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 구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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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구데리안
1888년 6월 17일 ~ 1954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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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Schneller Heinz
태어난 곳 서 프러시아 쿨름
죽은 곳 알가우
복무 nazi 나치 독일
복무 기간 1907년 ~ 1945년
최종 계급 육군 상급대장
지휘 제 2기갑사단
XVI. Army-Corps,
XIX. Army-Corps
제11군
돈 집단군
남부 집단군

하인츠 빌헬름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1888년 6월 17일~1954년 5월 14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 군사이론가이다. 제1차 대전 때 참전한 후, 소모전을 타개할 기갑전술과 전격전(Blitzkrieg) 이론을 창안하여 독일군의 제2차 대전 초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1940년 7월 프랑스 작전의 전공으로 상급대장(Generaloberst)으로 승진했으나 에르빈 롬멜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는 달리 원수로 진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지휘관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지휘관의 한 명으로 꼽힌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1888년 바이크센 강변의 도시 쿨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령이 되어 헤우무노 나드 비스혼(Chełmno nad Wisł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코프렌츠 제3통신대대에 근무하여 무선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대전 뒤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참모본부, 군학교, 항공기, 잠수함, 전차의 보유을 금지당하고, 병력도 10만 명으로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게 되었다. 병무국이 설치되어 철도 전송, 통신, 자동차 전송을 관할하는 교통병감부(독일어: Inspektion der Verkehrstruppen)에 근무했다.

선견지명이 있던 상관 오스발드 루츠(Oswald Lutz) 아래에서 존 프레드릭 찰즈 브라(John Frederick Charies Fuller), 리델 하트(Liddell Hart)와 당시 무명이던 드골의 저작의 영향을 받아 자동차 부대와 전차 부대를 이용하는 혁신적인 전술을 개발하기 위해 헝겊이나 합판를 씌운 모형 전차로 전술 연구를 하였다. 독소 비밀 군사 협력에 기초하여 영불의 감시를 피해 소련 오지에서 독일군 장교의 전차 전술의 교육, 훈련에도 관여했다.

시대를 앞선 자동차의 장래성을 이해하고, 나치스당이 국가사회주의자동차단(NSKK)을 창설하고, 자동차 운전자, 수리 기술자를 대량으로 육성한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의 집중 운용에 주목하여 보병의 보조 역할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하던 보수적인 육군 상층부의 반대을 무릅쓰고 구데리안을 후원했다.

구데리안은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 아래에서 신설된 제2기갑사단의 사단장에 임명되어, 1937년 저서 [Achtung Panzer!]을 출판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에서 구데리안은 제2기갑사단과 자동차화된 LSSAH 연대를 이끌고 단시간에 빈에 진군하여 자신의 이론의 유용성을 입증했다. 제2기갑사단은 독일 남부의 뷜츠부르크에서 670km, LSSAH 연대는 베를린에서 1,000km을 48시간 만에 주파하여 빈에 도착했다.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제16기갑군단장(2개 기갑사단+1개 자동차화 보병사단)이 된 구데리안은 체코의 즈덴덴 지방에 신속히 진군하는데 성공했다. 다음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는 독일 본토와 동 프러시아 지방을 갈라놓았던 단지히 회랑을 빠른 속도로 횡단하여 브레스트-리트브스크까지 진격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는 당초 슐리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기밀 누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따라 망치가 되어, 아르덴느 고지를 돌파한 뒤 아미앙에서 덩케르크까지 쾌속 진격을 실시했다. 이러한 진격에 놀란 독일군 상층부에서 여러 차례 정지 명령이 내려왔다. 덩케르크에 이르러 공격은 금지되어, 덩케르크의 기적을 눈앞에 보고만 있어야 했고,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남하하여 알프스까지 진격해 프랑스군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만든 전차부대의 집중 운용과 항공 지원에 기초한 전격전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뒤에 폴란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독소전 초기까지 독일에게 대승리을 안겨주었다. 구데리안은 1940년 1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독일을 방문했던 일본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인솔한 육군 군사 시찰단에게 전격전에 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편집] 독소전

1941년 6월 22일에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중부 집단군에 참가한 제2기갑집단(후에 보급조직이 추가되어 제2기갑군으로 승격)을 지휘해 동료인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이끄는 제3기갑집단과 함께 집단군의 주력으로 진격하였다. 주로 집단군 남쪽을 담당해 호트의 부대와 함께 민스크 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대전과를 올렸다. 그가 지휘하는 전차에는 그의 이름의 첫글자 G가 새겨져(호트의 전차에는 H가 새겨져 있다) 위대한 하인츠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음 전략에서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으나 프리하치 소택지 동쪽을 북쪽에서 남하해 남부 집단군과 함께 키에프의 대포위전을 성공시켰다. 이 키에프 전투는 “야전군의 격멸”과 “중요 거점(모스크바) 탈취”라는 상반된 목표에서 야전군의 격멸을 우선시한 작전에 대해 구데리안 자신은 후에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했다고 술회했으나, 당시에는 남부 집단군의 이후 진격이 곤란하게 된 일, 또 보급 조직이 스몰렌스크 동쪽으로의 진격에 대해 미정비된 상태라는 이유도 있었기에 실제로는 히틀러가 선택한 야전군 격멸이 정확했다는 의견도 많았다.

다음 모스크바 진격을 재개해 10월에는 브리얀스크, 비얀지마에서 2중 포위전에서도 대전과를 쌓아 11월에는 제3기갑군의 게오르그 한스 라인할트 상급대장, 제4기갑군의 에리히 호프너 상급대장과 함께 모스크바 공략을 개시했다. 구데리안은 소(小)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모스크바의 남쪽 문에 해당하는 요새화된 투라를 우회해 남쪽에서 모스크바를 노렸다. 그러나 병력, 보급, 준비 등 모든 것이 부족했고, 특히 투라를 우회하는 동안 받은 피해(후에 공격을 실행하는 데 실패), 돌출되었던 남쪽의 개방부의 존재(담당한 제2군은 보병 중심으로 쫓아올 수 없었다), 북쪽의 2개의 기갑군과 남쪽과 서쪽에서 진격했던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과의 사이을 메우는 일과 제4군의 귄터 폰 클루게 원수와 공격이 연동될 수 밖에 없는 일, 거기에 소련군이 극동 시베리아에서 일본과의 전투에 대비해 배치했던 다수의 정예부대를 불러와 충분한 예비 전력을 확보한 것 때문에 공격은 곤란하게 되었다. 12월 구데리안은 작전을 중지하고 후방에서 월동 준비를 할 것을 히틀러에게 직접 상신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후 1943년 3월 1일에 기갑병총감에 임명되었다. 그 직책은 부대 지휘권을 갖고 있지 않은 휴직이었으나, 기갑부대의 재건을 위해 구데리안은 열심히 분주하게 일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부상당한 쿨트 자인츠러 상급대장의 후임으로 7월 21일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작전에 대한 간섭을 저지하고 독일 방위의 중책을 맡았으나, 1945년에 들어 국경을 압박하던 소련군에 대한 방어 전략을 둘러싸고 히틀러와의 대립이 정점에 달해 3월 28일 히틀러로부터 6주간의 휴가을 명령받았으나, 이것은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편집] 전후

구데리안은 1945년 5월 10일 미군에 항복해 포로가 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시작되자 소비에트 연방과 폴란드는 전쟁 범죄자로써 구데리안을 기소했으나 결국 기소는 중지되어 재판에서 군사 작전에 대한(특히 폴란드 침공에 대해서) 증언을 남겼다. 1948년 6월 17일 석방된 뒤 미군 육군 기갑학교에서 강의을 하면서 회상록을 집필했다. 1955년 5월 14일 서독에서 사망했다.

[편집] 인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