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로코솝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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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소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년 12월 21일 ~ 1968년 8월 3일

태어난 곳 제정러시아, 바르샤바 또는 벨리키에루키
죽은 곳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복무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최종 계급 원수
지휘 돈 전선군
제1벨라루스 전선군
제2벨라루스 전선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제2차세계대전
서훈 내역 레닌 훈장
소련 영웅(2회)
기타 이력 폴란드 국방장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Konstantinovich Rokossovskii, 러시아어: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폴란드어: Konstanty Rokossowski, 1896년 12월 21일 ~ 1968년 8월 3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의 군인이었다. 전후에는 폴란드 국방장관과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다.

폴란드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코솝스키는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군 기병대에서 복무하던 중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군대에 가담했다. 기병대에서 활약했던 그는 붉은군대에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기갑부대를 중시하는 혁신적인 생각때문에 기병을 중시하는 보수파 고위 장교들(대표적으로 부됸니)과 충돌이 잦았다. 이것이 이유가 되어 1937년 대숙청 기간 동안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폴란드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첩보조직과 내통" 이라는 이유가 공식적인 죄목이었다. 이 때 고문으로 갈비뼈가 세대, 이빨이 아홉 개가 부러졌고, 특히 발을 심하게 다쳐 평생 뒤뚱거리며 걸었다고 한다. 1940년 점증하는 독일의 위협과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동료들의 탄원으로 이유없이 석방되었고 스탈린과의 짧은 면담 이후 키에프 군관구의 군단장으로 복직했다.

194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 퍼레이드 당시 주코프 원수와 함께 있는 로코솝스키(검정 말)
194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 퍼레이드 당시 주코프 원수와 함께 있는 로코솝스키(검정 말)

이후 로코솝스키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붉은군대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고, 소련군의 승리한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등의 거의 모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1944년에는 원수로 승진하였다. 1945년에는 나치독일의 숨통을 끊는 베를린 공방전에도 참전했다.

소련군 군복 차림의 로코솝스키
소련군 군복 차림의 로코솝스키

전쟁이 끝난 후에 모스크바에서 승리 기념 퍼레이드를 펼칠때 퍼레이드를 지휘하는 명예스러운 임무를 맡았는데, 그때도 신분은 공식적으로는 사형수였다. 그가 사형수 신분에서 벗어난 것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난 후였다.[출처 필요]

폴란드군 군복 차림의 로코솝스키
폴란드군 군복 차림의 로코솝스키

전후에는 폴란드 주둔 소련군 사령관을 맡았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에 귀화하여 폴란드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35년동안이나 러시아에 살았던 그를 러시아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는 "러시아에서는 나를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나를 러시아인이라고 한다"고 씁쓸히 말하기도 했다. 1956년 폴란드에서 반소 봉기가 일어나자 폴란드 정치무대에서 은퇴하고 소련으로 돌아가 국방차관을 지내기도 했다. 1968년 사망후에는 다른 동료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크레믈린 벽묘지에 묻혔다. 회고록으로 <<군인의 의무>>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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