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1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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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ire français
프랑스 제국
국기 문장
프랑스 제국 당시의 국토
공용어 프랑스어
수도 파리
체제 전제군주제
왕가 보나파르트 왕가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
최후 황제 나폴레옹 2세
건국 연도 1804년
해체 연도 1814년 혹은 1815년
통화 프랑

프랑스 제1제정(프랑스어: Premier Empire)은 1804년 건립되어 나폴레옹 1세의 통치를 받으며 1814년 혹은 1815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군사 독재 정권이다.

목차

[편집] 역사

[편집] 프랑스 제국의 성립

[편집] 프랑스 제국의 번영

[편집] 해방 전쟁 전개

[편집] 프랑스 제국의 종식

당초에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알렉산드르 3세가 곧바로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폴레옹의 안이한 생각을 뒤집은 것은 또다시 프랑스 혁명의 수출품인 민족주의의 발흥이었다. 조국이 유린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반나폴레옹의 상징이 된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해서도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를 배경으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강한 저항을 했으며, 또한 프랑스군이 지나가는 길마다 농민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하게 된다. 한편 프랑스군은 예상이 빗나가자 다음 군사 목표를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철군 타이밍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10월에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철군을 개시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프랑스 병사들은 러시아군 또는 농민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죽는 사람 외에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12월에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군대를 방치한 채 파리로 귀환해 버리지만, 이 때 벌써 러시아 원정 시 100만 명에 달하던 프랑스군은 완전히 괴멸한 상태였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러시아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지만, 이 전세를 만회한 알렉산드르 3세는 기세를 올려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하여 서쪽으로 계속 군대를 진군시켰다. 여기에 프로이센이 가담하였으며, 오스트리아는 황후 마리 루이즈 문제로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대해서 호의적인 중립으로 입장을 굳혔다.

프랑스 국내에 있어서 나폴레옹 정권은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군사 능력과 그가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정권 존속을 보장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에서의 대패는 나폴레옹 정권의 기반을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12월의 쿠데타 미수 외에 정권 내부의 반역, 징병에 대한 반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1813년 여름에 군을 재편하고, 서쪽으로 향하는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드레스덴 주변에서 맞아 진격 저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전 교섭으로 시간을 지체하면서, 그 동안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에게 재편할 시간을 주게 되었으며 거기에다가 오스트리아군마저 적으로 돌린 일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실패였다. 결국 프랑스군의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격파되어 프랑스군은 프랑스 본토로의 철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되는 1814년의 파리 침공전에서도 연합군의 교묘한 기만 공작으로 소수의 부대가 수비하는 파리로의 입성을 허락해 버렸다. 제국 의회는 나폴레옹의 퇴위를 요구하였으며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도 의견을 모아 퇴위할 것을 간청하여 나폴레옹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4월 4일 퇴위 문서에 서명하여, 엘바 섬으로 떠났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왕당파에게 있어선 1792년의 왕권 정지 이래부터의 염원이었던 복권이였지만,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해 온 루이 18세로서는 혁명으로 진전된 프랑스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옛 제도의 부활을 기획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한편, 유럽 열강은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결정하기 위해 빈 회의를 열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한 채로 전혀 진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의 틈을 노려 나폴레옹은 1815년 엘바 섬에서 탈출하였다.

엘바 섬에서 벗어나 프랑스 남해안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젊은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휘하 장수들의 대부분을 소집하였다. 그런 다음 시대에 뒤떨어진 루이 18세에 대해 실망했던 파리 시민과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파리로 입성했다. 나폴레옹의 갑작스런 귀환에 경악한 각국 열강은 다시 나폴레옹에 대해 저항하기로 뜻을 모으고,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연합군은 벨기에 지방에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을, 라인 방면과 이탈리아 북부에 오스트리아군을 주둔시키면서 광범위한 나폴레옹 포위망을 형성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인솔한 프랑스군은 벨기에 방면을 침공하여, 영국군-프로이센군과 대치했다. 당시 영국군을 인솔한 사람은 웰링턴 공 아서 웰슬리로,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끈질기게 유지하며, 프로이센의 원군을 기다렸다. 한편 프랑스군은 지원 부대가 전투가 늦었는데 반해, 영국군은 프로이센군이 합류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다시 패배하여 파리로 패주하였다. 그리고 재차 퇴위 문서에 서명당하고, 이번에는 대서양의 멀리 떨어진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됨으로써 나폴레옹 정부는 완전히 실각하여 제1제정(제1제국)은 붕괴하고 만다.

[편집] 역대 황제

  1. 나폴레옹 1세 (1804년 - 1814년, 1815년)
  2. 나폴레옹 2세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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