각만니 찐덕찐덕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가 생각하여도 부당한 경쟁의 의식과 알지 못할 승부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신 괴 이하게 여겼다. 창 밖에는 여학교가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서 공고 같이 뛰노는 처녀들의 아무 계교없는 순진한 자태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매질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스럽게 시침을 떼고 주인없는 방의 여왕 이 되었다. 민호 안오는 시간의 무료를 못이겨 그는 알콜 풍로에 불을 달이고 물을 끓였다. 여러해 동안 살아오는 그 자신의 아파아트와도 같이 가장 손쉽게 장 속에서 크림과 사탕을 집어내서 코오피를 만들었다. 뜨거운 차를 불고 있 는 동안에 민호가 왔다. 「잠간 동안 이 방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자리를 사양하면서, 「—남희까지 쫓아버리고요.」 하고 이 한 마디가 민호에게 주는 효과를 살피려고 그의 얼굴을 진득이 노렸다. 「장하군요.」 슬푼 표정 대신에 민호는 미소로 이 어여쁜 「영웅」을 칭 찬하였다. 물론 그 미소와 칭찬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없었으나 주리야는 적어도 이 「사나이」—생각과 처지 와 양심과 순정을 빼내 버린 나머지의 이 사나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그의 헛된 자만심만은 아닌 듯하였다. 「주화가 단체 일로 시골 간 것 아시겠지?」 「동무에게서 들었지요.」 「주화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하고 주리야는 핸드빽 속에서 한 장의 두터운 봉투를 집어 냈다. 「—이것을 즉시 전해 달라구요.」 「하하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던가.」 민호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봉투를 책상 속 깊이 간수하였다. 주리야 자신 실상은 봉투의 내용을 몰랐으나—구태여 알 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갈의 임무를 마치니 곧 안심될 뿐이 었다. 「그리고—」 장난의 눈초리로 민호를 바라보며, 「즉시 뜯어보고 곧 시작해 달라구요.」 「영어면 곧 되겠지만 독일어면 좀 거북한데.」 늘 있는 구라파 한가운데에서 직수입하여 오는 직접 일에 관계있는 원물 팜플렛의 번역의 일인 것을 주리야는 여기에 서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여 더 자세한 내용의 비밀을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야지.」 껌을 새로 집어내서 입에 넣고 곱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파아트를 나와 고개를 걸어 내려가던 주리야는 고요한 행길에 인기척 소리를 듣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알 지 못할 사나이가 그의 뒤를 또 쫓는 것이었다. 별안간 소 름이 끼쳤다. (웬 벌레 같은 놈팽이야.) 그 추근추근한 사나이의 행동에 화가 버럭 나서 주리야는 문득 한 꾀를 내어 걸음을 멈추고 길 옆에 무뜩 서 버렸다— (놈 좀 앞서 봐라.) 사나이는 터벅터벅 가까이 오더니 그의 옆에 머물렀다. 씹 던 껌을 그의 낯짝에 탁 뱉을까 생각하며 휙 돌아섰을 때 사나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공손히 목례를 하였다. 「실례지만 김영애씨지요?」 「웬 걱정이요?」 「이를 말이 있어서요—」 사나이는 모자를 쑥 올려 뒷덜이에 붙이고 두 손을 양복바 지 주머니 속에 푹 꼽더니, 「—공연히 서울바닥을 일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골로 내 려가는 것이 어떻소?」 별안간의 충고에 마음이 짜릿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례한 그의 낯짝에 숫제 껌을 뱉아버릴까 하다가 참고, 「아니, 댁이 무엇인데 그렇게 주제넘소?」 물론 그가 경박한 불량소년이 아님은 그의 충고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은......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나 당신의 처지가 딱해서 하는 말이요.」 「나의 자유 의지의 행동인데 무엇이 딱하단 말요.」 「시골서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소.」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보다 도 남의 사정을 여기까지 알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괴상하 여 주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다.」 하고 사나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정색하더니, 「어떻든 잘 생각하여서 앞길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이번에는 혼자 앞장을 서서 더끔더끔 걸어 내려갔다. 주리야는 의아하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그자리에 우두 커니 서서 껌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이상스런 사나이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의 말이 유난히도 뼈속에 사무쳐서 여러 가지 생 각을 가슴속에 자아내게 하였다. 움직이는 불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주리야는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외로운 처 소에 돌아가서 혼자의 저녁을 짓기도 스산할 것 같아서 양 식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거리에 등불이 들어온후에 야 어슬어슬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아래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필연코 주화의 동무들이 찾아 와 있으려니 생각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주리야는 그들이 도무지 뜻하지 못하였던 의외의 인 물임에 깜짝 놀랐다. 될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의 앞을 피하 여 되돌아서서 도망이라도 하고 싶은 정경이었다. 「어디를 가서 종일 쏘다닌단 말이냐?」 침착한 목소리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주리야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우두 커니 서 있는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주리야는 마음을 다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오빠.」 고개를 수그린 누이동생의 자태에 오빠는 목소리를 부드럽 혔다. 「서울 온지는 벌써 여러날 되었으나 집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이야.」 「아니 그래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 수 있니? 사립 탐정에게 부탁하여 사흘만에 겨우 찾 아냈다.」 「탐정에게요?」 이렇게 반문한 주리야는 아까의 아상스러운 거리의 사나이 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 추근추근하게 그의 뒤를 쫓던 것 도 결국 고마운 충고를 주려는 생각보다도 그의 거동을 살 피려는 직업적 심사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안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이야?」 「저도 충분히 생각한 후에 취한 행동인데 걱정하실 필요 가 어디 있어요?」 「한 분밖에 안계시는 어머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시 는 줄 아니. 불효막심한 자식.」 「어차피 불효막심은 생각한 끝에 일인데요. 어머님께 반 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유만은 배반할 수 없어요.」 「주제넘은 소리 그만두어.」 오빠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에 서울 와서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돈 한푼 없는 놈팽이와 붙어서 무엇을 했어?」 이 말은 듣고 주리야는 그의 기개높은 자존심으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 마세요. 돈 한푼 없는 놈팽이라니 요? 어떻게 하시는 말씀예요? 돈은 없다 할지라도 돈 많은 도야지와는 뜻이 다르답니다.」 옆에 앉은 사나이—주리야가 배반하고 온 시골의 약혼자— 가 입맛이 쓴지 오빠와 주리야를 등분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라.」 오빠의 이 한마디에 주리야는 그러나 구태여 반항하려 하 지 않고 그것이 도리어 괴로울 듯하여서 잠자코 고개를 숙 였다. 「.............」 허수아비같이 앉았던 약혼자는 기회를 잡은 듯이 오빠를, 다음에 주리야를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 을 하여 주시오. 지금이라도 나에게는 결코 늦지 않으니 충 분히 생각해서 잘 조처하시오.」 주리야는 기가 막혀 속으로 픽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 리라고 말한 법도 없다. 추근추근한 사나이.) 이렇게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말없이 침울하고 슬픈태도를 지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내일은 단연코 내려가자—나이는 차 가는데 언제까지든지 그 주제로 언제 사람 되겠니.」 비교적 온순한 오빠의 태도에 호감을 가진 주리야는 오빠 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공손히 듣는 체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집안에 대한 체면도 체면이지만 이제는 박군을 대할 면 목이 없다.」 오빠는 사과하는 듯이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주리야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두 청 년은 그들의 권유가 효과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기뻐하였으 나 주리야는 속마음으로는 웃고 있었다. 눈물—그것은 반드시 슬픔의 표현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주리야에게 그 눈물이 일종의 기교(技巧)요, 일종의 수단이 었다. 눈물과는 딴판으로 마음속으로는 물론 다를 꾀를 궁 리하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같이 새우다가는 불가불 붙들리고야 말 것이다. 밤이 새기 전에 이 두 마리의 이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하겠다.) 그날밤 늦은 후 일찍 잠든 두 사람의 옆을 빠져 주리야는 일보러 가는 체 하고 방을 나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여행에 넉 넉하리만큼 가방 속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몰래 집을 나왔다. 들고 나온 「벙어리」를 돌에 부딪쳐 깨뜨리고 흐 트러진 돈을 가방 속에 걷어 넣었다. (월미도에 가서 며칠 동안 바다를 보며 은신하여 있을 여 비는 되겠지.) 주체스런 가방을 들고 뒷골목을 걸음 빨리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행을 승낙할까.) 혼자 가기가 수상하게 보일까봐 민호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이것이 민호를 차지할 안성마춤의 좋은 기회라고 은근 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가면 끌고 가지.) 아름다운 악마의 결심을 하고 주리야는 고요한 밤거리를 걸어 정동 아파아트로 향하였다. 벌써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운 민호를 잡아 일으키고 주 리야는 황급한 어조로 그의 신변의 위험을 고하였다. 물론 그것이 일종의 그의 기교였으나 그의 어조가 너무도 황급하 고 태도가 서먹서먹한 까달게 민호도 황급하게 뛰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치 불이 났다!는 고함을 듣고 순간 뛰어나가 듯이 민호는 잠시 동안 아무 지각없이 들뜬 마음으로 날뛰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바 람에 전후의 판단과 냉정한 분별이 없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집어 얹고 주리야의 손에 끌리다시피하여 허둥지둥 거리로 나갔다. 막차는 이미 끊어진 뒤었다. 주리야는 하는 수 없이 택시 를 세내 가지고 민호와 같이 탔다. 넓은 밤 가도를 자동차 는 전속력으로 달았다. 길 양편의 나뭇잎이 선명한 초록빛 으로 자동차의 등불 속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신선한 밤 드라이브—그 속에서 차차 정신이 든 민호는 이 밤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몽유병자가 아닌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몽롱한 의식에서 차차 현실로 돌아갔다. (나의 행동은 바른 것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비판할 여가 가 없었다. 요동하는 차 안에 있을 때에 사람은 이유없이 취하는 법이다. 그 가벼운 도취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주 리야의 육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다시 꿈 세 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데를 왔나.) 단 걸음에 섬 속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호는 부지식간의 그 의 행동이 엄청나게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았어요. 범의 구에서 피해 나온 듯해요.」 주리야는 마음속으로 안도한 듯이 여관집 문앞까지 갖다 댄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저하는 민호의 손을 끌었다. 「동행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나는 뒤로 가지요.」 동지인 주화의 생각이 퍼뜩 머리속을 스치자 정신을 깬 양 심의 조각이 민호의 가슴을 죄었다. 「동무의 위험을 보면서도 그의 옆을 피하다니 그런 비겁 한 사람이 어디 있소?」 주리야는 비웃는 듯이 우뚝 서서, 「미래의 투사 될 사람이 그만한 용기도 없이 어떻게 하우.」 「옆을 피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주리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 「나 혼자 보다도 당신이 옆에 같이 있는 것이 다른 눈에 도 수상치 아니하고 더욱 안전하단 말예요. 당신은 며칠 동 안 나의 허수아비가 되고 장식품이 되면 그만예요.」 얇은 양심은 부드럽게 거세를 당하고 민호는 끌려 들어갔다. 여관의 바다의 첫 시절이라 만원이었다. 이층의 방 한 간 이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로 안내해 주시오.」 주리야는 하녀에게 분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거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대담한 까닭에 민호는 도리 어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그와 싸워 보자고 민호는 결심하였다. 양심과 애욕과 어느 것이 이길까 승패를 가려 보리라고 작정하고 닥쳐오는 현실 그대로를 순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밤이다. 창르 열고 민호는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에 잠 들고 있는 항구에는 등불이 둥실둥실 떠 있고 섬 밑에서부 터는 어두운 바다가 폭넓게 쭉 깔려 있다. 시원한 바람이 우거진 나뭇잎을 흔들면서 흘러와서는 가슴속을 헤치고 들 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민호의 등뒤에 주리야가 너무도 가까이 와 섰기 때문에 목 덜미가 간지러우리만큼 주리야의 따뜻한 입김이 가깝게 흘 러왔다. 「밤 바다는 어두운 데서 보아야 더 좋답니다.」 「어두우면 바다가 보이나요.」 「우렷이 보이는 곳에 운치가 있지요—내 불을 끄고 올게 보세요.」 「불은 그대로 두시지.」 민호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주리야는 뒤로 가서 방 복판의 전기불을 껐다. 민호 옆에 와서 창을 마주 열고, 「어슴푸레한 것이 더 한층 아름답지요. 밝은 곳에서 추한 것도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아름답게 보여요. 바다도 사람 의 죄악도—」 하면서 가슴을 헤치고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아, 저 등대!」 등대를 발견하고 그는 어린아이같이 팔을 뻗쳐 반짝거리는 먼 곳의 등대를 가리켰다. 깜박거리는 등대 밑에는 신비로 운 바다가 짙은 빛으로 질펀하게 퍼져 있고 같은 바다 위에 하늘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초생달이 얕게 빗겼다. 「귀찮은 현실에 부닥기는 우리에게는 가끔 이와 같은 로 맨티시즘도 필요하겠지요.」 「로맨티시즘이라니요?—나에게는 이 밤이 괴롭소이다. 주 리야와 나와의 관계는 결코 로맨티시즘 속에 떠 놀 관계가 못되니까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가상도 못해 요?」 별안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리야는 죄진 것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휙 돌아섰다. 그 바람에 민호의 양복 호크에 공교롭게 걸렸던 원피스의 치마 허리가 쭉 찢어졌다. 「아이구 어쩌나.」 찢어진 허리르 만지면서 주리야는 새삼스럽게 민호를 쳐다 보았다. 마치 민호의 탓인 듯이 그를 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문간에 선 하녀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주춤하면서 문을 빼꼼이 닫았다. 「쉬시기 전에 목욕들 안하세요?」 민호는 급스럽게 불을 켜고 수건을 얻어 가지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주리야가 가족탕에 들어간 동안에 민호는 혼자 넓은 남탕 에 들어가서 더운 조수 속에 몸을 담궜다. 전신의 피가 녹고 풀리는 동안에 주리야에게 대한 생각과 여러 가지 의심이 뒤를 이어 솟았다. (주리야의 마음속은 대체 어떤한 것인고.) 그의 눈을 현혹케 하고 괴롭히는 것은 나 어리고 천진한 그의 무작위한 심사에서 나온 것일까. 찬란한 그의 천성에 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 있는 말이요, 속 있는 거동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를 유혹하자는 처 음부터의 계속적 성심으로인가. 그러나 그의 주화에게 대한 사랑은 두텁고 깊고 한푼의 틈도 없는 것임을 민호는 잘 알 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의 지듭을 떠보자는 수작인가. 동 지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는 가짜의 마음으로인가. 그렇다면 거동이 너무도 공들다. 아무리 신변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 도 하필 즐겨하지 않는 그를 이 밤중에 끌어낸다는 것은 너 무도 공든 행동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일시 의 장난일까. 심심풀이의 장난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다시 첫 끝에 돌아가 주리야의 본 심을 되생각하고 거듭 짐작하였다. 그동안에 주리야도 독탕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 던 것이다. 그는 갈래갈래의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도 그는 주화를 사랑하였다. 사상적 동감보다도 시각적(視覺 的) 애정으로 첫눈에 끌은 그를 주리야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랑은 차차 깊고 진하고 믿음직한 것으로 변하 였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주화의 동무인 민호를 싫어하 지 않았다. 시각적이고 호감을 느꼈다. 사람의 육체에 눈이 있고 심장이 있는 이상 이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감각의 안테나인 두 눈에 모양이 비칠 때 그것 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사람된 마음의 자유라 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함에 그는 하등의 양심의 꾸지 람을 받지 않았다. 감정의 명령을 잘 좇는 것이 도리어 양 심에 충실한 소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 에 불을 지른 것은 민호의 애인 남희였다. 그는 남희를 만 나는 첫 순간부터 이유 모를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마는 그 질투가 도와서 오늘밤의 행동을 인도한 것이었다. 오늘밤의 행동—그것은 그의 신변의 위험 을 피하는 한 수단인 동시에 남희에게 대한 일종의 자랑이 요, 시위운동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밤의 행동을 어느 끝 까지 전개시키겠다는 최우적 성산과 야심은 없었다. 그는 아직 민호에게 최후의 것까지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 만 주화에게 대하여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에게 대하 여 느끼는 시각적 호감—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박넝쿨같이 갈래갈래로 뻗어 나가는 여자의 마음—어느 갈래가 진짬이요 어느 갈래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모두 똑같이 진정의 갈래—그 방향 많은 갈래갈래의 마음에 주리 야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방 가운데에는 두채의 이불 이 나란히 펴 있었다. 물론 부부려니 짐작하고 하녀가 펴 놓은 것이다. (흠. 마치 두 부부의 잠자리 같군.) 뒤미처 들어온 민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한편 이불께 로 갔다. 「—밤이 퍽도 늦은가부다.」 「곧 자야지요.」 주리야는 나머지 한편의 이불 위로 가서, 「나는 밝으면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불을 끄지요.」 민호의 손이 뻗어 전기불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잠자리 옷을 갈아입고 각 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주리야는 무심한 자태를 지니고 민호는 하룻밤 동안 괴롭게 싸워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 그 뒤에 오는 것 ==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이불 속에서 황망히 속옷을 껴입은 주리야는 이불을 걷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였다. 엉겹결에 그의 두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 만졌다. 한 송이의 꽃이 하룻밤 서리에 시들어버리듯이 팽 팽하던 그의 얼굴이 하룻밤 도안 이지러지지나 않았을까를 본능적으로 염려하는 듯이. 다음에 그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 오리 한 오리 어루만졌다. 만지는 동안에 그도 모르게 그의 손에 힘이 맺혔다. 손가락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오리 두오리 뚝뚝 뜯겼다. 나중에는 여러 오리씩 줌으로 뜯겼다. 머리를 뜯으면서 그의 시선은 이불 사이로 하아얗게 드러 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보지 않을 것을 본 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스럽게 솟아올라 그는 이불로 다리를 푹 덮어 버렸다. 머리속이 아찔하여지며 별안간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눈이 팽팽 돌았다. 마치 처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려서 깨뜨린 첫 순간과도 같이. 무의식간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잠간 동안에 이불 위에 가락가락 흐트러졌다. 콧등이 띵하여지며 눈물이 빠지지 솟았다—목소리를 내서 막 울고 싶은 심중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슴 밑으로 둥긋이 드러나 젖통을 만지 다가 황망히 옷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소 잃은 후에 외양 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찬란한 아침 해가 창으로 불쑥 솟아 들어왔다. 햇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주리야는 얼굴을 숙 여 버렸다. 너무도 밝은 빛을 꺼리고 사양하는 듯이. 「벌써 깨셨소?」 등위에서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가 아제는 마치 그의 몸을 찌르는 황충이와 같아서 주리야는 그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 였다. 「아니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오?」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건강한 체중이 그의 등뒤에 바싹 기어 옴을 주 리야는 느꼈다. 「골이 아프시오, 배가 아프시오?—별안간 웬일이시오?」 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으며 울음에 떨리는 주리야의 두 어깨가 육중한 힘 안에 폭 싸였다. 주리야는 순간 달팽이같이 움츠러들면 번개같이 몸을 흔들 어 빼쳤다. 몸서리를 치면서—민호의 육체가 지금에는 징그 러운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몸을 빼치는 것과 동시에 좌향을 휙 돌리면서 바른손이 민 호의 볼 위에 날쌔게 날랐다. 「악마!」 또한번 손이 날았다. 「아니 무슨 짓이요?」 「저리 가요.」 「주리야.」 「동물!」 「미쳤소?」 「당신은 동지가 아니고 동물이요.」 「아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요?」 「시침을 떼는구료.」 「곡절을 모르겠으니.」 「간밤에 나를......」 주리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그것이 그다지......」 「그것이 그다지라니.」 「그다지 노엽소?」 「어떻게 하는 말요?」 「대체 나 한 사람만의 의사였단 말요?」 「잠든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있단 말요?」 「그러면 그때까지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 「아니 누가 유혹을 했단 말요?—코큰 소리 그만하오.」 「적어도 암시는 주지 않았소.」 「하룻동안 허수아비 노릇하랬지 누가 사람 노릇—아니 애 인 노릇을 하랬소.」 「그건 이유닷지 않는, 모욕에 지나지 못하는 말요.」 「버젓한 애인 노릇을 한 당신이 너무도 주제넘었소.」 「그렇게 말하면 당초에 아파아트에서 잠든 사람을 몰아낸 것은 무슨 까닭이었소?」 「당신은 그것을 이 결말을 가져오기 위하여서 한 꾀인 줄 아는구려.」 「적어도 결과는 그렇게 되잖았소. 당신이 원인을 지어 놓 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모욕이요. 바로 그때에 치든지 욕 을 주든지하지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요?」 「아니 변명이 무슨 변명이요?」 주리야는 기가 막히는 듯이 눈물 어린 얼굴로 민호를 노렸다. 「나는 다만 떨어진 물건을 집었을 뿐요—땅에 떨어진 양말 대님을 줍듯이.」 양말대님—주리야는 문득 언제인가 차점「아리랑」에서 그 가 떨어뜨린 양말대님을 민호가 집어주던 장면을 그리고 그 가 별 것 다 떨어뜨리시는군 하고 웃던 것을 생각하였다. 사나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임을 알고 그의 큰 실책을 깨달았다. 양말대님이라면 사실 그가 양말 대님을 떨어뜨린 것과 정조를 떨어뜨린 것과는 같은 정도의 부지식간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여운 가운데에도 얼 굴이 붉어져서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정말 별 것을 다 떨어뜨렸구나!) 이러한 속생각 뿐이다. 「손 닿는 곳에 있는 향기 높은 한 송이의 능금—동지고 원 수고 간에 발병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따지 낳을 사나이는 세상에 없을거요. 결국 육체적 거리의 죄였소. 육체적 거리 가 너무도 가까웠든 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 「뻔질뻔질하게—설교를 하는 셈인가.」 주리야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섰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보기 싫으니.」 민호를 보지 않고 눈은 딴전을 향한 채 손은 문을 가리켰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은 아니오. 그러나 이 한가 지만은 잘 알아주어야 하오—결코 주리야의 의지를 짓밟은 나 혼자의 의사로의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이 점에 있는 것이요.」 주리야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무츰무츰하고 서 있다가,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요.」 하고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듯이 방을 뛰어나갔다. 아래층 문간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오는 여하인의 아침인사를 받은 체 만 체하고 문을 뛰어나간 주리야는 허 둥지둥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얼굴이 불을 끼얹은 듯이 화끈화끈 달았다. 굴이라도 있으 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거리는 발이 대중없이 빨리 언덕을 휘둘러 내려갔다. 해가 활짝 솟아 가까운 바다를 일직선으로 찬란히 빛내었다. 움푹 줄어들어간 바다는 파도 한 조각 없이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신선하고 공기가 차다. 불역에가지 내려간 주리야는 모래 위에 푹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무의식간에 지난 밤 기억이 다시 소생되어 마음을 찧고 얼 굴을 달게 하였다. 더구나 아까의 민호의 마지감 마디가 가 슴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운 몸을 바닷물에 잠 그고도 싶은 생각이 났다. (주화를 무슨 낯으로 대하누.) 생각할수록 엄청났다. 처녀가 물동이를 깨뜨린 느낌을 지 나 이제는 하늘을 뒤엎은 듯한 땅을 깨뜨려 놓은 듯도 한 느낌이었다. 주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나 현재 그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금단의 길이다. 그 금단의 과일 을 딴 것은 과시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허락하지 못할 장 난이요 죄악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조관이라도 이것은 허락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주리야는 그가 저지를 죄를, 잘못된 몸을 어떻게 처치하였으면 좋을지 나중에는 몸부림이 날 뿐 이었다. (진작 그때에 왜 반항하지 못하였던가.) 이 생각이 더한층 그의 마음을 에우고 수치의 불을 끼얹었다. 붙잡을 수 없는 애욕의 힘을 이제는 오히려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 결과가 올 것을 처음에 전연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결과가 있은 후의 이 후회 환멸 슬픔—이것이야말로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예측 못한 것이었다. 불어나는 고무풍선을 그것이 터질 줄 을 번연히 알면서도 힘껏 불어 기어코 터뜨리고 그 후에 새 삼스럽게 뉘우치는—그 심사였다. 사랑—미움—후회. 이 갈래갈래의 마음의 줄기와 모순된 심 정—주리야는 이제 이것을 또한번 느꼈다. 수건을 바닷물에 축여 얼굴을 식히면서 그는 모래펄을 거 닐다가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 위에서 다시 행길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어수선한 감정은 차츰 정리되고 통일되어 이 제는 다시 마지막의 한 점인 주화에게로 향하였다. 한 점으 로 집중되니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다. (주화를 어떻게 대하누—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옳겠지— 그러면 대체 주화는 무엇이라고 할까—나를 어떻게 조처할까......) 주화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항상 극히 순진하고 깨끗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화의 앞에 속일 수는 없 었다. 그만큼 주화에게 바친 그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다. 그 의 양심—그것은 곧 주화에게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은 이 제 그를 괴롬의 바퀴 속에 넣고 끝장이 되었다. 「아씨, 아씨, 어데까지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신발소리 역시 여관집 하녀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바람 쏘이러 나왔소.」 수상한 것을 느낀 듯한 하녀의 태도를 살피고 주리야는 시 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그러서요—이렇게 일찌기.」 하녀는 황망하던 그의 양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미소를 띄 우면서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제가 이 근처를 안내하여 드릴까요?」 「그만 거닐고 들어가겠소.」 섣불리 하다가 도리어 마음속을 들여다 보일까 두려워하여 주리야는 발을 돌렸다. 하녀와 나란히 서서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민호가 가버렸 을까, 아직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층에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민호는 아직 있었다. 화로전을 끼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주리야가 들어가도 즉시 고 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보면 또다시 기억이 소생되는 까닭에 주리야는 딴전 을 보면서 한구석에 가서 주섬주섬 짐으 싸기 시작하였다. 「주리야.」 민호는 고개를 들고—무거운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과실이라는 것도 있지 않우. 이렇게 불쾌한 결 말을 맺은 채 섭섭하게 헤어질 거야 있소?」 「............」 「주리야의 생각대로 나의 과실로 돌려보내더라도 앞으로 나 틈 없이 지냅시다. 너무 태도를 선명히 해서 도리어 남 의 눈에라도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우.」 「모든 것을 숨기잔 말이지요.」 「어젯밤에 주리야가 말한 것같이 우리에게는 로맨티시즘 도 필요하다니 한 폭의 로맨틱한 기억으로 싸 두면 그만 아 니요.」 「나는 먼저 가요.」 짐을 다 싸고 손쉽게 단장한 주리야는 민호의 말을 한 귀 로 흘리면서 슈우트 케이스를 들고 문을 나갔다. 「주리야, 주리야.」 들은 체 만 체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의아해 하는 하녀에게 두어 마디 귓속말로 이르고 이른 아 침의 여관을 나갔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탈 생각이었다. 오빠들의 그 뒷소식을 모르는 까닭에 집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우선 당분간 「아 리랑」의 한라에게 몸을 둘 작정으로. 「아침부터 행장을 하고 오늘은 또 웬일이야.」 주리야가 인천서 오는 아침 차를 내린 길로 바로 아직 가 게도 열지 않은 「아리랑」의 문을 두드렸을 때 눈을 비비 며 나온 한라가 의아하여 문을 열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어데를 가는 셈이야?」 「여기까지 왔지」 「여기에 오는데 가방까지 들어야 하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주리야는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풀썩 주저앉으며, 「—시골서 오빠들이 올라온 까닭에 집을 쫓겨 다니는 셈야.」 「진작 이리로 오지 왜—잡히면 경이겠지.」 「처음부터 오기도 미안해서—」 어름어름 그 자리를 미봉하는 주리야를 한라는 손을 끌어 뒷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걱정 말고 방으로 들어와요.」 두터운 벽을 끼고 가게 뒷편에 붙은 넓직한 한 간의 방—한 라의 살림방이요 침실인 그 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루 를 앞둔 의롱 그릇과 잠자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만 숨어 있으면 거리가 뒤집혀도 몰라요.」 주섬주섬 잠자리를 걷고 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당분간 있어 볼까?」 주리야는 천연스러운 자태를 지었다. 그러나 한라가 아침 준비로 밖에 나가 덜거덕덜거덕 하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에는 일단락의 침착이 오고 그 맑은 침착 속으로 모든 비밀과 고민이 새로 살아나왔다. 뒷골목으로 열린 창으로는 늦은 햇발이 흘러 들어와 창 기 슭에 놓인 화분의 「제라늄」을 짙은 분홍으로 물들였다. 그 맑고 신선한 분홍이 주리야의 흐린 마음에는 지나쳐 무 거운 짐이었다. 같은 붉은 빛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나 「제라늄」의 신선한 분홍은 주리야의 붉은 마음에 는 도리어 눈부신 것이었다. 마치 맑은 태양의 빛이 어두운 눈에는 지나쳐 눈부신 것과도 같이. 그 눈부신 「제라늄」 과 동무하여 가는 한라의 순진한 열정—한 사람에게 줄기차 게 바치고 있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그것이 불현 듯이 부 럽게 생각되었다. 그 한라의 열정과 나의 마음과는 마치 달 라진 흙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주리야가 생 각할 때 한라의 그 단순한 살림이 주리야의 더럽힌 몸을 받 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제라늄」의 감격에서 눈을 돌린 쥘야에게 문득 책시렁에 끼인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주리야는 새삼스런 감동에 끌려 이미 졸업하여 버린 그 한권의 책—코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시렁에서 뽑아냈다—의지할 곳을 찾는 그의 고독한 마음에 그것은 마치 기다만한 기둥같이도 생각되어서. 두터운 책을 군데군데 펴서 무의미 하게 구절구절을 읽어 가며 그의 마음의 동감되는 대문을 억지로 찾으려고 애썼으 나 그의 현재의 처지를 변호하여 줄 만한 대문이 쉽사리 눈 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펄펄 넘어가는 책장 틈 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나왔다. 푸른 검사의 도장이 찍힌 현 저동에서 온 편지—무심히 뒤를 번기니 연필로 박아 쓴 두어 줄의 글이 또렷이 눈에 띄었다. —한라! 외로운 세상에 있으니 그 무슨 든든한 믿을 것을 찾는 마음 뿐이오. 쇠같이 굳은 한라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마음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오. 주의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 어서나 든든히 믿는 마음—이것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는 것임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오...... 결코 감상적이 아닌 이 외로운 마음의 고백이 주리야의 가 슴을 에웠다. 영오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한라의 굳은 심지 가 주리야의 마음을 울렸다. 유리 그릇과도 같이 깨지기 쉬 운 그의 마음이야 드디어 한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임을 주 리야는 느꼈다. 신발 소리를 듣고 주리야는 엽서를 책 틈에 날쌔게 감추어 버렸다. 한라가 쟁반에 조반을 날라온 것이었다. 「대단히 설핀 것이지만 이것이 조반이야.」 그다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한라는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진한 코오피, 덩어리 채로의 빵, 통 째로의 버터—뜨거운 코오피의 피어오르는 김이 향기로왔다. 「그러나 이것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사 치해—이 한 잔의 코오피의 향기가 목에 걸리는 때가 많은걸.」 회포를 말하면서 차를 권하다가 한라는 문득 주리야의 손 밑에 펴져 있는 책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붉은 사랑>은—」 하고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보고 싶어서.」 「한라는 코론타이즘을 어떻게 생각허우.」 「코론타이즘—성생활에 관한 자도요 이단이지 결코 새로운 성도덕의 수립이 아니야—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가령 왓시라사의 행동은—」 「음탕한 계집의 난잡한 행동에 지나지 못하지.」 「굳건한 투사적 공로는 어떻게 허구.」 「투사적 공로는 공로요 사랑은 사랑이지, 그와 이와는 아 무 관련도 없는 거야. 주의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은 감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랑의 감각을 주의의 양심으로 카무프라즈하려고 한 곳에 왓시릿사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즉 문란한 애욕을 감추려고 주의를 내세웠단 말이지?」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애욕을 난용한 것은 어떨까 생각해. 애욕 생활이 어지러운 이상 그것은 동물적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어젓한 주의 의 간판으로 둘러 가리우는 것은 약고 간사한 짓야—왓시릿 사는 결국 굳건한 투사였는지 모르나 반면에 음탕한 둥물이 지 무어야.」 「사람이 아니요, 동물!」 한라의 마치 재판관의 그것과도 같은 엄격한 자세에 주리 야는 그도 그렇게 이렇게 돌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왓시릿사가 동물이면 나는 무엇인고.) 이명제가 가슴곳게 뱅 돌면서 주리야는 한라의 앞에서 의 젓이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듯하였다. (—왓시릿사에게는 굳건한 투사적 일면이나 있지. 나는 다 만 달뜬 불량소녀 밖에는—단순한 동물밖에는 못되는 셈이다.) 한라가 가게에 나가 손님을 맞으며 덜거덕덜거덕 일보고 있는 하룻동안 주리야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마음을 죄이면 서 솟아올랐다. 한낮이 지나 손님이 잠간 비었을 때 한라가 과일 접시와 먹을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왔다. 한라가 쟁반을 책상 위에 놓기가 바쁘게 밖에서 별안간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라 언니! 한라 언니!」 한라는 숨도 돌릴 새 없이 황망히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님 남희, 웬일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예요.」 듣고 보니 갈데없는 남희의 목소리였다. 한라의 의아하는 태도와 남희의 조급한 양이 그들의 목소 리 만으로도 주리야에게는 또렷이 짐작되었다. 「무슨 급한 일로—」 「저—」 남희는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동안을 띄었다가, 「민호씨 혹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급히 말을 이어 버렸다. (—아니 민호를 왜?) 민호라는 한 마디가 마치 철퇴같이 머리를 내려친 듯이 주 리야는 순간 아찔하였으나 다시 숨을 죽이고 전신을 귀삼아 문밖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中略)...... == 반둥건둥 == 짧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리야는 옆에 앉아 그를 지키 고 있는 주화를 발견한 순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에 게 대하여 용솟음치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정리하고 든든한 배짱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혼수상태에 빠질 첫 순간과 같 이 여전히 마음이 설레고 골이 띵하였다. 「정신 좀 차렸소—대체 웬일요. 별안간 혼몽상태에 빠졌으니.」 주화으 부드러운 목소리도 퍽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주화를 그렇게 정면 으로 순간에 대하여 버리니 도리어 옹졸이고 있던 마음이 턱 놓이며 그의 귀익은 목소리에 든든한 안도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리야의 일신이 안전하였으니 다행 이오.」 골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수건에 새로 물을 축여 이마 위에 대면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서 주리 야는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언제 올라 오셨어요?」 「시골 일이 웬만큼 정리된 것을 좋아라 하고 어젯밤에 뛰 어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이곳 일이 뒤틀려 있는구려. 박선 생 남죽네 민호 할 것 없이 전통이구려.」 민호마저 들어간 것을 그보다도 먼저 주화가 알고 있는 것 을 알고 주리야는 돌연히 무서운 생각이 났다. 민호가 들어 간 것조차 알고 있다면 그럼 그것까지—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리야까지 한몫에 쓸리지 않았나 염려하였더니 이 런 다행은 없소—이곳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 었소. 언제 별안간 바람이 휩쓸려 올는지 모르는 판이요.」 하고 이마의 수건을 잠간 떼고 낯색을 엿보면서 주화는 말 을 이었다. 「몸이 웬만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집을 피해야 할 것이요.」 「아니,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이제 또 새로운 커다란 일이 눈 앞에 닥쳐있음을 듣고 주리야는 마음이 옹송망송함을 깨 달았다. 「웬만하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구려. 나는 그동안 정리 할 것을 대개 정리하여야겠소.」 하고 주화는 새삼스럽게 조급하게 주리야의 옆을 떠나 책 상께로 갔다. 책시렁에서 책을 뽑아내 책장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도 하 고 책상 빼닫이를 뽑아 편지와 종잇장을 갈피갈피 뒤지기도 하였다. 그 급스러운 거동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 도 마치 부채로 부치는 듯이 차차 조급하게 설레기 시작하 였다—이 기회야말로 속히 허물을 고백하여야 할 알맞은 기 회인 것이다. 「이것 보세요.」 그러나 눈을 꼭 감고 이 한 마디를 말하고는 주화가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볼 것을 느끼고 주리야는 말도 잇지 못하고 이불을 푹 써버렸다. 「일어나지 못하겠단 말요.」 주화가 와서 이불을 벗기고 그를 들여다볼 때에 그는 황당 하게 딴소리를 할 수 밖에는 없었다. 「몸이 거북해서 저는 못 일어나겠어요. 어서 혼자나 몸을 피하여요. 저는 이곳에 누운 채 일을 당하겠어요—죄진 몸이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지막 마디를 쥘야는 뼈있는 말로 한 셈이었으나 그 풍자 를 깨닫지 못한 주화는 주리야의 자포적 태도를 도리어 위 험하다 생각하며 애써 그를 일으키려 하였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고 어서 기운을 내보아요. 정 맥이 없다면 차를 부르리다.」 「차는 무슨 차예요.」 주화의 말이 너무도 고마워서 그는 미안한 생각에 상반신 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지요—일어나기는 해도 몸을 피하기 전에 먼 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이 어느때라고 그렇게 유한 소리만 하오. 이야기도 할 때가 따로 있지 이 시급한 경우에—」 도리어 약간 화를 내며 주화는 다시 책상께로 가서 주섬주 섬 정리를 계속하였다. 그러고 보니 또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려서 주리야는 초조한 마음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피신 문제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가로놓여 있어요.」 밖에서 돌연히 바시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리야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주화는 잠시 쫑그렸다가 문서를 주섬주섬 모 아 들고 뒷문으로 살며시 나가 버렸다. 아무 것도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엉겼던 긴장이 풀어지자 주리야도 일어서서 날쌔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화는 부엌에서 들고나간 문서를 불사르는 눈치였다. 한 참 동안 부스럭거리더니 뒤로 돌아 안방으로 들어가 벽장 속을 들추었다. 주리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에 주 화는 다시 뒤로 돌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제가 진 죄를 고백하면 놀라지 않으실 테예요? 괴로워하 지 않으실 데예요—어떤 죄를 저었든지 같이 데리고 가시겠 어요? 죄—그렇지요. 저는 적어도 아직까지 큰 죄라고 생각 하여요.」 말은 평범하였으나 주리야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 낸 것이 었다. 「아니 무슨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단 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갑시다—나는 어쩐지 커다란 위험이 일각일각 가까이 닥쳐오는 듯한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소.」 「저의 고백—그것이 커다란 위험일는지도 모르지요.」 「아, 웬일인지 몸이 떨리누나.」 사실 알 수 없는 몸을 떨면서 주화는 채 손대지 못한 책상 위 다른 문서를 대충대충 골라서 두 손에 나눠 쥐었다. 「자, 이 길로 바로 나갑시다. 내 뒤를 곧 쫓아 나오구려.」 하고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앞문을 열었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말할 것은 말해 버려야 시원하겠어요.」 주리야가 조바심하고 외칠 동안에 벌써 문밖에 나가 버린 주화는 웬일인지 별안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으흐ㅅ!」 다음 순간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손에 든 문서 를 마저 불살러 버리려는 셈이겠지 생각하고 문을 홱 연 주 리야 자신도 깜짝 놀라 버렸다. 밖에는 어느새인지 주화의 직각대로 올 것이 와 선 것이었다. 몇분 해서 주화와 주리야는 조금의 거역도 없이 순순하게 관할 서원의 앞을 섰다. 위험이 올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일각일각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죄이거니 하고 느낄 때 주리야는 주화의 일 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이라 저무는 거리를 남녀가 나란히 서 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걸어가기가 너무도 겸연쩍어서 주리야는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다. 사흘이 두 번 겹치고 세 번 겹쳐 열흘만에 주리야는 단독 서를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건에 직접 관계 가 엷고 죄가 가벼운 탓이지, 주화들의 풀릴 날은 바다같이 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를 여러 번 거듭하여야 할 것을 주 리야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옷고름을 줄기줄리 뜯기우고 옷 폭을 찢기운 너불너불한 주제로 거리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첫 경험인 주리야는 며 칠 동안에 겪은 변이 마치 여러 해 동안의 고생과도 같이 몹시도 길고 험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글자대로 지옥의 괴롬이었다. 그가 이전에 경솔한 달뜬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운동의 현실이란 지긋지긋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 길의 열정을 꾸준히 가짐이 범상한 사람의 능히 할바가 아님을 알았을 때 그런 괴롬을 거듭하여도 주저앉는 법 없는 주화들의 앙칼진 의지야말로 하늘 위의 태양과도 같이 높고 장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모욕」—이라는 점잖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이 하의 대접—그 속에서 정신도 정신이려니와 주리야의 육체는 완전히 피곤하고 쇠잔하였다. 그 뒤에 더한층 괴로운 것은 돌연히 처음 당하는 커다란 생리적 변화가 온 것이었다. 들어간 지 며칠 안되어서부터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돌연히 식욕이 줄고 구역질이 나고 간간이 복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갈수 록에 더하여 갔다. 취조실에서 받는 괴롬보다도 어두운 우 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이 생리적 괴롬이 그에게는 더한층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의 문을 풀려 나온 날, 불현 듯이 이 증세는 더욱 심한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밝은 거리를 걸으려니 골이 뒤흔들리 고 현기증이 나며 느긋느긋 속이 뒤집혀 갔다. 넓은 거리를 걷다가 그는 몇번이나 머물러 서서 한참씩 구 역질을 하다가는 걷고 걷고 하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괴롬에 지쳐서 그는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꺼릴 여가조 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육체적 변화를 불안히 여겨 집에도 들릴 새 없이 그는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았다. 한라의 권유로 내 친 걸음에 뒷골목의 조그만 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맥박을 보고 청진기를 대고 일정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주 리야의 오도깝스런 불안의 표정을 웃는 듯이 침착하게 말하 였다.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예요?」 「큰 변화야 큰 변화지요.」 의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고는 아직도 인생에 미흡한 순진 한 주리야의 태도를 귀엽게 여기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사든 지 벌써 서너달째 되는 것 같소이다. 」 「네?」 철없는 주리야는 아직도 의사의 말의 뜻을 몰라서 알지 못 할 그의 선고에 놀라서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경사라니요?」 「짐작해 보시구려.」 하고 은근히 그의 배를 노려보는 의사의 시선에 살핀 순간 쥘야는 처음으로 그의 뜻을 깨닫고 홀연히 놀라며 그도 모 르게 배를 부둥켜안았다. 「아니 그럼—」 귓불을 별안간 빨갛게 물들이며 주리야는 의사의 선고에 요번에는 짜장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걱정하실 것은 없소이다. 달포쯤 지나면 그 런 증세는 다시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니까요.」 쫓기우는 듯이 급스럽게 병원을 나온 주리야는 거리의 찬 바람을 쏘이면서 걸어도 화끈 다는 얼굴이 쉽사리 식지 않 았다. 여러 가지의 변이 너무도 일시에 닥쳐온 까닭에 그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흥분과 부끄럼 사이로도 주리야는 은근 히 손꼽아 석달을 세어 올라가 석달 전의 주화와의 열정의 기억을 마음속에 되풀이하여 보았다. 물론 시일에 틀림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일의 확실성을 얻으면 얻을수 록 더욱 부끄러운 생각에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그 인생의 큰 변화가 한결같이 거짓말 같이만 생각되었다. ......(中略)...... hm382yb0fimti0e825gll79zh2gslk7 426863 426860 2026-05-05T07:39:05Z ZornsLemon 15531 10화 원문 보충함. 426863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주리야 |다른 표기=朱利耶 |저자=[[저자:이효석|이효석]] |설명=<新女性>에 1933.3~1934.3까지 연재하였다. 8회분이 연재에서 누락되어 있고, 해당 호의 목차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원래는 장편소설로 기획한 듯하나, 10회 연재 후 종료하였다. }} == 생활의 노래 (生活譜) == 「짱 겐 보」 「짱 겐 돌」 「짱 겐 칼」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듯 이르니, 「로오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로오자라고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싫어요—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그것이 소아병이란 거야.」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오자가 크게 실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 로오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로오자가— 부엌에서— 암만해도 어색한 걸.」 「로오자가 별 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도 짓고 옷도 기워야지.」 「행주치마 입은 로오자.」 「참으로 장한 로오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나는 공설시장의 로오자인가요?— 장에 가는 건 내게만 맡기니.」 「암, 공설시장의 로오자요, 방안의 로오자요, 거리의 로오자요.」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오자, 그런 로오자는 오늘부터 폐업이여요.」 「땅속의 로오자가 슬퍼하게.— 어서 장에 나갔다 와요.」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 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하니까요.」 책상 위에 펴 놓은 로오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활의 잔치 마당이에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 그 속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 그같이 신성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그러믄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요?— 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띄우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sic|재}}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찬란하게 비치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나물 바구니— 생활 바구니.)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 생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 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 가지고 올게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드러냄표|벙어리|sesame}}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빼죽이 솟는 돈 닢이 한 닢 두 닢 좁은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푼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r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 속에 넣고 날마다 한 닢 두 닢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갈지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 이것을 생각할 때에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 그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워 노세요. 네?」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게 덥석 전신을 의지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문질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는—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능금 한 입 드릴까?」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서요. 한 입 이상은 안 되요— 행길에서 먹을게 없어지게.」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나의 능금 누가 사노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모로코」에서 디이트릿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리로 읊으면서 주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 못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한숨.— 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졋을 때에 주화에게는 두 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 잊어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건넌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어느덧 뜰 안에 봄이 가득 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벌써— 봄.) 주리야와의 몇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로오자는 못 되더라도— 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 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다 먹고 난 속심을 뾰족한 구두 끝으로 툭 차버릴 주리야— 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과 진열장의 미학(美學)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 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 길게 떨어뜨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섰을 주리야— 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에 그려볼 때 주화에게는 석 달 전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나왔다— {{문단 그림}}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독특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 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 항구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 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이 어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걸이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은 귀엽다고 생{{sic|간|각}}하였다. 나이 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부는 못 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 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리는 동안에 문득 꿈을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계셔요?」 주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에!」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 여자— S 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 보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성진 사는 김영애요.」 「대체 웬일이요.— 들어오시오.」 「편지도 안 드리고 문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우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내렸다.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왔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 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이 바라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 왜 그리 일찍 주무세요?」 듣고 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 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있소.— 그것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흠— 대담한 용단이시군.」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속이 백짓장같이 하아얀 넌센스 뽀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 결혼의 희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드러냄표|노라|sesame}}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에요.— 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 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는 안 돌아갈 작정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 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왔으니까요.」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 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는 못했을 거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에요.」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 당분간 살 만한 것만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 하고 그는 슈우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을 집어내서 주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놀라서 그를 똑바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 쓰면 한 일 년 지탱해 갈는지요.」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다 할는지— 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슈우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 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 놓고는 자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 등 얇다란 몇 권의 팜플렛이었다.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 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 빈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 한구석에 간수하였다. 주화는 그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 두 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도의 정도를 넘은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의 사상의 경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할 수 없었다. --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간 자세를 이지러뜨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의 절대적임을 언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듯이 기뻐하며 다음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삭월세로 빌려 놓고 약 백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만하고 따로 백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 「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 「리야」를 빌어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정한 생산과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이 괴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는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이퍼(이렇게 부르기는 과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주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신의 피가 수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가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그칠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채의 전개— 책을 아직 반도 넘기지 않은 이제 주화는 주리야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 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서 준 것은 무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속을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에 생긋 웃고 섰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드러냄표|카페|sesame}}(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 대로 {{드러냄표|샐러드|sesame}}나 맨들구요.」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그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고 하꾸라이가 아니라요, 크로오바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먹어 본 탓인지.」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 갑에 든 크로오바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 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드러냄표|샐러드|sesame}}, 카페와 숭늉— 이 칵테일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렇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떤 때에는 {{드러냄표|햄|sesame}}이나 {{드러냄표|소오세지|sesame}} 조각을 사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되게까지 되었던 거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하고 탄식하였을 때 주화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치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지」 하고 도리어 톡톡이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에도 가야 하지 않겠소?」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 석 달 동안이나 데리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이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에요?」 「석 달 동안이나 벼르고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드러냄표|견학|sesame}}할 자격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직공과도 친해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찍이 가 봅시다.」 「네— 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기뻐서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이 뚫어져 뾰족이 내다보이는 하아얀 한 개의 별— 석 달 동안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성가족(聖家族) == 「대체 어데까지 끌고 가실 작정예요?」 「따라만 오구려.」 「지도에도 없는 세상 속으로 데리고 가실 셈이군.」 「지도에 없는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도에 없는 세상이라면 천당과 지옥인데 끌고 가시는 곳이 대체 어데예요?」 「지옥일는지도 모르지.」 「맙소사. 천당으로 못 데리고 가실지언정 지옥으로 끌고 가시겠어요?」 「그럼 천당으로—」 「성스러운 가족 사는 세상으로요.」 종종걸음으로 주화의 뒤를 따라가는 주리야는 이 한가하지 못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재담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장식하려 하였다. 시구문 안, 전차를 내려서 좁은 옆 골목으로 한 마장 가량이나 걸어 들어가도 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나는 곳이 없었다. 전등 하나도 달리지 않은 골목 안은 유심히도 어둡다. 도희의 불빛이 밤하늘 위에 우렷이 흐려있을 뿐이요, 그것이 이 동떨어진 어두운 골목 안까지 비취이지는 않았다. 서울 온 지 석달에 아직 거리 거리의 지리가 밝지 못한 주리야에게 이 궁벽한 지대는 생각지도 못한 딴 세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전등 하나도 없다니.」 길바닥이 어두워서 발밑이 허전허전하는 주리야는 주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길을 더듬으면서 게두덜거린다. 「아마도 지옥인가 보오.」 껄껄 웃는 주화가 얄궂게 생각되었다. 「난 도로 갈 테예요.」 「여기까지 왔다 도로 가다니...... 가만 있소. 다 왔나 부오.」 하면서 주화는 무뜩 눈앞에 닥치는 대문 앞에 머물렀다. 「낙원에서 지옥까지가 아흐레 동안의 길이라더니 전찻길에서 여기까지 아마 구 분은 걸렸나 봐요.」 「농담은 그만 두고 따라 들어 오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도래를 틀고 손쉽게 문을 열더니 주리야를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지옥이고 천당이고 간에 다 왔으니 시원하군요.」 한 간의 조촐한 대문과는 딴판으로 뜰 안은 침침한 어둠 속에 넓직하게 퍼져 있고 그 네모에 마룻대를 달리한 여러 채의 초라한 집이 들어섰음을 보아 그 안은 한 집안이 아니라 채마다 다른 가호가 들어있음을 주리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뜰 복판에 지붕 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아도 돌 틈에 푸르칙칙하게 이끼 끼인 그 우물이 집안 전체에 우중충한 느낌을 주었다. 가호마다의 생활의 자태를 첫눈에 엿볼 수는 없었으나 전체에서 받는 첫인상은 심히 우중충한 것이었다. 우물과 같은 칙칙한 생활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 밑을 조심해요.」 주화는 우물 옆을 돌아 구석으로 훨씬 들어박힌 서편 가호의 뒤로 돌아갔다. 첫걸음의 발 설은 어둠길을 주리야는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가호와 동떨어져서 외딸리 아늑하게 서편으로 향한 그 집을 돌아 정면에 이르렀을 때에 좁은 뜰로 향한 두 간의 방에서는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인기척이 없고 고요한 공기가 바닷속같이 주위에 잠겨 있다. 「바로 이 집이요.」 「성당같이 고요하군요.」 「성당같이 고이 올라 오오.」 야트막한 툇마루에 오르더니 주화는 말도 없이 아랫방 문을 열고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주선생님이시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여인네의 얼굴이 밀장 사이에 어리웠다. 「시스러워 여기지 말고 들어오.」 주화는 주저하는 주리야를 내다보고 다시 여인네를 향하였다. 「주리야를 데리고 왔는데.」 여인네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더니 마루로 뛰어나왔다. 「들어오시오.」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초면의 따뜻한 손길에 끌려 주리야는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첫 인사는 아무 것도 없이 끔직이도 반가워하여 주는 따뜻한 애정에 주리야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한 느낌을 받아 그 자리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어지러운데 와 주시노라구.」 여인네— 주화에게서 늘 들어온 남죽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진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어 한구석에 뭉쳐 놓았다. 오랫동안 고생에 폭 바스러진 까무잡잡한 남죽의 얼굴에 주리야는 첫눈에 친밀한 「언니」를 느꼈다. 「진작 오려던 것이 생각만 앞서고 여의치 못했어요.」 「나야말로 늘 주선생께서 듣기만 하면서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남죽은 주리야를 진득이 바라보며, 「살림살이 바쁘시지.」 고향이 같은 관북의 이웃 고을이라는 생각이 도와서인지 즉석에 한 집안 식구와 같이 피차의 감정과 의사가 유통되었다. 몇 마디를 건너지 않아 벌써 두 사람의 마음은 긴밀히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땅속의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나 주리야가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같이 낯설고 서마서마한 곳은 아니요, 마음의 세상에는 땅 위 땅 속이 없이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쉽게 합류되었던 것이다. 「오늘 면회하였소?」 주화는 남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면회는 못했어요. 요전에 면회한지 몇 날 안 된다구 허가를 해주어야지요. 겨우 헌 옷가지를 차하해 왔을 뿐이지요.」 「공연히 공장만 하루 때려눕혔군요.」 「그런데 요사이 건강이 퍽 부실한 모양이여요.」 「그 동무 말 아니군— 검거될 때부터 심장이 약하던 사람이 예심에 거의 일 년이나 있게 되니 안 그럴 리 있겠노.」 「요전에 면회할 때부터 신관이 몹시 축났기에 걱정은 했지만— 오늘 편지로 자세히 들으니 아주 심한 모양인데요.」 「편지로요?」 「차하해 내온 옷을 뜯었더니 저고리 솜 갈피 속에서 이런 것이 나왔어요.」 하며 남죽은 치마띠 사이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한 장의 종이 조각을 집어내서 주리야의 눈앞을 서슴지 아니하고 주화에게 주었다. 「혈서이군.」 종이 조각을 펴 들자 주화의 양미간에는 볼 동안에 수심의 주름이 잡혔다. 「입술을 깨물고 피를 내서 간수의 눈을 숨겨 가며 차입해 준 코종이에 깨알 박듯 그렸겠지요.— 늘 하는 짓이니.」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서 주리야는 가벼운 몸서리를 치면서 주화가 든 혈서의 조각을 무시무시 바라보았다. 내려 읽는 주화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주리야는 불시에 수군거리는 사람의 음성을 들었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고 외국어의 단어를 외우는 것도 같은 가는 목소리는 확실히 웃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있는 웃방 장지를 바라보았다. --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린 후 책 덮는 소리가 나더니 웃방 장지가 가볍게 열렸다. 그칠 새 없이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상스러워서 은근히 그쪽만 바라보고 앉았던 주리야는 열린 장지로 나타난 그 인물에 적지 아니 놀랐다. 「저이가......」 주리야는 집에 가끔 주화를 찾아오는 그 대학생을 이 낯설은 곳에서 만날 줄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주동무요.」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그는 주화들이 와 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있으련만 의아한 눈초리로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리야의 더욱 이상스럽게 여긴 것은 뒤미처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낯설은 처녀였다. 어떤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그 처녀가 남죽의 동생 남희인 줄은 물론 첫눈에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와 이 대학생이 한 방에서 수군거리는 친밀한 사이에 있다는 것이 그러한 장면을 처음 당하는 주리야에게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려워서 못해 먹겠다.」 낯설은 주리야를 보고 문턱에서 주춤한 남희는 부끄러운 표정을 이런 탄식으로 얼버무려 넘기면서 언니 옆에 사뿐 내려와 앉았다. 주리야는 여자다운 민첩한 신경으로 수줍어하는 남희의 태도와 겸연쩍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과 남희 두 사람의 서먹서먹한 이를 첫눈에 느꼈다. 「한 달이나 두 달로 그렇게 쉽게 깨치겠소?」 대학생인 민호는 딴전을 보면서 남희에게 말하고 주리야를 바라 보며, 「주동무는 불란서말 공부하신다지요?」 주화를 부를 때 쓰는 「주동무」로 주리야를 부르는 것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친밀의 느낌이 없지 않음을 깨달은 주리야는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심심풀이로 강의록을 뒤적거릴 뿐이지 정성을 들여야 말이지요.」 「남희 불란서말은 안 배우려우.」 「그렇게 한가한 것 배울 틈 있나요.」 민호의 농담에 남희는 가볍게 반박하며 주리야를 흘끗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이 한마디가 주리야에게 불현듯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남희와 불란서말을 공부하는 자기와의 의식의 정도, 피차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주리야가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이 말에서 받는 불쾌한 느낌을 마지 못하였다. 남죽에게 「언니」를 느낀 그는 남희에게도 응당 친밀한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나 웬일인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도리어 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가 본데.」 편지에만 열중하였던 주화는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남죽을 바라보았다. 「이왕 들어가 있는 이상 고분고분히 일르는 대로 했으면 좋을 것을 공연히 쓸데 없는 반항을 하는 모양이예요.」 남죽의 뒤를 남희가 받아서, 「아재는 원래 피가 관 분이래서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시게 되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청대로 보석 운동을 해보시지.」 「보석 운동인들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보석이라면 저도 힘써 보지요.」 민호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희망도 있으니 우선 이변호사를 찾아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나도 만나는 대로 말해 보지만.」 「이변호사에게 폐를 끼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형무서에서 여간해서 승낙하겠어요? 병이 쇠해 빠져서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옥을 시키는 형편인데.」 한숨을 짓고 남죽은 계속하여, 「그러고 둘째로 보증금이 수백원은 들 터인데 그것을 또 어데서 어떻게 구하겠어요.」 「어떻든 유예할 경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곧 이변호사를 찾아보시도록 하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죽은 날쌔게 혈서를 접어서 치마 틈에 수습하고 널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었다. 박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누구시라구요.」 긴장이 풀리며 남죽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들 다 오지 않었소.」 박선생은 문득 주리야를 발견하고, 「주씨 웬일이요.」 의아한 눈을 던졌다. 늘 집으로 찾아오는 박선생 처소를 항상 변경하면서 돌아 다니는 그에게 가끔 저녁을 대접한 일까지 있는 박선생— 그를 문득 이런 곳에서 만나니 친밀한 느낌이 났다. 「바람도 쏘일 겸 놀러 왔지요.」 「놀러......」 「올 때들이 되었는데 아직 안 오는군.」 주화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이 있나 보구나— 주리야는 직각적으로 느꼈다. 놀 러 왔다는 말을 듣고 박선생이 놀라는 것이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도 주화는 모임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극히 신중히 해나가는 모임인 것같이 짐작되었다. 따라서 그가 참례할 바가 못 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이만 실례할까요?」 하고 주화의 의견을 묻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있으려면 있구.」 꼭 있으라고는 권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임에는 참석시키지 말고 우선 집만 가리켜 줄 작정인 듯하였다. 「더 {{드러냄표|놀다}} 가시지, 이런 것 저런 것 보아 두셔야지.」 박선생의 권고를 그러나 주리야는 사양하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밖에 아마도 「동무」들의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났다.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오.」 하고 그를 보내는 주화에게 체면에 차마 달려들어 어리광을 피우지는 못하고 점잖게 대답하면서 좌중에 목례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아리랑'에 잠간 들렸다가 바로 집에 가 있을게요.」 -- 야영 백화점에 들려 늘 하는 버릇으로 막연히 찬란한 층층을 한 바퀴 돈 후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다시 단골로 다니는 조촐한 차점 '아리랑'에 들려 진한 커피를 청하였다. 커피 인이 꼭 박혀버린 주리야는 하루에도 여러 잔은 예사로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의 건강을 해롭히지는 않았다. 커피의 향기와 쓴맛이 그의 비위에 꼭 맞았던 것이다. (발자크는 그의 일생을 커피 마시고 소설 쓰는 데 바쳤다지. 나도 그이와 같이 {{드러냄표|자바|sesame}}보다도 {{드러냄표|브라질|sesame}}보다도 {{드러냄표|모카|sesame}}가 제일 좋아.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평생 커피나 실컷 마셔 볼까) 하면서 그의 커피의 습관을 발자크의 풍류에 비기는 주리야였다. 그러나 그 습관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색한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 감정에 꼭 들어맞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크림은 넣지 말까?」 「아무렴. 시커먼 진짬으로 한 잔.」 어느결엔지 벌써 퍽 친밀한 사이가 된 차점의 여주인 한라에게 주리야는 손짓과 웃음을 던졌다. 「오늘 난 좋은 곳에 갔다 왔지.」 한라가 손수 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없는 고요한 탁자에 주리야와 마주 앉았을 때에 주리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데라니. 천당에?」 「천사들이 있는 대신 거츠런 장정들이 모이는 곳에.」 「장정들이 모여서 천국을 세우려고 애쓰는 곳에 말이지.」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끔찍한 세상을 보았소.— 피가 난 모둠 계획.......—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연히나마 짐작되는 것 같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쾌한 레코드나 한 장 걸가. 주리야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도 한 장.」 하면서 일어서려는 한라를 그러나 주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붙들어 앉히고, 「오늘밤만은 나의 기분을 깨뜨리지 말고 고요히 그대로 두어요...... 나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랫동안 잊었던 한 구절의 시가 가슴속에 솟아 오르겠지.」 「에구, 오늘밤에는 또 왜 이리 센티멘탈해졌어?」 「놀리지 말구 이것 좀 들어봐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리야는 한 구절의 시를 읊기 시작하 였다. :하아얀 횟돌의 조각이 있고 꽃향기 넘치고 햇볕이 창에 얼기설기 비치는 곳 :이글이글 타는 난로와 음식장과 유리잔 있는 곳 :거기에서 꿈을 꾸고 그대를 생각하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이지러진 한 개의 탁자가 있다. :쉬어빠진 한 잔의 술이 있다. :낡은 한 권의 성서가 있다. :끄슬러서 침침한 등불이 있다. :시들어버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유리창 밖에는 진눈깨비와 바람이 불고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에 떨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니라. 「아니 어데서 그런 시를 외웠소?」 듣고 난 한라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면서 주리야의 코를 끄들었다. 「훌륭하지.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읊은 아름다운 노래야.」 「가난한 줄 이제 알었나.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드러냄표|싸움터|sesame}}로 나가야 할 시절이니라'—고 고쳤으면 좋겠군.— 우리도 현재 이런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시가 아니라 소시민적 감정을 표현한 잠꼬대야.」 「이지러진 탁자. 쉬어빠진 술. 어두운 등불.— 시상으로 얼마나 훌륭하우. 나는 여기에서 한 편의 프로 시를 발견한 듯한데.」 「프로 시에 아스파라거스는 다 무어야. 세상에는 아스파라거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우. 진정한 프로 시 되려면 아직 구만리의 거리가 있어.」 사귄 지는 오래지만 한라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의견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마음속에 그 무엇이 있듯이 평소에 멍하고 있는 한라이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이러한 소리를 하는 오늘밤의 그가 주리야에게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럼 결국 프로 시가 아니란 말이지?」 「주리야나 나같이 날마다 커피나 먹고 지내는 한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이 싱싱한 실감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그럼 부르주아의 것이란 말요.」 어느결엔지 모둠에서 만났던 민호가 나타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주리야는 이렇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계시오.」 「프로 시 시비예요.」 「어떤 프로 시요.」 「아니 그래 이런 것이 프로 시가 아니예요?」 하고 주리야는 다시 아까의 시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까지 듣고 앉았던 민호는 신중한 목소리로, 「훌륭한 시가 듣고 싶으면 내 한 편 읊어 드리지— 이런 것이 정말 훌륭한 시란 것이요.」 :고향 사정 말한 일 없고 :자유로운 시간 가진 적 없이 :제일 싫은 책임 도맡아 보던 그 동무 :곤란이 막심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그 동무 :기계같이 일하고 :칼날같이 과단성 있고 :××의 그물 표범같이 뚫던 그 동무 :밉살스러우리만치 대담하던 그 동무 :아! 끝내 그는 붙잡히고야 말았다 :겁내는 내의 마음 늘 매질하여 준 것은 :신념에 빛나는 그의 눈이었다 :풍진 세상의 행복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 :꾸짖어 준 것은 도깨비불 같은 그 눈이었다 :나의 가슴 사소한 책무에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백곱절의 일을 하였다 :모진 폭풍우가 휩쓸어오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던 그 동무 :나의 마음 못 믿더라도 그만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 동무 잡히고야 말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누나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콘크리트 천정을 노리고 있을까 지금의 그 동무 :이틀 동안 굶은 배 한 그릇 국밥으로 채운 :그와 나였다 :우박송이 퍼붓는 어둠 뚫고 :전신을 폭 적시우며 :모둠에 달려간 그와 나였다 :「우리」에서 돌아올 때 :나는 늘 그의 꿋꿋한 손과 낭랑한 웃음이 그리웠다 :그 동무 그 동무 돌아오지 않는 그 동무 :목숨 떨어지는 날까지 잡히운 몸의 그 동무 :매맞고 박채우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그 동무 :도깨비불 같은 그이 눈이 :철망을 건너 나에게 광명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그 동무 돌아오지 않누나. :그러나 그가 주고 간 열정 그가 보낸 광명 :나의 가슴에 타고 수천 동지 가슴에 타서 :세상을 살러 버릴 횃불이 되리라 :아! 동무여 편히 쉬라 새벽은 가깝다! 「아 그 동무 그 동무.— 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하군. 아니 그것이 대체 시요, 실제 경험이요?」 마지막 구절까지 숨도 가라앉지 않고 듣고 있던 주리야는 감동에 넘치는 두 눈에 광채를 가득히 담았다. 「퍽이나 감동하신 모양이군.」 「그렇게 훌륭한 시는 오늘밤 처음 들엇어요.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아! 돌아오지 않누나. 그 동무!」 감동된 두어 줄을 외우다가 주리야는 문득 한라를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같이 둥근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고여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술에는 웃음을 띄우고 눈으로는 울고 있다. 「한라, 왜 우우?」 「지금 그 시가 너무도 훌륭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는 병증이 있다우.」 그렇게는 말하여도 주리야는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느꼈다. 아까의 그의 시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지금의 눈물이라든지 그 무슨 그 시와 관련되는 것이 그의 생활의 한구석에 있으려니 짐작되었다. 하기는 주리야 자신도 그 시에서 받은 감동은 심히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무지를 개발하여 주는 횃불이요, 소시민적 생활 위에 떨어진 위대한 폭탄덩이였다. 그 위에 한라의 눈물은 더한층 그를 매질하여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고요하던 좌석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기가 아까워서 그는 한라의 손을 잡으면서, 「울지 말우 한라— 내 레코드 한 장 걸게.」 하고 일어나 가서 그가 좋아하는 {{드러냄표|렌·피리스|sesame}}의 하와이안 비 타를 걸었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양말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아리고 내 양말 대님.」 하고 땅 위를 더듬어보는 동안에,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민호가 그의 발밑에서 그것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리야는 민호의 눈앞을 꺼리지도 않고 무릎 위까지 치마를 걷고 양말을 걷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민호가 그에게 준 한 마디가 웬일인지 이상스럽게도 가슴속에 들어 배는 듯하였다.—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 집에 돌아오니 주화는 어느덧 아랫목 이불 속에 드러누워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웃목에 친 검은 막 속에서 옷을 벗고 나오는 오늘밤의 주리야의 자태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찬란한 나체에 포도 잎새 한 닢 붙이지 않고 칵 속에서 뛰어나와 주화의 앞에 나타나던 그가 오늘은 포도 잎새 아닌 한 권의 책으로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주화의 앞에 웬일인지 별안간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포도 잎새 대신으로 쓴 그 책은 자본론의 한 권이었다. 이불 속에 뛰어들어가기가 바쁘게 주화의 귀 밑에, 「아리랑의 한라가 '그 동무'란 시의 낭독을 듣고 우니 웬 일예요.」 「그 시 그대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울 때도 있겠지.」 「아니 한라의 친구가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그 동무'의 처지에 있으니까 말요.」 작자 부언(附言)— 作中 두 편의 詩는 某氏의 것을 빌려다가 의역한 것임을 말하여 둔다. == 마음의 안테나 == (대체 웬 녀석야.) 알지 못할 사나이의 시선을 등 뒤에 받으면서 정동 골목으로 들어갈 때에 주리야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향을 갈아 길을 돌릴까도 생각하였으나 맡은 일의 관계상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대로 정동 골목을 들어갔다. (불량소년일까, 그렇지 않으면 탐정일까......) 알지 못할 작자였다. 종로 근처에서부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 M 백화점의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단정한 양복 맵시로 보더라도 탐정의 유가 아니면 흔히 있는 불량소년의 따위였다. 그러나 탐정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 정체 모를 사나이의 추격은 더한층 불안한 느낌 을 주었다. (이녀석, 어데 따라 보아라.)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 가다가 조그만 과자가게 앞에 왔을 때에 뒤를 돌아보고 사나이의 눈을 교묘하게 감춰 과자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츄잉 껌을 사서 쭐기쭐기 씹으면서 밖을 내다보노라니 헛물 켠 사나이는 길 옆을 기웃기웃 살피면서 과자점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흉칙한 녀석.) 주리야는 코웃음을 치면서 가게 주인을 보고, 「저따위 녀석이 뒤를 쫓겠나요.」 주인의 웃음을 들으면서 다시 가게를 나온 그는 사나이의 간 곳을 살핀 후 뒷골목으로 살짝 돌아섰다. 영사관 지대를 지나 넓은 고개 위에 나섰을 때에도 사나이의 그림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주리야는 통쾌한 웃음을 남기면서— 그러나 역시 치밀한 주의의 눈을 던지면서 급한 걸음으로 민호의 숙소인 아파아트로 향하여 내려갔다. 고개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목조 이층집— 문간에는 여러 가지 단체의 간판까지 걸린 그 한 채를 아파아트라고 부르기는 부적당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방방을 개인 혹은 단체에게 빌려주는 그 집을 아파아트라고 부르기에 주리야는 아무런 부자연한 느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층의 방 한 간을 민호가 빌려 가지고 있었다. 급히 문간을 들어간 주리야는 그것이 첫걸음이었지만 이층에 뛰어 올라가 손쉽게 민호의 방을 찾았다. 걸리지 않은 문을 노크하니 반갑게 안으로부터 열렸다. 불쑥 내밀었던 남희의 고개가 별안간 움츠러들었다. 순간 예상치 아니한 여주인공의 출현에 주리야의 눈썹이 볼 동안에 찌푸러졌으나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없고 남희 혼자였다. 남희가 무료하여서 읽던 책이 침대 위에 편 채로 놓여 있었다. 무심히 뒹굴고 있던 남희는 성에 맞지 않는 이 돌연한 침입자로 인하여 마치 엄한 선생의 앞에 나선 듯이 마음이 거북하고 몸이 굳어졌다. 「민호씨를 만나러 왔더니 안 계신가 부군.」 「입때껏 기다려도 안 들어 오셔요.」 「웬일인가 시간이 넘었는데.」 하면서 주리야가 책상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남희는 별안간 그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 위에 놓인 한 자의 종이를 집어서 날쌔게 꾸겨 버렸다.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우렷이 빛났다. 필연코 민호에게 대한 공상의 낙서를 그 위에 장난 쳤으려니 생각하고 주리야는 쓴웃음을 남희의 얼굴 위에 정면으로 던졌다. 그 웃음의 그늘 속에는 그러나 독사의 그것과 같은 매운 눈초리가 숨겨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앞을 가로채고 나타나는 남희가 주리야에게는 귀찮고 어줍지 않은 존재였고, 그 남희에게 주리야는 독을 품은 수리같이 생각되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겁을, 한 사람은 불같은 질투를 만나는 때마다 동시에 느꼈다. 주리야의 냉정한 이성이 그의 이 부탕한 질투를 꾸짖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더 많이 그의 여자다운 본능이 과분의 열정을 북돋아 마지 않았다. 「이만 가볼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 남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주리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파아트를 나갔다. 남희가 가버리고 혼자 주인 없는 방에 남아있으려니 주리야는 도리어 스스러운 생각이 났다. 남의 권리를 뺏고 그 뒷자리에 들어선 그의 염치가 너무도 뻔질뻔질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가 씹는 껌의 향기와 같이 사라져 버리고 민호에게 대한 생각만이 찐덕찐덕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가 생각하여도 부당한 경쟁의 의식과 알지 못할 승부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신 괴이하게 여겼다. 창 밖에는 여학교가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서 공과 같이 뛰노는 처녀들의 아무 계교 없는 순진한 자태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매질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스럽게 시침을 떼고 주인 없는 방의 여왕이 되었다. 민호 안 오는 시간의 무료를 못 이겨 그는 알콜 풍로에 불을 달이고 물을 끓였다. 여러 해 동안 살아오는 그 자신의 아파아트와도 같이 가장 손쉽게 장 속에서 크림과 사탕을 집어내서 커피를 만들었다. 뜨거운 차를 불고 있는 동안에 민호가 왔다. 「잠깐 동안 이 방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자리를 사양하면서, 「—남희까지 쫓아버리고요.」 하고 이 한 마디가 민호에게 주는 효과를 살피려고 그의 얼굴을 진득이 노렸다. 「장하군요.」 슬픈 표정 대신에 민호는 미소로 이 어여쁜 「영웅」을 칭찬하였다. 물론 그 미소와 칭찬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없었으나 주리야는 적어도 이 「사나이」—생각과 처지와 양심과 순정을 빼내 버린 나머지의 이 사나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그의 헛된 자만심만은 아닌 듯하였다. 「주화가 단체 일로 시골 간 것 아시겠지?」 「동무에게서 들었지요.」 「주화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하고 주리야는 핸드빽 속에서 한 장의 두터운 봉투를 집어냈다. 「—이것을 즉시 전해 달라구요.」 「하하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던가.」 민호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봉투를 책상 속 깊이 간수하였다. 주리야 자신 실상은 봉투의 내용을 몰랐으나—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갈의 임무를 마치니 곧 안심될 뿐이었다. 「그리고—」 장난의 눈초리로 민호를 바라보며, 「즉시 뜯어보고 곧 시작해 달라구요.」 「영어면 곧 되겠지만 독일어면 좀 거북한데.」 늘 있는 구라파 한가운데에서 직수입하여 오는 직접 일에 관계있는 원문 팜플렛의 번역의 일인 것을 주리야는 여기에서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여 더 자세한 내용의 비밀을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야지.」 껌을 새로 집어내서 입에 넣고 곱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파아트를 나와 고개를 걸어 내려가던 주리야는 고요한 행길에 인기척 소리를 듣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알지 못할 사나이가 그의 뒤를 또 쫓는 것이었다. 별안간 소름이 끼쳤다. (웬 벌레 같은 놈팽이야.) 그 추근추근한 사나이의 행동에 화가 버럭 나서 주리야는 문득 한 꾀를 내어 걸음을 멈추고 길 옆에 무뚝 서 버렸다.— (놈 좀 앞서 봐라.) 사나이는 터벅터벅 가까이 오더니 그의 옆에 머물렀다. 씹던 껌을 그의 낯짝에 탁 뱉을까 생각하며 휙 돌아섰을 때 사나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공손히 목례를 하였다. 「실례지만 김영애씨지요?」 「웬 걱정이요?」 「이를 말이 있어서요—」 사나이는 모자를 쑥 올려 뒷덜미에 붙이고 두 손을 양복 바지 주머니 속에 푹 꼽더니, 「—공연히 서울 바닥을 일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소?」 별안간의 충고에 마음이 짜릿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례한 그의 낯짝에 숫제 껌을 뱉어 버릴까 하다가 참고, 「아니, 댁이 무엇인데 그렇게 주제넘소?」 물론 그가 경박한 불량소년이 아님은 그의 충고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은......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나 당신의 처지가 딱해서 하는 말이요.」 「나의 자유 의지의 행동인데 무엇이 딱하단 말요.」 「시골서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소.」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남의 사정을 여기까지 알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괴상하여 주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다.」 하고 사나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정색하더니, 「어떻든 잘 생각하여서 앞길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이번에는 혼자 앞장을 서서 더끔더끔 걸어 내려갔다. 주리야는 의아하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껌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이상스런 사나이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의 말이 유난히도 뼛속에 사무쳐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슴속에 자아내게 하였다. 움직이는 불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주리야는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외로운 처소에 돌아가서 혼자의 저녁을 짓기도 스산할 것 같아서 양식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거리에 등불이 들어온 후에 야 어슬어슬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아래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필연코 주화의 동무들이 찾아 와 있으려니 생각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주리야는 그들이 도무지 뜻하지 못하였던 의외의 인물임에 깜짝 놀랐다. 될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의 앞을 피하여 되돌아서서 도망이라도 하고 싶은 정경이었다. 「어디를 가서 종일 쏘다닌단 말이냐?」 침착한 목소리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주리야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주리야는 마음을 다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오빠.」 고개를 수그린 누이동생의 자태에 '오빠'는 목소리를 부드럽혔다. 「서울 온 지는 벌써 여러 날 되었으나 집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이냐.」 「아니 그래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 수 있니? 사립 탐정에게 부탁하여 사흘 만에 겨우 찾아냈다.」 「탐정에게요?」 이렇게 반문한 주리야는 아까의 이상스러운 거리의 사나이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 추근추근하게 그의 뒤를 쫓던 것도 결국 고마운 충고를 주려는 생각보다도 그의 거동을 살피려는 직업적 심사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안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이야?」 「저도 충분히 생각한 후에 취한 행동인데 걱정하실 필요가 어디 있어요?」 「한 분밖에 안 계시는 어머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시는 줄 아니. 불효막심한 자식.」 「어차피 불효막심은 생각한 끝에 일인데요. 어머님께 반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유만은 배반할 수 없어요.」 「주제넘은 소리 그만두어.」 오빠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에 서울 와서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돈 한 푼 없는 놈팽이와 붙어서 무엇을 했어?」 이 말은 듣고 주리야는 그의 기개 높은 자존심으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 마세요. 돈 한 푼 없는 놈팽이라니요? 어떻게 하시는 말씀예요? 돈은 없다 할지라도 돈 많은 도야지와는 뜻이 다르답니다.」 옆에 앉은 사나이—주리야가 배반하고 온 시골의 약혼자—가 입맛이 쓴지 오빠와 주리야를 등분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라.」 오빠의 이 한 마디에 주리야는 그러나 구태여 반항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도리어 괴로울 듯하여서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 허수아비같이 앉았던 약혼자는 기회를 잡은 듯이 오빠를, 다음에 주리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을 하여 주시오. 지금이라도 나에게는 결코 늦지 않으니 충분히 생각해서 잘 조처하시오.」 주리야는 기가 막혀 속으로 픽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라고 말한 법도 없다. 추근추근한 사나이.) 이렇게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말없이 침울하고 슬픈 태도를 지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내일은 단연코 내려가자— 나이는 차 가는데 언제까지든지 그 주제로 언제 사람 되겠니.」 비교적 온순한 오빠의 태도에 호감을 가진 주리야는 오빠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공손히 듣는 체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집안에 대한 체면도 체면이지만 이제는 박군을 대할 면목이 없다.」 오빠는 사과하는 듯이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주리야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두 청년은 그들의 권유가 효과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기뻐하였으나 주리야는 속마음으로는 웃고 있었다. 눈물— 그것은 반드시 슬픔의 표현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주리야에게 그 눈물이 일종의 기교(技巧)요, 일종의 수단이었다. 눈물과는 딴판으로 마음 속으로는 물론 다른 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같이 새우다가는 불가불 붙들리고야 말 것이다. 밤이 새기 전에 이 두 마리의 이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하겠다.) 그날 밤 늦은 후 일찍 잠든 두 사람의 옆을 빠져 주리야는 일 보러 가는 체하고 방을 나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여행에 넉넉하리만큼 가방 속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몰래 집을 나왔다. 들고 나온 「벙어리」를 돌에 부딪쳐 깨뜨리고 흐트러진 돈을 가방 속에 걷어 넣었다. (월미도에 가서 며칠 동안 바다를 보며 은신하여 있을 여비는 되겠지.) 주체스런 가방을 들고 뒷골목을 걸음 빨리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행을 승낙할까.) 혼자 가기가 수상하게 보일까 봐 민호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이것이 민호를 차지할 안성맞춤의 좋은 기회라고 은근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가면 끌고 가지.) 아름다운 악마의 결심을 하고 주리야는 고요한 밤거리를 걸어 정동 아파아트로 향하였다. -- 벌써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운 민호를 잡아 일으키고 주리야는 황급한 어조로 그의 신변의 위험을 고하였다. 물론 그것이 일종의 그의 기교였으나 그의 어조가 너무도 황급하고 태도가 서먹서먹한 까닭에 민호도 황급하게 뛰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치 불이 났다!는 고함을 듣고 순간 뛰어 나가듯이 민호는 잠시 동안 아무 지각없이 들뜬 마음으로 날뛰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바람에 전후의 판단과 냉정한 분별이 없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집어 얹고 주리야의 손에 끌리다시피 하여 허둥지둥 거리로 나갔다. 막차는 이미 끊어진 뒤었다. 주리야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세 내 가지고 민호와 같이 탔다. 넓은 밤 가도를 자동차는 전속력으로 달았다. 길 양편의 나뭇잎이 선명한 초록빛으로 자동차의 등불 속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신선한 밤 드라이브— 그 속에서 차차 정신이 든 민호는 이 밤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몽유병자가 아닌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몽롱한 의식에서 차차 현실로 돌아갔다. (나의 행동은 바른 것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비판할 여가가 없었다. 요동하는 차 안에 있을 때에 사람은 이유 없이 취하는 법이다. 그 가벼운 도취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주리야의 육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다시 꿈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데를 왔나.) 단걸음에 섬 속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호는 부지식간의 그의 행동이 엄청나게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았어요. 범의 굴에서 피해 나온 듯해요.」 주리야는 마음속으로 안도한 듯이 여관집 문앞까지 갖다 댄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저하는 민호의 손을 끌었다. 「동행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나는 뒤로 가지요.」 동지인 주화의 생각이 퍼뜩 머리 속을 스치자 정신을 깬 양심의 조각이 민호의 가슴을 죄었다. 「동무의 위험을 보면서도 그의 옆을 피하다니 그런 비겁한 사람이 어디 있소?」 주리야는 비웃는 듯이 우뚝 서서, 「미래의 투사 될 사람이 그만한 용기도 없이 어떻게 하우.」 「옆을 피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주리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 「나 혼자보다도 당신이 옆에 같이 있는 것이 다른 눈에도 수상치 아니하고 더욱 안전하단 말예요. 당신은 며칠 동안 나의 허수아비가 되고 장식품이 되면 그만예요.」 얇은 양심은 부드럽게 거세를 당하고 민호는 끌려 들어갔다. 여관의 바다의 첫 시절이라 만원이었다. 이층의 방 한 간이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로 안내해 주시오.」 주리야는 하녀에게 분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거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대담한 까닭에 민호는 도리어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그와 싸워 보자고 민호는 결심하였다. 양심과 애욕과 어느 것이 이길까 승패를 가려 보리라고 작정하고 닥쳐오는 현실 그대로를 순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밤이다. 창르 열고 민호는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에 잠들고 있는 항구에는 등불이 둥실둥실 떠 있고 섬 밑에서부터는 어두운 바다가 폭넓게 쭉 깔려 있다. 시원한 바람이 우거진 나뭇잎을 흔들면서 흘러와서는 가슴속을 헤치고 들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민호의 등 뒤에 주리야가 너무도 가까이 와 섰기 때문에 목덜미가 간지러우리만큼 주리야의 따뜻한 입김이 가깝게 흘러 왔다. 「밤바다는 어두운 데서 보아야 더 좋답니다.」 「어두우면 바다가 보이나요.」 「우렷이 보이는 곳에 운치가 있지요— 내 불을 끄고 올게 보세요.」 「불은 그대로 두시지.」 민호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주리야는 뒤로 가서 방 복판의 전기불을 껐다. 민호 옆에 와서 창을 마주 열고, 「어슴푸레한 것이 더한층 아름답지요. 밝은 곳에서 추한 것도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아름답게 보여요. 바다도 사람의 죄악도—」 하면서 가슴을 헤치고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아, 저 등대!」 {{sic|두|등}}대를 발견하고 그는 어린아이같이 팔을 뻗쳐 반짝거리는 먼 곳의 등대를 가리켰다. 깜박거리는 등대 밑에는 신비로운 바다가 짙은 빛으로 질펀하게 퍼져 있고 같은 바다 위에 하늘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초승달이 얕게 비꼈다. 「귀찮은 현실에 부대끼는 우리에게는 가끔 이와 같은 로맨티시즘도 필요하겠지요.」 「로맨티시즘이라니요?— 나에게는 이 밤이 괴롭소이다. 주리야와 나와의 관계는 결코 로맨티시즘 속에 떠 놀 관계가 못되니까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가상도 못 해요?」 별안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리야는 죄진 것 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휙 돌아섰다. 그 바람에 민호의 양복 호크에 공교롭게 걸렸던 원피스의 치마 허리가 쭉 찢어졌다. 「아이구 어쩌나.」 찢어진 허리를 만지면서 주리야는 새삼스럽게 민호를 쳐다 보았다. 마치 민호의 탓인 듯이 그를 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문간에 선 하녀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주춤하면서 문을 빼꼼이 닫았다. 「쉬시기 전에 목욕들 안 하세요?」 민호는 급스럽게 불을 켜고 수건을 얻어가지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주리야가 가족탕에 들어간 동안에 민호는 혼자 넓은 남탕에 들어가서 더운 조수 속에 몸을 담갔다. 전신의 피가 녹고 풀리는 동안에 주리야에게 대한 생각과 여러 가지 의심이 뒤를 이어 솟았다. (주리야의 마음속은 대체 어떠한 것인고.) 그의 눈을 현혹케 하고 괴롭히는 것은 나이 어리고 천진한 그의 무작위한 심사에서 나온 것일까. 찬란한 그의 천성에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 있는 말이요, 속 있는 거동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를 유혹하자는 처음부터의 계획적 성심으로인가. 그러나 그의 주화에게 대한 사랑은 두텁고 깊고 한 푼의 틈도 없는 것임을 민호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의 지듭을 떠보자는 수작인가. 동지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는 가짜의 마음으로인가. 그렇다면 거동이 너무도 공들다. 아무리 신변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하필 즐겨하지 않는 그를 이 밤중에 끌어낸다는 것은 너무도 공든 행동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일시의 장난일까. 심심풀이의 장난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다시 첫 끝에 돌아가 주리야의 본심을 되생각하고 거듭 짐작하였다. 그동안에 주리야도 독탕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이다. 그는 갈래갈래의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는 주화를 사랑하였다. 사상적 동감보다도 시각적(視覺的) 애정으로 첫눈에 고른 그를 주리야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랑은 차차 깊고 진하고 믿음직한 것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주화의 동무인 민호를 싫어하지 않았다. 시각적(視覺的) 호감을 느꼈다. 사람의 육체에 눈이 있고 심장이 있는 이상 이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감각의 안테나인 두 눈에 모양이 비칠 때 그것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사람 된 마음의 자유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함에 그는 하등의 양심의 꾸지람을 받지 않았다. 감정의 명령을 잘 좇는 것이 도리어 양심에 충실한 소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불을 지른 것은 민호의 애인 남희였다. 그는 남희를 만나는 첫 순간부터 이유 모를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마는 그 질투가 도와서 오늘 밤의 행동을 인도한 것이었다. 오늘 밤의 행동— 그것은 그의 신변의 위험을 피하는 한 수단인 동시에 남희에게 대한 일종의 자랑이요, 시위 운동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 밤의 행동을 어느 끝까지 전개시키겠다는 최후적 성산과 야심은 없었다. 그는 아직 민호에게 최후의 것까지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주화에게 대하여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에게 대하여 느끼는 시각적 호감—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박넝쿨같이 갈래갈래로 뻗어 나가는 여자의 마음— 어느 갈래가 진짬이요 어느 갈래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모두 똑같이 진정의 갈래— 그 방향 많은 갈래갈래의 마음에 주리야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방 가운데에는 두 채의 이불이 나란히 펴 있었다. 물론 부부려니 짐작하고 하녀가 펴 놓은 것이다. (흠. 마치 두 부부의 잠자리 같군.) 뒤미처 들어온 민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한편 이불께로 갔다. 「—밤이 퍽도 늦은가 부다.」 「곧 자야지요.」 주리야는 나머지 한편의 이불 위로 가서, 「나는 밝으면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불을 끄지요.」 민호의 손이 뻗어 전기불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잠자리 옷을 갈아입고 각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주리야는 무심한 자태를 지니고 민호는 하룻밤 동안 괴롭게 싸워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 그 뒤에 오는 것 ==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이불 속에서 황망히 속옷을 껴입은 주리야는 이불을 걷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엉겹결에 그의 두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 송이의 꽃이 하룻밤 서리에 시들어버리듯이 팽팽하던 그의 얼굴이 하룻밤 동안 이지러지지나 않았을까를 본능적으로 염려하는 듯이. 다음에 그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 오리 한 오리 어루만졌다. 만지는 동안에 그도 모르게 그의 손에 힘이 맺혔다. 손가락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 오리 두 오리 뚝뚝 뜯겼다. 나중에는 여러 오리씩 줌으로 뜯겼다. 머리를 뜯으면서 그의 시선은 이불 사이로 하아얗게 드러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보지 않을 것을 본 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스럽게 솟아올라 그는 이불로 다리를 푹 덮어 버렸다. 머리 속이 아찔하여지며 별안간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눈이 팽팽 돌았다. 마치 처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려서 깨뜨린 첫 순간과도 같이. 무의식간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잠깐 동안에 이불 위에 가락가락 흐트러졌다. 콧등이 띵하여지며 눈물이 빠지지 솟았다.— 목소리를 내서 막 울고 싶은 심중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슴 밑으로 둥긋이 드러난 젖통을 만지다가 황망히 옷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소 잃은 후에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찬란한 아침 해가 창으로 불쑥 솟아 들어왔다. 햇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주리야는 얼굴을 숙여 버렸다. 너무도 밝은 빛을 꺼리고 사양하는 듯이. 「벌써 깨셨소?」 등 뒤에서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가 아제는 마치 그의 몸을 찌르는 황충이와 같아서 주리야는 그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였다. 「아니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오?」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건강한 체중이 그의 등 뒤에 바싹 기어 옴을 주리야는 느꼈다. 「골이 아프시오, 배가 아프시오?— 별안간 웬 일이시오?」 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으며 울음에 떨리는 주리야의 두 어깨가 육중한 힘 안에 폭 싸였다. 주리야는 순간 달팽이같이 움츠러들면 번개같이 몸을 흔들어 빼쳤다. 몸서리를 치면서— 민호의 육체가 지금에는 징그러운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몸을 빼치는 것과 동시에 좌향을 휙 돌리면서 바른손이 민호의 볼 위에 날쌔게 날랐다. 「악마!」 또 한 번 손이 날았다. 「아니 무슨 짓이요?」 「저리 가요.」 「주리야.」 「동물!」 「미쳤소?」 「당신은 동지가 아니고 동물이요.」 「아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요?」 「시침을 떼는 구료.」 「곡절을 모르겠으니.」 「간밤에 나를......」 주리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그것이 그다지......」 「그것이 그다지라니.」 「그다지 노엽소?」 「어떻게 하는 말요?」 「대체 나 한 사람만의 의사였단 말요?」 「잠든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있단 말요?」 「그러면 그때까지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 「아니 누가 유혹을 했단 말요?— 코 큰 소리 그만하오.」 「적어도 암시는 주지 않았소.」 「하루 동안 허수아비 노릇하랬지 누가 사람 노릇— 아니 애인 노릇을 하랬소.」 「그건 이유 닿지 않는, 모욕에 지나지 못하는 말요.」 「버젓한 애인 노릇을 한 당신이 너무도 주제넘었소.」 「그렇게 말하면 당초에 아파아트에서 잠든 사람을 몰아낸 것은 무슨 까닭이었소?」 「당신은 그것을 이 결말을 가져오기 위하여서 한 꾀인 줄 아는구려.」 「적어도 결과는 그렇게 되잖았소. 당신이 원인을 지어 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모욕이요. 바로 그 때에 치든지 욕을 주든지 하지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요?」 「아니 변명이 무슨 변명이요?」 주리야는 기가 막히는 듯이 눈물 어린 얼굴로 민호를 노렸다. 「나는 다만 떨어진 물건을 집었을 뿐요— 땅에 떨어진 양말대님을 줍듯이.」 양말대님— 주리야는 문득 언제인가 차점 「아리랑」에서 그가 떨어뜨린 양말대님을 민호가 집어주던 장면을 그리고 그가 별것 다 떨어뜨리시는군 하고 웃던 것을 생각하였다. 사나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임을 알고 그의 큰 실책을 깨달았다. 양말대님이라면 사실 그가 양말대님을 떨어뜨린 것과 정조를 떨어뜨린 것과는 같은 정도의 부지식간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여운 가운데에도 얼굴이 붉어져서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정말 별것을 다 떨어뜨렸구나!) 이러한 속 생각뿐이다. 「손 닿는 곳에 있는 향기 높은 한 송이의 능금— 동지고 원수고 간에 발 병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따지 않을 사나이는 세상에 없을 거요. 결국 육체적 거리의 죄였소. 육체적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던 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 「뻔질뻔질하게— 설교를 하는 셈인가.」 주리야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섰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 보기 싫으니.」 민호를 보지 않고 눈은 딴전을 향한 채 손은 문을 가리켰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은 아니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잘 알아주어야 하오— 결코 주리야의 의지를 짓밟은 나 혼자의 의사로의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이 점에 있는 것이요.」 주리야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무츰무츰하고 서 있다가,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요.」 하고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듯이 방을 뛰어나갔다. {{문단 그림}} 아래층 문간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오는 여하인의 아침 인사를 받은 체 만 체하고 문을 뛰어나간 주리야는 허둥지둥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얼굴이 불을 끼얹은 듯이 화끈화끈 달았다. 굴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거리는 발이 대중없이 빨리 언덕을 휘둘러 내려갔다. 해가 활짝 솟아 가까운 바다를 일직선으로 찬란히 빛내었다. 움푹 줄어 들어간 바다는 파도 한 조각 없이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신선하고 공기가 차다. 불역에까지 내려간 주리야는 모래 위에 푹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무의식간에 지난 밤 기억이 다시 소생되어 마음을 찧고 얼굴을 달게 하였다. 더구나 아까의 민호의 마지막 마디가 가슴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운 몸을 바닷물에 잠그고도 싶은 생각이 났다. (주화를 무슨 낯으로 대하누.) 생각할수록 엄청났다. 처녀가 물동이를 깨뜨린 느낌을 지나 이제는 하늘을 뒤엎은 듯한 땅을 깨뜨려 놓은 듯도 한 느낌이었다. 주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나 현재 그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금단의 길이다. 그 금단의 과일을 딴 것은 과시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허락하지 못할 장난이요 죄악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조관이라도 이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주리야는 그가 저지를 죄를, 잘못된 몸을 어떻게 처치하였으면 좋을지 나중에는 몸부림이 날 뿐이었다. (진작 그때에 왜 반항하지 못하였던가.) 이 생각이 더한층 그의 마음을 에우고 수치의 불을 끼얹었다. 붙잡을 수 없는 애욕의 힘을 이제는 오히려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 결과가 올 것을 처음에 전연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결과가 있은 후의 이 후회, 환멸, 슬픔— 이것이야말로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예측 못 한 것이었다. 불어나는 고무풍선을 그것이 터질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힘껏 불어 기어코 터뜨리고 그 후에 새삼스럽게 뉘우치는— 그 심사였다. 사랑— 미움— 후회. 이 갈래갈래의 마음의 줄기와 모순된 심정— 주리야는 이제 이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수건을 바닷물에 축여 얼굴을 식히면서 그는 모래펄을 거닐다가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 위에서 다시 행길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어수선한 감정은 차츰 정리되고 통일되어 이제는 다시 마지막의 한 점인 주화에게로 향하였다. 한 점으로 집중되니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다. (주화를 어떻게 대하누—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옳겠지— 그러면 대체 주화는 무엇이라고 할까— 나를 어떻게 조처할까......) 주화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항상 극히 순진하고 깨끗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화의 앞에 속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주화에게 바친 그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다. 그의 양심—그것은 곧 주화에게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은 이제 그를 괴롬의 바퀴 속에 넣고 끝장이 되었다. 「아씨, 아씨, 어데까지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신발 소리 역시 여관집 하녀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바람 쏘이러 나왔소.」 수상한 것을 느낀 듯한 하녀의 태도를 살피고 주리야는 시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그러서요.— 이렇게 일찍이.」 하녀는 황망하던 그의 양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미소를 띄우면서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제가 이 근처를 안내하여 드릴까요?」 「그만 거닐고 들어가겠소.」 섣불리 하다가 도리어 마음속을 들여다 보일까 두려워하여 주리야는 발을 돌렸다. 하녀와 나란히 서서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민호가 가버렸을까, 아직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층에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민호는 아직 있었다. 화로전을 끼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주리야가 들어가도 즉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보면 또다시 기억이 소생되는 까닭에 주리야는 딴전을 보면서 한구석에 가서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주리야.」 민호는 고개를 들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과실이라는 것도 있지 않우. 이렇게 불쾌한 결말을 맺은 채 섭섭하게 헤어질 거야 있소?」 「............」 「주리야의 생각대로 나의 과실로 돌려보내더라도 앞으로나 뜸 없이 지냅시다. 너무 태도를 선명히 해서 도리어 남의 눈에라도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우.」 「모든 것을 숨기잔 말이지요?」 「어젯밤에 주리야가 말한 것같이 우리에게는 로맨티시즘도 필요하다니 한 폭의 로맨틱한 기억으로 싸 두면 그만 아니요.」 「나는 먼저 가요.」 짐을 다 싸고 손쉽게 단장한 주리야는 민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슈우트 케이스를 들고 문을 나갔다. 「주리야, 주리야.」 들은 체 만 체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의아해 하는 하녀에게 두어 마디 귓속말로 이르고 이른 아침의 여관을 나갔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탈 생각이었다. 오빠들의 그 뒷소식을 모르는 까닭에 집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우선 당분간 「아리랑」의 한라에게 몸을 둘 작정으로. -- 「아침부터 행장을 하고 오늘은 또 웬일이야.」 주리야가 인천서 오는 아침 차를 내린 길로 바로 아직 가게도 열지 않은 「아리랑」의 문을 두드렸을 때 눈을 비비며 나온 한라가 의아하여 문을 열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어데를 가는 셈야?」 「여기까지 왔지.」 「여기에 오는데 가방까지 들어야 하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주리야는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풀썩 주저앉으며, 「—시골서 오빠들이 올라온 까닭에 집을 쫓겨 다니는 셈야.」 「진작 이리로 오지 왜— 잡히면 경이겠지.」 「처음부터 오기도 미안해서—」 어름어름 그 자리를 미봉하는 주리야를 한라는 손을 끌어 뒷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걱정 말고 방으로 들어와요.」 두터운 벽을 끼고 가게 뒷편에 붙은 넓직한 한 간의 방— 한라의 살림방이요 침실인 그 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루를 앞두고 의롱 그릇과 잠자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만 숨어 있으면 거리가 뒤집혀도 몰라요.」 주섬주섬 잠자리를 걷고 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당분간 있어 볼까?」 주리야는 천연스러운 자태를 지었다. 그러나 한라가 아침 준비로 밖에 나가 덜거덕덜거덕 하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에는 일단락의 침착이 오고 그 맑은 침착 속으로 모든 비밀과 고민이 새로 살아나왔다. 뒷골목으로 열린 창으로는 늦은 햇발이 흘러 들어와 창 기슭에 놓인 화분의 「제라늄」을 짙은 분홍으로 물들였다. 그 맑고 신선한 분홍이 주리야의 흐린 마음에는 지나쳐 무거운 짐이었다. 같은 붉은 빛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나 「제라늄」의 신선한 분홍은 주리야의 붉은 마음에는 도리어 눈부신 것이었다. 마치 맑은 태양의 빛이 어두운 눈에는 지나쳐 눈부신 것과도 같이. 그 눈부신 「제라늄」과 동무하여 가는 한라의 순진한 열정— 한 사람에게 줄기차게 바치고 있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그것이 불현듯이 부럽게 생각되었다. 그 한라의 열정과 나의 마음과는 마치 달라진 흙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리야가 생각할 때 한라의 그 단순한 살림이 주리야의 더럽힌 몸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제라늄」의 감격에서 눈을 돌린 주리야에게 문득 책시렁에 끼인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주리야는 새삼스런 감동에 끌려 이미 졸업하여 버린 그 한 권의 책— 코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시렁에서 뽑아냈다— 의지할 곳을 찾는 그의 고독한 마음에 그것은 마치 기다만한 기둥같이도 생각되어서. 두터운 책을 군데군데 펴서 무의미하게 구절구절을 읽어 가며 그의 마음의 동감 되는 대문을 억지로 찾으려고 애썼으나 그의 현재의 처지를 변호하여 줄 만한 대문이 쉽사리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펄펄 넘어가는 책장 틈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나왔다. 푸른 검사의 도장이 찍힌 현저동에서 온 편지— 무심히 뒤를 번기니 연필로 박아 쓴 두어 줄의 글이 또렷이 눈에 띄었다. —「한라! 외로운 세상에 있으니 그 무슨 든든한 믿을 것을 찾는 마음 뿐이오. 쇠같이 굳은 한라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마음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오. 주의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든든히 믿는 마음— 이것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는 것임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소......」 결코 감상적이 아닌 이 외로운 마음의 고백이 주리야의 가슴을 에웠다. 영오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한라의 굳은 심지가 주리야의 마음을 울렸다. 유리그릇과도 같이 깨지기 쉬운 그의 마음이야 드디어 한 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임을 주리야는 느꼈다. 신발 소리를 듣고 주리야는 엽서를 책 틈에 날쌔게 감추어 버렸다. 한라가 쟁반에 조반을 날라온 것이었다. 「대단히 설핀 것이지만 이것이 조반이야.」 그다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한라는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진한 커피, 덩어리 채로의 빵, 통째로의 버터— 뜨거운 커피의 피어오르는 김이 향기로왔다. 「그러나 이것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사치해— 이 한 잔의 커피의 향기가 목에 걸리는 때가 많은걸.」 회포를 말하면서 차를 권하다가 한라는 문득 주리야의 손 밑에 펴져 있는 책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붉은 사랑>은—」 하고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보고 싶어서.」 「한라는 코론타이즘을 어떻게 생각허우.」 「코론타이즘— 성생활에 관한 자도요 이단이지 결코 새로운 성도덕의 수립이 아니야—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가령 왓시라사의 행동은—」 「음탕한 계집의 난잡한 행동에 지나지 못하지.」 「굳건한 투사적 공로는 어떻게 허구.」 「투사적 공로는 공로요 사랑은 사랑이지, 그와 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거야. 주의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은 감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랑의 감각을 주의의 양심으로 카무프라즈하려고 한 곳에 왓시릿사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즉 문란한 애욕을 감추려고 주의를 내세웠단 말이지?」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애욕을 난용한 것은 어떨까 생각해. 애욕 생활이 어지러운 이상 그것은 동물적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어젓한 주의의 간판으로 둘러 가리우는 것은 약고 간사한 짓야— 왓시릿사는 결국 굳건한 투사였는지 모르나 반면에 음탕한 둥물이지 무어야.」 「사람이 아니요, 동물!」 한라의 마치 재판관의 그것과도 같은 엄격한 자세에 주리야는 그도 그렇게 이렇게 돌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왓시릿사가 동물이면 나는 무엇인고.) 이 명제가 가슴 속에 뱅 돌면서 주리야는 한라의 앞에서 의젓이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듯하였다. (—왓시릿사에게는 굳건한 투사적 일면이나 있지. 나는 다만 달뜬 불량소녀 밖에는— 단순한 동물밖에는 못 되는 셈이다.) 한라가 가게에 나가 손님을 맞으며 덜거덕덜거덕 일보고 있는 하룻동안 주리야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마음을 죄이면서 솟아올랐다. 한낮이 지나 손님이 잠간 비었을 때 한라가 과일 접시와 먹을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왔다. 한라가 쟁반을 책상 위에 놓기가 바쁘게 밖에서 별안간 귀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라 언니! 한라 언니!」 한라는 숨도 돌릴 새 없이 황망히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니 남희, 웬일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예요.」 듣고 보니 갈데없는 남희의 목소리였다. 한라의 의아하는 태도와 남희의 조급한 양이 그들의 목소리 만으로도 주리야에게는 또렷이 짐작되었다. 「무슨 급한 일로—」 「저—」 남희는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동안을 띄었다가, 「민호씨 혹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급히 말을 이어 버렸다. (—아니 민호를 왜?) 민호라는 한 마디가 마치 철퇴같이 머리를 내려친 듯이 주리야는 순간 아찔하였으나 다시 숨을 죽이고 전신을 귀 삼아 문밖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1회분 연재 누락 == 반둥건둥 == 짧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리야는 앉아 그를 지키고 있는 주화를 발견한 순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에게 대하여 용솟음치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정리하고 든든한 배짱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혼수상태에 빠질 첫 순간과 같이 여전히 마음이 설레고 골이 띵하였다. 「정신 좀 차렸소.— 대체 웬일요. 별안간 혼몽상태에 빠졌으니.」 주화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퍽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주화를 그렇게 정면으로 순간에 대하여 버리니 도리어 옹졸하고 있던 마음이 턱 놓이며 그의 귀익은 목소리에 든든한 안도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리야의 일신이 안전하였으니 다행이오.」 골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수건에 새로 물을 축여 이마 위에 대면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서 주리야는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언제 올라 오셨어요.」 「시골 일이 웬만큼 정리된 곳을 좋아라 하고 어젯밤에 뛰어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이곳 일이 뒤틀려 있는구려. 박선생 남죽네 민호 할 것 없이 전통이구려.」 민호마저 들어간 것을 그보다도 먼저 주화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주리야는 돌연히 무서운 생각이 났다. 민호가 들어간 것조차 알고 있다면 그럼 그것까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리야까지 한몫에 쓸리지 않았나 염려하였더니 이런 다행은 없소.— 이곳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었소. 언제 별안간 바람이 휩쓸려 올는지 모르는 판이요.」 하고 이마의 수건을 잠깐 떼고 낯색을 엿보면서 주화는 말을 이었다. 「몸이 웬만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집을 피해야 할 것이요.」 「아니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이제 또 새로운 커다란 일이 눈앞에 닥쳐 있음을 듣고 주리야는 마음이 옹송망송함을 깨달았다. 「웬만하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구려. 나는 그동안 정리할 것을 대개 정리하여 주겠소.」 하고 주화는 새삼스럽게 조급하게 주리야의 옆을 떠나 책상께로 갔다. 책시렁에서 책을 뽑아내 책장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도 하고 책상 빼닫이를 뽑아 편지와 종잇장을 갈피갈피 뒤지기도 하였다. 그 급스러운 거동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도 마치 부채로 부치는 듯이 차차 조급하게 설레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야말로 속히 허물을 고백하여야 할 알맞은 기회인 것이다. 「이것 보세요.」 그러나 눈을 꼭 감고 이 한 마디를 말하고는 주화가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볼 것을 느끼고 주리야는 말도 잇지 못하고 이불을 푹 써버렸다. 「일어나지 못하겠단 말요.」 주화가 와서 이불을 벗기고 그를 들여다볼 때에 그는 황당하게 딴소리를 할 수밖에는 없었다. 「몸이 거북해서 저는 못 일어나겠어요. 어서 혼자나 몸을 피하여요. 저는 이곳에 누운 채 일을 당하겠어요.— 죄진 몸이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지막 마디를 주리야는 뼈 있는 말로 한 셈이었으나 그 풍자를 깨닫지 못한 주화는 주리야의 자포적 태도를 도리어 위험하다 생각하며 애써 그를 일으키려 하였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고 어서 기운을 내보아요. 정 맥이 없다면 차를 부르리라.」 「차는 무슨 차예요.」 주화의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는 미안한 생각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지요.— 일어나기는 해도 몸을 피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렇게 유한 소리만 하오. 이야기도 할 때가 따로 있지 이 시급한 경우에.—」 도리어 약간 화를 내며 주화는 다시 책상께로 가서 주섬주섬 정리를 계속하였다. 그러고 보니 또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려서 주리야는 조급한 마음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피신 문제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가로놓여 있어요.」 밖에서 돌연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리야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주화는 잠시 쫑그렸다가 문서를 주섬주섬 모아들고 뒷문으로 살며시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엉겼던 긴장이 풀어지자 주리야도 일어서서 날쌔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화는 부엌에서 들고 나간 문서를 불사르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부스럭 거리 더니 뒤로 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 벽장 속을 들추었다. 주리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에 주화는 다시 뒤로 돌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제가 진 죄를 고백하면 놀라지 않으실 테예요. 괴로워하지 않으실 테예요.— 어떤 죄를 지었던지 같이 데리고 가시겠어요. 죄— 그렇지요. 저는 적어도 아직까지 큰 죄라고 생각하여요.」 말은 평범하였으나 주리야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 낸 것이었다. 「아니 무슨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단 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갑시다.— 나는 어쩐지 커다란 위험이 일각일각 가까이 닥쳐오는 듯한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소.」 「저의 고백— 그것이 커다란 위험일는지도 모르지요.」 「아, 웬일인지 몸이 떨리누나.」 사실 알 수 없이 몸을 떨면서 주화는 채 손대지 못한 책상 위 다른 문서를 대충대충 골라서 두 손에 나눠 쥐었다. 「자, 이 길로 바로 나갑시다. 내 뒤를 곧 쫒아 나오구려.」 하고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앞문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 말할 것은 말해 버려야 시원하겠어요.」 주리야가 조바심하고 외칠 동안에 벌써 문밖에 나가 버린 주화는 웬일인지 별안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으흣!」 다음 순간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에 든 문서를 마저 불살라 버리려는 셈이겠지 생각하고 문을 홱 연 주리야 자신도 깜짝 놀라 버렸다. 밖에는 어느 새인지 주화의 직각대로 올 것이 와 선 것이었다. 몇 분 해서 주화와 주리야는 조금의 거역도 없이 순순하게 관할 서원의 앞을 섰다. 위험이 올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일각일각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죄이거니 하고 느낄 때 주리야는 주화의 일신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이라 저무는 거리를 남녀가 나란히 서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걸어가기가 너무도 겸연쩍어서 주리야는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다. 사흘이 두 번 겹치고 세 번 겹쳐 열흘 만에 주리야는 단독 서를 풀려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건에 직접 관계가 엷고 죄가 가벼운 탓이지 주화들의 풀릴 날은 바다같이 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를 여러 번 거듭 하여야 할 것을 주리야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옷고름을 줄기줄기 뜯기우고 옷폭을 찢기운 너불너불한 주제로 거리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첫경험인 주리야는 며칠 동안에 격조변이 마치 여러 해 동안의 고생과도 같이 몹시도 길고 험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글자대로 지옥의 괴롬이었다. 그가 이전에 경솔한 달뜬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운동의 현실이란 지긋지긋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 길의 열정을 꾸준히 가짐이 범상한 사람의 능히 할 바가 아님을 알았을 때에 그런 괴롬을 거듭하여도 주저앉는 법 없는 주화들의 앙칼진 의지야말로 하늘 위에 태양과도 같이 높고 장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모욕—이러는 점잖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대접— 그 속에서 정신도 정신이려니와 주리야의 육체는 완전히 피곤하고 쇠잔하였다. 그 위에 더한층 괴로운 것은 돌연히 처음 당하는 커다란 생리적 변화가 온 것이었다. 들어간지 며칠 안 되어서부터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돌연히 식욕이 줄고 구역질이 나고 간간히 복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갈수록에 더하여 갔다. 취조실에서 받는 괴롬보다도 어두운 우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이 생리적 괴롬이 그에게는 더한층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의 문을 풀려나온 날, 불현듯이 이 증세는 더욱 심한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밝은 거리를 걸으려니 골이 뒤흔들리고 현기증이 나며 느긋느긋 속이 뒤집혀 갔다. 넓은 거리를 걷다가 그는 몇 번이나 머물러 서서 한참씩 구역질을 하다가는 걷고 하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괴롬에 지쳐서 그는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꺼릴 여가조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육체적 변화를 불안히 여겨 집에도 들릴 새 없이 그는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았다. 한라의 권유로 내친 걸음에 뒷골목의 조그만 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맥박을 보고 청진기를 대고 일정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주리야의 오도깝스런 불안의 표정을 웃는 듯이 침착하게 말하였다.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큰 변화야 큰 변화지요.」 의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고 아직도 인생에 미흡한 순진한 주리야의 태도를 귀엽게 여기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사 든지 벌써 서너 달째 되는 것 같소이다.」 「네?」 철없는 주리야는 아직도 의사의 말의 뜻을 몰라서 알지 못할 그의 선고에 놀라며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경사라니요.」 「짐작해 보시구려 」 하고 은근히 그의 배를 노려보는 의사의 시선을 살핀 주리야는 처음으로 그의 뜻을 깨닫고 홀연히 놀라며 그도 모르게 배를 부둥켜 안았다. 「아니 그럼—.」 귓불을 별안간 발갛게 물들이며 주리야는 의사의 선고에 요번에는 짜장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걱정하실 것은 없소이다. 달포쯤 지나면 그런 증세는 다시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에 돌아갈 것이니까요.」 쫒기우는 듯이 급스럽게 병원을 나온 주리야는 거리의 찬바람을 쏘이면서 걸어도 화끈 다는 얼굴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변이 너무도 일시에 닥쳐온 까닭에 그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흥분과 부끄럼 사이로도 주리야는 은근히 손꼽아 석 달을 세어 올라가 석 달 전의 주화와의 열정의 기억을 마음속에 되풀이하여 보았다. 물론 시일에 틀림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일의 확실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부끄러운 생각에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 인생의 큰 변화가 한결같이 거짓말 같이만 생각되었다. -- 집으로 돌아온 주리야는 그날부터 외로운 방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서에서 겪은 여러 날 동안의 피곤이 일시에 북받쳐 오는 위에 육체적 변화가 더욱 심하였던 까닭이다. 무시로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고 정신이 어찔어찔하였다. 몹시 몹시 으스스하여서 크게 병든 것과도 같은 느낌이 났다. 이불을 쓰고 누우니 할 수 없이 마음이 열어져서 그도 모르는 결에 신음 소리조차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 생각이 문득 가슴 속에 새어 들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흐르기까지 하였다.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병이 커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괴로운 몸을 더한층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밤을 새우고 날이 지나면 증세가 엷어지고 몸이 한결 거뿐하곤 하였다. 병의 괴롬이 엷어지면 이번에는 마음의 괴롬이 불현듯이 짙어 갔다.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 데서 생기는 일종의 공포와 특수한 그의 경우에 따르는 수치의 념— 이 두 가지의 무거운 감정이 저울추같이 그의 마음을 내려눌렀다. 더욱이 설명할 수 없는 수치의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경박하고 미흡한 그가 벌써 여자의 마지막 계단인 모성이 된다는 생각에 그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안타까운 마음에 배를 두드리고 듣고 하였다. 「결국 그 수밖에 없어.」 며칠 동안 생각하고 번민한 끝에 그는 기어코 마지막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갈피갈피 생각하고 망설이던 끝에 밤이 어두워짐을 살펴 가까운 매약점을 찾았다. 누런 기름병을 치마폭에 감추어 들고는 계면쩍은 마음에 얼른 가게를 나와 버렸다. 그날 밤 그는 큰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생각을 억제하면서 한 종지 남짓한 피마자 기름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예측은 한 바였으나 창자를 훑어 내리는 듯도 하게 목통이 심하였다. 학교 다닐 때에 잡지 등속에서 손쉽게 얻은 간단한 지식이니 완전한 것이리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나 복통이 너무도 심하고 보니 그의 경솔한 조치가 다시 후회되었다. 방바닥을 설설 헤매이고 심하리만치 배가 조이고 치밀든 끝에 이어서 심한 설사가 왔다. 배 속을 한바탕 쪽 씻어내는 듯하였다.— 심히 괴로운 며칠 밤을 지내고 나니 전신이 나른하게 지쳐 버려서 그는 다시 그 방법을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물론 한 번 시험에 효과가 있을 리는 없고 생리적 상태는 그것을 먹기 전과 일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더 손찌검하고 싶지 않었다. 며칠 동안의 무한한 괴롬이 마치 그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는 형벌같이도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모성에 대한 부끄러운 생각쯤은 그 괴롬에 비기면 하잘 것 없는 불필요한 일종의 마음의 사치일 뿐이었다. 자연에 반역함이란 허락될 수 없는 헛된 노력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육체를 가지고 깨달았다. 이러한 생각 외에 그에게는 돌연히 주화의 생각이 났다. 그의 돌아올 날을 고백하지 못한 채 그를 뺏겨 버렸다. 그의 돌아올 날은 멀다. 그가 남겨놓고 간 사랑의 유물— 이것이 주리야에게 끼쳐진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그 사랑의 유산조차 없애 버림은 주화와의 인연을 스스로 즐겨서 끊어 버리는 셈이다. 사랑하는 주화에게 대하여 아직까지도 간곡한 그의 심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처럼 끼쳐진 유물을 정성껏 지키고 길러감이 진 허물의 배상도 되고 주화에게 대하여 변치 않은 사랑의 표현도 되리라고 주리야는 생각하였다. 「딴생각 말고 오는 것은 오는 대로 받아들이자.」 며칠 만에 결국 주리야는 이 결론을 마음속에 굳게 깨달았다. 며칠 전까지 품고 있던 어리석은 생각과 경솔한 행동이 너무도 무의미하였던 것을 뉘우쳤다. 새로운 생각에 새로운 인생이 열린 듯이도 마음이 즐겁고 유쾌하였다. 앞이 훤히 열리고 그의 밟을 길이 또렷이 내다보였다. 밝은 생각과 함께 육체의 괴롬도 차차 덜하여 갔다. 자리에 누운지 일주일 남짓하여서 그는 쾌한 심신으로 자리를 일어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집안이 심히 어지러웠다. 책시렁, 책상, 벽장 속 등은 그들이 검거될 그때의 어지러운 꼴 그대로였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반 날 동안에 대충대충 집안을 정리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의 정리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저윽히 솟았다. 웬만한 것은 있던 대로의 위치에 그대로 두고 책, 옷가지, 일용 도구 등에서 직접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눈에 띄는 곳에 따로 모아서 쌓아 놓았다. 책시렁 벽 위의 로오자의 초상화도 든손 뜯어서 따로 내놓은 책갈피에 끼어 두었다. 나중에 책상 빼닫이 속에서 저금 통장이 나왔다. 처음 서울에 올 당시에 지니고 왔던 삼백에 남짓한 돈을 예금하였던 우편 통장이었다. 그는 시험 삼아 통장을 살펴보았다. 예금란은 단 한 줄 금액의 기입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의 칸은 노동자 없는 공장 속과도 같이 텅 비인 헛간임에 반하여 아랫란은 끝 페이지까지 한 줄의 빈칸도 없이 가득 숫자가 들어 차 있다. 한 덩이의 살 위에 새까맣게 엉겨서 피를 빨고 있는 무수한 모기떼의 꼴과도 같은 가느다란 액수의 숫자가 예금란의 피를 다 빨고 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죽어 쓰러져 있는 격이었다. 혹은 그 무수한 생명 없는 숫자를 생산이 없는 공장 마당에 쌓인 소비의 쓰레기라고도 할까. 그는 장난삼아 그 많은 숫자를 은근히 계산하여 보았다. 행여나 얼마간의 잔액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는 아니었으나 씻은 듯이도 여유가 없었다. 계산을 자칫 잘못하면 아랫란의 합계가 예금 액수를 훨씬 더 지날 지경이었다. 「차 한 잔 값도 없구나」 주리야는 중얼거리고 픽 웃어 버렸다. 지나간 생활할의 해골이 되어 버린 의미 없는 통장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쪽쪽 찢겼다. 줄기줄기 찢겨서 떨어지는 숫자의 한 줄 한 줄이 주리야의 지나간 반 년 동안의 생활의 역사의 한 줄 한 줄이 되어서 펀득펀득 그의 눈을 스쳤다. 다 찢고 나서 그는 새삼스럽게 책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위에 늘 놓여 있던 「벙어리」도 벌써 깨트려진지 오래되지 않었던가. 그러나 주리야는 이제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날이 있음이 마땅하다는 듯이 태연히 시선을 다시 옮겨 버리고 무릎 위에 수북히 쌓인 통장의 조각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자리를 일어섰다. 장난삼아 손아귀에 든 것을 훠 치트렸다. 낙화와도 같이 방 안에 그득히 날리는 무수한 조각 무수한 숫자— 그것은 곧 청산되는 주리야 자신의 지난 생활의 단편 단편이었다. 「지날 것은 지나고 올 것은 오너라」 다 떨어져 버린 낙화를 보고 이렇게 새삼스럽게 중얼거렸을 만큼 주리야는 그도 모르는 동안에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아서 「아리랑」까지 갔을 때에는 흥분도 사라지고 다시 침착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병중에 두어 번이나 간호하려 와 준 친절을 치사한 후에 주리야는 전에 없던 진득한 어조로 돌아갔다. 「언니와도 아마 마지막 의논일까 보우.」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새삼스럽게.」 「일신의 진퇴 문제이니 나로서는 큰 문제이구 말구요.」 뒤미처 뒤를 이어서 주리야는 「다 들어간 뒤에 혼자 남어 있어도 하릴없어 당분간 시골이나 내려가 있을까 해서.」 「잘 생각했지.」 생각도 판단도 할 새 없이 너무도 서글픈 대답이기에 주리야는 한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라의 목소리에는 진실과 애정이 넘쳐 있음을 알았다. 「일없이 여기 있어야 별 수 있소? 더구나 무거운 몸을 가지고.」 「몸도 조심할 겸 부끄러운 생각 무릅쓰고 어떻든 잠깐 동안 내려가 있어야겠수.」 「집에서 용납한다면야 제일 좋은 수지.」 「여린 부모의 마음에 용납하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들어간 사람의 뒷시중인데.」 「이곳 일은 걱정 말우. 손 미치는 대로 내 돌보지 않으리.」 「그렇게 해 준다면 오죽이나 고맙겠소— 그럼 이곳 일은 언니만 믿어요.」 「그 일만은 길게 말하지 마우.」 끝을 막고 한라는 어조를 변하여 「이왕 온 김에 오늘 저녁은 여기서 나와 만찬이나 같이 합시다.」 하고 일어나서 가게 안을 주섬주섬 걷고는 저녁 준비에 착수하였다. 주리야도 나가서 같이 거들었다. 마지막 만찬이라고 한라는 평소보다 공을 들여 로오스를 사다 볶고 커다란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장황히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밤이 깊어갔다. 자기의 계획에 동무의 동의와 권유를 받은 주리야는 앞길이 똑바로 내다보여 자연 마음이 놓이고 이야기가 잦았다. 기어코 집에 돌아가기도 귀찮고 하여 늦은 밤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자 버리기로 하였다. {{문단 그림}} 이튿날 아침 한라와 같이 일어난 주리야는 한라의 서대문 행을 좋은 기회 삼아 자원하여 동행하기로 하였다. 필요와 호기심은 늘 느껴오면서도 현저동을 찾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차입할 옷보퉁이를 든 한라를 따라 영천행 버스를 내렸을 때에는 알 수 없이 마음이 수선거렸다. 차입소의 광경 멀리 바라보이는 무악재 고개 긴 벽돌담 육중한 철문— 처음 보는 이 모든 풍경이 주리야에게는 심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동무에게 책을 차입하려 왔다고 칭탁하고 그는 공교로히 입문을 허락받았다. 한라의 꽁무니를 따라 뜰, 사무소, 차입물 취급소, 영치계를 차례차례 지나서 나중에 대합실에 들어갔다. 별것 아니라 선생을 따라 견학을 온 셈이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한 마음으로 대합실 안에 웅중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양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벽돌담 하나를 격한 세상임에 지나지 않으나 그 안에도 공기는 사파의 그것과는 손바닥을 번진 듯이 다른 것이었다. 얼굴마다 서마서마한 어두운 기색이 나타나 그것이 빚어내는 대합실 안의 분위기란 일률로 침울한 것이었다. 갓난애를 업고까지 와서 면회를 거절당한 여인네는 여러 사람의 눈앞을 꺼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놓고 울어 버렸다. 차마 진득이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어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자리를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한라가 면회를 마치고 차하물을 찾았을 때는 오정을 훨씬 지난 뒤였다. 다시 철문을 나왔을 때에는 벽돌담의 그림자가 땅 위에 길게 떨어져 있었다. 무악재 고개에서는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내렸다. 「주화도 장차 저 속에서 살림하게 되렸다.」 불필요한 감상은 떨쳐 버리려고 애쓰면서도 주리야는 모르는 새에 담 너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 좋은 곳을 견학하였다고 기뻐하면서 주리야는 다시 버스를 탔다. 서울 와서 반 년 동안을 반둥건둥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지냈으나 그러나 적어도 여러 가지의 분위기를 보고 안 것이 장차를 위한 일종의 예비 교육이었다고 그는 차 중에서 곰곰히 생각햐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 주리야는 가방 속에 주섬주섬 행장을 수습하였다. 행장이래야 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올라올 때에는 바스켓이던 것이 지금에는 큰 여행용 가방으로 변한 것이 생활이 조금 복잡해진 증거라면 증거일까. 따로 내놓았던 책 옷가지 등이 그래도 가방 속에 뽀듯이 찼다. 나머지의 짐과 세간 그릇은 일절 한라의 손에 맡길 작정이었다. 뒷정리는 한라에게 부탁할 생각으로 대강 그대로 버려 두고 대문만 걸고 가방을 들고 또 한라에게로 갔다. 주리야의 빈 주머니 속을 짐작하고 한라는 이미 차표까지 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한 커피를 대접하여 주었다. 그날도 한라는 가게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온전히 주리야의 동무하여 주었다. 모든 일을 두 번 세 번 겹쳐 부탁하고 주리야는 늦은 밤 막차에 몸을 던졌다. 침착한 속으로도 마음이 약간 설렘을 느꼈다. 출발의 종이 울리고 플랫폼 위에 보내는 사람, 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날릴 때에 주리야도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라를 향하여 플랫폼을 향하여 설레는 마음에 갈팡질팡 어지러운 이별의 말을 던졌다.— 「잘 있거라 서울아— 잠깐 동안의 작별이지 영 이별은 아니다— 다음에 올라올 때에는 나도 사람 되어 오겠지— 잘 있수 한라— 몸이 충실해지면 또 올라올게— 뒷일 잘 보아 주세요— 편지 자주 하고......」 :作者後言.— 「朱利耶」의 반둥건둥의 成長과도 같이 作品 「朱利耶」도 이만큼 길러서 우선 여기서 끝을 막고 붓을 갈아 「朱利耶 後日譚」을 쓸 날을 讀者諸賢과 같이 기다릴 作定이다. ==저작권== {{PD-old-70}} 0a2lalkpvut6716jk6b9xssvcn70xxb 426864 426863 2026-05-05T07:42:05Z ZornsLemon 15531 426864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주리야 |다른 표기=朱利耶 |저자=[[저자:이효석|이효석]] |설명=<新女性>에 1933.3~1934.3까지 연재하였다. 8회분이 연재에서 누락되어 있고, 해당 호의 목차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원래는 장편소설로 기획한 듯하나, 10회 연재 후 종료하였다. }} == 생활의 노래 (生活譜) == 「짱 겐 보」 「짱 겐 돌」 「짱 겐 칼」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듯 이르니, 「로오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로오자라고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싫어요—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그것이 소아병이란 거야.」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오자가 크게 실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 로오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로오자가— 부엌에서— 암만해도 어색한 걸.」 「로오자가 별 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도 짓고 옷도 기워야지.」 「행주치마 입은 로오자.」 「참으로 장한 로오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나는 공설시장의 로오자인가요?— 장에 가는 건 내게만 맡기니.」 「암, 공설시장의 로오자요, 방안의 로오자요, 거리의 로오자요.」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오자, 그런 로오자는 오늘부터 폐업이여요.」 「땅속의 로오자가 슬퍼하게.— 어서 장에 나갔다 와요.」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 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하니까요.」 책상 위에 펴 놓은 로오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활의 잔치 마당이에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 그 속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 그같이 신성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그러믄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요?— 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띄우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sic|재}}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찬란하게 비치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나물 바구니— 생활 바구니.)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 생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 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 가지고 올게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드러냄표|벙어리|sesame}}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빼죽이 솟는 돈 닢이 한 닢 두 닢 좁은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푼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r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 속에 넣고 날마다 한 닢 두 닢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갈지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 이것을 생각할 때에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 그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워 노세요. 네?」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게 덥석 전신을 의지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문질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는—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능금 한 입 드릴까?」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서요. 한 입 이상은 안 되요— 행길에서 먹을게 없어지게.」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나의 능금 누가 사노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모로코」에서 디이트릿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리로 읊으면서 주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 못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한숨.— 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졋을 때에 주화에게는 두 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 잊어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건넌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어느덧 뜰 안에 봄이 가득 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벌써— 봄.) 주리야와의 몇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로오자는 못 되더라도— 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 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다 먹고 난 속심을 뾰족한 구두 끝으로 툭 차버릴 주리야— 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과 진열장의 미학(美學)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 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 길게 떨어뜨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섰을 주리야— 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에 그려볼 때 주화에게는 석 달 전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나왔다— {{문단 그림}}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독특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 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 항구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 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이 어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걸이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은 귀엽다고 생{{sic|간|각}}하였다. 나이 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부는 못 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 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리는 동안에 문득 꿈을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계셔요?」 주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에!」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 여자— S 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 보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성진 사는 김영애요.」 「대체 웬일이요.— 들어오시오.」 「편지도 안 드리고 문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우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내렸다.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왔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 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이 바라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 왜 그리 일찍 주무세요?」 듣고 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 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있소.— 그것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흠— 대담한 용단이시군.」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속이 백짓장같이 하아얀 넌센스 뽀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 결혼의 희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드러냄표|노라|sesame}}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에요.— 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 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는 안 돌아갈 작정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 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왔으니까요.」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 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는 못했을 거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에요.」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 당분간 살 만한 것만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 하고 그는 슈우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을 집어내서 주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놀라서 그를 똑바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 쓰면 한 일 년 지탱해 갈는지요.」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다 할는지— 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슈우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 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 놓고는 자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 등 얇다란 몇 권의 팜플렛이었다.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 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 빈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 한구석에 간수하였다. 주화는 그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 두 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도의 정도를 넘은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의 사상의 경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할 수 없었다. {{문단 그림}}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간 자세를 이지러뜨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의 절대적임을 언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듯이 기뻐하며 다음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삭월세로 빌려 놓고 약 백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만하고 따로 백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 「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 「리야」를 빌어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정한 생산과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이 괴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는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이퍼(이렇게 부르기는 과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주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신의 피가 수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가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그칠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채의 전개— 책을 아직 반도 넘기지 않은 이제 주화는 주리야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 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서 준 것은 무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속을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에 생긋 웃고 섰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드러냄표|카페|sesame}}(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 대로 {{드러냄표|샐러드|sesame}}나 맨들구요.」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그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고 하꾸라이가 아니라요, 크로오바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먹어 본 탓인지.」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 갑에 든 크로오바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 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드러냄표|샐러드|sesame}}, 카페와 숭늉— 이 칵테일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렇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떤 때에는 {{드러냄표|햄|sesame}}이나 {{드러냄표|소오세지|sesame}} 조각을 사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되게까지 되었던 거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하고 탄식하였을 때 주화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치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지」 하고 도리어 톡톡이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에도 가야 하지 않겠소?」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 석 달 동안이나 데리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이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에요?」 「석 달 동안이나 벼르고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드러냄표|견학|sesame}}할 자격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직공과도 친해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찍이 가 봅시다.」 「네— 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기뻐서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이 뚫어져 뾰족이 내다보이는 하아얀 한 개의 별— 석 달 동안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성가족(聖家族) == 「대체 어데까지 끌고 가실 작정예요?」 「따라만 오구려.」 「지도에도 없는 세상 속으로 데리고 가실 셈이군.」 「지도에 없는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도에 없는 세상이라면 천당과 지옥인데 끌고 가시는 곳이 대체 어데예요?」 「지옥일는지도 모르지.」 「맙소사. 천당으로 못 데리고 가실지언정 지옥으로 끌고 가시겠어요?」 「그럼 천당으로—」 「성스러운 가족 사는 세상으로요.」 종종걸음으로 주화의 뒤를 따라가는 주리야는 이 한가하지 못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재담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장식하려 하였다. 시구문 안, 전차를 내려서 좁은 옆 골목으로 한 마장 가량이나 걸어 들어가도 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나는 곳이 없었다. 전등 하나도 달리지 않은 골목 안은 유심히도 어둡다. 도희의 불빛이 밤하늘 위에 우렷이 흐려있을 뿐이요, 그것이 이 동떨어진 어두운 골목 안까지 비취이지는 않았다. 서울 온 지 석달에 아직 거리 거리의 지리가 밝지 못한 주리야에게 이 궁벽한 지대는 생각지도 못한 딴 세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전등 하나도 없다니.」 길바닥이 어두워서 발밑이 허전허전하는 주리야는 주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길을 더듬으면서 게두덜거린다. 「아마도 지옥인가 보오.」 껄껄 웃는 주화가 얄궂게 생각되었다. 「난 도로 갈 테예요.」 「여기까지 왔다 도로 가다니...... 가만 있소. 다 왔나 부오.」 하면서 주화는 무뜩 눈앞에 닥치는 대문 앞에 머물렀다. 「낙원에서 지옥까지가 아흐레 동안의 길이라더니 전찻길에서 여기까지 아마 구 분은 걸렸나 봐요.」 「농담은 그만 두고 따라 들어 오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도래를 틀고 손쉽게 문을 열더니 주리야를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지옥이고 천당이고 간에 다 왔으니 시원하군요.」 한 간의 조촐한 대문과는 딴판으로 뜰 안은 침침한 어둠 속에 넓직하게 퍼져 있고 그 네모에 마룻대를 달리한 여러 채의 초라한 집이 들어섰음을 보아 그 안은 한 집안이 아니라 채마다 다른 가호가 들어있음을 주리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뜰 복판에 지붕 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아도 돌 틈에 푸르칙칙하게 이끼 끼인 그 우물이 집안 전체에 우중충한 느낌을 주었다. 가호마다의 생활의 자태를 첫눈에 엿볼 수는 없었으나 전체에서 받는 첫인상은 심히 우중충한 것이었다. 우물과 같은 칙칙한 생활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 밑을 조심해요.」 주화는 우물 옆을 돌아 구석으로 훨씬 들어박힌 서편 가호의 뒤로 돌아갔다. 첫걸음의 발 설은 어둠길을 주리야는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가호와 동떨어져서 외딸리 아늑하게 서편으로 향한 그 집을 돌아 정면에 이르렀을 때에 좁은 뜰로 향한 두 간의 방에서는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인기척이 없고 고요한 공기가 바닷속같이 주위에 잠겨 있다. 「바로 이 집이요.」 「성당같이 고요하군요.」 「성당같이 고이 올라 오오.」 야트막한 툇마루에 오르더니 주화는 말도 없이 아랫방 문을 열고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주선생님이시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여인네의 얼굴이 밀장 사이에 어리웠다. 「시스러워 여기지 말고 들어오.」 주화는 주저하는 주리야를 내다보고 다시 여인네를 향하였다. 「주리야를 데리고 왔는데.」 여인네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더니 마루로 뛰어나왔다. 「들어오시오.」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초면의 따뜻한 손길에 끌려 주리야는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첫 인사는 아무 것도 없이 끔직이도 반가워하여 주는 따뜻한 애정에 주리야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한 느낌을 받아 그 자리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어지러운데 와 주시노라구.」 여인네— 주화에게서 늘 들어온 남죽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진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어 한구석에 뭉쳐 놓았다. 오랫동안 고생에 폭 바스러진 까무잡잡한 남죽의 얼굴에 주리야는 첫눈에 친밀한 「언니」를 느꼈다. 「진작 오려던 것이 생각만 앞서고 여의치 못했어요.」 「나야말로 늘 주선생께서 듣기만 하면서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남죽은 주리야를 진득이 바라보며, 「살림살이 바쁘시지.」 고향이 같은 관북의 이웃 고을이라는 생각이 도와서인지 즉석에 한 집안 식구와 같이 피차의 감정과 의사가 유통되었다. 몇 마디를 건너지 않아 벌써 두 사람의 마음은 긴밀히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땅속의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나 주리야가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같이 낯설고 서마서마한 곳은 아니요, 마음의 세상에는 땅 위 땅 속이 없이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쉽게 합류되었던 것이다. 「오늘 면회하였소?」 주화는 남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면회는 못했어요. 요전에 면회한지 몇 날 안 된다구 허가를 해주어야지요. 겨우 헌 옷가지를 차하해 왔을 뿐이지요.」 「공연히 공장만 하루 때려눕혔군요.」 「그런데 요사이 건강이 퍽 부실한 모양이여요.」 「그 동무 말 아니군— 검거될 때부터 심장이 약하던 사람이 예심에 거의 일 년이나 있게 되니 안 그럴 리 있겠노.」 「요전에 면회할 때부터 신관이 몹시 축났기에 걱정은 했지만— 오늘 편지로 자세히 들으니 아주 심한 모양인데요.」 「편지로요?」 「차하해 내온 옷을 뜯었더니 저고리 솜 갈피 속에서 이런 것이 나왔어요.」 하며 남죽은 치마띠 사이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한 장의 종이 조각을 집어내서 주리야의 눈앞을 서슴지 아니하고 주화에게 주었다. 「혈서이군.」 종이 조각을 펴 들자 주화의 양미간에는 볼 동안에 수심의 주름이 잡혔다. 「입술을 깨물고 피를 내서 간수의 눈을 숨겨 가며 차입해 준 코종이에 깨알 박듯 그렸겠지요.— 늘 하는 짓이니.」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서 주리야는 가벼운 몸서리를 치면서 주화가 든 혈서의 조각을 무시무시 바라보았다. 내려 읽는 주화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주리야는 불시에 수군거리는 사람의 음성을 들었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고 외국어의 단어를 외우는 것도 같은 가는 목소리는 확실히 웃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있는 웃방 장지를 바라보았다. {{문단 그림}}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린 후 책 덮는 소리가 나더니 웃방 장지가 가볍게 열렸다. 그칠 새 없이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상스러워서 은근히 그쪽만 바라보고 앉았던 주리야는 열린 장지로 나타난 그 인물에 적지 아니 놀랐다. 「저이가......」 주리야는 집에 가끔 주화를 찾아오는 그 대학생을 이 낯설은 곳에서 만날 줄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주동무요.」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그는 주화들이 와 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있으련만 의아한 눈초리로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리야의 더욱 이상스럽게 여긴 것은 뒤미처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낯설은 처녀였다. 어떤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그 처녀가 남죽의 동생 남희인 줄은 물론 첫눈에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와 이 대학생이 한 방에서 수군거리는 친밀한 사이에 있다는 것이 그러한 장면을 처음 당하는 주리야에게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려워서 못해 먹겠다.」 낯설은 주리야를 보고 문턱에서 주춤한 남희는 부끄러운 표정을 이런 탄식으로 얼버무려 넘기면서 언니 옆에 사뿐 내려와 앉았다. 주리야는 여자다운 민첩한 신경으로 수줍어하는 남희의 태도와 겸연쩍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과 남희 두 사람의 서먹서먹한 이를 첫눈에 느꼈다. 「한 달이나 두 달로 그렇게 쉽게 깨치겠소?」 대학생인 민호는 딴전을 보면서 남희에게 말하고 주리야를 바라 보며, 「주동무는 불란서말 공부하신다지요?」 주화를 부를 때 쓰는 「주동무」로 주리야를 부르는 것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친밀의 느낌이 없지 않음을 깨달은 주리야는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심심풀이로 강의록을 뒤적거릴 뿐이지 정성을 들여야 말이지요.」 「남희 불란서말은 안 배우려우.」 「그렇게 한가한 것 배울 틈 있나요.」 민호의 농담에 남희는 가볍게 반박하며 주리야를 흘끗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이 한마디가 주리야에게 불현듯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남희와 불란서말을 공부하는 자기와의 의식의 정도, 피차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주리야가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이 말에서 받는 불쾌한 느낌을 마지 못하였다. 남죽에게 「언니」를 느낀 그는 남희에게도 응당 친밀한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나 웬일인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도리어 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가 본데.」 편지에만 열중하였던 주화는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남죽을 바라보았다. 「이왕 들어가 있는 이상 고분고분히 일르는 대로 했으면 좋을 것을 공연히 쓸데 없는 반항을 하는 모양이예요.」 남죽의 뒤를 남희가 받아서, 「아재는 원래 피가 관 분이래서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시게 되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청대로 보석 운동을 해보시지.」 「보석 운동인들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보석이라면 저도 힘써 보지요.」 민호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희망도 있으니 우선 이변호사를 찾아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나도 만나는 대로 말해 보지만.」 「이변호사에게 폐를 끼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형무서에서 여간해서 승낙하겠어요? 병이 쇠해 빠져서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옥을 시키는 형편인데.」 한숨을 짓고 남죽은 계속하여, 「그러고 둘째로 보증금이 수백원은 들 터인데 그것을 또 어데서 어떻게 구하겠어요.」 「어떻든 유예할 경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곧 이변호사를 찾아보시도록 하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죽은 날쌔게 혈서를 접어서 치마 틈에 수습하고 널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었다. 박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누구시라구요.」 긴장이 풀리며 남죽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들 다 오지 않었소.」 박선생은 문득 주리야를 발견하고, 「주씨 웬일이요.」 의아한 눈을 던졌다. 늘 집으로 찾아오는 박선생 처소를 항상 변경하면서 돌아 다니는 그에게 가끔 저녁을 대접한 일까지 있는 박선생— 그를 문득 이런 곳에서 만나니 친밀한 느낌이 났다. 「바람도 쏘일 겸 놀러 왔지요.」 「놀러......」 「올 때들이 되었는데 아직 안 오는군.」 주화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이 있나 보구나— 주리야는 직각적으로 느꼈다. 놀 러 왔다는 말을 듣고 박선생이 놀라는 것이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도 주화는 모임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극히 신중히 해나가는 모임인 것같이 짐작되었다. 따라서 그가 참례할 바가 못 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이만 실례할까요?」 하고 주화의 의견을 묻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있으려면 있구.」 꼭 있으라고는 권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임에는 참석시키지 말고 우선 집만 가리켜 줄 작정인 듯하였다. 「더 {{드러냄표|놀다}} 가시지, 이런 것 저런 것 보아 두셔야지.」 박선생의 권고를 그러나 주리야는 사양하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밖에 아마도 「동무」들의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났다.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오.」 하고 그를 보내는 주화에게 체면에 차마 달려들어 어리광을 피우지는 못하고 점잖게 대답하면서 좌중에 목례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아리랑'에 잠간 들렸다가 바로 집에 가 있을게요.」 {{문단 그림}} 야영 백화점에 들려 늘 하는 버릇으로 막연히 찬란한 층층을 한 바퀴 돈 후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다시 단골로 다니는 조촐한 차점 '아리랑'에 들려 진한 커피를 청하였다. 커피 인이 꼭 박혀버린 주리야는 하루에도 여러 잔은 예사로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의 건강을 해롭히지는 않았다. 커피의 향기와 쓴맛이 그의 비위에 꼭 맞았던 것이다. (발자크는 그의 일생을 커피 마시고 소설 쓰는 데 바쳤다지. 나도 그이와 같이 {{드러냄표|자바|sesame}}보다도 {{드러냄표|브라질|sesame}}보다도 {{드러냄표|모카|sesame}}가 제일 좋아.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평생 커피나 실컷 마셔 볼까) 하면서 그의 커피의 습관을 발자크의 풍류에 비기는 주리야였다. 그러나 그 습관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색한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 감정에 꼭 들어맞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크림은 넣지 말까?」 「아무렴. 시커먼 진짬으로 한 잔.」 어느결엔지 벌써 퍽 친밀한 사이가 된 차점의 여주인 한라에게 주리야는 손짓과 웃음을 던졌다. 「오늘 난 좋은 곳에 갔다 왔지.」 한라가 손수 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없는 고요한 탁자에 주리야와 마주 앉았을 때에 주리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데라니. 천당에?」 「천사들이 있는 대신 거츠런 장정들이 모이는 곳에.」 「장정들이 모여서 천국을 세우려고 애쓰는 곳에 말이지.」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끔찍한 세상을 보았소.— 피가 난 모둠 계획.......—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연히나마 짐작되는 것 같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쾌한 레코드나 한 장 걸가. 주리야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도 한 장.」 하면서 일어서려는 한라를 그러나 주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붙들어 앉히고, 「오늘밤만은 나의 기분을 깨뜨리지 말고 고요히 그대로 두어요...... 나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랫동안 잊었던 한 구절의 시가 가슴속에 솟아 오르겠지.」 「에구, 오늘밤에는 또 왜 이리 센티멘탈해졌어?」 「놀리지 말구 이것 좀 들어봐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리야는 한 구절의 시를 읊기 시작하 였다. :하아얀 횟돌의 조각이 있고 꽃향기 넘치고 햇볕이 창에 얼기설기 비치는 곳 :이글이글 타는 난로와 음식장과 유리잔 있는 곳 :거기에서 꿈을 꾸고 그대를 생각하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이지러진 한 개의 탁자가 있다. :쉬어빠진 한 잔의 술이 있다. :낡은 한 권의 성서가 있다. :끄슬러서 침침한 등불이 있다. :시들어버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유리창 밖에는 진눈깨비와 바람이 불고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에 떨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니라. 「아니 어데서 그런 시를 외웠소?」 듣고 난 한라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면서 주리야의 코를 끄들었다. 「훌륭하지.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읊은 아름다운 노래야.」 「가난한 줄 이제 알었나.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드러냄표|싸움터|sesame}}로 나가야 할 시절이니라'—고 고쳤으면 좋겠군.— 우리도 현재 이런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시가 아니라 소시민적 감정을 표현한 잠꼬대야.」 「이지러진 탁자. 쉬어빠진 술. 어두운 등불.— 시상으로 얼마나 훌륭하우. 나는 여기에서 한 편의 프로 시를 발견한 듯한데.」 「프로 시에 아스파라거스는 다 무어야. 세상에는 아스파라거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우. 진정한 프로 시 되려면 아직 구만리의 거리가 있어.」 사귄 지는 오래지만 한라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의견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마음속에 그 무엇이 있듯이 평소에 멍하고 있는 한라이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이러한 소리를 하는 오늘밤의 그가 주리야에게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럼 결국 프로 시가 아니란 말이지?」 「주리야나 나같이 날마다 커피나 먹고 지내는 한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이 싱싱한 실감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그럼 부르주아의 것이란 말요.」 어느결엔지 모둠에서 만났던 민호가 나타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주리야는 이렇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계시오.」 「프로 시 시비예요.」 「어떤 프로 시요.」 「아니 그래 이런 것이 프로 시가 아니예요?」 하고 주리야는 다시 아까의 시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까지 듣고 앉았던 민호는 신중한 목소리로, 「훌륭한 시가 듣고 싶으면 내 한 편 읊어 드리지— 이런 것이 정말 훌륭한 시란 것이요.」 :고향 사정 말한 일 없고 :자유로운 시간 가진 적 없이 :제일 싫은 책임 도맡아 보던 그 동무 :곤란이 막심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그 동무 :기계같이 일하고 :칼날같이 과단성 있고 :××의 그물 표범같이 뚫던 그 동무 :밉살스러우리만치 대담하던 그 동무 :아! 끝내 그는 붙잡히고야 말았다 :겁내는 내의 마음 늘 매질하여 준 것은 :신념에 빛나는 그의 눈이었다 :풍진 세상의 행복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 :꾸짖어 준 것은 도깨비불 같은 그 눈이었다 :나의 가슴 사소한 책무에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백곱절의 일을 하였다 :모진 폭풍우가 휩쓸어오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던 그 동무 :나의 마음 못 믿더라도 그만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 동무 잡히고야 말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누나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콘크리트 천정을 노리고 있을까 지금의 그 동무 :이틀 동안 굶은 배 한 그릇 국밥으로 채운 :그와 나였다 :우박송이 퍼붓는 어둠 뚫고 :전신을 폭 적시우며 :모둠에 달려간 그와 나였다 :「우리」에서 돌아올 때 :나는 늘 그의 꿋꿋한 손과 낭랑한 웃음이 그리웠다 :그 동무 그 동무 돌아오지 않는 그 동무 :목숨 떨어지는 날까지 잡히운 몸의 그 동무 :매맞고 박채우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그 동무 :도깨비불 같은 그이 눈이 :철망을 건너 나에게 광명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그 동무 돌아오지 않누나. :그러나 그가 주고 간 열정 그가 보낸 광명 :나의 가슴에 타고 수천 동지 가슴에 타서 :세상을 살러 버릴 횃불이 되리라 :아! 동무여 편히 쉬라 새벽은 가깝다! 「아 그 동무 그 동무.— 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하군. 아니 그것이 대체 시요, 실제 경험이요?」 마지막 구절까지 숨도 가라앉지 않고 듣고 있던 주리야는 감동에 넘치는 두 눈에 광채를 가득히 담았다. 「퍽이나 감동하신 모양이군.」 「그렇게 훌륭한 시는 오늘밤 처음 들엇어요.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아! 돌아오지 않누나. 그 동무!」 감동된 두어 줄을 외우다가 주리야는 문득 한라를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같이 둥근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고여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술에는 웃음을 띄우고 눈으로는 울고 있다. 「한라, 왜 우우?」 「지금 그 시가 너무도 훌륭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는 병증이 있다우.」 그렇게는 말하여도 주리야는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느꼈다. 아까의 그의 시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지금의 눈물이라든지 그 무슨 그 시와 관련되는 것이 그의 생활의 한구석에 있으려니 짐작되었다. 하기는 주리야 자신도 그 시에서 받은 감동은 심히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무지를 개발하여 주는 횃불이요, 소시민적 생활 위에 떨어진 위대한 폭탄덩이였다. 그 위에 한라의 눈물은 더한층 그를 매질하여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고요하던 좌석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기가 아까워서 그는 한라의 손을 잡으면서, 「울지 말우 한라— 내 레코드 한 장 걸게.」 하고 일어나 가서 그가 좋아하는 {{드러냄표|렌·피리스|sesame}}의 하와이안 비 타를 걸었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양말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아리고 내 양말 대님.」 하고 땅 위를 더듬어보는 동안에,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민호가 그의 발밑에서 그것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리야는 민호의 눈앞을 꺼리지도 않고 무릎 위까지 치마를 걷고 양말을 걷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민호가 그에게 준 한 마디가 웬일인지 이상스럽게도 가슴속에 들어 배는 듯하였다.—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문단 그림}} 집에 돌아오니 주화는 어느덧 아랫목 이불 속에 드러누워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웃목에 친 검은 막 속에서 옷을 벗고 나오는 오늘밤의 주리야의 자태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찬란한 나체에 포도 잎새 한 닢 붙이지 않고 칵 속에서 뛰어나와 주화의 앞에 나타나던 그가 오늘은 포도 잎새 아닌 한 권의 책으로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주화의 앞에 웬일인지 별안간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포도 잎새 대신으로 쓴 그 책은 자본론의 한 권이었다. 이불 속에 뛰어들어가기가 바쁘게 주화의 귀 밑에, 「아리랑의 한라가 '그 동무'란 시의 낭독을 듣고 우니 웬 일예요.」 「그 시 그대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울 때도 있겠지.」 「아니 한라의 친구가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그 동무'의 처지에 있으니까 말요.」 작자 부언(附言)— 作中 두 편의 詩는 某氏의 것을 빌려다가 의역한 것임을 말하여 둔다. == 마음의 안테나 == (대체 웬 녀석야.) 알지 못할 사나이의 시선을 등 뒤에 받으면서 정동 골목으로 들어갈 때에 주리야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향을 갈아 길을 돌릴까도 생각하였으나 맡은 일의 관계상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대로 정동 골목을 들어갔다. (불량소년일까, 그렇지 않으면 탐정일까......) 알지 못할 작자였다. 종로 근처에서부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 M 백화점의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단정한 양복 맵시로 보더라도 탐정의 유가 아니면 흔히 있는 불량소년의 따위였다. 그러나 탐정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 정체 모를 사나이의 추격은 더한층 불안한 느낌 을 주었다. (이녀석, 어데 따라 보아라.)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 가다가 조그만 과자가게 앞에 왔을 때에 뒤를 돌아보고 사나이의 눈을 교묘하게 감춰 과자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츄잉 껌을 사서 쭐기쭐기 씹으면서 밖을 내다보노라니 헛물 켠 사나이는 길 옆을 기웃기웃 살피면서 과자점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흉칙한 녀석.) 주리야는 코웃음을 치면서 가게 주인을 보고, 「저따위 녀석이 뒤를 쫓겠나요.」 주인의 웃음을 들으면서 다시 가게를 나온 그는 사나이의 간 곳을 살핀 후 뒷골목으로 살짝 돌아섰다. 영사관 지대를 지나 넓은 고개 위에 나섰을 때에도 사나이의 그림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주리야는 통쾌한 웃음을 남기면서— 그러나 역시 치밀한 주의의 눈을 던지면서 급한 걸음으로 민호의 숙소인 아파아트로 향하여 내려갔다. 고개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목조 이층집— 문간에는 여러 가지 단체의 간판까지 걸린 그 한 채를 아파아트라고 부르기는 부적당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방방을 개인 혹은 단체에게 빌려주는 그 집을 아파아트라고 부르기에 주리야는 아무런 부자연한 느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층의 방 한 간을 민호가 빌려 가지고 있었다. 급히 문간을 들어간 주리야는 그것이 첫걸음이었지만 이층에 뛰어 올라가 손쉽게 민호의 방을 찾았다. 걸리지 않은 문을 노크하니 반갑게 안으로부터 열렸다. 불쑥 내밀었던 남희의 고개가 별안간 움츠러들었다. 순간 예상치 아니한 여주인공의 출현에 주리야의 눈썹이 볼 동안에 찌푸러졌으나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없고 남희 혼자였다. 남희가 무료하여서 읽던 책이 침대 위에 편 채로 놓여 있었다. 무심히 뒹굴고 있던 남희는 성에 맞지 않는 이 돌연한 침입자로 인하여 마치 엄한 선생의 앞에 나선 듯이 마음이 거북하고 몸이 굳어졌다. 「민호씨를 만나러 왔더니 안 계신가 부군.」 「입때껏 기다려도 안 들어 오셔요.」 「웬일인가 시간이 넘었는데.」 하면서 주리야가 책상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남희는 별안간 그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 위에 놓인 한 자의 종이를 집어서 날쌔게 꾸겨 버렸다.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우렷이 빛났다. 필연코 민호에게 대한 공상의 낙서를 그 위에 장난 쳤으려니 생각하고 주리야는 쓴웃음을 남희의 얼굴 위에 정면으로 던졌다. 그 웃음의 그늘 속에는 그러나 독사의 그것과 같은 매운 눈초리가 숨겨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앞을 가로채고 나타나는 남희가 주리야에게는 귀찮고 어줍지 않은 존재였고, 그 남희에게 주리야는 독을 품은 수리같이 생각되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겁을, 한 사람은 불같은 질투를 만나는 때마다 동시에 느꼈다. 주리야의 냉정한 이성이 그의 이 부탕한 질투를 꾸짖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더 많이 그의 여자다운 본능이 과분의 열정을 북돋아 마지 않았다. 「이만 가볼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 남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주리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파아트를 나갔다. 남희가 가버리고 혼자 주인 없는 방에 남아있으려니 주리야는 도리어 스스러운 생각이 났다. 남의 권리를 뺏고 그 뒷자리에 들어선 그의 염치가 너무도 뻔질뻔질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가 씹는 껌의 향기와 같이 사라져 버리고 민호에게 대한 생각만이 찐덕찐덕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가 생각하여도 부당한 경쟁의 의식과 알지 못할 승부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신 괴이하게 여겼다. 창 밖에는 여학교가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서 공과 같이 뛰노는 처녀들의 아무 계교 없는 순진한 자태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매질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스럽게 시침을 떼고 주인 없는 방의 여왕이 되었다. 민호 안 오는 시간의 무료를 못 이겨 그는 알콜 풍로에 불을 달이고 물을 끓였다. 여러 해 동안 살아오는 그 자신의 아파아트와도 같이 가장 손쉽게 장 속에서 크림과 사탕을 집어내서 커피를 만들었다. 뜨거운 차를 불고 있는 동안에 민호가 왔다. 「잠깐 동안 이 방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자리를 사양하면서, 「—남희까지 쫓아버리고요.」 하고 이 한 마디가 민호에게 주는 효과를 살피려고 그의 얼굴을 진득이 노렸다. 「장하군요.」 슬픈 표정 대신에 민호는 미소로 이 어여쁜 「영웅」을 칭찬하였다. 물론 그 미소와 칭찬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없었으나 주리야는 적어도 이 「사나이」—생각과 처지와 양심과 순정을 빼내 버린 나머지의 이 사나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그의 헛된 자만심만은 아닌 듯하였다. 「주화가 단체 일로 시골 간 것 아시겠지?」 「동무에게서 들었지요.」 「주화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하고 주리야는 핸드빽 속에서 한 장의 두터운 봉투를 집어냈다. 「—이것을 즉시 전해 달라구요.」 「하하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던가.」 민호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봉투를 책상 속 깊이 간수하였다. 주리야 자신 실상은 봉투의 내용을 몰랐으나—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갈의 임무를 마치니 곧 안심될 뿐이었다. 「그리고—」 장난의 눈초리로 민호를 바라보며, 「즉시 뜯어보고 곧 시작해 달라구요.」 「영어면 곧 되겠지만 독일어면 좀 거북한데.」 늘 있는 구라파 한가운데에서 직수입하여 오는 직접 일에 관계있는 원문 팜플렛의 번역의 일인 것을 주리야는 여기에서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여 더 자세한 내용의 비밀을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야지.」 껌을 새로 집어내서 입에 넣고 곱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파아트를 나와 고개를 걸어 내려가던 주리야는 고요한 행길에 인기척 소리를 듣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알지 못할 사나이가 그의 뒤를 또 쫓는 것이었다. 별안간 소름이 끼쳤다. (웬 벌레 같은 놈팽이야.) 그 추근추근한 사나이의 행동에 화가 버럭 나서 주리야는 문득 한 꾀를 내어 걸음을 멈추고 길 옆에 무뚝 서 버렸다.— (놈 좀 앞서 봐라.) 사나이는 터벅터벅 가까이 오더니 그의 옆에 머물렀다. 씹던 껌을 그의 낯짝에 탁 뱉을까 생각하며 휙 돌아섰을 때 사나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공손히 목례를 하였다. 「실례지만 김영애씨지요?」 「웬 걱정이요?」 「이를 말이 있어서요—」 사나이는 모자를 쑥 올려 뒷덜미에 붙이고 두 손을 양복 바지 주머니 속에 푹 꼽더니, 「—공연히 서울 바닥을 일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소?」 별안간의 충고에 마음이 짜릿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례한 그의 낯짝에 숫제 껌을 뱉어 버릴까 하다가 참고, 「아니, 댁이 무엇인데 그렇게 주제넘소?」 물론 그가 경박한 불량소년이 아님은 그의 충고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은......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나 당신의 처지가 딱해서 하는 말이요.」 「나의 자유 의지의 행동인데 무엇이 딱하단 말요.」 「시골서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소.」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남의 사정을 여기까지 알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괴상하여 주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다.」 하고 사나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정색하더니, 「어떻든 잘 생각하여서 앞길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이번에는 혼자 앞장을 서서 더끔더끔 걸어 내려갔다. 주리야는 의아하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껌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이상스런 사나이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의 말이 유난히도 뼛속에 사무쳐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슴속에 자아내게 하였다. 움직이는 불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주리야는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외로운 처소에 돌아가서 혼자의 저녁을 짓기도 스산할 것 같아서 양식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거리에 등불이 들어온 후에 야 어슬어슬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아래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필연코 주화의 동무들이 찾아 와 있으려니 생각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주리야는 그들이 도무지 뜻하지 못하였던 의외의 인물임에 깜짝 놀랐다. 될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의 앞을 피하여 되돌아서서 도망이라도 하고 싶은 정경이었다. 「어디를 가서 종일 쏘다닌단 말이냐?」 침착한 목소리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주리야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주리야는 마음을 다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오빠.」 고개를 수그린 누이동생의 자태에 '오빠'는 목소리를 부드럽혔다. 「서울 온 지는 벌써 여러 날 되었으나 집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이냐.」 「아니 그래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 수 있니? 사립 탐정에게 부탁하여 사흘 만에 겨우 찾아냈다.」 「탐정에게요?」 이렇게 반문한 주리야는 아까의 이상스러운 거리의 사나이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 추근추근하게 그의 뒤를 쫓던 것도 결국 고마운 충고를 주려는 생각보다도 그의 거동을 살피려는 직업적 심사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안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이야?」 「저도 충분히 생각한 후에 취한 행동인데 걱정하실 필요가 어디 있어요?」 「한 분밖에 안 계시는 어머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시는 줄 아니. 불효막심한 자식.」 「어차피 불효막심은 생각한 끝에 일인데요. 어머님께 반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유만은 배반할 수 없어요.」 「주제넘은 소리 그만두어.」 오빠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에 서울 와서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돈 한 푼 없는 놈팽이와 붙어서 무엇을 했어?」 이 말은 듣고 주리야는 그의 기개 높은 자존심으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 마세요. 돈 한 푼 없는 놈팽이라니요? 어떻게 하시는 말씀예요? 돈은 없다 할지라도 돈 많은 도야지와는 뜻이 다르답니다.」 옆에 앉은 사나이—주리야가 배반하고 온 시골의 약혼자—가 입맛이 쓴지 오빠와 주리야를 등분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라.」 오빠의 이 한 마디에 주리야는 그러나 구태여 반항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도리어 괴로울 듯하여서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 허수아비같이 앉았던 약혼자는 기회를 잡은 듯이 오빠를, 다음에 주리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을 하여 주시오. 지금이라도 나에게는 결코 늦지 않으니 충분히 생각해서 잘 조처하시오.」 주리야는 기가 막혀 속으로 픽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라고 말한 법도 없다. 추근추근한 사나이.) 이렇게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말없이 침울하고 슬픈 태도를 지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내일은 단연코 내려가자— 나이는 차 가는데 언제까지든지 그 주제로 언제 사람 되겠니.」 비교적 온순한 오빠의 태도에 호감을 가진 주리야는 오빠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공손히 듣는 체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집안에 대한 체면도 체면이지만 이제는 박군을 대할 면목이 없다.」 오빠는 사과하는 듯이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주리야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두 청년은 그들의 권유가 효과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기뻐하였으나 주리야는 속마음으로는 웃고 있었다. 눈물— 그것은 반드시 슬픔의 표현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주리야에게 그 눈물이 일종의 기교(技巧)요, 일종의 수단이었다. 눈물과는 딴판으로 마음 속으로는 물론 다른 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같이 새우다가는 불가불 붙들리고야 말 것이다. 밤이 새기 전에 이 두 마리의 이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하겠다.) 그날 밤 늦은 후 일찍 잠든 두 사람의 옆을 빠져 주리야는 일 보러 가는 체하고 방을 나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여행에 넉넉하리만큼 가방 속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몰래 집을 나왔다. 들고 나온 「벙어리」를 돌에 부딪쳐 깨뜨리고 흐트러진 돈을 가방 속에 걷어 넣었다. (월미도에 가서 며칠 동안 바다를 보며 은신하여 있을 여비는 되겠지.) 주체스런 가방을 들고 뒷골목을 걸음 빨리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행을 승낙할까.) 혼자 가기가 수상하게 보일까 봐 민호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이것이 민호를 차지할 안성맞춤의 좋은 기회라고 은근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가면 끌고 가지.) 아름다운 악마의 결심을 하고 주리야는 고요한 밤거리를 걸어 정동 아파아트로 향하였다. {{문단 그림}} 벌써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운 민호를 잡아 일으키고 주리야는 황급한 어조로 그의 신변의 위험을 고하였다. 물론 그것이 일종의 그의 기교였으나 그의 어조가 너무도 황급하고 태도가 서먹서먹한 까닭에 민호도 황급하게 뛰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치 불이 났다!는 고함을 듣고 순간 뛰어 나가듯이 민호는 잠시 동안 아무 지각없이 들뜬 마음으로 날뛰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바람에 전후의 판단과 냉정한 분별이 없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집어 얹고 주리야의 손에 끌리다시피 하여 허둥지둥 거리로 나갔다. 막차는 이미 끊어진 뒤었다. 주리야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세 내 가지고 민호와 같이 탔다. 넓은 밤 가도를 자동차는 전속력으로 달았다. 길 양편의 나뭇잎이 선명한 초록빛으로 자동차의 등불 속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신선한 밤 드라이브— 그 속에서 차차 정신이 든 민호는 이 밤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몽유병자가 아닌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몽롱한 의식에서 차차 현실로 돌아갔다. (나의 행동은 바른 것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비판할 여가가 없었다. 요동하는 차 안에 있을 때에 사람은 이유 없이 취하는 법이다. 그 가벼운 도취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주리야의 육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다시 꿈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데를 왔나.) 단걸음에 섬 속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호는 부지식간의 그의 행동이 엄청나게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았어요. 범의 굴에서 피해 나온 듯해요.」 주리야는 마음속으로 안도한 듯이 여관집 문앞까지 갖다 댄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저하는 민호의 손을 끌었다. 「동행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나는 뒤로 가지요.」 동지인 주화의 생각이 퍼뜩 머리 속을 스치자 정신을 깬 양심의 조각이 민호의 가슴을 죄었다. 「동무의 위험을 보면서도 그의 옆을 피하다니 그런 비겁한 사람이 어디 있소?」 주리야는 비웃는 듯이 우뚝 서서, 「미래의 투사 될 사람이 그만한 용기도 없이 어떻게 하우.」 「옆을 피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주리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 「나 혼자보다도 당신이 옆에 같이 있는 것이 다른 눈에도 수상치 아니하고 더욱 안전하단 말예요. 당신은 며칠 동안 나의 허수아비가 되고 장식품이 되면 그만예요.」 얇은 양심은 부드럽게 거세를 당하고 민호는 끌려 들어갔다. 여관의 바다의 첫 시절이라 만원이었다. 이층의 방 한 간이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로 안내해 주시오.」 주리야는 하녀에게 분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거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대담한 까닭에 민호는 도리어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그와 싸워 보자고 민호는 결심하였다. 양심과 애욕과 어느 것이 이길까 승패를 가려 보리라고 작정하고 닥쳐오는 현실 그대로를 순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밤이다. 창르 열고 민호는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에 잠들고 있는 항구에는 등불이 둥실둥실 떠 있고 섬 밑에서부터는 어두운 바다가 폭넓게 쭉 깔려 있다. 시원한 바람이 우거진 나뭇잎을 흔들면서 흘러와서는 가슴속을 헤치고 들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민호의 등 뒤에 주리야가 너무도 가까이 와 섰기 때문에 목덜미가 간지러우리만큼 주리야의 따뜻한 입김이 가깝게 흘러 왔다. 「밤바다는 어두운 데서 보아야 더 좋답니다.」 「어두우면 바다가 보이나요.」 「우렷이 보이는 곳에 운치가 있지요— 내 불을 끄고 올게 보세요.」 「불은 그대로 두시지.」 민호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주리야는 뒤로 가서 방 복판의 전기불을 껐다. 민호 옆에 와서 창을 마주 열고, 「어슴푸레한 것이 더한층 아름답지요. 밝은 곳에서 추한 것도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아름답게 보여요. 바다도 사람의 죄악도—」 하면서 가슴을 헤치고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아, 저 등대!」 {{sic|두|등}}대를 발견하고 그는 어린아이같이 팔을 뻗쳐 반짝거리는 먼 곳의 등대를 가리켰다. 깜박거리는 등대 밑에는 신비로운 바다가 짙은 빛으로 질펀하게 퍼져 있고 같은 바다 위에 하늘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초승달이 얕게 비꼈다. 「귀찮은 현실에 부대끼는 우리에게는 가끔 이와 같은 로맨티시즘도 필요하겠지요.」 「로맨티시즘이라니요?— 나에게는 이 밤이 괴롭소이다. 주리야와 나와의 관계는 결코 로맨티시즘 속에 떠 놀 관계가 못되니까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가상도 못 해요?」 별안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리야는 죄진 것 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휙 돌아섰다. 그 바람에 민호의 양복 호크에 공교롭게 걸렸던 원피스의 치마 허리가 쭉 찢어졌다. 「아이구 어쩌나.」 찢어진 허리를 만지면서 주리야는 새삼스럽게 민호를 쳐다 보았다. 마치 민호의 탓인 듯이 그를 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문간에 선 하녀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주춤하면서 문을 빼꼼이 닫았다. 「쉬시기 전에 목욕들 안 하세요?」 민호는 급스럽게 불을 켜고 수건을 얻어가지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주리야가 가족탕에 들어간 동안에 민호는 혼자 넓은 남탕에 들어가서 더운 조수 속에 몸을 담갔다. 전신의 피가 녹고 풀리는 동안에 주리야에게 대한 생각과 여러 가지 의심이 뒤를 이어 솟았다. (주리야의 마음속은 대체 어떠한 것인고.) 그의 눈을 현혹케 하고 괴롭히는 것은 나이 어리고 천진한 그의 무작위한 심사에서 나온 것일까. 찬란한 그의 천성에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 있는 말이요, 속 있는 거동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를 유혹하자는 처음부터의 계획적 성심으로인가. 그러나 그의 주화에게 대한 사랑은 두텁고 깊고 한 푼의 틈도 없는 것임을 민호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의 지듭을 떠보자는 수작인가. 동지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는 가짜의 마음으로인가. 그렇다면 거동이 너무도 공들다. 아무리 신변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하필 즐겨하지 않는 그를 이 밤중에 끌어낸다는 것은 너무도 공든 행동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일시의 장난일까. 심심풀이의 장난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다시 첫 끝에 돌아가 주리야의 본심을 되생각하고 거듭 짐작하였다. 그동안에 주리야도 독탕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이다. 그는 갈래갈래의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는 주화를 사랑하였다. 사상적 동감보다도 시각적(視覺的) 애정으로 첫눈에 고른 그를 주리야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랑은 차차 깊고 진하고 믿음직한 것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주화의 동무인 민호를 싫어하지 않았다. 시각적(視覺的) 호감을 느꼈다. 사람의 육체에 눈이 있고 심장이 있는 이상 이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감각의 안테나인 두 눈에 모양이 비칠 때 그것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사람 된 마음의 자유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함에 그는 하등의 양심의 꾸지람을 받지 않았다. 감정의 명령을 잘 좇는 것이 도리어 양심에 충실한 소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불을 지른 것은 민호의 애인 남희였다. 그는 남희를 만나는 첫 순간부터 이유 모를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마는 그 질투가 도와서 오늘 밤의 행동을 인도한 것이었다. 오늘 밤의 행동— 그것은 그의 신변의 위험을 피하는 한 수단인 동시에 남희에게 대한 일종의 자랑이요, 시위 운동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 밤의 행동을 어느 끝까지 전개시키겠다는 최후적 성산과 야심은 없었다. 그는 아직 민호에게 최후의 것까지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주화에게 대하여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에게 대하여 느끼는 시각적 호감—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박넝쿨같이 갈래갈래로 뻗어 나가는 여자의 마음— 어느 갈래가 진짬이요 어느 갈래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모두 똑같이 진정의 갈래— 그 방향 많은 갈래갈래의 마음에 주리야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방 가운데에는 두 채의 이불이 나란히 펴 있었다. 물론 부부려니 짐작하고 하녀가 펴 놓은 것이다. (흠. 마치 두 부부의 잠자리 같군.) 뒤미처 들어온 민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한편 이불께로 갔다. 「—밤이 퍽도 늦은가 부다.」 「곧 자야지요.」 주리야는 나머지 한편의 이불 위로 가서, 「나는 밝으면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불을 끄지요.」 민호의 손이 뻗어 전기불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잠자리 옷을 갈아입고 각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주리야는 무심한 자태를 지니고 민호는 하룻밤 동안 괴롭게 싸워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 그 뒤에 오는 것 ==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이불 속에서 황망히 속옷을 껴입은 주리야는 이불을 걷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엉겹결에 그의 두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 송이의 꽃이 하룻밤 서리에 시들어버리듯이 팽팽하던 그의 얼굴이 하룻밤 동안 이지러지지나 않았을까를 본능적으로 염려하는 듯이. 다음에 그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 오리 한 오리 어루만졌다. 만지는 동안에 그도 모르게 그의 손에 힘이 맺혔다. 손가락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 오리 두 오리 뚝뚝 뜯겼다. 나중에는 여러 오리씩 줌으로 뜯겼다. 머리를 뜯으면서 그의 시선은 이불 사이로 하아얗게 드러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보지 않을 것을 본 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스럽게 솟아올라 그는 이불로 다리를 푹 덮어 버렸다. 머리 속이 아찔하여지며 별안간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눈이 팽팽 돌았다. 마치 처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려서 깨뜨린 첫 순간과도 같이. 무의식간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잠깐 동안에 이불 위에 가락가락 흐트러졌다. 콧등이 띵하여지며 눈물이 빠지지 솟았다.— 목소리를 내서 막 울고 싶은 심중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슴 밑으로 둥긋이 드러난 젖통을 만지다가 황망히 옷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소 잃은 후에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찬란한 아침 해가 창으로 불쑥 솟아 들어왔다. 햇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주리야는 얼굴을 숙여 버렸다. 너무도 밝은 빛을 꺼리고 사양하는 듯이. 「벌써 깨셨소?」 등 뒤에서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가 아제는 마치 그의 몸을 찌르는 황충이와 같아서 주리야는 그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였다. 「아니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오?」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건강한 체중이 그의 등 뒤에 바싹 기어 옴을 주리야는 느꼈다. 「골이 아프시오, 배가 아프시오?— 별안간 웬 일이시오?」 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으며 울음에 떨리는 주리야의 두 어깨가 육중한 힘 안에 폭 싸였다. 주리야는 순간 달팽이같이 움츠러들면 번개같이 몸을 흔들어 빼쳤다. 몸서리를 치면서— 민호의 육체가 지금에는 징그러운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몸을 빼치는 것과 동시에 좌향을 휙 돌리면서 바른손이 민호의 볼 위에 날쌔게 날랐다. 「악마!」 또 한 번 손이 날았다. 「아니 무슨 짓이요?」 「저리 가요.」 「주리야.」 「동물!」 「미쳤소?」 「당신은 동지가 아니고 동물이요.」 「아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요?」 「시침을 떼는 구료.」 「곡절을 모르겠으니.」 「간밤에 나를......」 주리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그것이 그다지......」 「그것이 그다지라니.」 「그다지 노엽소?」 「어떻게 하는 말요?」 「대체 나 한 사람만의 의사였단 말요?」 「잠든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있단 말요?」 「그러면 그때까지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 「아니 누가 유혹을 했단 말요?— 코 큰 소리 그만하오.」 「적어도 암시는 주지 않았소.」 「하루 동안 허수아비 노릇하랬지 누가 사람 노릇— 아니 애인 노릇을 하랬소.」 「그건 이유 닿지 않는, 모욕에 지나지 못하는 말요.」 「버젓한 애인 노릇을 한 당신이 너무도 주제넘었소.」 「그렇게 말하면 당초에 아파아트에서 잠든 사람을 몰아낸 것은 무슨 까닭이었소?」 「당신은 그것을 이 결말을 가져오기 위하여서 한 꾀인 줄 아는구려.」 「적어도 결과는 그렇게 되잖았소. 당신이 원인을 지어 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모욕이요. 바로 그 때에 치든지 욕을 주든지 하지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요?」 「아니 변명이 무슨 변명이요?」 주리야는 기가 막히는 듯이 눈물 어린 얼굴로 민호를 노렸다. 「나는 다만 떨어진 물건을 집었을 뿐요— 땅에 떨어진 양말대님을 줍듯이.」 양말대님— 주리야는 문득 언제인가 차점 「아리랑」에서 그가 떨어뜨린 양말대님을 민호가 집어주던 장면을 그리고 그가 별것 다 떨어뜨리시는군 하고 웃던 것을 생각하였다. 사나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임을 알고 그의 큰 실책을 깨달았다. 양말대님이라면 사실 그가 양말대님을 떨어뜨린 것과 정조를 떨어뜨린 것과는 같은 정도의 부지식간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여운 가운데에도 얼굴이 붉어져서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정말 별것을 다 떨어뜨렸구나!) 이러한 속 생각뿐이다. 「손 닿는 곳에 있는 향기 높은 한 송이의 능금— 동지고 원수고 간에 발 병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따지 않을 사나이는 세상에 없을 거요. 결국 육체적 거리의 죄였소. 육체적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던 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 「뻔질뻔질하게— 설교를 하는 셈인가.」 주리야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섰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 보기 싫으니.」 민호를 보지 않고 눈은 딴전을 향한 채 손은 문을 가리켰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은 아니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잘 알아주어야 하오— 결코 주리야의 의지를 짓밟은 나 혼자의 의사로의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이 점에 있는 것이요.」 주리야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무츰무츰하고 서 있다가,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요.」 하고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듯이 방을 뛰어나갔다. {{문단 그림}} 아래층 문간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오는 여하인의 아침 인사를 받은 체 만 체하고 문을 뛰어나간 주리야는 허둥지둥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얼굴이 불을 끼얹은 듯이 화끈화끈 달았다. 굴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거리는 발이 대중없이 빨리 언덕을 휘둘러 내려갔다. 해가 활짝 솟아 가까운 바다를 일직선으로 찬란히 빛내었다. 움푹 줄어 들어간 바다는 파도 한 조각 없이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신선하고 공기가 차다. 불역에까지 내려간 주리야는 모래 위에 푹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무의식간에 지난 밤 기억이 다시 소생되어 마음을 찧고 얼굴을 달게 하였다. 더구나 아까의 민호의 마지막 마디가 가슴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운 몸을 바닷물에 잠그고도 싶은 생각이 났다. (주화를 무슨 낯으로 대하누.) 생각할수록 엄청났다. 처녀가 물동이를 깨뜨린 느낌을 지나 이제는 하늘을 뒤엎은 듯한 땅을 깨뜨려 놓은 듯도 한 느낌이었다. 주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나 현재 그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금단의 길이다. 그 금단의 과일을 딴 것은 과시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허락하지 못할 장난이요 죄악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조관이라도 이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주리야는 그가 저지를 죄를, 잘못된 몸을 어떻게 처치하였으면 좋을지 나중에는 몸부림이 날 뿐이었다. (진작 그때에 왜 반항하지 못하였던가.) 이 생각이 더한층 그의 마음을 에우고 수치의 불을 끼얹었다. 붙잡을 수 없는 애욕의 힘을 이제는 오히려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 결과가 올 것을 처음에 전연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결과가 있은 후의 이 후회, 환멸, 슬픔— 이것이야말로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예측 못 한 것이었다. 불어나는 고무풍선을 그것이 터질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힘껏 불어 기어코 터뜨리고 그 후에 새삼스럽게 뉘우치는— 그 심사였다. 사랑— 미움— 후회. 이 갈래갈래의 마음의 줄기와 모순된 심정— 주리야는 이제 이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수건을 바닷물에 축여 얼굴을 식히면서 그는 모래펄을 거닐다가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 위에서 다시 행길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어수선한 감정은 차츰 정리되고 통일되어 이제는 다시 마지막의 한 점인 주화에게로 향하였다. 한 점으로 집중되니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다. (주화를 어떻게 대하누—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옳겠지— 그러면 대체 주화는 무엇이라고 할까— 나를 어떻게 조처할까......) 주화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항상 극히 순진하고 깨끗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화의 앞에 속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주화에게 바친 그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다. 그의 양심—그것은 곧 주화에게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은 이제 그를 괴롬의 바퀴 속에 넣고 끝장이 되었다. 「아씨, 아씨, 어데까지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신발 소리 역시 여관집 하녀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바람 쏘이러 나왔소.」 수상한 것을 느낀 듯한 하녀의 태도를 살피고 주리야는 시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그러서요.— 이렇게 일찍이.」 하녀는 황망하던 그의 양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미소를 띄우면서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제가 이 근처를 안내하여 드릴까요?」 「그만 거닐고 들어가겠소.」 섣불리 하다가 도리어 마음속을 들여다 보일까 두려워하여 주리야는 발을 돌렸다. 하녀와 나란히 서서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민호가 가버렸을까, 아직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층에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민호는 아직 있었다. 화로전을 끼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주리야가 들어가도 즉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보면 또다시 기억이 소생되는 까닭에 주리야는 딴전을 보면서 한구석에 가서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주리야.」 민호는 고개를 들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과실이라는 것도 있지 않우. 이렇게 불쾌한 결말을 맺은 채 섭섭하게 헤어질 거야 있소?」 「............」 「주리야의 생각대로 나의 과실로 돌려보내더라도 앞으로나 뜸 없이 지냅시다. 너무 태도를 선명히 해서 도리어 남의 눈에라도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우.」 「모든 것을 숨기잔 말이지요?」 「어젯밤에 주리야가 말한 것같이 우리에게는 로맨티시즘도 필요하다니 한 폭의 로맨틱한 기억으로 싸 두면 그만 아니요.」 「나는 먼저 가요.」 짐을 다 싸고 손쉽게 단장한 주리야는 민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슈우트 케이스를 들고 문을 나갔다. 「주리야, 주리야.」 들은 체 만 체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의아해 하는 하녀에게 두어 마디 귓속말로 이르고 이른 아침의 여관을 나갔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탈 생각이었다. 오빠들의 그 뒷소식을 모르는 까닭에 집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우선 당분간 「아리랑」의 한라에게 몸을 둘 작정으로. {{문단 그림}} 「아침부터 행장을 하고 오늘은 또 웬일이야.」 주리야가 인천서 오는 아침 차를 내린 길로 바로 아직 가게도 열지 않은 「아리랑」의 문을 두드렸을 때 눈을 비비며 나온 한라가 의아하여 문을 열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어데를 가는 셈야?」 「여기까지 왔지.」 「여기에 오는데 가방까지 들어야 하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주리야는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풀썩 주저앉으며, 「—시골서 오빠들이 올라온 까닭에 집을 쫓겨 다니는 셈야.」 「진작 이리로 오지 왜— 잡히면 경이겠지.」 「처음부터 오기도 미안해서—」 어름어름 그 자리를 미봉하는 주리야를 한라는 손을 끌어 뒷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걱정 말고 방으로 들어와요.」 두터운 벽을 끼고 가게 뒷편에 붙은 넓직한 한 간의 방— 한라의 살림방이요 침실인 그 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루를 앞두고 의롱 그릇과 잠자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만 숨어 있으면 거리가 뒤집혀도 몰라요.」 주섬주섬 잠자리를 걷고 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당분간 있어 볼까?」 주리야는 천연스러운 자태를 지었다. 그러나 한라가 아침 준비로 밖에 나가 덜거덕덜거덕 하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에는 일단락의 침착이 오고 그 맑은 침착 속으로 모든 비밀과 고민이 새로 살아나왔다. 뒷골목으로 열린 창으로는 늦은 햇발이 흘러 들어와 창 기슭에 놓인 화분의 「제라늄」을 짙은 분홍으로 물들였다. 그 맑고 신선한 분홍이 주리야의 흐린 마음에는 지나쳐 무거운 짐이었다. 같은 붉은 빛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나 「제라늄」의 신선한 분홍은 주리야의 붉은 마음에는 도리어 눈부신 것이었다. 마치 맑은 태양의 빛이 어두운 눈에는 지나쳐 눈부신 것과도 같이. 그 눈부신 「제라늄」과 동무하여 가는 한라의 순진한 열정— 한 사람에게 줄기차게 바치고 있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그것이 불현듯이 부럽게 생각되었다. 그 한라의 열정과 나의 마음과는 마치 달라진 흙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리야가 생각할 때 한라의 그 단순한 살림이 주리야의 더럽힌 몸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제라늄」의 감격에서 눈을 돌린 주리야에게 문득 책시렁에 끼인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주리야는 새삼스런 감동에 끌려 이미 졸업하여 버린 그 한 권의 책— 코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시렁에서 뽑아냈다— 의지할 곳을 찾는 그의 고독한 마음에 그것은 마치 기다만한 기둥같이도 생각되어서. 두터운 책을 군데군데 펴서 무의미하게 구절구절을 읽어 가며 그의 마음의 동감 되는 대문을 억지로 찾으려고 애썼으나 그의 현재의 처지를 변호하여 줄 만한 대문이 쉽사리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펄펄 넘어가는 책장 틈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나왔다. 푸른 검사의 도장이 찍힌 현저동에서 온 편지— 무심히 뒤를 번기니 연필로 박아 쓴 두어 줄의 글이 또렷이 눈에 띄었다. —「한라! 외로운 세상에 있으니 그 무슨 든든한 믿을 것을 찾는 마음 뿐이오. 쇠같이 굳은 한라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마음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오. 주의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든든히 믿는 마음— 이것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는 것임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소......」 결코 감상적이 아닌 이 외로운 마음의 고백이 주리야의 가슴을 에웠다. 영오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한라의 굳은 심지가 주리야의 마음을 울렸다. 유리그릇과도 같이 깨지기 쉬운 그의 마음이야 드디어 한 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임을 주리야는 느꼈다. 신발 소리를 듣고 주리야는 엽서를 책 틈에 날쌔게 감추어 버렸다. 한라가 쟁반에 조반을 날라온 것이었다. 「대단히 설핀 것이지만 이것이 조반이야.」 그다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한라는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진한 커피, 덩어리 채로의 빵, 통째로의 버터— 뜨거운 커피의 피어오르는 김이 향기로왔다. 「그러나 이것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사치해— 이 한 잔의 커피의 향기가 목에 걸리는 때가 많은걸.」 회포를 말하면서 차를 권하다가 한라는 문득 주리야의 손 밑에 펴져 있는 책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붉은 사랑>은—」 하고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보고 싶어서.」 「한라는 코론타이즘을 어떻게 생각허우.」 「코론타이즘— 성생활에 관한 자도요 이단이지 결코 새로운 성도덕의 수립이 아니야—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가령 왓시라사의 행동은—」 「음탕한 계집의 난잡한 행동에 지나지 못하지.」 「굳건한 투사적 공로는 어떻게 허구.」 「투사적 공로는 공로요 사랑은 사랑이지, 그와 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거야. 주의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은 감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랑의 감각을 주의의 양심으로 카무프라즈하려고 한 곳에 왓시릿사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즉 문란한 애욕을 감추려고 주의를 내세웠단 말이지?」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애욕을 난용한 것은 어떨까 생각해. 애욕 생활이 어지러운 이상 그것은 동물적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어젓한 주의의 간판으로 둘러 가리우는 것은 약고 간사한 짓야— 왓시릿사는 결국 굳건한 투사였는지 모르나 반면에 음탕한 둥물이지 무어야.」 「사람이 아니요, 동물!」 한라의 마치 재판관의 그것과도 같은 엄격한 자세에 주리야는 그도 그렇게 이렇게 돌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왓시릿사가 동물이면 나는 무엇인고.) 이 명제가 가슴 속에 뱅 돌면서 주리야는 한라의 앞에서 의젓이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듯하였다. (—왓시릿사에게는 굳건한 투사적 일면이나 있지. 나는 다만 달뜬 불량소녀 밖에는— 단순한 동물밖에는 못 되는 셈이다.) 한라가 가게에 나가 손님을 맞으며 덜거덕덜거덕 일보고 있는 하룻동안 주리야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마음을 죄이면서 솟아올랐다. 한낮이 지나 손님이 잠간 비었을 때 한라가 과일 접시와 먹을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왔다. 한라가 쟁반을 책상 위에 놓기가 바쁘게 밖에서 별안간 귀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라 언니! 한라 언니!」 한라는 숨도 돌릴 새 없이 황망히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니 남희, 웬일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예요.」 듣고 보니 갈데없는 남희의 목소리였다. 한라의 의아하는 태도와 남희의 조급한 양이 그들의 목소리 만으로도 주리야에게는 또렷이 짐작되었다. 「무슨 급한 일로—」 「저—」 남희는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동안을 띄었다가, 「민호씨 혹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급히 말을 이어 버렸다. (—아니 민호를 왜?) 민호라는 한 마디가 마치 철퇴같이 머리를 내려친 듯이 주리야는 순간 아찔하였으나 다시 숨을 죽이고 전신을 귀 삼아 문밖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1회분 연재 누락 == 반둥건둥 == 짧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리야는 앉아 그를 지키고 있는 주화를 발견한 순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에게 대하여 용솟음치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정리하고 든든한 배짱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혼수상태에 빠질 첫 순간과 같이 여전히 마음이 설레고 골이 띵하였다. 「정신 좀 차렸소.— 대체 웬일요. 별안간 혼몽상태에 빠졌으니.」 주화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퍽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주화를 그렇게 정면으로 순간에 대하여 버리니 도리어 옹졸하고 있던 마음이 턱 놓이며 그의 귀익은 목소리에 든든한 안도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리야의 일신이 안전하였으니 다행이오.」 골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수건에 새로 물을 축여 이마 위에 대면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서 주리야는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언제 올라 오셨어요.」 「시골 일이 웬만큼 정리된 곳을 좋아라 하고 어젯밤에 뛰어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이곳 일이 뒤틀려 있는구려. 박선생 남죽네 민호 할 것 없이 전통이구려.」 민호마저 들어간 것을 그보다도 먼저 주화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주리야는 돌연히 무서운 생각이 났다. 민호가 들어간 것조차 알고 있다면 그럼 그것까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리야까지 한몫에 쓸리지 않았나 염려하였더니 이런 다행은 없소.— 이곳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었소. 언제 별안간 바람이 휩쓸려 올는지 모르는 판이요.」 하고 이마의 수건을 잠깐 떼고 낯색을 엿보면서 주화는 말을 이었다. 「몸이 웬만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집을 피해야 할 것이요.」 「아니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이제 또 새로운 커다란 일이 눈앞에 닥쳐 있음을 듣고 주리야는 마음이 옹송망송함을 깨달았다. 「웬만하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구려. 나는 그동안 정리할 것을 대개 정리하여 주겠소.」 하고 주화는 새삼스럽게 조급하게 주리야의 옆을 떠나 책상께로 갔다. 책시렁에서 책을 뽑아내 책장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도 하고 책상 빼닫이를 뽑아 편지와 종잇장을 갈피갈피 뒤지기도 하였다. 그 급스러운 거동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도 마치 부채로 부치는 듯이 차차 조급하게 설레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야말로 속히 허물을 고백하여야 할 알맞은 기회인 것이다. 「이것 보세요.」 그러나 눈을 꼭 감고 이 한 마디를 말하고는 주화가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볼 것을 느끼고 주리야는 말도 잇지 못하고 이불을 푹 써버렸다. 「일어나지 못하겠단 말요.」 주화가 와서 이불을 벗기고 그를 들여다볼 때에 그는 황당하게 딴소리를 할 수밖에는 없었다. 「몸이 거북해서 저는 못 일어나겠어요. 어서 혼자나 몸을 피하여요. 저는 이곳에 누운 채 일을 당하겠어요.— 죄진 몸이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지막 마디를 주리야는 뼈 있는 말로 한 셈이었으나 그 풍자를 깨닫지 못한 주화는 주리야의 자포적 태도를 도리어 위험하다 생각하며 애써 그를 일으키려 하였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고 어서 기운을 내보아요. 정 맥이 없다면 차를 부르리라.」 「차는 무슨 차예요.」 주화의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는 미안한 생각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지요.— 일어나기는 해도 몸을 피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렇게 유한 소리만 하오. 이야기도 할 때가 따로 있지 이 시급한 경우에.—」 도리어 약간 화를 내며 주화는 다시 책상께로 가서 주섬주섬 정리를 계속하였다. 그러고 보니 또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려서 주리야는 조급한 마음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피신 문제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가로놓여 있어요.」 밖에서 돌연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리야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주화는 잠시 쫑그렸다가 문서를 주섬주섬 모아들고 뒷문으로 살며시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엉겼던 긴장이 풀어지자 주리야도 일어서서 날쌔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화는 부엌에서 들고 나간 문서를 불사르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부스럭 거리 더니 뒤로 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 벽장 속을 들추었다. 주리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에 주화는 다시 뒤로 돌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제가 진 죄를 고백하면 놀라지 않으실 테예요. 괴로워하지 않으실 테예요.— 어떤 죄를 지었던지 같이 데리고 가시겠어요. 죄— 그렇지요. 저는 적어도 아직까지 큰 죄라고 생각하여요.」 말은 평범하였으나 주리야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 낸 것이었다. 「아니 무슨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단 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갑시다.— 나는 어쩐지 커다란 위험이 일각일각 가까이 닥쳐오는 듯한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소.」 「저의 고백— 그것이 커다란 위험일는지도 모르지요.」 「아, 웬일인지 몸이 떨리누나.」 사실 알 수 없이 몸을 떨면서 주화는 채 손대지 못한 책상 위 다른 문서를 대충대충 골라서 두 손에 나눠 쥐었다. 「자, 이 길로 바로 나갑시다. 내 뒤를 곧 쫒아 나오구려.」 하고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앞문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 말할 것은 말해 버려야 시원하겠어요.」 주리야가 조바심하고 외칠 동안에 벌써 문밖에 나가 버린 주화는 웬일인지 별안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으흣!」 다음 순간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에 든 문서를 마저 불살라 버리려는 셈이겠지 생각하고 문을 홱 연 주리야 자신도 깜짝 놀라 버렸다. 밖에는 어느 새인지 주화의 직각대로 올 것이 와 선 것이었다. 몇 분 해서 주화와 주리야는 조금의 거역도 없이 순순하게 관할 서원의 앞을 섰다. 위험이 올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일각일각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죄이거니 하고 느낄 때 주리야는 주화의 일신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이라 저무는 거리를 남녀가 나란히 서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걸어가기가 너무도 겸연쩍어서 주리야는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다. 사흘이 두 번 겹치고 세 번 겹쳐 열흘 만에 주리야는 단독 서를 풀려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건에 직접 관계가 엷고 죄가 가벼운 탓이지 주화들의 풀릴 날은 바다같이 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를 여러 번 거듭 하여야 할 것을 주리야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옷고름을 줄기줄기 뜯기우고 옷폭을 찢기운 너불너불한 주제로 거리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첫경험인 주리야는 며칠 동안에 격조변이 마치 여러 해 동안의 고생과도 같이 몹시도 길고 험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글자대로 지옥의 괴롬이었다. 그가 이전에 경솔한 달뜬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운동의 현실이란 지긋지긋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 길의 열정을 꾸준히 가짐이 범상한 사람의 능히 할 바가 아님을 알았을 때에 그런 괴롬을 거듭하여도 주저앉는 법 없는 주화들의 앙칼진 의지야말로 하늘 위에 태양과도 같이 높고 장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모욕—이러는 점잖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대접— 그 속에서 정신도 정신이려니와 주리야의 육체는 완전히 피곤하고 쇠잔하였다. 그 위에 더한층 괴로운 것은 돌연히 처음 당하는 커다란 생리적 변화가 온 것이었다. 들어간지 며칠 안 되어서부터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돌연히 식욕이 줄고 구역질이 나고 간간히 복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갈수록에 더하여 갔다. 취조실에서 받는 괴롬보다도 어두운 우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이 생리적 괴롬이 그에게는 더한층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의 문을 풀려나온 날, 불현듯이 이 증세는 더욱 심한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밝은 거리를 걸으려니 골이 뒤흔들리고 현기증이 나며 느긋느긋 속이 뒤집혀 갔다. 넓은 거리를 걷다가 그는 몇 번이나 머물러 서서 한참씩 구역질을 하다가는 걷고 하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괴롬에 지쳐서 그는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꺼릴 여가조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육체적 변화를 불안히 여겨 집에도 들릴 새 없이 그는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았다. 한라의 권유로 내친 걸음에 뒷골목의 조그만 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맥박을 보고 청진기를 대고 일정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주리야의 오도깝스런 불안의 표정을 웃는 듯이 침착하게 말하였다.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큰 변화야 큰 변화지요.」 의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고 아직도 인생에 미흡한 순진한 주리야의 태도를 귀엽게 여기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사 든지 벌써 서너 달째 되는 것 같소이다.」 「네?」 철없는 주리야는 아직도 의사의 말의 뜻을 몰라서 알지 못할 그의 선고에 놀라며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경사라니요.」 「짐작해 보시구려 」 하고 은근히 그의 배를 노려보는 의사의 시선을 살핀 주리야는 처음으로 그의 뜻을 깨닫고 홀연히 놀라며 그도 모르게 배를 부둥켜 안았다. 「아니 그럼—.」 귓불을 별안간 발갛게 물들이며 주리야는 의사의 선고에 요번에는 짜장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걱정하실 것은 없소이다. 달포쯤 지나면 그런 증세는 다시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에 돌아갈 것이니까요.」 쫒기우는 듯이 급스럽게 병원을 나온 주리야는 거리의 찬바람을 쏘이면서 걸어도 화끈 다는 얼굴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변이 너무도 일시에 닥쳐온 까닭에 그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흥분과 부끄럼 사이로도 주리야는 은근히 손꼽아 석 달을 세어 올라가 석 달 전의 주화와의 열정의 기억을 마음속에 되풀이하여 보았다. 물론 시일에 틀림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일의 확실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부끄러운 생각에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 인생의 큰 변화가 한결같이 거짓말 같이만 생각되었다. {{문단 그림}} 집으로 돌아온 주리야는 그날부터 외로운 방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서에서 겪은 여러 날 동안의 피곤이 일시에 북받쳐 오는 위에 육체적 변화가 더욱 심하였던 까닭이다. 무시로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고 정신이 어찔어찔하였다. 몹시 몹시 으스스하여서 크게 병든 것과도 같은 느낌이 났다. 이불을 쓰고 누우니 할 수 없이 마음이 열어져서 그도 모르는 결에 신음 소리조차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 생각이 문득 가슴 속에 새어 들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흐르기까지 하였다.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병이 커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괴로운 몸을 더한층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밤을 새우고 날이 지나면 증세가 엷어지고 몸이 한결 거뿐하곤 하였다. 병의 괴롬이 엷어지면 이번에는 마음의 괴롬이 불현듯이 짙어 갔다.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 데서 생기는 일종의 공포와 특수한 그의 경우에 따르는 수치의 념— 이 두 가지의 무거운 감정이 저울추같이 그의 마음을 내려눌렀다. 더욱이 설명할 수 없는 수치의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경박하고 미흡한 그가 벌써 여자의 마지막 계단인 모성이 된다는 생각에 그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안타까운 마음에 배를 두드리고 듣고 하였다. 「결국 그 수밖에 없어.」 며칠 동안 생각하고 번민한 끝에 그는 기어코 마지막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갈피갈피 생각하고 망설이던 끝에 밤이 어두워짐을 살펴 가까운 매약점을 찾았다. 누런 기름병을 치마폭에 감추어 들고는 계면쩍은 마음에 얼른 가게를 나와 버렸다. 그날 밤 그는 큰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생각을 억제하면서 한 종지 남짓한 피마자 기름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예측은 한 바였으나 창자를 훑어 내리는 듯도 하게 목통이 심하였다. 학교 다닐 때에 잡지 등속에서 손쉽게 얻은 간단한 지식이니 완전한 것이리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나 복통이 너무도 심하고 보니 그의 경솔한 조치가 다시 후회되었다. 방바닥을 설설 헤매이고 심하리만치 배가 조이고 치밀든 끝에 이어서 심한 설사가 왔다. 배 속을 한바탕 쪽 씻어내는 듯하였다.— 심히 괴로운 며칠 밤을 지내고 나니 전신이 나른하게 지쳐 버려서 그는 다시 그 방법을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물론 한 번 시험에 효과가 있을 리는 없고 생리적 상태는 그것을 먹기 전과 일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더 손찌검하고 싶지 않었다. 며칠 동안의 무한한 괴롬이 마치 그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는 형벌같이도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모성에 대한 부끄러운 생각쯤은 그 괴롬에 비기면 하잘 것 없는 불필요한 일종의 마음의 사치일 뿐이었다. 자연에 반역함이란 허락될 수 없는 헛된 노력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육체를 가지고 깨달았다. 이러한 생각 외에 그에게는 돌연히 주화의 생각이 났다. 그의 돌아올 날을 고백하지 못한 채 그를 뺏겨 버렸다. 그의 돌아올 날은 멀다. 그가 남겨놓고 간 사랑의 유물— 이것이 주리야에게 끼쳐진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그 사랑의 유산조차 없애 버림은 주화와의 인연을 스스로 즐겨서 끊어 버리는 셈이다. 사랑하는 주화에게 대하여 아직까지도 간곡한 그의 심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처럼 끼쳐진 유물을 정성껏 지키고 길러감이 진 허물의 배상도 되고 주화에게 대하여 변치 않은 사랑의 표현도 되리라고 주리야는 생각하였다. 「딴생각 말고 오는 것은 오는 대로 받아들이자.」 며칠 만에 결국 주리야는 이 결론을 마음속에 굳게 깨달았다. 며칠 전까지 품고 있던 어리석은 생각과 경솔한 행동이 너무도 무의미하였던 것을 뉘우쳤다. 새로운 생각에 새로운 인생이 열린 듯이도 마음이 즐겁고 유쾌하였다. 앞이 훤히 열리고 그의 밟을 길이 또렷이 내다보였다. 밝은 생각과 함께 육체의 괴롬도 차차 덜하여 갔다. 자리에 누운지 일주일 남짓하여서 그는 쾌한 심신으로 자리를 일어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집안이 심히 어지러웠다. 책시렁, 책상, 벽장 속 등은 그들이 검거될 그때의 어지러운 꼴 그대로였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반 날 동안에 대충대충 집안을 정리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의 정리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저윽히 솟았다. 웬만한 것은 있던 대로의 위치에 그대로 두고 책, 옷가지, 일용 도구 등에서 직접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눈에 띄는 곳에 따로 모아서 쌓아 놓았다. 책시렁 벽 위의 로오자의 초상화도 든손 뜯어서 따로 내놓은 책갈피에 끼어 두었다. 나중에 책상 빼닫이 속에서 저금 통장이 나왔다. 처음 서울에 올 당시에 지니고 왔던 삼백에 남짓한 돈을 예금하였던 우편 통장이었다. 그는 시험 삼아 통장을 살펴보았다. 예금란은 단 한 줄 금액의 기입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의 칸은 노동자 없는 공장 속과도 같이 텅 비인 헛간임에 반하여 아랫란은 끝 페이지까지 한 줄의 빈칸도 없이 가득 숫자가 들어 차 있다. 한 덩이의 살 위에 새까맣게 엉겨서 피를 빨고 있는 무수한 모기떼의 꼴과도 같은 가느다란 액수의 숫자가 예금란의 피를 다 빨고 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죽어 쓰러져 있는 격이었다. 혹은 그 무수한 생명 없는 숫자를 생산이 없는 공장 마당에 쌓인 소비의 쓰레기라고도 할까. 그는 장난삼아 그 많은 숫자를 은근히 계산하여 보았다. 행여나 얼마간의 잔액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는 아니었으나 씻은 듯이도 여유가 없었다. 계산을 자칫 잘못하면 아랫란의 합계가 예금 액수를 훨씬 더 지날 지경이었다. 「차 한 잔 값도 없구나」 주리야는 중얼거리고 픽 웃어 버렸다. 지나간 생활할의 해골이 되어 버린 의미 없는 통장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쪽쪽 찢겼다. 줄기줄기 찢겨서 떨어지는 숫자의 한 줄 한 줄이 주리야의 지나간 반 년 동안의 생활의 역사의 한 줄 한 줄이 되어서 펀득펀득 그의 눈을 스쳤다. 다 찢고 나서 그는 새삼스럽게 책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위에 늘 놓여 있던 「벙어리」도 벌써 깨트려진지 오래되지 않었던가. 그러나 주리야는 이제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날이 있음이 마땅하다는 듯이 태연히 시선을 다시 옮겨 버리고 무릎 위에 수북히 쌓인 통장의 조각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자리를 일어섰다. 장난삼아 손아귀에 든 것을 훠 치트렸다. 낙화와도 같이 방 안에 그득히 날리는 무수한 조각 무수한 숫자— 그것은 곧 청산되는 주리야 자신의 지난 생활의 단편 단편이었다. 「지날 것은 지나고 올 것은 오너라」 다 떨어져 버린 낙화를 보고 이렇게 새삼스럽게 중얼거렸을 만큼 주리야는 그도 모르는 동안에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아서 「아리랑」까지 갔을 때에는 흥분도 사라지고 다시 침착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병중에 두어 번이나 간호하려 와 준 친절을 치사한 후에 주리야는 전에 없던 진득한 어조로 돌아갔다. 「언니와도 아마 마지막 의논일까 보우.」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새삼스럽게.」 「일신의 진퇴 문제이니 나로서는 큰 문제이구 말구요.」 뒤미처 뒤를 이어서 주리야는 「다 들어간 뒤에 혼자 남어 있어도 하릴없어 당분간 시골이나 내려가 있을까 해서.」 「잘 생각했지.」 생각도 판단도 할 새 없이 너무도 서글픈 대답이기에 주리야는 한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라의 목소리에는 진실과 애정이 넘쳐 있음을 알았다. 「일없이 여기 있어야 별 수 있소? 더구나 무거운 몸을 가지고.」 「몸도 조심할 겸 부끄러운 생각 무릅쓰고 어떻든 잠깐 동안 내려가 있어야겠수.」 「집에서 용납한다면야 제일 좋은 수지.」 「여린 부모의 마음에 용납하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들어간 사람의 뒷시중인데.」 「이곳 일은 걱정 말우. 손 미치는 대로 내 돌보지 않으리.」 「그렇게 해 준다면 오죽이나 고맙겠소— 그럼 이곳 일은 언니만 믿어요.」 「그 일만은 길게 말하지 마우.」 끝을 막고 한라는 어조를 변하여 「이왕 온 김에 오늘 저녁은 여기서 나와 만찬이나 같이 합시다.」 하고 일어나서 가게 안을 주섬주섬 걷고는 저녁 준비에 착수하였다. 주리야도 나가서 같이 거들었다. 마지막 만찬이라고 한라는 평소보다 공을 들여 로오스를 사다 볶고 커다란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장황히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밤이 깊어갔다. 자기의 계획에 동무의 동의와 권유를 받은 주리야는 앞길이 똑바로 내다보여 자연 마음이 놓이고 이야기가 잦았다. 기어코 집에 돌아가기도 귀찮고 하여 늦은 밤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자 버리기로 하였다. {{문단 그림}} 이튿날 아침 한라와 같이 일어난 주리야는 한라의 서대문 행을 좋은 기회 삼아 자원하여 동행하기로 하였다. 필요와 호기심은 늘 느껴오면서도 현저동을 찾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차입할 옷보퉁이를 든 한라를 따라 영천행 버스를 내렸을 때에는 알 수 없이 마음이 수선거렸다. 차입소의 광경 멀리 바라보이는 무악재 고개 긴 벽돌담 육중한 철문— 처음 보는 이 모든 풍경이 주리야에게는 심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동무에게 책을 차입하려 왔다고 칭탁하고 그는 공교로히 입문을 허락받았다. 한라의 꽁무니를 따라 뜰, 사무소, 차입물 취급소, 영치계를 차례차례 지나서 나중에 대합실에 들어갔다. 별것 아니라 선생을 따라 견학을 온 셈이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한 마음으로 대합실 안에 웅중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양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벽돌담 하나를 격한 세상임에 지나지 않으나 그 안에도 공기는 사파의 그것과는 손바닥을 번진 듯이 다른 것이었다. 얼굴마다 서마서마한 어두운 기색이 나타나 그것이 빚어내는 대합실 안의 분위기란 일률로 침울한 것이었다. 갓난애를 업고까지 와서 면회를 거절당한 여인네는 여러 사람의 눈앞을 꺼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놓고 울어 버렸다. 차마 진득이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어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자리를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한라가 면회를 마치고 차하물을 찾았을 때는 오정을 훨씬 지난 뒤였다. 다시 철문을 나왔을 때에는 벽돌담의 그림자가 땅 위에 길게 떨어져 있었다. 무악재 고개에서는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내렸다. 「주화도 장차 저 속에서 살림하게 되렸다.」 불필요한 감상은 떨쳐 버리려고 애쓰면서도 주리야는 모르는 새에 담 너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 좋은 곳을 견학하였다고 기뻐하면서 주리야는 다시 버스를 탔다. 서울 와서 반 년 동안을 반둥건둥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지냈으나 그러나 적어도 여러 가지의 분위기를 보고 안 것이 장차를 위한 일종의 예비 교육이었다고 그는 차 중에서 곰곰히 생각햐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 주리야는 가방 속에 주섬주섬 행장을 수습하였다. 행장이래야 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올라올 때에는 바스켓이던 것이 지금에는 큰 여행용 가방으로 변한 것이 생활이 조금 복잡해진 증거라면 증거일까. 따로 내놓았던 책 옷가지 등이 그래도 가방 속에 뽀듯이 찼다. 나머지의 짐과 세간 그릇은 일절 한라의 손에 맡길 작정이었다. 뒷정리는 한라에게 부탁할 생각으로 대강 그대로 버려 두고 대문만 걸고 가방을 들고 또 한라에게로 갔다. 주리야의 빈 주머니 속을 짐작하고 한라는 이미 차표까지 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한 커피를 대접하여 주었다. 그날도 한라는 가게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온전히 주리야의 동무하여 주었다. 모든 일을 두 번 세 번 겹쳐 부탁하고 주리야는 늦은 밤 막차에 몸을 던졌다. 침착한 속으로도 마음이 약간 설렘을 느꼈다. 출발의 종이 울리고 플랫폼 위에 보내는 사람, 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날릴 때에 주리야도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라를 향하여 플랫폼을 향하여 설레는 마음에 갈팡질팡 어지러운 이별의 말을 던졌다.— 「잘 있거라 서울아— 잠깐 동안의 작별이지 영 이별은 아니다— 다음에 올라올 때에는 나도 사람 되어 오겠지— 잘 있수 한라— 몸이 충실해지면 또 올라올게— 뒷일 잘 보아 주세요— 편지 자주 하고......」 :作者後言.— 「朱利耶」의 반둥건둥의 成長과도 같이 作品 「朱利耶」도 이만큼 길러서 우선 여기서 끝을 막고 붓을 갈아 「朱利耶 後日譚」을 쓸 날을 讀者諸賢과 같이 기다릴 作定이다. ==저작권== {{PD-old-70}} q4co648k92s3q206z5mz5qsv4zvl3tj 426865 426864 2026-05-05T07:43:32Z ZornsLemon 15531 426865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주리야 |다른 표기=朱利耶 |저자=[[저자:이효석|이효석]] |설명=<新女性>에 1933.3~1934.3까지 연재하였다. 8회분이 연재에서 누락되어 있고, 해당 호의 목차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원래는 장편소설로 기획한 듯하나, 10회 연재 후 종료하였다. }} == 생활의 노래 (生活譜) == 「짱 겐 보」 「짱 겐 돌」 「짱 겐 칼」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듯 이르니, 「로오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로오자라고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싫어요—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그것이 소아병이란 거야.」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오자가 크게 실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 로오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로오자가— 부엌에서— 암만해도 어색한 걸.」 「로오자가 별 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도 짓고 옷도 기워야지.」 「행주치마 입은 로오자.」 「참으로 장한 로오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나는 공설시장의 로오자인가요?— 장에 가는 건 내게만 맡기니.」 「암, 공설시장의 로오자요, 방안의 로오자요, 거리의 로오자요.」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오자, 그런 로오자는 오늘부터 폐업이여요.」 「땅속의 로오자가 슬퍼하게.— 어서 장에 나갔다 와요.」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 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하니까요.」 책상 위에 펴 놓은 로오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활의 잔치 마당이에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 그 속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 그같이 신성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그러믄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요?— 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띄우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sic|재}}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찬란하게 비치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나물 바구니— 생활 바구니.)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 생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 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 가지고 올게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드러냄표|벙어리|sesame}}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빼죽이 솟는 돈 닢이 한 닢 두 닢 좁은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푼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r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드러냄표|벙어리|sesame}} 속에 넣고 날마다 한 닢 두 닢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갈지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 이것을 생각할 때에 {{드러냄표|벙어리|sesame}}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 그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워 노세요. 네?」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게 덥석 전신을 의지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문질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는—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능금 한 입 드릴까?」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서요. 한 입 이상은 안 되요— 행길에서 먹을게 없어지게.」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나의 능금 누가 사노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모로코」에서 디이트릿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리로 읊으면서 주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 못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한숨.— 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졋을 때에 주화에게는 두 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 잊어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건넌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어느덧 뜰 안에 봄이 가득 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벌써— 봄.) 주리야와의 몇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로오자는 못 되더라도— 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 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다 먹고 난 속심을 뾰족한 구두 끝으로 툭 차버릴 주리야— 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과 진열장의 미학(美學)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 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 길게 떨어뜨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섰을 주리야— 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에 그려볼 때 주화에게는 석 달 전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나왔다— {{문단 그림}}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독특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 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 항구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 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이 어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걸이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은 귀엽다고 생{{sic|간|각}}하였다. 나이 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부는 못 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 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리는 동안에 문득 꿈을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계셔요?」 주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에!」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 여자— S 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 보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성진 사는 김영애요.」 「대체 웬일이요.— 들어오시오.」 「편지도 안 드리고 문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우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내렸다.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왔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 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이 바라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 왜 그리 일찍 주무세요?」 듣고 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 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있소.— 그것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흠— 대담한 용단이시군.」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속이 백짓장같이 하아얀 넌센스 뽀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 결혼의 희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드러냄표|노라|sesame}}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에요.— 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 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는 안 돌아갈 작정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 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왔으니까요.」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 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는 못했을 거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에요.」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 당분간 살 만한 것만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 하고 그는 슈우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을 집어내서 주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놀라서 그를 똑바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 쓰면 한 일 년 지탱해 갈는지요.」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다 할는지— 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슈우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 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 놓고는 자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 등 얇다란 몇 권의 팜플렛이었다.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 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 빈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 한구석에 간수하였다. 주화는 그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 두 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도의 정도를 넘은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의 사상의 경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할 수 없었다. {{문단 그림}}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간 자세를 이지러뜨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의 절대적임을 언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듯이 기뻐하며 다음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삭월세로 빌려 놓고 약 백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만하고 따로 백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 「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 「리야」를 빌어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정한 생산과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이 괴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는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이퍼(이렇게 부르기는 과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주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신의 피가 수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가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그칠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채의 전개— 책을 아직 반도 넘기지 않은 이제 주화는 주리야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 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서 준 것은 무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속을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에 생긋 웃고 섰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드러냄표|카페|sesame}}(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 대로 {{드러냄표|샐러드|sesame}}나 맨들구요.」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그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고 하꾸라이가 아니라요, 크로오바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먹어 본 탓인지.」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 갑에 든 크로오바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 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드러냄표|샐러드|sesame}}, 카페와 숭늉— 이 칵테일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렇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떤 때에는 {{드러냄표|햄|sesame}}이나 {{드러냄표|소오세지|sesame}} 조각을 사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되게까지 되었던 거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하고 탄식하였을 때 주화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치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지」 하고 도리어 톡톡이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에도 가야 하지 않겠소?」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 석 달 동안이나 데리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이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에요?」 「석 달 동안이나 벼르고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드러냄표|견학|sesame}}할 자격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직공과도 친해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찍이 가 봅시다.」 「네— 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기뻐서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이 뚫어져 뾰족이 내다보이는 하아얀 한 개의 별— 석 달 동안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성가족(聖家族) == 「대체 어데까지 끌고 가실 작정예요?」 「따라만 오구려.」 「지도에도 없는 세상 속으로 데리고 가실 셈이군.」 「지도에 없는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도에 없는 세상이라면 천당과 지옥인데 끌고 가시는 곳이 대체 어데예요?」 「지옥일는지도 모르지.」 「맙소사. 천당으로 못 데리고 가실지언정 지옥으로 끌고 가시겠어요?」 「그럼 천당으로—」 「성스러운 가족 사는 세상으로요.」 종종걸음으로 주화의 뒤를 따라가는 주리야는 이 한가하지 못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재담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장식하려 하였다. 시구문 안, 전차를 내려서 좁은 옆 골목으로 한 마장 가량이나 걸어 들어가도 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나는 곳이 없었다. 전등 하나도 달리지 않은 골목 안은 유심히도 어둡다. 도희의 불빛이 밤하늘 위에 우렷이 흐려있을 뿐이요, 그것이 이 동떨어진 어두운 골목 안까지 비취이지는 않았다. 서울 온 지 석달에 아직 거리 거리의 지리가 밝지 못한 주리야에게 이 궁벽한 지대는 생각지도 못한 딴 세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전등 하나도 없다니.」 길바닥이 어두워서 발밑이 허전허전하는 주리야는 주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길을 더듬으면서 게두덜거린다. 「아마도 지옥인가 보오.」 껄껄 웃는 주화가 얄궂게 생각되었다. 「난 도로 갈 테예요.」 「여기까지 왔다 도로 가다니...... 가만 있소. 다 왔나 부오.」 하면서 주화는 무뜩 눈앞에 닥치는 대문 앞에 머물렀다. 「낙원에서 지옥까지가 아흐레 동안의 길이라더니 전찻길에서 여기까지 아마 구 분은 걸렸나 봐요.」 「농담은 그만 두고 따라 들어 오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도래를 틀고 손쉽게 문을 열더니 주리야를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지옥이고 천당이고 간에 다 왔으니 시원하군요.」 한 간의 조촐한 대문과는 딴판으로 뜰 안은 침침한 어둠 속에 넓직하게 퍼져 있고 그 네모에 마룻대를 달리한 여러 채의 초라한 집이 들어섰음을 보아 그 안은 한 집안이 아니라 채마다 다른 가호가 들어있음을 주리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뜰 복판에 지붕 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아도 돌 틈에 푸르칙칙하게 이끼 끼인 그 우물이 집안 전체에 우중충한 느낌을 주었다. 가호마다의 생활의 자태를 첫눈에 엿볼 수는 없었으나 전체에서 받는 첫인상은 심히 우중충한 것이었다. 우물과 같은 칙칙한 생활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 밑을 조심해요.」 주화는 우물 옆을 돌아 구석으로 훨씬 들어박힌 서편 가호의 뒤로 돌아갔다. 첫걸음의 발 설은 어둠길을 주리야는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가호와 동떨어져서 외딸리 아늑하게 서편으로 향한 그 집을 돌아 정면에 이르렀을 때에 좁은 뜰로 향한 두 간의 방에서는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인기척이 없고 고요한 공기가 바닷속같이 주위에 잠겨 있다. 「바로 이 집이요.」 「성당같이 고요하군요.」 「성당같이 고이 올라 오오.」 야트막한 툇마루에 오르더니 주화는 말도 없이 아랫방 문을 열고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주선생님이시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여인네의 얼굴이 밀장 사이에 어리웠다. 「시스러워 여기지 말고 들어오.」 주화는 주저하는 주리야를 내다보고 다시 여인네를 향하였다. 「주리야를 데리고 왔는데.」 여인네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더니 마루로 뛰어나왔다. 「들어오시오.」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초면의 따뜻한 손길에 끌려 주리야는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첫 인사는 아무 것도 없이 끔직이도 반가워하여 주는 따뜻한 애정에 주리야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한 느낌을 받아 그 자리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어지러운데 와 주시노라구.」 여인네— 주화에게서 늘 들어온 남죽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진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어 한구석에 뭉쳐 놓았다. 오랫동안 고생에 폭 바스러진 까무잡잡한 남죽의 얼굴에 주리야는 첫눈에 친밀한 「언니」를 느꼈다. 「진작 오려던 것이 생각만 앞서고 여의치 못했어요.」 「나야말로 늘 주선생께서 듣기만 하면서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남죽은 주리야를 진득이 바라보며, 「살림살이 바쁘시지.」 고향이 같은 관북의 이웃 고을이라는 생각이 도와서인지 즉석에 한 집안 식구와 같이 피차의 감정과 의사가 유통되었다. 몇 마디를 건너지 않아 벌써 두 사람의 마음은 긴밀히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땅속의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나 주리야가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같이 낯설고 서마서마한 곳은 아니요, 마음의 세상에는 땅 위 땅 속이 없이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쉽게 합류되었던 것이다. 「오늘 면회하였소?」 주화는 남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면회는 못했어요. 요전에 면회한지 몇 날 안 된다구 허가를 해주어야지요. 겨우 헌 옷가지를 차하해 왔을 뿐이지요.」 「공연히 공장만 하루 때려눕혔군요.」 「그런데 요사이 건강이 퍽 부실한 모양이여요.」 「그 동무 말 아니군— 검거될 때부터 심장이 약하던 사람이 예심에 거의 일 년이나 있게 되니 안 그럴 리 있겠노.」 「요전에 면회할 때부터 신관이 몹시 축났기에 걱정은 했지만— 오늘 편지로 자세히 들으니 아주 심한 모양인데요.」 「편지로요?」 「차하해 내온 옷을 뜯었더니 저고리 솜 갈피 속에서 이런 것이 나왔어요.」 하며 남죽은 치마띠 사이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한 장의 종이 조각을 집어내서 주리야의 눈앞을 서슴지 아니하고 주화에게 주었다. 「혈서이군.」 종이 조각을 펴 들자 주화의 양미간에는 볼 동안에 수심의 주름이 잡혔다. 「입술을 깨물고 피를 내서 간수의 눈을 숨겨 가며 차입해 준 코종이에 깨알 박듯 그렸겠지요.— 늘 하는 짓이니.」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서 주리야는 가벼운 몸서리를 치면서 주화가 든 혈서의 조각을 무시무시 바라보았다. 내려 읽는 주화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주리야는 불시에 수군거리는 사람의 음성을 들었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고 외국어의 단어를 외우는 것도 같은 가는 목소리는 확실히 웃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있는 웃방 장지를 바라보았다. {{문단 그림}}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린 후 책 덮는 소리가 나더니 웃방 장지가 가볍게 열렸다. 그칠 새 없이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상스러워서 은근히 그쪽만 바라보고 앉았던 주리야는 열린 장지로 나타난 그 인물에 적지 아니 놀랐다. 「저이가......」 주리야는 집에 가끔 주화를 찾아오는 그 대학생을 이 낯설은 곳에서 만날 줄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주동무요.」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그는 주화들이 와 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있으련만 의아한 눈초리로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리야의 더욱 이상스럽게 여긴 것은 뒤미처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낯설은 처녀였다. 어떤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그 처녀가 남죽의 동생 남희인 줄은 물론 첫눈에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와 이 대학생이 한 방에서 수군거리는 친밀한 사이에 있다는 것이 그러한 장면을 처음 당하는 주리야에게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려워서 못해 먹겠다.」 낯설은 주리야를 보고 문턱에서 주춤한 남희는 부끄러운 표정을 이런 탄식으로 얼버무려 넘기면서 언니 옆에 사뿐 내려와 앉았다. 주리야는 여자다운 민첩한 신경으로 수줍어하는 남희의 태도와 겸연쩍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과 남희 두 사람의 서먹서먹한 이를 첫눈에 느꼈다. 「한 달이나 두 달로 그렇게 쉽게 깨치겠소?」 대학생인 민호는 딴전을 보면서 남희에게 말하고 주리야를 바라 보며, 「주동무는 불란서말 공부하신다지요?」 주화를 부를 때 쓰는 「주동무」로 주리야를 부르는 것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친밀의 느낌이 없지 않음을 깨달은 주리야는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심심풀이로 강의록을 뒤적거릴 뿐이지 정성을 들여야 말이지요.」 「남희 불란서말은 안 배우려우.」 「그렇게 한가한 것 배울 틈 있나요.」 민호의 농담에 남희는 가볍게 반박하며 주리야를 흘끗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이 한마디가 주리야에게 불현듯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남희와 불란서말을 공부하는 자기와의 의식의 정도, 피차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주리야가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이 말에서 받는 불쾌한 느낌을 마지 못하였다. 남죽에게 「언니」를 느낀 그는 남희에게도 응당 친밀한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나 웬일인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도리어 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가 본데.」 편지에만 열중하였던 주화는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남죽을 바라보았다. 「이왕 들어가 있는 이상 고분고분히 일르는 대로 했으면 좋을 것을 공연히 쓸데 없는 반항을 하는 모양이예요.」 남죽의 뒤를 남희가 받아서, 「아재는 원래 피가 관 분이래서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시게 되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청대로 보석 운동을 해보시지.」 「보석 운동인들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보석이라면 저도 힘써 보지요.」 민호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희망도 있으니 우선 이변호사를 찾아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나도 만나는 대로 말해 보지만.」 「이변호사에게 폐를 끼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형무서에서 여간해서 승낙하겠어요? 병이 쇠해 빠져서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옥을 시키는 형편인데.」 한숨을 짓고 남죽은 계속하여, 「그러고 둘째로 보증금이 수백원은 들 터인데 그것을 또 어데서 어떻게 구하겠어요.」 「어떻든 유예할 경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곧 이변호사를 찾아보시도록 하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죽은 날쌔게 혈서를 접어서 치마 틈에 수습하고 널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었다. 박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누구시라구요.」 긴장이 풀리며 남죽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들 다 오지 않었소.」 박선생은 문득 주리야를 발견하고, 「주씨 웬일이요.」 의아한 눈을 던졌다. 늘 집으로 찾아오는 박선생 처소를 항상 변경하면서 돌아 다니는 그에게 가끔 저녁을 대접한 일까지 있는 박선생— 그를 문득 이런 곳에서 만나니 친밀한 느낌이 났다. 「바람도 쏘일 겸 놀러 왔지요.」 「놀러......」 「올 때들이 되었는데 아직 안 오는군.」 주화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이 있나 보구나— 주리야는 직각적으로 느꼈다. 놀 러 왔다는 말을 듣고 박선생이 놀라는 것이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도 주화는 모임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극히 신중히 해나가는 모임인 것같이 짐작되었다. 따라서 그가 참례할 바가 못 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이만 실례할까요?」 하고 주화의 의견을 묻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있으려면 있구.」 꼭 있으라고는 권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임에는 참석시키지 말고 우선 집만 가리켜 줄 작정인 듯하였다. 「더 {{드러냄표|놀다}} 가시지, 이런 것 저런 것 보아 두셔야지.」 박선생의 권고를 그러나 주리야는 사양하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밖에 아마도 「동무」들의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났다.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오.」 하고 그를 보내는 주화에게 체면에 차마 달려들어 어리광을 피우지는 못하고 점잖게 대답하면서 좌중에 목례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아리랑'에 잠간 들렸다가 바로 집에 가 있을게요.」 {{문단 그림}} 야영 백화점에 들려 늘 하는 버릇으로 막연히 찬란한 층층을 한 바퀴 돈 후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다시 단골로 다니는 조촐한 차점 '아리랑'에 들려 진한 커피를 청하였다. 커피 인이 꼭 박혀버린 주리야는 하루에도 여러 잔은 예사로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의 건강을 해롭히지는 않았다. 커피의 향기와 쓴맛이 그의 비위에 꼭 맞았던 것이다. (발자크는 그의 일생을 커피 마시고 소설 쓰는 데 바쳤다지. 나도 그이와 같이 {{드러냄표|자바|sesame}}보다도 {{드러냄표|브라질|sesame}}보다도 {{드러냄표|모카|sesame}}가 제일 좋아.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평생 커피나 실컷 마셔 볼까) 하면서 그의 커피의 습관을 발자크의 풍류에 비기는 주리야였다. 그러나 그 습관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색한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 감정에 꼭 들어맞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크림은 넣지 말까?」 「아무렴. 시커먼 진짬으로 한 잔.」 어느결엔지 벌써 퍽 친밀한 사이가 된 차점의 여주인 한라에게 주리야는 손짓과 웃음을 던졌다. 「오늘 난 좋은 곳에 갔다 왔지.」 한라가 손수 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없는 고요한 탁자에 주리야와 마주 앉았을 때에 주리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데라니. 천당에?」 「천사들이 있는 대신 거츠런 장정들이 모이는 곳에.」 「장정들이 모여서 천국을 세우려고 애쓰는 곳에 말이지.」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끔찍한 세상을 보았소.— 피가 난 모둠 계획.......—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연히나마 짐작되는 것 같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쾌한 레코드나 한 장 걸가. 주리야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도 한 장.」 하면서 일어서려는 한라를 그러나 주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붙들어 앉히고, 「오늘밤만은 나의 기분을 깨뜨리지 말고 고요히 그대로 두어요...... 나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랫동안 잊었던 한 구절의 시가 가슴속에 솟아 오르겠지.」 「에구, 오늘밤에는 또 왜 이리 센티멘탈해졌어?」 「놀리지 말구 이것 좀 들어봐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리야는 한 구절의 시를 읊기 시작하 였다. :하아얀 횟돌의 조각이 있고 꽃향기 넘치고 햇볕이 창에 얼기설기 비치는 곳 :이글이글 타는 난로와 음식장과 유리잔 있는 곳 :거기에서 꿈을 꾸고 그대를 생각하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이지러진 한 개의 탁자가 있다. :쉬어빠진 한 잔의 술이 있다. :낡은 한 권의 성서가 있다. :끄슬러서 침침한 등불이 있다. :시들어버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유리창 밖에는 진눈깨비와 바람이 불고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에 떨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니라. 「아니 어데서 그런 시를 외웠소?」 듣고 난 한라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면서 주리야의 코를 끄들었다. 「훌륭하지.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읊은 아름다운 노래야.」 「가난한 줄 이제 알었나.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드러냄표|싸움터|sesame}}로 나가야 할 시절이니라'—고 고쳤으면 좋겠군.— 우리도 현재 이런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시가 아니라 소시민적 감정을 표현한 잠꼬대야.」 「이지러진 탁자. 쉬어빠진 술. 어두운 등불.— 시상으로 얼마나 훌륭하우. 나는 여기에서 한 편의 프로 시를 발견한 듯한데.」 「프로 시에 아스파라거스는 다 무어야. 세상에는 아스파라거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우. 진정한 프로 시 되려면 아직 구만리의 거리가 있어.」 사귄 지는 오래지만 한라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의견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마음속에 그 무엇이 있듯이 평소에 멍하고 있는 한라이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이러한 소리를 하는 오늘밤의 그가 주리야에게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럼 결국 프로 시가 아니란 말이지?」 「주리야나 나같이 날마다 커피나 먹고 지내는 한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이 싱싱한 실감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그럼 부르주아의 것이란 말요.」 어느결엔지 모둠에서 만났던 민호가 나타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주리야는 이렇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계시오.」 「프로 시 시비예요.」 「어떤 프로 시요.」 「아니 그래 이런 것이 프로 시가 아니예요?」 하고 주리야는 다시 아까의 시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까지 듣고 앉았던 민호는 신중한 목소리로, 「훌륭한 시가 듣고 싶으면 내 한 편 읊어 드리지— 이런 것이 정말 훌륭한 시란 것이요.」 :고향 사정 말한 일 없고 :자유로운 시간 가진 적 없이 :제일 싫은 책임 도맡아 보던 그 동무 :곤란이 막심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그 동무 :기계같이 일하고 :칼날같이 과단성 있고 :××의 그물 표범같이 뚫던 그 동무 :밉살스러우리만치 대담하던 그 동무 :아! 끝내 그는 붙잡히고야 말았다 :겁내는 내의 마음 늘 매질하여 준 것은 :신념에 빛나는 그의 눈이었다 :풍진 세상의 행복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 :꾸짖어 준 것은 도깨비불 같은 그 눈이었다 :나의 가슴 사소한 책무에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백곱절의 일을 하였다 :모진 폭풍우가 휩쓸어오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던 그 동무 :나의 마음 못 믿더라도 그만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 동무 잡히고야 말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누나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콘크리트 천정을 노리고 있을까 지금의 그 동무 :이틀 동안 굶은 배 한 그릇 국밥으로 채운 :그와 나였다 :우박송이 퍼붓는 어둠 뚫고 :전신을 폭 적시우며 :모둠에 달려간 그와 나였다 :「우리」에서 돌아올 때 :나는 늘 그의 꿋꿋한 손과 낭랑한 웃음이 그리웠다 :그 동무 그 동무 돌아오지 않는 그 동무 :목숨 떨어지는 날까지 잡히운 몸의 그 동무 :매맞고 박채우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그 동무 :도깨비불 같은 그이 눈이 :철망을 건너 나에게 광명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그 동무 돌아오지 않누나. :그러나 그가 주고 간 열정 그가 보낸 광명 :나의 가슴에 타고 수천 동지 가슴에 타서 :세상을 살러 버릴 횃불이 되리라 :아! 동무여 편히 쉬라 새벽은 가깝다! 「아 그 동무 그 동무.— 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하군. 아니 그것이 대체 시요, 실제 경험이요?」 마지막 구절까지 숨도 가라앉지 않고 듣고 있던 주리야는 감동에 넘치는 두 눈에 광채를 가득히 담았다. 「퍽이나 감동하신 모양이군.」 「그렇게 훌륭한 시는 오늘밤 처음 들엇어요.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아! 돌아오지 않누나. 그 동무!」 감동된 두어 줄을 외우다가 주리야는 문득 한라를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같이 둥근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고여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술에는 웃음을 띄우고 눈으로는 울고 있다. 「한라, 왜 우우?」 「지금 그 시가 너무도 훌륭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는 병증이 있다우.」 그렇게는 말하여도 주리야는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느꼈다. 아까의 그의 시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지금의 눈물이라든지 그 무슨 그 시와 관련되는 것이 그의 생활의 한구석에 있으려니 짐작되었다. 하기는 주리야 자신도 그 시에서 받은 감동은 심히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무지를 개발하여 주는 횃불이요, 소시민적 생활 위에 떨어진 위대한 폭탄덩이였다. 그 위에 한라의 눈물은 더한층 그를 매질하여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고요하던 좌석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기가 아까워서 그는 한라의 손을 잡으면서, 「울지 말우 한라— 내 레코드 한 장 걸게.」 하고 일어나 가서 그가 좋아하는 {{드러냄표|렌·피리스|sesame}}의 하와이안 비 타를 걸었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양말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아리고 내 양말 대님.」 하고 땅 위를 더듬어보는 동안에,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민호가 그의 발밑에서 그것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리야는 민호의 눈앞을 꺼리지도 않고 무릎 위까지 치마를 걷고 양말을 걷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민호가 그에게 준 한 마디가 웬일인지 이상스럽게도 가슴속에 들어 배는 듯하였다.— (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문단 그림}} 집에 돌아오니 주화는 어느덧 아랫목 이불 속에 드러누워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웃목에 친 검은 막 속에서 옷을 벗고 나오는 오늘밤의 주리야의 자태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찬란한 나체에 포도 잎새 한 닢 붙이지 않고 칵 속에서 뛰어나와 주화의 앞에 나타나던 그가 오늘은 포도 잎새 아닌 한 권의 책으로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주화의 앞에 웬일인지 별안간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포도 잎새 대신으로 쓴 그 책은 자본론의 한 권이었다. 이불 속에 뛰어들어가기가 바쁘게 주화의 귀 밑에, 「아리랑의 한라가 '그 동무'란 시의 낭독을 듣고 우니 웬 일예요.」 「그 시 그대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울 때도 있겠지.」 「아니 한라의 친구가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그 동무'의 처지에 있으니까 말요.」 작자 부언(附言)— 作中 두 편의 詩는 某氏의 것을 빌려다가 의역한 것임을 말하여 둔다. == 마음의 안테나 == (대체 웬 녀석야.) 알지 못할 사나이의 시선을 등 뒤에 받으면서 정동 골목으로 들어갈 때에 주리야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향을 갈아 길을 돌릴까도 생각하였으나 맡은 일의 관계상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대로 정동 골목을 들어갔다. (불량소년일까, 그렇지 않으면 탐정일까......) 알지 못할 작자였다. 종로 근처에서부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 M 백화점의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단정한 양복 맵시로 보더라도 탐정의 유가 아니면 흔히 있는 불량소년의 따위였다. 그러나 탐정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 정체 모를 사나이의 추격은 더한층 불안한 느낌 을 주었다. (이녀석, 어데 따라 보아라.)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 가다가 조그만 과자가게 앞에 왔을 때에 뒤를 돌아보고 사나이의 눈을 교묘하게 감춰 과자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츄잉 껌을 사서 쭐기쭐기 씹으면서 밖을 내다보노라니 헛물 켠 사나이는 길 옆을 기웃기웃 살피면서 과자점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흉칙한 녀석.) 주리야는 코웃음을 치면서 가게 주인을 보고, 「저따위 녀석이 뒤를 쫓겠나요.」 주인의 웃음을 들으면서 다시 가게를 나온 그는 사나이의 간 곳을 살핀 후 뒷골목으로 살짝 돌아섰다. 영사관 지대를 지나 넓은 고개 위에 나섰을 때에도 사나이의 그림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주리야는 통쾌한 웃음을 남기면서— 그러나 역시 치밀한 주의의 눈을 던지면서 급한 걸음으로 민호의 숙소인 아파아트로 향하여 내려갔다. 고개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목조 이층집— 문간에는 여러 가지 단체의 간판까지 걸린 그 한 채를 아파아트라고 부르기는 부적당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방방을 개인 혹은 단체에게 빌려주는 그 집을 아파아트라고 부르기에 주리야는 아무런 부자연한 느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층의 방 한 간을 민호가 빌려 가지고 있었다. 급히 문간을 들어간 주리야는 그것이 첫걸음이었지만 이층에 뛰어 올라가 손쉽게 민호의 방을 찾았다. 걸리지 않은 문을 노크하니 반갑게 안으로부터 열렸다. 불쑥 내밀었던 남희의 고개가 별안간 움츠러들었다. 순간 예상치 아니한 여주인공의 출현에 주리야의 눈썹이 볼 동안에 찌푸러졌으나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없고 남희 혼자였다. 남희가 무료하여서 읽던 책이 침대 위에 편 채로 놓여 있었다. 무심히 뒹굴고 있던 남희는 성에 맞지 않는 이 돌연한 침입자로 인하여 마치 엄한 선생의 앞에 나선 듯이 마음이 거북하고 몸이 굳어졌다. 「민호씨를 만나러 왔더니 안 계신가 부군.」 「입때껏 기다려도 안 들어 오셔요.」 「웬일인가 시간이 넘었는데.」 하면서 주리야가 책상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남희는 별안간 그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 위에 놓인 한 자의 종이를 집어서 날쌔게 꾸겨 버렸다.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우렷이 빛났다. 필연코 민호에게 대한 공상의 낙서를 그 위에 장난 쳤으려니 생각하고 주리야는 쓴웃음을 남희의 얼굴 위에 정면으로 던졌다. 그 웃음의 그늘 속에는 그러나 독사의 그것과 같은 매운 눈초리가 숨겨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앞을 가로채고 나타나는 남희가 주리야에게는 귀찮고 어줍지 않은 존재였고, 그 남희에게 주리야는 독을 품은 수리같이 생각되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겁을, 한 사람은 불같은 질투를 만나는 때마다 동시에 느꼈다. 주리야의 냉정한 이성이 그의 이 부탕한 질투를 꾸짖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더 많이 그의 여자다운 본능이 과분의 열정을 북돋아 마지 않았다. 「이만 가볼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 남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주리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파아트를 나갔다. 남희가 가버리고 혼자 주인 없는 방에 남아있으려니 주리야는 도리어 스스러운 생각이 났다. 남의 권리를 뺏고 그 뒷자리에 들어선 그의 염치가 너무도 뻔질뻔질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가 씹는 껌의 향기와 같이 사라져 버리고 민호에게 대한 생각만이 찐덕찐덕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가 생각하여도 부당한 경쟁의 의식과 알지 못할 승부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신 괴이하게 여겼다. 창 밖에는 여학교가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서 공과 같이 뛰노는 처녀들의 아무 계교 없는 순진한 자태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매질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스럽게 시침을 떼고 주인 없는 방의 여왕이 되었다. 민호 안 오는 시간의 무료를 못 이겨 그는 알콜 풍로에 불을 달이고 물을 끓였다. 여러 해 동안 살아오는 그 자신의 아파아트와도 같이 가장 손쉽게 장 속에서 크림과 사탕을 집어내서 커피를 만들었다. 뜨거운 차를 불고 있는 동안에 민호가 왔다. 「잠깐 동안 이 방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자리를 사양하면서, 「—남희까지 쫓아버리고요.」 하고 이 한 마디가 민호에게 주는 효과를 살피려고 그의 얼굴을 진득이 노렸다. 「장하군요.」 슬픈 표정 대신에 민호는 미소로 이 어여쁜 「영웅」을 칭찬하였다. 물론 그 미소와 칭찬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없었으나 주리야는 적어도 이 「사나이」—생각과 처지와 양심과 순정을 빼내 버린 나머지의 이 사나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그의 헛된 자만심만은 아닌 듯하였다. 「주화가 단체 일로 시골 간 것 아시겠지?」 「동무에게서 들었지요.」 「주화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하고 주리야는 핸드빽 속에서 한 장의 두터운 봉투를 집어냈다. 「—이것을 즉시 전해 달라구요.」 「하하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던가.」 민호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봉투를 책상 속 깊이 간수하였다. 주리야 자신 실상은 봉투의 내용을 몰랐으나—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갈의 임무를 마치니 곧 안심될 뿐이었다. 「그리고—」 장난의 눈초리로 민호를 바라보며, 「즉시 뜯어보고 곧 시작해 달라구요.」 「영어면 곧 되겠지만 독일어면 좀 거북한데.」 늘 있는 구라파 한가운데에서 직수입하여 오는 직접 일에 관계있는 원문 팜플렛의 번역의 일인 것을 주리야는 여기에서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여 더 자세한 내용의 비밀을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야지.」 껌을 새로 집어내서 입에 넣고 곱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파아트를 나와 고개를 걸어 내려가던 주리야는 고요한 행길에 인기척 소리를 듣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알지 못할 사나이가 그의 뒤를 또 쫓는 것이었다. 별안간 소름이 끼쳤다. (웬 벌레 같은 놈팽이야.) 그 추근추근한 사나이의 행동에 화가 버럭 나서 주리야는 문득 한 꾀를 내어 걸음을 멈추고 길 옆에 무뚝 서 버렸다.— (놈 좀 앞서 봐라.) 사나이는 터벅터벅 가까이 오더니 그의 옆에 머물렀다. 씹던 껌을 그의 낯짝에 탁 뱉을까 생각하며 휙 돌아섰을 때 사나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공손히 목례를 하였다. 「실례지만 김영애씨지요?」 「웬 걱정이요?」 「이를 말이 있어서요—」 사나이는 모자를 쑥 올려 뒷덜미에 붙이고 두 손을 양복 바지 주머니 속에 푹 꼽더니, 「—공연히 서울 바닥을 일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소?」 별안간의 충고에 마음이 짜릿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례한 그의 낯짝에 숫제 껌을 뱉어 버릴까 하다가 참고, 「아니, 댁이 무엇인데 그렇게 주제넘소?」 물론 그가 경박한 불량소년이 아님은 그의 충고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은......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나 당신의 처지가 딱해서 하는 말이요.」 「나의 자유 의지의 행동인데 무엇이 딱하단 말요.」 「시골서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소.」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남의 사정을 여기까지 알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괴상하여 주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다.」 하고 사나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정색하더니, 「어떻든 잘 생각하여서 앞길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이번에는 혼자 앞장을 서서 더끔더끔 걸어 내려갔다. 주리야는 의아하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껌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이상스런 사나이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의 말이 유난히도 뼛속에 사무쳐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슴속에 자아내게 하였다. 움직이는 불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주리야는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외로운 처소에 돌아가서 혼자의 저녁을 짓기도 스산할 것 같아서 양식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거리에 등불이 들어온 후에 야 어슬어슬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아래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필연코 주화의 동무들이 찾아 와 있으려니 생각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주리야는 그들이 도무지 뜻하지 못하였던 의외의 인물임에 깜짝 놀랐다. 될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의 앞을 피하여 되돌아서서 도망이라도 하고 싶은 정경이었다. 「어디를 가서 종일 쏘다닌단 말이냐?」 침착한 목소리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주리야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주리야는 마음을 다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오빠.」 고개를 수그린 누이동생의 자태에 '오빠'는 목소리를 부드럽혔다. 「서울 온 지는 벌써 여러 날 되었으나 집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이냐.」 「아니 그래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 수 있니? 사립 탐정에게 부탁하여 사흘 만에 겨우 찾아냈다.」 「탐정에게요?」 이렇게 반문한 주리야는 아까의 이상스러운 거리의 사나이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 추근추근하게 그의 뒤를 쫓던 것도 결국 고마운 충고를 주려는 생각보다도 그의 거동을 살피려는 직업적 심사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안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이야?」 「저도 충분히 생각한 후에 취한 행동인데 걱정하실 필요가 어디 있어요?」 「한 분밖에 안 계시는 어머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시는 줄 아니. 불효막심한 자식.」 「어차피 불효막심은 생각한 끝에 일인데요. 어머님께 반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유만은 배반할 수 없어요.」 「주제넘은 소리 그만두어.」 오빠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에 서울 와서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돈 한 푼 없는 놈팽이와 붙어서 무엇을 했어?」 이 말은 듣고 주리야는 그의 기개 높은 자존심으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 마세요. 돈 한 푼 없는 놈팽이라니요? 어떻게 하시는 말씀예요? 돈은 없다 할지라도 돈 많은 도야지와는 뜻이 다르답니다.」 옆에 앉은 사나이—주리야가 배반하고 온 시골의 약혼자—가 입맛이 쓴지 오빠와 주리야를 등분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라.」 오빠의 이 한 마디에 주리야는 그러나 구태여 반항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도리어 괴로울 듯하여서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 허수아비같이 앉았던 약혼자는 기회를 잡은 듯이 오빠를, 다음에 주리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을 하여 주시오. 지금이라도 나에게는 결코 늦지 않으니 충분히 생각해서 잘 조처하시오.」 주리야는 기가 막혀 속으로 픽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라고 말한 법도 없다. 추근추근한 사나이.) 이렇게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말없이 침울하고 슬픈 태도를 지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내일은 단연코 내려가자— 나이는 차 가는데 언제까지든지 그 주제로 언제 사람 되겠니.」 비교적 온순한 오빠의 태도에 호감을 가진 주리야는 오빠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공손히 듣는 체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집안에 대한 체면도 체면이지만 이제는 박군을 대할 면목이 없다.」 오빠는 사과하는 듯이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주리야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두 청년은 그들의 권유가 효과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기뻐하였으나 주리야는 속마음으로는 웃고 있었다. 눈물— 그것은 반드시 슬픔의 표현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주리야에게 그 눈물이 일종의 기교(技巧)요, 일종의 수단이었다. 눈물과는 딴판으로 마음 속으로는 물론 다른 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같이 새우다가는 불가불 붙들리고야 말 것이다. 밤이 새기 전에 이 두 마리의 이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하겠다.) 그날 밤 늦은 후 일찍 잠든 두 사람의 옆을 빠져 주리야는 일 보러 가는 체하고 방을 나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여행에 넉넉하리만큼 가방 속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몰래 집을 나왔다. 들고 나온 「벙어리」를 돌에 부딪쳐 깨뜨리고 흐트러진 돈을 가방 속에 걷어 넣었다. (월미도에 가서 며칠 동안 바다를 보며 은신하여 있을 여비는 되겠지.) 주체스런 가방을 들고 뒷골목을 걸음 빨리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행을 승낙할까.) 혼자 가기가 수상하게 보일까 봐 민호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이것이 민호를 차지할 안성맞춤의 좋은 기회라고 은근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가면 끌고 가지.) 아름다운 악마의 결심을 하고 주리야는 고요한 밤거리를 걸어 정동 아파아트로 향하였다. {{문단 그림}} 벌써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운 민호를 잡아 일으키고 주리야는 황급한 어조로 그의 신변의 위험을 고하였다. 물론 그것이 일종의 그의 기교였으나 그의 어조가 너무도 황급하고 태도가 서먹서먹한 까닭에 민호도 황급하게 뛰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치 불이 났다!는 고함을 듣고 순간 뛰어 나가듯이 민호는 잠시 동안 아무 지각없이 들뜬 마음으로 날뛰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바람에 전후의 판단과 냉정한 분별이 없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집어 얹고 주리야의 손에 끌리다시피 하여 허둥지둥 거리로 나갔다. 막차는 이미 끊어진 뒤었다. 주리야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세 내 가지고 민호와 같이 탔다. 넓은 밤 가도를 자동차는 전속력으로 달았다. 길 양편의 나뭇잎이 선명한 초록빛으로 자동차의 등불 속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신선한 밤 드라이브— 그 속에서 차차 정신이 든 민호는 이 밤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몽유병자가 아닌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몽롱한 의식에서 차차 현실로 돌아갔다. (나의 행동은 바른 것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비판할 여가가 없었다. 요동하는 차 안에 있을 때에 사람은 이유 없이 취하는 법이다. 그 가벼운 도취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주리야의 육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다시 꿈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데를 왔나.) 단걸음에 섬 속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호는 부지식간의 그의 행동이 엄청나게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았어요. 범의 굴에서 피해 나온 듯해요.」 주리야는 마음속으로 안도한 듯이 여관집 문앞까지 갖다 댄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저하는 민호의 손을 끌었다. 「동행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나는 뒤로 가지요.」 동지인 주화의 생각이 퍼뜩 머리 속을 스치자 정신을 깬 양심의 조각이 민호의 가슴을 죄었다. 「동무의 위험을 보면서도 그의 옆을 피하다니 그런 비겁한 사람이 어디 있소?」 주리야는 비웃는 듯이 우뚝 서서, 「미래의 투사 될 사람이 그만한 용기도 없이 어떻게 하우.」 「옆을 피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주리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 「나 혼자보다도 당신이 옆에 같이 있는 것이 다른 눈에도 수상치 아니하고 더욱 안전하단 말예요. 당신은 며칠 동안 나의 허수아비가 되고 장식품이 되면 그만예요.」 얇은 양심은 부드럽게 거세를 당하고 민호는 끌려 들어갔다. 여관의 바다의 첫 시절이라 만원이었다. 이층의 방 한 간이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로 안내해 주시오.」 주리야는 하녀에게 분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거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대담한 까닭에 민호는 도리어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그와 싸워 보자고 민호는 결심하였다. 양심과 애욕과 어느 것이 이길까 승패를 가려 보리라고 작정하고 닥쳐오는 현실 그대로를 순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밤이다. 창르 열고 민호는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에 잠들고 있는 항구에는 등불이 둥실둥실 떠 있고 섬 밑에서부터는 어두운 바다가 폭넓게 쭉 깔려 있다. 시원한 바람이 우거진 나뭇잎을 흔들면서 흘러와서는 가슴속을 헤치고 들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민호의 등 뒤에 주리야가 너무도 가까이 와 섰기 때문에 목덜미가 간지러우리만큼 주리야의 따뜻한 입김이 가깝게 흘러 왔다. 「밤바다는 어두운 데서 보아야 더 좋답니다.」 「어두우면 바다가 보이나요.」 「우렷이 보이는 곳에 운치가 있지요— 내 불을 끄고 올게 보세요.」 「불은 그대로 두시지.」 민호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주리야는 뒤로 가서 방 복판의 전기불을 껐다. 민호 옆에 와서 창을 마주 열고, 「어슴푸레한 것이 더한층 아름답지요. 밝은 곳에서 추한 것도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아름답게 보여요. 바다도 사람의 죄악도—」 하면서 가슴을 헤치고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아, 저 등대!」 {{sic|두|등}}대를 발견하고 그는 어린아이같이 팔을 뻗쳐 반짝거리는 먼 곳의 등대를 가리켰다. 깜박거리는 등대 밑에는 신비로운 바다가 짙은 빛으로 질펀하게 퍼져 있고 같은 바다 위에 하늘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초승달이 얕게 비꼈다. 「귀찮은 현실에 부대끼는 우리에게는 가끔 이와 같은 로맨티시즘도 필요하겠지요.」 「로맨티시즘이라니요?— 나에게는 이 밤이 괴롭소이다. 주리야와 나와의 관계는 결코 로맨티시즘 속에 떠 놀 관계가 못되니까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가상도 못 해요?」 별안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리야는 죄진 것 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휙 돌아섰다. 그 바람에 민호의 양복 호크에 공교롭게 걸렸던 원피스의 치마 허리가 쭉 찢어졌다. 「아이구 어쩌나.」 찢어진 허리를 만지면서 주리야는 새삼스럽게 민호를 쳐다 보았다. 마치 민호의 탓인 듯이 그를 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문간에 선 하녀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주춤하면서 문을 빼꼼이 닫았다. 「쉬시기 전에 목욕들 안 하세요?」 민호는 급스럽게 불을 켜고 수건을 얻어가지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주리야가 가족탕에 들어간 동안에 민호는 혼자 넓은 남탕에 들어가서 더운 조수 속에 몸을 담갔다. 전신의 피가 녹고 풀리는 동안에 주리야에게 대한 생각과 여러 가지 의심이 뒤를 이어 솟았다. (주리야의 마음속은 대체 어떠한 것인고.) 그의 눈을 현혹케 하고 괴롭히는 것은 나이 어리고 천진한 그의 무작위한 심사에서 나온 것일까. 찬란한 그의 천성에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 있는 말이요, 속 있는 거동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를 유혹하자는 처음부터의 계획적 성심으로인가. 그러나 그의 주화에게 대한 사랑은 두텁고 깊고 한 푼의 틈도 없는 것임을 민호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의 지듭을 떠보자는 수작인가. 동지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는 가짜의 마음으로인가. 그렇다면 거동이 너무도 공들다. 아무리 신변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하필 즐겨하지 않는 그를 이 밤중에 끌어낸다는 것은 너무도 공든 행동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일시의 장난일까. 심심풀이의 장난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다시 첫 끝에 돌아가 주리야의 본심을 되생각하고 거듭 짐작하였다. 그동안에 주리야도 독탕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이다. 그는 갈래갈래의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는 주화를 사랑하였다. 사상적 동감보다도 시각적(視覺的) 애정으로 첫눈에 고른 그를 주리야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랑은 차차 깊고 진하고 믿음직한 것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주화의 동무인 민호를 싫어하지 않았다. 시각적(視覺的) 호감을 느꼈다. 사람의 육체에 눈이 있고 심장이 있는 이상 이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감각의 안테나인 두 눈에 모양이 비칠 때 그것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사람 된 마음의 자유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함에 그는 하등의 양심의 꾸지람을 받지 않았다. 감정의 명령을 잘 좇는 것이 도리어 양심에 충실한 소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불을 지른 것은 민호의 애인 남희였다. 그는 남희를 만나는 첫 순간부터 이유 모를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마는 그 질투가 도와서 오늘 밤의 행동을 인도한 것이었다. 오늘 밤의 행동— 그것은 그의 신변의 위험을 피하는 한 수단인 동시에 남희에게 대한 일종의 자랑이요, 시위 운동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 밤의 행동을 어느 끝까지 전개시키겠다는 최후적 성산과 야심은 없었다. 그는 아직 민호에게 최후의 것까지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주화에게 대하여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에게 대하여 느끼는 시각적 호감—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박넝쿨같이 갈래갈래로 뻗어 나가는 여자의 마음— 어느 갈래가 진짬이요 어느 갈래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모두 똑같이 진정의 갈래— 그 방향 많은 갈래갈래의 마음에 주리야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방 가운데에는 두 채의 이불이 나란히 펴 있었다. 물론 부부려니 짐작하고 하녀가 펴 놓은 것이다. (흠. 마치 두 부부의 잠자리 같군.) 뒤미처 들어온 민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한편 이불께로 갔다. 「—밤이 퍽도 늦은가 부다.」 「곧 자야지요.」 주리야는 나머지 한편의 이불 위로 가서, 「나는 밝으면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불을 끄지요.」 민호의 손이 뻗어 전기불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잠자리 옷을 갈아입고 각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주리야는 무심한 자태를 지니고 민호는 하룻밤 동안 괴롭게 싸워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 그 뒤에 오는 것 ==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이불 속에서 황망히 속옷을 껴입은 주리야는 이불을 걷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엉겹결에 그의 두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 송이의 꽃이 하룻밤 서리에 시들어버리듯이 팽팽하던 그의 얼굴이 하룻밤 동안 이지러지지나 않았을까를 본능적으로 염려하는 듯이. 다음에 그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 오리 한 오리 어루만졌다. 만지는 동안에 그도 모르게 그의 손에 힘이 맺혔다. 손가락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 오리 두 오리 뚝뚝 뜯겼다. 나중에는 여러 오리씩 줌으로 뜯겼다. 머리를 뜯으면서 그의 시선은 이불 사이로 하아얗게 드러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보지 않을 것을 본 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스럽게 솟아올라 그는 이불로 다리를 푹 덮어 버렸다. 머리 속이 아찔하여지며 별안간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눈이 팽팽 돌았다. 마치 처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려서 깨뜨린 첫 순간과도 같이. 무의식간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잠깐 동안에 이불 위에 가락가락 흐트러졌다. 콧등이 띵하여지며 눈물이 빠지지 솟았다.— 목소리를 내서 막 울고 싶은 심중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슴 밑으로 둥긋이 드러난 젖통을 만지다가 황망히 옷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소 잃은 후에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찬란한 아침 해가 창으로 불쑥 솟아 들어왔다. 햇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주리야는 얼굴을 숙여 버렸다. 너무도 밝은 빛을 꺼리고 사양하는 듯이. 「벌써 깨셨소?」 등 뒤에서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가 아제는 마치 그의 몸을 찌르는 황충이와 같아서 주리야는 그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였다. 「아니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오?」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건강한 체중이 그의 등 뒤에 바싹 기어 옴을 주리야는 느꼈다. 「골이 아프시오, 배가 아프시오?— 별안간 웬 일이시오?」 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으며 울음에 떨리는 주리야의 두 어깨가 육중한 힘 안에 폭 싸였다. 주리야는 순간 달팽이같이 움츠러들면 번개같이 몸을 흔들어 빼쳤다. 몸서리를 치면서— 민호의 육체가 지금에는 징그러운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몸을 빼치는 것과 동시에 좌향을 휙 돌리면서 바른손이 민호의 볼 위에 날쌔게 날랐다. 「악마!」 또 한 번 손이 날았다. 「아니 무슨 짓이요?」 「저리 가요.」 「주리야.」 「동물!」 「미쳤소?」 「당신은 동지가 아니고 동물이요.」 「아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요?」 「시침을 떼는 구료.」 「곡절을 모르겠으니.」 「간밤에 나를......」 주리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그것이 그다지......」 「그것이 그다지라니.」 「그다지 노엽소?」 「어떻게 하는 말요?」 「대체 나 한 사람만의 의사였단 말요?」 「잠든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있단 말요?」 「그러면 그때까지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 「아니 누가 유혹을 했단 말요?— 코 큰 소리 그만하오.」 「적어도 암시는 주지 않았소.」 「하루 동안 허수아비 노릇하랬지 누가 사람 노릇— 아니 애인 노릇을 하랬소.」 「그건 이유 닿지 않는, 모욕에 지나지 못하는 말요.」 「버젓한 애인 노릇을 한 당신이 너무도 주제넘었소.」 「그렇게 말하면 당초에 아파아트에서 잠든 사람을 몰아낸 것은 무슨 까닭이었소?」 「당신은 그것을 이 결말을 가져오기 위하여서 한 꾀인 줄 아는구려.」 「적어도 결과는 그렇게 되잖았소. 당신이 원인을 지어 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모욕이요. 바로 그 때에 치든지 욕을 주든지 하지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요?」 「아니 변명이 무슨 변명이요?」 주리야는 기가 막히는 듯이 눈물 어린 얼굴로 민호를 노렸다. 「나는 다만 떨어진 물건을 집었을 뿐요— 땅에 떨어진 양말대님을 줍듯이.」 양말대님— 주리야는 문득 언제인가 차점 「아리랑」에서 그가 떨어뜨린 양말대님을 민호가 집어주던 장면을 그리고 그가 별것 다 떨어뜨리시는군 하고 웃던 것을 생각하였다. 사나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임을 알고 그의 큰 실책을 깨달았다. 양말대님이라면 사실 그가 양말대님을 떨어뜨린 것과 정조를 떨어뜨린 것과는 같은 정도의 부지식간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여운 가운데에도 얼굴이 붉어져서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정말 별것을 다 떨어뜨렸구나!) 이러한 속 생각뿐이다. 「손 닿는 곳에 있는 향기 높은 한 송이의 능금— 동지고 원수고 간에 발 병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따지 않을 사나이는 세상에 없을 거요. 결국 육체적 거리의 죄였소. 육체적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던 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 「뻔질뻔질하게— 설교를 하는 셈인가.」 주리야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섰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 보기 싫으니.」 민호를 보지 않고 눈은 딴전을 향한 채 손은 문을 가리켰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은 아니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잘 알아주어야 하오— 결코 주리야의 의지를 짓밟은 나 혼자의 의사로의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이 점에 있는 것이요.」 주리야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무츰무츰하고 서 있다가,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요.」 하고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듯이 방을 뛰어나갔다. {{문단 그림}} 아래층 문간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오는 여하인의 아침 인사를 받은 체 만 체하고 문을 뛰어나간 주리야는 허둥지둥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얼굴이 불을 끼얹은 듯이 화끈화끈 달았다. 굴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거리는 발이 대중없이 빨리 언덕을 휘둘러 내려갔다. 해가 활짝 솟아 가까운 바다를 일직선으로 찬란히 빛내었다. 움푹 줄어 들어간 바다는 파도 한 조각 없이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신선하고 공기가 차다. 불역에까지 내려간 주리야는 모래 위에 푹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무의식간에 지난 밤 기억이 다시 소생되어 마음을 찧고 얼굴을 달게 하였다. 더구나 아까의 민호의 마지막 마디가 가슴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운 몸을 바닷물에 잠그고도 싶은 생각이 났다. (주화를 무슨 낯으로 대하누.) 생각할수록 엄청났다. 처녀가 물동이를 깨뜨린 느낌을 지나 이제는 하늘을 뒤엎은 듯한 땅을 깨뜨려 놓은 듯도 한 느낌이었다. 주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나 현재 그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금단의 길이다. 그 금단의 과일을 딴 것은 과시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허락하지 못할 장난이요 죄악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조관이라도 이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주리야는 그가 저지를 죄를, 잘못된 몸을 어떻게 처치하였으면 좋을지 나중에는 몸부림이 날 뿐이었다. (진작 그때에 왜 반항하지 못하였던가.) 이 생각이 더한층 그의 마음을 에우고 수치의 불을 끼얹었다. 붙잡을 수 없는 애욕의 힘을 이제는 오히려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 결과가 올 것을 처음에 전연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결과가 있은 후의 이 후회, 환멸, 슬픔— 이것이야말로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예측 못 한 것이었다. 불어나는 고무풍선을 그것이 터질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힘껏 불어 기어코 터뜨리고 그 후에 새삼스럽게 뉘우치는— 그 심사였다. 사랑— 미움— 후회. 이 갈래갈래의 마음의 줄기와 모순된 심정— 주리야는 이제 이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수건을 바닷물에 축여 얼굴을 식히면서 그는 모래펄을 거닐다가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 위에서 다시 행길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어수선한 감정은 차츰 정리되고 통일되어 이제는 다시 마지막의 한 점인 주화에게로 향하였다. 한 점으로 집중되니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다. (주화를 어떻게 대하누—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옳겠지— 그러면 대체 주화는 무엇이라고 할까— 나를 어떻게 조처할까......) 주화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항상 극히 순진하고 깨끗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화의 앞에 속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주화에게 바친 그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다. 그의 양심—그것은 곧 주화에게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은 이제 그를 괴롬의 바퀴 속에 넣고 끝장이 되었다. 「아씨, 아씨, 어데까지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신발 소리 역시 여관집 하녀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바람 쏘이러 나왔소.」 수상한 것을 느낀 듯한 하녀의 태도를 살피고 주리야는 시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그러서요.— 이렇게 일찍이.」 하녀는 황망하던 그의 양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미소를 띄우면서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제가 이 근처를 안내하여 드릴까요?」 「그만 거닐고 들어가겠소.」 섣불리 하다가 도리어 마음속을 들여다 보일까 두려워하여 주리야는 발을 돌렸다. 하녀와 나란히 서서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민호가 가버렸을까, 아직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층에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민호는 아직 있었다. 화로전을 끼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주리야가 들어가도 즉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보면 또다시 기억이 소생되는 까닭에 주리야는 딴전을 보면서 한구석에 가서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주리야.」 민호는 고개를 들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과실이라는 것도 있지 않우. 이렇게 불쾌한 결말을 맺은 채 섭섭하게 헤어질 거야 있소?」 「............」 「주리야의 생각대로 나의 과실로 돌려보내더라도 앞으로나 뜸 없이 지냅시다. 너무 태도를 선명히 해서 도리어 남의 눈에라도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우.」 「모든 것을 숨기잔 말이지요?」 「어젯밤에 주리야가 말한 것같이 우리에게는 로맨티시즘도 필요하다니 한 폭의 로맨틱한 기억으로 싸 두면 그만 아니요.」 「나는 먼저 가요.」 짐을 다 싸고 손쉽게 단장한 주리야는 민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슈우트 케이스를 들고 문을 나갔다. 「주리야, 주리야.」 들은 체 만 체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의아해 하는 하녀에게 두어 마디 귓속말로 이르고 이른 아침의 여관을 나갔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탈 생각이었다. 오빠들의 그 뒷소식을 모르는 까닭에 집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우선 당분간 「아리랑」의 한라에게 몸을 둘 작정으로. {{문단 그림}} 「아침부터 행장을 하고 오늘은 또 웬일이야.」 주리야가 인천서 오는 아침 차를 내린 길로 바로 아직 가게도 열지 않은 「아리랑」의 문을 두드렸을 때 눈을 비비며 나온 한라가 의아하여 문을 열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어데를 가는 셈야?」 「여기까지 왔지.」 「여기에 오는데 가방까지 들어야 하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주리야는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풀썩 주저앉으며, 「—시골서 오빠들이 올라온 까닭에 집을 쫓겨 다니는 셈야.」 「진작 이리로 오지 왜— 잡히면 경이겠지.」 「처음부터 오기도 미안해서—」 어름어름 그 자리를 미봉하는 주리야를 한라는 손을 끌어 뒷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걱정 말고 방으로 들어와요.」 두터운 벽을 끼고 가게 뒷편에 붙은 넓직한 한 간의 방— 한라의 살림방이요 침실인 그 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루를 앞두고 의롱 그릇과 잠자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만 숨어 있으면 거리가 뒤집혀도 몰라요.」 주섬주섬 잠자리를 걷고 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당분간 있어 볼까?」 주리야는 천연스러운 자태를 지었다. 그러나 한라가 아침 준비로 밖에 나가 덜거덕덜거덕 하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에는 일단락의 침착이 오고 그 맑은 침착 속으로 모든 비밀과 고민이 새로 살아나왔다. 뒷골목으로 열린 창으로는 늦은 햇발이 흘러 들어와 창 기슭에 놓인 화분의 「제라늄」을 짙은 분홍으로 물들였다. 그 맑고 신선한 분홍이 주리야의 흐린 마음에는 지나쳐 무거운 짐이었다. 같은 붉은 빛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나 「제라늄」의 신선한 분홍은 주리야의 붉은 마음에는 도리어 눈부신 것이었다. 마치 맑은 태양의 빛이 어두운 눈에는 지나쳐 눈부신 것과도 같이. 그 눈부신 「제라늄」과 동무하여 가는 한라의 순진한 열정— 한 사람에게 줄기차게 바치고 있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그것이 불현듯이 부럽게 생각되었다. 그 한라의 열정과 나의 마음과는 마치 달라진 흙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리야가 생각할 때 한라의 그 단순한 살림이 주리야의 더럽힌 몸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제라늄」의 감격에서 눈을 돌린 주리야에게 문득 책시렁에 끼인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주리야는 새삼스런 감동에 끌려 이미 졸업하여 버린 그 한 권의 책— 코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시렁에서 뽑아냈다— 의지할 곳을 찾는 그의 고독한 마음에 그것은 마치 기다만한 기둥같이도 생각되어서. 두터운 책을 군데군데 펴서 무의미하게 구절구절을 읽어 가며 그의 마음의 동감 되는 대문을 억지로 찾으려고 애썼으나 그의 현재의 처지를 변호하여 줄 만한 대문이 쉽사리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펄펄 넘어가는 책장 틈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나왔다. 푸른 검사의 도장이 찍힌 현저동에서 온 편지— 무심히 뒤를 번기니 연필로 박아 쓴 두어 줄의 글이 또렷이 눈에 띄었다. —「한라! 외로운 세상에 있으니 그 무슨 든든한 믿을 것을 찾는 마음 뿐이오. 쇠같이 굳은 한라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마음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오. 주의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든든히 믿는 마음— 이것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는 것임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소......」 결코 감상적이 아닌 이 외로운 마음의 고백이 주리야의 가슴을 에웠다. 영오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한라의 굳은 심지가 주리야의 마음을 울렸다. 유리그릇과도 같이 깨지기 쉬운 그의 마음이야 드디어 한 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임을 주리야는 느꼈다. 신발 소리를 듣고 주리야는 엽서를 책 틈에 날쌔게 감추어 버렸다. 한라가 쟁반에 조반을 날라온 것이었다. 「대단히 설핀 것이지만 이것이 조반이야.」 그다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한라는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진한 커피, 덩어리 채로의 빵, 통째로의 버터— 뜨거운 커피의 피어오르는 김이 향기로왔다. 「그러나 이것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사치해— 이 한 잔의 커피의 향기가 목에 걸리는 때가 많은걸.」 회포를 말하면서 차를 권하다가 한라는 문득 주리야의 손 밑에 펴져 있는 책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붉은 사랑>은—」 하고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보고 싶어서.」 「한라는 코론타이즘을 어떻게 생각허우.」 「코론타이즘— 성생활에 관한 자도요 이단이지 결코 새로운 성도덕의 수립이 아니야—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가령 왓시라사의 행동은—」 「음탕한 계집의 난잡한 행동에 지나지 못하지.」 「굳건한 투사적 공로는 어떻게 허구.」 「투사적 공로는 공로요 사랑은 사랑이지, 그와 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거야. 주의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은 감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랑의 감각을 주의의 양심으로 카무프라즈하려고 한 곳에 왓시릿사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즉 문란한 애욕을 감추려고 주의를 내세웠단 말이지?」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애욕을 난용한 것은 어떨까 생각해. 애욕 생활이 어지러운 이상 그것은 동물적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어젓한 주의의 간판으로 둘러 가리우는 것은 약고 간사한 짓야— 왓시릿사는 결국 굳건한 투사였는지 모르나 반면에 음탕한 둥물이지 무어야.」 「사람이 아니요, 동물!」 한라의 마치 재판관의 그것과도 같은 엄격한 자세에 주리야는 그도 그렇게 이렇게 돌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왓시릿사가 동물이면 나는 무엇인고.) 이 명제가 가슴 속에 뱅 돌면서 주리야는 한라의 앞에서 의젓이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듯하였다. (—왓시릿사에게는 굳건한 투사적 일면이나 있지. 나는 다만 달뜬 불량소녀 밖에는— 단순한 동물밖에는 못 되는 셈이다.) 한라가 가게에 나가 손님을 맞으며 덜거덕덜거덕 일보고 있는 하룻동안 주리야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마음을 죄이면서 솟아올랐다. 한낮이 지나 손님이 잠간 비었을 때 한라가 과일 접시와 먹을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왔다. 한라가 쟁반을 책상 위에 놓기가 바쁘게 밖에서 별안간 귀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라 언니! 한라 언니!」 한라는 숨도 돌릴 새 없이 황망히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니 남희, 웬일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예요.」 듣고 보니 갈데없는 남희의 목소리였다. 한라의 의아하는 태도와 남희의 조급한 양이 그들의 목소리 만으로도 주리야에게는 또렷이 짐작되었다. 「무슨 급한 일로—」 「저—」 남희는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동안을 띄었다가, 「민호씨 혹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급히 말을 이어 버렸다. (—아니 민호를 왜?) 민호라는 한 마디가 마치 철퇴같이 머리를 내려친 듯이 주리야는 순간 아찔하였으나 다시 숨을 죽이고 전신을 귀 삼아 문밖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1회분 연재 누락 == 반둥건둥 == 짧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리야는 앉아 그를 지키고 있는 주화를 발견한 순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에게 대하여 용솟음치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정리하고 든든한 배짱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혼수상태에 빠질 첫 순간과 같이 여전히 마음이 설레고 골이 띵하였다. 「정신 좀 차렸소.— 대체 웬일요. 별안간 혼몽상태에 빠졌으니.」 주화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퍽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주화를 그렇게 정면으로 순간에 대하여 버리니 도리어 옹졸하고 있던 마음이 턱 놓이며 그의 귀익은 목소리에 든든한 안도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리야의 일신이 안전하였으니 다행이오.」 골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수건에 새로 물을 축여 이마 위에 대면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서 주리야는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언제 올라 오셨어요.」 「시골 일이 웬만큼 정리된 곳을 좋아라 하고 어젯밤에 뛰어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이곳 일이 뒤틀려 있는구려. 박선생 남죽네 민호 할 것 없이 전통이구려.」 민호마저 들어간 것을 그보다도 먼저 주화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주리야는 돌연히 무서운 생각이 났다. 민호가 들어간 것조차 알고 있다면 그럼 그것까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리야까지 한몫에 쓸리지 않았나 염려하였더니 이런 다행은 없소.— 이곳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었소. 언제 별안간 바람이 휩쓸려 올는지 모르는 판이요.」 하고 이마의 수건을 잠깐 떼고 낯색을 엿보면서 주화는 말을 이었다. 「몸이 웬만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집을 피해야 할 것이요.」 「아니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이제 또 새로운 커다란 일이 눈앞에 닥쳐 있음을 듣고 주리야는 마음이 옹송망송함을 깨달았다. 「웬만하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구려. 나는 그동안 정리할 것을 대개 정리하여 주겠소.」 하고 주화는 새삼스럽게 조급하게 주리야의 옆을 떠나 책상께로 갔다. 책시렁에서 책을 뽑아내 책장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도 하고 책상 빼닫이를 뽑아 편지와 종잇장을 갈피갈피 뒤지기도 하였다. 그 급스러운 거동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도 마치 부채로 부치는 듯이 차차 조급하게 설레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야말로 속히 허물을 고백하여야 할 알맞은 기회인 것이다. 「이것 보세요.」 그러나 눈을 꼭 감고 이 한 마디를 말하고는 주화가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볼 것을 느끼고 주리야는 말도 잇지 못하고 이불을 푹 써버렸다. 「일어나지 못하겠단 말요.」 주화가 와서 이불을 벗기고 그를 들여다볼 때에 그는 황당하게 딴소리를 할 수밖에는 없었다. 「몸이 거북해서 저는 못 일어나겠어요. 어서 혼자나 몸을 피하여요. 저는 이곳에 누운 채 일을 당하겠어요.— 죄진 몸이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지막 마디를 주리야는 뼈 있는 말로 한 셈이었으나 그 풍자를 깨닫지 못한 주화는 주리야의 자포적 태도를 도리어 위험하다 생각하며 애써 그를 일으키려 하였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고 어서 기운을 내보아요. 정 맥이 없다면 차를 부르리라.」 「차는 무슨 차예요.」 주화의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는 미안한 생각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지요.— 일어나기는 해도 몸을 피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렇게 유한 소리만 하오. 이야기도 할 때가 따로 있지 이 시급한 경우에.—」 도리어 약간 화를 내며 주화는 다시 책상께로 가서 주섬주섬 정리를 계속하였다. 그러고 보니 또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려서 주리야는 조급한 마음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피신 문제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가로놓여 있어요.」 밖에서 돌연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리야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주화는 잠시 쫑그렸다가 문서를 주섬주섬 모아들고 뒷문으로 살며시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엉겼던 긴장이 풀어지자 주리야도 일어서서 날쌔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화는 부엌에서 들고 나간 문서를 불사르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부스럭 거리 더니 뒤로 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 벽장 속을 들추었다. 주리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에 주화는 다시 뒤로 돌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제가 진 죄를 고백하면 놀라지 않으실 테예요. 괴로워하지 않으실 테예요.— 어떤 죄를 지었던지 같이 데리고 가시겠어요. 죄— 그렇지요. 저는 적어도 아직까지 큰 죄라고 생각하여요.」 말은 평범하였으나 주리야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 낸 것이었다. 「아니 무슨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단 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갑시다.— 나는 어쩐지 커다란 위험이 일각일각 가까이 닥쳐오는 듯한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소.」 「저의 고백— 그것이 커다란 위험일는지도 모르지요.」 「아, 웬일인지 몸이 떨리누나.」 사실 알 수 없이 몸을 떨면서 주화는 채 손대지 못한 책상 위 다른 문서를 대충대충 골라서 두 손에 나눠 쥐었다. 「자, 이 길로 바로 나갑시다. 내 뒤를 곧 쫒아 나오구려.」 하고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앞문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 말할 것은 말해 버려야 시원하겠어요.」 주리야가 조바심하고 외칠 동안에 벌써 문밖에 나가 버린 주화는 웬일인지 별안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으흣!」 다음 순간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에 든 문서를 마저 불살라 버리려는 셈이겠지 생각하고 문을 홱 연 주리야 자신도 깜짝 놀라 버렸다. 밖에는 어느 새인지 주화의 직각대로 올 것이 와 선 것이었다. 몇 분 해서 주화와 주리야는 조금의 거역도 없이 순순하게 관할 서원의 앞을 섰다. 위험이 올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일각일각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죄이거니 하고 느낄 때 주리야는 주화의 일신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이라 저무는 거리를 남녀가 나란히 서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걸어가기가 너무도 겸연쩍어서 주리야는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다. 사흘이 두 번 겹치고 세 번 겹쳐 열흘 만에 주리야는 단독 서를 풀려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건에 직접 관계가 엷고 죄가 가벼운 탓이지 주화들의 풀릴 날은 바다같이 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를 여러 번 거듭 하여야 할 것을 주리야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옷고름을 줄기줄기 뜯기우고 옷폭을 찢기운 너불너불한 주제로 거리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첫경험인 주리야는 며칠 동안에 격조변이 마치 여러 해 동안의 고생과도 같이 몹시도 길고 험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글자대로 지옥의 괴롬이었다. 그가 이전에 경솔한 달뜬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운동의 현실이란 지긋지긋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 길의 열정을 꾸준히 가짐이 범상한 사람의 능히 할 바가 아님을 알았을 때에 그런 괴롬을 거듭하여도 주저앉는 법 없는 주화들의 앙칼진 의지야말로 하늘 위에 태양과도 같이 높고 장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모욕—이러는 점잖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대접— 그 속에서 정신도 정신이려니와 주리야의 육체는 완전히 피곤하고 쇠잔하였다. 그 위에 더한층 괴로운 것은 돌연히 처음 당하는 커다란 생리적 변화가 온 것이었다. 들어간지 며칠 안 되어서부터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돌연히 식욕이 줄고 구역질이 나고 간간히 복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갈수록에 더하여 갔다. 취조실에서 받는 괴롬보다도 어두운 우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이 생리적 괴롬이 그에게는 더한층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의 문을 풀려나온 날, 불현듯이 이 증세는 더욱 심한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밝은 거리를 걸으려니 골이 뒤흔들리고 현기증이 나며 느긋느긋 속이 뒤집혀 갔다. 넓은 거리를 걷다가 그는 몇 번이나 머물러 서서 한참씩 구역질을 하다가는 걷고 하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괴롬에 지쳐서 그는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꺼릴 여가조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육체적 변화를 불안히 여겨 집에도 들릴 새 없이 그는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았다. 한라의 권유로 내친 걸음에 뒷골목의 조그만 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맥박을 보고 청진기를 대고 일정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주리야의 오도깝스런 불안의 표정을 웃는 듯이 침착하게 말하였다.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큰 변화야 큰 변화지요.」 의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고 아직도 인생에 미흡한 순진한 주리야의 태도를 귀엽게 여기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사 든지 벌써 서너 달째 되는 것 같소이다.」 「네?」 철없는 주리야는 아직도 의사의 말의 뜻을 몰라서 알지 못할 그의 선고에 놀라며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경사라니요.」 「짐작해 보시구려 」 하고 은근히 그의 배를 노려보는 의사의 시선을 살핀 주리야는 처음으로 그의 뜻을 깨닫고 홀연히 놀라며 그도 모르게 배를 부둥켜 안았다. 「아니 그럼—.」 귓불을 별안간 발갛게 물들이며 주리야는 의사의 선고에 요번에는 짜장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걱정하실 것은 없소이다. 달포쯤 지나면 그런 증세는 다시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에 돌아갈 것이니까요.」 쫒기우는 듯이 급스럽게 병원을 나온 주리야는 거리의 찬바람을 쏘이면서 걸어도 화끈 다는 얼굴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변이 너무도 일시에 닥쳐온 까닭에 그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흥분과 부끄럼 사이로도 주리야는 은근히 손꼽아 석 달을 세어 올라가 석 달 전의 주화와의 열정의 기억을 마음속에 되풀이하여 보았다. 물론 시일에 틀림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일의 확실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부끄러운 생각에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 인생의 큰 변화가 한결같이 거짓말 같이만 생각되었다. {{문단 그림}} 집으로 돌아온 주리야는 그날부터 외로운 방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서에서 겪은 여러 날 동안의 피곤이 일시에 북받쳐 오는 위에 육체적 변화가 더욱 심하였던 까닭이다. 무시로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고 정신이 어찔어찔하였다. 몹시 몹시 으스스하여서 크게 병든 것과도 같은 느낌이 났다. 이불을 쓰고 누우니 할 수 없이 마음이 열어져서 그도 모르는 결에 신음 소리조차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 생각이 문득 가슴 속에 새어 들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흐르기까지 하였다.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병이 커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괴로운 몸을 더한층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밤을 새우고 날이 지나면 증세가 엷어지고 몸이 한결 거뿐하곤 하였다. 병의 괴롬이 엷어지면 이번에는 마음의 괴롬이 불현듯이 짙어 갔다.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 데서 생기는 일종의 공포와 특수한 그의 경우에 따르는 수치의 념— 이 두 가지의 무거운 감정이 저울추같이 그의 마음을 내려눌렀다. 더욱이 설명할 수 없는 수치의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경박하고 미흡한 그가 벌써 여자의 마지막 계단인 모성이 된다는 생각에 그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안타까운 마음에 배를 두드리고 듣고 하였다. 「결국 그 수밖에 없어.」 며칠 동안 생각하고 번민한 끝에 그는 기어코 마지막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갈피갈피 생각하고 망설이던 끝에 밤이 어두워짐을 살펴 가까운 매약점을 찾았다. 누런 기름병을 치마폭에 감추어 들고는 계면쩍은 마음에 얼른 가게를 나와 버렸다. 그날 밤 그는 큰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생각을 억제하면서 한 종지 남짓한 피마자 기름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예측은 한 바였으나 창자를 훑어 내리는 듯도 하게 목통이 심하였다. 학교 다닐 때에 잡지 등속에서 손쉽게 얻은 간단한 지식이니 완전한 것이리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나 복통이 너무도 심하고 보니 그의 경솔한 조치가 다시 후회되었다. 방바닥을 설설 헤매이고 심하리만치 배가 조이고 치밀든 끝에 이어서 심한 설사가 왔다. 배 속을 한바탕 쪽 씻어내는 듯하였다.— 심히 괴로운 며칠 밤을 지내고 나니 전신이 나른하게 지쳐 버려서 그는 다시 그 방법을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물론 한 번 시험에 효과가 있을 리는 없고 생리적 상태는 그것을 먹기 전과 일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더 손찌검하고 싶지 않었다. 며칠 동안의 무한한 괴롬이 마치 그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는 형벌같이도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모성에 대한 부끄러운 생각쯤은 그 괴롬에 비기면 하잘 것 없는 불필요한 일종의 마음의 사치일 뿐이었다. 자연에 반역함이란 허락될 수 없는 헛된 노력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육체를 가지고 깨달았다. 이러한 생각 외에 그에게는 돌연히 주화의 생각이 났다. 그의 돌아올 날을 고백하지 못한 채 그를 뺏겨 버렸다. 그의 돌아올 날은 멀다. 그가 남겨놓고 간 사랑의 유물— 이것이 주리야에게 끼쳐진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그 사랑의 유산조차 없애 버림은 주화와의 인연을 스스로 즐겨서 끊어 버리는 셈이다. 사랑하는 주화에게 대하여 아직까지도 간곡한 그의 심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처럼 끼쳐진 유물을 정성껏 지키고 길러감이 진 허물의 배상도 되고 주화에게 대하여 변치 않은 사랑의 표현도 되리라고 주리야는 생각하였다. 「딴생각 말고 오는 것은 오는 대로 받아들이자.」 며칠 만에 결국 주리야는 이 결론을 마음속에 굳게 깨달았다. 며칠 전까지 품고 있던 어리석은 생각과 경솔한 행동이 너무도 무의미하였던 것을 뉘우쳤다. 새로운 생각에 새로운 인생이 열린 듯이도 마음이 즐겁고 유쾌하였다. 앞이 훤히 열리고 그의 밟을 길이 또렷이 내다보였다. 밝은 생각과 함께 육체의 괴롬도 차차 덜하여 갔다. 자리에 누운지 일주일 남짓하여서 그는 쾌한 심신으로 자리를 일어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집안이 심히 어지러웠다. 책시렁, 책상, 벽장 속 등은 그들이 검거될 그때의 어지러운 꼴 그대로였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반 날 동안에 대충대충 집안을 정리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의 정리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저윽히 솟았다. 웬만한 것은 있던 대로의 위치에 그대로 두고 책, 옷가지, 일용 도구 등에서 직접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눈에 띄는 곳에 따로 모아서 쌓아 놓았다. 책시렁 벽 위의 로오자의 초상화도 든손 뜯어서 따로 내놓은 책갈피에 끼어 두었다. 나중에 책상 빼닫이 속에서 저금 통장이 나왔다. 처음 서울에 올 당시에 지니고 왔던 삼백에 남짓한 돈을 예금하였던 우편 통장이었다. 그는 시험 삼아 통장을 살펴보았다. 예금란은 단 한 줄 금액의 기입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의 칸은 노동자 없는 공장 속과도 같이 텅 비인 헛간임에 반하여 아랫란은 끝 페이지까지 한 줄의 빈칸도 없이 가득 숫자가 들어 차 있다. 한 덩이의 살 위에 새까맣게 엉겨서 피를 빨고 있는 무수한 모기떼의 꼴과도 같은 가느다란 액수의 숫자가 예금란의 피를 다 빨고 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죽어 쓰러져 있는 격이었다. 혹은 그 무수한 생명 없는 숫자를 생산이 없는 공장 마당에 쌓인 소비의 쓰레기라고도 할까. 그는 장난삼아 그 많은 숫자를 은근히 계산하여 보았다. 행여나 얼마간의 잔액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는 아니었으나 씻은 듯이도 여유가 없었다. 계산을 자칫 잘못하면 아랫란의 합계가 예금 액수를 훨씬 더 지날 지경이었다. 「차 한 잔 값도 없구나」 주리야는 중얼거리고 픽 웃어 버렸다. 지나간 생활할의 해골이 되어 버린 의미 없는 통장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쪽쪽 찢겼다. 줄기줄기 찢겨서 떨어지는 숫자의 한 줄 한 줄이 주리야의 지나간 반 년 동안의 생활의 역사의 한 줄 한 줄이 되어서 펀득펀득 그의 눈을 스쳤다. 다 찢고 나서 그는 새삼스럽게 책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위에 늘 놓여 있던 「벙어리」도 벌써 깨트려진지 오래되지 않었던가. 그러나 주리야는 이제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날이 있음이 마땅하다는 듯이 태연히 시선을 다시 옮겨 버리고 무릎 위에 수북히 쌓인 통장의 조각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자리를 일어섰다. 장난삼아 손아귀에 든 것을 훠 치트렸다. 낙화와도 같이 방 안에 그득히 날리는 무수한 조각 무수한 숫자— 그것은 곧 청산되는 주리야 자신의 지난 생활의 단편 단편이었다. 「지날 것은 지나고 올 것은 오너라」 다 떨어져 버린 낙화를 보고 이렇게 새삼스럽게 중얼거렸을 만큼 주리야는 그도 모르는 동안에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아서 「아리랑」까지 갔을 때에는 흥분도 사라지고 다시 침착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병중에 두어 번이나 간호하려 와 준 친절을 치사한 후에 주리야는 전에 없던 진득한 어조로 돌아갔다. 「언니와도 아마 마지막 의논일까 보우.」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새삼스럽게.」 「일신의 진퇴 문제이니 나로서는 큰 문제이구 말구요.」 뒤미처 뒤를 이어서 주리야는 「다 들어간 뒤에 혼자 남어 있어도 하릴없어 당분간 시골이나 내려가 있을까 해서.」 「잘 생각했지.」 생각도 판단도 할 새 없이 너무도 서글픈 대답이기에 주리야는 한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라의 목소리에는 진실과 애정이 넘쳐 있음을 알았다. 「일없이 여기 있어야 별 수 있소? 더구나 무거운 몸을 가지고.」 「몸도 조심할 겸 부끄러운 생각 무릅쓰고 어떻든 잠깐 동안 내려가 있어야겠수.」 「집에서 용납한다면야 제일 좋은 수지.」 「여린 부모의 마음에 용납하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들어간 사람의 뒷시중인데.」 「이곳 일은 걱정 말우. 손 미치는 대로 내 돌보지 않으리.」 「그렇게 해 준다면 오죽이나 고맙겠소— 그럼 이곳 일은 언니만 믿어요.」 「그 일만은 길게 말하지 마우.」 끝을 막고 한라는 어조를 변하여 「이왕 온 김에 오늘 저녁은 여기서 나와 만찬이나 같이 합시다.」 하고 일어나서 가게 안을 주섬주섬 걷고는 저녁 준비에 착수하였다. 주리야도 나가서 같이 거들었다. 마지막 만찬이라고 한라는 평소보다 공을 들여 로오스를 사다 볶고 커다란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장황히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밤이 깊어갔다. 자기의 계획에 동무의 동의와 권유를 받은 주리야는 앞길이 똑바로 내다보여 자연 마음이 놓이고 이야기가 잦았다. 기어코 집에 돌아가기도 귀찮고 하여 늦은 밤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자 버리기로 하였다. {{문단 그림}} 이튿날 아침 한라와 같이 일어난 주리야는 한라의 서대문 행을 좋은 기회 삼아 자원하여 동행하기로 하였다. 필요와 호기심은 늘 느껴오면서도 현저동을 찾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차입할 옷보퉁이를 든 한라를 따라 영천행 버스를 내렸을 때에는 알 수 없이 마음이 수선거렸다. 차입소의 광경 멀리 바라보이는 무악재 고개 긴 벽돌담 육중한 철문— 처음 보는 이 모든 풍경이 주리야에게는 심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동무에게 책을 차입하려 왔다고 칭탁하고 그는 공교로히 입문을 허락받았다. 한라의 꽁무니를 따라 뜰, 사무소, 차입물 취급소, 영치계를 차례차례 지나서 나중에 대합실에 들어갔다. 별것 아니라 선생을 따라 견학을 온 셈이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한 마음으로 대합실 안에 웅중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양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벽돌담 하나를 격한 세상임에 지나지 않으나 그 안에도 공기는 사파의 그것과는 손바닥을 번진 듯이 다른 것이었다. 얼굴마다 서마서마한 어두운 기색이 나타나 그것이 빚어내는 대합실 안의 분위기란 일률로 침울한 것이었다. 갓난애를 업고까지 와서 면회를 거절당한 여인네는 여러 사람의 눈앞을 꺼릴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놓고 울어 버렸다. 차마 진득이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어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자리를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한라가 면회를 마치고 차하물을 찾았을 때는 오정을 훨씬 지난 뒤였다. 다시 철문을 나왔을 때에는 벽돌담의 그림자가 땅 위에 길게 떨어져 있었다. 무악재 고개에서는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내렸다. 「주화도 장차 저 속에서 살림하게 되렸다.」 불필요한 감상은 떨쳐 버리려고 애쓰면서도 주리야는 모르는 새에 담 너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 좋은 곳을 견학하였다고 기뻐하면서 주리야는 다시 버스를 탔다. 서울 와서 반 년 동안을 반둥건둥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지냈으나 그러나 적어도 여러 가지의 분위기를 보고 안 것이 장차를 위한 일종의 예비 교육이었다고 그는 차 중에서 곰곰히 생각햐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 주리야는 가방 속에 주섬주섬 행장을 수습하였다. 행장이래야 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올라올 때에는 바스켓이던 것이 지금에는 큰 여행용 가방으로 변한 것이 생활이 조금 복잡해진 증거라면 증거일까. 따로 내놓았던 책 옷가지 등이 그래도 가방 속에 뽀듯이 찼다. 나머지의 짐과 세간 그릇은 일절 한라의 손에 맡길 작정이었다. 뒷정리는 한라에게 부탁할 생각으로 대강 그대로 버려 두고 대문만 걸고 가방을 들고 또 한라에게로 갔다. 주리야의 빈 주머니 속을 짐작하고 한라는 이미 차표까지 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한 커피를 대접하여 주었다. 그날도 한라는 가게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온전히 주리야의 동무하여 주었다. 모든 일을 두 번 세 번 겹쳐 부탁하고 주리야는 늦은 밤 막차에 몸을 던졌다. 침착한 속으로도 마음이 약간 설렘을 느꼈다. 출발의 종이 울리고 플랫폼 위에 보내는 사람, 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날릴 때에 주리야도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라를 향하여 플랫폼을 향하여 설레는 마음에 갈팡질팡 어지러운 이별의 말을 던졌다.— 「잘 있거라 서울아— 잠깐 동안의 작별이지 영 이별은 아니다— 다음에 올라올 때에는 나도 사람 되어 오겠지— 잘 있수 한라— 몸이 충실해지면 또 올라올게— 뒷일 잘 보아 주세요— 편지 자주 하고......」 :作者後言.— 「朱利耶」의 반둥건둥의 成長과도 같이 作品 「朱利耶」도 이만큼 길러서 우선 여기서 끝을 막고 붓을 갈아 「朱利耶 後日譚」을 쓸 날을 讀者諸賢과 같이 기다릴 作定이다. ==저작권== {{PD-old-70}} o8qfg4vh5jsfdc2lsasq1u2dzfla8h9 페이지:대법원 2020오1.pdf/1 250 111861 426861 426851 2026-05-04T23:51:33Z Aspere 5453 42686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Revi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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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ᄉᆞᆷ 일인지 아지 못ᄒᆞ고 좌우를 분변치 못ᄒᆞ고 피ᄒᆞᆯ 바를 아지 못ᄒᆞ야 ᄒᆞᆯ 즈음에 총을 ᄇᆞ리고 다른 총을 들고 {{u|금요}}ᄃᆞ려 ᄯᅩ 무러 ᄀᆞ... 42686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흐니 {{u|금요}}는 나보다 잘 노흔 고로 두 사ᄅᆞᆷ을 죽이고 세 사ᄅᆞᆷ을 샹ᄒᆞ엿고 나는 ᄒᆞᆫ 사ᄅᆞᆷ을 죽이고 두 사ᄅᆞᆷ을 샹ᄒᆞᆫ지라 뎌희가 크게 놀나 황망ᄒᆞ야 무ᄉᆞᆷ 일인지 아지 못ᄒᆞ고 좌우를 분변치 못ᄒᆞ고 피ᄒᆞᆯ 바를 아지 못ᄒᆞ야 ᄒᆞᆯ 즈음에 총을 ᄇᆞ리고 다른 총을 들고 {{u|금요}}ᄃᆞ려 ᄯᅩ 무러 ᄀᆞᆯ오ᄃᆡ 쥰비 되엿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되엿ᄂᆞ이다 ᄀᆞᆯᄋᆞᄃᆡ 노흐라 ᄒᆞ고 ᄯᅩ 일시에 노흐니 이번에는 즁탄을 너흔 고로 두 사ᄅᆞᆷ이 너머지고 여러 사ᄅᆞᆷ이 샹ᄒᆞᆫ지라 뎌희들이 피 흐름을 보고 소란ᄒᆞᆫ 가온ᄃᆡ ᄯᅩ 셰 사ᄅᆞᆷ이 샹ᄒᆞ야 너머지거늘 내가 {{u|금요}}ᄃᆞ려 닐ᄋᆞᄃᆡ 나를 ᄯᆞ라 오라 ᄒᆞ고 ᄌᆡ여 노흔 총을 밧고아 들고 ᄯᅡ에 걱구러진 ᄇᆡᆨ인의게로 달녀 가니 뎌희가 일제히 흣허지며 ᄇᆡᆨ인을 잡으려 ᄒᆞ던 두 사ᄅᆞᆷ도 달녀 가셔 ᄇᆡ에 ᄯᅱ여 올나 도망ᄒᆞ거늘 {{u|금요}}를 명ᄒᆞ야 총을 노흐라 ᄒᆞ니 {{u|금요}}가 달녀 가셔 노흘ᄉᆡ ᄇᆡ속에 여러 사ᄅᆞᆷ이 잇다가 모다 마져 너머지더니 조곰 잇다가 두 사ᄅᆞᆷ이 도로 니러 서더라 이ᄯᅢ를 ᄐᆞ셔 그 ᄇᆡᆨ인의 ᄆᆡᆫ 것을 칼노 버히고 {{du|포도아}} 말노 무르니 뎌가 {{du|로마}} 말노 ᄃᆡ답ᄒᆞᄃᆡ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ᄒᆞ나 힘이 업서 말을 일우지 못ᄒᆞ며 니러나지도 못ᄒᆞᄂᆞᆫ지라 이에 독쥬와 ᄯᅥᆨ을 주어 먹게 ᄒᆞ고 ᄯᅩ 무러 ᄀᆞᆯᄋᆞᄃᆡ 어ᄂᆞ 나라 사ᄅᆞᆷ이 ᄃᆡ답ᄒᆞᄃᆡ {{du|에스바늬울늬}}라 ᄒᆞ니 이는 {{du|셔반아}}인이란 말이라 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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ᄶᅵᆨ을ᄉᆡ {{du|셔반아}}인이 총을 가지고 ᄶᅩᆺ차 가나 샹하게 ᄒᆞᆯ 힘이 업슴으로 두 사ᄅᆞᆷ이 도망ᄒᆞ야 수풀 ᄉᆞ이에 숨음을 보고 ᄶᅩᆺ차 가셔 그 ᄒᆞ나를 죽이매 그 ᄒᆞ나는 효용ᄒᆞ야 물속으로 ᄯᅱ여 드러 가셔 ᄇᆡ에 긔여 오르니 처음으로 총 노흘 ᄯᅢ에 세 사ᄅᆞᆷ이 죽고 두 번재 노흘 ᄯᅢ에 두 사ᄅᆞᆷ이 죽고 {{u|금요}}는 ᄇᆡ속에 잇ᄂᆞᆫ 세 사ᄅᆞᆷ을 죽이고 먼져 샹ᄒᆞ엿던 쟈 두 사ᄅᆞᆷ을 죽이고 {{du|셔반아}} 사ᄅᆞᆷ은 세 사ᄅᆞᆷ을 죽엿고 네 사ᄅᆞᆷ은 샹ᄒᆞ야 너머지고 네 사ᄅᆞᆷ은 ᄇᆡᄐᆞ고 피ᄒᆞ야 갓스니 모도 이십일인이라 ᄇᆡ에 오른 쟈가 총을 피ᄒᆞ야 도망ᄒᆞ니 {{u|금요}}가 두 번이나 총을 노흐나 너무 멀어 밋치지 못ᄒᆞᆷ으로 ᄇᆡᄐᆞ고 ᄶᅩᆺ차 가려 ᄒᆞ거늘 내가 올히 녁여 ᄇᆡ에 올나 {{u|금요}}를 불너 올닐 ᄯᅢ에 보니 그 ᄇᆡ속에 오히려 ᄒᆞᆫ 사ᄅᆞᆷ이 결박되여 잇ᄂᆞᆫ지라 그 결박을 풀너 주나 긔동ᄒᆞ지 못ᄒᆞᆯ ᄲᅮᆫ 아니라 말ᄒᆞᆯ 힘도 업서 ᄒᆞᄂᆞᆫ 고로 {{u|금요}}를 불너 위로ᄒᆞ고 독쥬를 주어 마시우라 ᄒᆞ엿더니 {{u|금요}}가 ᄇᆡ에 올나 드려다 보다가 ᄭᅡᆷ작 놀나 달녀들어 안고 울며 입맛초며 ᄯᅩ ᄯᅱ여 니러나 우스며 춤추고 크게 소ᄅᆡ 지르다가 다시 몸을 굽흐려 울며 그 압헤 무수히 졀ᄒᆞᄂᆞᆫ지라 그 연고를 무르나 뎌가 밋친 것 ᄀᆞᆺ고 ᄎᆔᄒᆞᆫ 것 ᄀᆞᆺᄒᆞ야 ᄃᆡ답지 못ᄒᆞ다가 나죵에야 ᄌᆞ긔 부친이라 ᄒᆞ거늘 내가 ᄉᆡᆼ각ᄒᆞᄃᆡ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kmcp26b2x26qckc1rfyll5v9lk6ty7i 페이지:그루쇼 표류긔(1925) 제임스 게일, 이원모 역.pdf/81 250 111886 426869 2026-05-05T11:37:29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이런 야만이 그 아비의게 효도가 극진ᄒᆞᆷ은 엇짐인고 ᄒᆞ고 경탄ᄒᆞᆷ을 마지 아니ᄒᆞ더니 뎌가 련ᄒᆞ야 ᄉᆞ랑ᄒᆞ고 귀히 녁이ᄂᆞᆫ 모양은 불가형언이라 혹 ᄌᆞ긔 품을 풀고 그 아비를 안고 어르ᄆᆞᆫ지기도 ᄒᆞ며 혹 그 슈족을 주므르기도 ᄒᆞᄂᆞᆫ지라 내가 명ᄒᆞ야 독쥬로 결박당ᄒᆞ엿던 슈죡에 발나 압흔 것을 면케 ᄒᆞ... 42686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이런 야만이 그 아비의게 효도가 극진ᄒᆞᆷ은 엇짐인고 ᄒᆞ고 경탄ᄒᆞᆷ을 마지 아니ᄒᆞ더니 뎌가 련ᄒᆞ야 ᄉᆞ랑ᄒᆞ고 귀히 녁이ᄂᆞᆫ 모양은 불가형언이라 혹 ᄌᆞ긔 품을 풀고 그 아비를 안고 어르ᄆᆞᆫ지기도 ᄒᆞ며 혹 그 슈족을 주므르기도 ᄒᆞᄂᆞᆫ지라 내가 명ᄒᆞ야 독쥬로 결박당ᄒᆞ엿던 슈죡에 발나 압흔 것을 면케 ᄒᆞ니 이로 인ᄒᆞ야 뎌희를 ᄶᅩᆺ차 가지 못ᄒᆞ엿스나 도로혀 복이 될 줄 엇지 알앗스리오 두어 시 후에 대풍이 니러나 파도가 흉용ᄒᆞ니 뎌희도 무ᄉᆞ히 도라가지 못ᄒᆞ엿슬 듯ᄒᆞ더라 {{u|금요}}가 그 아비로 ᄒᆞ야 분주ᄒᆞᄂᆞᆫ지라 내가 무러 ᄀᆞᆯᄋᆞᄃᆡ 무ᄉᆞᆷ 식물을 먹엿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아직 먹이지 못ᄒᆞ엿ᄂᆞ이다 이에 과ᄌᆞ와 건포도를 주어 먹이게 ᄒᆞ니 뎌가 그 아비의게 먹이다가 별안간에 ᄯᅱ여 니러나 ᄂᆞ는 듯이 달녀가니 그 ᄲᆞ름이 회리바람 ᄀᆞᆺᄒᆞ야 보던 바 처음이라 이샹히 녁여 아모리 불너도 부를ᄉᆞ록 속히 가더니 거의 십오 분이나 ᄒᆞ야 쳔쳔히 도라 오거늘 본즉 ᄒᆞᆫ손에 물그릇을 들고 ᄒᆞᆫ 손에 ᄯᅥᆨ 두 ᄀᆡ를 들고 오니 그 ᄉᆞ이에 집에 갓다 오ᄂᆞᆫ 모양이라 ᄯᅥᆨ은 내게 주고 물은 그 아비의게 마시운즉 독쥬보다 유력ᄒᆞ야 졍신이 소셩ᄒᆞᄂᆞᆫ지라 내가 ᄀᆞᆯᄋᆞᄃᆡ ᄂᆞᆷ은 물이 잇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잇ᄂᆞ이다 ᄀᆞᆯᄋᆞᄃᆡ 그러면 {{du|셔반아}} 사ᄅᆞᆷ의게 주어 마시우라 ᄒᆞ고 ᄯᅥᆨ도 주니 ᄯᅢ에 {{du|셔반아}} 사ᄅᆞᆷ이 나무 밋해 누엇ᄂᆞᆫ지라 {{u|금요}}가 물과 ᄯᅥᆨ을 주니 니러 안거늘 내가 ᄯᅩ 건포도를 준즉 나를 향ᄒᆞ야 감샤ᄒᆞᆷ을 마지 아니ᄒᆞ니 조곰 젼에는 용ᄆᆡᆼ히 싸호던 쟈가 이제는 무력ᄒᆞ야 련ᄒᆞ야 쓰러지ᄂᆞᆫ지라 {{u|금요}}를 명ᄒᆞ야 그 아비의게 간호ᄒᆞᆷ ᄀᆞᆺ치 독쥬로 발으고 주므르게 ᄒᆞ니 뎌가 그동안에도 자조자조 그 아비를 도라보다가 어ᄂᆞ ᄯᅢ에는 그 아비가 보이지 아니ᄒᆞᄂᆞᆫ 고{{upe}}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c0jqizsu8w9nfmymby0g6fhtyymszzj 페이지:그루쇼 표류긔(1925) 제임스 게일, 이원모 역.pdf/82 250 111887 426870 2026-05-05T11:37:57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로 {{du|셔반아}} 사ᄅᆞᆷ을 ᄇᆞ리고 급히 가셔 본즉 언덕가에 누엇더라 {{u|금요}}를 명ᄒᆞ야 {{du|셔반아}} 사ᄅᆞᆷ을 도아 집으로 도라갈ᄉᆡ 뎌가 업어 ᄇᆡ에 올니고 ᄯᅩ 그 아비를 업어 ᄇᆡ에 올닌 후에 강물을 거슬너 져어 집 압헤 니르러 언덕에 올니고 나무 두 ᄀᆡ로 들것을 ᄆᆞᆫ들어 두 사ᄅᆞᆷ을 ᄯᅥ매여 울타리 밋헤 니르럿스나... 42687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로 {{du|셔반아}} 사ᄅᆞᆷ을 ᄇᆞ리고 급히 가셔 본즉 언덕가에 누엇더라 {{u|금요}}를 명ᄒᆞ야 {{du|셔반아}} 사ᄅᆞᆷ을 도아 집으로 도라갈ᄉᆡ 뎌가 업어 ᄇᆡ에 올니고 ᄯᅩ 그 아비를 업어 ᄇᆡ에 올닌 후에 강물을 거슬너 져어 집 압헤 니르러 언덕에 올니고 나무 두 ᄀᆡ로 들것을 ᄆᆞᆫ들어 두 사ᄅᆞᆷ을 ᄯᅥ매여 울타리 밋헤 니르럿스나 넘어 드러갈 힘이 업슴으로 {{u|금요}}를 ᄃᆞ리고 두 시간 동안을 슈고ᄒᆞ야 나무가지와 ᄒᆡ여진 옷과 범포(帆布)로 쟝막을 짓고 벼 집 우ᄒᆡ 헌겁을 덥허 침샹 둘을 ᄆᆞᆫ들어 뎌희로 거졉ᄒᆞ게 ᄒᆞ니 이에 니르러 우리 셤은 거의 ᄒᆞᆫ 나라를 일운지라 토디 샹으로 보면 나는 쥬인이니 왕이오 뎌희는 나로 인ᄒᆞ야 ᄉᆡᆼ명을 엇은 고로 ᄭᅳᆺᄭᆞ지 슌복ᄒᆞᄂᆞᆫ ᄇᆡᆨ셩이라 내 ᄇᆡᆨ셩은 비록 세 사ᄅᆞᆷᄲᅮᆫ이라도 도가 각기 부동ᄒᆞ야 {{u|금요}}는 독실히 밋ᄂᆞᆫ 그리스도인이오 그 아비는 인육을 먹ᄂᆞᆫ 야만이오 {{du|셔반아}} 사ᄅᆞᆷ은 텬쥬교인이라도 우리나라는 압제 졍치가 업슴으로 ᄌᆞ유로 신교ᄒᆞᆯ 수 잇더라 두 사ᄅᆞᆷ을 안치ᄒᆞᆫ 후에 식물을 쥰비ᄒᆞᆯᄉᆡ {{u|금요}}를 명ᄒᆞ야 일 년 된 염소 ᄒᆞᆫ 마리를 잡고 보리와 쌀을 너허 삶고 울타리 밧겻 쟝막 압헤 샹을 베풀고 ᄒᆞᆷᄭᅴ 안져 먹으며 위로ᄒᆞᆯᄉᆡ {{du|셔반아}} 사ᄅᆞᆷ은 영어를 아지 못ᄒᆞ고 그동안 야만의 말을 ᄇᆡ혼 고로 {{u|금요}}가 두 사ᄅᆞᆷ의 말을 통역ᄒᆞ야 ᄉᆞ졍을 통ᄒᆞ니라 식후에 {{u|금요}}를 보내여 총과 다른 긔계를 가져온 후 모든 시톄와 인육을 ᄯᅡ에 뭇어 흔젹을 ᄀᆞᆷ초게 ᄒᆞ고 {{u|금요}}를 식혀 그 아비의게 무르ᄃᆡ 도망ᄒᆞᆫ 야만이 무ᄉᆞ히 도라 갓겟ᄂᆞ뇨 도라 갓스면 큰 무리를 모화 가지고 다시 오지 아니하겟ᄂᆞ뇨 뎌가 ᄃᆡ답ᄒᆞᄃᆡ 뎌희가 무ᄉᆞ히 도라 가지 못ᄒᆞ엿을 ᄯᅳᆺᄒᆞ며 무ᄉᆞ히 도라갈지라도 풍랑에 몰녀 다른 디방에 다핫스면 필연 잡혀 먹혓슬 듯ᄒᆞ거니와 본 디방으로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r4dcwgeip55qmoek0yxfq6qrmzlht9 페이지:그루쇼 표류긔(1925) 제임스 게일, 이원모 역.pdf/83 250 111888 426871 2026-05-05T11:38:20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도라 갓스면 다시 오고 아니 옴을 헤아리기 어렵도다 그러나 뎌희의 ᄉᆡᆼ각에 이번 일은 심샹ᄒᆞᆫ 일이 아니라 텬벌을 닙어 죽은 줄노 알며 {{u|금요}}와 당신을 사ᄅᆞᆷ이 아니오 신으로 알 ᄲᅮᆫ 아니라 손에 벼락을 가진 신으로 알고 뎌희가 도망ᄒᆞᆯ ᄯᅢ에 닐ᄋᆞ기를 손을 놀니지 아니ᄒᆞ고 불과 ᄉᆞ망을 더지며 벼락 소ᄅᆡ가 진... 42687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도라 갓스면 다시 오고 아니 옴을 헤아리기 어렵도다 그러나 뎌희의 ᄉᆡᆼ각에 이번 일은 심샹ᄒᆞᆫ 일이 아니라 텬벌을 닙어 죽은 줄노 알며 {{u|금요}}와 당신을 사ᄅᆞᆷ이 아니오 신으로 알 ᄲᅮᆫ 아니라 손에 벼락을 가진 신으로 알고 뎌희가 도망ᄒᆞᆯ ᄯᅢ에 닐ᄋᆞ기를 손을 놀니지 아니ᄒᆞ고 불과 ᄉᆞ망을 더지며 벼락 소ᄅᆡ가 진동ᄒᆞ니 이 엇지 사ᄅᆞᆷ이 ᄒᆞᆯ 수 잇ᄂᆞᆫ 일이리오 ᄒᆞ니 이 말을 드른즉 뎌희는 다시 오지 아니ᄒᆞᆯ 줄 아노라 내가 이 말 듯고 겁이 풀니ᄂᆞᆫ 고로 대륙으로 가고져 ᄒᆞᄂᆞᆫ ᄆᆞᄋᆞᆷ이 다시 니러나ᄂᆞᆫ지라 {{u|금요}}의 아비도 닐ᄋᆞ기를 뎌곳으로 가면 잘 ᄃᆡ졉ᄒᆞ리니 아모 념려가 업스리라 ᄒᆞᆫ즉 가고져 ᄒᆞᄂᆞᆫ ᄆᆞᄋᆞᆷ이 불 닐듯 ᄒᆞ나 {{du|셔반아}} 사ᄅᆞᆷ은 닐ᄋᆞ기를 우리 동모가 십륙인이라 비록 야만과 동쳐 ᄒᆞ엿스나 식물이 합당치 못ᄒᆞ야 거의 굶어 죽을 디경이라 ᄒᆞᄂᆞᆫ 고로 쥬져ᄒᆞ며 무러 ᄀᆞᆯᄋᆞᄃᆡ 그ᄃᆡ는 엇지ᄒᆞ야 그곳에 나르게 되엿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du|규바}}로 가셔 우피와 은덩이로 물건을 무역ᄒᆞ야 {{du|구라파}}로 가고져 ᄒᆞ야 ᄒᆡᆼᄒᆞᄂᆞᆫ 길에 파션ᄒᆞᆫ {{du|포도아}} 사ᄅᆞᆷ 다섯 명을 구원ᄒᆞᆫ 후에 우리 ᄇᆡ가 ᄭᆡ여져 다섯 사ᄅᆞᆷ이 죽고 야만의 ᄯᅡ에 류락ᄒᆞ니 우리의게 군긔는 잇스나 화약이 슈침ᄒᆞᆷ으로 죽을 수밧게 아모 도리가 업섯노라 ᄀᆞᆯᄋᆞᄃᆡ 그러면 그곳에셔 늙어 죽고져 ᄒᆞ엿셧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그곳을 피ᄒᆞ야 가고져 죵죵 운동ᄒᆞ야 보앗스나 ᄇᆡ도 업고 제구도 업고 긔계도 업슴으로 눈물만 흘닐 ᄲᅮᆫ이엿셧노라 ᄀᆞᆯᄋᆞᄃᆡ 우리가 혹시 그곳으로 가셔 피ᄒᆞ야 가기를 도모ᄒᆞᆯ진ᄃᆡ 그ᄃᆡ의 동모들이 깃버ᄒᆞ겟ᄂᆞ뇨 이 세샹 인죵 ᄉᆞ이에 서로 불샹히 녁이ᄂᆞᆫ ᄆᆞᄋᆞᆷ이 박ᄒᆞᆫ지라 내가 비록 그ᄃᆡ를 구원ᄒᆞ엿스나 그ᄃᆡ의 동모들이 나를 해ᄒᆞ려 ᄒᆞ면 엇지 ᄒᆞ리오 ᄃᆡ답ᄒᆞᄃᆡ 아니라 뎌희가 심ᄒᆞᆫ 곤난 가온ᄃᆡ 타{{upe}}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ah3bj2z43h8j7u2gxmuthw4ja96pcf5 페이지:그루쇼 표류긔(1925) 제임스 게일, 이원모 역.pdf/84 250 111889 426872 2026-05-05T11:38:56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락ᄒᆞ야 거지보다 불샹ᄒᆞ게 되엿ᄂᆞ니 만일 구원ᄒᆞᆯ 사ᄅᆞᆷ만 잇스면 뎌희가 환영ᄒᆞᆯ 줄 아노라 ᄯᅩ ᄀᆞᆯᄋᆞᄃᆡ 내가 {{u|금요}}의 아비와 ᄒᆞᆷᄭᅴ 건너가셔 뎌희의게 그ᄃᆡ를 쥬인으로 삼겟다ᄂᆞᆫ ᄆᆡᆼ셔를 밧은 후에 도라 와 그ᄃᆡ와 ᄒᆞᆷᄭᅴ 가겟고 ᄆᆡᆼ셔ᄒᆞᆯ ᄯᅢ에 복음의 거륵ᄒᆞᆫ 례를 들어 ᄆᆡᆼ... 42687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락ᄒᆞ야 거지보다 불샹ᄒᆞ게 되엿ᄂᆞ니 만일 구원ᄒᆞᆯ 사ᄅᆞᆷ만 잇스면 뎌희가 환영ᄒᆞᆯ 줄 아노라 ᄯᅩ ᄀᆞᆯᄋᆞᄃᆡ 내가 {{u|금요}}의 아비와 ᄒᆞᆷᄭᅴ 건너가셔 뎌희의게 그ᄃᆡ를 쥬인으로 삼겟다ᄂᆞᆫ ᄆᆡᆼ셔를 밧은 후에 도라 와 그ᄃᆡ와 ᄒᆞᆷᄭᅴ 가겟고 ᄆᆡᆼ셔ᄒᆞᆯ ᄯᅢ에 복음의 거륵ᄒᆞᆫ 례를 들어 ᄆᆡᆼ셔ᄒᆞ게 ᄒᆞ고 약됴셔를 써 가지고 오리라 내가 올히 녁여 이 두 사ᄅᆞᆷ을 몬져 보내고져 ᄒᆞ엿더니 츄후에 {{du|셔반아}} 사ᄅᆞᆷ이 ᄀᆞᆯᄋᆞᄃᆡ 아직 뎡지ᄒᆞ고 일이년 후에 ᄒᆡᆼᄒᆞᆷ이 됴흘 듯ᄒᆞ도다 이곳에 잇ᄂᆞᆫ 곡식이 다수ᄒᆞᆫ 사ᄅᆞᆷ의 식물이 되지 못ᄒᆞ겟고 피ᄒᆞ야 갈 ᄯᅢ에 ᄇᆡ속에셔 먹을 량식도 되지 못ᄒᆞ니 만일 이 식물이 부죡ᄒᆞᆯ진ᄃᆡ 무ᄉᆞᆷ 변이 ᄉᆡᆼ길ᄂᆞᆫ지 엇지 알니오 {{du|이스라엘}}의 ᄒᆡᆼ위를 ᄉᆡᆼ각지 못ᄂᆞ뇨 뎌희가 {{du|홍ᄒᆡ}}를 건널 ᄯᅢ에는 깃버ᄒᆞ더니 광야에 니르러 식물이 업스매 구원ᄒᆞ신 텬부를 원망ᄒᆞ지 아니ᄒᆞ엿ᄂᆞ뇨 우리가 이곳에 수 년 동안 더 류ᄒᆞ야 곡식을 만히 쥰비ᄒᆞᆫ 후에 ᄒᆡᆼᄒᆞᆷ이 올흘 듯ᄒᆞ도다 내가 이 말을 심히 올히 녁여 네 사ᄅᆞᆷ이 ᄆᆡ일 슈고ᄒᆞ야 새 ᄯᅡ를 긔ᄀᆞᆫᄒᆞ고 이십이 두 곡식 죵ᄌᆞ를 ᄲᅮ리고 염소도 만히 기를ᄉᆡ 어ᄂᆞ날은 {{du|셔반아}} 사ᄅᆞᆷ이 {{u|금요}}와 ᄒᆞᆷᄭᅴ 나가 들염소를 잡아 오고 그 잇흔날 나도 {{u|금요}}를 ᄃᆞ리고 나가 ᄯᅩ 이십 마리를 잡으니 어미 염소만 죽이면 삭기 염소는 몰수히 잡을 수 잇더라 포도 거둘 ᄯᅢ가 니르매 다수히 ᄆᆞᆯ녀 팔십 광쥬리에 ᄎᆡ오고 츄슈ᄒᆞᆯ ᄯᅢ가 니르매 곡식이 풍등ᄒᆞ야 이십이 두락에 이ᄇᆡᆨ이십 두를 거두니 비록 십륙인이 올지라도 엇지 식물을 걱졍ᄒᆞ리오 {{du|셔반아}} 사ᄅᆞᆷ이 나보다 손 ᄌᆡ조가 민첩ᄒᆞᆫ 고로 광쥬리를 만히 결어 곡식을 싸흔 후에 {{du|셔반아}} 사ᄅᆞᆷ을 보내려 ᄒᆞ야 부탁ᄒᆞ야 ᄀᆞᆯᄋᆞᄃᆡ 뎌희가 이 셤 쥬관ᄒᆞᄂᆞᆫ 쟈를 쥬인으로 셤겨 복죵ᄒᆞ리라 ᄆᆡᆼ셔ᄒᆞ거든 다려 오라 그러나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ggyvml2pt1vbx7x82vn8o2zdkiknikc 페이지:그루쇼 표류긔(1925) 제임스 게일, 이원모 역.pdf/85 250 111890 426873 2026-05-05T11:39:18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필묵이 업스니 엇더케 쓸 수 잇스리오 ᄒᆞ고 두 사ᄅᆞᆷ의게 각기 총 ᄒᆞᆫ 자로와 여ᄃᆞᆲ 방식 노흘 ᄌᆡ료를 주며 쓸ᄃᆡ 업ᄂᆞᆫ 일에 노치 말나 당부ᄒᆞ고 뎌희가 잡혀올 ᄯᅢ에 ᄐᆞ고 온 ᄇᆡ를 ᄐᆡ와 보낼ᄉᆡ 셤에 니른지 이십칠년 만에 처음으로 ᄯᅥ나기를 쥰비ᄒᆞ니 엇지 샹쾌ᄒᆞᆫ 일이 아니리오 ᄇᆡ속에 뎌희와 모든 {{du|... 426873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필묵이 업스니 엇더케 쓸 수 잇스리오 ᄒᆞ고 두 사ᄅᆞᆷ의게 각기 총 ᄒᆞᆫ 자로와 여ᄃᆞᆲ 방식 노흘 ᄌᆡ료를 주며 쓸ᄃᆡ 업ᄂᆞᆫ 일에 노치 말나 당부ᄒᆞ고 뎌희가 잡혀올 ᄯᅢ에 ᄐᆞ고 온 ᄇᆡ를 ᄐᆡ와 보낼ᄉᆡ 셤에 니른지 이십칠년 만에 처음으로 ᄯᅥ나기를 쥰비ᄒᆞ니 엇지 샹쾌ᄒᆞᆫ 일이 아니리오 ᄇᆡ속에 뎌희와 모든 {{du|셔반아}} 사ᄅᆞᆷ의 팔 일 동안 먹을 량식을 실니고 도라올 ᄯᅢ에 긔를 달아 다른 ᄇᆡ와 분변ᄒᆞ게 ᄒᆞ라 ᄒᆞ고 망일(望日) 즈음ᄒᆞ야 보내니 그날은 열흘날인 줄 아나 날을 계산ᄒᆞᆯ ᄯᅢ에 ᄒᆞᆫ 번 차착이 잇섯ᄂᆞᆫ 고로 그 후에 여러 번 차착이 잇셧ᄂᆞᆫ지라 그런고로 지금이 ᄎᆞᆷ으로 이십칠년인가 의심ᄒᆞ엿더니 후에 본즉 틀니지 아니ᄒᆞ엿더라 여드ᄅᆡ 동안 기ᄃᆞ리더니 어ᄂᆞ 날 아ᄎᆞᆷ에는 {{u|금요}}가 ᄯᅱ여 드러와 ᄭᆡ여 ᄀᆞᆯᄋᆞᄃᆡ 오ᄂᆞ이다 오ᄂᆞ이다 ᄒᆞ거늘 급히 옷을 닙고 뷘 몸으로 나가보니 ᄇᆡ ᄒᆞᆫ 쳑이 삼각형 돗츨 달고 셤을 향ᄒᆞ고 오ᄃᆡ 건넌편에셔 오지 아니ᄒᆞ고 셤 뒤흐로 좃차 오ᄂᆞᆫ지라 {{u|금요}}ᄃᆞ려 닐ᄋᆞᄃᆡ 우리의 ᄇᆡ가 아니니 숨으라 ᄒᆞ고 집에 드러가 망원경을 가지고 산에 올나 ᄇᆞ라 보니 바다 먼 곳에도 큰 ᄇᆡ가 닷츨 주고 섯스니 샹거가 십여 리나 되나 영국 ᄇᆡ인 듯ᄒᆞᆫ지라 크게 놀나고 깃븜을 의긜 수 업스나 이곳은 항로도 아니오 영국 ᄇᆡ가 올 리유도 업ᄂᆞᆫ 곳이오 풍랑에 몰녀셔 온 것도 아닌즉 비록 영국 ᄇᆡ라도 필연 곡졀이 잇슴이라 방심치 못ᄒᆞ야 ᄀᆞ만히 업ᄃᆡ여 본즉 그 죵션이 강물을 거ᄉᆞ려 올나가지 아니ᄒᆞ고 바로 언덕가에 니르러 여러 사ᄅᆞᆷ이 하륙ᄒᆞ니 그 즁 두 사ᄅᆞᆷ은 {{du|하란}} 사ᄅᆞᆷ ᄀᆞᆺ고도 아니며 ᄯᅩ 셰 사ᄅᆞᆷ은 아모 군긔도 업시 결박을 당ᄒᆞᆫ 모양이라 몬져 나온 쟈가 ᄇᆡ속에셔 ᄭᅳ으러 내니 그 즁 ᄒᆞᆫ 사ᄅᆞᆷ은 ᄆᆡ우 ᄋᆡ걸ᄒᆞᄂᆞᆫ 모양이며 두 사ᄅᆞᆷ은 손을 들어 무엇을 구ᄒᆞᄂᆞᆫ 모양이니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6zx1xlospaq3djv0hq975fnmfs427wh 페이지:그루쇼 표류긔(1925) 제임스 게일, 이원모 역.pdf/86 250 111891 426874 2026-05-05T11:39:46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25장" />그 연고를 알 수 업ᄂᆞᆫ지라 {{u|금요}}가 ᄀᆞᆯᄋᆞᄃᆡ 당신의 영국 사ᄅᆞᆷ도 우리 족쇽ᄀᆞᆺ치 인육을 먹ᄂᆞᆫ 인죵이로다 내가 ᄀᆞᆯᄋᆞᄃᆡ 엇지ᄒᆞ야 이ᄀᆞᆺ치 ᄉᆡᆼ각ᄒᆞ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내가 이ᄀᆞᆺ치 ᄉᆡᆼ각ᄒᆞᆷ이 아니라 그 모양이 그러치 아니ᄒᆞ니잇가 ᄒᆞ더라 내가 그 연고를 아지... 42687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section begin="25장" />그 연고를 알 수 업ᄂᆞᆫ지라 {{u|금요}}가 ᄀᆞᆯᄋᆞᄃᆡ 당신의 영국 사ᄅᆞᆷ도 우리 족쇽ᄀᆞᆺ치 인육을 먹ᄂᆞᆫ 인죵이로다 내가 ᄀᆞᆯᄋᆞᄃᆡ 엇지ᄒᆞ야 이ᄀᆞᆺ치 ᄉᆡᆼ각ᄒᆞᄂᆞ뇨 ᄃᆡ답ᄒᆞᄃᆡ 내가 이ᄀᆞᆺ치 ᄉᆡᆼ각ᄒᆞᆷ이 아니라 그 모양이 그러치 아니ᄒᆞ니잇가 ᄒᆞ더라 내가 그 연고를 아지 못ᄒᆞ야 동졍만 ᄉᆞᆲ히더니 뎌희 즁 ᄒᆞ나히 칼을 들어 ᄒᆞᆫ 사ᄅᆞᆷ을 버히려 ᄒᆞᄂᆞᆫ 모양이라 내가 이를 보고 ᄆᆞᄋᆞᆷ이 셔늘ᄒᆞ야 피가 엉긤을 ᄭᆡᄃᆞᆺ지 못ᄒᆞ야 그 사ᄅᆞᆷ들을 구원ᄒᆞ려 ᄒᆞᆯᄉᆡ {{du|셔반아}} 사ᄅᆞᆷ과 {{u|금요}}의 아비를 보내엿슴을 ᄒᆞᆫ탄ᄒᆞ나 뎌희의게 총이 업고 칼만 잇슴으로 방법을 궁구ᄒᆞᄂᆞᆫ 즁에 뎌희 몃 사ᄅᆞᆷ은 그 세 사ᄅᆞᆷ을 직히고 잇고 ᄂᆞᆷ어지 사ᄅᆞᆷ은 셤 속으로 허여져 드러가 구경ᄒᆞᄂᆞᆫ 모양이오 그 셰 사ᄅᆞᆷ은 별노히 결박은 당ᄒᆞ지 아니ᄒᆞ엿스나 락심ᄒᆞᆫ 모양으로 죵용히 안져 무엇을 기ᄃᆞ리ᄂᆞᆫ 듯ᄒᆞᆫ지라 이를 보고 내가 처음으로 셤에 ᄯᅥ러질 ᄯᅢ의 락심ᄒᆞ던 모양이며 그ᄯᅢ에 즘ᄉᆡᆼ을 두려워ᄒᆞ야 ᄒᆞ로밤 동안 나무 우헤셔 자던 일이 ᄉᆡᆼ각나ᄂᆞᆫ지라 이 가련ᄒᆞᆫ 사ᄅᆞᆷ이 구원 엇을 길이 ᄭᅳᆫ쳣스나 셰샹에 무지ᄒᆞᆫ 것은 인ᄉᆡᆼ이라 던디 만물을 지으신 자의 지ᄇᆡᄒᆞ심을 ᄭᆡᄃᆞᆺ지 못하ᄂᆞ니 뎨일 두렵고 졀망된 ᄯᅡ에도 구원이 잇슬 줄 엇지 알니오 <section end="25장" /> <section begin="26장" />:{{더크게|뎨이십륙쟝}} {{크게|영국 함쟝을 도아 반역ᄒᆞᄂᆞᆫ 무리를 이긤}} 뎌희의 ᄇᆡ는 밀물이 넘칠 ᄯᅢ에 드러온 고로 물이 물너가매 ᄇᆡ가 언덕 우헤 붓흔지라 ᄇᆡ를 직히던 두 사ᄅᆞᆷ이 물의 진퇴ᄒᆞᆷ을 ᄭᆡᄃᆞᆺ지 못ᄒᆞ고 쇼쥬를 만히 마시고 ᄎᆔᄒᆞ야 자다가 ᄒᆞᆫ 사ᄅᆞᆷ이 몬져 ᄭᆡ여 ᄇᆡ가 붓헛슴을 보고 소ᄅᆡᄒᆞ야 여러 사ᄅᆞᆷ을 부르니 뎌희가 일제히 니르러 운젼ᄒᆞ{{upe}} {{옛한글쪽 끝}}<section end="26장"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qmp5fqes97uzmcndzx1d3x2lbx6ga6t 그루쇼 표류긔/제25장 0 111892 426875 2026-05-05T11:42:07Z ZornsLemon 15531 새 문서: {{머리말 | 제목 = 그루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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