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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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
(로마 공화정의 내전의 일부)

카이사르폼페이우스
날짜 : 기원전 49년 1월 - 기원전 45년
장소 : 히스파니아,이탈리아,그리스,북아프리카
결과 : 카이사르의 승리
교전국
카이사르와 민중파 원로원
지휘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살해됨)
메텔루스 스키피오(전사)
티투스 라비에누스(전사)
카토(자살)

카이사르의 내전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민중파와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말한다. 이 내전에서 카이사르는 원로원 공화정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잡았고 로마 공화정은 그 종말로 한걸음 다가가게 되었다.

목차

[편집] 내전 전의 상황

기원전 53년을 고비로 제1차 삼두정치가 깨지자 폼페이우스는 점점 원로원파에 기울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로마에 머물던 폼페이우스는 거부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앞세워 갈리아 전쟁으로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 카이사르를 압박해왔고 카이사르는 여러차례 타협점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원로원은 갈리아에서 집정관직 참가 자격을 부여할 것을 요청한 카이사르의 요구를 묵살하였고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에게 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양측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위해 일하던 호민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했다. 기원전 49년 1월 1일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고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을 "공화정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편집] 내전의 양상

[편집] 루비콘 강과 히스파니아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제13군단을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로마의 원로원파는 카이사르가 그렇게 빨리 쳐내려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로마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쿠리오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아레초를 비롯한 거점도시를 공략하게 했고 도망치는 폼페이우스에게 여러차례 대화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폼페이우스는 도미티쿠스를 북쪽으로 보내 카이사르를 막게하는 한편 브린디시에 도착해 자신의 영향력이 막강한 동부의 속주로 달아나 장기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로마에서 도망친 메텔루스 스키피오카토도 곧 폼페이우스와 합류했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추격하는 카이사르 군을 따돌리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진영을 짰고 이탈리아를 봉쇄했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안토니우스에게 맡기고 서둘러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 히스파니아로 떠났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동방에 걸쳐 있었기에 그는 일단 히스파니아를 평정하여 배후를 다질 생각이었다. 카이사르는 엄청난 속도로 행군하였는데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저항을 받았다. 마실리아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했고 8개월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당했다. 27일만에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그곳에서 놀라운 기동력으로 폼페이우스의 군단장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로니우스의 군단을 궁지에 몰아 넣고 항복을 받아냈다. 곧이어 히스파니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편집] 그리스, 아프리카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떠나면서 시칠리아북아프리카쿠리오에게 맡겼는데 쿠리오는 시칠리아를 평정하는데 성공했으나 북아프리카에서는 누미디아왕 유바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연합군에게 패했고 전사했다. 한편 아드리아 해를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에게 맡겼는데 우세한 폼페이우스군에게 패하여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단 10일정도를 로마에 머물면서 독재관에 취임하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한다음 바로 사임하고 기원전 48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떠났다. 기원전 48년 1월 카이사르는 디라키움(현재의 알바니아의 두레스)남쪽에 상륙했고 폼페이우스군과 대치했다. 폼페이우스는 병력의 우세와 군량의 풍족함을 바탕으로 방어적인 전술로 나왔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카이사르는 적극전법을 사용했다. 3개월에 걸친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패했고 테살리아로 퇴각했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진영에 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포로들을 모두 살해했다.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에서의 거둔 승리에도 카이사르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두 진영은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의 평원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다시 맞붙었고 결과는 카이사르의 승리였다. 보병은 2배, 기병은 7배나 많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패배하고 라리사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파는 양분되어 일부는 북아프리카로 가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로 하였고 일부는 은퇴했다. 카이사르는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고 폼페이우스의 지지세력인 동방의 여러 지역이 카이사르편으로 돌아섰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향했다.

[편집] 이집트와 동방정벌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의탁하려했으나 9월 28일 이집트에 상륙하자마자 살해당했다. 며칠후 알렉산드리아까지 폼페이우스를 쫓아갔던 카이사르는 그곳에서 이집트 왕실의 내전에 관여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의 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싸우고 그녀를 이집트의 왕위에 앉혔다. 이후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더 머물면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가졌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기원전 47년, 이집트에서 나와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한 카이사르는 폰투스파르나케스 2세를 격파했고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vici)라는 승전보를 원로원에 보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실정과 여러가지 국내문제를 해결한 뒤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듬해인 기원전 46년 4월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의 탑수스(현재의 튀니지)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을 맞아 싸웠다. 이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왕 유바와 폼페이우스파 연합군을 격파했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누미디아왕이 죽었고 그리고 오랬동안 카이사르를 공격했던 카토가 자살했다.

[편집] 잔당의 소탕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여러가지 개혁에 착수했으나 곧이어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직접 히스파니아로 원정을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는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모아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함께 세력을 모았다.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내전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폼페이우스의 아들중 그나이우스는 죽고 섹스투스는 도망쳤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관이었다가 폼페이우스파로 돌아섰던 라비에누스도 전사했다. 이로서 카이사르의 내전은 모두 끝이 났다.

[편집] 내전의 결과

카이사르는 내전을 끝내고 로마의 유일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마리우스술라 처럼 잔인한 보복과 숙청을 하지 않고 관용정책으로 등용하였다. 키케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등 자신에게 적대했던 사람들을 모두 살려주었고 재산을 빼았지도 않았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되어 각종 국가개조 사업을 벌였고 열정적으로 일했으나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암살당했다.

[편집]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