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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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설명
제후국이 있는 왕, 다시 말해 왕 중의 왕이다. 중국에서 주나라까지는 왕이 홀로였고, 왕과 제후국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주나라 이후 진시황 때부터 왕 중의 왕은 황제라 부르고, 제후국의 군주는 왕이나 공, 후, 백, 자, 남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제후국은 크기에 따라 하, 은, 주부터 존재해 왔다.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조선에서는 왕의 아들을 대군 또는 군으로 봉해졌다.
[편집] 2인칭 (경칭)
황제의 호칭은 2인칭으로서는 폐하(陛下)이다. 이는 뜰 폐(陛)자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높이 우러러 볼 사람이기에 뜰에서 층계 위로 우러러 뵙는다는 뜻이다. 왕의 2인칭은 전하(殿下)이다. 이는 계단 아래에서 우르러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폐하와 전하는 둘다 중세 한국어에서는 그 뜻(버터ᇰ 아래)이 같았다 (陛下ᄂᆞᆫ 버터ᇰ 아래니 皇帝ᄅᆞᆯ 바ᄅᆞ 몯 ᄉᆞᆯᄫᅡ 버터ᇰ 아래ᄅᆞᆯ ᄉᆞᆲᄂᆞ니라 《월인석보 2,65》). 다만 그 품격에서 폐하가 전하보다 높았다.
이때 폐(陛)자는 '뜰'보다는 '뜰층계'라는 뜻으로 풀어야 더욱 옳고, 이는 전(殿)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군주가 있는 곳이 다를 뿐이며, 신하는 언제나 전하 또는 폐하의 처음 뜻이 가리키는 '뜰'(뜰층계의 아래)에 자리하게 된다.
[편집] 황제의 유래
동아시아에서 황제의 어원은 ‘삼황오제’에서 가져온 것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처음으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군주이다. 전국(戰國)을 통일한 시황제는 전국 시대을 거치면서 각국에서 수많은 ‘왕’이 난립하였기 때문에 ‘왕’의 권위가 실추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승상 이사(李斯)로 하여금 왕보다 더 권위 있는 칭호를 짓게 하였다. 이리 하여 ‘황제’의 칭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의 이름과 칭호에서 비롯한다. 그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서 ‘임페라토르(Imperator)’와 ‘카이사르(Caesar)’가 황제를 뜻하는 영어 ‘엠퍼러(emperor)’와 독일어 ‘카이저(Kaiser)’ 및 러시아어 ‘차르(царь)’ 등의 어원이 되었다.
[편집] 동아시아의 황제
황제(皇帝)가 다스리는 나라는 제국이다. 봉건 시대에서는 영지나 봉토에 왕이나 영주를 봉하였고, 근대에서는 총독을 파견하여 제후국이나 속국을 지배하였다. 중국에서는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황제를 '천제(天帝)'의 '아들(子)'인 '천자(天子)'라고도 하였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는 오직 황제국 뿐이었고, 제후국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황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진나라 시황제 이후 황제의 칭호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편집] 중국
시황제 이래 천자국을 표방한 중국의 여러 황조들은 모두 자국의 최고 군주의 칭호로 황제를 사용하였다. 한족이 세운 황조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 세운 나라들(요·금·원·청 등)도 마찬가지였다.
당 태종은 돌궐을 굴복시킨 뒤 돌궐족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받았다. 가한(카간)은 북방 민족들의 군주인 칸 중의 칸이라는 뜻을 가진 칭호인데, 이 앞에 천(天)을 붙였으므로 극존칭이 된다. 그러나 태종은 천가한의 칭호를 쓰는 것을 고구려 정복 이후로 미루었다. 태종의 고구려 정벌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그는 결국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했다.
이후에도 서역인들과 돌궐족들이 당나라 황제를 천가한이라고 부르고, 몽골을 통과하는 당나라 무역로를 ‘참천가한도(參天可汗道)’, 즉 ‘천가한께 가는 길’이라고 부른 예가 있다[1].
당 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고, 측천무후는 아예 황제의 칭호를 천황으로 고치기도 하였었다.
[편집] 몽골 등 중국 북방 민족
몽골 등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은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가한(카간)의 칭호를 썼다. 중국 관내에까지 진입하여 한족화한 민족들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편집] 한국
[편집] 삼국시대 이전
한국에서는 고대에 ‘환웅천왕’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황제와 동등한 ‘천왕(天王)’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천황’이라는 칭호도 고대 한국의 ‘천왕’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칭호일 가능성이 있다. 또 고구려[1]와 신라[2]에서는 태왕(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백제는 아직 ‘태왕’이란 칭호를 썼다는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고구려와 신라의 예로 보아 ‘태왕’의 칭호를 썼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편집] 고려시대 또는 남북국 시대
발해에서는 군주의 칭호를 정확히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황제’에 준하는 칭호들을 사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신당서》에 발해에서 군주를 ‘가독부(可毒夫)’·‘성왕(聖王)’·‘기하(基下)’라고 불렀고, 그의 부친을 ‘노왕(老王)’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정혜공주묘비에서는 “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황상(皇上)이 너무 슬퍼해서 정부 회의를 3일 동안 진행하지 못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 묘비의 ‘황상’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발해의 군주의 정식 칭호가 ‘황제’나 ‘천황’ 같은 것이었는지는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가 적어도 국내에서는 중국의 황제처럼 받들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려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 광종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임금이 근무를 할 때 황색 조복을 입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아직 확인한 바가 없지만, 고려에서도 중국의 천단과 비슷한 건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맹위를 떨치던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임금의 업적을 높이는 이름인 시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짐(朕)으로 부르지 말고, 고(孤)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했다(공민왕이 집권하던 때부터 다시 짐으로 부르도록 했다).
[편집] 조선시대
고려말의 관계는 명나라.청나라와 국교를 맺으면서 지속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원구단(圜丘壇) 또는 이를 새로 만든 원단(圓檀)에서 임금이 직접 하늘에 제를 올렸다.
1894년에 조선이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왕을 대군주 폐하, 왕비를 왕후 폐하로 격상해 부르면서, 원구단을 다시 세워 제를 지내게 되었다.
[편집] 대한제국
대한제국 때에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편집] 일본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섬나라인 일본은 중국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에서는 대왕(大王 오키미[*])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에 이 칭호를 천황(天皇 덴노[*])으로 개칭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593년~628년 사이라는 통설을 비롯해 여러 설이 있다.
일본의 천황 칭호는 고대 한국의 ‘천왕’, 측천무후가 사용한 ‘천황’ 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편집] 베트남
베트남에서는 대외적으로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 ‘왕’의 칭호를 썼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편집] 유럽에서의 황제
서구에서도 황제 칭호를 사용한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로마 제국과 같이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도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호국경과 집정관을 폐지하면서 황제의 지위를 올랐고, 로마 제국의 후예인 비잔티움 제국 역시 황제 칭호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 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도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한편,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황제 칭호를 사용했고, 10세기와 11세기의 불가리아에서도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편집] 주석
분류: 출처가 필요한 문서 | 관직과 칭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