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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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스 1세((히브리어: הוֹרְדוֹס, 그리스어: ἡρῴdης, 약 기원전 73년 - 기원전 4년) 또는 헤로데, 헤롯대왕은 로마 제국시대에 유대 지방에 분봉된 왕이였다. 흔히 기독교의 신약성경 마태복음 제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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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유대의 왕
헤로데의 아버지는 이도메네아의 안티파트로스, 어머니는 나바테아왕국의 페트라의 공주 키프로스로 헤로데는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이도메네아의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도메네아 지방은 유대 남쪽의 지역으로 흔히 성경상에서 에돔으로 알려져 있고 마카베오가문의 요한 히르카우스에 의해 정복당한 후 유대교로 개종했던 지방이다.
헤로데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했으나 헤로데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의 지대한 영향 아래에 있었으므로 독실한 유대인들은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나 카시우스와 같은 로마의 유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기원전 47년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아들 헤로데를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3년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그는 암살자를 처형하고 돌아와 당시 명목상 유대의 왕가였던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의 청혼을 받았다. 당시 미리암은 아직 10대였으나 헤로데는 첫번째 부인인 도리스와 3살난 아들 안티파트로스(헤로데의 아버지의 이름과 같음)를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유대 제사장 가문과 결합하였다.
기원전 40년 하스몬 왕조의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가 유대를 침공하자 그는 로마로 도망쳤고 거기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의 칭호를 받았고 기원전 37년 유대로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이기고 집권한 이래 34년간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사이의 내전당시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했으나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로도스섬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왕'의 지위를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는 한편 또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간통죄로 처형했는데 여기에 마리암의 동생인 살로메와 친어머니인 알렉산드라가 개입하였다고 한다. 마리암의 처형 이후 알렉산드라는 헤로데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여왕으로 선포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헤로데가 그녀를 재판없이 죽였다.
[편집] 치세와 업적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묘사된 대로 헤로데를 잔인하고 음흉한 광기어린 군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힘쓴 선견적인 통치자이기도 했다. 기원전 25년에는 유대지방에 대가뭄으로 기근이 나자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수입하고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헤로데는 자기 영토에 일종의 건축붐을 일으키고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다.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을 건설하고 국경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새로이 정비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배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했던 아스팔트를 사해에서 추출하여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배분하여 독점하였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키프로스의 구리광산을 임대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에 그가 건설한 도시로 유명한 것은 카이사레아 마르티아와 그 항구, 그리고 옛 사마리아의 유적위에 세워져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세바스테인데 카이사레아는 나중에 유대가 로마의 직할령이 된 후 그 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유대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는데 이것을 헤로데의 성전 또는 그냥 두번째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 로데는 그외에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등에 수많은 건물을 지었고, 로마의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짓는등 유대전통과 맞지 않는 이교적인 일을 많이 했다. 올림픽 경기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주관자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대지역에서는 헤로데에 대한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이 많았는데 메시아가 도래하면 헤로데의 통치가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라사이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그는 그리스-로마인들이나 유대지역외의 유대인들에게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아나톨리아, 크레네에 사는 유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편집] 죽음과 후계문제
헤로데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처형으로 얼룩졌다. 그는 여섯번 결혼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을 죽였고 그녀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장모까지도 죽였버렸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속에서 살았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했다. 후계자 문제를 두고 수차례 유언을 번복하기도 하고 결국,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재판에 올려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하에 처형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4년 봄에 극심한 고통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누누어 주었는데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에게는 자신의 전 영토를 주었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페레아를, 헤로데 필립보 1세에게는 골란지역과 베타니아, 트라코니티스를 각각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유언은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결국 세아들 모두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편집] 신약성경에 나타난 헤로데
헤로데는 기독교의 신약성경에서 잠깐 언급이 된다. 신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 제2장에 언급된 동방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유아살해의 전승이 그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직후 동방에서 박사 세사람이 커다란 별에 이끌려서 헤로데에게로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있다며 경배하고자 한다고 전한다. 헤로데는 그 아이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사장들에게 그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예언자들의 기록을 살펴본 사제들은 그 아이가 베들레헴에 있다고 하고 헤로데는 동방박사를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그 아이를 찾거든 내게 알려주시오, 나도 그 아이에게 경배를 드려야 겠소...'라고 말한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헤로데에게 알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한편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헤로데가 예수를 죽일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을 하고 헤로데는 동방박사에게 속을 것을 알고 베들레헴과 그 근처의 모든 2살이하의 갖난 아이는 모두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요셉과 그의 가족은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서 살다가 그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우스의 밑에서 사는 것을 피하려고 나자렛의 갈릴리로 옮겨간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인 실체는 의문시된다. 마태복음의 기록외에는 성경이나 다른 기록에서 이러한 대량학살의 이야기를 뒷받침 할 만한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또한 이야기 자체가 모세의 설화의 변형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헤로데 대왕보다는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요한의 체포와 처형과 관련하여 더 많이 언급이 되고 있다.
[편집] 후손
분류: 신약성경의 인물 | 유대의 역사 | 기원전 73년 태어남 | 기원전 4년 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