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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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하멜(네덜란드어: Hendrick Hamel, 1630년 ~ 1692년)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네덜란드어: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소속의 선원이자,서기이다. 고향은 네덜란드 호르콤시이며, 1635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서 살았다.

목차

[편집] 조선 체류

1653년 스페르베르(네덜란드말로 새매)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한다. 이들은 곧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그곳에서 하멜과 똑같이 조선에 표류하여 훈련도감 근무자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의 통역을 통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부대원으로서의 체류는 허락받았으나, 일본이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조선에서는 이방인을 외부에 보내지 않는다"면서 금지되었다. 이들은 한양에 체류하였으나, 조정의 감시를 받았으며,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에게 호소하여 국외로 탈출하려는 계획과 어선으로 탈출하려는 계획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두번째 탈출계혹 실패에 대해서 하멜은 일본 관리의 심문에서 조선 지리를 잘 몰라서였다고 하였다. 효종승하(1659년)후 닥친 식량난때문에 각각 분산되어 전라도에 보내져 10년간 살았다.[1] 심각한 식량난과 일부 관리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이들 22명의 선원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은 어선을 타고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하였으니 이때가 1666년이었다. 이들은 일본관리의 심문을 받은후, 약 1년간 억류되어 있었다. 1년간 억압된 이유는 조선과 일본사이에 외교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2] 고향을 떠난지 13년만인 1668년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과 동료들은 소속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조선과 일본에서 지낸 12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여, 보상금을 받았다. 이때 하멜은 정식보고서인 ‘1653년 바타비아(현재 인도네시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를 회사에 제출했는데, 이 문서가 《하멜표류기》이다. 네덜란드에 돌아온 하멜은 인디아로 항해하기도 하였으나,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미혼자로 살았다는 것외에는 이후의 생활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편집] 하멜 표류기

문맹이었던 다른 선원들과 달리-실제로 보상금을 받고 서명할때 일부 선원은 이름대신 X를 표시했다.-하멜은 유일하게 글쓰기 교육을 받은 서기였으며, 따라서 조선에서 체험한 사건들에 대해서 꼼꼼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피고용인으로서 그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귀환 후 그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억류 기간 동안의 임금을 요구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조선의 정치·외교·교육·종교(불교문화·사회상 및 언어에 대해 서구인의 시각에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하멜표류기를 근거로 조선에서의 무역을 계획하였다.

[편집] 현재

하멜과 한국의 인연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네덜란드에서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나, 월드컵을 통해 유명해진 거스 히딩크 감독등이 네덜란드에 소개되면서 하멜도 알려졌다. 그의 고향 호린헴에서는 하멜동상이 세워졌으며, 하멜이 7년간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에도 하멜 기념관이 2007년 8월경에 완공예정이다. 또한 일본의 나가사키 시에도 하멜기념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언론에서는 한국방송의 다큐멘터리 〈KBS스페셜〉에서 재현극과 네덜란드에서의 취재로 하멜의 조선에서의 억류생활과 귀국후 생활을 보도하였다. 2003년에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하멜이 남긴 표류기의 육필원고원본을 공개[3]하였으며, 남제주군에서도 20억원을 들여 길이 36.6미터 높이 11미터 규모의 당시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을 85% 규모로 축소 제작하여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다.[4]

[편집] 바깥고리

하멜표류기에 관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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