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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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車美理士, 1880년 8월 21일 ~ 1955년)는 여성운동가 및 교육인이다.

[편집] 생애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1905년에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에 밀항하여, 1909년 쑤저우 버지니아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에는 미국 선교회에서 파견하는 선교사로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배화학당에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취임하였고, 1919년에는 3·1 운동 국내외 비밀연락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0년에는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에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에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 및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1940년에는 교장 자리를 송금선에게 넘기고 자신은 재단이사장 겸 명예 교장으로 교육일선에서 물러났다.

광복 후, 1948년 김구의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108인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그동안 계획해왔던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여 초대학장은 송금선에게 맡겼다. 그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52년에는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직에서 사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타계하였다.

이 후 덕성여대는 초대 학장을 맡은 송금선이 이사장직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1997년 족벌운영에 반대하는 학내분규가 발생, 송금선 일가의 전횡과 비리가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덕성여자대학교 설립자가 송금선으로 왜곡되어 있었던 것을 1999년 국정감사 자료에 근거하여 2000년에 설립자가 차미리사라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며, 2002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덕성여자대학교에서는 차미리사 기념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편집] 상훈

  •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편집]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