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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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後涼 384년~403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저족출신의 여광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편집] 역사

건국자 여광은 같은 저족출신의 부씨가 건국했던 전진의 건국이래의 공신으로 수차례 무공을 세웠다. 전진의 최전성기때 부견이 동진토벌을 기도할때 여광은 도독서토제군사(都督西討諸軍事)에 임명되어 서역으로 원정을 나갔었다.

383년 1월 원정길에 올라 하서회랑을 진군해 384년 7월 귀현을 정벌하는데 성공했다. 그때 서역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구마라습을 자신의 비호아래 두었다. 실은 석도안에게서 구마라습의 명성을 들은 부견이 여광에게 귀현을 지배하에 두면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휘하 장병의 희망과 구마라습의 진언에 의해 여광은 이어질 서쪽지방에 대한 진군을 멈추고 귀환을 결심했다.

385년 9월 고창을 정벌한 여광은 그 땅에서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한 전진군의 소식과 그후 장안의 혼란상황을 들어 알게되었다. 동쪽으로 나간 여광은 후진휘하의 양주자사을 주천부근에서 격파했다. 고장에 들어간 여광은 이땅에서 양주자사-호강교위을 자칭하고 사실상의 자립정권을 세웠다. 386년 9월 부견의 죽음을 알고 문소황제의 시호을 추증했다. 10월 여광은 태안이라 개원하고 주천공을 자칭했다.

387년 12월 전량의 부흥을 기도한 장천탕의 아들 장대예의 군을 격파하고 구 전량의 지배지역을 전부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389년 2월 삼하왕을 칭하고 396년 6월에는 국호을 대량으로 정하고 천왕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여광의 사후, 왕조 내부에서 황위계승권 다툼이 계속해서 일어나 후량은 급속히 쇠퇴하여 여광이 죽은지 겨우 4년후인 403년 조카 여륭의 때에 후진의 고조(요흥)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의 왕조
오호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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