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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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AD 280 ~ 337)은 흔히 콘스탄틴 대제, 혹은 콘스탄틴 1세로 불리기도 한다. 고대 로마의 최초의 기독교인 황제이며 기독교로마의 공인된 종교로 만들고 (국교로 지정된 것은 AD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여러차례의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해 기독교 교리의 성립과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동방정교에서는 성 콘스탄틴으로서 성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AD313년에서 324년까지 치열한 내전 끝에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통일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어려서 받은 그리스 문화와 언어의 교육의 영향으로 AD 324~33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었다. 이 수도 이동 이후 로마 제국의 교육, 정치의 중심은 점차 동로마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의 사후 도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고 그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수도로 사용되었다.

[편집]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황제 자신은 40세가 되어서야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불렀고 사망 직전에 처음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파에 대해 관대한 자세를 보여, AD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사형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에는 기독교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계속하기도 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이 된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이유는 어머니로부터의 영향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내전을 통해 황제가 된 콘스탄틴 대제의 위치상, 새로운 수도인 비잔티움으로 천도하고 신흥종교인 (로마인의 1/5정도가 그때 이미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기독교를 힘입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확립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있다.

AD325년, 황제는 당시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도록 명한다. 이 기간에 삼위일체 개념의 공식 채택, 예수를 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지정하는 등, 일련의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황제는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토론에 참여하는 등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지고 있다.

[편집] 정치 개혁

수도의 이동 이후 콘스탄틴은 다양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 감옥의 갇힌 사람들에게 일정한 시간마다 햇빛을 볼 수 있게 하고 감방에서 나갈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이전의 로마 감옥에서는 완전한 어두움 속에서 몇년간 갖혀 계속 수감 생활을 하는 죄수들이 많았다.
  • 검투사 시합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검투 경기는 4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 십자가형을 금지하고 교수형으로 대신하였다.
  • 도축업에 종사하거나 제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대로 직업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같은 직종을 대대로 유지하는 관습은 중세 유럽에까지 계속되었다.
  • 그때까지 토지를 빌려서 농사하는 사람들을 농노로 바꾸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중세의 장원 경제의 기초가 이때 놓여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