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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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역사서이며, 동이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을 배척한 서술이 그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을 포함하여 진위의 논란이 있다.
《환단고기》「범례」에 따르면 1911년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자금지원으로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고 이기(李沂)가 교열(校閱)했다고 한다.
《환단고기》는 1949년에 이유립이 오형기에게 정서시켰으며[1], 한 차례 원본과 함께 관련 자료가 분실되었으나 그 후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여 필사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복원된 내용을 1979년 영인본으로 제작한 것이다.
2006년 초에 숙명여대에서 1912년에 첫 출판된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1989년에 기증된 영인본(배달의숙 발행)이고, 뒷면에 이미 1979년 인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최소한 1979년 이후에 다시 정서하여 영인된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서지학적 가치는 일반적으로 《규원사화》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2]
목차 |
저자
계연수
도인(道人), 사학자.
1898년 《태백유사》와《단군세기》를 간행하였다.[3]
1916년 묘향산 석굴에서 천부경을 발견하여 대종교를 통하여 보급하도록 하였다.[4]
《환단고기》〈범례〉에 의하면 1911년 여러 사서들을 엮어 《환단고기》라는 제목으로 필사했고, 이기의 감수를 받았다고 했다.[5]
이유립
민족운동가.[6]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1979년 음력 10월에 필사 영인본인 한문본 《환단고기(광오이해사)》를 간행하였다.
《환단고기》의 출간경위 및 경과
1911년, 광무 15년(환단고기 범례에 따른 연도. 실제 광무 연호는 10년까지만 사용) 계연수가 고대사서들을 묶어 환단고기라는 책명으로 간행하였다고 한다.
1920년 이전, (이유립이 13세가 채 안 되었을 때에) 편집된 《환단고기》의 원본을 계연수(~ 1920)로부터 건네받았다고 한다.
1975년 1920년대부터 보관해 오던 원본이 모든 관련 자료와 함께 유실되었으나, 기억을 되살려 복원했다고 한다.
1975년 박창암(퇴역장성, 월간 자유사 사장), 임승국(정사학회 회장, 환단고기 번역주해 저자), 이유립(단단학회장, 태백교, 환단고기 발간), 안호상(전직 문교부장관), 유봉영, 문정창(한국 고대사학회장), 박시인(알타이 인문학회 회장) 등 국사찾기협의회 조직.
1979년 11월, 필사, 영인하여 100부로 한정된 한문본이 출간되었고, 박창암[7]을 통하여 일본의 변호사 출신 재야학자 카지마 노보루(鹿島曻)에게 원본을 전달하였다.
1982년 일본에서 재야학자[8]의 추천 글이 실린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카지마 노보루는 이 책에 붙여진 상세한 해제를 통해 한반도에 고대 '우가야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1985년 일반을 대상으로 한 첫 한글 번역본[9]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개요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다른 시대에 씌여진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다.
- 《삼성기》는 환웅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배달국과 그 전신이라 하는 3301년간의 환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단군세기》는 47대의 단군이 2천 년 간 다스린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북부여기》는 북부여에 6명의 왕이 있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 《태백일사》는 환국, 배달국, 삼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한말-일제초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 포함되어 있다.
구성
'...'의 구분 뒤에 분량이 페이지(2페이지가 1장)로 표시되며, 1979년 광오이해본 10행 22자 138장을 기준으로 한다. 공백은 세지 않는다.'
- 목차 ... 1
- 범례(凡例) ... 3
- 삼성기(三聖紀) 上, 안함로(安含老) 찬(撰) ... 4
- 삼성기(三聖紀) 下, 원동중(元董仲) ... 9 (신시역대기 포함)
- 단군세기(檀君世紀), 행촌 이암(李嵒)
- 단군세기서(檀君世紀序) .... 4
- 단군세기 ... 49
- 북부여기(北夫餘紀),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찬
- 북부여기(北夫餘紀) 上 ... 7
- 북부여기(北夫餘紀) 下 ... 3
-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 5
- 태백일사(太白逸史),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 태백일사목록(太白逸史目錄) ... 1
-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 15
- 환국본기(桓國本紀) ... 5
- 신시본기(神市本紀) ... 28
-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 삼한관경본기제사(三韓管境本紀) ... 3
- 마한세가(馬韓世家) 上 ... 9
- 마한세가(馬韓世家) 下 ... 5
- 번한세가(番韓世家) 上 ... 6
- 번한세가(番韓世家) 下 ... 6
-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27 (천부경, 삼일신고 포함)
-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33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 12
-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 25
- 태백일사발(太白逸史跋) ... 1
- 환단고기발(桓壇古記跋) ... 3
《환단고기》의 참고 문헌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
- 확인되지 않는 문헌 ...《대변설(大辨設)》, 《삼성밀기(三聖密記)》, 《삼한비기(三韓秘記)》,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遺記)》, 《표훈천사(表訓天祠)》
- 확인되는 문헌 ... 《사기(史記》, 《운급헌원기》, 《관자》, 《한서》
'확인되지 않는 문헌'은 해당 문서가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조대기》와 《진역유기》의 경우, 해당 문헌을 인용한 《규원사화》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지적된다.
상세 내용
환국의 치세
- 이 부분의 본문은 환국입니다.
-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며 각각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등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였다고 한다.
-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이며, 왕이 7대라고 한다.
- 안파견(安巴堅) 환인
- 혁서(赫胥) 환인
- 고시리(古是利) 환인
- 주우양(朱于襄) 환인
- 석제임(釋提壬) 환인
- 구을리(邱乙利) 환인
- 지위리(智爲利) 환인 또는 단인(檀仁)
배달국의 치세
- 출전 - 《삼성기》〈신시역대기〉, 《태백일사》〈신시본기〉
배달국(배달國[11][12])은 의 명칭이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韓民族) 고대국가의 시대를 배달국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중국사서에서 나라 이름이 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3]) 〈신시역대기〉에는 배달국이 3301년 간의 환국 다음에 1565년 간 환웅이 다스린 나라로 설명되었다. 중국신화의 치우를 한 때 배달국을 다스린 왕으로 보고 있다.
건국과 멸망
하늘의 주신(主神)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렸는데, 이를 신시라 하였다. 신시의 멸망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으며, 단지 신시를 이어 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였다.
나라를 세운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백성을 보살피는 직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즉, 호가(虎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과 같이 이름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고 그러나 짐승의 이름으로 관직을 나타내는 것은 후대에 고조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시국의 전쟁
- 치우와 유망(楡罔)과의 전쟁
환단고기에는 헌원과 유망와의 전쟁이 기록되었다. 그 개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치우가 신시국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 중국의 임금은 유망(楡罔)이었다. 치우는 신시국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유망을 공격하였다.
- 치우와 헌원(軒轅)과의 전쟁
치우가 유망과의 전쟁에서 유망의 나라를 아울러 통치한다는 소리를 헌원(軒轅)이 듣고 공격하여 왔다. 1차 전쟁으로 헌원과 탁록(涿鹿)에서 싸워 이겼으며 이때 헌원은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회대(淮岱) 와 기연(冀兗)의 모든 땅을 신시의 영토로 삼았다고 하니 회대는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및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기연은 기주(冀州)와 연주(兗州)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兗州)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및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70여 차례 헌원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 하였다. 치우가 죽은 후에 점차 그 땅에서 물러나왔지만, 많은 유민들이 고조선 시대에도 남아 있어 그 영향력을 중국에 미쳤는데, 중국사서에서는 이들을 회대지방에 있으므로 주로 회이(淮夷)라 기록하고 있으며 우이(嵎夷), 래이(萊夷), 도이(島夷), 구이(九夷)라고 기록한 사서도 있다.
역대 통치자
환단고기에는 환웅이 1천 5백여 년 간 대를 이어 다스린 배달국(또는 신시)의 역년이 기록되어 있다.
- (기원전 3898년): 거발한(居發桓) 한웅, 재위 94년, 120세
- (기원전 3804년): 거불리(居佛理) 한웅, 재위 86년, 102세
- (기원전 3718년): 우야고(右耶古) 한웅, 재위 99년, 135세
- (기원전 3619년): 모사라(慕士羅) 한웅, 재위 107년, 129세
- (기원전 3512년~기원전 3418년): 태우의(太虞儀) 한웅, 재위 93년, 115세
- (기원전 3419년~기원전 3322년): 다의발(多儀發) 한웅, 재위 98년, 110세
- (기원전 3321년): 거 련(居連) 한웅, 재위 81년, 140세
- (기원전 3240년~기원전 3168년): 안부련(安夫連) 한웅, 재위 73년, 94세
- (기원전 3167년): 양 운(養雲) 한웅, 재위 93년, 139세
- (기원전 3071년~기원전 2972년): 갈 고(葛古) 한웅, 또는 독로한 한웅 재위 100년, 125세
- (기원전 2971년): 거야발(居耶發) 한웅, 재위 92년, 149세
- (기원전 2897년): 주무신(州武愼) 한웅, 재위 105년, 123세
- (기원전 2774년): 사와라(斯瓦羅) 한웅, 재위 67년, 100세
- (기원전 2707년~기원전 2599년): 자오지(慈烏支) 한웅, 일명 치우천왕이라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 (기원전 2598년): 치액특(蚩額特) 한웅, 재위 89년, 118세
- (기원전 2509년): 축다리(祝多利) 한웅, 재위 56년, 99세
- (기원전 2453년): 혁다세(赫多世) 한웅, 재위 72년, 97세
- (기원전 2381년): 거불단(居弗壇) 한웅, 혹은 단웅(壇雄), 재위 48년, 82세
47대 단군의 치세
- 출전 - 「단군세기」
- 왕검(王儉)단군 : 재위 93년
- 부루(扶婁)단군 : 재위 58년
- 기원전 2231년 4월 밭을 나누고 밭 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 12년(기원전 2229년) 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 58년(기원전 2193년) 일식이 있었다.
- 가륵(嘉勒)단군 : 재위 45년
- 2년(기원전 2182년)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려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
- 오사구(烏斯丘)단군 : 재위 38년
- 원년(기원전 2137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였다.
- 7년(기원전 2131년) 조선소를 살수 상류에 설치했다.
- 구을(丘乙)단군 : 재위 16년
- 달문(達文)단군 : 재위 36년
- 한율(翰栗)단군 : 재위 54년
-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烏舍咸)단군 : 재위 8년
- 갑인 7년(기원전 1987년),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날아와 궁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너비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 아술(阿述)단군 : 재위 35년
- 노을(魯乙)단군 : 재위 59년
- 도해(道奚)단군 : 재위 57년
- 아한(阿漢)단군 : 재위 52년
- 흘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단군 : 재위 61년
- 고불(古弗)단군 : 재위 60년
- 56년(기원전 1657년)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 8천만인이었다.
-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단군 : 재위 51년
- 위나(尉那)단군 : 재위 58년
- 여을(余乙)단군 : 재위 68년
- 동엄(冬奄)단군 : 재위 49년
- 구모소(緱牟蘇)단군 : 재위 55년
- 기미 54년(기원전 1382년)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짓다.
- 고홀(固忽)단군 : 재위 43년
- 소태(蘇台)단군 : 재위 52년
- 색불루(索弗婁)단군 : 재위 48년
- 신독의 난
- 아홀(阿忽)단군 : 재위 76년
- 연나(延那)단군 : 재위 11년
- 솔나(率那)단군 : 재위 88년
- 추로(鄒盧)단군 : 재위 65년
- 두밀(豆密)단군 : 재위 26년
- 해모(奚牟)단군 : 재위 28년
- 마휴(摩休)단군 : 재위 34년
- 9년(기원전 935년) 남해 썰물이 3척을 물러갔다.
- 나휴(奈休)단군 : 재위 35년
- 등올(登兀)단군 : 재위 25년
- 추밀(鄒密)단군 : 재위 30년
- 13년(기원전 837년) 일식이 있었다.
- 감물(甘勿)단군 : 재위 24년
- 오루문(奧婁門)단군 : 재위 23년
- 사벌(沙伐)단군 : 재위 68년
- 매륵(買勒)단군 : 재위 58년
- 28년(기원전 676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 38년(기원전 555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해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 마물(麻勿)단군 : 재위 56년
- 다물(多勿)단군 : 재위 45년
- 두홀(豆忽)단군 : 재위 36년
- 달음(達音)단군 : 재위 18년
- 음차(音次)단군 : 재위 20년
- 을우지(乙于支)단군 : 재위 10년
- 물리(勿理)단군 : 재위 36년
- 구물(丘勿)단군 : 재위 29년
- 우화충의 난
- 여루(余婁)단군 : 재위 55년
- 보을(普乙)단군 : 재위 46년
- 한개의 난
- 고열가(古列加)단군 : 재위 58년
위서인가 진서인가?
학계의 의견
《환단고기》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쪽의 주류 역사학계는 위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79년에 처음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았으며, 각 시대의 저자들의 시대에는 없었던 용어들이 등장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 않으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의 학계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대한민국
환단고기는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고 있으며, 그 저술시기는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 등의 이견이 있다. (대체적인 의견은, 47대의 왕의 명칭과 천부경.삼일신고 같은 일부 내용이 1920년대에 이미 있었고, 1949년에 대부분의 내용이 구성되었으며, 이후로부터 1979년의 사이에 일부 내용이 덧붙여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조선의 광대한 묘사나 환국과 배달국의 기록 등은 근거가 부족하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 사료로서의 내용 채택을 보류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환단고기》가 위작인 것은 분명하나, 어딘가 다른 사료에 기반해 있어 연구의 가치는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규원사화》와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단기고사》 등을 국사연구 서적에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으나, 2천 년 간 47대로 《환단고기》와 거의 유사하게 설정된 《단기고사》의 연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전조선, 후조선의 구분은 채택하였다.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3. 40쪽 등 참조).
일본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吾鄕淸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 극찬하고 우익 또한 환영하였으나, 이와는 별도로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문헌의 불명확함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또한, 일본의 고사고전(古史古伝)[1] - 실사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의 사서(일본어 위키백과) - 과 비슷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진위의 논란
진서론
'진서론' 또는 '위서론에 대한 변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근대용어 등 후세에 일부 가필되었더라도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작했다면 보다 완벽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다.[14]
- 환단고기에는 민족 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련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
- 기존 학계가 밝혀내지 못한 내용들이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주장하는 논문은 다음과 같다.
- 김막순, 「한국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방대학원, 2000
- 박병섭,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한단고기》의 역사성 검토」, 한국종교사학회, 2003
위서론
《환단고기》가 위서(僞書)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도학, 〈在野史書 解題《桓檀古記》〉,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년, 경남대학교
- 이순근,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년 5월 15일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년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년
-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10호, 1990년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년
이들 위서론의 논점은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 용어사용의 부적절 - 고려(高麗), 몽고(蒙古), 사백력(시베리아), 흑수(흑룡강), 파나류산(파미르고원), 수밀이(수메르), 우루, 지백특(티베트), 남녀평권, 부권, 상춘, 영고탑, 세계만방(世界萬邦) 등 근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나 저술 시기와 맞지 않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 저술연대
- 기존 사서와의 불일치
- 후대의 글 인용 등 내용상의 모순 - 후대의 시가 인용되었고, 1909년 사망한 이기가 1911년 완성된 환단고기를 감수하는 등 주장에 모순이 있으며, 내용상 많은 문제점이 지적된다.
-
-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술된 2천 년 간 인구 1억 8천만명에 가까운 인구를 유지했을 고조선이 남긴 유적(거주지나 무덤),《환단고기》의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의 유적이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중도론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한말 ~ 일제 강점기 초에는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변용된 정도를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뉜다.
전자에 해당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년
후자에 해당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박창범, 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95, 1993[15]
- 김병기, 신정일,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7
기타 주장
민족주의적 성격에 대한 의문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다음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16]
- 《환단고기》가 저술되었다는 1911년은 항일민족투쟁기인데, 범례에서는 '세계 인류가 대등하게 모여서 함께 존재함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저술하고 있다.
- 고려 우왕 말기에 기록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왜구와의 싸움에 대한 언급이 없다.
- 「단군세기」에는 '소시모리'가 3도를 거점으로 '천왕'을 자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의 '소잔명존'을 연상시키며, '일선동조론'에 이용될 소지가 충분하다.
각주
- ↑ 이중연, 《'책'의 운명》, 혜안, 2001년, 32쪽
- ↑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
- ↑ 성창호, 《해동인물지》, 1969
- ↑ 전병훈, 《정신철학통편》, 1919
- ↑ 이단단학회, 《환단고기》, 1979
- ↑ '이유립'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유경, '박창암과 장도빈 - 국사찾기운동', 프레시안뉴스, 2003.12.13.
- ↑ 일본어 위키백과 - '吾郷清彦'
- ↑ 김은수 역주, (註解)《桓檀古記 - 檀君은 아시아를 統一했다》, 가나출판사, 1985
- ↑ 윤종영, '제5차 교육과정기의 국사 교과서 파동'
- ↑ 한자를 빌려 倍達國으로 적기도 한다.
- ↑ 밝달국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 ↑ 여운건, 오재성,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2004).
- ↑ 김막순, 「한국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방대학원, 2000, p.8
- ↑ 이 주장에는 반론이 있다. (이문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전국역사학대회 과학사분과 발표문, 2003)
- ↑ 박광용, 「대종교 과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
참고 문헌 및 링크
- 《환단고기》, 환단학회 편, 광오이해사, 1979.
-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고준환(경기대 법학과 교수), 개천절에 되새겨 보는 ‘실증적’ 단군조선사, 오마이뉴스, 2003.10.3..
- 〈환단고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조인성(경희대 사학과 교수), 국토포탈사이트.
- ‘‘환단고기’ 토대로 상고사 연구 보류해야 - 검증안된 내용 왜곡 우려’, 정영훈(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대 신문, 2004.3.31..
-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1997, pp.53.
-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안창범(제주대 명예교수), 한국종교사연구 통권 제10호 (2002. 2)
- 桓檀古記, 이도학(한양대 강사), 민족지성 9('86.11), 民族知性社
- 〈韓末 檀君關係史書의 再檢討 :《神檀實記》·《檀奇古史》·《桓檀古記》를 中心으로〉, 조인성, 국사관논총 제3집 (1989. 10), 國史編纂委員會.
-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한영우(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외, 일지사, 2002
-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이상시(변호사), 고려원, 1990
- 《韓民族의 뿌리思想》, 송호수(Baylor Univ. 명예교수), 가나출판사, 1985
-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전병훈, 1919
- 《고조선력사개관》, 허종호,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환단고기',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