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글의 중립적 시각에 관해 논의 중입니다.
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들이 편견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주세요.

해당 글의 토론을 참고해 주세요.

목차

[편집] 한글 전용

한글 전용(-專用)은 한국어를 적을 때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만을 쓰는 것을 말한다. 한자어를 쓰지 않는 국어 순화와는 다르다.

[편집] 국한문혼용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 또는 한자혼용은 한국어를 문자로 표기할 때 한글한자를 섞어서 표기하는 방식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문은 사용하지 않으므로 국한자 혼용(國漢字混用)이라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면서 한자를 함께 표기하는 한자 병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자 병기를 국한문 혼용의 한 경우로 보는 경우도 있다.

국한문 혼용 반대론자들은 국한문 혼용이 20세기 중반 이후로 계속 사용이 줄고 있으며 실생활에서는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찬성론자들은 아직도 국한문 혼용이 상당히 사용되며 한국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계속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편집] 예시

[편집]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과 부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부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 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위 내용을 국한문 혼용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편집] 大韓民國 憲法의 前文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 大韓民國은 3·1 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 民主理念을 繼承하고, 祖國의 民主改革과 平和的統一의 使命에 立脚하여 正義, 人道와 同胞愛로써 民族의 團結을 鞏固히 하고, 모든 社會的弊習과 不義를 打破하며, 自律과 調和를 바탕으로 自由民主的基本秩序를 더욱 確固히 하여 政治·經濟·社會·文化의 모든 領域에 있어서 各人의 機會를 均等히 하고, 能力을 最高度로 發輝하게 하며, 自由와 權利에 따르는 責任과 義務를 完遂하게 하여, 안으로는 國民生活의 均等한 向上을 期하고 밖으로는 恒久的인 世界平和와 人類共榮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子孫의 安全과 自由와 幸福을 永遠히 確保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年 7月 12日에 制定되고 8次에 걸쳐 改訂된 憲法을 이제 國會의 議決을 거쳐 國民投票에 依하여 改訂한다.

1987年 10月 29日

[편집] 역사

[편집] 조선 시대

한글은 1443년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이 친히 만든 글자이다. 세종은 중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한문이 실제 조선인이 쓰는 말과 맞지 않고, 한문의 학습이 어려워서, 이에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을 만들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수구적 유학자들은 중화의 문화를 따라야한다는 사대주의적 면에서 한글(당시 명칭 훈민정음)을 반대했다. 이들의 논리는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문동괘(同文同軌)하는 문화국으로서 다른 글자를 만든다면 문화적으로나 국제관계에서 고립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1]초기에는 《용비어천가》,《석보상절》등 공식적 번역 문서를 통해 발달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는 사실상 공용 문서에는 한글이 쓰여지지 않았지만 하지만 한글은 궁중의 내명부와 일반 백성 사이에 널리 퍼져, 문맹을 퇴치하고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창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는 양반들도 한글로 문예 활동을 하는 것이 퍼져 한자과 한글 혼용으로 쓰인 소설에 이어, 한글만으로 쓰여진 작품도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1600년대 초기에 쓰여진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한글과 한자가 섞인 문장이 공용 문서에까지 쓰여졌다.

[편집] 일제 강점기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는 일본어가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한국어도 한 과목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 수는 많지 않았고 한국어나 한글에 대한 사회 압력도 많이 있었다. 그런 중에도 사립 학교나 서당처럼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교육 기관에서는 국한문혼용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 상태에서도 한글은 살아남았다.

[편집]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광복 이후로 각 문서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10월 9일 ‘한글전용에관한법률’[제정 1948.10.9 법률 제6호]을 제정했는데,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공용 문서’의 정의도, ‘얼마동안’의 정의도 없고, 시행 규칙도 없고 위반자에 대한 벌칙 규정도 없어 법률이 아니고 선언문이라고 해석하는 법률가도 있다. 또 한글 학회와 같은 한글 전용론자들은 “다만” 뒤 단서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2005년 1월에 제정한 국어기본법에 흡수되면서 자연히 폐지되었다.

[편집] 국한문 혼용과 한글 전용의 논쟁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참고 문헌·출처 등을 각주로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의심받을 수 있으며 삭제될 수 있습니다. (토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한글전용에관한 법률'이 제정, 시행됐다.

이승만 시대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 교육을 했지만, 박정희 시대인 1970년에는 한자 폐지 선언을 발표, 보통 교육에서 한자 교육을 전면 폐지했다. 그러나 언론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대가 강해서 1972년에 다시 한자 폐지 선언을 철회해 중학교고등학교의 한문 교육이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한문은 선택 과목이 됐으며 시험에도 거의 관계가 없고, 실제 사회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는 학생들의 학습 동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은 금지되어 아이에게 사적으로 한자를 가르친 초등학교 교원은 국책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징계 면직 같은 무거운 벌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신문·잡지도 점차 한자를 쓰지 않기 시작했다. 한자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세대가 많았기 때문에 한자를 섞어 쓴 출판물이 팔리지 않게 된 점이 한 이유라 할 수 있다.

한편 1990년대 후반부터 한자 교육 부활을 요구하는 소리가 더해지자, 1998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공문서에 한자를 섞어 쓰는 데에 손을 들어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로 도로 표지나 철도역·버스 정류소에서 한자 병기는 실현되었지만, 한글 전용파의 저항이 완강해서 초등학교에서 한자 교육 의무화나 젊은 층에서 한자 사용 일상화는 실현되지 않았다. 서울 시내의 버스 정류소의 한자 표기는 버스 개편으로 없어졌다.

공교육에서 한자 교육이 잘 추진되지 않자, 한자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국 국민들은 사교육으로 한자를 배우고 있다.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사람은 한국어에서 한자로 이루어진 낱말이 70% 또는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르면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조사했을 때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50% 가량이라 한다. 한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한자어 낱말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한글 전용인지 한자 혼용인지에 대해서는 여론 조사에서도 국론이 양분되어 왔다. 정치가들도 이것을 쟁점화하기에 난색을 보여 광복 이래 계속된 이 논쟁을 '문자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편집] 참고자료

  1. 조선왕조실록

[편집] 같이보기

[편집] 관련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