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쓰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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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쓰나시게 / 쓰나나리(北条 綱成, ほうじょう つなしげ / つななり 1515년 ~ 1587년 6월 11일)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 가와고에 성 전투로 유명하다. 그리고 무용이 뛰어나서 [지오 하치만(地黄八幡)]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편집] 생애
에쇼 12년(1515년) 이마가와씨의 가신 구시마 마사시게의 아들로 태어난다.
다이에 원년(1521년) 이다가와라 전투에서 패해 마사시게의 일족들이 많이 전사했기 때문에 오다하라로 달아나 호조 우지쓰나의 보호를 받았다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덴분 5년(1536년) 아버지가 이마가와씨 내분(하나쿠라의 난)에 말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복형 겐코에탄를 지지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지쓰나 밑으로 와 보호를 받았다라는 설도 있다. 이렇게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호조 우지쓰나는 쓰나시게를 크게 마음에 두어, 딸과 결혼시켜 호조씨 일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호조라는 성을 주었다고 한다. 쓰나시게의 쓰나(綱)는 우지쓰나에서 왔고, 시게(成)는 아버지 구시마 마사시게에서 왔다. 이 둘을 합친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호조 우지쓰나에게 쓰나시게가 어떻게 평가를 받았는지 대략 알 수 있다. 호조 우지쓰나는 아들 호조 다메마사의 후견인역을 맏겼다. 덴분 11년(1542년) 다메마사가 죽은 후, 다마나와성주가 된다.
덴분 6년(1537년)부터 우에스기가와의 전투를 비롯 각지를 전전한다. 덴분 10년(1541년) 우지쓰나가 죽어 호조 우지야스가 가독을 승계했어도 그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덴분 15년(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는 가와고에성에서 반년남짓을 견뎌내 호조군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 공적으로 가와고에성 성주도 겸하게된다. 이 후에도 사토미 요시타카와의 고노다이 전투, 다케다 신겐과의 스루가 후카자와성 전투에서 활약한다.
겐키 2년(1571년) 10월, 우지야스가 병사하자, 쓰나시게도 가독을 아들 호조 우지시게에 양도하고 은거한다. 그리고, 출가를 해 上総入道道感라고 이름을 바꾼다. 덴쇼 15년(1587년) 5월 6일, 병사한다. 향년 73세.
[편집] 인물, 일화
- 쓰나시게는 젊을 때부터 무용이 뛰어나서, 매일 15일은 반드시 몸을 청결히해 하치만다이보사쓰에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적갈색으로 물든 사시모노[1]를 꽃고, 항상 호조군의 선봉으로 비할때없는 무용을 뽑냈다. 그 때문에 [지오 하치만(地黄八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가까운 이웃국에서는 조쇼군단(常勝軍団)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소년기에는 평판이 별로였던 호조 우지야스를 대신해 호조가의 도슈로 추대할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한다.
- 호조 쓰나시게의 [지오 하치만] 깃발은 현재 나가노 현 나가노 시 마쓰시로마치에 있는 사나다 호모쓰간에 현존한다. 이것은 다케다씨와 고호조씨가 대립했던 겐키 2년(1571년), 쓰나시게가 수비하고 있던 스루가 후카자와성을 다케다 센겐에게 개성하고 오다하라로 갔을 때, 성내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겐은 그 기를 가신 사나다 유키타카의 아들 사나다 겐지로(사나다 마사테루)에게 주면서 [사에몬다이부(호조 쓰나시게)의 무용을 닮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 우지야스로부터 신임이 두터워, 우지야스를 대신해 외교와 군사 전권을 받은 일도 있다고 한다.
- 전장에서는 항상 용감무쌍해서 특히 야전에서는 대장로 있던 관계없이 항상 선두 서서[이겼다!]라고 소리치면서 돌격했다고 한다. 그의 무용에는 다케다군도 두려위해, 스루가 후카자와성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병력차와 관계없이 고전했다고 한다.
[편집] 주석
- ↑ 전장터에서 갑옷위에 꽃는 작은 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