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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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시대 세종 1년(1419년)에 건축한 궁궐로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으나 성종 14년(1483년)에 고쳐 지은 후, 현재 이름인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1909년 일본이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안에 궁문, 담장 등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1]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쳐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창경궁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원래대로 창경궁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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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창경궁의 건축물
[편집]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편집] 옥천교
[편집] 명정문
[편집]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편집] 문정전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집] 관천대
보물 제 851호.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천문 관측대. 첨성대(瞻星臺)라고도 한다.
높이는 2.2m이고,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대 위에는 99cm의 받침대가 놓여 천문 관측기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창덕궁 금호문 밖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전되었다가 현재의 자리에 옮겨졌다.
관천대 위에는 별을 관측하는 기구인 소간의(小簡儀)가 놓였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편집] 숭문당
[편집] 빈양문
[편집] 함인정
[편집] 경춘전
[편집] 환경전
[편집] 함양문
[편집] 통명전
보물 제818호. 통명전(通明轉)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연회를 열기도 하던 곳이다. 1484년(성종 15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는데, 그 후 여러 차례의 화재를 당하여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전 건물 중 규모가 크고 꾸밈이 화려하여 내전을 대표하는 건물이며,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에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집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높고 넓게 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으며, 서쪽에는 연못과 돌다리 등을 두어 주위 공간도 아름답게 꾸몄다.
[편집]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기었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1830년(순조 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1878년(고종 15년) 철종의 아내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편집] 영춘헌
[편집] 춘당지
[편집] 대온실
'식물원'이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순종 융희 원년(1907년)에 기공하여 융희 3년(1909년)에 준공하였다. 정초석(머릿돌)에는 '단기 4242년'에 세워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한국 최대의 목조 식물원이었으며, 각종 희귀 식물을 전시하였다.
[편집] 관덕정
[편집] 집춘문
[편집] 과학문
[편집] 월근문
[편집] 선인문
[편집] 옥천교
창경궁 금천 위에 놓은 다리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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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바깥 고리
[편집] 주석
- ↑ 1909년 일본이~: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바람》(한길사, 2004)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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