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토의 보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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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몽 드 타란토( ? ~ 1111년 )는 1차 십자군에 가담한 영주의 하나이다. 1차 십자군의 영주들 중 그 누구보다도 잔인하고 야심이 큰 인물로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아들이다. 한때 아버지를 따라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해 알렉시우스 1세 황제와 싸우기도 했으나 아버지 사후 계모에 밀려 몰락했다. 그러다 십자군이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중 십자군에 버금가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합류했다. 그는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카르부카에게 공격받는다. 그는 은자 피에르가 주장한 성창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은자 피에르가 시죄법 재판으로 죽자 당연히 입김이 세졌다. 또한 무슬림들을 도살해 어른은 삶아먹고 어린이는 구워먹는 등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아데마르 주교의 후임인 다임베르트 주교와 짜고 고드프루아가 맡은 예루살렘을 빼앗으려다가 실패, 보에몽은 무슬림들에게 투옥당한다.
옥고를 치르고 비잔티움 제국에는 보에몽의 운구차가 온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을 지나 서유럽으로 들어서자 마자 보에몽은 벌떡 일어난다. 그는 서유럽으로 가려고 했으나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비잔티움을 안전히 지나기 위해 시체인척 했던 것이다. 알렉시우스 1세 황제의 딸 안나 콤네나 공주의 역사서 《알렉시아드》에 따르면, 보에몽은 연극을 실감나게 하려고 썩어가는 닭의 사체를 자기 옆에 두고 누웠다고 한다.
이런 기발한 방법으로 탈출한 보에몽은 1107년 군사를 모아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지만 실패하고 강화를 맺는다. 조약의 내용은 <보에몽이 죽으면 안티오키아를 비잔틴에 반환한다>로 알렉시우스 1세와 안티오키아의 새 군주 탕크레드와 마찰이 이는 원인이 된다. 보에몽은 그 뒤 서유럽으로 돌아가 1111년 죽었다. 보에몽의 작위를 가로챈 조카 탕크레드 또한 보에몽이 죽고 이듬해 1112년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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