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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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궁(陳宮, ?~198년)은 자는 공태(公台)로서 예주 동군(東郡) 사람이다. 후한 말기의 군웅 여포(呂布)의 참모였다.
[편집] 생애
강직하고 기백이 충만한 인품으로 젊을 적부터 천하의 명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했었다. 조조를 섬길 때 예주 자사 유대(劉岱)가 황건적에게 패하여 죽자 조조에게 자신을 보내면 예주 사람들을 설득하여 조조를 맞이할 수 있다고 하였고, 포신(鮑信)도 이에 동의해 파견한 진궁은 이후 조조를 예주목이 되게 하였다.
그런데 그후 장초, 장막, 왕해 등과 함께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맞이하여 예주을 거의 모두 제압하고, 조조측 세력은 순욱과 정욱이 지키는 몇 개 성만이 남았다. 여기서 서주로 원정을 나갔던 조조가 귀환하여 그후 여포와 조조는 2년간 사투를 벌였다. 여포군이 정도(定陶)에서 패한 후 다시 여포를 따라 1만의 병력으로 조조과 거야(鋸野)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복병의 기습에 대패해 여포와 함께 유비를 의지했다.
198년 하비에서 조조군에게 포위당한 진궁은 손자병법의 예를 들어 “멀리서 왔기에 피곤한 적을 생생한 우리군으로 맞아싸워야 합니다”라고 진언했지만, 여포는 농성을 택했다. 조조군의 공격이 격해지면서 여포는 항복을 생각했다. 진궁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라고 말렸다. 농성전이 계속되던 중 여포는 원술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원군을 요청할 요량으로 수비장에 진궁과 고순을 임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궁과 고순이 서로 사이가 나빴기에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후성과 위속의 배신으로 진궁은 붙잡혔고, 여포도 조조에게 항복하여 하비는 함락되었다. 조조는 진궁에게 자신의 휘하에서 일할 것을 권하지만 진궁은 거절하고 유유히 처형장으로 향했고, 조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보내주고, 진궁은 처형되었다. 진궁의 가족은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비 공성전시 조조는 겨울 때문에 허도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이때 순유는 “여포의 전의는 사라지고, 진궁은 지혜는 있지만 결단력이 없습니다. 여포의 기력이 회복하지 못하고, 진궁의 계략이 정해지지 않는 이때에 공격한다면 성은 틀림없이 함락될것입니다.”라고 조조를 격려했다.
또한 일설에 따르면, 여포의 부장 학맹이 원술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킬 시 학맹을 토벌한 조성이 모반의 주모자는 진궁이라고 답했다. 그 장소에 있던 진궁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기 때문에 여러 장수는 이 말을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이 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불문에 붙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중모현 현령으로 등장해 동탁 암살 실패로 도망치던 조조를 잡았다가 그를 풀어주면서 동행했지만 여백사 사건으로 서로 헤어졌다. 이후엔 장막을 의지하다 여포를 맞이하여 그의 참모가 되면서 조조와 싸움을 되풀이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