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당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후당(後唐 923년~936년)은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五代)의 두번째 왕조로 진왕(晉王)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건국한 나라이다.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여 국호을 당나라라고 하였는데, 구별하기 위해 후당이라 불리었다. 수도는 낙양이다.
목차 |
[편집] 역사
당나라 말기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이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써 진양(晋陽;태원)에 주둔하여 산서지방에서 일어난 군벌(진(晋)나라)이 그 전신(前身)이다. 이극용은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을 제수받았으나, 라이벌 주전충과의 세력다툼에서 패배했다. 주전충이 당나라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우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편집] 전기
이극용의 사후,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할때쯤 후량의 내분이 일어나 서서히 진나라가 우세하게 되었다. 힘을 얻은 이존욱은 923년 위주(魏州)에서 황제을 칭하면서 후당을 건국했다. 같은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에 수도을 정했다.
이존욱(장종;莊宗)은 이후 사천지방의 전촉을 멸망시키고, 남쪽의 여러나라의 제위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재통일을 추진했으나, 서서히 교만해지면서 사치와 향략에 빠져 군대의 신뢰을 잃었다. 926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후당은 큰 혼란에 빠졌다. 장종은 부득이하게 이극용의 양자 이사원(후에 명종(明宗)에게 명하여 하북의 반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사원의 양자 이종하와 사위 석경당의 책략하에 하북반군은 이사원을 황제로 옹립하고 오히려 낙양에 쳐들어왔다. 장종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이사원은 반란을 수습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수도를 낙양에서 카이펑으로 옮기니 그가 바로 후당의 명종이었다.
[편집] 후기
명종은 즉위 후 재상 풍도을 등용하여 정치을 바로 잡고, 열심히 다스렸기에 명종은 상당한 치적을 쌓았고 조정안밖은 매우 안정하였다. 다만 군인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게 된것이 불안요소였다. 치세기간은 비교적 평온하게 보냈으나 만년에 이르러 제위을 둘러싼 혼란이 일어났다. 933년 명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진왕(秦王) 이종영이 찬탈을 노리고 명종을 살해하러 병사를 이끌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결과적으로 찬탈은 실패하고 이종영은 살해되었다. 명종은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사실을 알고 놀라 사망하였고, 대신들은 상의끝에 송왕(宋王) 이종후가 뒤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후당의 민제였다.
민제의 즉위후 채용한 삭번정책은 군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명종의 양자 노왕(潞王)이종하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쳐들어와 제위을 빼앗았다. 민제는 부인을 데리고 하북으로 도망쳤으나 이종하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종하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후당의 말제였다.
말제가 즉위하였지만 이번엔 이종하와 함께 명종의 오랜 심복이면서 명종의 사위였던 석경당과 불화가 일어나 석경당은 진양에서 후당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말제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태원을 공격하자, 석경당은 북쪽의 거란에게 항복하여 원군을 요청하였고, 거란은 태종 야율덕광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격파했다.
석경당은 거란의 힘을 빌어 스스로 제위에 올라 936년 후진을 건국했다. 937년 1월 거란과 합세한 석경당의 대군이 낙양을 공격하자 말제는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고, 후당은 멸망하였다.
후당의 지배영역은 하남, 산동, 산서, 하북, 섬서북부, 감숙동부, 호북북부, 안휘북부에 이르렀다.
[편집] 명장,명신
| 중국 오대십국 시대의 왕조 |
|---|
| 5대 왕조 |
|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 10국 정권 |
| 전촉 | 후촉 | 오 | 남당 | 형남 | 오월 | 민 | 초 | 남한 | 북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