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도르 폰 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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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도르 폰 보크 | |
|---|---|
| 1880년 12월 3일 ~ 1945년 5월 4일 | |
| 태어난 곳 | 독일 퀴스트린 |
| 죽은 곳 | 독일 홀슈타인 |
| 복무 기간 | 1898년 ~ 1942년 |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 지휘 | 북부집단군(1939) B 집단군(1940) 중부집단군(1941) 남부집단군(1942)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 1차 세계 대전 제 2차 세계대전 |
| 서훈 내역 | 푸어 르 메리트 훈장 기사철십자 훈장 |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 1880년 12월 3일 ~ 1945년 5월 4일)는 제 2차 세계대전중 독일 육군의 원수이다.
[편집] 생애
프로이센 왕국의 퀴스트린(Küstrin, 현재는 폴란드령)에서 태어났다. 1898년 제 5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참모장교로써 종군하여 1918년 4월에는 프로이센의 최고위 프루-르-메리트 훈장(Pour le Mérite)을 수상했다. 대전후에도 군비제한을 당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있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폴란드 침공에서는 북부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0년 서방전격전에서는 B집단군사령관으로 지휘을 맡아 그 전공으로 인해 같은해 7월 육군원수로 승진했다.
1941년 6월 22일에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중부집단군사령관으로써 민스크, 스몰렌스크을 공략해 12월에는 예하부대가 모스크바 정면 30km까지 육박했으나,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과 맹렬한 추위로 인해 독일군의 공격은 둔화되어 그 책임을 물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1942년 1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병사하자,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여름 공세에 대한 작전지휘을 둘러싸고 또 다시 히틀러와 대립하여 7월에 다시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예비역으로 재편되어 현역으로는 복귀하지 못했으나, 1945년 4월 히틀러의 자살후 칼 되니츠의 요청에 의해 연합국과의 정전교섭의 임무을 맡았으나, 1945년 5월 3일에 키르 근교에서 탑승했던 차가 영국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했다.
폴란드 침공 작전 이후 히틀러의 방침에 의해 전선 후방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민간인 대량학살에 강력히 반대했었다. 한편 조카였던 헤닝그 폰 트레스코우 육군 소장에게서 반 히틀러 활동에 참가를 타진받았으나 이것을 거절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