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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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휘(避諱)는 고대 중국에서 황제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다. 때에 따라서는 글자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이 관습은 한국, 일본 등 주변의 한자문화권에 전파되었고 오랫동안 행해졌다. (諱)는 원래 왕이나 제후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실명경피속)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하여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풍습은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던 초기에 "세례명"을 자나 호처럼 여겨 기독교의 전래를 돕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일부 낱말도 쓰지 않는 예가 있었는데, 이러한 경우도 피휘로 보기도 한다.

목차

[편집] 피휘의 종류

  • 국휘(國諱)는 황제나 왕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보통 황제는 7대 위, 왕은 5대 위의 지배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 가휘(家諱)는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 성인휘(聖人諱)는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나라 사이의 외교 문서나 집안 사이의 서신 등에서는 서로 피휘를 지켜 주었다. 왕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에 불편이 생기기 때문에 왕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지었으며 주로 한 글자로 이름을 지었다.

[편집] 피휘의 방법

피휘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 대자(代字): 피할 글자를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다른 글자로 대체해서 쓴다.
  • 결자(缺字): 피할 글자를 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 놓는다.
  • 결획(缺劃): 피할 글자의 한 획, 특히 마지막 획을 긋지 않는다.

[편집] 중국의 피휘

  • 진시황이 황(皇)자와 고(辜, 흉이나 잘못을 뜻한다.)자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辜)를 죄(罪)로 바꾸었다.
  • 진시황의 이름 정(政)자를 피하려고 정월(正月)을 단월(端月)이라 고쳐 불렀다.
  •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계(啓)자를 쓰지 않기 위해 이십사절기 가운데 계칩(啓蟄)을 경칩(驚蟄)으로 바꾸었다.
  • 한나라 명제의 이름이 유장(劉莊)이었기 때문에 장(莊)을 뜻이 같은 엄(嚴)으로 고쳤다.
  • 삼국시대 위나라에서는 황제의 이름이 조황(曹璜)에서 조환(曹奐)으로 바뀌었다. ‘황’이라는 글자가 많은 사람들이 쓰는 글자라,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변경한 것이다.
  • 당나라 고조의 부친이 이병(李昞)이었다. 그 이름을 피하려고 육십간지에서 병(丙)을 모두 경(京)으로 바꿔야 했다.
  •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성씨 이(李)와 소리가 같은 이(鯉)가 뜻하는 “잉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잉어를 이(鯉) 대신에 적선공(赤鮮公, 붉은 물고기님)이라고 고쳐 썼다.
  •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고 대(代)자로 바꿔 썼다. 예를 들면 절세가인(絶世佳人)을 절대가인(絶代佳人)으로 바꾸었다.
  •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다 보니, 역사서 수서(隋書)를 편찬할 때 왕세충(王世充)을 왕 충(王 充)이라고 세(世)자를 공백으로 남겨 놓았고, 이 탓에 전한의 왕충(王充)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이세적(李世勣)도 이 적(李 勣)이라고 바꾸어 기록했다.
  • 송나라 휘종은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하였다.
  • 금나라 때에는 주공공자의 이름을 피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 청나라 때에는 강희제의 이름인 현엽(玄燁)을 피해 북경 자금성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을 신무문(神武門)으로 바꾸었다.
  • 1777년 청나라에서 왕석후(王錫侯)라는 학자가 건륭제의 이름을 책에 써서 본인을 포함해 수십 명의 관련된 사람이 처형당한 경우가 있다.

[편집] 한국의 피휘

  • 신라 시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와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에서 육십갑자병진(丙辰)과 병오(丙午)를 각각 경진(景辰)과 경오(景午)라고 썼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高祖)의 아버지 휘 ‘병(昞)’의 음을 피하기 위해 ‘경(景)’을 썼기 때문이다.
  • 고려 시대 봉암사(鳳巖寺) 정진대사탑비문(靜眞大師塔碑文)에서 '문무양반(文武兩班)'을 '문호양반(文虎兩班)'이라고 썼다. 이것은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피하기 위해 ‘호(虎)’를 썼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의 휘를 피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 삼국사기에서 김부식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썼다.
  • 조선 시대 대구군의 한자 이름은 원래 ‘大丘’였으나 공자의 휘 ‘구(丘)’를 피하기 위해 ‘大邱’로 바뀌었다. 1750년 대구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공자의 휘가 ‘구(丘)’ 이므로 ‘大丘’를 ‘大邱’로 바꾸어달라고 상소했으나 영조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 때부터 점차적으로 ‘大邱’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 조선 시대 대원군경복궁을 복원할 때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홍례문(弘禮門)의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이라고 바꿨다.
  • 조선 시대 유교 경전이나 서적을 펴낼 때 ‘丘’자를 붉은 종이로 덮어두거나, 붉은 네모 테두리로 둘렀다.
  • 조선 시대 공자의 이름 ‘孔丘’(공구)를 말하거나 읽을 때 ‘공모’라고 하기도 했다.

[편집] 특수한 경우

  • 원래(原來)라는 말은 원래(元來)였으나, 그 말의 다른 뜻(원이 온다) 때문에, 한자문화권의 국가에서는 원나라가 물러난 뒤에 원래(原來)로 바꾸었다. 오늘날은 둘 다 쓰인다.
  • 명나라 초기에 많은 관리가 원년(元年) 대신 원년(原年)으로 고쳐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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