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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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년 1월 5일 ~ 1865년 1월 19일)은 프랑스의 상호주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프랑스어: anarchiste)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편집] 생애
프루동은 프랑스 바탕에서 통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9세 때 쥐라 산맥에서 목동이 되었다. 브장송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으나 경제적 부담으로 대학 입학 시험(바칼로레아)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하고 많은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38년 프루동은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소유자에 대한 경고》로 인해 재판을 받았으나 석방되었다. 그는 1843년 자신의 인쇄소를 팔고 수상 운수회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마르크스와 바쿠닌을 알게 되었다. 프루동이 1842년 쓴 《경제적 모순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에 대해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으로 비판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프루동은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 그는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어 1852년 석방됐다. 그는 생트펠라지에서 외프라지 피에가르(Euphrasie Piegard)와 결혼했으며 《혁명가의 고백》과 〈민중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다. 그는 1858년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여 이때 톨스토이를 만난다. 1862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를 썼다. 그는 1865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