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야마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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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1838년 6월 14일(天保텐포-9년)~1922년 2월 1일(大正다이쇼 11년) 일본의 정치가, 군인.

유명은 신노스케 통칭은 소보 후에 쿄우스케로 개명. 유신 후에는 아리토모의 휘를 칭함. 만년에는 육군 뿐 아니라 정계의 흑막으로 군림해, ‘일본 군벌의 선조’의 이명을 지닌다. 제 3대, 9대 내각총리대신. 원로, 위계 훈등은 육군 대장․원수 종1위 대훈위 공1급 공작. 또, 대영제국의 메리트 훈장도 받았다.


경력

하기죠 하 근교의 아부군 카와시마무라(현, 야마구치현 하기이치 카와시마)에서 하기번 하급무사인 쿠라모토츠케츄칸(蔵元付中間) 아시가루(足軽)보다 낮은 신분 야마가타 유-미노리, 마츠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래에 창술로 출세하려 소년시절부터 창 연습에 힘쓰고 있었다.

구사카 겐즈이의 소개로 요시다 쇼인이 주최한 마쓰시타 손쥬쿠에서 배우며 존왕양이 운동에 참가했다. 야마가타 자신은 생애「본인은 쇼인 선생님 문하로소이다」라고 칭하며 자랑으로 삼고 있었지만, 현존하는 자료로부터 야마가타의 재학기간이 지극히 짧았던 사실이 판명되고 있어 실제로 쇼인으로부터 어느정도의 훈도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분큐3년(1863년)에 상하이에 도항했다. 다카스키 신사쿠를 대신해 키헤이타이 군감으로서 활약, 보신 전쟁에서는 호쿠리쿠도 진무총독, 아이즈 정토 총독의 참모로 활약했다.

1869년에 유럽으로 가서 각국의 군사제도를 시찰했다. 익년 귀국해, 후에 암살된 오-무라 마스지로-의 유지를 이어 군제개혁을 실시해, 징병제를 도입했다. 1872년 야마시로야 사건(山城屋事件)으로 사직, 1873년 육군경이 되어 참모본부를 설치, 군인속요의 제정에 관여한다.

1883년에는 내무경에 취임하여, 자유민권운동을 탄압함과 동시에, 시제市制・정촌제町村制・부현제府県制・군제郡制를 개정하였다.

1889년에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 초연주의를 취해 군비확장을 진행시켜갔다. 제1회 제국의회에서는 시정 방침 연설로 ‘주권선’(국경) 뿐만 아니라 ‘이익선’(한반도)의 확보를 위해 군사예산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891년에 사임하고(1) 원로가 됐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는 전쟁수행의 지휘를 맡았지만 빗나간 것이 많아 ‘천황께 분정보고를 하라’라는 명목으로 제일선에서 소환된 적도 있다.

현재 도쿄 중심부의 도로는 좁다고 하지만, 메이지기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비정상일 정도로 넓은 도로였다. 장래의 발전을 생각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며 넓은 도로를 만든 것은 야마가타다.

1898년 제 2차 야마가타 내각 발족.

1899년 문관 임용령을 개정(2) 문관징계령, 문관분한령을 공포

1900년 3월 10일, 치안 경찰법을 제정해, 정치․노동 운동등의 탄압을 진행시켰다. 내용은 정치 결사․정치집회의 신고제 및 해산권의 소지, 군인․경찰관․종교자․교원․여성․미성년자․공권박탈자의 정치운동의 금지, 노동조합 가맹 권유의 제한․동맹 파업 금지등이다. 이어 3월 29일, 중의원 의원 선거법을 개정해, 선거권을 지조 또는 국세 15엔 이상에서 10엔 이상으로 완화 (더불어, 국세는 과거 3년간에서 2년으로 완화, 지조는 1년간으로 변화 없음) 함과 동시에, 소선거구제(일부 완전 연기제의 중선거구제)에서 대선거구제(일부 소선거구)로 고쳤다.

시의 제도를 집행하고 있는 자치체는 각각 독립된 선거구로 하여, 도도부현都道府県의 군부郡部를 각각 1선거구로 했다. 이 때문에, 도쿄, 오사카, 나고야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는 인구가 적어 정수 1의 소선거구가 되었다. 또, 기명투표를 비밀투표로 고쳐, 초등학교 교원의 피선거권을 금지했다. 야마가타는 정당정치를 싫어해, 의회세력과 일관해서 적대했다(초연주의). 소선거구제는 강대한 정당이 태어나기 쉬웠기에, 대선거구제로 고쳐 소당을 분립시키면 의회의 회유가 쉬워진다는 계산이 있었다. 또, 정당이 농촌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 때문에, 선거구의 재조합이나 국세 납부의 자격을 완화하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지반을 파괴해 정부나 도시지역의 의향을 반영한 의원을 낳기 쉽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한다. 그렇다지만, 소선거구가 남은 것, 정당 그 자체가 발전도상의 시기인 것 등에서 대선거구제하에서도 오히려 의석은 대정당으로 집중되어갔다.

자유민권운동의 탄압이나 대역사건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 궁중모중대사건에서의 궁중으로의 필요이상의 용훼(이 사건의 원인은 야먀가타보다 사이온지 긴모치에 있다고도 말해지고 있지만, 세간에서는 번파간의 대립으로 파악되었고, 결과적으로 야마가타 1인이 ‘惡人’이 된 면이 있다.)등에서, 야마가타의 인기는 생전부터 대단히 낮았다.

그 임종때에는 유신의 원훈으로서 국장을 행했지만, 참례한 것은 육군이나 경찰의 관계자가 대부분으로, 일반인의 참례는 별로 없었다. 이것은, 거의 때를 같이해 죽은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장의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똑같이 수상 경험자이며 유신의 원훈이었찌만 국장이 되지 못한데에도 각계의 저명인사나 일반 참석자에 의해서 붐비었던데에 비교하면 정말 외로운 것이었다. 또, 당시 신문기자였던 이시바시 단잔(후의 수상)은 야마가타의 죽음을 ‘죽음으로 또 사회봉사’라고 혹평했다. 또 다른 신문에서는 ‘국민을 뺀 국장’이라고 전했다.

황실에서도 야마가타는 상당히 인기가 없던 나머지, 메이지 천황은 야마가타에게 キリギリス(학명Gampsocleis buergeri)-여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메이지 천황은 뒤로 어둡고 음험한 면이 있는 야마가타보다, 명랑 쾌활하고 냉정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신뢰하고 있었다. 또 다이쇼 천황은 야마가타가 궁중에 참내했다는 말을 들으면, 측근들에게 ‘뭔가 야마가타에게 줘버릴게 없는가?’라고 묻는게 여러차례 있었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뭔가 참례의 기념이 되는 것을 줘버리고 빨리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또 야마가타가 지닌 비정상적일 만큼의 권력을 향한 집착, 훈장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하라 다카시는 ‘저건 아시가루이기 때문이다.’란 한마디로 줄여 경멸했다.

더하여 야마가타는 죠수벌의 대표격으로 있던 것으로, 보신전쟁에 적대한 구 막부여러번의 출신자로부터도 평판이 나빴다. 메이지기를 통해서 아이즈번이나 난부번 출신자등을 ‘조적풍정가로 업신여겨 아이즈 마쓰다이라 출신의 마쓰다이라 세츠코 왕비의 혼인에 반대하는 등 여러 가지 방해 공작을 행했다. 이것이 삿쵸벌을 향한 원한을 증폭시켜, 현재에도 계속되어 아이즈와카마츠시와 야마구치현 출신자의 응어리가 되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쇼와 천황은 야마가타를 군인으로서 높게 평가하고 있던 것 같다. 이것에 대해서는 쇼와 천황의 항목을 참조.

정원을 좋아하는 걸로도 알려져, 교토의 무인암, 도쿄의 츠바키야마장은 야마가타가 7대째의 오가와 지헤이를 발탁해 구축한 것이다. 그 밖에 오이소의 소도암, 오다와라의 고희암이 있다. 다인으로서도 알려져 있고, 한편 와카를 좋아했다.


군 내부에 준 영향

그의 죠슈번 출신의 군인만을 요직에 종사하게 하는 수업은 쵸바츠(長閥)로 불려 싫어하는 사라이 매우 많았다. 또 근대 일본 최초의 대대적인 오직 의혹에 관련되어 일시 사직도 하고 있다 -야마시로야 사건(山城屋事件)-.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와 함께 죠슈편들기를 추진했지만, 데라우치의 사후 그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여 야마가타의 죽음으로 쵸바츠세력의 최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 후, 군 내부에서는 반쵸바츠의 이름하에 배척이 진행되어, 이전에는 조슈 출신이라고 쓰면 요직에 앉게된다고까지 이야기된 것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특히 도조 히데키는 조슈 출신의 사람을 싫어하여 철저히 경멸해, 시험때도 조슈출신이라고 하는 것 만으로 도조는 큰 폭으로 점수를 떨어뜨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가 실권을 잡게 되어, 그 이외의 사람들은 그들을 군벌이라 불렀다. 결국, 쵸바츠, 반 쵸바츠의 대립이 사라지고, 군벌과 그렇지 않은 자의 대립이 태어난 것이다.


영전

메이지 10년 11월 12일 : 훈1등 욱일 대수장

메이지 17년 7월 7일 : 백작

메이지 28년 5월 26일 : 원훈 우대

메이지 28년 8월 5일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공2급금치훈장, 후작

메이지 31년 1월 20일 : 원수

메이지 35년 6월 3일 : 대훈위 국화 대수장

메이지 40년 9월 21일 : 대훈위 국화장경식, 공1급금치훈장, 공작

다이쇼 11년 2월 9일 : 국장




(1)정적인 이토 히로부미가 입헌 정우회를 설립해, 총재로 취임했던 것에 따른 것. 사임에 임하여 후임에 이토를 추천했다. 정우회 설립 직후이기 때문에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고 혼란스러울 것을 예측한 것이다.

(2)부처, 특히 내무성의 고급관료로부터 켄세이토憲政党등의 정당원을 내쫓아, 처음부터 기르는 관료를 많이 배치하기 위해서다. 이 노력도, 후에 하라 다카시에 의해서 억지로 되돌려지는 결과가 된다.



출처: 일본 위키페디아 야마가타 아리토모 항목

http://ja.wikipedia.org/wiki/%E5%B1%B1%E7%B8%A3%E6%9C%89%E6%9C%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