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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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촬영한 토리노 수의. 놀랍게도 포지티브 이미지보다 네거티브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사람의 형태를 나타낸다.
1898년에 촬영한 토리노 수의. 놀랍게도 포지티브 이미지보다 네거티브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사람의 형태를 나타낸다.

토리노의 수의예수의 장례식 때 사용된 수의로 알려져 있는 유물이다. 수의에는 남성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찬성론자들은 이 그림이 예수의 형상이 찍힌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토리노의 수의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몇 차례 과학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확실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현재 찬성론자들은 손목에 못이 박힌 흔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서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수의의 연대측정 결과를 근거로 14세기에 만들어졌다고 맞서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중세 기독교의 침략전쟁인 십자군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이슬람교도들이 성물숭배가 유행한 중세 기독교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목차

[편집] 연구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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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논란의 시작

토리노 수의의 논란은 이탈리아 사진가 세콘도 피아가 왕의 허락으로 수의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수의의 형상이 너무 희미해서 세콘도 피아는 실망했지만 그가 촬영한 원판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편집] 트리노의 수의 옹호론

토리노 수의의 형상은 예수가 죽을 당시의 묘사와 대부분 일치하였다.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으로 얻어 맞고, 십자가를 매고갔으며, 십자가에 손목이 못박혔던 상황과 일치한다.

어떤 이들은 이 형상이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VP-8 화상분석기의 분석 결과는 토리노 성의는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 3차원의 얼굴과 몸이 찍힌 3차원 영상이라는걸 보여준다.

수의의 얼굴 부분은 3차원 특성을 가진 이미지로 분석되지만, 사람이 그린 그림은 2차원의 평면으로 분석된다. 입체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사람 손으로 그려진 것은, 어떠한 그림이라도 위 처럼 2차원의 평면으로 분석된다.

또 어떤이들은 1353년 프랑스 리레이 교회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1300년 동안 수의의 역사적 자취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만, 요한복음 20장 6절에 성 베드로예수의 무덤에서 세마포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고, 4세기경 시리아 사본에는 에데사의 왕 아브갈이 사도 다대오가 건네준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천을 받고서 한센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고, 4세기 이전에는 예수의 형상이 수염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이 시기 이후에 그려진 예수의 초상은 수염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토리노의 수의가 진짜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토리노 수의의 눈 부위에 동전 모양이 발견되었는데, 이 동전은 로마의 렙튼으로 기원 29-32년 빌라도 총독이 발행하였고, 팔레스타인이나 다른 지역에서는 다시 발행된 적이 없었으므로 이는 수의의 정확한 시대를 알려준다.

에데사의 왕 아브갈이 나병이 나았다는 기록 이후로 성의에 대한 기록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에데사에 홍수가 나면서 다시 나타났고, 동로마 황제가 군대를 보내서 콘스탄티노플로 수의를 옮긴 944년까지 성소에 보관되어왔다. 이후 1204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소장되어 왔다.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했고, 프랑스 기사였던 로버트 드 클래리는 그리스도 모습이 담긴 수의를 봤다고 기록했으나 도시 함락 후 수의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최근 발견된 문헌에 따르면 1205년 4차 십자군의 기사 오손 드 라 로쉬가 수의를 아테네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1353년 오손의 먼 후손 잔느 드 베르지가 리레이에서 처음으로 수의를 소장하고 있던 제프리 드 샤네이와 결혼해서 공동소유하였다고 하는데, 위 사진이 두 가문의 문장과 수의의 모양이 그려진 메달이다. 샤네이의 후손들은 1452년에 수의의 소유권을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에 넘겼다.

1532년 프랑스 상베리의 사보이 대성당의 화재로 수의는 피해를 입었다. 1578년 사보이 왕가는 토리노를 수도로 정하고 이때 수의도 옮겨와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1580년 이후로 수의는 400년간 11차례 정도만 공개되었다.

스위스의 범죄학자이자 먼지와 꽃가루 분석의 최고 권위자인 막스 프레이 박사는 수의에서 58개의 꽃가루를 발견했는데, 17개만 유럽이 원산지였고, 나머지는 팔레스타인과 터키 남부의 에데사와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즉 수의는 일정기간 이들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수의에는 상처부위의 혈흔도 있지만, 전체적인 예수의 형상은 혈흔이 아니다. 혈흔이 남아있는 조각을 화학처리해서 혈흔을 지워도,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수의에서는 예수의 신체의 형상과 꽃의 형상도 발견되었는데, 정확하게 확인 가능한건 28종이었고, 이 꽃들은 모두 예수살렘 반경 20km 내에서 자라는 것들이었다. 더구나 28종의 꽃 중에서 25종의 꽃가루가 수의에서 확인되었다.

혈흔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런 형상을 가능하게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고에너지 장이 형성되었고, 그 에너지가 수의에 신체의 형상과 꽃의 형상을 남긴것 같다.

일부 사람들은 수의에서 물감성분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성분들 중 하나인 산화철은 형상이 그려진 부위와 그려지지 않은 부위의 농도가 같았으며, 다른 성분들도 농도가 너무 적어서 먼지일 수도 있고 수의가 전해져 오는 중간 과정에서 묻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의의 섬유를 살펴보면 제일 표면의 섬유 한 가닥 깊이까지만 형상이 나타나있고 그 아래에는 전혀 염색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현재의 과학기술로도 불가능하고 그려진게 아니라 어떤 자극에 의해 섬유가 변질된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1988년에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수의의 연대가 1260년-1390년 사이인 중세로 나왔다. 이 결과로 수의가 진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거세어졌지만, 3개의 샘플을 3개의 연구소에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신뢰도를 검사해보았는데, 이 샘플 중 하나는 기원전 3천년의 황소 미라의 아마포였는데, 이 샘플의 실험실 3곳의 결과는 1100년의 편차를 보였고, 다른 샘플들도 500-1100년의 편차가 나타났다.

텍사스 휴스턴의 건강과학센터 미생물학 부교수인 레온치오 가르자발데스 박사에 의하면 아주 작은 미생물들은 섬유에 붙어서 시간이 지나면 원생체 코팅이란 것을 형성하는데 이 코팅 때문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의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집트의 따오기 미라에 실험한 결과 따오기 몸체의 연대측정과 몸체를 둘러싼 아마포의 연대측정 결과는 600년의 오차가 발생했다고 한다. 따라서 수의가 진품이더라도 연대측정의 오차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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