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기독교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성 파울루스
성 파울루스

파울루스(Paulus)는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다. 라틴어로 ‘작은 조각상’을 의미하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 또는 ‘샤울’이었으며, 바울로는 그리스 이름이다. 한글개역판에서는 ‘바울’(영어: Paul), 공동번역에서는 ‘바울로'로 음역하고 있다. 하지만 ‘바오로’(이탈리아어: Paolo), ‘바우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인. 축일인 베드로와 똑같은 6월 29일이며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세기이후에 등장한 성화에서 발견된다.

목차

[편집] 생애

사도행전(22,3)에 따르면 파울루스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 년대는 신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파울루스는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으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22,25-29)에서 파울루스가 선교 활동 중에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사도행전 21장 39절에서 자신이 타르소스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엇갈린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성 루가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하튼 파울루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사도 9,1-19)에서 개종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2코린 11,22; 로마 11,1).

파울루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따르면, 그는 가말리엘에게서 유대 율법 공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학계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루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개종을 하고 나서도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편집] 다마스쿠스에서 개종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성서학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본 적이 없는 바울로가 사도들과 정경화로 현재 신약정경이 27권으로 결정되기 이전의 예수문서(외경이나 위경)들을 통해서 예수 이야기(예수 전승)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례로 성 바울로가 에페소의 사제(원로)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왔습니다"라는 설교내용(사도 20:35)이 복음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력에서는 바울로의 회심을 사도 바울로의 회심일(1월 25일)로 기념한다.

[편집] 선교활동

파울루스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라는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했는데, 바르나바가 그를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루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논쟁 끝에 결별했지만, 나중에는 루카와 더불어 자신을 외면하지 않은 마르코의 가치를 높게 보았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바르나바는 유대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지만, 파울루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결별한 것으로 추정한다.

파울루스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아직 유대교의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의 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인 매튜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의하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편집]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 사도 바울로의 탈 율법적인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냉대를 받게 했다.(사도행전 21:18-22)

[편집] 파울루스의 신학

[편집] 파울루스의 예수상과 교회

[편집] 신약성서의 해석

[편집] 구원론

바울로의 구원론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당시 교회유대교의 소 종파로 남아 있던 예루살렘 교회와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해외파 유대인 교회(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유대인 또는 헬라파 유대인으로 표현)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바울로는 후자의 입장에서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구원관을 주장했는데, 이는 전자의 성직자들에게는 위험한 주장으로 여겨졌다.

[편집] 파울루스의 편지

[편집] 상징물

서한집, 칼.

[편집] 수호 성인

신학자, 인쇄업자, 밧줄 제작자, 바구니 제작자.

[편집] 바깥고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