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텔 산탄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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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 산탄젤로 또는 하드리아누스의 영묘는 로마에 있는 원통모양의 건축물로 원래 로마 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세운 무덤이었다. 이후에는 성곽과 요새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편집] 하드리아누스의 건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영묘는 135년부터 139년에 티베르 강 오른쪽 연안에 세워졌다. 하드리아누스의 유해는 138년이곳에 묻혔고 그 이후 카라칼라황제까지 묘지로 쓰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영묘의 정면에 산탄젤로 다리도 세웠는데 이 다리는 아직까지도 로마에서 산탄젤로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원래는 수많은 조각품과 석상들로 장식되어있었으나 401년 영묘가 군사 요새로 개조되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호노리우스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세울 때 재료로 쓰였다. 산탄젤로의 왕제의 유해는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할 때 상당부분 약탈당했고 이후 537년 고트족의 로마 공성전때도 파괴되었다.
산탄젤로라는 이름은 590년 대교황 그레고리우스가 흑사병이 물러나기를 기원하는 참회의 기도를 올리다 흑사병의 종말을 뜻하는 광경, 즉 대천사 미카엘이 이 성 상공에서 칼을 칼집에 넣는 환영을 보았고 해서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 지금의 산탄젤로 (성 천사) 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1536년 조각가 라파엘로 다 몬테루포는 이 건물 꼭대기에 대천사 미카엘의 대리석상을 세웠다.
[편집] 교황의 성, 피난처, 그리고 감옥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교황들이 이 영묘단지를 성곽으로 개조했고 중세동안 내내 교황의 피난처, 요새, 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3세는 산탄젤로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연결하는 요새화된 통로를 만들었고 1527년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로 도피했고 황제는 이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이 때 화가 벤베누토 첼리니가 성벽에서 적군을 쏘아죽였다는 일화도 내려온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안에 성모 성당을 지었고 교황 바오로 3세는 성안을 화려한 교황의 거처로 꾸며 향후에 교황을 위협하는 전투가 벌어졌을때의 피난처로 만들었다. 또한 교황령의 중요한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성에 갇힌 가장 유명한 죄수중에는 조르다노 부르노가 있는데 그는 이 곳에서 6년간 죄수로 투옥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4각형으로 둘러싸인 원형인데 4각형의 각 모서리에는 개별적으로 설계된 망루가 있다. 중앙에 우뚝 솟은 원통형 부분은 홀·예배당·주택·중정 및 감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의 원통형의 성 정상에서 원래 라파엘로 다 몬테루포가 제작한 대천사 미카엘의 대리석상이 있었는데 18세기에 들어서 플랑드르의 조작가 페터 안톤 폰 베르샤펠트에 의해 청동상으로 바뀌었다.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서 3막에 여주인공이 뛰어내리는 성벽의 배경도 바로 이 산탄젤로 성이다. 1901년부터는 사용이 중단되었고 현재는 이탈리아의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편집] 겔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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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7세의 세면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