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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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어: 福澤諭吉, ふくざわゆきち, 1835년 1월 10일 - 1901년 2월 3일) 는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이다. 현재는 '福沢諭吉'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다. 시호는 '한'(일본어: 範 はん).
1984년~2004년의 일본은행권 D호 1만엔권, 2004년부터의 E호 1만엔권에 초상화가 쓰여 '유키치'라는 말이 1만엔권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게이오 대학를 설립하여 학교에서는 경의를 표하여 '후쿠자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다른 교수나 교원에게는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 유길준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개인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문명의 도입이 급선무라고 하며, 영국의 입헌정체(立憲政體) 실천을 주장하였다. [1]후쿠자와의 대표적인 명언은 '독립자존'으로 그의 계명이기도 했다. 이 의미는 심신을 독립시키고 자기자신을 존중하며,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또 베스트셀러가 된 <서양사정>이나 <문명론의 개략>등의 저서를 발표하여 메이지유신이후의 일본이 중화사상, 유교정신에서 탈피하여 서양문명을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을 만들었다.
후쿠자와는 회계학의 기초가 되는 복식부기를 일본에 소개하였다.
또한 일본에 근대 보험제도를 소개 한 것도 후쿠자와다. 후쿠자와는 <서양안내서>에서 '재난청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생애청합(생명보험), 화재청합(화재보험),해상청합(손해보험)의 3종류의 재난청합을 소개,설명하였다.
지금은 '1만엔권의 얼굴'로 많이 알려져있다. 하지만 전쟁후 종이지폐에 인쇄될 인물은 '민주주의에 공헌한 일본인'로 정해져 있었고 후쿠자와는 자유민권운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즉, 그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고, 교양이 없고 유동적인 대중을 매우 싫어했던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편집] 3대 명저
[편집] 주석
- ↑ 야나부 아키라, 서혜영 옮김 (2003). 《번역어성립사정》. 서울: 도서출판 일빛,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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