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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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崔良業 : 1821년 3월 1일 - 1861년 6월 15일)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사제이다. 세례명 토마스.

[편집] 생애

  • 본명은 최정구(崔鼎九)이며, 충청남도 청양군 출신으로 그의 부모인 최경환(토마스 아퀴나스)와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하였다. 특히 아버지 최경환(토마스 아퀴나스)는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증조부인 최한일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할 수 없었으며, 그의 집안은 자주 도피생활을 해야했다. 결국 최양업의 집은 경기도 과천 수리산 자락에 자리잡게 되었다.
  •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부제서품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주, 내몽고 일대를 떠돌다가 1845년 친구인 김대건부제의 입국을 성공시켰다. 최양업은 1846년 1월에 입국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동년 12월에 재차 입국하려고 시국하였으나 친구 김대건신부의 순교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돌아가 조선의 기해박해때 순교한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하여 '기해일기'라는 책을 저술하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 1847년1849년 다시 입국을 시도 했으나 실패 했고 1849년 청나라 강남교구 교구장인 마레스카 주교에게 조선인으로써 2번째로 사제서품을 받는다. 이후 요녕성에서 활동하다가 그 해 12월 최양업 신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나고 본격적은 사목활동을 시작한 최 신부는 6개월동안 삼남지방을 5천리를 돌면서 수많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미사를 주었고 그 이후에도 매년 7천리를 걸어서 129개의 공소를 돌면서 많은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와 미사를 주는 사목을 자그마치 11년 6개월간 지속하였다.
  • 1861년6월 15일 영남지방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식중독으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사한다. 그후 제천시 배론에 안장되었으며 일제시대때 비석과 묘비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그것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비석과 묘비를 세웠다.
  • 김대건신부는 '피의 순교자'라 하여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에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에서 불기 시작한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 최양업 신부와 124명의 순교자들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청원을 해놓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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