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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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後梁, 554년~58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서위(西魏)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가이다. 서량(西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편집] 역사

의 왕족이었던 소찬(蕭詧)은 후경의 난 직후, 각지의 왕족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소택(蕭繹)과 대립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서위에게 원군을 요청해 보호을 받는다는 미명하에 실질적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후 소택은 강남의 북제(北齊)와 긴밀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서위는 이에 대항하고, 강남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550년 소찬을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이후 즉위하여 원제(元帝)가 된 소택과 서위는 대립끝에 554년 서위의 군대가 강릉에 있던 원제의 정권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소찬을 양나라의 황제에 즉위시켰다. 이것이 후량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후량이 지배한 영역은 강릉주변의 일부지역뿐이었기에 실제론 서위의 괴뢰정권에 불과했다. 한편 북제는 스스로 지배하에 들어온 소연명(蕭淵明)을 돌려보내 양나라을 계승시키고, 이를 실효있게 지배했다. 소연명은 이후 경제(敬帝)로 즉위했다.

그후 경제는 (陳)의 무제(武帝)가 되는 진패선(陳覇先)에 의해 퇴위당하고 양나라는 멸망한다. 한편 후량은 서위을 대신한 북주(北周), 그리고 이를 대신한 수나라(隋)때까지 괴뢰정권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서위나 북주에 있어서 진나라가 양나라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정권이기에 자신의 휘하에 있는 후량이야말로 정통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것과 이것으로 강남에 대한 세력을 넓히는것을 시도할때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로써 꼽을 수 있었다.

또한 후량은 양나라의 성숙된 문화을 이어받았기에 괴뢰정권이지만 그 아래에서 높은 문화을 꽃피어 후세에 그 문화를 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고 한다.

남북조 통일 직전인 587년 수나라 문제에 의해 후량은 없어졌다. 남조 진나라의 멸망후 589년 진나라의 동양주자사(東揚州刺史) 소엄(蕭厳)과 오주자사(呉州刺史) 소 (蕭瓛)가 주인을 자처하며 수나라에 반항했는데, 소엄은 후량의 선제(宣帝) 소찬의 5남이었고, 소 는 후량의 명제(明帝) 소 의 3남이었다.

또한 수나라 말기 파릉(巴陵)에서 거병하여 양왕을 칭했던 소선(蕭銑)은 소엄의 손자였다. 거기에 당나라의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까지 오른 소우(蕭瑀)는 소 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량 멸망후에도 소씨가 높은 명망을 지카고 있었다는것을 간접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편집] 참고문헌

일본쪽 참고문헌입니다.

  • 吉川忠夫「後梁春秋 ある傀儡王朝の記録」(中公新書357『侯景の乱始末記』(1974年)に収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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