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7.0-wmf.15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해석 해석토론 초안 초안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행사 행사토론 저자:방정환 100 4343 458055 426700 2026-08-18T00:45:23Z ZornsLemon 15531 458055 wikitext text/x-wiki {{글쓴이 |이름 = 방정환 |다른 표기 = 方定煥 |이름 첫 글자 = ㅂ |국적 = 일제 강점기 |탄생 연도 = 1899년 |사망 연도 = 1931년 |설명 = 아동 문화 운동가이며, 사회 운동가, 아동 문학가이다. 호는 소파(小波)이다. 필명은 잔물, 소파(小波), 소파생, SP, SP生, CWP, CW生, 목성(牧星), 북극성(北極星) 등이 있다. |그림 = 방정환.JPG |그림 크기 = |위키백과 링크 = 방정환 |위키인용집 링크 = |공용 링크 = |정렬 = 방정환 }} == 동화 == * [[이상한 샘물]] (1923.7) * [[나비의 꿈]] (1923.7) * [[두더지의 혼인]] (1924.1) * [[금도끼]] (1924.2) * [[4월 그믐날 밤]] (1924.5) * [[소문만복래]] (1925.1) ** [[소문만복래#늣동이 도적|늦동이 도적]] ** [[소문만복래#셈 치루기|셈 치르기]] * [[까치의 옷]] (1925.6) * [[과거 문제]] (1925.7) * [[호랑이 형님]] (1926.1) * [[옹기 셈]] (1926.3) * [[벚꽃 이야기]] (1926.4) * [[미련이 나라]] (1926.4~1926.12) * [[무서운 두꺼비]] (1926.5) * [[방귀 출신 최덜렁]] (1926.8/9) * [[시골쥐 서울 구경]] (1926.10) * [[엉터리 병정]] (1926.11) * [[참된 동정]] (1927.4) * [[꼬부랑할머니]] (1929.3) * [[느티나무 신세 이야기]] (1929.7/8~9) * [[겁쟁이 도적]] (1930.2) * [[제일 짧은 동화]] (1930.3) ==동시/동요== * [[크리스마스 (방정환)|크리스마스]] (1920.12) * [[형제별]] (1922.9) * [[가을밤]] (1923.9) * [[귀뜨라미|귀뚜라미]] (1924.10) * [[늙은 잠자리]] (1924.12) * [[여름비]] (1926.7) * [[눈 (방정환)|눈]] (1930.9) ==시== * [[마음 (방정환)|마음]] == 소설 == ===어린이=== * [[영길이의 설움]] (1923.4.23) * [[동생을 찾으러]] (1925.1~10) * [[절영도 섬 너머]] (1925.10) * [[칠칠단의 비밀]] (1926.4~1927.12) * [[동무를 위하여]] (1927.2) * [[만년 셔츠]] (1927.3) * [[1+1=|하나에 하나(1+1=?)]] (1927.4) * [[금시계]] (1929.1~1929.2) ===개벽=== * [[유범]] (流帆) (1920.6) - 창간호 * [[그날 밤]] (1920.12~1921.2) - 6호~8호 * [[깨어 가는 길]] (1921.4): 번안 == 번역, 번안 == * [[사랑의 선물]] (1922년) ** [[사랑의 선물/난파선|난파선]] ** [[사랑의 선물/산드룡의 유리 구두|산드룡의 유리 구두]] ** [[사랑의 선물/왕자와 제비|왕자와 제비]] ** [[사랑의 선물/요술왕 아아|요술왕 아아]] ** [[사랑의 선물/한네레의 죽음|한네레의 죽음]] ** [[사랑의 선물/어린 음악가|어린 음악가]] ** [[사랑의 선물/잠자는 왕녀|잠자는 왕녀]] ** [[사랑의 선물/천당가는 길|천당가는 길]] ** [[사랑의 선물/마음의 꽃|마음의 꽃]] ** [[사랑의 선물/꽃 속의 작은이|꽃 속의 작은이]] * [[저자:이정호|이정호]]의 [[세계일주 동화집]]과 겹치는 작품들 ** [[눈 어두운 포수]] (1923.4.23) ** [[선물 아닌 선물]] (1924.2) ** [[개구리 왕자]] (1924.7) ** [[삼손 이야기]] (1925.2) * [[호수의 여왕]] (1922.7, 1922.9) 아나톨 프랑스 * [[털보 장사]] (1922.11) 오스카 와일드 * [[천사]] (1923.1.3) 안데르센 * 그림 형제 ** [[황금 거위]] (1923.4.1) ** [[작은 이의 이름]] (1924.1~2) ** [[막보의 큰 장사]] (1924.7) ** [[하메른의 쥐난리]] (1926.8) * [[삼태성]] (1924.4.1~2) ?? * [[귀먹은 집오리]] (1925.5) 사이토 소카 * [[양초 귀신]] (1925.8) 고지마 마사지로 * [[뿌움뿌움 이야기]] (1925.9) 프랑스 소학독본 * [[눈물의 노래]] (1925.10) 프랑스 소학독본 * 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1926.2) ** [[어부와 마귀]] (1926.3~1926.5) ** [[흘러간 삼남매]] (1926.9~1926.12) ** [[알리바바와 도적]] (1927.8~1927.9/10) * [[굉장한 약방문]] (1926.4) 독일 소학독본 * [[욕심쟁이 땅차지]] (1926.10) 톨스토이 * [[누구의 죄 (방정환)|누구의 죄]] (1926.12) 로버트 매길 ===번역 시=== * [[어머님]] (1920.1) 타고르 * [[신생의 선물]] (1920.1) 타고르 * [[불 켜는 이]] (1920.8) R. L. 스티븐슨 == 희곡(동극) == * [[노래 주머니]] (1923.3~1923.4) == 수필 == * [[공원정조]] (1922.8) * [[추창만초]] (1923.9) * [[뭉게구름의 비밀]] (1924.6) * [[어린이 찬미]] (1924.6) * [[사라지지 않는 기억]] (1925.6) * [[옛날 학교 이야기]] (1926.6~1926.10) * [[없는 이의 행복]] (1930.1) * [[나의 어릴 때 이야기]] (1928.6) ===풍자 수필(소설)=== * [[은파리]] (1921.1~1927.3): 개벽, 신여성, 별건곤 등에 연재 * [[여류 운동가]]: 신여성 (1924.10) ==저작권== {{PD-old-70}} ts33506pql1ragqb37bv6us72qbk3zk 번역:하타요가프라디피카/4 114 78504 458062 399462 2026-08-18T01:33:12Z Danuri19 16656 458062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 제목 = 하타요가프라디피카 | 다른 표기 = Hatha Yoga Pradipika | 부제 = 4장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판참 싱(Pancham Sinh) | 역자 = [[사:Danuri19|Danuri19]] | 이전 = [[../3|3장]] | 다음 = | 연도 = | 언어 = en | 원본 = | 설명 = }} {{col-begin}} {{col-2}} CHAPTER IV - On Samādhi<ref>하타요가프라디피카 P153 L1</ref><br> 제4장 사마띠(Samādhi,삼매三昧,명상瞑想)<ref>a state of intense concentration achieved through meditation. In Hindu yoga this is regarded as the final stage, at which union with the divine is reached (before or at death).명상을 통해 달성되는 강렬한 집중 상태. 힌두 요가(또는 불교)에서는 이것을 (죽기 전이나 죽음에서)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마지막 단계로 간주합니다.</ref><ref>사마디(띠)(Samādhi)는 sama 평행한(동등한),dhi 붙잡다 또는 sam 방해(또는 함께), ati 지나가다 등의 어원들을 가진다. 따라서 이것은 신(god 또는 대자연 또는 우주)과의 합일에 도달하는(또는 동행하는) 것을 목표(최종단계)로 하는 (또는 잠(sleep(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과 같은 수면상태(비의식)와 의식상태의 사이클을 유도하는) 일종의 정신수양이자 신체단련으로 이해해볼수있다.</ref><ref>HYP는 종교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비유로 제시된 것들을 실체로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이를 대체가능한 지문(text)에서 구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바(아디나타)는 첫번째힘(한 힘)으로서 중력을 이해하는 또다른 표현일수 있습니다. 또는 H2O의 물(분자)의 (음양의)분해와 재조립의 경이로움의 표상일수있으며 또는 어쩌면 세포(cell)내부의 에너지 공생설(symbio-)을 보여주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일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종교적 절차도 개입되거나 전제되지 않게됩니다.</ref><ref>(요가철학)어떤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거나 잘못된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요. 그럴수있습니다. 다만 어떤 감정이 점점 커져가면서 그 감정이 자신을 삼켜간다면 그것은 당신을 잘못된 길로 데려가고 있는 것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자신뿐만아니라 주변까지도 망가트립니다. 따라서 어제가 올수는 없습니다. 미래를 기약합니다. 어둠속에서도 한줄기 실날같은 희망은 늘 촛불처럼 나와 함께하고있습니다.[참고]삶이 당신을 속인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화내지 마세요. 절망의 날에도 겸손해 할수있습니다. 기쁜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봅니다. 마음은 기꺼이 미래에 살고있습니다. 현실은 정말 슬픔입니다. 모든 것은 시간앞에 즉각적이고 그래서 모든것은 곧 지나갑니다. 지나간것에 후회않게 하려합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 1825)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йдет, Что прой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 (1825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 Alexander Pushkin)</ref><ref>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의 여유가 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나의 주변과)세상에 미친다) 주역(周易) 제2괘 곤(第二卦 坤) 문언(文言)積善之家,必有餘慶;積不善之家,必有餘殃。 </ref><ref>이익(선)에 손해(악)가 섞여있기에 이익(선)을 보전하려고 힘써 노력함으로 이익(선)이 온전해질수있으며 손해(악)에도 이익(선)이 섞여있기에 손해(악)(으)로부터 근심을 해결할 방도(선용)가(이) 생기는것이다.(必雜於利害,雜於利而務可信也,雜於害而患可解也)손자병법 제팔편 구변(第八篇 九變)</ref> <br>[4.1]Salutation to the Gurū, the dispenser of happiness to all, appearing as Nāda, Bindū and Kalā! One, who is devoted to Him, obtains the highest bliss.<br> 나다Nāda<ref> नाद nāda : 큰 소리, 포효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어떤 소리나 음색(a loud sound, roaring, bellowing, crying , any sound or tone)</ref><ref>[참고]비음(鼻音) : 코 소리(입안의 통로를 막고 코로 공기를 내보내면서 내는 소리. ‘ㅇ’, ‘ㅁ’,‘ㄴ’ 등) </ref><ref>nada : (바람(공기의 흐름)소리를 듣는)포효하는 사람(천둥치는 사람), [참고]말(horse),갈대(reed)</ref>, 빈두Bindū<ref> बिन्दु bindu (물 한)방울,분리된 입자(단위),소구체 또는 (수평선상의)점(이마 전두엽 중앙으로 여겨지는 또는 양미간 중앙)</ref> 및 칼라Kalā<ref>कला kalā 부드러움 ,낮음 또는 공간속에서 평온한 (안정된 자세)</ref><ref>희생의 세가지 (원인)요소(मन्त्र만트라mantra(정의로운)말(또는 생각),द्रव्य드라비야dravya(어떤)대상(object),श्रद्धा쉬라드다śraddhā믿음)</ref>로 나타나는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구루Gurū(스승master)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분께 헌신하는 사람은 최고의 행복을 얻습니다.<ref>스승님의 손가락(힘)의 한점이 또는 손바닥으로 밀어주는 그 힘이 제가 온몸으로 받는 중력의 힘이 제몸안에서 흐트로지지않도록 (붙잡아 놓도록)해주십니다. 스승님의 온화한 표정과 가르침으로 이끄심이 제 마음의 동요에서 눈물을 그치게하고 웃음을 잠재우십니다. 그것이 저의 몸이 마음을 위해(그리고 호흡(마음)이 몸을 위해) 헌신하도록 (노력하게하는것을 알게)합니다.</ref> <br>[4.2]Now I will describe a regular method of attaining to Samādhi, which destroys death, is the means for obtaining happiness, and gives the Brahmānanda.<br> 이제 나는 죽음을 파괴하고 행복을 얻는 수단이며 브라흐마난다<ref>brahman 정신(이성),nanda 행복(정서)의 합일,조우</ref>를 주는 사마띠(Samādhi)에 도달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설명하겠습니다.<ref>현대 임상학 및 생물심리학 , 생화학등에서는 잠(sleep 또는 수면)의 여러 깊은 단계(꿈(dream)포함)에서 세포의 재생과 면역력의 강화 그리고 정서적인 안정감등 여러 작용 및 기능에서 비의식적인 뇌의 중요한 역할을 가리키는 연구결과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상(사마띠)은 호흡과 관련해서 중요한 맥락(context)을 시사한다.</ref><ref>이제 여기 통나무가 땅위에 놓여있습니다. 한쪽끝에서 다른 한쪽끝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해봅니다. 처음은 서툴지만 이내 익숙해지고 쉽게 왔다갔다하는것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여기 바로 그 통나무가 강위에 외나무다리로 놓여있습니다. 당신은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것이 왜 무엇이 그토록 어렵습니까? 단지 땅위에 놓여있는 통나무와 무엇이 다릅니까? 눈에 보이는 주변만 다를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것을 알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수있습니까? 이제 천길 낭떨어지 절벽에 놓여있는 같은 그 통나무의 외나무다리를 상상해 보십시요.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봐 땅위 놓여있는 통나루위를 걸어가 보는것을 비교해 봅니다. 이것이 사마띠의 시작입니다.</ref><ref>[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이 다양한 형태(Vrittis)를 취하는 것을 억제합니다. [1.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저자: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br>[4.3][4.4]Raja Yogī, Samādhi, Unmani, mauonmanī, Amarativa, Laya, Tatwa, Sūnya, Aśūnya, Parama Pada, Amanaska, Adwaitama, Nirãlamba, Nirañjana, Jīwana mukti, Sahajā, Turyā, are all synonymous.<br> 라자 요기,사마띠,운마니,마우온마니,아마라티브,라야,타트와,수냐,아수니아(아수니야),파라마 파다,아마나스카,아드와이타마, 니랄람바,니란자나,지와나 묵티,사하자,투리야는 모두 동의어입니다. <br>[4.5]As salt being dissolved in water becomes one with it, so when ātmā and mind become one, it is called Samādhi.<br> 소금이 물에 녹아 물과 하나가 되듯이, 아뜨마(ātma(n) आत्म(न्)또는 아트마)<ref>호흡(영혼) 또는 자신(self) [예1] (요가철학에서) 아트마 즈나나(atma jñāna)는 자아(아트만)와 궁극의 존재(브라흐만,브라만)가 하나로 어울림에 대한 앎(지식) 따라서 진실된 앎을 가리킨다. [예2](그리스 격언-델파이(델포이) (아폴로)신탁(oracle)신전)Know thyself (너자신을 알라!)</ref>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사마띠(Samādhi)라고 합니다. <br>[4.6]When the Prāna becomes lean (vigourless) and the mind becomes absorbed, then their becoming equal is called Samādhi.<br> 프라나가 가늘어지고(활력이 잠잠해 가면) 마음에 흡수될 때, 둘이 같아지는(하나가 되는) 것을 사마띠(Samādhi)라고 합니다.<ref>각성때의 호흡에서 늘숨과 날숨의 균형은 수면시에 그것과 비교해볼수있습니다.</ref> <br>[4.7]This equality and oneness of the self and the ultra self, when all Samkalpas cease to exist, is called Samādhi.<br> 모든 삼칼파(Samkalpa)<ref>sam 방해받다,kalpa 실행 </ref>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자아와 초자아<ref>의식과 비의식(전의식 또는 무의식)의 대칭(성)이거나 또는 (이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이성(양심)과 같은 맥락(context)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자신(ultra-self)과 이보다는 근본적인 (자신에게 충실한)자신(self)과의 일대일대응관계를 기술한다고 이해해볼수도 있다.</ref>의 평등과 하나됨을 사마띠(Samādhi)<ref>samādhi 또는 삼아디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 - 와 합치다,결합하다,집합체 ('전체는 부분들의 합 그 이상입니다')게슈탈트</ref><ref>sam 방해,adhi(또는 ati) 지나가다</ref>라고 합니다.<ref>(절대자)중력(또는 몸(비의식) 또는 심장소리)와의 대화(conversation)</ref><ref>(마음은 몸을 위해 몸은 마음을 위해)(두려움 또는 고통을 이겨내는)마음과 몸이 하나가 됩니다.</ref><ref>[창발성1]'전체는 부분들의 합 그 이상입니다'περὶ δὲ τῆς ἀπορίας τῆς εἰρημένης περί τε τοὺς ὁρισμοὺς καὶ περὶ τοὺς ἀριθμούς, τί αἴτιον τοῦ ἓν εἶναι; πάντων γὰρ ὅσα πλείω μέρη ἔχει καὶ μὴ ἔστιν οἷον σωρὸς τὸ πᾶν (Aristotle,Metaphysics [1045α][5]) 정의와 숫자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은 무엇입니까? 결국 그것은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부분들 모든 것이 하나의 덩어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H(VIII) [1045α][5])</ref><ref>[창발성2]'전체는 부분들의 합 그 이상입니다'for it is evident that when the parts exist, there is nothing to prevent the whole from not existing, so that the parts are not the same with the whole. (Organon, Topics by Aristotle, translated by Octavius Freire Owen , Book 6 Chapter 13 [498]) 왜냐하면 부분들이 다 있을 때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모든)부분들이 전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오르가논) 토피카 쳅터13 [498], (번역) 옥타비우스 F. 오웬)</ref><ref>[창발성3]'전체는 부분들의 합 그 이상입니다'정신력이 체력보다 우월하다는것을 말하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이들 부분들의 합은 분명 전체 한 덩어리로서 부분들의 합(合)보다 그 이상을 보여줄수있다는 것입니다.</ref> <br>[4.8]Or, who can know the true greatness of the Raja Yoga. Knowledge, mukti, condition, and Siddhīs can be learnt by instructions from a gurū alone.<br> 그렇지 않으면 라자 요가의 진정한 위대함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앎<ref>또는 지식 또는 즈나나(ज्ञान knowledge) </ref>, 묵티(mukti), (평화로운)상태, 싯디(Siddhīs)는 구루의 지시만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br>[4.9]Indifference to worldly enjoyments is very difficult to obtain, and equally difficult is the knowledge of the Realities to obtain. It is very difficult to get the condition of Samādhi, without the favour of a true guru.<br>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무관심은 얻기가 매우 어렵고, 현실에 대한 지식도 얻기가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진정한 구루의 도움 없이는 사마띠(Samādhi)의 상태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br>[4.10]By means of various postures and different Kumbhakas,when the great power (Kundalī) awakens, then the Prāna becomes absorbed in Sūnya (Samādhi).<br> 다양한 자세(아사나)와 다양한 쿰바카Kumbhaka(항아리)를 통해 큰 힘(Kundalī)이 깨어날 때 프라나는 수니야Sūnya(Samādhi)에 흡수됩니다. <br>[4.11]The Yogī whose śakti has awakened, and who has renounced all actions, attains to the condition of Samādhi, without any effort.<br> 샥티(샤크티)가 깨어나고 모든 행위를 멈춘 요기(Yogī)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사마띠(Samādhi)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br>[4.12]When the Prāna flows in the Susumnā, and the mind has entered śūnya, then the Yogī is free from the effects of Karmas.<br> 프라나가 수숨나Susumnā로 흐르고 마음이 수니야śūnya에 들어가면 요기는 카르마<ref>(in Hinduism and Buddhism) the sum of a person's actions in this and previous states of existence, viewed as deciding their fate in future existences.(힌두교와 불교에서) 현 상태와 이전 존재 상태에서의 개인의 행동의 총합으로, 미래 존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ref>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집니다. <br>[4.13]O Immortal one (that is, the yogi who has attained to the condition of Samādhi), I salute thee! Even death itself, into whose mouth the whole of this movable and immovable world has fallen, has been conquered by thee.<br> 오 불멸의 존재(즉, 사마띠의 경지를 얻은 수행자)이시여, 나는 당신께 경의를 표합니다! 움직이거나 (또는)움직일 수 없는 이 세상 전체가 그 입 속으로 떨어진 죽음마저도 당신께 정복당했습니다. <br>[4.14]Amarolī, Vajrolī and Sahajolī are accomplished when the mind becomes calm and Prāna has entered the middle channel<br> 아마롤리Amarolī, 바즈롤리Vajrolī 및 사하졸리Sahajolī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프라나가 중간 채널<ref>참고 [3.3]</ref>에 들어갈 때 달성됩니다. <br>[4.15]How can it he possible to get knowledge, so long as the Prāna is living and the mind has not died? No one else can get moksa, except one who can make one's Prāna and mind latent.<br> 프라나가 살아 있고 마음이 죽지 않은 한, 그가 어떻게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합니까? 자신의 프라나와 마음을 잠재적으로(의식이 비의식과 대화를 나누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목사(moksa)<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ref>라자요가(요가수트라)[1.51]'씨 없는' 사마띠(니르비자nirbija) , [4.28] '덕(德)의 구름'(다르마메가 삼매,Dharma-megha 사마띠) 참고</ref>를 얻을 수 없습니다. <br>[4.16]Always living in a good locality and having known the secret of the Susumnā, which has a middle course, and making the Vāyu move in it., (the Yogī) should restrain the Vāyu in the Brahma randhra.<br> 항상 좋은 지역에 살면서(위치를 점하면서) 중간 과정이 있는 수숨나(Susumnā)의 비밀을 알고 그 안에서 바유(Vāyu)를 움직이게 한 요기(요기)는 브라흐마 란드라에서 바유를 억제해야 합니다. <br>[4.17]Time, in the form of night and day, is made by the sun and the moon. That, the Susumnā devours this time (death) even, is a great secret.<br> 밤과 낮의 형태인 시간은 해와 달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수숨나(Susumnā)가 이 시간(죽음)을 먹어치운다는 것은 큰 비밀입니다. <br>[4.18]In this body there are 7,000 openings of Nādis; of these, the Susumnā, which has the Śāmhhavī Sakti in it, is the only important one, the rest are useless.<br> 이 몸에는 나디스(나디들)의 구멍이 7,000개 있습니다. 이들 중 삼하비 샥티Śāmhhavī Sakti가 포함된 수숨나Susumnā가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며 나머지는 쓸모가 없습니다. <br>[4.19]The Vāyu should be made to enter the Susumnā without restraint by him who has practised the control of breathing and has awakened the Kundali by the (gastric) fire.<br> 바유Vāyu는 호흡 조절을 수행하고 (위의) 불로 쿤달리Kundali를 깨운 사람에 의해 제한 없이 수숨나Susumnā에 들어가도록 만들어져야 합니다. <br>[4.20]The Prāna, flowing through the Susumnā, brings about the condition of manonmanī; other practices are simply futile for the Yogī.<br> 수숨나(Susumnā)를 통해 흐르는 프라나는 마논마니(manonmanī)의 상태를 가져옵니다. 다른 수행법은 요기(Yogī)에게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br>[4.21]By whom the breathing has been controlled, by him the activities of the mind also have been controlled; and, conversely, by whom the activities of the mind have been controlled, by him the breathing also has been controlled.<br> 호흡을 조절하신 분에 의해 마음의 활동도 조절되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의 활동을 통제하는 (그)분에 의해 호흡도 통제됩니다. <br>[4.22]There are two causes of the activities of the mind: (1) Vāsanā (desires) and (2) the respiration (the Prāna). Of these, the destruction of the one is the destruction of both.<br> 마음 활동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1) 바사나(욕망)와 (2) 호흡(프라나). 그중 하나의 멸망은 둘 다의 멸망입니다. <br>[4.23]Breathing is lessened when the mind becomes absorbed, and the mind becomes absorbed when the Prāna is restrained.<br> 마음이 흡수되면 호흡이 줄어들고(잦아들다), 프라나가 억제되면 마음이 흡수됩니다. <br>[4.24]Both the mind and the breath are united together, like milk and water; and both of them are equal in their activities. Mind begins its activities where there is the breath, and the Parana begins its activities where there is the mind.<br> 마음과 호흡은 우유와 물처럼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둘 다 활동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마음은 호흡이 있는 곳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파라나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br>[4.25]By the suspension of the one, therefore, comes the suspension of the other, and by the operations of the one are brought about the operations of the other. When they are present, the Indriyas (the senses) remain engaged in their proper functions, and when they become latent then there is moksa.<br> 그러므로 하나가 정지되면 다른 것도 정지되고, 하나가 작동하면 다른 것도 작동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존재할 때 인드리야(감각)는 적절한 기능을 계속 수행하고, 잠복해 있을 때 목사가 있습니다. <br>[4.26]By nature, mercury and mind are unsteady: there is nothing in the world which cannot be accomplished when these are made steady.<br> 본질적으로 수은(Hg)<ref>여기서는 물(H2O) 또는 호흡과 관련한 공기의 성질로 다루어 볼수있다.</ref>과 정신은 불안정합니다. 이 두 가지가 안정되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br>[4.27]O Pārvati! Mercury and breathing, when made steady, destroy diseases and the dead himself comes to life (by their means). By their (proper) control, moving in the air is attained.<br> 오 파르바티! 수은(Hg 또는 체온)<ref>여기서는 상온(常溫) 부근에서 액체로서 쉽게 팽창하는 성질을 갖는 금속으로 이러한 맥락의 수은을 생각해볼수있다. 이러한 성질로 인해서 수은은 고대부터 열(熱)과 관련해 다루어져 왔으며 1600년대에 본격적으로 수은온도계가 기계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ref>과 호흡이 안정되면 질병을 없애고 죽은 사람도 살아납니다. 이들의 (적절한) (호흡에서) 획득된 공기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가능해집니다. <br>[4.28]The breathing is calmed when the mind becomes steady and calm; and hence the preservation of bindu. The preservation of this latter makes the satwa established in the body.<br>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지면 호흡도 고요해집니다. 따라서 빈두가 보존됩니다. 후자를 보존하면 사트와(satwa)가 몸에 확립됩니다. <br>[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āda.<br>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ref>लय laya(=사마띠) (소리)에 집중함 또는 흡수됨.</ref><ref>[참고]4.33</ref>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에 의존합니다. <br>[4.30]This very laya is what is called moksa, or, being a sectarian, you may not call it moksa; but when the mind becomes absorbed, a sort of ecstacy is experienced.<br> 바로 이 라야가 목사(moksa)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또는 (다른)종파주의자(이거나 또는 아니거나)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목사라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흡수되면 일종의 황홀경(또는 정서적 안정감)이 경험됩니다.<ref>하타요가프라디피카는 당시 시대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특정 신(또는 개념)을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몸과 마음을 안심시키고 강인할수있는 임상학적인 경험자료를 비유로서 제안하려고 한다고 이해해볼수있다. 하타요가프라디피카는 종교적 절차로서 신(god)에 대한 강요나 논리적 전제는 없으며 또한 이러한 맥락(context)에서 이에대한 대체불가가 아닌 대체가능함을 본 지문을 통해서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예를 들어 하타요가프라디피카에서 언급되는 신(god)이라는 개념이나 단어는 현대물리학의 중력(gravitation)이나 원자핵력(nuclear(atomic) power)의 원리에서 보여지는 개념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ref><ref>[4.40]참고</ref> <br>[4.31]By the suspension of respiration and the annihilation of the enjoyments of the senses, when the mind becomes devoid of all the activities and remains changeless, then the Yogī attains to the Laya Stage.<br> 호흡이 멈추고 감각의 즐거움이 소멸되어 마음에 모든 활동이 없어지고 변함이 없을 때 요기는 라야 단계에 도달합니다. <br>[4.32]When all the thoughts and activities are destroyed, thenthe Laya Stage is produced, to describe which is beyondthe power of speech, being known by selfexperience alone.<br> 모든 생각과 활동이 파괴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 경험만으로 알 수 있는 단계를 설명하는 라야 단계가 생성됩니다. <br>[4.33]They often speak of Laya, Laya; but what is meant by it?<br> 그들은 종종(곧잘) 라야Laya, 라야Laya(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br>[4.34]Laya is simply then forgetting of the objects of senses when the Vāsanās (desires) do not rise into existence again.<br> 라야는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바사나(욕망)가 또다시 존재로서 일어나지 않을 때 그때 감각의 대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br>[4.35]The Sāmbhavī mudrā<br> 삼바비 무드라<br> The Vedas and the Śāstras are like ordinary public women. Śāmhhavī mudrā is the one, which is secluded like a respectable lady.<br> 베다Vedas와 사스트라Śāstras는<ref>वेद veda 앎(체계적인 지식), 참되거나 신성한 지식이나 의식에 대한 지식(knowledge, true or sacred knowledge or lore, knowledge of ritual) , शास्त्र śāstra 질서, 명령, 계율, 규칙(order, command, precept, rule) </ref> 일반인 여성과 같다고 말한다면 삼바비 무드라Śāmbhavī mudrā는 존경받는 여인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람일 것입니다. <br>[4.36]Aiming at Brahman inwardly, while keeping the sight directed to the external objects, without blinking the eyes, is called the Sāmbhavī mudrā, hidden in the Vedas and the Sāstras.<br> 눈을 깜박이지 않고 외부 대상을 향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로 브라만을 겨냥하는 것을 삼바비 무드라(Sāmbhavī mudrā)라고 하며, 베다와 사스트라에 숨겨져 있습니다 <br>[4.37]When the Yogī remains inwardly attentive to the Brahman, keeping the mind and the Prāna absorbed, and the sight steady, as if seeing everything while in reality seeing nothing outside, below, or above, verily then it is called the Sāmbhavī mudrā, which is learnt by the favour of a guru. Whatever, wonderful, Sūnya or Asūnya is perceived, is to be regarded as the manifestation of that great Śambhū (Śiva.)<br> 요기(Yogī)가 브라만에게 내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과 프라나를 흡수하고 시야가 안정되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유지될 때, 실제로는 외부, 위, 아래 아무것도 보지 않을 때, 이를 삼바비 무드라(Sāmbhavimudra)라고 합니다. 스승님의 은혜로 배웠습니다. 수니야Sūnya 또는 아수니아Asūnya가 인식되는 놀라운 것은 무엇이든 그 위대한 삼바부Śambhū(시바Śiva)<ref>siva or sivaka, m. one who sews or stitches, a sewer, stitcher 바느질하는 사람</ref>의 (무언가)를 인식하거나 의식(깨닫게 되거나 이해)하게 됩니다. <br>[4.38]The two states, the Sāmbhavī and the Khecharī, are different because of their seats (being the heart and the space between the eyebrows respectively); but both cause happiness, for the mind becomes absorbed in the ChitasukhaRupaātmana which is void.<br> 두 주인 삼바비Sāmbhavī와 케차리Khecharī는 좌석(각각 심장과 눈썹 사이의 공간) 때문에 다릅니다. 그러나 둘 다 행복을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공허한 치타수카루파아트마나Chita-sukha-Rupa-ātmana<ref>Chita(보다,나누다)수카sukha(평안,행복,경건) (대칭성 같은)균형을 찾은, Rupaātmana(for knowlage 앎을 향한)</ref>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br>[4.39]The Unmanī<br> 운마니<br> Fix the gaze on the light (seen on the tip of the nose) and raise the eyebrows a little, with the mind contemplating as before (in the Śambhavī mudrā that is, inwardly thinking of Brahma, but apparently looking outside.) This will create the Unmanī avasthā at once.<br> 빛(코 끝에 보이는)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전처럼 마음으로 명상하면서 눈썹을 조금 올리십시오(샴바비 무드라에서는 내부적으로는 브라흐마<ref>brahma 절대적인 것(존재 또는 힘)</ref>를 생각하지만 외관상으로는 외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운마니 아바스타Unmanī avasthā가 즉시 생성됩니다. <br>[4.40]The Tāraka<br> 타라카<br> Some are devoted to the Vedas, some to Nigama, while others are enwrapt in Logic, but none knows the value of this mudrā, which enables one to cross the ocean of existence<br> 일부는(어떤이는) 베다<ref>veda 알다(또는 앎), 진실되거나 거룩한 지식이나 이야기, 의식에 대한 깊은 지식</ref><ref>(종교적으로)베다(Veda)인도 바라문교 사상의 근본 성전이며 가장 오래된 경전.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100년에 이루어졌으며, 인도의 종교ㆍ철학ㆍ문학의 근원을 이루는 것으로 리그베다, 야주르베다, 사마베다, 아타르바베다의 네 가지가 있다.</ref>에 헌신하고, 일부는(어떤이는) 니가마(nigama)<ref>내면과 외면(바깥세계와)의 네트워크</ref><ref>(개인적인 철학(믿음)에서)신성한 의식(내재신 또는 영지주의)</ref>에 헌신하고, 다른 일부는(또다른 이는) (과학적으로)논리학에 둘러싸여 있지만, 존재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이 무드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br>[4.41]With steady calm mind and half closed eyes, fixed on the tip of the nose, stopping the Idā and the Pingalā without blinking, he who can see the light which is the all, the seed, the entire brilliant, great Tatwama, approaches Him, who is the great object. What is the use of more talk?<br> 꾸준하고 고요한 마음과 반쯤 감은 눈을 코 끝에 고정하고, 이다(Idā)와 핑갈라(Pingala)를 깜박이지 않고 멈추면서, 모든 것, 씨앗, 온전하고 찬란하고 위대한 타트와마(Tatwama)인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그분께(그것에) 다가갑니다. 위대한 대상은 누구입니까? 더 많은 말을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br>[4.42]One should not meditate on the Linga (i.e., ātman) in the day (i.e., while Sūrya or Pingalā is working) or at night (when Idā is working), but should always contemplate after restraining both.<br> 낮(즉, 수리야(Sūrya)나 핑갈라(Pingalā)가 일하는 동안)나 밤(이다(Idā)가 일하는 동안)에 링가(즉, 아트만)를 명상해서는 안 되지만, 두 가지를 항상 억제한 후에 명상해야 합니다. <br>[4.43]The Khecharī <br> 케차리<br> When the air has ceased to move in the right and the left nostrils, and has begun to flow in the middle path, then the Khecharī mudrā, can be accomplished there. There is no doubt of this.<br> 공기가 오른쪽과 왼쪽 콧구멍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 길로 흐르기 시작하면 그곳에서 케차리 무드라(Khecharī mudrā)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br>[4.44]If the Prāna can he drawn into the Sūnya (Susumnā), which is between the Idā and the Pingalā, and male motionless there, then the Khecharī mudrā can truly become steady there.<br> 만약 프라나가 이다(Idā)와 핑갈라(Pingalā) 사이에 있는 수숨나(Susumnā)로 끌어들여 남성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케차리 무드라(Khecharī mudrā)는 그곳에서 진정으로 안정될 수 있습니다. <br>[4.45]That mudrā is called Khecharī which is performed in the supportless space between the Sūrya and the Chandra (the Idā and the Pingalā) and called the Vyoma Chakra.<br> 그 무드라는 수리아Sūrya와 찬드라Chandra(이다Idā와 핑갈라Pingalā) 사이의 지지가 없는(supportless) 공간에서 수행되고 비요마 차크라Vyoma Chakra라고 불리는 케차리Khecharī라고 불립니다. <br>[4.46]The Khecharī which causes the stream to flow from the Chandra (Śoma) is beloved of Śiva. The incomparable divine Susumnā should be closed by the tongue drawn back.<br> 찬드라(Śoma) 강에서 시냇물이 흘러나오게 하는 케차리(Khecharī)는 시바가 사랑하는 강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신성한 수숨나(Susumnā)는 뒤로 당겨진 혀로 (목구멍이)닫혀야 합니다.(그러면 오직 하나의 강(river)으로 즉 기도(氣道)로만 프라나가 흘러들어갑니다) <br>[4.47]It can be closed from the front also (by stopping the movements of the Prāna), and then surely it becomes the Khecharī. By practice, this Khecharī leads to Unmanī.<br> 그것은 앞에서도 닫힐 수 있으며(프라나의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그러면 확실히 케차리(Khecharī)가 됩니다. 실제로 이 케차리Khecharī는 운마니Unmanī로 이어집니다. <br>[4.48]The seat of Śiva is between the eyebrows, and the mind becomes absorbed there. This condition (in which the mind is thus absorbed) is known as Tūrya, and death has no access there.<br> 시바의 자리는 눈썹 사이에 있고 마음은 거기에 몰입됩니다. 이 상태(마음이 흡수된 상태)는 투리야Tūrya<ref>turya 투리아: forming a 4th part 4부 구성 또는 the 4th state of soul 영혼의 네 번째 상태</ref>로 알려져 있으며, 거기에는 죽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br>[4.49]The Khecharī should be practised till there is Yoganidrā (Samādhi). One who has induced Yoganidrā, cannot fall a victim to death.<br> 케차리Khecharī는 요가니드라Yoganidrā(사마띠Samādhi)가 생겨날때까지 수행되어야 합니다. 요가니드라Yoganidrā를 유도한 사람은 죽음의 희생자가 될 수 없습니다. <br>[4.50]Freeing the mind from all thoughts and thinking of nothing, one should sit firmly like a pot in the space (surrounded and filled with the ether).<br> (이것은)모든 생각에서 마음을 해방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공간(에테르<ref>ether:(매질媒質의) 공기</ref>로 둘러싸여 가득 차 있는)에 항아리(kumbhaka)처럼 굳건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4.51]As the air, in and out of the body, remains unmoved, so the breath with mind becomes steady in its place (i.e., in Brahma randhra).<br> 몸 안팎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있는 호흡도 그 자리(즉, 브라흐마 란드라)에서 안정됩니다.<br> [4.52]By thus practising, night and day, the breathing is brought under control, and, as the practice increases, the mind becomes calm and steady.<br> 이렇게 수행함으로써 밤낮으로 호흡이 통제되고, 수행이 증가할수록 마음은 고요하고 안정됩니다.<br> [4.53]By rubbing the body over with Amrita (exuding from the moon), from head to foot, one gets mahākāyā, i.e., great strength and energy.<br> 암리타(달에서 흘러나오는)로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지르면 마하카야, 즉 큰 힘과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br> End of the Khecharī<ref>THE HATHA YOGA PRADIPIKA 176</ref><br> 케차리 끝.<br> [4.54]Placing the mind into the Kundalini, and getting thelatter into the mind, by looking upon the Buddhi (intellect) with mind (reflexively), the Param Pada (Brahma) should be obtained.<br> 마음을 쿤달리니에 두고 후자를 마음에 가져가면서 마음(반사적으로)으로 붓디(지성)를 바라봄으로써 파람 파다(브라흐마)를 얻어야 합니다.<br> [4.55]Keep the ātmā inside the Kha (Brahma) and place Brahma inside your ātmā. Having made everything pervaded with Kha (Brahma), think of nothing else.<br> 아트마를 카(브라흐마) 안에 두고 브라흐마를 아트마 안에 두세요. 모든 것에 카(브라흐마)가 스며들게 하고 나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br> [4.56]One should become void in and void out, and voice like a pot in the space. Full in and full outside, like a jar in the ocean.<br> 안과 그릭 밖이 하나로 공이 되어야 하며, (이처럼)공간 속의 항아리처럼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또한)바다 속의 항아리처럼, 안팎이 가득 차 있습니다.<br> [4.57]He should be neither of his inside nor of outside world; and, leaving all thoughts, he should think of nothing.<br> 그는 자신의 내부 세계나 외부 세계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버리고 아무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br> [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āma! Obtain peace.<br>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ref>राम rāma (매우)행복한 또는 아름다운 또는 기쁜 [예]oh my god !</ref>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br> [4.59]As camphor disappears in fire, and rock salt in water, so the mind united with the ātmā loses its identity.<br> 장뇌가 불 속에서 사라지고 암염이 물 속에서 사라지듯이, 아트마와 결합된 마음은 그 정체성을 잃습니다.<br> [4.60]When the knowable, and the knowledge, are both destroyed equally, then there is no second way (i.e., Duality is destroyed).<br> 알 수 있는 것과 지식이 모두 동등하게 파괴되면 두 번째 방법은 없습니다(즉, 이원성이 파괴됩니다).<br> [4.61]All this movable and immovable world is mind. When the mind has attained to the unmanī avasthā, there is no dwaita (from the absence of the working of the mind.)<br> 이 움직일 수 있는 세상과 움직일 수 없는 세상은 모두 마음이다. 마음이 운마니 아바스타unmanī avasthā에 도달하면 드바이타dvaita(duality,마음의 작용이 없는 데서 오는)가 없습니다.<br> [4.62]mind disappears by removing the knowable, and, on its disappearance, ātmā only remains behind.<br> 마음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면 아뜨마(atmā)만 뒤에 남게 됩니다.<br> [4.63]The highsouled āchāryas (Teachers) of yore gained experience in the various methods of Samādhi themselves, and then they preached them to others.<br> 옛날의 고결한 아차리아(스승)들은 사마띠의 다양한 방법에 대한 경험을 얻었고, 그런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br> [4.64]Salutations to Thee, O Susumnā, to Thee O Kundalinī, to Thee O Sudhā, born of Chandra, to Thee O manomnanī! To Thee O great power, energy and the intelligent spirit!<br> 오 수숨나, 오 쿤달리니, 찬드라Chandra<ref>चन्द्र candra 달(의 여신),소마(신들의 음료)</ref>에서 태어난 오 수다, 오 마놈나니(मनोन्मनी manonmanī)<ref>manonmanī : a form of Durgā</ref>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에게 오, 위대한 힘과 에너지와 지성적인 정신이여!<br> [4.65]I will describe now the practice of anāhata nāda, as propounded by Goraksa Nātha, for the benefit of those who are unable to understand the principles of knowledge—a method, which is liked by the ignorant also.<br> 나는 이제 지식의 원리를 (아직)이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락사 나타(Goraksa Nātha)가 제안한 아나하타 나다(anahata nāda) 수행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이 방법은 (잔꾀가 없는)단순해 사람들도 좋아하는 방법입니다.<br> [4.66]ādinātha propounded ¼ crore methods of trance, and they are all extant. Of these, the hearing of the anāhata nāda is the Only one, the chief, in my opinion.<br> 아디나타ādinātha는 ¼ 크로어(10,000,000)<ref>인도 숫자단위 1크로어(crore)는 10,000,000(천만)이다.</ref>의 트랜스<ref>일반적으로 최면에 의해 유발되거나 매체에 의해 입력되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는 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반의식 상태입니다. </ref> 방법을 제안했으며 모두 현존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중에서 아나하타 나다(anāhata nāda)가 듣는 것이 유일한 것,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br> [4.67]Sitting with mukta āsana and with the Sāmbhavī madill, the Yogī should hear the sound inside his right ear, with collected mind.<br> 묵타 아사나(mukta āsana)와 삼바비 마딜(Sāmbhavī madill)과 함께 앉아 있는 요기는 마음을 모아 오른쪽 귀 안에서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br> [4.68]The ears, the eyes, the nose, and the mouth should be closed and then the clear sound is heard in the passage of the Susumnā which has been cleansed of all its impurities.<br> 귀, 눈, 코, 입을 닫아야 하며,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수숨나의 통로에서 맑은 소리가 들립니다.<br> [4.69]In all the Yogas, there are four states: (1) ārambha or the preliminary, (2) Ghata, or the state of a jar, (3) Parichaya (known), (4) nispatti (consumate.)<br> 모든 요가에는 네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1) 아람바 또는 예비 상태, (2) 가타 또는 항아리의 상태, (3) 파리차야(알려짐), (4) 니스파티(완성) (또는 니슈타바스타 Nishthavastha)<br> [4.70] ārambha Avasthā<br> 아람바 아바스타<br> When the Brahma granthi (in the heart) is pierced through by Prānāyāma, then a sort of happiness is experienced in the vacuum of the heart, and the anāhat sounds, like various tinkling sounds of ornaments, are heard in the body.<br> 브라마 그란티(가슴 속)가 프라나야마에 의해 관통되면, 마음의 진공 속에서 일종의 행복이 경험되고, 장식품의 딸랑이는 다양한 소리와 같은 아나하트 소리가 몸에서 들립니다.<br> [4.71]In the ārambha, a Yogī's body becomes divine, glowing, healthy, and emits a divine smell. The whole of his heart becomes void.<br> 아람바에서 요기의 몸은 신성해지고, 빛나고, 건강해지며, 신성한 냄새를 발산합니다. 그의 마음 전체가 공허해집니다.<br> [4.72]The Ghata Avasthā<br> 가타 아바스타<br> In the second stage, the airs are united into one and begin moving in the middle channel. The Yogī's posture becomes firm, and he becomes wise like a god.<br> 두 번째 단계에서는 공기가 하나로 합쳐져 중간 채널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요기의 자세는 확고해지고, 신처럼 현명해집니다. [4.73]By this means the Visnu knot (in the throat) is pierced which is indicated by highest pleasure experienced, And then the Bherī sound (like the beating of a kettle drain) is evolved in the vacuum in the throat.<br> 이를 통해 (목에 있는) 비슈누 매듭이 뚫리게 되는데, 이는 경험한 최고의 즐거움을 나타냅니다. 그런 다음 목구멍의 진공 상태에서 베리Bherī 소리(주전자 배수구를 두드리는 소리와 같은)가 발생합니다.<br> [4.74]The Parichaya Avasthā<br> 파리차야 아바스타<br> In the third stage, the sound of a drum is known to arise in tie Sūnya between the eyebrows, and then the Vāyu goes to the mahāśūnya, which is the home of all the siddhīs.<br> 세 번째 단계에서는 눈썹 사이의 묶인 수니야Sūnya에서 북소리가 발생하고 바유Vāyu는 모든 싯디siddhīs의 고향인 마하수니야mahāśūnya로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br> [4.75]Conquering, then, the pleasures of the mind, ecstacy is spontaneously produced which is devoid of evils, pains, old age, disease, hunger and sleep.<br> 그러면 마음의 즐거움을 정복하고 악, 고통, 늙음, 질병, 배고픔, 잠이 없는 황홀경이 저절로 생겨납니다.<br> [4.76]The Nishthavastha<br> 니슈타바스타<br> When the Rudra granthi is pierced and the air enters the seat of the Lord (the space between the eyebrows), then the perfect sound like that of a flute is produced.<br> 루드라 그란티를 뚫고 공기가 신의 자리(미간 사이)로 들어가면 피리 소리와 같은 완벽한 소리가 만들어 집니다.<br> [4.77]The union of the mind and the sound is called theRājaYoga. The (real) Yogī becomes the creator and destroyer of the universe, like God.<br> 마음과 소리의 결합을 라자요가(Rāja Yoga)라고 합니다. (실제) 요기(Yogī)는 신처럼 우주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와 하나)가 됩니다.<br> [4.78]Perpetual Happiness is achieved by this; I do not care if the mukti be not attained. This happiness, resulting from absorption [in Brahma], is obtained by means of RajaYoga.<br> 이를 통해 영원한 행복이 달성됩니다. 묵티(mukti)를 얻지 못하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브라흐마에] 흡수되어 생기는 이 행복은 라자요가를 통해 얻습니다.<br> [4.79]Those who are ignorant of the RājaYoga and practise only the HathaYoga, will, in my opinion, waste their energy fruitlessly.<br> 내 생각에는 라자요가에 대해 무지하고 하타요가만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에너지를 헛되이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br> [4.80]Contemplation on the space between the eyebrows is, in my opinion, best for accomplishing soon the Unmanī state. For people of small intellect, it is a very easy method for obtaining perfection in the RajaYoga. The Laya produced by nāda, at once gives experience (of spiritual powers)<br> 내 생각에는 눈썹 사이의 공간에 대한 명상이 곧 운마니 상태를 이루는 데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초보자들에게는 라자요가에서 완벽함을 얻는 매우 쉬운 방법입니다. 나다nāda가 생산한 라야Laya는 즉시 (영적 힘의) 경험을 제공합니다.<br> [4.81]The happiness which increases in the hearts of Yogiśwaras, who have gained success in Samādhi by means of attention to the nāda, is beyond description, and is known to Śri Gurū Nātha alone.<br> 나다nāda에 대한 관심을 통해 사마디(띠)Samādhi에서 성공을 거둔 요기스와라Yogiśwaras의 마음에 커지는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스리구루나다Śri Gurū Nātha만이 알고 있습니다. [4.82]The sound which a muni hears by closing his ears with his fingers should be heard attentively, till the mind becomes steady in it.<br> 무니가 손가락으로 귀를 막아 듣는 소리는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br> [4.83]By practising with this nāda, all other external sounds are stopped. The Yogī becomes happy by overcoming all distractions within 5 days.<br> 이 나다로 수행함으로써 다른 모든 외부 소리가 멈춥니다. 요기는 5일 안에 모든 방해 요소를 극복함으로써 행복해집니다.<br> [4.84]In the beginning, the sounds heard are of great variety and very loud; but, as the practice increases, they become more and more subtle.<br> 처음에는 들리는 소리가 매우 다양하고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수행이 증가할수록 그것들은 점점 더 미묘해 집니다.<br> [4.85]In the first stage, the sounds are surging, thundering like the beating of kettle drums and jingling ones. In the intermediate stage, they are like those produced by conch, mridanga, bells, etc.<br> 첫 번째 단계에서는 주전자 드럼을 치는 것처럼 천둥소리가 울리고 윙윙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중간 단계에서는 소라, 므리당가mridanga<ref>므리당가: 인도의 구식 북, 긴 나무통 모양의 것을 눕혀놓고 직경이 다른 두 면을 두드린다.</ref>, 종 등이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br> [4.86]In the last stage, the sounds resemble those from tinklets, flute, Vīnā, bee, &c. These various kinds of sounds are heard as being produced in the body.<br> 마지막 단계에서는 소리가 팅클렛, 플루트, 비나Vīnā, 벌 등의 소리와 유사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소리는 신체에서 생성되면서 듣게 됩니다.<br> [4.87]Though hearing loud sounds like those of thunder, kettle drums, etc., one should practise with the subtle sounds also<br> 천둥, 북소리 등 큰 소리가 들리지만 미묘한 소리도 연습해야 합니다.<br> [4.88]Leaving the loudest, taking up the subtle one, and leaving the subtle one, taking up the loudest, thus practising, the distracted mind does not wander elsewhere<br> 가장 큰 소리를 버리고 미묘한 것을 취하고, 미묘한 것을 버리고 가장 큰 소리를 들어서 수행하면 산만한 마음은 다른 곳으로 헤매지 않는다.<br> [4.89]Wherever the mind attaches itself first, it becomes steady there; and then it becomes absorbed in it.<br> 마음이 먼저 집착하는 곳에는 마음이 안정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것에 흡수되게 됩니다.<br> [4.90]Just as a bee, drinking sweet juice, does not care for the smell of the flower; so the mind, absorbed in the nāda, does not desire the objects of enjoyment.<br> 꿀벌이 달콤한 주스를 마시면서 꽃의 냄새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다에 흡수된 마음은 즐거움의 대상을 원하지 않습니다.<br> [4.91]The mind, like an elephant habituated to wander in the garden of enjoyments, is capable of being controlled by the sharp goad of anāhata nāda.<br> 즐거움의 정원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는 코끼리처럼 마음은 아나하타 나다(anahata nāda)라는 날카로운 자극에 의해 통제될 수 있습니다.<br> [4.92]The mind, captivated in the snare of nāda, gives up all its activity; and, like a bird with clipped wings, becomes calm at once.<br> 나다의 올무에 사로잡힌 마음은 모든 활동을 포기합니다. 그러면 날개가 잘린 새처럼 즉시 조용해집니다.<br> [4.93]Those desirous of the kingdom of Yoga, should take up the practice of hearing the anāhata nāda, with mind collected and free from all cares. <br> 요가의 왕국을 원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모으고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 아나하타 나다(anāhata nāda)를 듣는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br> [4.94]Nada is the snare for catching the mind; and, when it is caught like a deer, it can be killed also like it.<br> 나다는 마음을 사로잡는 올무입니다. 그리고 사슴처럼 잡히면 사슴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br> [4.95]Nāda is the bolt of the stable door for the horse (the minds of the Yogīs). A Yogī should determine to practise constantly in the hearing of the nāda sounds.<br> 나다Nāda는 말(요기의 마음)을 위한 마구간 문의 빗장입니다. 요기는 나다 소리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수행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br> [4.96]Mind gets the properties of calcined mercury. When deprived of its unsteadiness it is calcined, combined with the sulphur of nāda, and then it roams like it in tine supportless ākāśa or Brahma.<br> 마음은 소성된 수은의 특성을 얻습니다. 불안정성이 제거되면 소성되어 나다nāda의 유황과 결합된 다음 지지대 없는 아카사ākāśa 또는 브라흐마Brahma에서 그처럼 돌아다닙니다.<br> [4.97]The mind is like a serpent, forgetting all its unsteadiness by hearing the nāda, it does not run away anywhere.<br> 마음은 뱀과 같아서 나다(nāda)를 들음으로써 모든 불안정함을 잊어버리고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습니다.<br> [4.98]The fire, catching firewood, is extinguished along with it (after burning it up); and so the mind also, working with the nāda, becomes latent along with it.<br> 장작을 붙잡은 불은 그것과 함께 꺼집니다 (불태운 후). 그래서 나다와 함께 일하는 마음 역시 나다와 함께 잠복하게 됩니다.<br> [4.99]The antahkarana (mind), like a deer, becomes absorbed and motionless on hearing the sound of hells, etc.; and then it is very easy for an expert archer to kill it.<br> 안타카라나(마음)는 사슴처럼 지옥의 소리 등을 들으면 몰입되어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숙련된 궁수가 그것을 죽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br> [4.100]The knowable interpenetrates the anāhata sound which is heard, and the mind interpenetrates the knowable. The mind becomes absorbed there, which is the seat of the allpervading, almighty Lord.<br> 인식 가능한 것은 들리는 아나하타 소리에 침투하고, 마음은 인식 가능한 것에 침투합니다. 마음은 모든 곳에 두루 퍼지시는 전능하신 주님(권능있는 주인)의 자리인 그곳에서 흡수됩니다.<br> [4.101]So long as the sounds continue, there is the idea of ākāśa. When they disappear, then it is called Para Brahma, Paramātmana.<br> 소리가 계속되는 한 아카사ākāśa<ref>आकाश ākāśa 공간(을 채우고(지배하고) 있는 그 어떤것) 또는 미묘하고 영묘한 유체(우주를 가득 채우고 널리 퍼져 있으며 생명과 소리의 독특한 전달체로 추정됨),</ref>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라질 때, 그것은 파라 브라흐마, 파라마트마나(Paramātmana)라고 불립니다.<br> [4.102]Whatever is heard in the form of nāda, is the śakti(power). That which is formless, the final state of the Tatwas, is tile Parameśwara.<br> 나다nāda의 형태로 들리는 것은 무엇이든 삭티śakti(힘)입니다. 형태가 없는 것, 타트와스Tatwas의 최종 상태는 타일 파라메스와라Parameśwara<ref>파라메스바라Parameśvara:the supreme lord, Supreme Being, God 절대적 존재(와 동등한 것), 신(같은 힘)</ref>입니다.<br> [4.103]All the methods of Hatha are meant for gaining success in the RajaYoga; for, the man, who is wellestablished in the RajaYoga, overcomes death.<br> 하타의 모든 방법은 라자요가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자요가를 확고히 확립한 사람은 죽음을 극복하기 때문입니다.(죽음이 육체의 정당한 상속자임을 이해합니다)<ref>살아야할까요 아니면 죽어버려야하나요. 이것이 나의 질문입니다. 터무니없는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마음이 과연 고귀한 것인지 아니면 넘쳐나는 고난의 바다가 우루루 밀려와서는 드리대는 성난 파도물결에 불굴의 의지로 무기를 들어 부여잡고 이에 대항함으로써 그들을 끝장내야 하는 것인지를. 죽는다는것은 단지 잠드는 것일 뿐이리라. 죽음이 나에게 삶이 주는 수천번의 충격과 마음의 고통을 이제는 끝낼수있다고 말해준다. 이 살덩어리가 절실히 원하는 상대가 죽음이란 말인가? 죽는다는것은 단지 잠드는 것일 뿐이리라.(햄릿 제3막 제1장 ,셰익스피어) (Hamlet)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e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es of outragious Fortune, Or to take Arme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to dye, to sleepe. No more; and by a sleepe, to say we end The Heart-ake, and the thousand Naturall shockes That Flesh is heyre too? 'Tis a consummation Deuoutly to be wish'd. To dye to sleepe,([https://en.wikisource.org/wiki/Shakespeare_-_First_Folio_facsimile_(1910)/The_Tragedy_of_Hamlet/Act_3_Scene_1 Shakespeare - First Folio facsimile (1910) by William Shakespeare ,Act 3 Scene 1])</ref><br> [4.104]Tatwa is the seed, Hatha the field; and Indifference(Vairāgya) the water. By the action of these three, the creeper Unmanī thrives very rapidly.<br> 타트와Tatwa<ref>tattva 타트와Tatwa : (라자요가가 이끄는 주는)진실 또는 실제 상태 </ref>는 씨앗이고 하타Hatha는 밭입니다. 그리고 무관심(Vairāgya)이라는 물. 이 세 가지의 활동으로 덩굴 운마니(Unmanī)는 매우 빠르게 번성합니다.<br> [4.105]All the accumulations of sins are destroyed by practising always with the nāda; and the mind and the airs do certainly become latent in the colorless (Paramātmana).<br> 모든 축적된 죄는 항상 나다와 함께 수행함으로써 소멸됩니다. 그리고 마음과 공기는 확실히 무색(Paramātmana) 속에 잠복하게 됩니다.<br> [4.106]Such a one does not hear the noise of the conch and Dundubhi. Being in the Unmanī avasthā, his body becomes like a piece of wood.<br> 그런 사람은 소라와 둔두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운마니 아바스타Unmanī avasthā에 있으면 그의 몸은 나무 조각(상)처럼 (완전하게)됩니다.<br> [4.107]There is no doubt such a Yogī becomes free from all states, from all cares, and remains like one dead.<br> 그러한 요기가 모든 상태와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 죽은 자처럼 남아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br> [4.108]He is not devoured by death, is not bound by his actions. The Yogī who is engaged in Samādhi is overpowered by none.<br> 그분은 죽음에 삼켜지지 않으시며, 그분의 행위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사마띠(Samādhi)에 종사하는 요기(Yogī)는 그 누구에게도 압도당하지 않습니다.<br> [4.109]The Yogī, engaged in Samādhi, feels neither smell, nor taste, color, touch nor sound, nor is conscious of his own self.<br> 사마띠(Samādhi)에 종사하는 요기(Yogī)는 냄새, 맛, 색깔, 촉감, 소리를 느끼지 못하며 자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br> [4.110]He whose mind is neither sleeping, waking, remembering, destitute of memory, disappearing nor appearing, is liberated.8 마음이 자지도 깨어있지도 않은 사람, 기억하는 것, 기억이 없는 것,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것 등이 해탈됩니다.<br> [4.111]He is not affected by heat or cold, pain or pleasure, respect or disrespect. Such a Yogī is absorbed in Samādhi.<br> 그는 더위나 추위, 고통이나 즐거움, 존경이나 무례함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한 요기는 사마띠(Samādhi)에 빠져 있습니다.<br> [4.112]He who, though awake, appears like one sleeping and is without inhalation or exhalation (due to Kumbhaka) is certainly free.<br> 비록 깨어 있지만 자는 사람처럼 보이고 (쿰바카로 인해) 숨을 들이쉬거나 내쉬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자유롭습니다.<br> [4.113]The Yogī, engaged in Samādhi, cannot be killed by any instrument, and is beyond the controlling power of beings. He is beyond the reach of incantations and charms.<br> 사마띠(Samādhi)에 종사하는 요기(Yogī)는 어떤 도구로도 죽일 수 없으며 존재의 통제력을 넘어서는 존재입니다. 그는 주문과 부적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br> [4.114]As long as the Prāna does not enter and flow in the middle channel and the vindu does not become firm by the control of the movements of the Prāna; as long as the mind does not assume the form of Brahma without any effort in contemplation, so long all the talk of knowledge and wisdom is merely the nonsensical babbling of a mad man.<br> (끊없는 연습을 통해서)프라나가 중간 통로로 들어가 흐르지 않고 빈두가 프라나의 움직임을 통제하여 (몸이)굳건해지지 않는 한,(그리고) 마음이 명상(묵상)에 대한 노력 없이 절대적인 것(브라흐마)<ref>(물리적)모든 현상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인 실재(힘)</ref>의 형태를 취하지 못하는 한, 지식과 지혜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단지 미친 사람의 터무니없는 옹알이일 뿐입니다.<br> THE END<br> 끝<br> <br> {{col-2}} <poem> नमः शिवाय गुरवे नादबिन्दुकलात्मने । निरञ्जनपदं याति नित्यं तत्र परायणः ॥ ४.१ ॥ <br> '''अथेदानीं प्रवक्ष्यामि समाधिक्रमं उत्तमम् । मृत्युघ्नं च सुखोपायं ब्रह्मानन्दकरं परम् ॥ ४.२ ॥ <br> राजयोगः समाधिश्च उन्मनी च मनोन्मनी । अमरत्वं लयस्तत्त्वं शून्याशून्यं परं पदम् ॥ ४.३ ॥ <br> अमनस्कं तथाद्वैतं निरालम्बं निरञ्जनम् । जीवन्मुक्तिश्च सहजा तुर्या चेत्येकवाचकाः ॥ ४.४ ॥ <br> सलिले सैन्धवं यद्वत्साम्यं भजति योगतः । तथात्ममनसोरैक्यं समाधिरभिधीयते ॥ ४.५ ॥ <br> यदा संक्षीयते प्राणो मानसं च प्रलीयते । तदा समरसत्वं च समाधिरभिधीयते ॥ ४.६ ॥ <br> तत्समं च द्वयोरैक्यं जीवात्मपरमात्मनोः । प्रनष्टसर्वसङ्कल्पः समाधिः सोऽभिधीयते ॥ ४.७ ॥ <br> राजयोगस्य माहात्म्यं को वा जानाति तत्त्वतः । ज्ञानं मुक्तिः स्थितिः सिद्धिर्गुरुवाक्येन लभ्यते ॥ ४.८ ॥ <br> दुर्लभो विषयत्यागो दुर्लभं तत्त्वदर्शनम् । दुर्लभा सहजावस्था सद्गुरोः करुणां विना ॥ ४.९ ॥ <br> विविधैरासनैः कुभैर्विचित्रैः करणैरपि । प्रबुद्धायां महाशक्तौ प्राणः शून्ये प्रलीयते ॥ ४.१० ॥ <br> उत्पन्नशक्तिबोधस्य त्यक्तनिःशेषकर्मणः । योगिनः सहजावस्था स्वयं एव प्रजायते ॥ ४.११ ॥ <br> सुषुम्णावाहिनि प्राणे शून्ये विशति मानसे । तदा सर्वाणि कर्माणि निर्मूलयति योगवित् ॥ ४.१२ ॥ <br> अमराय नमस्तुभ्यं सोऽपि कालस्त्वया जितः । पतितं वदने यस्य जगदेतच्चराचरम् ॥ ४.१३ ॥ <br> चित्ते समत्वं आपन्ने वायौ व्रजति मध्यमे । तदामरोली वज्रोली सहजोली प्रजायते ॥ ४.१४ ॥ <br> ज्ञानं कुतो मनसि सम्भवतीह तावत् प्राणोऽपि जीवति मनो म्रियते न यावत् । प्राणो मनो द्वयं इदं विलयं नयेद्यो मोक्षं स गच्छति नरो न कथंचिदन्यः ॥ ४.१५ ॥ <br> ज्ञात्वा सुषुम्णासद्भेदं कृत्वा वायुं च मध्यगम् । स्थित्वा सदैव सुस्थाने ब्रह्मरन्ध्रे निरोधयेत् ॥ ४.१६ ॥ <br> सूर्यचन्द्रमसौ धत्तः कालं रात्रिन्दिवात्मकम् । भोक्त्री सुषुम्ना कालस्य गुह्यं एतदुदाहृतम् ॥ ४.१७ ॥ <br> द्वासप्ततिसहस्राणि नाडीद्वाराणि पञ्जरे । सुषुम्णा शाम्भवी शक्तिः शेषास्त्वेव निरर्थकाः ॥ ४.१८ ॥ <br> वायुः परिचितो यस्मादग्निना सह कुण्डलीम् । बोधयित्वा सुषुम्णायां प्रविशेदनिरोधतः ॥ ४.१९ ॥ <br> सुषुम्णावाहिनि प्राणे सिद्ध्यत्येव मनोन्मनी । अन्यथा त्वितराभ्यासाः प्रयासायैव योगिनाम् ॥ ४.२० ॥ <br> पवनो बध्यते येन मनस्तेनैव बध्यते । मनश्च बध्यते येन पवनस्तेन बध्यते ॥ ४.२१ ॥ <br> हेतुद्वयं तु चित्तस्य वासना च समीरणः । तयोर्विनष्ट एकस्मिन्तौ द्वावपि विनश्यतः ॥ ४.२२ ॥ <br> मनो यत्र विलीयेत पवनस्तत्र लीयते । पवनो लीयते यत्र मनस्तत्र विलीयते ॥ ४.२३ ॥ <br> दुग्धाम्बुवत्संमिलितावुभौ तौ तुल्यक्रियौ मानसमारुतौ हि । यतो मरुत्तत्र मनःप्रवृत्तिर् यतो मनस्तत्र मरुत्प्रवृत्तिः ॥ ४.२४ ॥ <br> तत्रैकनाशादपरस्य नाश एकप्रवृत्तेरपरप्रवृत्तिः । अध्वस्तयोश्चेन्द्रियवर्गवृत्तिः प्रध्वस्तयोर्मोक्षपदस्य सिद्धिः ॥ ४.२५ ॥ <br> रसस्य मनसश्चैव चञ्चलत्वं स्वभावतः । रसो बद्धो मनो बद्धं किं न सिद्ध्यति भूतले ॥ ४.२६ ॥ <br> मूर्च्छितो हरते व्याधीन्मृतो जीवयति स्वयम् । बद्धः खेचरतां धत्ते रसो वायुश्च पार्वति ॥ ४.२७ ॥ <br> मनः स्थैर्यं स्थिरो वायुस्ततो बिन्दुः स्थिरो भवेत् । बिन्दुस्थैर्यात्सदा सत्त्वं पिण्डस्थैर्यं प्रजायते ॥ ४.२८ ॥ <br> इन्द्रियाणां मनो नाथो मनोनाथस्तु मारुतः । मारुतस्य लयो नाथः स लयो नादं आश्रितः ॥ ४.२९ ॥ <br> सोऽयं एवास्तु मोक्षाख्यो मास्तु वापि मतान्तरे । मनःप्राणलये कश्चिदानन्दः सम्प्रवर्तते ॥ ४.३० ॥ <br> प्रनष्टश्वासनिश्वासः प्रध्वस्तविषयग्रहः । निश्चेष्टो निर्विकारश्च लयो जयति योगिनाम् ॥ ४.३१ ॥ <br> उच्छिन्नसर्वसङ्कल्पो निःशेषाशेषचेष्टितः । स्वावगम्यो लयः कोऽपि जायते वागगोचरः ॥ ४.३२ ॥ <br> यत्र दृष्टिर्लयस्तत्र भूतेन्द्रियसनातनी । सा शक्तिर्जीवभूतानां द्वे अलक्ष्ये लयं गते ॥ ४.३३ ॥ <br> लयो लय इति प्राहुः कीदृशं लयलक्षणम् । अपुनर्वासनोत्थानाल्लयो विषयविस्मृतिः ॥ ४.३४ ॥ <br> वेदशास्त्रपुराणानि सामान्यगणिका इव । एकैव शाम्भवी मुद्रा गुप्ता कुलवधूरिव ॥ ४.३५ ॥ <br> '''अथ शाम्भवी अन्तर्लक्ष्यं बहिर्दृष्टिर्निमेषोन्मेषवर्जिता । एषा सा शाम्भवी मुद्रा वेदशास्त्रेषु गोपिता ॥ ४.३६ ॥ <br> अन्तर्लक्ष्यविलीनचित्तपवनो योगी यदा वर्तते दृष्ट्या निश्चलतारया बहिरधः पश्यन्नपश्यन्नपि । मुद्रेयं खलु शाम्भवी भवति सा लब्धा प्रसादाद्गुरोः शून्याशून्यविलक्षणं स्फुरति तत्तत्त्वं पदं शाम्भवम् ॥ ४.३७ ॥ <br> श्रीशाम्भव्याश्च खेचर्या अवस्थाधामभेदतः । भवेच्चित्तलयानन्दः शून्ये चित्सुखरूपिणि ॥ ४.३८ ॥ <br> तारे ज्योतिषि संयोज्य किंचिदुन्नमयेद्भ्रुवौ । पूर्वयोगं मनो युञ्जन्नुन्मनीकारकः क्षणात् ॥ ४.३९ ॥ <br> केचिदागमजालेन केचिन्निगमसङ्कुलैः । केचित्तर्केण मुह्यन्ति नैव जानन्ति तारकम् ॥ ४.४० ॥ <br> अर्धोन्मीलितलोचनः स्थिरमना नासाग्रदत्तेक्षणश् चन्द्रार्कावपि लीनतां उपनयन्निस्पन्दभावेन यः । ज्योतीरूपं अशेषबीजं अखिलं देदीप्यमानं परं तत्त्वं तत्पदं एति वस्तु परमं वाच्यं किं अत्राधिकम् ॥ ४.४१ ॥ <br> दिवा न पूजयेल्लिङ्गं रात्रौ चैव न पूजयेत् । सर्वदा पूजयेल्लिङ्गं दिवारात्रिनिरोधतः ॥ ४.४२ ॥ <br> '''अथ खेचरी सव्यदक्षिणनाडीस्थो मध्ये चरति मारुतः । तिष्ठते खेचरी मुद्रा तस्मिन्स्थाने न संशयः ॥ ४.४३ ॥ <br> इडापिङ्गलयोर्मध्ये शून्यं चैवानिलं ग्रसेत् । तिष्ठते खेचरी मुद्रा तत्र सत्यं पुनः पुनः ॥ ४.४४ ॥ <br> सूर्च्याचन्द्रमसोर्मध्ये निरालम्बान्तरे पुनः । संस्थिता व्योमचक्रे या सा मुद्रा नाम खेचरी ॥ ४.४५ ॥ <br> सोमाद्यत्रोदिता धारा साक्षात्सा शिववल्लभा । पूरयेदतुलां दिव्यां सुषुम्णां पश्चिमे मुखे ॥ ४.४६ ॥ <br> पुरस्ताच्चैव पूर्येत निश्चिता खेचरी भवेत् । अभ्यस्ता खेचरी मुद्राप्युन्मनी सम्प्रजायते ॥ ४.४७ ॥ <br> भ्रुवोर्मध्ये शिवस्थानं मनस्तत्र विलीयते । ज्ञातव्यं तत्पदं तुर्यं तत्र कालो न विद्यते ॥ ४.४८ ॥ <br> अभ्यसेत्खेचरीं तावद्यावत्स्याद्योगनिद्रितः । सम्प्राप्तयोगनिद्रस्य कालो नास्ति कदाचन ॥ ४.४९ ॥ <br> निरालम्बं मनः कृत्वा न किंचिदपि चिन्तयेत् । सबाह्याभ्यन्तरं व्योम्नि घटवत्तिष्ठति ध्रुवम् ॥ ४.५० ॥ <br> बाह्यवायुर्यथा लीनस्तथा मध्यो न संशयः । स्वस्थाने स्थिरतां एति पवनो मनसा सह ॥ ४.५१ ॥ <br> एवं अभ्यस्यतस्तस्य वायुमार्गे दिवानिशम् । अभ्यासाज्जीर्यते वायुर्मनस्तत्रैव लीयते ॥ ४.५२ ॥ <br> अमृतैः प्लावयेद्देहं आपादतलमस्तकम् । सिद्ध्यत्येव महाकायो महाबलपराक्रमः ॥ ४.५३ ॥ <br> शक्तिमध्ये मनः कृत्वा शक्तिं मानसमध्यगाम् । मनसा मन आलोक्य धारयेत्परमं पदम् ॥ ४.५४ ॥ <br> खमध्ये कुरु चात्मानं आत्ममध्ये च खं कुरु । सर्वं च खमयं कृत्वा न किंचिदपि चिन्तयेत् ॥ ४.५५ ॥ <br> अन्तः शून्यो बहिः शून्यः शून्यः कुम्भ इवाम्बरे । अन्तः पूर्णो बहिः पूर्णः पूर्णः कुम्भ इवार्णवे ॥ ४.५६ ॥ <br> बाह्यचिन्ता न कर्तव्या तथैवान्तरचिन्तनम् । सर्वचिन्तां परित्यज्य न किंचिदपि चिन्तयेत् ॥ ४.५७ ॥ <br> सङ्कल्पमात्रकलनैव जगत्समग्रं सङ्कल्पमात्रकलनैव मनोविलासः । सङ्कल्पमात्रमतिं उत्सृज निर्विकल्पम् आश्रित्य निश्चयं अवाप्नुहि राम शान्तिम् ॥ ४.५८ ॥ <br> कर्पूरं अनले यद्वत्सैन्धवं सलिले यथा । तथा सन्धीयमानं च मनस्तत्त्वे विलीयते ॥ ४.५९ ॥ <br> ज्ञेयं सर्वं प्रतीतं च ज्ञानं च मन उच्यते । ज्ञानं ज्ञेयं समं नष्टं नान्यः पन्था द्वितीयकः ॥ ४.६० ॥ <br> मनोदृश्यं इदं सर्वं यत्किंचित्सचराचरम् । मनसो ह्युन्मनीभावाद्द्वैतं नैवोलभ्यते ॥ ४.६१ ॥ <br> ज्ञेयवस्तुपरित्यागाद्विलयं याति मानसम् । मनसो विलये जाते कैवल्यं अवशिष्यते ॥ ४.६२ ॥ <br> एवं नानाविधोपायाः सम्यक्स्वानुभवान्विताः । समाधिमार्गाः कथिताः पूर्वाचार्यैर्महात्मभिः ॥ ४.६३ ॥ <br> सुषुम्णायै कुण्डलिन्यै सुधायै चन्द्रजन्मने । मनोन्मन्यै नमस्तुभ्यं महाशक्त्यै चिदात्मने ॥ ४.६४ ॥ <br> अशक्यतत्त्वबोधानां मूढानां अपि संमतम् । प्रोक्तं गोरक्षनाथेन नादोपासनं उच्यते ॥ ४.६५ ॥ <br> श्रीआदिनाथेन सपादकोटि लयप्रकाराः कथिता जयन्ति । नादानुसन्धानकं एकं एव मन्यामहे मुख्यतमं लयानाम् ॥ ४.६६ ॥ <br> मुक्तासने स्थितो योगी मुद्रां सन्धाय शाम्भवीम् । शृणुयाद्दक्षिणे कर्णे नादं अन्तास्थं एकधीः ॥ ४.६७ ॥ <br> श्रवणपुटनयनयुगल घ्राणमुखानां निरोधनं कार्यम् । शुद्धसुषुम्णासरणौ स्फुटं अमलः श्रूयते नादः ॥ ४.६८ ॥ <br> आरम्भश्च घटश्चैव तथा परिचयोऽपि च । निष्पत्तिः सर्वयोगेषु स्यादवस्थाचतुष्टयम् ॥ ४.६९ ॥ <br> '''अथ आरम्भावस्था ब्रह्मग्रन्थेर्भवेद्भेदो ह्यानन्दः शून्यसम्भवः । विचित्रः क्वणको देहेऽनाहतः श्रूयते ध्वनिः ॥ ४.७० ॥ <br> दिव्यदेहश्च तेजस्वी दिव्यगन्धस्त्वरोगवान् । सम्पूर्णहृदयः शून्य आरम्भे योगवान्भवेत् ॥ ४.७१ ॥ <br> '''अथ घटावस्था द्वितीयायां घटीकृत्य वायुर्भवति मध्यगः । दृढासनो भवेद्योगी ज्ञानी देवसमस्तदा ॥ ४.७२ ॥ <br> विष्णुग्रन्थेस्ततो भेदात्परमानन्दसूचकः । अतिशून्ये विमर्दश्च भेरीशब्दस्तदा भवेत् ॥ ४.७३ ॥ <br> '''अथ परिचयावस्था तृतीयायां तु विज्ञेयो विहायो मर्दलध्वनिः । महाशून्यं तदा याति सर्वसिद्धिसमाश्रयम् ॥ ४.७४ ॥ <br> चित्तानन्दं तदा जित्वा सहजानन्दसम्भवः । दोषदुःखजराव्याधिक्षुधानिद्राविवर्जितः ॥ ४.७५ ॥ <br> '''अथ निष्पत्त्यवस्था रुद्रग्रन्थिं यदा भित्त्वा शर्वपीठगतोऽनिलः । निष्पत्तौ वैणवः शब्दः क्वणद्वीणाक्वणो भवेत् ॥ ४.७६ ॥ <br> एकीभूतं तदा चित्तं राजयोगाभिधानकम् । सृष्टिसंहारकर्तासौ योगीश्वरसमो भवेत् ॥ ४.७७ ॥ <br> अस्तु वा मास्तु वा मुक्तिरत्रैवाखण्डितं सुखम् । लयोद्भवं इदं सौख्यं राजयोगादवाप्यते ॥ ४.७८ ॥ <br> राजयोगं अजानन्तः केवलं हठकर्मिणः । एतानभ्यासिनो मन्ये प्रयासफलवर्जितान् ॥ ४.७९ ॥ <br> उन्मन्यवाप्तये शीघ्रं भ्रूध्यानं मम संमतम् । राजयोगपदं प्राप्तुं सुखोपायोऽल्पचेतसाम् । सद्यः प्रत्ययसन्धायी जायते नादजो लयः ॥ ४.८० ॥ <br> नादानुसन्धानसमाधिभाजां योगीश्वराणां हृदि वर्धमानम् । आनन्दं एकं वचसां अगम्यं जानाति तं श्रीगुरुनाथ एकः ॥ ४.८१ ॥ <br> कर्णौ पिधाय हस्ताभ्यां यः शृणोति ध्वनिं मुनिः । तत्र चित्तं स्थिरीकुर्याद्यावत्स्थिरपदं व्रजेत् ॥ ४.८२ ॥ <br> अभ्यस्यमानो नादोऽयं बाह्यं आवृणुते ध्वनिम् । पक्षाद्विक्षेपं अखिलं जित्वा योगी सुखी भवेत् ॥ ४.८३ ॥ <br> श्रूयते प्रथमाभ्यासे नादो नानाविधो महान् । ततोऽभ्यासे वर्धमाने श्रूयते सूक्ष्मसूक्ष्मकः ॥ ४.८४ ॥ <br> आदौ जलधिजीमूतभेरीझर्झरसम्भवाः । मध्ये मर्दलशङ्खोत्था घण्टाकाहलजास्तथा ॥ ४.८५ ॥ <br> अन्ते तु किङ्किणीवंशवीणाभ्रमरनिःस्वनाः । इति नानाविधा नादाः श्रूयन्ते देहमध्यगाः ॥ ४.८६ ॥ <br> महति श्रूयमाणेऽपि मेघभेर्यादिके ध्वनौ । तत्र सूक्ष्मात्सूक्ष्मतरं नादं एव परामृशेत् ॥ ४.८७ ॥ <br> घनं उत्सृज्य वा सूक्ष्मे सूक्ष्मं उत्सृज्य वा घने । रममाणं अपि क्षिप्तं मनो नान्यत्र चालयेत् ॥ ४.८८ ॥ <br> यत्र कुत्रापि वा नादे लगति प्रथमं मनः । तत्रैव सुस्थिरीभूय तेन सार्धं विलीयते ॥ ४.८९ ॥ <br> मकरन्दं पिबन्भृङ्गी गन्धं नापेक्षते यथा । नादासक्तं तथा चित्तं विषयान्नहि काङ्क्षते ॥ ४.९० ॥ <br> मनोमत्तगजेन्द्रस्य विषयोद्यानचारिणः । समर्थोऽयं नियमने निनादनिशिताङ्कुशः ॥ ४.९१ ॥ <br> बद्धं तु नादबन्धेन मनः सन्त्यक्तचापलम् । प्रयाति सुतरां स्थैर्यं छिन्नपक्षः खगो यथा ॥ ४.९२ ॥ <br> सर्वचिन्तां परित्यज्य सावधानेन चेतसा । नाद एवानुसन्धेयो योगसाम्राज्यं इच्छता ॥ ४.९३ ॥ <br> नादोऽन्तरङ्गसारङ्गबन्धने वागुरायते । अन्तरङ्गकुरङ्गस्य वधे व्याधायतेऽपि च ॥ ४.९४ ॥ <br> अन्तरङ्गस्य यमिनो वाजिनः परिघायते । नादोपास्तिरतो नित्यं अवधार्या हि योगिना ॥ ४.९५ ॥ <br> बद्धं विमुक्तचाञ्चल्यं नादगन्धकजारणात् । मनःपारदं आप्नोति निरालम्बाख्यखेऽटनम् ॥ ४.९६ ॥ <br> नादश्रवणतः क्षिप्रं अन्तरङ्गभुजङ्गमम् । विस्मृतय सर्वं एकाग्रः कुत्रचिन्नहि धावति ॥ ४.९७ ॥ <br> काष्ठे प्रवर्तितो वह्निः काष्ठेन सह शाम्यति । नादे प्रवर्तितं चित्तं नादेन सह लीयते ॥ ४.९८ ॥ <br> घण्टादिनादसक्तस्तब्धान्तःकरणहरिणस्य । प्रहरणं अपि सुकरं स्याच्छरसन्धानप्रवीणश्चेत् ॥ ४.९९ ॥ <br> अनाहतस्य शब्दस्य ध्वनिर्य उपलभ्यते । ध्वनेरन्तर्गतं ज्ञेयं ज्ञेयस्यान्तर्गतं मनः । मनस्तत्र लयं याति तद्विष्णोः परमं पदम् ॥ ४.१०० ॥ <br> तावदाकाशसङ्कल्पो यावच्छब्दः प्रवर्तते । निःशब्दं तत्परं ब्रह्म परमातेति गीयते ॥ ४.१०१ ॥ <br> यत्किंचिन्नादरूपेण श्रूयते शक्तिरेव सा । यस्तत्त्वान्तो निराकारः स एव परमेश्वरः ॥ ४.१०२ ॥ <br> '''इति नादानुसन्धानं सर्वे हठलयोपाया राजयोगस्य सिद्धये । राजयोगसमारूढः पुरुषः कालवञ्चकः ॥ ४.१०३ ॥ <br> तत्त्वं बीजं हठः क्षेत्रं औदासीन्यं जलं त्रिभिः । उन्मनी कल्पलतिका सद्य एव प्रवर्तते ॥ ४.१०४ ॥ <br> सदा नादानुसन्धानात्क्षीयन्ते पापसंचयाः । निरञ्जने विलीयेते निश्चितं चित्तमारुतौ ॥ ४.१०५ ॥ <br> शङ्खदुन्धुभिनादं च न शृणोति कदाचन । काष्ठवज्जायते देह उन्मन्यावस्थया ध्रुवम् ॥ ४.१०६ ॥ <br> सर्वावस्थाविनिर्मुक्तः सर्वचिन्ताविवर्जितः । मृतवत्तिष्ठते योगी स मुक्तो नात्र संशयः ॥ ४.१०७ ॥ <br> खाद्यते न च कालेन बाध्यते न च कर्मणा । साध्यते न स केनापि योगी युक्तः समाधिना ॥ ४.१०८ ॥ <br> न गन्धं न रसं रूपं न च स्पर्शं न निःस्वनम् । नात्मानं न परं वेत्ति योगी युक्तः समाधिना ॥ ४.१०९ ॥ <br> चित्तं न सुप्तं नोजाग्रत्स्मृतिविस्मृतिवर्जितम् । न चास्तं एति नोदेति यस्यासौ मुक्त एव सः ॥ ४.११० ॥ <br> न विजानाति शीतोष्णं न दुःखं न सुखं तथा । न मानं नोपमानं च योगी युक्तः समाधिना ॥ ४.१११ ॥ <br> स्वस्थो जाग्रदवस्थायां सुप्तवद्योऽवतिष्ठते । निःश्वासोच्छ्वासहीनश्च निश्चितं मुक्त एव सः ॥ ४.११२ ॥ <br> अवध्यः सर्वशस्त्राणां अशक्यः सर्वदेहिनाम् । अग्राह्यो मन्त्रयन्त्राणां योगी युक्तः समाधिना ॥ ४.११३ ॥ <br> यावन्नैव प्रविशति चरन्मारुतो मध्यमार्गे यावद्विदुर्न भवति दृढः प्राणवातप्रबन्धात् । यावद्ध्याने सहजसदृशं जायते नैव तत्त्वं तावज्ज्ञानं वदति तदिदं दम्भमिथ्याप्रलापः ॥ ४.११४ ॥ <br> इति हठयोगप्रदीपिकायां समाधिलक्षणं नाम चतुर्थोपदेशः । </poem> {{col-end}} == 참고 == {{주석}} aey2w18t7a8f2g02zc1vfvp2e3l6e98 번역:라자 요가 114 83932 458050 418778 2026-08-18T00:33:15Z Danuri19 16656 458050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 분별(미세한 탐구), 행복(이성적 깨달음),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samprajñāta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bsjh2mpg74q00zwf2tlr9bt2lq50i13 458051 458050 2026-08-18T00:35:09Z Danuri19 16656 458051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 분별(미세한 탐구), 행복(이성적 깨달음),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samprajñāta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44e2flmfq1v7cm9f1e5nf5joinjhrey 458052 458051 2026-08-18T00:38:13Z Danuri19 16656 458052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 분별(미세한 탐구), 행복(이성적 깨달음),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삼쁘라즈냐타)samprajñāta<ref>유상삼매(有相三昧)</ref>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b2bgajkauwow4qn2dzoitxzmycpp2el 458054 458052 2026-08-18T00:44:49Z Danuri19 16656 458054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vitarka), 분별(미세한 탐구,vicara), 행복(순수한 앎<ref>한편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또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적 기쁨'으로도 이해해볼수있다.</ref> ananda),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 asmita)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삼쁘라즈냐타)samprajñāta<ref>유상삼매(有相三昧)</ref>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anqvzzshvk4qq0ggaplpuisbiuuppw1 458056 458054 2026-08-18T00:47:43Z Danuri19 16656 458056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vitarka), 분별(미세한 탐구,vicara), 행복(순수한 앎<ref>한편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또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적 기쁨'으로도 이해해볼수있다.</ref> ananda),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 asmita)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삼쁘라즈냐타)samprajñāta<ref>유상삼매(有相三昧)</ref>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ref>아삼쁘라즈냐타 삼매 (Asamprajñāta Samādhi, 무상삼매)</ref>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7swxif46a14vlfrrz2orthp8ue37cpr 458057 458056 2026-08-18T01:00:26Z Danuri19 16656 458057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vitarka), 분별(미세한 탐구,vicara), 행복(순수한 앎<ref>한편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또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적 기쁨'으로도 이해해볼수있다.</ref> ananda),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 asmita)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삼쁘라즈냐타)samprajñāta<ref>유상삼매(有相三昧)</ref>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ref>아삼쁘라즈냐타 삼매 (Asamprajñāta Samādhi, 무상삼매)</ref>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니르비자nirvija)<ref>a-sam-prajñāta samadhi(무상삼매)</ref>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9m0d9ys436h9nljim8xkrq0cgswduvo 458059 458057 2026-08-18T01:17:33Z Danuri19 16656 458059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vitarka), 분별(미세한 탐구,vicara), 행복(순수한 앎<ref>한편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또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적 기쁨'으로도 이해해볼수있다.</ref> ananda),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 asmita)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삼쁘라즈냐타)samprajñāta<ref>유상삼매(有相三昧)</ref>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ref>아삼쁘라즈냐타 삼매 (Asamprajñāta Samādhi, 무상삼매)</ref>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니르비자nirvija)<ref>a-sam-prajñāta samadhi(무상삼매)</ref>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ref>[4.28] '덕(德)의 구름'(다르마메가 삼매,Dharma-megha 사마띠) 참고</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03hqetlcqrw5df7inica4lkh5vy4j2g 458060 458059 2026-08-18T01:20:11Z Danuri19 16656 458060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번역 및 해설)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next=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참고1]고락샤-샤타카(Goraksha-Shataka,Gsh) 브릭스(Briggs)영문판 1938년<ref>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170504 #] </ref> ,[참고2][[하타요가프라디피카|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ha Yoga Pradipika,Hyp) 저자: 스와미 스와트마라마(Swami Swatmarama) / 역자: 판참 싱(Pancham Sinh)판 영문텍스트 1915년 ,[참고3]요가 입문(An Introduction to Yoga)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1907년<ref>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https://www.gutenberg.org/ebooks/4278 #]</ref> ,[참고4][[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1922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참고5]심리학의 원리 1918년판 윌리엄 제임스<ref>(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https://www.gutenberg.org/ebooks/57628 #]</ref>[참고6] 역경(주역) 제임스 레지1882년 영문판 <ref>(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https://ko.wikisource.org/wiki/%EC%A3%BC%EC%97%AD%EC%83%81 #]</ref> }}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CHAPTER I (제1장) <br>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br>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br> CHAPTER II (제2장) <br>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br> - 아사나(asana) 수행 - <br> CHAPTER III (제3장) <br> POWERS(능력의 시작점) <br>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br> CHAPTER IV (제4장) <br>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br>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td></tr></table>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br>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br>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br> atha yogānuśāsanam<br>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br> [1.1] 이제 집중(yoga)<ref>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ref><ref>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ref><ref>[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ref><ref>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이 설명됩니다.<ref>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f><ref>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ref><br>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br>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br>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br>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ref>[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ref><ref>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ref><br>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br>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ref>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ref>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ref>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ref>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ref>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ref>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ref>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ref>)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br>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b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br>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br>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br>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br>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r>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br>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ref>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ref>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br>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br>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br>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br>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ref>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ref>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br>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br>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br>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br> vṛttisārūpyam itaratra<br>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br>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ref>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ref><br>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br>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br>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br>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br>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br>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br>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br>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br>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br>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br>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br>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br>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br>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ref>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ref><br>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br>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br>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br>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br>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br>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b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br>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br>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br>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br>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br>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br>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br>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br>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br>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br>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br>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br>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br>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br>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br>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br>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br>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br>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br>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br>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br>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br>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f>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ref><br>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b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ref>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ref>,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br>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br>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br>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br>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br>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br>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br>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br>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ref>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ref><br>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br>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br>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br>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br>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br>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br>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br>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br>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ref>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ref>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br>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br>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br>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br>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br>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tri-guna트리구나) 하나는 타마(스)Tama(s)<ref>तम tama darkness 어둠</ref>,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ref>रज raja 감정,정서</ref>,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ref>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br>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br>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br>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br> [1.17] 올바른 지식<ref>현대적 해석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해볼수있다.</ref>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거친 사유,vitarka), 분별(미세한 탐구,vicara), 행복(순수한 앎<ref>한편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또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적 기쁨'으로도 이해해볼수있다.</ref> ananda),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대상(존재 asmita)이 뒤따르는 것입니다.<br>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br>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삼쁘라즈냐타)samprajñāta<ref>유상삼매(有相三昧)</ref>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ref>아삼쁘라즈냐타 삼매 (Asamprajñāta Samādhi, 무상삼매)</ref>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ref>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ref>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br>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br>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ref>1.43 nirvitarka </ref>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ref>1.44 nirvitarka , nir -vi- cāra (निर् वि चार) nir -vi- cāra , nir(ḥ)निर्(निः)- ~에서 벗어난 , vi- -펼친 또는 나누는 , cāra : 움직임 또는 탐색 , vicāra(विचार) = “미세하게 살펴보는 사고" , nirvicāra(निर्विचार)=개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 무이중성?</ref><ref>바가바드 기타 5.24,5.25(브라흐마-니르바나 brahma-nirvāṇa) 참고</ref>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br>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br>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br>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br>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br>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br>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br>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br>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br>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br>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br>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br>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br>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br>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br>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br>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br>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br>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br>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br>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br>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br>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br>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br>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br>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br>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br>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br>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br>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br>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br>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br> īśvarapraṇidhānād vā <br> 23. Or by devotion to Ishvara.<br>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ref>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ref>에 대한 헌신으로.<br>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br>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br>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br>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br>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br>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br>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br>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br>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br>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br>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br>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br>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br>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br>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br>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br>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br>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br>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br>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br>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br>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ref>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ref><ref>[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ref>는 옴(om)<ref>진동(振動)소리 </ref><ref>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ref><ref>(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ref>입니다.<br>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br>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f>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ref>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ref>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ref>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ref>om,aum, uhm 아움,흠,옴 등</ref>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br>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br> tajjapas tadarthabhāvanam<br>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br>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br>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br>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br>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br>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br>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br>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br>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br>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br>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br>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br>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br>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br>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br>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ref>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ref>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br>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br>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br>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br>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br>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br>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br>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br>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br>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br>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br>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br>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br>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br>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br>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br>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ref>[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ref><ref>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ref><br>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br>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ref>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ref>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ref>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ref>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br>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br>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br>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br>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br>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br>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ref>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ref>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ref>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ref>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br>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br>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br>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br>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ref>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ref>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ref>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br>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br>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ref>슬럼프 , 침체기 같은</ref>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br>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br>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br>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br>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br>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br>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ref>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ref>,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br>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br> viśokā vā jyotiṣmatī<br>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br>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br>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br>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br>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br>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br>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br>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br>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br>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br>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br>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br>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br>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br>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br>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br>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br> yathābhimatadhyānād vā<br>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br>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ref>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br>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br>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br>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br>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br>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br>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br>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b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br>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br>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br>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br> [1.41] 브리티스<ref>[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ref>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br>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br>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br>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br>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br>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br>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br>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b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ref>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br>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br>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br>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br>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nirvitarka니르비타르카)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br>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br>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br>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br>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br>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br>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이상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니르비카라)이 (또한) 설명됩니다.<br>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br>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되지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었던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세밀한 대상을 다룹니다.<br>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br>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br>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br>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br>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br>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ref>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ref>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br>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br>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br>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br>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ref>종자(種子) = 원인, 이유</ref>에 대한 집중입니다.<br>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br>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br>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br>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br>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br>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br>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br>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br>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br>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br>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br>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br>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br>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br>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br>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br>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br>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br>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br>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br>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br>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br>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br>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br>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br>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br>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br>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br>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br>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니르비자nirbija)<ref>a-sam-prajñāta samadhi(무상삼매)</ref>가 나옵니다.<ref>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ref><ref>[4.28] '덕(德)의 구름'(다르마메가 삼매,Dharma-megha 사마띠) 참고</ref><br>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br>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ref>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ref>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br> == 참고 ==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br>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scans/MWScan/2020/web/webtc/indexcaller.php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br>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br>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br>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br>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g18w0zmqx77iek4dzlzzlajxskz99pb 번역:라자 요가/제3장 114 84138 458048 393662 2026-08-18T00:03:21Z Danuri19 16656 458048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라자 요가/제2장|제2장]] |next= [[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II POWERS <br> 파탄자리의 요가 수트라 제3장 능력의 시작점 <br> देशबन्धश्चित्तस्य धारणा ॥१॥<br> deśabandhaś cittasya dhāraṇā<br> 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br> [3.1] 다라나(dharanā)<ref>마음 집중 또는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ref>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br> Dharana (concentration) is when the mind holds on to some object, either in the body, or outside the body, and keeps itself in that state.<br> 다라나(집중)는 마음이 몸 안이나 몸 밖에 어떤 대상을 붙잡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br> तत्र प्रत्ययैकतानता ध्यानम् ॥२॥<br> tatra pratyayaikatānatā dhyānam<br> 2. An unbroken flow of knowledge in that object is Dhyāna.<br> [3.2] 그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의식)의 흐름이 드야나(명상)<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명상(묵상contemplation, thought생각(의식,의지), reflection 반영(반사상)</ref><ref>과학적 사고(원리)</ref><ref>참고[3.13] 삼야마(संयम saṃyama) = 변수(variable變數)</ref><ref>명상(meditation)영적 목적을 위해 또는 이완 방법으로 침묵 속에서 또는 소리(청각)의 도움을 받아 깊이 생각하거나 일정 시간 동안 마음을 집중하는 것. 묵상(contemplation) 무언가에 몰입해(생각에잠겨)서 이를 바라보(듣)는 행위.</ref>입니다.<br> The mind tries to think of one object, to hold itself to one particular spot, as the top of the head, the heart, etc., and if the mind succeeds in receiving the sensations only through that part of the body, and through no other part, that would be Dharana, and when the mind succeeds in keeping itself in that state for some time, it is called Dhyana (meditation).<br> 마음은 머리 꼭대기, 심장 등과 같은 하나의 특정 지점에 자신을 고정하기 위해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려고 시도하며, 마음이 신체의 해당 부분을 통해서만 감각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면 다른 부분은 다라나(Dharana)이며, 마음이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면 이를 드야나(명상)라고 합니다.<br> तदे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स्वरूपशून्यमिव समाधिः ॥३॥<br> tad evārthamātranirbhāsaṃ svarūpaśūnyam iva samādhiḥ<br> 3. When that, giving up all forms, reflects only the meaning, it is Samādhi.<br> [3.3] 그것이 모든 형태를 버리고 의미만을 반영할 때, 그것이 사마띠(삼다)<ref>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 -삼다(국어사전)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어 자기와 관계있는 것으로 만들다. -삼다 [동사]( ~을 ~으로)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거나 여기다. 무엇을 무엇으로 가정하다.</ref><ref>무언가를 무언가로 삼아 사마띠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무언가로 삼지 않음으로서 삼는 이것도 (씨없는)사마띠입니다. 그리고 사마띠의 삼(는)다는 행위조차도 푸루샤(purusha)앞에서는(때가 되면) 한줌의 먼지같은 한점이 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사라집니다.그러나 그때가 될때까지는 질량덩어리로 잉태된 고귀한 의무를 다합니다.</ref>입니다.<br> That comes when in meditation the form or the external part is given up. Suppose I were meditating on a book, and that I have gradually succeeded in concentrating the mind on it, and perceiving only the internal sensations, the meaning, unexpressed in any form — that state of Dhyana is called Samadhi.<br> 그것은 명상 중에 형태나 외적인 부분을 포기할 때 발생합니다. 내가 책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어떤 형태로도 표현되지 않은 내적 감각과 의미만을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한 드야나(명상)의 상태를 삼매(사마띠samadhi)라고 합니다.<br> त्रयमेकत्र संयमः ॥४॥<br> trayam ekatra saṃyamaḥ <br> 4. (These) three (when practised) in regard to one object is Samyama.<br> [3.4] (이들) 세 가지(를 수행<ref>수련 또는 실천</ref>할 때) (또다른)하나의 대상이 삼야마<ref>[3.13]참고</ref><ref>변수(variable變數) 또는 가능성(possibility)</ref>입니다.<br> When a man can direct his mind to any particular object and fix it there, and then keep it there for a long time, separating the object from the internal part, this is Samyama; or Dharana, Dhyana, and Samadhi, one following the other, and making one. The form of the thing has vanished, and only its meaning remains in the mind.<br> 사람이 어떤 특정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거기에 고정시킨 다음 대상과 내부 부분을 분리하여 오랫동안 거기에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삼야마입니다. 또는 다라나(Dharana), 드야나(Dhyana), 사마띠(Samadhi)가 차례로 이어져 하나를 만듭니다. 사물의 형태는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의미(뜻)<ref>뜻은 말의 단어가 표상되는 그 (일대일대응되는)대상이며 뇌신경의 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단어)로 발음되기전의 상태입니다.</ref>만 남습니다.<br> तज्जयात् प्रज्ञाऽऽलोकः ॥५॥<br> tajjayāt prajñālokaḥ <br> 5. By the conquest of that comes light of knowledge.<br> [3.5] 그것을 극복(정복)함으로써 지식(의지)의 빛이 나옵니다.<br> When one has succeeded in making this Samyama, all powers come under his control. This is the great instrument of the Yogi. The objects of knowledge are infinite, and they are divided into the gross, grosser, grossest and the fine, finer, finest and so on. This Samyama should be first applied to gross things, and when you begin to get knowledge of this gross, slowly, by stages, it should be brought to finer things.<br> 이 삼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모든 권력이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요기의 위대한 도구입니다. 지식의 대상은 무한하며, 그것들은 (부분의 합이자 그이상의 것)전체적인 것(gross)<ref>gross 전체(합),총체</ref>, 더 전체적인것, 가장 전체적인것과 미세한것(fine), 더 미세한것, 아주 가장 미세한것 등으로 나뉩니다. 이 삼야마는 총체적인 것들에 먼저 적용되어야 하며, 이 총체적인 것들에 대해 서서히, 단계적으로 지식을 얻기 시작하면 (점점)더 미세한 것으로 가져와야 합니다.<br> तस्य भूमिषु विनियोगः ॥६॥<br> tasya bhūmiṣu viniyogaḥ<br> 6. That should be employed in stages.<br> [3.6] 단계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br> This is a note of warning not to attempt to go too fast.<br> 너무 빨리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br> त्रयमन्तरङ्गं पूर्वेभ्यः ॥७॥<br> trayam antaraṅgaṃ pūrvebhyaḥ <br> 7. These three are more internal than those that precede.<br> [3.7] (여덟가지중)<ref>[참고] 팔지체 아쉬탕가 [2.29]</ref>이 세 가지는 앞의 것(5개)보다 내부적인 것입니다.<br> Before these we had the Pratyāhāra, the Prānāyāma, the Āsana, the Yama and Niyama; they are external parts of the three — Dharana, Dhyana and Samadhi. When a man has attained to them, he may attain to omniscience and omnipotence, but that would not be salvation. These three would not make the mind Nirvikalpa, changeless, but would leave the seeds for getting bodies again. Only when the seeds are, as the Yogi says, "fried," do they lose the possibility of producing further plants. These powers cannot fry the seed.<br> 이들 이전에는 프라티야하라Pratyāhāra, 프라나야마Prānāyāma, 아사나Āsana, 야마Yama 및 니야마Niyama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다라나(Dharana), 드야나(Dhyana), 사마띠(Samadhi)의 외부 부분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에 도달하면 전지와 전능함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마음을 불변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유'(니르비칼파Nirvikalpa)<ref>निर्विकल्प nirvikalpa , 니르비칼파(Nir- (없음) + Vikalpa (언어적) 분별/상상)</ref><ref>[1.5],[1.6]판차브리티스(vṛttayaḥ pañcatayyaḥ 5가지 변형들)중 비칼파(vikalpa) 참고. </ref>로 만들지 않고 다시 몸을 얻기 위한 씨앗을 남길 것입니다. 요기가 말했듯이 씨앗이 '소멸한'<ref>태워진(fry) 불에 볶다. 기름에 튀기다. 여기서는 (씨를)말리다 , (정당하게)흡수되(소멸한)로 이해할수있다.</ref> 경우에만 더 많은 식물을 생산할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힘으로는 씨(앗)를 태울(말릴)수 없습니다.<ref>참고 [1.17]</ref><br> तदपि बहिरङ्गं निर्बीजस्य ॥८॥<br> tad api bahiraṅgaṃ nirbījasya <br> 8. But even they are external to the seedless (Samadhi).<br> [3.8] 그러나 그들조차도 씨앗 없는 것(사마띠)의 외부에 있습니다.<br> Compared with that seedless Samadhi, therefore, even these are external. We have not yet reached the real Samadhi, the highest, but a lower stage, in which this universe still exists as we see it, and in which are all these powers.<br> 그러므로 이들조차도 저 씨(앗)없는 사마띠에 비하면 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우주가 우리가 보는 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그리고 이 모든 힘들이 존재하는 (가장높은단계)보다는 더 낮은 단계이며 그리고(아직) 가장 높은 단계인 실제 사마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br> व्युत्थान-निरोधसंस्कारयोरभिभव-प्रादुर्भावौ निरोधक्षणचित्तान्वयो निरोध-परिणामः ॥९॥<br> vyutthānanirodhasaṃskārayor abhibhavaprādurbhāvau nirodhakṣaṇacittānvayo nirodhapariṇāmaḥ<br> 9. By the suppression of the disturbed impressions of the mind, and by the rise of impressions of control, the mind, which persists in that moment of control, is said to attain the controlling modifications.<br> [3.9] 마음의 흐트러진 인상(반영)<ref>반사상 reflection</ref>을 억제하고, 통제의 인상을 상승(돌출)시킴으로써, 그 통제의 순간에 지속되는 마음은 통제의 변화를 이룬다고 합니다.<br> That is to say, in this first state of Samadhi the modifications of the mind have been controlled, but not perfectly, because if they were, there would be no modifications. If there is a modification which impels the mind to rush out through the senses, and the Yogi tries to control it, that very control itself will be a modification. One wave will be checked by another wave, so it will not be real Samadhi in which all the waves subside, as control itself will be a wave. Yet this lower Samadhi is very much nearer to the higher Samadhi than when the mind comes bubbling out.<br> 즉, 사마띠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통제되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변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감각을 통해 빠져나오도록 강요하는 변형이 있고, 요기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 통제 자체가 변형이 될 것입니다. 하나의 파동은 다른 파동에 의해 저지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파동이 가라앉는 진정한 사마띠는 아닐 것입니다. 통제 자체가 파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낮은 삼매는 마음이 솟아날 때보다(는) 더 높은 사마띠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br> तस्य प्रशान्तवाहिता संस्कारात् ॥१०॥<br> tasya praśāntavāhitā saṃskārāt<br> 10. Its flow becomes steady by habit.<br> [3.10] 습관에 의해 흐름이 꾸준해집니다.<br> The flow of this continuous control of the mind becomes steady when practised day after day, and the mind obtains the faculty of constant concentration.<br> 마음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는 흐름은 날마다 수행할 때 안정되고 마음은 지속적인 집중 능력을 얻습니다.<br> सर्वार्थतैकाग्रतयोः क्षयोदयौ चित्तस्य समाधि-परिणामः ॥११॥<br> sarvārthataikāgratayoḥ kṣayodayau cittasya samādhipariṇāmaḥ <br> 11. Taking in all sorts of objects, and concentrating upon one object, these two powers being destroyed and manifested respectively, the Chitta gets the modification called Samadhi.<br> [3.11] 모든 종류의 대상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이 두 가지 힘이 각각 파괴되고 (새로이)발현되면 치타는 (또다른)사마띠(Samadhi)라는 변형을 얻습니다.<br> The mind takes up various objects, runs into all sorts of things. That is the lower state. There is a higher state of the mind, when it takes up one object and excludes all others, of which Samadhi is the result.<br> 마음은 다양한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종류의 것들에 부딪칩니다. 즉 낮은 상태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취하고 다른 모든 대상을 배제하는 마음의 더 높은 상태가 있으며, 그 결과가 사마띠입니다.<br> शान्तोदितौ तुल्यप्रत्ययौ चित्तस्यैकाग्रता-परिणामः ॥१२॥<br> tataḥ punaḥ śāntoditau tulyapratyayau cittasyaikāgratāpariṇāmaḥ<br> 12. The one-pointedness of the Chitta is when the impression that is past and that which is present are similar.<br> [3.12] 치타의 일점성(一點性)<ref>초점을 맞추는 성질(또는 초점이 맞추어지는 성질) , 참고 [1.2]</ref><ref>심리학적인 또는 원근법의 소실점(또는 수평선)</ref>은 과거의 인상과 현재의 인상이 유사할 때입니다.<br> How are we to know that the mind has become concentrated? Because the idea of time will vanish. The more time passes unnoticed the more concentrated we are. In common life we see that when we are interested in a book we do not note the time at all; and when we leave the book, we are often surprised to find how many hours have passed. All time will have the tendency to come and stand in the one present. So the definition is given: When the past and present come and stand in one, the mind is said to be concentrated.<ref>The distinction among the three kinds of concentration mentioned in aphorisms 9, 11 and 12 is as follows: In the first, the disturbed impressions are merely held back, but not altogether obliterated by the impressions of control which just come in; in the second, the former are completely suppressed by the latter which stand in bold relief; while in the third, which is the highest, there is no question of suppressing, but only similar impressions succeed each other in a stream. —Ed.</ref><br> 마음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간에 대한 생각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집중하고있게 된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책에 관심을 가질 때 시간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떠날 때,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고 종종 놀라게 됩니다. 모든 시간은 하나의 현재에 왔다가 멈추어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주어졌습니다. 과거(그리고 미래)가 현재로 와서 하나로 뭉칠 때 마음이 집중된다고 합니다.<ref>구절 9, 11, 12에 언급된 세 가지 종류의 집중 사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방해받은 인상은 단지 (하나로)억제될 뿐이며 지금 들어온 통제의 인상에 의해 완전히 제거된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전자가 후자에 의해 완전히 억압되어 대담한 안도감(압도감)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가장 높은 세 번째에서는 억제할 여지가 없으며 유사한 인상만이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에드.</ref><br> एतेन भूतेन्द्रियेषु धर्मलक्षणावस्थापरिणामा व्याख्याताः ॥१३॥<br> etena bhūtendriyeṣu dharmalakṣaṇāvasthāpariṇāmā vyākhyātāḥ<br> 13. By this is explained the threefold transformation of form, time and state, in fine or gross matter and in the organs.<br> [3.13] 이것은 미세하거나 총체적인 물질과 기관에서 형태, 시간, (공간적으로)상태<ref>공간속에서의 상황,상태</ref>의 삼중(三重) 변형을 설명합니다.<ref>현대요가는 이것을 과학적방법론의 절차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 이해해볼수있습니다.</ref><br> By the threefold changes in the mind-stuff as to form, time and state are explained the corresponding changes in gross and subtle matter and in the organs. Suppose there is a lump of gold. It is transformed into a bracelet and again into an earring. These are changes as to form. The same phenomena looked at from the standpoint of time give us change as to time. Again, the bracelet or the earring may be bright or dull, thick or thin, and so on. This is change as to state. Now referring to the aphorisms 9, 11 and 12, the mind-stuff is changing into Vrittis — this is change as to form. That it passes through past, present and future moments of time is change as to time. That the impressions vary as to intensity within one particular period, say, present, is change as to state. The concentrations taught in the preceding aphorisms were to give the Yogi a voluntary control over the transformations of his mind-stuff, which alone will enable him to make the Samyama named in III.4.<br> 형태, 시간, 상태(공간)에 관한 마음의 삼중 변화는 총체적이거나 미묘한 물질과 기관의 상응하는 변화를 설명합니다. 금 덩어리가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팔찌로, 다시 귀걸이로 변형됩니다. 이는 형태에 따른 변화입니다. 동일한 현상을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에 따른 변화도 나타납니다. 역시 팔찌나 귀걸이는 밝을 수도 있고 칙칙할 수도 있고, 두껍거나 얇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상태에 대한 변경입니다. 이제 구절(verse) 9, 11, 12를 언급하면 마음의 재료가 브리티스(Vrittis)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태의 변화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간을 통과한다는 것은 시간의 변화입니다. 특정 기간, 즉 현재 내에서 강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것은 상태에 대한 변화입니다. 앞의 구절(verse)에서 가르친 집중은 요기가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자발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3.4]에 명명된 삼야마(Samyama)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br> शान्तोदिताव्यपदेश्यधर्मानुपातो धर्मी ॥१४॥<br> śāntoditāvyapadeśyadharmānupātī dharmī <br> 14. That which is acted upon by transformation, either past, present, or yet to be manifested is the qualified.<br> [3.14] 과거, 현재 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변화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자격이 있는 것'(자격있음)입니다.<br> That is to say, the qualified is the substance which is being acted upon by time and by the Samskāras, and getting changed and being manifested always.<br> 즉, '자격있음'은 시간과 삼스카라에 의해 항상 작용하여 변화하는 구현된 실체입니다.<br> क्रमान्यत्वं परिणामान्यत्वे हेतुः ॥१५॥<br> kramānyatvaṃ pariṇāmānyatve hetuḥ <br> 15. The succession of changes is the cause of manifold evolution.<br> [3.15] 변화의 연속은 다양체 진화의 원인입니다.<br> परिणामत्रयसंयमादतीतानागतज्ञानम् ॥१६॥<br> pariṇāmatrayasaṃyamād atītānāgatajñānam<br> 16. By making Samyama on the three sorts of changes comes the knowledge of past and future.<br> [3.16] 세 가지 변화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br> We must not lose sight of the first definition of Samyama. When the mind has attained to that state when it identifies itself with the internal impression of the object, leaving the external, and when, by long practice, that is retained by the mind and the mind can get into that state in a moment, that is Samyama. If a man in that state wants to know the past and future, he has to make a Samyama on the changes in the Samskaras (III.13). Some are working now at present, some have worked out, and some are waiting to work. So by making a Samyama on these he knows the past and future.<br> 우리는 삼야마에 대한 첫 번째 정의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대상의 내적 인상과 동일시되어 외적인 것을 떠나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리고 마음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오랜 연습에 의해 그 상태에 (순차적으로)순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삼야마입니다.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이 과거와 미래를 알고 싶다면, 삼까라스(삼카라스samskaras)의 변화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어야 합니다(참고[3.13]). 어떤 사람은 현재 일(연습)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운동(연습)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일(연습)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어서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br> शब्दार्थप्रत्ययानामितरेतराध्यासात्सङ्करस्तत्प्रविभागसंयमात् सर्वभूतरुतज्ञानम् ॥१७॥<br> śabdārthapratyayānām itaretarādhyāsāt saṃkaras tatpravibhāgasaṃyamāt sarvabhūtarutajñānam <br> 17. By making Samyama on word, meaning and knowledge, which are ordinarily confused, comes the knowledge of all animal sounds.<br> 17. 평소에 혼동되었던 말과 의미 그리고 지식을 삼야마로 만듦게 됨으로써 모든 동물의 소리에 대한 앎이 형성(체득)됩니다.<br> The word represents the external cause, the meaning represents the internal vibration that travels to the brain through the channels of the Indriyas, conveying the external impression to the mind, and knowledge represents the reaction of the mind, with which comes perception. These three, confused, make our sense-objects. Suppose I hear a word;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next the internal sensation carried to the mind by the organ of hearing, then the mind reacts, and I know the word. The word I know is a mixture of the three — vibration, sensation, and reaction. Ordinarily these three are inseparable; but by practice the Yogi can separate them. When a man has attained to this, if he makes a Samyama on any sound, he understands the meaning which that sound was intended to express, whether it was made by man or by any other animal.<br> 그 말(음성적 울림 또는 진동)은 (소리라는)외적인 원인을 나타내고, 그 의미는 인드리야스의 통로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내적인 진동을 나타내며, 외적인 인상을 마음에 전달하고, 지식은 지각에 이르는 마음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혼란스러운 이 세 가지는 우리의 감각 대상을 만듭니다. 내가 어떤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봅니다. 먼저 외적인 진동이 있고, 다음은 청각 기관에 의해 마음으로 전달되는 내적인 감각이 있고, 그 다음은 마음이 반응하고, 나는 그 말을 압니다. 내가 아는 그 말은 진동, 감각, 그리고 반응의 세 가지가 혼합된 것입니다. 보통 이 세 가지는 분리할 수 없지만, 연습에 의해 요기들은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것에 도달했을 때, 어떤 소리에 대해 삼야마를 지으면, 그 소리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든 다른 동물에 의해 만들어졌든,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를 이해합니다.<br> संस्कारसाक्षात्करणात् पूर्वजातिज्ञानम् ॥१८॥<br> saṃskārasākṣātkaraṇāt pūrvajātijñānam <br> 18. By perceiving the impressions, (comes) the knowledge of past life.<br> [3.18] 인상을 지각함으로써 과거(삶)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br> Each experience that we have, comes in the form of a wave in the Chitta, and this subsides and becomes finer and finer, but is never lost. It remains there in minute form, and if we can bring this wave up again, it becomes memory. So, if the Yogi can make a Samyama on these past impressions in the mind, he will begin to remember all his past lives.<br>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경험은 치타에서 파동의 형태로 오고, 이것은 가라앉고 점점 미세해지지만 결코 잃지 않습니다. 미세한 형태로 거기에 남아 있고, 이 파동을 다시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요기들이 이러한 과거의 인상에 대해 마음속에 삼야마를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생을 기억하기 시작할 것입니다.<br> प्रत्ययस्य परचित्तज्ञानम् ॥१९॥<br> pratyayasya paracittajñānam <br> 19. By making Samyama on the signs in another's body, knowledge of his mind comes.<br> [3.19] 남의 몸에 있는 신호(싸인)를 삼야마로 만듦으로써 그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br> Each man has particular signs on his body, which differentiate him from others; when the Yogi makes a Samyama on these signs he knows the nature of the mind of that person.<br> 사람마다 몸에 특별한 표시(신호)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됩니다. 요기가 이 표시(신호)에 삼야마를 만들 때 그 사람의 마음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br> न च तत् सालम्बनं तस्याविषयीभूतत्वात् ॥२०॥<br> na ca tat sālambanaṃ tasyāviṣayībhūtatvāt<br> 20. But not its contents, that not being the object of the Samyama.<br> [3.20] 그러나 (우선)그 내용(을 바로 아는것)은 아닙니다. 삼야마의 대상은 (행동을 통해서 마음을 이해하는것이지) 그 내용 자체는 아니라는것입니다.<ref>치타는 다양한 브리티스를 만들수있지만 그것(치타)을 삼야마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지금 이것은 그것(치타가 삼야마를 (합리적으로)담을수있도록 수련하는것)을 가리킵니다.</ref><br> He would not know the contents of the mind by making a Samyama on the body. There would be required a twofold Samyama, first on the signs in the body, and then on the mind itself. The Yogi would then know everything that is in that mind.<br> 그는 몸에 삼야마를 만들어서 마음의 내용을 알(려고하)지 않습니다. 먼저 몸의 징표(신호)에, 그리고(나서) 마음 자체에 (서로 연관된)이중(二重)의 삼야마가 (비로서)요구됩니다. 그러면 요기들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br> कायरूपसंयमात्तद्ग्राह्यशक्ति-स्तम्भे चक्षुःप्रकाशासंप्रयोगेऽन्तर्धानम् ॥२१॥<br> kāyarūpasaṃyamāt tadgrāhyaśaktistambhe cakṣuḥprakāśāsaṃprayoge 'ntardhānam<br> 21. By making Samyama on the form of the body, the perceptibility of the form being obstructed and the power of manifestation in the eye being separated, the Yogi's body becomes unseen.<br> [3.21] 몸의 형태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형태를 가로막는 지각력과 눈에 나타나는 발현력이 분리됨으로써 요기의 몸은 보이지 않(사라지)게 됩니다.(또는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 그 형태를 통해서 그 기능을 바라볼수있게됩니다.)<ref>조각가는 거대한 자연의 돌덩이 앞에서 생각만으로 조각상 작업을 시작하고 진행할수있습니다.</ref><ref>이미 가득차 그릇은 더이상 어떤것도 담을수없게 됩니다. 절반이 채워진 그릇은 나머지 절반에서 자유롭습니다. 담겨진것이 모두 사라진 빈공간의 그릇은 모든것이 가능합니다.</ref><br> A Yogi standing in the midst of this room can apparently vanish. He does not really vanish, but he will not be seen by anyone. The form and the body are, as it were, separated. You must remember that this can only be done when the Yogi has attained to that power of concentration when form and the thing formed have been separated. Then he makes a Samyama on that, and the power to perceive forms is obstructed, because the power of perceiving forms comes from the junction of form and the thing formed.<br> 이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요기는 분명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삼야마는 이처럼)누구도 (자신과 다른이들도)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형식과 몸은, 그대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것은 형식과 형성된 것이 분리되었을 때, 요기가 그러한 집중력에 도달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형식을 지각하는 힘은 형식과 형성된 것의 접합점에서 나오기 때문에, 형식을 지각하는 힘은 방해를 받습니다.<br>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एतेन शब्दाद्यन्तर्धानमुक्तम् ॥२२॥<br> etena śabdādyantardhānam uktam<br> 22. By this the disappearance or concealment of words which are being spoken and such other things are also explained.<br> [3.22] 이(삼야마<ref>saṃyam संयम् to hold together(함께 붙잡다),guide(안내하다),(네트워크를)to present with(제시하다)</ref>)는 말하는 단어가 사라지거나 숨겨지는 것과 기타 다른 것들도 설명됩니다.<ref>소리는 청각을 통해 뇌에 정보를 만들어 놓습니다. 소리,청각,(언어)정보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역시)삼중의 삼야마의 대상입니다. 삼야마는 모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사라지게합니다)</ref><ref>참고[3.17]</ref><br> ※이절은 몇몇 요가수트라 판본에서는 없는 또는 보이지않는(사라진) 절로 언급됩니다. </td></tr></table> सोपक्रमं निरुपक्रमं च कर्म तत्संयमादपरान्तज्ञानमरिष्टेभ्यो वा ॥२३॥<br> sopakramaṃ nirupakramaṃ ca karma tatsaṃyamād aparāntajñānam ariṣṭebhyo vā<br> 23. Karma is of two kinds — soon to be fructified and late to be fructified. By making Samyama on these, or by the signs called Arishta, portents, the Yogis know the exact time of separation from their bodies.<br> [3.23] 카르마<ref>कर्म karma(n)कर्मन् 특별한 임무,제사의례절차, 행위에서의 작업(과정)의 결과(consequence) </ref>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곧 결실을 맺게 되는 것과 늦게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삼야마Samyama를 만들거나 아리쉬타arishta<ref>ariṣṭa(अरिष्ट)proof against injury or damage(손상이나 부상에대한 증거), secure(안전), safe(안심) 여기서는 sukha(सुख)의 뜻 safe(안심,안전,편안함) </ref>라는 신호를 표시함으로써 요기들은 자신의 몸(행동)에서 분리(파생)되는 정확한 시간(확률적 있을수있는 여러 변수들)을 알(예측할) 수 있습니다.<br> When a Yogi makes a Samyama on his own Karma, upon those impressions in his mind which are now working, and those which are just waiting to work, he knows exactly by those that are waiting when his body will fall. He knows when he will die, at what hour, even at what minute. The Hindus think very much of that knowledge or consciousness of the nearness of death, because it is taught in the Gita that the thoughts at the moment of departure are great powers in determining the next life.<br> 요기가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삼야마를 만들 때, 마음 속에 지금 작용하고 있는 인상과 단지 작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상에 대해 그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질(분리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인상을 통해 정확히 압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몇 시에, 심지어 몇 분에 죽을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힌두교인들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지식이나 의식을 매우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출발 순간의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기타<ref>바가바드 기타 (भगवद्गीता)Bhagavad Gītā</ref>에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br> मैत्र्यादिषु बलानि ॥२४॥<br> maitryādiṣu balāni<br> 24. By making Samyama on friendship, mercy, etc. (I.33), the Yogi excels in the respective qualities.<br> [3.24] 의리(우정), 연민(자비) 등을 삼야마(Samyama)로 삼음으로써(참고[1.33] ) 요기는 각각의 자질에서 탁월합니다.<br> बलेषु हस्तिबलादीनि ॥२५॥<br> baleṣu hastibalādīni <br> 25. By making Samyama on the strength of the elephant and others, their respective strength comes to the Yogi.<br> [3.25] 코끼리와 다른것들의 힘을 동일시(그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함으로써 요기는 코끼리(나 다른것)의 힘을 기대할수있습니다.<br> When a Yogi has attained to this Samyama and wants strength, he makes a Samyama on the strength of the elephant and gets it. Infinite energy is at the disposal of everyone if he only knows how to get it. The Yogi has discovered the science of getting it.<br> 요기는 이 삼야마에 도달하여 힘을 얻고자 할 때 코끼리의 힘으로 삼야마를 만들어 얻습니다. 무한한 에너지는 얻을 줄만 알면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기는 얻는 과학을 발견했습니다.<br> प्रवृत्त्यालोकन्यासात् सूक्ष्म-व्यवहित-विप्रकृष्टज्ञानम् ॥२६॥<br> pravṛttyālokanyāsāt sūkṣmavyavahitaviprakṛṣṭajñānam<br> 26. By making Samyama on the Effulgent Light (I.36), comes the knowledge of the fine, the obstructed, and the remote.<br> [3.26] 삼야마를 힘찬 빛(참고[1.36] ) 위에 만들어 줌으로써 미세한 것, 방해받고 있는 것, 멀리 떨어져있는 것에 대한(것이라도 그것에대한) 지식이 드러납니다.<br> When the Yogi makes Samyama on that Effulgent Light in the heart, he sees things which are very remote, things, for instance, that are happening in a distant place, and which are obstructed by mountain barriers, and also things which are very fine.<br> 요기가 마음속의 그 힘찬 빛에 삼야마를 만들 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 그리고 산의 장벽에 의해 막혀 있는 것들(넘어에 있는), 그리고 아주 (눈에 보이지않는)미세한 것들을 봅니다.<br> भुवनज्ञानं सूर्ये संयमात् ॥२७॥<br> bhuvanajñānaṃ sūrye saṃyamāt<br> 27. By making Samyama on the sun, (comes) the knowledge of the world.<br> [3.27] 삼야마를 태양 위에 세움으로써 세상의 지식이 됩니다.<br> चन्द्रे ताराव्यूहज्ञानम् ॥२८॥<br> candre tārāvyūhajñānam <br> 28. On the moon, (comes) the knowledge of the cluster of stars.<br> [3.28] 달에서는 별들의 성단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br> ध्रुवे तद्गतिज्ञानम् ॥२९॥<br> dhruve tadgatijñānam<br> 29. On the pole-star, (comes) the knowledge of the motions of the stars.<br> [3.29] (북)극성에서는 별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br> नाभिचक्रे कायव्यूहज्ञानम् ॥३०॥<br> nābhicakre kāyavyūhajñānam<br> 30. On the navel circle, (comes) the knowledge of the constitution of the body.<br> [3.30] 배꼽 원에서는 몸의 체질에 대한 지식이 들어옵니다.<br> कण्ठकूपे क्षुत्पिपासानिवृत्तिः ॥३१॥<br> kaṇṭhakūpe kṣutpipāsānivṛttiḥ<br> 31. On the hollow of the throat, (comes) cessation of hunger.<br> [3.31] 목구멍에서, 배고픔의 정지(가 옵니다).<br> When a man is very hungry, if he can make Samyama on the hollow of the throat, hunger ceases.<br> 사람이 몹시 배고플 때, 목구멍에 삼야마를 만들 수 있다면 배고픔은 그치게 됩니다.<br> कूर्मनाड्यां स्थैर्यम् ॥३२॥<br> kūrmanāḍyāṃ sthairyam<br> 32. On the nerve called Kurma, (comes) fixity of the body.<br> [3.32] 쿠르마<ref>kūrma कूर्म 거북이 또는 (물 위를 헤엄치는 거북이로 간주되는)지구(의 별칭) 여기서는 특히 생물체로서 거북이(의 느린 동작)</ref>라고 불리는 신경(nerve)에, 몸의 고정성.<br> When he is practising, the body is not disturbed.<br> 수련할 때 몸이 흔들리지 않습니다.<br> मूर्धज्योतिषि सिद्धदर्शनम् ॥३३॥<br> mūrdhajyotiṣi siddhadarśanam<br> 33. On the light emanating from the top of the head, sight of the Siddhas.<br> [3.33] 머리 꼭대기<ref>앞이마(미간사이) 또는 머리 후광</ref>에서 나오는 빛에 싯다스가 보입니다.<br> The Siddhas are beings who are a little above ghosts. When the Yogi concentrates his mind on the top of his head, he will see these Siddhas. The word Siddha does not refer to those men who have become free — a sense in which it is often used.<br> 싯다(들)Siddha(s)는 유령보다 약간 높은 존재입니다. 요기가 머리 꼭대기에 마음을 집중할 때, 그는 이 싯다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싯다(Siddha)라는 단어는 자유로워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br> प्रातिभाद्वा सर्वम् ॥३४॥<br> prātibhād vā sarvam<br> 34. Or by the power of Prātibha, all knowledge.<br> [3.34] 또는 프라티바prātibha의 힘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br> All these can come without any Samyama to the man who has the power of Pratibha (spontaneous enlightenment from purity). When a man has risen to a high state of Pratibha, he has that great light. All things are apparent to him. Everything comes to him naturally without making Samyama.<br> 이 모든 것은 프라티바(순수로부터의 자발적인 깨달음)<ref>프라티바(또는 쁘라띠바 pratibha प्रतिभ wise(현명한), intelligent(지적인) </ref><ref>좋아하는 또는 염감받는 또는 선천적으로(타고난) 또는 기타 이와같이 쉽게 접근하는 것들 </ref>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삼야마samyama 없이도 올 수 있습니다. 사람이 프라티바(pratibha)라는 높은 경지에 올랐을 때 그 사람은 그 큰 빛을 갖게 됩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백합니다. 삼야마를 만들지 않고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옵니다.<br> ह्रदये चित्त-संवित् ॥३५॥<br> hṛdaye cittasaṃvit<br> 35. In the heart, knowledge of minds.<br> [3.35] 심장(가슴)에는 마음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ref>브리티스(vrittis)는 치타(chitta)를 낳고 치타는 삼야마(samyama)를 낳고 삼야마는 푸루샤(purusha)를 보여줍니다.</ref><ref>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것 사랑하는이가 사랑하는이에 연민을 토해내는것 이러한 맥락(context)의 궁극의 존재가 푸루샤(purusha)입니다. 과연 푸루샤(purusha)가 대자연의 흐름을 벗어난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위해 죽는다는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밝히)비추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진리와 푸루샤(purusha)가 관련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푸루샤(purusha)일리가 없습니다. 죽음어야만 다시 사는 희생과 연민만이 완전한 동물(animal)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신(god)도 아닌 어정쩡하고 애매모호한 모두 다 시간이 흐를수록 망가져가는 인간을 비로서 인간답게 하는 것 그것만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빛나는 가냘픈 한줄기 실날같은 빛 바로 푸루샤(purusha)의 존재 이유여야합니다.</ref> <br> सत्त्वपुरुषयोरत्यन्तासंकीर्णयोः प्रत्ययाविशेषाद् भोगः परार्थत्वात् स्वार्थसंयमात् पुरुषज्ञानम् ॥३६॥<br> sattvapuruṣayor atyantāsaṃkīrṇayoḥ pratyayāviśeṣo bhogaḥ parārthāt svārthasaṃyamāt puruṣajñānam<br> 36. Enjoyment comes from the non-discrimination of the soul and Sattva which are totally different because the latter's actions are for another. Samyama on the self-centred one gives knowledge of the Purusha.<br> [3.36] 즐거움은 영혼과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being, existence, entity, reality (ईश्वर-स्°, ‘the existence of a Supreme Being’) 궁극적인 존재, 존재를 존재케하는 존재(있다는것을 있게하는 그 어떤 있는것)</ref>의 행위가 서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차별(차등)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삼야마는 푸루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합니다.<br> All action of Sattva, a modification of Prakriti characterised by light and happiness, is for the soul. When Sattva is free from egoism and illuminated with the pure intelligence of Purusha, it is called the self-centred one, because in that state it becomes independent of all relations.<br> 빛과 행복을 특징으로 하는 프라크리티prakriti의 변형인 사트바sattva의 모든 행동은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사트바가 이기심에서 벗어나 푸루샤의 순수한 지성으로 조명될 때, 사트바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라고 불립니다.<br> ततः प्रातिभश्रावणवेदनादर्शास्वादवार्ता जायन्ते ॥३७॥<br> tataḥ prātibhaśrāvaṇavedanādarśāsvādavārtā jāyante<br> 37. From that arises the knowledge belonging to Pratibha and (supernatural) hearing, touching, seeing, tasting and smelling.<br> [3.37] 여기에서 프라티바(pratibha)<ref>प्रातिभ intuitive, divinatory 직관, 예측</ref>에 속하는 지식과 (인위적인) 듣고, 만지고, 보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지식이 나옵니다.<br> ते समाधावुपसर्गा व्युत्थाने सिद्धयः ॥३८॥<br> te samādhāv upasargā vyutthāne siddhayaḥ<br> 38. These are obstacles to Samadhi; but they are powers in the worldly state.<br> [3.38] 이것들은 사마띠(sammadhi)에 장애가 됩니다.<ref>인지기능(삼야마)과 정서(사마띠=삼다)는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합해서 하나입니다. </ref> 그러나 그들은 세상 국가에서는 권력입니다.<br> To the Yogi knowledge of the enjoyments of the world comes by the junction of the Purusha and the mind. If he wants to make Samyama on the knowledge that they are two different things, nature and soul, he gets knowledge of the Purusha. From that arises discrimination. When he has got that discrimination, he gets the Pratibha, the light of supreme genius. These powers, however, are obstructions to the attainment of the highest goal, the knowledge of the pure Self, and freedom. These are, as it were, to be met in the way; and if the Yogi rejects them, he attains the highest. If he is tempted to acquire these, his further progress is barred.<br>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요기의 지식은 푸루샤와 마음의 접점을 통해 옵니다. 자연과 영혼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삼야마를 만들고 싶다면 푸루샤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차별이 발생합니다. 그가 그 차별을 갖게 되면, 그는 최고의 천재의 빛인 프라티바(Pratibha)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가장 높은 목표, 순수한 자아에 대한 지식 및 자유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은 도중에(과도기적으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요기가 그것들을 거부하면 그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합니다. 만약 그가 이것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의 더 이상의 발전은 방해받을 것입니다.<br> बन्धकारणशैथिल्यात् प्रचारसंवेदनाच्च चित्तस्य परशरीरावेशः ॥३९॥<br> bandhakāraṇaśaithilyāt pracārasaṃvedanāc ca cittasya paraśarīrāveśaḥ<br> 39. When the cause of bondage of the Chitta has become loosened, the Yogi, by his knowledge of its channels of activity (the nerves), enters another's body.<br> [3.39] 치타의 속박의 원인이 풀리면 요기는 활동 경로(신경)에 대한 지식을 통해 다른 사람의 몸을 들어갑니다(다룰수있습니다)<ref>하나를 알면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것을 이해할수있습니다. 하나가 그 시작입니다. 시작이 반입니다.</ref><br> (※ 이후부터 보다 초인적인 표현으로 기술되는 구절들의 맥락(context)은 개개의 생명체가 하나의 개체로서 독립적(개인적)으로 존중되어야한다는 생명존중의 기준을 넘어서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을 염두하십시오.)<br> The Yogi can enter a dead body and make it get up and move, even while he himself is working in another body. Or he can enter a living body and hold that man's mind and organs in check, and for the time being act through the body of that man. That is done by the Yogi coming to this discrimination of Purusha and nature. If he wants to enter another's body, he makes a Samyama on that body and enters it, because, not only is his soul omnipresent, but his mind also, as the Yogi teaches. It is one bit of the universal mind. Now, however, it can only work through the nerve currents in this body, but when the Yogi has loosened himself from these nerve currents, he can work through other things.<br> 요기는 자신이 다른 몸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죽은 몸에 들어가서 몸을 일으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살아있는 몸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정신과 기관을 통제하고 한동안 그 사람의 몸을 통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푸루샤와 자연을 차별하는 요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 몸에 삼야마(Samyama)를 하고 그 몸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기가 가르치는 것처럼 그의 영혼은 편재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신체의 신경 전류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지만 요기가 이러한 신경 전류에서 벗어나면 다른 작업을 통해 작동할 수 있습니다.<br> उदानजयाज्जलपङ्ककण्टकादिष्वसङ्ग उत्क्रान्तिश्च ॥४०॥<br> udānajayāj jalapaṅkakaṇṭakādiṣv asaṅga utkrāntiś ca<br> 40. By conquering the current called Udāna the Yogi does not sink in water or in swamps, he can walk on thorns etc., and can die at will.<br> [3.40] 웃다나(Udāna)라는 흐름을 정복함으로써 요기는 물이나 늪에 빠지지 않고 가시나무 위를 걸을 수 있으며 마음대로 죽음에 도달할(가사상태일) 수 있습니다.<br> Udana is the name of the nerve current that governs the lungs and all the upper parts of the body, and when he is master of it, he becomes light in weight. He does not sink in water; he can walk on thorns and sword blades, and stand in fire, and can depart this life whenever he likes.<br> 우다나(웃다나)는 폐와 몸의 모든 윗부분을 관장하는 신경류의 이름으로, 그것을 익히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는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가시와 칼날 위를 걸을 수도 있고, 불 속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원할 때마다 이생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br> समानजयात् प्रज्वलनम् ॥४१॥<br> samānajayāj jvalanam<br> 41. By the conquest of the current Samāna he is surrounded by a blaze of light.<br> [3.41] 현재의 사마나(samāna)<ref>समान being (present)존재 = सत् sat</ref>를 정복함으로써 그는 빛의 불꽃에 둘러싸여 있습니다.<br> Whenever he likes, light flashes from his body.<br> 그가 원할 때마다 그의 몸에서 빛이 번쩍입니다.<br> श्रोत्राकाशयोः सम्बन्धसंयमाद्दिव्यं श्रोत्रम् ॥४२॥<br> śrotrākāśayoḥ saṃbandhasaṃyamād divyaṃ śrotram <br> 42. By making Samyama on the relation between the ear and the Akasha comes divine hearing.<br> [3.42] 귀와 아카샤의 관계에 대해 삼야마(samyama)를 함으로써 신성한 청각이 나옵니다.<br> There is the Akasha, the ether, and the instrument, the ear. By making Samyama on them the Yogi gets supernormal hearing; he hears everything. Anything spoken or sounded miles away he can hear.<br> 에테르인 아카샤와 도구인 귀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삼야마(Samyama)를 함으로써 요기는 초인적인 청력을 얻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듣습니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모든 말이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br> कायाकाशयोः सम्बन्धसंयमाल्लघुतूलसमापत्तेश्चाकाशगमनम् ॥४३॥<br> kāyākāśayoḥ saṃbandhasaṃyamāl laghutūlasamāpatteś cākāśagamanam<ref>몸과 공간(ākāśa)의 관계에 대한 집중을 통해, 몸이 가벼운 깃털처럼 되어 공중을 떠다닐 수 있다.</ref><br> 43. By making Samyama on the relation between the Akasha and the body and becoming light as cotton-wool etc., through meditation on them, the Yogi goes through the skies.<br> [3.43] 아카샤(akasha)<ref>आकाश 아카샤 ākāśa (빈)공간 space , ether(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토대(Background)로 여겨지는 (곳)것)</ref>와 몸의 관계에 대해 삼야마를 하고, 명상을 통해 솜처럼 가벼워짐으로써 요기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br> This Akasha is the material of this body; it is only Akasha in a certain form that has become the body. If the Yogi makes a Samyama on this Akasha material of his body, it acquires the lightness of Akasha, and he can go anywhere through the air. So in the other case also.<br> 이 아카샤는 이 몸의 재료()입니다. 몸이 된 것은 특정한 형태의 아카샤일뿐입니다. 요기가 몸의 이 아카샤 물질에 삼야마(Samyama)를 하면 아카샤의 가벼움을 얻게 되고 공기(또는 공간)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ref>"이 아카샤(Akasha)는 이 몸의 물질이다.이것은 단지 특정한 형태로 나타난 아카샤일 뿐이며,이것이 몸이 된 것이다.만약 요기가 그의 몸을 이루는 아카샤에 대해 삼야마(Samyama, 깊은 집중)를 수행하면,그의 몸은 아카샤의 가벼움을 획득하며,그는 공중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다.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는 원자가 핵과 전자 그리고 (빈)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상대성이론에서 중력장은 질량덩어리(물질)가 시공간을 전제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집중해야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합니다.</ref><br> बहिरकल्पिता वृत्तिर्महाविदेहा ततः प्रकाशावरणक्षयः ॥४४॥<br> bahir akalpitā vṛttir mahāvidehā tataḥ prakāśāvaraṇakṣayaḥ<br> 44. By making Samyama on the "real modifications" of the mind, outside of the body, called great disembodiedness, comes disappearance of the covering to light.<br> [3.44] 몸 밖에서 마음의 '실질적인 변형'을 삼야마로 얻음으로써, 큰 탈육신이라 불리며 덮개가 빛으로 사라지게 됩니다.<br> The mind in its foolishness thinks that it is working in this body. Why should I be bound by one system of nerves, and put the Ego only in one body, if the mind is omnipresent? There is no reason why I should. The Yogi wants to feel the Ego wherever he likes. The mental waves which arise in the absence of egoism in the body are called "real modifications" or "great disembodiedness". When he has succeeded in making Samyama on these modifications, all covering to light goes away, and all darkness and ignorance vanish. Everything appears to him to be full of knowledge.<br> 어리석은 마음은 자신이 이 몸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편재한다면 왜 내가 하나의 신경 체계에 묶여 있고 자아를 하나의 몸에만 두어야 합니까?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 어디에서나 자아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신체에 이기심이 없을 때 발생하는 정신적 파동을 "진정한 변형" 또는 "큰 탈육체화"라고 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정을 통해 삼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모든 빛을 덮는 것이 사라지고 모든 어둠과 무지가 사라집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br> स्थूल-स्वरूप-सूक्ष्मान्वयार्थवत्त्वसंयमाद्भूतजयः ॥४५॥<br> sthūlasvarūpasūkṣmānvayārthavattvasaṃyamād bhūtajayaḥ<br> 45. By making Samyama on the gross and fine forms of the elements, their essential traits, the inherence of the Gunas in them and on their contributing to the experience of the soul, comes mastery of the elements.<br> [3.45] 요소의 (커다란)총체적이거나 (아주)미세한 형태, 요소의 본질적인 속성(property), 요소 안에 있는 구나스(gunas)<ref>guṇa गुण 줄(thread 또는 string) 여기서는 기능(method 또는 function)</ref>들의 내재 및 영혼의 경험에 기여하는 삼야마를 만들면 요소의 숙달이 이루어집니다.<br> The Yogi makes Samyama on the elements, first on the gross, and then on the finer states. This Samyama is taken up more by a sect of the Buddhists. They take a lump of clay and make Samyama on that, and gradually they begin to see the fine materials of which it is composed, and when they have known all the fine materials in it, they get power over that element. So with all the elements. The Yogi can conquer them all.<br> 요기들은 처음에는 총체적인 상태에서, 다음에는 미세한 상태에서 삼야마를 만듭니다. 이 삼야마는 (종교적으로는)불교 종파가 더 많이 차지합니다. 그들은 점토 덩어리를 가지고 그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점차 그 구성의 미세한 물질을 보기 시작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미세한 물질을 알게 되면 그 원소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모든 원소를 가지고 요기들은 그들을 모두 정복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ऽणिमादिप्रादुर्भावः कायसम्पत्तद्धर्मानभिघातश्च ॥४६॥<br> tato 'ṇimādiprādurbhāvaḥ kāyasaṃpat taddharmānabhighātaś ca<br> 46. From that comes minuteness and the rest of the powers, "glorification of the body," and indestructibleness of the bodily qualities.<br> [3.46] 그것으로부터 미세함과 나머지 힘들 '몸의 영광' 그리고 신체의 자질들에 대한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나옵니다.<br> This means that the Yogi has attained the eight powers. He can make himself as minute as a particle, or as huge as a mountain, as heavy as the earth, or as light as the air; he can reach anything he likes, he can rule everything he wants, he can conquer everything he wants, and so on. A lion will sit at his feet like a lamb, and all his desires will be fulfilled at will.<br> 이것은 요기가 팔력(八力)<ref>여덟가지(팔지체 또는 아쉬탕가) 수행의 결과</ref>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을 입자처럼 미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산처럼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땅처럼 무겁게 만들 수도 있고, 공기처럼 가볍게 만들 수도 있고,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스릴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정복할 수 있습니다. 사자가 양처럼 그의 발 앞에 앉아 있을 것이고, 그의 모든 욕망은 마음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br> रूप-लावण्य-बल-वज्रसंहननत्वानि कायसम्पत् ॥४७॥<br> rūpalāvaṇyabalavajrasaṃhananatvāni kāyasaṃpat<br> 47. The "glorification of the body" is beauty, complexion, strength, adamantine hardness.<br> [3.47] '몸의 영광'은 아름다움, 혈색, 힘, 아다만틴(철석같은) 경도<ref>(중력이 한곳으로 모이면) 몸이 단단해 집니다. [2.46]참고</ref><ref>[참고]vajra वज्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the hard or mighty one) 또는 천둥(thunderbolt)</ref>입니다.<br> The body becomes indestructible. Nothing can injure it. Nothing can destroy it until the Yogi wishes. "Breaking the rod of time he lives in this universe with his body." In the Vedas it is written that for that man there is no more disease, death or pain.<br> 육체는 파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요기가 바라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시간의 막대를 그의 몸으로 부수어라." 베다(Veda)에는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질병도, 죽음도, 고통도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br> ग्रहण-स्वरूपास्मितान्वयार्थवत्त्वसंयमादिन्द्रियजयः ॥४८॥<br> grahaṇasvarūpāsmitānvayārthavattvasaṃyamād indriyajayaḥ<br> 48. By making Samyama on the objectivity and power of illumination of the organs, on egoism, the inherence of the Gunas in them and on their contributing to the experience of the soul, comes the conquest of the organs.<br> [3.48] (신체)기관들을 조명하는 객관성과 힘, 자기절제의, 그 안에 있는 구나들(guṇas)의 독립성, 영혼의 경험에 기여하는 그들의 힘으로 삼야마를 만들면서 기관들의 정복이 옵니다.<br> In the perception of external objects the organs leave their place in the mind and go towards the object; this is followed by knowledge. Egoism also is present in the act. When the Yogi makes Samyama on these and the other two by gradation, he conquers the organs. Take up anything that you see or feel, a book for instance; first concentrate the mind on it, then on the knowledge that is in the form of a book, and then on the Ego that sees the book, and so on. By that practice all the organs will be conquered.<br> 외부 대상을 지각할 때 기관은 마음 속의 자리를 떠나 대상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식이 따릅니다. 행위에는 (자기절제가 필요한)이기주의도 존재합니다. 요기가 이들과 다른 두 가지에 단계적으로 삼야마를 만들 때, 그는 기관을 정복합니다. 예를 들어 책과 같이 보거나 느끼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가져오십시오. 먼저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 다음에는 책 형태의 지식에, 그 다음에는 책을 보는 자아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장기들(organs)이 정복될 것입니다.<br> ततो मनोजवित्वं विकरणभावः प्रधानजयश्च ॥४९॥<br> tato manojavitvaṃ vikaraṇabhāvaḥ pradhānajayaś ca<br> 49. From that comes to the body the power of rapid movement like the mind, power of the organs independently of the body, and conquest of nature.<br> [3.49] 거기서부터 마음처럼 빠른 움직임의 힘, 몸과 독립된 기관의 힘, 자연을 정복하는 힘이 몸으로 나옵니다.<br> Just as by the conquest of the elements comes glorified body, so from the conquest of the organs will come the above-mentioned powers.<br> 요소를 정복하면 영광스러운 몸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관을 정복하면 위에서 언급한 능력이 나올 것입니다.<br> सत्त्वपुरुषान्यताख्यातिमात्रस्य सर्वभावाधिष्ठातृत्वं सर्वज्ञातृत्वञ्च ॥५०॥<br> sattvapuruṣānyatākhyātimātrasya sarvabhāvādhiṣṭhātṛtvaṃ sarvajñātṛtvaṃ ca<br> 50. By making Samyama on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Sattva and the Purusha come omnipotence and omniscience.<br> [3.50] 사트바(Sattva)와 푸루샤(Purusha)의 차별을 삼야마(Samyama)로 만듦으로써 전능함과 전지함이 나옵니다.<br> When nature has been conquered,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Purusha and nature realised — that the Purusha is indestructible, pure and perfect — then come omnipotence and omniscience.<br> 자연이 정복되고 푸루샤와 자연의 차이, 즉 푸루샤는 불멸이고 순수하며 완벽하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전능함과 전지함이 찾아옵니다.<br> तद्वैराग्यादपि दोषबीजक्षये कैवल्यम् ॥५१॥<br> tadvairāgyād api doṣabījakṣaye kaivalyam<br> 51. By giving up even these powers comes the destruction of the very seed of evil, which leads to Kaivalya.<br> [3.51] 이러한 힘조차 포기함으로써 카이발랴(kaivalya)로 이어지는 악의 씨앗 자체가 파괴됩니다.<br> He attains aloneness, independence, and becomes free. When one gives up even the ideas of omnipotence and omniscience, there comes entire rejection of enjoyment, of the temptations from celestial beings. When the Yogi has seen all these wonderful powers, and rejected them, he reaches the goal. What are all these powers? Simply manifestations. They are no better than dreams. Even omnipotence is a dream. It depends on the mind. So long as there is a mind it can be understood, but the goal is beyond even the mind.<br> 그는 고독과 독립을 얻고 자유로워집니다. 전능함과 전지함에 대한 관념조차 포기할 때, 즐거움과 천상의 존재로부터 오는 유혹을 완전히 거부하게 됩니다. 요기가 이 모든 놀라운 힘을 보고 거부하면 목표에 도달합니다. 이 힘은 다 무엇입니까? 단순히 표현(에 지나지않는것)입니다. 그것은 꿈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전능함도 꿈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한 이해할 수 있지만 목표는 마음조차 초월합니다.<br> स्थान्युपनिमन्त्रणे सङ्गस्मयाकरणं पुनरनिष्टप्रसङ्गात् ॥५२॥<br> sthānyupanimantraṇe saṅgasmayākaraṇaṃ punar aniṣṭaprasaṅgāt<br> 52. The Yogi should not feel allured or flattered by the overtures of celestial beings for fear of evil again.<br> [3.52] 수행자는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천상의 존재들의 제안에 유혹을 받거나 우쭐해져서는 안 됩니다.<br> There are other dangers too; gods and other beings come to tempt the Yogi. They do not want anyone to be perfectly free. They are jealous, just as we are, and worse than us sometimes. They are very much afraid of losing their places. Those Yogis who do not reach perfection die and become gods; leaving the direct road they go into one of the side streets, and get these powers. Then, again, they have to be born. But he who is strong enough to withstand these temptations and go straight to the goal, becomes free.<br>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신들과 다른 존재들이 요기를 유혹하러 옵니다. 그들은 누구도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질투심이 많고 때로는 우리보다 더 심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봐 매우 두려워합니다.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요기들은 죽어 신이 됩니다. 직선 도로를 벗어나면 옆길 중 하나로 들어가 이러한 권한을 얻습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목표를 향해 직진할 만큼 강한 사람은 자유로워집니다.<br> क्षण-तत्क्रमयोः संयमाद्विवेकजं ज्ञानम् ॥५३॥<br> kṣaṇatatkramayoḥ saṃyamād vivekajaṃ jñānam<br> 53. By making Samyama on a particle of time and its precession and succession comes discrimination.<br> [3.53] 삼야마를 시간의 입자와 세차 그리고 연속으로 만들면 차별(변별력)이 생깁니다.<br> How are we to avoid all these things, these Devas, and heavens, and powers? By discrimination, by knowing good from evil. Therefore a Samyama is given by which the power of discrimination can be strengthened. This is by making a Samyama on a particle of time, and the time preceding and following it.<br> 우리는 이 모든 것, 이 천신들과 하늘들과 권세들을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분별함으로써, 선악을 분별함으로써. 그러므로 차별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삼야마(Samyama)가 주어집니다. 이는 시간의 입자와 그 전후의 시간에 따라 삼야마를 만드는 것입니다.<br> जाति-लक्षण-देशैरन्यताऽनवच्छेदात्तुल्ययोस्ततः प्रतिपत्तिः ॥५४॥<br> jātilakṣaṇadeśair anyatānavacchedāt tulyayos tataḥ pratipattiḥ<br> 54. Those things which cannot be differentiated by species, sign, and place, even they will be discriminated by the above Samyama.<br> [3.54] 종(species), 기호, 장소로 구별할 수 없는 것들도 위의 삼야마에 의해 구별될 것입니다.<br> The misery that we suffer comes from ignorance, from non-discrimination between the real and the unreal. We all take the bad for the good, the dream for the reality. Soul is the only reality, and we have forgotten it. Body is an unreal dream, and we think we are all bodies. This non-discrimination is the cause of misery. It is caused by ignorance. When discrimination comes, it brings strength, and then alone can we avoid all these various ideas of body, heavens, and gods. This ignorance arises through differentiating by species, sign, and place. For instance, take a cow. The cow is differentiated from the dog by species. Even with the cows alone how do we make the distinction between one cow and another? By signs. If two objects are exactly similar, they can be distinguished if they are in different places. When objects are so mixed up that even these differentiae will not help us, the power of discrimination acquired by the above-mentioned practice will give us the ability to distinguish them. The highest philosophy of the Yogi is based upon this fact, that the Purusha is pure and perfect, and is the only "simple" that exists in this universe. The body and mind are compounds, and yet we are ever identifying ourselves with them. This is the great mistake that the distinction has been lost. When this power of discrimination has been attained, man sees that everything in this world, mental and physical, is a compound, and, as such, cannot be the Purusha.<br> 우리가 겪는 불행은 무지, 즉 현실과 비현실을 차별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꿈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영혼은 유일한 현실인데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몸은 비현실적인 꿈이고, 우리는 우리 모두가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별 중지가 불행의 원인입니다. 무지로 인해 발생합니다. 차별이 오면 힘이 생기고, 그때만이 우리만이 몸, 하늘, 신에 대한 이 모든 다양한 관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는 종(species), 기호, 장소를 구별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소를 생각해 보세요. 소는 종(species)에 따라 개와 구별됩니다. 소들만 있어도 한 소와 다른 소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표시(sign기호)로(가능합니다). 두 물체가 완전히 유사할 경우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 너무 뒤섞여 있어 이러한 구별조차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위에서 언급한 실천을 통해 얻은 식별의 힘은 우리에게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입니다. 요기의 가장 높은 철학은 푸루샤가 순수하고 완벽하며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단순'(simple)이라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몸과 마음은 복합물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별성을 상실한 큰 실수입니다. 이러한 차별의 힘이 달성되면 인간은 이 세상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것이 복합물이므로 푸루샤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br> तारकं सर्वविषयं सर्वथाविषयमक्रमञ्चेति विवेकजं ज्ञानम् ॥५५॥<br> tārakaṃ sarvaviṣayaṃ sarvathāviṣayam akramaṃ ceti vivekajaṃ jñānam<br> 55. The saving knowledge is that knowledge of discrimination which simultaneously covers all objects, in all their variations.<br> [3.55] 구원의 지식은 모든 대상과 모든 변형을 동시에 포괄하는 변별<ref>변별(=구별=차별=차이)은 일대일대응을 사용할때만이 대상(정보)에 접근해 갈수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것과 또다른 그 어떤것의 반대편에 있는것으로서 A=B(A는B이다) 이거나 또는 A ≠ C(A는C가 아니다)라는 사실로부터 삼단논법으로 확인할수있는 확장된 정보(따라서 A≠C이므로 B는C가 아니다)입니다.</ref>에 대한 지식입니다.<br> Saving, because the knowledge takes the Yogi across the ocean of birth and death. The whole of Prakriti in all its states, subtle and gross, is within the grasp of this knowledge. There is no succession in perception by this knowledge; it takes in all things simultaneously, at a glance.<br> 구원은 지식이 요기를 탄생과 죽음의 바다 건너편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미묘하고 총체적인 모든 상태의 프라크리티 전체가 이 지식의 이해 범위 내에 있습니다. 이 지식에 의한 지각에는 연속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동시에 한 눈에 파악합니다.<br> सत्त्वपुरुषयोः शुद्धिसाम्ये कैवल्यमिति ॥५६॥<br> sattvapuruṣayoḥ śuddhisāmye kaivalyam iti<br> 56. By the similarity of purity between the Sattva and the Purusha comes Kaivalya.<br> [3.56] 사트바(Sattva)와 푸루샤(Purusha) 사이의 순수성의 유사성에 의해 카이발야(Kaivalya)가 옵니다.<br> When the soul realises that it depends on nothing in the universe, from gods to the lowest atom, that is called Kaivalya (isolation) and perfection. It is attained when this mixture of purity and impurity called Sattva (intellect) has been made as pure as the Purusha itself; then the Sattva reflects only the unqualified essence of purity, which is the Purusha.<br> 영혼이 신에서 가장 낮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카이발야Kaivalya(고립) 및 (동시에 원자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이 서로 연결되있다는 그 반대편의 지식도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것. 이것을)완전이라고 합니다. 사트바(지성,이성)라고 불리는 순수함과 불순함의 혼합물이 푸루샤 자체만큼 순수해졌을 때 달성됩니다. 그러면 사트바는 순수함의 무조건적인 본질, 즉 푸루샤만을 반영합니다.<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nflnvyy1scpwl6diefuh4ntb15ux6tg 458061 458048 2026-08-18T01:21:20Z Danuri19 16656 458061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라자 요가/제2장|제2장]] |next= [[라자 요가/제4장|제4장]] |notes= }}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II POWERS <br> 파탄자리의 요가 수트라 제3장 능력의 시작점 <br> देशबन्धश्चित्तस्य धारणा ॥१॥<br> deśabandhaś cittasya dhāraṇā<br> 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br> [3.1] 다라나(dharanā)<ref>마음 집중 또는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ref>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br> Dharana (concentration) is when the mind holds on to some object, either in the body, or outside the body, and keeps itself in that state.<br> 다라나(집중)는 마음이 몸 안이나 몸 밖에 어떤 대상을 붙잡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br> तत्र प्रत्ययैकतानता ध्यानम् ॥२॥<br> tatra pratyayaikatānatā dhyānam<br> 2. An unbroken flow of knowledge in that object is Dhyāna.<br> [3.2] 그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의식)의 흐름이 드야나(명상)<ref>ध्यान dhyāna meditation명상(묵상contemplation, thought생각(의식,의지), reflection 반영(반사상)</ref><ref>과학적 사고(원리)</ref><ref>참고[3.13] 삼야마(संयम saṃyama) = 변수(variable變數)</ref><ref>명상(meditation)영적 목적을 위해 또는 이완 방법으로 침묵 속에서 또는 소리(청각)의 도움을 받아 깊이 생각하거나 일정 시간 동안 마음을 집중하는 것. 묵상(contemplation) 무언가에 몰입해(생각에잠겨)서 이를 바라보(듣)는 행위.</ref>입니다.<br> The mind tries to think of one object, to hold itself to one particular spot, as the top of the head, the heart, etc., and if the mind succeeds in receiving the sensations only through that part of the body, and through no other part, that would be Dharana, and when the mind succeeds in keeping itself in that state for some time, it is called Dhyana (meditation).<br> 마음은 머리 꼭대기, 심장 등과 같은 하나의 특정 지점에 자신을 고정하기 위해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려고 시도하며, 마음이 신체의 해당 부분을 통해서만 감각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면 다른 부분은 다라나(Dharana)이며, 마음이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면 이를 드야나(명상)라고 합니다.<br> तदे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स्वरूपशून्यमिव समाधिः ॥३॥<br> tad evārthamātranirbhāsaṃ svarūpaśūnyam iva samādhiḥ<br> 3. When that, giving up all forms, reflects only the meaning, it is Samādhi.<br> [3.3] 그것이 모든 형태를 버리고 의미만을 반영할 때, 그것이 사마띠(삼다)<ref>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 -삼다(국어사전)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어 자기와 관계있는 것으로 만들다. -삼다 [동사]( ~을 ~으로)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거나 여기다. 무엇을 무엇으로 가정하다.</ref><ref>무언가를 무언가로 삼아 사마띠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무언가로 삼지 않음으로서 삼는 이것도 (씨없는)사마띠입니다. 그리고 사마띠의 삼(는)다는 행위조차도 푸루샤(purusha)앞에서는(때가 되면) 한줌의 먼지같은 한점이 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사라집니다.그러나 그때가 될때까지는 질량덩어리로 잉태된 고귀한 의무를 다합니다.</ref>입니다.<br> That comes when in meditation the form or the external part is given up. Suppose I were meditating on a book, and that I have gradually succeeded in concentrating the mind on it, and perceiving only the internal sensations, the meaning, unexpressed in any form — that state of Dhyana is called Samadhi.<br> 그것은 명상 중에 형태나 외적인 부분을 포기할 때 발생합니다. 내가 책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어떤 형태로도 표현되지 않은 내적 감각과 의미만을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한 드야나(명상)의 상태를 삼매(사마띠samadhi)라고 합니다.<br> त्रयमेकत्र संयमः ॥४॥<br> trayam ekatra saṃyamaḥ <br> 4. (These) three (when practised) in regard to one object is Samyama.<br> [3.4] (이들) 세 가지(를 수행<ref>수련 또는 실천</ref>할 때) (또다른)하나의 대상이 삼야마<ref>[3.13]참고</ref><ref>변수(variable變數) 또는 가능성(possibility)</ref>입니다.<br> When a man can direct his mind to any particular object and fix it there, and then keep it there for a long time, separating the object from the internal part, this is Samyama; or Dharana, Dhyana, and Samadhi, one following the other, and making one. The form of the thing has vanished, and only its meaning remains in the mind.<br> 사람이 어떤 특정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거기에 고정시킨 다음 대상과 내부 부분을 분리하여 오랫동안 거기에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삼야마입니다. 또는 다라나(Dharana), 드야나(Dhyana), 사마띠(Samadhi)가 차례로 이어져 하나를 만듭니다. 사물의 형태는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의미(뜻)<ref>뜻은 말의 단어가 표상되는 그 (일대일대응되는)대상이며 뇌신경의 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단어)로 발음되기전의 상태입니다.</ref>만 남습니다.<br> तज्जयात् प्रज्ञाऽऽलोकः ॥५॥<br> tajjayāt prajñālokaḥ <br> 5. By the conquest of that comes light of knowledge.<br> [3.5] 그것을 극복(정복)함으로써 지식(의지)의 빛이 나옵니다.<br> When one has succeeded in making this Samyama, all powers come under his control. This is the great instrument of the Yogi. The objects of knowledge are infinite, and they are divided into the gross, grosser, grossest and the fine, finer, finest and so on. This Samyama should be first applied to gross things, and when you begin to get knowledge of this gross, slowly, by stages, it should be brought to finer things.<br> 이 삼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모든 권력이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요기의 위대한 도구입니다. 지식의 대상은 무한하며, 그것들은 (부분의 합이자 그이상의 것)전체적인 것(gross)<ref>gross 전체(합),총체</ref>, 더 전체적인것, 가장 전체적인것과 미세한것(fine), 더 미세한것, 아주 가장 미세한것 등으로 나뉩니다. 이 삼야마는 총체적인 것들에 먼저 적용되어야 하며, 이 총체적인 것들에 대해 서서히, 단계적으로 지식을 얻기 시작하면 (점점)더 미세한 것으로 가져와야 합니다.<br> तस्य भूमिषु विनियोगः ॥६॥<br> tasya bhūmiṣu viniyogaḥ<br> 6. That should be employed in stages.<br> [3.6] 단계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br> This is a note of warning not to attempt to go too fast.<br> 너무 빨리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br> त्रयमन्तरङ्गं पूर्वेभ्यः ॥७॥<br> trayam antaraṅgaṃ pūrvebhyaḥ <br> 7. These three are more internal than those that precede.<br> [3.7] (여덟가지중)<ref>[참고] 팔지체 아쉬탕가 [2.29]</ref>이 세 가지는 앞의 것(5개)보다 내부적인 것입니다.<br> Before these we had the Pratyāhāra, the Prānāyāma, the Āsana, the Yama and Niyama; they are external parts of the three — Dharana, Dhyana and Samadhi. When a man has attained to them, he may attain to omniscience and omnipotence, but that would not be salvation. These three would not make the mind Nirvikalpa, changeless, but would leave the seeds for getting bodies again. Only when the seeds are, as the Yogi says, "fried," do they lose the possibility of producing further plants. These powers cannot fry the seed.<br> 이들 이전에는 프라티야하라Pratyāhāra, 프라나야마Prānāyāma, 아사나Āsana, 야마Yama 및 니야마Niyama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다라나(Dharana), 드야나(Dhyana), 사마띠(Samadhi)의 외부 부분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에 도달하면 전지와 전능함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마음을 불변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유'(니르비칼파Nirvikalpa)<ref>निर्विकल्प nirvikalpa , 니르비칼파(Nir- (없음) + Vikalpa (언어적) 분별/상상)</ref><ref>[1.5],[1.6]판차브리티스(vṛttayaḥ pañcatayyaḥ 5가지 변형들)중 비칼파(vikalpa) 참고. </ref>로 만들지 않고 다시 몸을 얻기 위한 씨앗을 남길 것입니다. 요기가 말했듯이 씨앗이 '소멸한'<ref>태워진(fry) 불에 볶다. 기름에 튀기다. 여기서는 (씨를)말리다 , (정당하게)흡수되(소멸한)로 이해할수있다.</ref> 경우에만 더 많은 식물을 생산할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힘으로는 씨(앗)를 태울(말릴)수 없습니다.<ref>참고 [1.17]</ref><br> तदपि बहिरङ्गं निर्बीजस्य ॥८॥<br> tad api bahiraṅgaṃ nirbījasya <br> 8. But even they are external to the seedless (Samadhi).<br> [3.8] 그러나 그들조차도 씨앗 없는 것(니르비자 사마띠)의 외부에 있습니다.<br> Compared with that seedless Samadhi, therefore, even these are external. We have not yet reached the real Samadhi, the highest, but a lower stage, in which this universe still exists as we see it, and in which are all these powers.<br> 그러므로 이들조차도 저 씨(앗)없는 사마띠에 비하면 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우주가 우리가 보는 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그리고 이 모든 힘들이 존재하는 (가장높은단계)보다는 더 낮은 단계이며 그리고(아직) 가장 높은 단계인 실제 사마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br> व्युत्थान-निरोधसंस्कारयोरभिभव-प्रादुर्भावौ निरोधक्षणचित्तान्वयो निरोध-परिणामः ॥९॥<br> vyutthānanirodhasaṃskārayor abhibhavaprādurbhāvau nirodhakṣaṇacittānvayo nirodhapariṇāmaḥ<br> 9. By the suppression of the disturbed impressions of the mind, and by the rise of impressions of control, the mind, which persists in that moment of control, is said to attain the controlling modifications.<br> [3.9] 마음의 흐트러진 인상(반영)<ref>반사상 reflection</ref>을 억제하고, 통제의 인상을 상승(돌출)시킴으로써, 그 통제의 순간에 지속되는 마음은 통제의 변화를 이룬다고 합니다.<br> That is to say, in this first state of Samadhi the modifications of the mind have been controlled, but not perfectly, because if they were, there would be no modifications. If there is a modification which impels the mind to rush out through the senses, and the Yogi tries to control it, that very control itself will be a modification. One wave will be checked by another wave, so it will not be real Samadhi in which all the waves subside, as control itself will be a wave. Yet this lower Samadhi is very much nearer to the higher Samadhi than when the mind comes bubbling out.<br> 즉, 사마띠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통제되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변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감각을 통해 빠져나오도록 강요하는 변형이 있고, 요기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 통제 자체가 변형이 될 것입니다. 하나의 파동은 다른 파동에 의해 저지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파동이 가라앉는 진정한 사마띠는 아닐 것입니다. 통제 자체가 파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낮은 삼매는 마음이 솟아날 때보다(는) 더 높은 사마띠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br> तस्य प्रशान्तवाहिता संस्कारात् ॥१०॥<br> tasya praśāntavāhitā saṃskārāt<br> 10. Its flow becomes steady by habit.<br> [3.10] 습관에 의해 흐름이 꾸준해집니다.<br> The flow of this continuous control of the mind becomes steady when practised day after day, and the mind obtains the faculty of constant concentration.<br> 마음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는 흐름은 날마다 수행할 때 안정되고 마음은 지속적인 집중 능력을 얻습니다.<br> सर्वार्थतैकाग्रतयोः क्षयोदयौ चित्तस्य समाधि-परिणामः ॥११॥<br> sarvārthataikāgratayoḥ kṣayodayau cittasya samādhipariṇāmaḥ <br> 11. Taking in all sorts of objects, and concentrating upon one object, these two powers being destroyed and manifested respectively, the Chitta gets the modification called Samadhi.<br> [3.11] 모든 종류의 대상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이 두 가지 힘이 각각 파괴되고 (새로이)발현되면 치타는 (또다른)사마띠(Samadhi)라는 변형을 얻습니다.<br> The mind takes up various objects, runs into all sorts of things. That is the lower state. There is a higher state of the mind, when it takes up one object and excludes all others, of which Samadhi is the result.<br> 마음은 다양한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종류의 것들에 부딪칩니다. 즉 낮은 상태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취하고 다른 모든 대상을 배제하는 마음의 더 높은 상태가 있으며, 그 결과가 사마띠입니다.<br> शान्तोदितौ तुल्यप्रत्ययौ चित्तस्यैकाग्रता-परिणामः ॥१२॥<br> tataḥ punaḥ śāntoditau tulyapratyayau cittasyaikāgratāpariṇāmaḥ<br> 12. The one-pointedness of the Chitta is when the impression that is past and that which is present are similar.<br> [3.12] 치타의 일점성(一點性)<ref>초점을 맞추는 성질(또는 초점이 맞추어지는 성질) , 참고 [1.2]</ref><ref>심리학적인 또는 원근법의 소실점(또는 수평선)</ref>은 과거의 인상과 현재의 인상이 유사할 때입니다.<br> How are we to know that the mind has become concentrated? Because the idea of time will vanish. The more time passes unnoticed the more concentrated we are. In common life we see that when we are interested in a book we do not note the time at all; and when we leave the book, we are often surprised to find how many hours have passed. All time will have the tendency to come and stand in the one present. So the definition is given: When the past and present come and stand in one, the mind is said to be concentrated.<ref>The distinction among the three kinds of concentration mentioned in aphorisms 9, 11 and 12 is as follows: In the first, the disturbed impressions are merely held back, but not altogether obliterated by the impressions of control which just come in; in the second, the former are completely suppressed by the latter which stand in bold relief; while in the third, which is the highest, there is no question of suppressing, but only similar impressions succeed each other in a stream. —Ed.</ref><br> 마음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간에 대한 생각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집중하고있게 된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책에 관심을 가질 때 시간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떠날 때,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고 종종 놀라게 됩니다. 모든 시간은 하나의 현재에 왔다가 멈추어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주어졌습니다. 과거(그리고 미래)가 현재로 와서 하나로 뭉칠 때 마음이 집중된다고 합니다.<ref>구절 9, 11, 12에 언급된 세 가지 종류의 집중 사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방해받은 인상은 단지 (하나로)억제될 뿐이며 지금 들어온 통제의 인상에 의해 완전히 제거된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전자가 후자에 의해 완전히 억압되어 대담한 안도감(압도감)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가장 높은 세 번째에서는 억제할 여지가 없으며 유사한 인상만이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에드.</ref><br> एतेन भूतेन्द्रियेषु धर्मलक्षणावस्थापरिणामा व्याख्याताः ॥१३॥<br> etena bhūtendriyeṣu dharmalakṣaṇāvasthāpariṇāmā vyākhyātāḥ<br> 13. By this is explained the threefold transformation of form, time and state, in fine or gross matter and in the organs.<br> [3.13] 이것은 미세하거나 총체적인 물질과 기관에서 형태, 시간, (공간적으로)상태<ref>공간속에서의 상황,상태</ref>의 삼중(三重) 변형을 설명합니다.<ref>현대요가는 이것을 과학적방법론의 절차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 이해해볼수있습니다.</ref><br> By the threefold changes in the mind-stuff as to form, time and state are explained the corresponding changes in gross and subtle matter and in the organs. Suppose there is a lump of gold. It is transformed into a bracelet and again into an earring. These are changes as to form. The same phenomena looked at from the standpoint of time give us change as to time. Again, the bracelet or the earring may be bright or dull, thick or thin, and so on. This is change as to state. Now referring to the aphorisms 9, 11 and 12, the mind-stuff is changing into Vrittis — this is change as to form. That it passes through past, present and future moments of time is change as to time. That the impressions vary as to intensity within one particular period, say, present, is change as to state. The concentrations taught in the preceding aphorisms were to give the Yogi a voluntary control over the transformations of his mind-stuff, which alone will enable him to make the Samyama named in III.4.<br> 형태, 시간, 상태(공간)에 관한 마음의 삼중 변화는 총체적이거나 미묘한 물질과 기관의 상응하는 변화를 설명합니다. 금 덩어리가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팔찌로, 다시 귀걸이로 변형됩니다. 이는 형태에 따른 변화입니다. 동일한 현상을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에 따른 변화도 나타납니다. 역시 팔찌나 귀걸이는 밝을 수도 있고 칙칙할 수도 있고, 두껍거나 얇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상태에 대한 변경입니다. 이제 구절(verse) 9, 11, 12를 언급하면 마음의 재료가 브리티스(Vrittis)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태의 변화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간을 통과한다는 것은 시간의 변화입니다. 특정 기간, 즉 현재 내에서 강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것은 상태에 대한 변화입니다. 앞의 구절(verse)에서 가르친 집중은 요기가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자발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3.4]에 명명된 삼야마(Samyama)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br> शान्तोदिताव्यपदेश्यधर्मानुपातो धर्मी ॥१४॥<br> śāntoditāvyapadeśyadharmānupātī dharmī <br> 14. That which is acted upon by transformation, either past, present, or yet to be manifested is the qualified.<br> [3.14] 과거, 현재 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변화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자격이 있는 것'(자격있음)입니다.<br> That is to say, the qualified is the substance which is being acted upon by time and by the Samskāras, and getting changed and being manifested always.<br> 즉, '자격있음'은 시간과 삼스카라에 의해 항상 작용하여 변화하는 구현된 실체입니다.<br> क्रमान्यत्वं परिणामान्यत्वे हेतुः ॥१५॥<br> kramānyatvaṃ pariṇāmānyatve hetuḥ <br> 15. The succession of changes is the cause of manifold evolution.<br> [3.15] 변화의 연속은 다양체 진화의 원인입니다.<br> परिणामत्रयसंयमादतीतानागतज्ञानम् ॥१६॥<br> pariṇāmatrayasaṃyamād atītānāgatajñānam<br> 16. By making Samyama on the three sorts of changes comes the knowledge of past and future.<br> [3.16] 세 가지 변화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br> We must not lose sight of the first definition of Samyama. When the mind has attained to that state when it identifies itself with the internal impression of the object, leaving the external, and when, by long practice, that is retained by the mind and the mind can get into that state in a moment, that is Samyama. If a man in that state wants to know the past and future, he has to make a Samyama on the changes in the Samskaras (III.13). Some are working now at present, some have worked out, and some are waiting to work. So by making a Samyama on these he knows the past and future.<br> 우리는 삼야마에 대한 첫 번째 정의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대상의 내적 인상과 동일시되어 외적인 것을 떠나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리고 마음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오랜 연습에 의해 그 상태에 (순차적으로)순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삼야마입니다.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이 과거와 미래를 알고 싶다면, 삼까라스(삼카라스samskaras)의 변화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어야 합니다(참고[3.13]). 어떤 사람은 현재 일(연습)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운동(연습)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일(연습)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어서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br> शब्दार्थप्रत्ययानामितरेतराध्यासात्सङ्करस्तत्प्रविभागसंयमात् सर्वभूतरुतज्ञानम् ॥१७॥<br> śabdārthapratyayānām itaretarādhyāsāt saṃkaras tatpravibhāgasaṃyamāt sarvabhūtarutajñānam <br> 17. By making Samyama on word, meaning and knowledge, which are ordinarily confused, comes the knowledge of all animal sounds.<br> 17. 평소에 혼동되었던 말과 의미 그리고 지식을 삼야마로 만듦게 됨으로써 모든 동물의 소리에 대한 앎이 형성(체득)됩니다.<br> The word represents the external cause, the meaning represents the internal vibration that travels to the brain through the channels of the Indriyas, conveying the external impression to the mind, and knowledge represents the reaction of the mind, with which comes perception. These three, confused, make our sense-objects. Suppose I hear a word;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next the internal sensation carried to the mind by the organ of hearing, then the mind reacts, and I know the word. The word I know is a mixture of the three — vibration, sensation, and reaction. Ordinarily these three are inseparable; but by practice the Yogi can separate them. When a man has attained to this, if he makes a Samyama on any sound, he understands the meaning which that sound was intended to express, whether it was made by man or by any other animal.<br> 그 말(음성적 울림 또는 진동)은 (소리라는)외적인 원인을 나타내고, 그 의미는 인드리야스의 통로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내적인 진동을 나타내며, 외적인 인상을 마음에 전달하고, 지식은 지각에 이르는 마음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혼란스러운 이 세 가지는 우리의 감각 대상을 만듭니다. 내가 어떤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봅니다. 먼저 외적인 진동이 있고, 다음은 청각 기관에 의해 마음으로 전달되는 내적인 감각이 있고, 그 다음은 마음이 반응하고, 나는 그 말을 압니다. 내가 아는 그 말은 진동, 감각, 그리고 반응의 세 가지가 혼합된 것입니다. 보통 이 세 가지는 분리할 수 없지만, 연습에 의해 요기들은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것에 도달했을 때, 어떤 소리에 대해 삼야마를 지으면, 그 소리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든 다른 동물에 의해 만들어졌든,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를 이해합니다.<br> संस्कारसाक्षात्करणात् पूर्वजातिज्ञानम् ॥१८॥<br> saṃskārasākṣātkaraṇāt pūrvajātijñānam <br> 18. By perceiving the impressions, (comes) the knowledge of past life.<br> [3.18] 인상을 지각함으로써 과거(삶)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br> Each experience that we have, comes in the form of a wave in the Chitta, and this subsides and becomes finer and finer, but is never lost. It remains there in minute form, and if we can bring this wave up again, it becomes memory. So, if the Yogi can make a Samyama on these past impressions in the mind, he will begin to remember all his past lives.<br>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경험은 치타에서 파동의 형태로 오고, 이것은 가라앉고 점점 미세해지지만 결코 잃지 않습니다. 미세한 형태로 거기에 남아 있고, 이 파동을 다시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요기들이 이러한 과거의 인상에 대해 마음속에 삼야마를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생을 기억하기 시작할 것입니다.<br> प्रत्ययस्य परचित्तज्ञानम् ॥१९॥<br> pratyayasya paracittajñānam <br> 19. By making Samyama on the signs in another's body, knowledge of his mind comes.<br> [3.19] 남의 몸에 있는 신호(싸인)를 삼야마로 만듦으로써 그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br> Each man has particular signs on his body, which differentiate him from others; when the Yogi makes a Samyama on these signs he knows the nature of the mind of that person.<br> 사람마다 몸에 특별한 표시(신호)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됩니다. 요기가 이 표시(신호)에 삼야마를 만들 때 그 사람의 마음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br> न च तत् सालम्बनं तस्याविषयीभूतत्वात् ॥२०॥<br> na ca tat sālambanaṃ tasyāviṣayībhūtatvāt<br> 20. But not its contents, that not being the object of the Samyama.<br> [3.20] 그러나 (우선)그 내용(을 바로 아는것)은 아닙니다. 삼야마의 대상은 (행동을 통해서 마음을 이해하는것이지) 그 내용 자체는 아니라는것입니다.<ref>치타는 다양한 브리티스를 만들수있지만 그것(치타)을 삼야마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지금 이것은 그것(치타가 삼야마를 (합리적으로)담을수있도록 수련하는것)을 가리킵니다.</ref><br> He would not know the contents of the mind by making a Samyama on the body. There would be required a twofold Samyama, first on the signs in the body, and then on the mind itself. The Yogi would then know everything that is in that mind.<br> 그는 몸에 삼야마를 만들어서 마음의 내용을 알(려고하)지 않습니다. 먼저 몸의 징표(신호)에, 그리고(나서) 마음 자체에 (서로 연관된)이중(二重)의 삼야마가 (비로서)요구됩니다. 그러면 요기들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br> कायरूपसंयमात्तद्ग्राह्यशक्ति-स्तम्भे चक्षुःप्रकाशासंप्रयोगेऽन्तर्धानम् ॥२१॥<br> kāyarūpasaṃyamāt tadgrāhyaśaktistambhe cakṣuḥprakāśāsaṃprayoge 'ntardhānam<br> 21. By making Samyama on the form of the body, the perceptibility of the form being obstructed and the power of manifestation in the eye being separated, the Yogi's body becomes unseen.<br> [3.21] 몸의 형태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형태를 가로막는 지각력과 눈에 나타나는 발현력이 분리됨으로써 요기의 몸은 보이지 않(사라지)게 됩니다.(또는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 그 형태를 통해서 그 기능을 바라볼수있게됩니다.)<ref>조각가는 거대한 자연의 돌덩이 앞에서 생각만으로 조각상 작업을 시작하고 진행할수있습니다.</ref><ref>이미 가득차 그릇은 더이상 어떤것도 담을수없게 됩니다. 절반이 채워진 그릇은 나머지 절반에서 자유롭습니다. 담겨진것이 모두 사라진 빈공간의 그릇은 모든것이 가능합니다.</ref><br> A Yogi standing in the midst of this room can apparently vanish. He does not really vanish, but he will not be seen by anyone. The form and the body are, as it were, separated. You must remember that this can only be done when the Yogi has attained to that power of concentration when form and the thing formed have been separated. Then he makes a Samyama on that, and the power to perceive forms is obstructed, because the power of perceiving forms comes from the junction of form and the thing formed.<br> 이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요기는 분명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삼야마는 이처럼)누구도 (자신과 다른이들도)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형식과 몸은, 그대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것은 형식과 형성된 것이 분리되었을 때, 요기가 그러한 집중력에 도달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형식을 지각하는 힘은 형식과 형성된 것의 접합점에서 나오기 때문에, 형식을 지각하는 힘은 방해를 받습니다.<br>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एतेन शब्दाद्यन्तर्धानमुक्तम् ॥२२॥<br> etena śabdādyantardhānam uktam<br> 22. By this the disappearance or concealment of words which are being spoken and such other things are also explained.<br> [3.22] 이(삼야마<ref>saṃyam संयम् to hold together(함께 붙잡다),guide(안내하다),(네트워크를)to present with(제시하다)</ref>)는 말하는 단어가 사라지거나 숨겨지는 것과 기타 다른 것들도 설명됩니다.<ref>소리는 청각을 통해 뇌에 정보를 만들어 놓습니다. 소리,청각,(언어)정보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역시)삼중의 삼야마의 대상입니다. 삼야마는 모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사라지게합니다)</ref><ref>참고[3.17]</ref><br> ※이절은 몇몇 요가수트라 판본에서는 없는 또는 보이지않는(사라진) 절로 언급됩니다. </td></tr></table> सोपक्रमं निरुपक्रमं च कर्म तत्संयमादपरान्तज्ञानमरिष्टेभ्यो वा ॥२३॥<br> sopakramaṃ nirupakramaṃ ca karma tatsaṃyamād aparāntajñānam ariṣṭebhyo vā<br> 23. Karma is of two kinds — soon to be fructified and late to be fructified. By making Samyama on these, or by the signs called Arishta, portents, the Yogis know the exact time of separation from their bodies.<br> [3.23] 카르마<ref>कर्म karma(n)कर्मन् 특별한 임무,제사의례절차, 행위에서의 작업(과정)의 결과(consequence) </ref>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곧 결실을 맺게 되는 것과 늦게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삼야마Samyama를 만들거나 아리쉬타arishta<ref>ariṣṭa(अरिष्ट)proof against injury or damage(손상이나 부상에대한 증거), secure(안전), safe(안심) 여기서는 sukha(सुख)의 뜻 safe(안심,안전,편안함) </ref>라는 신호를 표시함으로써 요기들은 자신의 몸(행동)에서 분리(파생)되는 정확한 시간(확률적 있을수있는 여러 변수들)을 알(예측할) 수 있습니다.<br> When a Yogi makes a Samyama on his own Karma, upon those impressions in his mind which are now working, and those which are just waiting to work, he knows exactly by those that are waiting when his body will fall. He knows when he will die, at what hour, even at what minute. The Hindus think very much of that knowledge or consciousness of the nearness of death, because it is taught in the Gita that the thoughts at the moment of departure are great powers in determining the next life.<br> 요기가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삼야마를 만들 때, 마음 속에 지금 작용하고 있는 인상과 단지 작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상에 대해 그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질(분리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인상을 통해 정확히 압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몇 시에, 심지어 몇 분에 죽을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힌두교인들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지식이나 의식을 매우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출발 순간의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기타<ref>바가바드 기타 (भगवद्गीता)Bhagavad Gītā</ref>에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br> मैत्र्यादिषु बलानि ॥२४॥<br> maitryādiṣu balāni<br> 24. By making Samyama on friendship, mercy, etc. (I.33), the Yogi excels in the respective qualities.<br> [3.24] 의리(우정), 연민(자비) 등을 삼야마(Samyama)로 삼음으로써(참고[1.33] ) 요기는 각각의 자질에서 탁월합니다.<br> बलेषु हस्तिबलादीनि ॥२५॥<br> baleṣu hastibalādīni <br> 25. By making Samyama on the strength of the elephant and others, their respective strength comes to the Yogi.<br> [3.25] 코끼리와 다른것들의 힘을 동일시(그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함으로써 요기는 코끼리(나 다른것)의 힘을 기대할수있습니다.<br> When a Yogi has attained to this Samyama and wants strength, he makes a Samyama on the strength of the elephant and gets it. Infinite energy is at the disposal of everyone if he only knows how to get it. The Yogi has discovered the science of getting it.<br> 요기는 이 삼야마에 도달하여 힘을 얻고자 할 때 코끼리의 힘으로 삼야마를 만들어 얻습니다. 무한한 에너지는 얻을 줄만 알면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기는 얻는 과학을 발견했습니다.<br> प्रवृत्त्यालोकन्यासात् सूक्ष्म-व्यवहित-विप्रकृष्टज्ञानम् ॥२६॥<br> pravṛttyālokanyāsāt sūkṣmavyavahitaviprakṛṣṭajñānam<br> 26. By making Samyama on the Effulgent Light (I.36), comes the knowledge of the fine, the obstructed, and the remote.<br> [3.26] 삼야마를 힘찬 빛(참고[1.36] ) 위에 만들어 줌으로써 미세한 것, 방해받고 있는 것, 멀리 떨어져있는 것에 대한(것이라도 그것에대한) 지식이 드러납니다.<br> When the Yogi makes Samyama on that Effulgent Light in the heart, he sees things which are very remote, things, for instance, that are happening in a distant place, and which are obstructed by mountain barriers, and also things which are very fine.<br> 요기가 마음속의 그 힘찬 빛에 삼야마를 만들 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 그리고 산의 장벽에 의해 막혀 있는 것들(넘어에 있는), 그리고 아주 (눈에 보이지않는)미세한 것들을 봅니다.<br> भुवनज्ञानं सूर्ये संयमात् ॥२७॥<br> bhuvanajñānaṃ sūrye saṃyamāt<br> 27. By making Samyama on the sun, (comes) the knowledge of the world.<br> [3.27] 삼야마를 태양 위에 세움으로써 세상의 지식이 됩니다.<br> चन्द्रे ताराव्यूहज्ञानम् ॥२८॥<br> candre tārāvyūhajñānam <br> 28. On the moon, (comes) the knowledge of the cluster of stars.<br> [3.28] 달에서는 별들의 성단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br> ध्रुवे तद्गतिज्ञानम् ॥२९॥<br> dhruve tadgatijñānam<br> 29. On the pole-star, (comes) the knowledge of the motions of the stars.<br> [3.29] (북)극성에서는 별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br> नाभिचक्रे कायव्यूहज्ञानम् ॥३०॥<br> nābhicakre kāyavyūhajñānam<br> 30. On the navel circle, (comes) the knowledge of the constitution of the body.<br> [3.30] 배꼽 원에서는 몸의 체질에 대한 지식이 들어옵니다.<br> कण्ठकूपे क्षुत्पिपासानिवृत्तिः ॥३१॥<br> kaṇṭhakūpe kṣutpipāsānivṛttiḥ<br> 31. On the hollow of the throat, (comes) cessation of hunger.<br> [3.31] 목구멍에서, 배고픔의 정지(가 옵니다).<br> When a man is very hungry, if he can make Samyama on the hollow of the throat, hunger ceases.<br> 사람이 몹시 배고플 때, 목구멍에 삼야마를 만들 수 있다면 배고픔은 그치게 됩니다.<br> कूर्मनाड्यां स्थैर्यम् ॥३२॥<br> kūrmanāḍyāṃ sthairyam<br> 32. On the nerve called Kurma, (comes) fixity of the body.<br> [3.32] 쿠르마<ref>kūrma कूर्म 거북이 또는 (물 위를 헤엄치는 거북이로 간주되는)지구(의 별칭) 여기서는 특히 생물체로서 거북이(의 느린 동작)</ref>라고 불리는 신경(nerve)에, 몸의 고정성.<br> When he is practising, the body is not disturbed.<br> 수련할 때 몸이 흔들리지 않습니다.<br> मूर्धज्योतिषि सिद्धदर्शनम् ॥३३॥<br> mūrdhajyotiṣi siddhadarśanam<br> 33. On the light emanating from the top of the head, sight of the Siddhas.<br> [3.33] 머리 꼭대기<ref>앞이마(미간사이) 또는 머리 후광</ref>에서 나오는 빛에 싯다스가 보입니다.<br> The Siddhas are beings who are a little above ghosts. When the Yogi concentrates his mind on the top of his head, he will see these Siddhas. The word Siddha does not refer to those men who have become free — a sense in which it is often used.<br> 싯다(들)Siddha(s)는 유령보다 약간 높은 존재입니다. 요기가 머리 꼭대기에 마음을 집중할 때, 그는 이 싯다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싯다(Siddha)라는 단어는 자유로워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br> प्रातिभाद्वा सर्वम् ॥३४॥<br> prātibhād vā sarvam<br> 34. Or by the power of Prātibha, all knowledge.<br> [3.34] 또는 프라티바prātibha의 힘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br> All these can come without any Samyama to the man who has the power of Pratibha (spontaneous enlightenment from purity). When a man has risen to a high state of Pratibha, he has that great light. All things are apparent to him. Everything comes to him naturally without making Samyama.<br> 이 모든 것은 프라티바(순수로부터의 자발적인 깨달음)<ref>프라티바(또는 쁘라띠바 pratibha प्रतिभ wise(현명한), intelligent(지적인) </ref><ref>좋아하는 또는 염감받는 또는 선천적으로(타고난) 또는 기타 이와같이 쉽게 접근하는 것들 </ref>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삼야마samyama 없이도 올 수 있습니다. 사람이 프라티바(pratibha)라는 높은 경지에 올랐을 때 그 사람은 그 큰 빛을 갖게 됩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백합니다. 삼야마를 만들지 않고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옵니다.<br> ह्रदये चित्त-संवित् ॥३५॥<br> hṛdaye cittasaṃvit<br> 35. In the heart, knowledge of minds.<br> [3.35] 심장(가슴)에는 마음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ref>브리티스(vrittis)는 치타(chitta)를 낳고 치타는 삼야마(samyama)를 낳고 삼야마는 푸루샤(purusha)를 보여줍니다.</ref><ref>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것 사랑하는이가 사랑하는이에 연민을 토해내는것 이러한 맥락(context)의 궁극의 존재가 푸루샤(purusha)입니다. 과연 푸루샤(purusha)가 대자연의 흐름을 벗어난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위해 죽는다는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밝히)비추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진리와 푸루샤(purusha)가 관련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푸루샤(purusha)일리가 없습니다. 죽음어야만 다시 사는 희생과 연민만이 완전한 동물(animal)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신(god)도 아닌 어정쩡하고 애매모호한 모두 다 시간이 흐를수록 망가져가는 인간을 비로서 인간답게 하는 것 그것만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빛나는 가냘픈 한줄기 실날같은 빛 바로 푸루샤(purusha)의 존재 이유여야합니다.</ref> <br> सत्त्वपुरुषयोरत्यन्तासंकीर्णयोः प्रत्ययाविशेषाद् भोगः परार्थत्वात् स्वार्थसंयमात् पुरुषज्ञानम् ॥३६॥<br> sattvapuruṣayor atyantāsaṃkīrṇayoḥ pratyayāviśeṣo bhogaḥ parārthāt svārthasaṃyamāt puruṣajñānam<br> 36. Enjoyment comes from the non-discrimination of the soul and Sattva which are totally different because the latter's actions are for another. Samyama on the self-centred one gives knowledge of the Purusha.<br> [3.36] 즐거움은 영혼과 사트바(sattva)<ref>सत्त्व being, existence, entity, reality (ईश्वर-स्°, ‘the existence of a Supreme Being’) 궁극적인 존재, 존재를 존재케하는 존재(있다는것을 있게하는 그 어떤 있는것)</ref>의 행위가 서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차별(차등)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삼야마는 푸루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합니다.<br> All action of Sattva, a modification of Prakriti characterised by light and happiness, is for the soul. When Sattva is free from egoism and illuminated with the pure intelligence of Purusha, it is called the self-centred one, because in that state it becomes independent of all relations.<br> 빛과 행복을 특징으로 하는 프라크리티prakriti의 변형인 사트바sattva의 모든 행동은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사트바가 이기심에서 벗어나 푸루샤의 순수한 지성으로 조명될 때, 사트바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라고 불립니다.<br> ततः प्रातिभश्रावणवेदनादर्शास्वादवार्ता जायन्ते ॥३७॥<br> tataḥ prātibhaśrāvaṇavedanādarśāsvādavārtā jāyante<br> 37. From that arises the knowledge belonging to Pratibha and (supernatural) hearing, touching, seeing, tasting and smelling.<br> [3.37] 여기에서 프라티바(pratibha)<ref>प्रातिभ intuitive, divinatory 직관, 예측</ref>에 속하는 지식과 (인위적인) 듣고, 만지고, 보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지식이 나옵니다.<br> ते समाधावुपसर्गा व्युत्थाने सिद्धयः ॥३८॥<br> te samādhāv upasargā vyutthāne siddhayaḥ<br> 38. These are obstacles to Samadhi; but they are powers in the worldly state.<br> [3.38] 이것들은 사마띠(sammadhi)에 장애가 됩니다.<ref>인지기능(삼야마)과 정서(사마띠=삼다)는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합해서 하나입니다. </ref> 그러나 그들은 세상 국가에서는 권력입니다.<br> To the Yogi knowledge of the enjoyments of the world comes by the junction of the Purusha and the mind. If he wants to make Samyama on the knowledge that they are two different things, nature and soul, he gets knowledge of the Purusha. From that arises discrimination. When he has got that discrimination, he gets the Pratibha, the light of supreme genius. These powers, however, are obstructions to the attainment of the highest goal, the knowledge of the pure Self, and freedom. These are, as it were, to be met in the way; and if the Yogi rejects them, he attains the highest. If he is tempted to acquire these, his further progress is barred.<br>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요기의 지식은 푸루샤와 마음의 접점을 통해 옵니다. 자연과 영혼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삼야마를 만들고 싶다면 푸루샤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차별이 발생합니다. 그가 그 차별을 갖게 되면, 그는 최고의 천재의 빛인 프라티바(Pratibha)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가장 높은 목표, 순수한 자아에 대한 지식 및 자유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은 도중에(과도기적으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요기가 그것들을 거부하면 그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합니다. 만약 그가 이것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의 더 이상의 발전은 방해받을 것입니다.<br> बन्धकारणशैथिल्यात् प्रचारसंवेदनाच्च चित्तस्य परशरीरावेशः ॥३९॥<br> bandhakāraṇaśaithilyāt pracārasaṃvedanāc ca cittasya paraśarīrāveśaḥ<br> 39. When the cause of bondage of the Chitta has become loosened, the Yogi, by his knowledge of its channels of activity (the nerves), enters another's body.<br> [3.39] 치타의 속박의 원인이 풀리면 요기는 활동 경로(신경)에 대한 지식을 통해 다른 사람의 몸을 들어갑니다(다룰수있습니다)<ref>하나를 알면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것을 이해할수있습니다. 하나가 그 시작입니다. 시작이 반입니다.</ref><br> (※ 이후부터 보다 초인적인 표현으로 기술되는 구절들의 맥락(context)은 개개의 생명체가 하나의 개체로서 독립적(개인적)으로 존중되어야한다는 생명존중의 기준을 넘어서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을 염두하십시오.)<br> The Yogi can enter a dead body and make it get up and move, even while he himself is working in another body. Or he can enter a living body and hold that man's mind and organs in check, and for the time being act through the body of that man. That is done by the Yogi coming to this discrimination of Purusha and nature. If he wants to enter another's body, he makes a Samyama on that body and enters it, because, not only is his soul omnipresent, but his mind also, as the Yogi teaches. It is one bit of the universal mind. Now, however, it can only work through the nerve currents in this body, but when the Yogi has loosened himself from these nerve currents, he can work through other things.<br> 요기는 자신이 다른 몸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죽은 몸에 들어가서 몸을 일으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살아있는 몸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정신과 기관을 통제하고 한동안 그 사람의 몸을 통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푸루샤와 자연을 차별하는 요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 몸에 삼야마(Samyama)를 하고 그 몸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기가 가르치는 것처럼 그의 영혼은 편재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신체의 신경 전류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지만 요기가 이러한 신경 전류에서 벗어나면 다른 작업을 통해 작동할 수 있습니다.<br> उदानजयाज्जलपङ्ककण्टकादिष्वसङ्ग उत्क्रान्तिश्च ॥४०॥<br> udānajayāj jalapaṅkakaṇṭakādiṣv asaṅga utkrāntiś ca<br> 40. By conquering the current called Udāna the Yogi does not sink in water or in swamps, he can walk on thorns etc., and can die at will.<br> [3.40] 웃다나(Udāna)라는 흐름을 정복함으로써 요기는 물이나 늪에 빠지지 않고 가시나무 위를 걸을 수 있으며 마음대로 죽음에 도달할(가사상태일) 수 있습니다.<br> Udana is the name of the nerve current that governs the lungs and all the upper parts of the body, and when he is master of it, he becomes light in weight. He does not sink in water; he can walk on thorns and sword blades, and stand in fire, and can depart this life whenever he likes.<br> 우다나(웃다나)는 폐와 몸의 모든 윗부분을 관장하는 신경류의 이름으로, 그것을 익히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는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가시와 칼날 위를 걸을 수도 있고, 불 속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원할 때마다 이생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br> समानजयात् प्रज्वलनम् ॥४१॥<br> samānajayāj jvalanam<br> 41. By the conquest of the current Samāna he is surrounded by a blaze of light.<br> [3.41] 현재의 사마나(samāna)<ref>समान being (present)존재 = सत् sat</ref>를 정복함으로써 그는 빛의 불꽃에 둘러싸여 있습니다.<br> Whenever he likes, light flashes from his body.<br> 그가 원할 때마다 그의 몸에서 빛이 번쩍입니다.<br> श्रोत्राकाशयोः सम्बन्धसंयमाद्दिव्यं श्रोत्रम् ॥४२॥<br> śrotrākāśayoḥ saṃbandhasaṃyamād divyaṃ śrotram <br> 42. By making Samyama on the relation between the ear and the Akasha comes divine hearing.<br> [3.42] 귀와 아카샤의 관계에 대해 삼야마(samyama)를 함으로써 신성한 청각이 나옵니다.<br> There is the Akasha, the ether, and the instrument, the ear. By making Samyama on them the Yogi gets supernormal hearing; he hears everything. Anything spoken or sounded miles away he can hear.<br> 에테르인 아카샤와 도구인 귀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삼야마(Samyama)를 함으로써 요기는 초인적인 청력을 얻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듣습니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모든 말이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br> कायाकाशयोः सम्बन्धसंयमाल्लघुतूलसमापत्तेश्चाकाशगमनम् ॥४३॥<br> kāyākāśayoḥ saṃbandhasaṃyamāl laghutūlasamāpatteś cākāśagamanam<ref>몸과 공간(ākāśa)의 관계에 대한 집중을 통해, 몸이 가벼운 깃털처럼 되어 공중을 떠다닐 수 있다.</ref><br> 43. By making Samyama on the relation between the Akasha and the body and becoming light as cotton-wool etc., through meditation on them, the Yogi goes through the skies.<br> [3.43] 아카샤(akasha)<ref>आकाश 아카샤 ākāśa (빈)공간 space , ether(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토대(Background)로 여겨지는 (곳)것)</ref>와 몸의 관계에 대해 삼야마를 하고, 명상을 통해 솜처럼 가벼워짐으로써 요기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br> This Akasha is the material of this body; it is only Akasha in a certain form that has become the body. If the Yogi makes a Samyama on this Akasha material of his body, it acquires the lightness of Akasha, and he can go anywhere through the air. So in the other case also.<br> 이 아카샤는 이 몸의 재료()입니다. 몸이 된 것은 특정한 형태의 아카샤일뿐입니다. 요기가 몸의 이 아카샤 물질에 삼야마(Samyama)를 하면 아카샤의 가벼움을 얻게 되고 공기(또는 공간)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ref>"이 아카샤(Akasha)는 이 몸의 물질이다.이것은 단지 특정한 형태로 나타난 아카샤일 뿐이며,이것이 몸이 된 것이다.만약 요기가 그의 몸을 이루는 아카샤에 대해 삼야마(Samyama, 깊은 집중)를 수행하면,그의 몸은 아카샤의 가벼움을 획득하며,그는 공중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다.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는 원자가 핵과 전자 그리고 (빈)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상대성이론에서 중력장은 질량덩어리(물질)가 시공간을 전제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집중해야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합니다.</ref><br> बहिरकल्पिता वृत्तिर्महाविदेहा ततः प्रकाशावरणक्षयः ॥४४॥<br> bahir akalpitā vṛttir mahāvidehā tataḥ prakāśāvaraṇakṣayaḥ<br> 44. By making Samyama on the "real modifications" of the mind, outside of the body, called great disembodiedness, comes disappearance of the covering to light.<br> [3.44] 몸 밖에서 마음의 '실질적인 변형'을 삼야마로 얻음으로써, 큰 탈육신이라 불리며 덮개가 빛으로 사라지게 됩니다.<br> The mind in its foolishness thinks that it is working in this body. Why should I be bound by one system of nerves, and put the Ego only in one body, if the mind is omnipresent? There is no reason why I should. The Yogi wants to feel the Ego wherever he likes. The mental waves which arise in the absence of egoism in the body are called "real modifications" or "great disembodiedness". When he has succeeded in making Samyama on these modifications, all covering to light goes away, and all darkness and ignorance vanish. Everything appears to him to be full of knowledge.<br> 어리석은 마음은 자신이 이 몸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편재한다면 왜 내가 하나의 신경 체계에 묶여 있고 자아를 하나의 몸에만 두어야 합니까?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 어디에서나 자아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신체에 이기심이 없을 때 발생하는 정신적 파동을 "진정한 변형" 또는 "큰 탈육체화"라고 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정을 통해 삼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모든 빛을 덮는 것이 사라지고 모든 어둠과 무지가 사라집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br> स्थूल-स्वरूप-सूक्ष्मान्वयार्थवत्त्वसंयमाद्भूतजयः ॥४५॥<br> sthūlasvarūpasūkṣmānvayārthavattvasaṃyamād bhūtajayaḥ<br> 45. By making Samyama on the gross and fine forms of the elements, their essential traits, the inherence of the Gunas in them and on their contributing to the experience of the soul, comes mastery of the elements.<br> [3.45] 요소의 (커다란)총체적이거나 (아주)미세한 형태, 요소의 본질적인 속성(property), 요소 안에 있는 구나스(gunas)<ref>guṇa गुण 줄(thread 또는 string) 여기서는 기능(method 또는 function)</ref>들의 내재 및 영혼의 경험에 기여하는 삼야마를 만들면 요소의 숙달이 이루어집니다.<br> The Yogi makes Samyama on the elements, first on the gross, and then on the finer states. This Samyama is taken up more by a sect of the Buddhists. They take a lump of clay and make Samyama on that, and gradually they begin to see the fine materials of which it is composed, and when they have known all the fine materials in it, they get power over that element. So with all the elements. The Yogi can conquer them all.<br> 요기들은 처음에는 총체적인 상태에서, 다음에는 미세한 상태에서 삼야마를 만듭니다. 이 삼야마는 (종교적으로는)불교 종파가 더 많이 차지합니다. 그들은 점토 덩어리를 가지고 그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점차 그 구성의 미세한 물질을 보기 시작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미세한 물질을 알게 되면 그 원소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모든 원소를 가지고 요기들은 그들을 모두 정복할 수 있습니다.<br> ततोऽणिमादिप्रादुर्भावः कायसम्पत्तद्धर्मानभिघातश्च ॥४६॥<br> tato 'ṇimādiprādurbhāvaḥ kāyasaṃpat taddharmānabhighātaś ca<br> 46. From that comes minuteness and the rest of the powers, "glorification of the body," and indestructibleness of the bodily qualities.<br> [3.46] 그것으로부터 미세함과 나머지 힘들 '몸의 영광' 그리고 신체의 자질들에 대한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나옵니다.<br> This means that the Yogi has attained the eight powers. He can make himself as minute as a particle, or as huge as a mountain, as heavy as the earth, or as light as the air; he can reach anything he likes, he can rule everything he wants, he can conquer everything he wants, and so on. A lion will sit at his feet like a lamb, and all his desires will be fulfilled at will.<br> 이것은 요기가 팔력(八力)<ref>여덟가지(팔지체 또는 아쉬탕가) 수행의 결과</ref>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을 입자처럼 미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산처럼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땅처럼 무겁게 만들 수도 있고, 공기처럼 가볍게 만들 수도 있고,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스릴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정복할 수 있습니다. 사자가 양처럼 그의 발 앞에 앉아 있을 것이고, 그의 모든 욕망은 마음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br> रूप-लावण्य-बल-वज्रसंहननत्वानि कायसम्पत् ॥४७॥<br> rūpalāvaṇyabalavajrasaṃhananatvāni kāyasaṃpat<br> 47. The "glorification of the body" is beauty, complexion, strength, adamantine hardness.<br> [3.47] '몸의 영광'은 아름다움, 혈색, 힘, 아다만틴(철석같은) 경도<ref>(중력이 한곳으로 모이면) 몸이 단단해 집니다. [2.46]참고</ref><ref>[참고]vajra वज्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the hard or mighty one) 또는 천둥(thunderbolt)</ref>입니다.<br> The body becomes indestructible. Nothing can injure it. Nothing can destroy it until the Yogi wishes. "Breaking the rod of time he lives in this universe with his body." In the Vedas it is written that for that man there is no more disease, death or pain.<br> 육체는 파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요기가 바라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시간의 막대를 그의 몸으로 부수어라." 베다(Veda)에는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질병도, 죽음도, 고통도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br> ग्रहण-स्वरूपास्मितान्वयार्थवत्त्वसंयमादिन्द्रियजयः ॥४८॥<br> grahaṇasvarūpāsmitānvayārthavattvasaṃyamād indriyajayaḥ<br> 48. By making Samyama on the objectivity and power of illumination of the organs, on egoism, the inherence of the Gunas in them and on their contributing to the experience of the soul, comes the conquest of the organs.<br> [3.48] (신체)기관들을 조명하는 객관성과 힘, 자기절제의, 그 안에 있는 구나들(guṇas)의 독립성, 영혼의 경험에 기여하는 그들의 힘으로 삼야마를 만들면서 기관들의 정복이 옵니다.<br> In the perception of external objects the organs leave their place in the mind and go towards the object; this is followed by knowledge. Egoism also is present in the act. When the Yogi makes Samyama on these and the other two by gradation, he conquers the organs. Take up anything that you see or feel, a book for instance; first concentrate the mind on it, then on the knowledge that is in the form of a book, and then on the Ego that sees the book, and so on. By that practice all the organs will be conquered.<br> 외부 대상을 지각할 때 기관은 마음 속의 자리를 떠나 대상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식이 따릅니다. 행위에는 (자기절제가 필요한)이기주의도 존재합니다. 요기가 이들과 다른 두 가지에 단계적으로 삼야마를 만들 때, 그는 기관을 정복합니다. 예를 들어 책과 같이 보거나 느끼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가져오십시오. 먼저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 다음에는 책 형태의 지식에, 그 다음에는 책을 보는 자아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장기들(organs)이 정복될 것입니다.<br> ततो मनोजवित्वं विकरणभावः प्रधानजयश्च ॥४९॥<br> tato manojavitvaṃ vikaraṇabhāvaḥ pradhānajayaś ca<br> 49. From that comes to the body the power of rapid movement like the mind, power of the organs independently of the body, and conquest of nature.<br> [3.49] 거기서부터 마음처럼 빠른 움직임의 힘, 몸과 독립된 기관의 힘, 자연을 정복하는 힘이 몸으로 나옵니다.<br> Just as by the conquest of the elements comes glorified body, so from the conquest of the organs will come the above-mentioned powers.<br> 요소를 정복하면 영광스러운 몸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관을 정복하면 위에서 언급한 능력이 나올 것입니다.<br> सत्त्वपुरुषान्यताख्यातिमात्रस्य सर्वभावाधिष्ठातृत्वं सर्वज्ञातृत्वञ्च ॥५०॥<br> sattvapuruṣānyatākhyātimātrasya sarvabhāvādhiṣṭhātṛtvaṃ sarvajñātṛtvaṃ ca<br> 50. By making Samyama on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Sattva and the Purusha come omnipotence and omniscience.<br> [3.50] 사트바(Sattva)와 푸루샤(Purusha)의 차별을 삼야마(Samyama)로 만듦으로써 전능함과 전지함이 나옵니다.<br> When nature has been conquered,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Purusha and nature realised — that the Purusha is indestructible, pure and perfect — then come omnipotence and omniscience.<br> 자연이 정복되고 푸루샤와 자연의 차이, 즉 푸루샤는 불멸이고 순수하며 완벽하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전능함과 전지함이 찾아옵니다.<br> तद्वैराग्यादपि दोषबीजक्षये कैवल्यम् ॥५१॥<br> tadvairāgyād api doṣabījakṣaye kaivalyam<br> 51. By giving up even these powers comes the destruction of the very seed of evil, which leads to Kaivalya.<br> [3.51] 이러한 힘조차 포기함으로써 카이발랴(kaivalya)로 이어지는 악의 씨앗 자체가 파괴됩니다.<br> He attains aloneness, independence, and becomes free. When one gives up even the ideas of omnipotence and omniscience, there comes entire rejection of enjoyment, of the temptations from celestial beings. When the Yogi has seen all these wonderful powers, and rejected them, he reaches the goal. What are all these powers? Simply manifestations. They are no better than dreams. Even omnipotence is a dream. It depends on the mind. So long as there is a mind it can be understood, but the goal is beyond even the mind.<br> 그는 고독과 독립을 얻고 자유로워집니다. 전능함과 전지함에 대한 관념조차 포기할 때, 즐거움과 천상의 존재로부터 오는 유혹을 완전히 거부하게 됩니다. 요기가 이 모든 놀라운 힘을 보고 거부하면 목표에 도달합니다. 이 힘은 다 무엇입니까? 단순히 표현(에 지나지않는것)입니다. 그것은 꿈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전능함도 꿈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한 이해할 수 있지만 목표는 마음조차 초월합니다.<br> स्थान्युपनिमन्त्रणे सङ्गस्मयाकरणं पुनरनिष्टप्रसङ्गात् ॥५२॥<br> sthānyupanimantraṇe saṅgasmayākaraṇaṃ punar aniṣṭaprasaṅgāt<br> 52. The Yogi should not feel allured or flattered by the overtures of celestial beings for fear of evil again.<br> [3.52] 수행자는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천상의 존재들의 제안에 유혹을 받거나 우쭐해져서는 안 됩니다.<br> There are other dangers too; gods and other beings come to tempt the Yogi. They do not want anyone to be perfectly free. They are jealous, just as we are, and worse than us sometimes. They are very much afraid of losing their places. Those Yogis who do not reach perfection die and become gods; leaving the direct road they go into one of the side streets, and get these powers. Then, again, they have to be born. But he who is strong enough to withstand these temptations and go straight to the goal, becomes free.<br>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신들과 다른 존재들이 요기를 유혹하러 옵니다. 그들은 누구도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질투심이 많고 때로는 우리보다 더 심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봐 매우 두려워합니다.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요기들은 죽어 신이 됩니다. 직선 도로를 벗어나면 옆길 중 하나로 들어가 이러한 권한을 얻습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목표를 향해 직진할 만큼 강한 사람은 자유로워집니다.<br> क्षण-तत्क्रमयोः संयमाद्विवेकजं ज्ञानम् ॥५३॥<br> kṣaṇatatkramayoḥ saṃyamād vivekajaṃ jñānam<br> 53. By making Samyama on a particle of time and its precession and succession comes discrimination.<br> [3.53] 삼야마를 시간의 입자와 세차 그리고 연속으로 만들면 차별(변별력)이 생깁니다.<br> How are we to avoid all these things, these Devas, and heavens, and powers? By discrimination, by knowing good from evil. Therefore a Samyama is given by which the power of discrimination can be strengthened. This is by making a Samyama on a particle of time, and the time preceding and following it.<br> 우리는 이 모든 것, 이 천신들과 하늘들과 권세들을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분별함으로써, 선악을 분별함으로써. 그러므로 차별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삼야마(Samyama)가 주어집니다. 이는 시간의 입자와 그 전후의 시간에 따라 삼야마를 만드는 것입니다.<br> जाति-लक्षण-देशैरन्यताऽनवच्छेदात्तुल्ययोस्ततः प्रतिपत्तिः ॥५४॥<br> jātilakṣaṇadeśair anyatānavacchedāt tulyayos tataḥ pratipattiḥ<br> 54. Those things which cannot be differentiated by species, sign, and place, even they will be discriminated by the above Samyama.<br> [3.54] 종(species), 기호, 장소로 구별할 수 없는 것들도 위의 삼야마에 의해 구별될 것입니다.<br> The misery that we suffer comes from ignorance, from non-discrimination between the real and the unreal. We all take the bad for the good, the dream for the reality. Soul is the only reality, and we have forgotten it. Body is an unreal dream, and we think we are all bodies. This non-discrimination is the cause of misery. It is caused by ignorance. When discrimination comes, it brings strength, and then alone can we avoid all these various ideas of body, heavens, and gods. This ignorance arises through differentiating by species, sign, and place. For instance, take a cow. The cow is differentiated from the dog by species. Even with the cows alone how do we make the distinction between one cow and another? By signs. If two objects are exactly similar, they can be distinguished if they are in different places. When objects are so mixed up that even these differentiae will not help us, the power of discrimination acquired by the above-mentioned practice will give us the ability to distinguish them. The highest philosophy of the Yogi is based upon this fact, that the Purusha is pure and perfect, and is the only "simple" that exists in this universe. The body and mind are compounds, and yet we are ever identifying ourselves with them. This is the great mistake that the distinction has been lost. When this power of discrimination has been attained, man sees that everything in this world, mental and physical, is a compound, and, as such, cannot be the Purusha.<br> 우리가 겪는 불행은 무지, 즉 현실과 비현실을 차별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꿈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영혼은 유일한 현실인데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몸은 비현실적인 꿈이고, 우리는 우리 모두가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별 중지가 불행의 원인입니다. 무지로 인해 발생합니다. 차별이 오면 힘이 생기고, 그때만이 우리만이 몸, 하늘, 신에 대한 이 모든 다양한 관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는 종(species), 기호, 장소를 구별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소를 생각해 보세요. 소는 종(species)에 따라 개와 구별됩니다. 소들만 있어도 한 소와 다른 소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표시(sign기호)로(가능합니다). 두 물체가 완전히 유사할 경우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 너무 뒤섞여 있어 이러한 구별조차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위에서 언급한 실천을 통해 얻은 식별의 힘은 우리에게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입니다. 요기의 가장 높은 철학은 푸루샤가 순수하고 완벽하며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단순'(simple)이라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몸과 마음은 복합물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별성을 상실한 큰 실수입니다. 이러한 차별의 힘이 달성되면 인간은 이 세상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것이 복합물이므로 푸루샤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br> तारकं सर्वविषयं सर्वथाविषयमक्रमञ्चेति विवेकजं ज्ञानम् ॥५५॥<br> tārakaṃ sarvaviṣayaṃ sarvathāviṣayam akramaṃ ceti vivekajaṃ jñānam<br> 55. The saving knowledge is that knowledge of discrimination which simultaneously covers all objects, in all their variations.<br> [3.55] 구원의 지식은 모든 대상과 모든 변형을 동시에 포괄하는 변별<ref>변별(=구별=차별=차이)은 일대일대응을 사용할때만이 대상(정보)에 접근해 갈수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것과 또다른 그 어떤것의 반대편에 있는것으로서 A=B(A는B이다) 이거나 또는 A ≠ C(A는C가 아니다)라는 사실로부터 삼단논법으로 확인할수있는 확장된 정보(따라서 A≠C이므로 B는C가 아니다)입니다.</ref>에 대한 지식입니다.<br> Saving, because the knowledge takes the Yogi across the ocean of birth and death. The whole of Prakriti in all its states, subtle and gross, is within the grasp of this knowledge. There is no succession in perception by this knowledge; it takes in all things simultaneously, at a glance.<br> 구원은 지식이 요기를 탄생과 죽음의 바다 건너편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미묘하고 총체적인 모든 상태의 프라크리티 전체가 이 지식의 이해 범위 내에 있습니다. 이 지식에 의한 지각에는 연속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동시에 한 눈에 파악합니다.<br> सत्त्वपुरुषयोः शुद्धिसाम्ये कैवल्यमिति ॥५६॥<br> sattvapuruṣayoḥ śuddhisāmye kaivalyam iti<br> 56. By the similarity of purity between the Sattva and the Purusha comes Kaivalya.<br> [3.56] 사트바(Sattva)와 푸루샤(Purusha) 사이의 순수성의 유사성에 의해 카이발야(Kaivalya)가 옵니다.<br> When the soul realises that it depends on nothing in the universe, from gods to the lowest atom, that is called Kaivalya (isolation) and perfection. It is attained when this mixture of purity and impurity called Sattva (intellect) has been made as pure as the Purusha itself; then the Sattva reflects only the unqualified essence of purity, which is the Purusha.<br> 영혼이 신에서 가장 낮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카이발야Kaivalya(고립) 및 (동시에 원자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이 서로 연결되있다는 그 반대편의 지식도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것. 이것을)완전이라고 합니다. 사트바(지성,이성)라고 불리는 순수함과 불순함의 혼합물이 푸루샤 자체만큼 순수해졌을 때 달성됩니다. 그러면 사트바는 순수함의 무조건적인 본질, 즉 푸루샤만을 반영합니다.<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c1tsxlbmajwm88zg77ze5zmfw0hss5v 번역:라자 요가/제4장 114 84139 458049 393664 2026-08-18T00:06:22Z Danuri19 16656 458049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 |next= |notes= }}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V INDEPENDENCE<br> 파탄자리의 요가 수트라 제4장 (연결점으로서의)독립(된 경계면)<br> जन्मौषधि-मन्त्र-तपः-समाधिजाः सिद्धयः ॥१॥<br> janmauṣadhimantratapaḥsamādhijāḥ siddhayaḥ<br> 1. The Siddhis (powers) are attained by birth, chemical means, power of words, mortification, or concentration.<br> [4.1] 싯디(힘)는 탄생, (생)화학적 수단<ref>먹이사슬과 생태계라는 단지 생명체들이 벗어날수없는 생명의 굴레만으로도 생화학적인 에너지의 끝없는 순환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커다란 딜레마 중 주요한 하나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생태계조차 원자들로 이루어지는 물질세계의 질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 또한 단지 존재하는것으로부터 영적으로 겸손하고 겸허하게 합니다.</ref>, 말(소리)의 힘, 고행 또는 집중을 통해 획득됩니다.<br> Sometimes a man is born with the Siddhis, powers, of course, those he had earned in his previous incarnation. This time he is born, as it were, to enjoy the fruits of them. It is said of Kapila, the great father of the Sankhya philosophy, that he was a born Siddha, which means literally a man who has attained to success.<br> 때때로 사람은 싯디(siddhi)<ref>सिद्धि siddhi 성취,능력,성공</ref>의 힘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물론 그가 이전 화신(생애)에서 얻은 힘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그는 말하자면 그 열매를 즐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상키아 철학의 위대한 아버지인 카필라(Kapila)는 타고난 싯다(Siddha)라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성공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br> The Yogis claim that these powers can be gained by chemical means. All of you know that chemistry originally began as alchemy; men went in search of the philosopher's stone and elixirs of life, and so forth. In India there was a sect called the Rāsāyanas. Their idea was that ideality, knowledge, spirituality, and religion were all very right, but that the body was the only instrument by which to attain to all these. If the body came to an end every now and again, it would take so much more time to attain to the goal. For instance, a man wants to practise Yoga, or wants to become spiritual. Before he has advanced very far he dies. Then he takes another body and begins again, then dies, and so on. In this way much time will be lost in dying and being born again. If the body could be made strong and perfect, so that it would get rid of birth and death, we should have so much more time to become spiritual. So these Rasayanas say, first make the body very strong. They claim that this body can be made immortal. Their idea is that if the mind manufactures the body, and if it be true that each mind is only one outlet to the infinite energy, there should be no limit to each outlet getting any amount of power from outside. Why is it impossible to keep our bodies all the time? We have to manufacture all the bodies that we ever have. As soon as this body dies, we shall have to manufacture another. If we can do that, why cannot we do it just here and now, without getting out of the present body? The theory is perfectly correct. If it is possible that we live after death, and make other bodies, why is it impossible that we should have the power of making bodies here, without entirely dissolving this body, simply changing it continually? They also thought that in mercury and in sulphur was hidden the most wonderful power, and that by certain preparations of these a man could keep the body as long as he liked. Others believed that certain drugs could bring powers, such as flying through the air. Many of the most wonderful medicines of the present day we owe to the Rasayanas, notably the use of metals in medicine. Certain sects of Yogis claim that many of their principal teachers are still living in their old bodies. Patanjali, the great authority on Yoga, does not deny this.<br> 요기들은 이러한 힘이 화학적 수단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화학이 원래 연금술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의 돌과 생명의 비약 등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도에는 라사야나(Rāsāyanas)라는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상, 지식, 영성, 종교가 모두 매우 옳지만 몸은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유일한 도구라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가끔씩 끝이 난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요가를 수련하고 싶거나 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가 아주 멀리 발전하기 전에 (시간이 다되면)그는 죽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몸을 취하고 다시 시작하고 죽는 식으로 계속됩니다. 이런 식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낭비(소요)될 것입니다. 몸이 강해지고 완전해져서 탄생과 죽음이 제거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라사야나들은 먼저 몸을 매우 강하게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몸이 불멸의 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마음이 몸을 만든다면, 그리고 각 마음이 무한한 에너지의 출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각 출구가 외부로부터 어떤 양의 힘이라도 얻는 데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몸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체를 제조해야 합니다. 이 몸이 죽자마자 우리는 다른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왜 지금 여기서, 이 몸을 벗어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까? 이론은 완벽하게 정확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며 다른 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몸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꾸는 것 없이 여기서 몸을 만드는 힘을 갖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그들은 또한 수은과 유황에 가장 놀라운 힘이 숨겨져 있으며, 이들의 특정한 준비를 통해 사람이 원하는 만큼 몸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중) 또다른 사람들은 특정 약물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의약품 중 상당수는 라사야나(Rasayanas)의 덕분입니다. 특히 의약품에 금속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기의 일부 종파에서는 많은 주요 스승(guru)들이 여전히 오래된 몸으로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가의 위대한 권위자인 파탄잘리는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br> ''The power of words''. There are certain sacred words called Mantras, which have power, when repeated under proper conditions, to produce these extraordinary powers. We are living in the midst of such a mass of miracles, day and night, that we do not think anything of them. There is no limit to man's power, the power of words and the power of mind.<br> '말의 힘'. 만트라(Mantras)라는 특정 신성한 단어가 있는데, 적절한 조건에서 반복하면 이러한 놀라운 힘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수많은 기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 말의 힘, 정신의 힘에는 한계가 없습니다.<br> ''Mortification''. You find that in every religion mortifications and asceticisms have been practised. In these religious conceptions the Hindus always go to the extremes. You will find men with their hands up all their lives, until their hands wither and die. Men keep standing, day and night, until their feet swell, and if they live, the legs become so stiff in this position that they can no more bend them, but have to stand all their lives. I once saw a man who had kept his hands raised in this way, and I asked him how it felt when he did it first. He said it was awful torture. It was such torture that he had to go to a river and put himself in water, and that allayed the pain for a little while. After a month he did not suffer much. Through such practices powers (Siddhis) can be attained.<br> ''고행''. 당신은 모든 종교에서 고행과 금욕주의가 실천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개념에서 힌두교인들은 항상 극단적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손이 시들고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남자들은 발이 부을 때까지 밤낮으로 계속 서 있고, 살면서 이 자세로 다리가 너무 굳어 더 이상 구부릴 수 없고 평생 서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이런 식으로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 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끔찍한 고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강에 가서 물에 몸을 담가야 할 정도의 고문이었고, 그 고통은 잠시 가라앉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그는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 힘(시디)을 얻을 수 있습니다.<br> ''Concentration''. Concentration is Samādhi, and that is Yoga proper; that is the principal theme of this science, and it is the highest means. The preceding ones are only secondary, and we cannot attain to the highest through them. Samadhi is the means through which we can gain anything and everything, mental, moral, or spiritual.<br> ''집중''. 집중은 사마띠(Samādhi)(의 또다른 말)이며, 그것이 바로 요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과학의 주요 주제이며 최고의 수단입니다. 앞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는 가장 높은 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마띠는 (사마띠만이) 우리가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br> जात्यन्तरपरिणामः प्रकृत्यापूरात् ॥२॥<br> jātyantarapariṇāmaḥ prakṛtyāpūrāt<br> 2. The change into another species is by the filling in of nature.<br> [4.2] 다른 종류(species)로의 변화는 자연의 충만에 의한 것입니다.<br> Patanjali has advanced the proposition that these powers come by birth, sometimes by chemical means, or through mortification. He also admits that this body can be kept for any length of time. Now he goes on to state what is the cause of the change of the body into another species. He says this is done by the filling in of nature, which he explains in the next aphorism.<br> 파탄잘리는 이러한 힘이 탄생, 때로는 화학적 수단 또는 고행을 통해 온다는 제안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이 몸이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 그는 신체가 다른 종(species)으로 변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계속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이 자연을 채우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그는 다음 구절(verse)([4.3]이후)에서 이에 대해 설명합니다.<br> निमित्तमप्रयोजकं प्रकृतीनां वरणभेदस्तु ततः क्षेत्रिकवत् ॥३॥<br> nimittam aprayojakaṃ prakṛtīnāṃ varaṇabhedas tu tataḥ kṣetrikavat<br> 3. Good and bad deeds are not the direct causes in the transformations of nature, but they act as breakers of obstacles to the evolutions of nature: as a farmer breaks the obstacles to the course of water, which then runs down by its own nature.<br> [4.3] 선행과 악행은 자연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자연의 진화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농부가 물의 흐름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고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br> The water for irrigation of fields is already in the canal, only shut in by gates. The farmer opens these gates, and the water flows in by itself, by the law of gravitation. So all progress and power are already in every man; perfection is man's nature, only it is barred in and prevented from taking its proper course. If anyone can take the bar off, in rushes nature. Then the man attains the powers which are his already. Those we call wicked become saints, as soon as the bar is broken and nature rushes in. It is nature that is driving us towards perfection, and eventually she will bring everyone there. All these practices and struggles to become religious are only negative work, to take off the bars, and open the doors to that perfection which is our birthright, our nature.<br> 들판의 관개용 물은 이미 운하에 있고, 문으로만 막혀 있습니다. 농부는 이 문을 열고, 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와 능력은 이미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완벽함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단지 그것이 방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방해될 뿐입니다. 누구든지 (울타리 빗장)막대를 떼어낼 수 있다면, 자연 속에서 달려가세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악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장벽이 무너지고 자연이 돌진하자마자 성인이 됩니다. 우리를 완벽함으로 이끄는 것은 자연이며, 결국 그녀는 모든 사람을 완벽함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종교적이 되기 위한 이러한 모든 실천과 투쟁은 빗장을 풀고 우리의 타고난 권리이자 본성인 완벽함에 이르는 문을 여는 부정적인 일일 뿐입니다.<br> Today the evolution theory of the ancient Yogis will be better understood in the light of modern research. And yet the theory of the Yogis is a better explanation. The two causes of evolution advanced by the moderns, viz. sexual selection and survival of the fittest, are inadequate. Suppose human knowledge to have advanced so much as to eliminate competition, both from the function of acquiring physical sustenance and of acquiring a mate. Then, according to the moderns, human progress will stop and the race will die. The result of this theory is to furnish every oppressor with an argument to calm the qualms of conscience. Men are not lacking, who, posing as philosophers, want to kill out all wicked and incompetent persons (they are, of course, the only judges of competency) and thus preserve the human race! But the great ancient evolutionist, Patanjali, declares that the true secret of evolution is the manifestation of the perfection which is already in every being; that this perfection has been barred and the infinite tide behind is struggling to express itself. These struggles and competitions are but the results of our ignorance, because we do not know the proper way to unlock the gate and let the water in. This infinite tide behind must express itself; it is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br> 오늘날 고대 요기들의 진화론은 현대 연구에 비추어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기(Yogi)의 이론이 더 나은 설명입니다. 현대인들이 발전시킨 진화의 두 가지 원인, 즉. 성적 선택과 적자 생존은 (인간에 이르러서는 점점더)부적절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육체적 생계를 유지하는 기능과 배우자를 얻는 기능 모두에서 경쟁을 제거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현대인에 따르면 인간의 진보는 멈추고 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론의 결과는 모든 억압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기 위한 논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로 가장하여 사악하고 무능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물론 그들은 유일한 능력의 재판관입니다) 인류를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위대한 진화론자인 파탄잘리는 진화의 진정한 비밀은 모든 존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완벽함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완벽함은 금지되었고 뒤에 있는 무한한 조류(tide)는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과 경쟁은 우리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을 열고 물을 들여오는 적절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뒤에 있는 이 무한한 조수(tide)는 스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발현의 원인입니다.<br> Competitions for life or sex-gratification are only momentary, unnecessary, extraneous effects, caused by ignorance. Even when all competition has ceased, this perfect nature behind will make us go forward until everyone has become perfect. Therefore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competition is necessary to progress. In the animal the man was suppressed, but as soon as the door was opened, out rushed man. So in man there is the potential god, kept in by the locks and bars of ignorance. When knowledge breaks these bars, the god becomes manifest.<br> 삶이나 성적 만족을 위한 경쟁은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이고 불필요하며 외부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모든 경쟁이 끝나더라도 뒤에 있는 완벽한 본성은 모두가 완벽해질 때까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전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물 안에서는 인간이 제압당했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인간이 달려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는 무지의 자물쇠와 빗장으로 갇혀 있는 잠재적인 신이 있습니다. 지식이 이러한 기준을 깨면 신이 나타나게 됩니다.<br> निर्माणचित्तान्यस्मितामात्रात् ॥४॥<br> nirmāṇacittāny asmitāmātrāt<br> 4. From egoism alone proceed the created minds.<br> [4.4] (인위적인)창조된 마음은 (그 시작점은)이기심(또는 자아)에서만 나옵니다.<br> The theory of Karma is that we suffer for our good or bad deeds, and the whole scope of philosophy is to reach the glory of man. All the scriptures sing the glory of man, of the soul, and then, in the same breath, they preach Karma. A good deed brings such a result, and a bad deed such another, but if the soul can be acted upon by a good or a bad deed, the soul amounts to nothing. Bad deeds put a bar to the manifestation of the nature of the Purusha; good deeds take the obstacles off, and the glory of the Purusha becomes manifest. The Purusha itself is never changed. Whatever you do never destroys your own glory, your own nature, because the soul cannot be acted upon by anything, only a veil is spread before it, hiding its perfection.<br> 카르마 이론은 우리가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며, 철학의 전체 범위는 인간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인간과 영혼의 영광을 노래하고 동시에 카르마를 설교합니다. 선한 행위는 (그에 맞는)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한 행위는 (또한)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영혼이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영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쁜 행위는 푸루샤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장애가 됩니다. 선행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푸루샤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푸루샤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 자신의 영광과 본성을 결코 파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을 수 없고, 영혼 앞에는 베일이 펼쳐져 있어 그 완벽함을 숨길 뿐입니다.<br> With a view to exhausting their Karma quickly, Yogis create Kāya-vyuha, or groups of bodies, in which to work it out. For all these bodies they create minds from egoism. These are called "created minds", in contradistinction to their original minds.<br> 카르마를 빨리 소진시키기 위해 요기들은 카르마를 해결하기 위한 신체 그룹인 카야뷰하(Kāya-vyuha)를 만듭니다. 이 모든 신체에 대해 그들은 이기심에서 마음을 창조합니다. 이것을 원래의 마음과 달리 '창조된 마음'이라고 합니다.<br> प्रवृत्तिभेदे प्रयोजकं चित्तमेकमनेकेषाम् ॥५॥<br> pravṛttibhede prayojakaṃ cittam ekam anekeṣām<br> 5. Though the activities of the different created minds are various, the one original mind is the controller of them all.<br> [4.5] (인위적으로)창조된 여러 마음의 활동은 다양하지만 하나의 본심이 모든 것을 주관합니다.<br> These different minds, which act in these different bodies are called made-minds, and the bodies, made-bodies; that is, manufactured bodies and minds. Matter and mind are like two inexhaustible storehouses. When you become a Yogi, you learn the secret of their control. It was yours all the time, but you had forgotten it. When you become a Yogi, you recollect it. Then you can do anything with it, manipulate it in every way you like. The material out of which a manufactured mind is created is the very same material which is used for the macrocosm. It is not that mind is one thing and matter another, they are different aspects of the same thing. Asmitā, egoism, is the material, the fine state of existence out of which these made-minds and made-bodies of the Yogi are manufactured. Therefore, when the Yogi has found the secret of these energies of nature, he can manufacture any number of bodies or minds out of the substance known as egoism.<br> 이렇게 서로 다른 신체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서로 다른 마음을 만든 마음이라고 하고, 몸을 만든 몸이라고 합니다. 즉, 만들어진 육체와 정신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두 개의 무한한 창고와 같습니다. 당신이 요기가 되면 그들의 통제의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항상 당신의 것이었지만 당신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요기가 되면 그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가공된 마음이 창조되는 물질은 대우주에 사용되는 물질과 바로 동일합니다. 마음은 하나이고 물질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측면입니다. 이기심인 아스미타(asmitā)는 요기의 만들어진 마음과 만들어진 몸이 만들어지는 물질, 존재의 훌륭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요기가 이러한 자연 에너지의 비밀을 발견하면 이기주의라는 물질로 수많은 몸이나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ध्यानजमनाशयम् ॥६॥<br> tatra dhyānajam anāśayam<br> 6. Among the various Chittas, that which is attained by Samadhi is desireless.<br> [4.6] 다양한 치타(Chitta) 중에서 사마띠(samadhi,-삼다)에 의해 달성된 것은 욕망이 없습니다.<br> Among all the various minds that we see in various men, only that mind which has attained to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is the highest. A man who has attained certain powers through medicines, or through words, or through mortifications, still has desires, but that man who has attained to Samadhi through concentration is alone free from all desires.<br>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마음 중에서 오직 사마띠, 즉 완전한 집중에 도달한 마음만이 가장 높습니다. 약이나 말, 고행을 통해 어떤 힘을 얻은 사람은 여전히 욕망을 갖고 있지만 집중을 통해 사마띠에 도달한 사람은 홀로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습니다.<br> कर्माशुक्लाकृष्णं योगिनस्त्रिविधमितरेषाम् ॥७॥<br> karmāśuklākṛṣṇaṃ yoginas trividham itareṣām<br> 7. Works are neither black nor white for the Yogis; for others they are threefold — black, white, and mixed.<br> [4.7] 요기들에게는 일<ref>수행,수련,실천</ref>이 흑백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검은색, 흰색, 혼합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br> When the Yogi has attained perfection, his actions, and the Karma produced by those actions, do not bind him, because he did not desire them. He just works on; he works to do good, and he does good, but does not care for the result, and it will not come to him. But, for ordinary men, who have not attained to the highest state, works are of three kinds, black (evil actions), white (good actions), and mixed.<br> 요기가 완전함과 그의 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로 인해 생긴 카르마를 얻었을 때 그를 묶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해 일하고 선을 행하지만 결과를 염려하지 않으며 결과가 그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행위는 흑색(악행), 백색(선행), 혼합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br> ततस्तद्विपाकानुगुणानामेवाभिव्यक्तिर्वासनानाम् ॥८॥<br> tatas tadvipākānuguṇānām evābhivyaktir vāsanānām<br> 8. From these threefold works are manifested in each state only those desires (which are) fitting to that state alone. (The others are held in abeyance for the time being.)<br> [4.8] 이 세 가지 행위 중에서 각 상태에서는 그 상태에만 적합한 욕망만이 나타납니다. (나머지는 당분간(잠정적으로) 보류됩니다.)<br> Suppose I have made the three kinds of Karma, good, bad, and mixed, and suppose I die and become a god in heaven. The desires in a god body are not the same as the desires in a human body; the god body neither eats nor drinks. What becomes of my past unworked Karmas which produce as their effect the desire to eat and drink? Where would these Karmas go when I become a god? The answer is that desires can only manifest themselves in proper environments. Only those desires will come out for which the environment is fitted; the rest will remain stored up. In this life we have many godly desires, many human desires, many animal desires. If I take a god body, only the good desires will come up, because for them the environments are suitable. And if I take an animal body, only the animal desires will come up, and the good desires will wait. What does this show? That by means of environment we can check these desires. Only that Karma which is suited to and fitted for the environments will come out. This shows that the power of environment is the great check to control even Karma itself.<br> 내가 세 가지 카르마(좋은 카르마, 나쁜 카르마, 혼합 카르마)를 만들고 죽어서 천국의 신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신의 몸에 있는 욕망은 인간 몸에 있는 욕망과 같지 않습니다. 신의 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가정합니다). 먹고 마시고 싶은 욕망을 결과로 낳는 과거의 일하지 않은 카르마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신이 되면 이 카르마들은 어디로 갈 것입ᄂᆝ까? 대답은 욕망이 적절한 환경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맞는 욕망만이 나올 것입니다. 나머지는 저장된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생에서 우리는 많은 경건한 욕망, 많은 인간적 욕망, 많은 동물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신체를 취하면 좋은 욕망만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물의 몸을 취하면 동물적인 욕망만 올라오고, 좋은 욕망만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환경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욕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경에 적합하고 적당한 카르마만이 나올 것입니다. 이는 환경의 힘이 카르마 자체를 제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br> जाति-देश-काल-व्यवहितानामप्यानन्तर्यं स्मृतिसंस्कारयोरेकरूपत्वात् ॥९॥<br> jātideśakālavyavahitānām apy ānantaryaṃ smṛtisaṃskārayor ekarūpatvāt<br> 9. There is consecutiveness in desires, even though separated by species, space, and time, there being identification of memory and impressions.<br> [4.9] 욕망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비록 종류(species)<ref>종류(철학,논리학) - 종차(種差)는 같은 유(류)개념에 속한 어떤 종개념과 또다른 종개념을 서로 구별할수있는 요소라고 정의해본다면 이를테면 동물에 속하는 사람과 새를 비교할 때 날개가 있고 없는 차이를 종차의 예로 들수있다. 이 때 종류를 이해해볼수있다.</ref><ref>[2.13]The root being there, the fruition comes (in the form of) species, life, and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뿌리가 거기에 있고 그 열매는 종(種)과 생명과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형태)으로 옵니다.[2.13]참고</ref><ref>치타(chitta)가 브리티스(vrittis)를 멈출때 푸루샤(purusha)가 아트만(atman)을 브라흐마(brahma)에게 안내합니다. 이제 카르마(karma)는 더이상 그곳에 없습니다. (몸이 자신을 받아들이면 영혼이 드러납니다. 그 영혼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도됩니다.)</ref>, 공간, 시간으로 구분되어도 기억과 인상의 동일성이 있습니다.<br> Experiences becoming fine become impressions; impressions revivified become memory. The word memory here includes unconscious co-ordination of past experiences, reduced to impressions, with present conscious action. In each body, the group of impressions acquired in a similar body only becomes the cause of action in that body. The experiences of a dissimilar body are held in abeyance. Each body acts as if it were a descendant of a series of bodies of that species only; thus, consecutiveness of desires is not to be broken.<br> 괜찮은 경험은 인상이 됩니다. 되살아난 인상은 추억이 됩니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단어는 인상으로 축소된 과거 경험과 현재의 의식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각 신체에서는 유사한 신체에서 획득한 인상들의 집합이 그 신체에서 작용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서로 다른 신체의 경험은 보류됩니다. 각 신체는 마치 해당 종(species)의 일련의 신체의 후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따라서 욕망의 연속성은 깨지지 않습니다.<br> तासामनादित्वं चाशिषो नित्यत्वात् ॥१०॥<br> tāsām anāditvaṃ cāśiṣo nityatvāt<br> 10. Thirst for happiness being eternal, desires are without beginning.<br> [4.10] 행복에 대한 갈증은 영원하고 욕망은 시작이 없습니다.(따라서 끝도 없습니다)<br> All experience is preceded by desire for happiness. There was no beginning of experience, as each fresh experience is built upon the tendency generated by past experience; therefore desire is without beginning.<br> 모든 경험에는 행복에 대한 열망이 선행됩니다. 각각의 새로운 경험은 과거 경험에 의해 생성된 경향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경험의 시작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시작이 없습니다.<br> हेतुफलाश्रयालम्बनैः संगृहीतत्वादेषामभावे तदभावः ॥११॥<br> hetuphalāśrayālambanaiḥ saṃgṛhītatvād eṣām abhāve tadabhāvaḥ <br> 11. Being held together by cause, effect, support, and objects, in the absence of these is its absence.<br> [4.11] 원인, 결과, 지탱 및 대상에 의해 결합되며, 이것이 없으면 부재(존재하지않음)입니다.<br> Desires are held together by cause and effect;<ref>The causes are the "pain-bearing obstructions" (II.3) and actions (IV.7), and the effects are "species, life, and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II.13). —Ed.</ref> if a desire has been raised, it does not die without producing its effect. Then, again, the mind-stuff is the great storehouse, the support of all past desires reduced to Samskāra form; until they have worked themselves out, they will not die. Moreover, so long as the senses receive the external objects, fresh desires will arise. If it be possible to get rid of the cause, effect, support, and objects of desire, then alone it will vanish.<br> 욕망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합됩니다.<ref>원인은 "고통을 수반하는 장애물"([2.3])과 행위([4.7])이며, 결과는 "종(species), 생명, 쾌락과 고통의 경험"이다. ([2.13]). —Ed.</ref> 욕망이 고조되면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의 재료는 거대한 창고이며, 삼스카라(Samskāra) 형태로 축소된 모든 과거의 욕망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일할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감각이 외부 대상을 받아들이는 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욕망의 원인과 결과, 지탱과 대상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혼자서도 사라질 것입니다.<br> अतीतानागतं स्वरूपतोऽस्त्यध्वभेदाद्धर्माणाम् ॥१२॥<br> atītānāgataṃ svarūpato 'sty adhvabhedād dharmāṇām <br> 12. The past and future exist in their own nature, qualities having different ways.<br> [4.12]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 존재하며, 특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br> The idea is that existence never comes out of non-existence. The past and future, though not existing in a manifested form, yet exist in a fine form.<br>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비록 현현(顯現)된 형태는 아니지만 미세한 형태로 존재합니다.<br> ते व्यक्त-सूक्ष्मा गुणात्मानः ॥१३॥<br> te vyaktasūkṣmā guṇātmānaḥ<br> 13. They are manifested or fine, being of the nature of the Gunas.<br> [4.13] (셋)구나들(gunas)<ref>트리구나 tri-guna(s)</ref>의 특성상 뚜렷하거나 미세(미미)<ref>미미할수있습니다. 애매모호하게 보입니다. </ref>합니다.<br> The Gunas are the three substances, Sattva, Rajas, and Tamas, whose gross state is the sensible universe. Past and future arise from the different modes of manifestation of these Gunas.<br> 구나스Gunas는 사트바Sattva(물질), 라자스Rajas(빛) 및 타마스Tamas(어둠)의 세 가지 재질이며, 그 전체 상태는 감각적 우주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이러한 구나스Gunas의 다양한 발현 방식에서 발생합니다.<br> परिणामैकत्वाद्वस्तुतत्त्वम् ॥१४॥<br> pariṇāmaikatvād vastutattvam <br> 14. The unity in things is from the unity in changes.<br> [4.14] 사물의 통일성(연관성)은 변화의 통일성(관련성)에서 나옵니다.<ref>[https://archive.org/stream/fp_Silent_Spring-Rachel_Carson-1962/Silent_Spring-Rachel_Carson-1962_djvu.txt The Silent Spring(침묵의 봄)]레이첼 루이즈 카슨(Rachel Louise Carson)1962년 (쳅터4. Surface Waters and Underground Seas) Here again we are reminded that in nature nothing exists alone. To understand more clearly how the pollution of our world is happening, we must now look at another of the earth's basic resources, the soil.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 세계의 오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이제 지구의 또 다른 기본 자원인 토양을 살펴봐야 합니다.) </ref><br> Though there are three substances, their changes being co-ordinated, all objects have their unity.<br> 세 가지 물질이 있고 그 변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모든 사물은 통일성을 갖고 있습니다.<br> वस्तुसाम्ये चित्तभेदात्तयोर्विभक्तः पन्थाः ॥१५॥<br> vastusāmye cittabhedāt tayor vibhaktaḥ panthāḥ <br> 15. Since perception and desire vary with regard to the same object, mind and object are of different nature.<br> [4.15]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지각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대상은 성질이 다릅니다.<br> That is, there is an objective world independent of our minds. This is a refutation of Buddhistic Idealism. Since different people look at the same thing differently, it cannot be a mere imagination of any particular individual.<ref>There is an additional aphorism here in some editions:<br />न चैकचित्ततन्त्रं वस्तु तदप्रमाणकं तदा किं स्यात् ॥<br />"The object cannot be said to be dependent on a single mind. There being no proof of its existence, it would then become nonexistent."<br />If the perception of an object were the only criterion of its existence, then when the mind is absorbed in anything or is in Samadhi, it would not be perceived by anybody and might as well be said to be non-existent. This is an undesirable conclusion. —Ed.</ref><br> 즉, 우리 마음과 독립된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적 이상주의에 대한 반박일수있습니다. 같은 것도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 때문에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의 단순한 상상일 수는 없습니다.<ref>대상에 대한 인식이 그 존재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마음이 어떤 것에 몰입하거나 사마띠에 (들어)있을 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론입니다. —에드.</ref><br>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न चैकचित्ततन्त्रं वस्तु तदप्रमाणकं तदा किं स्यात् ॥१६॥<br> na caikacittatantraṃ vastu tadapramāṇakaṃ tadā kiṃ syāt <br> 16. The object cannot be said to be dependent on a single mind. There being no proof of its existence, it would then become nonexistent.<br> [4.16] 대상은 한 마음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존재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br> ※ 몇몇 판본에는 이구절이 추가되어있습니다. </td></tr></table> तदुपरागापेक्षित्वाच्चित्तस्य वस्तु ज्ञाताज्ञातम् ॥१६॥<br> taduparāgāpekṣitvāc cittasya vastu jñātājñātam<br> 16. Things are known or unknown to the mind, being dependent on the colouring which they give to the mind.<br> [4.16] 사물은 마음에 부여되는 색상에 따라 마음에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습니다.<br> सदा ज्ञाताश्चित्तवृत्तयस्तत्प्रभोः पुरुषस्यापरिणामित्वात् ॥१७॥<br> sadā jñātāś cittavṛttayas tatprabhoḥ puruṣasyāpariṇāmitvāt <br> 17. The states of the mind are always known, because the lord of the mind, the Purusha, is unchangeable.<br> [4.17] 마음의 주인인 푸루샤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는 항상 알려져 있습니다.<br> The whole gist of this theory is that the universe is both mental and material. Both of these are in a continuous state of flux. What is this book? It is a combination of molecules in constant change. One lot is going out, and another coming in; it is a whirlpool, but what makes the unity? What makes it the same book? The changes are rhythmical; in harmonious order they are sending impressions to my mind, and these pieced together make a continuous picture, although the parts are continuously changing. Mind itself is continuously changing. The mind and body are like two layers in the same substance, moving at different rates of speed. Relatively, one being slower and the other quicker, we can distinguish between the two motions. For instance, a train is in motion, and a carriage is moving alongside it. It is possible to find the motion of both these to a certain extent. But still something else is necessary. Motion can only be perceived when there is something else which is not moving. But when two or three things are relatively moving, we first perceive the motion of the faster one, and then that of the slower ones. How is the mind to perceive? It is also in a flux. Therefore another thing is necessary which moves more slowly, then you must get to something in which the motion is still slower, and so on, and you will find no end. Therefore logic compels you to stop somewhere. You must complete the series by knowing something which never changes. Behind this never-ending chain of motion is the Purusha, the changeless, the colourless, the pure. All these impressions are merely reflected upon it, as a magic lantern throws images upon a screen, without in any way tarnishing it.<br> 이 이론의 전체적인 요점은 우주가 정신적이고 물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지속적인 유동 상태에 있습니다. 이 책은 무엇입니까?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자들의 조합입니다. 한 무더기가 나가고 다른 무더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나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책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변화는 리드미컬(주기적인 또는 율동의)합니다. 조화로운 순서로 그것들은 내 마음에 인상을 주고 있으며, 부분들이 계속해서 변하더라도 이것들이 함께 뭉쳐서 연속적인 그림을 이룹니다. 마음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동일한 물질의 두 층과 같아서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는 느리고 다른 하나는 더 빠르므로 두 동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차가 움직이고 있고 마차가 그 옆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움직임은 움직이지 않는 다른 것이 있을 때만 감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세 가지 사물이 상대적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먼저 더 빠른 것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그 다음에는 느린 것의 움직임을 인지합니다. 마음은 어떻게 인식합니까? 그것은 또한 유동적입니다. 그러므로 더 느리게 움직이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고, 그런 다음 동작이 여전히 더 느린 것에 도달해야 하며, 계속해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는 당신이 어딘가에서 멈추도록 강요합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시리즈(연속성)를 완성해야 합니다. 이 끝없는 운동 사슬 뒤에는 불변, 무색, 순수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상은 마술 랜턴이 어떤 방식으로든 화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화면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처럼 화면에 반영될 뿐입니다.<br> न तत् स्वाभासं दृश्यत्वात् ॥१८॥<br> na tat svābhāsaṃ dṛśyatvāt <br> 18. The mind is not self-luminous, being an object.<br> [4.18] 마음은 객체로서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br> Tremendous power is manifested everywhere in nature, but it is not self-luminous, not essentially intelligent. The Purusha alone is self-luminous, and gives its light to everything. It is the power of the Purusha that is percolating through all matter and force.<br> 엄청난 힘은 자연의 모든 곳에서 발현되지만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도 않고 본질적으로 이해력을 바랄수있지 않습니다. 푸루샤만이 스스로 빛을 내며 모든 것에 빛을 줍니다. 모든 물질과 힘에 스며드는 푸루샤의 힘입니다.<br> एकसमये चोभयानवधारणम् ॥१९॥<br> ekasamaye cobhayānavadhāraṇam<br> 19. From its being unable to cognise both at the same time.<br> [4.19] 동시에 두 가지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f>한 물질이 동시에 두 공간에서 존재할수없고 그리고 두 물질은 서로 한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할수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한 개의 독립된 물질로 가정할수있게 됩니다.</ref><br> If the mind were self-luminous it would be able to cognise itself and its objects at the same time, which it cannot. When it cognises the object, it cannot reflect on itself. Therefore the Purusha is self-luminous, and the mind is not.<br> 마음이 스스로 빛난다면 그 자체와 그 대상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면 그 자체를 성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푸루샤는 스스로 빛을 발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br> चित्तान्तरदृश्ये बुद्धिबुद्धेरतिप्रसङ्गः स्मृतिसङ्करश्च ॥२०॥<br> cittāntaradṛśye buddhibuddher atiprasaṅgaḥ smṛtisaṃkaraśca <br> 20. Another cognising mind being assumed, there will be no end to such assumptions, and confusion of memory will be the result.<br> [4.20] 또 다른 인식 정신을 가정하면 그러한 가정은 끝이 없을 것이며 기억의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br> Let us suppose there is another mind which cognises the ordinary mind, then there will have to be still another to cognise the former, and so there will be no end to it. It will result in confusion of memory, there will be no storehouse of memory.<br> 평범한 마음을 인식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전자를 인식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기억의 창고도 (끝이)없을 것입니다.<br> चितेरप्रतिसंक्रमायास्तदाकारापत्तौ स्वबुद्धि-संवेदनम् ॥२१॥<br> citer apratisaṃkramāyās tadākārāpattau svabuddhisaṃvedanam<br> 21. The essence of knowledge (the Purusha) being unchangeable, when the mind takes its form, it becomes conscious.<br> [4.21] 지식(푸루샤)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마음이 형태를 취하면 의식(변별력)이 생깁니다.<ref>여기 어떤 모든것의 첫번째 질서(1st order)가 있다고 가정해봄니다. 그것은 모든것의 시작이며 모든것의 끝입니다. 치타와 브리티스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러한 첫번째 질서에 접근했다고 가정해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푸루샤조차도 그것앞에서는 한낱 아주 미세한 입자(먼지) 같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라고 가정해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첫번째 질서앞에서는 먼지도 푸루샤도 치타도 브리티들도 모두 중요하고 동시에 동등할것입니다. </ref><br> Patanjali says this to make it more clear that knowledge is not a quality of the Purusha. When the mind comes near the Purusha it is reflected, as it were, upon the mind, and the mind, for the time being, becomes knowing and seems as if it were itself the Purusha.<br> 파탄잘리Patanjali는 지식이 푸루샤의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푸루샤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은 말하자면 마음에 반영되며, 마음은 한동안 알게 되고 마치 그 자체가 푸루샤인 것처럼 보입니다.<br> द्रष्टृदृश्योपरक्तं चित्तं सर्वार्थम् ॥२२॥<br> draṣṭṛdṛśyoparaktaṃ cittaṃ sarvārtham <br> 22. Coloured by the seer and the seen the mind is able to understand everything.<br> [4.22] 보는자(것)(seer)와 보여진 것(seen)에 의해 색칠된 마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br> On one side of the mind the external world, the seen, is being reflected, and on the other, the seer is being reflected. Thus comes the power of all knowledge to the mind.<br> 마음의 한쪽에는 외부 세계, 즉 보이는 것이 반영되고, 다른 한쪽에는 보는 사람이 반영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지식의 힘이 마음에 옵니다.<br> तदसंख्येयवासनाभिश्चित्रमपि परार्थं संहत्यकारित्वात् ॥२३॥<br> tad asaṃkhyeyavāsanābhiś citram api parārthaṃ saṃhatyakāritvāt <br> 23. The mind, though variegated by innumerable desires, acts for another (the Purusha), because it acts in combination.<br> [4.23] 마음은 무수한 욕망으로 다양하지만 다른것(푸루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결합하여 행동이 나오는 이유입니다.<br> The mind is a compound of various things and therefore it cannot work for itself. Everything that is a combination in this world has some object for that combination, some third thing for which this combination is going on. So this combination of the mind is for the Purusha.<br> 마음은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이므로 스스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결합인 모든 것에는 그 결합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고, 이 결합이 진행되는 세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의 조합은 푸루샤를 위한 것입니다.<br> विशेषदर्शिन आत्मभाव-भावनाविनिवृत्तिः ॥२४॥<br> viśeṣadarśina ātmabhāvabhāvanānivṛttiḥ <br> 24. For the discriminating, the perception of the mind as Atman ceases.<br> [4.24] 분별을 위해 아트만(atman)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인식이 중단됩니다.<br> Through discrimination the Yogi knows that the Purusha is not mind.<br> 차별을 통해 요기는 푸루샤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br> तदा विवेकनिम्नं कैवल्यप्राग्भावं चित्तम् ॥२५॥<br> tadā vivekanimnaṃ kaivalyaprāgbhāraṃ cittam<br> 25. Then, bent on discriminating, the mind attains the previous state of Kaivalya (isolation).<ref>There is another reading — कैवल्यप्राग्भारं। The meaning then would be: "Then the mind becomes deep in discrimination and gravitates towards Kaivalya." —Ed.</ref><br> [4.25] 그런 다음 분별에 전념하면 마음은 이전 상태인 카이발야Kaivalya(독립)에 도달합니다.<ref>또 다른 해석(또는 주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차별에 깊이 빠지고 카이발야Kaivalya 쪽으로 끌립니다." —Ed.(번역가 또는 편집자)</ref> Thus the practice of Yoga leads to discriminating power, to clearness of vision. The veil drops from the eyes, and we see things as they are. We find that nature is a compound, and is showing the panorama for the Purusha, who is the witness; that nature is not the Lord, that all the combinations of nature are simply for the sake of showing these phenomena to the Purusha, the enthroned king within. When discrimination comes by long practice, fear ceases, and the mind attains isolation.<br> 따라서 요가 수련은 분별력, 시야의 명료함으로 이어집니다. 눈에서 베일이 벗겨지고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이 복합적이며, 증인인 푸루샤에게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자연은 주된 것이 아니며, 자연의 모든 조합은 단순히 내면에 즉위한 왕인 푸루샤에게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랜 연습으로 차별이 생기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은 독립됩니다.<br> तच्छिद्रेषु प्रत्ययान्तराणि संस्कारेभ्यः ॥२६॥<br> tacchidreṣu pratyayāntarāṇi saṃskārebhyaḥ <br> 26. The thoughts that arise as obstructions to that are from impressions.<br> [4.26] 그것을 방해하는 생각은 인상에서 비롯됩니다.<br> All the various ideas that arise, making us believe that we require something external to make us happy, are obstructions to that perfection. The Purusha is happiness and blessedness by its own nature. But that knowledge is covered over by past impressions. These impressions have to work themselves out.<br>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외부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다양한 아이디어는 모두 그러한 완벽함을 방해합니다. 푸루샤는 그 자체로 행복과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과거의 인상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러한 노출은 스스로 해결되어야 합니다.<br> हानमेषां क्लेशवदुक्तम् ॥२७॥<br> hānam eṣāṃ kleśavad uktam<br> 27. Their destruction is in the same manner as of ignorance, egoism, etc., as said before (II.10).<br> [4.27] 그들의 멸망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무지, (벗어나야할)이기주의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참고[2.10]).<br> प्रसंख्यानेऽप्यकुसीदस्य सर्वथा विवेकख्यातेर्धर्ममेघः समाधिः ॥२८॥<br> prasaṃkhyāne 'py akusīdasya sarvathā vivekakhyāter dharmameghaḥ samādhiḥ <br> 28. Even when arriving at the right discriminating knowledge of the essences, he who gives up the fruits, unto him comes, as the result of perfect discrimination, the Samadhi called the cloud of virtue.<br> [4.28] 본질에 대한 올바른 식별 지식에 도달할 때에도 열매(fruits)를 버리는 사람은 완전한 식별의 결과로 그에게 (돌아)옵니다. 이를 사마띠는 덕(德)의 구름이라고 불렀습니다.<br> When the Yogi has attained to this discrimination, all the powers mentioned in the last chapter come to him, but the true Yogi rejects them all. Unto him comes a peculiar knowledge, a particular light, called the Dharma-megha, the cloud of virtue. All the great prophets of the world whom history has recorded had this. They had found the whole foundation of knowledge within themselves. Truth to them had become real. Peace and calmness, and perfect purity became their own nature, after they had given up the vanities of powers.<br> 요기가 이 분별력에 도달하면 마지막 장에서 언급한 모든 힘이 그에게 오지만, 진정한 요기는 그 모든 힘을 거부합니다. 그에게 덕의 구름인 다르마메가(Dharma-megha)라고 불리는 특별한 지식, 특별한 빛이 옵니다. 역사에 기록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의 기초 전체를 자기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힘의 허영을 포기한 후에는 평화와 평온, 완전한 순결이 그들 자신의 본성이 되었습니다.<br> ततः क्लेशकर्मनिवृत्तिः ॥२९॥<br> tataḥ kleśakarmanivṛttiḥ <br> 29. From that comes cessation of pain and works.<br> [4.29] 거기서 괴로움과 일이 그쳐집니다.<br> When that cloud of virtue has come, then no more is there fear of falling, nothing can drag the Yogi down. No more will there be evils for him. No more pains.<br> 그 미덕의 구름이 오면 더 이상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그 무엇도 요기를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악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은 없습니다.<ref>또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이세상은 가뭄과 단비가 주기(週期)를 돌며 찬공기와 더운공기가 자연을 조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선과 악은 여기에 비교될수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슬픈일로 여겨질수있으며 고통으로 여겨질수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두려움이 두려움이 아니며 더이상 악이 악이 아닙니다.'라는 생각의 또다른 영토에 접근해보고 이를 조사(investigation)할수있습니다. </ref><br> तदा सर्वावरणमलापेतस्य ज्ञानस्याऽनन्त्याज्ज्ञेयमल्पम् ॥३०॥<br> tadā sarvāvaraṇamalāpetasya jñānasyānantyāj jñeyam alpam <br> 30. The knowledge, bereft of covering and impurities, becoming infinite, the knowable becomes small.<br> [4.30] 지식은 가려짐과 불순물이 없어지고 무한해지며, 알 수 있는 것은 작아집니다.<ref>[참고]तत् कर्माल्पं समाधिप्रसादात् Tat karmālpam samādhi-prasādāt 그(완전한 요기)의 업(karma)은 삼매(samādhi)의 평온함으로 인해 미미하다(alpam). (chatGPT)</ref><br> Knowledge itself is there; its covering is gone. One of the Buddhistic scriptures defines what is meant by the Buddha (which is the name of a state) as infinite knowledge, infinite as the sky. Jesus attained to that and became the Christ. All of you will attain to that state. Knowledge becoming infinite, the knowable becomes small. The whole universe, with all its objects of knowledge, becomes as nothing before the Purusha. The ordinary man thinks himself very small, because to him the knowable seems to be infinite.<br> 지식 자체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덮개가 사라졌습니다. 불교 경전 중 하나는 부처님(의 나라)이 의미하는 바를 무한한 지식, 하늘처럼 무한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것(그 나라)을 얻으시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당신(들) 모두는 그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지식은 무한해지며, 알 수 있는 것은 작아질것입다. 모든 지식의 대상을 포함한 온 우주는 푸루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됩니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매우 작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알 수 있는 것은 무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कृतार्थानां परिणामक्रमसमाप्तिर्गुणानाम् ॥३१॥<br> tataḥ kṛtārthānāṃ pariṇāmakramasamāptir guṇānām <br> 31. Then are finished the successive transformations of the qualities, they having attained the end.<br> [4.31] 그런 다음 특성의 연속적인 변형이 완료되어 종말에 도달했습니다.<br> Then all these various transformations of the qualities, which change from species to species, cease for ever.<br> 그러면 종(species)에서 종(species)으로 변하는 이러한 다양한 특성의 변형이 모두 영원히 중단됩니다.<br> क्षणप्रतियोगी परिणामापरान्तनिर्ग्राह्यः क्रमः ॥३२॥<br> kṣaṇapratiyogī pariṇāmāparāntanirgrāhyaḥ kramaḥ <br> 32. The changes that exist in relation to moments and which are perceived at the other end (at the end of a series) are succession.<br> [4.32] 순간과 관련하여 존재하고 다른 쪽 끝(연속의 끝)에서 지각(이해)되는 변화는 연속입니다.<br> Patanjali here defines the word succession, the changes that exist in relation to moments. While I think, many moments pass, and with each moment there is a change of idea, but I only perceive these changes at the end of a series. This is called succession, but for the mind that has realised omnipresence there is no succession. Everything has become present for it; to it the present alone exists, the past and future are lost. Time stands controlled, all knowledge is there in one second. Everything is known like a flash.<br> 파탄잘리Patanjali는 여기에서 연속이라는 단어, 즉 순간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변화를 정의합니다. 생각하는 동안 많은 순간이 지나가고 매 순간 생각의 변화가 있지만 나는 이러한 변화를 시리즈가 끝날 때만 인식합니다. 이것을 계승이라고 부르지만 편재성을 깨달은 마음에게는 계승이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현재만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는 상실됩니다. 시간은 통제되며 모든 지식은 1초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플래시처럼 알려져 있습니다.<br> पुरुषार्थशून्यानां गुणानां प्रतिप्रसवः कैवल्यं स्वरूपप्रतिष्ठा वा चितिशक्तेरिति ॥३३॥<br> puruṣārthaśūnyānāṃ guṇānāṃ pratiprasavaḥ kaivalyaṃ svarūpapratiṣṭhā vā citiśaktir iti <br> 33. The resolution in the inverse order of the qualities, bereft of any motive of action for the Purusha, is Kaivalya, or it is the establishment of the power of knowledge in its own nature.<br> [4.33] 푸루샤에 대한 행동 동기를 상실한 채 자질의 역순으로 해결되는 것은 카이발야Kaivalya 또는 그 자체의 성격으로 지식의 힘을 확립하는 것입니다.<br> Nature's task is done, this unselfish task which our sweet nurse, nature, had imposed upon herself. She gently took the self-forgetting soul by the hand, as it were, and showed him all the experiences in the universe, all manifestations, bringing him higher and higher through various bodies, till his lost glory came back, and he remembered his own nature. Then the kind mother went back the same way she came, for others who also have lost their way in the trackless desert of life. And thus is she working, without beginning and without end. And thus through pleasure and pain, through good and evil, the infinite river of souls is flowing into the ocean of perfection, of self-realisation.<br> 자연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유모인 자연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 비이기적인 임무입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자기를 망각하는 영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경험과 모든 현현(顯現)을 보여 주었고, 그의 잃어버린 영광이 돌아올 때까지 그를 다양한 몸을 통해 점점 더 높이 올려주었습니다. 자연(이자), 그리고 친절한 어머니는 길도 없는 삶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시작도 끝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과 고통, 선과 악을 통해 영혼의 무한한 강이 완전함과 자아 실현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br> Glory unto those who have realised their own nature. May their blessing be on us all!<br>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자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4068wqcqq5he13wq40o6px9m6ib5epz 458058 458049 2026-08-18T01:08:17Z Danuri19 16656 458058 wikitext text/x-wiki {{header |author =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99년판 <ref>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https://archive.org/stream/RajaYogaBySwamiVivekananda/Raja-Yoga-by-Swami-Vivekananda_djvu.txt|#]</ref> |title = 라자요가(요가수트라) Raja Yoga(yogasutras) |section = 요가수트라(yogasutras) 파탄잘리(Patanjali)영문판 |previous= [[라자 요가/제2장|제2장]],[[라자 요가/제3장|제3장]] |next= |notes= }}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V INDEPENDENCE<br> 파탄자리의 요가 수트라 제4장 (연결점으로서의)독립(된 경계면)<br> जन्मौषधि-मन्त्र-तपः-समाधिजाः सिद्धयः ॥१॥<br> janmauṣadhimantratapaḥsamādhijāḥ siddhayaḥ<br> 1. The Siddhis (powers) are attained by birth, chemical means, power of words, mortification, or concentration.<br> [4.1] 싯디(힘)는 탄생, (생)화학적 수단<ref>먹이사슬과 생태계라는 단지 생명체들이 벗어날수없는 생명의 굴레만으로도 생화학적인 에너지의 끝없는 순환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커다란 딜레마 중 주요한 하나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생태계조차 원자들로 이루어지는 물질세계의 질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 또한 단지 존재하는것으로부터 영적으로 겸손하고 겸허하게 합니다.</ref>, 말(소리)의 힘, 고행 또는 집중을 통해 획득됩니다.<br> Sometimes a man is born with the Siddhis, powers, of course, those he had earned in his previous incarnation. This time he is born, as it were, to enjoy the fruits of them. It is said of Kapila, the great father of the Sankhya philosophy, that he was a born Siddha, which means literally a man who has attained to success.<br> 때때로 사람은 싯디(siddhi)<ref>सिद्धि siddhi 성취,능력,성공</ref>의 힘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물론 그가 이전 화신(생애)에서 얻은 힘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그는 말하자면 그 열매를 즐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상키아 철학의 위대한 아버지인 카필라(Kapila)는 타고난 싯다(Siddha)라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성공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br> The Yogis claim that these powers can be gained by chemical means. All of you know that chemistry originally began as alchemy; men went in search of the philosopher's stone and elixirs of life, and so forth. In India there was a sect called the Rāsāyanas. Their idea was that ideality, knowledge, spirituality, and religion were all very right, but that the body was the only instrument by which to attain to all these. If the body came to an end every now and again, it would take so much more time to attain to the goal. For instance, a man wants to practise Yoga, or wants to become spiritual. Before he has advanced very far he dies. Then he takes another body and begins again, then dies, and so on. In this way much time will be lost in dying and being born again. If the body could be made strong and perfect, so that it would get rid of birth and death, we should have so much more time to become spiritual. So these Rasayanas say, first make the body very strong. They claim that this body can be made immortal. Their idea is that if the mind manufactures the body, and if it be true that each mind is only one outlet to the infinite energy, there should be no limit to each outlet getting any amount of power from outside. Why is it impossible to keep our bodies all the time? We have to manufacture all the bodies that we ever have. As soon as this body dies, we shall have to manufacture another. If we can do that, why cannot we do it just here and now, without getting out of the present body? The theory is perfectly correct. If it is possible that we live after death, and make other bodies, why is it impossible that we should have the power of making bodies here, without entirely dissolving this body, simply changing it continually? They also thought that in mercury and in sulphur was hidden the most wonderful power, and that by certain preparations of these a man could keep the body as long as he liked. Others believed that certain drugs could bring powers, such as flying through the air. Many of the most wonderful medicines of the present day we owe to the Rasayanas, notably the use of metals in medicine. Certain sects of Yogis claim that many of their principal teachers are still living in their old bodies. Patanjali, the great authority on Yoga, does not deny this.<br> 요기들은 이러한 힘이 화학적 수단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화학이 원래 연금술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의 돌과 생명의 비약 등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도에는 라사야나(Rāsāyanas)라는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상, 지식, 영성, 종교가 모두 매우 옳지만 몸은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유일한 도구라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가끔씩 끝이 난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요가를 수련하고 싶거나 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가 아주 멀리 발전하기 전에 (시간이 다되면)그는 죽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몸을 취하고 다시 시작하고 죽는 식으로 계속됩니다. 이런 식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낭비(소요)될 것입니다. 몸이 강해지고 완전해져서 탄생과 죽음이 제거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라사야나들은 먼저 몸을 매우 강하게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몸이 불멸의 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마음이 몸을 만든다면, 그리고 각 마음이 무한한 에너지의 출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각 출구가 외부로부터 어떤 양의 힘이라도 얻는 데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몸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체를 제조해야 합니다. 이 몸이 죽자마자 우리는 다른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왜 지금 여기서, 이 몸을 벗어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까? 이론은 완벽하게 정확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며 다른 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몸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꾸는 것 없이 여기서 몸을 만드는 힘을 갖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그들은 또한 수은과 유황에 가장 놀라운 힘이 숨겨져 있으며, 이들의 특정한 준비를 통해 사람이 원하는 만큼 몸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중) 또다른 사람들은 특정 약물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의약품 중 상당수는 라사야나(Rasayanas)의 덕분입니다. 특히 의약품에 금속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기의 일부 종파에서는 많은 주요 스승(guru)들이 여전히 오래된 몸으로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가의 위대한 권위자인 파탄잘리는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br> ''The power of words''. There are certain sacred words called Mantras, which have power, when repeated under proper conditions, to produce these extraordinary powers. We are living in the midst of such a mass of miracles, day and night, that we do not think anything of them. There is no limit to man's power, the power of words and the power of mind.<br> '말의 힘'. 만트라(Mantras)라는 특정 신성한 단어가 있는데, 적절한 조건에서 반복하면 이러한 놀라운 힘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수많은 기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 말의 힘, 정신의 힘에는 한계가 없습니다.<br> ''Mortification''. You find that in every religion mortifications and asceticisms have been practised. In these religious conceptions the Hindus always go to the extremes. You will find men with their hands up all their lives, until their hands wither and die. Men keep standing, day and night, until their feet swell, and if they live, the legs become so stiff in this position that they can no more bend them, but have to stand all their lives. I once saw a man who had kept his hands raised in this way, and I asked him how it felt when he did it first. He said it was awful torture. It was such torture that he had to go to a river and put himself in water, and that allayed the pain for a little while. After a month he did not suffer much. Through such practices powers (Siddhis) can be attained.<br> ''고행''. 당신은 모든 종교에서 고행과 금욕주의가 실천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개념에서 힌두교인들은 항상 극단적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손이 시들고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남자들은 발이 부을 때까지 밤낮으로 계속 서 있고, 살면서 이 자세로 다리가 너무 굳어 더 이상 구부릴 수 없고 평생 서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이런 식으로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 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끔찍한 고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강에 가서 물에 몸을 담가야 할 정도의 고문이었고, 그 고통은 잠시 가라앉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그는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 힘(시디)을 얻을 수 있습니다.<br> ''Concentration''. Concentration is Samādhi, and that is Yoga proper; that is the principal theme of this science, and it is the highest means. The preceding ones are only secondary, and we cannot attain to the highest through them. Samadhi is the means through which we can gain anything and everything, mental, moral, or spiritual.<br> ''집중''. 집중은 사마띠(Samādhi)(의 또다른 말)이며, 그것이 바로 요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과학의 주요 주제이며 최고의 수단입니다. 앞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는 가장 높은 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마띠는 (사마띠만이) 우리가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br> जात्यन्तरपरिणामः प्रकृत्यापूरात् ॥२॥<br> jātyantarapariṇāmaḥ prakṛtyāpūrāt<br> 2. The change into another species is by the filling in of nature.<br> [4.2] 다른 종류(species)로의 변화는 자연의 충만에 의한 것입니다.<br> Patanjali has advanced the proposition that these powers come by birth, sometimes by chemical means, or through mortification. He also admits that this body can be kept for any length of time. Now he goes on to state what is the cause of the change of the body into another species. He says this is done by the filling in of nature, which he explains in the next aphorism.<br> 파탄잘리는 이러한 힘이 탄생, 때로는 화학적 수단 또는 고행을 통해 온다는 제안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이 몸이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 그는 신체가 다른 종(species)으로 변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계속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이 자연을 채우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그는 다음 구절(verse)([4.3]이후)에서 이에 대해 설명합니다.<br> निमित्तमप्रयोजकं प्रकृतीनां वरणभेदस्तु ततः क्षेत्रिकवत् ॥३॥<br> nimittam aprayojakaṃ prakṛtīnāṃ varaṇabhedas tu tataḥ kṣetrikavat<br> 3. Good and bad deeds are not the direct causes in the transformations of nature, but they act as breakers of obstacles to the evolutions of nature: as a farmer breaks the obstacles to the course of water, which then runs down by its own nature.<br> [4.3] 선행과 악행은 자연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자연의 진화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농부가 물의 흐름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고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br> The water for irrigation of fields is already in the canal, only shut in by gates. The farmer opens these gates, and the water flows in by itself, by the law of gravitation. So all progress and power are already in every man; perfection is man's nature, only it is barred in and prevented from taking its proper course. If anyone can take the bar off, in rushes nature. Then the man attains the powers which are his already. Those we call wicked become saints, as soon as the bar is broken and nature rushes in. It is nature that is driving us towards perfection, and eventually she will bring everyone there. All these practices and struggles to become religious are only negative work, to take off the bars, and open the doors to that perfection which is our birthright, our nature.<br> 들판의 관개용 물은 이미 운하에 있고, 문으로만 막혀 있습니다. 농부는 이 문을 열고, 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와 능력은 이미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완벽함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단지 그것이 방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방해될 뿐입니다. 누구든지 (울타리 빗장)막대를 떼어낼 수 있다면, 자연 속에서 달려가세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악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장벽이 무너지고 자연이 돌진하자마자 성인이 됩니다. 우리를 완벽함으로 이끄는 것은 자연이며, 결국 그녀는 모든 사람을 완벽함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종교적이 되기 위한 이러한 모든 실천과 투쟁은 빗장을 풀고 우리의 타고난 권리이자 본성인 완벽함에 이르는 문을 여는 부정적인 일일 뿐입니다.<br> Today the evolution theory of the ancient Yogis will be better understood in the light of modern research. And yet the theory of the Yogis is a better explanation. The two causes of evolution advanced by the moderns, viz. sexual selection and survival of the fittest, are inadequate. Suppose human knowledge to have advanced so much as to eliminate competition, both from the function of acquiring physical sustenance and of acquiring a mate. Then, according to the moderns, human progress will stop and the race will die. The result of this theory is to furnish every oppressor with an argument to calm the qualms of conscience. Men are not lacking, who, posing as philosophers, want to kill out all wicked and incompetent persons (they are, of course, the only judges of competency) and thus preserve the human race! But the great ancient evolutionist, Patanjali, declares that the true secret of evolution is the manifestation of the perfection which is already in every being; that this perfection has been barred and the infinite tide behind is struggling to express itself. These struggles and competitions are but the results of our ignorance, because we do not know the proper way to unlock the gate and let the water in. This infinite tide behind must express itself; it is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br> 오늘날 고대 요기들의 진화론은 현대 연구에 비추어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기(Yogi)의 이론이 더 나은 설명입니다. 현대인들이 발전시킨 진화의 두 가지 원인, 즉. 성적 선택과 적자 생존은 (인간에 이르러서는 점점더)부적절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육체적 생계를 유지하는 기능과 배우자를 얻는 기능 모두에서 경쟁을 제거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현대인에 따르면 인간의 진보는 멈추고 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론의 결과는 모든 억압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기 위한 논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로 가장하여 사악하고 무능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물론 그들은 유일한 능력의 재판관입니다) 인류를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위대한 진화론자인 파탄잘리는 진화의 진정한 비밀은 모든 존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완벽함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완벽함은 금지되었고 뒤에 있는 무한한 조류(tide)는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과 경쟁은 우리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을 열고 물을 들여오는 적절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뒤에 있는 이 무한한 조수(tide)는 스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발현의 원인입니다.<br> Competitions for life or sex-gratification are only momentary, unnecessary, extraneous effects, caused by ignorance. Even when all competition has ceased, this perfect nature behind will make us go forward until everyone has become perfect. Therefore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competition is necessary to progress. In the animal the man was suppressed, but as soon as the door was opened, out rushed man. So in man there is the potential god, kept in by the locks and bars of ignorance. When knowledge breaks these bars, the god becomes manifest.<br> 삶이나 성적 만족을 위한 경쟁은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이고 불필요하며 외부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모든 경쟁이 끝나더라도 뒤에 있는 완벽한 본성은 모두가 완벽해질 때까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전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물 안에서는 인간이 제압당했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인간이 달려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는 무지의 자물쇠와 빗장으로 갇혀 있는 잠재적인 신이 있습니다. 지식이 이러한 기준을 깨면 신이 나타나게 됩니다.<br> निर्माणचित्तान्यस्मितामात्रात् ॥४॥<br> nirmāṇacittāny asmitāmātrāt<br> 4. From egoism alone proceed the created minds.<br> [4.4] (인위적인)창조된 마음은 (그 시작점은)이기심(또는 자아)에서만 나옵니다.<br> The theory of Karma is that we suffer for our good or bad deeds, and the whole scope of philosophy is to reach the glory of man. All the scriptures sing the glory of man, of the soul, and then, in the same breath, they preach Karma. A good deed brings such a result, and a bad deed such another, but if the soul can be acted upon by a good or a bad deed, the soul amounts to nothing. Bad deeds put a bar to the manifestation of the nature of the Purusha; good deeds take the obstacles off, and the glory of the Purusha becomes manifest. The Purusha itself is never changed. Whatever you do never destroys your own glory, your own nature, because the soul cannot be acted upon by anything, only a veil is spread before it, hiding its perfection.<br> 카르마 이론은 우리가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며, 철학의 전체 범위는 인간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인간과 영혼의 영광을 노래하고 동시에 카르마를 설교합니다. 선한 행위는 (그에 맞는)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한 행위는 (또한)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영혼이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영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쁜 행위는 푸루샤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장애가 됩니다. 선행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푸루샤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푸루샤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 자신의 영광과 본성을 결코 파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을 수 없고, 영혼 앞에는 베일이 펼쳐져 있어 그 완벽함을 숨길 뿐입니다.<br> With a view to exhausting their Karma quickly, Yogis create Kāya-vyuha, or groups of bodies, in which to work it out. For all these bodies they create minds from egoism. These are called "created minds", in contradistinction to their original minds.<br> 카르마를 빨리 소진시키기 위해 요기들은 카르마를 해결하기 위한 신체 그룹인 카야뷰하(Kāya-vyuha)를 만듭니다. 이 모든 신체에 대해 그들은 이기심에서 마음을 창조합니다. 이것을 원래의 마음과 달리 '창조된 마음'이라고 합니다.<br> प्रवृत्तिभेदे प्रयोजकं चित्तमेकमनेकेषाम् ॥५॥<br> pravṛttibhede prayojakaṃ cittam ekam anekeṣām<br> 5. Though the activities of the different created minds are various, the one original mind is the controller of them all.<br> [4.5] (인위적으로)창조된 여러 마음의 활동은 다양하지만 하나의 본심이 모든 것을 주관합니다.<br> These different minds, which act in these different bodies are called made-minds, and the bodies, made-bodies; that is, manufactured bodies and minds. Matter and mind are like two inexhaustible storehouses. When you become a Yogi, you learn the secret of their control. It was yours all the time, but you had forgotten it. When you become a Yogi, you recollect it. Then you can do anything with it, manipulate it in every way you like. The material out of which a manufactured mind is created is the very same material which is used for the macrocosm. It is not that mind is one thing and matter another, they are different aspects of the same thing. Asmitā, egoism, is the material, the fine state of existence out of which these made-minds and made-bodies of the Yogi are manufactured. Therefore, when the Yogi has found the secret of these energies of nature, he can manufacture any number of bodies or minds out of the substance known as egoism.<br> 이렇게 서로 다른 신체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서로 다른 마음을 만든 마음이라고 하고, 몸을 만든 몸이라고 합니다. 즉, 만들어진 육체와 정신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두 개의 무한한 창고와 같습니다. 당신이 요기가 되면 그들의 통제의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항상 당신의 것이었지만 당신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요기가 되면 그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가공된 마음이 창조되는 물질은 대우주에 사용되는 물질과 바로 동일합니다. 마음은 하나이고 물질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측면입니다. 이기심인 아스미타(asmitā)는 요기의 만들어진 마음과 만들어진 몸이 만들어지는 물질, 존재의 훌륭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요기가 이러한 자연 에너지의 비밀을 발견하면 이기주의라는 물질로 수많은 몸이나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br> तत्र ध्यानजमनाशयम् ॥६॥<br> tatra dhyānajam anāśayam<br> 6. Among the various Chittas, that which is attained by Samadhi is desireless.<br> [4.6] 다양한 치타(Chitta) 중에서 사마띠(samadhi,-삼다)에 의해 달성된 것은 욕망이 없습니다.<br> Among all the various minds that we see in various men, only that mind which has attained to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is the highest. A man who has attained certain powers through medicines, or through words, or through mortifications, still has desires, but that man who has attained to Samadhi through concentration is alone free from all desires.<br>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마음 중에서 오직 사마띠, 즉 완전한 집중에 도달한 마음만이 가장 높습니다. 약이나 말, 고행을 통해 어떤 힘을 얻은 사람은 여전히 욕망을 갖고 있지만 집중을 통해 사마띠에 도달한 사람은 홀로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습니다.<br> कर्माशुक्लाकृष्णं योगिनस्त्रिविधमितरेषाम् ॥७॥<br> karmāśuklākṛṣṇaṃ yoginas trividham itareṣām<br> 7. Works are neither black nor white for the Yogis; for others they are threefold — black, white, and mixed.<br> [4.7] 요기들에게는 일<ref>수행,수련,실천</ref>이 흑백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검은색, 흰색, 혼합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br> When the Yogi has attained perfection, his actions, and the Karma produced by those actions, do not bind him, because he did not desire them. He just works on; he works to do good, and he does good, but does not care for the result, and it will not come to him. But, for ordinary men, who have not attained to the highest state, works are of three kinds, black (evil actions), white (good actions), and mixed.<br> 요기가 완전함과 그의 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로 인해 생긴 카르마를 얻었을 때 그를 묶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해 일하고 선을 행하지만 결과를 염려하지 않으며 결과가 그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행위는 흑색(악행), 백색(선행), 혼합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br> ततस्तद्विपाकानुगुणानामेवाभिव्यक्तिर्वासनानाम् ॥८॥<br> tatas tadvipākānuguṇānām evābhivyaktir vāsanānām<br> 8. From these threefold works are manifested in each state only those desires (which are) fitting to that state alone. (The others are held in abeyance for the time being.)<br> [4.8] 이 세 가지 행위 중에서 각 상태에서는 그 상태에만 적합한 욕망만이 나타납니다. (나머지는 당분간(잠정적으로) 보류됩니다.)<br> Suppose I have made the three kinds of Karma, good, bad, and mixed, and suppose I die and become a god in heaven. The desires in a god body are not the same as the desires in a human body; the god body neither eats nor drinks. What becomes of my past unworked Karmas which produce as their effect the desire to eat and drink? Where would these Karmas go when I become a god? The answer is that desires can only manifest themselves in proper environments. Only those desires will come out for which the environment is fitted; the rest will remain stored up. In this life we have many godly desires, many human desires, many animal desires. If I take a god body, only the good desires will come up, because for them the environments are suitable. And if I take an animal body, only the animal desires will come up, and the good desires will wait. What does this show? That by means of environment we can check these desires. Only that Karma which is suited to and fitted for the environments will come out. This shows that the power of environment is the great check to control even Karma itself.<br> 내가 세 가지 카르마(좋은 카르마, 나쁜 카르마, 혼합 카르마)를 만들고 죽어서 천국의 신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신의 몸에 있는 욕망은 인간 몸에 있는 욕망과 같지 않습니다. 신의 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가정합니다). 먹고 마시고 싶은 욕망을 결과로 낳는 과거의 일하지 않은 카르마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신이 되면 이 카르마들은 어디로 갈 것입ᄂᆝ까? 대답은 욕망이 적절한 환경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맞는 욕망만이 나올 것입니다. 나머지는 저장된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생에서 우리는 많은 경건한 욕망, 많은 인간적 욕망, 많은 동물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신체를 취하면 좋은 욕망만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물의 몸을 취하면 동물적인 욕망만 올라오고, 좋은 욕망만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환경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욕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경에 적합하고 적당한 카르마만이 나올 것입니다. 이는 환경의 힘이 카르마 자체를 제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br> जाति-देश-काल-व्यवहितानामप्यानन्तर्यं स्मृतिसंस्कारयोरेकरूपत्वात् ॥९॥<br> jātideśakālavyavahitānām apy ānantaryaṃ smṛtisaṃskārayor ekarūpatvāt<br> 9. There is consecutiveness in desires, even though separated by species, space, and time, there being identification of memory and impressions.<br> [4.9] 욕망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비록 종류(species)<ref>종류(철학,논리학) - 종차(種差)는 같은 유(류)개념에 속한 어떤 종개념과 또다른 종개념을 서로 구별할수있는 요소라고 정의해본다면 이를테면 동물에 속하는 사람과 새를 비교할 때 날개가 있고 없는 차이를 종차의 예로 들수있다. 이 때 종류를 이해해볼수있다.</ref><ref>[2.13]The root being there, the fruition comes (in the form of) species, life, and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뿌리가 거기에 있고 그 열매는 종(種)과 생명과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형태)으로 옵니다.[2.13]참고</ref><ref>치타(chitta)가 브리티스(vrittis)를 멈출때 푸루샤(purusha)가 아트만(atman)을 브라흐마(brahma)에게 안내합니다. 이제 카르마(karma)는 더이상 그곳에 없습니다. (몸이 자신을 받아들이면 영혼이 드러납니다. 그 영혼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도됩니다.)</ref>, 공간, 시간으로 구분되어도 기억과 인상의 동일성이 있습니다.<br> Experiences becoming fine become impressions; impressions revivified become memory. The word memory here includes unconscious co-ordination of past experiences, reduced to impressions, with present conscious action. In each body, the group of impressions acquired in a similar body only becomes the cause of action in that body. The experiences of a dissimilar body are held in abeyance. Each body acts as if it were a descendant of a series of bodies of that species only; thus, consecutiveness of desires is not to be broken.<br> 괜찮은 경험은 인상이 됩니다. 되살아난 인상은 추억이 됩니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단어는 인상으로 축소된 과거 경험과 현재의 의식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각 신체에서는 유사한 신체에서 획득한 인상들의 집합이 그 신체에서 작용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서로 다른 신체의 경험은 보류됩니다. 각 신체는 마치 해당 종(species)의 일련의 신체의 후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따라서 욕망의 연속성은 깨지지 않습니다.<br> तासामनादित्वं चाशिषो नित्यत्वात् ॥१०॥<br> tāsām anāditvaṃ cāśiṣo nityatvāt<br> 10. Thirst for happiness being eternal, desires are without beginning.<br> [4.10] 행복에 대한 갈증은 영원하고 욕망은 시작이 없습니다.(따라서 끝도 없습니다)<br> All experience is preceded by desire for happiness. There was no beginning of experience, as each fresh experience is built upon the tendency generated by past experience; therefore desire is without beginning.<br> 모든 경험에는 행복에 대한 열망이 선행됩니다. 각각의 새로운 경험은 과거 경험에 의해 생성된 경향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경험의 시작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시작이 없습니다.<br> हेतुफलाश्रयालम्बनैः संगृहीतत्वादेषामभावे तदभावः ॥११॥<br> hetuphalāśrayālambanaiḥ saṃgṛhītatvād eṣām abhāve tadabhāvaḥ <br> 11. Being held together by cause, effect, support, and objects, in the absence of these is its absence.<br> [4.11] 원인, 결과, 지탱 및 대상에 의해 결합되며, 이것이 없으면 부재(존재하지않음)입니다.<br> Desires are held together by cause and effect;<ref>The causes are the "pain-bearing obstructions" (II.3) and actions (IV.7), and the effects are "species, life, and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II.13). —Ed.</ref> if a desire has been raised, it does not die without producing its effect. Then, again, the mind-stuff is the great storehouse, the support of all past desires reduced to Samskāra form; until they have worked themselves out, they will not die. Moreover, so long as the senses receive the external objects, fresh desires will arise. If it be possible to get rid of the cause, effect, support, and objects of desire, then alone it will vanish.<br> 욕망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합됩니다.<ref>원인은 "고통을 수반하는 장애물"([2.3])과 행위([4.7])이며, 결과는 "종(species), 생명, 쾌락과 고통의 경험"이다. ([2.13]). —Ed.</ref> 욕망이 고조되면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의 재료는 거대한 창고이며, 삼스카라(Samskāra) 형태로 축소된 모든 과거의 욕망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일할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감각이 외부 대상을 받아들이는 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욕망의 원인과 결과, 지탱과 대상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혼자서도 사라질 것입니다.<br> अतीतानागतं स्वरूपतोऽस्त्यध्वभेदाद्धर्माणाम् ॥१२॥<br> atītānāgataṃ svarūpato 'sty adhvabhedād dharmāṇām <br> 12. The past and future exist in their own nature, qualities having different ways.<br> [4.12]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 존재하며, 특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br> The idea is that existence never comes out of non-existence. The past and future, though not existing in a manifested form, yet exist in a fine form.<br>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비록 현현(顯現)된 형태는 아니지만 미세한 형태로 존재합니다.<br> ते व्यक्त-सूक्ष्मा गुणात्मानः ॥१३॥<br> te vyaktasūkṣmā guṇātmānaḥ<br> 13. They are manifested or fine, being of the nature of the Gunas.<br> [4.13] (셋)구나들(gunas)<ref>트리구나 tri-guna(s)</ref>의 특성상 뚜렷하거나 미세(미미)<ref>미미할수있습니다. 애매모호하게 보입니다. </ref>합니다.<br> The Gunas are the three substances, Sattva, Rajas, and Tamas, whose gross state is the sensible universe. Past and future arise from the different modes of manifestation of these Gunas.<br> 구나스Gunas는 사트바Sattva(물질), 라자스Rajas(빛) 및 타마스Tamas(어둠)의 세 가지 재질이며, 그 전체 상태는 감각적 우주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이러한 구나스Gunas의 다양한 발현 방식에서 발생합니다.<br> परिणामैकत्वाद्वस्तुतत्त्वम् ॥१४॥<br> pariṇāmaikatvād vastutattvam <br> 14. The unity in things is from the unity in changes.<br> [4.14] 사물의 통일성(연관성)은 변화의 통일성(관련성)에서 나옵니다.<ref>[https://archive.org/stream/fp_Silent_Spring-Rachel_Carson-1962/Silent_Spring-Rachel_Carson-1962_djvu.txt The Silent Spring(침묵의 봄)]레이첼 루이즈 카슨(Rachel Louise Carson)1962년 (쳅터4. Surface Waters and Underground Seas) Here again we are reminded that in nature nothing exists alone. To understand more clearly how the pollution of our world is happening, we must now look at another of the earth's basic resources, the soil.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 세계의 오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이제 지구의 또 다른 기본 자원인 토양을 살펴봐야 합니다.) </ref><br> Though there are three substances, their changes being co-ordinated, all objects have their unity.<br> 세 가지 물질이 있고 그 변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모든 사물은 통일성을 갖고 있습니다.<br> वस्तुसाम्ये चित्तभेदात्तयोर्विभक्तः पन्थाः ॥१५॥<br> vastusāmye cittabhedāt tayor vibhaktaḥ panthāḥ <br> 15. Since perception and desire vary with regard to the same object, mind and object are of different nature.<br> [4.15]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지각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대상은 성질이 다릅니다.<br> That is, there is an objective world independent of our minds. This is a refutation of Buddhistic Idealism. Since different people look at the same thing differently, it cannot be a mere imagination of any particular individual.<ref>There is an additional aphorism here in some editions:<br />न चैकचित्ततन्त्रं वस्तु तदप्रमाणकं तदा किं स्यात् ॥<br />"The object cannot be said to be dependent on a single mind. There being no proof of its existence, it would then become nonexistent."<br />If the perception of an object were the only criterion of its existence, then when the mind is absorbed in anything or is in Samadhi, it would not be perceived by anybody and might as well be said to be non-existent. This is an undesirable conclusion. —Ed.</ref><br> 즉, 우리 마음과 독립된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적 이상주의에 대한 반박일수있습니다. 같은 것도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 때문에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의 단순한 상상일 수는 없습니다.<ref>대상에 대한 인식이 그 존재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마음이 어떤 것에 몰입하거나 사마띠에 (들어)있을 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론입니다. —에드.</ref><br> <table border="1" style="border-collapse:collapse;"><tr><td> न चैकचित्ततन्त्रं वस्तु तदप्रमाणकं तदा किं स्यात् ॥१६॥<br> na caikacittatantraṃ vastu tadapramāṇakaṃ tadā kiṃ syāt <br> 16. The object cannot be said to be dependent on a single mind. There being no proof of its existence, it would then become nonexistent.<br> [4.16] 대상은 한 마음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존재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br> ※ 몇몇 판본에는 이구절이 추가되어있습니다. </td></tr></table> तदुपरागापेक्षित्वाच्चित्तस्य वस्तु ज्ञाताज्ञातम् ॥१६॥<br> taduparāgāpekṣitvāc cittasya vastu jñātājñātam<br> 16. Things are known or unknown to the mind, being dependent on the colouring which they give to the mind.<br> [4.16] 사물은 마음에 부여되는 색상에 따라 마음에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습니다.<br> सदा ज्ञाताश्चित्तवृत्तयस्तत्प्रभोः पुरुषस्यापरिणामित्वात् ॥१७॥<br> sadā jñātāś cittavṛttayas tatprabhoḥ puruṣasyāpariṇāmitvāt <br> 17. The states of the mind are always known, because the lord of the mind, the Purusha, is unchangeable.<br> [4.17] 마음의 주인인 푸루샤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는 항상 알려져 있습니다.<br> The whole gist of this theory is that the universe is both mental and material. Both of these are in a continuous state of flux. What is this book? It is a combination of molecules in constant change. One lot is going out, and another coming in; it is a whirlpool, but what makes the unity? What makes it the same book? The changes are rhythmical; in harmonious order they are sending impressions to my mind, and these pieced together make a continuous picture, although the parts are continuously changing. Mind itself is continuously changing. The mind and body are like two layers in the same substance, moving at different rates of speed. Relatively, one being slower and the other quicker, we can distinguish between the two motions. For instance, a train is in motion, and a carriage is moving alongside it. It is possible to find the motion of both these to a certain extent. But still something else is necessary. Motion can only be perceived when there is something else which is not moving. But when two or three things are relatively moving, we first perceive the motion of the faster one, and then that of the slower ones. How is the mind to perceive? It is also in a flux. Therefore another thing is necessary which moves more slowly, then you must get to something in which the motion is still slower, and so on, and you will find no end. Therefore logic compels you to stop somewhere. You must complete the series by knowing something which never changes. Behind this never-ending chain of motion is the Purusha, the changeless, the colourless, the pure. All these impressions are merely reflected upon it, as a magic lantern throws images upon a screen, without in any way tarnishing it.<br> 이 이론의 전체적인 요점은 우주가 정신적이고 물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지속적인 유동 상태에 있습니다. 이 책은 무엇입니까?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자들의 조합입니다. 한 무더기가 나가고 다른 무더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나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책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변화는 리드미컬(주기적인 또는 율동의)합니다. 조화로운 순서로 그것들은 내 마음에 인상을 주고 있으며, 부분들이 계속해서 변하더라도 이것들이 함께 뭉쳐서 연속적인 그림을 이룹니다. 마음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동일한 물질의 두 층과 같아서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는 느리고 다른 하나는 더 빠르므로 두 동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차가 움직이고 있고 마차가 그 옆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움직임은 움직이지 않는 다른 것이 있을 때만 감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세 가지 사물이 상대적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먼저 더 빠른 것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그 다음에는 느린 것의 움직임을 인지합니다. 마음은 어떻게 인식합니까? 그것은 또한 유동적입니다. 그러므로 더 느리게 움직이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고, 그런 다음 동작이 여전히 더 느린 것에 도달해야 하며, 계속해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는 당신이 어딘가에서 멈추도록 강요합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시리즈(연속성)를 완성해야 합니다. 이 끝없는 운동 사슬 뒤에는 불변, 무색, 순수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상은 마술 랜턴이 어떤 방식으로든 화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화면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처럼 화면에 반영될 뿐입니다.<br> न तत् स्वाभासं दृश्यत्वात् ॥१८॥<br> na tat svābhāsaṃ dṛśyatvāt <br> 18. The mind is not self-luminous, being an object.<br> [4.18] 마음은 객체로서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br> Tremendous power is manifested everywhere in nature, but it is not self-luminous, not essentially intelligent. The Purusha alone is self-luminous, and gives its light to everything. It is the power of the Purusha that is percolating through all matter and force.<br> 엄청난 힘은 자연의 모든 곳에서 발현되지만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도 않고 본질적으로 이해력을 바랄수있지 않습니다. 푸루샤만이 스스로 빛을 내며 모든 것에 빛을 줍니다. 모든 물질과 힘에 스며드는 푸루샤의 힘입니다.<br> एकसमये चोभयानवधारणम् ॥१९॥<br> ekasamaye cobhayānavadhāraṇam<br> 19. From its being unable to cognise both at the same time.<br> [4.19] 동시에 두 가지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f>한 물질이 동시에 두 공간에서 존재할수없고 그리고 두 물질은 서로 한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할수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한 개의 독립된 물질로 가정할수있게 됩니다.</ref><br> If the mind were self-luminous it would be able to cognise itself and its objects at the same time, which it cannot. When it cognises the object, it cannot reflect on itself. Therefore the Purusha is self-luminous, and the mind is not.<br> 마음이 스스로 빛난다면 그 자체와 그 대상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면 그 자체를 성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푸루샤는 스스로 빛을 발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br> चित्तान्तरदृश्ये बुद्धिबुद्धेरतिप्रसङ्गः स्मृतिसङ्करश्च ॥२०॥<br> cittāntaradṛśye buddhibuddher atiprasaṅgaḥ smṛtisaṃkaraśca <br> 20. Another cognising mind being assumed, there will be no end to such assumptions, and confusion of memory will be the result.<br> [4.20] 또 다른 인식 정신을 가정하면 그러한 가정은 끝이 없을 것이며 기억의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br> Let us suppose there is another mind which cognises the ordinary mind, then there will have to be still another to cognise the former, and so there will be no end to it. It will result in confusion of memory, there will be no storehouse of memory.<br> 평범한 마음을 인식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전자를 인식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기억의 창고도 (끝이)없을 것입니다.<br> चितेरप्रतिसंक्रमायास्तदाकारापत्तौ स्वबुद्धि-संवेदनम् ॥२१॥<br> citer apratisaṃkramāyās tadākārāpattau svabuddhisaṃvedanam<br> 21. The essence of knowledge (the Purusha) being unchangeable, when the mind takes its form, it becomes conscious.<br> [4.21] 지식(푸루샤)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마음이 형태를 취하면 의식(변별력)이 생깁니다.<ref>여기 어떤 모든것의 첫번째 질서(1st order)가 있다고 가정해봄니다. 그것은 모든것의 시작이며 모든것의 끝입니다. 치타와 브리티스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러한 첫번째 질서에 접근했다고 가정해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푸루샤조차도 그것앞에서는 한낱 아주 미세한 입자(먼지) 같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라고 가정해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첫번째 질서앞에서는 먼지도 푸루샤도 치타도 브리티들도 모두 중요하고 동시에 동등할것입니다. </ref><br> Patanjali says this to make it more clear that knowledge is not a quality of the Purusha. When the mind comes near the Purusha it is reflected, as it were, upon the mind, and the mind, for the time being, becomes knowing and seems as if it were itself the Purusha.<br> 파탄잘리Patanjali는 지식이 푸루샤의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푸루샤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은 말하자면 마음에 반영되며, 마음은 한동안 알게 되고 마치 그 자체가 푸루샤인 것처럼 보입니다.<br> द्रष्टृदृश्योपरक्तं चित्तं सर्वार्थम् ॥२२॥<br> draṣṭṛdṛśyoparaktaṃ cittaṃ sarvārtham <br> 22. Coloured by the seer and the seen the mind is able to understand everything.<br> [4.22] 보는자(것)(seer)와 보여진 것(seen)에 의해 색칠된 마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br> On one side of the mind the external world, the seen, is being reflected, and on the other, the seer is being reflected. Thus comes the power of all knowledge to the mind.<br> 마음의 한쪽에는 외부 세계, 즉 보이는 것이 반영되고, 다른 한쪽에는 보는 사람이 반영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지식의 힘이 마음에 옵니다.<br> तदसंख्येयवासनाभिश्चित्रमपि परार्थं संहत्यकारित्वात् ॥२३॥<br> tad asaṃkhyeyavāsanābhiś citram api parārthaṃ saṃhatyakāritvāt <br> 23. The mind, though variegated by innumerable desires, acts for another (the Purusha), because it acts in combination.<br> [4.23] 마음은 무수한 욕망으로 다양하지만 다른것(푸루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결합하여 행동이 나오는 이유입니다.<br> The mind is a compound of various things and therefore it cannot work for itself. Everything that is a combination in this world has some object for that combination, some third thing for which this combination is going on. So this combination of the mind is for the Purusha.<br> 마음은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이므로 스스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결합인 모든 것에는 그 결합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고, 이 결합이 진행되는 세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의 조합은 푸루샤를 위한 것입니다.<br> विशेषदर्शिन आत्मभाव-भावनाविनिवृत्तिः ॥२४॥<br> viśeṣadarśina ātmabhāvabhāvanānivṛttiḥ <br> 24. For the discriminating, the perception of the mind as Atman ceases.<br> [4.24] 분별을 위해 아트만(atman)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인식이 중단됩니다.<br> Through discrimination the Yogi knows that the Purusha is not mind.<br> 차별을 통해 요기는 푸루샤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br> तदा विवेकनिम्नं कैवल्यप्राग्भावं चित्तम् ॥२५॥<br> tadā vivekanimnaṃ kaivalyaprāgbhāraṃ cittam<br> 25. Then, bent on discriminating, the mind attains the previous state of Kaivalya (isolation).<ref>There is another reading — कैवल्यप्राग्भारं। The meaning then would be: "Then the mind becomes deep in discrimination and gravitates towards Kaivalya." —Ed.</ref><br> [4.25] 그런 다음 분별에 전념하면 마음은 이전 상태인 카이발야Kaivalya(독립)에 도달합니다.<ref>또 다른 해석(또는 주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차별에 깊이 빠지고 카이발야Kaivalya 쪽으로 끌립니다." —Ed.(번역가 또는 편집자)</ref> Thus the practice of Yoga leads to discriminating power, to clearness of vision. The veil drops from the eyes, and we see things as they are. We find that nature is a compound, and is showing the panorama for the Purusha, who is the witness; that nature is not the Lord, that all the combinations of nature are simply for the sake of showing these phenomena to the Purusha, the enthroned king within. When discrimination comes by long practice, fear ceases, and the mind attains isolation.<br> 따라서 요가 수련은 분별력, 시야의 명료함으로 이어집니다. 눈에서 베일이 벗겨지고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이 복합적이며, 증인인 푸루샤에게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자연은 주된 것이 아니며, 자연의 모든 조합은 단순히 내면에 즉위한 왕인 푸루샤에게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랜 연습으로 차별이 생기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은 독립됩니다.<br> तच्छिद्रेषु प्रत्ययान्तराणि संस्कारेभ्यः ॥२६॥<br> tacchidreṣu pratyayāntarāṇi saṃskārebhyaḥ <br> 26. The thoughts that arise as obstructions to that are from impressions.<br> [4.26] 그것을 방해하는 생각은 인상에서 비롯됩니다.<br> All the various ideas that arise, making us believe that we require something external to make us happy, are obstructions to that perfection. The Purusha is happiness and blessedness by its own nature. But that knowledge is covered over by past impressions. These impressions have to work themselves out.<br>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외부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다양한 아이디어는 모두 그러한 완벽함을 방해합니다. 푸루샤는 그 자체로 행복과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과거의 인상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러한 노출은 스스로 해결되어야 합니다.<br> हानमेषां क्लेशवदुक्तम् ॥२७॥<br> hānam eṣāṃ kleśavad uktam<br> 27. Their destruction is in the same manner as of ignorance, egoism, etc., as said before (II.10).<br> [4.27] 그들의 멸망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무지, (벗어나야할)이기주의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참고[2.10]).<br> प्रसंख्यानेऽप्यकुसीदस्य सर्वथा विवेकख्यातेर्धर्ममेघः समाधिः ॥२८॥<br> prasaṃkhyāne 'py akusīdasya sarvathā vivekakhyāter dharmameghaḥ samādhiḥ <br> 28. Even when arriving at the right discriminating knowledge of the essences, he who gives up the fruits, unto him comes, as the result of perfect discrimination, the Samadhi called the cloud of virtue.<br> [4.28] 본질에 대한 올바른 식별 지식에 도달할 때에도 열매(fruits)를 버리는 사람은 완전한 식별의 결과로 그에게 (돌아)옵니다. 이를 사마띠는 '덕(德)의 구름'(다르마메가 삼매)이라고 불렀습니다.<ref>[1.51]니르비자(nirbija) 참고</ref><br> When the Yogi has attained to this discrimination, all the powers mentioned in the last chapter come to him, but the true Yogi rejects them all. Unto him comes a peculiar knowledge, a particular light, called the Dharma-megha, the cloud of virtue. All the great prophets of the world whom history has recorded had this. They had found the whole foundation of knowledge within themselves. Truth to them had become real. Peace and calmness, and perfect purity became their own nature, after they had given up the vanities of powers.<br> 요기가 이 분별력에 도달하면 마지막 장에서 언급한 모든 힘이 그에게 오지만, 진정한 요기는 그 모든 힘을 거부합니다. 그에게 덕의 구름인 다르마메가(Dharma-megha)라고 불리는 특별한 지식, 특별한 빛이 옵니다. 역사에 기록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의 기초 전체를 자기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힘의 허영을 포기한 후에는 평화와 평온, 완전한 순결이 그들 자신의 본성이 되었습니다.<br> ततः क्लेशकर्मनिवृत्तिः ॥२९॥<br> tataḥ kleśakarmanivṛttiḥ <br> 29. From that comes cessation of pain and works.<br> [4.29] 거기서 괴로움과 일이 그쳐집니다.<br> When that cloud of virtue has come, then no more is there fear of falling, nothing can drag the Yogi down. No more will there be evils for him. No more pains.<br> 그 미덕의 구름이 오면 더 이상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그 무엇도 요기를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악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은 없습니다.<ref>또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이세상은 가뭄과 단비가 주기(週期)를 돌며 찬공기와 더운공기가 자연을 조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선과 악은 여기에 비교될수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슬픈일로 여겨질수있으며 고통으로 여겨질수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두려움이 두려움이 아니며 더이상 악이 악이 아닙니다.'라는 생각의 또다른 영토에 접근해보고 이를 조사(investigation)할수있습니다. </ref><br> तदा सर्वावरणमलापेतस्य ज्ञानस्याऽनन्त्याज्ज्ञेयमल्पम् ॥३०॥<br> tadā sarvāvaraṇamalāpetasya jñānasyānantyāj jñeyam alpam <br> 30. The knowledge, bereft of covering and impurities, becoming infinite, the knowable becomes small.<br> [4.30] 지식은 가려짐과 불순물이 없어지고 무한해지며, 알 수 있는 것은 작아집니다.<ref>[참고]तत् कर्माल्पं समाधिप्रसादात् Tat karmālpam samādhi-prasādāt 그(완전한 요기)의 업(karma)은 삼매(samādhi)의 평온함으로 인해 미미하다(alpam). (chatGPT)</ref><br> Knowledge itself is there; its covering is gone. One of the Buddhistic scriptures defines what is meant by the Buddha (which is the name of a state) as infinite knowledge, infinite as the sky. Jesus attained to that and became the Christ. All of you will attain to that state. Knowledge becoming infinite, the knowable becomes small. The whole universe, with all its objects of knowledge, becomes as nothing before the Purusha. The ordinary man thinks himself very small, because to him the knowable seems to be infinite.<br> 지식 자체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덮개가 사라졌습니다. 불교 경전 중 하나는 부처님(의 나라)이 의미하는 바를 무한한 지식, 하늘처럼 무한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것(그 나라)을 얻으시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당신(들) 모두는 그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지식은 무한해지며, 알 수 있는 것은 작아질것입다. 모든 지식의 대상을 포함한 온 우주는 푸루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됩니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매우 작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알 수 있는 것은 무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br> ततः कृतार्थानां परिणामक्रमसमाप्तिर्गुणानाम् ॥३१॥<br> tataḥ kṛtārthānāṃ pariṇāmakramasamāptir guṇānām <br> 31. Then are finished the successive transformations of the qualities, they having attained the end.<br> [4.31] 그런 다음 특성의 연속적인 변형이 완료되어 종말에 도달했습니다.<br> Then all these various transformations of the qualities, which change from species to species, cease for ever.<br> 그러면 종(species)에서 종(species)으로 변하는 이러한 다양한 특성의 변형이 모두 영원히 중단됩니다.<br> क्षणप्रतियोगी परिणामापरान्तनिर्ग्राह्यः क्रमः ॥३२॥<br> kṣaṇapratiyogī pariṇāmāparāntanirgrāhyaḥ kramaḥ <br> 32. The changes that exist in relation to moments and which are perceived at the other end (at the end of a series) are succession.<br> [4.32] 순간과 관련하여 존재하고 다른 쪽 끝(연속의 끝)에서 지각(이해)되는 변화는 연속입니다.<br> Patanjali here defines the word succession, the changes that exist in relation to moments. While I think, many moments pass, and with each moment there is a change of idea, but I only perceive these changes at the end of a series. This is called succession, but for the mind that has realised omnipresence there is no succession. Everything has become present for it; to it the present alone exists, the past and future are lost. Time stands controlled, all knowledge is there in one second. Everything is known like a flash.<br> 파탄잘리Patanjali는 여기에서 연속이라는 단어, 즉 순간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변화를 정의합니다. 생각하는 동안 많은 순간이 지나가고 매 순간 생각의 변화가 있지만 나는 이러한 변화를 시리즈가 끝날 때만 인식합니다. 이것을 계승이라고 부르지만 편재성을 깨달은 마음에게는 계승이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현재만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는 상실됩니다. 시간은 통제되며 모든 지식은 1초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플래시처럼 알려져 있습니다.<br> पुरुषार्थशून्यानां गुणानां प्रतिप्रसवः कैवल्यं स्वरूपप्रतिष्ठा वा चितिशक्तेरिति ॥३३॥<br> puruṣārthaśūnyānāṃ guṇānāṃ pratiprasavaḥ kaivalyaṃ svarūpapratiṣṭhā vā citiśaktir iti <br> 33. The resolution in the inverse order of the qualities, bereft of any motive of action for the Purusha, is Kaivalya, or it is the establishment of the power of knowledge in its own nature.<br> [4.33] 푸루샤에 대한 행동 동기를 상실한 채 자질의 역순으로 해결되는 것은 카이발야Kaivalya 또는 그 자체의 성격으로 지식의 힘을 확립하는 것입니다.<br> Nature's task is done, this unselfish task which our sweet nurse, nature, had imposed upon herself. She gently took the self-forgetting soul by the hand, as it were, and showed him all the experiences in the universe, all manifestations, bringing him higher and higher through various bodies, till his lost glory came back, and he remembered his own nature. Then the kind mother went back the same way she came, for others who also have lost their way in the trackless desert of life. And thus is she working, without beginning and without end. And thus through pleasure and pain, through good and evil, the infinite river of souls is flowing into the ocean of perfection, of self-realisation.<br> 자연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유모인 자연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 비이기적인 임무입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자기를 망각하는 영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경험과 모든 현현(顯現)을 보여 주었고, 그의 잃어버린 영광이 돌아올 때까지 그를 다양한 몸을 통해 점점 더 높이 올려주었습니다. 자연(이자), 그리고 친절한 어머니는 길도 없는 삶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시작도 끝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과 고통, 선과 악을 통해 영혼의 무한한 강이 완전함과 자아 실현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br> Glory unto those who have realised their own nature. May their blessing be on us all!<br>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자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br> <Hr> {{주석}} == 라이선스 == {{PD-old-60}} [[분류:경전]] jjt98yrvsysto7uvib4w9kzphfj2h4j 위키문헌:저작권 토론 4 97996 458007 456536 2026-08-17T16:16:16Z Aspere 5453 458007 wikitext text/x-wiki {{절차 머리말 | 제목 = 저작권 토론 | 부제 = | 이전 = | 다음 = | 단축 = | 설명 = {{단축|문:저작권의심|문:저작권침해}} 이 문서는 위키문헌의 [[문:저작권 정책|저작권 정책]]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헌에 관하여 논의하는 장소입니다. 논의에 앞서 위키문헌의 서버는 물리적으로 미국에 위치하여 있다는 특징으로 '''미국의 저작권법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미 진행 중인 논의에 참여하는 것과 [{{fullurl:위키문헌:저작권 토론|action=edit&section=new 새 논의를 시작하는 것}}] 모두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p>명백하게 저작권을 침해하는 문서의 경우 이 문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삭제 신청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위키미디어 재단을 법적 책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저작권 상태에 관해 상당한 의심이 있는 경우는 바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p> <p>이 토론 문서에 주제를 추가할 때는 해당 문서에 '''<code><nowiki>{{저작권 의심}}</nowiki></code>'''틀을 부착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문서의 내용이 표시되지 않습니다. 저작권 문제가 아닌 이유로 삭제를 신청하는 경우에는 이 문서를 이용하지 말아 주십시오.</p> }} == [[틀:세계법제정보센터]] == {{토론보존|유지 및 변경|접기}} {{토론 가져옴|틀토론:세계법제정보센터#저작권 문제}} '''유지 및 변경'''. 틀에 경고 문구를 추가하였으며, 2017년 10월 31일 후에 생성된 문서에 대해서는 [[틀: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라이선스 틀을 변경하였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18:33 (KST) ---- {{답장|HappyMidnight}} [https://web.archive.org/web/20150220051538/http://www.moleg.go.kr/openarea/guide/copyright 2015년 당시 저작권 정책]에 따르면 "즉, 공공누리가 부착되지 않은 자료들을 사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담당자와 사전에 협의한 이후에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공공누리 중에서도 제1유형이 부착되지 않은 경우에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에도 제1유형이 붙은 것이 있는 반면, 2·3·4유형이 붙은 경우도 있으므로 해당 틀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각 문서별로 저작권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8일 (토) 02:38 (KST) : 안녕하세요? 법제처 말고, 세계법제정보센터의 저작권 정책에 따르면, "공공데이터 정책에 따라 ‘세계법제정보센터’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세계법제정보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며, 제공된 세계법제정보는 영리 목적의 이용을 포함하여 자유로운 활용이 보장됩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https://web.archive.org/web/20150220051538/http://www.moleg.go.kr/openarea/guide/copyright 세계법제정보센터의 저작권 정책] [[사:HappyMidnight|HappyMidnight]] ([[사토:HappyMidnight|토론]]) 2025년 3월 9일 (일) 18:55 (KST) ::{{답장|HappyMidnight}} 언급하신 링크가 제가 처음에 언급한 링크와 같은 링크인데, 리다이렉트가 자동으로 된거였네요. 다시 확인해보니 말씀하신 내용이 담겨있는 것은 [https://web.archive.org/web/20171031073438/http://world.moleg.go.kr/introduce/copyRight 2017년 10월 31일에 보존된 것]이 마지막으로 보존되어 있네요. [https://web.archive.org/web/20171207035516/https://world.moleg.go.kr/web/main/index.do 2017년 12월 7일] 이전에 홈페이지 개편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는 법제처 홈페이지의 저작권 정책을 연결하고 있으므로 이때를 기준으로 저작권 정책이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9일 (일) 21:26 (KST) ::: {{답장|Namoroka}} 그렇다면, 2017년 이전에 저작권이 선언된 것과 그 이후의 것을 구별해야 할 것 같네요.[[사:HappyMidnight|HappyMidnight]] ([[사토:HappyMidnight|토론]]) 2025년 3월 10일 (월) 15:39 (KST) {{토론보존끝}} == [[틀:우리역사넷]] == {{토론 가져옴|틀토론:우리역사넷#저작권 문제}} {{답장|HappyMidnight|Aspere|Vpark45}} [https://web.archive.org/web/20160202184649/http://contents.history.go.kr/front/etc/data.do 2016년 저작권 정책]에서는 "그러므로 저작권법 제25조의 ‘학교교육 목적 등에의 이용’ 이외의 목적에는 임의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https://www.history.go.kr/contents/contentsPage.do?groupId=000000000571&menuId=000000000572&pageId=000000000213 현 저작권 정책]에서는 "단, 자유이용의 경우 학술, 연구 등의 개인적인 목적으로만 이용이 가능하며"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자유 이용이 허가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8일 (토) 03:30 (KST) : {{핑|Namoroka}} 저도 우리역사넷 자체의 저작권 정책이 보존문서로 넘어간 것은 지금 알았습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냥 봤던 것 같은데...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먼저 제일 위의 문구를 보면, {{인용문|공공 데이터 개방은 민간이 공공 데이터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관련 산업 및 서비스의 육성과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역사넷>에서 제공하는 콘텐츠 중 일부 데이터도 공개·개방되고 있습니다.}} : 라고 적혀 있는데, 이를 보면 이는 상업적 이용을 허가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맨 밑의 문구도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인용문| 따라서 <우리역사넷>의 콘텐츠 중 저작권이 개방된 ‘역사 속 오늘’, ‘역대 국사 교과서’ 중 국정 교과서,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제외한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습니다.<br />그러므로 저작권법 제25조의 ‘학교교육 목적 등에의 이용’ 이외의 목적에는 임의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서비스 이용 외에 무단 전재 또는 재배포로 인한 명예 훼손, 초상권 침해, 재산상의 피해 등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개방되어 있지 않은 콘텐츠의 경우에는 (경우에만) 25조 이외의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8일 (토) 09:15 (KST) :: 그런데 별개로 이렇게 써 있는 저작권 정책이 사라진 것이니 배포를 철회한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법적으로 철회가 가능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8일 (토) 09:18 (KST) ::: 제가 조건문을 제대로 안 읽어보았군요. 말씀하신 사항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저작권 정책이 바뀌었으므로, 저작권 정책이 변경되기 이전 내용은 계속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또한 이런 경우라면 "너 고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건지 의문입니다. (이러한 경우처럼 초기에 미리 공식적으로 저작권 관련 허락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문의를 넣으면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당연히 상업적 이용 및 재배포 등이 안 된다고 답이 올 것 같다는 예상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8일 (토) 19:52 (KST)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errorReport/view.do?reportId=2287 우리역사넷 측 답변]에서 자신들도 바뀐 이유를 모르며, 현행 저작권 정책을 지켜달라는 실망스러운 답변만 받았습니다. 현재 공공데이터 포털에는 [https://www.data.go.kr/data/15053641/fileData.do 역사 지리]와 [https://www.data.go.kr/data/15053642/fileData.do 오늘의 역사(연표)] 부분만 xml 파일로 공개되어 있으며, 국사 교과서 중 국정 교과서는 빠져있는 상태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9월 4일 (목) 20:57 (KST) == [[색인:철학사전 (1949).pdf]] == {{토론보존|삭제|접기}} '''삭제'''. 공용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저자에 대한 정보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휘문고 교장을 지냈으며 1956년에 55살이었고[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6043000239203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4-30&officeId=00023&pageNo=3&printNo=10403&publishType=00020], 1982년에도 아마? 사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20119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1-19&officeId=00032&pageNo=9&printNo=11171&publishType=00020] [https://www.gangnam.go.kr/board/article/3478/view.do?mid=ID01_0501] [http://www.dni.co.kr/webzine/view/?m_seqno=128&seqno=133]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12821]--[[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29일 (토) 00:00 (KST) ---- {{토론 가져옴|색인토론:철학사전 (1949).pdf#저작권}} 이 책의 저자인 李載壎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렵지만, 1973년에 철학책 '프라토: 철학과 정치'를 낸 사람과 동일한 분 같습니다. 따라서 아직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ZornsLemon|Z.Lemon]] ([[사토:ZornsLemon|토론]]) 2025년 3월 2일 (일) 17:01 (KST) :사실 원본 출처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권리자 불명 저작물"로 공개되어 있어서 좀 애매하긴 했는데 그 정도로 최근일 줄은 몰랐네요.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2일 (일) 20:52 (KST) : [[:c:Commons:Deletion requests/File:철학사전 (1949).pdf|공용 파일에 삭제 신청]]을 넣었습니다. 완료되면 색인 문서도 지우면 될 것 같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12일 (수) 17:53 (KST) {{토론보존끝}} == [[수당연의]] 및 [[색인:슈당연의.djvu]] == {{토론보존|유지 (복구)|접기}} '''복구'''. [[commons:Commons:Undeletion_requests/Archive/2025-03#File:슈당연의.djvu]] 공용에서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또한 추가로 관련된 내용을 발견하여서 링크를 걸어둡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전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著作者는 글쓴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펴낸이 내지 엮은이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https://www.mjmedi.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54] --[[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28일 (금) 23:36 (KST) ---- 본 문서 도입 전 이미 {{틀|저작권 의심}}이 부착되어 있던 점과, 해당 파일이 공용에서 삭제된 점을 들어 발제합니다. ([[:c:Commons:Deletion requests/File:슈당연의.djvu|공용에서의 삭제 토론 문서]]) 한국어 위키문헌이라도 이론적으로 미국 저작권법을 따르는 특성 상, 한국에서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았더라도 로컬에 파일을 다시 올리는 방법으로 우회 가능합니다.<ref group="수당연의">공용은 "미국과 본국에서 자유일 것"을 정책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지, 법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미국에서만 만료되었으면 됩니다. 영어판에서도 미국에서만 만료된 경우 로컬 업로드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f> 만약 괜찮다는 쪽으로 총의가 모이고 미국법 상 저작권이 만료된 것이 확실하면 그 방법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핑|Motoko C. K.}} 공용에서의 삭제 토론 발제자께도 안내 차 알림드립니다. ; 설명 <references group="수당연의" />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12일 (수) 17:39 (KST) :회동서관(匯東書館)을 운영하였던 고유상(高裕相)은 1884년 출생, 1972년 사망한 인물로 보입니다. {{뉴스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404210032920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4-21&officeId=00032&pageNo=5&printNo=11866&publishType=00020|제목=黎明(여명)의 開拓者(개척자)들 (7) 高裕相(고유상)|날짜=1984-04-21|뉴스=경향신문|면=5|경유=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gongu.copyright.or.kr/gongu/authr/authr/viewWrtrPage.do?menuNo=200186&authrSn=12326&wrtFileTy=01 공공누리]에는 만료 저작물 저자로 잘못 올라와 있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12일 (수) 21:41 (KST) :제가 전에 회동서관의 오성긔담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고유상의 [[삼쾌정]]이 올라와 있어서 이분 저작은 당연히 만료인 줄 알고 올렸어요.) 그러다 조사했더니 고유상씨가 1972년 사망으로 밝혀져서 일단은 삭제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조금 불만스러운 점은... 당시 회동서관에서 출판된 서적의 '저작자'라고 돼 있지만 실은 저작자 불명이며 고유상씨는 회동서관의 사장으로 편집자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회동서관에서 나온 책 중 저작자가 알려져 있음에도 저작자가 고유상씨로 돼 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당시 다른 출판사에서도 '저작자' 개념이 잘 서 있지 않아서 이런 관행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를 확증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데 있죠. [[사:ZornsLemon|Z.Lemon]] ([[사토:ZornsLemon|토론]]) 2025년 3월 12일 (수) 22:02 (KST) ::지금 저작권 틀을 계속 정리하고 있는데, 미국에서의 저작권만을 따진다면 {{tlx|PD-anon-US|1918}}을 사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고유상 씨가 저자든 번역자든 편집자든 미국에서는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만약 고유상 씨가 저자라면 {{tlx|PD-US|1972|1918}}입니다. ::그런데 Aspere 님 의견처럼 로컬 위키에서 미국 법만을 따른다는 것은 그냥 각 커뮤니티에서 결정하는 사항인지요?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당연히 한국 법 또한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키문헌에서는 이러한 토론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일본어 위키문헌의 [[:ja:テンプレート:PD-KRGov|틀:PD-KRGov]]를 보니 한국, 일본, 미국에서 PD인 이유 3가지를 모두 기재해뒀더라고요.)--[[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00:13 (KST) :::저도 이 김에 정확히 확인해보려고 여러 프로젝트를 뒤졌는데 굉장한 회색지대라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요약하면 "애매하니 하지 말자"가 제일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일단 재단 이용 약관에는 "적용되는 법은 최소한 미합중국과 캘리포니아주의 법을 포함한다" 정도의 언급이 제일 직접적이고, 나머지는 미국 법만 따르라고 하지는 않으나 미국 법 이외에도 꼭 따라야 한다는 말도 없습니다. 공용의 경우에는 "미국과 원작국에서 자유여야 한다"라는 언급은 적혀 있으나 이 문구의 도입 배경 같은 것은 결국 못 찾았고요. :::영어판에서는 {{틀|PD-EdictGov}}을 이용해서 "미국이 아니어도 미국에서 자유면 다 올려도 된다" 정도의 언급([[:en:Help:Official texts|Help:Official texts]])이 직접적이고, 로컬 업로드가 가능하다는 언급이 토론 문서에 산재되어 있으나 정책 문서에 적어놓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영어판은 관례적으로 이렇게 한 경우가 많아서 그냥 그렇게 밀어붙이는 것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전부 확인해본 건 아니긴 하나) 이외의 언어판에서는 정책에 해당 국가의 법을 지킬 것을 명기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안 정했으니까 해도 된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어 보이는데, 이걸 시작하면 어디까지 올릴 수 있는가에 관해 엄청난 난장판이 날 것도 같고, 또 현실적으로 한국인이 제일 많이 볼 한국어판에서 "한국에서는 자유 사용이 불가능한 텍스트"를 우르르 올리는 것이 적절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02:29 (KST) :::결국 들은 말을 확신에 차서 얘기한 제 잘못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큰일이 나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02:30 (KST) ::::죄송해 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저작권 자체로도 복잡한데 관련 규정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저도 상황을 이해하는데 난처한 처지였습니다. 대충 더 찾아보니 중국어 위키문헌과 스페인어 위키문헌에서는 "중화권 사용자"나 "스페언어 사용 국가"의 법률 등을 고려한다는 표현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사실 엄청 애매모호한 표현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남한 인구의 절반 수준에 달하는 북한 법률은 "인터넷 접속이 사실상 어렵다"라는 이유로 고려하고 있지 않은 처지인데 말입니다. ::::하여튼 이건 긴 얘기이고 파일로 돌아오면, 서지 부분을 찾아 보니 명확하게 "저작겸 발행자 고유상"(著作兼 發行者 高裕相)이라고 쓰여 있어 번역자를 고유상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페이지:삼쾌정 (회동서관, 1921).djvu/78]]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네요.--[[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06:45 (KST) :::::서지에 쓰여 있다고 해서 실제 저작자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신유복전]]은 광문서시에서 1917년 발간한 것이 우리 문헌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니다. 회동서관에서도 신류복적을 발간한 적이 있는데, 한자가 없다는 것만 빼면 거의 동일합니다. 그런데 회동서관본 신류복전의 서지를 보면 저작 겸 발행자가 고유상으로 돼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무명 저작물의 '편집자'에 불과하지만 '저작자'로 기재한 경우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가 좀 있는 듯하고, 당시 어느 출판사를 막론하고 저작권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은 탓에 이런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개별 작품에 대해 실제 저작 여부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문제긴 하죠. [[사:ZornsLemon|Z.Lemon]] ([[사토:ZornsLemon|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13:02 (KST) :::::예를 들어 회동서관에서 발행한 '(女의鬼)강명화전'을 보면 '이해관'이라는 사람이 저작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女의鬼)강명화실기'의 저자 '이해조'와 동일 인물이지요. 하지만 이 책의 서지를 보면 저작겸 발행자가 고유상 씨로 돼 있습니다. [[사:ZornsLemon|Z.Lemon]] ([[사토:ZornsLemon|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13:09 (KST) ::::::저도 해당 인물이 당시 나온 모든 글을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0년전 책에 쓰여있는 내용을 "저작자"라고 되어 있다는 이유로 오늘날의 시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언급한 문헌이나 논문이 있나 찾아보니 [https://www.nl.go.kr/NL/contents/N20103000000.do?schM=contView&schOpt1=CA0000000022&schOpt2=CA0000000024&schOpt3=05&schIdSub=CO0000232607 국립중앙도서관]의 설명 중에 관련된 내용이 있네요. "그러나 서지에는, 저작 겸 발행자가 출판사 회동서관의 대표인 고유상高裕相으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출판사의 대표가 저작자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13일 (목) 21:26 (KST) :::::::한국저작권위원회로부터도 동일한 답변을 받았습니다. 실제 저자가 아닌 단순 출판인이므로 실제 저자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맞으니 만료저작물이 맞다고 합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19일 (수) 18:33 (KST) ::::::::와. 직접 확인까지 하셨네요. 그럼 전에 올렸던 오성기담 다시 올리는 걸 고려해야겠네요. [[사:ZornsLemon|Z.Lemon]] ([[사토:ZornsLemon|토론]]) 2025년 3월 19일 (수) 19:35 (KST) :::::::::그전에 가능하다면 다른 사용자분들 의견도 좀 더 들어보고, 이견이 없다면 공용에서 해당 파일에 대해 [[:commons:Commons:Undeletion requests|복구 토론]]을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공용에서 거부가 된다면 한국어 위키문헌에서만 로컬로 올리는 방안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작권위원회의 답변은 이메일로 오지 않고 개인적으로만 확인 가능하여서 [[commons:Commons:Volunteer_Response_Team/ko|VRT]] 등에 증거를 제시할 수 없습니다. 영어로 외국 사용자들을 설득을 못하면 공용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19일 (수) 23:04 (KST) ::::::::::제 생각에도 복구에 문제가 없을 것습니다. 또한 로컬에 업로드하는 방안도 좋은 것 같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3월 20일 (목) 22:43 (KST) [[commons:Commons:Undeletion requests/Current requests#File:슈당연의.djvu]] 복구 토론을 열었습니다. 한국어로 의견을 남기셔도 좋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3월 22일 (토) 01:34 (KST) {{토론보존끝}} == [[대비계획 세부자료]] == {{토론보존|삭제|접기}} '''삭제'''. 공용에서 삭제되었습니다. 2087년이 지나면 복구 가능합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10월 15일 (수) 23:12 (KST) ---- 국군기무사령부의 유출된 내부 문서일 뿐이지,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7조에서 말하는 보호받지 못하는 저작물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페이지: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 대비계획 세부자료.pdf/67|붙임 4]]에 있는 훈령 예시 또한 실제 훈령이 아니었으므로 제7조에 해당한다고 봐야할 지 의문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6월 2일 (월) 20:09 (KST) :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한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유출"된 문서이다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 저작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래도 별개로 나름 역사적 가치도 있고 이걸 보고 "저작권 침해"라고 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하는지라 좀 아쉽긴 하네요...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6월 3일 (화) 14:41 (KST) :: [[commons:Commons:Deletion requests/File: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 대비계획 세부자료.pdf]]--[[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19:12 (KST) {{토론보존끝}} == [[색인:중등 인류교과서.pdf]] == {{토론보존|삭제|접기}} '''삭제'''. 공용에서 삭제되었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10월 15일 (수) 23:12 (KST) ---- 윤익병(尹益炳)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아래 다섯 서적을 발행한 것 이외에는 정보가 없네요. * 중등생리실험, 수문관, ? * 중등 인류교과서, 수문관, ? [https://www.hbem.or.kr/prog/relic/kor/sub04_01_01/possessionGoods.do] * 동물해부학, 동지사 1949 * 중등 인류교과서, 문화당 1947.6 * 중등동물실험, 수문관 1950.3 --[[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6월 11일 (수) 19:31 (KST) :개인적인 의견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보가 없다고 무조건 최악을 가정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극단적으로 "죽었다는 증거가 없으면 전부 살았다고 가정해야 한다"로 시작하면 몇천 년 전 사람들도 저작권이 살아 있는 게 되어버리니까요. (상식적으로, 유고작이 아닌 이상, 책을 내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하므로) 책을 낸 다음 날 사망했다고 가정하면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일단 등재하되, 나중에 사망 날짜가 밝혀져 저작권이 살아있다는 게 확실해지면 그 때 지워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7월 15일 (화) 10:28 (KST) ::그렇긴 하지만, 공용에서는 현재 저자의 사망일을 알 수 없는 경우 창작일로부터 120년을 마진으로 두고 있습니다. [[commons:Template:PD-old-assumed]]--[[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7월 15일 (화) 23:16 (KST) :::분명히 일리 있는 말씀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저것은 공용의 총의인 만큼, 여기에서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깔끔한 건 역시 여기에서 총의를 모아서 규정화해버리는 것인데, 과연 얼마나 가능할지... (유사하게 저자 정보가 파악이 안 되는 문헌의 경우 일일이 판단하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규정을 마련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7월 16일 (수) 02:53 (KST) ::::일단은 공용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파일이 맞으므로 삭제 신청은 진행하겠습니다. [[commons:Commons:Deletion requests/File:CNTS-00056911451 중등동물실험. 2- 윤익병 지음.pdf]]--[[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19:42 (KST) {{토론보존끝}} == [[찬송가]], [[찬송가/샘물과 같은 보혈은]] == {{토론보존|삭제|접기}} '''삭제'''. 가사는 퍼블릭 도메인이지만 악보는 저작권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19:45 (KST) ----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 190번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당 문서는 1983년에 나온 통일찬송가를 기반으로 한 것 같은데, 한국어판이 통일찬송가에서 처음 번안되어서 수록된 것이라면 여전히 저작권이 존재합니다. 별다른 출처도 없고 이전에 언제 처음 번안된 것인지 모르겠네요.--[[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7월 12일 (토) 17:52 (KST) :{{삭제|특정판}} 일단 그 찬송가 "자체"는 [[신편찬송가/찬송가#뎨칠십이|더 예전의 문헌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현재 문서가 통일찬송가를 기반으로 한 것도 맞는 만큼, 아에 넘겨주기나 판본(동음이의) 문서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위 문서로 존재하는 형태도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7월 15일 (화) 11:32 (KST) ::덧붙여서 [[찬송가]] 문서는 범위도 너무 넓고 ("찬송가"라고 칭할 수 있는 문헌이 한두개가 아니니까요) 내용도 없는 만큼, 과감히 날려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동음이의 문서로 만드는 것도 좋겠지만 빨간 링크 투성이가 될 것 같고...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7월 15일 (화) 11:36 (KST) {{토론보존끝}} == [[색인:최신중등화학 상.pdf]] / [[색인:최신중등화학 하.pdf]] == {{토론보존|삭제|접기}} '''삭제'''. [[commons:Commons:Deletion requests/File:최신중등화학 상.pdf|공용]]에서 삭제되었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9월 26일 (금) 21:24 (KST) ---- [[페이지:최신중등화학 상.pdf/163]]에 아래와 같이 저자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인용문|著者略傳 / 일찍이 京城藥學專門學校를 나온後, 京城藥學專門學校 助手, 세브란스醫專病院 藥局長, 傲新中學敎員, 서울大學校藥學大學 敎授등을 歷任, 現在 延禧 大學敎授, 藥學大學及 梨花大學講師로 있음. 著書. 分析化學의 原理. 受驗化學. 저자약전 / 일찍이 경성약학전문학교를 나온후, 경성약학전문학교 조수, 세브란스의전병원 약국장, 오신중학교원, 서울대학교약학대학 교수등을 역임, 현재 연희 대학교수, 약학대학 및 이화대학강사로 있음. 저서. 분석화학의 원리. 수험화학.}}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213439/1/36.1953%EB%85%84%20%EC%95%BD%EB%8C%80%20%EC%9E%85%ED%95%99%EC%83%9D%EC%9D%98%20%ED%95%99%EC%B0%BD%EC%8B%9C%EC%A0%88.pdf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회보 2020, 제16호]에 따르면 이길상은 경성약전 6회 졸업생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올라와있는 다른 저서인 최신 고등 화학. 상(1967)의 저자 소개도 아래와 같습니다. {{인용문|【著者略歷】 京城藥學專門學校卒業, 同校助手, 세브란스醫專病院 藥局長, 傲新中學校教師, 서울大學校藥學大學敎授歷任, 서울大學校, 藥學大學, 梨花女子大學校講師, 西獨에 留學硏究. 現職 延世大理工大學長. 著書:「分析化學의 原理」.「受驗化學」外多數 有함. 【저자 약력】 경성약학전문학교 졸업, 동교 조수, 세브란스의전병원 약국장, 덕신중학교 교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역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서독'''에 유학 연구. 현직 '''연세대 이공대학장'''. 저서: 「분석화학의 원리」, 「수험화학」 외 다수 있음.}} [https://www.jh1004.com/malls.go?pCode=10412000008 성서에서 본 식생활과 건강법 - 건강시리즈 1 (1994, 기독교문사)]라는 책의 저자도 이길상인데 소개가 아래와 같습니다. {{인용문|이길상 교수는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오번대학 대학원을 수료, '''서독''' 하이델베르크대학과 스웨덴 옛테보르히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경도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이화여자 대학교 약학대학,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이공대학장''', 연세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현재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명예교수이며, 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 원로장로로 있다. }} 위 저서와 동일인물로 보이며, 따라서 적어도 1994년까지 생존 인물이므로 대한민국에서 저작권이 여전히 존재합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7월 12일 (토) 23:13 (KST) :{{삭제}} 제가 올린 파일이지만 그 정도로 저작권이 오래 살아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5년 7월 15일 (화) 10:31 (KST) ::[[commons:Commons:Deletion requests/File:최신중등화학 상.pdf]]--[[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19:50 (KST) {{토론보존끝}} == [[색인:하믈레트 현철 1920.pdf]] == {{토론보존|삭제|접기}} '''삭제'''. [[commons:Commons:Deletion requests/File:하믈레트 현철 1920.pdf|공용]]에서 삭제되었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9월 26일 (금) 21:25 (KST) ---- 번역자인 [[w:현철 (1891년)|현철]]이 1965년에 사망하였으므로 공유마당의 설명과 상관없이 대한민국에서 저작권이 1965+70=2035년까지 보호됩니다. 미국에서는 1923년에 공표된 작품이므로 [[틀:PD-US]]에 따라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공용에는 CC로 잘못 기재되어 있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7월 19일 (토) 10:48 (KST) :[[commons:Commons:Deletion requests/File:하믈레트 현철 1920.pdf]]--[[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20:02 (KST) {{토론보존끝}} == English Translations of Constitution/Constitutional Court and KLRI translations of Korean law/Supreme Court (헌재/헌법/법규/대법원 번역물) == {{토론보존|(해당 없음)|접기}} '''해당 없음'''. [[:en:Wikisource:Copyright_discussions/Archives/2025#h-2004HunMa554_Relocation_of_the_Capital_City-20250727174600|영문 위키문헌]]에서 유지로 결정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영문 번역은 퍼블릭 도메인입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5년 8월 25일 (월) 20:04 (KST) ---- Hello Korean Wikisourcers, I've been involved in finding out the Copyright status of Constitutional Court Translations. It is difficult for me to deal with this alone, so I am wondering if there is a way to do this together. [https://en.wikisource.org/wiki/Wikisource:Copyright_discussions#2004HunMa554_Relocation_of_the_Capital_City] here is the discussion thread in en. It is very likely Constitutional Court translations are under 24-2, but I think we'll have to bite the bullet and find out about the copyright status of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Korean Constitution on Wikisource soon. Luckily, I emailed [[w:ko:박경신 (1971년)|Prof K.S. Park]] and he stated that he advised the Constitutional Court on the translation 25 years ago so it was done by the Court itself. I really don't want English Wikisource to not have an English translation of the Korean Constitution so any help would be appreciated. Sorry for the English. Special thanks to [[사:Revi C.]] and [[사:Namoroka]]. [[사:Reepy1|Reepy1]] ([[사토:Reepy1|토론]]) 2025년 8월 3일 (일) 19:48 (KST) {{토론보존끝}} == [[변호사업무광고규정]] == {{토론보존|유지|접기}} '''유지'''. 창작성의 기준을 쓸데없이 너무 높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https://www.lawmeca.com/web/pds/columnDetail.do?seq=476] --[[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6년 4월 12일 (일) 02:11 (KST) ---- * [[변호사업무광고규정]] * [[변호사연수규칙]] * [[변호사윤리장전]] * [[변호사징계규칙]] * [[인터넷등을이용한변호사업무광고기준]] [https://koreanbar.or.kr/pages/board/law_list.asp?category=2 출처 1], [https://koreanbar.or.kr/pages/board/law_list.asp?category=3 출처 2] / 단체에서 작성한 내부 문서로 창작성이 없다고 보기 어렵습니다.--[[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6년 4월 6일 (월) 22:44 (KST) :{{의견}} 이게 얼마나 관련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대한변호사협회 회칙]] 문서의 삭제와 관련하여 [[사용자토론:LR0725#대한변호사협회 회칙 등|저작권위원회에서의 답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 감안하면 단순히 '단체가 만들었다' 이상의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6년 4월 7일 (화) 23:33 (KST) ::해당 문서도 넣었어야 했는데 누락되었네요. 그런 토론이 있었는 줄 몰랐습니다. 저작권 토론을 시작한 것은 [[틀:저작권 의심]]에 적힌 내용에 따라 저작권에 부합하는지 알기 어렵기 떄문에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관련 근거가 어느정도 있는 것 같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으면 유지해야겠네요.--[[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6년 4월 8일 (수) 11:18 (KST) {{토론보존끝}} == [[황산대첩비/해석]] == {{토론보존|유지|접기}} 제가 발제하긴 했지만 유지로 종결합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6년 8월 18일 (화) 01:16 (KST) 머리말 틀에 <code>황산대첩비 - 국가유산 지식이음</code>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 [https://portal.nrich.go.kr/kor/ksmPandokView.do?ksm_idx=1699&pan_idx1=1178 해당 링크]가 출처로 보입니다. 내용도 동일합니다. 다만 해석자가 별도 명의로 기재되어 있는 점에서 저작권을 포기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고, [https://www.nrich.go.kr/kor/copyright.do?menuIdx=888 동 페이지의 저작권 정책]에도 '자유이용이 가능한 자료는 공공누리를 부착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공공누리 표시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 저작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6년 7월 12일 (일) 03:42 (KST) :(덧붙입니다) 다른 문헌을 찾다가 본 건데,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1787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해석한 경우는 저자를 분명하게 '국립문화유산연구원'으로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 문헌의 저작권자는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아니라 '이우태'라고 하는 개인으로 보입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6년 7월 12일 (일) 03:47 (KST) :{{핑|Qkqhrhkdtn}} 문서 생성자분께 호출드립니다. [[사:Aspere|Aspere]] ([[사토:Aspere|토론]]) 2026년 7월 12일 (일) 03:48 (KST) ::이우태라는 이름을 명기한 것은 저작권자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판독자를 명기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국가유산지식이음 사이트에서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1699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명기해 놓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따랐습니다. [[사:Qkqhrhkdtn|Qkqhrhkdtn]] ([[사토:Qkqhrhkdtn|토론]]) 2026년 7월 12일 (일) 06:17 (KST) :::Qkqhrhkdtn님이 알려주신 링크 및 [https://portal.nrich.go.kr/streamdocs/view/sd;streamdocsId=VLHUUFNyT3wdYNr1GQSoyipTHfGweWXx8ypCFU1Fjk0;code=371;type=0;currentPage= 이 링크]를 참고하면 사진을 포함하여 원문, 해석문 모두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되는 것 같습니다. 제1유형이 아닌 자료는 명확히 다른 유형으로 표시 중입니다. [https://portal.nrich.go.kr/kor/materialView.do?menuIdx=871&idx=2095&kind=6 예시 1], [https://portal.nrich.go.kr/kor/mireukInfoUsrView.do?menuIdx=1014&catea=A&cateb=A2 예시 2].--[[사:Namoroka|Namoroka]] ([[사토:Namoroka|토론]]) 2026년 7월 13일 (월) 15:46 (KST) {{토론보존끝}} 7vbmz60uamfy8ly4st6kk9bmxa0j7cs 페이지:졔환공.djvu/1 250 101197 458014 450686 2026-08-17T17:07:20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1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옛한글/시작}}</noinclude>{{더크게|{{자간|1em|졔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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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040 450704 2026-08-17T17:12:31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4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옛한글/시작}} {{왼쪽 여백/s|1em}}</noinclude>시속소ㅣ먹이는류가아니오당셰의쓸데잇는ᄌᆡ목이오니쥬공은맛당히머물너셔도음을ᄉᆞᆷ으소셔만일바리ᄉᆞ다른나라의소용이되오면뉘우치심을밋치지못ᄒᆞ시리이다ᄒᆞ엿거늘 {{왼쪽 여백/e}} 환공왈그ᄃᆡ임의즁보의셔신을맛고엇지일즉이과인의게올니지아니ᄒᆞ얏ᄂᆞ뇨녕쳑이ᄃᆡ왈신은듯ᄉᆞ오니어진인군은ᄉᆞᄅᆞᆷ을ᄐᆡᆨᄒᆞ야도음을삼고어진신하도ᄯᅩᄒᆞᆫ어진인군을ᄐᆡᆨᄒᆞ야셤긴다ᄒᆞ오니쥬공이만일고든말ᄉᆞᆷ을믜워ᄒᆞ시고아쳠ᄒᆞᆷ을됴와ᄒᆞ샤무례ᄒᆞ신닐로신의게더ᄒᆞ고져ᄒᆞ시오면신이차라히죽ᄉᆞ올지언졍상국의글월을올니지아니ᄒᆞ오려ᄒᆞ얏ᄂᆞ이다ᄒᆞ거ᄂᆞᆯ환공이대열ᄒᆞ야뒤슈ᄅᆡ에실코가다가그날져녁에한곳에니르러류진ᄒᆞ고드듸여불을혀고의관을차짐을급ᄒᆞ게ᄒᆞ니시인쵸ㅣᄀᆞᆯ오ᄃᆡ쥬공이의관을차지시오니녕쳑을벼살식히고져ᄒᆞ시ᄂᆞ닛가환공왈그러ᄒᆞ다시인쵸왈위국의셔졔국이뭐지아니ᄒᆞ오니ᄉᆞᄅᆞᆷ을보ᄂᆡ여탐지ᄒᆞ야과연그ᄉᆞᄅᆞᆷ이어질거든벼살식히심이늣지아니ᄒᆞᆯ가ᄒᆞᄂᆞ이다ᄒᆞ거ᄂᆞᆯ환공왈이ᄉᆞᄅᆞᆷ은활달ᄒᆞᆫᄌᆡ조ㅣ라져근졀ᄀᆡ에거리ᄭᅵ지아니ᄒᆞ리니위국에잇슬ᄯᆡ에셜혹과실이잇슬지라도그허물을탐지ᄒᆞ야벼살식히면빗ᄂᆞ지못ᄒᆞ고바리면앗가운닐이라ᄒᆞ고즉시촉불아ᄅᆡ에셔녕쳑을ᄇᆡᄒᆞ야대부를삼아셔관즁으로더부러한가지국ᄉᆞ를의론ᄒᆞ게ᄒᆞ더라ᄎᆞ셜환공의군ᄉᆞㅣ송국디경에다다르니진션공저구와조장공셕고ㅣ몬져이르고그후에쥬단ᄌᆞ의군ᄉᆞㅣᄯᅩᄒᆞᆫ이르러셔례필후에송국칠닐을상의ᄒᆞ더니녕쳑이쥬왈명공이텬ᄌᆞ의명령을밧드러여러나라졔후를모듸여위염으로송국을익이옴이덕으{{upe}}<noinclude><references/> {{옛한글/끝}}</noinclude> 4pk0gtv7kv9u397s4q089844yvtqvh0 황산대첩비/해석 0 105358 458008 456420 2026-08-17T16:16:31Z Aspere 5453 [[Special:Contributions/Aspere|Aspere]] ([[User talk:Aspere|토론]])의 [[Special:Diff/456420|456420]] 판 편집을 되돌림: 저작권 토론에 따름 458008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 황산대첩비 |저자 = [[저자:김귀영|김귀영]] |역자 = 이우태 |부제 = |이전 = [[황산대첩비]] |다음 = |설명 = 황산대첩비 - 국가유산 지식이음 }} == 해석문 ==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겸홍문관대제학(兼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知成均館)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臣) 김귀영(金貴榮)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br> 봉헌대부(奉憲大夫) 여성군(礪城君) 신(臣) 송인(宋寅)이 왕명을 받들어 씀.</br> 가선대봉(嘉善大奉) 호조참판(戶曹叅判)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 신(臣) 남응운(南應雲)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만력(萬曆) 3(선조 8, 1575년)년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박계현(朴啓賢)이 보고하기를 “운봉현(雲峰縣)의 동쪽 16리 되는 곳에 황산(荒山)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곳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 땅 이름도 엉뚱하게 바뀌고 길도 잘 알 수 없어 정확한 지점을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수 천 수 백 년 후에 높은 산은 밋밋해지고 낮은 곳은 잠기게 되어 갈수록 더 희미해지면 아무도 그 장소를 모르게 될까보아 심히 두렵습니다. 원컨대 큰 돌 하나를 세워 이를 표시하기를 고을의 늙은이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청에 하소연하니,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써 감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삼가 아룁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그 도(道)에서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고, 이어 신(臣) 귀영(貴榮)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셨다.</br> 신이 명을 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니, 고려말(高麗末)에 나라는 갈수록 위태로워지는데 섬 오랑캐들이 그 틈을 타서 성읍(城邑)을 도륙내고 불싸지르니, 죽은 시체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곳마다 유혈이 낭자하여 모든 산천이 쓸쓸하였다. 함양(咸陽) 사람을 모두 죽이고 운봉(雲峰)을 불싸지르고 인월(引月)에 주둔해 있으면서, 말을 배불리 먹여 북쪽으로 진격한다고 떠드니 나라 안팎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br> 태조께서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荒山)으로 치달려가 정봉(鼎峰)에 올라가서 형편을 살펴보고는, 날랜 군사들을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며 적을 공격하여 10배가 넘는 적을 모두 무찔렀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 모두 소탕하여 버렸다. 그 후 200여 년 간 바다에 아무런 근심이 없고 영남(嶺南)과 호남(湖南) 지방이 편안한 것은 모두 이 때의 전공(戰功)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남쪽의 백성들이 모두 진심으로 우러러 추모(追募)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고 받들어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이다.</br> 아아. 우리 성조(聖朝)의 크고도 높은 공열(功烈)은 나라의 역사에 밝게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두로 미쳐서, 천지에 가득 차고 고금(古今)에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이 산처럼 영원할 것이니, 굳이 이러한 사정을 돌에 새겨 형용하지 않더라도 후세에 영원토록 전할 수 있을 것이다.</br> 그러나 남쪽의 산들 가운데 높고도 높이 우뚝 솟은 것이 무려 수 백에 이르는데 우리 성조(聖祖)의 커다란 공훈은 이 봉우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가히 하늘이 만든 높은 산과 그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하겠으며, 그 높고 험준한 산세는 영원토록 우러러 보는 바가 될 것이다.</br> 아아, 옛날에 주나라의 선왕(宣王)이 기양(岐陽)으로 사냥 갔을 때에 따르는 수레와 군사들의 무리는 간소하게 하였으나 석고(石鼓)에 그 공적을 새겼으며, 회서(淮西) 지방을 평정하여 변경 지역을 안정시킴에 여러 신하들이 황제가 울타리를 깨끗이 한 공적을 기록하기를 청하므로 그 크고도 훌륭한 공적이 영원토록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하니 좋은 돌에 글자를 새겨 거북과 용으로 장식한 비각에 안치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고 조아리게 한다면, 또한 세상이 바뀌어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br> 신 귀영(貴榮)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칭송의 노래를 지어 바치노라. 고려의 운명이 다하여 간악하고 사특한 무리들로 인해 안에서부터 무너지자,</br> 바깥의 적을 불러들인 꼴이 되어 섬나라 오랑캐들이 갑자기 몰려왔네.</br> 세 번 씩이나 피해를 입어 온 나라가 어육(魚肉) 같은 신세가 되어버리니,</br> 만백성의 뼈가 들판에 늘어져 있어 그 참상(慘狀)이 천리(千里)나 이어졌네.</br> 그 어지러움을 바로 잡으려 우리 태조께서 장군의 도끼를 받으시고,</br> 군대의 규율을 세우시니 그 위세가 천둥처럼 떨쳤네.</br> 정성이 하늘에 미침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니,</br> 승전(勝戰)할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이니 이는 하늘도 함께 그들을 미워한 것이다.</br> 땅도 그 이로움을 빌려주니 황산(荒山)의 이로움은 바로 땅의 신이 주신 것이라,</br> 이에 한 번 크게 노하여 그 무위(武威)를 크게 떨쳤네.</br> 우리 대장기 흔들리고 북소리 울리자 흉악한 무리들은 어린 새새끼처럼 버둥거리며,</br> 호랑이에게 반항해 보려 하였지만 그저 스스로의 목숨만 갖다 바칠 뿐.</br> 활을 쏘아 정수리를 맞히자 투구가 잠시 옆으로 기울었는데,</br> 이미 날카로운 화살이 꿰뚫자 적들은 벌떼처럼 흩어지고 개미처럼 뒤엉켰네.</br> 넋을 잃고 울부짖는 적의 병사들 일만 마리 소가 골짜기에 가득 찬 듯하니,</br>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산등성이에 올라 사방으로 공격해 들어가네.</br> 누가 감히 맞설 수 있으리오, 우뢰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부딪히는데,</br> 대나무처럼 쪼개지고 기와처럼 부서져서 살과 뇌(腦)가 낭자하게 흩어지네.</br> 사람과 하늘이 힘을 합쳐 토벌하니 하루아침에 재빠르게도 소탕하였네.</br> 삼한(三韓) 땅을 새로이 만드시니 면모를 일신하고 지난 잘못을 뉘우치게 하셨다네.</br> 그 업적 바다까지 이어져 이백 여 년 간을 편안히 지내니,</br> 남쪽 백성들 밭 갈고 우물 파서 배부르고 등따습게 부모 자식 모시고 길렀다네.</br> 그 모두가 당시의 업적의 결과이니 이에 추모하고 이에 축원하며,</br> 가슴과 배 속에 새겨두니 세월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br> 명나라 만력(萬曆) 5년에 돌을 캐어 기록하여 산의 기슭에 세우니</br> 기울어지거나 벗겨짐이 없이 영원토록 변치 않음이 이 돌과 같을 진저.</br> 만력(萬曆) 5년 정축(선조 10, 1577년) 8월 일에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운봉현감(行雲峰縣監) 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신(臣) 박광옥(朴光玉)이 세움. == 저작권 == {{번역 저작권 |원문 = {{PD-old-100}} |번역 = {{GFDL/CC-BY-SA-4.0}} }} [[분류:1577년 작성]] [[분류:금석문]] f8e7tozoc0zumtztvrq7x4mb1zyu257 페이지:졔환공.djvu/27 250 105864 458041 401073 2026-08-17T17:12:39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4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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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이〮어나〮 브ᅀᅳ면〮 즉〮재〮 ᄭᆡ〮ᄂᆞ〮니라〮}}又方卒中風不省人事痰壅用生白礬二錢爲末生薑自然汁調幹開口灌下化痰或吐卽醒{{*|ᄯᅩ〮 믄득〮 中듀ᇰ風보ᇰ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모ᄅᆞ〮고〮 痰땀이〮마켜〮ᄭᅥ든 生ᄉᆡᇰ白ᄈᆡᆨ〮礬뻔〮 두〯 돈〯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에〮 프〮러〮 입〮버〯리〮혀고〮 브ᅀᅳ면〮 痰땀이〮슬〮어나 시혹 吐통ᄒᆞ면〮 곧〮 ᄭᆡ〮ᄂᆞ〮니라〮}} 簡易方救急稀涎散治中風忽然昏若醉形體昏悶四肢不收涎潮於上氣閉不通光明白礬{{*|一兩}}猪牙皂角{{*|四介肥實幷不蛀者去黑皮}}右細末硏勻輕者半錢匕重者三錢匕溫水調灌下不大嘔吐但微微冷涎出一二升便得醒醒次緩而調理不可大吐{{*|救구ᇢ急급稀힁涎ᄊᆑᆫ散산〮ᄋᆞᆫ〮 中듀ᇰ〮風보ᇰᄒᆞ〮야〮 忽호ᇙ然ᅀᅧᆫ히 어〮즐ᄒᆞ〮야〮 醉ᄌᆔᆼᄒᆞᆫᄃᆞᆺ〮ᄒᆞ며〮 모〮미 어〮즐〮코〮닶〮가와〮 네〯 활개ᄅᆞᆯ〮거두〮디〮 몯〯ᄒᆞ며〮더푸〮미〮 모ᄀᆞ〮로〮 올아〮氣킝〮分분이 마가〮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티〮ᄂᆞ니〮 光과ᇰ明며ᇰ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과〮 猪뎡牙ᅌᅡᆼ皂조ᇢ〯角각〮 네〯나〯치〮 ᄉᆞᆯ〮지고〮 염글오〮 좀〮 먹디〮 아니〮ᄒᆞ〮닐〮 거믄〮 거플밧겨〮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輕켜ᇰᄒᆞ니〮란〮 半반〮 돈〯이〮오〮 重듀ᇰ〯ᄒᆞ니〮란〮 세〯 돈〯ᄋᆞᆯ〮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ᅥ〮 너무吐통〮티〮 아니〮케코〮 오직〮 젹젹 ᄎᆞᆫ추〯미〮 ᄒᆞᆫ두〯 되〮만〮 나면〮 곧〮ᄉᆞᆲᄉᆞᆲᄒᆞ〮ᄂᆞ〮니라〮 {{SIC|버|바}}거 날회야〮 調뚀ᇢ理링〯 ᄒᆞ고〮 너무 吐통〮호〮미〮 몯〯ᄒᆞ리〮라〮}} 經驗良方破棺散治中風牙已緊無門下藥天南星末{{*|半錢}}白龍腦末一字右合硏勻頻擦令熱牙自開{{*|破팡〮棺관〮散산〮 은〮 中듀ᇰ〮風보ᇰᄒᆞ〮야〮 니〮ᄒᆞ마〮 구더〮 藥약〮머귤〮 門몬업〯스닐〮 고티〮ᄂᆞ니〮 天텬南남星셔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白ᄈᆡᆨ〮龍료ᇰ腦노ᇢ〯 ㅅ ᄀᆞᄅᆞ 一ᅙᅵᇙ 字ᄍᆞᆼ〮와〮ᄅᆞᆯ〮 뫼화〮 ᄀᆞ〮라 골아〮 ᄌᆞ조〮ᄲᅵ븨〮여〮 덥〯게〮 ᄒᆞ면〮 니〮 절로〮 열〯리라〮}} 葛氏備急方中風角弓反張四肢不收煩亂欲死者 淸酒{{*|五升}}雞白屎{{*|一升}}右擣篩合和揚之千遍乃飮之大人服一升日三少小服五合差{{*|ᄇᆞᄅᆞᆷ마자〮왜지그〯라〮 네〯 활〮개ᄅᆞᆯ〮 거두〮디〮 몯〯ᄒᆞ〮야〮어〮즈〮러워〮 죽ᄂᆞ닐〮 淸쳐ᇰ酒쥬ᇢ〯 닷 되〮와〮ᄃᆞᆯᄀᆡ〮 ᄒᆡᆫ〮 ᄯᅩᇰ ᄒᆞᆫ 되〮와〮ᄅᆞᆯ〮디코〮 {{SIC|처〮|치〮}} 프〮러〮 一ᅙᅵᇙ〮千쳔 버늘〮저ᅀᅥ〮 머구〮ᄃᆡ〮 얼〯우ᄂᆞᆫ〮 ᄒᆞᆫ 되〮옴〮 ᄒᆞᄅᆞ 세〯 번 먹고〮져므〮닌〮 닷호ᄇᆞᆯ〮 머그〮면〮 됴〯ᄒᆞ리〮라〮}} ==中寒第二<sub>凍瘡凍死附</sub>== 和劑方姜附湯 乾薑{{*|一兩}}附子{{*|生去皮臍細切一枚}}右㕮咀每服三錢水一盞半煎七分食前溫服{{*|姜가ᇰ附뿡〮湯타ᇰ 乾간薑가ᇰ ᄒᆞᆫ 兩랴ᇰ과附뿡〮子ᄌᆞᆼ〯 ᄂᆞᄅᆞᆯ〮 것 과〮ᄇᆡᆺ보ᄀᆞᆯ〮 앗〯고〮細솅切쳐ᇙ〮호〮니〮 ᄒᆞᆫ 낫〯과〮ᄅ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돈〯애〮 믈〮 ᄒᆞᆫ 盞잔〮 半반〮ᄋᆞ〮로〮 닐굽〮 分분ᄋᆞᆯ〮글혀〮 食씩〮前쪈에〮ᄃᆞᄉᆞ닐〮 머그〮라〮}}又方理中湯治五臟中寒口噤失音四肢强直兼治胃脘停痰冷氣刺痛 人蔘 乾薑 白朮 甘草{{*|各等分}}右㕮咀每服四錢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溫服{{*|ᄯᅩ〮理링〯中듀ᇰ湯탕 은五ᅌᅩᆼ〯臟짜ᇰ〯 이〮 中듀ᇰ〮寒ᅘᅡᆫᄒᆞ〮야〮 입〮 마고〮므러〮 소리〮 몯〯ᄒᆞ며〮 四ᄉᆞᆼ〮肢징세〯오〮 고ᄃᆞ〮닐〮 고티〮며〮 ᄯᅩ〮胃ᅌᅱᆼ〮脘ᅌᅪᆫ〮 애〮 痰땀이〯담겨〮 胃ᅌᅱᆼ〮脘ᅌᅪᆫ〮ᄋᆞᆫ〮가ᄉᆞ〮미라〮 冷ᄅᆡᇰ〯ᄒᆞᆫ 氣킝〮分분이〮디ᄅᆞ저겨〮 알ᄑᆞ닐〮 고티〮ᄂᆞ〮니〮人ᅀᅵᆫ蔘ᄉᆞᆷ 과〮 乾간薑가ᇰ과〮白ᄈᆡᆨ〮朮뜌ᇙ〮 와〮 甘감草초ᇢ〯ᄅᆞᆯ〮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네〯 돈〯애〮 믈〮 ᄒᆞᆫ 큰〮 盞잔〮으〮로〮 글혀〮 六륙分분에〮 니르〮거든〮즛의 앗〯고〮 ᄃᆞᄉᆞ닐〮 머그〮라}} 凍瘡聖惠方治凍耳成瘡兎腦髓取塗之{{*|귀〮어러〮 허〯닐〮 고툐〮ᄃᆡ〮 톳〮긔 머릿〮 骨고ᇙ〮髓ᄉᆔᆼ〯 를〮내〯야〮 ᄇᆞᄅᆞ라〮}}又方杏仁{{*|一斤湯浸去皮}}壓取油塗之{{*|ᄯᅩ〮杏ᅘᆡᇰ〯仁ᅀᅵᆫ ᄒᆞᆫ 斤근을〮 더운〮 므〮레ᄃᆞ〮마 것〮밧기〮고〮 지즐〮워〮 기름〮 내〯야〮 ᄇᆞᄅᆞ라〮}} 聖濟緫錄治手足凍瘡腫爛赤小豆半升煮汁熱浸洗瘡日三五次{{*|손〮밠〮언〯 瘡차ᇰ 이〮브ᅀᅳ며〮 헤여〮디닐〮 고툐〮ᄃᆡ〮 블근〮 ᄑᆞᆺ〮 半반〮 되〮ᄉᆞᆯᄆᆞᆫ〮 므〮를〮 덥〯게〮 ᄒᆞ〮야〮 瘡차ᇰᄋᆞᆯ〮 ᄃᆞ〮마〮시수〮ᄃᆡ〮 ᄒᆞᄅᆞ 세〯버니〮나〮 다ᄉᆞᆺ〮 버니〮나〮 ᄒᆞ라〮}} 治寒凍足跟開裂血出疼痛牛皮膠燒細硏爲末以唾和塗之{{*|어러〮밠〮츠〮기 ᄠᅥ〮디〮어〮 피〮나고알히〮ᄂᆞ닐〮 고툐〮ᄃᆡ〮ᄉᆈ〯 갓프〮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추〮메 ᄆᆞ라〮 ᄇᆞᄅᆞ라〮}} 百一選方治凍瘡黃蘗燒存性細硏以雞子淸調傅破者乾摻神妙{{*|언〮 瘡차ᇰᄋᆞᆯ〮 고툐〮ᄃᆡ〮黃ᅘᅪᇰ蘗ᄇᆡᆨ〮 을〮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ᄃᆞᆯᄀᆡ〮앐〮 ᄆᆞᆯᄀᆞᆫ〮 므〮레〮 ᄆᆞ〮라〮브티〮라〮 허〯닌〮ᄆᆞᄅᆞ닐〮 ᄲᅵ후〮미〮 됴〯ᄒᆞ니〮라〮}} 得效方治足上凍爛生瘡黃丹爲末用猪脂調傅妙{{*|바〮리〮ᄃᆞ〮라 헤여〮디닐〮 고툐〮ᄃᆡ〮 黃ᅘᅪᇰ丹단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도ᄐᆡ〮 기르〮메〮 ᄆᆞ라〮브튜〮미〮 됴〯ᄒᆞ니〮라〯}} 衛生寶鑑如神散治凍瘡皮膚破爛痛不可忍大黃爲細末新水調搽凍破瘡上{{*|}} 凍도ᇰ〮瘡차ᇰ〮 이〮 갓과〮 ᄉᆞᆯ〮쾌〮 헤여〮디〮여〮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닐〮 고툐〮ᄃᆡ〮大땡〮黃ᅘᅪᇰ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ᆺ기룬〮 므〮레〮프〮러 헌〯듸〮 ᄇᆞᄅᆞ라〮 衛生十全方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濃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茄子莖葉枯者煮洗之{{*|}} 凍도ᇰ〮瘡차ᇰ을〮 고툐〮ᄃᆡ〮 가짓 불휘ᄅᆞᆯ〮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고ᇙ〮髓ᄉᆔᆼ〯로〮 ᄇᆞᄅ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ᄯᅩ〮 가짓 줄기〮와〮 닙이우〮닐〮 글혀〮 시스〮라〮 又方黃丹炒令色變 風化石灰{{*|等分}}右拌勻每一兩許沸湯浸洗患處冷卽止不過三洗効{{*|}} ᄯᅩ〮 黃ᅘᅪᇰ丹단ᄋᆞᆯ〮봇가〮 비〮치〮다ᄅᆞ게〮 코〮 ᄇᆞᄅᆞ매〮ᄂᆞᆯ욘〮 石쎡〮灰횡 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섯거〮 골아〮 ᄒᆞᆫ 兩랴ᇰ만〮글는 므〮레〮 ᄃᆞᆷ가〮 알ᄑᆞᆫ ᄃᆡ〮 시수〮ᄃᆡ〮 ᄎᆞ〮거든〮 말〮면〮 세〯 번 시수〮믈〮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라〮 凍死聖惠方治凍死方以大器中多熬灰使煖囊盛以摶其心冷卽更易心煖氣通目轉則口乃亦開可與溫酒服粥淸稍稍嚥之卽活若不先溫其心便將火灸其身冷氣與火相摶急卽不活也{{*|}} 어러〮주그〮닐〮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큰〮그르〮세〮 ᄌᆡ〮ᄅᆞᆯ〮만〯히〮 봇가〮 덥〯게〮 ᄒᆞ〮야〮 주머니〮예〮녀허〮 가〮ᄉᆞ〮매〮노햇〮다가〮 ᄎᆞ〮거든〮 즉〮재 ᄀᆞᆯ라〮ᄆᆞᅀᆞ미〯 더워〮 氣킝〮分분이〮 通토ᇰᄒᆞ며 누〮니 돌〯면〮 이〮비 ᄯᅩ〮 열〯리니〮어루〮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며〮粥쥭〮므〮를〮 漸쪔〯漸쪔〯 ᄉᆞᇝ기〮면〮 곧〮 사〯ᄂᆞ니〮ᄒᆞ〮다가〯 그 ᄆᆞᅀᆞᄆᆞᆯ〮ᄃᆞᆺ게〮 아니〮코〮 곧〮 블〮로〮 그 모〮ᄆᆞᆯ〮ᄧᅬ〯 면〮 ᄎᆞᆫ〮 氣킝〮分분이 블〮와〮 서르사화〮 ᄲᆞᄅᆞ면〮 곧〮사〯디〮 몯〯ᄒᆞ〮ᄂᆞ〮니라〮 本朝經驗粥飮醬湯爲上飮酒次之{{*|}} 粥쥭〮믈〮와〮쟈ᇰ〯ᄭᅮ기〮 위두코〮 술 머구〮미〮버그〮니라〮 ==中暑第三== 聖惠方治熱暍心悶方以熱土及熬熱灰土壅其臍上佳{{*|}} 中듀ᇰ〮暑셩〮ᄒᆞ〮야〮 ᄆᆞᅀᆞᆷ 답답ᄒᆞ니〮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더운〮 ᄒᆞᆰ과〮 봇ᄀᆞᆫ〮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우희〮 두프〮면〮 됴〯ᄒᆞ〮니라〮 又方濃煮蓼取汁一大盞分二服飮之愈{{*|}} ᄯᅩ〮엿귀〮ᄅᆞᆯ〮 두터이〮 글혀〮 汁집〮을〮 取츙〯ᄒᆞ〮야〮 큰〮 ᄒᆞᆫ 盞잔ᄋᆞᆯ〮 두〮 服뽁〮애〯 ᄂᆞᆫ화〮 머그〮면〮 됻〯ᄂᆞ〮니〮라〮 又方生地黃汁一中盞溫暖服之{{*|}} ᄯᅩ〮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汁집〮 ᄒᆞᆫ 中듀ᇰ盞잔〮을〮데여〮 머그〮라〮 又方取麵一兩以溫水一中盞攪和服之{{*|}} ᄯᅩ〮 밄〮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을〮 ᄃᆞᄉᆞᆫ〮 믈〮 ᄒᆞᆫ 中듀ᇰ盞잔〮애〮 프〮러 머그〮라〮 又方服地漿一盞卽愈{{*|}} ᄯᅩ〮地띵〮漿쟈ᇰ ᄒᆞᆫ 盞잔〮ᄋᆞᆯ〮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地띵〮漿쟈ᇰᄋᆞᆫ〮ᄯᅡ해〮 져〯근 굳〮 ᄑᆞ〮고〮 믈〮 브ᅀᅥ〯니기〮 후ᇰ〯두ᅌᅲᆫ〮 므〮리라〯 千金方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 더우〮며닐〮 고툐〮ᄃᆡ〮길헷〯 더운〮ᄒᆞᆯᄀᆞ〮로〮 가ᄉᆞ〮매〮여ᇇ고〮 져〯 기 식거든〮 ᄀᆞᆯ오〮 氣킝〮分분이〮通토ᇰ커든〮 말〯라〮 又方張死人口令通以暖湯徐徐灌口中小擧死人頭令湯入腹湏臾卽蘇{{*|}}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이〮블〮버〯리혀〮 通토ᇰ케〮 ᄒᆞ고〮 더운〮믈〮로〮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이베〮 븟고〮 주근〮 사〯ᄅᆞᄆᆡ〮 머리〮ᄅᆞᆯ〮 져〯기〮 드러〮 더운〮 므〮리〮 ᄇᆡ에들〮에〮 ᄒᆞ면〮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살〯리라〮 又方使人噓其心令暖易人爲之{{*|}} ᄯᅩ〮 사〮ᄅᆞ〮ᄆᆞ로〮 가〮ᄉᆞ〮매〮 잆〮김〯 드〮려 덥〯게〮 호〮ᄃᆡ〮 사〯ᄅᆞᄆᆞᆯ〮ᄀᆞ람〮 ᄒᆞ라〮 又方抱狗子若雞着心上熨之{{*|}} ᄯᅩ〮 가ᇰ아지〯와〮 ᄃᆞᆰ과〮ᄅᆞᆯ〮 아나〮 가ᄉᆞᆷ 우희〮다혀 熨ᅙᅮᇙ〮ᄒᆞ라 又方屋上南畔瓦熱熨心冷易之{{*|}} ᄯᅩ〮 집 우흿 南남녁ᄀᆞ〮ᅀᅢᆺ〮 디새〮ᄅᆞᆯ 덥〯게〮 ᄒᆞ〮야〮 가ᄉᆞ〮매〮 熨ᅙᅮᇙ〮호〮ᄃᆡ〮 식거든〮 ᄀᆞᆯ라〮 壽域神方車輪土五錢冷水調澄淸服之妙{{*|}} 술윗〮ᄠᅵ옛〯 무든 ᄒᆞᆰ 닷 도〯ᄂᆞᆯ〮 ᄎᆞᆫ〮므레〮 프〮러〮ᄆᆞᆰ안초〮아 머그〮면〮 됴〯ᄒᆞ니라〮 又方中暑發昏以新汲水滴入鼻孔用扇搧之重者以地漿灌則醒與冷水飮則死{{*|}} ᄯᅩ〮 中듀ᇰ〮暑쎵〮ᄒᆞ〮야〮 어즐〮커든〮 ᄀᆞᆺ 기!른〮!룬〮! 믈〮로곳〮굼긔〮 처〮디〯오〮 부체〮로〮부츠라〮 重뜌ᇰᄒᆞ니〮란〮 地띵〮漿쟈ᇰᄋᆞ로〮 브ᅀᅳ면 ᄭᆡ〮ᄂᆞ니〮 ᄎᆞᆫ〮 믈〮 ?머?기〮면〮 ?죽?ᄂᆞ니〮라〮 又方用大蒜三兩瓣細嚼溫湯送下仍禁冷水卽愈{{*|}} ᄯᅩ〮 굴〯근〮 마ᄂᆞᆯ〮 두〯ᅀᅥ알〮 ᄒᆞᆯ ?ᄂᆞ?로니 십고〮 더운〮믈〮로〮ᄂᆞ리〮오고〮 ᄎᆞᆫ〮 므〮를〮 먹디〮 말〯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 ᄯᅩ〮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ᄒᆞᆰ과〮 굴〯근〮마ᄂᆞᆯ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ᄂᆞ로니 ᄀᆞ〮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管見大全良方云若偶在無人所居之境一時無湯可移病人安於樹陰之下却掬路上熱土安於病人臍上仍撥開作一窮以人注尿於其中得暖卽活{{*|}} ᄒᆞ다가〮마!조〮!초〮!아 사〮ᄅᆞᆷ 업〯슨〮 ᄯᅡ해이셔〮 더운〮믈 업〯거든〮 病뼈ᇰ〮人ᅀᅵᆫᄋᆞᆯ 옮겨〮 나못〮ᄀᆞ〮ᄂᆞᆯ해 두고〮 길헷〮 더운 ᄒᆞᆯᄀᆞᆯ〮?우?희〮여〮 病뼈ᇰ〮人ᅀᅵᆫ의 ᄇᆡᆺ복 우희〮노코〮 헤혀〮 ᄒᆞᆫ굼글〮 짓〯고〮 사〯ᄅᆞ미〮 그 가온〮ᄃᆡ〮 오좀〮 누면〮 더우〮면〮 곧 사〯ᄂᆞ〮니라〮 ==中氣第四== 和劑方指南云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激挫忿怒盛氣不得宣泄逆氣上行忽然仆倒昏迷不省人事牙關緊急手足拘攣其狀與中風無異但口內無涎聲此證只是氣中不可妄投取涎發汗等藥而反生他病但可與七氣湯分解其氣散其壅結其氣自止七氣湯連進效速更可與蘇合香元{{*|}} 氣킝〮中듀ᇰ〮ᄒᆞᆫ 證지ᇰ은〮해〯 豪ᅘᅩᇢ貴귕ᄒᆞᆫ 사〯ᄅᆞ미이〯ᄅᆞᆯ〮 因ᅙᅵᆫᄒᆞ〮야〮!긱!격〮!발〮ᄒᆞ며〮 것기〮여〮 忿푼〯怒농〯ᄒᆞ〮야〮 氣킝〮分분이〮 盛쎠ᇰ〮호〮ᄃᆡ펴ᄃᆞᆯ〮 몯〯ᄒᆞ〮야〮 氣킝〮分분〮이거스〮러〮 우흐〮로〮올오〮매나〮 믄〮득〯업더〮디〮여 어〮즐〮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고〮 니〮세워드〮며 손〮바리뷔〯트〯리 그 야ᇰ〯이〮 中듀ᇰ〮風보ᇰ과〮 다ᄅᆞ디〮 아니〮ᄒᆞ니 오직〮 입〮 안해〮 추ᇝ〮소ᄅᆡ〮 업〯스니〮 이〮 證!시ᇰ〮!지ᇰ〮!이〮 곧〮 이〮 氣킝中듀ᇰ〮이〮니〮간대로〮 춤〮아ᅀᆞ며〮 ᄯᆞᆷ〮내〯욤 ᄃᆞᆯ〮햇〮 藥약〮ᄋᆞᆯ ᄡᅥ〮도ᄅᆞ혀〮 다ᄅᆞᆫ 病뼈ᇰ나긔〮 호〮미〮 몯〯ᄒᆞ리〮니〮 오직〮七치ᇙ氣킝湯!다ᇰ!타ᇰ! ᄋᆞᆯ 머겨〮 그 氣킝〮分분을ᄂᆞᆫ화〮 노기며〮막?딜?여〮 ᄆᆡ요〮ᄆᆞᆯ〮 흐트〮면〮 그 氣킝分분이〮 절로〮긋ᄂᆞ니〮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ᆯ〮닛우〮 머기〮면〮 效ᅘᅭᇢ〮驗ᅌᅥᆷ〮이〮 ᄲᆞ〮ᄅᆞ니〮 ᄯᅩ〮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을〮머규미〮 됴〯ᄒᆞ〮니라〮 七氣湯治虛冷上氣及寒熱怒恚喜憂愁等氣內結積聚堅牢如柸心腹絞痛不能飮食時發時止發則欲死半夏{{*|湯洗七次焙五兩}}人蔘{{*|去蘆}}甘草{{*|灸}}肉桂{{*|去麤皮各一兩}}右剉每服三錢水一大盞入生薑三片煎至七分去滓稍熱服食前{{*|}}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ᆫ虛!힝!헝!冷ᄅᆡᇰ〯 ᄒᆞ야〮 氣킝〮分분이〮오ᄅᆞ니〮와〮 寒ᅘᅡᆫ과〮 熱ᅀᅧᇙ〮와〮 怒농〯와〮 깃붐〮과〮 시름〮 ᄃᆞᆯ〮햇〮 氣킝〮分분이〮 안해〮모다〮 구두〮미〮 진〮 ᄀᆞᆮ〮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파〮 飮ᅙᅳᆷ〯食씩〮 몯〮ᄒᆞ며〮 잇다감〮 發버ᇙᄒᆞ며잇다감〮 그처 發버ᇙ〮ᄒᆞ면〮 죽ᄂᆞ닐〮 고티〮ᄂᆞ니〮 半반〮夏ᅘᅡᆼ〮ᄅᆞᆯ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焙ᄈᆡᆼ乾건호〮니〮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蔘ᄉᆞᆷᄋᆞᆯ〮 !이!머!리〮!비!버!히고〮 甘감草초ᇢ〮ᄅᆞᆯ〮 굽고〮 肉ᅀᅲᆨ〮桂ᄀᆒᆼ〮ᄅᆞᆯ〮麤총ᄒᆞᆫ 것밧교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 돈〮애〮 믈 ᄒᆞᆫ 大땡〮?盞?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 너허〮 七치ᇙ〮分분을〮 글혀〮 즛의 앗〮고〮 져〯기 덥〮게 ᄒᆞ〮야〮 食씩〮前쩐에〮 머기〮라〯 澹療方獨香湯主中氣閉目不語四肢不收昏沈等證南木香爲末每服一錢冬瓜子煎湯調下{{*|}} 獨똑〮香햐ᇰ〮湯타ᇰ은〮 中듀ᇰ〮氣킝〮ᄒᆞ야〮 눈〮ᄀᆞᆷ〮고〯 말〯 몯〯고〮 四ᄉᆞᆼ〮肢징를〮 거두〮디〮 몯〯ᄒᆞ고 昏혼沈띰 等드ᇰ〯엣〮 證지ᇰ?에〮? 主즁〯ᄒᆞ니〮 南남木목〮香햐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 錢쩐을冬도ᇰ瓜광 ᄡᅵ〮글휸〮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廻陽湯治中氣脉弱大叚虛怯等證 川烏{{*|生去皮臍}}附子{{*|生去皮臍各半兩}}乾薑{{*|炮二錢}}靑皮{{*|去穰一兩}}益智仁{{*|一兩}}右剉每服三錢水二盞生薑七片棗一枚同煎至一盞去滓溫服或入小木香{{*|}} ᄯᅩ〮廻ᅘᅬᆼ陽야ᇰ湯타ᇰ 은〮 中듀ᇰ氣킝〮ᄒᆞ〮야〮 脉ᄆᆡᆨ〮이〮 弱ᅀᅣᆨ〮ᄒᆞ〮야 ᄀᆞ자ᇰ〮 虛헝弱ᅀᅣᆨ〮ᄒᆞᆫ〮 等드ᇰ〯엣〮 證지ᇰ〮을〮 고티ᄂᆞ니川ᄎᆑᆫ烏ᅌᅩ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과〮 앗〯고〮 附뿡〮子ᄌᆞ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아ᅀᅩ〮니〮 各각 半반〮 兩랴ᇰ〯과〮 乾간薑가ᇰ 炮뽀ᇢ호〮니 두〯 돈〮과〮 炮뽀ᇢᄂᆞᆫ〮 믈〮 저즌〮 죠ᄒᆡ〮예〮 ᄡᅡ〮노ᄋᆞᆯ압〮ᄌᆡ〮예 무더〮구을〮시〮라〮 靑쳐ᇰ皮삥솝〮 아ᅀᅩ〮니〮 ᄒᆞᆫ 兩랴ᇰ〮과〮 益ᅙᅧᆨ〮智딩〮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三삼錢쪈에〮 믈 두〯 盞잔〮과〮 生ᄉᆡᇰ薑가ᇰ 닐굽〮 片편〮과〮 大땡〮棗조ᇢ〯 ᄒᆞᆫ ᄂᆞᆺ〯과〮 ᄒᆞᆫᄃᆡ〮 글혀 ᄒᆞᆫ 盞잔애〮 니르〮거든〮 즛의 앗〯고〮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시혹〮小쇼ᇢ木목〮香햐ᇰ ᄋᆞᆯ〮 더드〮리ᄂᆞ니라〮 ==中忤中惡鬼氣第五== 經驗良方云其證暮夜或登廁或出郊野或遊空冷屋室或人所不至之地忽然眼見鬼物鼻口吸着惡鬼氣驀然倒地四肢厥冷兩手握拳口鼻出淸血性命逡巡湏臾不救此證與尸厥同但腹不鳴心脇俱暖凡中惡驀然倒地切勿移動其尸卽令親戚衆人圍繞打鼓燒火或燒射香安息蘇木香樟木之類直候醒記人事方可移歸犀角{{*|鎊屑硏爲細末半兩}}射香 朱砂{{*|各一分}}已上爲細末每服二錢井水調服灌之如無前藥用雄黃一味爲末每服一錢煎桃枝葉湯調灌又無雄黃用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男用婦衣婦用男衣燒灰每服二錢百沸湯調下{{*|}} 그 證지ᇰ〮이〮 바ᄆᆡ〮 시혹〮 뒷〯가내〮 오ᄅᆞ거나〮 시혹〮드르〮헤〮 나〮가〮거나〮 시혹〮뷘〯 ᄎᆞᆫ〮 房바ᇰ의〮 놀〯어나〮 시혹〮 사ᄅᆞ미〮 가디〮 아니〮ᄒᆞ〮ᄂᆞᆫ〮 ᄯᅡ해〮 믄득〮 누네〮 귓것 보며〮 고〮콰〮 입〮과〮로〯모〯딘〮 귓거싀〮 氣킝〮分분을〮 마시〮거나〮 ᄒᆞ〮야〮 믄득〮 ᄯᅡ해〮그우러〮디〮여〮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두〯 소〮니〮쥐〯오〮 입〮과〮 고해〮ᄆᆞᆯᄀᆞᆫ〮 피〮 흘러〮性셔ᇰ〮命며ᇰ〮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이〮 證지ᇰ이〮尸싱厥궈ᇙ〮 와〮 ᄀᆞᆮ〮ᄒᆞ니〮 오〮직〮 ᄇᆡ〮우〯디〮 아니〮ᄒᆞ고〮 가ᄉᆞᆷ〮과〮녀비〮 다〯더우〮니라〮 믈〮읫 中듀ᇰ〮惡ᅙᅡᆨ〮 ᄒᆞ〮야〮 믄득〮 ᄯᅡ해〮 그우러디〮거든〮자ᇝ〯간도〮 그주거〮믈〮 옮기〮디〮 말〯오〮 즉〮재아ᅀᆞᆷ〮과〮 한 사〯ᄅᆞ〮ᄆᆞ로〮 圍ᅌᅱᆼ繞ᅀᅭᇢ〮ᄒᆞ〮야〮붑〮 두드〮리며〮 블〮다히〮게 ᄒᆞ며〮 시혹〮射썅〮香햐ᇰ 과〮安ᅙᅡᆫ息씩〮香햐ᇰ 과〮 蘇송木목〮香햐ᇰ과〮樟자ᇰ木목〮 ㅅ類ᄅᆔᆼᄅᆞᆯ〮 ᄉᆞ〮라〮 人ᅀᅵᆫ事ᄊᆞᆼ〮ᄎᆞ〮료ᄆᆞᆯ〮 기드〮려〮 옮겨〮 갈〯디〮니라〮犀솅角각〮 ᄋᆞᆯ〮슬허〮 ᄀᆞ〮라〮 細솅〮末마ᇙ〮호니〮 半반〮 兩!라ᇰ〮!랴ᇰ〮!과〮 射썅〮香햐ᇰ과〮 朱즁砂상와〮 各각〮 ᄒᆞᆫ 分분을〮 細솅〮末마ᇙ〮ᄒᆞ〮야〮 每ᄆᆡᆼ〯服뽁〮二ᅀᅵᆼ〮錢쪈을〮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브ᅀᅳ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錢쪈을〮복셩홧가〮지 와〮 닙〮 글횬〮 므〮레〮 프〮러〮 브ᅀᅳ라〮 ᄯᅩ〮雄ᅘᅮᇰ黃ᅘᅪᇰ 업〯거든〮 ᄂᆞᆯᄀᆞᆫ〮 ᄯᆞᆷ〮오〮시나〮 시혹〮觸쵹〮衣ᅙᅴᆼ어나〮 ᄯᆞᆷ〮오〯ᄉᆞᆫ 모매〮 오래〮 니버〮 오래〮 ᄯᆞᆷ〮ᄇᆡ니〮 됴〯코〮 觸쵹〮衣ᅙᅴᆼᄂᆞᆫ 오래F 니븐〮솝〯오〮시라〮 남진ᄋᆞᆫ〮겨〯지븨〮 오〮ᄉᆞᆯ〮 ᄡᅳ〮고〮 겨〯지븐〮 남지〮늬〮 오〮ᄉᆞᆯ ᄡᅮᆯ〮디니〮 ᄌᆡ〮 ᄉᆞ라〮 每ᄆᆡᆼ〯服뽁〮 二ᅀᅵᆼ〮錢쪈을〮 一ᅙᅵᇙ百ᄇᆡᆨ〮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聖惠方治卒客忤有似卒死生昌蒲根擣絞取汁二三合灌下立愈{{*|}}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니〮 ᄀᆞᆮ〮ᄒᆞ닐〮 고툐〮ᄃᆡ〮 ᄂᆞᆯ昌챠ᇰ蒲뽕 ㅅ 불휘〮ᄅᆞᆯ〮디허〮 汁집〮ᄲᅡ〮 두〯ᅀᅥ〮 호ᄇᆞᆯ〮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治中惡心痛欲絶方釜底墨{{*|半兩}}塩{{*|一錢}}右件藥和硏以熱水一盞調頓服之{{*|}}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알파〮 죽ᄂᆞ닐〮 고툐〮!ᄐᆡ〮!ᄃᆡ〮!가마 미틧〮 검듸여ᇰ 半반〮 兩랴ᇰ〯과〮 소곰 ᄒᆞᆫ 돈〯ᄋᆞᆯ〮섯거〮 ᄀᆞ〮라〮 더운〮믈〮 ᄒᆞᆫ 盞잔〮애〮 프〮러 다〯 머그〮라〮 又方中惡氣絶以上好朱砂細硏於舌上書鬼字又額上亦書之此法極效{{*|}}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 긋거든 ᄀᆞ자ᇰ 됴〯ᄒᆞᆫ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혀〮에〮鬼귕〯ㅈ字ᄍᆞᆼ〮 ᄅᆞᆯ〮스〮고〮 ᄯᅩ〮니마〮희〮 술〮디니〮 이〮 法법〮이〮지〮극 됴〯ᄒᆞ〮니라〮 又方鬼神所擊諸術不治熟艾如鴨子大二枚水二盞煮取五分去滓頓服{{*|}} ᄯᅩ〮 귓거시〮텨〮 여러〮 法법〮으〮로〮 고티〮디 몯〯ᄒᆞ〮거든〮 니근〮 ᄡᅮᆨ〮올〮ᄒᆡ알〮 만〮ᄒᆞ니〮 두〯 나〯ᄎᆞᆯ〮 믈〮 두〯 盞잔〮애〮 글혀〮 다ᄉᆞᆺ〮 分분을〯 取츙〯ᄒᆞ〮야〮 즛의 앗〯고〮 다〯 머그〮라〮 又方卒中鬼擊及刀兵所傷血滿膓中不出煩悶欲死雄黃一兩細硏如粉以溫酒調一分服日三服血化爲水{{*|}} ᄯᅩ〮 귓거시〮 믄득〮 티며〮갈〮 잠개〮예〮 허러〮 피〮 토ᇰ〮 안해〮ᄀᆞᄃᆞᆨᄒᆞ〮야〮 나디〮 몯〯ᄒᆞ〮야〮답〮ᄭᅡ와〮 죽ᄂᆞ닐〮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ᄃᆞᄉᆞᆫ 수레〮 ᄒᆞᆫ 分뿐〮을〮 프〮러〮 ᄒᆞ〮ᄅᆞ 세〯 번곰〮 머그〮면〮 피〮 믈〮 ᄃᆞ외ᄂᆞ〮니라〮 千金方治卒忤塩八合以水三升煮取一升半分二服得吐卽愈若小便不通筆頭七枚燒作灰末水和服之卽通{{*|}}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니〮 고툐〮ᄃᆡ〮 소곰 여듧〮 호ᄇᆞᆯ〮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거〮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ᄒᆞ〮다가〮 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붇〮 머리〮 닐구〮블〮 ᄉᆞ〮라〮 ᄀᆞᄅᆞ !ᄃᆡᇰ!ᄆᆡᇰ!ᄀᆞ〮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라〮 葛氏備急方中惡證候視其上唇裏弦者有白如黍米大以針決去之{{*|}} 中듀ᇰ惡ᅙᅡᆨ 證지ᇰ〮이 웃입시울〮 !인!안!ᄒᆞᆯ 보〯ᄃᆡ〮 ᄒᆡᆫ〮 거시〮 기장ᄡᆞᆯ〮ᄀᆞᆮ〮ᄒᆞ니〮 잇ᄂᆞ니〮 바ᄂᆞᆯ〮로〮ᄯᅡ〮 아ᅀᅩᆯ〮디〮니라 又方半夏末如豆大吹鼻中{{*|}} ᄯᅩ〮 半!빈〮!반〮!夏ᅘᅡᆼ〮末마ᇙ〮ᄋᆞᆯ〮 콩낫〯?만〮? 곳〮굼긔〮 불〯라〮 又方客忤者中惡之類也令人心腹絞痛脹滿氣衝心胸不卽治殺人 細辛 桂末等分內口中{{*|}}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ᄂᆞᆫ〮 中듀ᇰ〮惡ᅙᅡᆨ〮ㅅ類ᄅᆔᆼ〮니〮 사〯ᄅᆞ〮ᄆᆞ로〮 가ᄉᆞᆷ〮 ᄇᆡ〮 알ᄑᆞ며〮탸ᇰ〯만〮ᄒᆞ〮야〮 氣킝〮分분이〮 가ᄉᆞ〮매〮다와티〮ᄂᆞ니〮 즉재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細솅〮辛신과〮桂궹〮皮삥 ㅅ ᄀᆞᆯᄋᆞᆯ〮等드ᇰ〯分분ᄒᆞ〮야〮 입〮 안해〮녀흐〮라〮 又方卒得鬼擊之病無漸卒着如人刀刺狀胸脇腹內絞急切痛不可抑按或卽吐血或鼻中出血或下血一名鬼排治之灸鼻下人中一壯立愈{{*|}} ᄯᅩ〮 믄득〮 귓것 틴 病뼈ᇰ〮을〮 어〯더漸쪔〯漸쪔〯 아니〮ᄒᆞ〮야〮 믄득〮어〯두미〮 갈〮ᄒᆞ로〮 디르ᄂᆞᆫ ᄃᆞᆺ〮ᄒᆞ〮야〮 가ᄉᆞᆷ〮과〮 녑과〮 ᄇᆡ〮 안〮히ᄀᆞ자ᇰ〮 알파〮ᄆᆞᆫ지〮디〮 몯〯ᄒᆞ며〮 시혹〮 피〮ᄅᆞᆯ〮 吐통〮ᄒᆞ며〮 시혹〮 고해〮 피〮내〯며〮 시혹 아래〮 피〮나〮ᄂᆞ니〮 고툐〮ᄃᆡ〮 고〮 아랫〮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 을〮 ᄒᆞᆫ 붓글〮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臍下一寸三壯炙臍上一寸七壯{{*|}} ᄯᅩ〮 ᄇᆡᆺ복 아랫〮一ᅙᅵᇙ〮寸촌〮ᄋᆞᆯ〮 세〮 붓글〮 ᄯᅳ〮고〮 ᄇᆡᆺ복 우 一ᅙᅵᇙ〮寸촌ᄋᆞᆯ 닐굽〮 붓글〮 ᄯᅳ라〮 又方以淳酒吹內兩鼻中{{*|}} ᄯᅩ 됴〮ᄒᆞᆫ 술로 두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鼠屎末服如黍米不能飮之以少水和內喉中{{*|}} ᄯᅩ〮 쥐ᄯᅩᆼᄋᆞᆯᄇᆞᆺ아〮 기자ᇰᄡᆞᆯ〮만〮 머구〮ᄃᆡ〮 먹디〮 몯〯거든〮 믈〮져〯기 ᄒᆞ〮야〮 프〮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被鬼擊用竈心土爲末每服二錢新汲水調下及以少許吹鼻中{{*|}} 귓거싀〮게 마ᄌᆞ〮닐〮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먹그〮며 져〯기 고해〮 불〯라〮 又方{{*|恍惚見鬼}}發狂用平胃散加辰砂末棗湯調服{{*|}} ᄯᅩ 어즐ᄒᆞ〮야〮 귓것 보〮아〮 미치〮거든〮平뼈ᇰ胃ᅌᅱᆼ〮散산〮 애〮 朱즁砂상ㅅᄀᆞᆯᄋᆞᆯ〮 녀허〮 大땡〮棗조ᇢ〯湯타ᇰ애〮 프〮러 머그〮라〮 又方中惡客忤卒死者用皂角末吹鼻或硏韭汁灌耳中以艾灸臍中百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닐〮 皂쪼ᇢ〯角각〮ㅅ ᄀᆞᆯᄋᆞᆯ〮 고해〮 불〯라〮 시혹〮 염〮굣〮 즈〮블 ᄀᆞ〮라 귀예〮 븟고〮 ᄡᅮ〮그로〮 ᄇᆡᆺ보ᄀ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붓글〮 ᄯᅳ〮라〮 又方中惡客忤垂死用射香一錢硏和醋二合服之卽差{{*|}}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죽ᄂᆞ닐〮 射썅〮香햐ᇰ ᄒᆞᆫ 돈〯 ᄀᆞ라 초에〮 프〮러 두〮 호ᄇᆞᆯ〮 머그〮면〮 즉재 !둍〯!됻〯!ᄂᆞ〮니라〯 壽域神方凡卒死或先病痛或常寢臥忽絶皆是中惡救之以葱黃心刺入鼻內男左女右入深五寸若目中出血佳又用葱管吹其兩耳兩鼻孔中{{*|}} 믈읫 믄득〮 주구〮미 시혹〮 몬져 病!뼝〮!뼈ᇰ〮!을〮 알커나〮 시혹〮샤ᇰ녜〮 자다가〮 믄득〮 죽ᄂᆞ니〮 다〯 이〮 中듀ᇰ〮惡ᅙᅡᆨ〮이〮니〮 救구ᇢ〮호〯ᄃᆡ〮 팟〮 누른〮엄〯으〮로〮 고 안해〮 녀호〮ᄃᆡ〮 남지는〮 왼〯녁 겨〯지븐〮 올〮ᄒᆞᆫ녀긔〮 기피〮 五ᅌᅩᆼ〯寸촌〮이〮들〮에〮 ᄒᆞ〮야〮 ᄒᆞ〮다가〮 누내〮 피〮나면〮 됴〮ᄒᆞ니라〮 ᄯᅩ〮 팟〮 니〮프로〮 두〯 귀〮와〮 두〯 곳〮굼글〮 불〯라〮 又方取小便灌其口數遍卽能語{{*|}} ᄯᅩ〮 小쇼ᇢ〯便뼌을〮 이베〮 브ᅀᅩ〮믈〮 두〯ᅀᅥ〮 번 ᄒᆞ면〮 곧〮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中惡短氣欲死灸足兩大𧿹趾上甲後聚毛中各十四壯不愈再灸十四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뎔어〮 죽ᄂᆞ닐〮두〮 발〮엄지〮가〮락 톱〮 뒷〯 털〮 난ᄯᅡ〮ᄒᆞᆯ〮 열〯네〯 붓곰〮 ᄯᅮ〮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시〮 열〮네〯 붓글〮 ᄯᅳ〮라〮 又方驚怖死者用溫酒灌之卽蘇{{*|}} ᄯᅩ 놀〮라 주그〮닐〮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鬼魘鬼打第六== 經驗良方其證初到客舍或官驛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湏臾不救則死 牛黃 雄黃{{*|各一錢}}朱砂{{*|半錢}}巳上各硏爲細末和勻每挑一錢許床下燒次挑一錢用酒調灌之如無前藥用桃柳枝取東邊各三七寸煎湯三盞候溫倂灌服又無桃柳枝用竈心土搥碎爲細末每服二錢新汲井花水調灌更挑半指甲許吹入鼻中更用艾灸人中穴在鼻下幷灸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 그 證지ᇰ〮이〮 客ᄏᆡᆨ舍상〮ㅣ어나〮 시혹〮 驛역〯이〮어나〮 오래〮 사〯ᄅᆞᆷ 업〯슨〮 ᄎᆞᆫ〮 房바ᇰ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툐ᄆᆞᆯ〮 아라〮 오직〮 그 사〯ᄅᆞ미〮헐헐ᄒᆞᆯ 소릴〮 듣고〮 곧〮 사〯ᄅᆞ〮ᄆᆞ로〮 브르게〮 !ᄒᆞᆯ〮!훌〮!디니〮블로〮ᄃᆡ〮 ᄭᆡ디〮 아니〮ᄒᆞ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ᄉᆞᅀᅵ〮ᄅᆞᆯ〮 救구ᇢ〮티〮 아니〮ᄒᆞ면〮 죽ᄂᆞ니〮 牛ᅌᅮᇢ黃ᅘᅪᇰ과 雄ᅘᅮᇰ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돈〯과〮 朱즁砂상 半반〮 돈〯ᄋᆞᆯ〮 各각〮各각〮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골오〮 섯거〮 ᄒᆞᆫ 돈〯만〮 ᄯᅥ〮 사ᇰ 아래〮 ᄉᆞᆯ〮오〯 !비!버!거〮 ᄒᆞᆫ 돈〯ᄋᆞᆯ〮 수레〮 프〮러〮 머기〮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복〮샤ᇰ화나모와〮 버드〮나못 가〮지ᄅᆞᆯ〮 東도ᇰ녁긔〮칠 各각〮各각〮 세〯닐굽〮 寸촌〮ᄋᆞᆯ〮 가져〮다가〮 므〮?레? 글혀〮 세〯 盞잔〮ᄋᆞᆯ〮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복?샤ᇰ?화나모 버듨〮가〮지 업〯거든〮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누〯!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른〮!룬〮! 井졍〯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머기〮고〮 ᄯᅩ〮 半반〮 소ᇇ톱만〮 ᄯᅥ〮 고해〮 부러〮 드〮리고〮 ᄯᅩ〮 ᄡᅮ〮그로〮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ᄯᅳ〮고〮 두〯 !밠〮!뱘〯! !염!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ᄒᆞᆫ 부〯ᄎᆡᆺ닙〮 만〮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ᄒᆞᆫ닐굽〮 붓글〮 ᄯᅳ〮면〮 곧〮 사〯ᄂᆞ〮니라〮 千金方治鬼擊雞屎白{{*|如棗大}}靑花麻一把{{*|卽常用麻}}右二味以酒七升煮取三升熱服須臾發汗若不汗熨斗盛火灸兩脇下使熱汗出愈{{*|}} 귓것 티〮닐〮 고툐〮ᄃᆡ〮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것 대〯초만〮과〮 삼〮 ᄒᆞᆫ 줌〯과〮 두〯 가지〮ᄅᆞᆯ〮 술 닐굽〮 되〮로〮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더우〮닐〮 머그〮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ᄯᆞᆷ〮나〮ᄂᆞ니〮 ᄒᆞ〮다가〮 ᄯᆞᆷ〮나디〮 아니〮커든〮다리〮우〮리예〮 블〮 다마〮 두〯 녁 녀〮블〮ᄧᅬ〯야〮 덥〯게〮 ᄒᆞ면〮 ᄯᆞᆷ〮나면〮 됻〯ᄂᆞ〮니라〮 聖惠方卒魘忌燈火照照則神魂遂不復入乃至於死人有於燈光前魘者本在明處是以不忌火也{{*|}} ᄀᆞ오〮누르〮이닐〮 블〮혀〮 뵈〯요미〮 몯〯ᄒᆞ리〮니〮 블〮 뵈〯면〮 넉시〮 도로 드〮디〮 아니〮ᄒᆞ〮야〮 죽ᄂᆞ니〮라〮 블〮 현〯 ᄃᆡ〮 이셔〮 ᄀᆞ오누르〮이닌〮본〮ᄅᆡ ᄇᆞᆯᄀᆞᆫ〮 ᄃᆡ 이실ᄉᆡ〮 블〮 혀〯미〮 므〮던ᄒᆞ니〮라〮 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 믄득 ᄀᆞ오〮누르〮여 ᄎᆞ〮림 몯〯ᄒᆞ〮거든〮皂쪼ᇢ〯莢겹〮 ᄀᆞᆯᄋᆞᆯ〮 ᄀᆞ〮ᄂᆞᆫ 대〮로〮 두〯 곳〮굼긔〮 불〯면〮 즉〮재 니〯ᄂᆞ니〮 잇사ᄋᆞ〮래도〮 어루〮 불〯리!라〮!라〮! 又方治卒魘右以雄黃細硏以蘆管吹入兩鼻中桂心末亦得{{*|}} ᄯᅩ〮 과ᄀᆞᆯ이〮ᄀᆞ오눌〯엿〮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ᄀᆞᆯ〮로 부러〮 두〯 고해〮 녀흐라〮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ᄅᆞ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菖蒲末吹兩鼻中以桂末納於舌下亦得{{*|}}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불〯오〮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ᆯ〮 혀〮 아래〮 녀후〮미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雄黃如棗核大繫於左臂令人終身不魘寐也{{*|}}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ᆼᄋᆞᆯ〮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ᄒᆞ닐〮 왼〯녁ᄇᆞᆯᄒᆡ〮 ᄃᆞ〮라 두면〮 사〯ᄅᆞ〮ᄆᆞ로〮 죽ᄃᆞ록〮 ᄀᆞ오〮누르〮이디〮 아니〮케〮 ᄒᆞ〮ᄂᆞ〮니라〮 又方服猪脂如雞子大卽差未差再服{{*|}} ᄯᅩ〮 猪뎡脂징〯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 됴〯티 아니〮커든〮 다시〮 머그〮라〮 備急大全良方療臥忽不悟愼勿以火照則殺人但唾其面更痛囓足大拇指甲際卽省更以半夏末吹入鼻中更以韭葉擣取自然汁灌鼻孔中冬月用韭根擣取自然汁灌卽活{{*|}} 자〮다가〮 ᄭᆡ〮디 몯〯ᄒᆞ닐〮 고툐〮ᄃᆡ〮 자ᇝ〯간도〮 블〮 혀 뵈〯디마롤〮디니〮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오직〮 ᄂᆞᄎᆡ〮 춤〮받고〮 ᄯᅩ〮 발〮엄지〮가락 톱〮 ᄉᆞᅀᅵ〮ᄅᆞᆯ〮ᄆᆡ이〮 믈면〮 즉〮재 ᄭᆡ〮ᄂᆞ〮니라〮 ᄯᅩ〮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곳〮굼긔〮 불〯오〮 ᄯᅩ〮 부〯ᄎᆡᆺ 니〮플〮 디허〮 즈〮브로〮 곳굼긔〮 브ᅀᅳ라〮겨ᅀᅳ〮렌 부〯ᄎᆡᆺ 불휘〮ᄅᆞᆯ〮 디허〮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取츙〯ᄒᆞ〮야〮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卒死第七== 千金方治卒死無脉牽牛臨鼻上二百息牛舐必瘥牛不肯舐着塩汁塗面上牛卽肯舐{{*|}} 가ᄀᆞ〮기 주거〮 脉ᄆᆡᆨ〮업〯스닐〮 고툐〮ᄃᆡ〮 쇼〮ᄅᆞᆯ〮잇거〮 고〮 우희〮 다혀〮 二ᅀᅵᆼ〮百ᄇᆡᆨ〮 버ᄂᆞᆯ〮숨〯쉬울디〮니 ᄉᆈ〮 할ᄒᆞ〮면〮 반ᄃᆞ〮기 됻〯ᄂᆞ〮니라〮쇼〮옷〮 할티〮 아니〮!키〮!커!든〮 소곰므〮를〮 ᄂᆞᄎᆡ〮 ᄇᆞᄅᆞ면〮 ᄉᆈ〮 곧〮 할ᄂᆞ니〮라〮 又方馬屎絞取汁飮之無新者水和乾者亦得{{*|}} ᄯᅩ〮 ᄆᆞᆯᄯᅩᇰᄋᆞᆯ〮 ᄧᅡ〮 즈〮블 取츙〮ᄒᆞ〮야〮 마시〮라〮 새〮 업〯거든〮 므〮레 ᄆᆞᄅᆞ닐〮 프〮러도〮 ᄯᅩ〮 됴〯ᄒᆞ〮니라〮 肘後方乾者以人溺解之{{*|}} ᄆᆞᄅᆞ닌〮 사〯ᄅᆞᄆᆡ〮 오조〮ᄆᆞ로〮 플〮라〮 又方灸熨斗熨兩脇下又治尸厥{{*|}} ᄯᅩ〮 다리〮우릴〮 데여〮 두〮 녀블〮 울〮ᄒᆞ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ᄂᆞ〮니라 又針閒使各百餘息又灸鼻下人中又治尸厥{{*|}} ᄯᅩ〮閒간使ᄉᆞᆼ〮 ᄅᆞᆯ〮 針짐호〮ᄃᆡ〮 一ᅙᅵᇙ〮百ᄇᆡᆨ〮 숨〯 남ᄌᆞ기 ᄒᆞ고〮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ᄯᅳ〮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 ᄂᆞ니〮라〮 又方治五絶夫五絶者一曰自縊二曰墻壁壓迮三曰溺水四曰魘寐五曰産婦乳絶取半夏一兩細下篩吹一大豆許內鼻中卽活心下溫者一日亦可活{{*|}} ᄯᅩ〮 다ᄉᆞᆺ 주그〮닐 고티〮ᄂᆞ니〮 ᄒᆞ나ᄒᆞᆫ〮 목 ᄆᆡ야〮 주그〮니오〮 둘〯흔 담〮지즐〮이〮니오〮 세〯흔 므〮레 ᄲᅡ〮디니〮오〮 !네〯!녜〯!흔ᄀᆞ〮오〮누르〮이〮니오〮 다ᄉᆞ〮ᄉᆞᆫ 아〮기나타가〯 주그〮니니〮 半반〮夏ᅘᅡᆼ〮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처〮 큰 콩 낫〯만〮 ᄒᆞ닐〮 곳〮굼긔〮 부러〮 녀흐면〮 즉〮재 사〯ᄂᆞ니〮 가ᄉᆞ〮미 ᄃᆞᄉᆞ닌〮ᄒᆞᆯ리〮라도〮 ᄯᅩ〮 어루〮 살〯리라〮 聖惠方卒死中惡及尸厥以緜漬好酒手挼汁令入鼻中幷持其手足莫令驚動{{*|}} 과ᄀᆞᆯ!이〮!ᄋᆡ〮! 주그〮니와〮 中듀ᇰ〮惡ᅙᅡᆨ〮ᄒᆞ니〮와〮 尸싱厥궈ᇙ〮ᄒᆞ니〮ᄅᆞᆯ〮소오ᄆᆞ〮로 됴〯ᄒᆞᆫ 술저져〮 소〮ᄂᆞ로〮 汁집〮을〮ᄲᅡ〮 곳〮굼긔〮 들〮에 ᄒᆞ고〮 손〮바〮ᄅᆞᆯ〮 자바〮 놀〯라디〮 아니〮케 ᄒᆞ라 又方擣韮取汁以灌口中{{*|}} ᄯᅩ〮 부〯ᄎᆡᄅᆞᆯ〮 디허〮 汁집〮을〮 取츙〯ᄒᆞ〮야〮 이베〮 브ᅀᅳ라〮 又方取猪膏如雞子大以醋一合煮沸灌喉中良{{*|}} ᄯᅩ〮 猪뎡膏고ᇢ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醋총〮 ᄒᆞᆫ 호배〮 글혀〮 모ᄀᆡ〮 브ᅀᅳ면〮 됴〮ᄒᆞ〮니라〮 又方卒死而壯熱者用白礬半斤以水二豆斗煮消以漬脚卽活{{*|}} ᄯᅩ 과ᄀᆞᆯ이〮 죽고〮 壯자ᇰ〮히〮 熱ᅀᅧᇙ〮ᄒᆞ닐〮白ᄈᆡᆨ〮礬뻔 半반〮 斤근ᄋᆞᆯ〮 믈〮 두〯 마래〮 글혀〮 노겨〮허튀〮ᄅᆞᆯ〮 ᄃᆞ〮ᄆ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用小便灌其面卽能迴語{{*|}} ᄯᅩ〮 小쇼ᇢ〯便뼌으〮로〮 ᄂᆞᄎᆡ ᄲᅳ리〮면〮 즉〮재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以雄雞頭取血以塗其面乾復塗之{{*|}} ᄯᅩ〮 수〮ᄃᆞᆯᄀᆡ〮 머리〮엣〮 피〮 내〯아〮 ᄂᆞᄎᆡ〮 ᄇᆞᄅᆞ〮고〮 ᄆᆞᄅᆞ거든〮 다시〮 ᄇᆞᄅᆞ라〮 又方治忤打死心稍暖取葱白納於下部中及鼻中湏臾卽活{{*|}}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ㅣ어나〮귓거시〮 텨〮 주그〮니 가ᄉᆞ〮미〮져〮기 ᄃᆞᆺᄒᆞ닐〮 고툐〮ᄃᆡ〮 파〮ᄒᆞᆯ〮밋구무와〮 곳〮굼긔〮 녀흐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사〯ᄂᆞ〮니라 又方治卒客忤不能言桔梗末一兩射香末一分右二味更硏令勻每服二錢以溫水調下{{*|}} ᄯᅩ〮 과ᄀᆞᆯ이〮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말〯 몯〯ᄒᆞ〮거든〮桔겨ᇙ〮梗겨ᇰ〯 ㅅ 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分뿐을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머기〮라〮 千金方治一切卒死灸臍中百壯{{*|}} 一ᅙᅵᇙ〮切쳐ᇙ〮 과ᄀᆞᆯ이〮 주그〮닐〮 고툐〮ᄃᆡ〮 ᄇᆡᆺ복을 百ᄇᆡᆨ〮壯자ᇰ〮을〮 ᄯᅳ〮라 ==卒心痛第八<sub>腹痛附</sub>== 聖惠方治卒心痛氣悶欲絶面色靑四肢逆冷釅醋{{*|一合}}雞子{{*|一枚打破}}右件相和攪勻煖過頓飮之{{*|}}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 알파〮 氣킝〮分분이〮닶〮가와〮 주거〮가〮 ᄂᆞ치〮 프르〮고〮 四ᄉᆞᆼ〯肢징 ᄎᆞ〮닐〮 고툐〮ᄃᆡ〮 醋총〮 ᄒᆞᆫ 홉과〮 ᄃᆞᆯᄀᆡ!알〮!알〮! ᄒᆞᆫ 나〯ᄎᆞᆯ〮ᄣᆞ려〮 섯거〮 골오〮 프〮러 ᄃᆞ시 ᄒᆞ〮야〮 다〯 머기〮라〮 又方白艾二兩熟者右以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分爲三服稍熱服之{{*|}} ᄯᅩ〮 ᄒᆡᆫ〮 ᄡᅮᆨ〮 두〯 兩랴ᇰ〯니기〮 디후〮닐〮 믈〮 두〯 큰〮잔〮애〮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세〮 服!쁙〮!뽁〮!애〮 ᄂᆞᆫ화〯 져〯기 더우〮닐〮 머그〮라〮 經驗良方布衷塩如彈丸大燒令赤溫酒化服溫水亦得{{*|}} 뵈〮로 소고ᄆᆞᆯ〮 탄ᄌᆞ〮만〮ᄢᅳ려〮 ᄉᆞ〮라 븕게〮 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그〮라〮 ᄃᆞᄉᆞᆫ 믈〮도〮 ᄯᅩ〮 ᄒᆞ리〮라〮 壽域神方草菓 玄胡索 乳香 沒藥 五靈脂{{*|各等分}}右爲末每服二錢溫酒調下{{*|}} 草초ᇢ〯菓광〯와〮玄ᅘᆑᆫ胡ᅘᅩᆼ索짝〮 과〮乳ᅀᅲᆼ〯香햐ᇰ 과〮 沒모ᇙ〯藥약〮과〮五ᅌᅩᆼ〯靈려ᇰ脂징〯 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기〮라〮 又方桃白皮煮汁宜空腹服之{{*|}} ᄯᅩ〮 복샤ᇰ화나못 ᄒᆡᆫ〮 거츨〮 글혀〮 汁집〮을〮 空고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生香油半合溫服妙{{*|}} ᄯᅩ〮 ᄎᆞᆷ〮기름〮 半반〮 호블 ᄃᆞ시 ᄒᆞ〮야〮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令病人當戶坐若男病婦人與水一柸飮之若女病男子與水一柸飮之用新汲水尤佳{{*|}} ᄯᅩ〮 病뼈ᇰ〮人ᅀᅵᆫ으〮로〮이페〮 안치〮고〮 ᄒᆞ다가 남지니〮 病뼈ᇰ〮커든〮 겨〯지비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고〮 ᄒᆞ〮다가〮 겨〯지비〮 病뼈ᇰ〮커든〮 남지니〮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라〮 ᄀᆞᆺ 기룬〮 므〮리 더 됴〯ᄒᆞ〯니라〮 又以蜜一分水二分飮之亦妙{{*|}} ᄯᅩ〮 ᄢᅮᆯ〮 ᄒᆞᆫ 分분과〮 믈〮 두〯 分분을〮 마쇼〮미ᄯᅩ〮 됴〮ᄒᆞ〮니라〮 又方治腹痛細嚼石菖蒲飮凉水送下妙{{*|}} ᄯᅩ〮 ᄇᆡ〮알힐〮 고툐〮ᄃᆡ 石쎡〮菖챠ᇰ蒲뽕ᄅᆞᆯ〮 ᄂᆞ로니 십고〮 ᄎᆞᆫ〮 므〮를 마셔〮ᄂᆞ리〮오미〮 됴〮ᄒᆞ〮니라〮 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絞取汁飮之{{*|}} ᄯᅩ〮 ᄯᅡ해〮 ᄒᆞᆫ 져〯고맛〮 구〮들 ᄑᆞ〮고〮 믈〮로 구데〮 ᄀᆞᄃᆞ기 븟고〮 니기〮 후ᇰ두ᅌᅧ〮 汁집〮을〮 取츙〯ᄒᆞ야〮 마시〮라〮 又方令人騎其腹溺臍中{{*|}} ᄯᅩ〮 사〯ᄅᆞ미〮 그 ᄇᆡ〮ᄅᆞᆯ 타〮 안자〮 ᄇᆡᆺ〮보개〮 오좀〮 누게〮 ᄒᆞ라〮 又方針手足十指頭出血灸臍中七七壯{{*|}} ᄯᅩ〮 손〮발〮 열〮 가락 그〮틀〮 針짐ᄒᆞ야〮 피〮내〯오〮 ᄇᆡᆺ〮보ᄀᆞᆯ 七치ᇙ〮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治心腹俱脹疼痛氣短欲死或已絶者取梔子十四枚豉五合以水二盞先煮豉取一盞半去滓入梔子再煎取一盞去渣服半盞不愈盡服之{{*|}} ᄯᅩ〮 가ᄉᆞᆷ〮 ᄇᆡ〮 다〯 탸ᇰ〯만〮ᄒᆞ〮야〮 알ᄑᆞ고〮 氣킝〮分분이 뎔어〮 죽ᄂᆞ니〮와〮 시혹〮 ᄒᆞ마〮 주그〮닐〮 고툐〮ᄃᆡ梔징子ᄌᆞᆼ〯 열〮네〯 낫〯과〮 젼국 다ᄉᆞᆺ 호블〮 믈〮 두〯 잔〮ᄋᆞ로 몬져 젼국 글혀〮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滓ᄌᆡᆼ〮 앗〯고〮 梔징子ᄌᆞᆼ〮 녀허〯 다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츄ᇢ〯ᄒᆞ〮야〮 즛의 앗〯고〮 半반〮 잔〮ᄋᆞᆯ〮 머구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 머그〮라〮 又方治卒心腹煩滿疼痛欲死者以熱湯浸手足妙冷再換{{*|}} ᄯᅩ〮 과ᄀᆞᆯ이〮 가ᄉᆞᆷ〮 ᄇᆡ〮 煩뻔滿만〯ᄒᆞ〮여〮 알파〮 죽ᄂᆞ닐〮 고툐〮ᄃᆡ 더운〮 므〮레 손〮바〮ᄅᆞᆯ ᄃᆞᆷ고〮미 됴〯ᄒᆞ니〮 ᄎᆞ거든〮 다시〮 ᄀᆞᆯ라〮 又方卒煩滿嘔逆灸乳下一寸七壯卽愈{{*|}} ᄯᅩ〮 과ᄀᆞᆯ이〮 煩뻔滿만〯ᄒᆞ〮야〮吐통〯逆ᅌᅧᆨ〮 ᄒᆞ〮거든〮 졋〮 아랫〮 ᄒᆞᆫ 寸촌〮ᄋᆞᆯ 七칧〮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兩手大母指內邊爪後第一紋頭各一壯又灸兩手中指爪下一壯卽愈{{*|}} ᄯᅩ〮 !드〮!두〯! 손〮 엄지〮가락 안〮녁 소ᇇ토ᄇᆞ〮로셔〮 첫〮 그ᇝ〮 그〮틀 各각〮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ᄯᅩ〮 두〯 손 가?온〮ᄃᆡᆺ〮 가락 소ᇇ톱 아래〮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九種心痛取當大歲上新生槐枝一握去兩頭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 아홉〮 가짓〮 가ᄉᆞᆷ〮 알힐〮 고툐〮ᄃᆡ大땡〮歲ᄉᆒᆼ〯方바ᇰ앳〮 올ᄒᆡ〮 난회홧가〮지 ᄒᆞᆫ우희〮윰을〮 두〯 녁 그〮틀〮 버히〮고〯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治卒中惡心痛 苦參{{*|三兩}}㕮咀以好醋一升半煮取八合强者頓服老小分二服{{*|}} ᄯᅩ〮 과ᄀᆞᆯ이〮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 알ᄂᆞ닐〮 고툐〮ᄃᆡ〮苦공〯參ᄉᆞᆷ 석〯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됴〯ᄒᆞᆫ 醋총〮 ᄒᆞᆫ 되〮 半반〮ᄋᆞ〮로 글혀〮 여듧〮 호ᄇᆞᆯ〮 取츙〯ᄒᆞ〮야〮 強가ᇰᄒᆞ닌〮 다〯 먹고 늘그〮니와 져므〮니ᄂᆞᆫ〮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桂心{{*|一兩}}㕮咀以水四升煮取一升半分二服{{*|}} ᄯᅩ〮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넉〯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霍亂吐瀉第九<sub>沙證附</sub>== 經驗良方始因飮冷或胃寒或失飢或大怒或乘舟車傷動胃氣令人上吐上吐不止令人下瀉吐瀉倂作遂成霍亂頭旋眼暈手脚轉筋四肢逆冷用藥遲緩湏臾不救吳茱萸 木瓜 食塩{{*|各半兩}}右三味同炒令焦先用磁甁盛水三升煮令百沸却入前藥同煎至二升已下傾一盞冷熱隨病人意與服藥入卽醒{{*|}} 처〮ᅀᅥ믜 ᄎᆞᆫ〮믈〮 마쇼〮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치〮위〮에 ᄃᆞᆫ니〮거나〮 시혹〮 ᄇᆡ〮 골커나〮 시혹 너무 怒농〮커나〮 시혹〮 ᄇᆡ〮와〮 술위와〮타〮 胃ᅌᅱᆼ氣킝〮ᄅᆞᆯ〮 傷샤ᇰᄒᆞ면〮 사〯ᄅᆞ미〮 우흐〮로 吐통〯케〮 ᄒᆞ〮ᄂᆞ〮니〮 우흐〮로 吐통〯호〮ᄆᆞᆯ〮그치〮디 몯〯ᄒᆞ면〮 사〯ᄅᆞ미〮 아래〮로 즈츼〮에〮 ᄒᆞ〮ᄂᆞ니〮 吐통〯와〮 즈츼〮유미〮 ᄒᆞᆫᄢᅴ〮니르와ᄃᆞ면〮 霍확〮亂란〮이〮 ᄃᆞ외야〮 머리〮휫두르며〮 누〮니 휫두르며〮 손밠〮 히〮미올ᄆᆞ〮며 四ᄉᆞᆼ〮肢징 ᄎᆞ〮ᄂᆞ니〮 藥약〮ᄋᆞᆯ디마〮니 ᄒᆞ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吳ᅌᅩᆼ茱쓩萸융 와〮木목瓜광 와〮 소곰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 ᄃᆡ〮봇가〮 눋〯게 ᄒᆞ〮야〮 몬져 沙상甁뼈ᇰ에〮 믈〮 서〯 되〮ᄅᆞᆯ〮 다마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커든〮 알ᄑᆡᆺ〮 藥약〮ᄋᆞᆯ〮 녀허〮 ᄒᆞᆫᄃᆡ〮 글혀〮 두〯 되예 니를〮어든〮 ᄒᆞᆫ 잔ᄋᆞᆯ〮 브ᅀᅥ〮 ᄎᆞ〮며 더우〮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ᄠᅳ〮들 조차〮 주〮어 머기〮면〮 藥약〮이〮 들〮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倉卒無前藥用枯白礬爲末每服一大錢百沸湯點服{{*|}} ᄒᆞ〮다〯가〮 時씽急급〮ᄒᆞ〮야〮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枯콩白ᄈᆡᆨ〮礬뻔 을〮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큰〮 돈〯ᄋ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如無白礬只用塩一撮醋一盞同煎至八分溫服或塩梅醎酸等物皆可煮服{{*|處方本以鹹醋二物煮}}{{*|}} ᄒᆞ〮다가〮 白ᄈᆡᆨ〮礬뻔이〮 업〯거든〮 소곰 ᄒᆞᆫ져붐〮과〮 醋총〮 ᄒᆞᆫ 잔〮ᄋᆞᆯ〮 ᄒᆞᆫᄃᆡ〮 글혀〮 여듧〮 分뿐〮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고〮 시혹〮 소고미〮나梅ᄆᆡᆼ實씨ᇙ〮 이〮나 ᄧᆞᆫ〮 것과〮싄 것ᄃᆞᆯ〮히 다〯 어루〮 글혀〮 머귤〮디〮니라〮 又方脚手轉筋赤蓼莖葉細切三合水四合酒二合同煎取四合分作二溫服{{*|}} ᄯᅩ〮 발〮 손 히〮미 옮〯거든〮 블근〮 엿귓〮 줄기〮와〮 닙〮과〮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세〯 홉과〮 믈〮 너〯 !흡!홉!과〮 술 두〯 홉과〮 ᄒᆞᆫᄃᆡ〮 글혀〮 네〮 호블〮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脚轉筋用大蒜磨脚心令遍熱卽差{{*|}} ᄯᅩ〮 밠 히〮미 옮〯거든〮 굴〯근 마ᄂᆞ〮ᄅᆞᆯ〮 밠〮바다〮ᅌᅢ〮 ᄲᅵ븨〮여 두루 덥〯게〮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絞腸沙痛不可忍或展轉在地或起或仆其膓絞縮在腹此是中毒之深湏臾能令人死古方名乾霍亂急用塩一兩熱湯調灌入病人口中塩氣一到腹其痛卽定又將石沙炒令赤色冷水淬之良久澄淸水一二合服之愈{{*|}} ᄯᅩ〮絞교ᇢ〯腸땨ᇰ沙상ㅣ 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야〮 시혹〮 ᄯᅡ해〮 그울며〮 시혹〮 닐〯며〮 시혹〮 업더〮디〮여 그膓땨ᇰ 이〮 ᄇᆡ〮예〮뷔〯트〮러 움주쥐여〮 잇ᄂᆞ니〮 이〮 毒독〮ᄋᆞᆯ〮 마조〮미 기퍼〮 아니〮한 ᄉᆞᅀᅵ〮예〮 사〯ᄅᆞ미〮 죽게〮 ᄒᆞ〮ᄂᆞ니〮 녯〮 方바ᇰ文문에〮 일후미 乾간霍확〮亂롼이〮니 ᄲᆞᆯ리〮 소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 므〮레 프〮러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이베〮 브ᅀᅳ라〮 소고ᇝ 氣킝〮分분이〮 ᄇᆡ〮예〮 들〮면〮 그 알포〮미 곧〮 긋거든〮 ᄯᅩ〮호ᄀᆞᆫ〮 돌〯ᄒᆞᆯ〮 봇가 븕게〮 ᄒᆞ〮야〮 ᄎᆞᆫ〮므〮레 ᄃᆞᆷ가〮안초〮아 ᄆᆞᆯ겨〮 그 믈〮 ᄒᆞᆫ두〯 호블〮 머그〮면〮 됻〯ᄂᆞ〮니라 葛氏備急方霍亂煩悶湊滿者用塩納臍中灸二七壯{{*|}} 霍확亂롼〮ᄒᆞ〮야〮 닶〮가와〮 탸ᇰ〯만ᄒᆞ닐 소고ᄆᆞᆯ〮 ᄇᆡᆺ보개〮 녀코〮 二ᅀᅵᆼ〮七치ᇙ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霍亂心腹脹痛者服乾薑屑三方寸匕{{*|}}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탸ᇰ〯만ᄒᆞ〮야〮 알ᄂᆞ닐〮 乾간薑가ᇰㅅ ᄀᆞᆯᄋᆞᆯ세〯 수〮를 머기〮라〮 又方小蒜一升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之{{*|}} ᄯᅩ〮 호ᄀᆞᆫ 마ᄂᆞᆯ〮 ᄒᆞᆫ 되〮ᄅᆞᆯ〮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生薑}}一斤切以水七升煮取二升分爲三服{{*|}} ᄯᅩ〮 生ᄉᆡᇰ薑가ᇰ ᄒᆞᆫ 斤근을〮 사ᄒᆞ〮라〮 믈〮 닐굽〮 되〮로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세〯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若轉筋桂半夏等分末方寸匕水一升和服{{*|}} ᄯᅩ〮 히〮미 올ᄆᆞ〮!날〮!닐〮! 桂ᄀᆒᆼ〮皮삥와〮 半반〮夏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수〮를〮 믈〮 ᄒᆞᆫ 되〮예〮 프〮러 머그〮라〮 又方生大豆屑酒和服方寸匕{{*|}} ᄯᅩ〮 ᄂᆞᆯ콩 ᄭᆞᆯᄋᆞᆯ〮 수레〮 프〮로ᄃᆡ〯 ᄒᆞᆫ〮 수〮를〮 머그〮!리〮!라〮! 又方治霍亂吐下後大渴多飮則殺人以黃米{{*|卽黍米}}五升水一斗煮之令得三升澄淸稍稍飮之莫飮餘物也{{*|}} ᄯᅩ〮 霍확〮乱롼〮ᄒᆞ〮야〮 吐통〮下ᅘᅡᆼ〮ᄒᆞᆫ 後ᅘᅮᇢ〯에〮 ᄀᆞ자ᇰ〮 목 ᄆᆞᆯ라〮 믈〮 하〮 머그〮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기자ᇰᄡᆞᆯ〮 닷 되〮ᄅᆞᆯ〮 믈〮 ᄒᆞᆫ 마래〮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ᄆᆞᆰ안초〮아〮 젹젹 먹고〮 다ᄅᆞᆫ 믈〮 먹디〮 마롤〮디〮니라〮 又方治霍亂轉筋垂死敗蒲席一握細剉漿水一盞煮汁溫溫頓服{{*|}}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ᅙᅵ〮!히〮!미 올마〯 죽ᄂᆞ닐〮 고툐〮ᄃᆡ〮 헌〯 부들〮 지즑〮 ᄒᆞᆫ 우후〮믈〮 ᄀᆞ〮ᄂᆞ리〮 사ᄒᆞ〮라〮漿쟈ᇰ水ᄉᆔᆼ〯 ᄒᆞᆫ 盞잔〮애〮 글혀〮 汁집〮을〮 ᄃᆞ시ᄒᆞ〮야〮 다〯 머그〮라〮 直指方霍亂吐瀉心腹作痛用炒塩二梡紙包紗護頓其胸前幷腹肚上以熨斗火熨氣透卽蘇續又以炒塩熨其背{{*|}} 霍확亂롼〮 吐통〯瀉샹〯 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커든〮 봇ᄀᆞᆫ〮 소곰 두〯보ᅀᆞ〮ᄅᆞᆯ〮 죠ᄒᆡ〮에〮 ᄡᆞ〮고〮 紗상로〮 ᄢᅳ려〮 가ᄉᆞᆷ〮과〮 ᄇᆡ〮예어ᇇ고〮 다리〮우리〮로〮 블〮 다마 다려〮 氣킝〮分분이〮ᄉᆞᄆᆞᄎᆞ!먼〮!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ᄯᅩ〮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드ᇰ을〮 熨ᅙᅮᇙ〮ᄒᆞ라〮 聖惠方霍亂吐不止欲死 生薑{{*|二兩}}牛糞三合右以水三大盞煎至一盞半去滓分溫三服{{*|}} 霍확〮亂롼〮ᄒᆞ〮야〮 吐통〯ᄅᆞᆯ〮 그치〮디 몯〯ᄒᆞ〮야〮 죽ᄂᆞ닐〮 生ᄉᆡᇰ薑가ᇰ 두〯 兩랴ᇰ〯과〮 ᄉᆈ〯ᄯᅩᇰ 서〯 호ᄇᆞᆯ〮 믈〮 세〯 큰〮 盞잔〮애〮 글혀〮 ᄒᆞᆫ 盞잔〮 半반〮애〮 니르〮커든〮 滓ᄌᆡᆼ〮 잇〯고〮 ᄃᆞ시 ᄒᆞ〮야〮 세〯 버네 머그〮라〮 經驗秘方治霍亂吐瀉丁香七枚細嚼新汲水送下如不能嚼硏細涼水調下亦可{{*|}} 霍확亂롼〮 吐!통〮!통〯!瀉샹〯ᄅᆞᆯ〮 고툐〮ᄃᆡ〮丁뎌ᇰ香햐ᇰ 닐굽〮 나〯ᄎᆞᆯ〮 ᄂᆞ로니〮 십고〮 ᄀᆞᆺ 기룬〮 믈〮로 ᄂᆞ리〮오ᄃᆡ〮 ᄒᆞ〮다가〮 십디〮 몯〯거든〮 ᄀᆞ〮ᄂᆞ리〮 ᄀᆞ〮라 ᄎᆞᆫ〮므〮레 프〮러 ᄂᆞ리옴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菉豆 胡椒{{*|各七七粒}}右擣爲末新汲水調服不拘時{{*|}} ᄯᅩ〮菉록〮豆뚜ᇢ〮 와〮胡ᅘᅩᆼ椒죠ᇢ 와 各각〮 닐굽〮닐굽〮 나〯ᄎᆞᆯ〮 디허〮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 머구〮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말〯라〮 醫方集成姜塩飮治乾霍亂欲吐不吐欲瀉不瀉 塩{{*|一兩}}生薑{{*|切半兩}}右同炒令色變以水一梡煎溫服甚者加童子小便一盞{{*|}} 薑가ᇰ塩염飮ᅙᅳᆷ〯 은〮 乾간霍확〮亂롼〮이〮 吐통〯코져〮 호〮ᄃᆡ 吐통〯티〮 몯〯ᄒᆞ고 즈츼〮오져〮 호〮ᄃᆡ 즈츼〮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소곰 ᄒᆞᆫ 兩랴ᇰ〯과〮 生ᄉᆡᇰ薑가ᇰ 사ᄒᆞ〮로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ᄃᆡ 봇가 비〮치 다ᄅᆞ거든〮 믈〮 ᄒᆞᆫ 보ᅀᆞ〮로〮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甚씸〯ᄒᆞ니〮란〮 아ᄒᆡ〮 오좀〮 ᄒᆞᆫ 盞잔ᄋᆞᆯ〮 조쳐〮 머기〮라〮 壽域神方霍亂已死上屋喚魂以諸治皆至而猶不差捧病覆臥之伸兩臂對以繩度兩肘尖頭依繩下夾背脊大骨空中去脊各一寸灸之百壯不治者可灸肘椎已試數百人皆灸畢卽起坐驗{{*|}} 霍확亂롼〮ᄒᆞ〮야〮 ᄒᆞ마〮 죽거든〮 집 우희〮 올아〮 넉슬〮 브르고〮 여러〮가짓〮 고툐〮ᄆᆞᆯ〮 다〯 호〮ᄃᆡ ᄉᆞᆫᄌᆡ〮 됴〯티 아니〮커든〯 病뼈ᇰ〮ᄒᆞ닐〮업더리〮와다 뉘이〮고〮 두〯 ᄇᆞᆯᄒᆞᆯ〮 펴고〮 노ᄒᆞ〮로 두〯 ᄇᆞᆯ톡〯 그〮틀 견주〮고〮 노ᄒᆞᆯ〮브터〮 드ᇰᄆᆞᄅᆞᆺ ᄲᅧ〮를〮 ᄢᅧ〮 가온〮ᄃᆡ 뷔우〮고〮 드ᇰᄆᆞᆯᄅᆞ〮로〮셔〮 各각〮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ᅮ〮ᄃᆡ 됴〯티 아닌〮ᄂᆞ니〮란 肘듀ᇢ〯椎ᄄᆔᆼᄅᆞᆯ〮 ᄯᅳ〮라 ᄒᆞ마〮 數슝〮百ᄇᆡᆨ〮人ᅀᅵᆫ을〮 디〯내〮요니〮 다〯ᄯᅩᆷ〮 ᄆᆞᄎᆞ〮면〮 즉〮재 니러〮 안ᄌᆞ니〮라〮 又方治絞腸沙腹痛不可忍者嘔吐泄瀉及中署霍亂心煩渴不省人事兼治急心痛白蜜馬糞二味不以多少擂新水化下去滓頓服一碗雖曰穢汚却有神功無蜜亦可{{*|}} ᄯᅩ〮 絞교ᇢ〯腸땨ᇰ沙상ㅣ ᄇᆡ〮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니와〮 吐!틍〯!통〯!ᄒᆞ고〮즈츼〮ᄂᆞ니〮와〮 中듀ᇰ〮暑셩〯ᄒᆞ며〮 霍확〮亂롼〮ᄒᆞ〮야〮 ᄆᆞᅀᆞ미〮 煩뻔渴카ᇙ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ᄂᆞ닐〮 고티〮고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알힐〮 조쳐〮 고티〮ᄂᆞ니〮 ᄒᆡᆫ〮 ᄢᅮᆯ〮와〮 ᄆᆞᆯᄯᅩᇰ과〮 두〯 가!저〮!지〮!를〮 새〮 므〮레 프〮러 즛의 앗〯고〮 ᄒᆞᆫ 보ᅀᆞ〮ᄅᆞᆯ〮 다〯 머그〮라〮 비록〮 더〯러〮우나〮 神씬奇긩ᄒᆞᆫ 功고ᇰ이〮 잇ᄂᆞ니〮 ᄢᅮᆯ〮 업〯서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用收蠶子的舊紙一幅務要去蠶子潔淨燒灰爲末用熱酒調服立效{{*|}} ᄯᅩ〮 누에〮ᄡᅵ〮 난 죠ᄒᆡ〮 ᄒᆞᆫ 張댜ᇰᄋᆞᆯ〮 누에〮ᄡᅵ〮ᄅᆞᆯ〮 조〮히 업〯게 ᄒᆞ고〮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술로〮 프〮러 머그〮면〮 즉〮자히〮 됻〯ᄂᆞ〯니라〮 又方治急肚痛絞膓沙用久乾猪糞一塊如指頭大用砂仁二箇碾爲末白湯調服妙{{*|}} ᄯᅩ〮 과ᄀᆞᆯ이〮 ᄇᆡ〮 알ᄑᆞᆫ 絞교ᇢ〯腸땨ᇰ沙상ᄅᆞᆯ〮 고툐〮ᄃᆡ 오래〮 ᄆᆞᄅᆞᆫ 도ᄐᆡ〮 ᄯᅩᇰ ᄒᆞᆫ 무저기〮 소ᇇ가락만〮 ᄒᆞ니〮와〮縮슉〮砂상 두〯 나〯ᄎ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尸厥第十== 經驗良方其證奄然死去四肢逆冷不省人事腹中氣走如雷鳴 焰焇{{*|半兩}}硫黃{{*|一兩}}右細硏如粉分作三服每服用好舊酒一大盞煎覺焰起傾於盞內盖着溫灌與服如人行五里又進一服不過二服卽醒兼灸頭上百會穴四十九壯兼臍下氣海丹田三百壯覺身體溫暖卽止{{*|}} 그 證지ᇰ〮이〮 믄득〮 죽거든〮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고〮 ᄇᆡ〮 안해〮 氣킝分분이〮ᄃᆞᆫ뇨〮ᄃᆡ 울〮에 ᄀᆞᆮ〮ᄒᆞ니〮 焰염〮焇쇼ᇢ 半반〮 兩랴ᇰ〯과〮硫류ᇢ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세〯 服뽁〮애〮 ᄂᆞᆫ화〮 ᄒᆞᆫ 服뽁〮애〮 됴〯ᄒᆞᆫ 무근〮 술 큰〮 ᄒᆞᆫ 잔〮애〮 글혀〮 焰염〮焇쇼ᇢㅣ 니러〮나〮거든〮 잔〮애〮 브ᅀᅥ〮 둡고〮 ᄃᆞ시 ᄒᆞ〮야〮 브ᅀᅥ〮 머기〮고〮 사〯ᄅᆞ미〮 五ᅌᅩᆼ〮里링〯예〮 갈 만〮ᄒᆞ〮야〮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 즉〮재 ᄭᆡ〮ᄂᆞ니〮 머릿〮 百ᄇᆡᆨ〮會ᅘᅬᆼ〮穴ᅘᆑᇙ〮ᄋᆞᆯ〮 四ᄉᆞᆼ〮十씹〮九구ᇢ〯 壯자ᇰ〮ᄋᆞᆯ〮 ᄯᅳ〯고〮 臍쪵下ᅘᅡᆼ〯와〮氣킝〮海ᄒᆡᆼ〯 와〮丹단田뗜 ᄋᆞᆯ〮 三삼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ᅥ〮 모〮미 덥〯거든〮 말〯라〮 如無前藥用附子重七錢許炮熟去皮臍爲末分作二服每服用酒三盞煎至一盞溫服{{*|}}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附뿡〮子ᄌᆞᆼ〯 므〮긔 닐굽〮 돈〯 남ᄌᆞᆺᄒᆞ닐〮 炮뽀ᇢᄒᆞ〮야〮 니겨〮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細솅〮末마ᇙ〮ᄒᆞ〮야〮 ᄂᆞᆫ화〮 두〯 服뽁〮애〮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술 세〯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애〮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又無附子用生薑自然汁半盞酒一盞煎百沸倂灌二服{{*|}} ᄯᅩ〮 附뿡〮子ᄌᆞᆼ〯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 半반〮 잔〮ᄋᆞᆯ〮 술 ᄒᆞᆫ 잔〮ᄋᆞᆯ〮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솟글커든〮 조쳐〮 브ᅀᅩ〮ᄃᆡ〮 두〯 服뽁〮애 ᄒᆞ라〮 聖惠方治尸厥脉動而無氣氣閉不通故正如死聽其耳中脩脩有如嘯聲而股內暖者是也不治三日當死宜服朱砂丸 朱砂{{*|細硏}}雄黃{{*|細硏}}附子{{*|各三分炮裂去皮臍}}桂心{{*|一兩半}}巴豆{{*|二十枚去皮心硏}}右件藥擣羅爲末入硏了藥令勻煉蜜和丸如麻子大每服不計時候以粥飮下五丸不知更下二丸若利多則止之{{*|}} 尸싱厥궈ᇙ〮을〮 고툐〮ᄃᆡ〮 脉ᄆᆡᆨ〮이〮뮈유〮ᄃᆡ〮 氣킝〮分분 업〯스며〮 氣킝〮分분이〮 마켜〮 通토ᇰ티〮 몯〯ᄒᆞᆯᄉᆡ〮 正져ᇰ〮히〮 주그〮니 ᄀᆞᆮ〮ᄒᆞ니〮 그 귀예〮 드로〮ᄃᆡ〮 脩슈ᇢ脩슈ᇢᄒᆞ〮야〮 ᄑᆞ〮라ᇝ 소ᄅᆡ〮 ᄀᆞᆮ〮고〮 다리 안〮히 더우〮니 이〮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ᄋᆞᆳ〮마〯내 죽ᄂᆞ니〮 朱즁砂상丸ᅘᅪᆫᄋᆞᆯ〮 머귤디니〮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ᆯ〮오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나리 ᄀᆞᆯ〮오 附뿡〮子ᄌᆞᆼ〯ᄅᆞᆯ〮 各각〮 三삼分뿐〮을 炮뽀ᇢᄒᆞ〮야〮 ᄢᅢ혀〮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桂ᄀᆒᆼ〮心심 ᄒᆞᆫ 兩랴ᇰ〯 半반〮과〮巴방豆뚜ᇢ〮 스〮믈 나〯ᄎᆞᆯ〮 것과〮 소〯ᄇᆞᆯ〮 앗〯고 ᄀᆞ〮라 이 藥약〮을〮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고〮 몬져 ᄀᆞ〮론 藥약〮ᄋᆞᆯ〮 녀허〮 골오〮 섯거〮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 지ᅀᅩ〮ᄃᆡ 열ᄡᅵ〮만〮 케〮 ᄒᆞ〮야〮 머규〮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粥쥭〮므〮레 다ᄉᆞᆺ〮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오고〮 아〯디 몯〯거든〮 다시〮 두〯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올디〮니 즈츼〮요ᄆᆞᆯ〮 하〮 ᄒᆞ〯야ᄃᆞᆫ〮 그치〮라〮 葛氏備急方尸蹶之病卒死而脉猶動灸鼻人中七壯又灸陰囊下去下部一寸百壯若婦人灸兩乳中閒又云爪刺人中良久又針人中至齒立起{{*|}} 尸싱厥궈ᇙ〮ㅅ 病뼈ᇰ〮이〮 과ᄀᆞᆯ이〮 주구〮ᄃᆡ 脉ᄆᆡᆨ〮이〮 ᄉᆞᆫᄌᆡ〮 動또ᇰ〯ᄒᆞ〮ᄂᆞ니〮 人ᅀᅵᆫ中듀ᇰ을〮 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고 ᄯᅩ〮陰ᅙᅳᆷ囊나ᇰ 아래〮 밋굼그〮로셔〮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ᄒᆞ〮다가〮 겨〯지비〮어든〮 두〯 졋〮 가온〮ᄃᆡᆯ〮 ᄯᅳ〮라〮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소ᇇ토ᄇᆞ〮로〮 오래〮ᄣᅵᆯ어〮 시며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針짐호〮ᄃᆡ 니〮예 다ᄃᆞᆮ게〮 ᄒᆞ면〮 즉〮자히〮 니〯ᄂᆞ〮니라〮 又方菖蒲屑納鼻兩孔中吹之令人以桂屑着舌下{{*|}}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녀코〮 불〯오〮 사〯ᄅᆞ미〮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로〮 혀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熨其兩脅下取竈中墨如彈丸漿水和飮之湏臾三四{{*|}} ᄯᅩ〮 두〯 녀블 熨ᅙᅮᇙ〮ᄒᆞ고 브ᅀᅥ〮븻〮 검듸〮여ᇰ을〮彈딴子ᄌᆞ〯 만〮 ᄒᆞ닐〮 가져〮 漿쟈ᇰ水ᄉᆔᆼ예〮 프〮러 머교〮ᄃᆡ〮 아니〮한 ᄉᆞᅀᅵ〮예〮 서〯너〮 번 ᄒᆞ〮라〮 又方針百會入三分補之又針足大指甲下內側去甲三分又足指甲上各入三分{{*|}} ᄯᅩ〮 百ᄇᆡᆨ〮會ᅘᅬᆼ〮ᄅᆞᆯ〮 針짐호〮ᄃᆡ 三삼分뿐〮에 들〮에 ᄒᆞ〮야〮 補봉〯ᄒᆞ고〮 ᄯᅩ〮 밠〮 엄지〮가락톱〮 아래〮 안〮녁 겨틀〮 토〮ᄇᆞ로〮셔 三삼分뿐〮만 ᄒᆞᆫᄃᆡ〮 針짐ᄒᆞ고〮 ᄯᅩ〮 밠〮톱 우흘〮 各!긱〮!각〮!各각〮 三삼分뿐〮이〮 들〮에 針짐ᄒᆞ라〮 又方灸膻中穴二十八壯{{*|}} ᄯᅩ 膻선中듀ᇰ穴ᅘᆑᇙ〮을〮 二ᅀᅵᆼ〮十씹〮八바ᇙ〮壯자ᇰ〮을〮 ᄯᅳ〮!리〮!라〮! ==纏喉風喉閉第十一<sub>喉腫舌腫失音附</sub>== 經驗良方其證先兩日胸膈氣緊取氣短促驀然咽喉腫痛手足厥冷氣閉不通頃刻不治 巴豆{{*|七粒三生四熟生者去殼生硏熟者去殼燈上燒存性}}雄黃一塊{{*|如皂角子大透明者細硏}}鬱金一箇{{*|蟬肚者硏爲末}}右三味硏末每服半字用茶淸兩呷許調下口噤咽塞用小竹管納藥吹入喉中湏臾吐利卽醒{{*|}} 그 證지ᇰ〮이〮 몬져 이트〮를〮 가ᄉᆞᇝ〮氣킝〮分분이〮 답답ᄒᆞ〮야〮 氣킝〮分분ᄋᆞᆯ〮 取츙〯호〮미 뎌르고〮 ᄌᆞᆺ다가〮 믄〮득〮 모기〮 븟고〮 손〮바〮리 ᄎᆞ〮고 氣킝〮分분이〮 마가〮 通토ᇰ티〮 몯〯ᄒᆞ〮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고티〮디〮 몯〯ᄒᆞ〮ᄂᆞ〮니라〮 巴방豆뚜ᇢ〮 닐굽〮 나〯ᄎᆞ로〮 세〯흔 生ᄉᆡᇰ이〮오〮 네〯흔 니겨〮 生ᄉᆡᇰ으〮란〮 거피〮 밧겨〮 ᄀᆞᆯ오 니그〮니란〮 거피〮 밧기〮고〮 드ᇰ자ᇇ〮브〮레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라〮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기〮 皂쪼ᇢ〯角각〮 ᄡᅵ〮만〮 ᄒᆞ니〮 ᄉᆞᄆᆞᆺ ᄇᆞᆯᄀᆞ〮닐〮 ᄀᆞ〮ᄂᆞ〮리〮 ᄀᆞᆯ〮라〮鬱ᅙᅮᇙ〮金금 ᄒᆞᆫ 낫〯 ᄆᆡ〮야ᄆᆡ〮 ᄇᆡ〮 ᄀᆞᆮ〮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세〯 가짓〮 마〮ᄉ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字ᄍᆞᆼ〮ᄅᆞᆯ〮 머교〮ᄃᆡ 찻믈〮 두〯 머굼〮만〮 ᄒᆞᆫᄃᆡ〮 프〮러 ᄂᆞ리〯오라〮 입〮 마고〮믈오 모기〮 마고〮 븟거든〮 져〮근 대〮로ᇰ애 藥약〮ᄋᆞᆯ〮 녀허〮 목 안해〮 불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吐통〯ᄒᆞ〮고〮 즈츼〮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無前藥用川升麻四兩剉碎水四椀煎一椀灌服{{*|}}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넉〯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네〯 보ᅀᆞ애〮 ᄒᆞᆫ 보ᅀᆡ〮 ᄃᆞ외에〮 글혀〮 브ᅀᅳ라〮 又無川升麻用皂角三莖搥碎挼一盞灌服或吐或不吐卽安{{*|}} ᄯᅩ〮 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업〯거든〮 皂쪼ᇢ〯角각〮 세〯 줄!길〮!걸〮! !ᄯᅳ!ᄯᅮ!드〮려〮 ᄇᆞᆺ아〮 ᄒᆞᆫ 자내〯 프〮러 브ᅀᅳ라〯 시혹〮 吐통〯커나〮 시혹〮 吐통〯티〮 아니〮커나〮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朱氏集驗方吹喉散治咽喉腫痛 朴硝{{*|四兩別硏}}甘草{{*|一兩生末}}右硏勻每用半錢乾擦喉如腫甚用竹管子吹入喉中爲佳{{*|}} 吹ᄎᆔᆼ喉ᅘᅮᇢ散!신!산! 은〮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朴박〮硝쇼ᇢ 넉〮 兩랴ᇰ〯ᄋ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ᄒᆞᆫ 兩량〯ᄋᆞᆯ〮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 半반〮 돈〯ᄋᆞᆯ〮 ᄆᆞᄅᆞ닐〮 모긔〮 ᄇᆞᆯ로〮ᄃᆡ〮 브ᅀᅮ〮미 甚씸〯커든〮 대〮로ᅌᆞ〮로 부러〮 목 안해 드〮류미〮 됴〯ᄒᆞ〮니라〮 經驗秘方治懸壅暴腫 白礬 塩右等分爲末以筯頭點少許在懸壅上{{*|}} 목져〮지 과글이 브ᅀᅳ닐〮 고툐〮ᄃᆡ 白ᄈᆡᆨ〮礬뻔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ᄇᆞᄅᆞ라〮 又方乾薑半夏等分爲末以少許着舌下{{*|}} ᄯᅩ〮 乾간薑가ᇰ과〮 半반〮夏!ᅘᅵᆼ!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혀 아래〮 녀흐라〮 又方一字散主喉痺氣塞不通欲死者 雄黃{{*|一分別硏}}蝎梢{{*|七枚}}猪牙皂角{{*|七鋌}}白礬{{*|生硏一錢}}藜蘆{{*|一錢}}右細末每用一字吹入鼻中頑涎卽吐效{{*|}} ᄯᅩ〮一ᅙᅵᇙ〮字ᄍᆞᆼ散산〮 은〮 모기〮 브ᅀᅥ〮 氣킝〮分분이〮 !아!마!가〮 通토ᇰ티〮 몯〯ᄒᆞ〮야 죽ᄂᆞ닐 主즁〮ᄒᆞ니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分뿐을〮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蝎허ᇙ〮梢쇼ᇢ 닐굽〮 낫〯과〮 皂쪼ᇢ〯角각 닐굽〮 鋌뗘ᇰ〯과 白ᄈᆡᆨ礬뻔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ᄀᆞ〮라 ᄒᆞᆫ 돈〯과〮藜래蘆 롱 ᄒᆞᆫ 돈〯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부러 녀허〮 건〯추〮믈 吐통〯ᄒᆞ면〮 됻〯ᄂᆞ〮니라 又方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馬㗸鐵{{*|一具}}右用水三盞煮一盞溫服又蒜塞耳鼻中{{*|}} ᄯᅩ〮 모기〮 막고〮 ᄀᆞ자ᇰ〮 브ᅀᅥ〮 ᄲᅡ매〮 닛〯고〮 氣킝分분을〮 吐통〯호〮미 ᄌᆞᄌᆞ〮면〮 일후〮미 ᄆᆞᆯ목브ᅀᅮ〮미니〮馬망〯含ᅘᅡᆷ쇠〮 ᄒᆞ나ᄒᆞᆯ〮 믈〮 세〯 잔〮ᄋᆞ로〮 ᄒᆞᆫ 잔〮 ᄃᆞ외!어〮!에〮!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마ᄂᆞ〮ᄅᆞᆯ〮 귀〮와〮 고해〮 고ᄌᆞ라〮 又方如聖散治舌腫喉痺 川芎 桔梗 薄苛葉 甘草 盆硝{{*|各等分}}右爲細末每用一錢乾摻{{*|}} ᄯᅩ〮如ᅀᅧᆼ聖셔ᇰ〮散산 은〮 혀〮 븟고〮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川!ᄌᆑᆫ!ᄎᆑᆫ!芎쿵 과〮 桔겨ᇙ〮梗겨ᇰ〯과〮薄팍〮荷ᅘᅡᆼㅅ 닙〮과〮 甘감草초ᇢ〯와〮盆뽄硝쇼ᇢ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곰〮 ᄆᆞᄅᆞ닐〮 ᄇᆞᄅᆞ라〮 又方舌忽腫硬塞悶百草霜食塩等分井水調塗舌上卽安{{*|}} ᄯᅩ 혜〮 忽호ᇙ然ᅀᅧᆫ히〮 브ᅀᅥ〮 세웓고〮 답답ᄒᆞ〮거든〮 百ᄇᆡᆨ〮草초ᇢ〯霜사ᇰ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우믌〮 므〮레 프〮러 혀〮에〮 ᄇᆞᄅᆞ면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直指方白藥散治喉中熱塞腫疼散血消痰白藥 朴硝{{*|等分}}右爲末以小管子吹入喉{{*|}} 白ᄈᆡᆨ〮藥약散산 은〮 목 안〮히 더워〮 마고〮 브ᅀᅳ닐〮 고티〮ᄂᆞ니〮 피〮ᄅᆞᆯ〮 슬〮며 痰땀〮을〮 노기〮ᄂᆞ니〮라 白ᄈᆡᆨ〮藥약〮!괴〮!과〮!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근 대〮롱ᄋᆞ〮로 부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纏喉風及喉痺用蠶退紙燒灰存性煉蜜丸如雞頭大含化嚥津{{*|}} 纏뗜喉ᅘᅮᇢ風보ᇰ과〮 목 브ᅀᅳ닐〮 누에〮ᄡᅵ〮 난 죠ᄒᆡ〮ᄅᆞᆯ〮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을〮 지ᅀᅩᄃᆡ〮雞곙頭뚜ᇢ實씨ᇙ 만〮 게〮 ᄒᆞ〮야〮 머구〮머 노겨〮 춤〮 ᄉᆞᇝ기〮라〮纏뗜喉ᅘᅮᇢ風보ᇰ 은〮 과ᄀᆞᄅᆞᆫ목더시〮라〮 又方纏喉風氣不通雄黃一塊新汲水磨急灌吐卽差{{*|}} ᄯᅩ 纏뗜喉ᅘᅮᇢ風보ᇰ에〮 氣킝分분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글〮 새〮 므〮레 ᄀᆞ〮!리〮!라〮! ᄲᆞᆯ리〮 브ᅀᅥ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咽喉腫閉 甘草 白礬{{*|等分}}右爲細末每以半錢許入口中津液嚥下{{*|}} ᄯᅩ 모기〮 브ᅀᅥ〮 마ᄀᆞ〮닐〮 고툐〮ᄃᆡ〮 甘감草초ᇢ〯와 白ᄈᆡᆨ〮礬뻔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돈〯 남ᄌᆞ샤 입〮 안해〮 녀허〮셔〮 추〮므로〮 ᄂᆞ리〮오라〮 聖惠方咽喉閉不通 硇砂 馬牙硝{{*|等分}}右細硏令勻用銅筯頭於水中 蘸令濕搵藥末點於咽喉中{{*|}} 모기〮 마가〮 通토ᇰ티〮 아니ᄒᆞ닐〮 硇뇨ᇢ砂상와〮 馬망〯牙ᅌᅡᆼ硝쇼ᇢ 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놋〮졋〮 그〮트로〮 므〮레 저〮져〮 藥약〮ᄋᆞᆯ〮 무텨〮 목 안해〮 디그〮라〮 又方咽喉閉塞口噤雄雀糞細硏每服半錢以溫水調灌{{*|}} ᄯᅩ〮 모기〮 막고〯 입〮 버〯리디〮 몯〯ᄒᆞ닐 수〮새〯 ᄯᅩᆼ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을〮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ᅳ라〮 又方咽喉生穀賊若不急治亦能殺人用針刺破令黑血出後含馬牙硝一小塊子嚥津卽差{{*|}} ᄯᅩ〮 모ᄀᆡ〮穀곡〮賊쪽〮 이〮 나〮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ᄯᅩ〮 能느ᇰ히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 針짐으〮로〯 허러〮 거믄〮 피나게 ᄒᆞ고〮 馬망〮牙ᅌᅡᆼ硝쇼ᇢ ᄒᆞᆫ 져〯근 무저글〮 머구머 추믈 ᄉᆞᆷᄭᅵ면〮 즉재 됻〯ᄂᆞ〮니〮라〮 穀곡賊쪽〮은〮 穀곡〮食씩〮에〮 몯〯내〮ᄑᆡᆫ〮 이사기〮 굳고〮!ᄭᅵ!ᄭᅡ!ᄭᅡᆯᄒᆞᆫ 거시〮니〮 몰〯라 ᄡᆞ〮리〮라〮 머고면〮 목 안히 브ᅀᅥ〮 通토ᇰ티〮 아니〮ᄒᆞ〮ᄂᆞ니〮 일후〮믈 목 안해〮 穀곡賊쪽〮 나다〮 ᄒᆞ〮ᄂᆞ〮니라〮 又方以馬牙硝細硏緜裹半錢含化嚥津以差爲度{{*|}} ᄯᅩ〮 馬망〯牙ᅌᅡᆼ硝쇼ᇢ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ᄋᆞᆯ소오매〮 ᄢᅳ려〮 머구머 노겨〮 춤〮 ᄉᆞᆷᄭᅭ〮ᄃᆡ〮 됴〯ᄒᆞᆯ ᄭᆞ자ᇰ ᄒᆞ라 又方咽喉腫痛語聲不出豉半升以水二大盞煎至一大盞去滓分爲二服相繼稍熱服之令有汗出卽差{{*|}} ᄯᅩ〮 목 브ᅀᅥ 소ᄅᆡ〮 나디〮 아니〮커든〮 젼국 半반〮 되〮ᄅᆞᆯ〮 믈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큰〮 잔애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두〯 服뽁〮애〮 ᄂᆞᆫ화〮 서르 닛우〮 져〯기 덥〯게〮 ᄒᆞ〮야〮 머거〮 ᄯᆞᆷ〮나게〮 ᄒᆞ면〮 곧〮 됻〯ᄂᆞ〮니라〮 壽域神方舌忽脹出口外雞冠上刺血磁盞盛浸舌就嚥下卽縮{{*|}} 혜〮 과글이 부러〮나〮 입〮 밧긔〮 나〮거든〮 ᄃᆞᆯᄀᆡ〮 벼〮츨〮 ᄡᅥᆯ어〮 피〮내〯야 沙상〮잔애〮 담〯고〮 혀를〮 ᄃᆞᆷ가〮셔 ᄉᆞᆷᄭᅵ〮면〮 즉〮재움처〮 드〮ᄂᆞ니라〮 ==骨鯁第十二== 醫方集成治骨鯁入喉 縮砂 甘草{{*|各等分}}右爲末緜裹少許噙之旋旋嚥津久之隨痰出{{*|}} ᄲᅨ〮 모긔〮거〯닐〮 고툐〮ᄃᆡ 縮슉砂상와〮 甘감草초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소오!마〮!ᄆᆡ〮! 져〯기 ᄢᅳ〮려〮 머구〮머 젹젹〮 춤〮 ᄉᆞᆷᄭᅵ〮면〮 오라〮면〮 痰땀 조차〮 나〮ᄂᆞ〮니라〮 又方野紵根洗淨不以多少搗爛如泥每用龍眼大如被雞骨所傷以雞羹化下如被魚骨所傷以魚羹汁化下{{*|}} ᄯᅩ〮 모싯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디호〮ᄃᆡ 니균〮 ᄒᆞᆰᄀᆞ〮티 ᄒᆞ〮야〮 龍료ᇰ眼ᅌᅡᆫ〯만〮 ᄒᆞ니〮ᄅᆞᆯ〮 ᄃᆞᆯ긔〮 ᄲᅧ〮에〮 傷샤ᇰ커든〮 ᄃᆞᆰ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고〮 고깃〮 ᄲᅧ〮에 傷샤ᇰ커든〮 生ᄉᆡᇰ鮮션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라 經驗良方治骨硬不下先嚼白茯苓一錢重次以白礬湯嚥下{{*|}} ᄲᅨ〮 거러〮 ᄂᆞ리〮디〮아닌〮ᄂᆞ닐〮 고툐〮ᄃᆡ〮 몬져白ᄈᆡᆨ〮茯뽁〮苓려ᇰ ᄒᆞᆫ 돈〯ᄋᆞᆯ 십고 버거〮白ᄈᆡᆨ〮礬뻔湯타ᇰ〮으〮로〮 ᄂᆞ리〮오라〮 又方治魚骨用白膠香細細呑下{{*|}} ᄯᅩ〮 믌〮고깃〮 ᄲᅧ〮걸우〮닐〮 고툐〮ᄃᆡ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을〮 젹젹 ᄉᆞᆷᄭᅧ〮 ᄂᆞ리〮오라〮 又方皂角少許吹入鼻{{*|}} ᄯᅩ〮 皂쪼ᇢ〮角각〮을〮 져〯기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口念鸕鶿鸕鶿立愈{{*|}} ᄯᅩ〮 이베〮 鸕롱鶿ᄍᆞᆼ 鸕롱鶿ᄍᆞᆼᄒᆞ〮야〮 念념〮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鸕롱鶿ᄍᆞᆼᄂᆞᆫ〮 가마오〮디라〮 朱氏集驗方治食鯉魚骨硬貫衆不以多少濃煎汁一盞半分三服幷進連服三劑{{*|}} 鯉링〯魚ᅌᅥᆼ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貫관〮衆쥬ᇰ〮을〮 두터이〮 글혀〮 즈〮블〮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세〯 服뽁〮애〮 ᄂᆞᆫ화〮 다〯 머구〮ᄃᆡ 닛우〮 세〯 劑쪵〮ᄅᆞᆯ〮 머그〮라〮 又方巧匠取喉鉤將繭剪如錢大用物搥四面令軟以油潤之仍中通一竅先穿上鉤線次穿數珠三五枚令兒正坐開口漸添引數珠挨之到喉覺至繫鉤處乃以向下一推其鉤自下而脫卽向上急出之見蠶錢向下裹定鉤線鬚而出並無所損{{*|}} ᄯᅩ〮 工고ᇰ巧교ᇢ〯ᄒᆞᆫ 匠쨔ᇰ〮ㅅᅀᅵᆫ이〮 아ᄒᆡ〮 모ᄀᆡ〮 건〯 낙〮ᄉᆞᆯ〮 아ᅀᅩ〮ᄃᆡ〮 고티〮ᄅᆞᆯ〮 돈〯ᄀᆞ〮티 ᄇᆞ〮리고〮 네〯 面면〮을〮 ᄯᅮ드〮려 보ᄃᆞ〮랍게〮 ᄒᆞ고〮 기르〮므로〮 저지〮고〮 가온〮ᄃᆡ〮 ᄒᆞᆫ 구무들워〮 몬〮져낛〮긴헤〮 ᄢᅦ〯오〮 버거〮念념〮珠즁 세〯다ᄉᆞᆺ〮 나〯ᄎᆞᆯ〮 ᄢᅦ〯오〮 아ᄒᆡ〮로〮 바ᄅᆞ 아ᇇ고〮 입〮버〯리〮게 코〮 졈〯졈〯 念념〮珠즁를〮 더〮 미러〮 모ᄀᆡ〮 다ᄃᆞᆮ게〮 ᄒᆞ〮야〮 낛〮 ᄆᆡ욘〮 ᄃᆡ〮 니른〮가〮 식브거늘〮 아래〮로〮 ᄒᆞᆫ 번 미〯니 그 낙〮시 제〯 ᄂᆞ려〮 버서〮디〮거늘 즉〮재 우흐〮로 時씽急급〮히〮 내〯오〮 고티〮ᄅᆞᆯ〮 보니〮 아래〮로 낙〮줄〮와〮 낛〮미느〮를〮 ᄢᅳ러〮 나〮 귿〮 헌〯 ᄃᆡ 업〯더라〮 聖惠方治食魚骨鯁以魚網燒灰細硏水調服一錢又方以魚網䨱頭立下{{*|}} 믌〮고기〮 먹다가〮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고깃〮 그〮므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 그〮므를〮 머리〮예〮 두프〮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含水獺骨立出或爪亦得{{*|}} ᄯᅩ〮 水ᄉᆔᆼ〯獺타ᇙ〮의〮 ᄲᅧ〮를〮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 시혹〮 밠〮톱〮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以牛筋水浸細擘以線繫如彈子大持線端呑之入喉至哽處徐徐引之鯁着筋卽出{{*|}} ᄯᅩ〮 ᄉᆈ〯 히〮믈〮 므〮레 ᄃᆞᆷ가〮 ᄀᆞ〮ᄂᆞ리〮 ᄧᆡ〮야〮 실〯로〮 ᄆᆡ요〮ᄃᆡ〮 彈딴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싨〯그〮틀 잡고〮 ᄉᆞᆷᄭᅧ〮 모ᄀᆡ〮 드〮려 ᄲᅧ〮 건〯 ᄃᆡ 니르〮거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ᄃᆞᆼᄀᆡ〮면〯 ᄲᅧ〮 히〮메 바켜〮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以虎糞或狼糞燒灰細硏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ᄯᅩᆼ이〮나〮 시혹〮 일〮희 ᄯᅩᆼ이〮나〮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虎骨或狸骨擣細羅爲散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ᄲᅨ〮나〯 시혹 ᄉᆞᆯ긔〮 ᄲᅨ〮나 디허〮 ᄀᆞ〮ᄂᆞ리〮처〮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硇砂半錢口中咀嚼嚥之立下{{*|}} ᄯᅩ〮 硇뇨ᇢ砂상 半반〮 돈〮ᄋᆞᆯ〮 이베〮 시버〮 ᄉᆞᆷᄭᅵ〮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治誤呑鉤若線猶在手中者莫引之但急以珠璫若薏苡子輩穿貫着線稍稍令推至鉤處小小引之則出{{*|}} ᄯᅩ〮 낙〮ᄉᆞᆯ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ᄒᆞ〮다가〮 긴〮히 소내〮 잇ᄂᆞ닌〮 ᄃᆞᇰᄀᆡ〮디 말〯오〮 ᄲᆞᆯ리〮 구스〮리나〮 율믜나 긴헤〮 ᄢᅦ〯어〮 졈〯졈〯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젹젹 ᄃᆞᇰᄀᆡ〮면〮 나〮ᄂᆞ〮니라〮 又方以琥珀珠着線貫之推令前入至鉤又復推以索引出矣或水精珠亦佳無珠諸堅實物磨令滑作孔用之{{*|}} ᄯᅩ〮琥홍珀ᄑᆡᆨ〮 구스〮를〮 긴헤 ᄢᅦ〮여〮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ᄯᅩ〮 미러〮혀면〮 나〮ᄂᆞ〮니라〮 시혹〮水ᄉᆔᆼ〯精져ᇰ 도〮 ᄯᅩ〮 됴〯ᄒᆞ니 구슬〯 업〯거든〮 구든〮 거슬〮 ᄀᆞ〮라 ᄆᆡᆺᄆᆡᆺ게〮 ᄒᆞ〮야〮 구무 들워〮 ᄡᅳ〮라〮 又方治誤呑針以上好磁石如小彈子大含之卽出{{*|}} ᄯᅩ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됴〯ᄒᆞᆫ指징〯南남石쎡〮 이〮 져〯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라〮 經驗秘方治誤呑錢百部根四兩酒一升浸一宿溫作二服{{*|}} 돈〯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百ᄇᆡᆨ〮部뽕〯根ᄀᆞᆫ 넉〯 랴ᇰᄋᆞᆯ〮 술 ᄒᆞᆫ 되〮예〮 ᄒᆞᄅᆞᆺ바〮ᄆᆞᆯ〮 ᄃᆞᆷ가〮 ᄃᆞ시 ᄒᆞ〮야〮 두〯 버네〮 머그〮라〮 又方服淸蜜二盞{{*|}} ᄯᅩ〮 淸쳐ᇰ蜜미ᇙ〮 두〯 잔〮ᄋᆞᆯ〮 머그〮라 又方濃煎艾湯一二盞飮之{{*|}}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혀〮 ᄒᆞᆫ두〯 자〮ᄂᆞᆯ 머그〮라〮 又方治誤呑針釘鉤子魚骨雜物多食肥羊脂肉及諸肉必自裹出{{*|}} ᄯᅩ〮 바ᄂᆞᆯ〮와〮 몯〮과〮 낛〮과〮 고깃 ᄲᅧ〮와〮 雜짭〮거슬〮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진 羊야ᇰᄋᆡ〮 기름〮과〮 고기〮와〮 여러〮 가짓〮 고기〮ᄅᆞᆯ〮 만〯히 머그〮면〮 절로〮 ᄢᅳ려〮 나〮ᄂᆞ〮니라〮 又方木炭爲細末每服一錢冷水調下頓服自然裹於大便中出{{*|}} ᄯᅩ〮숫글〮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ᄎᆞᆫ〮므〮레 프러 다〯 머그면〮 自ᄍᆞᆼ〮然ᅀᅧᆫ히〮 大땡〮便뼌에〮 ᄢᅳ려〮 나〮ᄂᆞ〮니라〮 衛生易簡方治一切骨鯁用朴硝噙化{{*|}} 一ᅙᅵᇙ〮切촁〮ㅅ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朴팍硝쇼ᇢᄅᆞᆯ〮 머구〮머 노기〮라〮 又方用雞蘇朴硝等分如彈子大仰臥噙化三五丸卽愈{{*|}} ᄯᅩ〮雞곙蘇송와〮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졋바〮누〮어〮 세〯 다ᄉᆞᆺ〮 버늘〮 머구〮머 노기〮?면〮? 즉〮재 됻〯ᄂᆞ〮니라〮 壽域神方治諸骨鯁用不蛀皂角一片槌碎作四截銚內炒令焦黑酸米醋一盞澆之用碗覆一茶久取出放溫漱嚥下{{*|}} 여러〮 가짓〮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벌에〮 먹디〮 아니〮ᄒᆞᆫ 皂쪼ᇢ〯角각〮 ᄒᆞᆫ 편〮을〮 ᄯᅮ드〮려 네〯헤 그처〮 새용〮 안해〮 봇가〮 검〯게 ᄒᆞ고〮 싄 초 ᄒᆞᆫ 잔〮ᄋᆞᆯ〮 븟고〮 보ᅀᆞ로 두퍼〮 ᄒᆞᆫ 차 다릴〮 ᄉᆞᅀᅵ〮만〮 커든〮 내〯야〮 ᄃᆞ시 ᄒᆞ〮야〮 야ᇰ〯지ᄒᆞ〮야〮 ᄉᆞᆷᄭᅵ〮라〮 又方用覆盆子根取淨洗釅醋瓦礶煎濃汁用紙盖礶口留一孔令患人開口置孔熏一二時久骨自下{{*|}} ᄯᅩ〮覆폭〮盆뽄子ᄌᆞᆼ〯ㅅ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초로〮 딜湯타ᇰ〮礶관〮에〮 즙〮이〮 두〮텁〮게〮 글히〮고〮 죠ᄒᆡ〮로〮 湯타ᇰ〮礶관〮 이〮블〮 막고〮 ᄒᆞᆫ 굼글〮 두〮어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로 입〮 버〯려 굼긔〮 다혀〮 ᄒᆞᆫ 두〯 時씽刻큭을〮 쐬〯면〮 ᄲᅨ〮 저〯 나〮ᄂᆞ〮니라〮 又方用餳糖再熬化丸如雞子黃大微嚼猛嚥呑之不下再作大丸呑妙{{*|}} ᄯᅩ〮 여〮슬 두〯 번 ᄉᆞ〮라 ᄃᆞᆯᄀᆡ〮앐〮 누른〮 것만〮 케 비븨〮여 자ᇝ〯간 시버〮 ᄆᆡ이〮 ᄉᆞᆷᄭᅭ〮ᄃᆡ ᄂᆞ리〮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크〮게 비븨〮여〮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以魚骨安於頭上立愈{{*|}} ᄯᅩ〮 믌〮고깃〮 ᄲᅧ〮ᄅᆞᆯ〮 머리〮예 연ᄌ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仍取所餘骨左右手反復擲背後立出{{*|}} ᄯᅩ〮 나ᄆᆞᆫ〮 ᄲᅧ〮를〮 두〯 녁 소〮ᄂᆞ로〮 서르 드ᇰ 뒤〯헤 더디〮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解衣帶眼看下部不下卽出{{*|}} ᄯᅩ〮 옷〮 밧고〮 미틀〮 보면〮 ᄂᆞ리〮디 아니〮ᄒᆞ면〮 즉〮자히〮 나〮ᄂᆞ〮니라〮 又方取鯉魚鱗皮燒灰作末以水調服卽出不出再作{{*|}} ᄯᅩ〮 鯉링〯魚ᅌᅥᆼㅅ 비늘〮와〮 가ᄎᆞᆯ〮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 나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又方用象牙爲末水調一錢服亦治魚刺{{*|}} ᄯᅩ〮象쌰ᇰ〯牙ᅌᅡ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ᄲᅧ〮 ᄣᅵᆯ인〮 ᄃᆡ 고티〮ᄂᆞ〮니라〮 又方用鸕鶿骨爲末湯調服之得呑其嗉最效{{*|}} ᄯᅩ〮 鸕롱鶿ᄍᆞᆼ ᄲᅧ〮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그〮라〮 그 부릴 어〯더 머그〮면〮 ᄆᆞᆺ〮 됴〯ᄒᆞ〮니라〮 又方治誤呑錢用慈菰搗半爛呑之移時其錢卽化一用濃煎艾汁亦可冬葵根煮汁亦可{{*|}} ᄯᅩ〮 그르 돈〯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慈ᄍᆞᆼ菰공ᄅᆞᆯ〮 디허〮 半반〮만 닉거든 ᄉᆞᆷᄭᅵ〮라〮 時씽刻큭이 올ᄆᆞ〮면 그 돈〯이 즉〮재 녹ᄂᆞ니〮라〮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횬〮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冬도ᇰ葵ᄁᆔᆼ 根ᄀᆞᆫ 글휸〮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再服卽出{{*|}} ᄯᅩ〮 金금銀ᅌᅳᆫ 곳〮 골〮회〮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水ᄉᆔᆼ〯銀ᅌᅳᆫ 半반〮 兩랴ᇰ〯을〮 머그〮라〮 다시〮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治小兒誤呑針用磁石如棗核大磨令光鑽作竅絲穿令含針自出{{*|}} ᄯᅩ〮 아ᄒᆡ〮 그르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指징〯南남石쎡〮이〮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 ᄒᆞ닐〮 ᄀᆞ〮라 빗〮나게〮 ᄒᆞ고〮 구무 들워〮 실〯로 ᄢᅦ여〮 머굼〮게〮 ᄒᆞ면〮 바ᄂᆞ〮리 제〯 나〮ᄂᆞ〮니라〮 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 ᄯᅩ〮 그르 골회〮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거유〮 ᄂᆞ〮랫짓〮 두〯ᅀᅥ흘〮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다ᇰ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脫陽陰縮第十三== 經驗良方其證或因大吐大瀉之後四肢逆冷元氣不接不醒人事或傷寒新瘥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喘冷汗自出亦是脫陽證湏臾不救先用葱白數莖炒令熱熨臍下次用 附子{{*|一枚重十錢許剉作八片}}白朮 乾薑{{*|各半兩}}木香{{*|一分}}已上四味各硏細水二椀煎至八分椀去滓放冷灌服湏臾又進一服合滓倂服{{*|}} 그 證지ᇰ〮이 시혹〮 하〮 吐통〯커나〮 하〮 즈칀〮 後ᅘᅮᇢ〯에 四ᄉᆞᆼ〮肢징 ᄎᆞ〮고元ᅌᅯᆫ氣킝〮 닛〯디 아니〮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거나〮 시혹〮傷샤ᇰ寒ᅘᅡᆫ 이〮 ᄀᆞᆺ 됴〯커든〮 그르 겨〯집과〮 사괴〮면〮 그 證지ᇰ〮이〮ᄇᆡᆺ〮기슬기 ᄀᆞ자ᇰ〮 알ᄑᆞ고〯 外ᅌᅬᆼ〮腎씬〯이〮 움치〮들〮오 ᄂᆞ치〮 검〯고〮 氣킝〮分분이〮 헐헐ᄒᆞ고〮 ᄎᆞᆫ〮 ᄯᆞ〮미 흐르ᄂᆞ니 ᄯᅩ〮 이〮 脫똬ᇙ〮陽야ᇰㅅ證지ᇰ〮이〮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몬져 파〮 두〯ᅀᅥ 줄기〮ᄅᆞᆯ〮 봇가〮 덥〯게 ᄒᆞ〮야〮 ᄇᆡᆺ복 아래〮ᄅ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버거〮 附뿡〮子ᄌᆞᆼ〯 ᄒᆞᆫ 낫〯 므〮긔 열〮 돈〯 남ᄌᆞᆺᄒᆞ닐〮 사ᄒᆞ라 여듧〮 片편 ᄆᆡᇰᄀᆞᆯ오〮 白ᄈᆡᆨ朮뜌ᇙ〮와〮 乾간薑가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량〯과〮木목〮香햐ᇰ ᄒᆞᆫ 分분과〮 네〯 가짓〮 마ᄉ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믈〮 두〯 보ᅀ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ᄎᆡ와〮 브ᅀᅳ라〮 이ᅀᅳᆨ고〮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고〮 滓ᄌᆡᆼ〮 조쳐〮 다〯 머기〮라〮 如無前藥用桂枝二兩用好酒二升煎至一升候溫分作二服灌之{{*|}} ᄒᆞ〮다!카!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桂ᄀᆒᆼ〮枝징〮 두〯 兩랴ᇰ〯ᄋᆞᆯ〮 됴〯ᄒᆞᆫ 술 두〯 되〮로 글혀〮 ᄒᆞᆫ 되〮예〮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두〯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라〮 又無桂枝用葱白連鬚三七莖細剉沙盆內硏細用酒五升煮至二升分作三服灌之陽氣卽回先用炒塩熨臍下氣海勿令氣冷{{*|}} ᄯᅩ〮 桂ᄀᆒᆼ〮枝징 업〯거든〮 파〮ᄒᆞᆯ 불휘〮 조쳐〮 세〯닐굽〮 줄기〮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沙상盆뽄에〮 ᄀᆞ〮ᄂᆞ리〮 ᄀᆞ〮라 술 닷 되〮로〮 글혀〮 두〯 되〮예〮 니르〮거든〮 세〯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면〮 陽야ᇰ氣킝〮 즉〮재 도〮라〮오〮ᄂᆞ니〮 몬져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臍쪵下ᅘᅡᆼ〯와〮 氣킝〮海ᄒ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야〮 氣킝〮分분이〮 ᄎᆞ〮디 아니〮케〮 홀〮디〮니라〮 又無葱白用生薑二七寸亦好依前法服{{*|}} ᄯᅩ〮 파〮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드!두〯!닐굽〮 寸촌〮도〮 ᄯᅩ〮 됴〯ᄒᆞ니〮 알ᄑᆡᆺ〯 法법〮을〮 브터〮 머기〮라〮 聖惠方治風入腹攻五藏拘急不得轉側陰縮手足厥冷腹中㽱痛宜服赤芍藥散赤芍藥{{*|一兩}}川烏頭{{*|三兩炮製去皮臍}}桂心 甘草炙微赤剉防風{{*|去蘆頭}}芎窮{{*|各一兩}}右擣麤羅爲散每服三錢以水一中盞入生薑半分棗二枚煎至六分去滓不計時候稍熱服{{*|}} ᄇᆞᄅᆞ〮미 ᄇᆡ〮예 드〮러 五ᅌᅩᆼ〯藏짜ᇰ〮ᄋᆞᆯ〮 보차〮 ᄇᆞᆯ라〮 움즈기〮디 몯〯고〮 陰ᅙᅳᆷ이〮 움처〮 들〮오 손〮발〮 ᄎᆞ〮고 ᄇᆡ〮 안〮히 알ᄑᆞ거든〮 赤쳑〮芍쟉〮藥약〮散산〮을〮 머골〮디니〮赤쳑〮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과〮 川ᄌᆑᆫ烏ᅙᅩᆼ頭뚜ᇢ 세〯 兩랴ᇰ〯을〮 炮뽀ᇢᄒᆞ〮야〮 갓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어 져〯기 븕게〮 ᄒᆞ〮야〮 사ᄒᆞᆯ〮오 防파ᇰ風봉을〮 머리〮 버히〮고芎구ᇰ窮꾸ᇰ과〮 各각〮 ᄒᆞᆫ 兩랴ᇰ〯을〮 디〮허〮 麤총케〮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中듀ᇰㅅ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半반〮 分분과〮 大땡〮棗초ᇢ〮 두〯 나〯ᄎᆞᆯ 드〮려 글효〮ᄃᆡ 六륙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져〯기 덥〯게 ᄒᆞ〮야〮 머기〮라〮 聖濟緫錄治陰疝腫縮疼痛 狼毒{{*|炙二兩}}防葵{{*|炒}}附子{{*|炮裂去皮臍各一兩}}右擣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十丸溫酒下空心日午臨臥服{{*|}} 陰ᅙᅳᆷ疝산ᄒᆞ〮야〮 븟고〮 움처〮 알ᄑᆞ닐〮 고툐〮ᄃᆡ狼라ᇰ毒독〮 구우〮니 두〯 兩랴ᇰ〯과〮防파ᇰ葵ᄁᆔᆼ 봇고니와〮 附뿡〮子ᄌᆞᆼ〯ᄅᆞᆯ〮 구어 것과〮 ᄇᆡᆺ복 아ᅀᅩ〮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혼〮 ᄢᅮᆯ〮로〮 丸ᅘᅪᆫᄋᆞᆯ〮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 만〮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 열〮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수레〮 ᄂᆞ리〮오ᄃᆡ〮 空코ᇰ心심과〮 낫〮과 누을 제와〮 머그〮라〮 又方雞趐左右俱用不限多少燒灰右細硏爲散每服二錢匕溫酒調下不拘時{{*|}} ᄯᅩ〮 ᄃᆞᆯᄀᆡ〮 ᄂᆞ래ᄅᆞᆯ〯 두〯 녀글〮 다〯ᄡᅮ〮ᄃᆡ 하며〮 져〯구믈〮 限ᅌᆞᆫ〯티〮 말오〮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ᄂᆞ리〮오ᄃᆡ〮 時씽刻큭〮에〮 븓들이〮디 말〯라〮 又方黃蓮{{*|去鬚}}熟艾{{*|炙}}杏人{{*|去皮尖別硏各半兩}}右擣硏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塩湯下空心服{{*|}} ᄯᅩ黃ᅘᅪᇰ蓮련을〮 거웃〮 앗〮고〮 니근〮 ᄡᅮ〮글 브〮레 ᄧᅬ〯오〮 杏ᅘᆡᇰ〯仁ᅀᅵᆫ을〮 것과〮 부〯리ᄅᆞᆯ〮 앗〯고〮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디허〮 ᄀᆞ〮라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ᄒᆞᆫ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게〮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塩염湯타ᇰ〮ᄋᆞ〮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硇砂{{*|硏}}木香{{*|各半兩}}棟實{{*|去核炒}}茴香子{{*|炒}}京三稜{{*|炮各一兩}}右五味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空心酒下{{*|}} ᄯᅩ〮 硇砂상ᄅᆞᆯ〮 ᄀᆞᆯ오 木목〮香햐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棟도ᇰ實씨ᇙ〮을〮 ᄌᆞᅀᆞ〮 아!ᅀᅵ〮!ᅀᅡ〮! 봇고〮 茴ᅘᅬᆼ香햐ᇰ ᄡᅵ〮를〮 봇고 京겨ᇰ三삼稜르ᇰ을〮 炮뽀ᇢᄒᆞ야〮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훈〮!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空코ᇰ心심에〮 술로〮 머그〮라〮 又方槐子{{*|炒一兩}}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溫酒下空心服{{*|}} ᄯᅩ〮槐ᅘᅬᆼ子ᄌᆞᆼ〯ᄅᆞᆯ〮 보ᄭᅡ〮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술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萵苣{{*|切半斤}}皂莢{{*|剉碎三挺}}蜀椒{{*|去目及閉口者炒出汗一兩}}右少用水煮令相得不可太稀乘熱用布三兩重裹熨腫處冷卽易頻熨自消{{*|}} ᄯᅩ〮 부루 사ᄒᆞ〮로〮니〮 半반〮 斤근과〮 皂쪼ᇢ〯莢겹〮 사ᄒᆞ〮라 ᄯᅮ드〮려 세〯 挺텨ᇰ〯과〮川ᄌᆑᆫ椒죠ᇢ 눈〮과〮 입〮 마ᄀᆞ〮닐〮 앗〯고〮 봇가〮 ᄯᆞᆷ〮 내〯요니〮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므〮를 져〯고매〮 ᄒᆞ〮야〮 글혀〮 서르 맛게〮 ᄒᆞ고〮 너무 젹〯게〮 마롤〮디니〮 더운〮 저긔〮 뵈〮로 두〯ᅀᅥ ᄇᆞᆯ〮 ᄢᅳ려〮 브ᅀᅳᆫ ᄃᆡ〮 熨ᅙᅮᇙ〮호〮ᄃᆡ ᄎᆞ〮거〮든〮 ᄀᆞᆯ라〮 ᄌᆞ조〮 熨ᅙᅮᇙ〮ᄒᆞ면〮 절로〮 ᄂᆞᆺᄂᆞ니〮라〮 又方雄黃{{*|硏}}甘草{{*|各一兩}}礬石{{*|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ᄀᆞ〮라 두〯 兩랴ᇰ〯과〮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믈〮 닷 되〮예〮 글혀〮 브ᅀᅳᆫ ᄃᆡ〮 시수〮ᄃᆡ 良랴ᇰ久고ᇢ〯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車前子不拘多少擣羅爲末湯調塗腫處{{*|}} ᄯᅩ〮車챵前쪈子ᄌᆞᆼ〮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브ᅀᅳᆫ ᄃᆡ〮 ᄇᆞᄅᆞ라〮 又方蔓菁根不拘多少剉碎擣羅爲散溫水調塗腫處或以絹帛傅之以差爲度{{*|}} ᄯᅩ〮 댓무ᅀᅮᆺ 불휘〮ᄅᆞᆯ〮 사ᄒᆞ〮라 ᄯᅮ드〮려 디허〮 처〮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ᅩᆫ ᄃᆡ〮 ᄇᆞᄅᆞ라〮 시혹〮 기〯브로〮 브툐〮ᄃᆡ 됴〯ᄒᆞᆯ ᄀᆞ자ᇰ ᄒᆞ라〮 ==吐血下血第十四<sub>齒閒出血九竅出血附</sub>== 經驗良方云其證皆因內損或酒色勞損或心肺脉破血氣妄行血如湧泉口鼻俱出須臾不救 側栢葉{{*|蒸乾}}人參{{*|焙乾各一兩}}右二味細末每服二錢入飛羅麪二錢新汲井花水調如稀糊啜服血如湧泉不過二服卽止{{*|}} 그 證지ᇰ〮이〮 다〯 안〮히 損손〯호〮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 酒쥬ᇢ〯色ᄉᆡᆨ〮애〮잇버〮 損손〯커나〮 시혹心심肺폥〮脉ᄆᆡᆨ〮 이〮 ᄒᆞ〮야디〮여 血ᄒᆑᇙ〮氣킝 간대〮로〮 行ᅘᆡᇰᄒᆞ〮야〮 피〮 믈〮ᄉᆡᆷ〯ᄃᆞᆺ〮 ᄒᆞ〮야 입〮과〮 고〮콰애〮 다〯 나〮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側즉栢ᄇᆡᆨ〮 니〮플〮ᄠᅧ〮 ᄆᆞᆯ외〮오〮 人ᅀᅵᆫ參ᄉᆞᆷᄋᆞᆯ〮 焙ᄈᆡᆼ〮乾간호〮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ᄒᆞ〮야〮 飛빙羅랑麪면〮 두〯 돈〯 드〮려 ᄀᆞᆺ 기룬〮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로ᄃᆡ〮 누근〮 플〮ᄀᆞ〮티 ᄒᆞ〮야〮 머그〮라〮 피〮 믈〮 솟ᄃᆞᆺ〮 하〮야도〮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즉〮재 긋ᄂᆞ니〮라〮 如無前藥用荊芥一握燒過盖於地上要出火毒細硏如粉以陳米飮調下三錢許與服不過二服效{{*|}}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荊혀ᇰ〮芥갱〯 ᄒᆞᆫ 우후〮믈 ᄉᆞ〮라 ᄯᅡ해〮 두퍼〮火황〯毒독〮 내〯오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무근〮 ᄡᆞᆯ 글흔〮 므〮레 프〮러 세〮 돈〯 남ᄌᆞ기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됻〯ᄂᆞ〮니라〮 又無荊芥用釜底墨刮下細硏如粉每服三錢濃米飮調下連進二三服鼻衄一字吹入鼻中立效{{*|}} ᄯᅩ〮 荊혀ᇰ芥갱〮 업〯거든〮 가마〮 미틧〮 검듸여ᇰ을〮 ᄀᆞᆯ〮가〮 ᄀᆞ〮ᄂᆞ리〮 紛분〮ᄀᆞ〮티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두터이〮 글힌 ᄡᆞᆳ〮므〮레 프〮러 닛우〮 두〯ᅀᅥ 服뽁〮을〮 머기〮라〯 고해피〮 흐르거든〮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블〯면〮 즉〮재 됴〯ᄒᆞ〮리라〮 又方人有九竅四肢指歧閒皆出血此暴驚所致勿令患人知以井花水猛噀其面{{*|}} ᄯᅩ 사〯ᄅᆞ미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 가락 ᄉᆞᅀᅵ〮예 다〯 피나〮ᄆᆞᆫ 이ᄂᆞᆫ 과ᄀᆞᆯ이 놀〮란 다시〮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ᆯ〮 알외〮디〮 말〯오〮 井져ᇰ〮花황水ᄉᆔᆼ〯로〮 그 ᄂᆞᄎᆡ〮 ᄆᆡ이〮 ᄲᅮ모라 又方鼻口中出血不止用赤馬糞燒灰細末溫酒調下一錢{{*|}} ᄯᅩ〮 고〮콰 이베〮 피〮나고〮 긋디 아니〮커든〮 블근〮 ᄆᆞᆯᄯᅩᆼᄋᆞᆯ〮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ᄒᆞᆫ 돈〯을〮 머그〮라〮 經驗秘方鼻衄方用龍骨爲末以筆管吹半錢鼻中九竅出血皆可用又隨衄左右以新水洗足又以左撚紙索子繫手四肢呪曰血神住立止又張弓絃向上令病人仰臥枕絃放四肢如常臥{{*|}} 고햇〮피〮 고티ᄂᆞᆫ 法법〮에龍료ᇰ骨고ᇙ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붇〮ᄌᆞᆯ오〮로 半반〮 돈〯ᄋᆞᆯ 곳〮굼긔〮 불〯라 아홉〯 굼긔〮 피〮나〮거든〮 다〯 어루 ᄡᅳ〮리라 ᄯᅩ〮 피〮의〮 왼〯녁 올〮ᄒᆞᆫ녀〮글〮 조처〮 새〮 믈〮로 발 싯고〮 ᄯᅩ 외오〮 ᄭᅩᆫ〮 죠ᄒᆡ〮 노ᄒᆞ〮로〮 소ᇇ〮 네〯 가라ᄀᆞᆯ〮 ᄆᆡ오〮 呪쥬ᇢ〯ᄒᆞ〮야〮 닐오〮ᄃᆡ 血ᄒᆑᇙ〮神씬은〮 그치〮라〮 ᄒᆞ면〮 즉〮재 긋ᄂᆞ니〮라 ᄯᅩ〮 홠시우〮를〮지허〮 우흘〮 向햐ᇰ〯ᄒᆞ〮야 노코〮 病뼈ᇰ〮ᄒᆞᆫ 사〯ᄅᆞ미〮 졋〮바〮디〮여 누워〮 홠시우〮를〮 볘〯오 四ᄉᆞᆼ肢징ᄅᆞᆯ 펴〮 샹녜〮 누움〮 ᄀᆞᆮ〮게〮 ᄒᆞ라〮 又灸項後髮際兩筋閒宛宛中{{*|}} ᄯᅩ〮 목 뒷〮髮바ᇙ〮際졩 ㅅ 두〯 히ᇝ〮 ᄉᆞᅀᅵᆺ〮 우믁ᄒᆞᆫ ᄃᆡᆯ〮 ᄯᅳ〮라〮 澹寮方茜根散治鼻衄終日不止心神煩悶 茜根 黃芩 側栢葉 阿膠{{*|蚌粉炒}}生地黃{{*|各一兩}}甘草{{*|炙半兩}}右㕮咀每服四錢水一盞半姜三片煎至八分去滓溫服不拘時{{*|}} 茜쳔〮根ᄀᆞᆫ散산은〮 고해〮피져므〮ᄃᆞ록〮 긋디〮 아니〮ᄒᆞ〮야 ᄆᆞᅀᆞ미〮 닶〮가오〮닐〮 고티ᄂᆞ니〮 茜쳔〮根ᄀᆞᆫ 과〮黃ᅘᅪᇰ芩끔과〮 側즉〮栢ᄇᆡᆨ〮 닙〮과〮 阿ᅙᅡᆼ膠교ᇢᄅᆞᆯᄉᆞᄒᆡ에〮 봇고〮니〮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우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네〮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잔〮 半반〮과〮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ᄋ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時씽節져ᇙ을〮 븓들이〮디 말〯라〮 衛生簡易方九竅出血小薊一握搗汁酒半盞和頓服如無靑者以乾薊末冷水調三錢匕服{{*|}} 아홉〮 굼긔〮 피〮나〮거든〮 小쇼ᇢ〯薊곙〮 ᄒᆞᆫ 우후〮믈 디허 汁집〮 내〯야〮 술 半반〮 잔애〮 프〮러 다〯 머그라 ᄒᆞ〮다가〮 프르〮니 업거든〮 ᄆᆞᄅᆞᆫ 薊곙〮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ᄎᆞᆫ므〮레 세〯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暴下血用蒜五六枚去皮入豆豉硏爲膏如桐子大米飮下五六十丸無不愈者{{*|}} ᄯᅩ〮 과〮ᄀᆞᆯ이〮 下ᅘᅡᆼ〯血혀ᇙ〮 ᄒᆞ릴〮 고툐〮ᄃᆡ 마ᄂᆞᆯ〮 대〯엿 나〯ᄎᆞᆯ〮 거플 밧기〮고〮 젼구〮글〮 드〮러〮 ᄀᆞ〮라 골 ᄆᆡᇰ〮ᄀᆞ〮라〮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ᄡᆞᆯ〮 글힌 므〮레 쉰〮 여ᄉᆔᆫ〯 丸ᅘᅪᆫ을〮 머그〮면〮 됴〯티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又方用赤小豆一升搗碎水三升絞汁飮之{{*|}} ᄯᅩ〮赤쳑〮小쇼ᇢ〮豆또ᇢ〮 ᄒᆞᆫ 되〮ᄅᆞᆯ〮 디허〮 ᄇᆞᆺ아〮 믈〮 서〯 되〮예〮 프〮러〮 즈〮블ᄲᅡ〮 머그〮라〮 壽域神方治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 小쇼ᇢ〯便뼌에 下ᅘᅡᆼ〮血혀ᇙ〮이〮 긋디 아니〮커든〮酸솬漿쟈ᇰ草초ᇢ〯 ᄅᆞᆯ〮 드〮러〮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ᄲᅡ〮 머그〮라〮 酸솬漿쟈ᇰ은〮 ᄭᅪ리〮라〮 朱氏集驗方一金散治鼻衄出血過多昏冒欲死諸藥不效大蒜硏左鼻貼左脚右鼻貼右脚心兩鼻貼兩脚心{{*|}} 一ᅙᅵᇙ〮金금散산〮 은〮 고해〮피〮 나〯미 너무 하〮 어〮즐ᄒᆞ〮야〮 주거〮 가〮ᄂᆞ니〮 여러〮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큰〮 마ᄂᆞ〮ᄅᆞᆯ〮 ᄀᆞ〮라 왼〯녁 고〮히어든〮 왼〮녁 밠〮바다ᇰ애〮 브티〮고〮 올〮ᄒᆞᆫ녁 고〮히어든〮 올〮ᄒᆞᆫ녁 밠〮바다〮ᅌᅢ 브티〮고〮 두〯 고〮히어든〮 두〯 밠〮바다〮ᅌᅢ 브티〮라 又方齒縫出血不止他藥不能治之者塩主之{{*|}} ᄯᅩ〮닛〮ᄢᅵ〮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다ᄅᆞᆫ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닌 소고미〮 主즁〯ᄒᆞ니〮라 聖惠方治九竅四肢指歧閒出血方 生地黃{{*|一兩細切}}蒲黃{{*|半兩}}靑竹茹半兩 右以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每於食後溫服{{*|}}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가락 ᄉᆞ〮ᅀᅵ〮예 피〮나〮ᄂ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ᄒᆞᆫ 兩!라ᇰ〮!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ᆯ〮오〮 蒲뽕黃ᅘᅪᇰ 半반〮 兩랴ᇰ〯과〮 프른〮 댓거프를〮 갈〮로 ᄀᆞᆯ가〮 半반〮 兩랴ᇰ〯ᄋᆞᆯ〮 믈〮 ᄒᆞᆫ 큰〮 잔〮ᄋᆞ로〮 글혀〯 여슷〮 分분에〮 니르〮거든〮 즛의 앗〯고〮 食씩〮後ᅘᅮᇢ〯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吐血及鼻衄不止烏賊魚骨搗細羅爲散不計時以淸粥飮調下二錢{{*|}} ᄯᅩ〮吐통〯血ᄒᆑᇙ〮와〮 고해〮피〮 긋디〮 아니〮커든〮 烏ᅙᅩᆼ賊쯕〮魚!ᅌᅵᆼ!ᅌᅥᆼ! ᄲᅧ를〮 디허〮 ᄀᆞ〮ᄂᆞ리〮 처〮 時씽刻큭〮 혜〯디〮 말〯오 粥쥭〯 므〮레 두〯 돈〯곰〮 프〮러 머그〮라〮 又方鼻衄經日夜不止用乾姜削如蓮子大塞鼻中卽止{{*|}} ᄯᅩ〮 고해〮 피〮 밤〮나〮ᄌᆞᆯ 디〯내〮요ᄃᆡ〮 긋디〮 아니〮커든〮 乾간姜가ᇰᄋᆞᆯ〮 蓮련子ᄌᆞᆼ〯 만〮 케〮 갓가〮 곳〮굼긔〮 마ᄀᆞ〮면〮 곧〮 긋ᄂᆞ니〮라〮 又方濃硏好墨點鼻中立止{{*|}} ᄯᅩ〮 됴〯ᄒᆞᆫ墨믁〮 을〮 두터이〯 ᄀᆞ〮라 곳〮굼긔〮 디그〮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牙齒縫忽然出血 當歸散 當歸 桂心{{*|各半兩}}白凡{{*|一兩燒令汁盡}}甘草{{*|半兩}}右件藥擣麤羅分爲三度用每度以漿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熱含冷吐{{*|}} ᄯᅩ〮 닛〮ᄢᅵ〮메 忽호ᇙ〮然ᅀᅧᆫ히〯 피〮나〮거든〮 當다ᇰ歸귕와〮 桂ᄀᆒᆼ〮心심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을〮 ᄉᆞ〮라 汁집〮 업〯게 ᄒᆞ고〮 甘감草초ᇢ〯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디허〮 麤총히 처〮 세〮 버네〮 ᄂᆞᆫ화 ᄡᅮ〮ᄃᆡ ᄒᆞᆫ 버네〮 漿쟈ᇰ水ᄉᆔᆼ〮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더우〮닐〮 머구〮머 ᄎᆞ거든비〯와ᄐᆞ〮라〮 又方齒齗血出不止乾地龍末一錢白凡灰一錢射香末{{*|半錢}}右同硏令勻濕布上塗落貼於患處{{*|}} ᄯᅩ〮 닛믜유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ᄆᆞᄅᆞᆫ地딩〮龍료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돈〯과 白ᄈᆡᆨ〮礬뻔ㅅ ᄌᆡ ᄒᆞᆫ 돈〯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 ᄒᆞᆫᄃᆡ〮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저즌〮 뵈〮 우희〮 藥약〮 ᄇᆞᆯ라〮 피〮나〮ᄂᆞᆫ ᄃᆡ〮 브티〮라〮 又方無故口齒閒血出不止以淡竹葉濃煎湯熱含冷吐{{*|}} ᄯᅩ〮 젼ᄎᆞ〮 업〯시 입〮과〮 닛ᄉᆞᅀᅵ〮예 피〮나〮 긋디〮 아!디〮!니!커든〮 淡땀〯竹듁〮 니〮플〮 두텁〯게〮 글혀〮 더운〮 므〮를 머구〮머 ᄎᆞ〮거든〮 비〯와ᄐᆞ〮라〮 直指方治齒出血 鬱金 白芷 細辛{{*|各等分}}右爲末擦牙仍以竹葉竹皮濃煎入塩少許含嚥或炒塩傅{{*|}} 니〮예〮 피〮나〮ᄂᆞ닐〮 고툐〮ᄃᆡ 鬱ᅙᅮᇙ〮金금과〮 白ᄈᆡᆨ〮芷징〯와〮 細솅〮辛신ᄋ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니〮예〮ᄡᅮᄭᅩ〮 댓〮닙〮과〮 댓〮가ᄎᆞᆯ〮 두터이〮 글혀 소곰 져〯기 녀허〮 머구〮머 ᄉᆞᆷᄭᅵ〮며 !시!셰!혹〮 소고ᄆᆞᆯ〮 봇가〮 브티〮라〮 千金方齒閒出血溫童子小便半升煮取三合含之其血卽止{{*|}} 닛〮ᄉᆞᅀᅵ〮예 피〮나〮거든〮 아ᄒᆡ〮 小쑈ᇢ〯便뼌 半반〮 되〮를〮 글혀〮 서〯 호블〮 取츙〯ᄒᆞ〮야〮 머구므면〮 그 피〮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齒出血不止刮生竹皮二兩苦酒浸之令其人解衣坐使人含噀其背上三過仍取竹茹濃煮汁勿與塩適寒溫含漱之竟日爲度{{*|}} ᄯᅩ〮 니예 피〮나〮 긋!다〮!디〮! 아니〮커든〮 ᄂᆞᆯ 댓〮거츨〮 ᄀᆞᆯ〮가 두〯 兩랴ᇰ〯ᄋᆞᆯ〮 醋초ᇢ〮애〮 ᄃᆞᆷ〮고〮 그 사〯ᄅᆞ〮ᄆᆞ로〮 옷〮 바사〮 아ᇇ게 ᄒᆞ고〮 !타!다!ᄅᆞᆫ 사〯ᄅᆞ미〮 머구〮머 그 드ᇰ의〮 세〯 버늘〮 ᄲᅮᆷ〮고〮 댓〮거프를〮 取츙〯ᄒᆞ〮야〮 두터이〮 즈〮블 글혀〮 소곰 주디〮 말〯오〮 ᄎᆞ〮며 ᄃᆞᆺ호〮미맛〮갑게〮 ᄒᆞ〮야〮 머구〮!어!머! 야ᇰ〯지호〮ᄃᆡ 져므〮ᄃᆞ록〮 ᄒᆞ라〮 又方治酒醉牙齒涌血出 當歸{{*|二兩}}礬石{{*|六銖}}桂心 細辛 甘草{{*|各一兩}}右五味㕮咀以漿水五升煮取三升含之日五六夜三{{*|}} ᄯᅩ〮 술 醉ᄌᆔᆼ〮ᄒᆞ〮야〮 니〮예 피〮 솟〮ᄂᆞ닐〮 고툐〮ᄃᆡ 當다ᇰ歸귕 두〯 兩랴ᇰ〯!괴〮!과〮! 白ᄈᆡᆨ〮礬뻔 여슷〮 銖쓩와〮 桂ᄀᆒᆼ〮心심과 細솅〮辛신〮과〮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漿쟈ᇰ水ᄉᆔᆼ〯 닷 되〮예〮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머구〮무ᄃᆡ〮 나ᄌᆡ〮 !데〯!대〯!엿〮 번〮 바ᄆᆡ〮 세〯 번 ᄒᆞ라〮 又方燒釘令赤注孔血中止{{*|}} ᄯᅩ〮 모〮ᄃᆞᆯ ᄉᆞ〮라 븕게〮 ᄒᆞ〮야〮 핏 굼긔〮 고ᄌᆞ〮!연〮!면〮! 긋ᄂᆞ니〮라〮 又方舌上黑有數孔大如簪出血如湧泉 戎塩 黃芩{{*|一作葵子}}黃蘗 大黃{{*|各五兩}}人參 桂心 甘草{{*|各二兩}}右爲末蜜丸梧子大米飮服十丸日三服亦燒鐵烙之{{*|}} ᄯᅩ〮 혀〮 우히〮 검〯고〮 두〯ᅀᅥ 굼기〮 빈혓 구무만〮 코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거든〮 戎ᅀᅲᇰ塩염과 黃ᅘᅪᇰ芩끔 과〮 ᄒᆞ나ᄒᆞᆫ〮 葵ᄁᆔᆼ子ᄌᆞᆼ〯ㅣ라 ᄒᆞ다〮 黃ᅘᅪᇰ蘗ᄇᆡᆨ〮과〮 大땡〮黃ᅘᅪᇰ 各각〮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參ᄉᆞᆷ과〮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 各각〮 두〯 兩랴ᇰ〯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 丸ᅘᅪᆫ곰〮 ᄒᆞᄅᆞ 세〯 번 머그〮라〮 ᄯᅩ〮 鐵텨ᇙ〮을〮 ᄉᆞ〮!리!라! 지지〮라〮 得效方文蛤散治熱壅舌上出血如泉 五倍子{{*|洗}}白膠香 牡蠣粉{{*|各等分}}右爲末每以少許 摻患處或燒鐵篦熟烙孔上{{*|}} 文문蛤갑〯散산〮ᄋᆞᆫ〮 上쌰ᇰ〯熱ᅀᅧᇙ〮ᄒᆞ〮야〮 혀〮에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ᄒᆞ닐〮 고툐〮ᄃᆡ〮五ᅌᅩᆼ〯倍ᄈᆡᆼ子ᄌᆞᆼ〯ᄅᆞᆯ〮 싯고〮 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과〮 牡무ᇢ〯蠣롕〯粉분을〮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피〮나〮ᄂᆞᆫᄃᆡ〮 ᄇᆞᄅᆞ고〮 시혹〮 쇠〮빈혀를〮 ᄉᆞ〮라 굼긔〮 니기〮 지지〮라〮 又方舌無故出血炒槐花爲末摻之而愈{{*|}} ᄯᅩ〮 혜 전ᄎᆞ 업〯시 피〮나〮거든〮 槐ᅘᅬᆼ花황ᄅᆞᆯ〮 보ᄭᅡ〮 細솅〮末마ᇙ〮ᄒᆞ〮야〮 ᄇᆞᄅᆞ면〮 됻〯ᄂᆞ〮니라〮 ==大小便不通第十五== 聖惠方治大小便關格不通腹脹喘急方 膩粉{{*|一錢}}生麻油{{*|一合}}右相和空腹服之{{*|}} 大땡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몯ᄒᆞ야 ᄇᆡ 탸ᇰ만ᄒᆞ고 수미 ᄌᆞᄌ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膩닝粉분 ᄒᆞᆫ 돈과生ᄉᆡᇰ麻망油유ᇢ ᄒᆞᆫ 홉과ᄅᆞᆯ 섯거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蔓菁子油一合空腹服之卽通通後汗出勿怪{{*|}} ᄯᅩ 댓무ᅀᅮᆺ ᄡᅵᆺ 기름 ᄒᆞᆫ 호ᄇᆞᆯ 空코ᇰ心심에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 通토ᇰᄒᆞᆫ 後ᅘᅮᇢ에 ᄯᆞᆷ나거든 疑ᅌᅴᆼ心심 말라 又方治小便難腹滿悶不急療之殺人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裹分作二苞更互熨臍下小便立出{{*|}} ᄯᅩ 小쇼ᇢ便뼌이 어려워 ᄇᆡ 탸ᇰ만ᄒᆞ고 답답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파 서 斤근과 소곰 ᄒᆞᆫ 斤근을 섯거 므르 디허 보ᄭᅡ 덥게 ᄒᆞ야 기브로 ᄢᅳ료ᄃᆡ 두 ᄢᅳ례예 ᄂᆞᆫ화 서르 臍쨍下ᅘ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면 小쇼ᇢ便뼌이 즉재 나ᄂᆞ니라 聖濟緫錄茯苓丸治大小便不通 赤茯苓{{*|去黑皮}}芍藥 當歸{{*|切焙}}枳殼{{*|去穰麩炒}}白朮 人參{{*|各五兩}}大麻仁 大黃{{*|剉各三兩}}右爲末煉蜜和丸梧桐子大每服十五丸至二十丸空心煎茅根湯下{{*|}} 茯뽁苓려ᇰ丸ᅘᅪᆫ 은 大땡小쇼ᇢ便뼌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티ᄂᆞ니赤쳑茯뽁苓려ᇰ 을 거믄 것 밧기고芍작藥약 과 當다ᇰ歸귕ᄅᆞᆯ 사ᄒᆞ라 焙ᄈᆡᆼ乾간ᄒᆞ고枳징殼칵 을 솝 앗고 기울와 봇고 白ᄈᆡᆨ朮뜌ᇙ와 人ᅀᅵᆫ參ᄉᆞᆷ 各각 다ᄉᆞᆺ 兩랴ᇰ과大땡麻망仁ᅀᅵᆫ 과 大땡黃ᅘᅪᇰᄋᆞᆯ 사ᄒᆞ라 各각 석 兩랴ᇰ과를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다ᄉᆞᆺ 丸ᅘᅪᆫ으로 스믈 丸ᅘᅪᆫ지히 空코ᇰ心심애茅모ᇢ根ᄀᆞᆫ湯타ᇰ 을 글혀 ᄂᆞ리우라 經驗良方木通散治小便不通小腹痛不可忍 木通 滑石{{*|各半兩}}黑牽牛{{*|頭末半兩}}右㕮咀每服一錢水半盞燈心十莖葱白一箇同煎三分食前溫服{{*|}} 木목通토ᇰ散산 은 小쇼ᇢ便뼌 不부ᇙ通토ᇰᄒᆞ야 ᄇᆡᆺ기슭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릴 고티ᄂᆞ니木목通토ᇰ 과滑ᅘᅪᇙ石쎡 각 半반 兩랴ᇰ과黑흑牽켠牛ᅌᅮᇢ 머릿 ᄀᆞᄅᆞ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돈곰 ᄒᆞ야 믈 半반 잔과燈드ᇰ 心심 열 줄기와 파 ᄒᆞᆫ 낫과 ᄒᆞᆫᄃᆡ 三삼分분을 글혀 食씩前쪈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肘後方治小便不利莖中痛欲死牛膝幷葉不以多小酒煮飮之立愈{{*|}} 小쇼ᇢ便뼌이 快쾡티 몯ᄒᆞ야陰ᅙᅳᆷ莖ᅘᆡᇰ ㅅ 소비 알파 죽고져 ᄒᆞᄂᆞ닐 고툐ᄃᆡ牛ᅌᅮᇢ膝시ᇙ 을 닙 조쳐 수레 글혀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大便秘澁不通 大黃{{*|四兩}}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右切以水六升煮取二升分再服{{*|}} 大땡便뼌이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大땡黃ᅘᅪᇰ 넉 兩랴ᇰ과桃또ᇢ仁ᅀᅵᆫ 셜흔나ᄎᆞᆯ 것과 부리와 어우러ᇰ ᄌᆞᅀᆞᄅᆞᆯ 앗고 ᄀᆞ라 믈 엿 되예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ᄂᆞᆫ화 두 버네 머그라 又方胡鷰屎蜜和納大孔中卽通{{*|}} ᄯᅩ 며ᇰ마긔 ᄯᅩᇰᄋᆞᆯ ᄢᅮ레 ᄆᆞ라 밋굼긔 녀흐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라 簡要濟衆方治大便澁不通牽牛子半生半熟擣爲散每服二錢煎薑湯調下如未通再服及以熱茶投之量虛實不計時加减服之{{*|}} 大땡便뼌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牽켠牛ᅌᅮᇢ子ᄌᆞᆼᄅᆞᆯ 半반만 ᄂᆞ리오 半반만 니그닐 디허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生ᄉᆡᇰ薑가ᇰ湯타ᇰ애 프러 ᄂᆞ리오ᄃᆡ 通토ᇰ티 몯거든 다시 먹고 더운 차로 머구ᄃᆡ 虛헝實씨ᇙ을 혜오 時씽刻큭 혜디 마라 더으며ᇰ더러 머그라 ==溺水第十六== 經驗良方凡有人溺水者救上岸卽將牛一頭却令溺水之人將肚橫覆相抵在牛背上兩邊用人扶策徐徐牽牛而行以出腹內之水如醒卽以蘇合香元之類或老生薑擦其齒若無牛以活人於長板櫈上仰臥却令溺水人如前法將肚相抵活人身聽其水出卽活{{*|}} 믈읫 사ᄅᆞ미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ᄀᆞᅀᅢ올이고 쇼 ᄒᆞ나ᄒᆞᆯ 가져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ᄇᆡᄅᆞᆯ ᄉᆈ 드ᇰ 우희 ᄀᆞᄅᆞ 업데우고 두 녁 ᄀᆞᅀᅢ 사ᄅᆞ미 자바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쇼ᄅᆞᆯ 잇거ᄃᆞᆮ녀 ᄇᆡ 안햇 므를 내오 ᄒᆞ다가ᄭᆡ어든 곧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類ᄅᆔᆼ어나 시혹 늘근 生ᄉᆡᇰ薑가ᇰ이나 그 니예 ᄡᅮ츠라 ᄒᆞ다가 쇼 업거든 산 사ᄅᆞᄆᆞ로長땨ᇰ床싸ᇰ 우희 졋바뉘이고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알ᄑᆡᆺ 法법ᄀᆞ티 ᄇᆡᄅᆞᆯ 산 사ᄅᆞᄆᆡ 모매 서르 다혀 므리 나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聖惠方凡溺水急解去死人衣灸臍中卽差{{*|}} 믈읫 므레ᄲᅡ디거든 時씽急급히 주근 사ᄅᆞᄆᆡ 옷 밧기고 ᄇᆡᆺ보ᄀ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竈中灰布地令厚五寸以甑側安着灰上令溺人伏於甑上使頭小垂下炒塩二錢內小竹管內吹入下部中卽當吐水去却甑扶下溺人着灰中以灰壅身水恒出鼻口中卽活矣{{*|}} ᄯᅩ 브ᅀᅥ븻 ᄌᆡ로 ᄯᅡ해 ᄭᆞ로ᄃᆡ 두틔 다ᄉᆞᆺ 寸촌이에 코 실을 ᄌᆡ 우희 겨트로 노코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시르 우희 업데우고 머리ᄅᆞᆯ 져기 아래로 ᄲᅡ디게 ᄒᆞ고 소고ᄆᆞᆯ 봇가 두 돈ᄋᆞᆯ 져근 대로ᇰ애 녀허 밋굼긔 부러 드리면 반ᄃᆞ기 므를 吐통ᄒᆞ리니 실을 앗고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아나 ᄂᆞ리와 ᄌᆡ예 노코 ᄌᆡ로 모ᄆᆞᆯ 두프면 므리 고콰 입과로 나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掘地作坑熬數斛熱灰內坑中下溺人灰覆濕徹卽易之灰勿大熱灰冷更易半日卽活也{{*|}} ᄯᅩ ᄯᅡ 파 굳 ᄆᆡᇰᄀᆞᆯ오 두ᅀᅥ 셤 더운 ᄌᆡᄅᆞᆯ 봇가 구데 녀코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녀코 ᄌᆡ로 두퍼 ᄉᆞᄆᆞᆺ젓거든 곧 ᄀᆞᆯ라 ᄌᆡᄅᆞᆯ 너무 봇디 말오 ᄌᆡ ᄎᆞ거든 ᄀᆞ라 半반 날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但埋溺人暖灰中頭足俱沒唯開七孔水出卽活{{*|}} ᄯᅩ 오직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다운 ᄌᆡ예 무두ᄃᆡ 머리와 발왜 다 들에 ᄒᆞ고 오직 닐굽 굼글 여러 므리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緜裹皂莢末內下部中湏臾水出{{*|}} ᄯᅩ 소오매 皂쪼ᇢ莢겹ㅅ ᄀᆞᆯᄋ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이ᅀᅳᆨ고 므리 나ᄂᆞ니라 千金方半夏末吹入鼻{{*|}}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부러 고해 녀ᄒᆞ라 又方裹石灰納下部中水出盡卽活{{*|}}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므리 다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熬沙覆死人上下有沙但出鼻口耳沙冷濕卽易{{*|}} ᄯᅩ 몰애ᄅᆞᆯ 봇가 주근 사ᄅᆞᄆᆞᆯ 두푸ᄃᆡ 아라우희 몰애 잇고 오직 고콰 입과 귀와ᄅᆞᆯ 내야 몰애 ᄎᆞ고 젓거든 곧 ᄀᆞᆯ라 管見大全良方救男女墮水中者以常用薦席卷之就平地上袞轉一二百轉則水出自活亦有用陳壁土末覆之死者更以爐中煖灰覆臍上下則元氣廻自活省後當服利水之藥如五苓散異功五積散朮附湯除濕湯不換金正氣散若欲兼服安心神收歛神氣之藥宜服蘇合香元在人斟酌輕重冷熱而投之{{*|}} 男남女녕ㅣ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샤ᇰ녜 ᄡᅳᄂᆞᆫ 돗긔 ᄆᆞ라 平뼈ᇰᄒᆞᆫ ᄯᅡ해 나ᅀᅡ가 一ᅙᅵᇙ二ᅀᅵᆼ百ᄇᆡᆨ 버늘 구으리면 므리 나면 절로 사ᄂᆞ니라 ᄯᅩ 무근 ᄇᆞᄅᆞ맷 ᄒᆞᆰᄀᆞᆯᄋᆞ로 둡ᄂᆞ니라 주그닐 ᄯᅩ 火황爐롱앳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 아라우희 두프면 元ᅌᅯᆫ氣킝 도라와 사ᄂᆞ니라 ᄎᆞ린 後ᅘᅮᇢ에 믈 즈츼ᄂᆞᆫ 藥약이五ᅌᅩᆼ苓려ᇰ散산 과異잉功고ᇰ五ᅌᅩᆼ積젹散산 과朮뜌ᇙ附뿡湯타ᇰ 과 除똉濕십湯타ᇰ과不부ᇙ換ᅘᅪᆫ金금正져ᇰ氣킝散산 ᄋᆞᆯ 머기고 ᄒᆞ다가 ᄆᆞᅀᆞᄆᆞᆯ 便뼌安ᅙᅡᆫ케 ᄒᆞ고 氣킝分분을 모도ᄂᆞᆫ 藥약을 조쳐 머기고져 커든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을 머귤디니 사ᄅᆞ미 輕켜ᇰ重뜌ᇰ과 冷ᄅᆡᇰ熱ᅀᅧᇙ을 斟짐酌쟉ᄒᆞ야 머교매 잇ᄂᆞ니라 壽域神方冬月落水微有氣者用大器炒灰熨心上候暖氣通溫粥稍稍呑之卽活若便持火炙卽死{{*|}} 겨ᅀᅳ레 므레 디여 자ᇝ간 氣킝分분 잇ᄂᆞ닐 큰 그르세 ᄌᆡᄅᆞᆯ 봇ᄭᅡ 가ᄉᆞᄆ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더운 氣킝分분이 通토ᇰ호ᄆᆞᆯ 기드려 ᄃᆞᄉᆞᆫ 粥쥭을 졈졈 머기면 곧 사ᄂᆞ니 ᄒᆞ다가 브를 ᄧᅬ면 즉재 죽ᄂᆞ니라 又方急於人中穴及兩脚大母趾內離甲一韭葉許各灸三五壯卽活{{*|}} ᄯᅩ ᄲᆞᆯ리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와 두 밠 엄지가띿 아ᇇ 밠토ᄇᆞ로셔 ᄒᆞᆫ 부ᄎᆡᆺ닙 너븨만 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세다ᄉᆞᆺ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以屈死人兩脚着生人肩上以溺人背搭走吐水出盡卽活{{*|}}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두 다리ᄅᆞᆯ 구펴 산 사ᄅᆞᄆᆡ 엇게 우희 여ᇇ고 주근 사ᄅᆞᄆᆞᆯ 지여 ᄃᆞᄅᆞ면 므리 다 나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得效方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 酒쥬ᇢ壜땀 ᄒᆞᆫ 나ᄎᆞ로 죠ᄒᆡ젼 ᄒᆞᆫ 주믈 ᄉᆞ라 壜땀 안해 녀코 時씽急급히 壜땀 이브로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ᆡ ᄂᆞ치나 시혹 ᄇᆡᆺ복 우희 두퍼 ᄎᆞ거든 다시 죠ᄒᆡ젼을 ᄉᆞ라 壜땀 안해 녀허 ᄂᆞᄎᆡ 두퍼 므를 아ᅀ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壜땀은 술녇ᄂᆞᆫ 딜어시라 ==自縊第十七== 千金方凡救自縊死者極須按定其心勿截繩手抱起徐徐解之心下尙溫者以氍毹{{*|卽毛席也}}覆口鼻兩人吹其兩耳{{*|}} 믈읫 목 ᄆᆡ야 주그닐 救구ᇢ호ᄃᆡ ᄀᆞ자ᇰ 모로매 그 ᄆᆞᅀᆞᄆᆞᆯ 눌러 一ᅙᅵᇙ定뗘ᇰᄒᆞ고 노ᄒᆞᆯ 긋디 말오 소ᄂᆞ로 아나 니르왇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글오ᄃᆡ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니란 담으로 입과 고ᄒᆞᆯ 둡고 두 사ᄅᆞ미 그 두 귀ᄅᆞᆯ 불라 又方强臥以物塞兩耳竹筒納口中使兩人痛吹之塞口傍無令氣得出半日死人卽噫噫卽勿吹也{{*|}} ᄯᅩ 뉘이고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ᆯ 입 안해 녀코 두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불오 입가ᅀᆞᆯ 마가 氣킝分분이 나디 몯게 ᄒᆞ면 半반 날ᄋᆞᆯ 주겟던 사ᄅᆞ미 곧 숨쉬ᄂᆞ니 숨쉬어든 부디 말라 又方擣皂莢細辛屑如豆大吹兩鼻中{{*|}} ᄯᅩ 皂쪼ᇢ莢겹과 細솅辛신ㅅ ᄀᆞᆯᄋᆞᆯ 디허 코ᇰ낫만 ᄒᆞ닐 두 곳굼긔 불라 又方刺雞冠血出滴口中卽活男雌女雄{{*|}} ᄯᅩ ᄃᆞᆯᄀᆡ 벼츨 ᄣᅵᆯ어 피내야 이베 처디면 즉자히 사ᄂᆞ니 남지ᄂᆞᆫ 암ᄐᆞᆯᄀᆞ로 코 겨지븐 수ᄐᆞᆯᄀᆞ로 ᄒᆞ라 又方尿鼻口眼耳中幷捉頭髮一撮如筆管大掣之立活{{*|}} ᄯᅩ 고콰 입과 눈과 귀와에 오좀 누고 머리터럭 ᄒᆞᆫ 져부미 붇 ᄌᆞᄅᆞ만 ᄒᆞ닐 자바ᄃᆞᇰᄀᆡ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雞血塗喉下{{*|}} ᄯᅩ ᄃᆞᆯᄀᆡ 피ᄅᆞᆯ 목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灸四肢大節陷大指本支名曰地袖各七壯{{*|}} ᄯᅩ 네 활기옛 큰 ᄆᆞᄃᆡᆺ 우무근 ᄃᆡ와 엄짓가락 미틧 그믈 일후믈 地띵袖쓔ᇢㅣ라 ᄒᆞᄂᆞ니 各각 닐굽 壯자ᇰ을 ᄯᅳ라 經驗救急方急抱起解下切不可截繩卽以衣物塞兩耳將竹筒於口中吹氣及以衣物緊塞二物爲妙凡縊者從早至晩雖已冷必可救從夜至早稍難救若心上溫一日已上猶可救切不可截斷繩欸欸地抱起其身緩解繩放臥令人踏其肩以手拔其髮常令一人緊以手擦胸脇一人以手摩搦臂足屈伸之若已僵漸强屈之又按其腹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却身苦勞動少與官桂湯及粥淸令喉潤更令兩人以筆管吹其耳中尤妙依此法救無不活者{{*|}} ᄲᆞᆯ리 아나 니르왇고 글오ᄃᆡ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즉자히 오ᄉᆞ로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로 입 안해 氣킝分분을 불오 오ᄉᆞ로 두 거슬 구디 마고미 됴ᄒᆞ니 믈읫 목ᄆᆡ야 주그니 아ᄎᆞᆷ브터 나조ᄒᆡ 니르닌 비록 차도 어루 救구ᇢᄒᆞ려니와 밤브터 아ᄎᆞᄆᆡ 니르닌 救구ᇢ호미 어려우니 ᄒᆞ다가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면 ᄒᆞᄅᆞᆺ 內뇡ᄂᆞᆫ 어루 救구ᇢᄒᆞ리니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그 모ᄆᆞᆯ 아나 니르왇고 노ᄒᆞᆯ 날회야 그르고 뉘이고 사ᄅᆞᄆᆞ로 그 엇게ᄅᆞᆯ ᄇᆞᆲ고 소ᄂᆞ로 머리 터릴 ᄲᅡ혀며 샤ᇰ녜 ᄒᆞᆫ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소ᄂᆞ로 가ᄉᆞᆷ과 녑과ᄅᆞᆯ ᄡᅮᆺ고 ᄒᆞᆫ 사ᄅᆞ미 소ᄂᆞ로 ᄇᆞᆯ콰 바ᄅᆞᆯ ᄡᅮᆺ고 구피락펴락게 ᄒᆞ라 ᄒᆞ다가 세웓거든 졈졈 구피고 ᄯᅩ 그 ᄇᆡᄅᆞᆯ ᄆᆞᆫ죨디니 이ᄀᆞ티 ᄒᆞᆫ 밥 ᄣᅢ만 ᄒᆞ면 곧 氣킝分분을 어더 숨쉬ᄂᆞ니라 모미이처커든 져기管관桂ᄀᆒᆼ湯타ᇰ 과 粥쥭므를 머겨 모기 젓게 ᄒᆞ고 ᄯᅩ 두 사ᄅᆞ미 붇ᄌᆞᆯᄋᆞ로 귓굼글 불에 호미 더 됴ᄒᆞ니 이 法법을 브터 救구ᇢᄒᆞ면 사디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得效方緊用兩手掩其口勿令透氣兩時氣急卽活{{*|}} ᄆᆡ이 두 소ᄂᆞ로 그 이블 마가 氣킝分분이 ᄉᆞᄆᆞᆺ디 아니케 두 時씽刻큭을 ᄒᆞ면 氣킝分분이 急급ᄒᆞ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壽域神方治自縊 就以所縊繩燒三指撮白湯調服之{{*|}}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ᄆᆡ얏던 노ᄒᆞᆯ 세 소ᇇ가락으로 자보니만 ᄉᆞ라 더운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未解下先用膝頭或手厚裹衣物緊塞穀道抱起解下揉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兩耳待其氣回方可放手若泄氣則不可救矣{{*|}} ᄯᅩ 그르디 아니ᄒᆞ야셔 몬져 무루피어나 소니어나 오ᄉᆞ로 두터이 ᄡᅡ 밋굼글 구디 막고 아나 니르와다 그르고 모ᄀᆡᆺ 허므를 주므르며 모ᄀᆞᆯ ᄆᆞᆫ지고 고해 불며 두 귀를 부러 氣킝分분이 도라오ᄆᆞᆯ 기드려ᅀᅡ 소ᄂᆞᆯ 쉬울디니 ᄒᆞ다가 氣킝分분이 ᄉᆡ면 救구ᇢ티 몯ᄒᆞ리라 又方卽於鼻下人中穴針灸遂活{{*|}} ᄯᅩ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針짐ᄒᆞ고 ᄯᅳ면 사ᄂᆞ니라 經驗秘方治自縊死梁上塵如豆兩耳鼻四處各納一粒以筒令四人極齊吹之卽活矣{{*|}}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보 우흿 드트를 코ᇰ만 ᄒᆞ닐 두 귀 두 고 네 고대 各각各각 ᄒᆞᆫ 나ᄎᆞᆯ 녀코 대로ᇰᄋᆞ로 네 사ᄅᆞ미 ᄀᆞ자ᇰ ᄀᆞᄌᆞ기 불에 ᄒᆞ면 즉재 살리라 管見大全良方以藍硏取汁灌之或以雞屎白如棗大以酒半盞和硏灌服及着鼻中尤佳{{*|}} 족ᄋᆞᆯ ᄀᆞ라 즈블 取츙ᄒᆞ야 브ᅀᅳ라 시혹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거시 大땡棗초ᇢ만 ᄒᆞ닐 술 半반 잔애 프러 ᄀᆞ라 브ᅀᅳ며 곳굼긔 녀후미 더 됴ᄒᆞ니라 ==失欠頷車蹉候第十八== 千金方治失欠頰車蹉開張不合方一人以手指牽其頤以漸推之則復入矣推當疾出其指恐誤嚙傷人指也{{*|}}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 버리고 어우디 아니ᄒ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ᄒᆞᆫ 사ᄅᆞ미 소ᇇ가라ᄀᆞ로 그 ᄐᆞᄀᆞᆯ ᄃᆞᇰᄀᆡ야 졈졈 밀면 다시 드ᄂᆞ니 밀오 모로매 그 소ᇇ가라ᄀᆞᆯ ᄲᆞᆯ리 내욜디니 사ᄅᆞᄆᆡ 소ᇇ가라ᄀᆞᆯ 그르믈까 저프니라 又方治失欠頰車蹉方消蠟和水傅之{{*|}} ᄯᅩ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디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미를 노겨 므레 프러 브티라 ==金瘡第十九== 聖惠方金瘡失血其人當苦渴然須忍之常令乾食與肥脂之物以止其渴又不得多飮粥則血溢出殺人也又忌嗔怒及大言笑思想陰陽動作勞力若食醎酸飮食熱羹臛輩皆使瘡痛衝發甚者卽死{{*|}} 金금瘡차ᇰ 애 피 흘리면 그 사ᄅᆞ미 반ᄃᆞ기 ᄀᆞ자ᇰ 목ᄆᆞᆯ라 ᄒᆞᄂᆞ니 그러나 모로매 ᄎᆞ마 샤ᇰ녜 ᄆᆞᄅᆞᆫ 飮ᅙᅳᆷ食씩과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ᄆᆞᆯ로ᄆᆞᆯ 그치고 ᄯᅩ 粥쥭을 해 머기디 마롤디니 피 솟나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ᄯᅩ嗔친心심 과 ᄆᆡ이 말홈과 우ᅀᅮᆷ과 陰ᅙᅳᆷ陽야ᇰ을 ᄉᆞ라ᇰ홈과 뮈우며 힘ᄡᅮ믈 마롤디니 ᄒᆞ다가 ᄧᆞᆫ 것과 싄 것과 더운羹ᄀᆡᇰ 과 고기ᄅᆞᆯ 머그면 다 瘡차ᇰ이 알파 다시 發버ᇙᄒᆞᄂᆞ니 甚씸ᄒᆞ닌 즉재 죽ᄂᆞ니라 治金瘡大散方五月五日平旦使四人出四方各於五里內採一方草木莖葉每種各半把勿令漏脫一事日正午時切碓擣用石灰一豆斗擣令極爛仍先選揀大實桑樹三兩株鑿作孔令可受藥然分藥於孔中實築令堅後以桑樹皮蔽之用麻擣石灰密泥令不泄氣更以桑皮纏之令牢至九月九日午時出取陰乾百日藥成擣之日曝令乾更擣絹羅貯之凡有金瘡傷折出血用藥封裹勿令轉動不過十日瘥不膿不腫不畏風若傷後數日始得用藥須暖水洗令血出卽傅之此藥大驗{{*|}} 金금瘡차ᇰ 고티ᄂᆞᆫ 大땡散산方바ᇰ은 五ᅌᅩᆼ月ᅌᅯᇙ 五ᅌᅩᆼ日ᅀᅵᇙ 平뼈ᇰ明며ᇰ에 네 사ᄅᆞᄆᆞ로 四ᄉᆞᆼ方바ᇰ애 보내야 各각各각 五ᅌᅩᆼ里링 안햇 ᄒᆞᆫ 方바ᇰ草초ᇢ木목 줄기와 닙과ᄅᆞᆯ 가지마다 各각 半반 줌을 ᄏᆡ요ᄃᆡ ᄒᆞ나토 아니ᄒᆞ니 업시 ᄒᆞ야 바ᄅᆞ 나ᄌᆡ 사ᄒᆞ라 디허 石쎡灰횡 ᄒᆞᆫ 마ᄅᆞᆯ 디호ᄃᆡ ᄀᆞ자ᇰ 니기 ᄒᆞ고 몬져 큰 ᄲᅩᇰ나모 두ᅀᅥ흘 ᄀᆞᆯᄒᆡ야 구무 포ᄃᆡ 藥약 들 만ᄒᆞ야 藥약을 굼긔 ᄂᆞᆫ화 녀코 ᄀᆞᄃᆞ기다아 굳게 코 後ᅘᅮᇢ에거츠로 막고 삼 조쳐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구디 ᄇᆞᆯ라 氣킝分분 나디 아니케 코 다시 ᄲᅩᇰᄭᅥ츠로 얼거 굳게 코 九구ᇢ月ᅌᅯᇙ 九구ᇢ日ᅀᅵᇙ 午ᅌᅩᆼ時씽예니르러 내야 一ᅙᅵᇙ百ᄇᆡᆨ 나ᄅᆞᆯ ᄀᆞᄂᆞᆯ해 ᄆᆞᆯ외야 藥약이 일어든 디허 ᄒᆡ에 ᄆᆞᆯ외야 다시 디허 기베 처 ᄀᆞ초라 믈읫 金금瘡차ᇰ 헐어나 것거나 피나거든 藥약ᄋᆞ로 ᄡᆞ고 움즈기디 아니케 ᄒᆞ면 열흐를 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 곪디 아니ᄒᆞ며 븟디 아니ᄒᆞ며 ᄇᆞᄅᆞᄆᆞᆯ 저티 아니ᄒᆞᄂᆞ니 ᄒᆞ다가 傷샤ᇰᄒᆞᆫ 後ᅘᅮᇢ 사나ᄋᆞ래 비르서 藥약을 ᄡᅮᆯ디니 모로매 더운 므레 시서 피나게 ᄒᆞ고 곧 브튤디니 이 藥약이 ᄀᆞ자ᇰ 神씬驗ᅌᅥᆷᄒᆞ니라 又方治金瘡或肌肉斷裂右剝取新桑皮作線縫之又以新桑皮裹之又以桑白汁塗之極驗小瘡但以桑皮裹之便差如斷筋取旋復根擣封之卽續{{*|}} ᄯᅩ 金금瘡차ᇰ 고티며 시혹 ᄉᆞᆯ히 그처디며 ᄧᆡ야디거든 새 거츨 밧겨 실 ᄆᆡᇰᄀᆞ라호고 ᄯᅩ 새거츠로 ᄡᆞ고 ᄯᅩ ᄲᅩᇰ ᄒᆡᆫ 즙으로 ᄇᆞᄅᆞ면 지극 神신驗ᅌᅥᆷᄒᆞ니라 져근 瘡차ᇰ은 오직거츠로 ᄡᆞ면 곧 됻ᄂᆞ니 ᄒᆞ다가 히미 긋거든旋션復복根ᄀᆞᆫ 을 取츙ᄒᆞ야 디허 ᄡᆞ면 곧 닛ᄂᆞ니라 又方治刀傷斧斫等瘡右取黑氈燒爲灰細硏傅傷損處封裹勿動直待生肌爲妙{{*|}} ᄯᅩ 갈해 헐며 도ᄎᆡ예버흔 ᄃᆞᆯ헷 瘡차ᇰ을 고툐ᄃᆡ 거믄 시우글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헌 ᄃᆡ 브티고 ᄢᅳ려 뮈우디 말오 ᄉᆞᆯ 날 ᄀᆞ자ᇰ 기드료미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右取馬蹄燒灰令極細不計時候以煖酒調下二錢{{*|}} ᄯᅩ 金금瘡차ᇰᄋᆞᆯ 고텨 알포ᄆᆞᆯ 긋게 호ᄃᆡ ᄆᆞᆯ구블 ᄉᆞ라 ᄀᆞ자ᇰ ᄀᆞᄂᆞ리 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더운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金瘡但刀斧傷損出血不止宜用此 石榴花{{*|半斤}}石灰{{*|一斤炒}}右件藥擣細羅爲散傅瘡上以帛裹勿令着風水瘡合差{{*|}}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툐ᄃᆡ 오직 갈콰 도최예 헐여 피나 긋디 아니커든 이ᄅᆞᆯ ᄡᅮᆯ디니 石쎡榴류ᇢㅅ곳 半반 斤근과 石쎡灰횡 ᄒᆞᆫ 斤근을 봇가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기브로 ᄢᅳ려 ᄇᆞᄅᆞᆷ과 믈와 맛디 아니케 ᄒᆞ야 瘡차ᇰ이 어울면 됻ᄂᆞ니라 又方取小便服三兩盞卽差{{*|}} ᄯᅩ 小쇼ᇢ便뼌 두ᅀᅥ 잔을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 杏人{{*|去皮擣如泥}}石灰{{*|等分}}右件藥同硏每用以猪脂和傅之日二三度卽差{{*|}} ᄯᅩ 金금瘡창애 피 긋디 아니커든 ᄉᆞᆯ곳 ᄌᆞᅀᆞᄅᆞᆯ 것 밧겨 즌ᄒᆞᆰᄀᆞ티 디코 石쎡灰횡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ᄒᆞᆫᄃᆡ ᄀᆞ라 도ᄐᆡ 기르므로 ᄆᆞ라 브툐ᄃᆡ ᄒᆞᄅᆞ 두ᅀᅥ 번곰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 ᄯᅩ 프른 뵈ᄅᆞᆯ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ᄢᅳ리면 잇사나ᄋᆞᆯ 後ᅘᅮᇢ에 됻ᄂᆞ니라 又方取狼牙草莖葉爛搗傅之{{*|}} ᄯᅩ狼라ᇰ牙앙草초ᇢ ㅅ 줄기와 닙과ᄅᆞᆯ 므르디허 브티라 又方取紫檀末以傅瘡上止痛止血生肌甚効{{*|}} ᄯᅩ 紫ᄌᆞᆼ檀딴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긋고 피 긋고 ᄉᆞᆯ 나ᄂᆞ니 甚씸히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牡礪散 牡礪{{*|半兩}}石膏{{*|一分}}右件藥擣羅更細硏用煉了猪膏調成膏以封瘡上痛卽止{{*|}}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텨 알품 긋게 ᄒᆞᄂᆞᆫ 牡무ᇢ礪롕散산은 牡무ᇢ礪롕 半반 兩랴ᇰ과 石쎡膏고ᇢ ᄒᆞᆫ 分분을 디허 츠고 다시ᄀᆞᄂᆞ리 ᄀᆞ라 煉련혼 도ᄐᆡ 곱ᄋᆞᆯ 노겨 골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取雄黃末傅瘡上當用有汁出卽差{{*|}}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반ᄃᆞ기 汁집이 나리니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疼痛以龍骨細硏傅瘡上{{*|}}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 긋디 아니코 알ᄑᆞ거든 龍료ᇰ骨고ᇙ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라 又方用桑根半斤剉以水一豆斗煎取五升不計時候煖服一盞服盡卽効{{*|}} ᄯᅩ ᄲᅩᇰ나못 불휘 半반 斤근을 사ᄒᆞ라 믈 ᄒᆞᆫ 말로 글혀 닷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데여 ᄒᆞᆫ잔을 머구ᄃᆡ 다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石灰擣爲末厚傅瘡上用緜子裹之若瘡口深不合者內少許末令瘡漸漸合也{{*|}}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瘡차ᇰ의 두터이 ᄇᆞᄅᆞ고 소오ᄆᆞ로 ᄡᅩᄃᆡ ᄒᆞ다가 瘡차ᇰ이 기퍼 어우디 아니커든 져기 ᄀᆞᆯᄋᆞᆯ 녀허 瘡차ᇰ이 졈졈 어울에 ᄒᆞ라 又方用乾塩梅燒作灰細硏傅瘡上卽差{{*|}} ᄯᅩ 소고매 ᄆᆞᆯ외욘 梅ᄆᆡᆼ實씨ᇙ을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金瘡血出不止取車前葉爛擣傅之血卽止連根取用亦効{{*|}}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나 긋디 아니커든 車창前젼 니플 므르디허 브티면 피 즉재 긋ᄂᆞ니 불휘 조쳐 ᄡᅮ미 ᄯᅩ 됴ᄒᆞ니라 治金瘡內漏瘀血在腹中脹滿宜服䖟蟲散 䖟蟲{{*|三十枚去趐足微炒}}桃仁{{*|一兩湯漫去皮尖雙仁麩炒微黃}}桂心{{*|一兩半去麤皮}}川大黃{{*|三兩剉碎微炒}}水蛭{{*|三十枚炒令微黃}}右件藥擣細羅爲散每服二錢用童子小便一中盞煎至五分溫溫和滓服日五服夜三服如卒無小便用酒水代之亦得{{*|}} 金금瘡차ᇰᄋᆡ 피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얼읜피 ᄇᆡ 안해 이셔 탸ᇰ만커든 䖟ᄆᆡᇰ蟲뜌ᇰ散산을 머귤디니 䖟ᄆᆡᇰ蟲뜌ᇰ 셜흔 나ᄎᆞᆯ ᄂᆞ래와 발와 앗고 자ᇝ간 봇고 桃또ᇢ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을 더운 므레 ᄃᆞ마 것과 부리와어우러ᅌᅵᄅᆞᆯ 앗고 기울와 섯거 봇가 져기 노ᄅᆞ게 코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 半반을 麤총ᄒᆞᆫ 거츨 밧기고川ᄌᆑᆫ大땡黃ᅘᅪᇰ 석 兩랴ᇰ을 사ᄒᆞ라 자ᇝ간 봇고 거머리 셜흔 나ᄎᆞᆯ 봇가 자ᇝ간 노ᄅᆞ게 ᄒᆞ고 이 藥약ᄃᆞᆯᄒᆞᆯ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에 두 돈곰 아ᄒᆡ 오좀 ᄒᆞᆫ 中듀ᇰ잔ᄋᆞ로 글혀 다ᄉᆞᆺ 分분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滓ᄌᆡᆼ 조쳐 머구ᄃᆡ 나ᄌᆡ 다ᄉᆞᆺ 번 먹고 바ᄆᆡ 세 번 머그라 ᄒᆞ다가 밧바 小쇼ᇢ便뼌 업거든 수리나 므리나 ᄒᆞ야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金瘡內漏血入腹中 大麻仁一升葱白{{*|二七莖}}右相和搗令熟以水三大盞煮取一盞去滓分爲三服若血出不盡腹中有膿血更令服當下膿血効{{*|}} ᄯᅩ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들어든 열ᄡᅵ ᄒᆞᆫ 되와 파 두닐굽 줄기ᄅᆞᆯ 섯거 디허 닉게 ᄒᆞ야 믈 세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츙ᄒᆞ야 즈ᅀᅴ 앗고 ᄂᆞᆫ화 세 버네 머고ᄃᆡ ᄒᆞ다가 피 몯 다 나 ᄇᆡ 안해 골ᄆᆞᆫ 피 잇거든 다시 머기면 골ᄆᆞᆫ 피 ᄂᆞ려 됴ᄒᆞ리라 又方蒲黃{{*|二兩}}當歸{{*|二兩末}}右相和更硏令勻每服以溫酒調下一錢日四五服{{*|}} ᄯᅩ 蒲뽕黃ᅘᅪᇰ 두 兩랴ᇰ과 當다ᇰ歸귕 두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섯거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번 머고매 ᄃᆞᄉᆞᆫ 술로 ᄒᆞᆫ 돈ᄋᆞᆯ 프러 머고ᄃᆡ ᄒᆞᄅᆞ 네다ᄉᆞᆺ 번 머그라 金瘡內漏血在腹中不出以牡丹擣細羅爲散不計時候以溫酒調下三錢{{*|}}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이셔 나디 아니커든牡무ᇢ丹단 ᄋ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ᄃᆞᄉᆞᆫ 술로 서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以馬齒莧擣取汁每服煖飮一小盞卽止兼治惡血在腹中{{*|}} ᄯᅩ馬망齒칭莧ᅘᅧᆫ ᄋᆞᆯ 디허 汁집 아ᅀᅡ 머글 제 데여 ᄒᆞᆫ 小쇼ᇢ盞잔ᄋᆞᆯ 머그면 곧 긋ᄂᆞ니 모딘 피 ᄇᆡ 안해 이쇼ᄆᆞᆯ 조쳐 고티ᄂᆞ니라 衛生易簡方金瘡血不止用小薊葉挼爛封之{{*|}} 金금瘡차ᇰ 피 긋디 아니커든 小쇼ᇢ薊곙 니플 니기 부븨여 브티라 又方用白薇末貼之立止{{*|}} ᄯᅩ 白ᄈᆡᆨ薇밍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用白芍藥一兩熬黃爲末酒調二錢服或米飮亦止痛{{*|}} ᄯᅩ白ᄇᆡᆨ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봇가 누르거든 細솅末마ᇙᄒᆞ야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며 시혹 ᄡᆞᆯ 글힌 므레 머거도 ᄯᅩ 알포미 긋ᄂᆞ니라 又方用血竭末傅之血與疼痛立止{{*|}} ᄯᅩ 血ᅘᆑᇙ竭꺼ᇙ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피와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金瘡腸出隨卽推入用桑皮作線縫佳以熱雞血塗之{{*|}}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챠ᇰᄌᆡ 나거든 卽즉時씽예 미러 녀코 ᄲᅩᇰ 거츠로 실 ᄆᆡᇰᄀᆞ라 호면 됴ᄒᆞ니 더운 ᄃᆞᆯᄀᆡ 피로 ᄇᆞᄅᆞ라 又方用靑蒿搗傅止血定痛生肌甚良{{*|}} ᄯᅩ 靑쳐ᇰ蒿호ᇢᄅᆞᆯ 디허 ᄇᆞᄅᆞ면 피 그츠며 알포미 그츠며 ᄉᆞᆯ히내사ᄂᆞ니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經驗良方治金瘡 木賊{{*|三兩}}麻黃{{*|去節一兩}}甘草{{*|七錢半}}右爲細末每服五錢熱酒調下先整骨了夾定飮之令醉{{*|}} 金금瘡차ᇰ 고툐ᄃᆡ 속새 세 兩랴ᇰ과 麻망黃ᅘᅪᇰ ᄆᆞᄃᆡ 아ᅀᅡ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 닐굽 돈 半반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한 服뽁애 다ᄉᆞᆺ 돈ᄋᆞᆯ 더운 수레 프러 먹고 몬져 ᄲᅧᄅᆞᆯ 고텨 ᄢᅧ 단기고 술 머겨 醉ᄌᆔᆼ케 ᄒᆞ라 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蒜半升破去心皮右以無灰酒二升煮令極爛細硏每服一合已來須臾得汗卽差{{*|}}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ᄇᆞᄅᆞᆷ 마자 왜트닐 고툐ᄃᆡ 마ᄂᆞᆯ 半반 되ᄅᆞᆯ ᄢᅢ혀 고ᄀᆡ야ᇰ과 거프를 앗고 ᄌᆡ 업슨 술 두 되로 글혀 ᄀᆞ자ᇰ 므르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번 머고ᄃᆡ ᄒᆞᆫ 홉만 ᄒᆞ면 아니한 더데 ᄯᆞᆷ나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鷄糞{{*|二兩}}黑豆{{*|一升洗淨炒令燋黑}}右以酒三升煎熱投藥於酒中更煎三五沸去滓時時隨多少飮之令盡得汗爲佳未汗卽更作服以汗出爲度{{*|}} ᄯᅩ ᄃᆞᆯᄀᆡ ᄯᅩᇰ 두 兩랴ᇰ과 거믄 코ᇰ ᄒᆞᆫ 되ᄅᆞᆯ 조히 시서 봇가 검게 ᄒᆞ고 술 서 되로 글혀 덥거든 藥약ᄋᆞᆯ 수레 녀허 다시 세다ᄉᆞᆺ 번 글히고 즈ᅀᅴ 아ᅀᅡ 時씽時씽예 하거나 젹거나 머거 업게 ᄒᆞ야 ᄯᆞᆷ나미 됴ᄒᆞ니 ᄯᆞᆷ 곳 아니 나거든 다시 ᄆᆡᇰᄀᆞ라 머거 ᄯᆞᆷ날 ᄀᆞ자ᇰ ᄒᆞ라 又方雞子{{*|三枚}}鳥麻油{{*|五合}}合煎稍稠待冷塗瘡上極妙救急方上{{*|終}}{{*|}} ᄯᅩ ᄃᆞᆯᄀᆡ알 세 낫과 ᄎᆞᆷ기름 닷 호ᄇᆞᆯ ᄒᆞᆫᄃᆡ 달혀 져기 두텁거든 ᄎᆡ와 헌 ᄃᆡ ᄇᆞᄅᆞ면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옛한글/끝}} 1dc237lubrl2vz4s3c37vyhwk0uahl4 458045 458044 2026-08-17T21:12:13Z Blahhmosh 13019 /* 大小便不通第十五 */ 458045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부제=권상 |저자= |이전= |다음=[[../하|권하]] |설명= }} {{옛한글 알림}} {{옛한글/시작}} ==卒中風第一== 直指方治卒中法 圓白天南星{{*|濕紙裹煨}}南木香 蒼朮{{*|生}}白羊眼半夏{{*|用百沸湯就銚蘸少頃各一錢半}}辣細辛 甘草{{*|生}}石昌蒲{{*|細切各一錢}}右件剉散分作二服水一盞半生薑七厚片煎取其半乘熱調蘇合香圓三圓灌下痰盛者加全蝎二枚灸治一切卒中不論中風中寒中暑中濕中氣及痰厥飮厥之類初作皆可用此先以皂角去弦皮細辛或生南星半夏爲末揭以管子吹入鼻中俟其噴嚔卽進前藥牙噤者中指點南星細辛末幷烏梅肉頻擦自開{{*|直띡〮指ᄌᆞᆼ〯方바ᇰ믄득〮 中듀ᇰ風보ᇰᄒᆞ니〮 고티〮ᄂᆞᆫ〮 法{{SIC|법〮|빔〮}}은도〮렫고〮 ᄒᆡᆫ〮天텬南남星셔ᇰ 을저즌〮 죠ᄒᆡ〮예〮 ᄡᅡ〮 구으〮니와〮 南남木목〮香햐ᇰ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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밠〮 엄지〮가락 아랫ᄀᆞᄅᆞᆫ 그〮믈〮ᄯᅮ〮ᄃᆡ〮 나〮마초〮 ᄒᆞ면〮즉〮재〮 됻〯ᄂᆞ〮니라 ᄯᅩ〮百ᄇᆡᆨ〮會ᅘᅬᆼ ᄅᆞᆯ〮七치ᇙ〮壯자ᇰ〮 ᄋᆞᆯ〮 ᄯᅳ〮라〮}} 衛生易簡方治中風不語舌强 人乳汁 三年陳醬{{*|各五合}}右和硏以生布絞汁不拘時少少與服良久當語{{*|中듀ᇰ〮風보ᇰᄒᆞ〮야〮 말〯 몯〯고〮 혀〮세〯닐〮 고툐〮ᄃᆡ〮 사〯ᄅᆞᄆᆡ〮 졋〮!과〮!괴〮! 三삼年년 무근〮쟈ᇰ〯 各각 닷홉 과〮ᄅᆞᆯ〮섯거〮 ᄀᆞ〮라 生ᄉᆡᇰ뵈〮로〮 汁집〮을〮ᄧᅡ〮 時씽節져ᇙᄋᆞᆯ〮븓들이〮디〮 마〯오〮 젹젹 주〮어〮 머기〮면〮 오라〮면〮 반ᄃᆞ〮기 말〯ᄒᆞ리〮라〮}}又方治中風急喉痺欲死者用白殭蠶焙黃爲末生薑自然汁調灌下喉立愈{{*|ᄯᅩ 中듀ᇰ風보ᇰᄒᆞ〮야〮과 ᄀᆞᆯ이〮 모기〮브ᅀᅥ〮 죽ᄂᆞ닐〮 고툐〮ᄃᆡ〯白ᄈᆡᆨ〮殭가ᇰ蠶짬 ᄋᆞᆯ〮焙ᄈᆡᆼ〮籠로ᇰ애〮 ᄆᆞᆯ외〮야〮 노〮라〮커든〮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에〮 프〮러〮 모ᄀᆡ〮 브ᅀᅳ면〮 즉〮재〮 됻〯ᄂᆞ〮니라〮}}又方治中風佛省人事用香油或生薑自然汁灌之卽醒{{*|ᄯᅩ〮 中듀ᇰ〮風보ᇰ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모ᄅᆞ〮ᄂᆞ닐〮 고툐〮!ᄃᆡ!ᄐᆡ〮! ᄎᆞᆷ〮기르〮미나〮 시혹〮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이〮어나〮 브ᅀᅳ면〮 즉〮재〮 ᄭᆡ〮ᄂᆞ〮니라〮}}又方卒中風不省人事痰壅用生白礬二錢爲末生薑自然汁調幹開口灌下化痰或吐卽醒{{*|ᄯᅩ〮 믄득〮 中듀ᇰ風보ᇰ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모ᄅᆞ〮고〮 痰땀이〮마켜〮ᄭᅥ든 生ᄉᆡᇰ白ᄈᆡᆨ〮礬뻔〮 두〯 돈〯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에〮 프〮러〮 입〮버〯리〮혀고〮 브ᅀᅳ면〮 痰땀이〮슬〮어나 시혹 吐통ᄒᆞ면〮 곧〮 ᄭᆡ〮ᄂᆞ〮니라〮}} 簡易方救急稀涎散治中風忽然昏若醉形體昏悶四肢不收涎潮於上氣閉不通光明白礬{{*|一兩}}猪牙皂角{{*|四介肥實幷不蛀者去黑皮}}右細末硏勻輕者半錢匕重者三錢匕溫水調灌下不大嘔吐但微微冷涎出一二升便得醒醒次緩而調理不可大吐{{*|救구ᇢ急급稀힁涎ᄊᆑᆫ散산〮ᄋᆞᆫ〮 中듀ᇰ〮風보ᇰᄒᆞ〮야〮 忽호ᇙ然ᅀᅧᆫ히 어〮즐ᄒᆞ〮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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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ᄃᆞᆯᄀᆡ〮앐〮 ᄆᆞᆯᄀᆞᆫ〮 므〮레〮 ᄆᆞ〮라〮브티〮라〮 허〯닌〮ᄆᆞᄅᆞ닐〮 ᄲᅵ후〮미〮 됴〯ᄒᆞ니〮라〮}} 得效方治足上凍爛生瘡黃丹爲末用猪脂調傅妙{{*|바〮리〮ᄃᆞ〮라 헤여〮디닐〮 고툐〮ᄃᆡ〮 黃ᅘᅪᇰ丹단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도ᄐᆡ〮 기르〮메〮 ᄆᆞ라〮브튜〮미〮 됴〯ᄒᆞ니〮라〯}} 衛生寶鑑如神散治凍瘡皮膚破爛痛不可忍大黃爲細末新水調搽凍破瘡上{{*|}} 凍도ᇰ〮瘡차ᇰ〮 이〮 갓과〮 ᄉᆞᆯ〮쾌〮 헤여〮디〮여〮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닐〮 고툐〮ᄃᆡ〮大땡〮黃ᅘᅪᇰ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ᆺ기룬〮 므〮레〮프〮러 헌〯듸〮 ᄇᆞᄅᆞ라〮 衛生十全方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濃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茄子莖葉枯者煮洗之{{*|}} 凍도ᇰ〮瘡차ᇰ을〮 고툐〮ᄃᆡ〮 가짓 불휘ᄅᆞᆯ〮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고ᇙ〮髓ᄉᆔᆼ〯로〮 ᄇᆞᄅ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ᄯᅩ〮 가짓 줄기〮와〮 닙이우〮닐〮 글혀〮 시스〮라〮 又方黃丹炒令色變 風化石灰{{*|等分}}右拌勻每一兩許沸湯浸洗患處冷卽止不過三洗効{{*|}} ᄯᅩ〮 黃ᅘᅪᇰ丹단ᄋᆞᆯ〮봇가〮 비〮치〮다ᄅᆞ게〮 코〮 ᄇᆞᄅᆞ매〮ᄂᆞᆯ욘〮 石쎡〮灰횡 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섯거〮 골아〮 ᄒᆞᆫ 兩랴ᇰ만〮글는 므〮레〮 ᄃᆞᆷ가〮 알ᄑᆞᆫ ᄃᆡ〮 시수〮ᄃᆡ〮 ᄎᆞ〮거든〮 말〮면〮 세〯 번 시수〮믈〮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라〮 凍死聖惠方治凍死方以大器中多熬灰使煖囊盛以摶其心冷卽更易心煖氣通目轉則口乃亦開可與溫酒服粥淸稍稍嚥之卽活若不先溫其心便將火灸其身冷氣與火相摶急卽不活也{{*|}} 어러〮주그〮닐〮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큰〮그르〮세〮 ᄌᆡ〮ᄅᆞᆯ〮만〯히〮 봇가〮 덥〯게〮 ᄒᆞ〮야〮 주머니〮예〮녀허〮 가〮ᄉᆞ〮매〮노햇〮다가〮 ᄎᆞ〮거든〮 즉〮재 ᄀᆞᆯ라〮ᄆᆞᅀᆞ미〯 더워〮 氣킝〮分분이〮 通토ᇰᄒᆞ며 누〮니 돌〯면〮 이〮비 ᄯᅩ〮 열〯리니〮어루〮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며〮粥쥭〮므〮를〮 漸쪔〯漸쪔〯 ᄉᆞᇝ기〮면〮 곧〮 사〯ᄂᆞ니〮ᄒᆞ〮다가〯 그 ᄆᆞᅀᆞᄆᆞᆯ〮ᄃᆞᆺ게〮 아니〮코〮 곧〮 블〮로〮 그 모〮ᄆᆞᆯ〮ᄧᅬ〯 면〮 ᄎᆞᆫ〮 氣킝〮分분이 블〮와〮 서르사화〮 ᄲᆞᄅᆞ면〮 곧〮사〯디〮 몯〯ᄒᆞ〮ᄂᆞ〮니라〮 本朝經驗粥飮醬湯爲上飮酒次之{{*|}} 粥쥭〮믈〮와〮쟈ᇰ〯ᄭᅮ기〮 위두코〮 술 머구〮미〮버그〮니라〮 ==中暑第三== 聖惠方治熱暍心悶方以熱土及熬熱灰土壅其臍上佳{{*|}} 中듀ᇰ〮暑셩〮ᄒᆞ〮야〮 ᄆᆞᅀᆞᆷ 답답ᄒᆞ니〮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더운〮 ᄒᆞᆰ과〮 봇ᄀᆞᆫ〮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우희〮 두프〮면〮 됴〯ᄒᆞ〮니라〮 又方濃煮蓼取汁一大盞分二服飮之愈{{*|}} ᄯᅩ〮엿귀〮ᄅᆞᆯ〮 두터이〮 글혀〮 汁집〮을〮 取츙〯ᄒᆞ〮야〮 큰〮 ᄒᆞᆫ 盞잔ᄋᆞᆯ〮 두〮 服뽁〮애〯 ᄂᆞᆫ화〮 머그〮면〮 됻〯ᄂᆞ〮니〮라〮 又方生地黃汁一中盞溫暖服之{{*|}} ᄯᅩ〮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汁집〮 ᄒᆞᆫ 中듀ᇰ盞잔〮을〮데여〮 머그〮라〮 又方取麵一兩以溫水一中盞攪和服之{{*|}} ᄯᅩ〮 밄〮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을〮 ᄃᆞᄉᆞᆫ〮 믈〮 ᄒᆞᆫ 中듀ᇰ盞잔〮애〮 프〮러 머그〮라〮 又方服地漿一盞卽愈{{*|}} ᄯᅩ〮地띵〮漿쟈ᇰ ᄒᆞᆫ 盞잔〮ᄋᆞᆯ〮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地띵〮漿쟈ᇰᄋᆞᆫ〮ᄯᅡ해〮 져〯근 굳〮 ᄑᆞ〮고〮 믈〮 브ᅀᅥ〯니기〮 후ᇰ〯두ᅌᅲᆫ〮 므〮리라〯 千金方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 더우〮며닐〮 고툐〮ᄃᆡ〮길헷〯 더운〮ᄒᆞᆯᄀᆞ〮로〮 가ᄉᆞ〮매〮여ᇇ고〮 져〯 기 식거든〮 ᄀᆞᆯ오〮 氣킝〮分분이〮通토ᇰ커든〮 말〯라〮 又方張死人口令通以暖湯徐徐灌口中小擧死人頭令湯入腹湏臾卽蘇{{*|}}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이〮블〮버〯리혀〮 通토ᇰ케〮 ᄒᆞ고〮 더운〮믈〮로〮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이베〮 븟고〮 주근〮 사〯ᄅᆞᄆᆡ〮 머리〮ᄅᆞᆯ〮 져〯기〮 드러〮 더운〮 므〮리〮 ᄇᆡ에들〮에〮 ᄒᆞ면〮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살〯리라〮 又方使人噓其心令暖易人爲之{{*|}} ᄯᅩ〮 사〮ᄅᆞ〮ᄆᆞ로〮 가〮ᄉᆞ〮매〮 잆〮김〯 드〮려 덥〯게〮 호〮ᄃᆡ〮 사〯ᄅᆞᄆᆞᆯ〮ᄀᆞ람〮 ᄒᆞ라〮 又方抱狗子若雞着心上熨之{{*|}} ᄯᅩ〮 가ᇰ아지〯와〮 ᄃᆞᆰ과〮ᄅᆞᆯ〮 아나〮 가ᄉᆞᆷ 우희〮다혀 熨ᅙᅮᇙ〮ᄒᆞ라 又方屋上南畔瓦熱熨心冷易之{{*|}} ᄯᅩ〮 집 우흿 南남녁ᄀᆞ〮ᅀᅢᆺ〮 디새〮ᄅᆞᆯ 덥〯게〮 ᄒᆞ〮야〮 가ᄉᆞ〮매〮 熨ᅙᅮᇙ〮호〮ᄃᆡ〮 식거든〮 ᄀᆞᆯ라〮 壽域神方車輪土五錢冷水調澄淸服之妙{{*|}} 술윗〮ᄠᅵ옛〯 무든 ᄒᆞᆰ 닷 도〯ᄂᆞᆯ〮 ᄎᆞᆫ〮므레〮 프〮러〮ᄆᆞᆰ안초〮아 머그〮면〮 됴〯ᄒᆞ니라〮 又方中暑發昏以新汲水滴入鼻孔用扇搧之重者以地漿灌則醒與冷水飮則死{{*|}} ᄯᅩ〮 中듀ᇰ〮暑쎵〮ᄒᆞ〮야〮 어즐〮커든〮 ᄀᆞᆺ 기!른〮!룬〮! 믈〮로곳〮굼긔〮 처〮디〯오〮 부체〮로〮부츠라〮 重뜌ᇰᄒᆞ니〮란〮 地띵〮漿쟈ᇰᄋᆞ로〮 브ᅀᅳ면 ᄭᆡ〮ᄂᆞ니〮 ᄎᆞᆫ〮 믈〮 ?머?기〮면〮 ?죽?ᄂᆞ니〮라〮 又方用大蒜三兩瓣細嚼溫湯送下仍禁冷水卽愈{{*|}} ᄯᅩ〮 굴〯근〮 마ᄂᆞᆯ〮 두〯ᅀᅥ알〮 ᄒᆞᆯ ?ᄂᆞ?로니 십고〮 더운〮믈〮로〮ᄂᆞ리〮오고〮 ᄎᆞᆫ〮 므〮를〮 먹디〮 말〯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 ᄯᅩ〮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ᄒᆞᆰ과〮 굴〯근〮마ᄂᆞᆯ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ᄂᆞ로니 ᄀᆞ〮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管見大全良方云若偶在無人所居之境一時無湯可移病人安於樹陰之下却掬路上熱土安於病人臍上仍撥開作一窮以人注尿於其中得暖卽活{{*|}} ᄒᆞ다가〮마!조〮!초〮!아 사〮ᄅᆞᆷ 업〯슨〮 ᄯᅡ해이셔〮 더운〮믈 업〯거든〮 病뼈ᇰ〮人ᅀᅵᆫᄋᆞᆯ 옮겨〮 나못〮ᄀᆞ〮ᄂᆞᆯ해 두고〮 길헷〮 더운 ᄒᆞᆯᄀᆞᆯ〮?우?희〮여〮 病뼈ᇰ〮人ᅀᅵᆫ의 ᄇᆡᆺ복 우희〮노코〮 헤혀〮 ᄒᆞᆫ굼글〮 짓〯고〮 사〯ᄅᆞ미〮 그 가온〮ᄃᆡ〮 오좀〮 누면〮 더우〮면〮 곧 사〯ᄂᆞ〮니라〮 ==中氣第四== 和劑方指南云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激挫忿怒盛氣不得宣泄逆氣上行忽然仆倒昏迷不省人事牙關緊急手足拘攣其狀與中風無異但口內無涎聲此證只是氣中不可妄投取涎發汗等藥而反生他病但可與七氣湯分解其氣散其壅結其氣自止七氣湯連進效速更可與蘇合香元{{*|}} 氣킝〮中듀ᇰ〮ᄒᆞᆫ 證지ᇰ은〮해〯 豪ᅘᅩᇢ貴귕ᄒᆞᆫ 사〯ᄅᆞ미이〯ᄅᆞᆯ〮 因ᅙᅵᆫᄒᆞ〮야〮!긱!격〮!발〮ᄒᆞ며〮 것기〮여〮 忿푼〯怒농〯ᄒᆞ〮야〮 氣킝〮分분이〮 盛쎠ᇰ〮호〮ᄃᆡ펴ᄃᆞᆯ〮 몯〯ᄒᆞ〮야〮 氣킝〮分분〮이거스〮러〮 우흐〮로〮올오〮매나〮 믄〮득〯업더〮디〮여 어〮즐〮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고〮 니〮세워드〮며 손〮바리뷔〯트〯리 그 야ᇰ〯이〮 中듀ᇰ〮風보ᇰ과〮 다ᄅᆞ디〮 아니〮ᄒᆞ니 오직〮 입〮 안해〮 추ᇝ〮소ᄅᆡ〮 업〯스니〮 이〮 證!시ᇰ〮!지ᇰ〮!이〮 곧〮 이〮 氣킝中듀ᇰ〮이〮니〮간대로〮 춤〮아ᅀᆞ며〮 ᄯᆞᆷ〮내〯욤 ᄃᆞᆯ〮햇〮 藥약〮ᄋᆞᆯ ᄡᅥ〮도ᄅᆞ혀〮 다ᄅᆞᆫ 病뼈ᇰ나긔〮 호〮미〮 몯〯ᄒᆞ리〮니〮 오직〮七치ᇙ氣킝湯!다ᇰ!타ᇰ! ᄋᆞᆯ 머겨〮 그 氣킝〮分분을ᄂᆞᆫ화〮 노기며〮막?딜?여〮 ᄆᆡ요〮ᄆᆞᆯ〮 흐트〮면〮 그 氣킝分분이〮 절로〮긋ᄂᆞ니〮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ᆯ〮닛우〮 머기〮면〮 效ᅘᅭᇢ〮驗ᅌᅥᆷ〮이〮 ᄲᆞ〮ᄅᆞ니〮 ᄯᅩ〮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을〮머규미〮 됴〯ᄒᆞ〮니라〮 七氣湯治虛冷上氣及寒熱怒恚喜憂愁等氣內結積聚堅牢如柸心腹絞痛不能飮食時發時止發則欲死半夏{{*|湯洗七次焙五兩}}人蔘{{*|去蘆}}甘草{{*|灸}}肉桂{{*|去麤皮各一兩}}右剉每服三錢水一大盞入生薑三片煎至七分去滓稍熱服食前{{*|}}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ᆫ虛!힝!헝!冷ᄅᆡᇰ〯 ᄒᆞ야〮 氣킝〮分분이〮오ᄅᆞ니〮와〮 寒ᅘᅡᆫ과〮 熱ᅀᅧᇙ〮와〮 怒농〯와〮 깃붐〮과〮 시름〮 ᄃᆞᆯ〮햇〮 氣킝〮分분이〮 안해〮모다〮 구두〮미〮 진〮 ᄀᆞᆮ〮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파〮 飮ᅙᅳᆷ〯食씩〮 몯〮ᄒᆞ며〮 잇다감〮 發버ᇙᄒᆞ며잇다감〮 그처 發버ᇙ〮ᄒᆞ면〮 죽ᄂᆞ닐〮 고티〮ᄂᆞ니〮 半반〮夏ᅘᅡᆼ〮ᄅᆞᆯ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焙ᄈᆡᆼ乾건호〮니〮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蔘ᄉᆞᆷᄋᆞᆯ〮 !이!머!리〮!비!버!히고〮 甘감草초ᇢ〮ᄅᆞᆯ〮 굽고〮 肉ᅀᅲᆨ〮桂ᄀᆒᆼ〮ᄅᆞᆯ〮麤총ᄒᆞᆫ 것밧교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 돈〮애〮 믈 ᄒᆞᆫ 大땡〮?盞?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 너허〮 七치ᇙ〮分분을〮 글혀〮 즛의 앗〮고〮 져〯기 덥〮게 ᄒᆞ〮야〮 食씩〮前쩐에〮 머기〮라〯 澹療方獨香湯主中氣閉目不語四肢不收昏沈等證南木香爲末每服一錢冬瓜子煎湯調下{{*|}} 獨똑〮香햐ᇰ〮湯타ᇰ은〮 中듀ᇰ〮氣킝〮ᄒᆞ야〮 눈〮ᄀᆞᆷ〮고〯 말〯 몯〯고〮 四ᄉᆞᆼ〮肢징를〮 거두〮디〮 몯〯ᄒᆞ고 昏혼沈띰 等드ᇰ〯엣〮 證지ᇰ?에〮? 主즁〯ᄒᆞ니〮 南남木목〮香햐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 錢쩐을冬도ᇰ瓜광 ᄡᅵ〮글휸〮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廻陽湯治中氣脉弱大叚虛怯等證 川烏{{*|生去皮臍}}附子{{*|生去皮臍各半兩}}乾薑{{*|炮二錢}}靑皮{{*|去穰一兩}}益智仁{{*|一兩}}右剉每服三錢水二盞生薑七片棗一枚同煎至一盞去滓溫服或入小木香{{*|}} ᄯᅩ〮廻ᅘᅬᆼ陽야ᇰ湯타ᇰ 은〮 中듀ᇰ氣킝〮ᄒᆞ〮야〮 脉ᄆᆡᆨ〮이〮 弱ᅀᅣᆨ〮ᄒᆞ〮야 ᄀᆞ자ᇰ〮 虛헝弱ᅀᅣᆨ〮ᄒᆞᆫ〮 等드ᇰ〯엣〮 證지ᇰ〮을〮 고티ᄂᆞ니川ᄎᆑᆫ烏ᅌᅩ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과〮 앗〯고〮 附뿡〮子ᄌᆞ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아ᅀᅩ〮니〮 各각 半반〮 兩랴ᇰ〯과〮 乾간薑가ᇰ 炮뽀ᇢ호〮니 두〯 돈〮과〮 炮뽀ᇢᄂᆞᆫ〮 믈〮 저즌〮 죠ᄒᆡ〮예〮 ᄡᅡ〮노ᄋᆞᆯ압〮ᄌᆡ〮예 무더〮구을〮시〮라〮 靑쳐ᇰ皮삥솝〮 아ᅀᅩ〮니〮 ᄒᆞᆫ 兩랴ᇰ〮과〮 益ᅙᅧᆨ〮智딩〮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三삼錢쪈에〮 믈 두〯 盞잔〮과〮 生ᄉᆡᇰ薑가ᇰ 닐굽〮 片편〮과〮 大땡〮棗조ᇢ〯 ᄒᆞᆫ ᄂᆞᆺ〯과〮 ᄒᆞᆫᄃᆡ〮 글혀 ᄒᆞᆫ 盞잔애〮 니르〮거든〮 즛의 앗〯고〮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시혹〮小쇼ᇢ木목〮香햐ᇰ ᄋᆞᆯ〮 더드〮리ᄂᆞ니라〮 ==中忤中惡鬼氣第五== 經驗良方云其證暮夜或登廁或出郊野或遊空冷屋室或人所不至之地忽然眼見鬼物鼻口吸着惡鬼氣驀然倒地四肢厥冷兩手握拳口鼻出淸血性命逡巡湏臾不救此證與尸厥同但腹不鳴心脇俱暖凡中惡驀然倒地切勿移動其尸卽令親戚衆人圍繞打鼓燒火或燒射香安息蘇木香樟木之類直候醒記人事方可移歸犀角{{*|鎊屑硏爲細末半兩}}射香 朱砂{{*|各一分}}已上爲細末每服二錢井水調服灌之如無前藥用雄黃一味爲末每服一錢煎桃枝葉湯調灌又無雄黃用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男用婦衣婦用男衣燒灰每服二錢百沸湯調下{{*|}} 그 證지ᇰ〮이〮 바ᄆᆡ〮 시혹〮 뒷〯가내〮 오ᄅᆞ거나〮 시혹〮드르〮헤〮 나〮가〮거나〮 시혹〮뷘〯 ᄎᆞᆫ〮 房바ᇰ의〮 놀〯어나〮 시혹〮 사ᄅᆞ미〮 가디〮 아니〮ᄒᆞ〮ᄂᆞᆫ〮 ᄯᅡ해〮 믄득〮 누네〮 귓것 보며〮 고〮콰〮 입〮과〮로〯모〯딘〮 귓거싀〮 氣킝〮分분을〮 마시〮거나〮 ᄒᆞ〮야〮 믄득〮 ᄯᅡ해〮그우러〮디〮여〮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두〯 소〮니〮쥐〯오〮 입〮과〮 고해〮ᄆᆞᆯᄀᆞᆫ〮 피〮 흘러〮性셔ᇰ〮命며ᇰ〮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이〮 證지ᇰ이〮尸싱厥궈ᇙ〮 와〮 ᄀᆞᆮ〮ᄒᆞ니〮 오〮직〮 ᄇᆡ〮우〯디〮 아니〮ᄒᆞ고〮 가ᄉᆞᆷ〮과〮녀비〮 다〯더우〮니라〮 믈〮읫 中듀ᇰ〮惡ᅙᅡᆨ〮 ᄒᆞ〮야〮 믄득〮 ᄯᅡ해〮 그우러디〮거든〮자ᇝ〯간도〮 그주거〮믈〮 옮기〮디〮 말〯오〮 즉〮재아ᅀᆞᆷ〮과〮 한 사〯ᄅᆞ〮ᄆᆞ로〮 圍ᅌᅱᆼ繞ᅀᅭᇢ〮ᄒᆞ〮야〮붑〮 두드〮리며〮 블〮다히〮게 ᄒᆞ며〮 시혹〮射썅〮香햐ᇰ 과〮安ᅙᅡᆫ息씩〮香햐ᇰ 과〮 蘇송木목〮香햐ᇰ과〮樟자ᇰ木목〮 ㅅ類ᄅᆔᆼᄅᆞᆯ〮 ᄉᆞ〮라〮 人ᅀᅵᆫ事ᄊᆞᆼ〮ᄎᆞ〮료ᄆᆞᆯ〮 기드〮려〮 옮겨〮 갈〯디〮니라〮犀솅角각〮 ᄋᆞᆯ〮슬허〮 ᄀᆞ〮라〮 細솅〮末마ᇙ〮호니〮 半반〮 兩!라ᇰ〮!랴ᇰ〮!과〮 射썅〮香햐ᇰ과〮 朱즁砂상와〮 各각〮 ᄒᆞᆫ 分분을〮 細솅〮末마ᇙ〮ᄒᆞ〮야〮 每ᄆᆡᆼ〯服뽁〮二ᅀᅵᆼ〮錢쪈을〮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브ᅀᅳ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錢쪈을〮복셩홧가〮지 와〮 닙〮 글횬〮 므〮레〮 프〮러〮 브ᅀᅳ라〮 ᄯᅩ〮雄ᅘᅮᇰ黃ᅘᅪᇰ 업〯거든〮 ᄂᆞᆯᄀᆞᆫ〮 ᄯᆞᆷ〮오〮시나〮 시혹〮觸쵹〮衣ᅙᅴᆼ어나〮 ᄯᆞᆷ〮오〯ᄉᆞᆫ 모매〮 오래〮 니버〮 오래〮 ᄯᆞᆷ〮ᄇᆡ니〮 됴〯코〮 觸쵹〮衣ᅙᅴᆼᄂᆞᆫ 오래F 니븐〮솝〯오〮시라〮 남진ᄋᆞᆫ〮겨〯지븨〮 오〮ᄉᆞᆯ〮 ᄡᅳ〮고〮 겨〯지븐〮 남지〮늬〮 오〮ᄉᆞᆯ ᄡᅮᆯ〮디니〮 ᄌᆡ〮 ᄉᆞ라〮 每ᄆᆡᆼ〯服뽁〮 二ᅀᅵᆼ〮錢쪈을〮 一ᅙᅵᇙ百ᄇᆡᆨ〮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聖惠方治卒客忤有似卒死生昌蒲根擣絞取汁二三合灌下立愈{{*|}}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니〮 ᄀᆞᆮ〮ᄒᆞ닐〮 고툐〮ᄃᆡ〮 ᄂᆞᆯ昌챠ᇰ蒲뽕 ㅅ 불휘〮ᄅᆞᆯ〮디허〮 汁집〮ᄲᅡ〮 두〯ᅀᅥ〮 호ᄇᆞᆯ〮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治中惡心痛欲絶方釜底墨{{*|半兩}}塩{{*|一錢}}右件藥和硏以熱水一盞調頓服之{{*|}}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알파〮 죽ᄂᆞ닐〮 고툐〮!ᄐᆡ〮!ᄃᆡ〮!가마 미틧〮 검듸여ᇰ 半반〮 兩랴ᇰ〯과〮 소곰 ᄒᆞᆫ 돈〯ᄋᆞᆯ〮섯거〮 ᄀᆞ〮라〮 더운〮믈〮 ᄒᆞᆫ 盞잔〮애〮 프〮러 다〯 머그〮라〮 又方中惡氣絶以上好朱砂細硏於舌上書鬼字又額上亦書之此法極效{{*|}}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 긋거든 ᄀᆞ자ᇰ 됴〯ᄒᆞᆫ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혀〮에〮鬼귕〯ㅈ字ᄍᆞᆼ〮 ᄅᆞᆯ〮스〮고〮 ᄯᅩ〮니마〮희〮 술〮디니〮 이〮 法법〮이〮지〮극 됴〯ᄒᆞ〮니라〮 又方鬼神所擊諸術不治熟艾如鴨子大二枚水二盞煮取五分去滓頓服{{*|}} ᄯᅩ〮 귓거시〮텨〮 여러〮 法법〮으〮로〮 고티〮디 몯〯ᄒᆞ〮거든〮 니근〮 ᄡᅮᆨ〮올〮ᄒᆡ알〮 만〮ᄒᆞ니〮 두〯 나〯ᄎᆞᆯ〮 믈〮 두〯 盞잔〮애〮 글혀〮 다ᄉᆞᆺ〮 分분을〯 取츙〯ᄒᆞ〮야〮 즛의 앗〯고〮 다〯 머그〮라〮 又方卒中鬼擊及刀兵所傷血滿膓中不出煩悶欲死雄黃一兩細硏如粉以溫酒調一分服日三服血化爲水{{*|}} ᄯᅩ〮 귓거시〮 믄득〮 티며〮갈〮 잠개〮예〮 허러〮 피〮 토ᇰ〮 안해〮ᄀᆞᄃᆞᆨᄒᆞ〮야〮 나디〮 몯〯ᄒᆞ〮야〮답〮ᄭᅡ와〮 죽ᄂᆞ닐〮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ᄃᆞᄉᆞᆫ 수레〮 ᄒᆞᆫ 分뿐〮을〮 프〮러〮 ᄒᆞ〮ᄅᆞ 세〯 번곰〮 머그〮면〮 피〮 믈〮 ᄃᆞ외ᄂᆞ〮니라〮 千金方治卒忤塩八合以水三升煮取一升半分二服得吐卽愈若小便不通筆頭七枚燒作灰末水和服之卽通{{*|}}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니〮 고툐〮ᄃᆡ〮 소곰 여듧〮 호ᄇᆞᆯ〮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거〮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ᄒᆞ〮다가〮 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붇〮 머리〮 닐구〮블〮 ᄉᆞ〮라〮 ᄀᆞᄅᆞ !ᄃᆡᇰ!ᄆᆡᇰ!ᄀᆞ〮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라〮 葛氏備急方中惡證候視其上唇裏弦者有白如黍米大以針決去之{{*|}} 中듀ᇰ惡ᅙᅡᆨ 證지ᇰ〮이 웃입시울〮 !인!안!ᄒᆞᆯ 보〯ᄃᆡ〮 ᄒᆡᆫ〮 거시〮 기장ᄡᆞᆯ〮ᄀᆞᆮ〮ᄒᆞ니〮 잇ᄂᆞ니〮 바ᄂᆞᆯ〮로〮ᄯᅡ〮 아ᅀᅩᆯ〮디〮니라 又方半夏末如豆大吹鼻中{{*|}} ᄯᅩ〮 半!빈〮!반〮!夏ᅘᅡᆼ〮末마ᇙ〮ᄋᆞᆯ〮 콩낫〯?만〮? 곳〮굼긔〮 불〯라〮 又方客忤者中惡之類也令人心腹絞痛脹滿氣衝心胸不卽治殺人 細辛 桂末等分內口中{{*|}}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ᄂᆞᆫ〮 中듀ᇰ〮惡ᅙᅡᆨ〮ㅅ類ᄅᆔᆼ〮니〮 사〯ᄅᆞ〮ᄆᆞ로〮 가ᄉᆞᆷ〮 ᄇᆡ〮 알ᄑᆞ며〮탸ᇰ〯만〮ᄒᆞ〮야〮 氣킝〮分분이〮 가ᄉᆞ〮매〮다와티〮ᄂᆞ니〮 즉재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細솅〮辛신과〮桂궹〮皮삥 ㅅ ᄀᆞᆯᄋᆞᆯ〮等드ᇰ〯分분ᄒᆞ〮야〮 입〮 안해〮녀흐〮라〮 又方卒得鬼擊之病無漸卒着如人刀刺狀胸脇腹內絞急切痛不可抑按或卽吐血或鼻中出血或下血一名鬼排治之灸鼻下人中一壯立愈{{*|}} ᄯᅩ〮 믄득〮 귓것 틴 病뼈ᇰ〮을〮 어〯더漸쪔〯漸쪔〯 아니〮ᄒᆞ〮야〮 믄득〮어〯두미〮 갈〮ᄒᆞ로〮 디르ᄂᆞᆫ ᄃᆞᆺ〮ᄒᆞ〮야〮 가ᄉᆞᆷ〮과〮 녑과〮 ᄇᆡ〮 안〮히ᄀᆞ자ᇰ〮 알파〮ᄆᆞᆫ지〮디〮 몯〯ᄒᆞ며〮 시혹〮 피〮ᄅᆞᆯ〮 吐통〮ᄒᆞ며〮 시혹〮 고해〮 피〮내〯며〮 시혹 아래〮 피〮나〮ᄂᆞ니〮 고툐〮ᄃᆡ〮 고〮 아랫〮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 을〮 ᄒᆞᆫ 붓글〮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臍下一寸三壯炙臍上一寸七壯{{*|}} ᄯᅩ〮 ᄇᆡᆺ복 아랫〮一ᅙᅵᇙ〮寸촌〮ᄋᆞᆯ〮 세〮 붓글〮 ᄯᅳ〮고〮 ᄇᆡᆺ복 우 一ᅙᅵᇙ〮寸촌ᄋᆞᆯ 닐굽〮 붓글〮 ᄯᅳ라〮 又方以淳酒吹內兩鼻中{{*|}} ᄯᅩ 됴〮ᄒᆞᆫ 술로 두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鼠屎末服如黍米不能飮之以少水和內喉中{{*|}} ᄯᅩ〮 쥐ᄯᅩᆼᄋᆞᆯᄇᆞᆺ아〮 기자ᇰᄡᆞᆯ〮만〮 머구〮ᄃᆡ〮 먹디〮 몯〯거든〮 믈〮져〯기 ᄒᆞ〮야〮 프〮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被鬼擊用竈心土爲末每服二錢新汲水調下及以少許吹鼻中{{*|}} 귓거싀〮게 마ᄌᆞ〮닐〮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먹그〮며 져〯기 고해〮 불〯라〮 又方{{*|恍惚見鬼}}發狂用平胃散加辰砂末棗湯調服{{*|}} ᄯᅩ 어즐ᄒᆞ〮야〮 귓것 보〮아〮 미치〮거든〮平뼈ᇰ胃ᅌᅱᆼ〮散산〮 애〮 朱즁砂상ㅅᄀᆞᆯᄋᆞᆯ〮 녀허〮 大땡〮棗조ᇢ〯湯타ᇰ애〮 프〮러 머그〮라〮 又方中惡客忤卒死者用皂角末吹鼻或硏韭汁灌耳中以艾灸臍中百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닐〮 皂쪼ᇢ〯角각〮ㅅ ᄀᆞᆯᄋᆞᆯ〮 고해〮 불〯라〮 시혹〮 염〮굣〮 즈〮블 ᄀᆞ〮라 귀예〮 븟고〮 ᄡᅮ〮그로〮 ᄇᆡᆺ보ᄀ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붓글〮 ᄯᅳ〮라〮 又方中惡客忤垂死用射香一錢硏和醋二合服之卽差{{*|}}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죽ᄂᆞ닐〮 射썅〮香햐ᇰ ᄒᆞᆫ 돈〯 ᄀᆞ라 초에〮 프〮러 두〮 호ᄇᆞᆯ〮 머그〮면〮 즉재 !둍〯!됻〯!ᄂᆞ〮니라〯 壽域神方凡卒死或先病痛或常寢臥忽絶皆是中惡救之以葱黃心刺入鼻內男左女右入深五寸若目中出血佳又用葱管吹其兩耳兩鼻孔中{{*|}} 믈읫 믄득〮 주구〮미 시혹〮 몬져 病!뼝〮!뼈ᇰ〮!을〮 알커나〮 시혹〮샤ᇰ녜〮 자다가〮 믄득〮 죽ᄂᆞ니〮 다〯 이〮 中듀ᇰ〮惡ᅙᅡᆨ〮이〮니〮 救구ᇢ〮호〯ᄃᆡ〮 팟〮 누른〮엄〯으〮로〮 고 안해〮 녀호〮ᄃᆡ〮 남지는〮 왼〯녁 겨〯지븐〮 올〮ᄒᆞᆫ녀긔〮 기피〮 五ᅌᅩᆼ〯寸촌〮이〮들〮에〮 ᄒᆞ〮야〮 ᄒᆞ〮다가〮 누내〮 피〮나면〮 됴〮ᄒᆞ니라〮 ᄯᅩ〮 팟〮 니〮프로〮 두〯 귀〮와〮 두〯 곳〮굼글〮 불〯라〮 又方取小便灌其口數遍卽能語{{*|}} ᄯᅩ〮 小쇼ᇢ〯便뼌을〮 이베〮 브ᅀᅩ〮믈〮 두〯ᅀᅥ〮 번 ᄒᆞ면〮 곧〮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中惡短氣欲死灸足兩大𧿹趾上甲後聚毛中各十四壯不愈再灸十四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뎔어〮 죽ᄂᆞ닐〮두〮 발〮엄지〮가〮락 톱〮 뒷〯 털〮 난ᄯᅡ〮ᄒᆞᆯ〮 열〯네〯 붓곰〮 ᄯᅮ〮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시〮 열〮네〯 붓글〮 ᄯᅳ〮라〮 又方驚怖死者用溫酒灌之卽蘇{{*|}} ᄯᅩ 놀〮라 주그〮닐〮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鬼魘鬼打第六== 經驗良方其證初到客舍或官驛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湏臾不救則死 牛黃 雄黃{{*|各一錢}}朱砂{{*|半錢}}巳上各硏爲細末和勻每挑一錢許床下燒次挑一錢用酒調灌之如無前藥用桃柳枝取東邊各三七寸煎湯三盞候溫倂灌服又無桃柳枝用竈心土搥碎爲細末每服二錢新汲井花水調灌更挑半指甲許吹入鼻中更用艾灸人中穴在鼻下幷灸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 그 證지ᇰ〮이〮 客ᄏᆡᆨ舍상〮ㅣ어나〮 시혹〮 驛역〯이〮어나〮 오래〮 사〯ᄅᆞᆷ 업〯슨〮 ᄎᆞᆫ〮 房바ᇰ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툐ᄆᆞᆯ〮 아라〮 오직〮 그 사〯ᄅᆞ미〮헐헐ᄒᆞᆯ 소릴〮 듣고〮 곧〮 사〯ᄅᆞ〮ᄆᆞ로〮 브르게〮 !ᄒᆞᆯ〮!훌〮!디니〮블로〮ᄃᆡ〮 ᄭᆡ디〮 아니〮ᄒᆞ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ᄉᆞᅀᅵ〮ᄅᆞᆯ〮 救구ᇢ〮티〮 아니〮ᄒᆞ면〮 죽ᄂᆞ니〮 牛ᅌᅮᇢ黃ᅘᅪᇰ과 雄ᅘᅮᇰ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돈〯과〮 朱즁砂상 半반〮 돈〯ᄋᆞᆯ〮 各각〮各각〮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골오〮 섯거〮 ᄒᆞᆫ 돈〯만〮 ᄯᅥ〮 사ᇰ 아래〮 ᄉᆞᆯ〮오〯 !비!버!거〮 ᄒᆞᆫ 돈〯ᄋᆞᆯ〮 수레〮 프〮러〮 머기〮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복〮샤ᇰ화나모와〮 버드〮나못 가〮지ᄅᆞᆯ〮 東도ᇰ녁긔〮칠 各각〮各각〮 세〯닐굽〮 寸촌〮ᄋᆞᆯ〮 가져〮다가〮 므〮?레? 글혀〮 세〯 盞잔〮ᄋᆞᆯ〮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복?샤ᇰ?화나모 버듨〮가〮지 업〯거든〮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누〯!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른〮!룬〮! 井졍〯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머기〮고〮 ᄯᅩ〮 半반〮 소ᇇ톱만〮 ᄯᅥ〮 고해〮 부러〮 드〮리고〮 ᄯᅩ〮 ᄡᅮ〮그로〮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ᄯᅳ〮고〮 두〯 !밠〮!뱘〯! !염!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ᄒᆞᆫ 부〯ᄎᆡᆺ닙〮 만〮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ᄒᆞᆫ닐굽〮 붓글〮 ᄯᅳ〮면〮 곧〮 사〯ᄂᆞ〮니라〮 千金方治鬼擊雞屎白{{*|如棗大}}靑花麻一把{{*|卽常用麻}}右二味以酒七升煮取三升熱服須臾發汗若不汗熨斗盛火灸兩脇下使熱汗出愈{{*|}} 귓것 티〮닐〮 고툐〮ᄃᆡ〮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것 대〯초만〮과〮 삼〮 ᄒᆞᆫ 줌〯과〮 두〯 가지〮ᄅᆞᆯ〮 술 닐굽〮 되〮로〮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더우〮닐〮 머그〮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ᄯᆞᆷ〮나〮ᄂᆞ니〮 ᄒᆞ〮다가〮 ᄯᆞᆷ〮나디〮 아니〮커든〮다리〮우〮리예〮 블〮 다마〮 두〯 녁 녀〮블〮ᄧᅬ〯야〮 덥〯게〮 ᄒᆞ면〮 ᄯᆞᆷ〮나면〮 됻〯ᄂᆞ〮니라〮 聖惠方卒魘忌燈火照照則神魂遂不復入乃至於死人有於燈光前魘者本在明處是以不忌火也{{*|}} ᄀᆞ오〮누르〮이닐〮 블〮혀〮 뵈〯요미〮 몯〯ᄒᆞ리〮니〮 블〮 뵈〯면〮 넉시〮 도로 드〮디〮 아니〮ᄒᆞ〮야〮 죽ᄂᆞ니〮라〮 블〮 현〯 ᄃᆡ〮 이셔〮 ᄀᆞ오누르〮이닌〮본〮ᄅᆡ ᄇᆞᆯᄀᆞᆫ〮 ᄃᆡ 이실ᄉᆡ〮 블〮 혀〯미〮 므〮던ᄒᆞ니〮라〮 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 믄득 ᄀᆞ오〮누르〮여 ᄎᆞ〮림 몯〯ᄒᆞ〮거든〮皂쪼ᇢ〯莢겹〮 ᄀᆞᆯᄋᆞᆯ〮 ᄀᆞ〮ᄂᆞᆫ 대〮로〮 두〯 곳〮굼긔〮 불〯면〮 즉〮재 니〯ᄂᆞ니〮 잇사ᄋᆞ〮래도〮 어루〮 불〯리!라〮!라〮! 又方治卒魘右以雄黃細硏以蘆管吹入兩鼻中桂心末亦得{{*|}} ᄯᅩ〮 과ᄀᆞᆯ이〮ᄀᆞ오눌〯엿〮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ᄀᆞᆯ〮로 부러〮 두〯 고해〮 녀흐라〮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ᄅᆞ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菖蒲末吹兩鼻中以桂末納於舌下亦得{{*|}}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불〯오〮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ᆯ〮 혀〮 아래〮 녀후〮미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雄黃如棗核大繫於左臂令人終身不魘寐也{{*|}}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ᆼᄋᆞᆯ〮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ᄒᆞ닐〮 왼〯녁ᄇᆞᆯᄒᆡ〮 ᄃᆞ〮라 두면〮 사〯ᄅᆞ〮ᄆᆞ로〮 죽ᄃᆞ록〮 ᄀᆞ오〮누르〮이디〮 아니〮케〮 ᄒᆞ〮ᄂᆞ〮니라〮 又方服猪脂如雞子大卽差未差再服{{*|}} ᄯᅩ〮 猪뎡脂징〯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 됴〯티 아니〮커든〮 다시〮 머그〮라〮 備急大全良方療臥忽不悟愼勿以火照則殺人但唾其面更痛囓足大拇指甲際卽省更以半夏末吹入鼻中更以韭葉擣取自然汁灌鼻孔中冬月用韭根擣取自然汁灌卽活{{*|}} 자〮다가〮 ᄭᆡ〮디 몯〯ᄒᆞ닐〮 고툐〮ᄃᆡ〮 자ᇝ〯간도〮 블〮 혀 뵈〯디마롤〮디니〮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오직〮 ᄂᆞᄎᆡ〮 춤〮받고〮 ᄯᅩ〮 발〮엄지〮가락 톱〮 ᄉᆞᅀᅵ〮ᄅᆞᆯ〮ᄆᆡ이〮 믈면〮 즉〮재 ᄭᆡ〮ᄂᆞ〮니라〮 ᄯᅩ〮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곳〮굼긔〮 불〯오〮 ᄯᅩ〮 부〯ᄎᆡᆺ 니〮플〮 디허〮 즈〮브로〮 곳굼긔〮 브ᅀᅳ라〮겨ᅀᅳ〮렌 부〯ᄎᆡᆺ 불휘〮ᄅᆞᆯ〮 디허〮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取츙〯ᄒᆞ〮야〮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卒死第七== 千金方治卒死無脉牽牛臨鼻上二百息牛舐必瘥牛不肯舐着塩汁塗面上牛卽肯舐{{*|}} 가ᄀᆞ〮기 주거〮 脉ᄆᆡᆨ〮업〯스닐〮 고툐〮ᄃᆡ〮 쇼〮ᄅᆞᆯ〮잇거〮 고〮 우희〮 다혀〮 二ᅀᅵᆼ〮百ᄇᆡᆨ〮 버ᄂᆞᆯ〮숨〯쉬울디〮니 ᄉᆈ〮 할ᄒᆞ〮면〮 반ᄃᆞ〮기 됻〯ᄂᆞ〮니라〮쇼〮옷〮 할티〮 아니〮!키〮!커!든〮 소곰므〮를〮 ᄂᆞᄎᆡ〮 ᄇᆞᄅᆞ면〮 ᄉᆈ〮 곧〮 할ᄂᆞ니〮라〮 又方馬屎絞取汁飮之無新者水和乾者亦得{{*|}} ᄯᅩ〮 ᄆᆞᆯᄯᅩᇰᄋᆞᆯ〮 ᄧᅡ〮 즈〮블 取츙〮ᄒᆞ〮야〮 마시〮라〮 새〮 업〯거든〮 므〮레 ᄆᆞᄅᆞ닐〮 프〮러도〮 ᄯᅩ〮 됴〯ᄒᆞ〮니라〮 肘後方乾者以人溺解之{{*|}} ᄆᆞᄅᆞ닌〮 사〯ᄅᆞᄆᆡ〮 오조〮ᄆᆞ로〮 플〮라〮 又方灸熨斗熨兩脇下又治尸厥{{*|}} ᄯᅩ〮 다리〮우릴〮 데여〮 두〮 녀블〮 울〮ᄒᆞ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ᄂᆞ〮니라 又針閒使各百餘息又灸鼻下人中又治尸厥{{*|}} ᄯᅩ〮閒간使ᄉᆞᆼ〮 ᄅᆞᆯ〮 針짐호〮ᄃᆡ〮 一ᅙᅵᇙ〮百ᄇᆡᆨ〮 숨〯 남ᄌᆞ기 ᄒᆞ고〮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ᄯᅳ〮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 ᄂᆞ니〮라〮 又方治五絶夫五絶者一曰自縊二曰墻壁壓迮三曰溺水四曰魘寐五曰産婦乳絶取半夏一兩細下篩吹一大豆許內鼻中卽活心下溫者一日亦可活{{*|}} ᄯᅩ〮 다ᄉᆞᆺ 주그〮닐 고티〮ᄂᆞ니〮 ᄒᆞ나ᄒᆞᆫ〮 목 ᄆᆡ야〮 주그〮니오〮 둘〯흔 담〮지즐〮이〮니오〮 세〯흔 므〮레 ᄲᅡ〮디니〮오〮 !네〯!녜〯!흔ᄀᆞ〮오〮누르〮이〮니오〮 다ᄉᆞ〮ᄉᆞᆫ 아〮기나타가〯 주그〮니니〮 半반〮夏ᅘᅡᆼ〮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처〮 큰 콩 낫〯만〮 ᄒᆞ닐〮 곳〮굼긔〮 부러〮 녀흐면〮 즉〮재 사〯ᄂᆞ니〮 가ᄉᆞ〮미 ᄃᆞᄉᆞ닌〮ᄒᆞᆯ리〮라도〮 ᄯᅩ〮 어루〮 살〯리라〮 聖惠方卒死中惡及尸厥以緜漬好酒手挼汁令入鼻中幷持其手足莫令驚動{{*|}} 과ᄀᆞᆯ!이〮!ᄋᆡ〮! 주그〮니와〮 中듀ᇰ〮惡ᅙᅡᆨ〮ᄒᆞ니〮와〮 尸싱厥궈ᇙ〮ᄒᆞ니〮ᄅᆞᆯ〮소오ᄆᆞ〮로 됴〯ᄒᆞᆫ 술저져〮 소〮ᄂᆞ로〮 汁집〮을〮ᄲᅡ〮 곳〮굼긔〮 들〮에 ᄒᆞ고〮 손〮바〮ᄅᆞᆯ〮 자바〮 놀〯라디〮 아니〮케 ᄒᆞ라 又方擣韮取汁以灌口中{{*|}} ᄯᅩ〮 부〯ᄎᆡᄅᆞᆯ〮 디허〮 汁집〮을〮 取츙〯ᄒᆞ〮야〮 이베〮 브ᅀᅳ라〮 又方取猪膏如雞子大以醋一合煮沸灌喉中良{{*|}} ᄯᅩ〮 猪뎡膏고ᇢ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醋총〮 ᄒᆞᆫ 호배〮 글혀〮 모ᄀᆡ〮 브ᅀᅳ면〮 됴〮ᄒᆞ〮니라〮 又方卒死而壯熱者用白礬半斤以水二豆斗煮消以漬脚卽活{{*|}} ᄯᅩ 과ᄀᆞᆯ이〮 죽고〮 壯자ᇰ〮히〮 熱ᅀᅧᇙ〮ᄒᆞ닐〮白ᄈᆡᆨ〮礬뻔 半반〮 斤근ᄋᆞᆯ〮 믈〮 두〯 마래〮 글혀〮 노겨〮허튀〮ᄅᆞᆯ〮 ᄃᆞ〮ᄆ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用小便灌其面卽能迴語{{*|}} ᄯᅩ〮 小쇼ᇢ〯便뼌으〮로〮 ᄂᆞᄎᆡ ᄲᅳ리〮면〮 즉〮재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以雄雞頭取血以塗其面乾復塗之{{*|}} ᄯᅩ〮 수〮ᄃᆞᆯᄀᆡ〮 머리〮엣〮 피〮 내〯아〮 ᄂᆞᄎᆡ〮 ᄇᆞᄅᆞ〮고〮 ᄆᆞᄅᆞ거든〮 다시〮 ᄇᆞᄅᆞ라〮 又方治忤打死心稍暖取葱白納於下部中及鼻中湏臾卽活{{*|}}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ㅣ어나〮귓거시〮 텨〮 주그〮니 가ᄉᆞ〮미〮져〮기 ᄃᆞᆺᄒᆞ닐〮 고툐〮ᄃᆡ〮 파〮ᄒᆞᆯ〮밋구무와〮 곳〮굼긔〮 녀흐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사〯ᄂᆞ〮니라 又方治卒客忤不能言桔梗末一兩射香末一分右二味更硏令勻每服二錢以溫水調下{{*|}} ᄯᅩ〮 과ᄀᆞᆯ이〮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말〯 몯〯ᄒᆞ〮거든〮桔겨ᇙ〮梗겨ᇰ〯 ㅅ 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分뿐을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머기〮라〮 千金方治一切卒死灸臍中百壯{{*|}} 一ᅙᅵᇙ〮切쳐ᇙ〮 과ᄀᆞᆯ이〮 주그〮닐〮 고툐〮ᄃᆡ〮 ᄇᆡᆺ복을 百ᄇᆡᆨ〮壯자ᇰ〮을〮 ᄯᅳ〮라 ==卒心痛第八<sub>腹痛附</sub>== 聖惠方治卒心痛氣悶欲絶面色靑四肢逆冷釅醋{{*|一合}}雞子{{*|一枚打破}}右件相和攪勻煖過頓飮之{{*|}}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 알파〮 氣킝〮分분이〮닶〮가와〮 주거〮가〮 ᄂᆞ치〮 프르〮고〮 四ᄉᆞᆼ〯肢징 ᄎᆞ〮닐〮 고툐〮ᄃᆡ〮 醋총〮 ᄒᆞᆫ 홉과〮 ᄃᆞᆯᄀᆡ!알〮!알〮! ᄒᆞᆫ 나〯ᄎᆞᆯ〮ᄣᆞ려〮 섯거〮 골오〮 프〮러 ᄃᆞ시 ᄒᆞ〮야〮 다〯 머기〮라〮 又方白艾二兩熟者右以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分爲三服稍熱服之{{*|}} ᄯᅩ〮 ᄒᆡᆫ〮 ᄡᅮᆨ〮 두〯 兩랴ᇰ〯니기〮 디후〮닐〮 믈〮 두〯 큰〮잔〮애〮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세〮 服!쁙〮!뽁〮!애〮 ᄂᆞᆫ화〯 져〯기 더우〮닐〮 머그〮라〮 經驗良方布衷塩如彈丸大燒令赤溫酒化服溫水亦得{{*|}} 뵈〮로 소고ᄆᆞᆯ〮 탄ᄌᆞ〮만〮ᄢᅳ려〮 ᄉᆞ〮라 븕게〮 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그〮라〮 ᄃᆞᄉᆞᆫ 믈〮도〮 ᄯᅩ〮 ᄒᆞ리〮라〮 壽域神方草菓 玄胡索 乳香 沒藥 五靈脂{{*|各等分}}右爲末每服二錢溫酒調下{{*|}} 草초ᇢ〯菓광〯와〮玄ᅘᆑᆫ胡ᅘᅩᆼ索짝〮 과〮乳ᅀᅲᆼ〯香햐ᇰ 과〮 沒모ᇙ〯藥약〮과〮五ᅌᅩᆼ〯靈려ᇰ脂징〯 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기〮라〮 又方桃白皮煮汁宜空腹服之{{*|}} ᄯᅩ〮 복샤ᇰ화나못 ᄒᆡᆫ〮 거츨〮 글혀〮 汁집〮을〮 空고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生香油半合溫服妙{{*|}} ᄯᅩ〮 ᄎᆞᆷ〮기름〮 半반〮 호블 ᄃᆞ시 ᄒᆞ〮야〮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令病人當戶坐若男病婦人與水一柸飮之若女病男子與水一柸飮之用新汲水尤佳{{*|}} ᄯᅩ〮 病뼈ᇰ〮人ᅀᅵᆫ으〮로〮이페〮 안치〮고〮 ᄒᆞ다가 남지니〮 病뼈ᇰ〮커든〮 겨〯지비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고〮 ᄒᆞ〮다가〮 겨〯지비〮 病뼈ᇰ〮커든〮 남지니〮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라〮 ᄀᆞᆺ 기룬〮 므〮리 더 됴〯ᄒᆞ〯니라〮 又以蜜一分水二分飮之亦妙{{*|}} ᄯᅩ〮 ᄢᅮᆯ〮 ᄒᆞᆫ 分분과〮 믈〮 두〯 分분을〮 마쇼〮미ᄯᅩ〮 됴〮ᄒᆞ〮니라〮 又方治腹痛細嚼石菖蒲飮凉水送下妙{{*|}} ᄯᅩ〮 ᄇᆡ〮알힐〮 고툐〮ᄃᆡ 石쎡〮菖챠ᇰ蒲뽕ᄅᆞᆯ〮 ᄂᆞ로니 십고〮 ᄎᆞᆫ〮 므〮를 마셔〮ᄂᆞ리〮오미〮 됴〮ᄒᆞ〮니라〮 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絞取汁飮之{{*|}} ᄯᅩ〮 ᄯᅡ해〮 ᄒᆞᆫ 져〯고맛〮 구〮들 ᄑᆞ〮고〮 믈〮로 구데〮 ᄀᆞᄃᆞ기 븟고〮 니기〮 후ᇰ두ᅌᅧ〮 汁집〮을〮 取츙〯ᄒᆞ야〮 마시〮라〮 又方令人騎其腹溺臍中{{*|}} ᄯᅩ〮 사〯ᄅᆞ미〮 그 ᄇᆡ〮ᄅᆞᆯ 타〮 안자〮 ᄇᆡᆺ〮보개〮 오좀〮 누게〮 ᄒᆞ라〮 又方針手足十指頭出血灸臍中七七壯{{*|}} ᄯᅩ〮 손〮발〮 열〮 가락 그〮틀〮 針짐ᄒᆞ야〮 피〮내〯오〮 ᄇᆡᆺ〮보ᄀᆞᆯ 七치ᇙ〮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治心腹俱脹疼痛氣短欲死或已絶者取梔子十四枚豉五合以水二盞先煮豉取一盞半去滓入梔子再煎取一盞去渣服半盞不愈盡服之{{*|}} ᄯᅩ〮 가ᄉᆞᆷ〮 ᄇᆡ〮 다〯 탸ᇰ〯만〮ᄒᆞ〮야〮 알ᄑᆞ고〮 氣킝〮分분이 뎔어〮 죽ᄂᆞ니〮와〮 시혹〮 ᄒᆞ마〮 주그〮닐〮 고툐〮ᄃᆡ梔징子ᄌᆞᆼ〯 열〮네〯 낫〯과〮 젼국 다ᄉᆞᆺ 호블〮 믈〮 두〯 잔〮ᄋᆞ로 몬져 젼국 글혀〮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滓ᄌᆡᆼ〮 앗〯고〮 梔징子ᄌᆞᆼ〮 녀허〯 다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츄ᇢ〯ᄒᆞ〮야〮 즛의 앗〯고〮 半반〮 잔〮ᄋᆞᆯ〮 머구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 머그〮라〮 又方治卒心腹煩滿疼痛欲死者以熱湯浸手足妙冷再換{{*|}} ᄯᅩ〮 과ᄀᆞᆯ이〮 가ᄉᆞᆷ〮 ᄇᆡ〮 煩뻔滿만〯ᄒᆞ〮여〮 알파〮 죽ᄂᆞ닐〮 고툐〮ᄃᆡ 더운〮 므〮레 손〮바〮ᄅᆞᆯ ᄃᆞᆷ고〮미 됴〯ᄒᆞ니〮 ᄎᆞ거든〮 다시〮 ᄀᆞᆯ라〮 又方卒煩滿嘔逆灸乳下一寸七壯卽愈{{*|}} ᄯᅩ〮 과ᄀᆞᆯ이〮 煩뻔滿만〯ᄒᆞ〮야〮吐통〯逆ᅌᅧᆨ〮 ᄒᆞ〮거든〮 졋〮 아랫〮 ᄒᆞᆫ 寸촌〮ᄋᆞᆯ 七칧〮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兩手大母指內邊爪後第一紋頭各一壯又灸兩手中指爪下一壯卽愈{{*|}} ᄯᅩ〮 !드〮!두〯! 손〮 엄지〮가락 안〮녁 소ᇇ토ᄇᆞ〮로셔〮 첫〮 그ᇝ〮 그〮틀 各각〮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ᄯᅩ〮 두〯 손 가?온〮ᄃᆡᆺ〮 가락 소ᇇ톱 아래〮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九種心痛取當大歲上新生槐枝一握去兩頭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 아홉〮 가짓〮 가ᄉᆞᆷ〮 알힐〮 고툐〮ᄃᆡ大땡〮歲ᄉᆒᆼ〯方바ᇰ앳〮 올ᄒᆡ〮 난회홧가〮지 ᄒᆞᆫ우희〮윰을〮 두〯 녁 그〮틀〮 버히〮고〯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治卒中惡心痛 苦參{{*|三兩}}㕮咀以好醋一升半煮取八合强者頓服老小分二服{{*|}} ᄯᅩ〮 과ᄀᆞᆯ이〮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 알ᄂᆞ닐〮 고툐〮ᄃᆡ〮苦공〯參ᄉᆞᆷ 석〯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됴〯ᄒᆞᆫ 醋총〮 ᄒᆞᆫ 되〮 半반〮ᄋᆞ〮로 글혀〮 여듧〮 호ᄇᆞᆯ〮 取츙〯ᄒᆞ〮야〮 強가ᇰᄒᆞ닌〮 다〯 먹고 늘그〮니와 져므〮니ᄂᆞᆫ〮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桂心{{*|一兩}}㕮咀以水四升煮取一升半分二服{{*|}} ᄯᅩ〮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넉〯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霍亂吐瀉第九<sub>沙證附</sub>== 經驗良方始因飮冷或胃寒或失飢或大怒或乘舟車傷動胃氣令人上吐上吐不止令人下瀉吐瀉倂作遂成霍亂頭旋眼暈手脚轉筋四肢逆冷用藥遲緩湏臾不救吳茱萸 木瓜 食塩{{*|各半兩}}右三味同炒令焦先用磁甁盛水三升煮令百沸却入前藥同煎至二升已下傾一盞冷熱隨病人意與服藥入卽醒{{*|}} 처〮ᅀᅥ믜 ᄎᆞᆫ〮믈〮 마쇼〮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치〮위〮에 ᄃᆞᆫ니〮거나〮 시혹〮 ᄇᆡ〮 골커나〮 시혹 너무 怒농〮커나〮 시혹〮 ᄇᆡ〮와〮 술위와〮타〮 胃ᅌᅱᆼ氣킝〮ᄅᆞᆯ〮 傷샤ᇰᄒᆞ면〮 사〯ᄅᆞ미〮 우흐〮로 吐통〯케〮 ᄒᆞ〮ᄂᆞ〮니〮 우흐〮로 吐통〯호〮ᄆᆞᆯ〮그치〮디 몯〯ᄒᆞ면〮 사〯ᄅᆞ미〮 아래〮로 즈츼〮에〮 ᄒᆞ〮ᄂᆞ니〮 吐통〯와〮 즈츼〮유미〮 ᄒᆞᆫᄢᅴ〮니르와ᄃᆞ면〮 霍확〮亂란〮이〮 ᄃᆞ외야〮 머리〮휫두르며〮 누〮니 휫두르며〮 손밠〮 히〮미올ᄆᆞ〮며 四ᄉᆞᆼ〮肢징 ᄎᆞ〮ᄂᆞ니〮 藥약〮ᄋᆞᆯ디마〮니 ᄒᆞ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吳ᅌᅩᆼ茱쓩萸융 와〮木목瓜광 와〮 소곰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 ᄃᆡ〮봇가〮 눋〯게 ᄒᆞ〮야〮 몬져 沙상甁뼈ᇰ에〮 믈〮 서〯 되〮ᄅᆞᆯ〮 다마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커든〮 알ᄑᆡᆺ〮 藥약〮ᄋᆞᆯ〮 녀허〮 ᄒᆞᆫᄃᆡ〮 글혀〮 두〯 되예 니를〮어든〮 ᄒᆞᆫ 잔ᄋᆞᆯ〮 브ᅀᅥ〮 ᄎᆞ〮며 더우〮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ᄠᅳ〮들 조차〮 주〮어 머기〮면〮 藥약〮이〮 들〮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倉卒無前藥用枯白礬爲末每服一大錢百沸湯點服{{*|}} ᄒᆞ〮다〯가〮 時씽急급〮ᄒᆞ〮야〮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枯콩白ᄈᆡᆨ〮礬뻔 을〮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큰〮 돈〯ᄋ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如無白礬只用塩一撮醋一盞同煎至八分溫服或塩梅醎酸等物皆可煮服{{*|處方本以鹹醋二物煮}}{{*|}} ᄒᆞ〮다가〮 白ᄈᆡᆨ〮礬뻔이〮 업〯거든〮 소곰 ᄒᆞᆫ져붐〮과〮 醋총〮 ᄒᆞᆫ 잔〮ᄋᆞᆯ〮 ᄒᆞᆫᄃᆡ〮 글혀〮 여듧〮 分뿐〮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고〮 시혹〮 소고미〮나梅ᄆᆡᆼ實씨ᇙ〮 이〮나 ᄧᆞᆫ〮 것과〮싄 것ᄃᆞᆯ〮히 다〯 어루〮 글혀〮 머귤〮디〮니라〮 又方脚手轉筋赤蓼莖葉細切三合水四合酒二合同煎取四合分作二溫服{{*|}} ᄯᅩ〮 발〮 손 히〮미 옮〯거든〮 블근〮 엿귓〮 줄기〮와〮 닙〮과〮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세〯 홉과〮 믈〮 너〯 !흡!홉!과〮 술 두〯 홉과〮 ᄒᆞᆫᄃᆡ〮 글혀〮 네〮 호블〮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脚轉筋用大蒜磨脚心令遍熱卽差{{*|}} ᄯᅩ〮 밠 히〮미 옮〯거든〮 굴〯근 마ᄂᆞ〮ᄅᆞᆯ〮 밠〮바다〮ᅌᅢ〮 ᄲᅵ븨〮여 두루 덥〯게〮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絞腸沙痛不可忍或展轉在地或起或仆其膓絞縮在腹此是中毒之深湏臾能令人死古方名乾霍亂急用塩一兩熱湯調灌入病人口中塩氣一到腹其痛卽定又將石沙炒令赤色冷水淬之良久澄淸水一二合服之愈{{*|}} ᄯᅩ〮絞교ᇢ〯腸땨ᇰ沙상ㅣ 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야〮 시혹〮 ᄯᅡ해〮 그울며〮 시혹〮 닐〯며〮 시혹〮 업더〮디〮여 그膓땨ᇰ 이〮 ᄇᆡ〮예〮뷔〯트〮러 움주쥐여〮 잇ᄂᆞ니〮 이〮 毒독〮ᄋᆞᆯ〮 마조〮미 기퍼〮 아니〮한 ᄉᆞᅀᅵ〮예〮 사〯ᄅᆞ미〮 죽게〮 ᄒᆞ〮ᄂᆞ니〮 녯〮 方바ᇰ文문에〮 일후미 乾간霍확〮亂롼이〮니 ᄲᆞᆯ리〮 소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 므〮레 프〮러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이베〮 브ᅀᅳ라〮 소고ᇝ 氣킝〮分분이〮 ᄇᆡ〮예〮 들〮면〮 그 알포〮미 곧〮 긋거든〮 ᄯᅩ〮호ᄀᆞᆫ〮 돌〯ᄒᆞᆯ〮 봇가 븕게〮 ᄒᆞ〮야〮 ᄎᆞᆫ〮므〮레 ᄃᆞᆷ가〮안초〮아 ᄆᆞᆯ겨〮 그 믈〮 ᄒᆞᆫ두〯 호블〮 머그〮면〮 됻〯ᄂᆞ〮니라 葛氏備急方霍亂煩悶湊滿者用塩納臍中灸二七壯{{*|}} 霍확亂롼〮ᄒᆞ〮야〮 닶〮가와〮 탸ᇰ〯만ᄒᆞ닐 소고ᄆᆞᆯ〮 ᄇᆡᆺ보개〮 녀코〮 二ᅀᅵᆼ〮七치ᇙ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霍亂心腹脹痛者服乾薑屑三方寸匕{{*|}}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탸ᇰ〯만ᄒᆞ〮야〮 알ᄂᆞ닐〮 乾간薑가ᇰㅅ ᄀᆞᆯᄋᆞᆯ세〯 수〮를 머기〮라〮 又方小蒜一升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之{{*|}} ᄯᅩ〮 호ᄀᆞᆫ 마ᄂᆞᆯ〮 ᄒᆞᆫ 되〮ᄅᆞᆯ〮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生薑}}一斤切以水七升煮取二升分爲三服{{*|}} ᄯᅩ〮 生ᄉᆡᇰ薑가ᇰ ᄒᆞᆫ 斤근을〮 사ᄒᆞ〮라〮 믈〮 닐굽〮 되〮로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세〯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若轉筋桂半夏等分末方寸匕水一升和服{{*|}} ᄯᅩ〮 히〮미 올ᄆᆞ〮!날〮!닐〮! 桂ᄀᆒᆼ〮皮삥와〮 半반〮夏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수〮를〮 믈〮 ᄒᆞᆫ 되〮예〮 프〮러 머그〮라〮 又方生大豆屑酒和服方寸匕{{*|}} ᄯᅩ〮 ᄂᆞᆯ콩 ᄭᆞᆯᄋᆞᆯ〮 수레〮 프〮로ᄃᆡ〯 ᄒᆞᆫ〮 수〮를〮 머그〮!리〮!라〮! 又方治霍亂吐下後大渴多飮則殺人以黃米{{*|卽黍米}}五升水一斗煮之令得三升澄淸稍稍飮之莫飮餘物也{{*|}} ᄯᅩ〮 霍확〮乱롼〮ᄒᆞ〮야〮 吐통〮下ᅘᅡᆼ〮ᄒᆞᆫ 後ᅘᅮᇢ〯에〮 ᄀᆞ자ᇰ〮 목 ᄆᆞᆯ라〮 믈〮 하〮 머그〮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기자ᇰᄡᆞᆯ〮 닷 되〮ᄅᆞᆯ〮 믈〮 ᄒᆞᆫ 마래〮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ᄆᆞᆰ안초〮아〮 젹젹 먹고〮 다ᄅᆞᆫ 믈〮 먹디〮 마롤〮디〮니라〮 又方治霍亂轉筋垂死敗蒲席一握細剉漿水一盞煮汁溫溫頓服{{*|}}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ᅙᅵ〮!히〮!미 올마〯 죽ᄂᆞ닐〮 고툐〮ᄃᆡ〮 헌〯 부들〮 지즑〮 ᄒᆞᆫ 우후〮믈〮 ᄀᆞ〮ᄂᆞ리〮 사ᄒᆞ〮라〮漿쟈ᇰ水ᄉᆔᆼ〯 ᄒᆞᆫ 盞잔〮애〮 글혀〮 汁집〮을〮 ᄃᆞ시ᄒᆞ〮야〮 다〯 머그〮라〮 直指方霍亂吐瀉心腹作痛用炒塩二梡紙包紗護頓其胸前幷腹肚上以熨斗火熨氣透卽蘇續又以炒塩熨其背{{*|}} 霍확亂롼〮 吐통〯瀉샹〯 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커든〮 봇ᄀᆞᆫ〮 소곰 두〯보ᅀᆞ〮ᄅᆞᆯ〮 죠ᄒᆡ〮에〮 ᄡᆞ〮고〮 紗상로〮 ᄢᅳ려〮 가ᄉᆞᆷ〮과〮 ᄇᆡ〮예어ᇇ고〮 다리〮우리〮로〮 블〮 다마 다려〮 氣킝〮分분이〮ᄉᆞᄆᆞᄎᆞ!먼〮!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ᄯᅩ〮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드ᇰ을〮 熨ᅙᅮᇙ〮ᄒᆞ라〮 聖惠方霍亂吐不止欲死 生薑{{*|二兩}}牛糞三合右以水三大盞煎至一盞半去滓分溫三服{{*|}} 霍확〮亂롼〮ᄒᆞ〮야〮 吐통〯ᄅᆞᆯ〮 그치〮디 몯〯ᄒᆞ〮야〮 죽ᄂᆞ닐〮 生ᄉᆡᇰ薑가ᇰ 두〯 兩랴ᇰ〯과〮 ᄉᆈ〯ᄯᅩᇰ 서〯 호ᄇᆞᆯ〮 믈〮 세〯 큰〮 盞잔〮애〮 글혀〮 ᄒᆞᆫ 盞잔〮 半반〮애〮 니르〮커든〮 滓ᄌᆡᆼ〮 잇〯고〮 ᄃᆞ시 ᄒᆞ〮야〮 세〯 버네 머그〮라〮 經驗秘方治霍亂吐瀉丁香七枚細嚼新汲水送下如不能嚼硏細涼水調下亦可{{*|}} 霍확亂롼〮 吐!통〮!통〯!瀉샹〯ᄅᆞᆯ〮 고툐〮ᄃᆡ〮丁뎌ᇰ香햐ᇰ 닐굽〮 나〯ᄎᆞᆯ〮 ᄂᆞ로니〮 십고〮 ᄀᆞᆺ 기룬〮 믈〮로 ᄂᆞ리〮오ᄃᆡ〮 ᄒᆞ〮다가〮 십디〮 몯〯거든〮 ᄀᆞ〮ᄂᆞ리〮 ᄀᆞ〮라 ᄎᆞᆫ〮므〮레 프〮러 ᄂᆞ리옴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菉豆 胡椒{{*|各七七粒}}右擣爲末新汲水調服不拘時{{*|}} ᄯᅩ〮菉록〮豆뚜ᇢ〮 와〮胡ᅘᅩᆼ椒죠ᇢ 와 各각〮 닐굽〮닐굽〮 나〯ᄎᆞᆯ〮 디허〮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 머구〮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말〯라〮 醫方集成姜塩飮治乾霍亂欲吐不吐欲瀉不瀉 塩{{*|一兩}}生薑{{*|切半兩}}右同炒令色變以水一梡煎溫服甚者加童子小便一盞{{*|}} 薑가ᇰ塩염飮ᅙᅳᆷ〯 은〮 乾간霍확〮亂롼〮이〮 吐통〯코져〮 호〮ᄃᆡ 吐통〯티〮 몯〯ᄒᆞ고 즈츼〮오져〮 호〮ᄃᆡ 즈츼〮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소곰 ᄒᆞᆫ 兩랴ᇰ〯과〮 生ᄉᆡᇰ薑가ᇰ 사ᄒᆞ〮로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ᄃᆡ 봇가 비〮치 다ᄅᆞ거든〮 믈〮 ᄒᆞᆫ 보ᅀᆞ〮로〮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甚씸〯ᄒᆞ니〮란〮 아ᄒᆡ〮 오좀〮 ᄒᆞᆫ 盞잔ᄋᆞᆯ〮 조쳐〮 머기〮라〮 壽域神方霍亂已死上屋喚魂以諸治皆至而猶不差捧病覆臥之伸兩臂對以繩度兩肘尖頭依繩下夾背脊大骨空中去脊各一寸灸之百壯不治者可灸肘椎已試數百人皆灸畢卽起坐驗{{*|}} 霍확亂롼〮ᄒᆞ〮야〮 ᄒᆞ마〮 죽거든〮 집 우희〮 올아〮 넉슬〮 브르고〮 여러〮가짓〮 고툐〮ᄆᆞᆯ〮 다〯 호〮ᄃᆡ ᄉᆞᆫᄌᆡ〮 됴〯티 아니〮커든〯 病뼈ᇰ〮ᄒᆞ닐〮업더리〮와다 뉘이〮고〮 두〯 ᄇᆞᆯᄒᆞᆯ〮 펴고〮 노ᄒᆞ〮로 두〯 ᄇᆞᆯ톡〯 그〮틀 견주〮고〮 노ᄒᆞᆯ〮브터〮 드ᇰᄆᆞᄅᆞᆺ ᄲᅧ〮를〮 ᄢᅧ〮 가온〮ᄃᆡ 뷔우〮고〮 드ᇰᄆᆞᆯᄅᆞ〮로〮셔〮 各각〮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ᅮ〮ᄃᆡ 됴〯티 아닌〮ᄂᆞ니〮란 肘듀ᇢ〯椎ᄄᆔᆼᄅᆞᆯ〮 ᄯᅳ〮라 ᄒᆞ마〮 數슝〮百ᄇᆡᆨ〮人ᅀᅵᆫ을〮 디〯내〮요니〮 다〯ᄯᅩᆷ〮 ᄆᆞᄎᆞ〮면〮 즉〮재 니러〮 안ᄌᆞ니〮라〮 又方治絞腸沙腹痛不可忍者嘔吐泄瀉及中署霍亂心煩渴不省人事兼治急心痛白蜜馬糞二味不以多少擂新水化下去滓頓服一碗雖曰穢汚却有神功無蜜亦可{{*|}} ᄯᅩ〮 絞교ᇢ〯腸땨ᇰ沙상ㅣ ᄇᆡ〮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니와〮 吐!틍〯!통〯!ᄒᆞ고〮즈츼〮ᄂᆞ니〮와〮 中듀ᇰ〮暑셩〯ᄒᆞ며〮 霍확〮亂롼〮ᄒᆞ〮야〮 ᄆᆞᅀᆞ미〮 煩뻔渴카ᇙ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ᄂᆞ닐〮 고티〮고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알힐〮 조쳐〮 고티〮ᄂᆞ니〮 ᄒᆡᆫ〮 ᄢᅮᆯ〮와〮 ᄆᆞᆯᄯᅩᇰ과〮 두〯 가!저〮!지〮!를〮 새〮 므〮레 프〮러 즛의 앗〯고〮 ᄒᆞᆫ 보ᅀᆞ〮ᄅᆞᆯ〮 다〯 머그〮라〮 비록〮 더〯러〮우나〮 神씬奇긩ᄒᆞᆫ 功고ᇰ이〮 잇ᄂᆞ니〮 ᄢᅮᆯ〮 업〯서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用收蠶子的舊紙一幅務要去蠶子潔淨燒灰爲末用熱酒調服立效{{*|}} ᄯᅩ〮 누에〮ᄡᅵ〮 난 죠ᄒᆡ〮 ᄒᆞᆫ 張댜ᇰᄋᆞᆯ〮 누에〮ᄡᅵ〮ᄅᆞᆯ〮 조〮히 업〯게 ᄒᆞ고〮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술로〮 프〮러 머그〮면〮 즉〮자히〮 됻〯ᄂᆞ〯니라〮 又方治急肚痛絞膓沙用久乾猪糞一塊如指頭大用砂仁二箇碾爲末白湯調服妙{{*|}} ᄯᅩ〮 과ᄀᆞᆯ이〮 ᄇᆡ〮 알ᄑᆞᆫ 絞교ᇢ〯腸땨ᇰ沙상ᄅᆞᆯ〮 고툐〮ᄃᆡ 오래〮 ᄆᆞᄅᆞᆫ 도ᄐᆡ〮 ᄯᅩᇰ ᄒᆞᆫ 무저기〮 소ᇇ가락만〮 ᄒᆞ니〮와〮縮슉〮砂상 두〯 나〯ᄎ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尸厥第十== 經驗良方其證奄然死去四肢逆冷不省人事腹中氣走如雷鳴 焰焇{{*|半兩}}硫黃{{*|一兩}}右細硏如粉分作三服每服用好舊酒一大盞煎覺焰起傾於盞內盖着溫灌與服如人行五里又進一服不過二服卽醒兼灸頭上百會穴四十九壯兼臍下氣海丹田三百壯覺身體溫暖卽止{{*|}} 그 證지ᇰ〮이〮 믄득〮 죽거든〮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고〮 ᄇᆡ〮 안해〮 氣킝分분이〮ᄃᆞᆫ뇨〮ᄃᆡ 울〮에 ᄀᆞᆮ〮ᄒᆞ니〮 焰염〮焇쇼ᇢ 半반〮 兩랴ᇰ〯과〮硫류ᇢ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세〯 服뽁〮애〮 ᄂᆞᆫ화〮 ᄒᆞᆫ 服뽁〮애〮 됴〯ᄒᆞᆫ 무근〮 술 큰〮 ᄒᆞᆫ 잔〮애〮 글혀〮 焰염〮焇쇼ᇢㅣ 니러〮나〮거든〮 잔〮애〮 브ᅀᅥ〮 둡고〮 ᄃᆞ시 ᄒᆞ〮야〮 브ᅀᅥ〮 머기〮고〮 사〯ᄅᆞ미〮 五ᅌᅩᆼ〮里링〯예〮 갈 만〮ᄒᆞ〮야〮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 즉〮재 ᄭᆡ〮ᄂᆞ니〮 머릿〮 百ᄇᆡᆨ〮會ᅘᅬᆼ〮穴ᅘᆑᇙ〮ᄋᆞᆯ〮 四ᄉᆞᆼ〮十씹〮九구ᇢ〯 壯자ᇰ〮ᄋᆞᆯ〮 ᄯᅳ〯고〮 臍쪵下ᅘᅡᆼ〯와〮氣킝〮海ᄒᆡᆼ〯 와〮丹단田뗜 ᄋᆞᆯ〮 三삼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ᅥ〮 모〮미 덥〯거든〮 말〯라〮 如無前藥用附子重七錢許炮熟去皮臍爲末分作二服每服用酒三盞煎至一盞溫服{{*|}}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附뿡〮子ᄌᆞᆼ〯 므〮긔 닐굽〮 돈〯 남ᄌᆞᆺᄒᆞ닐〮 炮뽀ᇢᄒᆞ〮야〮 니겨〮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細솅〮末마ᇙ〮ᄒᆞ〮야〮 ᄂᆞᆫ화〮 두〯 服뽁〮애〮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술 세〯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애〮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又無附子用生薑自然汁半盞酒一盞煎百沸倂灌二服{{*|}} ᄯᅩ〮 附뿡〮子ᄌᆞᆼ〯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 半반〮 잔〮ᄋᆞᆯ〮 술 ᄒᆞᆫ 잔〮ᄋᆞᆯ〮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솟글커든〮 조쳐〮 브ᅀᅩ〮ᄃᆡ〮 두〯 服뽁〮애 ᄒᆞ라〮 聖惠方治尸厥脉動而無氣氣閉不通故正如死聽其耳中脩脩有如嘯聲而股內暖者是也不治三日當死宜服朱砂丸 朱砂{{*|細硏}}雄黃{{*|細硏}}附子{{*|各三分炮裂去皮臍}}桂心{{*|一兩半}}巴豆{{*|二十枚去皮心硏}}右件藥擣羅爲末入硏了藥令勻煉蜜和丸如麻子大每服不計時候以粥飮下五丸不知更下二丸若利多則止之{{*|}} 尸싱厥궈ᇙ〮을〮 고툐〮ᄃᆡ〮 脉ᄆᆡᆨ〮이〮뮈유〮ᄃᆡ〮 氣킝〮分분 업〯스며〮 氣킝〮分분이〮 마켜〮 通토ᇰ티〮 몯〯ᄒᆞᆯᄉᆡ〮 正져ᇰ〮히〮 주그〮니 ᄀᆞᆮ〮ᄒᆞ니〮 그 귀예〮 드로〮ᄃᆡ〮 脩슈ᇢ脩슈ᇢᄒᆞ〮야〮 ᄑᆞ〮라ᇝ 소ᄅᆡ〮 ᄀᆞᆮ〮고〮 다리 안〮히 더우〮니 이〮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ᄋᆞᆳ〮마〯내 죽ᄂᆞ니〮 朱즁砂상丸ᅘᅪᆫᄋᆞᆯ〮 머귤디니〮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ᆯ〮오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나리 ᄀᆞᆯ〮오 附뿡〮子ᄌᆞᆼ〯ᄅᆞᆯ〮 各각〮 三삼分뿐〮을 炮뽀ᇢᄒᆞ〮야〮 ᄢᅢ혀〮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桂ᄀᆒᆼ〮心심 ᄒᆞᆫ 兩랴ᇰ〯 半반〮과〮巴방豆뚜ᇢ〮 스〮믈 나〯ᄎᆞᆯ〮 것과〮 소〯ᄇᆞᆯ〮 앗〯고 ᄀᆞ〮라 이 藥약〮을〮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고〮 몬져 ᄀᆞ〮론 藥약〮ᄋᆞᆯ〮 녀허〮 골오〮 섯거〮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 지ᅀᅩ〮ᄃᆡ 열ᄡᅵ〮만〮 케〮 ᄒᆞ〮야〮 머규〮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粥쥭〮므〮레 다ᄉᆞᆺ〮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오고〮 아〯디 몯〯거든〮 다시〮 두〯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올디〮니 즈츼〮요ᄆᆞᆯ〮 하〮 ᄒᆞ〯야ᄃᆞᆫ〮 그치〮라〮 葛氏備急方尸蹶之病卒死而脉猶動灸鼻人中七壯又灸陰囊下去下部一寸百壯若婦人灸兩乳中閒又云爪刺人中良久又針人中至齒立起{{*|}} 尸싱厥궈ᇙ〮ㅅ 病뼈ᇰ〮이〮 과ᄀᆞᆯ이〮 주구〮ᄃᆡ 脉ᄆᆡᆨ〮이〮 ᄉᆞᆫᄌᆡ〮 動또ᇰ〯ᄒᆞ〮ᄂᆞ니〮 人ᅀᅵᆫ中듀ᇰ을〮 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고 ᄯᅩ〮陰ᅙᅳᆷ囊나ᇰ 아래〮 밋굼그〮로셔〮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ᄒᆞ〮다가〮 겨〯지비〮어든〮 두〯 졋〮 가온〮ᄃᆡᆯ〮 ᄯᅳ〮라〮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소ᇇ토ᄇᆞ〮로〮 오래〮ᄣᅵᆯ어〮 시며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針짐호〮ᄃᆡ 니〮예 다ᄃᆞᆮ게〮 ᄒᆞ면〮 즉〮자히〮 니〯ᄂᆞ〮니라〮 又方菖蒲屑納鼻兩孔中吹之令人以桂屑着舌下{{*|}}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녀코〮 불〯오〮 사〯ᄅᆞ미〮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로〮 혀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熨其兩脅下取竈中墨如彈丸漿水和飮之湏臾三四{{*|}} ᄯᅩ〮 두〯 녀블 熨ᅙᅮᇙ〮ᄒᆞ고 브ᅀᅥ〮븻〮 검듸〮여ᇰ을〮彈딴子ᄌᆞ〯 만〮 ᄒᆞ닐〮 가져〮 漿쟈ᇰ水ᄉᆔᆼ예〮 프〮러 머교〮ᄃᆡ〮 아니〮한 ᄉᆞᅀᅵ〮예〮 서〯너〮 번 ᄒᆞ〮라〮 又方針百會入三分補之又針足大指甲下內側去甲三分又足指甲上各入三分{{*|}} ᄯᅩ〮 百ᄇᆡᆨ〮會ᅘᅬᆼ〮ᄅᆞᆯ〮 針짐호〮ᄃᆡ 三삼分뿐〮에 들〮에 ᄒᆞ〮야〮 補봉〯ᄒᆞ고〮 ᄯᅩ〮 밠〮 엄지〮가락톱〮 아래〮 안〮녁 겨틀〮 토〮ᄇᆞ로〮셔 三삼分뿐〮만 ᄒᆞᆫᄃᆡ〮 針짐ᄒᆞ고〮 ᄯᅩ〮 밠〮톱 우흘〮 各!긱〮!각〮!各각〮 三삼分뿐〮이〮 들〮에 針짐ᄒᆞ라〮 又方灸膻中穴二十八壯{{*|}} ᄯᅩ 膻선中듀ᇰ穴ᅘᆑᇙ〮을〮 二ᅀᅵᆼ〮十씹〮八바ᇙ〮壯자ᇰ〮을〮 ᄯᅳ〮!리〮!라〮! ==纏喉風喉閉第十一<sub>喉腫舌腫失音附</sub>== 經驗良方其證先兩日胸膈氣緊取氣短促驀然咽喉腫痛手足厥冷氣閉不通頃刻不治 巴豆{{*|七粒三生四熟生者去殼生硏熟者去殼燈上燒存性}}雄黃一塊{{*|如皂角子大透明者細硏}}鬱金一箇{{*|蟬肚者硏爲末}}右三味硏末每服半字用茶淸兩呷許調下口噤咽塞用小竹管納藥吹入喉中湏臾吐利卽醒{{*|}} 그 證지ᇰ〮이〮 몬져 이트〮를〮 가ᄉᆞᇝ〮氣킝〮分분이〮 답답ᄒᆞ〮야〮 氣킝〮分분ᄋᆞᆯ〮 取츙〯호〮미 뎌르고〮 ᄌᆞᆺ다가〮 믄〮득〮 모기〮 븟고〮 손〮바〮리 ᄎᆞ〮고 氣킝〮分분이〮 마가〮 通토ᇰ티〮 몯〯ᄒᆞ〮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고티〮디〮 몯〯ᄒᆞ〮ᄂᆞ〮니라〮 巴방豆뚜ᇢ〮 닐굽〮 나〯ᄎᆞ로〮 세〯흔 生ᄉᆡᇰ이〮오〮 네〯흔 니겨〮 生ᄉᆡᇰ으〮란〮 거피〮 밧겨〮 ᄀᆞᆯ오 니그〮니란〮 거피〮 밧기〮고〮 드ᇰ자ᇇ〮브〮레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라〮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기〮 皂쪼ᇢ〯角각〮 ᄡᅵ〮만〮 ᄒᆞ니〮 ᄉᆞᄆᆞᆺ ᄇᆞᆯᄀᆞ〮닐〮 ᄀᆞ〮ᄂᆞ〮리〮 ᄀᆞᆯ〮라〮鬱ᅙᅮᇙ〮金금 ᄒᆞᆫ 낫〯 ᄆᆡ〮야ᄆᆡ〮 ᄇᆡ〮 ᄀᆞᆮ〮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세〯 가짓〮 마〮ᄉ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字ᄍᆞᆼ〮ᄅᆞᆯ〮 머교〮ᄃᆡ 찻믈〮 두〯 머굼〮만〮 ᄒᆞᆫᄃᆡ〮 프〮러 ᄂᆞ리〯오라〮 입〮 마고〮믈오 모기〮 마고〮 븟거든〮 져〮근 대〮로ᇰ애 藥약〮ᄋᆞᆯ〮 녀허〮 목 안해〮 불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吐통〯ᄒᆞ〮고〮 즈츼〮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無前藥用川升麻四兩剉碎水四椀煎一椀灌服{{*|}}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넉〯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네〯 보ᅀᆞ애〮 ᄒᆞᆫ 보ᅀᆡ〮 ᄃᆞ외에〮 글혀〮 브ᅀᅳ라〮 又無川升麻用皂角三莖搥碎挼一盞灌服或吐或不吐卽安{{*|}} ᄯᅩ〮 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업〯거든〮 皂쪼ᇢ〯角각〮 세〯 줄!길〮!걸〮! !ᄯᅳ!ᄯᅮ!드〮려〮 ᄇᆞᆺ아〮 ᄒᆞᆫ 자내〯 프〮러 브ᅀᅳ라〯 시혹〮 吐통〯커나〮 시혹〮 吐통〯티〮 아니〮커나〮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朱氏集驗方吹喉散治咽喉腫痛 朴硝{{*|四兩別硏}}甘草{{*|一兩生末}}右硏勻每用半錢乾擦喉如腫甚用竹管子吹入喉中爲佳{{*|}} 吹ᄎᆔᆼ喉ᅘᅮᇢ散!신!산! 은〮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朴박〮硝쇼ᇢ 넉〮 兩랴ᇰ〯ᄋ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ᄒᆞᆫ 兩량〯ᄋᆞᆯ〮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 半반〮 돈〯ᄋᆞᆯ〮 ᄆᆞᄅᆞ닐〮 모긔〮 ᄇᆞᆯ로〮ᄃᆡ〮 브ᅀᅮ〮미 甚씸〯커든〮 대〮로ᅌᆞ〮로 부러〮 목 안해 드〮류미〮 됴〯ᄒᆞ〮니라〮 經驗秘方治懸壅暴腫 白礬 塩右等分爲末以筯頭點少許在懸壅上{{*|}} 목져〮지 과글이 브ᅀᅳ닐〮 고툐〮ᄃᆡ 白ᄈᆡᆨ〮礬뻔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ᄇᆞᄅᆞ라〮 又方乾薑半夏等分爲末以少許着舌下{{*|}} ᄯᅩ〮 乾간薑가ᇰ과〮 半반〮夏!ᅘᅵᆼ!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혀 아래〮 녀흐라〮 又方一字散主喉痺氣塞不通欲死者 雄黃{{*|一分別硏}}蝎梢{{*|七枚}}猪牙皂角{{*|七鋌}}白礬{{*|生硏一錢}}藜蘆{{*|一錢}}右細末每用一字吹入鼻中頑涎卽吐效{{*|}} ᄯᅩ〮一ᅙᅵᇙ〮字ᄍᆞᆼ散산〮 은〮 모기〮 브ᅀᅥ〮 氣킝〮分분이〮 !아!마!가〮 通토ᇰ티〮 몯〯ᄒᆞ〮야 죽ᄂᆞ닐 主즁〮ᄒᆞ니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分뿐을〮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蝎허ᇙ〮梢쇼ᇢ 닐굽〮 낫〯과〮 皂쪼ᇢ〯角각 닐굽〮 鋌뗘ᇰ〯과 白ᄈᆡᆨ礬뻔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ᄀᆞ〮라 ᄒᆞᆫ 돈〯과〮藜래蘆 롱 ᄒᆞᆫ 돈〯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부러 녀허〮 건〯추〮믈 吐통〯ᄒᆞ면〮 됻〯ᄂᆞ〮니라 又方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馬㗸鐵{{*|一具}}右用水三盞煮一盞溫服又蒜塞耳鼻中{{*|}} ᄯᅩ〮 모기〮 막고〮 ᄀᆞ자ᇰ〮 브ᅀᅥ〮 ᄲᅡ매〮 닛〯고〮 氣킝分분을〮 吐통〯호〮미 ᄌᆞᄌᆞ〮면〮 일후〮미 ᄆᆞᆯ목브ᅀᅮ〮미니〮馬망〯含ᅘᅡᆷ쇠〮 ᄒᆞ나ᄒᆞᆯ〮 믈〮 세〯 잔〮ᄋᆞ로〮 ᄒᆞᆫ 잔〮 ᄃᆞ외!어〮!에〮!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마ᄂᆞ〮ᄅᆞᆯ〮 귀〮와〮 고해〮 고ᄌᆞ라〮 又方如聖散治舌腫喉痺 川芎 桔梗 薄苛葉 甘草 盆硝{{*|各等分}}右爲細末每用一錢乾摻{{*|}} ᄯᅩ〮如ᅀᅧᆼ聖셔ᇰ〮散산 은〮 혀〮 븟고〮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川!ᄌᆑᆫ!ᄎᆑᆫ!芎쿵 과〮 桔겨ᇙ〮梗겨ᇰ〯과〮薄팍〮荷ᅘᅡᆼㅅ 닙〮과〮 甘감草초ᇢ〯와〮盆뽄硝쇼ᇢ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곰〮 ᄆᆞᄅᆞ닐〮 ᄇᆞᄅᆞ라〮 又方舌忽腫硬塞悶百草霜食塩等分井水調塗舌上卽安{{*|}} ᄯᅩ 혜〮 忽호ᇙ然ᅀᅧᆫ히〮 브ᅀᅥ〮 세웓고〮 답답ᄒᆞ〮거든〮 百ᄇᆡᆨ〮草초ᇢ〯霜사ᇰ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우믌〮 므〮레 프〮러 혀〮에〮 ᄇᆞᄅᆞ면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直指方白藥散治喉中熱塞腫疼散血消痰白藥 朴硝{{*|等分}}右爲末以小管子吹入喉{{*|}} 白ᄈᆡᆨ〮藥약散산 은〮 목 안〮히 더워〮 마고〮 브ᅀᅳ닐〮 고티〮ᄂᆞ니〮 피〮ᄅᆞᆯ〮 슬〮며 痰땀〮을〮 노기〮ᄂᆞ니〮라 白ᄈᆡᆨ〮藥약〮!괴〮!과〮!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근 대〮롱ᄋᆞ〮로 부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纏喉風及喉痺用蠶退紙燒灰存性煉蜜丸如雞頭大含化嚥津{{*|}} 纏뗜喉ᅘᅮᇢ風보ᇰ과〮 목 브ᅀᅳ닐〮 누에〮ᄡᅵ〮 난 죠ᄒᆡ〮ᄅᆞᆯ〮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을〮 지ᅀᅩᄃᆡ〮雞곙頭뚜ᇢ實씨ᇙ 만〮 게〮 ᄒᆞ〮야〮 머구〮머 노겨〮 춤〮 ᄉᆞᇝ기〮라〮纏뗜喉ᅘᅮᇢ風보ᇰ 은〮 과ᄀᆞᄅᆞᆫ목더시〮라〮 又方纏喉風氣不通雄黃一塊新汲水磨急灌吐卽差{{*|}} ᄯᅩ 纏뗜喉ᅘᅮᇢ風보ᇰ에〮 氣킝分분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글〮 새〮 므〮레 ᄀᆞ〮!리〮!라〮! ᄲᆞᆯ리〮 브ᅀᅥ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咽喉腫閉 甘草 白礬{{*|等分}}右爲細末每以半錢許入口中津液嚥下{{*|}} ᄯᅩ 모기〮 브ᅀᅥ〮 마ᄀᆞ〮닐〮 고툐〮ᄃᆡ〮 甘감草초ᇢ〯와 白ᄈᆡᆨ〮礬뻔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돈〯 남ᄌᆞ샤 입〮 안해〮 녀허〮셔〮 추〮므로〮 ᄂᆞ리〮오라〮 聖惠方咽喉閉不通 硇砂 馬牙硝{{*|等分}}右細硏令勻用銅筯頭於水中 蘸令濕搵藥末點於咽喉中{{*|}} 모기〮 마가〮 通토ᇰ티〮 아니ᄒᆞ닐〮 硇뇨ᇢ砂상와〮 馬망〯牙ᅌᅡᆼ硝쇼ᇢ 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놋〮졋〮 그〮트로〮 므〮레 저〮져〮 藥약〮ᄋᆞᆯ〮 무텨〮 목 안해〮 디그〮라〮 又方咽喉閉塞口噤雄雀糞細硏每服半錢以溫水調灌{{*|}} ᄯᅩ〮 모기〮 막고〯 입〮 버〯리디〮 몯〯ᄒᆞ닐 수〮새〯 ᄯᅩᆼ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을〮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ᅳ라〮 又方咽喉生穀賊若不急治亦能殺人用針刺破令黑血出後含馬牙硝一小塊子嚥津卽差{{*|}} ᄯᅩ〮 모ᄀᆡ〮穀곡〮賊쪽〮 이〮 나〮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ᄯᅩ〮 能느ᇰ히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 針짐으〮로〯 허러〮 거믄〮 피나게 ᄒᆞ고〮 馬망〮牙ᅌᅡᆼ硝쇼ᇢ ᄒᆞᆫ 져〯근 무저글〮 머구머 추믈 ᄉᆞᆷᄭᅵ면〮 즉재 됻〯ᄂᆞ〮니〮라〮 穀곡賊쪽〮은〮 穀곡〮食씩〮에〮 몯〯내〮ᄑᆡᆫ〮 이사기〮 굳고〮!ᄭᅵ!ᄭᅡ!ᄭᅡᆯᄒᆞᆫ 거시〮니〮 몰〯라 ᄡᆞ〮리〮라〮 머고면〮 목 안히 브ᅀᅥ〮 通토ᇰ티〮 아니〮ᄒᆞ〮ᄂᆞ니〮 일후〮믈 목 안해〮 穀곡賊쪽〮 나다〮 ᄒᆞ〮ᄂᆞ〮니라〮 又方以馬牙硝細硏緜裹半錢含化嚥津以差爲度{{*|}} ᄯᅩ〮 馬망〯牙ᅌᅡᆼ硝쇼ᇢ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ᄋᆞᆯ소오매〮 ᄢᅳ려〮 머구머 노겨〮 춤〮 ᄉᆞᆷᄭᅭ〮ᄃᆡ〮 됴〯ᄒᆞᆯ ᄭᆞ자ᇰ ᄒᆞ라 又方咽喉腫痛語聲不出豉半升以水二大盞煎至一大盞去滓分爲二服相繼稍熱服之令有汗出卽差{{*|}} ᄯᅩ〮 목 브ᅀᅥ 소ᄅᆡ〮 나디〮 아니〮커든〮 젼국 半반〮 되〮ᄅᆞᆯ〮 믈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큰〮 잔애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두〯 服뽁〮애〮 ᄂᆞᆫ화〮 서르 닛우〮 져〯기 덥〯게〮 ᄒᆞ〮야〮 머거〮 ᄯᆞᆷ〮나게〮 ᄒᆞ면〮 곧〮 됻〯ᄂᆞ〮니라〮 壽域神方舌忽脹出口外雞冠上刺血磁盞盛浸舌就嚥下卽縮{{*|}} 혜〮 과글이 부러〮나〮 입〮 밧긔〮 나〮거든〮 ᄃᆞᆯᄀᆡ〮 벼〮츨〮 ᄡᅥᆯ어〮 피〮내〯야 沙상〮잔애〮 담〯고〮 혀를〮 ᄃᆞᆷ가〮셔 ᄉᆞᆷᄭᅵ〮면〮 즉〮재움처〮 드〮ᄂᆞ니라〮 ==骨鯁第十二== 醫方集成治骨鯁入喉 縮砂 甘草{{*|各等分}}右爲末緜裹少許噙之旋旋嚥津久之隨痰出{{*|}} ᄲᅨ〮 모긔〮거〯닐〮 고툐〮ᄃᆡ 縮슉砂상와〮 甘감草초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소오!마〮!ᄆᆡ〮! 져〯기 ᄢᅳ〮려〮 머구〮머 젹젹〮 춤〮 ᄉᆞᆷᄭᅵ〮면〮 오라〮면〮 痰땀 조차〮 나〮ᄂᆞ〮니라〮 又方野紵根洗淨不以多少搗爛如泥每用龍眼大如被雞骨所傷以雞羹化下如被魚骨所傷以魚羹汁化下{{*|}} ᄯᅩ〮 모싯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디호〮ᄃᆡ 니균〮 ᄒᆞᆰᄀᆞ〮티 ᄒᆞ〮야〮 龍료ᇰ眼ᅌᅡᆫ〯만〮 ᄒᆞ니〮ᄅᆞᆯ〮 ᄃᆞᆯ긔〮 ᄲᅧ〮에〮 傷샤ᇰ커든〮 ᄃᆞᆰ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고〮 고깃〮 ᄲᅧ〮에 傷샤ᇰ커든〮 生ᄉᆡᇰ鮮션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라 經驗良方治骨硬不下先嚼白茯苓一錢重次以白礬湯嚥下{{*|}} ᄲᅨ〮 거러〮 ᄂᆞ리〮디〮아닌〮ᄂᆞ닐〮 고툐〮ᄃᆡ〮 몬져白ᄈᆡᆨ〮茯뽁〮苓려ᇰ ᄒᆞᆫ 돈〯ᄋᆞᆯ 십고 버거〮白ᄈᆡᆨ〮礬뻔湯타ᇰ〮으〮로〮 ᄂᆞ리〮오라〮 又方治魚骨用白膠香細細呑下{{*|}} ᄯᅩ〮 믌〮고깃〮 ᄲᅧ〮걸우〮닐〮 고툐〮ᄃᆡ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을〮 젹젹 ᄉᆞᆷᄭᅧ〮 ᄂᆞ리〮오라〮 又方皂角少許吹入鼻{{*|}} ᄯᅩ〮 皂쪼ᇢ〮角각〮을〮 져〯기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口念鸕鶿鸕鶿立愈{{*|}} ᄯᅩ〮 이베〮 鸕롱鶿ᄍᆞᆼ 鸕롱鶿ᄍᆞᆼᄒᆞ〮야〮 念념〮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鸕롱鶿ᄍᆞᆼᄂᆞᆫ〮 가마오〮디라〮 朱氏集驗方治食鯉魚骨硬貫衆不以多少濃煎汁一盞半分三服幷進連服三劑{{*|}} 鯉링〯魚ᅌᅥᆼ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貫관〮衆쥬ᇰ〮을〮 두터이〮 글혀〮 즈〮블〮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세〯 服뽁〮애〮 ᄂᆞᆫ화〮 다〯 머구〮ᄃᆡ 닛우〮 세〯 劑쪵〮ᄅᆞᆯ〮 머그〮라〮 又方巧匠取喉鉤將繭剪如錢大用物搥四面令軟以油潤之仍中通一竅先穿上鉤線次穿數珠三五枚令兒正坐開口漸添引數珠挨之到喉覺至繫鉤處乃以向下一推其鉤自下而脫卽向上急出之見蠶錢向下裹定鉤線鬚而出並無所損{{*|}} ᄯᅩ〮 工고ᇰ巧교ᇢ〯ᄒᆞᆫ 匠쨔ᇰ〮ㅅᅀᅵᆫ이〮 아ᄒᆡ〮 모ᄀᆡ〮 건〯 낙〮ᄉᆞᆯ〮 아ᅀᅩ〮ᄃᆡ〮 고티〮ᄅᆞᆯ〮 돈〯ᄀᆞ〮티 ᄇᆞ〮리고〮 네〯 面면〮을〮 ᄯᅮ드〮려 보ᄃᆞ〮랍게〮 ᄒᆞ고〮 기르〮므로〮 저지〮고〮 가온〮ᄃᆡ〮 ᄒᆞᆫ 구무들워〮 몬〮져낛〮긴헤〮 ᄢᅦ〯오〮 버거〮念념〮珠즁 세〯다ᄉᆞᆺ〮 나〯ᄎᆞᆯ〮 ᄢᅦ〯오〮 아ᄒᆡ〮로〮 바ᄅᆞ 아ᇇ고〮 입〮버〯리〮게 코〮 졈〯졈〯 念념〮珠즁를〮 더〮 미러〮 모ᄀᆡ〮 다ᄃᆞᆮ게〮 ᄒᆞ〮야〮 낛〮 ᄆᆡ욘〮 ᄃᆡ〮 니른〮가〮 식브거늘〮 아래〮로〮 ᄒᆞᆫ 번 미〯니 그 낙〮시 제〯 ᄂᆞ려〮 버서〮디〮거늘 즉〮재 우흐〮로 時씽急급〮히〮 내〯오〮 고티〮ᄅᆞᆯ〮 보니〮 아래〮로 낙〮줄〮와〮 낛〮미느〮를〮 ᄢᅳ러〮 나〮 귿〮 헌〯 ᄃᆡ 업〯더라〮 聖惠方治食魚骨鯁以魚網燒灰細硏水調服一錢又方以魚網䨱頭立下{{*|}} 믌〮고기〮 먹다가〮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고깃〮 그〮므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 그〮므를〮 머리〮예〮 두프〮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含水獺骨立出或爪亦得{{*|}} ᄯᅩ〮 水ᄉᆔᆼ〯獺타ᇙ〮의〮 ᄲᅧ〮를〮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 시혹〮 밠〮톱〮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以牛筋水浸細擘以線繫如彈子大持線端呑之入喉至哽處徐徐引之鯁着筋卽出{{*|}} ᄯᅩ〮 ᄉᆈ〯 히〮믈〮 므〮레 ᄃᆞᆷ가〮 ᄀᆞ〮ᄂᆞ리〮 ᄧᆡ〮야〮 실〯로〮 ᄆᆡ요〮ᄃᆡ〮 彈딴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싨〯그〮틀 잡고〮 ᄉᆞᆷᄭᅧ〮 모ᄀᆡ〮 드〮려 ᄲᅧ〮 건〯 ᄃᆡ 니르〮거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ᄃᆞᆼᄀᆡ〮면〯 ᄲᅧ〮 히〮메 바켜〮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以虎糞或狼糞燒灰細硏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ᄯᅩᆼ이〮나〮 시혹〮 일〮희 ᄯᅩᆼ이〮나〮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虎骨或狸骨擣細羅爲散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ᄲᅨ〮나〯 시혹 ᄉᆞᆯ긔〮 ᄲᅨ〮나 디허〮 ᄀᆞ〮ᄂᆞ리〮처〮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硇砂半錢口中咀嚼嚥之立下{{*|}} ᄯᅩ〮 硇뇨ᇢ砂상 半반〮 돈〮ᄋᆞᆯ〮 이베〮 시버〮 ᄉᆞᆷᄭᅵ〮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治誤呑鉤若線猶在手中者莫引之但急以珠璫若薏苡子輩穿貫着線稍稍令推至鉤處小小引之則出{{*|}} ᄯᅩ〮 낙〮ᄉᆞᆯ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ᄒᆞ〮다가〮 긴〮히 소내〮 잇ᄂᆞ닌〮 ᄃᆞᇰᄀᆡ〮디 말〯오〮 ᄲᆞᆯ리〮 구스〮리나〮 율믜나 긴헤〮 ᄢᅦ〯어〮 졈〯졈〯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젹젹 ᄃᆞᇰᄀᆡ〮면〮 나〮ᄂᆞ〮니라〮 又方以琥珀珠着線貫之推令前入至鉤又復推以索引出矣或水精珠亦佳無珠諸堅實物磨令滑作孔用之{{*|}} ᄯᅩ〮琥홍珀ᄑᆡᆨ〮 구스〮를〮 긴헤 ᄢᅦ〮여〮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ᄯᅩ〮 미러〮혀면〮 나〮ᄂᆞ〮니라〮 시혹〮水ᄉᆔᆼ〯精져ᇰ 도〮 ᄯᅩ〮 됴〯ᄒᆞ니 구슬〯 업〯거든〮 구든〮 거슬〮 ᄀᆞ〮라 ᄆᆡᆺᄆᆡᆺ게〮 ᄒᆞ〮야〮 구무 들워〮 ᄡᅳ〮라〮 又方治誤呑針以上好磁石如小彈子大含之卽出{{*|}} ᄯᅩ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됴〯ᄒᆞᆫ指징〯南남石쎡〮 이〮 져〯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라〮 經驗秘方治誤呑錢百部根四兩酒一升浸一宿溫作二服{{*|}} 돈〯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百ᄇᆡᆨ〮部뽕〯根ᄀᆞᆫ 넉〯 랴ᇰᄋᆞᆯ〮 술 ᄒᆞᆫ 되〮예〮 ᄒᆞᄅᆞᆺ바〮ᄆᆞᆯ〮 ᄃᆞᆷ가〮 ᄃᆞ시 ᄒᆞ〮야〮 두〯 버네〮 머그〮라〮 又方服淸蜜二盞{{*|}} ᄯᅩ〮 淸쳐ᇰ蜜미ᇙ〮 두〯 잔〮ᄋᆞᆯ〮 머그〮라 又方濃煎艾湯一二盞飮之{{*|}}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혀〮 ᄒᆞᆫ두〯 자〮ᄂᆞᆯ 머그〮라〮 又方治誤呑針釘鉤子魚骨雜物多食肥羊脂肉及諸肉必自裹出{{*|}} ᄯᅩ〮 바ᄂᆞᆯ〮와〮 몯〮과〮 낛〮과〮 고깃 ᄲᅧ〮와〮 雜짭〮거슬〮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진 羊야ᇰᄋᆡ〮 기름〮과〮 고기〮와〮 여러〮 가짓〮 고기〮ᄅᆞᆯ〮 만〯히 머그〮면〮 절로〮 ᄢᅳ려〮 나〮ᄂᆞ〮니라〮 又方木炭爲細末每服一錢冷水調下頓服自然裹於大便中出{{*|}} ᄯᅩ〮숫글〮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ᄎᆞᆫ〮므〮레 프러 다〯 머그면〮 自ᄍᆞᆼ〮然ᅀᅧᆫ히〮 大땡〮便뼌에〮 ᄢᅳ려〮 나〮ᄂᆞ〮니라〮 衛生易簡方治一切骨鯁用朴硝噙化{{*|}} 一ᅙᅵᇙ〮切촁〮ㅅ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朴팍硝쇼ᇢᄅᆞᆯ〮 머구〮머 노기〮라〮 又方用雞蘇朴硝等分如彈子大仰臥噙化三五丸卽愈{{*|}} ᄯᅩ〮雞곙蘇송와〮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졋바〮누〮어〮 세〯 다ᄉᆞᆺ〮 버늘〮 머구〮머 노기〮?면〮? 즉〮재 됻〯ᄂᆞ〮니라〮 壽域神方治諸骨鯁用不蛀皂角一片槌碎作四截銚內炒令焦黑酸米醋一盞澆之用碗覆一茶久取出放溫漱嚥下{{*|}} 여러〮 가짓〮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벌에〮 먹디〮 아니〮ᄒᆞᆫ 皂쪼ᇢ〯角각〮 ᄒᆞᆫ 편〮을〮 ᄯᅮ드〮려 네〯헤 그처〮 새용〮 안해〮 봇가〮 검〯게 ᄒᆞ고〮 싄 초 ᄒᆞᆫ 잔〮ᄋᆞᆯ〮 븟고〮 보ᅀᆞ로 두퍼〮 ᄒᆞᆫ 차 다릴〮 ᄉᆞᅀᅵ〮만〮 커든〮 내〯야〮 ᄃᆞ시 ᄒᆞ〮야〮 야ᇰ〯지ᄒᆞ〮야〮 ᄉᆞᆷᄭᅵ〮라〮 又方用覆盆子根取淨洗釅醋瓦礶煎濃汁用紙盖礶口留一孔令患人開口置孔熏一二時久骨自下{{*|}} ᄯᅩ〮覆폭〮盆뽄子ᄌᆞᆼ〯ㅅ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초로〮 딜湯타ᇰ〮礶관〮에〮 즙〮이〮 두〮텁〮게〮 글히〮고〮 죠ᄒᆡ〮로〮 湯타ᇰ〮礶관〮 이〮블〮 막고〮 ᄒᆞᆫ 굼글〮 두〮어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로 입〮 버〯려 굼긔〮 다혀〮 ᄒᆞᆫ 두〯 時씽刻큭을〮 쐬〯면〮 ᄲᅨ〮 저〯 나〮ᄂᆞ〮니라〮 又方用餳糖再熬化丸如雞子黃大微嚼猛嚥呑之不下再作大丸呑妙{{*|}} ᄯᅩ〮 여〮슬 두〯 번 ᄉᆞ〮라 ᄃᆞᆯᄀᆡ〮앐〮 누른〮 것만〮 케 비븨〮여 자ᇝ〯간 시버〮 ᄆᆡ이〮 ᄉᆞᆷᄭᅭ〮ᄃᆡ ᄂᆞ리〮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크〮게 비븨〮여〮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以魚骨安於頭上立愈{{*|}} ᄯᅩ〮 믌〮고깃〮 ᄲᅧ〮ᄅᆞᆯ〮 머리〮예 연ᄌ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仍取所餘骨左右手反復擲背後立出{{*|}} ᄯᅩ〮 나ᄆᆞᆫ〮 ᄲᅧ〮를〮 두〯 녁 소〮ᄂᆞ로〮 서르 드ᇰ 뒤〯헤 더디〮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解衣帶眼看下部不下卽出{{*|}} ᄯᅩ〮 옷〮 밧고〮 미틀〮 보면〮 ᄂᆞ리〮디 아니〮ᄒᆞ면〮 즉〮자히〮 나〮ᄂᆞ〮니라〮 又方取鯉魚鱗皮燒灰作末以水調服卽出不出再作{{*|}} ᄯᅩ〮 鯉링〯魚ᅌᅥᆼㅅ 비늘〮와〮 가ᄎᆞᆯ〮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 나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又方用象牙爲末水調一錢服亦治魚刺{{*|}} ᄯᅩ〮象쌰ᇰ〯牙ᅌᅡ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ᄲᅧ〮 ᄣᅵᆯ인〮 ᄃᆡ 고티〮ᄂᆞ〮니라〮 又方用鸕鶿骨爲末湯調服之得呑其嗉最效{{*|}} ᄯᅩ〮 鸕롱鶿ᄍᆞᆼ ᄲᅧ〮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그〮라〮 그 부릴 어〯더 머그〮면〮 ᄆᆞᆺ〮 됴〯ᄒᆞ〮니라〮 又方治誤呑錢用慈菰搗半爛呑之移時其錢卽化一用濃煎艾汁亦可冬葵根煮汁亦可{{*|}} ᄯᅩ〮 그르 돈〯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慈ᄍᆞᆼ菰공ᄅᆞᆯ〮 디허〮 半반〮만 닉거든 ᄉᆞᆷᄭᅵ〮라〮 時씽刻큭이 올ᄆᆞ〮면 그 돈〯이 즉〮재 녹ᄂᆞ니〮라〮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횬〮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冬도ᇰ葵ᄁᆔᆼ 根ᄀᆞᆫ 글휸〮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再服卽出{{*|}} ᄯᅩ〮 金금銀ᅌᅳᆫ 곳〮 골〮회〮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水ᄉᆔᆼ〯銀ᅌᅳᆫ 半반〮 兩랴ᇰ〯을〮 머그〮라〮 다시〮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治小兒誤呑針用磁石如棗核大磨令光鑽作竅絲穿令含針自出{{*|}} ᄯᅩ〮 아ᄒᆡ〮 그르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指징〯南남石쎡〮이〮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 ᄒᆞ닐〮 ᄀᆞ〮라 빗〮나게〮 ᄒᆞ고〮 구무 들워〮 실〯로 ᄢᅦ여〮 머굼〮게〮 ᄒᆞ면〮 바ᄂᆞ〮리 제〯 나〮ᄂᆞ〮니라〮 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 ᄯᅩ〮 그르 골회〮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거유〮 ᄂᆞ〮랫짓〮 두〯ᅀᅥ흘〮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다ᇰ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脫陽陰縮第十三== 經驗良方其證或因大吐大瀉之後四肢逆冷元氣不接不醒人事或傷寒新瘥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喘冷汗自出亦是脫陽證湏臾不救先用葱白數莖炒令熱熨臍下次用 附子{{*|一枚重十錢許剉作八片}}白朮 乾薑{{*|各半兩}}木香{{*|一分}}已上四味各硏細水二椀煎至八分椀去滓放冷灌服湏臾又進一服合滓倂服{{*|}} 그 證지ᇰ〮이 시혹〮 하〮 吐통〯커나〮 하〮 즈칀〮 後ᅘᅮᇢ〯에 四ᄉᆞᆼ〮肢징 ᄎᆞ〮고元ᅌᅯᆫ氣킝〮 닛〯디 아니〮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거나〮 시혹〮傷샤ᇰ寒ᅘᅡᆫ 이〮 ᄀᆞᆺ 됴〯커든〮 그르 겨〯집과〮 사괴〮면〮 그 證지ᇰ〮이〮ᄇᆡᆺ〮기슬기 ᄀᆞ자ᇰ〮 알ᄑᆞ고〯 外ᅌᅬᆼ〮腎씬〯이〮 움치〮들〮오 ᄂᆞ치〮 검〯고〮 氣킝〮分분이〮 헐헐ᄒᆞ고〮 ᄎᆞᆫ〮 ᄯᆞ〮미 흐르ᄂᆞ니 ᄯᅩ〮 이〮 脫똬ᇙ〮陽야ᇰㅅ證지ᇰ〮이〮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몬져 파〮 두〯ᅀᅥ 줄기〮ᄅᆞᆯ〮 봇가〮 덥〯게 ᄒᆞ〮야〮 ᄇᆡᆺ복 아래〮ᄅ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버거〮 附뿡〮子ᄌᆞᆼ〯 ᄒᆞᆫ 낫〯 므〮긔 열〮 돈〯 남ᄌᆞᆺᄒᆞ닐〮 사ᄒᆞ라 여듧〮 片편 ᄆᆡᇰᄀᆞᆯ오〮 白ᄈᆡᆨ朮뜌ᇙ〮와〮 乾간薑가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량〯과〮木목〮香햐ᇰ ᄒᆞᆫ 分분과〮 네〯 가짓〮 마ᄉ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믈〮 두〯 보ᅀ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ᄎᆡ와〮 브ᅀᅳ라〮 이ᅀᅳᆨ고〮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고〮 滓ᄌᆡᆼ〮 조쳐〮 다〯 머기〮라〮 如無前藥用桂枝二兩用好酒二升煎至一升候溫分作二服灌之{{*|}} ᄒᆞ〮다!카!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桂ᄀᆒᆼ〮枝징〮 두〯 兩랴ᇰ〯ᄋᆞᆯ〮 됴〯ᄒᆞᆫ 술 두〯 되〮로 글혀〮 ᄒᆞᆫ 되〮예〮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두〯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라〮 又無桂枝用葱白連鬚三七莖細剉沙盆內硏細用酒五升煮至二升分作三服灌之陽氣卽回先用炒塩熨臍下氣海勿令氣冷{{*|}} ᄯᅩ〮 桂ᄀᆒᆼ〮枝징 업〯거든〮 파〮ᄒᆞᆯ 불휘〮 조쳐〮 세〯닐굽〮 줄기〮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沙상盆뽄에〮 ᄀᆞ〮ᄂᆞ리〮 ᄀᆞ〮라 술 닷 되〮로〮 글혀〮 두〯 되〮예〮 니르〮거든〮 세〯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면〮 陽야ᇰ氣킝〮 즉〮재 도〮라〮오〮ᄂᆞ니〮 몬져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臍쪵下ᅘᅡᆼ〯와〮 氣킝〮海ᄒ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야〮 氣킝〮分분이〮 ᄎᆞ〮디 아니〮케〮 홀〮디〮니라〮 又無葱白用生薑二七寸亦好依前法服{{*|}} ᄯᅩ〮 파〮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드!두〯!닐굽〮 寸촌〮도〮 ᄯᅩ〮 됴〯ᄒᆞ니〮 알ᄑᆡᆺ〯 法법〮을〮 브터〮 머기〮라〮 聖惠方治風入腹攻五藏拘急不得轉側陰縮手足厥冷腹中㽱痛宜服赤芍藥散赤芍藥{{*|一兩}}川烏頭{{*|三兩炮製去皮臍}}桂心 甘草炙微赤剉防風{{*|去蘆頭}}芎窮{{*|各一兩}}右擣麤羅爲散每服三錢以水一中盞入生薑半分棗二枚煎至六分去滓不計時候稍熱服{{*|}} ᄇᆞᄅᆞ〮미 ᄇᆡ〮예 드〮러 五ᅌᅩᆼ〯藏짜ᇰ〮ᄋᆞᆯ〮 보차〮 ᄇᆞᆯ라〮 움즈기〮디 몯〯고〮 陰ᅙᅳᆷ이〮 움처〮 들〮오 손〮발〮 ᄎᆞ〮고 ᄇᆡ〮 안〮히 알ᄑᆞ거든〮 赤쳑〮芍쟉〮藥약〮散산〮을〮 머골〮디니〮赤쳑〮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과〮 川ᄌᆑᆫ烏ᅙᅩᆼ頭뚜ᇢ 세〯 兩랴ᇰ〯을〮 炮뽀ᇢᄒᆞ〮야〮 갓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어 져〯기 븕게〮 ᄒᆞ〮야〮 사ᄒᆞᆯ〮오 防파ᇰ風봉을〮 머리〮 버히〮고芎구ᇰ窮꾸ᇰ과〮 各각〮 ᄒᆞᆫ 兩랴ᇰ〯을〮 디〮허〮 麤총케〮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中듀ᇰㅅ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半반〮 分분과〮 大땡〮棗초ᇢ〮 두〯 나〯ᄎᆞᆯ 드〮려 글효〮ᄃᆡ 六륙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져〯기 덥〯게 ᄒᆞ〮야〮 머기〮라〮 聖濟緫錄治陰疝腫縮疼痛 狼毒{{*|炙二兩}}防葵{{*|炒}}附子{{*|炮裂去皮臍各一兩}}右擣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十丸溫酒下空心日午臨臥服{{*|}} 陰ᅙᅳᆷ疝산ᄒᆞ〮야〮 븟고〮 움처〮 알ᄑᆞ닐〮 고툐〮ᄃᆡ狼라ᇰ毒독〮 구우〮니 두〯 兩랴ᇰ〯과〮防파ᇰ葵ᄁᆔᆼ 봇고니와〮 附뿡〮子ᄌᆞᆼ〯ᄅᆞᆯ〮 구어 것과〮 ᄇᆡᆺ복 아ᅀᅩ〮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혼〮 ᄢᅮᆯ〮로〮 丸ᅘᅪᆫᄋᆞᆯ〮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 만〮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 열〮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수레〮 ᄂᆞ리〮오ᄃᆡ〮 空코ᇰ心심과〮 낫〮과 누을 제와〮 머그〮라〮 又方雞趐左右俱用不限多少燒灰右細硏爲散每服二錢匕溫酒調下不拘時{{*|}} ᄯᅩ〮 ᄃᆞᆯᄀᆡ〮 ᄂᆞ래ᄅᆞᆯ〯 두〯 녀글〮 다〯ᄡᅮ〮ᄃᆡ 하며〮 져〯구믈〮 限ᅌᆞᆫ〯티〮 말오〮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ᄂᆞ리〮오ᄃᆡ〮 時씽刻큭〮에〮 븓들이〮디 말〯라〮 又方黃蓮{{*|去鬚}}熟艾{{*|炙}}杏人{{*|去皮尖別硏各半兩}}右擣硏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塩湯下空心服{{*|}} ᄯᅩ黃ᅘᅪᇰ蓮련을〮 거웃〮 앗〮고〮 니근〮 ᄡᅮ〮글 브〮레 ᄧᅬ〯오〮 杏ᅘᆡᇰ〯仁ᅀᅵᆫ을〮 것과〮 부〯리ᄅᆞᆯ〮 앗〯고〮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디허〮 ᄀᆞ〮라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ᄒᆞᆫ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게〮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塩염湯타ᇰ〮ᄋᆞ〮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硇砂{{*|硏}}木香{{*|各半兩}}棟實{{*|去核炒}}茴香子{{*|炒}}京三稜{{*|炮各一兩}}右五味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空心酒下{{*|}} ᄯᅩ〮 硇砂상ᄅᆞᆯ〮 ᄀᆞᆯ오 木목〮香햐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棟도ᇰ實씨ᇙ〮을〮 ᄌᆞᅀᆞ〮 아!ᅀᅵ〮!ᅀᅡ〮! 봇고〮 茴ᅘᅬᆼ香햐ᇰ ᄡᅵ〮를〮 봇고 京겨ᇰ三삼稜르ᇰ을〮 炮뽀ᇢᄒᆞ야〮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훈〮!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空코ᇰ心심에〮 술로〮 머그〮라〮 又方槐子{{*|炒一兩}}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溫酒下空心服{{*|}} ᄯᅩ〮槐ᅘᅬᆼ子ᄌᆞᆼ〯ᄅᆞᆯ〮 보ᄭᅡ〮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술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萵苣{{*|切半斤}}皂莢{{*|剉碎三挺}}蜀椒{{*|去目及閉口者炒出汗一兩}}右少用水煮令相得不可太稀乘熱用布三兩重裹熨腫處冷卽易頻熨自消{{*|}} ᄯᅩ〮 부루 사ᄒᆞ〮로〮니〮 半반〮 斤근과〮 皂쪼ᇢ〯莢겹〮 사ᄒᆞ〮라 ᄯᅮ드〮려 세〯 挺텨ᇰ〯과〮川ᄌᆑᆫ椒죠ᇢ 눈〮과〮 입〮 마ᄀᆞ〮닐〮 앗〯고〮 봇가〮 ᄯᆞᆷ〮 내〯요니〮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므〮를 져〯고매〮 ᄒᆞ〮야〮 글혀〮 서르 맛게〮 ᄒᆞ고〮 너무 젹〯게〮 마롤〮디니〮 더운〮 저긔〮 뵈〮로 두〯ᅀᅥ ᄇᆞᆯ〮 ᄢᅳ려〮 브ᅀᅳᆫ ᄃᆡ〮 熨ᅙᅮᇙ〮호〮ᄃᆡ ᄎᆞ〮거〮든〮 ᄀᆞᆯ라〮 ᄌᆞ조〮 熨ᅙᅮᇙ〮ᄒᆞ면〮 절로〮 ᄂᆞᆺᄂᆞ니〮라〮 又方雄黃{{*|硏}}甘草{{*|各一兩}}礬石{{*|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ᄀᆞ〮라 두〯 兩랴ᇰ〯과〮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믈〮 닷 되〮예〮 글혀〮 브ᅀᅳᆫ ᄃᆡ〮 시수〮ᄃᆡ 良랴ᇰ久고ᇢ〯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車前子不拘多少擣羅爲末湯調塗腫處{{*|}} ᄯᅩ〮車챵前쪈子ᄌᆞᆼ〮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브ᅀᅳᆫ ᄃᆡ〮 ᄇᆞᄅᆞ라〮 又方蔓菁根不拘多少剉碎擣羅爲散溫水調塗腫處或以絹帛傅之以差爲度{{*|}} ᄯᅩ〮 댓무ᅀᅮᆺ 불휘〮ᄅᆞᆯ〮 사ᄒᆞ〮라 ᄯᅮ드〮려 디허〮 처〮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ᅩᆫ ᄃᆡ〮 ᄇᆞᄅᆞ라〮 시혹〮 기〯브로〮 브툐〮ᄃᆡ 됴〯ᄒᆞᆯ ᄀᆞ자ᇰ ᄒᆞ라〮 ==吐血下血第十四<sub>齒閒出血九竅出血附</sub>== 經驗良方云其證皆因內損或酒色勞損或心肺脉破血氣妄行血如湧泉口鼻俱出須臾不救 側栢葉{{*|蒸乾}}人參{{*|焙乾各一兩}}右二味細末每服二錢入飛羅麪二錢新汲井花水調如稀糊啜服血如湧泉不過二服卽止{{*|}} 그 證지ᇰ〮이〮 다〯 안〮히 損손〯호〮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 酒쥬ᇢ〯色ᄉᆡᆨ〮애〮잇버〮 損손〯커나〮 시혹心심肺폥〮脉ᄆᆡᆨ〮 이〮 ᄒᆞ〮야디〮여 血ᄒᆑᇙ〮氣킝 간대〮로〮 行ᅘᆡᇰᄒᆞ〮야〮 피〮 믈〮ᄉᆡᆷ〯ᄃᆞᆺ〮 ᄒᆞ〮야 입〮과〮 고〮콰애〮 다〯 나〮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側즉栢ᄇᆡᆨ〮 니〮플〮ᄠᅧ〮 ᄆᆞᆯ외〮오〮 人ᅀᅵᆫ參ᄉᆞᆷᄋᆞᆯ〮 焙ᄈᆡᆼ〮乾간호〮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ᄒᆞ〮야〮 飛빙羅랑麪면〮 두〯 돈〯 드〮려 ᄀᆞᆺ 기룬〮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로ᄃᆡ〮 누근〮 플〮ᄀᆞ〮티 ᄒᆞ〮야〮 머그〮라〮 피〮 믈〮 솟ᄃᆞᆺ〮 하〮야도〮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즉〮재 긋ᄂᆞ니〮라〮 如無前藥用荊芥一握燒過盖於地上要出火毒細硏如粉以陳米飮調下三錢許與服不過二服效{{*|}}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荊혀ᇰ〮芥갱〯 ᄒᆞᆫ 우후〮믈 ᄉᆞ〮라 ᄯᅡ해〮 두퍼〮火황〯毒독〮 내〯오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무근〮 ᄡᆞᆯ 글흔〮 므〮레 프〮러 세〮 돈〯 남ᄌᆞ기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됻〯ᄂᆞ〮니라〮 又無荊芥用釜底墨刮下細硏如粉每服三錢濃米飮調下連進二三服鼻衄一字吹入鼻中立效{{*|}} ᄯᅩ〮 荊혀ᇰ芥갱〮 업〯거든〮 가마〮 미틧〮 검듸여ᇰ을〮 ᄀᆞᆯ〮가〮 ᄀᆞ〮ᄂᆞ리〮 紛분〮ᄀᆞ〮티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두터이〮 글힌 ᄡᆞᆳ〮므〮레 프〮러 닛우〮 두〯ᅀᅥ 服뽁〮을〮 머기〮라〯 고해피〮 흐르거든〮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블〯면〮 즉〮재 됴〯ᄒᆞ〮리라〮 又方人有九竅四肢指歧閒皆出血此暴驚所致勿令患人知以井花水猛噀其面{{*|}} ᄯᅩ 사〯ᄅᆞ미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 가락 ᄉᆞᅀᅵ〮예 다〯 피나〮ᄆᆞᆫ 이ᄂᆞᆫ 과ᄀᆞᆯ이 놀〮란 다시〮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ᆯ〮 알외〮디〮 말〯오〮 井져ᇰ〮花황水ᄉᆔᆼ〯로〮 그 ᄂᆞᄎᆡ〮 ᄆᆡ이〮 ᄲᅮ모라 又方鼻口中出血不止用赤馬糞燒灰細末溫酒調下一錢{{*|}} ᄯᅩ〮 고〮콰 이베〮 피〮나고〮 긋디 아니〮커든〮 블근〮 ᄆᆞᆯᄯᅩᆼᄋᆞᆯ〮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ᄒᆞᆫ 돈〯을〮 머그〮라〮 經驗秘方鼻衄方用龍骨爲末以筆管吹半錢鼻中九竅出血皆可用又隨衄左右以新水洗足又以左撚紙索子繫手四肢呪曰血神住立止又張弓絃向上令病人仰臥枕絃放四肢如常臥{{*|}} 고햇〮피〮 고티ᄂᆞᆫ 法법〮에龍료ᇰ骨고ᇙ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붇〮ᄌᆞᆯ오〮로 半반〮 돈〯ᄋᆞᆯ 곳〮굼긔〮 불〯라 아홉〯 굼긔〮 피〮나〮거든〮 다〯 어루 ᄡᅳ〮리라 ᄯᅩ〮 피〮의〮 왼〯녁 올〮ᄒᆞᆫ녀〮글〮 조처〮 새〮 믈〮로 발 싯고〮 ᄯᅩ 외오〮 ᄭᅩᆫ〮 죠ᄒᆡ〮 노ᄒᆞ〮로〮 소ᇇ〮 네〯 가라ᄀᆞᆯ〮 ᄆᆡ오〮 呪쥬ᇢ〯ᄒᆞ〮야〮 닐오〮ᄃᆡ 血ᄒᆑᇙ〮神씬은〮 그치〮라〮 ᄒᆞ면〮 즉〮재 긋ᄂᆞ니〮라 ᄯᅩ〮 홠시우〮를〮지허〮 우흘〮 向햐ᇰ〯ᄒᆞ〮야 노코〮 病뼈ᇰ〮ᄒᆞᆫ 사〯ᄅᆞ미〮 졋〮바〮디〮여 누워〮 홠시우〮를〮 볘〯오 四ᄉᆞᆼ肢징ᄅᆞᆯ 펴〮 샹녜〮 누움〮 ᄀᆞᆮ〮게〮 ᄒᆞ라〮 又灸項後髮際兩筋閒宛宛中{{*|}} ᄯᅩ〮 목 뒷〮髮바ᇙ〮際졩 ㅅ 두〯 히ᇝ〮 ᄉᆞᅀᅵᆺ〮 우믁ᄒᆞᆫ ᄃᆡᆯ〮 ᄯᅳ〮라〮 澹寮方茜根散治鼻衄終日不止心神煩悶 茜根 黃芩 側栢葉 阿膠{{*|蚌粉炒}}生地黃{{*|各一兩}}甘草{{*|炙半兩}}右㕮咀每服四錢水一盞半姜三片煎至八分去滓溫服不拘時{{*|}} 茜쳔〮根ᄀᆞᆫ散산은〮 고해〮피져므〮ᄃᆞ록〮 긋디〮 아니〮ᄒᆞ〮야 ᄆᆞᅀᆞ미〮 닶〮가오〮닐〮 고티ᄂᆞ니〮 茜쳔〮根ᄀᆞᆫ 과〮黃ᅘᅪᇰ芩끔과〮 側즉〮栢ᄇᆡᆨ〮 닙〮과〮 阿ᅙᅡᆼ膠교ᇢᄅᆞᆯᄉᆞᄒᆡ에〮 봇고〮니〮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우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네〮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잔〮 半반〮과〮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ᄋ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時씽節져ᇙ을〮 븓들이〮디 말〯라〮 衛生簡易方九竅出血小薊一握搗汁酒半盞和頓服如無靑者以乾薊末冷水調三錢匕服{{*|}} 아홉〮 굼긔〮 피〮나〮거든〮 小쇼ᇢ〯薊곙〮 ᄒᆞᆫ 우후〮믈 디허 汁집〮 내〯야〮 술 半반〮 잔애〮 프〮러 다〯 머그라 ᄒᆞ〮다가〮 프르〮니 업거든〮 ᄆᆞᄅᆞᆫ 薊곙〮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ᄎᆞᆫ므〮레 세〯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暴下血用蒜五六枚去皮入豆豉硏爲膏如桐子大米飮下五六十丸無不愈者{{*|}} ᄯᅩ〮 과〮ᄀᆞᆯ이〮 下ᅘᅡᆼ〯血혀ᇙ〮 ᄒᆞ릴〮 고툐〮ᄃᆡ 마ᄂᆞᆯ〮 대〯엿 나〯ᄎᆞᆯ〮 거플 밧기〮고〮 젼구〮글〮 드〮러〮 ᄀᆞ〮라 골 ᄆᆡᇰ〮ᄀᆞ〮라〮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ᄡᆞᆯ〮 글힌 므〮레 쉰〮 여ᄉᆔᆫ〯 丸ᅘᅪᆫ을〮 머그〮면〮 됴〯티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又方用赤小豆一升搗碎水三升絞汁飮之{{*|}} ᄯᅩ〮赤쳑〮小쇼ᇢ〮豆또ᇢ〮 ᄒᆞᆫ 되〮ᄅᆞᆯ〮 디허〮 ᄇᆞᆺ아〮 믈〮 서〯 되〮예〮 프〮러〮 즈〮블ᄲᅡ〮 머그〮라〮 壽域神方治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 小쇼ᇢ〯便뼌에 下ᅘᅡᆼ〮血혀ᇙ〮이〮 긋디 아니〮커든〮酸솬漿쟈ᇰ草초ᇢ〯 ᄅᆞᆯ〮 드〮러〮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ᄲᅡ〮 머그〮라〮 酸솬漿쟈ᇰ은〮 ᄭᅪ리〮라〮 朱氏集驗方一金散治鼻衄出血過多昏冒欲死諸藥不效大蒜硏左鼻貼左脚右鼻貼右脚心兩鼻貼兩脚心{{*|}} 一ᅙᅵᇙ〮金금散산〮 은〮 고해〮피〮 나〯미 너무 하〮 어〮즐ᄒᆞ〮야〮 주거〮 가〮ᄂᆞ니〮 여러〮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큰〮 마ᄂᆞ〮ᄅᆞᆯ〮 ᄀᆞ〮라 왼〯녁 고〮히어든〮 왼〮녁 밠〮바다ᇰ애〮 브티〮고〮 올〮ᄒᆞᆫ녁 고〮히어든〮 올〮ᄒᆞᆫ녁 밠〮바다〮ᅌᅢ 브티〮고〮 두〯 고〮히어든〮 두〯 밠〮바다〮ᅌᅢ 브티〮라 又方齒縫出血不止他藥不能治之者塩主之{{*|}} ᄯᅩ〮닛〮ᄢᅵ〮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다ᄅᆞᆫ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닌 소고미〮 主즁〯ᄒᆞ니〮라 聖惠方治九竅四肢指歧閒出血方 生地黃{{*|一兩細切}}蒲黃{{*|半兩}}靑竹茹半兩 右以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每於食後溫服{{*|}}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가락 ᄉᆞ〮ᅀᅵ〮예 피〮나〮ᄂ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ᄒᆞᆫ 兩!라ᇰ〮!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ᆯ〮오〮 蒲뽕黃ᅘᅪᇰ 半반〮 兩랴ᇰ〯과〮 프른〮 댓거프를〮 갈〮로 ᄀᆞᆯ가〮 半반〮 兩랴ᇰ〯ᄋᆞᆯ〮 믈〮 ᄒᆞᆫ 큰〮 잔〮ᄋᆞ로〮 글혀〯 여슷〮 分분에〮 니르〮거든〮 즛의 앗〯고〮 食씩〮後ᅘᅮᇢ〯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吐血及鼻衄不止烏賊魚骨搗細羅爲散不計時以淸粥飮調下二錢{{*|}} ᄯᅩ〮吐통〯血ᄒᆑᇙ〮와〮 고해〮피〮 긋디〮 아니〮커든〮 烏ᅙᅩᆼ賊쯕〮魚!ᅌᅵᆼ!ᅌᅥᆼ! ᄲᅧ를〮 디허〮 ᄀᆞ〮ᄂᆞ리〮 처〮 時씽刻큭〮 혜〯디〮 말〯오 粥쥭〯 므〮레 두〯 돈〯곰〮 프〮러 머그〮라〮 又方鼻衄經日夜不止用乾姜削如蓮子大塞鼻中卽止{{*|}} ᄯᅩ〮 고해〮 피〮 밤〮나〮ᄌᆞᆯ 디〯내〮요ᄃᆡ〮 긋디〮 아니〮커든〮 乾간姜가ᇰᄋᆞᆯ〮 蓮련子ᄌᆞᆼ〯 만〮 케〮 갓가〮 곳〮굼긔〮 마ᄀᆞ〮면〮 곧〮 긋ᄂᆞ니〮라〮 又方濃硏好墨點鼻中立止{{*|}} ᄯᅩ〮 됴〯ᄒᆞᆫ墨믁〮 을〮 두터이〯 ᄀᆞ〮라 곳〮굼긔〮 디그〮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牙齒縫忽然出血 當歸散 當歸 桂心{{*|各半兩}}白凡{{*|一兩燒令汁盡}}甘草{{*|半兩}}右件藥擣麤羅分爲三度用每度以漿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熱含冷吐{{*|}} ᄯᅩ〮 닛〮ᄢᅵ〮메 忽호ᇙ〮然ᅀᅧᆫ히〯 피〮나〮거든〮 當다ᇰ歸귕와〮 桂ᄀᆒᆼ〮心심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을〮 ᄉᆞ〮라 汁집〮 업〯게 ᄒᆞ고〮 甘감草초ᇢ〯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디허〮 麤총히 처〮 세〮 버네〮 ᄂᆞᆫ화 ᄡᅮ〮ᄃᆡ ᄒᆞᆫ 버네〮 漿쟈ᇰ水ᄉᆔᆼ〮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더우〮닐〮 머구〮머 ᄎᆞ거든비〯와ᄐᆞ〮라〮 又方齒齗血出不止乾地龍末一錢白凡灰一錢射香末{{*|半錢}}右同硏令勻濕布上塗落貼於患處{{*|}} ᄯᅩ〮 닛믜유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ᄆᆞᄅᆞᆫ地딩〮龍료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돈〯과 白ᄈᆡᆨ〮礬뻔ㅅ ᄌᆡ ᄒᆞᆫ 돈〯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 ᄒᆞᆫᄃᆡ〮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저즌〮 뵈〮 우희〮 藥약〮 ᄇᆞᆯ라〮 피〮나〮ᄂᆞᆫ ᄃᆡ〮 브티〮라〮 又方無故口齒閒血出不止以淡竹葉濃煎湯熱含冷吐{{*|}} ᄯᅩ〮 젼ᄎᆞ〮 업〯시 입〮과〮 닛ᄉᆞᅀᅵ〮예 피〮나〮 긋디〮 아!디〮!니!커든〮 淡땀〯竹듁〮 니〮플〮 두텁〯게〮 글혀〮 더운〮 므〮를 머구〮머 ᄎᆞ〮거든〮 비〯와ᄐᆞ〮라〮 直指方治齒出血 鬱金 白芷 細辛{{*|各等分}}右爲末擦牙仍以竹葉竹皮濃煎入塩少許含嚥或炒塩傅{{*|}} 니〮예〮 피〮나〮ᄂᆞ닐〮 고툐〮ᄃᆡ 鬱ᅙᅮᇙ〮金금과〮 白ᄈᆡᆨ〮芷징〯와〮 細솅〮辛신ᄋ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니〮예〮ᄡᅮᄭᅩ〮 댓〮닙〮과〮 댓〮가ᄎᆞᆯ〮 두터이〮 글혀 소곰 져〯기 녀허〮 머구〮머 ᄉᆞᆷᄭᅵ〮며 !시!셰!혹〮 소고ᄆᆞᆯ〮 봇가〮 브티〮라〮 千金方齒閒出血溫童子小便半升煮取三合含之其血卽止{{*|}} 닛〮ᄉᆞᅀᅵ〮예 피〮나〮거든〮 아ᄒᆡ〮 小쑈ᇢ〯便뼌 半반〮 되〮를〮 글혀〮 서〯 호블〮 取츙〯ᄒᆞ〮야〮 머구므면〮 그 피〮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齒出血不止刮生竹皮二兩苦酒浸之令其人解衣坐使人含噀其背上三過仍取竹茹濃煮汁勿與塩適寒溫含漱之竟日爲度{{*|}} ᄯᅩ〮 니예 피〮나〮 긋!다〮!디〮! 아니〮커든〮 ᄂᆞᆯ 댓〮거츨〮 ᄀᆞᆯ〮가 두〯 兩랴ᇰ〯ᄋᆞᆯ〮 醋초ᇢ〮애〮 ᄃᆞᆷ〮고〮 그 사〯ᄅᆞ〮ᄆᆞ로〮 옷〮 바사〮 아ᇇ게 ᄒᆞ고〮 !타!다!ᄅᆞᆫ 사〯ᄅᆞ미〮 머구〮머 그 드ᇰ의〮 세〯 버늘〮 ᄲᅮᆷ〮고〮 댓〮거프를〮 取츙〯ᄒᆞ〮야〮 두터이〮 즈〮블 글혀〮 소곰 주디〮 말〯오〮 ᄎᆞ〮며 ᄃᆞᆺ호〮미맛〮갑게〮 ᄒᆞ〮야〮 머구〮!어!머! 야ᇰ〯지호〮ᄃᆡ 져므〮ᄃᆞ록〮 ᄒᆞ라〮 又方治酒醉牙齒涌血出 當歸{{*|二兩}}礬石{{*|六銖}}桂心 細辛 甘草{{*|各一兩}}右五味㕮咀以漿水五升煮取三升含之日五六夜三{{*|}} ᄯᅩ〮 술 醉ᄌᆔᆼ〮ᄒᆞ〮야〮 니〮예 피〮 솟〮ᄂᆞ닐〮 고툐〮ᄃᆡ 當다ᇰ歸귕 두〯 兩랴ᇰ〯!괴〮!과〮! 白ᄈᆡᆨ〮礬뻔 여슷〮 銖쓩와〮 桂ᄀᆒᆼ〮心심과 細솅〮辛신〮과〮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漿쟈ᇰ水ᄉᆔᆼ〯 닷 되〮예〮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머구〮무ᄃᆡ〮 나ᄌᆡ〮 !데〯!대〯!엿〮 번〮 바ᄆᆡ〮 세〯 번 ᄒᆞ라〮 又方燒釘令赤注孔血中止{{*|}} ᄯᅩ〮 모〮ᄃᆞᆯ ᄉᆞ〮라 븕게〮 ᄒᆞ〮야〮 핏 굼긔〮 고ᄌᆞ〮!연〮!면〮! 긋ᄂᆞ니〮라〮 又方舌上黑有數孔大如簪出血如湧泉 戎塩 黃芩{{*|一作葵子}}黃蘗 大黃{{*|各五兩}}人參 桂心 甘草{{*|各二兩}}右爲末蜜丸梧子大米飮服十丸日三服亦燒鐵烙之{{*|}} ᄯᅩ〮 혀〮 우히〮 검〯고〮 두〯ᅀᅥ 굼기〮 빈혓 구무만〮 코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거든〮 戎ᅀᅲᇰ塩염과 黃ᅘᅪᇰ芩끔 과〮 ᄒᆞ나ᄒᆞᆫ〮 葵ᄁᆔᆼ子ᄌᆞᆼ〯ㅣ라 ᄒᆞ다〮 黃ᅘᅪᇰ蘗ᄇᆡᆨ〮과〮 大땡〮黃ᅘᅪᇰ 各각〮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參ᄉᆞᆷ과〮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 各각〮 두〯 兩랴ᇰ〯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 丸ᅘᅪᆫ곰〮 ᄒᆞᄅᆞ 세〯 번 머그〮라〮 ᄯᅩ〮 鐵텨ᇙ〮을〮 ᄉᆞ〮!리!라! 지지〮라〮 得效方文蛤散治熱壅舌上出血如泉 五倍子{{*|洗}}白膠香 牡蠣粉{{*|各等分}}右爲末每以少許 摻患處或燒鐵篦熟烙孔上{{*|}} 文문蛤갑〯散산〮ᄋᆞᆫ〮 上쌰ᇰ〯熱ᅀᅧᇙ〮ᄒᆞ〮야〮 혀〮에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ᄒᆞ닐〮 고툐〮ᄃᆡ〮五ᅌᅩᆼ〯倍ᄈᆡᆼ子ᄌᆞᆼ〯ᄅᆞᆯ〮 싯고〮 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과〮 牡무ᇢ〯蠣롕〯粉분을〮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피〮나〮ᄂᆞᆫᄃᆡ〮 ᄇᆞᄅᆞ고〮 시혹〮 쇠〮빈혀를〮 ᄉᆞ〮라 굼긔〮 니기〮 지지〮라〮 又方舌無故出血炒槐花爲末摻之而愈{{*|}} ᄯᅩ〮 혜 전ᄎᆞ 업〯시 피〮나〮거든〮 槐ᅘᅬᆼ花황ᄅᆞᆯ〮 보ᄭᅡ〮 細솅〮末마ᇙ〮ᄒᆞ〮야〮 ᄇᆞᄅᆞ면〮 됻〯ᄂᆞ〮니라〮 ==大小便不通第十五== 聖惠方治大小便關格不通腹脹喘急方 膩粉{{*|一錢}}生麻油{{*|一合}}右相和空腹服之{{*|}} 大땡〮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몯〯ᄒᆞ〮야〮 ᄇᆡ〮 탸ᇰ〯만〮ᄒᆞ고〮 수〯미 ᄌᆞᄌ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膩닝〮粉분〮 ᄒᆞᆫ 돈〯과〮生ᄉᆡᇰ麻망油유ᇢ ᄒᆞᆫ 홉과〮ᄅᆞᆯ〮 섯거〮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蔓菁子油一合空腹服之卽通通後汗出勿怪{{*|}} ᄯᅩ〮 댓무ᅀᅮᆺ ᄡᅵᆺ〮 기름〯 ᄒᆞᆫ 호ᄇᆞᆯ〮 空코ᇰ心심에〮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 通토ᇰᄒᆞᆫ 後ᅘᅮᇢ〯에〮 ᄯᆞᆷ〮나〮거든〮 疑ᅌᅴᆼ心심 말〯라〮 又方治小便難腹滿悶不急療之殺人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裹分作二苞更互熨臍下小便立出{{*|}} ᄯᅩ〮 小쇼ᇢ〯便뼌이〮 어려〮워 ᄇᆡ〮 탸ᇰ〯만〮ᄒᆞ고〮 답답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파〮 서〯 斤근과〮 소곰 ᄒᆞᆫ 斤근을〮 섯거〮 므르 디허〮 보ᄭᅡ〮 덥〯게〮 ᄒᆞ〮야〮 기〯브로〮 ᄢᅳ료〮ᄃᆡ〮 두〮 ᄢᅳ례〮예〮 ᄂᆞᆫ화〮 서르 臍쨍〮下ᅘ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면〮 小쇼ᇢ〯便뼌이〮 즉〮재 나〮ᄂᆞ〮니라〮 聖濟緫錄茯苓丸治大小便不通 赤茯苓{{*|去黑皮}}芍藥 當歸{{*|切焙}}枳殼{{*|去穰麩炒}}白朮 人參{{*|各五兩}}大麻仁 大黃{{*|剉各三兩}}右爲末煉蜜和丸梧桐子大每服十五丸至二十丸空心煎茅根湯下{{*|}} 茯뽁〮苓려ᇰ丸ᅘᅪᆫ은〮 大땡〮小쇼ᇢ〯便뼌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티〮ᄂᆞ〮니〮 赤쳑茯뽁〮苓려ᇰ을〮 거믄〮 것 밧기〮고〮 芍작〮藥약〮과〮 當다ᇰ歸귕ᄅᆞᆯ〮 사ᄒᆞ〮라〮 焙ᄈᆡᆼ〮乾간ᄒᆞ고〮 枳징〮殼칵〮을〮 솝〯 앗〯!ᄀᆞ〮!고〮! 기울〮와〮 봇고〮 白ᄈᆡᆨ朮뜌ᇙ〮와〮 人ᅀᅵᆫ參ᄉᆞᆷ 各각〮 다ᄉᆞᆺ〮 兩랴ᇰ〯과〮大땡〮麻망仁ᅀᅵᆫ 과〮 大땡〮黃ᅘᅪᇰᄋᆞᆯ〮 사ᄒᆞ〮라〮 各각〮 석〯 兩랴ᇰ〯과〮를〮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다ᄉᆞᆺ〮 丸ᅘᅪᆫ으〮로〮 스〮믈〮 丸ᅘᅪᆫ지〯히 空코ᇰ心심애〮 茅모ᇢ根ᄀᆞᆫ湯타ᇰ〮을〮 글혀〮 ᄂᆞ리〮우라〮 經驗良方木通散治小便不通小腹痛不可忍 木通 滑石{{*|各半兩}}黑牽牛{{*|頭末半兩}}右㕮咀每服一錢水半盞燈心十莖葱白一箇同煎三分食前溫服{{*|}} 木목通토ᇰ散산 은 小쇼ᇢ便뼌 不부ᇙ通토ᇰᄒᆞ야 ᄇᆡᆺ기슭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릴 고티ᄂᆞ니木목通토ᇰ 과滑ᅘᅪᇙ石쎡 각 半반 兩랴ᇰ과黑흑牽켠牛ᅌᅮᇢ 머릿 ᄀᆞᄅᆞ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돈곰 ᄒᆞ야 믈 半반 잔과燈드ᇰ 心심 열 줄기와 파 ᄒᆞᆫ 낫과 ᄒᆞᆫᄃᆡ 三삼分분을 글혀 食씩前쪈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肘後方治小便不利莖中痛欲死牛膝幷葉不以多小酒煮飮之立愈{{*|}} 小쇼ᇢ便뼌이 快쾡티 몯ᄒᆞ야陰ᅙᅳᆷ莖ᅘᆡᇰ ㅅ 소비 알파 죽고져 ᄒᆞᄂᆞ닐 고툐ᄃᆡ牛ᅌᅮᇢ膝시ᇙ 을 닙 조쳐 수레 글혀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大便秘澁不通 大黃{{*|四兩}}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右切以水六升煮取二升分再服{{*|}} 大땡便뼌이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大땡黃ᅘᅪᇰ 넉 兩랴ᇰ과桃또ᇢ仁ᅀᅵᆫ 셜흔나ᄎᆞᆯ 것과 부리와 어우러ᇰ ᄌᆞᅀᆞᄅᆞᆯ 앗고 ᄀᆞ라 믈 엿 되예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ᄂᆞᆫ화 두 버네 머그라 又方胡鷰屎蜜和納大孔中卽通{{*|}} ᄯᅩ 며ᇰ마긔 ᄯᅩᇰᄋᆞᆯ ᄢᅮ레 ᄆᆞ라 밋굼긔 녀흐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라 簡要濟衆方治大便澁不通牽牛子半生半熟擣爲散每服二錢煎薑湯調下如未通再服及以熱茶投之量虛實不計時加减服之{{*|}} 大땡便뼌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牽켠牛ᅌᅮᇢ子ᄌᆞᆼᄅᆞᆯ 半반만 ᄂᆞ리오 半반만 니그닐 디허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生ᄉᆡᇰ薑가ᇰ湯타ᇰ애 프러 ᄂᆞ리오ᄃᆡ 通토ᇰ티 몯거든 다시 먹고 더운 차로 머구ᄃᆡ 虛헝實씨ᇙ을 혜오 時씽刻큭 혜디 마라 더으며ᇰ더러 머그라 ==溺水第十六== 經驗良方凡有人溺水者救上岸卽將牛一頭却令溺水之人將肚橫覆相抵在牛背上兩邊用人扶策徐徐牽牛而行以出腹內之水如醒卽以蘇合香元之類或老生薑擦其齒若無牛以活人於長板櫈上仰臥却令溺水人如前法將肚相抵活人身聽其水出卽活{{*|}} 믈읫 사ᄅᆞ미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ᄀᆞᅀᅢ올이고 쇼 ᄒᆞ나ᄒᆞᆯ 가져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ᄇᆡᄅᆞᆯ ᄉᆈ 드ᇰ 우희 ᄀᆞᄅᆞ 업데우고 두 녁 ᄀᆞᅀᅢ 사ᄅᆞ미 자바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쇼ᄅᆞᆯ 잇거ᄃᆞᆮ녀 ᄇᆡ 안햇 므를 내오 ᄒᆞ다가ᄭᆡ어든 곧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類ᄅᆔᆼ어나 시혹 늘근 生ᄉᆡᇰ薑가ᇰ이나 그 니예 ᄡᅮ츠라 ᄒᆞ다가 쇼 업거든 산 사ᄅᆞᄆᆞ로長땨ᇰ床싸ᇰ 우희 졋바뉘이고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알ᄑᆡᆺ 法법ᄀᆞ티 ᄇᆡᄅᆞᆯ 산 사ᄅᆞᄆᆡ 모매 서르 다혀 므리 나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聖惠方凡溺水急解去死人衣灸臍中卽差{{*|}} 믈읫 므레ᄲᅡ디거든 時씽急급히 주근 사ᄅᆞᄆᆡ 옷 밧기고 ᄇᆡᆺ보ᄀ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竈中灰布地令厚五寸以甑側安着灰上令溺人伏於甑上使頭小垂下炒塩二錢內小竹管內吹入下部中卽當吐水去却甑扶下溺人着灰中以灰壅身水恒出鼻口中卽活矣{{*|}} ᄯᅩ 브ᅀᅥ븻 ᄌᆡ로 ᄯᅡ해 ᄭᆞ로ᄃᆡ 두틔 다ᄉᆞᆺ 寸촌이에 코 실을 ᄌᆡ 우희 겨트로 노코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시르 우희 업데우고 머리ᄅᆞᆯ 져기 아래로 ᄲᅡ디게 ᄒᆞ고 소고ᄆᆞᆯ 봇가 두 돈ᄋᆞᆯ 져근 대로ᇰ애 녀허 밋굼긔 부러 드리면 반ᄃᆞ기 므를 吐통ᄒᆞ리니 실을 앗고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아나 ᄂᆞ리와 ᄌᆡ예 노코 ᄌᆡ로 모ᄆᆞᆯ 두프면 므리 고콰 입과로 나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掘地作坑熬數斛熱灰內坑中下溺人灰覆濕徹卽易之灰勿大熱灰冷更易半日卽活也{{*|}} ᄯᅩ ᄯᅡ 파 굳 ᄆᆡᇰᄀᆞᆯ오 두ᅀᅥ 셤 더운 ᄌᆡᄅᆞᆯ 봇가 구데 녀코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녀코 ᄌᆡ로 두퍼 ᄉᆞᄆᆞᆺ젓거든 곧 ᄀᆞᆯ라 ᄌᆡᄅᆞᆯ 너무 봇디 말오 ᄌᆡ ᄎᆞ거든 ᄀᆞ라 半반 날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但埋溺人暖灰中頭足俱沒唯開七孔水出卽活{{*|}} ᄯᅩ 오직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다운 ᄌᆡ예 무두ᄃᆡ 머리와 발왜 다 들에 ᄒᆞ고 오직 닐굽 굼글 여러 므리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緜裹皂莢末內下部中湏臾水出{{*|}} ᄯᅩ 소오매 皂쪼ᇢ莢겹ㅅ ᄀᆞᆯᄋ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이ᅀᅳᆨ고 므리 나ᄂᆞ니라 千金方半夏末吹入鼻{{*|}}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부러 고해 녀ᄒᆞ라 又方裹石灰納下部中水出盡卽活{{*|}}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므리 다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熬沙覆死人上下有沙但出鼻口耳沙冷濕卽易{{*|}} ᄯᅩ 몰애ᄅᆞᆯ 봇가 주근 사ᄅᆞᄆᆞᆯ 두푸ᄃᆡ 아라우희 몰애 잇고 오직 고콰 입과 귀와ᄅᆞᆯ 내야 몰애 ᄎᆞ고 젓거든 곧 ᄀᆞᆯ라 管見大全良方救男女墮水中者以常用薦席卷之就平地上袞轉一二百轉則水出自活亦有用陳壁土末覆之死者更以爐中煖灰覆臍上下則元氣廻自活省後當服利水之藥如五苓散異功五積散朮附湯除濕湯不換金正氣散若欲兼服安心神收歛神氣之藥宜服蘇合香元在人斟酌輕重冷熱而投之{{*|}} 男남女녕ㅣ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샤ᇰ녜 ᄡᅳᄂᆞᆫ 돗긔 ᄆᆞ라 平뼈ᇰᄒᆞᆫ ᄯᅡ해 나ᅀᅡ가 一ᅙᅵᇙ二ᅀᅵᆼ百ᄇᆡᆨ 버늘 구으리면 므리 나면 절로 사ᄂᆞ니라 ᄯᅩ 무근 ᄇᆞᄅᆞ맷 ᄒᆞᆰᄀᆞᆯᄋᆞ로 둡ᄂᆞ니라 주그닐 ᄯᅩ 火황爐롱앳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 아라우희 두프면 元ᅌᅯᆫ氣킝 도라와 사ᄂᆞ니라 ᄎᆞ린 後ᅘᅮᇢ에 믈 즈츼ᄂᆞᆫ 藥약이五ᅌᅩᆼ苓려ᇰ散산 과異잉功고ᇰ五ᅌᅩᆼ積젹散산 과朮뜌ᇙ附뿡湯타ᇰ 과 除똉濕십湯타ᇰ과不부ᇙ換ᅘᅪᆫ金금正져ᇰ氣킝散산 ᄋᆞᆯ 머기고 ᄒᆞ다가 ᄆᆞᅀᆞᄆᆞᆯ 便뼌安ᅙᅡᆫ케 ᄒᆞ고 氣킝分분을 모도ᄂᆞᆫ 藥약을 조쳐 머기고져 커든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을 머귤디니 사ᄅᆞ미 輕켜ᇰ重뜌ᇰ과 冷ᄅᆡᇰ熱ᅀᅧᇙ을 斟짐酌쟉ᄒᆞ야 머교매 잇ᄂᆞ니라 壽域神方冬月落水微有氣者用大器炒灰熨心上候暖氣通溫粥稍稍呑之卽活若便持火炙卽死{{*|}} 겨ᅀᅳ레 므레 디여 자ᇝ간 氣킝分분 잇ᄂᆞ닐 큰 그르세 ᄌᆡᄅᆞᆯ 봇ᄭᅡ 가ᄉᆞᄆ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더운 氣킝分분이 通토ᇰ호ᄆᆞᆯ 기드려 ᄃᆞᄉᆞᆫ 粥쥭을 졈졈 머기면 곧 사ᄂᆞ니 ᄒᆞ다가 브를 ᄧᅬ면 즉재 죽ᄂᆞ니라 又方急於人中穴及兩脚大母趾內離甲一韭葉許各灸三五壯卽活{{*|}} ᄯᅩ ᄲᆞᆯ리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와 두 밠 엄지가띿 아ᇇ 밠토ᄇᆞ로셔 ᄒᆞᆫ 부ᄎᆡᆺ닙 너븨만 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세다ᄉᆞᆺ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以屈死人兩脚着生人肩上以溺人背搭走吐水出盡卽活{{*|}}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두 다리ᄅᆞᆯ 구펴 산 사ᄅᆞᄆᆡ 엇게 우희 여ᇇ고 주근 사ᄅᆞᄆᆞᆯ 지여 ᄃᆞᄅᆞ면 므리 다 나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得效方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 酒쥬ᇢ壜땀 ᄒᆞᆫ 나ᄎᆞ로 죠ᄒᆡ젼 ᄒᆞᆫ 주믈 ᄉᆞ라 壜땀 안해 녀코 時씽急급히 壜땀 이브로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ᆡ ᄂᆞ치나 시혹 ᄇᆡᆺ복 우희 두퍼 ᄎᆞ거든 다시 죠ᄒᆡ젼을 ᄉᆞ라 壜땀 안해 녀허 ᄂᆞᄎᆡ 두퍼 므를 아ᅀ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壜땀은 술녇ᄂᆞᆫ 딜어시라 ==自縊第十七== 千金方凡救自縊死者極須按定其心勿截繩手抱起徐徐解之心下尙溫者以氍毹{{*|卽毛席也}}覆口鼻兩人吹其兩耳{{*|}} 믈읫 목 ᄆᆡ야 주그닐 救구ᇢ호ᄃᆡ ᄀᆞ자ᇰ 모로매 그 ᄆᆞᅀᆞᄆᆞᆯ 눌러 一ᅙᅵᇙ定뗘ᇰᄒᆞ고 노ᄒᆞᆯ 긋디 말오 소ᄂᆞ로 아나 니르왇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글오ᄃᆡ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니란 담으로 입과 고ᄒᆞᆯ 둡고 두 사ᄅᆞ미 그 두 귀ᄅᆞᆯ 불라 又方强臥以物塞兩耳竹筒納口中使兩人痛吹之塞口傍無令氣得出半日死人卽噫噫卽勿吹也{{*|}} ᄯᅩ 뉘이고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ᆯ 입 안해 녀코 두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불오 입가ᅀᆞᆯ 마가 氣킝分분이 나디 몯게 ᄒᆞ면 半반 날ᄋᆞᆯ 주겟던 사ᄅᆞ미 곧 숨쉬ᄂᆞ니 숨쉬어든 부디 말라 又方擣皂莢細辛屑如豆大吹兩鼻中{{*|}} ᄯᅩ 皂쪼ᇢ莢겹과 細솅辛신ㅅ ᄀᆞᆯᄋᆞᆯ 디허 코ᇰ낫만 ᄒᆞ닐 두 곳굼긔 불라 又方刺雞冠血出滴口中卽活男雌女雄{{*|}} ᄯᅩ ᄃᆞᆯᄀᆡ 벼츨 ᄣᅵᆯ어 피내야 이베 처디면 즉자히 사ᄂᆞ니 남지ᄂᆞᆫ 암ᄐᆞᆯᄀᆞ로 코 겨지븐 수ᄐᆞᆯᄀᆞ로 ᄒᆞ라 又方尿鼻口眼耳中幷捉頭髮一撮如筆管大掣之立活{{*|}} ᄯᅩ 고콰 입과 눈과 귀와에 오좀 누고 머리터럭 ᄒᆞᆫ 져부미 붇 ᄌᆞᄅᆞ만 ᄒᆞ닐 자바ᄃᆞᇰᄀᆡ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雞血塗喉下{{*|}} ᄯᅩ ᄃᆞᆯᄀᆡ 피ᄅᆞᆯ 목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灸四肢大節陷大指本支名曰地袖各七壯{{*|}} ᄯᅩ 네 활기옛 큰 ᄆᆞᄃᆡᆺ 우무근 ᄃᆡ와 엄짓가락 미틧 그믈 일후믈 地띵袖쓔ᇢㅣ라 ᄒᆞᄂᆞ니 各각 닐굽 壯자ᇰ을 ᄯᅳ라 經驗救急方急抱起解下切不可截繩卽以衣物塞兩耳將竹筒於口中吹氣及以衣物緊塞二物爲妙凡縊者從早至晩雖已冷必可救從夜至早稍難救若心上溫一日已上猶可救切不可截斷繩欸欸地抱起其身緩解繩放臥令人踏其肩以手拔其髮常令一人緊以手擦胸脇一人以手摩搦臂足屈伸之若已僵漸强屈之又按其腹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却身苦勞動少與官桂湯及粥淸令喉潤更令兩人以筆管吹其耳中尤妙依此法救無不活者{{*|}} ᄲᆞᆯ리 아나 니르왇고 글오ᄃᆡ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즉자히 오ᄉᆞ로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로 입 안해 氣킝分분을 불오 오ᄉᆞ로 두 거슬 구디 마고미 됴ᄒᆞ니 믈읫 목ᄆᆡ야 주그니 아ᄎᆞᆷ브터 나조ᄒᆡ 니르닌 비록 차도 어루 救구ᇢᄒᆞ려니와 밤브터 아ᄎᆞᄆᆡ 니르닌 救구ᇢ호미 어려우니 ᄒᆞ다가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면 ᄒᆞᄅᆞᆺ 內뇡ᄂᆞᆫ 어루 救구ᇢᄒᆞ리니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그 모ᄆᆞᆯ 아나 니르왇고 노ᄒᆞᆯ 날회야 그르고 뉘이고 사ᄅᆞᄆᆞ로 그 엇게ᄅᆞᆯ ᄇᆞᆲ고 소ᄂᆞ로 머리 터릴 ᄲᅡ혀며 샤ᇰ녜 ᄒᆞᆫ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소ᄂᆞ로 가ᄉᆞᆷ과 녑과ᄅᆞᆯ ᄡᅮᆺ고 ᄒᆞᆫ 사ᄅᆞ미 소ᄂᆞ로 ᄇᆞᆯ콰 바ᄅᆞᆯ ᄡᅮᆺ고 구피락펴락게 ᄒᆞ라 ᄒᆞ다가 세웓거든 졈졈 구피고 ᄯᅩ 그 ᄇᆡᄅᆞᆯ ᄆᆞᆫ죨디니 이ᄀᆞ티 ᄒᆞᆫ 밥 ᄣᅢ만 ᄒᆞ면 곧 氣킝分분을 어더 숨쉬ᄂᆞ니라 모미이처커든 져기管관桂ᄀᆒᆼ湯타ᇰ 과 粥쥭므를 머겨 모기 젓게 ᄒᆞ고 ᄯᅩ 두 사ᄅᆞ미 붇ᄌᆞᆯᄋᆞ로 귓굼글 불에 호미 더 됴ᄒᆞ니 이 法법을 브터 救구ᇢᄒᆞ면 사디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得效方緊用兩手掩其口勿令透氣兩時氣急卽活{{*|}} ᄆᆡ이 두 소ᄂᆞ로 그 이블 마가 氣킝分분이 ᄉᆞᄆᆞᆺ디 아니케 두 時씽刻큭을 ᄒᆞ면 氣킝分분이 急급ᄒᆞ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壽域神方治自縊 就以所縊繩燒三指撮白湯調服之{{*|}}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ᄆᆡ얏던 노ᄒᆞᆯ 세 소ᇇ가락으로 자보니만 ᄉᆞ라 더운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未解下先用膝頭或手厚裹衣物緊塞穀道抱起解下揉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兩耳待其氣回方可放手若泄氣則不可救矣{{*|}} ᄯᅩ 그르디 아니ᄒᆞ야셔 몬져 무루피어나 소니어나 오ᄉᆞ로 두터이 ᄡᅡ 밋굼글 구디 막고 아나 니르와다 그르고 모ᄀᆡᆺ 허므를 주므르며 모ᄀᆞᆯ ᄆᆞᆫ지고 고해 불며 두 귀를 부러 氣킝分분이 도라오ᄆᆞᆯ 기드려ᅀᅡ 소ᄂᆞᆯ 쉬울디니 ᄒᆞ다가 氣킝分분이 ᄉᆡ면 救구ᇢ티 몯ᄒᆞ리라 又方卽於鼻下人中穴針灸遂活{{*|}} ᄯᅩ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針짐ᄒᆞ고 ᄯᅳ면 사ᄂᆞ니라 經驗秘方治自縊死梁上塵如豆兩耳鼻四處各納一粒以筒令四人極齊吹之卽活矣{{*|}}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보 우흿 드트를 코ᇰ만 ᄒᆞ닐 두 귀 두 고 네 고대 各각各각 ᄒᆞᆫ 나ᄎᆞᆯ 녀코 대로ᇰᄋᆞ로 네 사ᄅᆞ미 ᄀᆞ자ᇰ ᄀᆞᄌᆞ기 불에 ᄒᆞ면 즉재 살리라 管見大全良方以藍硏取汁灌之或以雞屎白如棗大以酒半盞和硏灌服及着鼻中尤佳{{*|}} 족ᄋᆞᆯ ᄀᆞ라 즈블 取츙ᄒᆞ야 브ᅀᅳ라 시혹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거시 大땡棗초ᇢ만 ᄒᆞ닐 술 半반 잔애 프러 ᄀᆞ라 브ᅀᅳ며 곳굼긔 녀후미 더 됴ᄒᆞ니라 ==失欠頷車蹉候第十八== 千金方治失欠頰車蹉開張不合方一人以手指牽其頤以漸推之則復入矣推當疾出其指恐誤嚙傷人指也{{*|}}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 버리고 어우디 아니ᄒ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ᄒᆞᆫ 사ᄅᆞ미 소ᇇ가라ᄀᆞ로 그 ᄐᆞᄀᆞᆯ ᄃᆞᇰᄀᆡ야 졈졈 밀면 다시 드ᄂᆞ니 밀오 모로매 그 소ᇇ가라ᄀᆞᆯ ᄲᆞᆯ리 내욜디니 사ᄅᆞᄆᆡ 소ᇇ가라ᄀᆞᆯ 그르믈까 저프니라 又方治失欠頰車蹉方消蠟和水傅之{{*|}} ᄯᅩ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디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미를 노겨 므레 프러 브티라 ==金瘡第十九== 聖惠方金瘡失血其人當苦渴然須忍之常令乾食與肥脂之物以止其渴又不得多飮粥則血溢出殺人也又忌嗔怒及大言笑思想陰陽動作勞力若食醎酸飮食熱羹臛輩皆使瘡痛衝發甚者卽死{{*|}} 金금瘡차ᇰ 애 피 흘리면 그 사ᄅᆞ미 반ᄃᆞ기 ᄀᆞ자ᇰ 목ᄆᆞᆯ라 ᄒᆞᄂᆞ니 그러나 모로매 ᄎᆞ마 샤ᇰ녜 ᄆᆞᄅᆞᆫ 飮ᅙᅳᆷ食씩과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ᄆᆞᆯ로ᄆᆞᆯ 그치고 ᄯᅩ 粥쥭을 해 머기디 마롤디니 피 솟나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ᄯᅩ嗔친心심 과 ᄆᆡ이 말홈과 우ᅀᅮᆷ과 陰ᅙᅳᆷ陽야ᇰ을 ᄉᆞ라ᇰ홈과 뮈우며 힘ᄡᅮ믈 마롤디니 ᄒᆞ다가 ᄧᆞᆫ 것과 싄 것과 더운羹ᄀᆡᇰ 과 고기ᄅᆞᆯ 머그면 다 瘡차ᇰ이 알파 다시 發버ᇙᄒᆞᄂᆞ니 甚씸ᄒᆞ닌 즉재 죽ᄂᆞ니라 治金瘡大散方五月五日平旦使四人出四方各於五里內採一方草木莖葉每種各半把勿令漏脫一事日正午時切碓擣用石灰一豆斗擣令極爛仍先選揀大實桑樹三兩株鑿作孔令可受藥然分藥於孔中實築令堅後以桑樹皮蔽之用麻擣石灰密泥令不泄氣更以桑皮纏之令牢至九月九日午時出取陰乾百日藥成擣之日曝令乾更擣絹羅貯之凡有金瘡傷折出血用藥封裹勿令轉動不過十日瘥不膿不腫不畏風若傷後數日始得用藥須暖水洗令血出卽傅之此藥大驗{{*|}} 金금瘡차ᇰ 고티ᄂᆞᆫ 大땡散산方바ᇰ은 五ᅌᅩᆼ月ᅌᅯᇙ 五ᅌᅩᆼ日ᅀᅵᇙ 平뼈ᇰ明며ᇰ에 네 사ᄅᆞᄆᆞ로 四ᄉᆞᆼ方바ᇰ애 보내야 各각各각 五ᅌᅩᆼ里링 안햇 ᄒᆞᆫ 方바ᇰ草초ᇢ木목 줄기와 닙과ᄅᆞᆯ 가지마다 各각 半반 줌을 ᄏᆡ요ᄃᆡ ᄒᆞ나토 아니ᄒᆞ니 업시 ᄒᆞ야 바ᄅᆞ 나ᄌᆡ 사ᄒᆞ라 디허 石쎡灰횡 ᄒᆞᆫ 마ᄅᆞᆯ 디호ᄃᆡ ᄀᆞ자ᇰ 니기 ᄒᆞ고 몬져 큰 ᄲᅩᇰ나모 두ᅀᅥ흘 ᄀᆞᆯᄒᆡ야 구무 포ᄃᆡ 藥약 들 만ᄒᆞ야 藥약을 굼긔 ᄂᆞᆫ화 녀코 ᄀᆞᄃᆞ기다아 굳게 코 後ᅘᅮᇢ에거츠로 막고 삼 조쳐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구디 ᄇᆞᆯ라 氣킝分분 나디 아니케 코 다시 ᄲᅩᇰᄭᅥ츠로 얼거 굳게 코 九구ᇢ月ᅌᅯᇙ 九구ᇢ日ᅀᅵᇙ 午ᅌᅩᆼ時씽예니르러 내야 一ᅙᅵᇙ百ᄇᆡᆨ 나ᄅᆞᆯ ᄀᆞᄂᆞᆯ해 ᄆᆞᆯ외야 藥약이 일어든 디허 ᄒᆡ에 ᄆᆞᆯ외야 다시 디허 기베 처 ᄀᆞ초라 믈읫 金금瘡차ᇰ 헐어나 것거나 피나거든 藥약ᄋᆞ로 ᄡᆞ고 움즈기디 아니케 ᄒᆞ면 열흐를 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 곪디 아니ᄒᆞ며 븟디 아니ᄒᆞ며 ᄇᆞᄅᆞᄆᆞᆯ 저티 아니ᄒᆞᄂᆞ니 ᄒᆞ다가 傷샤ᇰᄒᆞᆫ 後ᅘᅮᇢ 사나ᄋᆞ래 비르서 藥약을 ᄡᅮᆯ디니 모로매 더운 므레 시서 피나게 ᄒᆞ고 곧 브튤디니 이 藥약이 ᄀᆞ자ᇰ 神씬驗ᅌᅥᆷᄒᆞ니라 又方治金瘡或肌肉斷裂右剝取新桑皮作線縫之又以新桑皮裹之又以桑白汁塗之極驗小瘡但以桑皮裹之便差如斷筋取旋復根擣封之卽續{{*|}} ᄯᅩ 金금瘡차ᇰ 고티며 시혹 ᄉᆞᆯ히 그처디며 ᄧᆡ야디거든 새 거츨 밧겨 실 ᄆᆡᇰᄀᆞ라호고 ᄯᅩ 새거츠로 ᄡᆞ고 ᄯᅩ ᄲᅩᇰ ᄒᆡᆫ 즙으로 ᄇᆞᄅᆞ면 지극 神신驗ᅌᅥᆷᄒᆞ니라 져근 瘡차ᇰ은 오직거츠로 ᄡᆞ면 곧 됻ᄂᆞ니 ᄒᆞ다가 히미 긋거든旋션復복根ᄀᆞᆫ 을 取츙ᄒᆞ야 디허 ᄡᆞ면 곧 닛ᄂᆞ니라 又方治刀傷斧斫等瘡右取黑氈燒爲灰細硏傅傷損處封裹勿動直待生肌爲妙{{*|}} ᄯᅩ 갈해 헐며 도ᄎᆡ예버흔 ᄃᆞᆯ헷 瘡차ᇰ을 고툐ᄃᆡ 거믄 시우글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헌 ᄃᆡ 브티고 ᄢᅳ려 뮈우디 말오 ᄉᆞᆯ 날 ᄀᆞ자ᇰ 기드료미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右取馬蹄燒灰令極細不計時候以煖酒調下二錢{{*|}} ᄯᅩ 金금瘡차ᇰᄋᆞᆯ 고텨 알포ᄆᆞᆯ 긋게 호ᄃᆡ ᄆᆞᆯ구블 ᄉᆞ라 ᄀᆞ자ᇰ ᄀᆞᄂᆞ리 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더운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金瘡但刀斧傷損出血不止宜用此 石榴花{{*|半斤}}石灰{{*|一斤炒}}右件藥擣細羅爲散傅瘡上以帛裹勿令着風水瘡合差{{*|}}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툐ᄃᆡ 오직 갈콰 도최예 헐여 피나 긋디 아니커든 이ᄅᆞᆯ ᄡᅮᆯ디니 石쎡榴류ᇢㅅ곳 半반 斤근과 石쎡灰횡 ᄒᆞᆫ 斤근을 봇가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기브로 ᄢᅳ려 ᄇᆞᄅᆞᆷ과 믈와 맛디 아니케 ᄒᆞ야 瘡차ᇰ이 어울면 됻ᄂᆞ니라 又方取小便服三兩盞卽差{{*|}} ᄯᅩ 小쇼ᇢ便뼌 두ᅀᅥ 잔을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 杏人{{*|去皮擣如泥}}石灰{{*|等分}}右件藥同硏每用以猪脂和傅之日二三度卽差{{*|}} ᄯᅩ 金금瘡창애 피 긋디 아니커든 ᄉᆞᆯ곳 ᄌᆞᅀᆞᄅᆞᆯ 것 밧겨 즌ᄒᆞᆰᄀᆞ티 디코 石쎡灰횡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ᄒᆞᆫᄃᆡ ᄀᆞ라 도ᄐᆡ 기르므로 ᄆᆞ라 브툐ᄃᆡ ᄒᆞᄅᆞ 두ᅀᅥ 번곰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 ᄯᅩ 프른 뵈ᄅᆞᆯ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ᄢᅳ리면 잇사나ᄋᆞᆯ 後ᅘᅮᇢ에 됻ᄂᆞ니라 又方取狼牙草莖葉爛搗傅之{{*|}} ᄯᅩ狼라ᇰ牙앙草초ᇢ ㅅ 줄기와 닙과ᄅᆞᆯ 므르디허 브티라 又方取紫檀末以傅瘡上止痛止血生肌甚効{{*|}} ᄯᅩ 紫ᄌᆞᆼ檀딴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긋고 피 긋고 ᄉᆞᆯ 나ᄂᆞ니 甚씸히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牡礪散 牡礪{{*|半兩}}石膏{{*|一分}}右件藥擣羅更細硏用煉了猪膏調成膏以封瘡上痛卽止{{*|}}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텨 알품 긋게 ᄒᆞᄂᆞᆫ 牡무ᇢ礪롕散산은 牡무ᇢ礪롕 半반 兩랴ᇰ과 石쎡膏고ᇢ ᄒᆞᆫ 分분을 디허 츠고 다시ᄀᆞᄂᆞ리 ᄀᆞ라 煉련혼 도ᄐᆡ 곱ᄋᆞᆯ 노겨 골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取雄黃末傅瘡上當用有汁出卽差{{*|}}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반ᄃᆞ기 汁집이 나리니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疼痛以龍骨細硏傅瘡上{{*|}}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 긋디 아니코 알ᄑᆞ거든 龍료ᇰ骨고ᇙ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라 又方用桑根半斤剉以水一豆斗煎取五升不計時候煖服一盞服盡卽効{{*|}} ᄯᅩ ᄲᅩᇰ나못 불휘 半반 斤근을 사ᄒᆞ라 믈 ᄒᆞᆫ 말로 글혀 닷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데여 ᄒᆞᆫ잔을 머구ᄃᆡ 다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石灰擣爲末厚傅瘡上用緜子裹之若瘡口深不合者內少許末令瘡漸漸合也{{*|}}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瘡차ᇰ의 두터이 ᄇᆞᄅᆞ고 소오ᄆᆞ로 ᄡᅩᄃᆡ ᄒᆞ다가 瘡차ᇰ이 기퍼 어우디 아니커든 져기 ᄀᆞᆯᄋᆞᆯ 녀허 瘡차ᇰ이 졈졈 어울에 ᄒᆞ라 又方用乾塩梅燒作灰細硏傅瘡上卽差{{*|}} ᄯᅩ 소고매 ᄆᆞᆯ외욘 梅ᄆᆡᆼ實씨ᇙ을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金瘡血出不止取車前葉爛擣傅之血卽止連根取用亦効{{*|}}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나 긋디 아니커든 車창前젼 니플 므르디허 브티면 피 즉재 긋ᄂᆞ니 불휘 조쳐 ᄡᅮ미 ᄯᅩ 됴ᄒᆞ니라 治金瘡內漏瘀血在腹中脹滿宜服䖟蟲散 䖟蟲{{*|三十枚去趐足微炒}}桃仁{{*|一兩湯漫去皮尖雙仁麩炒微黃}}桂心{{*|一兩半去麤皮}}川大黃{{*|三兩剉碎微炒}}水蛭{{*|三十枚炒令微黃}}右件藥擣細羅爲散每服二錢用童子小便一中盞煎至五分溫溫和滓服日五服夜三服如卒無小便用酒水代之亦得{{*|}} 金금瘡차ᇰᄋᆡ 피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얼읜피 ᄇᆡ 안해 이셔 탸ᇰ만커든 䖟ᄆᆡᇰ蟲뜌ᇰ散산을 머귤디니 䖟ᄆᆡᇰ蟲뜌ᇰ 셜흔 나ᄎᆞᆯ ᄂᆞ래와 발와 앗고 자ᇝ간 봇고 桃또ᇢ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을 더운 므레 ᄃᆞ마 것과 부리와어우러ᅌᅵᄅᆞᆯ 앗고 기울와 섯거 봇가 져기 노ᄅᆞ게 코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 半반을 麤총ᄒᆞᆫ 거츨 밧기고川ᄌᆑᆫ大땡黃ᅘᅪᇰ 석 兩랴ᇰ을 사ᄒᆞ라 자ᇝ간 봇고 거머리 셜흔 나ᄎᆞᆯ 봇가 자ᇝ간 노ᄅᆞ게 ᄒᆞ고 이 藥약ᄃᆞᆯᄒᆞᆯ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에 두 돈곰 아ᄒᆡ 오좀 ᄒᆞᆫ 中듀ᇰ잔ᄋᆞ로 글혀 다ᄉᆞᆺ 分분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滓ᄌᆡᆼ 조쳐 머구ᄃᆡ 나ᄌᆡ 다ᄉᆞᆺ 번 먹고 바ᄆᆡ 세 번 머그라 ᄒᆞ다가 밧바 小쇼ᇢ便뼌 업거든 수리나 므리나 ᄒᆞ야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金瘡內漏血入腹中 大麻仁一升葱白{{*|二七莖}}右相和搗令熟以水三大盞煮取一盞去滓分爲三服若血出不盡腹中有膿血更令服當下膿血効{{*|}} ᄯᅩ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들어든 열ᄡᅵ ᄒᆞᆫ 되와 파 두닐굽 줄기ᄅᆞᆯ 섯거 디허 닉게 ᄒᆞ야 믈 세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츙ᄒᆞ야 즈ᅀᅴ 앗고 ᄂᆞᆫ화 세 버네 머고ᄃᆡ ᄒᆞ다가 피 몯 다 나 ᄇᆡ 안해 골ᄆᆞᆫ 피 잇거든 다시 머기면 골ᄆᆞᆫ 피 ᄂᆞ려 됴ᄒᆞ리라 又方蒲黃{{*|二兩}}當歸{{*|二兩末}}右相和更硏令勻每服以溫酒調下一錢日四五服{{*|}} ᄯᅩ 蒲뽕黃ᅘᅪᇰ 두 兩랴ᇰ과 當다ᇰ歸귕 두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섯거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번 머고매 ᄃᆞᄉᆞᆫ 술로 ᄒᆞᆫ 돈ᄋᆞᆯ 프러 머고ᄃᆡ ᄒᆞᄅᆞ 네다ᄉᆞᆺ 번 머그라 金瘡內漏血在腹中不出以牡丹擣細羅爲散不計時候以溫酒調下三錢{{*|}}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이셔 나디 아니커든牡무ᇢ丹단 ᄋ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ᄃᆞᄉᆞᆫ 술로 서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以馬齒莧擣取汁每服煖飮一小盞卽止兼治惡血在腹中{{*|}} ᄯᅩ馬망齒칭莧ᅘᅧᆫ ᄋᆞᆯ 디허 汁집 아ᅀᅡ 머글 제 데여 ᄒᆞᆫ 小쇼ᇢ盞잔ᄋᆞᆯ 머그면 곧 긋ᄂᆞ니 모딘 피 ᄇᆡ 안해 이쇼ᄆᆞᆯ 조쳐 고티ᄂᆞ니라 衛生易簡方金瘡血不止用小薊葉挼爛封之{{*|}} 金금瘡차ᇰ 피 긋디 아니커든 小쇼ᇢ薊곙 니플 니기 부븨여 브티라 又方用白薇末貼之立止{{*|}} ᄯᅩ 白ᄈᆡᆨ薇밍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用白芍藥一兩熬黃爲末酒調二錢服或米飮亦止痛{{*|}} ᄯᅩ白ᄇᆡᆨ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봇가 누르거든 細솅末마ᇙᄒᆞ야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며 시혹 ᄡᆞᆯ 글힌 므레 머거도 ᄯᅩ 알포미 긋ᄂᆞ니라 又方用血竭末傅之血與疼痛立止{{*|}} ᄯᅩ 血ᅘᆑᇙ竭꺼ᇙ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피와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金瘡腸出隨卽推入用桑皮作線縫佳以熱雞血塗之{{*|}}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챠ᇰᄌᆡ 나거든 卽즉時씽예 미러 녀코 ᄲᅩᇰ 거츠로 실 ᄆᆡᇰᄀᆞ라 호면 됴ᄒᆞ니 더운 ᄃᆞᆯᄀᆡ 피로 ᄇᆞᄅᆞ라 又方用靑蒿搗傅止血定痛生肌甚良{{*|}} ᄯᅩ 靑쳐ᇰ蒿호ᇢᄅᆞᆯ 디허 ᄇᆞᄅᆞ면 피 그츠며 알포미 그츠며 ᄉᆞᆯ히내사ᄂᆞ니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經驗良方治金瘡 木賊{{*|三兩}}麻黃{{*|去節一兩}}甘草{{*|七錢半}}右爲細末每服五錢熱酒調下先整骨了夾定飮之令醉{{*|}} 金금瘡차ᇰ 고툐ᄃᆡ 속새 세 兩랴ᇰ과 麻망黃ᅘᅪᇰ ᄆᆞᄃᆡ 아ᅀᅡ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 닐굽 돈 半반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한 服뽁애 다ᄉᆞᆺ 돈ᄋᆞᆯ 더운 수레 프러 먹고 몬져 ᄲᅧᄅᆞᆯ 고텨 ᄢᅧ 단기고 술 머겨 醉ᄌᆔᆼ케 ᄒᆞ라 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蒜半升破去心皮右以無灰酒二升煮令極爛細硏每服一合已來須臾得汗卽差{{*|}}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ᄇᆞᄅᆞᆷ 마자 왜트닐 고툐ᄃᆡ 마ᄂᆞᆯ 半반 되ᄅᆞᆯ ᄢᅢ혀 고ᄀᆡ야ᇰ과 거프를 앗고 ᄌᆡ 업슨 술 두 되로 글혀 ᄀᆞ자ᇰ 므르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번 머고ᄃᆡ ᄒᆞᆫ 홉만 ᄒᆞ면 아니한 더데 ᄯᆞᆷ나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鷄糞{{*|二兩}}黑豆{{*|一升洗淨炒令燋黑}}右以酒三升煎熱投藥於酒中更煎三五沸去滓時時隨多少飮之令盡得汗爲佳未汗卽更作服以汗出爲度{{*|}} ᄯᅩ ᄃᆞᆯᄀᆡ ᄯᅩᇰ 두 兩랴ᇰ과 거믄 코ᇰ ᄒᆞᆫ 되ᄅᆞᆯ 조히 시서 봇가 검게 ᄒᆞ고 술 서 되로 글혀 덥거든 藥약ᄋᆞᆯ 수레 녀허 다시 세다ᄉᆞᆺ 번 글히고 즈ᅀᅴ 아ᅀᅡ 時씽時씽예 하거나 젹거나 머거 업게 ᄒᆞ야 ᄯᆞᆷ나미 됴ᄒᆞ니 ᄯᆞᆷ 곳 아니 나거든 다시 ᄆᆡᇰᄀᆞ라 머거 ᄯᆞᆷ날 ᄀᆞ자ᇰ ᄒᆞ라 又方雞子{{*|三枚}}鳥麻油{{*|五合}}合煎稍稠待冷塗瘡上極妙救急方上{{*|終}}{{*|}} ᄯᅩ ᄃᆞᆯᄀᆡ알 세 낫과 ᄎᆞᆷ기름 닷 호ᄇᆞᆯ ᄒᆞᆫᄃᆡ 달혀 져기 두텁거든 ᄎᆡ와 헌 ᄃᆡ ᄇᆞᄅᆞ면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옛한글/끝}} fumi08y16r6iec8okd0kavzl8h2nvhx 458046 458045 2026-08-17T21:25:55Z Blahhmosh 13019 /* 大小便不通第十五 */ 458046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부제=권상 |저자= |이전= |다음=[[../하|권하]] |설명= }} {{옛한글 알림}} {{옛한글/시작}} ==卒中風第一== 直指方治卒中法 圓白天南星{{*|濕紙裹煨}}南木香 蒼朮{{*|生}}白羊眼半夏{{*|用百沸湯就銚蘸少頃各一錢半}}辣細辛 甘草{{*|生}}石昌蒲{{*|細切各一錢}}右件剉散分作二服水一盞半生薑七厚片煎取其半乘熱調蘇合香圓三圓灌下痰盛者加全蝎二枚灸治一切卒中不論中風中寒中暑中濕中氣及痰厥飮厥之類初作皆可用此先以皂角去弦皮細辛或生南星半夏爲末揭以管子吹入鼻中俟其噴嚔卽進前藥牙噤者中指點南星細辛末幷烏梅肉頻擦自開{{*|直띡〮指ᄌᆞᆼ〯方바ᇰ믄득〮 中듀ᇰ風보ᇰᄒᆞ니〮 고티〮ᄂᆞᆫ〮 法{{SIC|법〮|빔〮}}은도〮렫고〮 ᄒᆡᆫ〮天텬南남星셔ᇰ 을저즌〮 죠ᄒᆡ〮예〮 ᄡᅡ〮 구으〮니와〮 南남木목〮香햐ᇰ 과〮 ᄂᆞᆯ蒼차ᇰ朮뜌ᇙ〮 와〮 ᄒᆡᆫ〮羊야ᇰᄋᆡ〮 눈〮ᄀᆞᆮ〮ᄒᆞᆫ 半반〮夏ᅘᅡᆼ〮 ᄅ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번솟글흔〮 므〮레자ᇝ〯간 ᄃᆞ〮모〮니〮 各각〮 ᄒᆞᆫ 돈〯 半반〮과〮ᄆᆡ온 細솅〮辛신 과〮 ᄂᆞᆯ甘감草초ᇢ〯 와石쎡昌챠ᇰ蒲뽕 ᄅᆞᆯ〮 細솅〮切쳐ᇙ〮호〮니 各각〮 ᄒᆞᆫ 돈〯ᄋᆞᆯ〮사ᄒᆞ〮라〮 ᄂᆞᆫ화〮 두〯服뽁〮 애ᄆᆡᇰᄀᆞ〮라〮 믈〮 ᄒᆞᆫ 盞{{SIC|잔〮|진〮}} 半반〮과〮 生ᄉᆡᇰ薑가ᇰ혀〮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더운〮 제 蘇송合ᅘᅡᆸ〮圓ᅌᅯᆫ 세〯 丸ᅘᅪᆫᄋᆞᆯ〮프〮{{SIC|러|리}} 브ᅀᅩ〮ᄃᆡ〮 痰땀 盛쎠ᇰ〮ᄒᆞ니〮란〮 全ᄍᆑᆫ蝎허ᇙ〮 두〯나〯ᄎᆞᆯ〮 구어 더으라〮 中듀ᇰ〮風보ᇰ과〮中듀ᇰ〮寒ᅘᅧᆫ 과〮中듀ᇰ〮暑셩〯 와〮中듀ᇰ〮濕십〮 과中듀ᇰ〮氣킝 와〮痰땀厥궈ᇙ〮 와〮飮ᅙᅳᆷ〯厥궈ᇙ〯 왓〮 類ᄅᆔᆼ〮ᄅᆞᆯ〮 議ᅌᅴᆼ〮論론말〯오〮 始싱〯作작〮애〮 다〯어루〮 이〮ᄅᆞᆯ〮ᄡᅳ〮리라〮 몬져 皂쪼ᇢ〯角각〮 시울〮와〮 거츨〮 앗고〮 細솅〮辛신이〮나〮生ᄉᆡᇰ南남星셔ᇰ 이〮나〮 半반〮夏ᅘᅡᆼ〮ᄅᆞᆯ〮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대〮로ᇰᄋᆞ〮로〮 ᄯᅥ〮 곳〮굼긔〮 부러〮 ᄌᆞᄎᆡ〮욤호〮ᄆᆞᆯ〮 기드〮려〮 藥약〮머기〮고〮 니〮 마고〮므니〮란〮 댜ᇰ가라개〮 南남星셔ᇰ과〮 細솅〮辛신ㅅᄀᆞᆯᄋᆞᆯ〮 무텨〮 烏ᅙᅩᆼ梅ᄆᆡᆼ肉ᅀᅲᆨ 조쳐 ᄌᆞ조〮 ᄲᅵ븨〮면〮 절〮로〮 열〯리라〮 厥궈ᇙ〮 은〮 손〮발〮 ᄎᆞ〮고〮脉ᄆᆡᆨ〮 그츤〮 病뼈ᇰ〮이〮라〮}} 經驗秘方三寶散治風昏氣厥不省痰塞失音 腦子 牛黃{{*|各二分}}朱砂{{*|六分}}右細末取 竹瀝油勻調每服一錢{{*|三삼寶보ᇢ〯散산〮 ᄇᆞᄅᆞᆷ마자〮 아〮즐〮ᄒᆞ며〮 氣킝〮厥궈ᇙ〮 ᄒᆞ〮야〮ᄎᆞ〮림 몯〯고〮 痰땀이〮마켜 소리〮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龍료ᇰ腦노ᇢ〯 牛우ᇢ黃ᅘᅪᇰ 各각〮 두〯分분과 朱즁砂상 六륙〮分분과〮ᄅᆞᆯ〮細솅〮末마ᇙᄒᆞ〮야〮 댓〮지〯네 골오〮 프〮러 ᄒᆞᆫ돈〯곰〮 머기라〮}} 千金方治惡風心悶欲死急灸足大趾下橫文隨年壯立愈又灸百會七壯{{*|惡ᅙᅡᆨ〮風보ᇰ이〮 안〮히 답답ᄒᆞ〮야〮 죽ᄂᆞ닐〮 고툐〮ᄃᆡ〮ᄲᆞᆯ리〮 밠〮 엄지〮가락 아랫ᄀᆞᄅᆞᆫ 그〮믈〮ᄯᅮ〮ᄃᆡ〮 나〮마초〮 ᄒᆞ면〮즉〮재〮 됻〯ᄂᆞ〮니라 ᄯᅩ〮百ᄇᆡᆨ〮會ᅘᅬᆼ ᄅᆞᆯ〮七치ᇙ〮壯자ᇰ〮 ᄋᆞᆯ〮 ᄯᅳ〮라〮}} 衛生易簡方治中風不語舌强 人乳汁 三年陳醬{{*|各五合}}右和硏以生布絞汁不拘時少少與服良久當語{{*|中듀ᇰ〮風보ᇰᄒᆞ〮야〮 말〯 몯〯고〮 혀〮세〯닐〮 고툐〮ᄃᆡ〮 사〯ᄅᆞᄆᆡ〮 졋〮!과〮!괴〮! 三삼年년 무근〮쟈ᇰ〯 各각 닷홉 과〮ᄅᆞᆯ〮섯거〮 ᄀᆞ〮라 生ᄉᆡᇰ뵈〮로〮 汁집〮을〮ᄧᅡ〮 時씽節져ᇙᄋᆞᆯ〮븓들이〮디〮 마〯오〮 젹젹 주〮어〮 머기〮면〮 오라〮면〮 반ᄃᆞ〮기 말〯ᄒᆞ리〮라〮}}又方治中風急喉痺欲死者用白殭蠶焙黃爲末生薑自然汁調灌下喉立愈{{*|ᄯᅩ 中듀ᇰ風보ᇰᄒᆞ〮야〮과 ᄀᆞᆯ이〮 모기〮브ᅀᅥ〮 죽ᄂᆞ닐〮 고툐〮ᄃᆡ〯白ᄈᆡᆨ〮殭가ᇰ蠶짬 ᄋᆞᆯ〮焙ᄈᆡᆼ〮籠로ᇰ애〮 ᄆᆞᆯ외〮야〮 노〮라〮커든〮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에〮 프〮러〮 모ᄀᆡ〮 브ᅀᅳ면〮 즉〮재〮 됻〯ᄂᆞ〮니라〮}}又方治中風佛省人事用香油或生薑自然汁灌之卽醒{{*|ᄯᅩ〮 中듀ᇰ〮風보ᇰ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모ᄅᆞ〮ᄂᆞ닐〮 고툐〮!ᄃᆡ!ᄐᆡ〮! ᄎᆞᆷ〮기르〮미나〮 시혹〮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이〮어나〮 브ᅀᅳ면〮 즉〮재〮 ᄭᆡ〮ᄂᆞ〮니라〮}}又方卒中風不省人事痰壅用生白礬二錢爲末生薑自然汁調幹開口灌下化痰或吐卽醒{{*|ᄯᅩ〮 믄득〮 中듀ᇰ風보ᇰ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모ᄅᆞ〮고〮 痰땀이〮마켜〮ᄭᅥ든 生ᄉᆡᇰ白ᄈᆡᆨ〮礬뻔〮 두〯 돈〯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에〮 프〮러〮 입〮버〯리〮혀고〮 브ᅀᅳ면〮 痰땀이〮슬〮어나 시혹 吐통ᄒᆞ면〮 곧〮 ᄭᆡ〮ᄂᆞ〮니라〮}} 簡易方救急稀涎散治中風忽然昏若醉形體昏悶四肢不收涎潮於上氣閉不通光明白礬{{*|一兩}}猪牙皂角{{*|四介肥實幷不蛀者去黑皮}}右細末硏勻輕者半錢匕重者三錢匕溫水調灌下不大嘔吐但微微冷涎出一二升便得醒醒次緩而調理不可大吐{{*|救구ᇢ急급稀힁涎ᄊᆑᆫ散산〮ᄋᆞᆫ〮 中듀ᇰ〮風보ᇰᄒᆞ〮야〮 忽호ᇙ然ᅀᅧᆫ히 어〮즐ᄒᆞ〮야〮 醉ᄌᆔᆼᄒᆞᆫᄃᆞᆺ〮ᄒᆞ며〮 모〮미 어〮즐〮코〮닶〮가와〮 네〯 활개ᄅᆞᆯ〮거두〮디〮 몯〯ᄒᆞ며〮더푸〮미〮 모ᄀᆞ〮로〮 올아〮氣킝〮分분이 마가〮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티〮ᄂᆞ니〮 光과ᇰ明며ᇰ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과〮 猪뎡牙ᅌᅡᆼ皂조ᇢ〯角각〮 네〯나〯치〮 ᄉᆞᆯ〮지고〮 염글오〮 좀〮 먹디〮 아니〮ᄒᆞ〮닐〮 거믄〮 거플밧겨〮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輕켜ᇰᄒᆞ니〮란〮 半반〮 돈〯이〮오〮 重듀ᇰ〯ᄒᆞ니〮란〮 세〯 돈〯ᄋᆞᆯ〮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ᅥ〮 너무吐통〮티〮 아니〮케코〮 오직〮 젹젹 ᄎᆞᆫ추〯미〮 ᄒᆞᆫ두〯 되〮만〮 나면〮 곧〮ᄉᆞᆲᄉᆞᆲᄒᆞ〮ᄂᆞ〮니라〮 {{SIC|버|바}}거 날회야〮 調뚀ᇢ理링〯 ᄒᆞ고〮 너무 吐통〮호〮미〮 몯〯ᄒᆞ리〮라〮}} 經驗良方破棺散治中風牙已緊無門下藥天南星末{{*|半錢}}白龍腦末一字右合硏勻頻擦令熱牙自開{{*|破팡〮棺관〮散산〮 은〮 中듀ᇰ〮風보ᇰᄒᆞ〮야〮 니〮ᄒᆞ마〮 구더〮 藥약〮머귤〮 門몬업〯스닐〮 고티〮ᄂᆞ니〮 天텬南남星셔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白ᄈᆡᆨ〮龍료ᇰ腦노ᇢ〯 ㅅ ᄀᆞᄅᆞ 一ᅙᅵᇙ 字ᄍᆞᆼ〮와〮ᄅᆞᆯ〮 뫼화〮 ᄀᆞ〮라 골아〮 ᄌᆞ조〮ᄲᅵ븨〮여〮 덥〯게〮 ᄒᆞ면〮 니〮 절로〮 열〯리라〮}} 葛氏備急方中風角弓反張四肢不收煩亂欲死者 淸酒{{*|五升}}雞白屎{{*|一升}}右擣篩合和揚之千遍乃飮之大人服一升日三少小服五合差{{*|ᄇᆞᄅᆞᆷ마자〮왜지그〯라〮 네〯 활〮개ᄅᆞᆯ〮 거두〮디〮 몯〯ᄒᆞ〮야〮어〮즈〮러워〮 죽ᄂᆞ닐〮 淸쳐ᇰ酒쥬ᇢ〯 닷 되〮와〮ᄃᆞᆯᄀᆡ〮 ᄒᆡᆫ〮 ᄯᅩᇰ ᄒᆞᆫ 되〮와〮ᄅᆞᆯ〮디코〮 {{SIC|처〮|치〮}} 프〮러〮 一ᅙᅵᇙ〮千쳔 버늘〮저ᅀᅥ〮 머구〮ᄃᆡ〮 얼〯우ᄂᆞᆫ〮 ᄒᆞᆫ 되〮옴〮 ᄒᆞᄅᆞ 세〯 번 먹고〮져므〮닌〮 닷호ᄇᆞᆯ〮 머그〮면〮 됴〯ᄒᆞ리〮라〮}} ==中寒第二<sub>凍瘡凍死附</sub>== 和劑方姜附湯 乾薑{{*|一兩}}附子{{*|生去皮臍細切一枚}}右㕮咀每服三錢水一盞半煎七分食前溫服{{*|姜가ᇰ附뿡〮湯타ᇰ 乾간薑가ᇰ ᄒᆞᆫ 兩랴ᇰ과附뿡〮子ᄌᆞᆼ〯 ᄂᆞᄅᆞᆯ〮 것 과〮ᄇᆡᆺ보ᄀᆞᆯ〮 앗〯고〮細솅切쳐ᇙ〮호〮니〮 ᄒᆞᆫ 낫〯과〮ᄅ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돈〯애〮 믈〮 ᄒᆞᆫ 盞잔〮 半반〮ᄋᆞ〮로〮 닐굽〮 分분ᄋᆞᆯ〮글혀〮 食씩〮前쪈에〮ᄃᆞᄉᆞ닐〮 머그〮라〮}}又方理中湯治五臟中寒口噤失音四肢强直兼治胃脘停痰冷氣刺痛 人蔘 乾薑 白朮 甘草{{*|各等分}}右㕮咀每服四錢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溫服{{*|ᄯᅩ〮理링〯中듀ᇰ湯탕 은五ᅌᅩᆼ〯臟짜ᇰ〯 이〮 中듀ᇰ〮寒ᅘᅡᆫᄒᆞ〮야〮 입〮 마고〮므러〮 소리〮 몯〯ᄒᆞ며〮 四ᄉᆞᆼ〮肢징세〯오〮 고ᄃᆞ〮닐〮 고티〮며〮 ᄯᅩ〮胃ᅌᅱᆼ〮脘ᅌᅪᆫ〮 애〮 痰땀이〯담겨〮 胃ᅌᅱᆼ〮脘ᅌᅪᆫ〮ᄋᆞᆫ〮가ᄉᆞ〮미라〮 冷ᄅᆡᇰ〯ᄒᆞᆫ 氣킝〮分분이〮디ᄅᆞ저겨〮 알ᄑᆞ닐〮 고티〮ᄂᆞ〮니〮人ᅀᅵᆫ蔘ᄉᆞᆷ 과〮 乾간薑가ᇰ과〮白ᄈᆡᆨ〮朮뜌ᇙ〮 와〮 甘감草초ᇢ〯ᄅᆞᆯ〮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네〯 돈〯애〮 믈〮 ᄒᆞᆫ 큰〮 盞잔〮으〮로〮 글혀〮 六륙分분에〮 니르〮거든〮즛의 앗〯고〮 ᄃᆞᄉᆞ닐〮 머그〮라}} 凍瘡聖惠方治凍耳成瘡兎腦髓取塗之{{*|귀〮어러〮 허〯닐〮 고툐〮ᄃᆡ〮 톳〮긔 머릿〮 骨고ᇙ〮髓ᄉᆔᆼ〯 를〮내〯야〮 ᄇᆞᄅᆞ라〮}}又方杏仁{{*|一斤湯浸去皮}}壓取油塗之{{*|ᄯᅩ〮杏ᅘᆡᇰ〯仁ᅀᅵᆫ ᄒᆞᆫ 斤근을〮 더운〮 므〮레ᄃᆞ〮마 것〮밧기〮고〮 지즐〮워〮 기름〮 내〯야〮 ᄇᆞᄅᆞ라〮}} 聖濟緫錄治手足凍瘡腫爛赤小豆半升煮汁熱浸洗瘡日三五次{{*|손〮밠〮언〯 瘡차ᇰ 이〮브ᅀᅳ며〮 헤여〮디닐〮 고툐〮ᄃᆡ〮 블근〮 ᄑᆞᆺ〮 半반〮 되〮ᄉᆞᆯᄆᆞᆫ〮 므〮를〮 덥〯게〮 ᄒᆞ〮야〮 瘡차ᇰᄋᆞᆯ〮 ᄃᆞ〮마〮시수〮ᄃᆡ〮 ᄒᆞᄅᆞ 세〯버니〮나〮 다ᄉᆞᆺ〮 버니〮나〮 ᄒᆞ라〮}} 治寒凍足跟開裂血出疼痛牛皮膠燒細硏爲末以唾和塗之{{*|어러〮밠〮츠〮기 ᄠᅥ〮디〮어〮 피〮나고알히〮ᄂᆞ닐〮 고툐〮ᄃᆡ〮ᄉᆈ〯 갓프〮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추〮메 ᄆᆞ라〮 ᄇᆞᄅᆞ라〮}} 百一選方治凍瘡黃蘗燒存性細硏以雞子淸調傅破者乾摻神妙{{*|언〮 瘡차ᇰᄋᆞᆯ〮 고툐〮ᄃᆡ〮黃ᅘᅪᇰ蘗ᄇᆡᆨ〮 을〮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ᄃᆞᆯᄀᆡ〮앐〮 ᄆᆞᆯᄀᆞᆫ〮 므〮레〮 ᄆᆞ〮라〮브티〮라〮 허〯닌〮ᄆᆞᄅᆞ닐〮 ᄲᅵ후〮미〮 됴〯ᄒᆞ니〮라〮}} 得效方治足上凍爛生瘡黃丹爲末用猪脂調傅妙{{*|바〮리〮ᄃᆞ〮라 헤여〮디닐〮 고툐〮ᄃᆡ〮 黃ᅘᅪᇰ丹단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도ᄐᆡ〮 기르〮메〮 ᄆᆞ라〮브튜〮미〮 됴〯ᄒᆞ니〮라〯}} 衛生寶鑑如神散治凍瘡皮膚破爛痛不可忍大黃爲細末新水調搽凍破瘡上{{*|}} 凍도ᇰ〮瘡차ᇰ〮 이〮 갓과〮 ᄉᆞᆯ〮쾌〮 헤여〮디〮여〮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닐〮 고툐〮ᄃᆡ〮大땡〮黃ᅘᅪᇰ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ᆺ기룬〮 므〮레〮프〮러 헌〯듸〮 ᄇᆞᄅᆞ라〮 衛生十全方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濃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茄子莖葉枯者煮洗之{{*|}} 凍도ᇰ〮瘡차ᇰ을〮 고툐〮ᄃᆡ〮 가짓 불휘ᄅᆞᆯ〮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고ᇙ〮髓ᄉᆔᆼ〯로〮 ᄇᆞᄅ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ᄯᅩ〮 가짓 줄기〮와〮 닙이우〮닐〮 글혀〮 시스〮라〮 又方黃丹炒令色變 風化石灰{{*|等分}}右拌勻每一兩許沸湯浸洗患處冷卽止不過三洗効{{*|}} ᄯᅩ〮 黃ᅘᅪᇰ丹단ᄋᆞᆯ〮봇가〮 비〮치〮다ᄅᆞ게〮 코〮 ᄇᆞᄅᆞ매〮ᄂᆞᆯ욘〮 石쎡〮灰횡 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섯거〮 골아〮 ᄒᆞᆫ 兩랴ᇰ만〮글는 므〮레〮 ᄃᆞᆷ가〮 알ᄑᆞᆫ ᄃᆡ〮 시수〮ᄃᆡ〮 ᄎᆞ〮거든〮 말〮면〮 세〯 번 시수〮믈〮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라〮 凍死聖惠方治凍死方以大器中多熬灰使煖囊盛以摶其心冷卽更易心煖氣通目轉則口乃亦開可與溫酒服粥淸稍稍嚥之卽活若不先溫其心便將火灸其身冷氣與火相摶急卽不活也{{*|}} 어러〮주그〮닐〮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큰〮그르〮세〮 ᄌᆡ〮ᄅᆞᆯ〮만〯히〮 봇가〮 덥〯게〮 ᄒᆞ〮야〮 주머니〮예〮녀허〮 가〮ᄉᆞ〮매〮노햇〮다가〮 ᄎᆞ〮거든〮 즉〮재 ᄀᆞᆯ라〮ᄆᆞᅀᆞ미〯 더워〮 氣킝〮分분이〮 通토ᇰᄒᆞ며 누〮니 돌〯면〮 이〮비 ᄯᅩ〮 열〯리니〮어루〮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며〮粥쥭〮므〮를〮 漸쪔〯漸쪔〯 ᄉᆞᇝ기〮면〮 곧〮 사〯ᄂᆞ니〮ᄒᆞ〮다가〯 그 ᄆᆞᅀᆞᄆᆞᆯ〮ᄃᆞᆺ게〮 아니〮코〮 곧〮 블〮로〮 그 모〮ᄆᆞᆯ〮ᄧᅬ〯 면〮 ᄎᆞᆫ〮 氣킝〮分분이 블〮와〮 서르사화〮 ᄲᆞᄅᆞ면〮 곧〮사〯디〮 몯〯ᄒᆞ〮ᄂᆞ〮니라〮 本朝經驗粥飮醬湯爲上飮酒次之{{*|}} 粥쥭〮믈〮와〮쟈ᇰ〯ᄭᅮ기〮 위두코〮 술 머구〮미〮버그〮니라〮 ==中暑第三== 聖惠方治熱暍心悶方以熱土及熬熱灰土壅其臍上佳{{*|}} 中듀ᇰ〮暑셩〮ᄒᆞ〮야〮 ᄆᆞᅀᆞᆷ 답답ᄒᆞ니〮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더운〮 ᄒᆞᆰ과〮 봇ᄀᆞᆫ〮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우희〮 두프〮면〮 됴〯ᄒᆞ〮니라〮 又方濃煮蓼取汁一大盞分二服飮之愈{{*|}} ᄯᅩ〮엿귀〮ᄅᆞᆯ〮 두터이〮 글혀〮 汁집〮을〮 取츙〯ᄒᆞ〮야〮 큰〮 ᄒᆞᆫ 盞잔ᄋᆞᆯ〮 두〮 服뽁〮애〯 ᄂᆞᆫ화〮 머그〮면〮 됻〯ᄂᆞ〮니〮라〮 又方生地黃汁一中盞溫暖服之{{*|}} ᄯᅩ〮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汁집〮 ᄒᆞᆫ 中듀ᇰ盞잔〮을〮데여〮 머그〮라〮 又方取麵一兩以溫水一中盞攪和服之{{*|}} ᄯᅩ〮 밄〮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을〮 ᄃᆞᄉᆞᆫ〮 믈〮 ᄒᆞᆫ 中듀ᇰ盞잔〮애〮 프〮러 머그〮라〮 又方服地漿一盞卽愈{{*|}} ᄯᅩ〮地띵〮漿쟈ᇰ ᄒᆞᆫ 盞잔〮ᄋᆞᆯ〮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地띵〮漿쟈ᇰᄋᆞᆫ〮ᄯᅡ해〮 져〯근 굳〮 ᄑᆞ〮고〮 믈〮 브ᅀᅥ〯니기〮 후ᇰ〯두ᅌᅲᆫ〮 므〮리라〯 千金方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 더우〮며닐〮 고툐〮ᄃᆡ〮길헷〯 더운〮ᄒᆞᆯᄀᆞ〮로〮 가ᄉᆞ〮매〮여ᇇ고〮 져〯 기 식거든〮 ᄀᆞᆯ오〮 氣킝〮分분이〮通토ᇰ커든〮 말〯라〮 又方張死人口令通以暖湯徐徐灌口中小擧死人頭令湯入腹湏臾卽蘇{{*|}}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이〮블〮버〯리혀〮 通토ᇰ케〮 ᄒᆞ고〮 더운〮믈〮로〮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이베〮 븟고〮 주근〮 사〯ᄅᆞᄆᆡ〮 머리〮ᄅᆞᆯ〮 져〯기〮 드러〮 더운〮 므〮리〮 ᄇᆡ에들〮에〮 ᄒᆞ면〮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살〯리라〮 又方使人噓其心令暖易人爲之{{*|}} ᄯᅩ〮 사〮ᄅᆞ〮ᄆᆞ로〮 가〮ᄉᆞ〮매〮 잆〮김〯 드〮려 덥〯게〮 호〮ᄃᆡ〮 사〯ᄅᆞᄆᆞᆯ〮ᄀᆞ람〮 ᄒᆞ라〮 又方抱狗子若雞着心上熨之{{*|}} ᄯᅩ〮 가ᇰ아지〯와〮 ᄃᆞᆰ과〮ᄅᆞᆯ〮 아나〮 가ᄉᆞᆷ 우희〮다혀 熨ᅙᅮᇙ〮ᄒᆞ라 又方屋上南畔瓦熱熨心冷易之{{*|}} ᄯᅩ〮 집 우흿 南남녁ᄀᆞ〮ᅀᅢᆺ〮 디새〮ᄅᆞᆯ 덥〯게〮 ᄒᆞ〮야〮 가ᄉᆞ〮매〮 熨ᅙᅮᇙ〮호〮ᄃᆡ〮 식거든〮 ᄀᆞᆯ라〮 壽域神方車輪土五錢冷水調澄淸服之妙{{*|}} 술윗〮ᄠᅵ옛〯 무든 ᄒᆞᆰ 닷 도〯ᄂᆞᆯ〮 ᄎᆞᆫ〮므레〮 프〮러〮ᄆᆞᆰ안초〮아 머그〮면〮 됴〯ᄒᆞ니라〮 又方中暑發昏以新汲水滴入鼻孔用扇搧之重者以地漿灌則醒與冷水飮則死{{*|}} ᄯᅩ〮 中듀ᇰ〮暑쎵〮ᄒᆞ〮야〮 어즐〮커든〮 ᄀᆞᆺ 기!른〮!룬〮! 믈〮로곳〮굼긔〮 처〮디〯오〮 부체〮로〮부츠라〮 重뜌ᇰᄒᆞ니〮란〮 地띵〮漿쟈ᇰᄋᆞ로〮 브ᅀᅳ면 ᄭᆡ〮ᄂᆞ니〮 ᄎᆞᆫ〮 믈〮 ?머?기〮면〮 ?죽?ᄂᆞ니〮라〮 又方用大蒜三兩瓣細嚼溫湯送下仍禁冷水卽愈{{*|}} ᄯᅩ〮 굴〯근〮 마ᄂᆞᆯ〮 두〯ᅀᅥ알〮 ᄒᆞᆯ ?ᄂᆞ?로니 십고〮 더운〮믈〮로〮ᄂᆞ리〮오고〮 ᄎᆞᆫ〮 므〮를〮 먹디〮 말〯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 ᄯᅩ〮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ᄒᆞᆰ과〮 굴〯근〮마ᄂᆞᆯ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ᄂᆞ로니 ᄀᆞ〮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管見大全良方云若偶在無人所居之境一時無湯可移病人安於樹陰之下却掬路上熱土安於病人臍上仍撥開作一窮以人注尿於其中得暖卽活{{*|}} ᄒᆞ다가〮마!조〮!초〮!아 사〮ᄅᆞᆷ 업〯슨〮 ᄯᅡ해이셔〮 더운〮믈 업〯거든〮 病뼈ᇰ〮人ᅀᅵᆫᄋᆞᆯ 옮겨〮 나못〮ᄀᆞ〮ᄂᆞᆯ해 두고〮 길헷〮 더운 ᄒᆞᆯᄀᆞᆯ〮?우?희〮여〮 病뼈ᇰ〮人ᅀᅵᆫ의 ᄇᆡᆺ복 우희〮노코〮 헤혀〮 ᄒᆞᆫ굼글〮 짓〯고〮 사〯ᄅᆞ미〮 그 가온〮ᄃᆡ〮 오좀〮 누면〮 더우〮면〮 곧 사〯ᄂᆞ〮니라〮 ==中氣第四== 和劑方指南云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激挫忿怒盛氣不得宣泄逆氣上行忽然仆倒昏迷不省人事牙關緊急手足拘攣其狀與中風無異但口內無涎聲此證只是氣中不可妄投取涎發汗等藥而反生他病但可與七氣湯分解其氣散其壅結其氣自止七氣湯連進效速更可與蘇合香元{{*|}} 氣킝〮中듀ᇰ〮ᄒᆞᆫ 證지ᇰ은〮해〯 豪ᅘᅩᇢ貴귕ᄒᆞᆫ 사〯ᄅᆞ미이〯ᄅᆞᆯ〮 因ᅙᅵᆫᄒᆞ〮야〮!긱!격〮!발〮ᄒᆞ며〮 것기〮여〮 忿푼〯怒농〯ᄒᆞ〮야〮 氣킝〮分분이〮 盛쎠ᇰ〮호〮ᄃᆡ펴ᄃᆞᆯ〮 몯〯ᄒᆞ〮야〮 氣킝〮分분〮이거스〮러〮 우흐〮로〮올오〮매나〮 믄〮득〯업더〮디〮여 어〮즐〮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고〮 니〮세워드〮며 손〮바리뷔〯트〯리 그 야ᇰ〯이〮 中듀ᇰ〮風보ᇰ과〮 다ᄅᆞ디〮 아니〮ᄒᆞ니 오직〮 입〮 안해〮 추ᇝ〮소ᄅᆡ〮 업〯스니〮 이〮 證!시ᇰ〮!지ᇰ〮!이〮 곧〮 이〮 氣킝中듀ᇰ〮이〮니〮간대로〮 춤〮아ᅀᆞ며〮 ᄯᆞᆷ〮내〯욤 ᄃᆞᆯ〮햇〮 藥약〮ᄋᆞᆯ ᄡᅥ〮도ᄅᆞ혀〮 다ᄅᆞᆫ 病뼈ᇰ나긔〮 호〮미〮 몯〯ᄒᆞ리〮니〮 오직〮七치ᇙ氣킝湯!다ᇰ!타ᇰ! ᄋᆞᆯ 머겨〮 그 氣킝〮分분을ᄂᆞᆫ화〮 노기며〮막?딜?여〮 ᄆᆡ요〮ᄆᆞᆯ〮 흐트〮면〮 그 氣킝分분이〮 절로〮긋ᄂᆞ니〮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ᆯ〮닛우〮 머기〮면〮 效ᅘᅭᇢ〮驗ᅌᅥᆷ〮이〮 ᄲᆞ〮ᄅᆞ니〮 ᄯᅩ〮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을〮머규미〮 됴〯ᄒᆞ〮니라〮 七氣湯治虛冷上氣及寒熱怒恚喜憂愁等氣內結積聚堅牢如柸心腹絞痛不能飮食時發時止發則欲死半夏{{*|湯洗七次焙五兩}}人蔘{{*|去蘆}}甘草{{*|灸}}肉桂{{*|去麤皮各一兩}}右剉每服三錢水一大盞入生薑三片煎至七分去滓稍熱服食前{{*|}}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ᆫ虛!힝!헝!冷ᄅᆡᇰ〯 ᄒᆞ야〮 氣킝〮分분이〮오ᄅᆞ니〮와〮 寒ᅘᅡᆫ과〮 熱ᅀᅧᇙ〮와〮 怒농〯와〮 깃붐〮과〮 시름〮 ᄃᆞᆯ〮햇〮 氣킝〮分분이〮 안해〮모다〮 구두〮미〮 진〮 ᄀᆞᆮ〮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파〮 飮ᅙᅳᆷ〯食씩〮 몯〮ᄒᆞ며〮 잇다감〮 發버ᇙᄒᆞ며잇다감〮 그처 發버ᇙ〮ᄒᆞ면〮 죽ᄂᆞ닐〮 고티〮ᄂᆞ니〮 半반〮夏ᅘᅡᆼ〮ᄅᆞᆯ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焙ᄈᆡᆼ乾건호〮니〮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蔘ᄉᆞᆷᄋᆞᆯ〮 !이!머!리〮!비!버!히고〮 甘감草초ᇢ〮ᄅᆞᆯ〮 굽고〮 肉ᅀᅲᆨ〮桂ᄀᆒᆼ〮ᄅᆞᆯ〮麤총ᄒᆞᆫ 것밧교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 돈〮애〮 믈 ᄒᆞᆫ 大땡〮?盞?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 너허〮 七치ᇙ〮分분을〮 글혀〮 즛의 앗〮고〮 져〯기 덥〮게 ᄒᆞ〮야〮 食씩〮前쩐에〮 머기〮라〯 澹療方獨香湯主中氣閉目不語四肢不收昏沈等證南木香爲末每服一錢冬瓜子煎湯調下{{*|}} 獨똑〮香햐ᇰ〮湯타ᇰ은〮 中듀ᇰ〮氣킝〮ᄒᆞ야〮 눈〮ᄀᆞᆷ〮고〯 말〯 몯〯고〮 四ᄉᆞᆼ〮肢징를〮 거두〮디〮 몯〯ᄒᆞ고 昏혼沈띰 等드ᇰ〯엣〮 證지ᇰ?에〮? 主즁〯ᄒᆞ니〮 南남木목〮香햐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 錢쩐을冬도ᇰ瓜광 ᄡᅵ〮글휸〮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廻陽湯治中氣脉弱大叚虛怯等證 川烏{{*|生去皮臍}}附子{{*|生去皮臍各半兩}}乾薑{{*|炮二錢}}靑皮{{*|去穰一兩}}益智仁{{*|一兩}}右剉每服三錢水二盞生薑七片棗一枚同煎至一盞去滓溫服或入小木香{{*|}} ᄯᅩ〮廻ᅘᅬᆼ陽야ᇰ湯타ᇰ 은〮 中듀ᇰ氣킝〮ᄒᆞ〮야〮 脉ᄆᆡᆨ〮이〮 弱ᅀᅣᆨ〮ᄒᆞ〮야 ᄀᆞ자ᇰ〮 虛헝弱ᅀᅣᆨ〮ᄒᆞᆫ〮 等드ᇰ〯엣〮 證지ᇰ〮을〮 고티ᄂᆞ니川ᄎᆑᆫ烏ᅌᅩ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과〮 앗〯고〮 附뿡〮子ᄌᆞ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아ᅀᅩ〮니〮 各각 半반〮 兩랴ᇰ〯과〮 乾간薑가ᇰ 炮뽀ᇢ호〮니 두〯 돈〮과〮 炮뽀ᇢᄂᆞᆫ〮 믈〮 저즌〮 죠ᄒᆡ〮예〮 ᄡᅡ〮노ᄋᆞᆯ압〮ᄌᆡ〮예 무더〮구을〮시〮라〮 靑쳐ᇰ皮삥솝〮 아ᅀᅩ〮니〮 ᄒᆞᆫ 兩랴ᇰ〮과〮 益ᅙᅧᆨ〮智딩〮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三삼錢쪈에〮 믈 두〯 盞잔〮과〮 生ᄉᆡᇰ薑가ᇰ 닐굽〮 片편〮과〮 大땡〮棗조ᇢ〯 ᄒᆞᆫ ᄂᆞᆺ〯과〮 ᄒᆞᆫᄃᆡ〮 글혀 ᄒᆞᆫ 盞잔애〮 니르〮거든〮 즛의 앗〯고〮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시혹〮小쇼ᇢ木목〮香햐ᇰ ᄋᆞᆯ〮 더드〮리ᄂᆞ니라〮 ==中忤中惡鬼氣第五== 經驗良方云其證暮夜或登廁或出郊野或遊空冷屋室或人所不至之地忽然眼見鬼物鼻口吸着惡鬼氣驀然倒地四肢厥冷兩手握拳口鼻出淸血性命逡巡湏臾不救此證與尸厥同但腹不鳴心脇俱暖凡中惡驀然倒地切勿移動其尸卽令親戚衆人圍繞打鼓燒火或燒射香安息蘇木香樟木之類直候醒記人事方可移歸犀角{{*|鎊屑硏爲細末半兩}}射香 朱砂{{*|各一分}}已上爲細末每服二錢井水調服灌之如無前藥用雄黃一味爲末每服一錢煎桃枝葉湯調灌又無雄黃用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男用婦衣婦用男衣燒灰每服二錢百沸湯調下{{*|}} 그 證지ᇰ〮이〮 바ᄆᆡ〮 시혹〮 뒷〯가내〮 오ᄅᆞ거나〮 시혹〮드르〮헤〮 나〮가〮거나〮 시혹〮뷘〯 ᄎᆞᆫ〮 房바ᇰ의〮 놀〯어나〮 시혹〮 사ᄅᆞ미〮 가디〮 아니〮ᄒᆞ〮ᄂᆞᆫ〮 ᄯᅡ해〮 믄득〮 누네〮 귓것 보며〮 고〮콰〮 입〮과〮로〯모〯딘〮 귓거싀〮 氣킝〮分분을〮 마시〮거나〮 ᄒᆞ〮야〮 믄득〮 ᄯᅡ해〮그우러〮디〮여〮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두〯 소〮니〮쥐〯오〮 입〮과〮 고해〮ᄆᆞᆯᄀᆞᆫ〮 피〮 흘러〮性셔ᇰ〮命며ᇰ〮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이〮 證지ᇰ이〮尸싱厥궈ᇙ〮 와〮 ᄀᆞᆮ〮ᄒᆞ니〮 오〮직〮 ᄇᆡ〮우〯디〮 아니〮ᄒᆞ고〮 가ᄉᆞᆷ〮과〮녀비〮 다〯더우〮니라〮 믈〮읫 中듀ᇰ〮惡ᅙᅡᆨ〮 ᄒᆞ〮야〮 믄득〮 ᄯᅡ해〮 그우러디〮거든〮자ᇝ〯간도〮 그주거〮믈〮 옮기〮디〮 말〯오〮 즉〮재아ᅀᆞᆷ〮과〮 한 사〯ᄅᆞ〮ᄆᆞ로〮 圍ᅌᅱᆼ繞ᅀᅭᇢ〮ᄒᆞ〮야〮붑〮 두드〮리며〮 블〮다히〮게 ᄒᆞ며〮 시혹〮射썅〮香햐ᇰ 과〮安ᅙᅡᆫ息씩〮香햐ᇰ 과〮 蘇송木목〮香햐ᇰ과〮樟자ᇰ木목〮 ㅅ類ᄅᆔᆼᄅᆞᆯ〮 ᄉᆞ〮라〮 人ᅀᅵᆫ事ᄊᆞᆼ〮ᄎᆞ〮료ᄆᆞᆯ〮 기드〮려〮 옮겨〮 갈〯디〮니라〮犀솅角각〮 ᄋᆞᆯ〮슬허〮 ᄀᆞ〮라〮 細솅〮末마ᇙ〮호니〮 半반〮 兩!라ᇰ〮!랴ᇰ〮!과〮 射썅〮香햐ᇰ과〮 朱즁砂상와〮 各각〮 ᄒᆞᆫ 分분을〮 細솅〮末마ᇙ〮ᄒᆞ〮야〮 每ᄆᆡᆼ〯服뽁〮二ᅀᅵᆼ〮錢쪈을〮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브ᅀᅳ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錢쪈을〮복셩홧가〮지 와〮 닙〮 글횬〮 므〮레〮 프〮러〮 브ᅀᅳ라〮 ᄯᅩ〮雄ᅘᅮᇰ黃ᅘᅪᇰ 업〯거든〮 ᄂᆞᆯᄀᆞᆫ〮 ᄯᆞᆷ〮오〮시나〮 시혹〮觸쵹〮衣ᅙᅴᆼ어나〮 ᄯᆞᆷ〮오〯ᄉᆞᆫ 모매〮 오래〮 니버〮 오래〮 ᄯᆞᆷ〮ᄇᆡ니〮 됴〯코〮 觸쵹〮衣ᅙᅴᆼᄂᆞᆫ 오래F 니븐〮솝〯오〮시라〮 남진ᄋᆞᆫ〮겨〯지븨〮 오〮ᄉᆞᆯ〮 ᄡᅳ〮고〮 겨〯지븐〮 남지〮늬〮 오〮ᄉᆞᆯ ᄡᅮᆯ〮디니〮 ᄌᆡ〮 ᄉᆞ라〮 每ᄆᆡᆼ〯服뽁〮 二ᅀᅵᆼ〮錢쪈을〮 一ᅙᅵᇙ百ᄇᆡᆨ〮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聖惠方治卒客忤有似卒死生昌蒲根擣絞取汁二三合灌下立愈{{*|}}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니〮 ᄀᆞᆮ〮ᄒᆞ닐〮 고툐〮ᄃᆡ〮 ᄂᆞᆯ昌챠ᇰ蒲뽕 ㅅ 불휘〮ᄅᆞᆯ〮디허〮 汁집〮ᄲᅡ〮 두〯ᅀᅥ〮 호ᄇᆞᆯ〮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治中惡心痛欲絶方釜底墨{{*|半兩}}塩{{*|一錢}}右件藥和硏以熱水一盞調頓服之{{*|}}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알파〮 죽ᄂᆞ닐〮 고툐〮!ᄐᆡ〮!ᄃᆡ〮!가마 미틧〮 검듸여ᇰ 半반〮 兩랴ᇰ〯과〮 소곰 ᄒᆞᆫ 돈〯ᄋᆞᆯ〮섯거〮 ᄀᆞ〮라〮 더운〮믈〮 ᄒᆞᆫ 盞잔〮애〮 프〮러 다〯 머그〮라〮 又方中惡氣絶以上好朱砂細硏於舌上書鬼字又額上亦書之此法極效{{*|}}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 긋거든 ᄀᆞ자ᇰ 됴〯ᄒᆞᆫ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혀〮에〮鬼귕〯ㅈ字ᄍᆞᆼ〮 ᄅᆞᆯ〮스〮고〮 ᄯᅩ〮니마〮희〮 술〮디니〮 이〮 法법〮이〮지〮극 됴〯ᄒᆞ〮니라〮 又方鬼神所擊諸術不治熟艾如鴨子大二枚水二盞煮取五分去滓頓服{{*|}} ᄯᅩ〮 귓거시〮텨〮 여러〮 法법〮으〮로〮 고티〮디 몯〯ᄒᆞ〮거든〮 니근〮 ᄡᅮᆨ〮올〮ᄒᆡ알〮 만〮ᄒᆞ니〮 두〯 나〯ᄎᆞᆯ〮 믈〮 두〯 盞잔〮애〮 글혀〮 다ᄉᆞᆺ〮 分분을〯 取츙〯ᄒᆞ〮야〮 즛의 앗〯고〮 다〯 머그〮라〮 又方卒中鬼擊及刀兵所傷血滿膓中不出煩悶欲死雄黃一兩細硏如粉以溫酒調一分服日三服血化爲水{{*|}} ᄯᅩ〮 귓거시〮 믄득〮 티며〮갈〮 잠개〮예〮 허러〮 피〮 토ᇰ〮 안해〮ᄀᆞᄃᆞᆨᄒᆞ〮야〮 나디〮 몯〯ᄒᆞ〮야〮답〮ᄭᅡ와〮 죽ᄂᆞ닐〮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ᄃᆞᄉᆞᆫ 수레〮 ᄒᆞᆫ 分뿐〮을〮 프〮러〮 ᄒᆞ〮ᄅᆞ 세〯 번곰〮 머그〮면〮 피〮 믈〮 ᄃᆞ외ᄂᆞ〮니라〮 千金方治卒忤塩八合以水三升煮取一升半分二服得吐卽愈若小便不通筆頭七枚燒作灰末水和服之卽通{{*|}}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니〮 고툐〮ᄃᆡ〮 소곰 여듧〮 호ᄇᆞᆯ〮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거〮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ᄒᆞ〮다가〮 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붇〮 머리〮 닐구〮블〮 ᄉᆞ〮라〮 ᄀᆞᄅᆞ !ᄃᆡᇰ!ᄆᆡᇰ!ᄀᆞ〮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라〮 葛氏備急方中惡證候視其上唇裏弦者有白如黍米大以針決去之{{*|}} 中듀ᇰ惡ᅙᅡᆨ 證지ᇰ〮이 웃입시울〮 !인!안!ᄒᆞᆯ 보〯ᄃᆡ〮 ᄒᆡᆫ〮 거시〮 기장ᄡᆞᆯ〮ᄀᆞᆮ〮ᄒᆞ니〮 잇ᄂᆞ니〮 바ᄂᆞᆯ〮로〮ᄯᅡ〮 아ᅀᅩᆯ〮디〮니라 又方半夏末如豆大吹鼻中{{*|}} ᄯᅩ〮 半!빈〮!반〮!夏ᅘᅡᆼ〮末마ᇙ〮ᄋᆞᆯ〮 콩낫〯?만〮? 곳〮굼긔〮 불〯라〮 又方客忤者中惡之類也令人心腹絞痛脹滿氣衝心胸不卽治殺人 細辛 桂末等分內口中{{*|}}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ᄂᆞᆫ〮 中듀ᇰ〮惡ᅙᅡᆨ〮ㅅ類ᄅᆔᆼ〮니〮 사〯ᄅᆞ〮ᄆᆞ로〮 가ᄉᆞᆷ〮 ᄇᆡ〮 알ᄑᆞ며〮탸ᇰ〯만〮ᄒᆞ〮야〮 氣킝〮分분이〮 가ᄉᆞ〮매〮다와티〮ᄂᆞ니〮 즉재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細솅〮辛신과〮桂궹〮皮삥 ㅅ ᄀᆞᆯᄋᆞᆯ〮等드ᇰ〯分분ᄒᆞ〮야〮 입〮 안해〮녀흐〮라〮 又方卒得鬼擊之病無漸卒着如人刀刺狀胸脇腹內絞急切痛不可抑按或卽吐血或鼻中出血或下血一名鬼排治之灸鼻下人中一壯立愈{{*|}} ᄯᅩ〮 믄득〮 귓것 틴 病뼈ᇰ〮을〮 어〯더漸쪔〯漸쪔〯 아니〮ᄒᆞ〮야〮 믄득〮어〯두미〮 갈〮ᄒᆞ로〮 디르ᄂᆞᆫ ᄃᆞᆺ〮ᄒᆞ〮야〮 가ᄉᆞᆷ〮과〮 녑과〮 ᄇᆡ〮 안〮히ᄀᆞ자ᇰ〮 알파〮ᄆᆞᆫ지〮디〮 몯〯ᄒᆞ며〮 시혹〮 피〮ᄅᆞᆯ〮 吐통〮ᄒᆞ며〮 시혹〮 고해〮 피〮내〯며〮 시혹 아래〮 피〮나〮ᄂᆞ니〮 고툐〮ᄃᆡ〮 고〮 아랫〮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 을〮 ᄒᆞᆫ 붓글〮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臍下一寸三壯炙臍上一寸七壯{{*|}} ᄯᅩ〮 ᄇᆡᆺ복 아랫〮一ᅙᅵᇙ〮寸촌〮ᄋᆞᆯ〮 세〮 붓글〮 ᄯᅳ〮고〮 ᄇᆡᆺ복 우 一ᅙᅵᇙ〮寸촌ᄋᆞᆯ 닐굽〮 붓글〮 ᄯᅳ라〮 又方以淳酒吹內兩鼻中{{*|}} ᄯᅩ 됴〮ᄒᆞᆫ 술로 두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鼠屎末服如黍米不能飮之以少水和內喉中{{*|}} ᄯᅩ〮 쥐ᄯᅩᆼᄋᆞᆯᄇᆞᆺ아〮 기자ᇰᄡᆞᆯ〮만〮 머구〮ᄃᆡ〮 먹디〮 몯〯거든〮 믈〮져〯기 ᄒᆞ〮야〮 프〮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被鬼擊用竈心土爲末每服二錢新汲水調下及以少許吹鼻中{{*|}} 귓거싀〮게 마ᄌᆞ〮닐〮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먹그〮며 져〯기 고해〮 불〯라〮 又方{{*|恍惚見鬼}}發狂用平胃散加辰砂末棗湯調服{{*|}} ᄯᅩ 어즐ᄒᆞ〮야〮 귓것 보〮아〮 미치〮거든〮平뼈ᇰ胃ᅌᅱᆼ〮散산〮 애〮 朱즁砂상ㅅᄀᆞᆯᄋᆞᆯ〮 녀허〮 大땡〮棗조ᇢ〯湯타ᇰ애〮 프〮러 머그〮라〮 又方中惡客忤卒死者用皂角末吹鼻或硏韭汁灌耳中以艾灸臍中百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닐〮 皂쪼ᇢ〯角각〮ㅅ ᄀᆞᆯᄋᆞᆯ〮 고해〮 불〯라〮 시혹〮 염〮굣〮 즈〮블 ᄀᆞ〮라 귀예〮 븟고〮 ᄡᅮ〮그로〮 ᄇᆡᆺ보ᄀ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붓글〮 ᄯᅳ〮라〮 又方中惡客忤垂死用射香一錢硏和醋二合服之卽差{{*|}}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죽ᄂᆞ닐〮 射썅〮香햐ᇰ ᄒᆞᆫ 돈〯 ᄀᆞ라 초에〮 프〮러 두〮 호ᄇᆞᆯ〮 머그〮면〮 즉재 !둍〯!됻〯!ᄂᆞ〮니라〯 壽域神方凡卒死或先病痛或常寢臥忽絶皆是中惡救之以葱黃心刺入鼻內男左女右入深五寸若目中出血佳又用葱管吹其兩耳兩鼻孔中{{*|}} 믈읫 믄득〮 주구〮미 시혹〮 몬져 病!뼝〮!뼈ᇰ〮!을〮 알커나〮 시혹〮샤ᇰ녜〮 자다가〮 믄득〮 죽ᄂᆞ니〮 다〯 이〮 中듀ᇰ〮惡ᅙᅡᆨ〮이〮니〮 救구ᇢ〮호〯ᄃᆡ〮 팟〮 누른〮엄〯으〮로〮 고 안해〮 녀호〮ᄃᆡ〮 남지는〮 왼〯녁 겨〯지븐〮 올〮ᄒᆞᆫ녀긔〮 기피〮 五ᅌᅩᆼ〯寸촌〮이〮들〮에〮 ᄒᆞ〮야〮 ᄒᆞ〮다가〮 누내〮 피〮나면〮 됴〮ᄒᆞ니라〮 ᄯᅩ〮 팟〮 니〮프로〮 두〯 귀〮와〮 두〯 곳〮굼글〮 불〯라〮 又方取小便灌其口數遍卽能語{{*|}} ᄯᅩ〮 小쇼ᇢ〯便뼌을〮 이베〮 브ᅀᅩ〮믈〮 두〯ᅀᅥ〮 번 ᄒᆞ면〮 곧〮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中惡短氣欲死灸足兩大𧿹趾上甲後聚毛中各十四壯不愈再灸十四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뎔어〮 죽ᄂᆞ닐〮두〮 발〮엄지〮가〮락 톱〮 뒷〯 털〮 난ᄯᅡ〮ᄒᆞᆯ〮 열〯네〯 붓곰〮 ᄯᅮ〮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시〮 열〮네〯 붓글〮 ᄯᅳ〮라〮 又方驚怖死者用溫酒灌之卽蘇{{*|}} ᄯᅩ 놀〮라 주그〮닐〮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鬼魘鬼打第六== 經驗良方其證初到客舍或官驛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湏臾不救則死 牛黃 雄黃{{*|各一錢}}朱砂{{*|半錢}}巳上各硏爲細末和勻每挑一錢許床下燒次挑一錢用酒調灌之如無前藥用桃柳枝取東邊各三七寸煎湯三盞候溫倂灌服又無桃柳枝用竈心土搥碎爲細末每服二錢新汲井花水調灌更挑半指甲許吹入鼻中更用艾灸人中穴在鼻下幷灸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 그 證지ᇰ〮이〮 客ᄏᆡᆨ舍상〮ㅣ어나〮 시혹〮 驛역〯이〮어나〮 오래〮 사〯ᄅᆞᆷ 업〯슨〮 ᄎᆞᆫ〮 房바ᇰ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툐ᄆᆞᆯ〮 아라〮 오직〮 그 사〯ᄅᆞ미〮헐헐ᄒᆞᆯ 소릴〮 듣고〮 곧〮 사〯ᄅᆞ〮ᄆᆞ로〮 브르게〮 !ᄒᆞᆯ〮!훌〮!디니〮블로〮ᄃᆡ〮 ᄭᆡ디〮 아니〮ᄒᆞ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ᄉᆞᅀᅵ〮ᄅᆞᆯ〮 救구ᇢ〮티〮 아니〮ᄒᆞ면〮 죽ᄂᆞ니〮 牛ᅌᅮᇢ黃ᅘᅪᇰ과 雄ᅘᅮᇰ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돈〯과〮 朱즁砂상 半반〮 돈〯ᄋᆞᆯ〮 各각〮各각〮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골오〮 섯거〮 ᄒᆞᆫ 돈〯만〮 ᄯᅥ〮 사ᇰ 아래〮 ᄉᆞᆯ〮오〯 !비!버!거〮 ᄒᆞᆫ 돈〯ᄋᆞᆯ〮 수레〮 프〮러〮 머기〮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복〮샤ᇰ화나모와〮 버드〮나못 가〮지ᄅᆞᆯ〮 東도ᇰ녁긔〮칠 各각〮各각〮 세〯닐굽〮 寸촌〮ᄋᆞᆯ〮 가져〮다가〮 므〮?레? 글혀〮 세〯 盞잔〮ᄋᆞᆯ〮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복?샤ᇰ?화나모 버듨〮가〮지 업〯거든〮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누〯!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른〮!룬〮! 井졍〯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머기〮고〮 ᄯᅩ〮 半반〮 소ᇇ톱만〮 ᄯᅥ〮 고해〮 부러〮 드〮리고〮 ᄯᅩ〮 ᄡᅮ〮그로〮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ᄯᅳ〮고〮 두〯 !밠〮!뱘〯! !염!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ᄒᆞᆫ 부〯ᄎᆡᆺ닙〮 만〮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ᄒᆞᆫ닐굽〮 붓글〮 ᄯᅳ〮면〮 곧〮 사〯ᄂᆞ〮니라〮 千金方治鬼擊雞屎白{{*|如棗大}}靑花麻一把{{*|卽常用麻}}右二味以酒七升煮取三升熱服須臾發汗若不汗熨斗盛火灸兩脇下使熱汗出愈{{*|}} 귓것 티〮닐〮 고툐〮ᄃᆡ〮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것 대〯초만〮과〮 삼〮 ᄒᆞᆫ 줌〯과〮 두〯 가지〮ᄅᆞᆯ〮 술 닐굽〮 되〮로〮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더우〮닐〮 머그〮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ᄯᆞᆷ〮나〮ᄂᆞ니〮 ᄒᆞ〮다가〮 ᄯᆞᆷ〮나디〮 아니〮커든〮다리〮우〮리예〮 블〮 다마〮 두〯 녁 녀〮블〮ᄧᅬ〯야〮 덥〯게〮 ᄒᆞ면〮 ᄯᆞᆷ〮나면〮 됻〯ᄂᆞ〮니라〮 聖惠方卒魘忌燈火照照則神魂遂不復入乃至於死人有於燈光前魘者本在明處是以不忌火也{{*|}} ᄀᆞ오〮누르〮이닐〮 블〮혀〮 뵈〯요미〮 몯〯ᄒᆞ리〮니〮 블〮 뵈〯면〮 넉시〮 도로 드〮디〮 아니〮ᄒᆞ〮야〮 죽ᄂᆞ니〮라〮 블〮 현〯 ᄃᆡ〮 이셔〮 ᄀᆞ오누르〮이닌〮본〮ᄅᆡ ᄇᆞᆯᄀᆞᆫ〮 ᄃᆡ 이실ᄉᆡ〮 블〮 혀〯미〮 므〮던ᄒᆞ니〮라〮 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 믄득 ᄀᆞ오〮누르〮여 ᄎᆞ〮림 몯〯ᄒᆞ〮거든〮皂쪼ᇢ〯莢겹〮 ᄀᆞᆯᄋᆞᆯ〮 ᄀᆞ〮ᄂᆞᆫ 대〮로〮 두〯 곳〮굼긔〮 불〯면〮 즉〮재 니〯ᄂᆞ니〮 잇사ᄋᆞ〮래도〮 어루〮 불〯리!라〮!라〮! 又方治卒魘右以雄黃細硏以蘆管吹入兩鼻中桂心末亦得{{*|}} ᄯᅩ〮 과ᄀᆞᆯ이〮ᄀᆞ오눌〯엿〮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ᄀᆞᆯ〮로 부러〮 두〯 고해〮 녀흐라〮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ᄅᆞ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菖蒲末吹兩鼻中以桂末納於舌下亦得{{*|}}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불〯오〮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ᆯ〮 혀〮 아래〮 녀후〮미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雄黃如棗核大繫於左臂令人終身不魘寐也{{*|}}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ᆼᄋᆞᆯ〮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ᄒᆞ닐〮 왼〯녁ᄇᆞᆯᄒᆡ〮 ᄃᆞ〮라 두면〮 사〯ᄅᆞ〮ᄆᆞ로〮 죽ᄃᆞ록〮 ᄀᆞ오〮누르〮이디〮 아니〮케〮 ᄒᆞ〮ᄂᆞ〮니라〮 又方服猪脂如雞子大卽差未差再服{{*|}} ᄯᅩ〮 猪뎡脂징〯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 됴〯티 아니〮커든〮 다시〮 머그〮라〮 備急大全良方療臥忽不悟愼勿以火照則殺人但唾其面更痛囓足大拇指甲際卽省更以半夏末吹入鼻中更以韭葉擣取自然汁灌鼻孔中冬月用韭根擣取自然汁灌卽活{{*|}} 자〮다가〮 ᄭᆡ〮디 몯〯ᄒᆞ닐〮 고툐〮ᄃᆡ〮 자ᇝ〯간도〮 블〮 혀 뵈〯디마롤〮디니〮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오직〮 ᄂᆞᄎᆡ〮 춤〮받고〮 ᄯᅩ〮 발〮엄지〮가락 톱〮 ᄉᆞᅀᅵ〮ᄅᆞᆯ〮ᄆᆡ이〮 믈면〮 즉〮재 ᄭᆡ〮ᄂᆞ〮니라〮 ᄯᅩ〮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곳〮굼긔〮 불〯오〮 ᄯᅩ〮 부〯ᄎᆡᆺ 니〮플〮 디허〮 즈〮브로〮 곳굼긔〮 브ᅀᅳ라〮겨ᅀᅳ〮렌 부〯ᄎᆡᆺ 불휘〮ᄅᆞᆯ〮 디허〮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取츙〯ᄒᆞ〮야〮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卒死第七== 千金方治卒死無脉牽牛臨鼻上二百息牛舐必瘥牛不肯舐着塩汁塗面上牛卽肯舐{{*|}} 가ᄀᆞ〮기 주거〮 脉ᄆᆡᆨ〮업〯스닐〮 고툐〮ᄃᆡ〮 쇼〮ᄅᆞᆯ〮잇거〮 고〮 우희〮 다혀〮 二ᅀᅵᆼ〮百ᄇᆡᆨ〮 버ᄂᆞᆯ〮숨〯쉬울디〮니 ᄉᆈ〮 할ᄒᆞ〮면〮 반ᄃᆞ〮기 됻〯ᄂᆞ〮니라〮쇼〮옷〮 할티〮 아니〮!키〮!커!든〮 소곰므〮를〮 ᄂᆞᄎᆡ〮 ᄇᆞᄅᆞ면〮 ᄉᆈ〮 곧〮 할ᄂᆞ니〮라〮 又方馬屎絞取汁飮之無新者水和乾者亦得{{*|}} ᄯᅩ〮 ᄆᆞᆯᄯᅩᇰᄋᆞᆯ〮 ᄧᅡ〮 즈〮블 取츙〮ᄒᆞ〮야〮 마시〮라〮 새〮 업〯거든〮 므〮레 ᄆᆞᄅᆞ닐〮 프〮러도〮 ᄯᅩ〮 됴〯ᄒᆞ〮니라〮 肘後方乾者以人溺解之{{*|}} ᄆᆞᄅᆞ닌〮 사〯ᄅᆞᄆᆡ〮 오조〮ᄆᆞ로〮 플〮라〮 又方灸熨斗熨兩脇下又治尸厥{{*|}} ᄯᅩ〮 다리〮우릴〮 데여〮 두〮 녀블〮 울〮ᄒᆞ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ᄂᆞ〮니라 又針閒使各百餘息又灸鼻下人中又治尸厥{{*|}} ᄯᅩ〮閒간使ᄉᆞᆼ〮 ᄅᆞᆯ〮 針짐호〮ᄃᆡ〮 一ᅙᅵᇙ〮百ᄇᆡᆨ〮 숨〯 남ᄌᆞ기 ᄒᆞ고〮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ᄯᅳ〮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 ᄂᆞ니〮라〮 又方治五絶夫五絶者一曰自縊二曰墻壁壓迮三曰溺水四曰魘寐五曰産婦乳絶取半夏一兩細下篩吹一大豆許內鼻中卽活心下溫者一日亦可活{{*|}} ᄯᅩ〮 다ᄉᆞᆺ 주그〮닐 고티〮ᄂᆞ니〮 ᄒᆞ나ᄒᆞᆫ〮 목 ᄆᆡ야〮 주그〮니오〮 둘〯흔 담〮지즐〮이〮니오〮 세〯흔 므〮레 ᄲᅡ〮디니〮오〮 !네〯!녜〯!흔ᄀᆞ〮오〮누르〮이〮니오〮 다ᄉᆞ〮ᄉᆞᆫ 아〮기나타가〯 주그〮니니〮 半반〮夏ᅘᅡᆼ〮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처〮 큰 콩 낫〯만〮 ᄒᆞ닐〮 곳〮굼긔〮 부러〮 녀흐면〮 즉〮재 사〯ᄂᆞ니〮 가ᄉᆞ〮미 ᄃᆞᄉᆞ닌〮ᄒᆞᆯ리〮라도〮 ᄯᅩ〮 어루〮 살〯리라〮 聖惠方卒死中惡及尸厥以緜漬好酒手挼汁令入鼻中幷持其手足莫令驚動{{*|}} 과ᄀᆞᆯ!이〮!ᄋᆡ〮! 주그〮니와〮 中듀ᇰ〮惡ᅙᅡᆨ〮ᄒᆞ니〮와〮 尸싱厥궈ᇙ〮ᄒᆞ니〮ᄅᆞᆯ〮소오ᄆᆞ〮로 됴〯ᄒᆞᆫ 술저져〮 소〮ᄂᆞ로〮 汁집〮을〮ᄲᅡ〮 곳〮굼긔〮 들〮에 ᄒᆞ고〮 손〮바〮ᄅᆞᆯ〮 자바〮 놀〯라디〮 아니〮케 ᄒᆞ라 又方擣韮取汁以灌口中{{*|}} ᄯᅩ〮 부〯ᄎᆡᄅᆞᆯ〮 디허〮 汁집〮을〮 取츙〯ᄒᆞ〮야〮 이베〮 브ᅀᅳ라〮 又方取猪膏如雞子大以醋一合煮沸灌喉中良{{*|}} ᄯᅩ〮 猪뎡膏고ᇢ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醋총〮 ᄒᆞᆫ 호배〮 글혀〮 모ᄀᆡ〮 브ᅀᅳ면〮 됴〮ᄒᆞ〮니라〮 又方卒死而壯熱者用白礬半斤以水二豆斗煮消以漬脚卽活{{*|}} ᄯᅩ 과ᄀᆞᆯ이〮 죽고〮 壯자ᇰ〮히〮 熱ᅀᅧᇙ〮ᄒᆞ닐〮白ᄈᆡᆨ〮礬뻔 半반〮 斤근ᄋᆞᆯ〮 믈〮 두〯 마래〮 글혀〮 노겨〮허튀〮ᄅᆞᆯ〮 ᄃᆞ〮ᄆ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用小便灌其面卽能迴語{{*|}} ᄯᅩ〮 小쇼ᇢ〯便뼌으〮로〮 ᄂᆞᄎᆡ ᄲᅳ리〮면〮 즉〮재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以雄雞頭取血以塗其面乾復塗之{{*|}} ᄯᅩ〮 수〮ᄃᆞᆯᄀᆡ〮 머리〮엣〮 피〮 내〯아〮 ᄂᆞᄎᆡ〮 ᄇᆞᄅᆞ〮고〮 ᄆᆞᄅᆞ거든〮 다시〮 ᄇᆞᄅᆞ라〮 又方治忤打死心稍暖取葱白納於下部中及鼻中湏臾卽活{{*|}}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ㅣ어나〮귓거시〮 텨〮 주그〮니 가ᄉᆞ〮미〮져〮기 ᄃᆞᆺᄒᆞ닐〮 고툐〮ᄃᆡ〮 파〮ᄒᆞᆯ〮밋구무와〮 곳〮굼긔〮 녀흐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사〯ᄂᆞ〮니라 又方治卒客忤不能言桔梗末一兩射香末一分右二味更硏令勻每服二錢以溫水調下{{*|}} ᄯᅩ〮 과ᄀᆞᆯ이〮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말〯 몯〯ᄒᆞ〮거든〮桔겨ᇙ〮梗겨ᇰ〯 ㅅ 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分뿐을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머기〮라〮 千金方治一切卒死灸臍中百壯{{*|}} 一ᅙᅵᇙ〮切쳐ᇙ〮 과ᄀᆞᆯ이〮 주그〮닐〮 고툐〮ᄃᆡ〮 ᄇᆡᆺ복을 百ᄇᆡᆨ〮壯자ᇰ〮을〮 ᄯᅳ〮라 ==卒心痛第八<sub>腹痛附</sub>== 聖惠方治卒心痛氣悶欲絶面色靑四肢逆冷釅醋{{*|一合}}雞子{{*|一枚打破}}右件相和攪勻煖過頓飮之{{*|}}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 알파〮 氣킝〮分분이〮닶〮가와〮 주거〮가〮 ᄂᆞ치〮 프르〮고〮 四ᄉᆞᆼ〯肢징 ᄎᆞ〮닐〮 고툐〮ᄃᆡ〮 醋총〮 ᄒᆞᆫ 홉과〮 ᄃᆞᆯᄀᆡ!알〮!알〮! ᄒᆞᆫ 나〯ᄎᆞᆯ〮ᄣᆞ려〮 섯거〮 골오〮 프〮러 ᄃᆞ시 ᄒᆞ〮야〮 다〯 머기〮라〮 又方白艾二兩熟者右以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分爲三服稍熱服之{{*|}} ᄯᅩ〮 ᄒᆡᆫ〮 ᄡᅮᆨ〮 두〯 兩랴ᇰ〯니기〮 디후〮닐〮 믈〮 두〯 큰〮잔〮애〮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세〮 服!쁙〮!뽁〮!애〮 ᄂᆞᆫ화〯 져〯기 더우〮닐〮 머그〮라〮 經驗良方布衷塩如彈丸大燒令赤溫酒化服溫水亦得{{*|}} 뵈〮로 소고ᄆᆞᆯ〮 탄ᄌᆞ〮만〮ᄢᅳ려〮 ᄉᆞ〮라 븕게〮 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그〮라〮 ᄃᆞᄉᆞᆫ 믈〮도〮 ᄯᅩ〮 ᄒᆞ리〮라〮 壽域神方草菓 玄胡索 乳香 沒藥 五靈脂{{*|各等分}}右爲末每服二錢溫酒調下{{*|}} 草초ᇢ〯菓광〯와〮玄ᅘᆑᆫ胡ᅘᅩᆼ索짝〮 과〮乳ᅀᅲᆼ〯香햐ᇰ 과〮 沒모ᇙ〯藥약〮과〮五ᅌᅩᆼ〯靈려ᇰ脂징〯 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기〮라〮 又方桃白皮煮汁宜空腹服之{{*|}} ᄯᅩ〮 복샤ᇰ화나못 ᄒᆡᆫ〮 거츨〮 글혀〮 汁집〮을〮 空고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生香油半合溫服妙{{*|}} ᄯᅩ〮 ᄎᆞᆷ〮기름〮 半반〮 호블 ᄃᆞ시 ᄒᆞ〮야〮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令病人當戶坐若男病婦人與水一柸飮之若女病男子與水一柸飮之用新汲水尤佳{{*|}} ᄯᅩ〮 病뼈ᇰ〮人ᅀᅵᆫ으〮로〮이페〮 안치〮고〮 ᄒᆞ다가 남지니〮 病뼈ᇰ〮커든〮 겨〯지비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고〮 ᄒᆞ〮다가〮 겨〯지비〮 病뼈ᇰ〮커든〮 남지니〮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라〮 ᄀᆞᆺ 기룬〮 므〮리 더 됴〯ᄒᆞ〯니라〮 又以蜜一分水二分飮之亦妙{{*|}} ᄯᅩ〮 ᄢᅮᆯ〮 ᄒᆞᆫ 分분과〮 믈〮 두〯 分분을〮 마쇼〮미ᄯᅩ〮 됴〮ᄒᆞ〮니라〮 又方治腹痛細嚼石菖蒲飮凉水送下妙{{*|}} ᄯᅩ〮 ᄇᆡ〮알힐〮 고툐〮ᄃᆡ 石쎡〮菖챠ᇰ蒲뽕ᄅᆞᆯ〮 ᄂᆞ로니 십고〮 ᄎᆞᆫ〮 므〮를 마셔〮ᄂᆞ리〮오미〮 됴〮ᄒᆞ〮니라〮 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絞取汁飮之{{*|}} ᄯᅩ〮 ᄯᅡ해〮 ᄒᆞᆫ 져〯고맛〮 구〮들 ᄑᆞ〮고〮 믈〮로 구데〮 ᄀᆞᄃᆞ기 븟고〮 니기〮 후ᇰ두ᅌᅧ〮 汁집〮을〮 取츙〯ᄒᆞ야〮 마시〮라〮 又方令人騎其腹溺臍中{{*|}} ᄯᅩ〮 사〯ᄅᆞ미〮 그 ᄇᆡ〮ᄅᆞᆯ 타〮 안자〮 ᄇᆡᆺ〮보개〮 오좀〮 누게〮 ᄒᆞ라〮 又方針手足十指頭出血灸臍中七七壯{{*|}} ᄯᅩ〮 손〮발〮 열〮 가락 그〮틀〮 針짐ᄒᆞ야〮 피〮내〯오〮 ᄇᆡᆺ〮보ᄀᆞᆯ 七치ᇙ〮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治心腹俱脹疼痛氣短欲死或已絶者取梔子十四枚豉五合以水二盞先煮豉取一盞半去滓入梔子再煎取一盞去渣服半盞不愈盡服之{{*|}} ᄯᅩ〮 가ᄉᆞᆷ〮 ᄇᆡ〮 다〯 탸ᇰ〯만〮ᄒᆞ〮야〮 알ᄑᆞ고〮 氣킝〮分분이 뎔어〮 죽ᄂᆞ니〮와〮 시혹〮 ᄒᆞ마〮 주그〮닐〮 고툐〮ᄃᆡ梔징子ᄌᆞᆼ〯 열〮네〯 낫〯과〮 젼국 다ᄉᆞᆺ 호블〮 믈〮 두〯 잔〮ᄋᆞ로 몬져 젼국 글혀〮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滓ᄌᆡᆼ〮 앗〯고〮 梔징子ᄌᆞᆼ〮 녀허〯 다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츄ᇢ〯ᄒᆞ〮야〮 즛의 앗〯고〮 半반〮 잔〮ᄋᆞᆯ〮 머구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 머그〮라〮 又方治卒心腹煩滿疼痛欲死者以熱湯浸手足妙冷再換{{*|}} ᄯᅩ〮 과ᄀᆞᆯ이〮 가ᄉᆞᆷ〮 ᄇᆡ〮 煩뻔滿만〯ᄒᆞ〮여〮 알파〮 죽ᄂᆞ닐〮 고툐〮ᄃᆡ 더운〮 므〮레 손〮바〮ᄅᆞᆯ ᄃᆞᆷ고〮미 됴〯ᄒᆞ니〮 ᄎᆞ거든〮 다시〮 ᄀᆞᆯ라〮 又方卒煩滿嘔逆灸乳下一寸七壯卽愈{{*|}} ᄯᅩ〮 과ᄀᆞᆯ이〮 煩뻔滿만〯ᄒᆞ〮야〮吐통〯逆ᅌᅧᆨ〮 ᄒᆞ〮거든〮 졋〮 아랫〮 ᄒᆞᆫ 寸촌〮ᄋᆞᆯ 七칧〮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兩手大母指內邊爪後第一紋頭各一壯又灸兩手中指爪下一壯卽愈{{*|}} ᄯᅩ〮 !드〮!두〯! 손〮 엄지〮가락 안〮녁 소ᇇ토ᄇᆞ〮로셔〮 첫〮 그ᇝ〮 그〮틀 各각〮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ᄯᅩ〮 두〯 손 가?온〮ᄃᆡᆺ〮 가락 소ᇇ톱 아래〮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九種心痛取當大歲上新生槐枝一握去兩頭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 아홉〮 가짓〮 가ᄉᆞᆷ〮 알힐〮 고툐〮ᄃᆡ大땡〮歲ᄉᆒᆼ〯方바ᇰ앳〮 올ᄒᆡ〮 난회홧가〮지 ᄒᆞᆫ우희〮윰을〮 두〯 녁 그〮틀〮 버히〮고〯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治卒中惡心痛 苦參{{*|三兩}}㕮咀以好醋一升半煮取八合强者頓服老小分二服{{*|}} ᄯᅩ〮 과ᄀᆞᆯ이〮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 알ᄂᆞ닐〮 고툐〮ᄃᆡ〮苦공〯參ᄉᆞᆷ 석〯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됴〯ᄒᆞᆫ 醋총〮 ᄒᆞᆫ 되〮 半반〮ᄋᆞ〮로 글혀〮 여듧〮 호ᄇᆞᆯ〮 取츙〯ᄒᆞ〮야〮 強가ᇰᄒᆞ닌〮 다〯 먹고 늘그〮니와 져므〮니ᄂᆞᆫ〮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桂心{{*|一兩}}㕮咀以水四升煮取一升半分二服{{*|}} ᄯᅩ〮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넉〯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霍亂吐瀉第九<sub>沙證附</sub>== 經驗良方始因飮冷或胃寒或失飢或大怒或乘舟車傷動胃氣令人上吐上吐不止令人下瀉吐瀉倂作遂成霍亂頭旋眼暈手脚轉筋四肢逆冷用藥遲緩湏臾不救吳茱萸 木瓜 食塩{{*|各半兩}}右三味同炒令焦先用磁甁盛水三升煮令百沸却入前藥同煎至二升已下傾一盞冷熱隨病人意與服藥入卽醒{{*|}} 처〮ᅀᅥ믜 ᄎᆞᆫ〮믈〮 마쇼〮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치〮위〮에 ᄃᆞᆫ니〮거나〮 시혹〮 ᄇᆡ〮 골커나〮 시혹 너무 怒농〮커나〮 시혹〮 ᄇᆡ〮와〮 술위와〮타〮 胃ᅌᅱᆼ氣킝〮ᄅᆞᆯ〮 傷샤ᇰᄒᆞ면〮 사〯ᄅᆞ미〮 우흐〮로 吐통〯케〮 ᄒᆞ〮ᄂᆞ〮니〮 우흐〮로 吐통〯호〮ᄆᆞᆯ〮그치〮디 몯〯ᄒᆞ면〮 사〯ᄅᆞ미〮 아래〮로 즈츼〮에〮 ᄒᆞ〮ᄂᆞ니〮 吐통〯와〮 즈츼〮유미〮 ᄒᆞᆫᄢᅴ〮니르와ᄃᆞ면〮 霍확〮亂란〮이〮 ᄃᆞ외야〮 머리〮휫두르며〮 누〮니 휫두르며〮 손밠〮 히〮미올ᄆᆞ〮며 四ᄉᆞᆼ〮肢징 ᄎᆞ〮ᄂᆞ니〮 藥약〮ᄋᆞᆯ디마〮니 ᄒᆞ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吳ᅌᅩᆼ茱쓩萸융 와〮木목瓜광 와〮 소곰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 ᄃᆡ〮봇가〮 눋〯게 ᄒᆞ〮야〮 몬져 沙상甁뼈ᇰ에〮 믈〮 서〯 되〮ᄅᆞᆯ〮 다마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커든〮 알ᄑᆡᆺ〮 藥약〮ᄋᆞᆯ〮 녀허〮 ᄒᆞᆫᄃᆡ〮 글혀〮 두〯 되예 니를〮어든〮 ᄒᆞᆫ 잔ᄋᆞᆯ〮 브ᅀᅥ〮 ᄎᆞ〮며 더우〮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ᄠᅳ〮들 조차〮 주〮어 머기〮면〮 藥약〮이〮 들〮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倉卒無前藥用枯白礬爲末每服一大錢百沸湯點服{{*|}} ᄒᆞ〮다〯가〮 時씽急급〮ᄒᆞ〮야〮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枯콩白ᄈᆡᆨ〮礬뻔 을〮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큰〮 돈〯ᄋ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如無白礬只用塩一撮醋一盞同煎至八分溫服或塩梅醎酸等物皆可煮服{{*|處方本以鹹醋二物煮}}{{*|}} ᄒᆞ〮다가〮 白ᄈᆡᆨ〮礬뻔이〮 업〯거든〮 소곰 ᄒᆞᆫ져붐〮과〮 醋총〮 ᄒᆞᆫ 잔〮ᄋᆞᆯ〮 ᄒᆞᆫᄃᆡ〮 글혀〮 여듧〮 分뿐〮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고〮 시혹〮 소고미〮나梅ᄆᆡᆼ實씨ᇙ〮 이〮나 ᄧᆞᆫ〮 것과〮싄 것ᄃᆞᆯ〮히 다〯 어루〮 글혀〮 머귤〮디〮니라〮 又方脚手轉筋赤蓼莖葉細切三合水四合酒二合同煎取四合分作二溫服{{*|}} ᄯᅩ〮 발〮 손 히〮미 옮〯거든〮 블근〮 엿귓〮 줄기〮와〮 닙〮과〮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세〯 홉과〮 믈〮 너〯 !흡!홉!과〮 술 두〯 홉과〮 ᄒᆞᆫᄃᆡ〮 글혀〮 네〮 호블〮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脚轉筋用大蒜磨脚心令遍熱卽差{{*|}} ᄯᅩ〮 밠 히〮미 옮〯거든〮 굴〯근 마ᄂᆞ〮ᄅᆞᆯ〮 밠〮바다〮ᅌᅢ〮 ᄲᅵ븨〮여 두루 덥〯게〮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絞腸沙痛不可忍或展轉在地或起或仆其膓絞縮在腹此是中毒之深湏臾能令人死古方名乾霍亂急用塩一兩熱湯調灌入病人口中塩氣一到腹其痛卽定又將石沙炒令赤色冷水淬之良久澄淸水一二合服之愈{{*|}} ᄯᅩ〮絞교ᇢ〯腸땨ᇰ沙상ㅣ 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야〮 시혹〮 ᄯᅡ해〮 그울며〮 시혹〮 닐〯며〮 시혹〮 업더〮디〮여 그膓땨ᇰ 이〮 ᄇᆡ〮예〮뷔〯트〮러 움주쥐여〮 잇ᄂᆞ니〮 이〮 毒독〮ᄋᆞᆯ〮 마조〮미 기퍼〮 아니〮한 ᄉᆞᅀᅵ〮예〮 사〯ᄅᆞ미〮 죽게〮 ᄒᆞ〮ᄂᆞ니〮 녯〮 方바ᇰ文문에〮 일후미 乾간霍확〮亂롼이〮니 ᄲᆞᆯ리〮 소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 므〮레 프〮러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이베〮 브ᅀᅳ라〮 소고ᇝ 氣킝〮分분이〮 ᄇᆡ〮예〮 들〮면〮 그 알포〮미 곧〮 긋거든〮 ᄯᅩ〮호ᄀᆞᆫ〮 돌〯ᄒᆞᆯ〮 봇가 븕게〮 ᄒᆞ〮야〮 ᄎᆞᆫ〮므〮레 ᄃᆞᆷ가〮안초〮아 ᄆᆞᆯ겨〮 그 믈〮 ᄒᆞᆫ두〯 호블〮 머그〮면〮 됻〯ᄂᆞ〮니라 葛氏備急方霍亂煩悶湊滿者用塩納臍中灸二七壯{{*|}} 霍확亂롼〮ᄒᆞ〮야〮 닶〮가와〮 탸ᇰ〯만ᄒᆞ닐 소고ᄆᆞᆯ〮 ᄇᆡᆺ보개〮 녀코〮 二ᅀᅵᆼ〮七치ᇙ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霍亂心腹脹痛者服乾薑屑三方寸匕{{*|}}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탸ᇰ〯만ᄒᆞ〮야〮 알ᄂᆞ닐〮 乾간薑가ᇰㅅ ᄀᆞᆯᄋᆞᆯ세〯 수〮를 머기〮라〮 又方小蒜一升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之{{*|}} ᄯᅩ〮 호ᄀᆞᆫ 마ᄂᆞᆯ〮 ᄒᆞᆫ 되〮ᄅᆞᆯ〮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生薑}}一斤切以水七升煮取二升分爲三服{{*|}} ᄯᅩ〮 生ᄉᆡᇰ薑가ᇰ ᄒᆞᆫ 斤근을〮 사ᄒᆞ〮라〮 믈〮 닐굽〮 되〮로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세〯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若轉筋桂半夏等分末方寸匕水一升和服{{*|}} ᄯᅩ〮 히〮미 올ᄆᆞ〮!날〮!닐〮! 桂ᄀᆒᆼ〮皮삥와〮 半반〮夏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수〮를〮 믈〮 ᄒᆞᆫ 되〮예〮 프〮러 머그〮라〮 又方生大豆屑酒和服方寸匕{{*|}} ᄯᅩ〮 ᄂᆞᆯ콩 ᄭᆞᆯᄋᆞᆯ〮 수레〮 프〮로ᄃᆡ〯 ᄒᆞᆫ〮 수〮를〮 머그〮!리〮!라〮! 又方治霍亂吐下後大渴多飮則殺人以黃米{{*|卽黍米}}五升水一斗煮之令得三升澄淸稍稍飮之莫飮餘物也{{*|}} ᄯᅩ〮 霍확〮乱롼〮ᄒᆞ〮야〮 吐통〮下ᅘᅡᆼ〮ᄒᆞᆫ 後ᅘᅮᇢ〯에〮 ᄀᆞ자ᇰ〮 목 ᄆᆞᆯ라〮 믈〮 하〮 머그〮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기자ᇰᄡᆞᆯ〮 닷 되〮ᄅᆞᆯ〮 믈〮 ᄒᆞᆫ 마래〮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ᄆᆞᆰ안초〮아〮 젹젹 먹고〮 다ᄅᆞᆫ 믈〮 먹디〮 마롤〮디〮니라〮 又方治霍亂轉筋垂死敗蒲席一握細剉漿水一盞煮汁溫溫頓服{{*|}}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ᅙᅵ〮!히〮!미 올마〯 죽ᄂᆞ닐〮 고툐〮ᄃᆡ〮 헌〯 부들〮 지즑〮 ᄒᆞᆫ 우후〮믈〮 ᄀᆞ〮ᄂᆞ리〮 사ᄒᆞ〮라〮漿쟈ᇰ水ᄉᆔᆼ〯 ᄒᆞᆫ 盞잔〮애〮 글혀〮 汁집〮을〮 ᄃᆞ시ᄒᆞ〮야〮 다〯 머그〮라〮 直指方霍亂吐瀉心腹作痛用炒塩二梡紙包紗護頓其胸前幷腹肚上以熨斗火熨氣透卽蘇續又以炒塩熨其背{{*|}} 霍확亂롼〮 吐통〯瀉샹〯 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커든〮 봇ᄀᆞᆫ〮 소곰 두〯보ᅀᆞ〮ᄅᆞᆯ〮 죠ᄒᆡ〮에〮 ᄡᆞ〮고〮 紗상로〮 ᄢᅳ려〮 가ᄉᆞᆷ〮과〮 ᄇᆡ〮예어ᇇ고〮 다리〮우리〮로〮 블〮 다마 다려〮 氣킝〮分분이〮ᄉᆞᄆᆞᄎᆞ!먼〮!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ᄯᅩ〮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드ᇰ을〮 熨ᅙᅮᇙ〮ᄒᆞ라〮 聖惠方霍亂吐不止欲死 生薑{{*|二兩}}牛糞三合右以水三大盞煎至一盞半去滓分溫三服{{*|}} 霍확〮亂롼〮ᄒᆞ〮야〮 吐통〯ᄅᆞᆯ〮 그치〮디 몯〯ᄒᆞ〮야〮 죽ᄂᆞ닐〮 生ᄉᆡᇰ薑가ᇰ 두〯 兩랴ᇰ〯과〮 ᄉᆈ〯ᄯᅩᇰ 서〯 호ᄇᆞᆯ〮 믈〮 세〯 큰〮 盞잔〮애〮 글혀〮 ᄒᆞᆫ 盞잔〮 半반〮애〮 니르〮커든〮 滓ᄌᆡᆼ〮 잇〯고〮 ᄃᆞ시 ᄒᆞ〮야〮 세〯 버네 머그〮라〮 經驗秘方治霍亂吐瀉丁香七枚細嚼新汲水送下如不能嚼硏細涼水調下亦可{{*|}} 霍확亂롼〮 吐!통〮!통〯!瀉샹〯ᄅᆞᆯ〮 고툐〮ᄃᆡ〮丁뎌ᇰ香햐ᇰ 닐굽〮 나〯ᄎᆞᆯ〮 ᄂᆞ로니〮 십고〮 ᄀᆞᆺ 기룬〮 믈〮로 ᄂᆞ리〮오ᄃᆡ〮 ᄒᆞ〮다가〮 십디〮 몯〯거든〮 ᄀᆞ〮ᄂᆞ리〮 ᄀᆞ〮라 ᄎᆞᆫ〮므〮레 프〮러 ᄂᆞ리옴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菉豆 胡椒{{*|各七七粒}}右擣爲末新汲水調服不拘時{{*|}} ᄯᅩ〮菉록〮豆뚜ᇢ〮 와〮胡ᅘᅩᆼ椒죠ᇢ 와 各각〮 닐굽〮닐굽〮 나〯ᄎᆞᆯ〮 디허〮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 머구〮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말〯라〮 醫方集成姜塩飮治乾霍亂欲吐不吐欲瀉不瀉 塩{{*|一兩}}生薑{{*|切半兩}}右同炒令色變以水一梡煎溫服甚者加童子小便一盞{{*|}} 薑가ᇰ塩염飮ᅙᅳᆷ〯 은〮 乾간霍확〮亂롼〮이〮 吐통〯코져〮 호〮ᄃᆡ 吐통〯티〮 몯〯ᄒᆞ고 즈츼〮오져〮 호〮ᄃᆡ 즈츼〮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소곰 ᄒᆞᆫ 兩랴ᇰ〯과〮 生ᄉᆡᇰ薑가ᇰ 사ᄒᆞ〮로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ᄃᆡ 봇가 비〮치 다ᄅᆞ거든〮 믈〮 ᄒᆞᆫ 보ᅀᆞ〮로〮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甚씸〯ᄒᆞ니〮란〮 아ᄒᆡ〮 오좀〮 ᄒᆞᆫ 盞잔ᄋᆞᆯ〮 조쳐〮 머기〮라〮 壽域神方霍亂已死上屋喚魂以諸治皆至而猶不差捧病覆臥之伸兩臂對以繩度兩肘尖頭依繩下夾背脊大骨空中去脊各一寸灸之百壯不治者可灸肘椎已試數百人皆灸畢卽起坐驗{{*|}} 霍확亂롼〮ᄒᆞ〮야〮 ᄒᆞ마〮 죽거든〮 집 우희〮 올아〮 넉슬〮 브르고〮 여러〮가짓〮 고툐〮ᄆᆞᆯ〮 다〯 호〮ᄃᆡ ᄉᆞᆫᄌᆡ〮 됴〯티 아니〮커든〯 病뼈ᇰ〮ᄒᆞ닐〮업더리〮와다 뉘이〮고〮 두〯 ᄇᆞᆯᄒᆞᆯ〮 펴고〮 노ᄒᆞ〮로 두〯 ᄇᆞᆯ톡〯 그〮틀 견주〮고〮 노ᄒᆞᆯ〮브터〮 드ᇰᄆᆞᄅᆞᆺ ᄲᅧ〮를〮 ᄢᅧ〮 가온〮ᄃᆡ 뷔우〮고〮 드ᇰᄆᆞᆯᄅᆞ〮로〮셔〮 各각〮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ᅮ〮ᄃᆡ 됴〯티 아닌〮ᄂᆞ니〮란 肘듀ᇢ〯椎ᄄᆔᆼᄅᆞᆯ〮 ᄯᅳ〮라 ᄒᆞ마〮 數슝〮百ᄇᆡᆨ〮人ᅀᅵᆫ을〮 디〯내〮요니〮 다〯ᄯᅩᆷ〮 ᄆᆞᄎᆞ〮면〮 즉〮재 니러〮 안ᄌᆞ니〮라〮 又方治絞腸沙腹痛不可忍者嘔吐泄瀉及中署霍亂心煩渴不省人事兼治急心痛白蜜馬糞二味不以多少擂新水化下去滓頓服一碗雖曰穢汚却有神功無蜜亦可{{*|}} ᄯᅩ〮 絞교ᇢ〯腸땨ᇰ沙상ㅣ ᄇᆡ〮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니와〮 吐!틍〯!통〯!ᄒᆞ고〮즈츼〮ᄂᆞ니〮와〮 中듀ᇰ〮暑셩〯ᄒᆞ며〮 霍확〮亂롼〮ᄒᆞ〮야〮 ᄆᆞᅀᆞ미〮 煩뻔渴카ᇙ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ᄂᆞ닐〮 고티〮고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알힐〮 조쳐〮 고티〮ᄂᆞ니〮 ᄒᆡᆫ〮 ᄢᅮᆯ〮와〮 ᄆᆞᆯᄯᅩᇰ과〮 두〯 가!저〮!지〮!를〮 새〮 므〮레 프〮러 즛의 앗〯고〮 ᄒᆞᆫ 보ᅀᆞ〮ᄅᆞᆯ〮 다〯 머그〮라〮 비록〮 더〯러〮우나〮 神씬奇긩ᄒᆞᆫ 功고ᇰ이〮 잇ᄂᆞ니〮 ᄢᅮᆯ〮 업〯서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用收蠶子的舊紙一幅務要去蠶子潔淨燒灰爲末用熱酒調服立效{{*|}} ᄯᅩ〮 누에〮ᄡᅵ〮 난 죠ᄒᆡ〮 ᄒᆞᆫ 張댜ᇰᄋᆞᆯ〮 누에〮ᄡᅵ〮ᄅᆞᆯ〮 조〮히 업〯게 ᄒᆞ고〮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술로〮 프〮러 머그〮면〮 즉〮자히〮 됻〯ᄂᆞ〯니라〮 又方治急肚痛絞膓沙用久乾猪糞一塊如指頭大用砂仁二箇碾爲末白湯調服妙{{*|}} ᄯᅩ〮 과ᄀᆞᆯ이〮 ᄇᆡ〮 알ᄑᆞᆫ 絞교ᇢ〯腸땨ᇰ沙상ᄅᆞᆯ〮 고툐〮ᄃᆡ 오래〮 ᄆᆞᄅᆞᆫ 도ᄐᆡ〮 ᄯᅩᇰ ᄒᆞᆫ 무저기〮 소ᇇ가락만〮 ᄒᆞ니〮와〮縮슉〮砂상 두〯 나〯ᄎ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尸厥第十== 經驗良方其證奄然死去四肢逆冷不省人事腹中氣走如雷鳴 焰焇{{*|半兩}}硫黃{{*|一兩}}右細硏如粉分作三服每服用好舊酒一大盞煎覺焰起傾於盞內盖着溫灌與服如人行五里又進一服不過二服卽醒兼灸頭上百會穴四十九壯兼臍下氣海丹田三百壯覺身體溫暖卽止{{*|}} 그 證지ᇰ〮이〮 믄득〮 죽거든〮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고〮 ᄇᆡ〮 안해〮 氣킝分분이〮ᄃᆞᆫ뇨〮ᄃᆡ 울〮에 ᄀᆞᆮ〮ᄒᆞ니〮 焰염〮焇쇼ᇢ 半반〮 兩랴ᇰ〯과〮硫류ᇢ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세〯 服뽁〮애〮 ᄂᆞᆫ화〮 ᄒᆞᆫ 服뽁〮애〮 됴〯ᄒᆞᆫ 무근〮 술 큰〮 ᄒᆞᆫ 잔〮애〮 글혀〮 焰염〮焇쇼ᇢㅣ 니러〮나〮거든〮 잔〮애〮 브ᅀᅥ〮 둡고〮 ᄃᆞ시 ᄒᆞ〮야〮 브ᅀᅥ〮 머기〮고〮 사〯ᄅᆞ미〮 五ᅌᅩᆼ〮里링〯예〮 갈 만〮ᄒᆞ〮야〮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 즉〮재 ᄭᆡ〮ᄂᆞ니〮 머릿〮 百ᄇᆡᆨ〮會ᅘᅬᆼ〮穴ᅘᆑᇙ〮ᄋᆞᆯ〮 四ᄉᆞᆼ〮十씹〮九구ᇢ〯 壯자ᇰ〮ᄋᆞᆯ〮 ᄯᅳ〯고〮 臍쪵下ᅘᅡᆼ〯와〮氣킝〮海ᄒᆡᆼ〯 와〮丹단田뗜 ᄋᆞᆯ〮 三삼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ᅥ〮 모〮미 덥〯거든〮 말〯라〮 如無前藥用附子重七錢許炮熟去皮臍爲末分作二服每服用酒三盞煎至一盞溫服{{*|}}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附뿡〮子ᄌᆞᆼ〯 므〮긔 닐굽〮 돈〯 남ᄌᆞᆺᄒᆞ닐〮 炮뽀ᇢᄒᆞ〮야〮 니겨〮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細솅〮末마ᇙ〮ᄒᆞ〮야〮 ᄂᆞᆫ화〮 두〯 服뽁〮애〮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술 세〯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애〮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又無附子用生薑自然汁半盞酒一盞煎百沸倂灌二服{{*|}} ᄯᅩ〮 附뿡〮子ᄌᆞᆼ〯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 半반〮 잔〮ᄋᆞᆯ〮 술 ᄒᆞᆫ 잔〮ᄋᆞᆯ〮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솟글커든〮 조쳐〮 브ᅀᅩ〮ᄃᆡ〮 두〯 服뽁〮애 ᄒᆞ라〮 聖惠方治尸厥脉動而無氣氣閉不通故正如死聽其耳中脩脩有如嘯聲而股內暖者是也不治三日當死宜服朱砂丸 朱砂{{*|細硏}}雄黃{{*|細硏}}附子{{*|各三分炮裂去皮臍}}桂心{{*|一兩半}}巴豆{{*|二十枚去皮心硏}}右件藥擣羅爲末入硏了藥令勻煉蜜和丸如麻子大每服不計時候以粥飮下五丸不知更下二丸若利多則止之{{*|}} 尸싱厥궈ᇙ〮을〮 고툐〮ᄃᆡ〮 脉ᄆᆡᆨ〮이〮뮈유〮ᄃᆡ〮 氣킝〮分분 업〯스며〮 氣킝〮分분이〮 마켜〮 通토ᇰ티〮 몯〯ᄒᆞᆯᄉᆡ〮 正져ᇰ〮히〮 주그〮니 ᄀᆞᆮ〮ᄒᆞ니〮 그 귀예〮 드로〮ᄃᆡ〮 脩슈ᇢ脩슈ᇢᄒᆞ〮야〮 ᄑᆞ〮라ᇝ 소ᄅᆡ〮 ᄀᆞᆮ〮고〮 다리 안〮히 더우〮니 이〮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ᄋᆞᆳ〮마〯내 죽ᄂᆞ니〮 朱즁砂상丸ᅘᅪᆫᄋᆞᆯ〮 머귤디니〮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ᆯ〮오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나리 ᄀᆞᆯ〮오 附뿡〮子ᄌᆞᆼ〯ᄅᆞᆯ〮 各각〮 三삼分뿐〮을 炮뽀ᇢᄒᆞ〮야〮 ᄢᅢ혀〮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桂ᄀᆒᆼ〮心심 ᄒᆞᆫ 兩랴ᇰ〯 半반〮과〮巴방豆뚜ᇢ〮 스〮믈 나〯ᄎᆞᆯ〮 것과〮 소〯ᄇᆞᆯ〮 앗〯고 ᄀᆞ〮라 이 藥약〮을〮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고〮 몬져 ᄀᆞ〮론 藥약〮ᄋᆞᆯ〮 녀허〮 골오〮 섯거〮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 지ᅀᅩ〮ᄃᆡ 열ᄡᅵ〮만〮 케〮 ᄒᆞ〮야〮 머규〮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粥쥭〮므〮레 다ᄉᆞᆺ〮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오고〮 아〯디 몯〯거든〮 다시〮 두〯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올디〮니 즈츼〮요ᄆᆞᆯ〮 하〮 ᄒᆞ〯야ᄃᆞᆫ〮 그치〮라〮 葛氏備急方尸蹶之病卒死而脉猶動灸鼻人中七壯又灸陰囊下去下部一寸百壯若婦人灸兩乳中閒又云爪刺人中良久又針人中至齒立起{{*|}} 尸싱厥궈ᇙ〮ㅅ 病뼈ᇰ〮이〮 과ᄀᆞᆯ이〮 주구〮ᄃᆡ 脉ᄆᆡᆨ〮이〮 ᄉᆞᆫᄌᆡ〮 動또ᇰ〯ᄒᆞ〮ᄂᆞ니〮 人ᅀᅵᆫ中듀ᇰ을〮 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고 ᄯᅩ〮陰ᅙᅳᆷ囊나ᇰ 아래〮 밋굼그〮로셔〮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ᄒᆞ〮다가〮 겨〯지비〮어든〮 두〯 졋〮 가온〮ᄃᆡᆯ〮 ᄯᅳ〮라〮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소ᇇ토ᄇᆞ〮로〮 오래〮ᄣᅵᆯ어〮 시며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針짐호〮ᄃᆡ 니〮예 다ᄃᆞᆮ게〮 ᄒᆞ면〮 즉〮자히〮 니〯ᄂᆞ〮니라〮 又方菖蒲屑納鼻兩孔中吹之令人以桂屑着舌下{{*|}}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녀코〮 불〯오〮 사〯ᄅᆞ미〮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로〮 혀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熨其兩脅下取竈中墨如彈丸漿水和飮之湏臾三四{{*|}} ᄯᅩ〮 두〯 녀블 熨ᅙᅮᇙ〮ᄒᆞ고 브ᅀᅥ〮븻〮 검듸〮여ᇰ을〮彈딴子ᄌᆞ〯 만〮 ᄒᆞ닐〮 가져〮 漿쟈ᇰ水ᄉᆔᆼ예〮 프〮러 머교〮ᄃᆡ〮 아니〮한 ᄉᆞᅀᅵ〮예〮 서〯너〮 번 ᄒᆞ〮라〮 又方針百會入三分補之又針足大指甲下內側去甲三分又足指甲上各入三分{{*|}} ᄯᅩ〮 百ᄇᆡᆨ〮會ᅘᅬᆼ〮ᄅᆞᆯ〮 針짐호〮ᄃᆡ 三삼分뿐〮에 들〮에 ᄒᆞ〮야〮 補봉〯ᄒᆞ고〮 ᄯᅩ〮 밠〮 엄지〮가락톱〮 아래〮 안〮녁 겨틀〮 토〮ᄇᆞ로〮셔 三삼分뿐〮만 ᄒᆞᆫᄃᆡ〮 針짐ᄒᆞ고〮 ᄯᅩ〮 밠〮톱 우흘〮 各!긱〮!각〮!各각〮 三삼分뿐〮이〮 들〮에 針짐ᄒᆞ라〮 又方灸膻中穴二十八壯{{*|}} ᄯᅩ 膻선中듀ᇰ穴ᅘᆑᇙ〮을〮 二ᅀᅵᆼ〮十씹〮八바ᇙ〮壯자ᇰ〮을〮 ᄯᅳ〮!리〮!라〮! ==纏喉風喉閉第十一<sub>喉腫舌腫失音附</sub>== 經驗良方其證先兩日胸膈氣緊取氣短促驀然咽喉腫痛手足厥冷氣閉不通頃刻不治 巴豆{{*|七粒三生四熟生者去殼生硏熟者去殼燈上燒存性}}雄黃一塊{{*|如皂角子大透明者細硏}}鬱金一箇{{*|蟬肚者硏爲末}}右三味硏末每服半字用茶淸兩呷許調下口噤咽塞用小竹管納藥吹入喉中湏臾吐利卽醒{{*|}} 그 證지ᇰ〮이〮 몬져 이트〮를〮 가ᄉᆞᇝ〮氣킝〮分분이〮 답답ᄒᆞ〮야〮 氣킝〮分분ᄋᆞᆯ〮 取츙〯호〮미 뎌르고〮 ᄌᆞᆺ다가〮 믄〮득〮 모기〮 븟고〮 손〮바〮리 ᄎᆞ〮고 氣킝〮分분이〮 마가〮 通토ᇰ티〮 몯〯ᄒᆞ〮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고티〮디〮 몯〯ᄒᆞ〮ᄂᆞ〮니라〮 巴방豆뚜ᇢ〮 닐굽〮 나〯ᄎᆞ로〮 세〯흔 生ᄉᆡᇰ이〮오〮 네〯흔 니겨〮 生ᄉᆡᇰ으〮란〮 거피〮 밧겨〮 ᄀᆞᆯ오 니그〮니란〮 거피〮 밧기〮고〮 드ᇰ자ᇇ〮브〮레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라〮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기〮 皂쪼ᇢ〯角각〮 ᄡᅵ〮만〮 ᄒᆞ니〮 ᄉᆞᄆᆞᆺ ᄇᆞᆯᄀᆞ〮닐〮 ᄀᆞ〮ᄂᆞ〮리〮 ᄀᆞᆯ〮라〮鬱ᅙᅮᇙ〮金금 ᄒᆞᆫ 낫〯 ᄆᆡ〮야ᄆᆡ〮 ᄇᆡ〮 ᄀᆞᆮ〮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세〯 가짓〮 마〮ᄉ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字ᄍᆞᆼ〮ᄅᆞᆯ〮 머교〮ᄃᆡ 찻믈〮 두〯 머굼〮만〮 ᄒᆞᆫᄃᆡ〮 프〮러 ᄂᆞ리〯오라〮 입〮 마고〮믈오 모기〮 마고〮 븟거든〮 져〮근 대〮로ᇰ애 藥약〮ᄋᆞᆯ〮 녀허〮 목 안해〮 불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吐통〯ᄒᆞ〮고〮 즈츼〮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無前藥用川升麻四兩剉碎水四椀煎一椀灌服{{*|}}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넉〯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네〯 보ᅀᆞ애〮 ᄒᆞᆫ 보ᅀᆡ〮 ᄃᆞ외에〮 글혀〮 브ᅀᅳ라〮 又無川升麻用皂角三莖搥碎挼一盞灌服或吐或不吐卽安{{*|}} ᄯᅩ〮 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업〯거든〮 皂쪼ᇢ〯角각〮 세〯 줄!길〮!걸〮! !ᄯᅳ!ᄯᅮ!드〮려〮 ᄇᆞᆺ아〮 ᄒᆞᆫ 자내〯 프〮러 브ᅀᅳ라〯 시혹〮 吐통〯커나〮 시혹〮 吐통〯티〮 아니〮커나〮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朱氏集驗方吹喉散治咽喉腫痛 朴硝{{*|四兩別硏}}甘草{{*|一兩生末}}右硏勻每用半錢乾擦喉如腫甚用竹管子吹入喉中爲佳{{*|}} 吹ᄎᆔᆼ喉ᅘᅮᇢ散!신!산! 은〮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朴박〮硝쇼ᇢ 넉〮 兩랴ᇰ〯ᄋ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ᄒᆞᆫ 兩량〯ᄋᆞᆯ〮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 半반〮 돈〯ᄋᆞᆯ〮 ᄆᆞᄅᆞ닐〮 모긔〮 ᄇᆞᆯ로〮ᄃᆡ〮 브ᅀᅮ〮미 甚씸〯커든〮 대〮로ᅌᆞ〮로 부러〮 목 안해 드〮류미〮 됴〯ᄒᆞ〮니라〮 經驗秘方治懸壅暴腫 白礬 塩右等分爲末以筯頭點少許在懸壅上{{*|}} 목져〮지 과글이 브ᅀᅳ닐〮 고툐〮ᄃᆡ 白ᄈᆡᆨ〮礬뻔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ᄇᆞᄅᆞ라〮 又方乾薑半夏等分爲末以少許着舌下{{*|}} ᄯᅩ〮 乾간薑가ᇰ과〮 半반〮夏!ᅘᅵᆼ!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혀 아래〮 녀흐라〮 又方一字散主喉痺氣塞不通欲死者 雄黃{{*|一分別硏}}蝎梢{{*|七枚}}猪牙皂角{{*|七鋌}}白礬{{*|生硏一錢}}藜蘆{{*|一錢}}右細末每用一字吹入鼻中頑涎卽吐效{{*|}} ᄯᅩ〮一ᅙᅵᇙ〮字ᄍᆞᆼ散산〮 은〮 모기〮 브ᅀᅥ〮 氣킝〮分분이〮 !아!마!가〮 通토ᇰ티〮 몯〯ᄒᆞ〮야 죽ᄂᆞ닐 主즁〮ᄒᆞ니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分뿐을〮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蝎허ᇙ〮梢쇼ᇢ 닐굽〮 낫〯과〮 皂쪼ᇢ〯角각 닐굽〮 鋌뗘ᇰ〯과 白ᄈᆡᆨ礬뻔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ᄀᆞ〮라 ᄒᆞᆫ 돈〯과〮藜래蘆 롱 ᄒᆞᆫ 돈〯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부러 녀허〮 건〯추〮믈 吐통〯ᄒᆞ면〮 됻〯ᄂᆞ〮니라 又方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馬㗸鐵{{*|一具}}右用水三盞煮一盞溫服又蒜塞耳鼻中{{*|}} ᄯᅩ〮 모기〮 막고〮 ᄀᆞ자ᇰ〮 브ᅀᅥ〮 ᄲᅡ매〮 닛〯고〮 氣킝分분을〮 吐통〯호〮미 ᄌᆞᄌᆞ〮면〮 일후〮미 ᄆᆞᆯ목브ᅀᅮ〮미니〮馬망〯含ᅘᅡᆷ쇠〮 ᄒᆞ나ᄒᆞᆯ〮 믈〮 세〯 잔〮ᄋᆞ로〮 ᄒᆞᆫ 잔〮 ᄃᆞ외!어〮!에〮!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마ᄂᆞ〮ᄅᆞᆯ〮 귀〮와〮 고해〮 고ᄌᆞ라〮 又方如聖散治舌腫喉痺 川芎 桔梗 薄苛葉 甘草 盆硝{{*|各等分}}右爲細末每用一錢乾摻{{*|}} ᄯᅩ〮如ᅀᅧᆼ聖셔ᇰ〮散산 은〮 혀〮 븟고〮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川!ᄌᆑᆫ!ᄎᆑᆫ!芎쿵 과〮 桔겨ᇙ〮梗겨ᇰ〯과〮薄팍〮荷ᅘᅡᆼㅅ 닙〮과〮 甘감草초ᇢ〯와〮盆뽄硝쇼ᇢ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곰〮 ᄆᆞᄅᆞ닐〮 ᄇᆞᄅᆞ라〮 又方舌忽腫硬塞悶百草霜食塩等分井水調塗舌上卽安{{*|}} ᄯᅩ 혜〮 忽호ᇙ然ᅀᅧᆫ히〮 브ᅀᅥ〮 세웓고〮 답답ᄒᆞ〮거든〮 百ᄇᆡᆨ〮草초ᇢ〯霜사ᇰ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우믌〮 므〮레 프〮러 혀〮에〮 ᄇᆞᄅᆞ면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直指方白藥散治喉中熱塞腫疼散血消痰白藥 朴硝{{*|等分}}右爲末以小管子吹入喉{{*|}} 白ᄈᆡᆨ〮藥약散산 은〮 목 안〮히 더워〮 마고〮 브ᅀᅳ닐〮 고티〮ᄂᆞ니〮 피〮ᄅᆞᆯ〮 슬〮며 痰땀〮을〮 노기〮ᄂᆞ니〮라 白ᄈᆡᆨ〮藥약〮!괴〮!과〮!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근 대〮롱ᄋᆞ〮로 부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纏喉風及喉痺用蠶退紙燒灰存性煉蜜丸如雞頭大含化嚥津{{*|}} 纏뗜喉ᅘᅮᇢ風보ᇰ과〮 목 브ᅀᅳ닐〮 누에〮ᄡᅵ〮 난 죠ᄒᆡ〮ᄅᆞᆯ〮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을〮 지ᅀᅩᄃᆡ〮雞곙頭뚜ᇢ實씨ᇙ 만〮 게〮 ᄒᆞ〮야〮 머구〮머 노겨〮 춤〮 ᄉᆞᇝ기〮라〮纏뗜喉ᅘᅮᇢ風보ᇰ 은〮 과ᄀᆞᄅᆞᆫ목더시〮라〮 又方纏喉風氣不通雄黃一塊新汲水磨急灌吐卽差{{*|}} ᄯᅩ 纏뗜喉ᅘᅮᇢ風보ᇰ에〮 氣킝分분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글〮 새〮 므〮레 ᄀᆞ〮!리〮!라〮! ᄲᆞᆯ리〮 브ᅀᅥ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咽喉腫閉 甘草 白礬{{*|等分}}右爲細末每以半錢許入口中津液嚥下{{*|}} ᄯᅩ 모기〮 브ᅀᅥ〮 마ᄀᆞ〮닐〮 고툐〮ᄃᆡ〮 甘감草초ᇢ〯와 白ᄈᆡᆨ〮礬뻔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돈〯 남ᄌᆞ샤 입〮 안해〮 녀허〮셔〮 추〮므로〮 ᄂᆞ리〮오라〮 聖惠方咽喉閉不通 硇砂 馬牙硝{{*|等分}}右細硏令勻用銅筯頭於水中 蘸令濕搵藥末點於咽喉中{{*|}} 모기〮 마가〮 通토ᇰ티〮 아니ᄒᆞ닐〮 硇뇨ᇢ砂상와〮 馬망〯牙ᅌᅡᆼ硝쇼ᇢ 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놋〮졋〮 그〮트로〮 므〮레 저〮져〮 藥약〮ᄋᆞᆯ〮 무텨〮 목 안해〮 디그〮라〮 又方咽喉閉塞口噤雄雀糞細硏每服半錢以溫水調灌{{*|}} ᄯᅩ〮 모기〮 막고〯 입〮 버〯리디〮 몯〯ᄒᆞ닐 수〮새〯 ᄯᅩᆼ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을〮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ᅳ라〮 又方咽喉生穀賊若不急治亦能殺人用針刺破令黑血出後含馬牙硝一小塊子嚥津卽差{{*|}} ᄯᅩ〮 모ᄀᆡ〮穀곡〮賊쪽〮 이〮 나〮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ᄯᅩ〮 能느ᇰ히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 針짐으〮로〯 허러〮 거믄〮 피나게 ᄒᆞ고〮 馬망〮牙ᅌᅡᆼ硝쇼ᇢ ᄒᆞᆫ 져〯근 무저글〮 머구머 추믈 ᄉᆞᆷᄭᅵ면〮 즉재 됻〯ᄂᆞ〮니〮라〮 穀곡賊쪽〮은〮 穀곡〮食씩〮에〮 몯〯내〮ᄑᆡᆫ〮 이사기〮 굳고〮!ᄭᅵ!ᄭᅡ!ᄭᅡᆯᄒᆞᆫ 거시〮니〮 몰〯라 ᄡᆞ〮리〮라〮 머고면〮 목 안히 브ᅀᅥ〮 通토ᇰ티〮 아니〮ᄒᆞ〮ᄂᆞ니〮 일후〮믈 목 안해〮 穀곡賊쪽〮 나다〮 ᄒᆞ〮ᄂᆞ〮니라〮 又方以馬牙硝細硏緜裹半錢含化嚥津以差爲度{{*|}} ᄯᅩ〮 馬망〯牙ᅌᅡᆼ硝쇼ᇢ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ᄋᆞᆯ소오매〮 ᄢᅳ려〮 머구머 노겨〮 춤〮 ᄉᆞᆷᄭᅭ〮ᄃᆡ〮 됴〯ᄒᆞᆯ ᄭᆞ자ᇰ ᄒᆞ라 又方咽喉腫痛語聲不出豉半升以水二大盞煎至一大盞去滓分爲二服相繼稍熱服之令有汗出卽差{{*|}} ᄯᅩ〮 목 브ᅀᅥ 소ᄅᆡ〮 나디〮 아니〮커든〮 젼국 半반〮 되〮ᄅᆞᆯ〮 믈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큰〮 잔애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두〯 服뽁〮애〮 ᄂᆞᆫ화〮 서르 닛우〮 져〯기 덥〯게〮 ᄒᆞ〮야〮 머거〮 ᄯᆞᆷ〮나게〮 ᄒᆞ면〮 곧〮 됻〯ᄂᆞ〮니라〮 壽域神方舌忽脹出口外雞冠上刺血磁盞盛浸舌就嚥下卽縮{{*|}} 혜〮 과글이 부러〮나〮 입〮 밧긔〮 나〮거든〮 ᄃᆞᆯᄀᆡ〮 벼〮츨〮 ᄡᅥᆯ어〮 피〮내〯야 沙상〮잔애〮 담〯고〮 혀를〮 ᄃᆞᆷ가〮셔 ᄉᆞᆷᄭᅵ〮면〮 즉〮재움처〮 드〮ᄂᆞ니라〮 ==骨鯁第十二== 醫方集成治骨鯁入喉 縮砂 甘草{{*|各等分}}右爲末緜裹少許噙之旋旋嚥津久之隨痰出{{*|}} ᄲᅨ〮 모긔〮거〯닐〮 고툐〮ᄃᆡ 縮슉砂상와〮 甘감草초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소오!마〮!ᄆᆡ〮! 져〯기 ᄢᅳ〮려〮 머구〮머 젹젹〮 춤〮 ᄉᆞᆷᄭᅵ〮면〮 오라〮면〮 痰땀 조차〮 나〮ᄂᆞ〮니라〮 又方野紵根洗淨不以多少搗爛如泥每用龍眼大如被雞骨所傷以雞羹化下如被魚骨所傷以魚羹汁化下{{*|}} ᄯᅩ〮 모싯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디호〮ᄃᆡ 니균〮 ᄒᆞᆰᄀᆞ〮티 ᄒᆞ〮야〮 龍료ᇰ眼ᅌᅡᆫ〯만〮 ᄒᆞ니〮ᄅᆞᆯ〮 ᄃᆞᆯ긔〮 ᄲᅧ〮에〮 傷샤ᇰ커든〮 ᄃᆞᆰ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고〮 고깃〮 ᄲᅧ〮에 傷샤ᇰ커든〮 生ᄉᆡᇰ鮮션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라 經驗良方治骨硬不下先嚼白茯苓一錢重次以白礬湯嚥下{{*|}} ᄲᅨ〮 거러〮 ᄂᆞ리〮디〮아닌〮ᄂᆞ닐〮 고툐〮ᄃᆡ〮 몬져白ᄈᆡᆨ〮茯뽁〮苓려ᇰ ᄒᆞᆫ 돈〯ᄋᆞᆯ 십고 버거〮白ᄈᆡᆨ〮礬뻔湯타ᇰ〮으〮로〮 ᄂᆞ리〮오라〮 又方治魚骨用白膠香細細呑下{{*|}} ᄯᅩ〮 믌〮고깃〮 ᄲᅧ〮걸우〮닐〮 고툐〮ᄃᆡ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을〮 젹젹 ᄉᆞᆷᄭᅧ〮 ᄂᆞ리〮오라〮 又方皂角少許吹入鼻{{*|}} ᄯᅩ〮 皂쪼ᇢ〮角각〮을〮 져〯기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口念鸕鶿鸕鶿立愈{{*|}} ᄯᅩ〮 이베〮 鸕롱鶿ᄍᆞᆼ 鸕롱鶿ᄍᆞᆼᄒᆞ〮야〮 念념〮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鸕롱鶿ᄍᆞᆼᄂᆞᆫ〮 가마오〮디라〮 朱氏集驗方治食鯉魚骨硬貫衆不以多少濃煎汁一盞半分三服幷進連服三劑{{*|}} 鯉링〯魚ᅌᅥᆼ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貫관〮衆쥬ᇰ〮을〮 두터이〮 글혀〮 즈〮블〮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세〯 服뽁〮애〮 ᄂᆞᆫ화〮 다〯 머구〮ᄃᆡ 닛우〮 세〯 劑쪵〮ᄅᆞᆯ〮 머그〮라〮 又方巧匠取喉鉤將繭剪如錢大用物搥四面令軟以油潤之仍中通一竅先穿上鉤線次穿數珠三五枚令兒正坐開口漸添引數珠挨之到喉覺至繫鉤處乃以向下一推其鉤自下而脫卽向上急出之見蠶錢向下裹定鉤線鬚而出並無所損{{*|}} ᄯᅩ〮 工고ᇰ巧교ᇢ〯ᄒᆞᆫ 匠쨔ᇰ〮ㅅᅀᅵᆫ이〮 아ᄒᆡ〮 모ᄀᆡ〮 건〯 낙〮ᄉᆞᆯ〮 아ᅀᅩ〮ᄃᆡ〮 고티〮ᄅᆞᆯ〮 돈〯ᄀᆞ〮티 ᄇᆞ〮리고〮 네〯 面면〮을〮 ᄯᅮ드〮려 보ᄃᆞ〮랍게〮 ᄒᆞ고〮 기르〮므로〮 저지〮고〮 가온〮ᄃᆡ〮 ᄒᆞᆫ 구무들워〮 몬〮져낛〮긴헤〮 ᄢᅦ〯오〮 버거〮念념〮珠즁 세〯다ᄉᆞᆺ〮 나〯ᄎᆞᆯ〮 ᄢᅦ〯오〮 아ᄒᆡ〮로〮 바ᄅᆞ 아ᇇ고〮 입〮버〯리〮게 코〮 졈〯졈〯 念념〮珠즁를〮 더〮 미러〮 모ᄀᆡ〮 다ᄃᆞᆮ게〮 ᄒᆞ〮야〮 낛〮 ᄆᆡ욘〮 ᄃᆡ〮 니른〮가〮 식브거늘〮 아래〮로〮 ᄒᆞᆫ 번 미〯니 그 낙〮시 제〯 ᄂᆞ려〮 버서〮디〮거늘 즉〮재 우흐〮로 時씽急급〮히〮 내〯오〮 고티〮ᄅᆞᆯ〮 보니〮 아래〮로 낙〮줄〮와〮 낛〮미느〮를〮 ᄢᅳ러〮 나〮 귿〮 헌〯 ᄃᆡ 업〯더라〮 聖惠方治食魚骨鯁以魚網燒灰細硏水調服一錢又方以魚網䨱頭立下{{*|}} 믌〮고기〮 먹다가〮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고깃〮 그〮므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 그〮므를〮 머리〮예〮 두프〮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含水獺骨立出或爪亦得{{*|}} ᄯᅩ〮 水ᄉᆔᆼ〯獺타ᇙ〮의〮 ᄲᅧ〮를〮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 시혹〮 밠〮톱〮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以牛筋水浸細擘以線繫如彈子大持線端呑之入喉至哽處徐徐引之鯁着筋卽出{{*|}} ᄯᅩ〮 ᄉᆈ〯 히〮믈〮 므〮레 ᄃᆞᆷ가〮 ᄀᆞ〮ᄂᆞ리〮 ᄧᆡ〮야〮 실〯로〮 ᄆᆡ요〮ᄃᆡ〮 彈딴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싨〯그〮틀 잡고〮 ᄉᆞᆷᄭᅧ〮 모ᄀᆡ〮 드〮려 ᄲᅧ〮 건〯 ᄃᆡ 니르〮거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ᄃᆞᆼᄀᆡ〮면〯 ᄲᅧ〮 히〮메 바켜〮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以虎糞或狼糞燒灰細硏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ᄯᅩᆼ이〮나〮 시혹〮 일〮희 ᄯᅩᆼ이〮나〮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虎骨或狸骨擣細羅爲散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ᄲᅨ〮나〯 시혹 ᄉᆞᆯ긔〮 ᄲᅨ〮나 디허〮 ᄀᆞ〮ᄂᆞ리〮처〮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硇砂半錢口中咀嚼嚥之立下{{*|}} ᄯᅩ〮 硇뇨ᇢ砂상 半반〮 돈〮ᄋᆞᆯ〮 이베〮 시버〮 ᄉᆞᆷᄭᅵ〮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治誤呑鉤若線猶在手中者莫引之但急以珠璫若薏苡子輩穿貫着線稍稍令推至鉤處小小引之則出{{*|}} ᄯᅩ〮 낙〮ᄉᆞᆯ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ᄒᆞ〮다가〮 긴〮히 소내〮 잇ᄂᆞ닌〮 ᄃᆞᇰᄀᆡ〮디 말〯오〮 ᄲᆞᆯ리〮 구스〮리나〮 율믜나 긴헤〮 ᄢᅦ〯어〮 졈〯졈〯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젹젹 ᄃᆞᇰᄀᆡ〮면〮 나〮ᄂᆞ〮니라〮 又方以琥珀珠着線貫之推令前入至鉤又復推以索引出矣或水精珠亦佳無珠諸堅實物磨令滑作孔用之{{*|}} ᄯᅩ〮琥홍珀ᄑᆡᆨ〮 구스〮를〮 긴헤 ᄢᅦ〮여〮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ᄯᅩ〮 미러〮혀면〮 나〮ᄂᆞ〮니라〮 시혹〮水ᄉᆔᆼ〯精져ᇰ 도〮 ᄯᅩ〮 됴〯ᄒᆞ니 구슬〯 업〯거든〮 구든〮 거슬〮 ᄀᆞ〮라 ᄆᆡᆺᄆᆡᆺ게〮 ᄒᆞ〮야〮 구무 들워〮 ᄡᅳ〮라〮 又方治誤呑針以上好磁石如小彈子大含之卽出{{*|}} ᄯᅩ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됴〯ᄒᆞᆫ指징〯南남石쎡〮 이〮 져〯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라〮 經驗秘方治誤呑錢百部根四兩酒一升浸一宿溫作二服{{*|}} 돈〯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百ᄇᆡᆨ〮部뽕〯根ᄀᆞᆫ 넉〯 랴ᇰᄋᆞᆯ〮 술 ᄒᆞᆫ 되〮예〮 ᄒᆞᄅᆞᆺ바〮ᄆᆞᆯ〮 ᄃᆞᆷ가〮 ᄃᆞ시 ᄒᆞ〮야〮 두〯 버네〮 머그〮라〮 又方服淸蜜二盞{{*|}} ᄯᅩ〮 淸쳐ᇰ蜜미ᇙ〮 두〯 잔〮ᄋᆞᆯ〮 머그〮라 又方濃煎艾湯一二盞飮之{{*|}}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혀〮 ᄒᆞᆫ두〯 자〮ᄂᆞᆯ 머그〮라〮 又方治誤呑針釘鉤子魚骨雜物多食肥羊脂肉及諸肉必自裹出{{*|}} ᄯᅩ〮 바ᄂᆞᆯ〮와〮 몯〮과〮 낛〮과〮 고깃 ᄲᅧ〮와〮 雜짭〮거슬〮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진 羊야ᇰᄋᆡ〮 기름〮과〮 고기〮와〮 여러〮 가짓〮 고기〮ᄅᆞᆯ〮 만〯히 머그〮면〮 절로〮 ᄢᅳ려〮 나〮ᄂᆞ〮니라〮 又方木炭爲細末每服一錢冷水調下頓服自然裹於大便中出{{*|}} ᄯᅩ〮숫글〮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ᄎᆞᆫ〮므〮레 프러 다〯 머그면〮 自ᄍᆞᆼ〮然ᅀᅧᆫ히〮 大땡〮便뼌에〮 ᄢᅳ려〮 나〮ᄂᆞ〮니라〮 衛生易簡方治一切骨鯁用朴硝噙化{{*|}} 一ᅙᅵᇙ〮切촁〮ㅅ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朴팍硝쇼ᇢᄅᆞᆯ〮 머구〮머 노기〮라〮 又方用雞蘇朴硝等分如彈子大仰臥噙化三五丸卽愈{{*|}} ᄯᅩ〮雞곙蘇송와〮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졋바〮누〮어〮 세〯 다ᄉᆞᆺ〮 버늘〮 머구〮머 노기〮?면〮? 즉〮재 됻〯ᄂᆞ〮니라〮 壽域神方治諸骨鯁用不蛀皂角一片槌碎作四截銚內炒令焦黑酸米醋一盞澆之用碗覆一茶久取出放溫漱嚥下{{*|}} 여러〮 가짓〮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벌에〮 먹디〮 아니〮ᄒᆞᆫ 皂쪼ᇢ〯角각〮 ᄒᆞᆫ 편〮을〮 ᄯᅮ드〮려 네〯헤 그처〮 새용〮 안해〮 봇가〮 검〯게 ᄒᆞ고〮 싄 초 ᄒᆞᆫ 잔〮ᄋᆞᆯ〮 븟고〮 보ᅀᆞ로 두퍼〮 ᄒᆞᆫ 차 다릴〮 ᄉᆞᅀᅵ〮만〮 커든〮 내〯야〮 ᄃᆞ시 ᄒᆞ〮야〮 야ᇰ〯지ᄒᆞ〮야〮 ᄉᆞᆷᄭᅵ〮라〮 又方用覆盆子根取淨洗釅醋瓦礶煎濃汁用紙盖礶口留一孔令患人開口置孔熏一二時久骨自下{{*|}} ᄯᅩ〮覆폭〮盆뽄子ᄌᆞᆼ〯ㅅ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초로〮 딜湯타ᇰ〮礶관〮에〮 즙〮이〮 두〮텁〮게〮 글히〮고〮 죠ᄒᆡ〮로〮 湯타ᇰ〮礶관〮 이〮블〮 막고〮 ᄒᆞᆫ 굼글〮 두〮어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로 입〮 버〯려 굼긔〮 다혀〮 ᄒᆞᆫ 두〯 時씽刻큭을〮 쐬〯면〮 ᄲᅨ〮 저〯 나〮ᄂᆞ〮니라〮 又方用餳糖再熬化丸如雞子黃大微嚼猛嚥呑之不下再作大丸呑妙{{*|}} ᄯᅩ〮 여〮슬 두〯 번 ᄉᆞ〮라 ᄃᆞᆯᄀᆡ〮앐〮 누른〮 것만〮 케 비븨〮여 자ᇝ〯간 시버〮 ᄆᆡ이〮 ᄉᆞᆷᄭᅭ〮ᄃᆡ ᄂᆞ리〮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크〮게 비븨〮여〮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以魚骨安於頭上立愈{{*|}} ᄯᅩ〮 믌〮고깃〮 ᄲᅧ〮ᄅᆞᆯ〮 머리〮예 연ᄌ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仍取所餘骨左右手反復擲背後立出{{*|}} ᄯᅩ〮 나ᄆᆞᆫ〮 ᄲᅧ〮를〮 두〯 녁 소〮ᄂᆞ로〮 서르 드ᇰ 뒤〯헤 더디〮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解衣帶眼看下部不下卽出{{*|}} ᄯᅩ〮 옷〮 밧고〮 미틀〮 보면〮 ᄂᆞ리〮디 아니〮ᄒᆞ면〮 즉〮자히〮 나〮ᄂᆞ〮니라〮 又方取鯉魚鱗皮燒灰作末以水調服卽出不出再作{{*|}} ᄯᅩ〮 鯉링〯魚ᅌᅥᆼㅅ 비늘〮와〮 가ᄎᆞᆯ〮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 나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又方用象牙爲末水調一錢服亦治魚刺{{*|}} ᄯᅩ〮象쌰ᇰ〯牙ᅌᅡ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ᄲᅧ〮 ᄣᅵᆯ인〮 ᄃᆡ 고티〮ᄂᆞ〮니라〮 又方用鸕鶿骨爲末湯調服之得呑其嗉最效{{*|}} ᄯᅩ〮 鸕롱鶿ᄍᆞᆼ ᄲᅧ〮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그〮라〮 그 부릴 어〯더 머그〮면〮 ᄆᆞᆺ〮 됴〯ᄒᆞ〮니라〮 又方治誤呑錢用慈菰搗半爛呑之移時其錢卽化一用濃煎艾汁亦可冬葵根煮汁亦可{{*|}} ᄯᅩ〮 그르 돈〯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慈ᄍᆞᆼ菰공ᄅᆞᆯ〮 디허〮 半반〮만 닉거든 ᄉᆞᆷᄭᅵ〮라〮 時씽刻큭이 올ᄆᆞ〮면 그 돈〯이 즉〮재 녹ᄂᆞ니〮라〮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횬〮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冬도ᇰ葵ᄁᆔᆼ 根ᄀᆞᆫ 글휸〮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再服卽出{{*|}} ᄯᅩ〮 金금銀ᅌᅳᆫ 곳〮 골〮회〮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水ᄉᆔᆼ〯銀ᅌᅳᆫ 半반〮 兩랴ᇰ〯을〮 머그〮라〮 다시〮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治小兒誤呑針用磁石如棗核大磨令光鑽作竅絲穿令含針自出{{*|}} ᄯᅩ〮 아ᄒᆡ〮 그르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指징〯南남石쎡〮이〮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 ᄒᆞ닐〮 ᄀᆞ〮라 빗〮나게〮 ᄒᆞ고〮 구무 들워〮 실〯로 ᄢᅦ여〮 머굼〮게〮 ᄒᆞ면〮 바ᄂᆞ〮리 제〯 나〮ᄂᆞ〮니라〮 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 ᄯᅩ〮 그르 골회〮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거유〮 ᄂᆞ〮랫짓〮 두〯ᅀᅥ흘〮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다ᇰ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脫陽陰縮第十三== 經驗良方其證或因大吐大瀉之後四肢逆冷元氣不接不醒人事或傷寒新瘥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喘冷汗自出亦是脫陽證湏臾不救先用葱白數莖炒令熱熨臍下次用 附子{{*|一枚重十錢許剉作八片}}白朮 乾薑{{*|各半兩}}木香{{*|一分}}已上四味各硏細水二椀煎至八分椀去滓放冷灌服湏臾又進一服合滓倂服{{*|}} 그 證지ᇰ〮이 시혹〮 하〮 吐통〯커나〮 하〮 즈칀〮 後ᅘᅮᇢ〯에 四ᄉᆞᆼ〮肢징 ᄎᆞ〮고元ᅌᅯᆫ氣킝〮 닛〯디 아니〮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거나〮 시혹〮傷샤ᇰ寒ᅘᅡᆫ 이〮 ᄀᆞᆺ 됴〯커든〮 그르 겨〯집과〮 사괴〮면〮 그 證지ᇰ〮이〮ᄇᆡᆺ〮기슬기 ᄀᆞ자ᇰ〮 알ᄑᆞ고〯 外ᅌᅬᆼ〮腎씬〯이〮 움치〮들〮오 ᄂᆞ치〮 검〯고〮 氣킝〮分분이〮 헐헐ᄒᆞ고〮 ᄎᆞᆫ〮 ᄯᆞ〮미 흐르ᄂᆞ니 ᄯᅩ〮 이〮 脫똬ᇙ〮陽야ᇰㅅ證지ᇰ〮이〮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몬져 파〮 두〯ᅀᅥ 줄기〮ᄅᆞᆯ〮 봇가〮 덥〯게 ᄒᆞ〮야〮 ᄇᆡᆺ복 아래〮ᄅ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버거〮 附뿡〮子ᄌᆞᆼ〯 ᄒᆞᆫ 낫〯 므〮긔 열〮 돈〯 남ᄌᆞᆺᄒᆞ닐〮 사ᄒᆞ라 여듧〮 片편 ᄆᆡᇰᄀᆞᆯ오〮 白ᄈᆡᆨ朮뜌ᇙ〮와〮 乾간薑가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량〯과〮木목〮香햐ᇰ ᄒᆞᆫ 分분과〮 네〯 가짓〮 마ᄉ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믈〮 두〯 보ᅀ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ᄎᆡ와〮 브ᅀᅳ라〮 이ᅀᅳᆨ고〮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고〮 滓ᄌᆡᆼ〮 조쳐〮 다〯 머기〮라〮 如無前藥用桂枝二兩用好酒二升煎至一升候溫分作二服灌之{{*|}} ᄒᆞ〮다!카!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桂ᄀᆒᆼ〮枝징〮 두〯 兩랴ᇰ〯ᄋᆞᆯ〮 됴〯ᄒᆞᆫ 술 두〯 되〮로 글혀〮 ᄒᆞᆫ 되〮예〮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두〯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라〮 又無桂枝用葱白連鬚三七莖細剉沙盆內硏細用酒五升煮至二升分作三服灌之陽氣卽回先用炒塩熨臍下氣海勿令氣冷{{*|}} ᄯᅩ〮 桂ᄀᆒᆼ〮枝징 업〯거든〮 파〮ᄒᆞᆯ 불휘〮 조쳐〮 세〯닐굽〮 줄기〮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沙상盆뽄에〮 ᄀᆞ〮ᄂᆞ리〮 ᄀᆞ〮라 술 닷 되〮로〮 글혀〮 두〯 되〮예〮 니르〮거든〮 세〯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면〮 陽야ᇰ氣킝〮 즉〮재 도〮라〮오〮ᄂᆞ니〮 몬져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臍쪵下ᅘᅡᆼ〯와〮 氣킝〮海ᄒ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야〮 氣킝〮分분이〮 ᄎᆞ〮디 아니〮케〮 홀〮디〮니라〮 又無葱白用生薑二七寸亦好依前法服{{*|}} ᄯᅩ〮 파〮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드!두〯!닐굽〮 寸촌〮도〮 ᄯᅩ〮 됴〯ᄒᆞ니〮 알ᄑᆡᆺ〯 法법〮을〮 브터〮 머기〮라〮 聖惠方治風入腹攻五藏拘急不得轉側陰縮手足厥冷腹中㽱痛宜服赤芍藥散赤芍藥{{*|一兩}}川烏頭{{*|三兩炮製去皮臍}}桂心 甘草炙微赤剉防風{{*|去蘆頭}}芎窮{{*|各一兩}}右擣麤羅爲散每服三錢以水一中盞入生薑半分棗二枚煎至六分去滓不計時候稍熱服{{*|}} ᄇᆞᄅᆞ〮미 ᄇᆡ〮예 드〮러 五ᅌᅩᆼ〯藏짜ᇰ〮ᄋᆞᆯ〮 보차〮 ᄇᆞᆯ라〮 움즈기〮디 몯〯고〮 陰ᅙᅳᆷ이〮 움처〮 들〮오 손〮발〮 ᄎᆞ〮고 ᄇᆡ〮 안〮히 알ᄑᆞ거든〮 赤쳑〮芍쟉〮藥약〮散산〮을〮 머골〮디니〮赤쳑〮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과〮 川ᄌᆑᆫ烏ᅙᅩᆼ頭뚜ᇢ 세〯 兩랴ᇰ〯을〮 炮뽀ᇢᄒᆞ〮야〮 갓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어 져〯기 븕게〮 ᄒᆞ〮야〮 사ᄒᆞᆯ〮오 防파ᇰ風봉을〮 머리〮 버히〮고芎구ᇰ窮꾸ᇰ과〮 各각〮 ᄒᆞᆫ 兩랴ᇰ〯을〮 디〮허〮 麤총케〮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中듀ᇰㅅ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半반〮 分분과〮 大땡〮棗초ᇢ〮 두〯 나〯ᄎᆞᆯ 드〮려 글효〮ᄃᆡ 六륙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져〯기 덥〯게 ᄒᆞ〮야〮 머기〮라〮 聖濟緫錄治陰疝腫縮疼痛 狼毒{{*|炙二兩}}防葵{{*|炒}}附子{{*|炮裂去皮臍各一兩}}右擣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十丸溫酒下空心日午臨臥服{{*|}} 陰ᅙᅳᆷ疝산ᄒᆞ〮야〮 븟고〮 움처〮 알ᄑᆞ닐〮 고툐〮ᄃᆡ狼라ᇰ毒독〮 구우〮니 두〯 兩랴ᇰ〯과〮防파ᇰ葵ᄁᆔᆼ 봇고니와〮 附뿡〮子ᄌᆞᆼ〯ᄅᆞᆯ〮 구어 것과〮 ᄇᆡᆺ복 아ᅀᅩ〮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혼〮 ᄢᅮᆯ〮로〮 丸ᅘᅪᆫᄋᆞᆯ〮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 만〮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 열〮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수레〮 ᄂᆞ리〮오ᄃᆡ〮 空코ᇰ心심과〮 낫〮과 누을 제와〮 머그〮라〮 又方雞趐左右俱用不限多少燒灰右細硏爲散每服二錢匕溫酒調下不拘時{{*|}} ᄯᅩ〮 ᄃᆞᆯᄀᆡ〮 ᄂᆞ래ᄅᆞᆯ〯 두〯 녀글〮 다〯ᄡᅮ〮ᄃᆡ 하며〮 져〯구믈〮 限ᅌᆞᆫ〯티〮 말오〮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ᄂᆞ리〮오ᄃᆡ〮 時씽刻큭〮에〮 븓들이〮디 말〯라〮 又方黃蓮{{*|去鬚}}熟艾{{*|炙}}杏人{{*|去皮尖別硏各半兩}}右擣硏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塩湯下空心服{{*|}} ᄯᅩ黃ᅘᅪᇰ蓮련을〮 거웃〮 앗〮고〮 니근〮 ᄡᅮ〮글 브〮레 ᄧᅬ〯오〮 杏ᅘᆡᇰ〯仁ᅀᅵᆫ을〮 것과〮 부〯리ᄅᆞᆯ〮 앗〯고〮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디허〮 ᄀᆞ〮라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ᄒᆞᆫ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게〮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塩염湯타ᇰ〮ᄋᆞ〮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硇砂{{*|硏}}木香{{*|各半兩}}棟實{{*|去核炒}}茴香子{{*|炒}}京三稜{{*|炮各一兩}}右五味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空心酒下{{*|}} ᄯᅩ〮 硇砂상ᄅᆞᆯ〮 ᄀᆞᆯ오 木목〮香햐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棟도ᇰ實씨ᇙ〮을〮 ᄌᆞᅀᆞ〮 아!ᅀᅵ〮!ᅀᅡ〮! 봇고〮 茴ᅘᅬᆼ香햐ᇰ ᄡᅵ〮를〮 봇고 京겨ᇰ三삼稜르ᇰ을〮 炮뽀ᇢᄒᆞ야〮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훈〮!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空코ᇰ心심에〮 술로〮 머그〮라〮 又方槐子{{*|炒一兩}}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溫酒下空心服{{*|}} ᄯᅩ〮槐ᅘᅬᆼ子ᄌᆞᆼ〯ᄅᆞᆯ〮 보ᄭᅡ〮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술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萵苣{{*|切半斤}}皂莢{{*|剉碎三挺}}蜀椒{{*|去目及閉口者炒出汗一兩}}右少用水煮令相得不可太稀乘熱用布三兩重裹熨腫處冷卽易頻熨自消{{*|}} ᄯᅩ〮 부루 사ᄒᆞ〮로〮니〮 半반〮 斤근과〮 皂쪼ᇢ〯莢겹〮 사ᄒᆞ〮라 ᄯᅮ드〮려 세〯 挺텨ᇰ〯과〮川ᄌᆑᆫ椒죠ᇢ 눈〮과〮 입〮 마ᄀᆞ〮닐〮 앗〯고〮 봇가〮 ᄯᆞᆷ〮 내〯요니〮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므〮를 져〯고매〮 ᄒᆞ〮야〮 글혀〮 서르 맛게〮 ᄒᆞ고〮 너무 젹〯게〮 마롤〮디니〮 더운〮 저긔〮 뵈〮로 두〯ᅀᅥ ᄇᆞᆯ〮 ᄢᅳ려〮 브ᅀᅳᆫ ᄃᆡ〮 熨ᅙᅮᇙ〮호〮ᄃᆡ ᄎᆞ〮거〮든〮 ᄀᆞᆯ라〮 ᄌᆞ조〮 熨ᅙᅮᇙ〮ᄒᆞ면〮 절로〮 ᄂᆞᆺᄂᆞ니〮라〮 又方雄黃{{*|硏}}甘草{{*|各一兩}}礬石{{*|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ᄀᆞ〮라 두〯 兩랴ᇰ〯과〮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믈〮 닷 되〮예〮 글혀〮 브ᅀᅳᆫ ᄃᆡ〮 시수〮ᄃᆡ 良랴ᇰ久고ᇢ〯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車前子不拘多少擣羅爲末湯調塗腫處{{*|}} ᄯᅩ〮車챵前쪈子ᄌᆞᆼ〮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브ᅀᅳᆫ ᄃᆡ〮 ᄇᆞᄅᆞ라〮 又方蔓菁根不拘多少剉碎擣羅爲散溫水調塗腫處或以絹帛傅之以差爲度{{*|}} ᄯᅩ〮 댓무ᅀᅮᆺ 불휘〮ᄅᆞᆯ〮 사ᄒᆞ〮라 ᄯᅮ드〮려 디허〮 처〮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ᅩᆫ ᄃᆡ〮 ᄇᆞᄅᆞ라〮 시혹〮 기〯브로〮 브툐〮ᄃᆡ 됴〯ᄒᆞᆯ ᄀᆞ자ᇰ ᄒᆞ라〮 ==吐血下血第十四<sub>齒閒出血九竅出血附</sub>== 經驗良方云其證皆因內損或酒色勞損或心肺脉破血氣妄行血如湧泉口鼻俱出須臾不救 側栢葉{{*|蒸乾}}人參{{*|焙乾各一兩}}右二味細末每服二錢入飛羅麪二錢新汲井花水調如稀糊啜服血如湧泉不過二服卽止{{*|}} 그 證지ᇰ〮이〮 다〯 안〮히 損손〯호〮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 酒쥬ᇢ〯色ᄉᆡᆨ〮애〮잇버〮 損손〯커나〮 시혹心심肺폥〮脉ᄆᆡᆨ〮 이〮 ᄒᆞ〮야디〮여 血ᄒᆑᇙ〮氣킝 간대〮로〮 行ᅘᆡᇰᄒᆞ〮야〮 피〮 믈〮ᄉᆡᆷ〯ᄃᆞᆺ〮 ᄒᆞ〮야 입〮과〮 고〮콰애〮 다〯 나〮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側즉栢ᄇᆡᆨ〮 니〮플〮ᄠᅧ〮 ᄆᆞᆯ외〮오〮 人ᅀᅵᆫ參ᄉᆞᆷᄋᆞᆯ〮 焙ᄈᆡᆼ〮乾간호〮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ᄒᆞ〮야〮 飛빙羅랑麪면〮 두〯 돈〯 드〮려 ᄀᆞᆺ 기룬〮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로ᄃᆡ〮 누근〮 플〮ᄀᆞ〮티 ᄒᆞ〮야〮 머그〮라〮 피〮 믈〮 솟ᄃᆞᆺ〮 하〮야도〮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즉〮재 긋ᄂᆞ니〮라〮 如無前藥用荊芥一握燒過盖於地上要出火毒細硏如粉以陳米飮調下三錢許與服不過二服效{{*|}}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荊혀ᇰ〮芥갱〯 ᄒᆞᆫ 우후〮믈 ᄉᆞ〮라 ᄯᅡ해〮 두퍼〮火황〯毒독〮 내〯오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무근〮 ᄡᆞᆯ 글흔〮 므〮레 프〮러 세〮 돈〯 남ᄌᆞ기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됻〯ᄂᆞ〮니라〮 又無荊芥用釜底墨刮下細硏如粉每服三錢濃米飮調下連進二三服鼻衄一字吹入鼻中立效{{*|}} ᄯᅩ〮 荊혀ᇰ芥갱〮 업〯거든〮 가마〮 미틧〮 검듸여ᇰ을〮 ᄀᆞᆯ〮가〮 ᄀᆞ〮ᄂᆞ리〮 紛분〮ᄀᆞ〮티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두터이〮 글힌 ᄡᆞᆳ〮므〮레 프〮러 닛우〮 두〯ᅀᅥ 服뽁〮을〮 머기〮라〯 고해피〮 흐르거든〮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블〯면〮 즉〮재 됴〯ᄒᆞ〮리라〮 又方人有九竅四肢指歧閒皆出血此暴驚所致勿令患人知以井花水猛噀其面{{*|}} ᄯᅩ 사〯ᄅᆞ미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 가락 ᄉᆞᅀᅵ〮예 다〯 피나〮ᄆᆞᆫ 이ᄂᆞᆫ 과ᄀᆞᆯ이 놀〮란 다시〮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ᆯ〮 알외〮디〮 말〯오〮 井져ᇰ〮花황水ᄉᆔᆼ〯로〮 그 ᄂᆞᄎᆡ〮 ᄆᆡ이〮 ᄲᅮ모라 又方鼻口中出血不止用赤馬糞燒灰細末溫酒調下一錢{{*|}} ᄯᅩ〮 고〮콰 이베〮 피〮나고〮 긋디 아니〮커든〮 블근〮 ᄆᆞᆯᄯᅩᆼᄋᆞᆯ〮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ᄒᆞᆫ 돈〯을〮 머그〮라〮 經驗秘方鼻衄方用龍骨爲末以筆管吹半錢鼻中九竅出血皆可用又隨衄左右以新水洗足又以左撚紙索子繫手四肢呪曰血神住立止又張弓絃向上令病人仰臥枕絃放四肢如常臥{{*|}} 고햇〮피〮 고티ᄂᆞᆫ 法법〮에龍료ᇰ骨고ᇙ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붇〮ᄌᆞᆯ오〮로 半반〮 돈〯ᄋᆞᆯ 곳〮굼긔〮 불〯라 아홉〯 굼긔〮 피〮나〮거든〮 다〯 어루 ᄡᅳ〮리라 ᄯᅩ〮 피〮의〮 왼〯녁 올〮ᄒᆞᆫ녀〮글〮 조처〮 새〮 믈〮로 발 싯고〮 ᄯᅩ 외오〮 ᄭᅩᆫ〮 죠ᄒᆡ〮 노ᄒᆞ〮로〮 소ᇇ〮 네〯 가라ᄀᆞᆯ〮 ᄆᆡ오〮 呪쥬ᇢ〯ᄒᆞ〮야〮 닐오〮ᄃᆡ 血ᄒᆑᇙ〮神씬은〮 그치〮라〮 ᄒᆞ면〮 즉〮재 긋ᄂᆞ니〮라 ᄯᅩ〮 홠시우〮를〮지허〮 우흘〮 向햐ᇰ〯ᄒᆞ〮야 노코〮 病뼈ᇰ〮ᄒᆞᆫ 사〯ᄅᆞ미〮 졋〮바〮디〮여 누워〮 홠시우〮를〮 볘〯오 四ᄉᆞᆼ肢징ᄅᆞᆯ 펴〮 샹녜〮 누움〮 ᄀᆞᆮ〮게〮 ᄒᆞ라〮 又灸項後髮際兩筋閒宛宛中{{*|}} ᄯᅩ〮 목 뒷〮髮바ᇙ〮際졩 ㅅ 두〯 히ᇝ〮 ᄉᆞᅀᅵᆺ〮 우믁ᄒᆞᆫ ᄃᆡᆯ〮 ᄯᅳ〮라〮 澹寮方茜根散治鼻衄終日不止心神煩悶 茜根 黃芩 側栢葉 阿膠{{*|蚌粉炒}}生地黃{{*|各一兩}}甘草{{*|炙半兩}}右㕮咀每服四錢水一盞半姜三片煎至八分去滓溫服不拘時{{*|}} 茜쳔〮根ᄀᆞᆫ散산은〮 고해〮피져므〮ᄃᆞ록〮 긋디〮 아니〮ᄒᆞ〮야 ᄆᆞᅀᆞ미〮 닶〮가오〮닐〮 고티ᄂᆞ니〮 茜쳔〮根ᄀᆞᆫ 과〮黃ᅘᅪᇰ芩끔과〮 側즉〮栢ᄇᆡᆨ〮 닙〮과〮 阿ᅙᅡᆼ膠교ᇢᄅᆞᆯᄉᆞᄒᆡ에〮 봇고〮니〮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우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네〮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잔〮 半반〮과〮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ᄋ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時씽節져ᇙ을〮 븓들이〮디 말〯라〮 衛生簡易方九竅出血小薊一握搗汁酒半盞和頓服如無靑者以乾薊末冷水調三錢匕服{{*|}} 아홉〮 굼긔〮 피〮나〮거든〮 小쇼ᇢ〯薊곙〮 ᄒᆞᆫ 우후〮믈 디허 汁집〮 내〯야〮 술 半반〮 잔애〮 프〮러 다〯 머그라 ᄒᆞ〮다가〮 프르〮니 업거든〮 ᄆᆞᄅᆞᆫ 薊곙〮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ᄎᆞᆫ므〮레 세〯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暴下血用蒜五六枚去皮入豆豉硏爲膏如桐子大米飮下五六十丸無不愈者{{*|}} ᄯᅩ〮 과〮ᄀᆞᆯ이〮 下ᅘᅡᆼ〯血혀ᇙ〮 ᄒᆞ릴〮 고툐〮ᄃᆡ 마ᄂᆞᆯ〮 대〯엿 나〯ᄎᆞᆯ〮 거플 밧기〮고〮 젼구〮글〮 드〮러〮 ᄀᆞ〮라 골 ᄆᆡᇰ〮ᄀᆞ〮라〮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ᄡᆞᆯ〮 글힌 므〮레 쉰〮 여ᄉᆔᆫ〯 丸ᅘᅪᆫ을〮 머그〮면〮 됴〯티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又方用赤小豆一升搗碎水三升絞汁飮之{{*|}} ᄯᅩ〮赤쳑〮小쇼ᇢ〮豆또ᇢ〮 ᄒᆞᆫ 되〮ᄅᆞᆯ〮 디허〮 ᄇᆞᆺ아〮 믈〮 서〯 되〮예〮 프〮러〮 즈〮블ᄲᅡ〮 머그〮라〮 壽域神方治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 小쇼ᇢ〯便뼌에 下ᅘᅡᆼ〮血혀ᇙ〮이〮 긋디 아니〮커든〮酸솬漿쟈ᇰ草초ᇢ〯 ᄅᆞᆯ〮 드〮러〮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ᄲᅡ〮 머그〮라〮 酸솬漿쟈ᇰ은〮 ᄭᅪ리〮라〮 朱氏集驗方一金散治鼻衄出血過多昏冒欲死諸藥不效大蒜硏左鼻貼左脚右鼻貼右脚心兩鼻貼兩脚心{{*|}} 一ᅙᅵᇙ〮金금散산〮 은〮 고해〮피〮 나〯미 너무 하〮 어〮즐ᄒᆞ〮야〮 주거〮 가〮ᄂᆞ니〮 여러〮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큰〮 마ᄂᆞ〮ᄅᆞᆯ〮 ᄀᆞ〮라 왼〯녁 고〮히어든〮 왼〮녁 밠〮바다ᇰ애〮 브티〮고〮 올〮ᄒᆞᆫ녁 고〮히어든〮 올〮ᄒᆞᆫ녁 밠〮바다〮ᅌᅢ 브티〮고〮 두〯 고〮히어든〮 두〯 밠〮바다〮ᅌᅢ 브티〮라 又方齒縫出血不止他藥不能治之者塩主之{{*|}} ᄯᅩ〮닛〮ᄢᅵ〮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다ᄅᆞᆫ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닌 소고미〮 主즁〯ᄒᆞ니〮라 聖惠方治九竅四肢指歧閒出血方 生地黃{{*|一兩細切}}蒲黃{{*|半兩}}靑竹茹半兩 右以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每於食後溫服{{*|}}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가락 ᄉᆞ〮ᅀᅵ〮예 피〮나〮ᄂ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ᄒᆞᆫ 兩!라ᇰ〮!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ᆯ〮오〮 蒲뽕黃ᅘᅪᇰ 半반〮 兩랴ᇰ〯과〮 프른〮 댓거프를〮 갈〮로 ᄀᆞᆯ가〮 半반〮 兩랴ᇰ〯ᄋᆞᆯ〮 믈〮 ᄒᆞᆫ 큰〮 잔〮ᄋᆞ로〮 글혀〯 여슷〮 分분에〮 니르〮거든〮 즛의 앗〯고〮 食씩〮後ᅘᅮᇢ〯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吐血及鼻衄不止烏賊魚骨搗細羅爲散不計時以淸粥飮調下二錢{{*|}} ᄯᅩ〮吐통〯血ᄒᆑᇙ〮와〮 고해〮피〮 긋디〮 아니〮커든〮 烏ᅙᅩᆼ賊쯕〮魚!ᅌᅵᆼ!ᅌᅥᆼ! ᄲᅧ를〮 디허〮 ᄀᆞ〮ᄂᆞ리〮 처〮 時씽刻큭〮 혜〯디〮 말〯오 粥쥭〯 므〮레 두〯 돈〯곰〮 프〮러 머그〮라〮 又方鼻衄經日夜不止用乾姜削如蓮子大塞鼻中卽止{{*|}} ᄯᅩ〮 고해〮 피〮 밤〮나〮ᄌᆞᆯ 디〯내〮요ᄃᆡ〮 긋디〮 아니〮커든〮 乾간姜가ᇰᄋᆞᆯ〮 蓮련子ᄌᆞᆼ〯 만〮 케〮 갓가〮 곳〮굼긔〮 마ᄀᆞ〮면〮 곧〮 긋ᄂᆞ니〮라〮 又方濃硏好墨點鼻中立止{{*|}} ᄯᅩ〮 됴〯ᄒᆞᆫ墨믁〮 을〮 두터이〯 ᄀᆞ〮라 곳〮굼긔〮 디그〮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牙齒縫忽然出血 當歸散 當歸 桂心{{*|各半兩}}白凡{{*|一兩燒令汁盡}}甘草{{*|半兩}}右件藥擣麤羅分爲三度用每度以漿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熱含冷吐{{*|}} ᄯᅩ〮 닛〮ᄢᅵ〮메 忽호ᇙ〮然ᅀᅧᆫ히〯 피〮나〮거든〮 當다ᇰ歸귕와〮 桂ᄀᆒᆼ〮心심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을〮 ᄉᆞ〮라 汁집〮 업〯게 ᄒᆞ고〮 甘감草초ᇢ〯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디허〮 麤총히 처〮 세〮 버네〮 ᄂᆞᆫ화 ᄡᅮ〮ᄃᆡ ᄒᆞᆫ 버네〮 漿쟈ᇰ水ᄉᆔᆼ〮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더우〮닐〮 머구〮머 ᄎᆞ거든비〯와ᄐᆞ〮라〮 又方齒齗血出不止乾地龍末一錢白凡灰一錢射香末{{*|半錢}}右同硏令勻濕布上塗落貼於患處{{*|}} ᄯᅩ〮 닛믜유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ᄆᆞᄅᆞᆫ地딩〮龍료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돈〯과 白ᄈᆡᆨ〮礬뻔ㅅ ᄌᆡ ᄒᆞᆫ 돈〯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 ᄒᆞᆫᄃᆡ〮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저즌〮 뵈〮 우희〮 藥약〮 ᄇᆞᆯ라〮 피〮나〮ᄂᆞᆫ ᄃᆡ〮 브티〮라〮 又方無故口齒閒血出不止以淡竹葉濃煎湯熱含冷吐{{*|}} ᄯᅩ〮 젼ᄎᆞ〮 업〯시 입〮과〮 닛ᄉᆞᅀᅵ〮예 피〮나〮 긋디〮 아!디〮!니!커든〮 淡땀〯竹듁〮 니〮플〮 두텁〯게〮 글혀〮 더운〮 므〮를 머구〮머 ᄎᆞ〮거든〮 비〯와ᄐᆞ〮라〮 直指方治齒出血 鬱金 白芷 細辛{{*|各等分}}右爲末擦牙仍以竹葉竹皮濃煎入塩少許含嚥或炒塩傅{{*|}} 니〮예〮 피〮나〮ᄂᆞ닐〮 고툐〮ᄃᆡ 鬱ᅙᅮᇙ〮金금과〮 白ᄈᆡᆨ〮芷징〯와〮 細솅〮辛신ᄋ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니〮예〮ᄡᅮᄭᅩ〮 댓〮닙〮과〮 댓〮가ᄎᆞᆯ〮 두터이〮 글혀 소곰 져〯기 녀허〮 머구〮머 ᄉᆞᆷᄭᅵ〮며 !시!셰!혹〮 소고ᄆᆞᆯ〮 봇가〮 브티〮라〮 千金方齒閒出血溫童子小便半升煮取三合含之其血卽止{{*|}} 닛〮ᄉᆞᅀᅵ〮예 피〮나〮거든〮 아ᄒᆡ〮 小쑈ᇢ〯便뼌 半반〮 되〮를〮 글혀〮 서〯 호블〮 取츙〯ᄒᆞ〮야〮 머구므면〮 그 피〮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齒出血不止刮生竹皮二兩苦酒浸之令其人解衣坐使人含噀其背上三過仍取竹茹濃煮汁勿與塩適寒溫含漱之竟日爲度{{*|}} ᄯᅩ〮 니예 피〮나〮 긋!다〮!디〮! 아니〮커든〮 ᄂᆞᆯ 댓〮거츨〮 ᄀᆞᆯ〮가 두〯 兩랴ᇰ〯ᄋᆞᆯ〮 醋초ᇢ〮애〮 ᄃᆞᆷ〮고〮 그 사〯ᄅᆞ〮ᄆᆞ로〮 옷〮 바사〮 아ᇇ게 ᄒᆞ고〮 !타!다!ᄅᆞᆫ 사〯ᄅᆞ미〮 머구〮머 그 드ᇰ의〮 세〯 버늘〮 ᄲᅮᆷ〮고〮 댓〮거프를〮 取츙〯ᄒᆞ〮야〮 두터이〮 즈〮블 글혀〮 소곰 주디〮 말〯오〮 ᄎᆞ〮며 ᄃᆞᆺ호〮미맛〮갑게〮 ᄒᆞ〮야〮 머구〮!어!머! 야ᇰ〯지호〮ᄃᆡ 져므〮ᄃᆞ록〮 ᄒᆞ라〮 又方治酒醉牙齒涌血出 當歸{{*|二兩}}礬石{{*|六銖}}桂心 細辛 甘草{{*|各一兩}}右五味㕮咀以漿水五升煮取三升含之日五六夜三{{*|}} ᄯᅩ〮 술 醉ᄌᆔᆼ〮ᄒᆞ〮야〮 니〮예 피〮 솟〮ᄂᆞ닐〮 고툐〮ᄃᆡ 當다ᇰ歸귕 두〯 兩랴ᇰ〯!괴〮!과〮! 白ᄈᆡᆨ〮礬뻔 여슷〮 銖쓩와〮 桂ᄀᆒᆼ〮心심과 細솅〮辛신〮과〮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漿쟈ᇰ水ᄉᆔᆼ〯 닷 되〮예〮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머구〮무ᄃᆡ〮 나ᄌᆡ〮 !데〯!대〯!엿〮 번〮 바ᄆᆡ〮 세〯 번 ᄒᆞ라〮 又方燒釘令赤注孔血中止{{*|}} ᄯᅩ〮 모〮ᄃᆞᆯ ᄉᆞ〮라 븕게〮 ᄒᆞ〮야〮 핏 굼긔〮 고ᄌᆞ〮!연〮!면〮! 긋ᄂᆞ니〮라〮 又方舌上黑有數孔大如簪出血如湧泉 戎塩 黃芩{{*|一作葵子}}黃蘗 大黃{{*|各五兩}}人參 桂心 甘草{{*|各二兩}}右爲末蜜丸梧子大米飮服十丸日三服亦燒鐵烙之{{*|}} ᄯᅩ〮 혀〮 우히〮 검〯고〮 두〯ᅀᅥ 굼기〮 빈혓 구무만〮 코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거든〮 戎ᅀᅲᇰ塩염과 黃ᅘᅪᇰ芩끔 과〮 ᄒᆞ나ᄒᆞᆫ〮 葵ᄁᆔᆼ子ᄌᆞᆼ〯ㅣ라 ᄒᆞ다〮 黃ᅘᅪᇰ蘗ᄇᆡᆨ〮과〮 大땡〮黃ᅘᅪᇰ 各각〮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參ᄉᆞᆷ과〮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 各각〮 두〯 兩랴ᇰ〯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 丸ᅘᅪᆫ곰〮 ᄒᆞᄅᆞ 세〯 번 머그〮라〮 ᄯᅩ〮 鐵텨ᇙ〮을〮 ᄉᆞ〮!리!라! 지지〮라〮 得效方文蛤散治熱壅舌上出血如泉 五倍子{{*|洗}}白膠香 牡蠣粉{{*|各等分}}右爲末每以少許 摻患處或燒鐵篦熟烙孔上{{*|}} 文문蛤갑〯散산〮ᄋᆞᆫ〮 上쌰ᇰ〯熱ᅀᅧᇙ〮ᄒᆞ〮야〮 혀〮에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ᄒᆞ닐〮 고툐〮ᄃᆡ〮五ᅌᅩᆼ〯倍ᄈᆡᆼ子ᄌᆞᆼ〯ᄅᆞᆯ〮 싯고〮 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과〮 牡무ᇢ〯蠣롕〯粉분을〮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피〮나〮ᄂᆞᆫᄃᆡ〮 ᄇᆞᄅᆞ고〮 시혹〮 쇠〮빈혀를〮 ᄉᆞ〮라 굼긔〮 니기〮 지지〮라〮 又方舌無故出血炒槐花爲末摻之而愈{{*|}} ᄯᅩ〮 혜 전ᄎᆞ 업〯시 피〮나〮거든〮 槐ᅘᅬᆼ花황ᄅᆞᆯ〮 보ᄭᅡ〮 細솅〮末마ᇙ〮ᄒᆞ〮야〮 ᄇᆞᄅᆞ면〮 됻〯ᄂᆞ〮니라〮 ==大小便不通第十五== 聖惠方治大小便關格不通腹脹喘急方 膩粉{{*|一錢}}生麻油{{*|一合}}右相和空腹服之{{*|}} 大땡〮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몯〯ᄒᆞ〮야〮 ᄇᆡ〮 탸ᇰ〯만〮ᄒᆞ고〮 수〯미 ᄌᆞᄌ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膩닝〮粉분〮 ᄒᆞᆫ 돈〯과〮生ᄉᆡᇰ麻망油유ᇢ ᄒᆞᆫ 홉과〮ᄅᆞᆯ〮 섯거〮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蔓菁子油一合空腹服之卽通通後汗出勿怪{{*|}} ᄯᅩ〮 댓무ᅀᅮᆺ ᄡᅵᆺ〮 기름〯 ᄒᆞᆫ 호ᄇᆞᆯ〮 空코ᇰ心심에〮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 通토ᇰᄒᆞᆫ 後ᅘᅮᇢ〯에〮 ᄯᆞᆷ〮나〮거든〮 疑ᅌᅴᆼ心심 말〯라〮 又方治小便難腹滿悶不急療之殺人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裹分作二苞更互熨臍下小便立出{{*|}} ᄯᅩ〮 小쇼ᇢ〯便뼌이〮 어려〮워 ᄇᆡ〮 탸ᇰ〯만〮ᄒᆞ고〮 답답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파〮 서〯 斤근과〮 소곰 ᄒᆞᆫ 斤근을〮 섯거〮 므르 디허〮 보ᄭᅡ〮 덥〯게〮 ᄒᆞ〮야〮 기〯브로〮 ᄢᅳ료〮ᄃᆡ〮 두〮 ᄢᅳ례〮예〮 ᄂᆞᆫ화〮 서르 臍쨍〮下ᅘ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면〮 小쇼ᇢ〯便뼌이〮 즉〮재 나〮ᄂᆞ〮니라〮 聖濟緫錄茯苓丸治大小便不通 赤茯苓{{*|去黑皮}}芍藥 當歸{{*|切焙}}枳殼{{*|去穰麩炒}}白朮 人參{{*|各五兩}}大麻仁 大黃{{*|剉各三兩}}右爲末煉蜜和丸梧桐子大每服十五丸至二十丸空心煎茅根湯下{{*|}} 茯뽁〮苓려ᇰ丸ᅘᅪᆫ은〮 大땡〮小쇼ᇢ〯便뼌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티〮ᄂᆞ〮니〮 赤쳑茯뽁〮苓려ᇰ을〮 거믄〮 것 밧기〮고〮 芍작〮藥약〮과〮 當다ᇰ歸귕ᄅᆞᆯ〮 사ᄒᆞ〮라〮 焙ᄈᆡᆼ〮乾간ᄒᆞ고〮 枳징〮殼칵〮을〮 솝〯 앗〯!ᄀᆞ〮!고〮! 기울〮와〮 봇고〮 白ᄈᆡᆨ朮뜌ᇙ〮와〮 人ᅀᅵᆫ參ᄉᆞᆷ 各각〮 다ᄉᆞᆺ〮 兩랴ᇰ〯과〮大땡〮麻망仁ᅀᅵᆫ 과〮 大땡〮黃ᅘᅪᇰᄋᆞᆯ〮 사ᄒᆞ〮라〮 各각〮 석〯 兩랴ᇰ〯과〮를〮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다ᄉᆞᆺ〮 丸ᅘᅪᆫ으〮로〮 스〮믈〮 丸ᅘᅪᆫ지〯히 空코ᇰ心심애〮 茅모ᇢ根ᄀᆞᆫ湯타ᇰ〮을〮 글혀〮 ᄂᆞ리〮우라〮 經驗良方木通散治小便不通小腹痛不可忍 木通 滑石{{*|各半兩}}黑牽牛{{*|頭末半兩}}右㕮咀每服一錢水半盞燈心十莖葱白一箇同煎三分食前溫服{{*|}} 木목〮通토ᇰ散산〮은〮 小쇼ᇢ〯便뼌 不부ᇙ〮通토ᇰᄒᆞ〮야〮 ᄇᆡᆺ〮기슭〮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릴〮 고티〮ᄂᆞ니〮 木목〮通토ᇰ과〮 滑ᅘᅪᇙ〮石쎡〮 각〮 半반〮 兩랴ᇰ〯과〮 黑흑〮牽켠牛ᅌᅮᇢ 머릿〮 ᄀᆞᄅᆞ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돈〯곰〮 ᄒᆞ〮야〮 믈〮 半반〮 잔〮과〮 燈드ᇰ 心심 열〮 줄기〮와〮 파〮 ᄒᆞᆫ 낫〮과〮 ᄒᆞᆫ〮ᄃᆡ〮 三삼分분을〮 글혀 食씩〮前쪈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리!라! 肘後方治小便不利莖中痛欲死牛膝幷葉不以多小酒煮飮之立愈{{*|}} 小쇼ᇢ〯便뼌이 快쾡〮티〮 몯〯ᄒᆞ〮야〮 陰ᅙᅳᆷ莖ᅘᆡᇰㅅ 소〮비 알파〮 죽고〮져〮 ᄒᆞ〮ᄂᆞ닐〮 고툐〮ᄃᆡ牛ᅌᅮᇢ膝시ᇙ〮을〮 닙〮 조쳐〮 수레〮 글혀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大便秘澁不通 大黃{{*|四兩}}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右切以水六升煮取二升分再服{{*|}} 大땡〮便뼌이〯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大땡〮黃ᅘᅪᇰ 넉〯 兩랴ᇰ〯과〮 桃또ᇢ仁ᅀᅵᆫ 셜흔〮 나〯ᄎᆞᆯ〮 것과〮 부〯리와〮 어우러ᇰ ᄌᆞᅀᆞ〮ᄅᆞᆯ〮 앗〯고 ᄀᆞ〮라 믈〮 엿 되〮예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ᄂᆞᆫ화〮 두〯 버네〮 머그〮라〮 又方胡鷰屎蜜和納大孔中卽通{{*|}} ᄯᅩ〮 며ᇰ마〮긔〮 ᄯᅩᇰᄋᆞᆯ〮 ᄢᅮ〮레 ᄆᆞ라〮 밋굼긔〮 녀흐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리〮!라〮! 簡要濟衆方治大便澁不通牽牛子半生半熟擣爲散每服二錢煎薑湯調下如未通再服及以熱茶投之量虛實不計時加减服之{{*|}} 大땡便뼌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牽켠牛ᅌᅮᇢ子ᄌᆞᆼ〮ᄅᆞᆯ〮 半반〮만〮 ᄂᆞ리〮오〮 半반〮만〮 니그〮닐〮 디허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生ᄉᆡᇰ薑가ᇰ湯타ᇰ〮애〮 프〮러 ᄂᆞ리〮오ᄃᆡ〮 通토ᇰ티〮 몯〯거든〮 다시〯 먹고 더운〮 차로〮 머구〮ᄃᆡ 虛헝實씨ᇙ〮을〮 혜〯오〮 時씽〮刻큭〮 혜〯디 마라〮 더으며ᇰ〮더러〮 머그〮라〮 ==溺水第十六== 經驗良方凡有人溺水者救上岸卽將牛一頭却令溺水之人將肚橫覆相抵在牛背上兩邊用人扶策徐徐牽牛而行以出腹內之水如醒卽以蘇合香元之類或老生薑擦其齒若無牛以活人於長板櫈上仰臥却令溺水人如前法將肚相抵活人身聽其水出卽活{{*|}} 믈읫 사ᄅᆞ미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ᄀᆞᅀᅢ올이고 쇼 ᄒᆞ나ᄒᆞᆯ 가져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ᄇᆡᄅᆞᆯ ᄉᆈ 드ᇰ 우희 ᄀᆞᄅᆞ 업데우고 두 녁 ᄀᆞᅀᅢ 사ᄅᆞ미 자바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쇼ᄅᆞᆯ 잇거ᄃᆞᆮ녀 ᄇᆡ 안햇 므를 내오 ᄒᆞ다가ᄭᆡ어든 곧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類ᄅᆔᆼ어나 시혹 늘근 生ᄉᆡᇰ薑가ᇰ이나 그 니예 ᄡᅮ츠라 ᄒᆞ다가 쇼 업거든 산 사ᄅᆞᄆᆞ로長땨ᇰ床싸ᇰ 우희 졋바뉘이고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알ᄑᆡᆺ 法법ᄀᆞ티 ᄇᆡᄅᆞᆯ 산 사ᄅᆞᄆᆡ 모매 서르 다혀 므리 나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聖惠方凡溺水急解去死人衣灸臍中卽差{{*|}} 믈읫 므레ᄲᅡ디거든 時씽急급히 주근 사ᄅᆞᄆᆡ 옷 밧기고 ᄇᆡᆺ보ᄀ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竈中灰布地令厚五寸以甑側安着灰上令溺人伏於甑上使頭小垂下炒塩二錢內小竹管內吹入下部中卽當吐水去却甑扶下溺人着灰中以灰壅身水恒出鼻口中卽活矣{{*|}} ᄯᅩ 브ᅀᅥ븻 ᄌᆡ로 ᄯᅡ해 ᄭᆞ로ᄃᆡ 두틔 다ᄉᆞᆺ 寸촌이에 코 실을 ᄌᆡ 우희 겨트로 노코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시르 우희 업데우고 머리ᄅᆞᆯ 져기 아래로 ᄲᅡ디게 ᄒᆞ고 소고ᄆᆞᆯ 봇가 두 돈ᄋᆞᆯ 져근 대로ᇰ애 녀허 밋굼긔 부러 드리면 반ᄃᆞ기 므를 吐통ᄒᆞ리니 실을 앗고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아나 ᄂᆞ리와 ᄌᆡ예 노코 ᄌᆡ로 모ᄆᆞᆯ 두프면 므리 고콰 입과로 나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掘地作坑熬數斛熱灰內坑中下溺人灰覆濕徹卽易之灰勿大熱灰冷更易半日卽活也{{*|}} ᄯᅩ ᄯᅡ 파 굳 ᄆᆡᇰᄀᆞᆯ오 두ᅀᅥ 셤 더운 ᄌᆡᄅᆞᆯ 봇가 구데 녀코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녀코 ᄌᆡ로 두퍼 ᄉᆞᄆᆞᆺ젓거든 곧 ᄀᆞᆯ라 ᄌᆡᄅᆞᆯ 너무 봇디 말오 ᄌᆡ ᄎᆞ거든 ᄀᆞ라 半반 날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但埋溺人暖灰中頭足俱沒唯開七孔水出卽活{{*|}} ᄯᅩ 오직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다운 ᄌᆡ예 무두ᄃᆡ 머리와 발왜 다 들에 ᄒᆞ고 오직 닐굽 굼글 여러 므리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緜裹皂莢末內下部中湏臾水出{{*|}} ᄯᅩ 소오매 皂쪼ᇢ莢겹ㅅ ᄀᆞᆯᄋ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이ᅀᅳᆨ고 므리 나ᄂᆞ니라 千金方半夏末吹入鼻{{*|}}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부러 고해 녀ᄒᆞ라 又方裹石灰納下部中水出盡卽活{{*|}}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므리 다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熬沙覆死人上下有沙但出鼻口耳沙冷濕卽易{{*|}} ᄯᅩ 몰애ᄅᆞᆯ 봇가 주근 사ᄅᆞᄆᆞᆯ 두푸ᄃᆡ 아라우희 몰애 잇고 오직 고콰 입과 귀와ᄅᆞᆯ 내야 몰애 ᄎᆞ고 젓거든 곧 ᄀᆞᆯ라 管見大全良方救男女墮水中者以常用薦席卷之就平地上袞轉一二百轉則水出自活亦有用陳壁土末覆之死者更以爐中煖灰覆臍上下則元氣廻自活省後當服利水之藥如五苓散異功五積散朮附湯除濕湯不換金正氣散若欲兼服安心神收歛神氣之藥宜服蘇合香元在人斟酌輕重冷熱而投之{{*|}} 男남女녕ㅣ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샤ᇰ녜 ᄡᅳᄂᆞᆫ 돗긔 ᄆᆞ라 平뼈ᇰᄒᆞᆫ ᄯᅡ해 나ᅀᅡ가 一ᅙᅵᇙ二ᅀᅵᆼ百ᄇᆡᆨ 버늘 구으리면 므리 나면 절로 사ᄂᆞ니라 ᄯᅩ 무근 ᄇᆞᄅᆞ맷 ᄒᆞᆰᄀᆞᆯᄋᆞ로 둡ᄂᆞ니라 주그닐 ᄯᅩ 火황爐롱앳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 아라우희 두프면 元ᅌᅯᆫ氣킝 도라와 사ᄂᆞ니라 ᄎᆞ린 後ᅘᅮᇢ에 믈 즈츼ᄂᆞᆫ 藥약이五ᅌᅩᆼ苓려ᇰ散산 과異잉功고ᇰ五ᅌᅩᆼ積젹散산 과朮뜌ᇙ附뿡湯타ᇰ 과 除똉濕십湯타ᇰ과不부ᇙ換ᅘᅪᆫ金금正져ᇰ氣킝散산 ᄋᆞᆯ 머기고 ᄒᆞ다가 ᄆᆞᅀᆞᄆᆞᆯ 便뼌安ᅙᅡᆫ케 ᄒᆞ고 氣킝分분을 모도ᄂᆞᆫ 藥약을 조쳐 머기고져 커든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을 머귤디니 사ᄅᆞ미 輕켜ᇰ重뜌ᇰ과 冷ᄅᆡᇰ熱ᅀᅧᇙ을 斟짐酌쟉ᄒᆞ야 머교매 잇ᄂᆞ니라 壽域神方冬月落水微有氣者用大器炒灰熨心上候暖氣通溫粥稍稍呑之卽活若便持火炙卽死{{*|}} 겨ᅀᅳ레 므레 디여 자ᇝ간 氣킝分분 잇ᄂᆞ닐 큰 그르세 ᄌᆡᄅᆞᆯ 봇ᄭᅡ 가ᄉᆞᄆ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더운 氣킝分분이 通토ᇰ호ᄆᆞᆯ 기드려 ᄃᆞᄉᆞᆫ 粥쥭을 졈졈 머기면 곧 사ᄂᆞ니 ᄒᆞ다가 브를 ᄧᅬ면 즉재 죽ᄂᆞ니라 又方急於人中穴及兩脚大母趾內離甲一韭葉許各灸三五壯卽活{{*|}} ᄯᅩ ᄲᆞᆯ리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와 두 밠 엄지가띿 아ᇇ 밠토ᄇᆞ로셔 ᄒᆞᆫ 부ᄎᆡᆺ닙 너븨만 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세다ᄉᆞᆺ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以屈死人兩脚着生人肩上以溺人背搭走吐水出盡卽活{{*|}}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두 다리ᄅᆞᆯ 구펴 산 사ᄅᆞᄆᆡ 엇게 우희 여ᇇ고 주근 사ᄅᆞᄆᆞᆯ 지여 ᄃᆞᄅᆞ면 므리 다 나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得效方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 酒쥬ᇢ壜땀 ᄒᆞᆫ 나ᄎᆞ로 죠ᄒᆡ젼 ᄒᆞᆫ 주믈 ᄉᆞ라 壜땀 안해 녀코 時씽急급히 壜땀 이브로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ᆡ ᄂᆞ치나 시혹 ᄇᆡᆺ복 우희 두퍼 ᄎᆞ거든 다시 죠ᄒᆡ젼을 ᄉᆞ라 壜땀 안해 녀허 ᄂᆞᄎᆡ 두퍼 므를 아ᅀ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壜땀은 술녇ᄂᆞᆫ 딜어시라 ==自縊第十七== 千金方凡救自縊死者極須按定其心勿截繩手抱起徐徐解之心下尙溫者以氍毹{{*|卽毛席也}}覆口鼻兩人吹其兩耳{{*|}} 믈읫 목 ᄆᆡ야 주그닐 救구ᇢ호ᄃᆡ ᄀᆞ자ᇰ 모로매 그 ᄆᆞᅀᆞᄆᆞᆯ 눌러 一ᅙᅵᇙ定뗘ᇰᄒᆞ고 노ᄒᆞᆯ 긋디 말오 소ᄂᆞ로 아나 니르왇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글오ᄃᆡ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니란 담으로 입과 고ᄒᆞᆯ 둡고 두 사ᄅᆞ미 그 두 귀ᄅᆞᆯ 불라 又方强臥以物塞兩耳竹筒納口中使兩人痛吹之塞口傍無令氣得出半日死人卽噫噫卽勿吹也{{*|}} ᄯᅩ 뉘이고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ᆯ 입 안해 녀코 두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불오 입가ᅀᆞᆯ 마가 氣킝分분이 나디 몯게 ᄒᆞ면 半반 날ᄋᆞᆯ 주겟던 사ᄅᆞ미 곧 숨쉬ᄂᆞ니 숨쉬어든 부디 말라 又方擣皂莢細辛屑如豆大吹兩鼻中{{*|}} ᄯᅩ 皂쪼ᇢ莢겹과 細솅辛신ㅅ ᄀᆞᆯᄋᆞᆯ 디허 코ᇰ낫만 ᄒᆞ닐 두 곳굼긔 불라 又方刺雞冠血出滴口中卽活男雌女雄{{*|}} ᄯᅩ ᄃᆞᆯᄀᆡ 벼츨 ᄣᅵᆯ어 피내야 이베 처디면 즉자히 사ᄂᆞ니 남지ᄂᆞᆫ 암ᄐᆞᆯᄀᆞ로 코 겨지븐 수ᄐᆞᆯᄀᆞ로 ᄒᆞ라 又方尿鼻口眼耳中幷捉頭髮一撮如筆管大掣之立活{{*|}} ᄯᅩ 고콰 입과 눈과 귀와에 오좀 누고 머리터럭 ᄒᆞᆫ 져부미 붇 ᄌᆞᄅᆞ만 ᄒᆞ닐 자바ᄃᆞᇰᄀᆡ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雞血塗喉下{{*|}} ᄯᅩ ᄃᆞᆯᄀᆡ 피ᄅᆞᆯ 목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灸四肢大節陷大指本支名曰地袖各七壯{{*|}} ᄯᅩ 네 활기옛 큰 ᄆᆞᄃᆡᆺ 우무근 ᄃᆡ와 엄짓가락 미틧 그믈 일후믈 地띵袖쓔ᇢㅣ라 ᄒᆞᄂᆞ니 各각 닐굽 壯자ᇰ을 ᄯᅳ라 經驗救急方急抱起解下切不可截繩卽以衣物塞兩耳將竹筒於口中吹氣及以衣物緊塞二物爲妙凡縊者從早至晩雖已冷必可救從夜至早稍難救若心上溫一日已上猶可救切不可截斷繩欸欸地抱起其身緩解繩放臥令人踏其肩以手拔其髮常令一人緊以手擦胸脇一人以手摩搦臂足屈伸之若已僵漸强屈之又按其腹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却身苦勞動少與官桂湯及粥淸令喉潤更令兩人以筆管吹其耳中尤妙依此法救無不活者{{*|}} ᄲᆞᆯ리 아나 니르왇고 글오ᄃᆡ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즉자히 오ᄉᆞ로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로 입 안해 氣킝分분을 불오 오ᄉᆞ로 두 거슬 구디 마고미 됴ᄒᆞ니 믈읫 목ᄆᆡ야 주그니 아ᄎᆞᆷ브터 나조ᄒᆡ 니르닌 비록 차도 어루 救구ᇢᄒᆞ려니와 밤브터 아ᄎᆞᄆᆡ 니르닌 救구ᇢ호미 어려우니 ᄒᆞ다가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면 ᄒᆞᄅᆞᆺ 內뇡ᄂᆞᆫ 어루 救구ᇢᄒᆞ리니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그 모ᄆᆞᆯ 아나 니르왇고 노ᄒᆞᆯ 날회야 그르고 뉘이고 사ᄅᆞᄆᆞ로 그 엇게ᄅᆞᆯ ᄇᆞᆲ고 소ᄂᆞ로 머리 터릴 ᄲᅡ혀며 샤ᇰ녜 ᄒᆞᆫ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소ᄂᆞ로 가ᄉᆞᆷ과 녑과ᄅᆞᆯ ᄡᅮᆺ고 ᄒᆞᆫ 사ᄅᆞ미 소ᄂᆞ로 ᄇᆞᆯ콰 바ᄅᆞᆯ ᄡᅮᆺ고 구피락펴락게 ᄒᆞ라 ᄒᆞ다가 세웓거든 졈졈 구피고 ᄯᅩ 그 ᄇᆡᄅᆞᆯ ᄆᆞᆫ죨디니 이ᄀᆞ티 ᄒᆞᆫ 밥 ᄣᅢ만 ᄒᆞ면 곧 氣킝分분을 어더 숨쉬ᄂᆞ니라 모미이처커든 져기管관桂ᄀᆒᆼ湯타ᇰ 과 粥쥭므를 머겨 모기 젓게 ᄒᆞ고 ᄯᅩ 두 사ᄅᆞ미 붇ᄌᆞᆯᄋᆞ로 귓굼글 불에 호미 더 됴ᄒᆞ니 이 法법을 브터 救구ᇢᄒᆞ면 사디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得效方緊用兩手掩其口勿令透氣兩時氣急卽活{{*|}} ᄆᆡ이 두 소ᄂᆞ로 그 이블 마가 氣킝分분이 ᄉᆞᄆᆞᆺ디 아니케 두 時씽刻큭을 ᄒᆞ면 氣킝分분이 急급ᄒᆞ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壽域神方治自縊 就以所縊繩燒三指撮白湯調服之{{*|}}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ᄆᆡ얏던 노ᄒᆞᆯ 세 소ᇇ가락으로 자보니만 ᄉᆞ라 더운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未解下先用膝頭或手厚裹衣物緊塞穀道抱起解下揉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兩耳待其氣回方可放手若泄氣則不可救矣{{*|}} ᄯᅩ 그르디 아니ᄒᆞ야셔 몬져 무루피어나 소니어나 오ᄉᆞ로 두터이 ᄡᅡ 밋굼글 구디 막고 아나 니르와다 그르고 모ᄀᆡᆺ 허므를 주므르며 모ᄀᆞᆯ ᄆᆞᆫ지고 고해 불며 두 귀를 부러 氣킝分분이 도라오ᄆᆞᆯ 기드려ᅀᅡ 소ᄂᆞᆯ 쉬울디니 ᄒᆞ다가 氣킝分분이 ᄉᆡ면 救구ᇢ티 몯ᄒᆞ리라 又方卽於鼻下人中穴針灸遂活{{*|}} ᄯᅩ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針짐ᄒᆞ고 ᄯᅳ면 사ᄂᆞ니라 經驗秘方治自縊死梁上塵如豆兩耳鼻四處各納一粒以筒令四人極齊吹之卽活矣{{*|}}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보 우흿 드트를 코ᇰ만 ᄒᆞ닐 두 귀 두 고 네 고대 各각各각 ᄒᆞᆫ 나ᄎᆞᆯ 녀코 대로ᇰᄋᆞ로 네 사ᄅᆞ미 ᄀᆞ자ᇰ ᄀᆞᄌᆞ기 불에 ᄒᆞ면 즉재 살리라 管見大全良方以藍硏取汁灌之或以雞屎白如棗大以酒半盞和硏灌服及着鼻中尤佳{{*|}} 족ᄋᆞᆯ ᄀᆞ라 즈블 取츙ᄒᆞ야 브ᅀᅳ라 시혹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거시 大땡棗초ᇢ만 ᄒᆞ닐 술 半반 잔애 프러 ᄀᆞ라 브ᅀᅳ며 곳굼긔 녀후미 더 됴ᄒᆞ니라 ==失欠頷車蹉候第十八== 千金方治失欠頰車蹉開張不合方一人以手指牽其頤以漸推之則復入矣推當疾出其指恐誤嚙傷人指也{{*|}}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 버리고 어우디 아니ᄒ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ᄒᆞᆫ 사ᄅᆞ미 소ᇇ가라ᄀᆞ로 그 ᄐᆞᄀᆞᆯ ᄃᆞᇰᄀᆡ야 졈졈 밀면 다시 드ᄂᆞ니 밀오 모로매 그 소ᇇ가라ᄀᆞᆯ ᄲᆞᆯ리 내욜디니 사ᄅᆞᄆᆡ 소ᇇ가라ᄀᆞᆯ 그르믈까 저프니라 又方治失欠頰車蹉方消蠟和水傅之{{*|}} ᄯᅩ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디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미를 노겨 므레 프러 브티라 ==金瘡第十九== 聖惠方金瘡失血其人當苦渴然須忍之常令乾食與肥脂之物以止其渴又不得多飮粥則血溢出殺人也又忌嗔怒及大言笑思想陰陽動作勞力若食醎酸飮食熱羹臛輩皆使瘡痛衝發甚者卽死{{*|}} 金금瘡차ᇰ 애 피 흘리면 그 사ᄅᆞ미 반ᄃᆞ기 ᄀᆞ자ᇰ 목ᄆᆞᆯ라 ᄒᆞᄂᆞ니 그러나 모로매 ᄎᆞ마 샤ᇰ녜 ᄆᆞᄅᆞᆫ 飮ᅙᅳᆷ食씩과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ᄆᆞᆯ로ᄆᆞᆯ 그치고 ᄯᅩ 粥쥭을 해 머기디 마롤디니 피 솟나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ᄯᅩ嗔친心심 과 ᄆᆡ이 말홈과 우ᅀᅮᆷ과 陰ᅙᅳᆷ陽야ᇰ을 ᄉᆞ라ᇰ홈과 뮈우며 힘ᄡᅮ믈 마롤디니 ᄒᆞ다가 ᄧᆞᆫ 것과 싄 것과 더운羹ᄀᆡᇰ 과 고기ᄅᆞᆯ 머그면 다 瘡차ᇰ이 알파 다시 發버ᇙᄒᆞᄂᆞ니 甚씸ᄒᆞ닌 즉재 죽ᄂᆞ니라 治金瘡大散方五月五日平旦使四人出四方各於五里內採一方草木莖葉每種各半把勿令漏脫一事日正午時切碓擣用石灰一豆斗擣令極爛仍先選揀大實桑樹三兩株鑿作孔令可受藥然分藥於孔中實築令堅後以桑樹皮蔽之用麻擣石灰密泥令不泄氣更以桑皮纏之令牢至九月九日午時出取陰乾百日藥成擣之日曝令乾更擣絹羅貯之凡有金瘡傷折出血用藥封裹勿令轉動不過十日瘥不膿不腫不畏風若傷後數日始得用藥須暖水洗令血出卽傅之此藥大驗{{*|}} 金금瘡차ᇰ 고티ᄂᆞᆫ 大땡散산方바ᇰ은 五ᅌᅩᆼ月ᅌᅯᇙ 五ᅌᅩᆼ日ᅀᅵᇙ 平뼈ᇰ明며ᇰ에 네 사ᄅᆞᄆᆞ로 四ᄉᆞᆼ方바ᇰ애 보내야 各각各각 五ᅌᅩᆼ里링 안햇 ᄒᆞᆫ 方바ᇰ草초ᇢ木목 줄기와 닙과ᄅᆞᆯ 가지마다 各각 半반 줌을 ᄏᆡ요ᄃᆡ ᄒᆞ나토 아니ᄒᆞ니 업시 ᄒᆞ야 바ᄅᆞ 나ᄌᆡ 사ᄒᆞ라 디허 石쎡灰횡 ᄒᆞᆫ 마ᄅᆞᆯ 디호ᄃᆡ ᄀᆞ자ᇰ 니기 ᄒᆞ고 몬져 큰 ᄲᅩᇰ나모 두ᅀᅥ흘 ᄀᆞᆯᄒᆡ야 구무 포ᄃᆡ 藥약 들 만ᄒᆞ야 藥약을 굼긔 ᄂᆞᆫ화 녀코 ᄀᆞᄃᆞ기다아 굳게 코 後ᅘᅮᇢ에거츠로 막고 삼 조쳐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구디 ᄇᆞᆯ라 氣킝分분 나디 아니케 코 다시 ᄲᅩᇰᄭᅥ츠로 얼거 굳게 코 九구ᇢ月ᅌᅯᇙ 九구ᇢ日ᅀᅵᇙ 午ᅌᅩᆼ時씽예니르러 내야 一ᅙᅵᇙ百ᄇᆡᆨ 나ᄅᆞᆯ ᄀᆞᄂᆞᆯ해 ᄆᆞᆯ외야 藥약이 일어든 디허 ᄒᆡ에 ᄆᆞᆯ외야 다시 디허 기베 처 ᄀᆞ초라 믈읫 金금瘡차ᇰ 헐어나 것거나 피나거든 藥약ᄋᆞ로 ᄡᆞ고 움즈기디 아니케 ᄒᆞ면 열흐를 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 곪디 아니ᄒᆞ며 븟디 아니ᄒᆞ며 ᄇᆞᄅᆞᄆᆞᆯ 저티 아니ᄒᆞᄂᆞ니 ᄒᆞ다가 傷샤ᇰᄒᆞᆫ 後ᅘᅮᇢ 사나ᄋᆞ래 비르서 藥약을 ᄡᅮᆯ디니 모로매 더운 므레 시서 피나게 ᄒᆞ고 곧 브튤디니 이 藥약이 ᄀᆞ자ᇰ 神씬驗ᅌᅥᆷᄒᆞ니라 又方治金瘡或肌肉斷裂右剝取新桑皮作線縫之又以新桑皮裹之又以桑白汁塗之極驗小瘡但以桑皮裹之便差如斷筋取旋復根擣封之卽續{{*|}} ᄯᅩ 金금瘡차ᇰ 고티며 시혹 ᄉᆞᆯ히 그처디며 ᄧᆡ야디거든 새 거츨 밧겨 실 ᄆᆡᇰᄀᆞ라호고 ᄯᅩ 새거츠로 ᄡᆞ고 ᄯᅩ ᄲᅩᇰ ᄒᆡᆫ 즙으로 ᄇᆞᄅᆞ면 지극 神신驗ᅌᅥᆷᄒᆞ니라 져근 瘡차ᇰ은 오직거츠로 ᄡᆞ면 곧 됻ᄂᆞ니 ᄒᆞ다가 히미 긋거든旋션復복根ᄀᆞᆫ 을 取츙ᄒᆞ야 디허 ᄡᆞ면 곧 닛ᄂᆞ니라 又方治刀傷斧斫等瘡右取黑氈燒爲灰細硏傅傷損處封裹勿動直待生肌爲妙{{*|}} ᄯᅩ 갈해 헐며 도ᄎᆡ예버흔 ᄃᆞᆯ헷 瘡차ᇰ을 고툐ᄃᆡ 거믄 시우글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헌 ᄃᆡ 브티고 ᄢᅳ려 뮈우디 말오 ᄉᆞᆯ 날 ᄀᆞ자ᇰ 기드료미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右取馬蹄燒灰令極細不計時候以煖酒調下二錢{{*|}} ᄯᅩ 金금瘡차ᇰᄋᆞᆯ 고텨 알포ᄆᆞᆯ 긋게 호ᄃᆡ ᄆᆞᆯ구블 ᄉᆞ라 ᄀᆞ자ᇰ ᄀᆞᄂᆞ리 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더운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金瘡但刀斧傷損出血不止宜用此 石榴花{{*|半斤}}石灰{{*|一斤炒}}右件藥擣細羅爲散傅瘡上以帛裹勿令着風水瘡合差{{*|}}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툐ᄃᆡ 오직 갈콰 도최예 헐여 피나 긋디 아니커든 이ᄅᆞᆯ ᄡᅮᆯ디니 石쎡榴류ᇢㅅ곳 半반 斤근과 石쎡灰횡 ᄒᆞᆫ 斤근을 봇가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기브로 ᄢᅳ려 ᄇᆞᄅᆞᆷ과 믈와 맛디 아니케 ᄒᆞ야 瘡차ᇰ이 어울면 됻ᄂᆞ니라 又方取小便服三兩盞卽差{{*|}} ᄯᅩ 小쇼ᇢ便뼌 두ᅀᅥ 잔을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 杏人{{*|去皮擣如泥}}石灰{{*|等分}}右件藥同硏每用以猪脂和傅之日二三度卽差{{*|}} ᄯᅩ 金금瘡창애 피 긋디 아니커든 ᄉᆞᆯ곳 ᄌᆞᅀᆞᄅᆞᆯ 것 밧겨 즌ᄒᆞᆰᄀᆞ티 디코 石쎡灰횡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ᄒᆞᆫᄃᆡ ᄀᆞ라 도ᄐᆡ 기르므로 ᄆᆞ라 브툐ᄃᆡ ᄒᆞᄅᆞ 두ᅀᅥ 번곰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 ᄯᅩ 프른 뵈ᄅᆞᆯ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ᄢᅳ리면 잇사나ᄋᆞᆯ 後ᅘᅮᇢ에 됻ᄂᆞ니라 又方取狼牙草莖葉爛搗傅之{{*|}} ᄯᅩ狼라ᇰ牙앙草초ᇢ ㅅ 줄기와 닙과ᄅᆞᆯ 므르디허 브티라 又方取紫檀末以傅瘡上止痛止血生肌甚効{{*|}} ᄯᅩ 紫ᄌᆞᆼ檀딴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긋고 피 긋고 ᄉᆞᆯ 나ᄂᆞ니 甚씸히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牡礪散 牡礪{{*|半兩}}石膏{{*|一分}}右件藥擣羅更細硏用煉了猪膏調成膏以封瘡上痛卽止{{*|}}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텨 알품 긋게 ᄒᆞᄂᆞᆫ 牡무ᇢ礪롕散산은 牡무ᇢ礪롕 半반 兩랴ᇰ과 石쎡膏고ᇢ ᄒᆞᆫ 分분을 디허 츠고 다시ᄀᆞᄂᆞ리 ᄀᆞ라 煉련혼 도ᄐᆡ 곱ᄋᆞᆯ 노겨 골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取雄黃末傅瘡上當用有汁出卽差{{*|}}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반ᄃᆞ기 汁집이 나리니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疼痛以龍骨細硏傅瘡上{{*|}}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 긋디 아니코 알ᄑᆞ거든 龍료ᇰ骨고ᇙ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라 又方用桑根半斤剉以水一豆斗煎取五升不計時候煖服一盞服盡卽効{{*|}} ᄯᅩ ᄲᅩᇰ나못 불휘 半반 斤근을 사ᄒᆞ라 믈 ᄒᆞᆫ 말로 글혀 닷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데여 ᄒᆞᆫ잔을 머구ᄃᆡ 다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石灰擣爲末厚傅瘡上用緜子裹之若瘡口深不合者內少許末令瘡漸漸合也{{*|}}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瘡차ᇰ의 두터이 ᄇᆞᄅᆞ고 소오ᄆᆞ로 ᄡᅩᄃᆡ ᄒᆞ다가 瘡차ᇰ이 기퍼 어우디 아니커든 져기 ᄀᆞᆯᄋᆞᆯ 녀허 瘡차ᇰ이 졈졈 어울에 ᄒᆞ라 又方用乾塩梅燒作灰細硏傅瘡上卽差{{*|}} ᄯᅩ 소고매 ᄆᆞᆯ외욘 梅ᄆᆡᆼ實씨ᇙ을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金瘡血出不止取車前葉爛擣傅之血卽止連根取用亦効{{*|}}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나 긋디 아니커든 車창前젼 니플 므르디허 브티면 피 즉재 긋ᄂᆞ니 불휘 조쳐 ᄡᅮ미 ᄯᅩ 됴ᄒᆞ니라 治金瘡內漏瘀血在腹中脹滿宜服䖟蟲散 䖟蟲{{*|三十枚去趐足微炒}}桃仁{{*|一兩湯漫去皮尖雙仁麩炒微黃}}桂心{{*|一兩半去麤皮}}川大黃{{*|三兩剉碎微炒}}水蛭{{*|三十枚炒令微黃}}右件藥擣細羅爲散每服二錢用童子小便一中盞煎至五分溫溫和滓服日五服夜三服如卒無小便用酒水代之亦得{{*|}} 金금瘡차ᇰᄋᆡ 피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얼읜피 ᄇᆡ 안해 이셔 탸ᇰ만커든 䖟ᄆᆡᇰ蟲뜌ᇰ散산을 머귤디니 䖟ᄆᆡᇰ蟲뜌ᇰ 셜흔 나ᄎᆞᆯ ᄂᆞ래와 발와 앗고 자ᇝ간 봇고 桃또ᇢ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을 더운 므레 ᄃᆞ마 것과 부리와어우러ᅌᅵᄅᆞᆯ 앗고 기울와 섯거 봇가 져기 노ᄅᆞ게 코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 半반을 麤총ᄒᆞᆫ 거츨 밧기고川ᄌᆑᆫ大땡黃ᅘᅪᇰ 석 兩랴ᇰ을 사ᄒᆞ라 자ᇝ간 봇고 거머리 셜흔 나ᄎᆞᆯ 봇가 자ᇝ간 노ᄅᆞ게 ᄒᆞ고 이 藥약ᄃᆞᆯᄒᆞᆯ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에 두 돈곰 아ᄒᆡ 오좀 ᄒᆞᆫ 中듀ᇰ잔ᄋᆞ로 글혀 다ᄉᆞᆺ 分분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滓ᄌᆡᆼ 조쳐 머구ᄃᆡ 나ᄌᆡ 다ᄉᆞᆺ 번 먹고 바ᄆᆡ 세 번 머그라 ᄒᆞ다가 밧바 小쇼ᇢ便뼌 업거든 수리나 므리나 ᄒᆞ야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金瘡內漏血入腹中 大麻仁一升葱白{{*|二七莖}}右相和搗令熟以水三大盞煮取一盞去滓分爲三服若血出不盡腹中有膿血更令服當下膿血効{{*|}} ᄯᅩ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들어든 열ᄡᅵ ᄒᆞᆫ 되와 파 두닐굽 줄기ᄅᆞᆯ 섯거 디허 닉게 ᄒᆞ야 믈 세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츙ᄒᆞ야 즈ᅀᅴ 앗고 ᄂᆞᆫ화 세 버네 머고ᄃᆡ ᄒᆞ다가 피 몯 다 나 ᄇᆡ 안해 골ᄆᆞᆫ 피 잇거든 다시 머기면 골ᄆᆞᆫ 피 ᄂᆞ려 됴ᄒᆞ리라 又方蒲黃{{*|二兩}}當歸{{*|二兩末}}右相和更硏令勻每服以溫酒調下一錢日四五服{{*|}} ᄯᅩ 蒲뽕黃ᅘᅪᇰ 두 兩랴ᇰ과 當다ᇰ歸귕 두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섯거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번 머고매 ᄃᆞᄉᆞᆫ 술로 ᄒᆞᆫ 돈ᄋᆞᆯ 프러 머고ᄃᆡ ᄒᆞᄅᆞ 네다ᄉᆞᆺ 번 머그라 金瘡內漏血在腹中不出以牡丹擣細羅爲散不計時候以溫酒調下三錢{{*|}}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이셔 나디 아니커든牡무ᇢ丹단 ᄋ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ᄃᆞᄉᆞᆫ 술로 서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以馬齒莧擣取汁每服煖飮一小盞卽止兼治惡血在腹中{{*|}} ᄯᅩ馬망齒칭莧ᅘᅧᆫ ᄋᆞᆯ 디허 汁집 아ᅀᅡ 머글 제 데여 ᄒᆞᆫ 小쇼ᇢ盞잔ᄋᆞᆯ 머그면 곧 긋ᄂᆞ니 모딘 피 ᄇᆡ 안해 이쇼ᄆᆞᆯ 조쳐 고티ᄂᆞ니라 衛生易簡方金瘡血不止用小薊葉挼爛封之{{*|}} 金금瘡차ᇰ 피 긋디 아니커든 小쇼ᇢ薊곙 니플 니기 부븨여 브티라 又方用白薇末貼之立止{{*|}} ᄯᅩ 白ᄈᆡᆨ薇밍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用白芍藥一兩熬黃爲末酒調二錢服或米飮亦止痛{{*|}} ᄯᅩ白ᄇᆡᆨ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봇가 누르거든 細솅末마ᇙᄒᆞ야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며 시혹 ᄡᆞᆯ 글힌 므레 머거도 ᄯᅩ 알포미 긋ᄂᆞ니라 又方用血竭末傅之血與疼痛立止{{*|}} ᄯᅩ 血ᅘᆑᇙ竭꺼ᇙ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피와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金瘡腸出隨卽推入用桑皮作線縫佳以熱雞血塗之{{*|}}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챠ᇰᄌᆡ 나거든 卽즉時씽예 미러 녀코 ᄲᅩᇰ 거츠로 실 ᄆᆡᇰᄀᆞ라 호면 됴ᄒᆞ니 더운 ᄃᆞᆯᄀᆡ 피로 ᄇᆞᄅᆞ라 又方用靑蒿搗傅止血定痛生肌甚良{{*|}} ᄯᅩ 靑쳐ᇰ蒿호ᇢᄅᆞᆯ 디허 ᄇᆞᄅᆞ면 피 그츠며 알포미 그츠며 ᄉᆞᆯ히내사ᄂᆞ니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經驗良方治金瘡 木賊{{*|三兩}}麻黃{{*|去節一兩}}甘草{{*|七錢半}}右爲細末每服五錢熱酒調下先整骨了夾定飮之令醉{{*|}} 金금瘡차ᇰ 고툐ᄃᆡ 속새 세 兩랴ᇰ과 麻망黃ᅘᅪᇰ ᄆᆞᄃᆡ 아ᅀᅡ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 닐굽 돈 半반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한 服뽁애 다ᄉᆞᆺ 돈ᄋᆞᆯ 더운 수레 프러 먹고 몬져 ᄲᅧᄅᆞᆯ 고텨 ᄢᅧ 단기고 술 머겨 醉ᄌᆔᆼ케 ᄒᆞ라 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蒜半升破去心皮右以無灰酒二升煮令極爛細硏每服一合已來須臾得汗卽差{{*|}}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ᄇᆞᄅᆞᆷ 마자 왜트닐 고툐ᄃᆡ 마ᄂᆞᆯ 半반 되ᄅᆞᆯ ᄢᅢ혀 고ᄀᆡ야ᇰ과 거프를 앗고 ᄌᆡ 업슨 술 두 되로 글혀 ᄀᆞ자ᇰ 므르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번 머고ᄃᆡ ᄒᆞᆫ 홉만 ᄒᆞ면 아니한 더데 ᄯᆞᆷ나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鷄糞{{*|二兩}}黑豆{{*|一升洗淨炒令燋黑}}右以酒三升煎熱投藥於酒中更煎三五沸去滓時時隨多少飮之令盡得汗爲佳未汗卽更作服以汗出爲度{{*|}} ᄯᅩ ᄃᆞᆯᄀᆡ ᄯᅩᇰ 두 兩랴ᇰ과 거믄 코ᇰ ᄒᆞᆫ 되ᄅᆞᆯ 조히 시서 봇가 검게 ᄒᆞ고 술 서 되로 글혀 덥거든 藥약ᄋᆞᆯ 수레 녀허 다시 세다ᄉᆞᆺ 번 글히고 즈ᅀᅴ 아ᅀᅡ 時씽時씽예 하거나 젹거나 머거 업게 ᄒᆞ야 ᄯᆞᆷ나미 됴ᄒᆞ니 ᄯᆞᆷ 곳 아니 나거든 다시 ᄆᆡᇰᄀᆞ라 머거 ᄯᆞᆷ날 ᄀᆞ자ᇰ ᄒᆞ라 又方雞子{{*|三枚}}鳥麻油{{*|五合}}合煎稍稠待冷塗瘡上極妙救急方上{{*|終}}{{*|}} ᄯᅩ ᄃᆞᆯᄀᆡ알 세 낫과 ᄎᆞᆷ기름 닷 호ᄇᆞᆯ ᄒᆞᆫᄃᆡ 달혀 져기 두텁거든 ᄎᆡ와 헌 ᄃᆡ ᄇᆞᄅᆞ면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옛한글/끝}} nmc2o5ruajzfw8zy5a8wl1lshjtkqlb 458047 458046 2026-08-17T23:09:32Z Blahhmosh 13019 /* 溺水第十六 */ 458047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부제=권상 |저자= |이전= |다음=[[../하|권하]] |설명= }} {{옛한글 알림}} {{옛한글/시작}} ==卒中風第一== 直指方治卒中法 圓白天南星{{*|濕紙裹煨}}南木香 蒼朮{{*|生}}白羊眼半夏{{*|用百沸湯就銚蘸少頃各一錢半}}辣細辛 甘草{{*|生}}石昌蒲{{*|細切各一錢}}右件剉散分作二服水一盞半生薑七厚片煎取其半乘熱調蘇合香圓三圓灌下痰盛者加全蝎二枚灸治一切卒中不論中風中寒中暑中濕中氣及痰厥飮厥之類初作皆可用此先以皂角去弦皮細辛或生南星半夏爲末揭以管子吹入鼻中俟其噴嚔卽進前藥牙噤者中指點南星細辛末幷烏梅肉頻擦自開{{*|直띡〮指ᄌᆞᆼ〯方바ᇰ믄득〮 中듀ᇰ風보ᇰᄒᆞ니〮 고티〮ᄂᆞᆫ〮 法{{SIC|법〮|빔〮}}은도〮렫고〮 ᄒᆡᆫ〮天텬南남星셔ᇰ 을저즌〮 죠ᄒᆡ〮예〮 ᄡᅡ〮 구으〮니와〮 南남木목〮香햐ᇰ 과〮 ᄂᆞᆯ蒼차ᇰ朮뜌ᇙ〮 와〮 ᄒᆡᆫ〮羊야ᇰᄋᆡ〮 눈〮ᄀᆞᆮ〮ᄒᆞᆫ 半반〮夏ᅘᅡᆼ〮 ᄅ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번솟글흔〮 므〮레자ᇝ〯간 ᄃᆞ〮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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몯〯ᄒᆞ닐〮 고티〮ᄂᆞ니〮 光과ᇰ明며ᇰ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과〮 猪뎡牙ᅌᅡᆼ皂조ᇢ〯角각〮 네〯나〯치〮 ᄉᆞᆯ〮지고〮 염글오〮 좀〮 먹디〮 아니〮ᄒᆞ〮닐〮 거믄〮 거플밧겨〮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輕켜ᇰᄒᆞ니〮란〮 半반〮 돈〯이〮오〮 重듀ᇰ〯ᄒᆞ니〮란〮 세〯 돈〯ᄋᆞᆯ〮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ᅥ〮 너무吐통〮티〮 아니〮케코〮 오직〮 젹젹 ᄎᆞᆫ추〯미〮 ᄒᆞᆫ두〯 되〮만〮 나면〮 곧〮ᄉᆞᆲᄉᆞᆲᄒᆞ〮ᄂᆞ〮니라〮 {{SIC|버|바}}거 날회야〮 調뚀ᇢ理링〯 ᄒᆞ고〮 너무 吐통〮호〮미〮 몯〯ᄒᆞ리〮라〮}} 經驗良方破棺散治中風牙已緊無門下藥天南星末{{*|半錢}}白龍腦末一字右合硏勻頻擦令熱牙自開{{*|破팡〮棺관〮散산〮 은〮 中듀ᇰ〮風보ᇰᄒᆞ〮야〮 니〮ᄒᆞ마〮 구더〮 藥약〮머귤〮 門몬업〯스닐〮 고티〮ᄂᆞ니〮 天텬南남星셔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白ᄈᆡᆨ〮龍료ᇰ腦노ᇢ〯 ㅅ ᄀᆞᄅᆞ 一ᅙᅵᇙ 字ᄍᆞᆼ〮와〮ᄅᆞᆯ〮 뫼화〮 ᄀᆞ〮라 골아〮 ᄌᆞ조〮ᄲᅵ븨〮여〮 덥〯게〮 ᄒᆞ면〮 니〮 절로〮 열〯리라〮}} 葛氏備急方中風角弓反張四肢不收煩亂欲死者 淸酒{{*|五升}}雞白屎{{*|一升}}右擣篩合和揚之千遍乃飮之大人服一升日三少小服五合差{{*|ᄇᆞᄅᆞᆷ마자〮왜지그〯라〮 네〯 활〮개ᄅᆞᆯ〮 거두〮디〮 몯〯ᄒᆞ〮야〮어〮즈〮러워〮 죽ᄂᆞ닐〮 淸쳐ᇰ酒쥬ᇢ〯 닷 되〮와〮ᄃᆞᆯᄀᆡ〮 ᄒᆡᆫ〮 ᄯᅩᇰ ᄒᆞᆫ 되〮와〮ᄅᆞᆯ〮디코〮 {{SIC|처〮|치〮}} 프〮러〮 一ᅙᅵᇙ〮千쳔 버늘〮저ᅀᅥ〮 머구〮ᄃᆡ〮 얼〯우ᄂᆞᆫ〮 ᄒᆞᆫ 되〮옴〮 ᄒᆞᄅᆞ 세〯 번 먹고〮져므〮닌〮 닷호ᄇᆞᆯ〮 머그〮면〮 됴〯ᄒᆞ리〮라〮}} ==中寒第二<sub>凍瘡凍死附</sub>== 和劑方姜附湯 乾薑{{*|一兩}}附子{{*|生去皮臍細切一枚}}右㕮咀每服三錢水一盞半煎七分食前溫服{{*|姜가ᇰ附뿡〮湯타ᇰ 乾간薑가ᇰ ᄒᆞᆫ 兩랴ᇰ과附뿡〮子ᄌᆞᆼ〯 ᄂᆞᄅᆞᆯ〮 것 과〮ᄇᆡᆺ보ᄀᆞᆯ〮 앗〯고〮細솅切쳐ᇙ〮호〮니〮 ᄒᆞᆫ 낫〯과〮ᄅ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돈〯애〮 믈〮 ᄒᆞᆫ 盞잔〮 半반〮ᄋᆞ〮로〮 닐굽〮 分분ᄋᆞᆯ〮글혀〮 食씩〮前쪈에〮ᄃᆞᄉᆞ닐〮 머그〮라〮}}又方理中湯治五臟中寒口噤失音四肢强直兼治胃脘停痰冷氣刺痛 人蔘 乾薑 白朮 甘草{{*|各等分}}右㕮咀每服四錢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溫服{{*|ᄯᅩ〮理링〯中듀ᇰ湯탕 은五ᅌᅩᆼ〯臟짜ᇰ〯 이〮 中듀ᇰ〮寒ᅘᅡᆫᄒᆞ〮야〮 입〮 마고〮므러〮 소리〮 몯〯ᄒᆞ며〮 四ᄉᆞᆼ〮肢징세〯오〮 고ᄃᆞ〮닐〮 고티〮며〮 ᄯᅩ〮胃ᅌᅱᆼ〮脘ᅌᅪᆫ〮 애〮 痰땀이〯담겨〮 胃ᅌᅱᆼ〮脘ᅌᅪᆫ〮ᄋᆞᆫ〮가ᄉᆞ〮미라〮 冷ᄅᆡᇰ〯ᄒᆞᆫ 氣킝〮分분이〮디ᄅᆞ저겨〮 알ᄑᆞ닐〮 고티〮ᄂᆞ〮니〮人ᅀᅵᆫ蔘ᄉᆞᆷ 과〮 乾간薑가ᇰ과〮白ᄈᆡᆨ〮朮뜌ᇙ〮 와〮 甘감草초ᇢ〯ᄅᆞᆯ〮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네〯 돈〯애〮 믈〮 ᄒᆞᆫ 큰〮 盞잔〮으〮로〮 글혀〮 六륙分분에〮 니르〮거든〮즛의 앗〯고〮 ᄃᆞᄉᆞ닐〮 머그〮라}} 凍瘡聖惠方治凍耳成瘡兎腦髓取塗之{{*|귀〮어러〮 허〯닐〮 고툐〮ᄃᆡ〮 톳〮긔 머릿〮 骨고ᇙ〮髓ᄉᆔᆼ〯 를〮내〯야〮 ᄇᆞᄅᆞ라〮}}又方杏仁{{*|一斤湯浸去皮}}壓取油塗之{{*|ᄯᅩ〮杏ᅘᆡᇰ〯仁ᅀᅵᆫ ᄒᆞᆫ 斤근을〮 더운〮 므〮레ᄃᆞ〮마 것〮밧기〮고〮 지즐〮워〮 기름〮 내〯야〮 ᄇᆞᄅᆞ라〮}} 聖濟緫錄治手足凍瘡腫爛赤小豆半升煮汁熱浸洗瘡日三五次{{*|손〮밠〮언〯 瘡차ᇰ 이〮브ᅀᅳ며〮 헤여〮디닐〮 고툐〮ᄃᆡ〮 블근〮 ᄑᆞᆺ〮 半반〮 되〮ᄉᆞᆯᄆᆞᆫ〮 므〮를〮 덥〯게〮 ᄒᆞ〮야〮 瘡차ᇰᄋᆞᆯ〮 ᄃᆞ〮마〮시수〮ᄃᆡ〮 ᄒᆞᄅᆞ 세〯버니〮나〮 다ᄉᆞᆺ〮 버니〮나〮 ᄒᆞ라〮}} 治寒凍足跟開裂血出疼痛牛皮膠燒細硏爲末以唾和塗之{{*|어러〮밠〮츠〮기 ᄠᅥ〮디〮어〮 피〮나고알히〮ᄂᆞ닐〮 고툐〮ᄃᆡ〮ᄉᆈ〯 갓프〮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추〮메 ᄆᆞ라〮 ᄇᆞᄅᆞ라〮}} 百一選方治凍瘡黃蘗燒存性細硏以雞子淸調傅破者乾摻神妙{{*|언〮 瘡차ᇰᄋᆞᆯ〮 고툐〮ᄃᆡ〮黃ᅘᅪᇰ蘗ᄇᆡᆨ〮 을〮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ᄃᆞᆯᄀᆡ〮앐〮 ᄆᆞᆯᄀᆞᆫ〮 므〮레〮 ᄆᆞ〮라〮브티〮라〮 허〯닌〮ᄆᆞᄅᆞ닐〮 ᄲᅵ후〮미〮 됴〯ᄒᆞ니〮라〮}} 得效方治足上凍爛生瘡黃丹爲末用猪脂調傅妙{{*|바〮리〮ᄃᆞ〮라 헤여〮디닐〮 고툐〮ᄃᆡ〮 黃ᅘᅪᇰ丹단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도ᄐᆡ〮 기르〮메〮 ᄆᆞ라〮브튜〮미〮 됴〯ᄒᆞ니〮라〯}} 衛生寶鑑如神散治凍瘡皮膚破爛痛不可忍大黃爲細末新水調搽凍破瘡上{{*|}} 凍도ᇰ〮瘡차ᇰ〮 이〮 갓과〮 ᄉᆞᆯ〮쾌〮 헤여〮디〮여〮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닐〮 고툐〮ᄃᆡ〮大땡〮黃ᅘᅪᇰ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ᆺ기룬〮 므〮레〮프〮러 헌〯듸〮 ᄇᆞᄅᆞ라〮 衛生十全方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濃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茄子莖葉枯者煮洗之{{*|}} 凍도ᇰ〮瘡차ᇰ을〮 고툐〮ᄃᆡ〮 가짓 불휘ᄅᆞᆯ〮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고ᇙ〮髓ᄉᆔᆼ〯로〮 ᄇᆞᄅ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ᄯᅩ〮 가짓 줄기〮와〮 닙이우〮닐〮 글혀〮 시스〮라〮 又方黃丹炒令色變 風化石灰{{*|等分}}右拌勻每一兩許沸湯浸洗患處冷卽止不過三洗効{{*|}} ᄯᅩ〮 黃ᅘᅪᇰ丹단ᄋᆞᆯ〮봇가〮 비〮치〮다ᄅᆞ게〮 코〮 ᄇᆞᄅᆞ매〮ᄂᆞᆯ욘〮 石쎡〮灰횡 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섯거〮 골아〮 ᄒᆞᆫ 兩랴ᇰ만〮글는 므〮레〮 ᄃᆞᆷ가〮 알ᄑᆞᆫ ᄃᆡ〮 시수〮ᄃᆡ〮 ᄎᆞ〮거든〮 말〮면〮 세〯 번 시수〮믈〮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라〮 凍死聖惠方治凍死方以大器中多熬灰使煖囊盛以摶其心冷卽更易心煖氣通目轉則口乃亦開可與溫酒服粥淸稍稍嚥之卽活若不先溫其心便將火灸其身冷氣與火相摶急卽不活也{{*|}} 어러〮주그〮닐〮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큰〮그르〮세〮 ᄌᆡ〮ᄅᆞᆯ〮만〯히〮 봇가〮 덥〯게〮 ᄒᆞ〮야〮 주머니〮예〮녀허〮 가〮ᄉᆞ〮매〮노햇〮다가〮 ᄎᆞ〮거든〮 즉〮재 ᄀᆞᆯ라〮ᄆᆞᅀᆞ미〯 더워〮 氣킝〮分분이〮 通토ᇰᄒᆞ며 누〮니 돌〯면〮 이〮비 ᄯᅩ〮 열〯리니〮어루〮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며〮粥쥭〮므〮를〮 漸쪔〯漸쪔〯 ᄉᆞᇝ기〮면〮 곧〮 사〯ᄂᆞ니〮ᄒᆞ〮다가〯 그 ᄆᆞᅀᆞᄆᆞᆯ〮ᄃᆞᆺ게〮 아니〮코〮 곧〮 블〮로〮 그 모〮ᄆᆞᆯ〮ᄧᅬ〯 면〮 ᄎᆞᆫ〮 氣킝〮分분이 블〮와〮 서르사화〮 ᄲᆞᄅᆞ면〮 곧〮사〯디〮 몯〯ᄒᆞ〮ᄂᆞ〮니라〮 本朝經驗粥飮醬湯爲上飮酒次之{{*|}} 粥쥭〮믈〮와〮쟈ᇰ〯ᄭᅮ기〮 위두코〮 술 머구〮미〮버그〮니라〮 ==中暑第三== 聖惠方治熱暍心悶方以熱土及熬熱灰土壅其臍上佳{{*|}} 中듀ᇰ〮暑셩〮ᄒᆞ〮야〮 ᄆᆞᅀᆞᆷ 답답ᄒᆞ니〮 고티〮ᄂᆞᆫ〮 方바ᇰ애〮 더운〮 ᄒᆞᆰ과〮 봇ᄀᆞᆫ〮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우희〮 두프〮면〮 됴〯ᄒᆞ〮니라〮 又方濃煮蓼取汁一大盞分二服飮之愈{{*|}} ᄯᅩ〮엿귀〮ᄅᆞᆯ〮 두터이〮 글혀〮 汁집〮을〮 取츙〯ᄒᆞ〮야〮 큰〮 ᄒᆞᆫ 盞잔ᄋᆞᆯ〮 두〮 服뽁〮애〯 ᄂᆞᆫ화〮 머그〮면〮 됻〯ᄂᆞ〮니〮라〮 又方生地黃汁一中盞溫暖服之{{*|}} ᄯᅩ〮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汁집〮 ᄒᆞᆫ 中듀ᇰ盞잔〮을〮데여〮 머그〮라〮 又方取麵一兩以溫水一中盞攪和服之{{*|}} ᄯᅩ〮 밄〮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을〮 ᄃᆞᄉᆞᆫ〮 믈〮 ᄒᆞᆫ 中듀ᇰ盞잔〮애〮 프〮러 머그〮라〮 又方服地漿一盞卽愈{{*|}} ᄯᅩ〮地띵〮漿쟈ᇰ ᄒᆞᆫ 盞잔〮ᄋᆞᆯ〮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地띵〮漿쟈ᇰᄋᆞᆫ〮ᄯᅡ해〮 져〯근 굳〮 ᄑᆞ〮고〮 믈〮 브ᅀᅥ〯니기〮 후ᇰ〯두ᅌᅲᆫ〮 므〮리라〯 千金方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 더우〮며닐〮 고툐〮ᄃᆡ〮길헷〯 더운〮ᄒᆞᆯᄀᆞ〮로〮 가ᄉᆞ〮매〮여ᇇ고〮 져〯 기 식거든〮 ᄀᆞᆯ오〮 氣킝〮分분이〮通토ᇰ커든〮 말〯라〮 又方張死人口令通以暖湯徐徐灌口中小擧死人頭令湯入腹湏臾卽蘇{{*|}}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이〮블〮버〯리혀〮 通토ᇰ케〮 ᄒᆞ고〮 더운〮믈〮로〮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이베〮 븟고〮 주근〮 사〯ᄅᆞᄆᆡ〮 머리〮ᄅᆞᆯ〮 져〯기〮 드러〮 더운〮 므〮리〮 ᄇᆡ에들〮에〮 ᄒᆞ면〮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살〯리라〮 又方使人噓其心令暖易人爲之{{*|}} ᄯᅩ〮 사〮ᄅᆞ〮ᄆᆞ로〮 가〮ᄉᆞ〮매〮 잆〮김〯 드〮려 덥〯게〮 호〮ᄃᆡ〮 사〯ᄅᆞᄆᆞᆯ〮ᄀᆞ람〮 ᄒᆞ라〮 又方抱狗子若雞着心上熨之{{*|}} ᄯᅩ〮 가ᇰ아지〯와〮 ᄃᆞᆰ과〮ᄅᆞᆯ〮 아나〮 가ᄉᆞᆷ 우희〮다혀 熨ᅙᅮᇙ〮ᄒᆞ라 又方屋上南畔瓦熱熨心冷易之{{*|}} ᄯᅩ〮 집 우흿 南남녁ᄀᆞ〮ᅀᅢᆺ〮 디새〮ᄅᆞᆯ 덥〯게〮 ᄒᆞ〮야〮 가ᄉᆞ〮매〮 熨ᅙᅮᇙ〮호〮ᄃᆡ〮 식거든〮 ᄀᆞᆯ라〮 壽域神方車輪土五錢冷水調澄淸服之妙{{*|}} 술윗〮ᄠᅵ옛〯 무든 ᄒᆞᆰ 닷 도〯ᄂᆞᆯ〮 ᄎᆞᆫ〮므레〮 프〮러〮ᄆᆞᆰ안초〮아 머그〮면〮 됴〯ᄒᆞ니라〮 又方中暑發昏以新汲水滴入鼻孔用扇搧之重者以地漿灌則醒與冷水飮則死{{*|}} ᄯᅩ〮 中듀ᇰ〮暑쎵〮ᄒᆞ〮야〮 어즐〮커든〮 ᄀᆞᆺ 기!른〮!룬〮! 믈〮로곳〮굼긔〮 처〮디〯오〮 부체〮로〮부츠라〮 重뜌ᇰᄒᆞ니〮란〮 地띵〮漿쟈ᇰᄋᆞ로〮 브ᅀᅳ면 ᄭᆡ〮ᄂᆞ니〮 ᄎᆞᆫ〮 믈〮 ?머?기〮면〮 ?죽?ᄂᆞ니〮라〮 又方用大蒜三兩瓣細嚼溫湯送下仍禁冷水卽愈{{*|}} ᄯᅩ〮 굴〯근〮 마ᄂᆞᆯ〮 두〯ᅀᅥ알〮 ᄒᆞᆯ ?ᄂᆞ?로니 십고〮 더운〮믈〮로〮ᄂᆞ리〮오고〮 ᄎᆞᆫ〮 므〮를〮 먹디〮 말〯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 ᄯᅩ〮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ᄒᆞᆰ과〮 굴〯근〮마ᄂᆞᆯ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ᄂᆞ로니 ᄀᆞ〮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管見大全良方云若偶在無人所居之境一時無湯可移病人安於樹陰之下却掬路上熱土安於病人臍上仍撥開作一窮以人注尿於其中得暖卽活{{*|}} ᄒᆞ다가〮마!조〮!초〮!아 사〮ᄅᆞᆷ 업〯슨〮 ᄯᅡ해이셔〮 더운〮믈 업〯거든〮 病뼈ᇰ〮人ᅀᅵᆫᄋᆞᆯ 옮겨〮 나못〮ᄀᆞ〮ᄂᆞᆯ해 두고〮 길헷〮 더운 ᄒᆞᆯᄀᆞᆯ〮?우?희〮여〮 病뼈ᇰ〮人ᅀᅵᆫ의 ᄇᆡᆺ복 우희〮노코〮 헤혀〮 ᄒᆞᆫ굼글〮 짓〯고〮 사〯ᄅᆞ미〮 그 가온〮ᄃᆡ〮 오좀〮 누면〮 더우〮면〮 곧 사〯ᄂᆞ〮니라〮 ==中氣第四== 和劑方指南云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激挫忿怒盛氣不得宣泄逆氣上行忽然仆倒昏迷不省人事牙關緊急手足拘攣其狀與中風無異但口內無涎聲此證只是氣中不可妄投取涎發汗等藥而反生他病但可與七氣湯分解其氣散其壅結其氣自止七氣湯連進效速更可與蘇合香元{{*|}} 氣킝〮中듀ᇰ〮ᄒᆞᆫ 證지ᇰ은〮해〯 豪ᅘᅩᇢ貴귕ᄒᆞᆫ 사〯ᄅᆞ미이〯ᄅᆞᆯ〮 因ᅙᅵᆫᄒᆞ〮야〮!긱!격〮!발〮ᄒᆞ며〮 것기〮여〮 忿푼〯怒농〯ᄒᆞ〮야〮 氣킝〮分분이〮 盛쎠ᇰ〮호〮ᄃᆡ펴ᄃᆞᆯ〮 몯〯ᄒᆞ〮야〮 氣킝〮分분〮이거스〮러〮 우흐〮로〮올오〮매나〮 믄〮득〯업더〮디〮여 어〮즐〮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고〮 니〮세워드〮며 손〮바리뷔〯트〯리 그 야ᇰ〯이〮 中듀ᇰ〮風보ᇰ과〮 다ᄅᆞ디〮 아니〮ᄒᆞ니 오직〮 입〮 안해〮 추ᇝ〮소ᄅᆡ〮 업〯스니〮 이〮 證!시ᇰ〮!지ᇰ〮!이〮 곧〮 이〮 氣킝中듀ᇰ〮이〮니〮간대로〮 춤〮아ᅀᆞ며〮 ᄯᆞᆷ〮내〯욤 ᄃᆞᆯ〮햇〮 藥약〮ᄋᆞᆯ ᄡᅥ〮도ᄅᆞ혀〮 다ᄅᆞᆫ 病뼈ᇰ나긔〮 호〮미〮 몯〯ᄒᆞ리〮니〮 오직〮七치ᇙ氣킝湯!다ᇰ!타ᇰ! ᄋᆞᆯ 머겨〮 그 氣킝〮分분을ᄂᆞᆫ화〮 노기며〮막?딜?여〮 ᄆᆡ요〮ᄆᆞᆯ〮 흐트〮면〮 그 氣킝分분이〮 절로〮긋ᄂᆞ니〮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ᆯ〮닛우〮 머기〮면〮 效ᅘᅭᇢ〮驗ᅌᅥᆷ〮이〮 ᄲᆞ〮ᄅᆞ니〮 ᄯᅩ〮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을〮머규미〮 됴〯ᄒᆞ〮니라〮 七氣湯治虛冷上氣及寒熱怒恚喜憂愁等氣內結積聚堅牢如柸心腹絞痛不能飮食時發時止發則欲死半夏{{*|湯洗七次焙五兩}}人蔘{{*|去蘆}}甘草{{*|灸}}肉桂{{*|去麤皮各一兩}}右剉每服三錢水一大盞入生薑三片煎至七分去滓稍熱服食前{{*|}} 七치ᇙ〮氣킝湯타ᇰᄋᆞᆫ虛!힝!헝!冷ᄅᆡᇰ〯 ᄒᆞ야〮 氣킝〮分분이〮오ᄅᆞ니〮와〮 寒ᅘᅡᆫ과〮 熱ᅀᅧᇙ〮와〮 怒농〯와〮 깃붐〮과〮 시름〮 ᄃᆞᆯ〮햇〮 氣킝〮分분이〮 안해〮모다〮 구두〮미〮 진〮 ᄀᆞᆮ〮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파〮 飮ᅙᅳᆷ〯食씩〮 몯〮ᄒᆞ며〮 잇다감〮 發버ᇙᄒᆞ며잇다감〮 그처 發버ᇙ〮ᄒᆞ면〮 죽ᄂᆞ닐〮 고티〮ᄂᆞ니〮 半반〮夏ᅘᅡᆼ〮ᄅᆞᆯ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焙ᄈᆡᆼ乾건호〮니〮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蔘ᄉᆞᆷᄋᆞᆯ〮 !이!머!리〮!비!버!히고〮 甘감草초ᇢ〮ᄅᆞᆯ〮 굽고〮 肉ᅀᅲᆨ〮桂ᄀᆒᆼ〮ᄅᆞᆯ〮麤총ᄒᆞᆫ 것밧교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세〯 돈〮애〮 믈 ᄒᆞᆫ 大땡〮?盞?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 너허〮 七치ᇙ〮分분을〮 글혀〮 즛의 앗〮고〮 져〯기 덥〮게 ᄒᆞ〮야〮 食씩〮前쩐에〮 머기〮라〯 澹療方獨香湯主中氣閉目不語四肢不收昏沈等證南木香爲末每服一錢冬瓜子煎湯調下{{*|}} 獨똑〮香햐ᇰ〮湯타ᇰ은〮 中듀ᇰ〮氣킝〮ᄒᆞ야〮 눈〮ᄀᆞᆷ〮고〯 말〯 몯〯고〮 四ᄉᆞᆼ〮肢징를〮 거두〮디〮 몯〯ᄒᆞ고 昏혼沈띰 等드ᇰ〯엣〮 證지ᇰ?에〮? 主즁〯ᄒᆞ니〮 南남木목〮香햐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 錢쩐을冬도ᇰ瓜광 ᄡᅵ〮글휸〮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廻陽湯治中氣脉弱大叚虛怯等證 川烏{{*|生去皮臍}}附子{{*|生去皮臍各半兩}}乾薑{{*|炮二錢}}靑皮{{*|去穰一兩}}益智仁{{*|一兩}}右剉每服三錢水二盞生薑七片棗一枚同煎至一盞去滓溫服或入小木香{{*|}} ᄯᅩ〮廻ᅘᅬᆼ陽야ᇰ湯타ᇰ 은〮 中듀ᇰ氣킝〮ᄒᆞ〮야〮 脉ᄆᆡᆨ〮이〮 弱ᅀᅣᆨ〮ᄒᆞ〮야 ᄀᆞ자ᇰ〮 虛헝弱ᅀᅣᆨ〮ᄒᆞᆫ〮 等드ᇰ〯엣〮 證지ᇰ〮을〮 고티ᄂᆞ니川ᄎᆑᆫ烏ᅌᅩ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과〮 앗〯고〮 附뿡〮子ᄌᆞᆼ〯 生ᄉᆡᇰᄒᆞ닐〮 것〮과〮 ᄇᆡᆺ복아ᅀᅩ〮니〮 各각 半반〮 兩랴ᇰ〯과〮 乾간薑가ᇰ 炮뽀ᇢ호〮니 두〯 돈〮과〮 炮뽀ᇢᄂᆞᆫ〮 믈〮 저즌〮 죠ᄒᆡ〮예〮 ᄡᅡ〮노ᄋᆞᆯ압〮ᄌᆡ〮예 무더〮구을〮시〮라〮 靑쳐ᇰ皮삥솝〮 아ᅀᅩ〮니〮 ᄒᆞᆫ 兩랴ᇰ〮과〮 益ᅙᅧᆨ〮智딩〮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每ᄆᆡᆼ〯服뽁〮 三삼錢쪈에〮 믈 두〯 盞잔〮과〮 生ᄉᆡᇰ薑가ᇰ 닐굽〮 片편〮과〮 大땡〮棗조ᇢ〯 ᄒᆞᆫ ᄂᆞᆺ〯과〮 ᄒᆞᆫᄃᆡ〮 글혀 ᄒᆞᆫ 盞잔애〮 니르〮거든〮 즛의 앗〯고〮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시혹〮小쇼ᇢ木목〮香햐ᇰ ᄋᆞᆯ〮 더드〮리ᄂᆞ니라〮 ==中忤中惡鬼氣第五== 經驗良方云其證暮夜或登廁或出郊野或遊空冷屋室或人所不至之地忽然眼見鬼物鼻口吸着惡鬼氣驀然倒地四肢厥冷兩手握拳口鼻出淸血性命逡巡湏臾不救此證與尸厥同但腹不鳴心脇俱暖凡中惡驀然倒地切勿移動其尸卽令親戚衆人圍繞打鼓燒火或燒射香安息蘇木香樟木之類直候醒記人事方可移歸犀角{{*|鎊屑硏爲細末半兩}}射香 朱砂{{*|各一分}}已上爲細末每服二錢井水調服灌之如無前藥用雄黃一味爲末每服一錢煎桃枝葉湯調灌又無雄黃用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男用婦衣婦用男衣燒灰每服二錢百沸湯調下{{*|}} 그 證지ᇰ〮이〮 바ᄆᆡ〮 시혹〮 뒷〯가내〮 오ᄅᆞ거나〮 시혹〮드르〮헤〮 나〮가〮거나〮 시혹〮뷘〯 ᄎᆞᆫ〮 房바ᇰ의〮 놀〯어나〮 시혹〮 사ᄅᆞ미〮 가디〮 아니〮ᄒᆞ〮ᄂᆞᆫ〮 ᄯᅡ해〮 믄득〮 누네〮 귓것 보며〮 고〮콰〮 입〮과〮로〯모〯딘〮 귓거싀〮 氣킝〮分분을〮 마시〮거나〮 ᄒᆞ〮야〮 믄득〮 ᄯᅡ해〮그우러〮디〮여〮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두〯 소〮니〮쥐〯오〮 입〮과〮 고해〮ᄆᆞᆯᄀᆞᆫ〮 피〮 흘러〮性셔ᇰ〮命며ᇰ〮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이〮 證지ᇰ이〮尸싱厥궈ᇙ〮 와〮 ᄀᆞᆮ〮ᄒᆞ니〮 오〮직〮 ᄇᆡ〮우〯디〮 아니〮ᄒᆞ고〮 가ᄉᆞᆷ〮과〮녀비〮 다〯더우〮니라〮 믈〮읫 中듀ᇰ〮惡ᅙᅡᆨ〮 ᄒᆞ〮야〮 믄득〮 ᄯᅡ해〮 그우러디〮거든〮자ᇝ〯간도〮 그주거〮믈〮 옮기〮디〮 말〯오〮 즉〮재아ᅀᆞᆷ〮과〮 한 사〯ᄅᆞ〮ᄆᆞ로〮 圍ᅌᅱᆼ繞ᅀᅭᇢ〮ᄒᆞ〮야〮붑〮 두드〮리며〮 블〮다히〮게 ᄒᆞ며〮 시혹〮射썅〮香햐ᇰ 과〮安ᅙᅡᆫ息씩〮香햐ᇰ 과〮 蘇송木목〮香햐ᇰ과〮樟자ᇰ木목〮 ㅅ類ᄅᆔᆼᄅᆞᆯ〮 ᄉᆞ〮라〮 人ᅀᅵᆫ事ᄊᆞᆼ〮ᄎᆞ〮료ᄆᆞᆯ〮 기드〮려〮 옮겨〮 갈〯디〮니라〮犀솅角각〮 ᄋᆞᆯ〮슬허〮 ᄀᆞ〮라〮 細솅〮末마ᇙ〮호니〮 半반〮 兩!라ᇰ〮!랴ᇰ〮!과〮 射썅〮香햐ᇰ과〮 朱즁砂상와〮 各각〮 ᄒᆞᆫ 分분을〮 細솅〮末마ᇙ〮ᄒᆞ〮야〮 每ᄆᆡᆼ〯服뽁〮二ᅀᅵᆼ〮錢쪈을〮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브ᅀᅳ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每ᄆᆡᆼ〯服뽁〮 一ᅙᅵᇙ〮錢쪈을〮복셩홧가〮지 와〮 닙〮 글횬〮 므〮레〮 프〮러〮 브ᅀᅳ라〮 ᄯᅩ〮雄ᅘᅮᇰ黃ᅘᅪᇰ 업〯거든〮 ᄂᆞᆯᄀᆞᆫ〮 ᄯᆞᆷ〮오〮시나〮 시혹〮觸쵹〮衣ᅙᅴᆼ어나〮 ᄯᆞᆷ〮오〯ᄉᆞᆫ 모매〮 오래〮 니버〮 오래〮 ᄯᆞᆷ〮ᄇᆡ니〮 됴〯코〮 觸쵹〮衣ᅙᅴᆼᄂᆞᆫ 오래F 니븐〮솝〯오〮시라〮 남진ᄋᆞᆫ〮겨〯지븨〮 오〮ᄉᆞᆯ〮 ᄡᅳ〮고〮 겨〯지븐〮 남지〮늬〮 오〮ᄉᆞᆯ ᄡᅮᆯ〮디니〮 ᄌᆡ〮 ᄉᆞ라〮 每ᄆᆡᆼ〯服뽁〮 二ᅀᅵᆼ〮錢쪈을〮 一ᅙᅵᇙ百ᄇᆡᆨ〮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聖惠方治卒客忤有似卒死生昌蒲根擣絞取汁二三合灌下立愈{{*|}}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니〮 ᄀᆞᆮ〮ᄒᆞ닐〮 고툐〮ᄃᆡ〮 ᄂᆞᆯ昌챠ᇰ蒲뽕 ㅅ 불휘〮ᄅᆞᆯ〮디허〮 汁집〮ᄲᅡ〮 두〯ᅀᅥ〮 호ᄇᆞᆯ〮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治中惡心痛欲絶方釜底墨{{*|半兩}}塩{{*|一錢}}右件藥和硏以熱水一盞調頓服之{{*|}}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알파〮 죽ᄂᆞ닐〮 고툐〮!ᄐᆡ〮!ᄃᆡ〮!가마 미틧〮 검듸여ᇰ 半반〮 兩랴ᇰ〯과〮 소곰 ᄒᆞᆫ 돈〯ᄋᆞᆯ〮섯거〮 ᄀᆞ〮라〮 더운〮믈〮 ᄒᆞᆫ 盞잔〮애〮 프〮러 다〯 머그〮라〮 又方中惡氣絶以上好朱砂細硏於舌上書鬼字又額上亦書之此法極效{{*|}}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 긋거든 ᄀᆞ자ᇰ 됴〯ᄒᆞᆫ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혀〮에〮鬼귕〯ㅈ字ᄍᆞᆼ〮 ᄅᆞᆯ〮스〮고〮 ᄯᅩ〮니마〮희〮 술〮디니〮 이〮 法법〮이〮지〮극 됴〯ᄒᆞ〮니라〮 又方鬼神所擊諸術不治熟艾如鴨子大二枚水二盞煮取五分去滓頓服{{*|}} ᄯᅩ〮 귓거시〮텨〮 여러〮 法법〮으〮로〮 고티〮디 몯〯ᄒᆞ〮거든〮 니근〮 ᄡᅮᆨ〮올〮ᄒᆡ알〮 만〮ᄒᆞ니〮 두〯 나〯ᄎᆞᆯ〮 믈〮 두〯 盞잔〮애〮 글혀〮 다ᄉᆞᆺ〮 分분을〯 取츙〯ᄒᆞ〮야〮 즛의 앗〯고〮 다〯 머그〮라〮 又方卒中鬼擊及刀兵所傷血滿膓中不出煩悶欲死雄黃一兩細硏如粉以溫酒調一分服日三服血化爲水{{*|}} ᄯᅩ〮 귓거시〮 믄득〮 티며〮갈〮 잠개〮예〮 허러〮 피〮 토ᇰ〮 안해〮ᄀᆞᄃᆞᆨᄒᆞ〮야〮 나디〮 몯〯ᄒᆞ〮야〮답〮ᄭᅡ와〮 죽ᄂᆞ닐〮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ᄃᆞᄉᆞᆫ 수레〮 ᄒᆞᆫ 分뿐〮을〮 프〮러〮 ᄒᆞ〮ᄅᆞ 세〯 번곰〮 머그〮면〮 피〮 믈〮 ᄃᆞ외ᄂᆞ〮니라〮 千金方治卒忤塩八合以水三升煮取一升半分二服得吐卽愈若小便不通筆頭七枚燒作灰末水和服之卽通{{*|}} 믄득〮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니〮 고툐〮ᄃᆡ〮 소곰 여듧〮 호ᄇᆞᆯ〮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거〮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ᄒᆞ〮다가〮 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붇〮 머리〮 닐구〮블〮 ᄉᆞ〮라〮 ᄀᆞᄅᆞ !ᄃᆡᇰ!ᄆᆡᇰ!ᄀᆞ〮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라〮 葛氏備急方中惡證候視其上唇裏弦者有白如黍米大以針決去之{{*|}} 中듀ᇰ惡ᅙᅡᆨ 證지ᇰ〮이 웃입시울〮 !인!안!ᄒᆞᆯ 보〯ᄃᆡ〮 ᄒᆡᆫ〮 거시〮 기장ᄡᆞᆯ〮ᄀᆞᆮ〮ᄒᆞ니〮 잇ᄂᆞ니〮 바ᄂᆞᆯ〮로〮ᄯᅡ〮 아ᅀᅩᆯ〮디〮니라 又方半夏末如豆大吹鼻中{{*|}} ᄯᅩ〮 半!빈〮!반〮!夏ᅘᅡᆼ〮末마ᇙ〮ᄋᆞᆯ〮 콩낫〯?만〮? 곳〮굼긔〮 불〯라〮 又方客忤者中惡之類也令人心腹絞痛脹滿氣衝心胸不卽治殺人 細辛 桂末等分內口中{{*|}}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ᄂᆞᆫ〮 中듀ᇰ〮惡ᅙᅡᆨ〮ㅅ類ᄅᆔᆼ〮니〮 사〯ᄅᆞ〮ᄆᆞ로〮 가ᄉᆞᆷ〮 ᄇᆡ〮 알ᄑᆞ며〮탸ᇰ〯만〮ᄒᆞ〮야〮 氣킝〮分분이〮 가ᄉᆞ〮매〮다와티〮ᄂᆞ니〮 즉재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細솅〮辛신과〮桂궹〮皮삥 ㅅ ᄀᆞᆯᄋᆞᆯ〮等드ᇰ〯分분ᄒᆞ〮야〮 입〮 안해〮녀흐〮라〮 又方卒得鬼擊之病無漸卒着如人刀刺狀胸脇腹內絞急切痛不可抑按或卽吐血或鼻中出血或下血一名鬼排治之灸鼻下人中一壯立愈{{*|}} ᄯᅩ〮 믄득〮 귓것 틴 病뼈ᇰ〮을〮 어〯더漸쪔〯漸쪔〯 아니〮ᄒᆞ〮야〮 믄득〮어〯두미〮 갈〮ᄒᆞ로〮 디르ᄂᆞᆫ ᄃᆞᆺ〮ᄒᆞ〮야〮 가ᄉᆞᆷ〮과〮 녑과〮 ᄇᆡ〮 안〮히ᄀᆞ자ᇰ〮 알파〮ᄆᆞᆫ지〮디〮 몯〯ᄒᆞ며〮 시혹〮 피〮ᄅᆞᆯ〮 吐통〮ᄒᆞ며〮 시혹〮 고해〮 피〮내〯며〮 시혹 아래〮 피〮나〮ᄂᆞ니〮 고툐〮ᄃᆡ〮 고〮 아랫〮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 을〮 ᄒᆞᆫ 붓글〮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臍下一寸三壯炙臍上一寸七壯{{*|}} ᄯᅩ〮 ᄇᆡᆺ복 아랫〮一ᅙᅵᇙ〮寸촌〮ᄋᆞᆯ〮 세〮 붓글〮 ᄯᅳ〮고〮 ᄇᆡᆺ복 우 一ᅙᅵᇙ〮寸촌ᄋᆞᆯ 닐굽〮 붓글〮 ᄯᅳ라〮 又方以淳酒吹內兩鼻中{{*|}} ᄯᅩ 됴〮ᄒᆞᆫ 술로 두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鼠屎末服如黍米不能飮之以少水和內喉中{{*|}} ᄯᅩ〮 쥐ᄯᅩᆼᄋᆞᆯᄇᆞᆺ아〮 기자ᇰᄡᆞᆯ〮만〮 머구〮ᄃᆡ〮 먹디〮 몯〯거든〮 믈〮져〯기 ᄒᆞ〮야〮 프〮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被鬼擊用竈心土爲末每服二錢新汲水調下及以少許吹鼻中{{*|}} 귓거싀〮게 마ᄌᆞ〮닐〮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먹그〮며 져〯기 고해〮 불〯라〮 又方{{*|恍惚見鬼}}發狂用平胃散加辰砂末棗湯調服{{*|}} ᄯᅩ 어즐ᄒᆞ〮야〮 귓것 보〮아〮 미치〮거든〮平뼈ᇰ胃ᅌᅱᆼ〮散산〮 애〮 朱즁砂상ㅅᄀᆞᆯᄋᆞᆯ〮 녀허〮 大땡〮棗조ᇢ〯湯타ᇰ애〮 프〮러 머그〮라〮 又方中惡客忤卒死者用皂角末吹鼻或硏韭汁灌耳中以艾灸臍中百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믄득〮 주그〮닐〮 皂쪼ᇢ〯角각〮ㅅ ᄀᆞᆯᄋᆞᆯ〮 고해〮 불〯라〮 시혹〮 염〮굣〮 즈〮블 ᄀᆞ〮라 귀예〮 븟고〮 ᄡᅮ〮그로〮 ᄇᆡᆺ보ᄀ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붓글〮 ᄯᅳ〮라〮 又方中惡客忤垂死用射香一錢硏和醋二合服之卽差{{*|}}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며〮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죽ᄂᆞ닐〮 射썅〮香햐ᇰ ᄒᆞᆫ 돈〯 ᄀᆞ라 초에〮 프〮러 두〮 호ᄇᆞᆯ〮 머그〮면〮 즉재 !둍〯!됻〯!ᄂᆞ〮니라〯 壽域神方凡卒死或先病痛或常寢臥忽絶皆是中惡救之以葱黃心刺入鼻內男左女右入深五寸若目中出血佳又用葱管吹其兩耳兩鼻孔中{{*|}} 믈읫 믄득〮 주구〮미 시혹〮 몬져 病!뼝〮!뼈ᇰ〮!을〮 알커나〮 시혹〮샤ᇰ녜〮 자다가〮 믄득〮 죽ᄂᆞ니〮 다〯 이〮 中듀ᇰ〮惡ᅙᅡᆨ〮이〮니〮 救구ᇢ〮호〯ᄃᆡ〮 팟〮 누른〮엄〯으〮로〮 고 안해〮 녀호〮ᄃᆡ〮 남지는〮 왼〯녁 겨〯지븐〮 올〮ᄒᆞᆫ녀긔〮 기피〮 五ᅌᅩᆼ〯寸촌〮이〮들〮에〮 ᄒᆞ〮야〮 ᄒᆞ〮다가〮 누내〮 피〮나면〮 됴〮ᄒᆞ니라〮 ᄯᅩ〮 팟〮 니〮프로〮 두〯 귀〮와〮 두〯 곳〮굼글〮 불〯라〮 又方取小便灌其口數遍卽能語{{*|}} ᄯᅩ〮 小쇼ᇢ〯便뼌을〮 이베〮 브ᅀᅩ〮믈〮 두〯ᅀᅥ〮 번 ᄒᆞ면〮 곧〮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中惡短氣欲死灸足兩大𧿹趾上甲後聚毛中各十四壯不愈再灸十四壯{{*|}} ᄯᅩ〮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氣킝〮分분이〮뎔어〮 죽ᄂᆞ닐〮두〮 발〮엄지〮가〮락 톱〮 뒷〯 털〮 난ᄯᅡ〮ᄒᆞᆯ〮 열〯네〯 붓곰〮 ᄯᅮ〮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시〮 열〮네〯 붓글〮 ᄯᅳ〮라〮 又方驚怖死者用溫酒灌之卽蘇{{*|}} ᄯᅩ 놀〮라 주그〮닐〮 ᄃᆞᄉᆞᆫ 수를〮 머기〮면〮 즉〮재 사〯ᄂᆞ〮니라〮 ==鬼魘鬼打第六== 經驗良方其證初到客舍或官驛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湏臾不救則死 牛黃 雄黃{{*|各一錢}}朱砂{{*|半錢}}巳上各硏爲細末和勻每挑一錢許床下燒次挑一錢用酒調灌之如無前藥用桃柳枝取東邊各三七寸煎湯三盞候溫倂灌服又無桃柳枝用竈心土搥碎爲細末每服二錢新汲井花水調灌更挑半指甲許吹入鼻中更用艾灸人中穴在鼻下幷灸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 그 證지ᇰ〮이〮 客ᄏᆡᆨ舍상〮ㅣ어나〮 시혹〮 驛역〯이〮어나〮 오래〮 사〯ᄅᆞᆷ 업〯슨〮 ᄎᆞᆫ〮 房바ᇰ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툐ᄆᆞᆯ〮 아라〮 오직〮 그 사〯ᄅᆞ미〮헐헐ᄒᆞᆯ 소릴〮 듣고〮 곧〮 사〯ᄅᆞ〮ᄆᆞ로〮 브르게〮 !ᄒᆞᆯ〮!훌〮!디니〮블로〮ᄃᆡ〮 ᄭᆡ디〮 아니〮ᄒᆞ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ᄉᆞᅀᅵ〮ᄅᆞᆯ〮 救구ᇢ〮티〮 아니〮ᄒᆞ면〮 죽ᄂᆞ니〮 牛ᅌᅮᇢ黃ᅘᅪᇰ과 雄ᅘᅮᇰ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돈〯과〮 朱즁砂상 半반〮 돈〯ᄋᆞᆯ〮 各각〮各각〮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골오〮 섯거〮 ᄒᆞᆫ 돈〯만〮 ᄯᅥ〮 사ᇰ 아래〮 ᄉᆞᆯ〮오〯 !비!버!거〮 ᄒᆞᆫ 돈〯ᄋᆞᆯ〮 수레〮 프〮러〮 머기〮라〮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복〮샤ᇰ화나모와〮 버드〮나못 가〮지ᄅᆞᆯ〮 東도ᇰ녁긔〮칠 各각〮各각〮 세〯닐굽〮 寸촌〮ᄋᆞᆯ〮 가져〮다가〮 므〮?레? 글혀〮 세〯 盞잔〮ᄋᆞᆯ〮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복?샤ᇰ?화나모 버듨〮가〮지 업〯거든〮 가〮마〮 미틧〮 ᄒᆞᆯ〮ᄀ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누〯!두〯! 돈〯ᄋᆞᆯ〮 ᄀᆞᆺ 기!른〮!룬〮! 井졍〯花황水ᄉᆔᆼ예〮 프〮러 머기〮고〮 ᄯᅩ〮 半반〮 소ᇇ톱만〮 ᄯᅥ〮 고해〮 부러〮 드〮리고〮 ᄯᅩ〮 ᄡᅮ〮그로〮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ᄯᅳ〮고〮 두〯 !밠〮!뱘〯! !염!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ᄒᆞᆫ 부〯ᄎᆡᆺ닙〮 만〮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ᄒᆞᆫ닐굽〮 붓글〮 ᄯᅳ〮면〮 곧〮 사〯ᄂᆞ〮니라〮 千金方治鬼擊雞屎白{{*|如棗大}}靑花麻一把{{*|卽常用麻}}右二味以酒七升煮取三升熱服須臾發汗若不汗熨斗盛火灸兩脇下使熱汗出愈{{*|}} 귓것 티〮닐〮 고툐〮ᄃᆡ〮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것 대〯초만〮과〮 삼〮 ᄒᆞᆫ 줌〯과〮 두〯 가지〮ᄅᆞᆯ〮 술 닐굽〮 되〮로〮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더우〮닐〮 머그〮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ᄯᆞᆷ〮나〮ᄂᆞ니〮 ᄒᆞ〮다가〮 ᄯᆞᆷ〮나디〮 아니〮커든〮다리〮우〮리예〮 블〮 다마〮 두〯 녁 녀〮블〮ᄧᅬ〯야〮 덥〯게〮 ᄒᆞ면〮 ᄯᆞᆷ〮나면〮 됻〯ᄂᆞ〮니라〮 聖惠方卒魘忌燈火照照則神魂遂不復入乃至於死人有於燈光前魘者本在明處是以不忌火也{{*|}} ᄀᆞ오〮누르〮이닐〮 블〮혀〮 뵈〯요미〮 몯〯ᄒᆞ리〮니〮 블〮 뵈〯면〮 넉시〮 도로 드〮디〮 아니〮ᄒᆞ〮야〮 죽ᄂᆞ니〮라〮 블〮 현〯 ᄃᆡ〮 이셔〮 ᄀᆞ오누르〮이닌〮본〮ᄅᆡ ᄇᆞᆯᄀᆞᆫ〮 ᄃᆡ 이실ᄉᆡ〮 블〮 혀〯미〮 므〮던ᄒᆞ니〮라〮 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 믄득 ᄀᆞ오〮누르〮여 ᄎᆞ〮림 몯〯ᄒᆞ〮거든〮皂쪼ᇢ〯莢겹〮 ᄀᆞᆯᄋᆞᆯ〮 ᄀᆞ〮ᄂᆞᆫ 대〮로〮 두〯 곳〮굼긔〮 불〯면〮 즉〮재 니〯ᄂᆞ니〮 잇사ᄋᆞ〮래도〮 어루〮 불〯리!라〮!라〮! 又方治卒魘右以雄黃細硏以蘆管吹入兩鼻中桂心末亦得{{*|}} ᄯᅩ〮 과ᄀᆞᆯ이〮ᄀᆞ오눌〯엿〮거든〮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ᄀᆞᆯ〮로 부러〮 두〯 고해〮 녀흐라〮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ᄅᆞ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菖蒲末吹兩鼻中以桂末納於舌下亦得{{*|}}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불〯오〮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ᆯ〮 혀〮 아래〮 녀후〮미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以雄黃如棗核大繫於左臂令人終身不魘寐也{{*|}}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ᆼᄋᆞᆯ〮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ᄒᆞ닐〮 왼〯녁ᄇᆞᆯᄒᆡ〮 ᄃᆞ〮라 두면〮 사〯ᄅᆞ〮ᄆᆞ로〮 죽ᄃᆞ록〮 ᄀᆞ오〮누르〮이디〮 아니〮케〮 ᄒᆞ〮ᄂᆞ〮니라〮 又方服猪脂如雞子大卽差未差再服{{*|}} ᄯᅩ〮 猪뎡脂징〯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 됴〯티 아니〮커든〮 다시〮 머그〮라〮 備急大全良方療臥忽不悟愼勿以火照則殺人但唾其面更痛囓足大拇指甲際卽省更以半夏末吹入鼻中更以韭葉擣取自然汁灌鼻孔中冬月用韭根擣取自然汁灌卽活{{*|}} 자〮다가〮 ᄭᆡ〮디 몯〯ᄒᆞ닐〮 고툐〮ᄃᆡ〮 자ᇝ〯간도〮 블〮 혀 뵈〯디마롤〮디니〮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오직〮 ᄂᆞᄎᆡ〮 춤〮받고〮 ᄯᅩ〮 발〮엄지〮가락 톱〮 ᄉᆞᅀᅵ〮ᄅᆞᆯ〮ᄆᆡ이〮 믈면〮 즉〮재 ᄭᆡ〮ᄂᆞ〮니라〮 ᄯᅩ〮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곳〮굼긔〮 불〯오〮 ᄯᅩ〮 부〯ᄎᆡᆺ 니〮플〮 디허〮 즈〮브로〮 곳굼긔〮 브ᅀᅳ라〮겨ᅀᅳ〮렌 부〯ᄎᆡᆺ 불휘〮ᄅᆞᆯ〮 디허〮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取츙〯ᄒᆞ〮야〮 브ᅀᅳ면〮 즉〮재 사〯ᄂᆞ〮니라〮 ==卒死第七== 千金方治卒死無脉牽牛臨鼻上二百息牛舐必瘥牛不肯舐着塩汁塗面上牛卽肯舐{{*|}} 가ᄀᆞ〮기 주거〮 脉ᄆᆡᆨ〮업〯스닐〮 고툐〮ᄃᆡ〮 쇼〮ᄅᆞᆯ〮잇거〮 고〮 우희〮 다혀〮 二ᅀᅵᆼ〮百ᄇᆡᆨ〮 버ᄂᆞᆯ〮숨〯쉬울디〮니 ᄉᆈ〮 할ᄒᆞ〮면〮 반ᄃᆞ〮기 됻〯ᄂᆞ〮니라〮쇼〮옷〮 할티〮 아니〮!키〮!커!든〮 소곰므〮를〮 ᄂᆞᄎᆡ〮 ᄇᆞᄅᆞ면〮 ᄉᆈ〮 곧〮 할ᄂᆞ니〮라〮 又方馬屎絞取汁飮之無新者水和乾者亦得{{*|}} ᄯᅩ〮 ᄆᆞᆯᄯᅩᇰᄋᆞᆯ〮 ᄧᅡ〮 즈〮블 取츙〮ᄒᆞ〮야〮 마시〮라〮 새〮 업〯거든〮 므〮레 ᄆᆞᄅᆞ닐〮 프〮러도〮 ᄯᅩ〮 됴〯ᄒᆞ〮니라〮 肘後方乾者以人溺解之{{*|}} ᄆᆞᄅᆞ닌〮 사〯ᄅᆞᄆᆡ〮 오조〮ᄆᆞ로〮 플〮라〮 又方灸熨斗熨兩脇下又治尸厥{{*|}} ᄯᅩ〮 다리〮우릴〮 데여〮 두〮 녀블〮 울〮ᄒᆞ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ᄂᆞ〮니라 又針閒使各百餘息又灸鼻下人中又治尸厥{{*|}} ᄯᅩ〮閒간使ᄉᆞᆼ〮 ᄅᆞᆯ〮 針짐호〮ᄃᆡ〮 一ᅙᅵᇙ〮百ᄇᆡᆨ〮 숨〯 남ᄌᆞ기 ᄒᆞ고〮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ᄯᅳ〮라〮 ᄯᅩ〮 尸싱厥궈ᇙ〮을〮 고티〮 ᄂᆞ니〮라〮 又方治五絶夫五絶者一曰自縊二曰墻壁壓迮三曰溺水四曰魘寐五曰産婦乳絶取半夏一兩細下篩吹一大豆許內鼻中卽活心下溫者一日亦可活{{*|}} ᄯᅩ〮 다ᄉᆞᆺ 주그〮닐 고티〮ᄂᆞ니〮 ᄒᆞ나ᄒᆞᆫ〮 목 ᄆᆡ야〮 주그〮니오〮 둘〯흔 담〮지즐〮이〮니오〮 세〯흔 므〮레 ᄲᅡ〮디니〮오〮 !네〯!녜〯!흔ᄀᆞ〮오〮누르〮이〮니오〮 다ᄉᆞ〮ᄉᆞᆫ 아〮기나타가〯 주그〮니니〮 半반〮夏ᅘᅡᆼ〮 ᄒᆞᆫ 兩랴ᇰ〯을〮 ᄀᆞ〮ᄂᆞ리〮처〮 큰 콩 낫〯만〮 ᄒᆞ닐〮 곳〮굼긔〮 부러〮 녀흐면〮 즉〮재 사〯ᄂᆞ니〮 가ᄉᆞ〮미 ᄃᆞᄉᆞ닌〮ᄒᆞᆯ리〮라도〮 ᄯᅩ〮 어루〮 살〯리라〮 聖惠方卒死中惡及尸厥以緜漬好酒手挼汁令入鼻中幷持其手足莫令驚動{{*|}} 과ᄀᆞᆯ!이〮!ᄋᆡ〮! 주그〮니와〮 中듀ᇰ〮惡ᅙᅡᆨ〮ᄒᆞ니〮와〮 尸싱厥궈ᇙ〮ᄒᆞ니〮ᄅᆞᆯ〮소오ᄆᆞ〮로 됴〯ᄒᆞᆫ 술저져〮 소〮ᄂᆞ로〮 汁집〮을〮ᄲᅡ〮 곳〮굼긔〮 들〮에 ᄒᆞ고〮 손〮바〮ᄅᆞᆯ〮 자바〮 놀〯라디〮 아니〮케 ᄒᆞ라 又方擣韮取汁以灌口中{{*|}} ᄯᅩ〮 부〯ᄎᆡᄅᆞᆯ〮 디허〮 汁집〮을〮 取츙〯ᄒᆞ〮야〮 이베〮 브ᅀᅳ라〮 又方取猪膏如雞子大以醋一合煮沸灌喉中良{{*|}} ᄯᅩ〮 猪뎡膏고ᇢᄅᆞᆯ〮 ᄃᆞᆯᄀᆡ〮알〮만〮ᄒᆞ닐〮 醋총〮 ᄒᆞᆫ 호배〮 글혀〮 모ᄀᆡ〮 브ᅀᅳ면〮 됴〮ᄒᆞ〮니라〮 又方卒死而壯熱者用白礬半斤以水二豆斗煮消以漬脚卽活{{*|}} ᄯᅩ 과ᄀᆞᆯ이〮 죽고〮 壯자ᇰ〮히〮 熱ᅀᅧᇙ〮ᄒᆞ닐〮白ᄈᆡᆨ〮礬뻔 半반〮 斤근ᄋᆞᆯ〮 믈〮 두〯 마래〮 글혀〮 노겨〮허튀〮ᄅᆞᆯ〮 ᄃᆞ〮ᄆ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用小便灌其面卽能迴語{{*|}} ᄯᅩ〮 小쇼ᇢ〯便뼌으〮로〮 ᄂᆞᄎᆡ ᄲᅳ리〮면〮 즉〮재 能느ᇰ히〮 말〮ᄒᆞ〮ᄂᆞ〮니라〮 又方以雄雞頭取血以塗其面乾復塗之{{*|}} ᄯᅩ〮 수〮ᄃᆞᆯᄀᆡ〮 머리〮엣〮 피〮 내〯아〮 ᄂᆞᄎᆡ〮 ᄇᆞᄅᆞ〮고〮 ᄆᆞᄅᆞ거든〮 다시〮 ᄇᆞᄅᆞ라〮 又方治忤打死心稍暖取葱白納於下部中及鼻中湏臾卽活{{*|}} ᄯᅩ〮 客ᄏᆡᆨ〮忤ᅌᅩᆼㅣ어나〮귓거시〮 텨〮 주그〮니 가ᄉᆞ〮미〮져〮기 ᄃᆞᆺᄒᆞ닐〮 고툐〮ᄃᆡ〮 파〮ᄒᆞᆯ〮밋구무와〮 곳〮굼긔〮 녀흐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곧〮 사〯ᄂᆞ〮니라 又方治卒客忤不能言桔梗末一兩射香末一分右二味更硏令勻每服二錢以溫水調下{{*|}} ᄯᅩ〮 과ᄀᆞᆯ이〮 客ᄏᆡᆨ〮忤ᅌᅩᆼ〮ᄒᆞ〮야〮 말〯 몯〯ᄒᆞ〮거든〮桔겨ᇙ〮梗겨ᇰ〯 ㅅ ᄀᆞᄅᆞ ᄒᆞᆫ 兩랴ᇰ〯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分뿐을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머기〮라〮 千金方治一切卒死灸臍中百壯{{*|}} 一ᅙᅵᇙ〮切쳐ᇙ〮 과ᄀᆞᆯ이〮 주그〮닐〮 고툐〮ᄃᆡ〮 ᄇᆡᆺ복을 百ᄇᆡᆨ〮壯자ᇰ〮을〮 ᄯᅳ〮라 ==卒心痛第八<sub>腹痛附</sub>== 聖惠方治卒心痛氣悶欲絶面色靑四肢逆冷釅醋{{*|一合}}雞子{{*|一枚打破}}右件相和攪勻煖過頓飮之{{*|}}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 알파〮 氣킝〮分분이〮닶〮가와〮 주거〮가〮 ᄂᆞ치〮 프르〮고〮 四ᄉᆞᆼ〯肢징 ᄎᆞ〮닐〮 고툐〮ᄃᆡ〮 醋총〮 ᄒᆞᆫ 홉과〮 ᄃᆞᆯᄀᆡ!알〮!알〮! ᄒᆞᆫ 나〯ᄎᆞᆯ〮ᄣᆞ려〮 섯거〮 골오〮 프〮러 ᄃᆞ시 ᄒᆞ〮야〮 다〯 머기〮라〮 又方白艾二兩熟者右以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分爲三服稍熱服之{{*|}} ᄯᅩ〮 ᄒᆡᆫ〮 ᄡᅮᆨ〮 두〯 兩랴ᇰ〯니기〮 디후〮닐〮 믈〮 두〯 큰〮잔〮애〮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세〮 服!쁙〮!뽁〮!애〮 ᄂᆞᆫ화〯 져〯기 더우〮닐〮 머그〮라〮 經驗良方布衷塩如彈丸大燒令赤溫酒化服溫水亦得{{*|}} 뵈〮로 소고ᄆᆞᆯ〮 탄ᄌᆞ〮만〮ᄢᅳ려〮 ᄉᆞ〮라 븕게〮 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그〮라〮 ᄃᆞᄉᆞᆫ 믈〮도〮 ᄯᅩ〮 ᄒᆞ리〮라〮 壽域神方草菓 玄胡索 乳香 沒藥 五靈脂{{*|各等分}}右爲末每服二錢溫酒調下{{*|}} 草초ᇢ〯菓광〯와〮玄ᅘᆑᆫ胡ᅘᅩᆼ索짝〮 과〮乳ᅀᅲᆼ〯香햐ᇰ 과〮 沒모ᇙ〯藥약〮과〮五ᅌᅩᆼ〯靈려ᇰ脂징〯 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머기〮라〮 又方桃白皮煮汁宜空腹服之{{*|}} ᄯᅩ〮 복샤ᇰ화나못 ᄒᆡᆫ〮 거츨〮 글혀〮 汁집〮을〮 空고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生香油半合溫服妙{{*|}} ᄯᅩ〮 ᄎᆞᆷ〮기름〮 半반〮 호블 ᄃᆞ시 ᄒᆞ〮야〮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令病人當戶坐若男病婦人與水一柸飮之若女病男子與水一柸飮之用新汲水尤佳{{*|}} ᄯᅩ〮 病뼈ᇰ〮人ᅀᅵᆫ으〮로〮이페〮 안치〮고〮 ᄒᆞ다가 남지니〮 病뼈ᇰ〮커든〮 겨〯지비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고〮 ᄒᆞ〮다가〮 겨〯지비〮 病뼈ᇰ〮커든〮 남지니〮 믈〮 ᄒᆞᆫ 자〮ᄂᆞᆯ 주〮어 머기〮라〮 ᄀᆞᆺ 기룬〮 므〮리 더 됴〯ᄒᆞ〯니라〮 又以蜜一分水二分飮之亦妙{{*|}} ᄯᅩ〮 ᄢᅮᆯ〮 ᄒᆞᆫ 分분과〮 믈〮 두〯 分분을〮 마쇼〮미ᄯᅩ〮 됴〮ᄒᆞ〮니라〮 又方治腹痛細嚼石菖蒲飮凉水送下妙{{*|}} ᄯᅩ〮 ᄇᆡ〮알힐〮 고툐〮ᄃᆡ 石쎡〮菖챠ᇰ蒲뽕ᄅᆞᆯ〮 ᄂᆞ로니 십고〮 ᄎᆞᆫ〮 므〮를 마셔〮ᄂᆞ리〮오미〮 됴〮ᄒᆞ〮니라〮 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絞取汁飮之{{*|}} ᄯᅩ〮 ᄯᅡ해〮 ᄒᆞᆫ 져〯고맛〮 구〮들 ᄑᆞ〮고〮 믈〮로 구데〮 ᄀᆞᄃᆞ기 븟고〮 니기〮 후ᇰ두ᅌᅧ〮 汁집〮을〮 取츙〯ᄒᆞ야〮 마시〮라〮 又方令人騎其腹溺臍中{{*|}} ᄯᅩ〮 사〯ᄅᆞ미〮 그 ᄇᆡ〮ᄅᆞᆯ 타〮 안자〮 ᄇᆡᆺ〮보개〮 오좀〮 누게〮 ᄒᆞ라〮 又方針手足十指頭出血灸臍中七七壯{{*|}} ᄯᅩ〮 손〮발〮 열〮 가락 그〮틀〮 針짐ᄒᆞ야〮 피〮내〯오〮 ᄇᆡᆺ〮보ᄀᆞᆯ 七치ᇙ〮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治心腹俱脹疼痛氣短欲死或已絶者取梔子十四枚豉五合以水二盞先煮豉取一盞半去滓入梔子再煎取一盞去渣服半盞不愈盡服之{{*|}} ᄯᅩ〮 가ᄉᆞᆷ〮 ᄇᆡ〮 다〯 탸ᇰ〯만〮ᄒᆞ〮야〮 알ᄑᆞ고〮 氣킝〮分분이 뎔어〮 죽ᄂᆞ니〮와〮 시혹〮 ᄒᆞ마〮 주그〮닐〮 고툐〮ᄃᆡ梔징子ᄌᆞᆼ〯 열〮네〯 낫〯과〮 젼국 다ᄉᆞᆺ 호블〮 믈〮 두〯 잔〮ᄋᆞ로 몬져 젼국 글혀〮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滓ᄌᆡᆼ〮 앗〯고〮 梔징子ᄌᆞᆼ〮 녀허〯 다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츄ᇢ〯ᄒᆞ〮야〮 즛의 앗〯고〮 半반〮 잔〮ᄋᆞᆯ〮 머구ᄃᆡ 됴〯티 아니〮커든〮 다〯 머그〮라〮 又方治卒心腹煩滿疼痛欲死者以熱湯浸手足妙冷再換{{*|}} ᄯᅩ〮 과ᄀᆞᆯ이〮 가ᄉᆞᆷ〮 ᄇᆡ〮 煩뻔滿만〯ᄒᆞ〮여〮 알파〮 죽ᄂᆞ닐〮 고툐〮ᄃᆡ 더운〮 므〮레 손〮바〮ᄅᆞᆯ ᄃᆞᆷ고〮미 됴〯ᄒᆞ니〮 ᄎᆞ거든〮 다시〮 ᄀᆞᆯ라〮 又方卒煩滿嘔逆灸乳下一寸七壯卽愈{{*|}} ᄯᅩ〮 과ᄀᆞᆯ이〮 煩뻔滿만〯ᄒᆞ〮야〮吐통〯逆ᅌᅧᆨ〮 ᄒᆞ〮거든〮 졋〮 아랫〮 ᄒᆞᆫ 寸촌〮ᄋᆞᆯ 七칧〮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灸兩手大母指內邊爪後第一紋頭各一壯又灸兩手中指爪下一壯卽愈{{*|}} ᄯᅩ〮 !드〮!두〯! 손〮 엄지〮가락 안〮녁 소ᇇ토ᄇᆞ〮로셔〮 첫〮 그ᇝ〮 그〮틀 各각〮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ᄯᅩ〮 두〯 손 가?온〮ᄃᆡᆺ〮 가락 소ᇇ톱 아래〮 ᄒᆞᆫ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九種心痛取當大歲上新生槐枝一握去兩頭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 아홉〮 가짓〮 가ᄉᆞᆷ〮 알힐〮 고툐〮ᄃᆡ大땡〮歲ᄉᆒᆼ〯方바ᇰ앳〮 올ᄒᆡ〮 난회홧가〮지 ᄒᆞᆫ우희〮윰을〮 두〯 녁 그〮틀〮 버히〮고〯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治卒中惡心痛 苦參{{*|三兩}}㕮咀以好醋一升半煮取八合强者頓服老小分二服{{*|}} ᄯᅩ〮 과ᄀᆞᆯ이〮 中듀ᇰ〮惡ᅙᅡᆨ〮ᄒᆞ〮야〮 가ᄉᆞᆷ〮 알ᄂᆞ닐〮 고툐〮ᄃᆡ〮苦공〯參ᄉᆞᆷ 석〯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됴〯ᄒᆞᆫ 醋총〮 ᄒᆞᆫ 되〮 半반〮ᄋᆞ〮로 글혀〮 여듧〮 호ᄇᆞᆯ〮 取츙〯ᄒᆞ〮야〮 強가ᇰᄒᆞ닌〮 다〯 먹고 늘그〮니와 져므〮니ᄂᆞᆫ〮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桂心{{*|一兩}}㕮咀以水四升煮取一升半分二服{{*|}} ᄯᅩ〮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넉〯 되〮로 글혀〮 ᄒᆞᆫ 되〮 半반〮ᄋᆞᆯ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머그〮라 ==霍亂吐瀉第九<sub>沙證附</sub>== 經驗良方始因飮冷或胃寒或失飢或大怒或乘舟車傷動胃氣令人上吐上吐不止令人下瀉吐瀉倂作遂成霍亂頭旋眼暈手脚轉筋四肢逆冷用藥遲緩湏臾不救吳茱萸 木瓜 食塩{{*|各半兩}}右三味同炒令焦先用磁甁盛水三升煮令百沸却入前藥同煎至二升已下傾一盞冷熱隨病人意與服藥入卽醒{{*|}} 처〮ᅀᅥ믜 ᄎᆞᆫ〮믈〮 마쇼〮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치〮위〮에 ᄃᆞᆫ니〮거나〮 시혹〮 ᄇᆡ〮 골커나〮 시혹 너무 怒농〮커나〮 시혹〮 ᄇᆡ〮와〮 술위와〮타〮 胃ᅌᅱᆼ氣킝〮ᄅᆞᆯ〮 傷샤ᇰᄒᆞ면〮 사〯ᄅᆞ미〮 우흐〮로 吐통〯케〮 ᄒᆞ〮ᄂᆞ〮니〮 우흐〮로 吐통〯호〮ᄆᆞᆯ〮그치〮디 몯〯ᄒᆞ면〮 사〯ᄅᆞ미〮 아래〮로 즈츼〮에〮 ᄒᆞ〮ᄂᆞ니〮 吐통〯와〮 즈츼〮유미〮 ᄒᆞᆫᄢᅴ〮니르와ᄃᆞ면〮 霍확〮亂란〮이〮 ᄃᆞ외야〮 머리〮휫두르며〮 누〮니 휫두르며〮 손밠〮 히〮미올ᄆᆞ〮며 四ᄉᆞᆼ〮肢징 ᄎᆞ〮ᄂᆞ니〮 藥약〮ᄋᆞᆯ디마〮니 ᄒᆞ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吳ᅌᅩᆼ茱쓩萸융 와〮木목瓜광 와〮 소곰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 ᄃᆡ〮봇가〮 눋〯게 ᄒᆞ〮야〮 몬져 沙상甁뼈ᇰ에〮 믈〮 서〯 되〮ᄅᆞᆯ〮 다마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커든〮 알ᄑᆡᆺ〮 藥약〮ᄋᆞᆯ〮 녀허〮 ᄒᆞᆫᄃᆡ〮 글혀〮 두〯 되예 니를〮어든〮 ᄒᆞᆫ 잔ᄋᆞᆯ〮 브ᅀᅥ〮 ᄎᆞ〮며 더우〮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ᄠᅳ〮들 조차〮 주〮어 머기〮면〮 藥약〮이〮 들〮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倉卒無前藥用枯白礬爲末每服一大錢百沸湯點服{{*|}} ᄒᆞ〮다〯가〮 時씽急급〮ᄒᆞ〮야〮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枯콩白ᄈᆡᆨ〮礬뻔 을〮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큰〮 돈〯ᄋᆞᆯ〮 一ᅙᅵᇙ〮百ᄇᆡᆨ〮 번 솟글흔〮 므〮레 프〮러 머기〮라〮. 如無白礬只用塩一撮醋一盞同煎至八分溫服或塩梅醎酸等物皆可煮服{{*|處方本以鹹醋二物煮}}{{*|}} ᄒᆞ〮다가〮 白ᄈᆡᆨ〮礬뻔이〮 업〯거든〮 소곰 ᄒᆞᆫ져붐〮과〮 醋총〮 ᄒᆞᆫ 잔〮ᄋᆞᆯ〮 ᄒᆞᆫᄃᆡ〮 글혀〮 여듧〮 分뿐〮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고〮 시혹〮 소고미〮나梅ᄆᆡᆼ實씨ᇙ〮 이〮나 ᄧᆞᆫ〮 것과〮싄 것ᄃᆞᆯ〮히 다〯 어루〮 글혀〮 머귤〮디〮니라〮 又方脚手轉筋赤蓼莖葉細切三合水四合酒二合同煎取四合分作二溫服{{*|}} ᄯᅩ〮 발〮 손 히〮미 옮〯거든〮 블근〮 엿귓〮 줄기〮와〮 닙〮과〮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세〯 홉과〮 믈〮 너〯 !흡!홉!과〮 술 두〯 홉과〮 ᄒᆞᆫᄃᆡ〮 글혀〮 네〮 호블〮 取츙〯ᄒᆞ〮야〮 둘〯헤〮 ᄂᆞᆫ화〮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脚轉筋用大蒜磨脚心令遍熱卽差{{*|}} ᄯᅩ〮 밠 히〮미 옮〯거든〮 굴〯근 마ᄂᆞ〮ᄅᆞᆯ〮 밠〮바다〮ᅌᅢ〮 ᄲᅵ븨〮여 두루 덥〯게〮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絞腸沙痛不可忍或展轉在地或起或仆其膓絞縮在腹此是中毒之深湏臾能令人死古方名乾霍亂急用塩一兩熱湯調灌入病人口中塩氣一到腹其痛卽定又將石沙炒令赤色冷水淬之良久澄淸水一二合服之愈{{*|}} ᄯᅩ〮絞교ᇢ〯腸땨ᇰ沙상ㅣ 알포〮ᄆᆞᆯ〮 ᄎᆞᆷ〮디 몯〯ᄒᆞ〮야〮 시혹〮 ᄯᅡ해〮 그울며〮 시혹〮 닐〯며〮 시혹〮 업더〮디〮여 그膓땨ᇰ 이〮 ᄇᆡ〮예〮뷔〯트〮러 움주쥐여〮 잇ᄂᆞ니〮 이〮 毒독〮ᄋᆞᆯ〮 마조〮미 기퍼〮 아니〮한 ᄉᆞᅀᅵ〮예〮 사〯ᄅᆞ미〮 죽게〮 ᄒᆞ〮ᄂᆞ니〮 녯〮 方바ᇰ文문에〮 일후미 乾간霍확〮亂롼이〮니 ᄲᆞᆯ리〮 소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 므〮레 프〮러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ᆡ〮 이베〮 브ᅀᅳ라〮 소고ᇝ 氣킝〮分분이〮 ᄇᆡ〮예〮 들〮면〮 그 알포〮미 곧〮 긋거든〮 ᄯᅩ〮호ᄀᆞᆫ〮 돌〯ᄒᆞᆯ〮 봇가 븕게〮 ᄒᆞ〮야〮 ᄎᆞᆫ〮므〮레 ᄃᆞᆷ가〮안초〮아 ᄆᆞᆯ겨〮 그 믈〮 ᄒᆞᆫ두〯 호블〮 머그〮면〮 됻〯ᄂᆞ〮니라 葛氏備急方霍亂煩悶湊滿者用塩納臍中灸二七壯{{*|}} 霍확亂롼〮ᄒᆞ〮야〮 닶〮가와〮 탸ᇰ〯만ᄒᆞ닐 소고ᄆᆞᆯ〮 ᄇᆡᆺ보개〮 녀코〮 二ᅀᅵᆼ〮七치ᇙ 壯자ᇰ〮ᄋᆞᆯ〮 ᄯᅳ〮라 又方霍亂心腹脹痛者服乾薑屑三方寸匕{{*|}}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탸ᇰ〯만ᄒᆞ〮야〮 알ᄂᆞ닐〮 乾간薑가ᇰㅅ ᄀᆞᆯᄋᆞᆯ세〯 수〮를 머기〮라〮 又方小蒜一升㕮咀以水三升煮取一升頓服之{{*|}} ᄯᅩ〮 호ᄀᆞᆫ 마ᄂᆞᆯ〮 ᄒᆞᆫ 되〮ᄅᆞᆯ〮 사ᄒᆞ〮라〮 믈〮 서〯 되〮로〮 글혀〮 ᄒᆞᆫ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다〯 머그〮라〮 又方{{*|生薑}}一斤切以水七升煮取二升分爲三服{{*|}} ᄯᅩ〮 生ᄉᆡᇰ薑가ᇰ ᄒᆞᆫ 斤근을〮 사ᄒᆞ〮라〮 믈〮 닐굽〮 되〮로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세〯헤 ᄂᆞᆫ화〮 머그〮라〮 又方若轉筋桂半夏等分末方寸匕水一升和服{{*|}} ᄯᅩ〮 히〮미 올ᄆᆞ〮!날〮!닐〮! 桂ᄀᆒᆼ〮皮삥와〮 半반〮夏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수〮를〮 믈〮 ᄒᆞᆫ 되〮예〮 프〮러 머그〮라〮 又方生大豆屑酒和服方寸匕{{*|}} ᄯᅩ〮 ᄂᆞᆯ콩 ᄭᆞᆯᄋᆞᆯ〮 수레〮 프〮로ᄃᆡ〯 ᄒᆞᆫ〮 수〮를〮 머그〮!리〮!라〮! 又方治霍亂吐下後大渴多飮則殺人以黃米{{*|卽黍米}}五升水一斗煮之令得三升澄淸稍稍飮之莫飮餘物也{{*|}} ᄯᅩ〮 霍확〮乱롼〮ᄒᆞ〮야〮 吐통〮下ᅘᅡᆼ〮ᄒᆞᆫ 後ᅘᅮᇢ〯에〮 ᄀᆞ자ᇰ〮 목 ᄆᆞᆯ라〮 믈〮 하〮 머그〮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기자ᇰᄡᆞᆯ〮 닷 되〮ᄅᆞᆯ〮 믈〮 ᄒᆞᆫ 마래〮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ᄆᆞᆰ안초〮아〮 젹젹 먹고〮 다ᄅᆞᆫ 믈〮 먹디〮 마롤〮디〮니라〮 又方治霍亂轉筋垂死敗蒲席一握細剉漿水一盞煮汁溫溫頓服{{*|}} ᄯᅩ〮 霍확〮亂롼〮ᄒᆞ〮야〮 !ᅙᅵ〮!히〮!미 올마〯 죽ᄂᆞ닐〮 고툐〮ᄃᆡ〮 헌〯 부들〮 지즑〮 ᄒᆞᆫ 우후〮믈〮 ᄀᆞ〮ᄂᆞ리〮 사ᄒᆞ〮라〮漿쟈ᇰ水ᄉᆔᆼ〯 ᄒᆞᆫ 盞잔〮애〮 글혀〮 汁집〮을〮 ᄃᆞ시ᄒᆞ〮야〮 다〯 머그〮라〮 直指方霍亂吐瀉心腹作痛用炒塩二梡紙包紗護頓其胸前幷腹肚上以熨斗火熨氣透卽蘇續又以炒塩熨其背{{*|}} 霍확亂롼〮 吐통〯瀉샹〯 ᄒᆞ〮야〮 가ᄉᆞᆷ〮 ᄇᆡ〮 알커든〮 봇ᄀᆞᆫ〮 소곰 두〯보ᅀᆞ〮ᄅᆞᆯ〮 죠ᄒᆡ〮에〮 ᄡᆞ〮고〮 紗상로〮 ᄢᅳ려〮 가ᄉᆞᆷ〮과〮 ᄇᆡ〮예어ᇇ고〮 다리〮우리〮로〮 블〮 다마 다려〮 氣킝〮分분이〮ᄉᆞᄆᆞᄎᆞ!먼〮!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ᄯᅩ〮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드ᇰ을〮 熨ᅙᅮᇙ〮ᄒᆞ라〮 聖惠方霍亂吐不止欲死 生薑{{*|二兩}}牛糞三合右以水三大盞煎至一盞半去滓分溫三服{{*|}} 霍확〮亂롼〮ᄒᆞ〮야〮 吐통〯ᄅᆞᆯ〮 그치〮디 몯〯ᄒᆞ〮야〮 죽ᄂᆞ닐〮 生ᄉᆡᇰ薑가ᇰ 두〯 兩랴ᇰ〯과〮 ᄉᆈ〯ᄯᅩᇰ 서〯 호ᄇᆞᆯ〮 믈〮 세〯 큰〮 盞잔〮애〮 글혀〮 ᄒᆞᆫ 盞잔〮 半반〮애〮 니르〮커든〮 滓ᄌᆡᆼ〮 잇〯고〮 ᄃᆞ시 ᄒᆞ〮야〮 세〯 버네 머그〮라〮 經驗秘方治霍亂吐瀉丁香七枚細嚼新汲水送下如不能嚼硏細涼水調下亦可{{*|}} 霍확亂롼〮 吐!통〮!통〯!瀉샹〯ᄅᆞᆯ〮 고툐〮ᄃᆡ〮丁뎌ᇰ香햐ᇰ 닐굽〮 나〯ᄎᆞᆯ〮 ᄂᆞ로니〮 십고〮 ᄀᆞᆺ 기룬〮 믈〮로 ᄂᆞ리〮오ᄃᆡ〮 ᄒᆞ〮다가〮 십디〮 몯〯거든〮 ᄀᆞ〮ᄂᆞ리〮 ᄀᆞ〮라 ᄎᆞᆫ〮므〮레 프〮러 ᄂᆞ리옴도〮 ᄯᅩ〮 됴〯ᄒᆞ〮니라〯 又方菉豆 胡椒{{*|各七七粒}}右擣爲末新汲水調服不拘時{{*|}} ᄯᅩ〮菉록〮豆뚜ᇢ〮 와〮胡ᅘᅩᆼ椒죠ᇢ 와 各각〮 닐굽〮닐굽〮 나〯ᄎᆞᆯ〮 디허〮 ᄀᆞᄅᆞ ᄆᆡᇰᄀᆞ〮라 ᄀᆞᆺ 기룬 므〮레 프〮러 머구〮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말〯라〮 醫方集成姜塩飮治乾霍亂欲吐不吐欲瀉不瀉 塩{{*|一兩}}生薑{{*|切半兩}}右同炒令色變以水一梡煎溫服甚者加童子小便一盞{{*|}} 薑가ᇰ塩염飮ᅙᅳᆷ〯 은〮 乾간霍확〮亂롼〮이〮 吐통〯코져〮 호〮ᄃᆡ 吐통〯티〮 몯〯ᄒᆞ고 즈츼〮오져〮 호〮ᄃᆡ 즈츼〮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소곰 ᄒᆞᆫ 兩랴ᇰ〯과〮 生ᄉᆡᇰ薑가ᇰ 사ᄒᆞ〮로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ᄒᆞᆫᄃᆡ 봇가 비〮치 다ᄅᆞ거든〮 믈〮 ᄒᆞᆫ 보ᅀᆞ〮로〮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甚씸〯ᄒᆞ니〮란〮 아ᄒᆡ〮 오좀〮 ᄒᆞᆫ 盞잔ᄋᆞᆯ〮 조쳐〮 머기〮라〮 壽域神方霍亂已死上屋喚魂以諸治皆至而猶不差捧病覆臥之伸兩臂對以繩度兩肘尖頭依繩下夾背脊大骨空中去脊各一寸灸之百壯不治者可灸肘椎已試數百人皆灸畢卽起坐驗{{*|}} 霍확亂롼〮ᄒᆞ〮야〮 ᄒᆞ마〮 죽거든〮 집 우희〮 올아〮 넉슬〮 브르고〮 여러〮가짓〮 고툐〮ᄆᆞᆯ〮 다〯 호〮ᄃᆡ ᄉᆞᆫᄌᆡ〮 됴〯티 아니〮커든〯 病뼈ᇰ〮ᄒᆞ닐〮업더리〮와다 뉘이〮고〮 두〯 ᄇᆞᆯᄒᆞᆯ〮 펴고〮 노ᄒᆞ〮로 두〯 ᄇᆞᆯ톡〯 그〮틀 견주〮고〮 노ᄒᆞᆯ〮브터〮 드ᇰᄆᆞᄅᆞᆺ ᄲᅧ〮를〮 ᄢᅧ〮 가온〮ᄃᆡ 뷔우〮고〮 드ᇰᄆᆞᆯᄅᆞ〮로〮셔〮 各각〮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ᅮ〮ᄃᆡ 됴〯티 아닌〮ᄂᆞ니〮란 肘듀ᇢ〯椎ᄄᆔᆼᄅᆞᆯ〮 ᄯᅳ〮라 ᄒᆞ마〮 數슝〮百ᄇᆡᆨ〮人ᅀᅵᆫ을〮 디〯내〮요니〮 다〯ᄯᅩᆷ〮 ᄆᆞᄎᆞ〮면〮 즉〮재 니러〮 안ᄌᆞ니〮라〮 又方治絞腸沙腹痛不可忍者嘔吐泄瀉及中署霍亂心煩渴不省人事兼治急心痛白蜜馬糞二味不以多少擂新水化下去滓頓服一碗雖曰穢汚却有神功無蜜亦可{{*|}} ᄯᅩ〮 絞교ᇢ〯腸땨ᇰ沙상ㅣ ᄇᆡ〮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ᄂᆞ〮니와〮 吐!틍〯!통〯!ᄒᆞ고〮즈츼〮ᄂᆞ니〮와〮 中듀ᇰ〮暑셩〯ᄒᆞ며〮 霍확〮亂롼〮ᄒᆞ〮야〮 ᄆᆞᅀᆞ미〮 煩뻔渴카ᇙ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ᄂᆞ닐〮 고티〮고 과ᄀᆞᄅᆞᆫ〮 가ᄉᆞᆷ〮알힐〮 조쳐〮 고티〮ᄂᆞ니〮 ᄒᆡᆫ〮 ᄢᅮᆯ〮와〮 ᄆᆞᆯᄯᅩᇰ과〮 두〯 가!저〮!지〮!를〮 새〮 므〮레 프〮러 즛의 앗〯고〮 ᄒᆞᆫ 보ᅀᆞ〮ᄅᆞᆯ〮 다〯 머그〮라〮 비록〮 더〯러〮우나〮 神씬奇긩ᄒᆞᆫ 功고ᇰ이〮 잇ᄂᆞ니〮 ᄢᅮᆯ〮 업〯서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用收蠶子的舊紙一幅務要去蠶子潔淨燒灰爲末用熱酒調服立效{{*|}} ᄯᅩ〮 누에〮ᄡᅵ〮 난 죠ᄒᆡ〮 ᄒᆞᆫ 張댜ᇰᄋᆞᆯ〮 누에〮ᄡᅵ〮ᄅᆞᆯ〮 조〮히 업〯게 ᄒᆞ고〮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술로〮 프〮러 머그〮면〮 즉〮자히〮 됻〯ᄂᆞ〯니라〮 又方治急肚痛絞膓沙用久乾猪糞一塊如指頭大用砂仁二箇碾爲末白湯調服妙{{*|}} ᄯᅩ〮 과ᄀᆞᆯ이〮 ᄇᆡ〮 알ᄑᆞᆫ 絞교ᇢ〯腸땨ᇰ沙상ᄅᆞᆯ〮 고툐〮ᄃᆡ 오래〮 ᄆᆞᄅᆞᆫ 도ᄐᆡ〮 ᄯᅩᇰ ᄒᆞᆫ 무저기〮 소ᇇ가락만〮 ᄒᆞ니〮와〮縮슉〮砂상 두〯 나〯ᄎ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尸厥第十== 經驗良方其證奄然死去四肢逆冷不省人事腹中氣走如雷鳴 焰焇{{*|半兩}}硫黃{{*|一兩}}右細硏如粉分作三服每服用好舊酒一大盞煎覺焰起傾於盞內盖着溫灌與服如人行五里又進一服不過二服卽醒兼灸頭上百會穴四十九壯兼臍下氣海丹田三百壯覺身體溫暖卽止{{*|}} 그 證지ᇰ〮이〮 믄득〮 죽거든〮 四ᄉᆞᆼ〮肢징 ᄎᆞ〮고 人ᅀᅵᆫ事ᄊᆞᆼ〮 ᄎᆞ〮리디〮 몯〯ᄒᆞ고〮 ᄇᆡ〮 안해〮 氣킝分분이〮ᄃᆞᆫ뇨〮ᄃᆡ 울〮에 ᄀᆞᆮ〮ᄒᆞ니〮 焰염〮焇쇼ᇢ 半반〮 兩랴ᇰ〯과〮硫류ᇢ黃ᅘᅪᇰ〮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세〯 服뽁〮애〮 ᄂᆞᆫ화〮 ᄒᆞᆫ 服뽁〮애〮 됴〯ᄒᆞᆫ 무근〮 술 큰〮 ᄒᆞᆫ 잔〮애〮 글혀〮 焰염〮焇쇼ᇢㅣ 니러〮나〮거든〮 잔〮애〮 브ᅀᅥ〮 둡고〮 ᄃᆞ시 ᄒᆞ〮야〮 브ᅀᅥ〮 머기〮고〮 사〯ᄅᆞ미〮 五ᅌᅩᆼ〮里링〯예〮 갈 만〮ᄒᆞ〮야〮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 즉〮재 ᄭᆡ〮ᄂᆞ니〮 머릿〮 百ᄇᆡᆨ〮會ᅘᅬᆼ〮穴ᅘᆑᇙ〮ᄋᆞᆯ〮 四ᄉᆞᆼ〮十씹〮九구ᇢ〯 壯자ᇰ〮ᄋᆞᆯ〮 ᄯᅳ〯고〮 臍쪵下ᅘᅡᆼ〯와〮氣킝〮海ᄒᆡᆼ〯 와〮丹단田뗜 ᄋᆞᆯ〮 三삼百ᄇᆡᆨ〮 壯자ᇰ〮ᄋᆞᆯ〮 ᄯᅥ〮 모〮미 덥〯거든〮 말〯라〮 如無前藥用附子重七錢許炮熟去皮臍爲末分作二服每服用酒三盞煎至一盞溫服{{*|}}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 附뿡〮子ᄌᆞᆼ〯 므〮긔 닐굽〮 돈〯 남ᄌᆞᆺᄒᆞ닐〮 炮뽀ᇢᄒᆞ〮야〮 니겨〮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細솅〮末마ᇙ〮ᄒᆞ〮야〮 ᄂᆞᆫ화〮 두〯 服뽁〮애〮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술 세〯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애〮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又無附子用生薑自然汁半盞酒一盞煎百沸倂灌二服{{*|}} ᄯᅩ〮 附뿡〮子ᄌᆞᆼ〯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 半반〮 잔〮ᄋᆞᆯ〮 술 ᄒᆞᆫ 잔〮ᄋᆞᆯ〮 글혀〮 一ᅙᅵᇙ〮百ᄇᆡᆨ〮 번솟글커든〮 조쳐〮 브ᅀᅩ〮ᄃᆡ〮 두〯 服뽁〮애 ᄒᆞ라〮 聖惠方治尸厥脉動而無氣氣閉不通故正如死聽其耳中脩脩有如嘯聲而股內暖者是也不治三日當死宜服朱砂丸 朱砂{{*|細硏}}雄黃{{*|細硏}}附子{{*|各三分炮裂去皮臍}}桂心{{*|一兩半}}巴豆{{*|二十枚去皮心硏}}右件藥擣羅爲末入硏了藥令勻煉蜜和丸如麻子大每服不計時候以粥飮下五丸不知更下二丸若利多則止之{{*|}} 尸싱厥궈ᇙ〮을〮 고툐〮ᄃᆡ〮 脉ᄆᆡᆨ〮이〮뮈유〮ᄃᆡ〮 氣킝〮分분 업〯스며〮 氣킝〮分분이〮 마켜〮 通토ᇰ티〮 몯〯ᄒᆞᆯᄉᆡ〮 正져ᇰ〮히〮 주그〮니 ᄀᆞᆮ〮ᄒᆞ니〮 그 귀예〮 드로〮ᄃᆡ〮 脩슈ᇢ脩슈ᇢᄒᆞ〮야〮 ᄑᆞ〮라ᇝ 소ᄅᆡ〮 ᄀᆞᆮ〮고〮 다리 안〮히 더우〮니 이〮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ᄋᆞᆳ〮마〯내 죽ᄂᆞ니〮 朱즁砂상丸ᅘᅪᆫᄋᆞᆯ〮 머귤디니〮 朱즁砂상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ᆯ〮오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나리 ᄀᆞᆯ〮오 附뿡〮子ᄌᆞᆼ〯ᄅᆞᆯ〮 各각〮 三삼分뿐〮을 炮뽀ᇢᄒᆞ〮야〮 ᄢᅢ혀〮 것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桂ᄀᆒᆼ〮心심 ᄒᆞᆫ 兩랴ᇰ〯 半반〮과〮巴방豆뚜ᇢ〮 스〮믈 나〯ᄎᆞᆯ〮 것과〮 소〯ᄇᆞᆯ〮 앗〯고 ᄀᆞ〮라 이 藥약〮을〮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고〮 몬져 ᄀᆞ〮론 藥약〮ᄋᆞᆯ〮 녀허〮 골오〮 섯거〮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 지ᅀᅩ〮ᄃᆡ 열ᄡᅵ〮만〮 케〮 ᄒᆞ〮야〮 머규〮ᄃᆡ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粥쥭〮므〮레 다ᄉᆞᆺ〮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오고〮 아〯디 몯〯거든〮 다시〮 두〯 丸ᅘᅪᆫᄋᆞᆯ〮 ᄂᆞ리〮올디〮니 즈츼〮요ᄆᆞᆯ〮 하〮 ᄒᆞ〯야ᄃᆞᆫ〮 그치〮라〮 葛氏備急方尸蹶之病卒死而脉猶動灸鼻人中七壯又灸陰囊下去下部一寸百壯若婦人灸兩乳中閒又云爪刺人中良久又針人中至齒立起{{*|}} 尸싱厥궈ᇙ〮ㅅ 病뼈ᇰ〮이〮 과ᄀᆞᆯ이〮 주구〮ᄃᆡ 脉ᄆᆡᆨ〮이〮 ᄉᆞᆫᄌᆡ〮 動또ᇰ〯ᄒᆞ〮ᄂᆞ니〮 人ᅀᅵᆫ中듀ᇰ을〮 七치ᇙ〮壯자ᇰ〮ᄋᆞᆯ〮 ᄯᅳ〮고 ᄯᅩ〮陰ᅙᅳᆷ囊나ᇰ 아래〮 밋굼그〮로셔〮 ᄒᆞᆫ 寸촌〮ᄋᆞᆯ〮 百ᄇᆡᆨ〮壯자ᇰ〮ᄋᆞᆯ〮 ᄯᅳ〮라 ᄒᆞ〮다가〮 겨〯지비〮어든〮 두〯 졋〮 가온〮ᄃᆡᆯ〮 ᄯᅳ〮라〮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소ᇇ토ᄇᆞ〮로〮 오래〮ᄣᅵᆯ어〮 시며 ᄯᅩ〮 人ᅀᅵᆫ中듀ᇰ을〮 針짐호〮ᄃᆡ 니〮예 다ᄃᆞᆮ게〮 ᄒᆞ면〮 즉〮자히〮 니〯ᄂᆞ〮니라〮 又方菖蒲屑納鼻兩孔中吹之令人以桂屑着舌下{{*|}} ᄯᅩ〮 菖챠ᇰ蒲뽕ㅅ ᄀᆞᆯᄋᆞᆯ 두〯 곳〮굼긔〮 녀코〮 불〯오〮 사〯ᄅᆞ미〮 桂ᄀᆒᆼ〮皮삥ㅅ ᄀᆞᆯᄋᆞ〮로〮 혀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熨其兩脅下取竈中墨如彈丸漿水和飮之湏臾三四{{*|}} ᄯᅩ〮 두〯 녀블 熨ᅙᅮᇙ〮ᄒᆞ고 브ᅀᅥ〮븻〮 검듸〮여ᇰ을〮彈딴子ᄌᆞ〯 만〮 ᄒᆞ닐〮 가져〮 漿쟈ᇰ水ᄉᆔᆼ예〮 프〮러 머교〮ᄃᆡ〮 아니〮한 ᄉᆞᅀᅵ〮예〮 서〯너〮 번 ᄒᆞ〮라〮 又方針百會入三分補之又針足大指甲下內側去甲三分又足指甲上各入三分{{*|}} ᄯᅩ〮 百ᄇᆡᆨ〮會ᅘᅬᆼ〮ᄅᆞᆯ〮 針짐호〮ᄃᆡ 三삼分뿐〮에 들〮에 ᄒᆞ〮야〮 補봉〯ᄒᆞ고〮 ᄯᅩ〮 밠〮 엄지〮가락톱〮 아래〮 안〮녁 겨틀〮 토〮ᄇᆞ로〮셔 三삼分뿐〮만 ᄒᆞᆫᄃᆡ〮 針짐ᄒᆞ고〮 ᄯᅩ〮 밠〮톱 우흘〮 各!긱〮!각〮!各각〮 三삼分뿐〮이〮 들〮에 針짐ᄒᆞ라〮 又方灸膻中穴二十八壯{{*|}} ᄯᅩ 膻선中듀ᇰ穴ᅘᆑᇙ〮을〮 二ᅀᅵᆼ〮十씹〮八바ᇙ〮壯자ᇰ〮을〮 ᄯᅳ〮!리〮!라〮! ==纏喉風喉閉第十一<sub>喉腫舌腫失音附</sub>== 經驗良方其證先兩日胸膈氣緊取氣短促驀然咽喉腫痛手足厥冷氣閉不通頃刻不治 巴豆{{*|七粒三生四熟生者去殼生硏熟者去殼燈上燒存性}}雄黃一塊{{*|如皂角子大透明者細硏}}鬱金一箇{{*|蟬肚者硏爲末}}右三味硏末每服半字用茶淸兩呷許調下口噤咽塞用小竹管納藥吹入喉中湏臾吐利卽醒{{*|}} 그 證지ᇰ〮이〮 몬져 이트〮를〮 가ᄉᆞᇝ〮氣킝〮分분이〮 답답ᄒᆞ〮야〮 氣킝〮分분ᄋᆞᆯ〮 取츙〯호〮미 뎌르고〮 ᄌᆞᆺ다가〮 믄〮득〮 모기〮 븟고〮 손〮바〮리 ᄎᆞ〮고 氣킝〮分분이〮 마가〮 通토ᇰ티〮 몯〯ᄒᆞ〮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고티〮디〮 몯〯ᄒᆞ〮ᄂᆞ〮니라〮 巴방豆뚜ᇢ〮 닐굽〮 나〯ᄎᆞ로〮 세〯흔 生ᄉᆡᇰ이〮오〮 네〯흔 니겨〮 生ᄉᆡᇰ으〮란〮 거피〮 밧겨〮 ᄀᆞᆯ오 니그〮니란〮 거피〮 밧기〮고〮 드ᇰ자ᇇ〮브〮레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라〮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기〮 皂쪼ᇢ〯角각〮 ᄡᅵ〮만〮 ᄒᆞ니〮 ᄉᆞᄆᆞᆺ ᄇᆞᆯᄀᆞ〮닐〮 ᄀᆞ〮ᄂᆞ〮리〮 ᄀᆞᆯ〮라〮鬱ᅙᅮᇙ〮金금 ᄒᆞᆫ 낫〯 ᄆᆡ〮야ᄆᆡ〮 ᄇᆡ〮 ᄀᆞᆮ〮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세〯 가짓〮 마〮ᄉᆞᆯ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字ᄍᆞᆼ〮ᄅᆞᆯ〮 머교〮ᄃᆡ 찻믈〮 두〯 머굼〮만〮 ᄒᆞᆫᄃᆡ〮 프〮러 ᄂᆞ리〯오라〮 입〮 마고〮믈오 모기〮 마고〮 븟거든〮 져〮근 대〮로ᇰ애 藥약〮ᄋᆞᆯ〮 녀허〮 목 안해〮 불면〮 아니〮한〮 ᄉᆞᅀᅵ〮예 吐통〯ᄒᆞ〮고〮 즈츼〮면〮 곧 ᄭᆡ〮ᄂᆞ니〮라〮 如無前藥用川升麻四兩剉碎水四椀煎一椀灌服{{*|}}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넉〯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믈〮 네〯 보ᅀᆞ애〮 ᄒᆞᆫ 보ᅀᆡ〮 ᄃᆞ외에〮 글혀〮 브ᅀᅳ라〮 又無川升麻用皂角三莖搥碎挼一盞灌服或吐或不吐卽安{{*|}} ᄯᅩ〮 川!ᄌᆑᆫ!ᄎᆑᆫ!升시ᇰ麻망 업〯거든〮 皂쪼ᇢ〯角각〮 세〯 줄!길〮!걸〮! !ᄯᅳ!ᄯᅮ!드〮려〮 ᄇᆞᆺ아〮 ᄒᆞᆫ 자내〯 프〮러 브ᅀᅳ라〯 시혹〮 吐통〯커나〮 시혹〮 吐통〯티〮 아니〮커나〮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朱氏集驗方吹喉散治咽喉腫痛 朴硝{{*|四兩別硏}}甘草{{*|一兩生末}}右硏勻每用半錢乾擦喉如腫甚用竹管子吹入喉中爲佳{{*|}} 吹ᄎᆔᆼ喉ᅘᅮᇢ散!신!산! 은〮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朴박〮硝쇼ᇢ 넉〮 兩랴ᇰ〯ᄋ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ᄒᆞᆫ 兩량〯ᄋᆞᆯ〮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細솅〮末마ᇙ〮ᄒᆞ〮야〮 ᄀᆞ〮라 골아〮 半반〮 돈〯ᄋᆞᆯ〮 ᄆᆞᄅᆞ닐〮 모긔〮 ᄇᆞᆯ로〮ᄃᆡ〮 브ᅀᅮ〮미 甚씸〯커든〮 대〮로ᅌᆞ〮로 부러〮 목 안해 드〮류미〮 됴〯ᄒᆞ〮니라〮 經驗秘方治懸壅暴腫 白礬 塩右等分爲末以筯頭點少許在懸壅上{{*|}} 목져〮지 과글이 브ᅀᅳ닐〮 고툐〮ᄃᆡ 白ᄈᆡᆨ〮礬뻔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ᄇᆞᄅᆞ라〮 又方乾薑半夏等分爲末以少許着舌下{{*|}} ᄯᅩ〮 乾간薑가ᇰ과〮 半반〮夏!ᅘᅵᆼ!ᅘᅡ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혀 아래〮 녀흐라〮 又方一字散主喉痺氣塞不通欲死者 雄黃{{*|一分別硏}}蝎梢{{*|七枚}}猪牙皂角{{*|七鋌}}白礬{{*|生硏一錢}}藜蘆{{*|一錢}}右細末每用一字吹入鼻中頑涎卽吐效{{*|}} ᄯᅩ〮一ᅙᅵᇙ〮字ᄍᆞᆼ散산〮 은〮 모기〮 브ᅀᅥ〮 氣킝〮分분이〮 !아!마!가〮 通토ᇰ티〮 몯〯ᄒᆞ〮야 죽ᄂᆞ닐 主즁〮ᄒᆞ니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分뿐을〮 各각別벼ᇙ히 ᄀᆞᆯ오 蝎허ᇙ〮梢쇼ᇢ 닐굽〮 낫〯과〮 皂쪼ᇢ〯角각 닐굽〮 鋌뗘ᇰ〯과 白ᄈᆡᆨ礬뻔 生!ᄉᆡᆼ!ᄉᆡᇰ!ᄒᆞ닐〮 ᄀᆞ〮라 ᄒᆞᆫ 돈〯과〮藜래蘆 롱 ᄒᆞᆫ 돈〯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부러 녀허〮 건〯추〮믈 吐통〯ᄒᆞ면〮 됻〯ᄂᆞ〮니라 又方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馬㗸鐵{{*|一具}}右用水三盞煮一盞溫服又蒜塞耳鼻中{{*|}} ᄯᅩ〮 모기〮 막고〮 ᄀᆞ자ᇰ〮 브ᅀᅥ〮 ᄲᅡ매〮 닛〯고〮 氣킝分분을〮 吐통〯호〮미 ᄌᆞᄌᆞ〮면〮 일후〮미 ᄆᆞᆯ목브ᅀᅮ〮미니〮馬망〯含ᅘᅡᆷ쇠〮 ᄒᆞ나ᄒᆞᆯ〮 믈〮 세〯 잔〮ᄋᆞ로〮 ᄒᆞᆫ 잔〮 ᄃᆞ외!어〮!에〮! 글혀〮 ᄃᆞ시 ᄒᆞ〮야〮 머기〮라〮 ᄯᅩ〮 마ᄂᆞ〮ᄅᆞᆯ〮 귀〮와〮 고해〮 고ᄌᆞ라〮 又方如聖散治舌腫喉痺 川芎 桔梗 薄苛葉 甘草 盆硝{{*|各等分}}右爲細末每用一錢乾摻{{*|}} ᄯᅩ〮如ᅀᅧᆼ聖셔ᇰ〮散산 은〮 혀〮 븟고〮 목 브ᅀᅳ닐〯 고티〮ᄂᆞ니〮川!ᄌᆑᆫ!ᄎᆑᆫ!芎쿵 과〮 桔겨ᇙ〮梗겨ᇰ〯과〮薄팍〮荷ᅘᅡᆼㅅ 닙〮과〮 甘감草초ᇢ〯와〮盆뽄硝쇼ᇢ와〮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곰〮 ᄆᆞᄅᆞ닐〮 ᄇᆞᄅᆞ라〮 又方舌忽腫硬塞悶百草霜食塩等分井水調塗舌上卽安{{*|}} ᄯᅩ 혜〮 忽호ᇙ然ᅀᅧᆫ히〮 브ᅀᅥ〮 세웓고〮 답답ᄒᆞ〮거든〮 百ᄇᆡᆨ〮草초ᇢ〯霜사ᇰ과〮 소〮곰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우믌〮 므〮레 프〮러 혀〮에〮 ᄇᆞᄅᆞ면 즉〮재 便뼌安ᅙᅡᆫᄒᆞ〮ᄂᆞ〮니라〮 直指方白藥散治喉中熱塞腫疼散血消痰白藥 朴硝{{*|等分}}右爲末以小管子吹入喉{{*|}} 白ᄈᆡᆨ〮藥약散산 은〮 목 안〮히 더워〮 마고〮 브ᅀᅳ닐〮 고티〮ᄂᆞ니〮 피〮ᄅᆞᆯ〮 슬〮며 痰땀〮을〮 노기〮ᄂᆞ니〮라 白ᄈᆡᆨ〮藥약〮!괴〮!과〮!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근 대〮롱ᄋᆞ〮로 부러〮 모ᄀᆡ〮 녀흐라〮 衛生易{{*|簡方}}纏喉風及喉痺用蠶退紙燒灰存性煉蜜丸如雞頭大含化嚥津{{*|}} 纏뗜喉ᅘᅮᇢ風보ᇰ과〮 목 브ᅀᅳ닐〮 누에〮ᄡᅵ〮 난 죠ᄒᆡ〮ᄅᆞᆯ〮 ᄉᆞ〮로ᄃᆡ〮 性셔ᇰ〮이〮 잇게 ᄒᆞ〮야〮 煉련〮혼〮 ᄢᅮ〮레 丸ᅘᅪᆫ을〮 지ᅀᅩᄃᆡ〮雞곙頭뚜ᇢ實씨ᇙ 만〮 게〮 ᄒᆞ〮야〮 머구〮머 노겨〮 춤〮 ᄉᆞᇝ기〮라〮纏뗜喉ᅘᅮᇢ風보ᇰ 은〮 과ᄀᆞᄅᆞᆫ목더시〮라〮 又方纏喉風氣不通雄黃一塊新汲水磨急灌吐卽差{{*|}} ᄯᅩ 纏뗜喉ᅘᅮᇢ風보ᇰ에〮 氣킝分분이〮 通토ᇰ티〮 아니〮커든〮 雄ᅘᅮᇰ黃ᅘᅪᇰ ᄒᆞᆫ 무저글〮 새〮 므〮레 ᄀᆞ〮!리〮!라〮! ᄲᆞᆯ리〮 브ᅀᅥ 吐통〯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咽喉腫閉 甘草 白礬{{*|等分}}右爲細末每以半錢許入口中津液嚥下{{*|}} ᄯᅩ 모기〮 브ᅀᅥ〮 마ᄀᆞ〮닐〮 고툐〮ᄃᆡ〮 甘감草초ᇢ〯와 白ᄈᆡᆨ〮礬뻔과〮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半반〮 돈〯 남ᄌᆞ샤 입〮 안해〮 녀허〮셔〮 추〮므로〮 ᄂᆞ리〮오라〮 聖惠方咽喉閉不通 硇砂 馬牙硝{{*|等分}}右細硏令勻用銅筯頭於水中 蘸令濕搵藥末點於咽喉中{{*|}} 모기〮 마가〮 通토ᇰ티〮 아니ᄒᆞ닐〮 硇뇨ᇢ砂상와〮 馬망〯牙ᅌᅡᆼ硝쇼ᇢ 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놋〮졋〮 그〮트로〮 므〮레 저〮져〮 藥약〮ᄋᆞᆯ〮 무텨〮 목 안해〮 디그〮라〮 又方咽喉閉塞口噤雄雀糞細硏每服半錢以溫水調灌{{*|}} ᄯᅩ〮 모기〮 막고〯 입〮 버〯리디〮 몯〯ᄒᆞ닐 수〮새〯 ᄯᅩᆼ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을〮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ᅳ라〮 又方咽喉生穀賊若不急治亦能殺人用針刺破令黑血出後含馬牙硝一小塊子嚥津卽差{{*|}} ᄯᅩ〮 모ᄀᆡ〮穀곡〮賊쪽〮 이〮 나〮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ᄯᅩ〮 能느ᇰ히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 針짐으〮로〯 허러〮 거믄〮 피나게 ᄒᆞ고〮 馬망〮牙ᅌᅡᆼ硝쇼ᇢ ᄒᆞᆫ 져〯근 무저글〮 머구머 추믈 ᄉᆞᆷᄭᅵ면〮 즉재 됻〯ᄂᆞ〮니〮라〮 穀곡賊쪽〮은〮 穀곡〮食씩〮에〮 몯〯내〮ᄑᆡᆫ〮 이사기〮 굳고〮!ᄭᅵ!ᄭᅡ!ᄭᅡᆯᄒᆞᆫ 거시〮니〮 몰〯라 ᄡᆞ〮리〮라〮 머고면〮 목 안히 브ᅀᅥ〮 通토ᇰ티〮 아니〮ᄒᆞ〮ᄂᆞ니〮 일후〮믈 목 안해〮 穀곡賊쪽〮 나다〮 ᄒᆞ〮ᄂᆞ〮니라〮 又方以馬牙硝細硏緜裹半錢含化嚥津以差爲度{{*|}} ᄯᅩ〮 馬망〯牙ᅌᅡᆼ硝쇼ᇢᄅ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半반〮 돈〯ᄋᆞᆯ소오매〮 ᄢᅳ려〮 머구머 노겨〮 춤〮 ᄉᆞᆷᄭᅭ〮ᄃᆡ〮 됴〯ᄒᆞᆯ ᄭᆞ자ᇰ ᄒᆞ라 又方咽喉腫痛語聲不出豉半升以水二大盞煎至一大盞去滓分爲二服相繼稍熱服之令有汗出卽差{{*|}} ᄯᅩ〮 목 브ᅀᅥ 소ᄅᆡ〮 나디〮 아니〮커든〮 젼국 半반〮 되〮ᄅᆞᆯ〮 믈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큰〮 잔애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두〯 服뽁〮애〮 ᄂᆞᆫ화〮 서르 닛우〮 져〯기 덥〯게〮 ᄒᆞ〮야〮 머거〮 ᄯᆞᆷ〮나게〮 ᄒᆞ면〮 곧〮 됻〯ᄂᆞ〮니라〮 壽域神方舌忽脹出口外雞冠上刺血磁盞盛浸舌就嚥下卽縮{{*|}} 혜〮 과글이 부러〮나〮 입〮 밧긔〮 나〮거든〮 ᄃᆞᆯᄀᆡ〮 벼〮츨〮 ᄡᅥᆯ어〮 피〮내〯야 沙상〮잔애〮 담〯고〮 혀를〮 ᄃᆞᆷ가〮셔 ᄉᆞᆷᄭᅵ〮면〮 즉〮재움처〮 드〮ᄂᆞ니라〮 ==骨鯁第十二== 醫方集成治骨鯁入喉 縮砂 甘草{{*|各等分}}右爲末緜裹少許噙之旋旋嚥津久之隨痰出{{*|}} ᄲᅨ〮 모긔〮거〯닐〮 고툐〮ᄃᆡ 縮슉砂상와〮 甘감草초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소오!마〮!ᄆᆡ〮! 져〯기 ᄢᅳ〮려〮 머구〮머 젹젹〮 춤〮 ᄉᆞᆷᄭᅵ〮면〮 오라〮면〮 痰땀 조차〮 나〮ᄂᆞ〮니라〮 又方野紵根洗淨不以多少搗爛如泥每用龍眼大如被雞骨所傷以雞羹化下如被魚骨所傷以魚羹汁化下{{*|}} ᄯᅩ〮 모싯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디호〮ᄃᆡ 니균〮 ᄒᆞᆰᄀᆞ〮티 ᄒᆞ〮야〮 龍료ᇰ眼ᅌᅡᆫ〯만〮 ᄒᆞ니〮ᄅᆞᆯ〮 ᄃᆞᆯ긔〮 ᄲᅧ〮에〮 傷샤ᇰ커든〮 ᄃᆞᆰ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고〮 고깃〮 ᄲᅧ〮에 傷샤ᇰ커든〮 生ᄉᆡᇰ鮮션湯타ᇰ〮ㅅ 즈〮브로〮 ᄂᆞ리〮오라 經驗良方治骨硬不下先嚼白茯苓一錢重次以白礬湯嚥下{{*|}} ᄲᅨ〮 거러〮 ᄂᆞ리〮디〮아닌〮ᄂᆞ닐〮 고툐〮ᄃᆡ〮 몬져白ᄈᆡᆨ〮茯뽁〮苓려ᇰ ᄒᆞᆫ 돈〯ᄋᆞᆯ 십고 버거〮白ᄈᆡᆨ〮礬뻔湯타ᇰ〮으〮로〮 ᄂᆞ리〮오라〮 又方治魚骨用白膠香細細呑下{{*|}} ᄯᅩ〮 믌〮고깃〮 ᄲᅧ〮걸우〮닐〮 고툐〮ᄃᆡ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을〮 젹젹 ᄉᆞᆷᄭᅧ〮 ᄂᆞ리〮오라〮 又方皂角少許吹入鼻{{*|}} ᄯᅩ〮 皂쪼ᇢ〮角각〮을〮 져〯기 곳〮굼긔〮 부러〮 녀흐라 又方口念鸕鶿鸕鶿立愈{{*|}} ᄯᅩ〮 이베〮 鸕롱鶿ᄍᆞᆼ 鸕롱鶿ᄍᆞᆼᄒᆞ〮야〮 念념〮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鸕롱鶿ᄍᆞᆼᄂᆞᆫ〮 가마오〮디라〮 朱氏集驗方治食鯉魚骨硬貫衆不以多少濃煎汁一盞半分三服幷進連服三劑{{*|}} 鯉링〯魚ᅌᅥᆼ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貫관〮衆쥬ᇰ〮을〮 두터이〮 글혀〮 즈〮블〮 ᄒᆞᆫ 잔〮 半반〮ᄋᆞᆯ〮 세〯 服뽁〮애〮 ᄂᆞᆫ화〮 다〯 머구〮ᄃᆡ 닛우〮 세〯 劑쪵〮ᄅᆞᆯ〮 머그〮라〮 又方巧匠取喉鉤將繭剪如錢大用物搥四面令軟以油潤之仍中通一竅先穿上鉤線次穿數珠三五枚令兒正坐開口漸添引數珠挨之到喉覺至繫鉤處乃以向下一推其鉤自下而脫卽向上急出之見蠶錢向下裹定鉤線鬚而出並無所損{{*|}} ᄯᅩ〮 工고ᇰ巧교ᇢ〯ᄒᆞᆫ 匠쨔ᇰ〮ㅅᅀᅵᆫ이〮 아ᄒᆡ〮 모ᄀᆡ〮 건〯 낙〮ᄉᆞᆯ〮 아ᅀᅩ〮ᄃᆡ〮 고티〮ᄅᆞᆯ〮 돈〯ᄀᆞ〮티 ᄇᆞ〮리고〮 네〯 面면〮을〮 ᄯᅮ드〮려 보ᄃᆞ〮랍게〮 ᄒᆞ고〮 기르〮므로〮 저지〮고〮 가온〮ᄃᆡ〮 ᄒᆞᆫ 구무들워〮 몬〮져낛〮긴헤〮 ᄢᅦ〯오〮 버거〮念념〮珠즁 세〯다ᄉᆞᆺ〮 나〯ᄎᆞᆯ〮 ᄢᅦ〯오〮 아ᄒᆡ〮로〮 바ᄅᆞ 아ᇇ고〮 입〮버〯리〮게 코〮 졈〯졈〯 念념〮珠즁를〮 더〮 미러〮 모ᄀᆡ〮 다ᄃᆞᆮ게〮 ᄒᆞ〮야〮 낛〮 ᄆᆡ욘〮 ᄃᆡ〮 니른〮가〮 식브거늘〮 아래〮로〮 ᄒᆞᆫ 번 미〯니 그 낙〮시 제〯 ᄂᆞ려〮 버서〮디〮거늘 즉〮재 우흐〮로 時씽急급〮히〮 내〯오〮 고티〮ᄅᆞᆯ〮 보니〮 아래〮로 낙〮줄〮와〮 낛〮미느〮를〮 ᄢᅳ러〮 나〮 귿〮 헌〯 ᄃᆡ 업〯더라〮 聖惠方治食魚骨鯁以魚網燒灰細硏水調服一錢又方以魚網䨱頭立下{{*|}} 믌〮고기〮 먹다가〮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고깃〮 그〮므를〮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 그〮므를〮 머리〮예〮 두프〮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含水獺骨立出或爪亦得{{*|}} ᄯᅩ〮 水ᄉᆔᆼ〯獺타ᇙ〮의〮 ᄲᅧ〮를〮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 시혹〮 밠〮톱〮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以牛筋水浸細擘以線繫如彈子大持線端呑之入喉至哽處徐徐引之鯁着筋卽出{{*|}} ᄯᅩ〮 ᄉᆈ〯 히〮믈〮 므〮레 ᄃᆞᆷ가〮 ᄀᆞ〮ᄂᆞ리〮 ᄧᆡ〮야〮 실〯로〮 ᄆᆡ요〮ᄃᆡ〮 彈딴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싨〯그〮틀 잡고〮 ᄉᆞᆷᄭᅧ〮 모ᄀᆡ〮 드〮려 ᄲᅧ〮 건〯 ᄃᆡ 니르〮거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ᄃᆞᆼᄀᆡ〮면〯 ᄲᅧ〮 히〮메 바켜〮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以虎糞或狼糞燒灰細硏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ᄯᅩᆼ이〮나〮 시혹〮 일〮희 ᄯᅩᆼ이〮나〮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虎骨或狸骨擣細羅爲散以水調一錢服之{{*|}} ᄯᅩ〮 버〯믜〮 ᄲᅨ〮나〯 시혹 ᄉᆞᆯ긔〮 ᄲᅨ〮나 디허〮 ᄀᆞ〮ᄂᆞ리〮처〮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又方以硇砂半錢口中咀嚼嚥之立下{{*|}} ᄯᅩ〮 硇뇨ᇢ砂상 半반〮 돈〮ᄋᆞᆯ〮 이베〮 시버〮 ᄉᆞᆷᄭᅵ〮면〮 즉〮재 ᄂᆞ리〮ᄂᆞ〮니라〮 又方治誤呑鉤若線猶在手中者莫引之但急以珠璫若薏苡子輩穿貫着線稍稍令推至鉤處小小引之則出{{*|}} ᄯᅩ〮 낙〮ᄉᆞᆯ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ᄒᆞ〮다가〮 긴〮히 소내〮 잇ᄂᆞ닌〮 ᄃᆞᇰᄀᆡ〮디 말〯오〮 ᄲᆞᆯ리〮 구스〮리나〮 율믜나 긴헤〮 ᄢᅦ〯어〮 졈〯졈〯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젹젹 ᄃᆞᇰᄀᆡ〮면〮 나〮ᄂᆞ〮니라〮 又方以琥珀珠着線貫之推令前入至鉤又復推以索引出矣或水精珠亦佳無珠諸堅實物磨令滑作孔用之{{*|}} ᄯᅩ〮琥홍珀ᄑᆡᆨ〮 구스〮를〮 긴헤 ᄢᅦ〮여〮 미러〮 낙새〮 다ᄃᆞᆮ게〮 ᄒᆞ고〮 ᄯᅩ〮 미러〮혀면〮 나〮ᄂᆞ〮니라〮 시혹〮水ᄉᆔᆼ〯精져ᇰ 도〮 ᄯᅩ〮 됴〯ᄒᆞ니 구슬〯 업〯거든〮 구든〮 거슬〮 ᄀᆞ〮라 ᄆᆡᆺᄆᆡᆺ게〮 ᄒᆞ〮야〮 구무 들워〮 ᄡᅳ〮라〮 又方治誤呑針以上好磁石如小彈子大含之卽出{{*|}} ᄯᅩ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됴〯ᄒᆞᆫ指징〯南남石쎡〮 이〮 져〯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 머구〮머?시?면〮 즉〮재 나ᄂᆞ니라〮 經驗秘方治誤呑錢百部根四兩酒一升浸一宿溫作二服{{*|}} 돈〯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百ᄇᆡᆨ〮部뽕〯根ᄀᆞᆫ 넉〯 랴ᇰᄋᆞᆯ〮 술 ᄒᆞᆫ 되〮예〮 ᄒᆞᄅᆞᆺ바〮ᄆᆞᆯ〮 ᄃᆞᆷ가〮 ᄃᆞ시 ᄒᆞ〮야〮 두〯 버네〮 머그〮라〮 又方服淸蜜二盞{{*|}} ᄯᅩ〮 淸쳐ᇰ蜜미ᇙ〮 두〯 잔〮ᄋᆞᆯ〮 머그〮라 又方濃煎艾湯一二盞飮之{{*|}}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혀〮 ᄒᆞᆫ두〯 자〮ᄂᆞᆯ 머그〮라〮 又方治誤呑針釘鉤子魚骨雜物多食肥羊脂肉及諸肉必自裹出{{*|}} ᄯᅩ〮 바ᄂᆞᆯ〮와〮 몯〮과〮 낛〮과〮 고깃 ᄲᅧ〮와〮 雜짭〮거슬〮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진 羊야ᇰᄋᆡ〮 기름〮과〮 고기〮와〮 여러〮 가짓〮 고기〮ᄅᆞᆯ〮 만〯히 머그〮면〮 절로〮 ᄢᅳ려〮 나〮ᄂᆞ〮니라〮 又方木炭爲細末每服一錢冷水調下頓服自然裹於大便中出{{*|}} ᄯᅩ〮숫글〮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ᄎᆞᆫ〮므〮레 프러 다〯 머그면〮 自ᄍᆞᆼ〮然ᅀᅧᆫ히〮 大땡〮便뼌에〮 ᄢᅳ려〮 나〮ᄂᆞ〮니라〮 衛生易簡方治一切骨鯁用朴硝噙化{{*|}} 一ᅙᅵᇙ〮切촁〮ㅅ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朴팍硝쇼ᇢᄅᆞᆯ〮 머구〮머 노기〮라〮 又方用雞蘇朴硝等分如彈子大仰臥噙化三五丸卽愈{{*|}} ᄯᅩ〮雞곙蘇송와〮 朴팍〮硝쇼ᇢᄅ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彈딴子ᄌᆞᆼ〯만〮 ᄒᆞ닐〮졋바〮누〮어〮 세〯 다ᄉᆞᆺ〮 버늘〮 머구〮머 노기〮?면〮? 즉〮재 됻〯ᄂᆞ〮니라〮 壽域神方治諸骨鯁用不蛀皂角一片槌碎作四截銚內炒令焦黑酸米醋一盞澆之用碗覆一茶久取出放溫漱嚥下{{*|}} 여러〮 가짓〮 ᄲᅧ〮 걸우〮닐〮 고툐〮ᄃᆡ 벌에〮 먹디〮 아니〮ᄒᆞᆫ 皂쪼ᇢ〯角각〮 ᄒᆞᆫ 편〮을〮 ᄯᅮ드〮려 네〯헤 그처〮 새용〮 안해〮 봇가〮 검〯게 ᄒᆞ고〮 싄 초 ᄒᆞᆫ 잔〮ᄋᆞᆯ〮 븟고〮 보ᅀᆞ로 두퍼〮 ᄒᆞᆫ 차 다릴〮 ᄉᆞᅀᅵ〮만〮 커든〮 내〯야〮 ᄃᆞ시 ᄒᆞ〮야〮 야ᇰ〯지ᄒᆞ〮야〮 ᄉᆞᆷᄭᅵ〮라〮 又方用覆盆子根取淨洗釅醋瓦礶煎濃汁用紙盖礶口留一孔令患人開口置孔熏一二時久骨自下{{*|}} ᄯᅩ〮覆폭〮盆뽄子ᄌᆞᆼ〯ㅅ 불휘〮ᄅᆞᆯ〮 조〮히 시서〮 초로〮 딜湯타ᇰ〮礶관〮에〮 즙〮이〮 두〮텁〮게〮 글히〮고〮 죠ᄒᆡ〮로〮 湯타ᇰ〮礶관〮 이〮블〮 막고〮 ᄒᆞᆫ 굼글〮 두〮어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로 입〮 버〯려 굼긔〮 다혀〮 ᄒᆞᆫ 두〯 時씽刻큭을〮 쐬〯면〮 ᄲᅨ〮 저〯 나〮ᄂᆞ〮니라〮 又方用餳糖再熬化丸如雞子黃大微嚼猛嚥呑之不下再作大丸呑妙{{*|}} ᄯᅩ〮 여〮슬 두〯 번 ᄉᆞ〮라 ᄃᆞᆯᄀᆡ〮앐〮 누른〮 것만〮 케 비븨〮여 자ᇝ〯간 시버〮 ᄆᆡ이〮 ᄉᆞᆷᄭᅭ〮ᄃᆡ ᄂᆞ리〮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크〮게 비븨〮여〮 머구〮미 됴〯ᄒᆞ〮니라〮 又方以魚骨安於頭上立愈{{*|}} ᄯᅩ〮 믌〮고깃〮 ᄲᅧ〮ᄅᆞᆯ〮 머리〮예 연ᄌ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仍取所餘骨左右手反復擲背後立出{{*|}} ᄯᅩ〮 나ᄆᆞᆫ〮 ᄲᅧ〮를〮 두〯 녁 소〮ᄂᆞ로〮 서르 드ᇰ 뒤〯헤 더디〮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解衣帶眼看下部不下卽出{{*|}} ᄯᅩ〮 옷〮 밧고〮 미틀〮 보면〮 ᄂᆞ리〮디 아니〮ᄒᆞ면〮 즉〮자히〮 나〮ᄂᆞ〮니라〮 又方取鯉魚鱗皮燒灰作末以水調服卽出不出再作{{*|}} ᄯᅩ〮 鯉링〯魚ᅌᅥᆼㅅ 비늘〮와〮 가ᄎᆞᆯ〮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므〮레 프〮러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 나디〮 아니〮커든〮 다시〮 ᄒᆞ라〮 又方用象牙爲末水調一錢服亦治魚刺{{*|}} ᄯᅩ〮象쌰ᇰ〯牙ᅌᅡ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돈〯ᄋᆞᆯ〮 므〮레 프〮러 머그〮라〮 ᄯᅩ〮 고깃〮ᄲᅧ〮 ᄣᅵᆯ인〮 ᄃᆡ 고티〮ᄂᆞ〮니라〮 又方用鸕鶿骨爲末湯調服之得呑其嗉最效{{*|}} ᄯᅩ〮 鸕롱鶿ᄍᆞᆼ ᄲᅧ〮를〮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머그〮라〮 그 부릴 어〯더 머그〮면〮 ᄆᆞᆺ〮 됴〯ᄒᆞ〮니라〮 又方治誤呑錢用慈菰搗半爛呑之移時其錢卽化一用濃煎艾汁亦可冬葵根煮汁亦可{{*|}} ᄯᅩ〮 그르 돈〯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慈ᄍᆞᆼ菰공ᄅᆞᆯ〮 디허〮 半반〮만 닉거든 ᄉᆞᆷᄭᅵ〮라〮 時씽刻큭이 올ᄆᆞ〮면 그 돈〯이 즉〮재 녹ᄂᆞ니〮라〮 ᄯᅩ〮 ᄡᅮ〮글 두터이〮 글횬〮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冬도ᇰ葵ᄁᆔᆼ 根ᄀᆞᆫ 글휸〮 汁집〮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再服卽出{{*|}} ᄯᅩ〮 金금銀ᅌᅳᆫ 곳〮 골〮회〮 그르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水ᄉᆔᆼ〯銀ᅌᅳᆫ 半반〮 兩랴ᇰ〯을〮 머그〮라〮 다시〮 머그〮면〮 즉〮재 나〮ᄂᆞ〮니라〮 又方治小兒誤呑針用磁石如棗核大磨令光鑽作竅絲穿令含針自出{{*|}} ᄯᅩ〮 아ᄒᆡ〮 그르 바ᄂᆞᆯ〮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指징〯南남石쎡〮이〮 大땡〮棗조ᇢ〯ㅅ ᄌᆞᅀᆞ〮만 ᄒᆞ닐〮 ᄀᆞ〮라 빗〮나게〮 ᄒᆞ고〮 구무 들워〮 실〯로 ᄢᅦ여〮 머굼〮게〮 ᄒᆞ면〮 바ᄂᆞ〮리 제〯 나〮ᄂᆞ〮니라〮 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 ᄯᅩ〮 그르 골회〮 ᄉᆞᆷᄭᅵ〮닐〮 고툐〮ᄃᆡ 거유〮 ᄂᆞ〮랫짓〮 두〯ᅀᅥ흘〮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다ᇰ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ᄒᆞ〮니라〮 ==脫陽陰縮第十三== 經驗良方其證或因大吐大瀉之後四肢逆冷元氣不接不醒人事或傷寒新瘥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喘冷汗自出亦是脫陽證湏臾不救先用葱白數莖炒令熱熨臍下次用 附子{{*|一枚重十錢許剉作八片}}白朮 乾薑{{*|各半兩}}木香{{*|一分}}已上四味各硏細水二椀煎至八分椀去滓放冷灌服湏臾又進一服合滓倂服{{*|}} 그 證지ᇰ〮이 시혹〮 하〮 吐통〯커나〮 하〮 즈칀〮 後ᅘᅮᇢ〯에 四ᄉᆞᆼ〮肢징 ᄎᆞ〮고元ᅌᅯᆫ氣킝〮 닛〯디 아니〮ᄒᆞ〮야〮 人ᅀᅵᆫ事ᄊᆞᆼ〮ᄅᆞᆯ〮 ᄎᆞ〮리디〮 몯〯ᄒᆞ〮거나〮 시혹〮傷샤ᇰ寒ᅘᅡᆫ 이〮 ᄀᆞᆺ 됴〯커든〮 그르 겨〯집과〮 사괴〮면〮 그 證지ᇰ〮이〮ᄇᆡᆺ〮기슬기 ᄀᆞ자ᇰ〮 알ᄑᆞ고〯 外ᅌᅬᆼ〮腎씬〯이〮 움치〮들〮오 ᄂᆞ치〮 검〯고〮 氣킝〮分분이〮 헐헐ᄒᆞ고〮 ᄎᆞᆫ〮 ᄯᆞ〮미 흐르ᄂᆞ니 ᄯᅩ〮 이〮 脫똬ᇙ〮陽야ᇰㅅ證지ᇰ〮이〮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 몬져 파〮 두〯ᅀᅥ 줄기〮ᄅᆞᆯ〮 봇가〮 덥〯게 ᄒᆞ〮야〮 ᄇᆡᆺ복 아래〮ᄅ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버거〮 附뿡〮子ᄌᆞᆼ〯 ᄒᆞᆫ 낫〯 므〮긔 열〮 돈〯 남ᄌᆞᆺᄒᆞ닐〮 사ᄒᆞ라 여듧〮 片편 ᄆᆡᇰᄀᆞᆯ오〮 白ᄈᆡᆨ朮뜌ᇙ〮와〮 乾간薑가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량〯과〮木목〮香햐ᇰ ᄒᆞᆫ 分분과〮 네〯 가짓〮 마ᄉᆞᆯ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믈〮 두〯 보ᅀ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ᄎᆡ와〮 브ᅀᅳ라〮 이ᅀᅳᆨ고〮 ᄯᅩ〮 ᄒᆞᆫ 服뽁〮ᄋᆞᆯ〮 머기〮고〮 滓ᄌᆡᆼ〮 조쳐〮 다〯 머기〮라〮 如無前藥用桂枝二兩用好酒二升煎至一升候溫分作二服灌之{{*|}} ᄒᆞ〮다!카!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桂ᄀᆒᆼ〮枝징〮 두〯 兩랴ᇰ〯ᄋᆞᆯ〮 됴〯ᄒᆞᆫ 술 두〯 되〮로 글혀〮 ᄒᆞᆫ 되〮예〮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두〯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라〮 又無桂枝用葱白連鬚三七莖細剉沙盆內硏細用酒五升煮至二升分作三服灌之陽氣卽回先用炒塩熨臍下氣海勿令氣冷{{*|}} ᄯᅩ〮 桂ᄀᆒᆼ〮枝징 업〯거든〮 파〮ᄒᆞᆯ 불휘〮 조쳐〮 세〯닐굽〮 줄기〮ᄅ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라〮 沙상盆뽄에〮 ᄀᆞ〮ᄂᆞ리〮 ᄀᆞ〮라 술 닷 되〮로〮 글혀〮 두〯 되〮예〮 니르〮거든〮 세〯 服뽁〮애〮 ᄂᆞᆫ화〮 브ᅀᅳ면〮 陽야ᇰ氣킝〮 즉〮재 도〮라〮오〮ᄂᆞ니〮 몬져 봇ᄀᆞᆫ〮 소고ᄆᆞ〮로〮 臍쪵下ᅘᅡᆼ〯와〮 氣킝〮海ᄒ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야〮 氣킝〮分분이〮 ᄎᆞ〮디 아니〮케〮 홀〮디〮니라〮 又無葱白用生薑二七寸亦好依前法服{{*|}} ᄯᅩ〮 파〮 업〯거든〮 生ᄉᆡᇰ薑가ᇰ !드!두〯!닐굽〮 寸촌〮도〮 ᄯᅩ〮 됴〯ᄒᆞ니〮 알ᄑᆡᆺ〯 法법〮을〮 브터〮 머기〮라〮 聖惠方治風入腹攻五藏拘急不得轉側陰縮手足厥冷腹中㽱痛宜服赤芍藥散赤芍藥{{*|一兩}}川烏頭{{*|三兩炮製去皮臍}}桂心 甘草炙微赤剉防風{{*|去蘆頭}}芎窮{{*|各一兩}}右擣麤羅爲散每服三錢以水一中盞入生薑半分棗二枚煎至六分去滓不計時候稍熱服{{*|}} ᄇᆞᄅᆞ〮미 ᄇᆡ〮예 드〮러 五ᅌᅩᆼ〯藏짜ᇰ〮ᄋᆞᆯ〮 보차〮 ᄇᆞᆯ라〮 움즈기〮디 몯〯고〮 陰ᅙᅳᆷ이〮 움처〮 들〮오 손〮발〮 ᄎᆞ〮고 ᄇᆡ〮 안〮히 알ᄑᆞ거든〮 赤쳑〮芍쟉〮藥약〮散산〮을〮 머골〮디니〮赤쳑〮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과〮 川ᄌᆑᆫ烏ᅙᅩᆼ頭뚜ᇢ 세〯 兩랴ᇰ〯을〮 炮뽀ᇢᄒᆞ〮야〮 갓과〮 ᄇᆡᆺ〮보ᄀᆞᆯ〮 앗〯고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어 져〯기 븕게〮 ᄒᆞ〮야〮 사ᄒᆞᆯ〮오 防파ᇰ風봉을〮 머리〮 버히〮고芎구ᇰ窮꾸ᇰ과〮 各각〮 ᄒᆞᆫ 兩랴ᇰ〯을〮 디〮허〮 麤총케〮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中듀ᇰㅅ잔〮으로〮 生ᄉᆡᇰ薑가ᇰ 半반〮 分분과〮 大땡〮棗초ᇢ〮 두〯 나〯ᄎᆞᆯ 드〮려 글효〮ᄃᆡ 六륙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져〯기 덥〯게 ᄒᆞ〮야〮 머기〮라〮 聖濟緫錄治陰疝腫縮疼痛 狼毒{{*|炙二兩}}防葵{{*|炒}}附子{{*|炮裂去皮臍各一兩}}右擣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十丸溫酒下空心日午臨臥服{{*|}} 陰ᅙᅳᆷ疝산ᄒᆞ〮야〮 븟고〮 움처〮 알ᄑᆞ닐〮 고툐〮ᄃᆡ狼라ᇰ毒독〮 구우〮니 두〯 兩랴ᇰ〯과〮防파ᇰ葵ᄁᆔᆼ 봇고니와〮 附뿡〮子ᄌᆞᆼ〯ᄅᆞᆯ〮 구어 것과〮 ᄇᆡᆺ복 아ᅀᅩ〮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혼〮 ᄢᅮᆯ〮로〮 丸ᅘᅪᆫᄋᆞᆯ〮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 만〮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 열〮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수레〮 ᄂᆞ리〮오ᄃᆡ〮 空코ᇰ心심과〮 낫〮과 누을 제와〮 머그〮라〮 又方雞趐左右俱用不限多少燒灰右細硏爲散每服二錢匕溫酒調下不拘時{{*|}} ᄯᅩ〮 ᄃᆞᆯᄀᆡ〮 ᄂᆞ래ᄅᆞᆯ〯 두〯 녀글〮 다〯ᄡᅮ〮ᄃᆡ 하며〮 져〯구믈〮 限ᅌᆞᆫ〯티〮 말오〮 ᄌᆡ〮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ᄂᆞ리〮오ᄃᆡ〮 時씽刻큭〮에〮 븓들이〮디 말〯라〮 又方黃蓮{{*|去鬚}}熟艾{{*|炙}}杏人{{*|去皮尖別硏各半兩}}右擣硏羅爲末鍊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塩湯下空心服{{*|}} ᄯᅩ黃ᅘᅪᇰ蓮련을〮 거웃〮 앗〮고〮 니근〮 ᄡᅮ〮글 브〮레 ᄧᅬ〯오〮 杏ᅘᆡᇰ〯仁ᅀᅵᆫ을〮 것과〮 부〯리ᄅᆞᆯ〮 앗〯고〮 各각〮別벼ᇙ〮히〮 ᄀᆞ〮라 各각〮 半반〮 兩랴ᇰ〯ᄋᆞᆯ〮 디허〮 ᄀᆞ〮라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ᄒᆞᆫ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게〮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塩염湯타ᇰ〮ᄋᆞ〮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硇砂{{*|硏}}木香{{*|各半兩}}棟實{{*|去核炒}}茴香子{{*|炒}}京三稜{{*|炮各一兩}}右五味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空心酒下{{*|}} ᄯᅩ〮 硇砂상ᄅᆞᆯ〮 ᄀᆞᆯ오 木목〮香햐ᇰ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棟도ᇰ實씨ᇙ〮을〮 ᄌᆞᅀᆞ〮 아!ᅀᅵ〮!ᅀᅡ〮! 봇고〮 茴ᅘᅬᆼ香햐ᇰ ᄡᅵ〮를〮 봇고 京겨ᇰ三삼稜르ᇰ을〮 炮뽀ᇢᄒᆞ야〮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鍊련〮!훈〮!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空코ᇰ心심에〮 술로〮 머그〮라〮 又方槐子{{*|炒一兩}}擣羅爲末煉蜜丸如梧桐子大每服二十丸溫酒下空心服{{*|}} ᄯᅩ〮槐ᅘᅬᆼ子ᄌᆞᆼ〯ᄅᆞᆯ〮 보ᄭᅡ〮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디허〮 처〮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통子ᄌᆞᆼ〯만〮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스〮믈 丸ᅘᅪᆫ곰〮 ᄃᆞᄉᆞᆫ 술로〮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萵苣{{*|切半斤}}皂莢{{*|剉碎三挺}}蜀椒{{*|去目及閉口者炒出汗一兩}}右少用水煮令相得不可太稀乘熱用布三兩重裹熨腫處冷卽易頻熨自消{{*|}} ᄯᅩ〮 부루 사ᄒᆞ〮로〮니〮 半반〮 斤근과〮 皂쪼ᇢ〯莢겹〮 사ᄒᆞ〮라 ᄯᅮ드〮려 세〯 挺텨ᇰ〯과〮川ᄌᆑᆫ椒죠ᇢ 눈〮과〮 입〮 마ᄀᆞ〮닐〮 앗〯고〮 봇가〮 ᄯᆞᆷ〮 내〯요니〮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므〮를 져〯고매〮 ᄒᆞ〮야〮 글혀〮 서르 맛게〮 ᄒᆞ고〮 너무 젹〯게〮 마롤〮디니〮 더운〮 저긔〮 뵈〮로 두〯ᅀᅥ ᄇᆞᆯ〮 ᄢᅳ려〮 브ᅀᅳᆫ ᄃᆡ〮 熨ᅙᅮᇙ〮호〮ᄃᆡ ᄎᆞ〮거〮든〮 ᄀᆞᆯ라〮 ᄌᆞ조〮 熨ᅙᅮᇙ〮ᄒᆞ면〮 절로〮 ᄂᆞᆺᄂᆞ니〮라〮 又方雄黃{{*|硏}}甘草{{*|各一兩}}礬石{{*|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ᄋᆞᆯ〮 ᄀᆞᆯ〮오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ᄀᆞ〮라 두〯 兩랴ᇰ〯과〮 ᄀ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더운〮믈〮 닷 되〮예〮 글혀〮 브ᅀᅳᆫ ᄃᆡ〮 시수〮ᄃᆡ 良랴ᇰ久고ᇢ〯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車前子不拘多少擣羅爲末湯調塗腫處{{*|}} ᄯᅩ〮車챵前쪈子ᄌᆞᆼ〮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더운〮 므〮레 프〮러 브ᅀᅳᆫ ᄃᆡ〮 ᄇᆞᄅᆞ라〮 又方蔓菁根不拘多少剉碎擣羅爲散溫水調塗腫處或以絹帛傅之以差爲度{{*|}} ᄯᅩ〮 댓무ᅀᅮᆺ 불휘〮ᄅᆞᆯ〮 사ᄒᆞ〮라 ᄯᅮ드〮려 디허〮 처〮 ᄃᆞᄉᆞᆫ 므〮레 프〮러 브ᅀᅩᆫ ᄃᆡ〮 ᄇᆞᄅᆞ라〮 시혹〮 기〯브로〮 브툐〮ᄃᆡ 됴〯ᄒᆞᆯ ᄀᆞ자ᇰ ᄒᆞ라〮 ==吐血下血第十四<sub>齒閒出血九竅出血附</sub>== 經驗良方云其證皆因內損或酒色勞損或心肺脉破血氣妄行血如湧泉口鼻俱出須臾不救 側栢葉{{*|蒸乾}}人參{{*|焙乾各一兩}}右二味細末每服二錢入飛羅麪二錢新汲井花水調如稀糊啜服血如湧泉不過二服卽止{{*|}} 그 證지ᇰ〮이〮 다〯 안〮히 損손〯호〮ᄆᆞᆯ 因ᅙᅵᆫ커나〮 시혹〮 酒쥬ᇢ〯色ᄉᆡᆨ〮애〮잇버〮 損손〯커나〮 시혹心심肺폥〮脉ᄆᆡᆨ〮 이〮 ᄒᆞ〮야디〮여 血ᄒᆑᇙ〮氣킝 간대〮로〮 行ᅘᆡᇰᄒᆞ〮야〮 피〮 믈〮ᄉᆡᆷ〯ᄃᆞᆺ〮 ᄒᆞ〮야 입〮과〮 고〮콰애〮 다〯 나〮ᄂᆞ니〮 아니〮한 ᄉᆞᅀᅵ〮예 救구ᇢ〮티〮 몯〯ᄒᆞ〮ᄂᆞ니〮側즉栢ᄇᆡᆨ〮 니〮플〮ᄠᅧ〮 ᄆᆞᆯ외〮오〮 人ᅀᅵᆫ參ᄉᆞᆷᄋᆞᆯ〮 焙ᄈᆡᆼ〮乾간호〮니 各각〮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ᄒᆞ〮야〮 飛빙羅랑麪면〮 두〯 돈〯 드〮려 ᄀᆞᆺ 기룬〮 井져ᇰ〯花황水ᄉᆔᆼ〯예〮 프〮로ᄃᆡ〮 누근〮 플〮ᄀᆞ〮티 ᄒᆞ〮야〮 머그〮라〮 피〮 믈〮 솟ᄃᆞᆺ〮 하〮야도〮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즉〮재 긋ᄂᆞ니〮라〮 如無前藥用荊芥一握燒過盖於地上要出火毒細硏如粉以陳米飮調下三錢許與服不過二服效{{*|}} ᄒᆞ〮다가〮 알ᄑᆡᆺ〮 藥약〮이〮 업〯거든〮荊혀ᇰ〮芥갱〯 ᄒᆞᆫ 우후〮믈 ᄉᆞ〮라 ᄯᅡ해〮 두퍼〮火황〯毒독〮 내〯오 ᄀᆞ〮ᄂᆞ리〮 粉분〮ᄀᆞ〮티 ᄀᆞ〮라〮 무근〮 ᄡᆞᆯ 글흔〮 므〮레 프〮러 세〮 돈〯 남ᄌᆞ기 머기〮면〮 두〯 服뽁〮애〮 넘〯디〮 아니〮ᄒᆞ야셔〮 됻〯ᄂᆞ〮니라〮 又無荊芥用釜底墨刮下細硏如粉每服三錢濃米飮調下連進二三服鼻衄一字吹入鼻中立效{{*|}} ᄯᅩ〮 荊혀ᇰ芥갱〮 업〯거든〮 가마〮 미틧〮 검듸여ᇰ을〮 ᄀᆞᆯ〮가〮 ᄀᆞ〮ᄂᆞ리〮 紛분〮ᄀᆞ〮티 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세〯 돈〯곰〮 두터이〮 글힌 ᄡᆞᆳ〮므〮레 프〮러 닛우〮 두〯ᅀᅥ 服뽁〮을〮 머기〮라〯 고해피〮 흐르거든〮 ᄒᆞᆫ 字ᄍᆞᆼ〮ᄅᆞᆯ〯 곳〮굼긔〮 블〯면〮 즉〮재 됴〯ᄒᆞ〮리라〮 又方人有九竅四肢指歧閒皆出血此暴驚所致勿令患人知以井花水猛噀其面{{*|}} ᄯᅩ 사〯ᄅᆞ미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 가락 ᄉᆞᅀᅵ〮예 다〯 피나〮ᄆᆞᆫ 이ᄂᆞᆫ 과ᄀᆞᆯ이 놀〮란 다시〮니〮 病뼈ᇰ〮ᄒᆞᆫ 사〯ᄅᆞᄆᆞᆯ〮 알외〮디〮 말〯오〮 井져ᇰ〮花황水ᄉᆔᆼ〯로〮 그 ᄂᆞᄎᆡ〮 ᄆᆡ이〮 ᄲᅮ모라 又方鼻口中出血不止用赤馬糞燒灰細末溫酒調下一錢{{*|}} ᄯᅩ〮 고〮콰 이베〮 피〮나고〮 긋디 아니〮커든〮 블근〮 ᄆᆞᆯᄯᅩᆼᄋᆞᆯ〮 ᄌᆡ〮 ᄉᆞ〮라 細솅〯末마ᇙ〮ᄒᆞ〮야 ᄃᆞᄉᆞᆫ 수레〮 프〮러 ᄒᆞᆫ 돈〯을〮 머그〮라〮 經驗秘方鼻衄方用龍骨爲末以筆管吹半錢鼻中九竅出血皆可用又隨衄左右以新水洗足又以左撚紙索子繫手四肢呪曰血神住立止又張弓絃向上令病人仰臥枕絃放四肢如常臥{{*|}} 고햇〮피〮 고티ᄂᆞᆫ 法법〮에龍료ᇰ骨고ᇙ 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붇〮ᄌᆞᆯ오〮로 半반〮 돈〯ᄋᆞᆯ 곳〮굼긔〮 불〯라 아홉〯 굼긔〮 피〮나〮거든〮 다〯 어루 ᄡᅳ〮리라 ᄯᅩ〮 피〮의〮 왼〯녁 올〮ᄒᆞᆫ녀〮글〮 조처〮 새〮 믈〮로 발 싯고〮 ᄯᅩ 외오〮 ᄭᅩᆫ〮 죠ᄒᆡ〮 노ᄒᆞ〮로〮 소ᇇ〮 네〯 가라ᄀᆞᆯ〮 ᄆᆡ오〮 呪쥬ᇢ〯ᄒᆞ〮야〮 닐오〮ᄃᆡ 血ᄒᆑᇙ〮神씬은〮 그치〮라〮 ᄒᆞ면〮 즉〮재 긋ᄂᆞ니〮라 ᄯᅩ〮 홠시우〮를〮지허〮 우흘〮 向햐ᇰ〯ᄒᆞ〮야 노코〮 病뼈ᇰ〮ᄒᆞᆫ 사〯ᄅᆞ미〮 졋〮바〮디〮여 누워〮 홠시우〮를〮 볘〯오 四ᄉᆞᆼ肢징ᄅᆞᆯ 펴〮 샹녜〮 누움〮 ᄀᆞᆮ〮게〮 ᄒᆞ라〮 又灸項後髮際兩筋閒宛宛中{{*|}} ᄯᅩ〮 목 뒷〮髮바ᇙ〮際졩 ㅅ 두〯 히ᇝ〮 ᄉᆞᅀᅵᆺ〮 우믁ᄒᆞᆫ ᄃᆡᆯ〮 ᄯᅳ〮라〮 澹寮方茜根散治鼻衄終日不止心神煩悶 茜根 黃芩 側栢葉 阿膠{{*|蚌粉炒}}生地黃{{*|各一兩}}甘草{{*|炙半兩}}右㕮咀每服四錢水一盞半姜三片煎至八分去滓溫服不拘時{{*|}} 茜쳔〮根ᄀᆞᆫ散산은〮 고해〮피져므〮ᄃᆞ록〮 긋디〮 아니〮ᄒᆞ〮야 ᄆᆞᅀᆞ미〮 닶〮가오〮닐〮 고티ᄂᆞ니〮 茜쳔〮根ᄀᆞᆫ 과〮黃ᅘᅪᇰ芩끔과〮 側즉〮栢ᄇᆡᆨ〮 닙〮과〮 阿ᅙᅡᆼ膠교ᇢᄅᆞᆯᄉᆞᄒᆡ에〮 봇고〮니〮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ᄅᆞᆯ 구우니 半반〮 兩랴ᇰ〯ᄋ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네〮 돈〮곰〮 ᄒᆞ〮야 믈〮 ᄒᆞᆫ 잔〮 半반〮과〮 生ᄉᆡᇰ薑가ᇰ 세〮 片편ᄋᆞ〮로 글〮혀〮 여듧〮 分분에〮 ?니?르〮거든〮 滓ᄌᆡᆼ〮 앗〮고〮 ᄃᆞ시〮 ᄒᆞ야〮 머교ᄃᆡ 時씽節져ᇙ을〮 븓들이〮디 말〯라〮 衛生簡易方九竅出血小薊一握搗汁酒半盞和頓服如無靑者以乾薊末冷水調三錢匕服{{*|}} 아홉〮 굼긔〮 피〮나〮거든〮 小쇼ᇢ〯薊곙〮 ᄒᆞᆫ 우후〮믈 디허 汁집〮 내〯야〮 술 半반〮 잔애〮 프〮러 다〯 머그라 ᄒᆞ〮다가〮 프르〮니 업거든〮 ᄆᆞᄅᆞᆫ 薊곙〮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ᄎᆞᆫ므〮레 세〯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暴下血用蒜五六枚去皮入豆豉硏爲膏如桐子大米飮下五六十丸無不愈者{{*|}} ᄯᅩ〮 과〮ᄀᆞᆯ이〮 下ᅘᅡᆼ〯血혀ᇙ〮 ᄒᆞ릴〮 고툐〮ᄃᆡ 마ᄂᆞᆯ〮 대〯엿 나〯ᄎᆞᆯ〮 거플 밧기〮고〮 젼구〮글〮 드〮러〮 ᄀᆞ〮라 골 ᄆᆡᇰ〮ᄀᆞ〮라〮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ᄒᆞ〮야 ᄡᆞᆯ〮 글힌 므〮레 쉰〮 여ᄉᆔᆫ〯 丸ᅘᅪᆫ을〮 머그〮면〮 됴〯티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又方用赤小豆一升搗碎水三升絞汁飮之{{*|}} ᄯᅩ〮赤쳑〮小쇼ᇢ〮豆또ᇢ〮 ᄒᆞᆫ 되〮ᄅᆞᆯ〮 디허〮 ᄇᆞᆺ아〮 믈〮 서〯 되〮예〮 프〮러〮 즈〮블ᄲᅡ〮 머그〮라〮 壽域神方治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 小쇼ᇢ〯便뼌에 下ᅘᅡᆼ〮血혀ᇙ〮이〮 긋디 아니〮커든〮酸솬漿쟈ᇰ草초ᇢ〯 ᄅᆞᆯ〮 드〮러〮 自ᄍᆞᆼ〮然ᅀᅧᆫ汁집〮을〮 ᄲᅡ〮 머그〮라〮 酸솬漿쟈ᇰ은〮 ᄭᅪ리〮라〮 朱氏集驗方一金散治鼻衄出血過多昏冒欲死諸藥不效大蒜硏左鼻貼左脚右鼻貼右脚心兩鼻貼兩脚心{{*|}} 一ᅙᅵᇙ〮金금散산〮 은〮 고해〮피〮 나〯미 너무 하〮 어〮즐ᄒᆞ〮야〮 주거〮 가〮ᄂᆞ니〮 여러〮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닐〮 고티〮ᄂᆞ니〮 큰〮 마ᄂᆞ〮ᄅᆞᆯ〮 ᄀᆞ〮라 왼〯녁 고〮히어든〮 왼〮녁 밠〮바다ᇰ애〮 브티〮고〮 올〮ᄒᆞᆫ녁 고〮히어든〮 올〮ᄒᆞᆫ녁 밠〮바다〮ᅌᅢ 브티〮고〮 두〯 고〮히어든〮 두〯 밠〮바다〮ᅌᅢ 브티〮라 又方齒縫出血不止他藥不能治之者塩主之{{*|}} ᄯᅩ〮닛〮ᄢᅵ〮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다ᄅᆞᆫ 藥약〮이〮 고티〮디〮 몯〯ᄒᆞ〮ᄂᆞ닌 소고미〮 主즁〯ᄒᆞ니〮라 聖惠方治九竅四肢指歧閒出血方 生地黃{{*|一兩細切}}蒲黃{{*|半兩}}靑竹茹半兩 右以水一大盞煎至六分去滓每於食後溫服{{*|}} 아홉〮 구무와〮 四ᄉᆞᆼ〮肢징ㅅ가락 ᄉᆞ〮ᅀᅵ〮예 피〮나〮ᄂ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生ᄉᆡᇰ地띵〮黃ᅘᅪᇰ ᄒᆞᆫ 兩!라ᇰ〮!랴ᇰ〯!ᄋᆞᆯ〮 ᄀᆞ〮ᄂᆞ리〮 사ᄒᆞᆯ〮오〮 蒲뽕黃ᅘᅪᇰ 半반〮 兩랴ᇰ〯과〮 프른〮 댓거프를〮 갈〮로 ᄀᆞᆯ가〮 半반〮 兩랴ᇰ〯ᄋᆞᆯ〮 믈〮 ᄒᆞᆫ 큰〮 잔〮ᄋᆞ로〮 글혀〯 여슷〮 分분에〮 니르〮거든〮 즛의 앗〯고〮 食씩〮後ᅘᅮᇢ〯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라〮 又方吐血及鼻衄不止烏賊魚骨搗細羅爲散不計時以淸粥飮調下二錢{{*|}} ᄯᅩ〮吐통〯血ᄒᆑᇙ〮와〮 고해〮피〮 긋디〮 아니〮커든〮 烏ᅙᅩᆼ賊쯕〮魚!ᅌᅵᆼ!ᅌᅥᆼ! ᄲᅧ를〮 디허〮 ᄀᆞ〮ᄂᆞ리〮 처〮 時씽刻큭〮 혜〯디〮 말〯오 粥쥭〯 므〮레 두〯 돈〯곰〮 프〮러 머그〮라〮 又方鼻衄經日夜不止用乾姜削如蓮子大塞鼻中卽止{{*|}} ᄯᅩ〮 고해〮 피〮 밤〮나〮ᄌᆞᆯ 디〯내〮요ᄃᆡ〮 긋디〮 아니〮커든〮 乾간姜가ᇰᄋᆞᆯ〮 蓮련子ᄌᆞᆼ〯 만〮 케〮 갓가〮 곳〮굼긔〮 마ᄀᆞ〮면〮 곧〮 긋ᄂᆞ니〮라〮 又方濃硏好墨點鼻中立止{{*|}} ᄯᅩ〮 됴〯ᄒᆞᆫ墨믁〮 을〮 두터이〯 ᄀᆞ〮라 곳〮굼긔〮 디그〮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牙齒縫忽然出血 當歸散 當歸 桂心{{*|各半兩}}白凡{{*|一兩燒令汁盡}}甘草{{*|半兩}}右件藥擣麤羅分爲三度用每度以漿水二大盞煎至一盞去滓熱含冷吐{{*|}} ᄯᅩ〮 닛〮ᄢᅵ〮메 忽호ᇙ〮然ᅀᅧᆫ히〯 피〮나〮거든〮 當다ᇰ歸귕와〮 桂ᄀᆒᆼ〮心심ᄋᆞᆯ〮 各각〮 半반〮 兩랴ᇰ〯과〮 白ᄈᆡᆨ〮礬뻔 ᄒᆞᆫ 兩랴ᇰ〯을〮 ᄉᆞ〮라 汁집〮 업〯게 ᄒᆞ고〮 甘감草초ᇢ〯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디허〮 麤총히 처〮 세〮 버네〮 ᄂᆞᆫ화 ᄡᅮ〮ᄃᆡ ᄒᆞᆫ 버네〮 漿쟈ᇰ水ᄉᆔᆼ〮 두〯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자내〮 니르〮거든〮 즛의 앗〯고〮 더우〮닐〮 머구〮머 ᄎᆞ거든비〯와ᄐᆞ〮라〮 又方齒齗血出不止乾地龍末一錢白凡灰一錢射香末{{*|半錢}}右同硏令勻濕布上塗落貼於患處{{*|}} ᄯᅩ〮 닛믜유메 피〮나〮 긋디〮 아니〮커든〮 ᄆᆞᄅᆞᆫ地딩〮龍료ᇰㅅ ᄀᆞᄅᆞ ᄒᆞᆫ 돈〯과 白ᄈᆡᆨ〮礬뻔ㅅ ᄌᆡ ᄒᆞᆫ 돈〯과〮 射썅香햐ᇰㅅ ᄀᆞᄅᆞ 半반 돈〯과〮 ᄒᆞᆫᄃᆡ〮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저즌〮 뵈〮 우희〮 藥약〮 ᄇᆞᆯ라〮 피〮나〮ᄂᆞᆫ ᄃᆡ〮 브티〮라〮 又方無故口齒閒血出不止以淡竹葉濃煎湯熱含冷吐{{*|}} ᄯᅩ〮 젼ᄎᆞ〮 업〯시 입〮과〮 닛ᄉᆞᅀᅵ〮예 피〮나〮 긋디〮 아!디〮!니!커든〮 淡땀〯竹듁〮 니〮플〮 두텁〯게〮 글혀〮 더운〮 므〮를 머구〮머 ᄎᆞ〮거든〮 비〯와ᄐᆞ〮라〮 直指方治齒出血 鬱金 白芷 細辛{{*|各等分}}右爲末擦牙仍以竹葉竹皮濃煎入塩少許含嚥或炒塩傅{{*|}} 니〮예〮 피〮나〮ᄂᆞ닐〮 고툐〮ᄃᆡ 鬱ᅙᅮᇙ〮金금과〮 白ᄈᆡᆨ〮芷징〯와〮 細솅〮辛신ᄋᆞᆯ〮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니〮예〮ᄡᅮᄭᅩ〮 댓〮닙〮과〮 댓〮가ᄎᆞᆯ〮 두터이〮 글혀 소곰 져〯기 녀허〮 머구〮머 ᄉᆞᆷᄭᅵ〮며 !시!셰!혹〮 소고ᄆᆞᆯ〮 봇가〮 브티〮라〮 千金方齒閒出血溫童子小便半升煮取三合含之其血卽止{{*|}} 닛〮ᄉᆞᅀᅵ〮예 피〮나〮거든〮 아ᄒᆡ〮 小쑈ᇢ〯便뼌 半반〮 되〮를〮 글혀〮 서〯 호블〮 取츙〯ᄒᆞ〮야〮 머구므면〮 그 피〮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治齒出血不止刮生竹皮二兩苦酒浸之令其人解衣坐使人含噀其背上三過仍取竹茹濃煮汁勿與塩適寒溫含漱之竟日爲度{{*|}} ᄯᅩ〮 니예 피〮나〮 긋!다〮!디〮! 아니〮커든〮 ᄂᆞᆯ 댓〮거츨〮 ᄀᆞᆯ〮가 두〯 兩랴ᇰ〯ᄋᆞᆯ〮 醋초ᇢ〮애〮 ᄃᆞᆷ〮고〮 그 사〯ᄅᆞ〮ᄆᆞ로〮 옷〮 바사〮 아ᇇ게 ᄒᆞ고〮 !타!다!ᄅᆞᆫ 사〯ᄅᆞ미〮 머구〮머 그 드ᇰ의〮 세〯 버늘〮 ᄲᅮᆷ〮고〮 댓〮거프를〮 取츙〯ᄒᆞ〮야〮 두터이〮 즈〮블 글혀〮 소곰 주디〮 말〯오〮 ᄎᆞ〮며 ᄃᆞᆺ호〮미맛〮갑게〮 ᄒᆞ〮야〮 머구〮!어!머! 야ᇰ〯지호〮ᄃᆡ 져므〮ᄃᆞ록〮 ᄒᆞ라〮 又方治酒醉牙齒涌血出 當歸{{*|二兩}}礬石{{*|六銖}}桂心 細辛 甘草{{*|各一兩}}右五味㕮咀以漿水五升煮取三升含之日五六夜三{{*|}} ᄯᅩ〮 술 醉ᄌᆔᆼ〮ᄒᆞ〮야〮 니〮예 피〮 솟〮ᄂᆞ닐〮 고툐〮ᄃᆡ 當다ᇰ歸귕 두〯 兩랴ᇰ〯!괴〮!과〮! 白ᄈᆡᆨ〮礬뻔 여슷〮 銖쓩와〮 桂ᄀᆒᆼ〮心심과 細솅〮辛신〮과〮 甘감草초ᇢ〯 各각〮 ᄒᆞᆫ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漿쟈ᇰ水ᄉᆔᆼ〯 닷 되〮예〮 글혀〮 서〯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머구〮무ᄃᆡ〮 나ᄌᆡ〮 !데〯!대〯!엿〮 번〮 바ᄆᆡ〮 세〯 번 ᄒᆞ라〮 又方燒釘令赤注孔血中止{{*|}} ᄯᅩ〮 모〮ᄃᆞᆯ ᄉᆞ〮라 븕게〮 ᄒᆞ〮야〮 핏 굼긔〮 고ᄌᆞ〮!연〮!면〮! 긋ᄂᆞ니〮라〮 又方舌上黑有數孔大如簪出血如湧泉 戎塩 黃芩{{*|一作葵子}}黃蘗 大黃{{*|各五兩}}人參 桂心 甘草{{*|各二兩}}右爲末蜜丸梧子大米飮服十丸日三服亦燒鐵烙之{{*|}} ᄯᅩ〮 혀〮 우히〮 검〯고〮 두〯ᅀᅥ 굼기〮 빈혓 구무만〮 코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거든〮 戎ᅀᅲᇰ塩염과 黃ᅘᅪᇰ芩끔 과〮 ᄒᆞ나ᄒᆞᆫ〮 葵ᄁᆔᆼ子ᄌᆞᆼ〯ㅣ라 ᄒᆞ다〮 黃ᅘᅪᇰ蘗ᄇᆡᆨ〮과〮 大땡〮黃ᅘᅪᇰ 各각〮 닷 兩랴ᇰ〯과〮 人ᅀᅵᆫ參ᄉᆞᆷ과〮 桂ᄀᆒᆼ〮心심과〮 甘감草초ᇢ〯 各각〮 두〯 兩랴ᇰ〯과〮ᄅ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 丸ᅘᅪᆫ곰〮 ᄒᆞᄅᆞ 세〯 번 머그〮라〮 ᄯᅩ〮 鐵텨ᇙ〮을〮 ᄉᆞ〮!리!라! 지지〮라〮 得效方文蛤散治熱壅舌上出血如泉 五倍子{{*|洗}}白膠香 牡蠣粉{{*|各等分}}右爲末每以少許 摻患處或燒鐵篦熟烙孔上{{*|}} 文문蛤갑〯散산〮ᄋᆞᆫ〮 上쌰ᇰ〯熱ᅀᅧᇙ〮ᄒᆞ〮야〮 혀〮에 피〮나〮ᄃᆡ 믈〮 ᄉᆡᆷ〯ᄃᆞᆺ〮 ᄒᆞ닐〮 고툐〮ᄃᆡ〮五ᅌᅩᆼ〯倍ᄈᆡᆼ子ᄌᆞᆼ〯ᄅᆞᆯ〮 싯고〮 白ᄈᆡᆨ〮膠교ᇢ香햐ᇰ과〮 牡무ᇢ〯蠣롕〯粉분을〮 各각〮 等드ᇰ〯分분ᄒᆞ〮야〮 細솅〮末마ᇙ〮ᄒᆞ〮야〮 져〯기 피〮나〮ᄂᆞᆫᄃᆡ〮 ᄇᆞᄅᆞ고〮 시혹〮 쇠〮빈혀를〮 ᄉᆞ〮라 굼긔〮 니기〮 지지〮라〮 又方舌無故出血炒槐花爲末摻之而愈{{*|}} ᄯᅩ〮 혜 전ᄎᆞ 업〯시 피〮나〮거든〮 槐ᅘᅬᆼ花황ᄅᆞᆯ〮 보ᄭᅡ〮 細솅〮末마ᇙ〮ᄒᆞ〮야〮 ᄇᆞᄅᆞ면〮 됻〯ᄂᆞ〮니라〮 ==大小便不通第十五== 聖惠方治大小便關格不通腹脹喘急方 膩粉{{*|一錢}}生麻油{{*|一合}}右相和空腹服之{{*|}} 大땡〮小쇼ᇢ〯便뼌이〮 通토ᇰ티〮 몯〯ᄒᆞ〮야〮 ᄇᆡ〮 탸ᇰ〯만〮ᄒᆞ고〮 수〯미 ᄌᆞᄌ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膩닝〮粉분〮 ᄒᆞᆫ 돈〯과〮生ᄉᆡᇰ麻망油유ᇢ ᄒᆞᆫ 홉과〮ᄅᆞᆯ〮 섯거〮 空코ᇰ心심에〮 머그라〮 又方蔓菁子油一合空腹服之卽通通後汗出勿怪{{*|}} ᄯᅩ〮 댓무ᅀᅮᆺ ᄡᅵᆺ〮 기름〯 ᄒᆞᆫ 호ᄇᆞᆯ〮 空코ᇰ心심에〮 머그〮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 通토ᇰᄒᆞᆫ 後ᅘᅮᇢ〯에〮 ᄯᆞᆷ〮나〮거든〮 疑ᅌᅴᆼ心심 말〯라〮 又方治小便難腹滿悶不急療之殺人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裹分作二苞更互熨臍下小便立出{{*|}} ᄯᅩ〮 小쇼ᇢ〯便뼌이〮 어려〮워 ᄇᆡ〮 탸ᇰ〯만〮ᄒᆞ고〮 답답거든〮 時씽急급〮히〮 고티〮디〮 아니〮ᄒᆞ면〮 사ᄅᆞᆷ 주기〮ᄂᆞ니〮 파〮 서〯 斤근과〮 소곰 ᄒᆞᆫ 斤근을〮 섯거〮 므르 디허〮 보ᄭᅡ〮 덥〯게〮 ᄒᆞ〮야〮 기〯브로〮 ᄢᅳ료〮ᄃᆡ〮 두〮 ᄢᅳ례〮예〮 ᄂᆞᆫ화〮 서르 臍쨍〮下ᅘᅡᆼ〯ᄅᆞᆯ〮 熨ᅙᅮᇙ〮ᄒᆞ면〮 小쇼ᇢ〯便뼌이〮 즉〮재 나〮ᄂᆞ〮니라〮 聖濟緫錄茯苓丸治大小便不通 赤茯苓{{*|去黑皮}}芍藥 當歸{{*|切焙}}枳殼{{*|去穰麩炒}}白朮 人參{{*|各五兩}}大麻仁 大黃{{*|剉各三兩}}右爲末煉蜜和丸梧桐子大每服十五丸至二十丸空心煎茅根湯下{{*|}} 茯뽁〮苓려ᇰ丸ᅘᅪᆫ은〮 大땡〮小쇼ᇢ〯便뼌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티〮ᄂᆞ〮니〮 赤쳑茯뽁〮苓려ᇰ을〮 거믄〮 것 밧기〮고〮 芍작〮藥약〮과〮 當다ᇰ歸귕ᄅᆞᆯ〮 사ᄒᆞ〮라〮 焙ᄈᆡᆼ〮乾간ᄒᆞ고〮 枳징〮殼칵〮을〮 솝〯 앗〯!ᄀᆞ〮!고〮! 기울〮와〮 봇고〮 白ᄈᆡᆨ朮뜌ᇙ〮와〮 人ᅀᅵᆫ參ᄉᆞᆷ 各각〮 다ᄉᆞᆺ〮 兩랴ᇰ〯과〮大땡〮麻망仁ᅀᅵᆫ 과〮 大땡〮黃ᅘᅪᇰᄋᆞᆯ〮 사ᄒᆞ〮라〮 各각〮 석〯 兩랴ᇰ〯과〮를〮 細솅〮末마ᇙ〮ᄒᆞ〮야〮 煉련〮혼〮 ᄢᅮᆯ〮로 梧ᅌᅩᆼ桐토ᇰ子ᄌᆞᆼ〯만〮 케 丸ᅘᅪᆫ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열〮다ᄉᆞᆺ〮 丸ᅘᅪᆫ으〮로〮 스〮믈〮 丸ᅘᅪᆫ지〯히 空코ᇰ心심애〮 茅모ᇢ根ᄀᆞᆫ湯타ᇰ〮을〮 글혀〮 ᄂᆞ리〮우라〮 經驗良方木通散治小便不通小腹痛不可忍 木通 滑石{{*|各半兩}}黑牽牛{{*|頭末半兩}}右㕮咀每服一錢水半盞燈心十莖葱白一箇同煎三分食前溫服{{*|}} 木목〮通토ᇰ散산〮은〮 小쇼ᇢ〯便뼌 不부ᇙ〮通토ᇰᄒᆞ〮야〮 ᄇᆡᆺ〮기슭〮 알파〮 ᄎᆞᆷ디 몯〯ᄒᆞ릴〮 고티〮ᄂᆞ니〮 木목〮通토ᇰ과〮 滑ᅘᅪᇙ〮石쎡〮 각〮 半반〮 兩랴ᇰ〯과〮 黑흑〮牽켠牛ᅌᅮᇢ 머릿〮 ᄀᆞᄅᆞ 半반〮 兩랴ᇰ〯과〮ᄅᆞᆯ〮 사ᄒᆞ라〮 ᄒᆞᆫ 服뽁〮애〮 ᄒᆞᆫ 돈〯곰〮 ᄒᆞ〮야〮 믈〮 半반〮 잔〮과〮 燈드ᇰ 心심 열〮 줄기〮와〮 파〮 ᄒᆞᆫ 낫〮과〮 ᄒᆞᆫ〮ᄃᆡ〮 三삼分분을〮 글혀 食씩〮前쪈에〮 ᄃᆞ〯시 ᄒᆞ〮야〮 머그〮!리!라! 肘後方治小便不利莖中痛欲死牛膝幷葉不以多小酒煮飮之立愈{{*|}} 小쇼ᇢ〯便뼌이 快쾡〮티〮 몯〯ᄒᆞ〮야〮 陰ᅙᅳᆷ莖ᅘᆡᇰㅅ 소〮비 알파〮 죽고〮져〮 ᄒᆞ〮ᄂᆞ닐〮 고툐〮ᄃᆡ牛ᅌᅮᇢ膝시ᇙ〮을〮 닙〮 조쳐〮 수레〮 글혀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千金方治大便秘澁不通 大黃{{*|四兩}}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右切以水六升煮取二升分再服{{*|}} 大땡〮便뼌이〯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大땡〮黃ᅘᅪᇰ 넉〯 兩랴ᇰ〯과〮 桃또ᇢ仁ᅀᅵᆫ 셜흔〮 나〯ᄎᆞᆯ〮 것과〮 부〯리와〮 어우러ᇰ ᄌᆞᅀᆞ〮ᄅᆞᆯ〮 앗〯고 ᄀᆞ〮라 믈〮 엿 되〮예 글혀〮 두〯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ᄂᆞᆫ화〮 두〯 버네〮 머그〮라〮 又方胡鷰屎蜜和納大孔中卽通{{*|}} ᄯᅩ〮 며ᇰ마〮긔〮 ᄯᅩᇰᄋᆞᆯ〮 ᄢᅮ〮레 ᄆᆞ라〮 밋굼긔〮 녀흐면〮 즉〮재 通토ᇰᄒᆞ〮ᄂᆞ〮니!리〮!라〮! 簡要濟衆方治大便澁不通牽牛子半生半熟擣爲散每服二錢煎薑湯調下如未通再服及以熱茶投之量虛實不計時加减服之{{*|}} 大땡便뼌 구더〮 通토ᇰ티〮 몯〯ᄒᆞ닐〮 고툐〮ᄃᆡ 牽켠牛ᅌᅮᇢ子ᄌᆞᆼ〮ᄅᆞᆯ〮 半반〮만〮 ᄂᆞ리〮오〮 半반〮만〮 니그〮닐〮 디허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애〮 두〯 돈〯곰〮 生ᄉᆡᇰ薑가ᇰ湯타ᇰ〮애〮 프〮러 ᄂᆞ리〮오ᄃᆡ〮 通토ᇰ티〮 몯〯거든〮 다시〯 먹고 더운〮 차로〮 머구〮ᄃᆡ 虛헝實씨ᇙ〮을〮 혜〯오〮 時씽〮刻큭〮 혜〯디 마라〮 더으며ᇰ〮더러〮 머그〮라〮 ==溺水第十六== 經驗良方凡有人溺水者救上岸卽將牛一頭却令溺水之人將肚橫覆相抵在牛背上兩邊用人扶策徐徐牽牛而行以出腹內之水如醒卽以蘇合香元之類或老生薑擦其齒若無牛以活人於長板櫈上仰臥却令溺水人如前法將肚相抵活人身聽其水出卽活{{*|}} 믈읫 사〯ᄅᆞ미〮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ᄀᆞ〯ᅀᅢ〮올이〮고〮 쇼〮 ᄒᆞ나ᄒᆞᆯ〮 가져〮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ᄇᆡ〮ᄅᆞᆯ〮 ᄉᆈ〮 드ᇰ 우희〮 ᄀᆞᄅᆞ 업데우〮고〮 두〯 녁 ᄀᆞ〯ᅀᅢ 사〯ᄅᆞ미 자바〮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쇼〮ᄅᆞᆯ〮 잇거ᄃᆞᆮ녀〮 ᄇᆡ〮 안햇〮 므〮를〮 내〯오 ᄒᆞ〮다가〮ᄭᆡ〮어든〮 곧〮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 類ᄅᆔᆼ〮어나〮 시혹〮 늘근〮 生ᄉᆡᇰ薑가ᇰ이〮나〮 그 니〮예 ᄡᅮ츠라 ᄒᆞ〮다가 쇼〮 업〯거든〮 산〯 사〯ᄅᆞ〮ᄆᆞ로〮 長땨ᇰ床싸ᇰ 우희〮 졋바〮뉘이〮고〮 므〮레 !ᄲᅵ〮!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알ᄑᆡᆺ〮 法법〮ᄀᆞ〮티 ᄇᆡ〮ᄅᆞᆯ〮 산〯 사〯ᄅᆞᄆᆡ〮 모매〮 서르 다혀〮 므〮리 나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聖惠方凡溺水急解去死人衣灸臍中卽差{{*|}} 믈읫 므〮레 ᄲᅡ〮디〮거든〮 時씽急급〮히〮 주근〮 사ᄅᆞᄆᆡ〮 옷〮 밧기〮고〮 ᄇᆡᆺ보ᄀᆞᆯ〮 ᄯᅳ〮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竈中灰布地令厚五寸以甑側安着灰上令溺人伏於甑上使頭小垂下炒塩二錢內小竹管內吹入下部中卽當吐水去却甑扶下溺人着灰中以灰壅身水恒出鼻口中卽活矣{{*|}} ᄯᅩ〮 브ᅀᅥ븻〮 ᄌᆡ〮로〮 ᄯᅡ해 ᄭᆞ〮로ᄃᆡ〮 두틔〮 다ᄉᆞᆺ〮 寸촌〮이〮에 코〮 실을〮 ᄌᆡ〮 우희〮 겨트〮로〮 노코〮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로〮 시르 우희〮 업데우〮고〮 머리〮ᄅᆞᆯ〮 져〯기 아래〮로 ᄲᅡ〮디게〮 ᄒᆞ고〮 소고ᄆᆞᆯ〮 봇가〮 두〯 돈〯ᄋᆞᆯ〮 져〯근 대〯로ᇰ애〮 녀허〮 밋굼긔〮 부러〮 드〮리면〮 반ᄃᆞ〮기 므〮를〮 吐통〯ᄒᆞ리〮니〮 !살!실!을〮 앗〮고〮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아나〮 ᄂᆞ리〮와〮 ᄌᆡ〮예 노코〮 ᄌᆡ〮로 모ᄆᆞᆯ 두프〮면〮 므〮리 고〮콰〮 입〮과〮로 나면〮 곧〮 사〯ᄂᆞ〮니!리〮!라〮! 又方掘地作坑熬數斛熱灰內坑中下溺人灰覆濕徹卽易之灰勿大熱灰冷更易半日卽活也{{*|}} ᄯᅩ〮 ᄯᅡ〮 파〮 굳〮 ᄆᆡᇰᄀᆞᆯ〮오 두〯ᅀᅥ 셤〮 더운〮 ᄌᆡ〮ᄅᆞᆯ〮 봇가〮 구데〮 녀코〮 !ᄲᅡ〮!ᄡᅢ〮!딘 사〯ᄅᆞᄆᆞᆯ〮 녀코〮 ᄌᆡ〮로 두퍼〮 ᄉᆞᄆᆞᆺ젓거든〮 곧〮 ᄀᆞᆯ라〮 ᄌᆡ〮ᄅᆞᆯ〮 너무 봇디〮 말〯오〮 ᄌᆡ〮 ᄎᆞ〮거든〮 ᄀᆞ라〮 半반〮 날〮만 ᄒᆞ면〮 곧〮 사〯ᄂᆞ〮니라〮 又方但埋溺人暖灰中頭足俱沒唯開七孔水出卽活{{*|}} ᄯᅩ〮 오직〮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ᆞᆯ〮 다운〮 ᄌᆡ〮예 무두〮ᄃᆡ〮 머리〮와〮 발〮왜〮 다〯 들〮에〮 ᄒᆞ고〮 오직〮 닐굽〮 굼글 여러 므〮리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緜裹皂莢末內下部中湏臾水出{{*|}} ᄯᅩ〮 소오매〮 皂쪼ᇢ〯莢겹〮ㅅ ᄀᆞᆯᄋ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이ᅀᅳᆨ고〮 므〮리 나〮ᄂᆞ니라〮 千金方半夏末吹入鼻{{*|}} 半반〮夏ᅘᅡᆼ〮ㅅ ᄀᆞᆯᄋᆞᆯ〮 부!리〮!러〮! 고해〮 녀ᄒᆞ라 又方裹石灰納下部中水出盡卽活{{*|}}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ᄡᅡ 밋굼긔〮 녀흐면〮 므〮리 다〯 나면〮 즉〮재 사〯ᄂᆞ〮니라〮 又方熬沙覆死人上下有沙但出鼻口耳沙冷濕卽易{{*|}} ᄯᅩ〮 몰애〮ᄅᆞᆯ〮 봇가 주근〮 사〯ᄅᆞᄆᆞᆯ〮 두푸〮ᄃᆡ 아라우희〮 몰애〮 잇고〮 오직〮 고〮콰〮 입〮과〮 귀〮와ᄅᆞᆯ〮 내〯야〮 몰애〮 ᄎᆞ〮고〮 젓거든〮 곧〮 ᄀᆞᆯ라〮 管見大全良方救男女墮水中者以常用薦席卷之就平地上袞轉一二百轉則水出自活亦有用陳壁土末覆之死者更以爐中煖灰覆臍上下則元氣廻自活省後當服利水之藥如五苓散異功五積散朮附湯除濕湯不換金正氣散若欲兼服安心神收歛神氣之藥宜服蘇合香元在人斟酌輕重冷熱而投之{{*|}} 男남女녕ㅣ 므레 ᄲᅡ디닐 救구ᇢ호ᄃᆡ 샤ᇰ녜 ᄡᅳᄂᆞᆫ 돗긔 ᄆᆞ라 平뼈ᇰᄒᆞᆫ ᄯᅡ해 나ᅀᅡ가 一ᅙᅵᇙ二ᅀᅵᆼ百ᄇᆡᆨ 버늘 구으리면 므리 나면 절로 사ᄂᆞ니라 ᄯᅩ 무근 ᄇᆞᄅᆞ맷 ᄒᆞᆰᄀᆞᆯᄋᆞ로 둡ᄂᆞ니라 주그닐 ᄯᅩ 火황爐롱앳 더운 ᄌᆡ로 ᄇᆡᆺ복 아라우희 두프면 元ᅌᅯᆫ氣킝 도라와 사ᄂᆞ니라 ᄎᆞ린 後ᅘᅮᇢ에 믈 즈츼ᄂᆞᆫ 藥약이五ᅌᅩᆼ苓려ᇰ散산 과異잉功고ᇰ五ᅌᅩᆼ積젹散산 과朮뜌ᇙ附뿡湯타ᇰ 과 除똉濕십湯타ᇰ과不부ᇙ換ᅘᅪᆫ金금正져ᇰ氣킝散산 ᄋᆞᆯ 머기고 ᄒᆞ다가 ᄆᆞᅀᆞᄆᆞᆯ 便뼌安ᅙᅡᆫ케 ᄒᆞ고 氣킝分분을 모도ᄂᆞᆫ 藥약을 조쳐 머기고져 커든 蘇송合ᅘᅡᆸ香햐ᇰ元ᅌᅯᆫ을 머귤디니 사ᄅᆞ미 輕켜ᇰ重뜌ᇰ과 冷ᄅᆡᇰ熱ᅀᅧᇙ을 斟짐酌쟉ᄒᆞ야 머교매 잇ᄂᆞ니라 壽域神方冬月落水微有氣者用大器炒灰熨心上候暖氣通溫粥稍稍呑之卽活若便持火炙卽死{{*|}} 겨ᅀᅳ레 므레 디여 자ᇝ간 氣킝分분 잇ᄂᆞ닐 큰 그르세 ᄌᆡᄅᆞᆯ 봇ᄭᅡ 가ᄉᆞᄆᆞᆯ 熨ᅙᅮᇙᄒᆞ고 더운 氣킝分분이 通토ᇰ호ᄆᆞᆯ 기드려 ᄃᆞᄉᆞᆫ 粥쥭을 졈졈 머기면 곧 사ᄂᆞ니 ᄒᆞ다가 브를 ᄧᅬ면 즉재 죽ᄂᆞ니라 又方急於人中穴及兩脚大母趾內離甲一韭葉許各灸三五壯卽活{{*|}} ᄯᅩ ᄲᆞᆯ리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와 두 밠 엄지가띿 아ᇇ 밠토ᄇᆞ로셔 ᄒᆞᆫ 부ᄎᆡᆺ닙 너븨만 ᄒᆞᆫ ᄃᆡ 各각各각 세다ᄉᆞᆺ 壯자ᇰᄋᆞᆯ ᄯᅳ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以屈死人兩脚着生人肩上以溺人背搭走吐水出盡卽活{{*|}} ᄯᅩ 주근 사ᄅᆞᄆᆡ 두 다리ᄅᆞᆯ 구펴 산 사ᄅᆞᄆᆡ 엇게 우희 여ᇇ고 주근 사ᄅᆞᄆᆞᆯ 지여 ᄃᆞᄅᆞ면 므리 다 나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得效方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 酒쥬ᇢ壜땀 ᄒᆞᆫ 나ᄎᆞ로 죠ᄒᆡ젼 ᄒᆞᆫ 주믈 ᄉᆞ라 壜땀 안해 녀코 時씽急급히 壜땀 이브로 므레 ᄲᅡ딘 사ᄅᆞᄆᆡ ᄂᆞ치나 시혹 ᄇᆡᆺ복 우희 두퍼 ᄎᆞ거든 다시 죠ᄒᆡ젼을 ᄉᆞ라 壜땀 안해 녀허 ᄂᆞᄎᆡ 두퍼 므를 아ᅀᆞ면 즉재 사ᄂᆞ니라 壜땀은 술녇ᄂᆞᆫ 딜어시라 ==自縊第十七== 千金方凡救自縊死者極須按定其心勿截繩手抱起徐徐解之心下尙溫者以氍毹{{*|卽毛席也}}覆口鼻兩人吹其兩耳{{*|}} 믈읫 목 ᄆᆡ야 주그닐 救구ᇢ호ᄃᆡ ᄀᆞ자ᇰ 모로매 그 ᄆᆞᅀᆞᄆᆞᆯ 눌러 一ᅙᅵᇙ定뗘ᇰᄒᆞ고 노ᄒᆞᆯ 긋디 말오 소ᄂᆞ로 아나 니르왇고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글오ᄃᆡ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니란 담으로 입과 고ᄒᆞᆯ 둡고 두 사ᄅᆞ미 그 두 귀ᄅᆞᆯ 불라 又方强臥以物塞兩耳竹筒納口中使兩人痛吹之塞口傍無令氣得出半日死人卽噫噫卽勿吹也{{*|}} ᄯᅩ 뉘이고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ᆯ 입 안해 녀코 두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불오 입가ᅀᆞᆯ 마가 氣킝分분이 나디 몯게 ᄒᆞ면 半반 날ᄋᆞᆯ 주겟던 사ᄅᆞ미 곧 숨쉬ᄂᆞ니 숨쉬어든 부디 말라 又方擣皂莢細辛屑如豆大吹兩鼻中{{*|}} ᄯᅩ 皂쪼ᇢ莢겹과 細솅辛신ㅅ ᄀᆞᆯᄋᆞᆯ 디허 코ᇰ낫만 ᄒᆞ닐 두 곳굼긔 불라 又方刺雞冠血出滴口中卽活男雌女雄{{*|}} ᄯᅩ ᄃᆞᆯᄀᆡ 벼츨 ᄣᅵᆯ어 피내야 이베 처디면 즉자히 사ᄂᆞ니 남지ᄂᆞᆫ 암ᄐᆞᆯᄀᆞ로 코 겨지븐 수ᄐᆞᆯᄀᆞ로 ᄒᆞ라 又方尿鼻口眼耳中幷捉頭髮一撮如筆管大掣之立活{{*|}} ᄯᅩ 고콰 입과 눈과 귀와에 오좀 누고 머리터럭 ᄒᆞᆫ 져부미 붇 ᄌᆞᄅᆞ만 ᄒᆞ닐 자바ᄃᆞᇰᄀᆡ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又方雞血塗喉下{{*|}} ᄯᅩ ᄃᆞᆯᄀᆡ 피ᄅᆞᆯ 목 아래 ᄇᆞᄅᆞ라 又方灸四肢大節陷大指本支名曰地袖各七壯{{*|}} ᄯᅩ 네 활기옛 큰 ᄆᆞᄃᆡᆺ 우무근 ᄃᆡ와 엄짓가락 미틧 그믈 일후믈 地띵袖쓔ᇢㅣ라 ᄒᆞᄂᆞ니 各각 닐굽 壯자ᇰ을 ᄯᅳ라 經驗救急方急抱起解下切不可截繩卽以衣物塞兩耳將竹筒於口中吹氣及以衣物緊塞二物爲妙凡縊者從早至晩雖已冷必可救從夜至早稍難救若心上溫一日已上猶可救切不可截斷繩欸欸地抱起其身緩解繩放臥令人踏其肩以手拔其髮常令一人緊以手擦胸脇一人以手摩搦臂足屈伸之若已僵漸强屈之又按其腹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却身苦勞動少與官桂湯及粥淸令喉潤更令兩人以筆管吹其耳中尤妙依此法救無不活者{{*|}} ᄲᆞᆯ리 아나 니르왇고 글오ᄃᆡ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즉자히 오ᄉᆞ로 두 귀 막고 대로ᇰᄋᆞ로 입 안해 氣킝分분을 불오 오ᄉᆞ로 두 거슬 구디 마고미 됴ᄒᆞ니 믈읫 목ᄆᆡ야 주그니 아ᄎᆞᆷ브터 나조ᄒᆡ 니르닌 비록 차도 어루 救구ᇢᄒᆞ려니와 밤브터 아ᄎᆞᄆᆡ 니르닌 救구ᇢ호미 어려우니 ᄒᆞ다가 가ᄉᆞ미 ᄃᆞᆺᄒᆞ면 ᄒᆞᄅᆞᆺ 內뇡ᄂᆞᆫ 어루 救구ᇢᄒᆞ리니 자ᇝ간도 노 긋디 말오 ᄌᆞᄂᆞᆨᄌᆞᄂᆞ기 그 모ᄆᆞᆯ 아나 니르왇고 노ᄒᆞᆯ 날회야 그르고 뉘이고 사ᄅᆞᄆᆞ로 그 엇게ᄅᆞᆯ ᄇᆞᆲ고 소ᄂᆞ로 머리 터릴 ᄲᅡ혀며 샤ᇰ녜 ᄒᆞᆫ 사ᄅᆞᄆᆞ로 ᄆᆡ이 소ᄂᆞ로 가ᄉᆞᆷ과 녑과ᄅᆞᆯ ᄡᅮᆺ고 ᄒᆞᆫ 사ᄅᆞ미 소ᄂᆞ로 ᄇᆞᆯ콰 바ᄅᆞᆯ ᄡᅮᆺ고 구피락펴락게 ᄒᆞ라 ᄒᆞ다가 세웓거든 졈졈 구피고 ᄯᅩ 그 ᄇᆡᄅᆞᆯ ᄆᆞᆫ죨디니 이ᄀᆞ티 ᄒᆞᆫ 밥 ᄣᅢ만 ᄒᆞ면 곧 氣킝分분을 어더 숨쉬ᄂᆞ니라 모미이처커든 져기管관桂ᄀᆒᆼ湯타ᇰ 과 粥쥭므를 머겨 모기 젓게 ᄒᆞ고 ᄯᅩ 두 사ᄅᆞ미 붇ᄌᆞᆯᄋᆞ로 귓굼글 불에 호미 더 됴ᄒᆞ니 이 法법을 브터 救구ᇢᄒᆞ면 사디 아니ᄒᆞ리 업스니라 得效方緊用兩手掩其口勿令透氣兩時氣急卽活{{*|}} ᄆᆡ이 두 소ᄂᆞ로 그 이블 마가 氣킝分분이 ᄉᆞᄆᆞᆺ디 아니케 두 時씽刻큭을 ᄒᆞ면 氣킝分분이 急급ᄒᆞ면 즉자히 사ᄂᆞ니라 壽域神方治自縊 就以所縊繩燒三指撮白湯調服之{{*|}}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ᄆᆡ얏던 노ᄒᆞᆯ 세 소ᇇ가락으로 자보니만 ᄉᆞ라 더운 므레 프러 머기라 又方未解下先用膝頭或手厚裹衣物緊塞穀道抱起解下揉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兩耳待其氣回方可放手若泄氣則不可救矣{{*|}} ᄯᅩ 그르디 아니ᄒᆞ야셔 몬져 무루피어나 소니어나 오ᄉᆞ로 두터이 ᄡᅡ 밋굼글 구디 막고 아나 니르와다 그르고 모ᄀᆡᆺ 허므를 주므르며 모ᄀᆞᆯ ᄆᆞᆫ지고 고해 불며 두 귀를 부러 氣킝分분이 도라오ᄆᆞᆯ 기드려ᅀᅡ 소ᄂᆞᆯ 쉬울디니 ᄒᆞ다가 氣킝分분이 ᄉᆡ면 救구ᇢ티 몯ᄒᆞ리라 又方卽於鼻下人中穴針灸遂活{{*|}} ᄯᅩ 人ᅀᅵᆫ中듀ᇰ穴ᅘᆑᇙ을 針짐ᄒᆞ고 ᄯᅳ면 사ᄂᆞ니라 經驗秘方治自縊死梁上塵如豆兩耳鼻四處各納一粒以筒令四人極齊吹之卽活矣{{*|}} 목ᄆᆡ야 주그닐 고툐ᄃᆡ 보 우흿 드트를 코ᇰ만 ᄒᆞ닐 두 귀 두 고 네 고대 各각各각 ᄒᆞᆫ 나ᄎᆞᆯ 녀코 대로ᇰᄋᆞ로 네 사ᄅᆞ미 ᄀᆞ자ᇰ ᄀᆞᄌᆞ기 불에 ᄒᆞ면 즉재 살리라 管見大全良方以藍硏取汁灌之或以雞屎白如棗大以酒半盞和硏灌服及着鼻中尤佳{{*|}} 족ᄋᆞᆯ ᄀᆞ라 즈블 取츙ᄒᆞ야 브ᅀᅳ라 시혹 ᄃᆞᆯᄀᆡ ᄯᅩᇰ ᄒᆡᆫ 거시 大땡棗초ᇢ만 ᄒᆞ닐 술 半반 잔애 프러 ᄀᆞ라 브ᅀᅳ며 곳굼긔 녀후미 더 됴ᄒᆞ니라 ==失欠頷車蹉候第十八== 千金方治失欠頰車蹉開張不合方一人以手指牽其頤以漸推之則復入矣推當疾出其指恐誤嚙傷人指也{{*|}}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 버리고 어우디 아니ᄒᆞ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ᄒᆞᆫ 사ᄅᆞ미 소ᇇ가라ᄀᆞ로 그 ᄐᆞᄀᆞᆯ ᄃᆞᇰᄀᆡ야 졈졈 밀면 다시 드ᄂᆞ니 밀오 모로매 그 소ᇇ가라ᄀᆞᆯ ᄲᆞᆯ리 내욜디니 사ᄅᆞᄆᆡ 소ᇇ가라ᄀᆞᆯ 그르믈까 저프니라 又方治失欠頰車蹉方消蠟和水傅之{{*|}} ᄯᅩ 하외욤 그르ᄒᆞ야 ᄐᆞᆨ 글희여디닐 고티ᄂᆞᆫ 法법은 미를 노겨 므레 프러 브티라 ==金瘡第十九== 聖惠方金瘡失血其人當苦渴然須忍之常令乾食與肥脂之物以止其渴又不得多飮粥則血溢出殺人也又忌嗔怒及大言笑思想陰陽動作勞力若食醎酸飮食熱羹臛輩皆使瘡痛衝發甚者卽死{{*|}} 金금瘡차ᇰ 애 피 흘리면 그 사ᄅᆞ미 반ᄃᆞ기 ᄀᆞ자ᇰ 목ᄆᆞᆯ라 ᄒᆞᄂᆞ니 그러나 모로매 ᄎᆞ마 샤ᇰ녜 ᄆᆞᄅᆞᆫ 飮ᅙᅳᆷ食씩과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ᄆᆞᆯ로ᄆᆞᆯ 그치고 ᄯᅩ 粥쥭을 해 머기디 마롤디니 피 솟나 사ᄅᆞᄆᆞᆯ 주기ᄂᆞ니라 ᄯᅩ嗔친心심 과 ᄆᆡ이 말홈과 우ᅀᅮᆷ과 陰ᅙᅳᆷ陽야ᇰ을 ᄉᆞ라ᇰ홈과 뮈우며 힘ᄡᅮ믈 마롤디니 ᄒᆞ다가 ᄧᆞᆫ 것과 싄 것과 더운羹ᄀᆡᇰ 과 고기ᄅᆞᆯ 머그면 다 瘡차ᇰ이 알파 다시 發버ᇙᄒᆞᄂᆞ니 甚씸ᄒᆞ닌 즉재 죽ᄂᆞ니라 治金瘡大散方五月五日平旦使四人出四方各於五里內採一方草木莖葉每種各半把勿令漏脫一事日正午時切碓擣用石灰一豆斗擣令極爛仍先選揀大實桑樹三兩株鑿作孔令可受藥然分藥於孔中實築令堅後以桑樹皮蔽之用麻擣石灰密泥令不泄氣更以桑皮纏之令牢至九月九日午時出取陰乾百日藥成擣之日曝令乾更擣絹羅貯之凡有金瘡傷折出血用藥封裹勿令轉動不過十日瘥不膿不腫不畏風若傷後數日始得用藥須暖水洗令血出卽傅之此藥大驗{{*|}} 金금瘡차ᇰ 고티ᄂᆞᆫ 大땡散산方바ᇰ은 五ᅌᅩᆼ月ᅌᅯᇙ 五ᅌᅩᆼ日ᅀᅵᇙ 平뼈ᇰ明며ᇰ에 네 사ᄅᆞᄆᆞ로 四ᄉᆞᆼ方바ᇰ애 보내야 各각各각 五ᅌᅩᆼ里링 안햇 ᄒᆞᆫ 方바ᇰ草초ᇢ木목 줄기와 닙과ᄅᆞᆯ 가지마다 各각 半반 줌을 ᄏᆡ요ᄃᆡ ᄒᆞ나토 아니ᄒᆞ니 업시 ᄒᆞ야 바ᄅᆞ 나ᄌᆡ 사ᄒᆞ라 디허 石쎡灰횡 ᄒᆞᆫ 마ᄅᆞᆯ 디호ᄃᆡ ᄀᆞ자ᇰ 니기 ᄒᆞ고 몬져 큰 ᄲᅩᇰ나모 두ᅀᅥ흘 ᄀᆞᆯᄒᆡ야 구무 포ᄃᆡ 藥약 들 만ᄒᆞ야 藥약을 굼긔 ᄂᆞᆫ화 녀코 ᄀᆞᄃᆞ기다아 굳게 코 後ᅘᅮᇢ에거츠로 막고 삼 조쳐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구디 ᄇᆞᆯ라 氣킝分분 나디 아니케 코 다시 ᄲᅩᇰᄭᅥ츠로 얼거 굳게 코 九구ᇢ月ᅌᅯᇙ 九구ᇢ日ᅀᅵᇙ 午ᅌᅩᆼ時씽예니르러 내야 一ᅙᅵᇙ百ᄇᆡᆨ 나ᄅᆞᆯ ᄀᆞᄂᆞᆯ해 ᄆᆞᆯ외야 藥약이 일어든 디허 ᄒᆡ에 ᄆᆞᆯ외야 다시 디허 기베 처 ᄀᆞ초라 믈읫 金금瘡차ᇰ 헐어나 것거나 피나거든 藥약ᄋᆞ로 ᄡᆞ고 움즈기디 아니케 ᄒᆞ면 열흐를 디나디 아니ᄒᆞ야 됻ᄂᆞ니 곪디 아니ᄒᆞ며 븟디 아니ᄒᆞ며 ᄇᆞᄅᆞᄆᆞᆯ 저티 아니ᄒᆞᄂᆞ니 ᄒᆞ다가 傷샤ᇰᄒᆞᆫ 後ᅘᅮᇢ 사나ᄋᆞ래 비르서 藥약을 ᄡᅮᆯ디니 모로매 더운 므레 시서 피나게 ᄒᆞ고 곧 브튤디니 이 藥약이 ᄀᆞ자ᇰ 神씬驗ᅌᅥᆷᄒᆞ니라 又方治金瘡或肌肉斷裂右剝取新桑皮作線縫之又以新桑皮裹之又以桑白汁塗之極驗小瘡但以桑皮裹之便差如斷筋取旋復根擣封之卽續{{*|}} ᄯᅩ 金금瘡차ᇰ 고티며 시혹 ᄉᆞᆯ히 그처디며 ᄧᆡ야디거든 새 거츨 밧겨 실 ᄆᆡᇰᄀᆞ라호고 ᄯᅩ 새거츠로 ᄡᆞ고 ᄯᅩ ᄲᅩᇰ ᄒᆡᆫ 즙으로 ᄇᆞᄅᆞ면 지극 神신驗ᅌᅥᆷᄒᆞ니라 져근 瘡차ᇰ은 오직거츠로 ᄡᆞ면 곧 됻ᄂᆞ니 ᄒᆞ다가 히미 긋거든旋션復복根ᄀᆞᆫ 을 取츙ᄒᆞ야 디허 ᄡᆞ면 곧 닛ᄂᆞ니라 又方治刀傷斧斫等瘡右取黑氈燒爲灰細硏傅傷損處封裹勿動直待生肌爲妙{{*|}} ᄯᅩ 갈해 헐며 도ᄎᆡ예버흔 ᄃᆞᆯ헷 瘡차ᇰ을 고툐ᄃᆡ 거믄 시우글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헌 ᄃᆡ 브티고 ᄢᅳ려 뮈우디 말오 ᄉᆞᆯ 날 ᄀᆞ자ᇰ 기드료미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右取馬蹄燒灰令極細不計時候以煖酒調下二錢{{*|}} ᄯᅩ 金금瘡차ᇰᄋᆞᆯ 고텨 알포ᄆᆞᆯ 긋게 호ᄃᆡ ᄆᆞᆯ구블 ᄉᆞ라 ᄀᆞ자ᇰ ᄀᆞᄂᆞ리 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더운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治金瘡但刀斧傷損出血不止宜用此 石榴花{{*|半斤}}石灰{{*|一斤炒}}右件藥擣細羅爲散傅瘡上以帛裹勿令着風水瘡合差{{*|}}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툐ᄃᆡ 오직 갈콰 도최예 헐여 피나 긋디 아니커든 이ᄅᆞᆯ ᄡᅮᆯ디니 石쎡榴류ᇢㅅ곳 半반 斤근과 石쎡灰횡 ᄒᆞᆫ 斤근을 봇가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기브로 ᄢᅳ려 ᄇᆞᄅᆞᆷ과 믈와 맛디 아니케 ᄒᆞ야 瘡차ᇰ이 어울면 됻ᄂᆞ니라 又方取小便服三兩盞卽差{{*|}} ᄯᅩ 小쇼ᇢ便뼌 두ᅀᅥ 잔을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 杏人{{*|去皮擣如泥}}石灰{{*|等分}}右件藥同硏每用以猪脂和傅之日二三度卽差{{*|}} ᄯᅩ 金금瘡창애 피 긋디 아니커든 ᄉᆞᆯ곳 ᄌᆞᅀᆞᄅᆞᆯ 것 밧겨 즌ᄒᆞᆰᄀᆞ티 디코 石쎡灰횡와 等드ᇰ分분ᄒᆞ야 ᄒᆞᆫᄃᆡ ᄀᆞ라 도ᄐᆡ 기르므로 ᄆᆞ라 브툐ᄃᆡ ᄒᆞᄅᆞ 두ᅀᅥ 번곰 ᄒᆞ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 ᄯᅩ 프른 뵈ᄅᆞᆯ ᄉᆞ라 ᄌᆡ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ᄇᆞᄅᆞ고 ᄢᅳ리면 잇사나ᄋᆞᆯ 後ᅘᅮᇢ에 됻ᄂᆞ니라 又方取狼牙草莖葉爛搗傅之{{*|}} ᄯᅩ狼라ᇰ牙앙草초ᇢ ㅅ 줄기와 닙과ᄅᆞᆯ 므르디허 브티라 又方取紫檀末以傅瘡上止痛止血生肌甚効{{*|}} ᄯᅩ 紫ᄌᆞᆼ檀딴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긋고 피 긋고 ᄉᆞᆯ 나ᄂᆞ니 甚씸히 됴ᄒᆞ니라 又方治金瘡止痛牡礪散 牡礪{{*|半兩}}石膏{{*|一分}}右件藥擣羅更細硏用煉了猪膏調成膏以封瘡上痛卽止{{*|}} ᄯᅩ 金금瘡차ᇰ을 고텨 알품 긋게 ᄒᆞᄂᆞᆫ 牡무ᇢ礪롕散산은 牡무ᇢ礪롕 半반 兩랴ᇰ과 石쎡膏고ᇢ ᄒᆞᆫ 分분을 디허 츠고 다시ᄀᆞᄂᆞ리 ᄀᆞ라 煉련혼 도ᄐᆡ 곱ᄋᆞᆯ 노겨 골 ᄆᆡᇰ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取雄黃末傅瘡上當用有汁出卽差{{*|}} ᄯᅩ 雄ᅘᅮᇰ黃ᅘᅪᇰㅅ ᄀᆞᆯᄋᆞᆯ 瘡차ᇰ의 브티면 반ᄃᆞ기 汁집이 나리니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金瘡血不止疼痛以龍骨細硏傅瘡上{{*|}}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 긋디 아니코 알ᄑᆞ거든 龍료ᇰ骨고ᇙᄋᆞᆯ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라 又方用桑根半斤剉以水一豆斗煎取五升不計時候煖服一盞服盡卽効{{*|}} ᄯᅩ ᄲᅩᇰ나못 불휘 半반 斤근을 사ᄒᆞ라 믈 ᄒᆞᆫ 말로 글혀 닷 되ᄅᆞᆯ 取츙ᄒᆞ야 時씽節져ᇙ 혜디 말오 데여 ᄒᆞᆫ잔을 머구ᄃᆡ 다 머그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以石灰擣爲末厚傅瘡上用緜子裹之若瘡口深不合者內少許末令瘡漸漸合也{{*|}} ᄯᅩ 石쎡灰횡ᄅ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瘡차ᇰ의 두터이 ᄇᆞᄅᆞ고 소오ᄆᆞ로 ᄡᅩᄃᆡ ᄒᆞ다가 瘡차ᇰ이 기퍼 어우디 아니커든 져기 ᄀᆞᆯᄋᆞᆯ 녀허 瘡차ᇰ이 졈졈 어울에 ᄒᆞ라 又方用乾塩梅燒作灰細硏傅瘡上卽差{{*|}} ᄯᅩ 소고매 ᄆᆞᆯ외욘 梅ᄆᆡᆼ實씨ᇙ을 ᄉᆞ라 ᄀᆞᄂᆞ리 ᄀᆞ라 瘡차ᇰ의 브티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治金瘡血出不止取車前葉爛擣傅之血卽止連根取用亦効{{*|}} ᄯᅩ 金금瘡차ᇰ애 피나 긋디 아니커든 車창前젼 니플 므르디허 브티면 피 즉재 긋ᄂᆞ니 불휘 조쳐 ᄡᅮ미 ᄯᅩ 됴ᄒᆞ니라 治金瘡內漏瘀血在腹中脹滿宜服䖟蟲散 䖟蟲{{*|三十枚去趐足微炒}}桃仁{{*|一兩湯漫去皮尖雙仁麩炒微黃}}桂心{{*|一兩半去麤皮}}川大黃{{*|三兩剉碎微炒}}水蛭{{*|三十枚炒令微黃}}右件藥擣細羅爲散每服二錢用童子小便一中盞煎至五分溫溫和滓服日五服夜三服如卒無小便用酒水代之亦得{{*|}} 金금瘡차ᇰᄋᆡ 피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얼읜피 ᄇᆡ 안해 이셔 탸ᇰ만커든 䖟ᄆᆡᇰ蟲뜌ᇰ散산을 머귤디니 䖟ᄆᆡᇰ蟲뜌ᇰ 셜흔 나ᄎᆞᆯ ᄂᆞ래와 발와 앗고 자ᇝ간 봇고 桃또ᇢ仁ᅀᅵᆫ ᄒᆞᆫ 兩랴ᇰ을 더운 므레 ᄃᆞ마 것과 부리와어우러ᅌᅵᄅᆞᆯ 앗고 기울와 섯거 봇가 져기 노ᄅᆞ게 코 桂ᄀᆒᆼ皮삥 ᄒᆞᆫ 兩랴ᇰ 半반을 麤총ᄒᆞᆫ 거츨 밧기고川ᄌᆑᆫ大땡黃ᅘᅪᇰ 석 兩랴ᇰ을 사ᄒᆞ라 자ᇝ간 봇고 거머리 셜흔 나ᄎᆞᆯ 봇가 자ᇝ간 노ᄅᆞ게 ᄒᆞ고 이 藥약ᄃᆞᆯᄒᆞᆯ 디허 ᄀᆞᄂᆞ리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ᄒᆞᆫ 服뽁에 두 돈곰 아ᄒᆡ 오좀 ᄒᆞᆫ 中듀ᇰ잔ᄋᆞ로 글혀 다ᄉᆞᆺ 分분에 니르거든 ᄃᆞ시 ᄒᆞ야 滓ᄌᆡᆼ 조쳐 머구ᄃᆡ 나ᄌᆡ 다ᄉᆞᆺ 번 먹고 바ᄆᆡ 세 번 머그라 ᄒᆞ다가 밧바 小쇼ᇢ便뼌 업거든 수리나 므리나 ᄒᆞ야도 ᄯᅩ ᄒᆞ리라 又方治金瘡內漏血入腹中 大麻仁一升葱白{{*|二七莖}}右相和搗令熟以水三大盞煮取一盞去滓分爲三服若血出不盡腹中有膿血更令服當下膿血効{{*|}} ᄯᅩ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들어든 열ᄡᅵ ᄒᆞᆫ 되와 파 두닐굽 줄기ᄅᆞᆯ 섯거 디허 닉게 ᄒᆞ야 믈 세 큰 잔ᄋᆞ로 글혀 ᄒᆞᆫ 잔ᄋᆞᆯ 取츙ᄒᆞ야 즈ᅀᅴ 앗고 ᄂᆞᆫ화 세 버네 머고ᄃᆡ ᄒᆞ다가 피 몯 다 나 ᄇᆡ 안해 골ᄆᆞᆫ 피 잇거든 다시 머기면 골ᄆᆞᆫ 피 ᄂᆞ려 됴ᄒᆞ리라 又方蒲黃{{*|二兩}}當歸{{*|二兩末}}右相和更硏令勻每服以溫酒調下一錢日四五服{{*|}} ᄯᅩ 蒲뽕黃ᅘᅪᇰ 두 兩랴ᇰ과 當다ᇰ歸귕 두兩랴ᇰ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섯거 다시 ᄀᆞ라 고ᄅᆞ게 ᄒᆞ야 ᄒᆞᆫ 번 머고매 ᄃᆞᄉᆞᆫ 술로 ᄒᆞᆫ 돈ᄋᆞᆯ 프러 머고ᄃᆡ ᄒᆞᄅᆞ 네다ᄉᆞᆺ 번 머그라 金瘡內漏血在腹中不出以牡丹擣細羅爲散不計時候以溫酒調下三錢{{*|}} 金금瘡차ᇰ이 안ᄒᆞ로 ᄉᆞᄆᆞ차 피 ᄇᆡ 안해 이셔 나디 아니커든牡무ᇢ丹단 ᄋᆞᆯ 디허 細솅末마ᇙᄒᆞ야 처 散산 ᄆᆡᇰᄀᆞ라 時씽節져ᇙ 혜디 마오 ᄃᆞᄉᆞᆫ 술로 서 돈ᄋᆞᆯ 프러 머그라 又方以馬齒莧擣取汁每服煖飮一小盞卽止兼治惡血在腹中{{*|}} ᄯᅩ馬망齒칭莧ᅘᅧᆫ ᄋᆞᆯ 디허 汁집 아ᅀᅡ 머글 제 데여 ᄒᆞᆫ 小쇼ᇢ盞잔ᄋᆞᆯ 머그면 곧 긋ᄂᆞ니 모딘 피 ᄇᆡ 안해 이쇼ᄆᆞᆯ 조쳐 고티ᄂᆞ니라 衛生易簡方金瘡血不止用小薊葉挼爛封之{{*|}} 金금瘡차ᇰ 피 긋디 아니커든 小쇼ᇢ薊곙 니플 니기 부븨여 브티라 又方用白薇末貼之立止{{*|}} ᄯᅩ 白ᄈᆡᆨ薇밍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用白芍藥一兩熬黃爲末酒調二錢服或米飮亦止痛{{*|}} ᄯᅩ白ᄇᆡᆨ芍쟉藥약 ᄒᆞᆫ 兩랴ᇰᄋᆞᆯ 봇가 누르거든 細솅末마ᇙᄒᆞ야 수레 두 돈ᄋᆞᆯ 프러 머그며 시혹 ᄡᆞᆯ 글힌 므레 머거도 ᄯᅩ 알포미 긋ᄂᆞ니라 又方用血竭末傅之血與疼痛立止{{*|}} ᄯᅩ 血ᅘᆑᇙ竭꺼ᇙㅅ ᄀᆞᆯᄋᆞᆯ 브티면 피와 알포미 즉재 긋ᄂᆞ니라 又方金瘡腸出隨卽推入用桑皮作線縫佳以熱雞血塗之{{*|}}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챠ᇰᄌᆡ 나거든 卽즉時씽예 미러 녀코 ᄲᅩᇰ 거츠로 실 ᄆᆡᇰᄀᆞ라 호면 됴ᄒᆞ니 더운 ᄃᆞᆯᄀᆡ 피로 ᄇᆞᄅᆞ라 又方用靑蒿搗傅止血定痛生肌甚良{{*|}} ᄯᅩ 靑쳐ᇰ蒿호ᇢᄅᆞᆯ 디허 ᄇᆞᄅᆞ면 피 그츠며 알포미 그츠며 ᄉᆞᆯ히내사ᄂᆞ니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經驗良方治金瘡 木賊{{*|三兩}}麻黃{{*|去節一兩}}甘草{{*|七錢半}}右爲細末每服五錢熱酒調下先整骨了夾定飮之令醉{{*|}} 金금瘡차ᇰ 고툐ᄃᆡ 속새 세 兩랴ᇰ과 麻망黃ᅘᅪᇰ ᄆᆞᄃᆡ 아ᅀᅡ ᄒᆞᆫ 兩랴ᇰ과 甘감草초ᇢ 닐굽 돈 半반ᄋᆞᆯ 細솅末마ᇙᄒᆞ야 한 服뽁애 다ᄉᆞᆺ 돈ᄋᆞᆯ 더운 수레 프러 먹고 몬져 ᄲᅧᄅᆞᆯ 고텨 ᄢᅧ 단기고 술 머겨 醉ᄌᆔᆼ케 ᄒᆞ라 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蒜半升破去心皮右以無灰酒二升煮令極爛細硏每服一合已來須臾得汗卽差{{*|}} ᄯᅩ 金금瘡차ᇰᄋᆡ ᄇᆞᄅᆞᆷ 마자 왜트닐 고툐ᄃᆡ 마ᄂᆞᆯ 半반 되ᄅᆞᆯ ᄢᅢ혀 고ᄀᆡ야ᇰ과 거프를 앗고 ᄌᆡ 업슨 술 두 되로 글혀 ᄀᆞ자ᇰ 므르게 ᄒᆞ야 ᄀᆞᄂᆞ리 ᄀᆞ라 ᄒᆞᆫ 번 머고ᄃᆡ ᄒᆞᆫ 홉만 ᄒᆞ면 아니한 더데 ᄯᆞᆷ나면 즉재 됻ᄂᆞ니라 又方鷄糞{{*|二兩}}黑豆{{*|一升洗淨炒令燋黑}}右以酒三升煎熱投藥於酒中更煎三五沸去滓時時隨多少飮之令盡得汗爲佳未汗卽更作服以汗出爲度{{*|}} ᄯᅩ ᄃᆞᆯᄀᆡ ᄯᅩᇰ 두 兩랴ᇰ과 거믄 코ᇰ ᄒᆞᆫ 되ᄅᆞᆯ 조히 시서 봇가 검게 ᄒᆞ고 술 서 되로 글혀 덥거든 藥약ᄋᆞᆯ 수레 녀허 다시 세다ᄉᆞᆺ 번 글히고 즈ᅀᅴ 아ᅀᅡ 時씽時씽예 하거나 젹거나 머거 업게 ᄒᆞ야 ᄯᆞᆷ나미 됴ᄒᆞ니 ᄯᆞᆷ 곳 아니 나거든 다시 ᄆᆡᇰᄀᆞ라 머거 ᄯᆞᆷ날 ᄀᆞ자ᇰ ᄒᆞ라 又方雞子{{*|三枚}}鳥麻油{{*|五合}}合煎稍稠待冷塗瘡上極妙救急方上{{*|終}}{{*|}} ᄯᅩ ᄃᆞᆯᄀᆡ알 세 낫과 ᄎᆞᆷ기름 닷 호ᄇᆞᆯ ᄒᆞᆫᄃᆡ 달혀 져기 두텁거든 ᄎᆡ와 헌 ᄃᆡ ᄇᆞᄅᆞ면 ᄀᆞ자ᇰ 됴ᄒᆞ니라 {{옛한글/끝}} qf7f2zebb9gz8yasjxsknoej9kraj5g 페이지:셩경젼셔 구약 권2.pdf/520 250 113712 458009 2026-08-17T16:29:19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0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noinclude>벌을 피치못ᄒᆞ리라 ○ {{절||六}} 너그러은 사ᄅᆞᆷ의게 은춍을 구ᄒᆞᆯ쟈가 만흐니 사ᄅᆞᆷ마다 션물을 주ᄂᆞᆫ쟈의 친구가 되ᄂᆞ니라 {{절||七}} 간난ᄒᆞᆫ쟈는 그 형뎨들도 다 뎌를 뮈워ᄒᆞ거든 ᄒᆞ믈며 친구야 뎌를 멀니ᄒᆞ지아니ᄒᆞ겟ᄂᆞ냐 ᄯᆞ라가면셔 부를지라도 간 곳이 업ᄂᆞ니라 {{절||八}} 지혜를 엇ᄂᆞᆫ쟈는 ᄌᆞ긔의 령혼을 ᄉᆞ랑ᄒᆞ고 지식을 보존ᄒᆞᄂᆞᆫ쟈는 복을 엇으리로다 {{절||九}} 거즛 증인은 벌을 면치 못ᄒᆞᆯ 거시오 거즛 말을 내ᄂᆞᆫ쟈는 망ᄒᆞ리로다 {{절||十}} 미련ᄒᆞᆫ쟈가 샤치ᄒᆞᆫ 디위에 거ᄒᆞᆫ 거시 뎍당치못ᄒᆞ거든 ᄒᆞ믈며 죵이 쥬인을 다ᄉᆞ리ᄂᆞᆫ 일이랴 {{절||十一}} 사ᄅᆞᆷ의 슬긔는 노를 ᄎᆞᆷᄂᆞ니 잘못ᄒᆞᆫ 거슬 두남두ᄂᆞᆫ 거시 ᄌᆞ긔의 영광이 되ᄂᆞ니라 {{절||十二}} 왕의 노ᄒᆞᆷ은 ᄉᆞᄌᆞ가 부르지지ᄂᆞᆫ 것 ᄀᆞᆺ고 그 은ᄐᆡᆨ은 풀 우에 이슬 ᄀᆞᆺ도다 {{절||十三}} 미련ᄒᆞᆫ 아ᄃᆞᆯ은 그 아비의 ᄌᆡ앙이오 안ᄒᆡ가 다토ᄂᆞᆫ 거시 비 방울이 ᄒᆞᆼ샹 ᄯᅥ러지ᄂᆞᆫ 것 ᄀᆞᆺ흐니라 {{절||十四}} 집과 ᄌᆡ물은 조샹으로브터 오ᄂᆞᆫ 산업이오 어진 쳐는 여호와ᄭᅴ로 말ᄆᆡ암아 밧은 거시라 {{절||十五}} 게으른 거시 사ᄅᆞᆷ을 깁히 잠들게 ᄒᆞᄂᆞ니 ᄒᆡ타ᄒᆞᆫ 사ᄅᆞᆷ은 맛당히 주릴지니라 {{절||十六}} 명령을 직히ᄂᆞᆫ쟈는 ᄌᆞ긔의 령혼을 직히ᄂᆞᆫ 거시니 그 ᄒᆡᆼ실을 삼가지아니ᄒᆞᄂᆞᆫ쟈는 맛당히 죽으리라 {{절||十七}} 간난ᄒᆞᆫ쟈를 불샹히 녁이ᄂᆞᆫ쟈는 여호와ᄭᅴ ᄭᅮ이ᄂᆞᆫ 거시니<noinclude><references/></noinclude> qbb19pdxmzyqxyle8ent50jogl13bxe 페이지:셩경젼셔 구약 권2.pdf/521 250 113713 458010 2026-08-17T16:31:40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1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noinclude>그 ᄒᆡᆼᄒᆞᆫ대로 갑하주시리라 {{절||十八}} 네 아ᄃᆞᆯ이 쟝ᄎᆔ셩이 잇슬 동안에 징계ᄒᆞ되 죽일 ᄆᆞᄋᆞᆷ은 두지말지어다 {{절||十九}} 노ᄒᆞ기를 ᄆᆡᆼ렬히 ᄒᆞᄂᆞᆫ쟈는 벌을 밧을지니 네가 만일 뎌를 건져줄지라도 다시 건져줄 일이 ᄉᆡᆼ기리라 {{절||二十}} 네가 권ᄒᆞᄂᆞᆫ 말을 듯고 교훈을 밧으라 그리ᄒᆞ면 ᄆᆞᆺᄎᆞᆷ내 지혜가 잇스리라 {{절||二一}} 사ᄅᆞᆷ의 ᄆᆞᄋᆞᆷ에는 여러 계교가 잇서도 오직 여호와의 ᄯᅳᆺ은 완뎡히 서리라 {{절||二二}} 사ᄅᆞᆷ이 인ᄌᆞᄒᆞᆷ을 베플매 다 ᄉᆞ모ᄒᆞᄂᆞ니라 간난ᄒᆞᆫ쟈는 거즛 말 ᄒᆞᄂᆞᆫ쟈보다 낫도다 {{절||二三}} 여호와를 경외ᄒᆞᄂᆞᆫ 거슨 ᄉᆡᆼ명을 엇게 ᄒᆞᆷ이니 경외ᄒᆞᄂᆞᆫ쟈는 ᄒᆞᆼ샹 풍죡ᄒᆞ고 ᄌᆡ앙을 맛나지안ᄂᆞ니라 {{절||二四}} 게으른쟈는 그 손을 그릇에 넛코 오히려 다시 입으로 드려가지아니ᄒᆞᄂᆞᆫ도다 {{절||二五}} 거만ᄒᆞᆫ쟈를 ᄯᅡ리면 어리셕은쟈도 삼갈 거시오 총명ᄒᆞᆫ쟈를 견ᄎᆡᆨᄒᆞ면 뎌가 지식을 엇으리라 {{절||二六}} 아비의 ᄌᆡ물을 로략ᄒᆞ고 어미를 ᄶᅩᆺ차내ᄂᆞᆫ 아ᄃᆞᆯ은 붓그러옴이 니르고 릉욕을 부르ᄂᆞᆫ쟈가 되ᄂᆞ니라 {{절||二七}} 내 아ᄃᆞᆯ아 지식의 말을 ᄇᆞ리고 미혹케 ᄒᆞᄂᆞᆫ 교훈을 듯지말나 {{절||二八}} 헛된 증인은 공의를 업수히녁이고 악인의 입은 악을 삼키ᄂᆞ니 {{절||二九}} 심판은 거만ᄒᆞᆫ쟈를 위ᄒᆞ야 예비ᄒᆞᆫ 거시오 채ᄶᅵᆨ은 어리셕은쟈의 등을 위ᄒᆞ야 예비ᄒᆞᆫ 거시니라 {{nop}}<noinclude><references/></noinclude> edkgqihme5jovqpu5l7q1bnnhylyu3v 페이지:셩경젼셔 구약 권2.pdf/522 250 113714 458011 2026-08-17T16:35:19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1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noinclude>{{nop}} == 이십쟝 == {{절|二十|一}} 술은 거만케 ᄒᆞᆷ이오 독ᄒᆞᆫ 술은 ᄯᅥ들게 ᄒᆞᄂᆞ니 무릇 여긔 미혹ᄒᆞᆫ쟈는 지혜가 업도다 {{절||二}} 왕의 진노ᄒᆞᆷ은 ᄉᆞᄌᆞ가 브르지짐 ᄀᆞᆺ고 뎌를 노ᄒᆞ게 ᄒᆞᄂᆞᆫ쟈는 죄를 엇어 ᄌᆞ긔의 ᄉᆡᆼ명을 해ᄒᆞᆷ이라 {{절||三}} 다톰을 멀니ᄒᆞᄂᆞᆫ쟈의게 영광이 잇스나 미련ᄒᆞᆫ쟈마다 다토ᄂᆞᆫ도다 {{절||四}} 게으른쟈는 치위를 인ᄒᆞ야 밧갈지아니ᄒᆞᄂᆞᆫ지라 그런고로 거둘 ᄯᅢ에 구걸ᄒᆞᆯ지라도 엇ᄂᆞᆫ 거시 업스리라 {{절||五}} 사ᄅᆞᆷ의 ᄆᆞᄋᆞᆷ에 잇ᄂᆞᆫ 계교는 깁흔 물 ᄀᆞᆺ흐나 그러나 총명ᄒᆞᆫ 사ᄅᆞᆷ은 그 거슬 기러내ᄂᆞ니라 {{절||六}} 사ᄅᆞᆷ이 ᄆᆡ양 ᄌᆞ긔의 ᄌᆞ비를 ᄌᆞ랑ᄒᆞᄂᆞᆫ쟈가 만흐나 누가 츙셩된쟈를 맛나리오 {{절||七}} 완젼히 ᄒᆡᆼᄒᆞᄂᆞᆫ 의인이여 그 후 ᄌᆞ손이 복이 잇슬진뎌 {{절||八}} 심판 자리에 안즌 왕은 그 눈으로써 모든 악을 흣허지게 ᄒᆞᄂᆞ니라 {{절||九}} 내가 내 ᄆᆞᄋᆞᆷ을 졍ᄒᆞ게 ᄒᆞ엿다 ᄒᆞ며 내 죄를 ᄭᆡᆨ긋ᄒᆞ게 ᄒᆞ엿다 ᄒᆞᆯ이가 누구뇨 {{절||十}} 두 가지 져울 츄와 두 가지 말은 일졀 여호와의 뮈워ᄒᆞ시ᄂᆞᆫ바라 {{절||十一}} 비록 어린 ᄋᆞ희라도 그 ᄒᆡᆼ동으로 말ᄆᆡ암아 셩픔을 나타내ᄂᆞ니 그 ᄒᆡᆼ실의 쳥결ᄒᆞ고 바른 여부를 아ᄂᆞ니라 {{절||十二}} 듯ᄂᆞᆫ 귀와 보ᄂᆞᆫ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바라 {{절||十三}} 너는 잠자기를 됴하ᄒᆞ지말지어다 네가 빈궁ᄒᆞᆫ ᄃᆡ 니를가 두려워ᄒᆞ노니 네 눈을 ᄯᅳ라 그리ᄒᆞ면<noinclude><references/></noinclude> 3cbb92zlldwrl35mdd228ygya8z9jxb 페이지:셩경젼셔 구약 권2.pdf/523 250 113715 458012 2026-08-17T16:38:13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1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noinclude>량식에 ᄇᆡ 부르리라 {{절||十四}} 사ᄂᆞᆫ쟈의 말이 됴치못ᄒᆞ다 됴치못ᄒᆞ다 ᄒᆞ다가 사가지고 간 후에는 스ᄉᆞ로 ᄌᆞ랑ᄒᆞᄂᆞ니라 {{절||十五}} 금도 잇고 홍보셕도 만히 잇슬지라도 귀ᄒᆞᆫ 보ᄇᆡ는 지식의 입셜이니라 {{절||十六}} 외인을 위ᄒᆞ야 보증이 된쟈의 옷을 볼모 잡고 타국 사ᄅᆞᆷ의 보증이 된쟈의 몸을 볼모 잡으라 {{절||十七}} 속이고 ᄲᅢ아슨 량식은 맛이 ᄃᆞ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ᄀᆞ득ᄒᆞ니라 {{절||十八}} 모든 경건은 서로 의론ᄒᆞᆷ으로 말ᄆᆡ암아 일우ᄂᆞᆫ 거시니 싸호려ᄒᆞ거든 됴흔 방ᄎᆡᆨ을 몬져 베플지니라 {{절||十九}} 입이 헤픈쟈는 두루 ᄃᆞᆫ니며 사ᄅᆞᆷ의 은밀ᄒᆞᆫ 일을 루셜ᄒᆞᄂᆞ니 입셜을 버리고 두루 ᄃᆞᆫ니ᄂᆞᆫ쟈를 ᄉᆞ괴지말나 {{절||二十}} ᄌᆞ긔의 부모를 져주ᄒᆞᄂᆞᆫ쟈는 그 등불이 캄캄ᄒᆞᆫ 가온ᄃᆡ셔 ᄭᅥ지리라 {{절||二一}} 처음에 속히 엇은 산업은 ᄆᆞᆺᄎᆞᆷ내 복이 되지못ᄒᆞ리라 {{절||二二}} 너희가 닐ᄋᆞ기를 내가 악을 갑겟다 ᄒᆞ지말고 여호와를 기ᄃᆞ리라 너를 구원ᄒᆞ시리라 {{절||二三}} 두 가지 져울 츄는 여호와의 뮈워ᄒᆞ시ᄂᆞᆫ바니 거즛 져울은 됴치못ᄒᆞᆫ 거시니라 {{절||二四}} 사ᄅᆞᆷ의 ᄒᆡᆼ위는 여호와ᄭᅴ로 말ᄆᆡ암ᄂᆞ니 사ᄅᆞᆷ이 엇지 ᄌᆞ긔의 길을 알니오 {{절||二五}} ᄒᆞᆷ부로 거륵ᄒᆞᆫ 물건이라 ᄒᆞᄂᆞᆫ 거시 그 사ᄅᆞᆷ의게셔 그믈이 되ᄂᆞ니 ᄆᆡᆼ셰를 ᄒᆞᆫ 후에 달니 ᄉᆡᆼ각ᄒᆞᄂᆞᆫ 일도 ᄯᅩᄒᆞᆫ 그러ᄒᆞ니라 {{절||二六}} 지혜로온 왕은 악인을<noinclude><references/></noinclude> l2zaouw3gee678b23akk2j0s43n057e 페이지:셩경젼셔 구약 권2.pdf/524 250 113716 458013 2026-08-17T16:49:27Z Aspere 5453 /* 교정 안 됨 */ 458013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Aspere" /></noinclude>키로 ᄭᅡᆸ을듯ᄒᆞ고 타작ᄒᆞᄂᆞᆫ 박회로 그 우에 굴니듯ᄒᆞ도다 {{절||二七}} 사ᄅᆞᆷ의 령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니 사ᄅᆞᆷ의 ᄇᆡ 속 깁흔 거슬 ᄉᆞᆯ피ᄂᆞ니라 {{절||二八}} ᄌᆞ비와 진리는 왕을 보호ᄒᆞ매 그 위가 ᄯᅩᄒᆞᆫ ᄌᆞ비ᄒᆞᆷ으로 말ᄆᆡ암아 견고ᄒᆞ니라 {{절||二九}} 젊은쟈의 영화는 그 힘이오 늙은쟈의 아름다온 거슨 ᄇᆡᆨ발이니라 {{절||三十}} 샹쳐가 나도록 ᄯᅡ리면 악ᄒᆞᆫ 거슬 ᄭᆡᆨ긋ᄒᆞ게 ᄒᆞᄂᆞ니 치ᄂᆞᆫ 채ᄶᅵᆨ이 ᄇᆡ 속ᄭᆞ지라도 드러가ᄂᆞ니라 == 이십일쟝 == {{절|二十一|一}} 왕의 ᄆᆞᄋᆞᆷ은 여호와의 손 가온ᄃᆡ 잇서셔 맛치 보의 물과 ᄀᆞᆺ흐니 ᄌᆞ긔의 ᄯᅳᆺ대로 인도ᄒᆞ시ᄂᆞᆫ도다 {{절||二}} 사ᄅᆞᆷ의 모든 ᄒᆡᆼ실이 ᄌᆞ긔 보기에는 졍직ᄒᆞ되 오직 여호와ᄭᅴ셔는 각 ᄆᆞᄋᆞᆷ을 져울질 ᄒᆞ시ᄂᆞ니라 {{절||三}} 의와 공평을 ᄒᆡᆼ ᄒᆞᄂᆞᆫ 거슨 여호와ᄭᅴ셔 졔ᄉᆞ보다 더 깃버ᄒᆞ시ᄂᆞᆫ바라 {{절||四}} 놉흔 눈과 교만ᄒᆞᆫ ᄆᆞᄋᆞᆷ과 악인의 등불이라도 다만 죄ᄲᅮᆫ이오 {{절||五}} 부지런ᄒᆞᆫ쟈의 도모ᄒᆞᄂᆞᆫ 거슨 풍셩케 ᄒᆞᆯᄲᅮᆫ이오 무릇 조급ᄒᆞᆫ쟈는 빈궁ᄒᆞᆯᄲᅮᆫ이니라 {{절||六}} 거즛 혀로 엇은 ᄌᆡ물은 불녀 ᄃᆞᆫ니ᄂᆞᆫ 안ᄀᆡ와 ᄀᆞᆺ흐니 이 거슬 구ᄒᆞᄂᆞᆫ쟈는 죽ᄂᆞᆫ 거슬 구ᄒᆞᄂᆞᆫ쟈니라 {{절||七}} 악인의 강포ᄒᆞᆫ 거슨 ᄌᆞ긔를 쇼멸ᄒᆞᄂᆞ니 공의 ᄒᆡᆼᄒᆞ기를 슬혀ᄒᆞᆷ이니라 {{절||八}} 죄의 짐이 무거온쟈의 길은 심히 굽으러지고 ᄭᆡᆨ긋ᄒᆞᆫ쟈의 ᄒᆡᆼ위는 곳으니라<noinclude><references/></noinclude> a0ggs3vb6ocuisijx9xr3g2me7xdhzx 누구의 죄 (방정환) 0 113717 458053 2026-08-18T00:44:06Z ZornsLemon 15531 새 문서: {{머리말 |제목 = 누구의 罪? |지은이 = 로버트 매길 |역자 = [[저자:방정환|방정환]]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별건곤》 2호, 1926년 12월 호에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번역 작품이다. Robert Magill의 일어 번역 작품의 중역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작품의 번역인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 {{더더크게|누구의 罪?}} 英 로바-드·마-길 北極星 譯 ᄯᅳᆺ... 458053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 누구의 罪? |지은이 = 로버트 매길 |역자 = [[저자:방정환|방정환]] |부제 = |이전 = |다음 = |설명 = 《별건곤》 2호, 1926년 12월 호에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번역 작품이다. Robert Magill의 일어 번역 작품의 중역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작품의 번역인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 {{더더크게|누구의 罪?}} 英 로바-드·마-길 北極星 譯 ᄯᅳᆺ 안 맛는 어븟아들, 아들의 애인인 어엽븐 처녀, 빗 갑흐러 온 변호사 이 세 사람이 눈을 ᄯᅳ고 서 잇는 그 자리에서 돈만흔 로인은 ᄶᅵᆯ려 죽엇다. 눈 ᄭᅡᆷ작할 동안에 번개가티 생긴 살인 사건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공범도 아니요 세 사람이 그 자리에 잇고도 범인을 모른다. 긔? 괴? 범인은 누구 ᄭᅡ닭은 무엇. 탐뎡은 천천히 입을 열엇다. === 一 === 변호사 「{{드러냄표|헨리―밧드}}」는, 과부집 대돈변보다는 더 빗싼 이 집의 빗을 갑흐려고 돈을 가지고 담보물을 차즈러 왓스나 긔한이 사흘 지낫다는 핑계로, 늙은이는, 담보물을 그냥 삼켜 버릴 욕심이엿다. 여러 번 졸라도 고개 한 번 ᄭᅳᆺ덕이지 안턴 주인 로인은 책상 우에 노힌 지권 뭉치는 본톄 <!-- 116 --> 도 안 하고 ᄭᅮ짓듯이 중얼거렷다. 「흥, 담보를 도로 내이라니 그런 잠ㅅ고대 가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어대 잇나」 변호사인만큼 별별 협잡군과 별별 사기 사건을 만히 보앗지만 이럿케 엄청나게 욕심을 부리는 빗장이는 처음 보는 터이라, 넘어 어이가 업섯다. 「二三日 느젓다고, 이럿케 연톄 리자ᄭᅡ지 ᄭᅡᆨ듯이 해왓는데 그건 넘어 무리한 말슴 아님닛가」 「그ᄯᅡ위 수작은 하지 말어!!」 로인은, 무슨 큰 권세나 부리는 듯이 책상을 ᄯᅡᆼ 치면서 소리 질넛다. 「긔한 전에 가저 왓드면 아모 말 안 하고 담보물을 내여 주엇지…… 二三일 아니야 단 하루라도 긔한이 지낫스닛가 담보물은 아모리 갑만흔 것이라도 내 물건이 된 것 아닌가. 그것을 그럿케 갑만흔 것이 내 물건이 되엇는데 고ᄭᅡ짓 리자 좀 더 밧고 도로 내여 줄 듯 십은가?」 변호사는 그만 참지 못할듯키 얼골빗이 변하엿다. 그러나 간신히 마음을 가려 안처 가지고 「잘 알앗소이다」 하고 말을 ᄭᅳᆫ엇다. 「알앗스면 고만이지」 내여 던지듯이 미여운 소리를 하고는 빙그르 도라 안저서 책상 우에 잇는 컴파쓰(兩脚規)의 다리를 벌려 가지고 무언지 둥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엿다. 담보물을 찻기는 고사하고 도로혀 신사로 당할 수 업는 모욕만 당한 변호사 헨리―는 닭ᄶᅩᆺ든 개 모양으로 벙벙히 서서 방안을 둘러보앗다. 방에는 아모 장식도 업시 늙은이가 안저 잇는 머리 우 텬정에 다섯 개 달린 뎐긔등이 돈앗기느라고 단 한 개만 켜저 잇고, 한편 구석 란로 우에 잇는 뎐등도 로인의 인색한 경제관렴으로 켜본 적이 업섯다. 한편 벽에 넷날 시대의 진긔한 무긔―긴 칼 넷날 창 가튼 것들―가 보물가티 장식으로 걸려 잇는 것을 보면 이 집이 전에는 상당한 행세하는 이의 집이엿든 것 가튼데 방바닥에 ᄭᅡᆫ 양탄자는 해여지고 헐어서 구멍이 펑펑 ᄯᅮ러진 것을 보면 이 집도 빗으로 ᄲᅢ아서 가지고 조흔 양탄자를 치우고 인색스럽게 뎐긔도 만히 안 켜고 양탄자도 다 해여진 것을 ᄭᅡᆯ아 노코 잇는 것이 분명하엿다. 한동안 렬심으로 컴파쓰를 돌니여 둥근 금을 긋고 그 치수를 재우고 잇던 로인은 얼골을 들더니 컴파쓰를 접어서 족기 웃주머니에 만년필처럼 ᄭᅩᆺ고 벌덕 니러섯다. 그ᄯᅢ에 방문이 열리고 어엽브게 생긴 처녀가 드러왓다. 「아젓씨 닐곱시 十五분임니다. 저녁 진지 잡수세요」 「무어야?」 늙은이는 심술구진 눈으로 미운 사람가티 처녀를 흘겨 보앗다. 쌀쌀스럽게 치운 날 얇은 옷을 닙은 처녀는 겁나는 듯이 주춤주춤 벽란로 엽흐로 갓가히 갓다. 「에그 너 그 대가리에 ᄭᅩ즌 게 ᄲᅡᆫ작ᄲᅡᆫ작하는 게 그게 무어냐 응?」 {{nop}} <!-- 117 --> 어엽븐 처녀는 로인이 손님 잇는 압헤서 쌍스럽게 하는 소리에 얼골빗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머리에서 송굿가티 ᄲᅵ죽한 핀을 ᄲᅩᆸ아 들엇다. 그 핀의 대가리에는 보석이 물려 잇섯다. 「{{드러냄표|로날드}} 옵바가 제 생일날 선물로 사준 거야요」 「이년!!」 하고 로인은 얼골을 ᄶᅵᆼ기면서 골난 소리를 질넛다. 「그 은혜도 모르는 로날드란 놈이 사 주엇서? 흥 그놈을 이리 불러오너라!」 이윽고 처녀에게 불리여 로인의 어붓아들 로날드가 드러왓다. 그는 키가 후리후리한 잘생긴 훌륭한 청년이엿다. 「아버지 왜 부르섯슴닛가」 「응 내가 어적게 너의들이 뒷마당에 가티 잇는 것을 보앗는데 너는 그ᄯᅢ 이 애하고 입을 맛첫지」 「네……」 하고 청년은 침착하고도 씩씩하게 대답을 계속하엿다. 「저는 이 애를 사랑함니다. 저 애도 저를 사랑함니다. 언제던지 긔회만 잇스면 저의들 둘이 결혼을 하겟다고 엿주려고 햇슴니다」 「무어야? 이 녀석아 결혼?」 하고 로인은 큰 일난 듯이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소리첫다. 그 통에 붉은 잉크가 업질러저서 책상에 흘럿다. 「너는 내가 길러주는 은헤는 모르고 얼른 어른이 되여 가지고 내 재산을 횡령해 가즈려고 그러지」 「은혜, 은혜하시지만 무슨 큰 은혜가 잇슴닛가. 어붓아들이라고 원수 가티만 녀기면서 부려먹기만 하는 그 은혜 말슴임닛가?」 청년…… 흥분되야 노한 소리로 드리대엿다. 「그러고 밤낫 재산 재산하시니 저승에ᄭᅡ지 재산은 못 가지고 가는 것임니다」 로인은 고만 머리ᄭᅳᆺᄭᅡ지 노긔가 올랏다. 「올치 이 녀석 아뭇소리라도 해라!! 나는 유언서를 다시 고쳐쓸 터이다. 내가 죽은 후라도 너하고 이년에게는 피천 한푼도 안 줄 터이다」 「마음대로 합시오 그려」 하고 청년은 코우숨치면서 「아이고 인제야 저의는 묵어운 짐을 버슨 것 갓슴니다. 그러면 래일이라도 당장에 이 집에서 나가겟슴니다. 지금 곳, 짐을 묵거 놋치요. 가겟슴니다 가서 짐을 묵겟슴니다」 하고 나아가다가 다시 도라서 「앗차 그 찬칼 좀 빌려 주십시오. 짐 묵는 줄을 ᄭᅳᆫ케요」 하고 로인의 책상에 가서 ᄲᅵ―죽한 칼을 집어 들고 방문을 향하야 거러갓다. 의외에 시작된 이 집안 싸움이 ᄭᅳᆺ나기를 기다리노라고 변호사 헨리―는 심심한 ᄯᅢ의 손ㅅ작란으로 그 벽에 걸닌 넷날 창(槍)ᄭᅳᆺ을 주물으고 섯고 처녀는 벽란로 엽헤서 핀을 손에 든 채로 얼골이 파래 가지고 발발 ᄯᅥᆯ고 잇섯다. 「얘 이 녀석아!!」 하고 로인은 찬칼을 가지고 나가려는 {{드러냄표|로날드}}를 불러세웟다. <!-- 118 --> 「나는 유언서를 고처 쓸 터이닛가 인제 四만 폰드는 네 돈이 못 된다. 너는 내가 얼른 죽엇스면 죽엇스면 하고 잇지…… 아니 너 하나ᄲᅮᆫ 아니라 이놈 저놈이 모다 나 하나만 죽기를 바라고 잇는 줄을 나는 다 안다. 우선 내가 죽으면 저 변호사 헨리―도 조와할 테지 밥 짓는 할멈도 시원해할 테지 내게 빗을 진 놈은 모다 조와할 테지. 그럿치만 내가 죽을 줄 아늬? 내가 죽을 듯 십으냐?」 로인은 귀신 갓튼 소리로 ᄭᅡᆯᄭᅡᆯ 우섯다. 그런데 그ᄯᅢ 별안간 불이 휙 ᄭᅥ젓다. 캄캄해진 방안에 벽란로의 숫불만이 벌―것케 보일 ᄲᅮᆫ이엿다. 바작 바작! 별안간에 누구인지 것는 발소리가 낫다. 그러자 쿵! 하고 업더지는 소리, 날카롭게 부르짓는 소리―. 로날드 청년은 급히 ᄯᅱ여가서 방문 갓갑게 잇는 뎐긔고등을 틀엇다. 불이 환―하게 켜젓는데 보닛가 세 사람은 여전히 앗가 불 ᄭᅥ지기 젼에 섯든 고 자리에 고대로 서 잇다. 누가 업더젓고 누가 브르지젓슬가― 로인은 어대 갓나? 자세 보닛가 로인은 얼골이 샛파래저서 책상 다리 밋헤 무릅을 ᄭᅮᆯ코 두 손으로 가슴을 고이고 잇는데 그 두 손 사이에서 샛ᄲᅡᆰ안 피가 샘물갓티 흘러나오고 잇다. 세 사람이 눈이 둥글할 ᄯᅢ 로인은 폭 업더지면서 ᄭᅵᆼ―ᄭᅵᆼ― 신음하엿다. 변호사와 청년이 ᄯᅱ여가서 안어 니르키려 할 ᄯᅢ는 벌서 아모 수도 업섯다. 단 수삼초(二三秒) 동안 어둡든 동안 고 동안에 무언지 날카로운 연장으로 가슴 심장(心臟)을 ᄶᅵᆯ려서……… === 二 === 변호사 {{드러냄표|헨리―밧드}}씨의 뎐화로 탐뎡 코볼드씨와 의사가 급히 달려왓다. 탐뎡은 변호사와 로날드 청년의 진술을 ᄭᅳᆺᄭᅡ지 차근차근히 듯고 나서 방중을 수색하기 시작하엿다. 「흉긔를 엇잿슬고?」 하고 탐뎡 코볼드씨가 중얼거렷다. 참말 이 이상스럽고도 무서운 살인 범죄에 씨엿슴즉한 흉긔가 보이지 안엇다. 「이상한 일이지 대톄 무얼로 죽엿슬고」 「상처는 三인치나 되게 깁슴니다」 하고 의사가 설명을 시작하엿다 「피가 쏘다진 분수로 추측하면 상처는 심장과 대동맥(大動{{sic|脉|脈}})의 접속뎜을 날카로운 연장으로 ᄶᅵᆯ닌 것이 분명함니다. 연장은 몹시 날카롭고 ᄲᅭ죽한 것임니다」 그ᄯᅢ 로날드 청년의 눈에 처녀의 손에 들고 잇는 핀이 새삼스레 ᄯᅴ엿다. 「자살은 아니겟지」 탐뎡이 갑갑한 듯이 중얼거렷다. 「상처의 성질로 보아 자살설(說)은 성립되지 안슴니다. 그러고 자살이면 흉긔가 이 자리에 잇슬 것이 아님닛가」 고 의사가 부정하엿다. {{nop}} <!-- 119 --> 「대톄 이러케 여러 사람이 한 방안에 섯섯는데 단 二三초 ᄯᅩᆨᄯᅡᆨ하는 동안에 번개갓티 죽일 수 잇섯다는 것은 암만해도 이상한 일인데?」 그ᄯᅢ 로날드 청년이 두어 거름 나섯다. 「더 됴사하실 필요는 업슴니다. 내가 죽엿슴니다」 「그대가?」 탐뎡과 의사는 물론 변호사ᄭᅡ지 놀내여 물엇다. 「네― 내가 죽엿슴니다」 대답하는 그의 얼골에는 고민하는 빗이 나타낫다 「아시는 바와 갓티 죽은 이는 나의 어붓아버지임니다. 지금ᄭᅡ지도 여긔서 서로 다투고 잇섯슴니다. 나를 미워하야 유언장을 고쳐 쓰겟다고 한고로 나는 뎐긔가 ᄭᅥ젓슬 ᄯᅢ 압뒤 생각 업시 그냥 ᄶᅵᆯ너 죽엿슴니다」 여러 사람은 아모 말 못하고 눈만 둥글하엿슴니다. 탐뎡도 어이가 업서 입을 못 열엇슴니다. 「흉긔는 이것임니다. 내가 짐을 묵는 데 쓰려고 이 칼을 가지고 나가려 할 ᄯᅢ에 뎐등이 ᄭᅥ진 고로……」 하고 손에 들엇든 찬칼을 내노앗다 자아 「이것 보십시오 이럿케 칼ᄭᅳᆺ에 피ᄭᅡ지 무덧슴니다」 하는 그의 입설은 바르르 ᄯᅥᆯ렷다. 그것을 보는 처녀의 얼골은 그냥 샛파랏케 질리여 당장 긔졀할 것 갓탯다. 「정말임니다. 더 됴사할 것 업시 나를 묵그서요」 탐뎡은 아모 말 업시 로날드의 얼골을 한참이나 드려다 보더니 변호사와 처녀를 보고 「두 분은 잠간 저켠 방으로 가서 계십시오. 이 청년에게 무러볼 말이 잇슴니다」 하야 엽방으로 보내노고 다시 로날드 청년에게 아조 친절한 말투로 「그대는 왜 그런 수상스런 자백을 하오?」 「수상한 자백이라니요」 청년은 덜컥하엿다. 「첫재 그대는 거짓말 자백이야 그 칼에 무덧다는 피를 먼저 됴사해 보면 알지」 의사는 즉시 그 찬칼에 무든 피를 조희에 뭇처서 드려다 보더니 「이것은 피가 아니고 붉은 잉크임니다」 하엿다. 「내 짐작이 마젓지」 하고 탐뎡은 싱ᄭᅳᆺ 웃고 나서 「그러고 로날드군은 찬칼을 가지고 나아가려고 하엿섯다니 방문 엽헤 잇섯슬 것 아닌가 그러나 단 二三초 동안에 엇더케 책상 엽헤ᄭᅡ지 가서 뎐긔고등을 틀 사이가 잇느냐 말이지 그럿치 안어?」 「아니야요. 방문 엽헤 서서 칼을 던젓서요」 하고 {{드러냄표|로날드}}는 그래도 자긔의 죄인 것을 주장하엿다. 「그럼 인제는 아조 그짓말인 것이 드러낫지 그대의 아버지는 책상을 향하느라고 방문 ᄶᅩᆨ으로 등을 향하고 잇섯는데 방문 ᄶᅩᆨ에서 던젓다는 찬칼이 무슨 재조로 억개 우로 넘어서 다시 도라 서서 가슴에 ᄭᅩᆺ칠 수가 잇나 말이야…… 그대는 누구인지 정말 죄인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 120 --> 그짓말로 자백을 한 것이 아닌가」 로날드 청년은 그만 대답을 못하고 입설을 ᄭᅢ물고 얼골이 파래저서 푹 숙으러젓다. 「그대가 자긔 몸으로 희생하기ᄭᅡ지 하야 숨겨주려고 하는 사람이 변호사가 아닐 것은 물론 아닌가 그럿타고 하면 그대의 련인(戀人)인 처녀가 분명하지…… 자아 이 시톄는 웃층으로 옴겨다 두고 그러고 그 처녀에게 자세 뭇기로 하지……」 === 三 === 「그ᄯᅢ 뎐등이 ᄭᅥ젓슬 ᄯᅢ 도라간 로인의 엽헤 뎨일 갓갑게 섯섯든 사람이 당신이라지요」 하고 탐뎡은 처녀에게 마서운 심문을 시작하엿다. 「그럼 내가 죽엿다고 하는 말슴임닛가?」 하고 처녀는 발발 ᄯᅥᆯ엇다. 「나는 의심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닛가 모든 사람에게 의심을 두어 보는 것임니다. 로인의 엽헤 단 한두 거름 밧게 안 ᄯᅥ러저 섯든 이가 당신이닛가 뎐등이 ᄭᅥ저서 캄캄해진 고 동안 단 一二초 동안에 로인의 가슴을 ᄶᅵᆯ러 노코 다시 제 자리에 가서 섯슬 수 잇기는 당신 한아 ᄲᅮᆫ 아님닛가?」 처녀는 그만 아모 말도 못하고 얼골을 숙이고 울기 시작하엿다. 그ᄯᅢ 그의 숙으린 머리에 ᄭᅩᆺ처 잇는 핀이 탐뎡의 눈에 ᄯᅴ엿다. 「그 머리에 ᄭᅩᆺ친 핀을 좀 보여주시요」 탐뎡의 말소리는 강하엿다. 처녀는 핀을 ᄲᅢ여 내노앗다. 「이걸로 ᄶᅵᆯ너 죽일 수 잇슬가요?」 탐뎡의 말ᄭᅳᆺ헤 「죽일 수 잇고 말고요 넉넉히 죽임니다. 그런데 피가 무든 흔적이 업는 걸요」 의사가 대답하엿다. 「그야 곳 씨섯겟지요 현미경으로 보아보지요」 그ᄯᅢ 처녀는 고만 긔절하야 쓰러질 번한 몸을 간신히 우편 손으로 벽란로의 웃턱을 집고 의지하엿다. 그러나 다행히 쓰러지지는 안엇스나 「에그머니」 소리를 치고 집헛든 바른손을 번ᄶᅥᆨ 들고 ᄶᅥᆯᄶᅥᆯ매엿다. 「왜 그러시요」 하고 의사가 눈이 둥글하야 무럿다. 「이 손목이 ᄲᅵᆫ 손목인데 지금 란로 턱을 집고 힘을 써서 부러지는 것 갓티 압허서 그래요」 참말 보닛가 그의 어엽븐 손목이 퉁퉁이 부어 가지고 빗ᄭᅡ지 푸르러저 잇섯다. 「엇저다 ᄲᅵ엿나요」 의사가 그 손목을 잡고 무럿다. 「어적게 저녁 ᄯᅢ 도라가신 아젓씨에게 ᄭᅮ지람을 드를 ᄯᅢ 어더 마즈면서 벌컥 너머질 ᄯᅢ에 ᄲᅵ엿서요 아젓씨는 갓금 저를 ᄯᅢ리시닛가요」 의사는 한참이나 그 손목을 드려다보더니 「올ㅅ소 참말 오늘 ᄲᅵᆫ 손은 아니요. 여보 코볼드씨 이 처녀도 무죄임니다. 이 처녀는 도라간 로인의 우편에 섯섯다닛가 이 이가 ᄶᅵᆯ럿다면 바른손에 힘이 잇서야 할 것인데 이럿케 바른손으로 흉긔를 쥘 수도 업섯스닛가 <!-- 121 --> 요」 하고 크게 말하엿다. 「절대로 못 쥘가?」 탐뎡은 다저 물엇다. 「절대로지요」 「그럼 무죄임니다. 인제는 변호사만 남엇군요」 === 四 === 「도라간 로인은 인색하여서 ᄭᅫ 남에게 미움을 밧든 이라지요?」 탐뎡은 이 방으로 불려 드려온 변호사 헨리―밧도씨에게 뭇기 시작하엿다. 「녜― 그럿슴니다」 「그럼 당신도 퍽 미워하섯겟슴니다 그려」 「그 로인은 누구에게던지 미움을 밧슴니다. 원톄 늙은이가 더럽고 천박한 사람임니다. 첫재 인색하고도 욕심이 사나워서 흉악한 짓으로 빗노이를 하야 불상한 사람의 소유를 억지로 ᄲᅢ앗는 부정한 인물임니다」 변호사는 연설하듯 하엿다. 「녜― 그럿켓슴니다」 하고 탐정은 계속하야 「그런데 뎐등이 ᄭᅥ질 ᄯᅢ에 당신은 어대 섯섯슴닛가」 변호사는 ᄯᅮ벅ᄯᅮ벅 걸어서 저편 벽 옛날 창이 걸려 잇는 곳에 가서 웃둑 섯다. 「여긔 섯섯소이다」 「녜― 로인에게서 한 十보나 ᄯᅥ러저서 섯슴니다 그려」 하고 탐뎡은 눈을 번ᄯᅳᆨ이엿다 「그럼 그 자리에서 한 거름도 움즉이지 안엇슴닛가?」 「물론임니다」 「그러나 그곳을 움즉이기드래도 그 옛날 창을 ᄭᅳ내 들고 ᄶᅵᆯ르면 거긔 서서 로인의 가슴을 ᄶᅵᆯ을 수 잇섯겟지요 한 발만 쑥 내여 드듸고 드리 ᄶᅵᆯ르면 바로 가슴을 ᄶᅵᆯ리지 안켓슴닛가?」 「에엣 그런 당치도 안흔 말을…… 그런 그런」 「아니요 그 현장에 잇섯든 이는 세 사람 ᄲᅮᆫ임니다. 그런데 먼저 취됴한 결과 두 분은 혐의가 ᄭᅢᆺ긋이 버서젓슴니다. 그런데 당신만은 그 이를 죽일 동긔(動機)라고 할 만한 것이 충분히 잇고 그 우에 흉긔도 잇고, ᄯᅩ 그 잠ᄭᅡᆫ 동안에 넉넉히 ᄶᅵᆯ을 수도 잇섯스닛가요」 하고 탐뎡은 벌덕 니러나서 벽 엽헤ᄭᅡ지 가서 거긔 걸려 잇는 옛날 창의 ᄭᅳᆺ을 자세 드려다보더니 「야 여긔 피가 뭇덧다!!」 하고 소리첫다. 그리고 의사를 도라다보고 「이것 좀 보아 주십시오. 이 창ᄭᅳᆺ에 뭇든 것이 분명히 사람의 피지요?」 「녜― 피는 피 갓슴니다. 그러나 자세 됴사해 보지 안으면 모르겟스닛가 이 창을 ᄯᅦ여 내려 가지고 자세 보기로 합시다」 의사의 말대로 탐뎡은 달겨들어 창을 고리에서 벗겨 나리려 하엿다. 그러나 그 창은 굿게 굿게 장식을 박어 벽에 박어 논 것이고 나사를 틀고 그 장식 못을 ᄲᅢ여 낸 후가 아니면 ᄭᅳ낼 수 업섯다. 그리하야 변호사가 잠간 동안에 그것을 ᄲᅢ여 내여 쓰지 못하엿슬 것을 알앗다. {{nop}} <!-- 122 --> 「그럼 이 창ᄭᅳᆺ에 무든 피는 엇전 것일가」 어이가 업서 입이 벙벙하든 탐뎡이 중얼거렷다. 변호사는 그ᄯᅢ 자긔 손을 내여 밀어 피가 흐른 험집을 보이면서 「이 손에서 피가 무덧나 봄니다. 앗가 심심하여서 이 창ᄭᅳᆺ을 주물너 보고 잇는데 별안간 뎐등이 ᄭᅥ저서 캄캄해진 고로 그ᄯᅢ 손으로 창ᄭᅳᆺ을 몹시 슷처서 피가 난 것임니다」고 설명하엿다. === 五 === 「참말 이상한 사건인 걸요 세 사람이 눈을 ᄲᅥᆫ하게 ᄯᅳ고 잇는데 엇던 놈이 고 눈 ᄭᅡᆷ작할 동안에 그 범행을 하엿겟소잇가 귀신이 아니고야」 방에서 나오면서 의사가 이러케 말하닛가 그제야 탐뎡은 처음 자긔의 의견을 말하엿다. 「이 방에 잇든 사람 세 사람에게 혐의가 모다 업다고 하면 이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 사람은 죽은 늙은이 당자 밧게는 아모도 업다고 나는 생각함니다」 탐뎡은 이층으로 올라가서 침대 위에 뉘여 노흔 시톄를 다시 한 번 됴사하엿다. :::× 「위대한 신령(神靈)의 정의(正義)의 칼이 그를 ᄶᅵᆯ른 것이라고 할가요」 탐뎡은 이층에서 나려와서 모든 사람이 모여 섯는 압헤서 이럿케 말을 내엿다. 「도라간 로인의 가장 ᄯᅱ여난 특질은 다만 인색한 것 그것 ᄲᅮᆫ이엿슴니다. 그래 결국 그 인색 ᄯᅢ문에 ᄶᅵᆯ려 죽은 것임니다」 「그 그래 누가 죽엿단 말임닛가」고 모다 눈이 둥글해 섯는 중에서 변호사가 물엇다. 「천천히 내 이약이를 드러 주십시요 만일 그가 바닥 해여진 구두를 신지 안엇드면…… 그러고 그런 해여진 족기를 닙지 안엇드면…… 그러고 그럿케 몹시 해여진 헌 양탄자를 ᄭᅡᆯ지 말고 새 양탄자를 ᄭᅡᆯ고 잇섯던들 그는 아즉 죽지 안코 더 살앗슬 것임니다 자세 드르십시오. 그는 족기 주머니에 컴파쓰를 ᄭᅩᆺ고 잇섯슴니다」 「녜 녜 나도 보앗슴니다」 변호사가 말하엿다. 「그것을 진작 알엇드면 여러분ᄭᅦ 실례되는 심문을 안 하고도 즉시 범인을 알엇슬 것을…… 실상은 늙은이를 ᄶᅵᆯ너 죽인 범인은 곳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죽은 늙은이 그자엿슴니다. 무얼요 사건은 아조 간단함니다. 그가 콤파쓰를 족기 웃주머니에 ᄭᅩ즐 ᄯᅢ 족기 주머니 속이 해여진 것인 고로 콤파쓰의 한 다리가 그 해여진 데 걸려서 두 다리가 저절로 버러저 잇섯슴니다. 그런데 그 버러진 ᄭᅳᆺ이 맛츰 로인의 가슴 심장 우에ᄶᅳᆷ 잇섯는데 별안간에 뎐등이 ᄭᅥ지닛가 원래 인색한 늙은이라 본능뎍으로 『엇던 놈이 이 돈뭉치를 가져가면 엇저나』 하고 책상 우에 잇는 지젼 뭉치를 집어 움키려고 달겨드는데 해여진 구두 바닥이 해여진 양탄자 험집에 걸려서 책상 구텅이에 허리를 걸치고 <!-- 123 --> 폭 업드진 고로 다리 버러진 콤파쓰의 한 다리가 심장에 쿡 박힌 것임니다. 그래 그는 가슴을 쥐고 ᄭᅮᆯ어 업드린 것임니다」 여러 사람은 그만 소생되야 얼골빗이 밝아젓다. 「그럿슴니다. ᄭᅩᆨ 그럿슴니다」고 청년이 웨첫다. 「그런데 그가 아조 업드러저 뒹굴 적에 그이 웃저고리와 족긔가 팽팽하게 켱겨지게 된 고로 콤파쓰의 한 다리는 저절로 심장에서 ᄲᅡ저 나왓슴니다. 그러고 그 후에 작고 뒹굴 ᄯᅢ에 콤파쓰는 두 다리가 한데 해여진 구멍으로 ᄲᅡ저서 족긔 거죽과 안 사이로 드러가 버린 고로 처음 우리가 시톄를 됴사할 ᄯᅢ에는 보지 못햇든 것임니다. 지금 다시 시톄를 됴사할 ᄯᅢ에 내가 그 콤파쓰 ᄭᅳᆺ에 ᄶᅵᆯ려서 손ᄭᅳᆺ을 걸켜민 고로 비로소 콤파쓰를 발견한 것임니다」 하고 시원스럽게 우섯다. 그 후 모든 문뎨가 모든 사람에게 깃겁게 해결되엇슬 것은 물론이다. ―(ᄭᅳᆺ)― ==저작권== {{PD-old-70}} s67hmljzxefr7llwegnfxefq9nwqdr4 페이지:어이켄 哲學.djvu/77 250 113718 458063 2026-08-18T04:47:45Z Kwonmax23 1577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個人主義니 更히彼는此를二分하야宗敎와內在的理想主義로써生活의眞髓로見하고 此에反하야 主知主義以下四軆系는現實可見의世界로써生活의眞義로하며 特히最后의二者는人間生活其者를重視한바라 그러나彼가特히生活軆系를如此히六分한것은 此로써眞生活軆系의根底를建設하는始初로思한緣故라<br/> {{밑줄|어이켄}}에從하면充分한意味의... 458063 proofread-page text/x-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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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神의觀念을否定하고蔑視함에至한지라 말하자면歷史硏究者는基督敎의天上界에對한觀念으로써 人類의進化過程에對한未開化의一階段에不過한다하얏고 宗敎의觀念은畢竟人生의根本要求가自我를基礎로하고 神이라云하는理想的實在를搆成하려함게不外한다는것을明白하게說明하려고努力하얏나니 即歷史硏究家들은如斯히宗敎를攻擊함과同時에 宗敎的思想은從來各時代의有力한모든思想으로因하야 變化도되얏고光輝도發耀하얏다함을보히고저努力한結果로 우리는宗敎에對하야宗敎를形成한모든要素以外에絶對不變의價値가有한要素의存否를疑訝케되야 疑問을懷하지안을수업셧나니라<br/> 그ᄲᅮᆫ아니라現代人은物質界와自然界의事物을利用하야 此로브터셔만快樂과利益을亨受코져함에至한結果로 超絶尊嚴한天上界는其存否를忘却하게되고 인々은다만現實世界의圈內에셔만滿足을發見하야 特殊한事情이無한限度內에셔 現實世界以上의世界가存在됨에對하야 其必要와可能을認識하지못하게되얏나니 換言하면人生이가쟝興味를感하며ᄯᅩ한重視할것은 感覺世界 現實世界요 此에對한興味와重視가넘우强烈하게되얏슴으로 天上의부르는쇼래에는耳를傾하지못하게된지라 科學과歷史와其他現實的인人心의活動은 高尙한不可見의世界에對한興味와注意를減殺하야 深遠하고永遠한眞正實在에對하야는 冷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815h79stme3ishazt67wwdqnutdbu2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