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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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으로, 제암리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사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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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3월 30일(또는 4월 5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편집] 경과
1919년 3월 30일 정오,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계획하였고, 30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8백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고주리 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때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업자 사사카(佐板) 등 43명이 30리 밖 삼괴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4월 2일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었으며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4월 3일 화수리·수촌리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4월 5일 정오, 제암리 발안 장날을 맞아 또 시위가 일어났다.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1]
-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 군인들이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했다.
[편집]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실
- 교회 문 못질 설 : 한국에서는 한때 교회에 가둬둔 뒤 문에 못질하여 막았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창문조차 총으로 들이대고 있었음에도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못질은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았음도 사실이다.
- 우발사건설 :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들이 일본인들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것 등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
-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 : 1919년 4월 17일 스코필드는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과 자동차로 수촌리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4월 18일 스코필드는 홀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여러 차례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아사히(朝日)신문 2007년 월 28일자 보도 - 제암리 학살 사건 은폐 : 사건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대장의 일기 발견.[2][3]
[편집] 주석
- ↑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 역사적 배경 / 발단 및 역사성
- ↑ 한겨레신문 - 일제 ‘제암리 학살’ 은폐공작 드러나 : 그는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보다 간단하지만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의 입장은 더욱 불이익”하기 때문에 “간부와 협의해서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 ↑ 중앙일보 - 일제 제암리학살 은폐 입증 조선군사령관 일기 발견
[편집] 참고 문헌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저,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년 08월 09일.
아래 두 논문은 위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 제암리교회 사건과 서구인들의 반응 : 김승태(숙명여대 강사)
- 제암리교회 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반응 : 서정민(연세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